26. 刺客列傳

第 二十六. 刺客列傳(자객열전)

덕치/이두진 2021. 8. 6. 19:03

             史記 列傳 

 

    第 二十六 刺客列傳(자객열전)

 

 

曹沫者,魯人也,以勇力事魯莊公.  莊公好力.  曹沫為魯將,與齊戰,三敗北. 

魯莊公懼,乃獻遂邑之地以和.  猶復以為將.

​[조말(曹沫)은 노나라 사람이다. 용기와 힘으로 노장공(魯莊公)1)을 모셨다.

노장공은 힘이 센 장사를 좋아하였다. 조말은 장군으로 임명되어 제나라 군사와 3번 싸웠으나 3번 모두 패했다.

노장공이 두려워하여 수읍(遂邑)2)의 땅을 바쳐 강화를 맺고 여전히 조말을 장군으로 삼았다.]

 

齊桓公許與魯會于柯而盟.  桓公與莊公既盟於壇上,曹沫執匕首劫齊桓公,桓公左右莫敢動,

而問曰:「子將何欲?」
曹沫曰:「齊彊魯弱,而大國侵魯亦甚矣. 今魯城壞即壓齊境,君其圖之.」 

桓公乃許盡歸魯之侵地.

[제환공은 노나라와 가(柯) 땅에서 회맹을 맺기를 허락했다. 환공과 장공이 만나 단에 올라 회맹의 의식을

이미 행했으나 수행했던 조말이 비수를 들고 제환공을 범하자 환공의 좌우 신하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제환공이 조말에게 묻기를 : “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자.
조말이 대답하기를 : “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합니다. 강한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하기를 

너무 심하게 합니다. 지금 만일에 노나라 도성의 성곽이 무너진다면 제나라 변경도 함께 무너질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제환공이 이에 노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기로 허락하였다.]

 

既已言,曹沫投其匕首,下壇,北面就群臣之位,顏色不變,辭令如故.  桓公怒,欲倍其約.
管仲曰:「不可.  夫貪小利以自快,棄信於諸侯,失天下之援,不如與之.」 

於是桓公乃遂割魯侵地,曹沫三戰所亡地盡復予魯.  其後百六十有七年而吳有專諸之事.

​[이윽고 환공이 말을 마치자, 조말이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땅에 던져버리고 단을 내려가 북면하고 있던

군신들 대열에 들어가 섰는데 얼굴색은 평상시와 같이 아무 변함이 없었고 말소리 또한 여전했다.

제환공이 노하여 그가 한 약속을 깨려고 했다.

관중이 말하기를 : “ 불가합니다. 무릇 작은 이익을 탐하여 스스로 만족하신다면 제후들로부터 신의를 잃고

천하의 모든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약속대로 노나라에 땅을 돌려주는 편이 좋습니다.”하였다. 
그래서 환공은 마침내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이로써 조말은 세 번의 싸움에서 지고

빼앗긴 땅을 모두 노나라로 돌려받았다. 그후 167년이 지나 오나라에서 전제(專諸)의 사건이 일어났다.3)]

 

專諸者,吳堂邑人也.  伍子胥之亡楚而如吳也,知專諸之能.  伍子胥既見吳王僚,說以伐楚之利.
吳公子光曰:「彼伍員父兄皆死於楚而員言伐楚,欲自為報私讎也,非能為吳.」吳王乃止.
伍子胥知公子光之欲殺吳王僚,乃曰:「彼光將有內志,未可說以外事.」乃進專諸於公子光.

[전제는 오나라의 당읍(堂邑)4) 사람이다. 초나라에서 도망쳐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는 전제의 현능함을 알았다.

오자서가 오왕 료(僚)를 접견하고 초나라를 정벌했을 때의 이로운 점을 유세하였다.

오나라의 공자 광이 듣고 말하기를 : " 저 오원(伍員)의 아버지와 형이 모두 초나라에서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초나라를 정벌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함이지

오나라를 위해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오왕이 초나라를 정벌하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에 오자서는 공자 광이 오왕 료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알고 말하기를 : 

“ 공자 광은 오나라의 국내 문제에 뜻을 두고 있음으로 그를 나라 밖의 일로 설득하면 안 되겠구나.” 라고 여기며,

오자서는 즉시 전제를 공자 광에게 천거하였다.]

 

光之父曰吳王諸樊.  諸樊弟三人:次曰餘祭,次曰夷眛,次曰季子札. 

諸樊知季子札賢而不立太子,以次傳三弟,欲卒致國于季子札.  諸樊既死,傳餘祭.

餘祭死,傳夷眛.  夷眛死,當傳季子札;季子札逃不肯立,吳人乃立夷眛之子僚為王.

[공자 광의 부친은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이다.

제번은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첫째가 여제(餘祭), 둘째가 이매(夷昧), 막내가 계자찰(季子札)이다.

제번은 막내 계자찰이 형제 중 가장 현능했으나 태자의 자리를 사양했음으로 형제끼리 왕위를 전하여

셋째 동생에게 이르게 하여 결국 나라를 계찰이 이어 받게 하려고 했다.

제번이 죽자 왕위는 여제에게 전해졌고 다시 여제가 죽자 이매에게 전해졌다.

이매가 죽으니 왕위는 당연히 막내 동생 계찰에게 전해져야 했으나 계자찰은 왕위에 오르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오나라 국인들은 이매의 아들 요를 오왕으로 세웠다.]


公子光曰:「使以兄弟次邪,季子當立;必以子乎,則光真適嗣,當立.」故嘗陰養謀臣以求立.

光既得專諸,善客待之.  九年而楚平王死.

春,吳王僚欲因楚喪,使其二弟公子蓋餘、屬庸將兵圍楚之灊; 

使延陵季子於晉,以觀諸侯之變.  楚發兵絕吳將蓋餘、屬庸路,吳兵不得還.

​[그것을 보고 공자 광이 말하기를 : “ 형제끼리 왕위를 전한다면 당연히 계찰 숙부가 이어야 되겠지만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한다면 이 광이야말로 적법한 계승자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아무도 몰래 모신(謀臣)을 길러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전제를 얻은 공자 광은 대우를 극진히 했다. 오왕 요 9년 초평왕(楚平王)이 죽었다5).

그해 봄, 오왕 요가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그의 두 동생인 공자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의 잠읍(潛邑)을 공격하도록 하고 동시에 연릉(延陵)에 머물고 있던 계자(季子)를 시켜

진(晉)나라에 사자를 보내 중원 제후국들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초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엄여와 촉용의 길을 끊자 오나라 군사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於是公子光謂專諸曰:「此時不可失,不求何獲!且光真王嗣,當立,季子雖來,不吾廢也.」
專諸曰 :「王僚可殺也. 母老子弱,而兩弟將兵伐楚,楚絕其後.

方今吳外困於楚,而內空無骨鯁之臣,是無如我何. 」 

公子光頓首曰:「光之身,子之身也.」

[이에 공자 광이 전제를 보고 말하기를 : " 이때야말로 절대 노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요.

이때 구하지 않으면 어찌 내가 왕의 자리를 얻을 수 있겠소? 이 광이야말로 진정한 왕위 계승자로 왕의 자리에는

마땅히 나의 것이라 계자 숙부가 귀국하시더라도 나를 폐하지 않으실 것이오.”라고 하자. 
전제가 말하기를 : “ 왕료를 제가 죽일 수 있으나 늙은 모친이 살아 계시고 애들은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오왕의 두 동생이 이끄는 군사들은 초나라 군사들에게 의해 뒷길이 끊겨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밖으로는 초나라에 의해 곤란에 빠져있고 안으로는 믿을만한

골경지신(骨鯁之臣)6)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자 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 이 광의 몸은 그대의 몸이오.”라고 하였다.] 

 

四月丙子,光伏甲士於窟室中,而具酒請王僚.

王僚使兵陳自宮至光之家,門戶階陛左右,皆王僚之親戚也. 

夾立侍,皆持長鈹.  酒既酣,公子光詳為足疾,入窟室中,使專諸置匕首魚炙之腹中而進之. 

既至王前,專諸擘魚,因以匕首刺王僚,王僚立死.  左右亦殺專諸,王人擾亂.

公子光出其伏甲以攻王僚之徒,盡滅之,遂自立為王,是為闔閭.

闔閭乃封專諸之子以為上卿.  其後七十餘年而晉有豫讓之事. 

[4월 병자(丙子) 일에 공자 광은 갑사들을 자기 집의 지하실에 매복시켜 놓고 주연을 준비하여 왕료를 청했다.

왕료가 호위병을 이끌고 궁궐에서 나와 공자 광의 저택에 이르자 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섬돌의 좌우 양측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료의 친척으로 지키게 했는데 그들은 모두 긴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윽고 주흥이 무르익자 공자 광이 거짓으로 넘어져 발을 다쳤다는 핑계를 대고 좌석에서 물러나

지하실로 들어가면서 전제를 시켜 비수를 뱃속에 숨긴 구운 생선을 가져다 바치도록 했다.

이윽고 왕의 면전에서 전제가 생선의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있던 비수를 꺼내어 왕료를 찌르자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왕료를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던 무사들 역시 전제를 죽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란을 피웠다.

공자 광이 매복시켜 두었던 갑병들을 내보내 왕료를 따라왔던 무리들을 공격하도록 해서 모조리 죽였다.

이윽고 공자 광이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오왕 합려(闔閭)다.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상경(上卿)으로 봉했다. 그 후 70여 년 후에 진(晉)나라에서 예양(豫讓)의 사건이 일어났다.]

 

 

豫讓者,晉人也,故嘗事范氏及中行氏,而無所知名.  去而事智伯,智伯甚尊寵之. 

及智伯伐趙襄子,趙襄子與韓、魏合謀滅智伯,滅智伯之後而三分其地.

[예양은 진(晉)나라 사람이다. 원래 범(范)씨와 중항(中行) 씨를 섬겼으나 명성을 얻지 못했다.

후에 두 가문을 떠나 지백(智伯)을 섬기자 지백은 그를 매우 존중하고 총애했다.

이윽고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공격하자 조양자는 한(韓)과 위(魏) 두 종족과 힘을 합쳐 지백을 멸하고,

지백을 없앤 뒤에 그 땅을 삼분해서 나누어 가졌다.]


趙襄子最怨智伯,漆其頭以為飲器.  豫讓遁逃山中,曰:「嗟乎!士為知己者死,女為說己者容.

今智伯知我,我必為報讎而死,以報智伯,則吾魂魄不愧矣.」

[지백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조양자는 그의 두개골에서 살을 발라내고 칠을 해서 음식 그릇으로 사용했다.

산중에 도망가 있던 예양이 듣고 한탄하며 말하기를 :
“ 아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예뻐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했다7).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나는 기필코 그의 원수를 갚아주고 죽어야 되겠다.

그래야만 내가 죽어 혼백이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乃變名姓為刑人,入宮涂廁,中挾匕首,欲以刺襄子.

襄子如廁,心動,執問涂廁之刑人,則豫讓,內持刀兵,曰:「欲為智伯報仇!」左右欲誅之.

[산중에서 나온 예양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죄수의 신분이 되어 조양자의 궁궐로 들어가 변소를 칠하는 

일을 하면서 가슴에 비수를 품고 기회를 보아 조양자를 암살하려고 했다. 양자가 변소에 갔다가 마음에 

놀라는 바가 있어 변소의 벽을 바르는 죄수를 잡아다 심문하니, 바로 예양으로 몸속에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예양이 말하기를 : “ 내가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양자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예양을 죽이려고 하였다.]

 

襄子曰:「彼義人也, 吾謹避之耳. 且智伯亡無後, 而其臣欲為報仇, 此天下之賢人也.」卒醳去之.

居頃之,豫讓又漆身為厲,吞炭為啞,使形狀不可知,行乞於市. 

其妻不識也.  行見其友,其友識之,曰:「汝非豫讓邪?」 曰:「我是也.」

[조양자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 “ 이 사람은 의인이다. 내가 조심하면 그뿐이다.

또한 지백은 이미 죽고 그 후손들도 끊어졌다.
이에 그 신하된 자가 그의 원수를 갚아주려고 하니 이는 천하의 보기 드문 현인이라!”라고 하였다. 
결국 예양은 석방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예양은 다시 몸에 칠을 하고 문둥병 환자처럼 꾸미고

다시 숯을 삼켜 벙어리로 형상과 모습을 꾸며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시정에 나가 걸식을 했다.

그런 예양을 그의 처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 묻기를 :
“ 자네는 예양이 아닌가?”라고 하자. 예양이 대답하기를 : “ 바로 나일세 ”라고 하였다.] 


其友為泣曰:「以子之才,委質而臣事襄子,襄子必近幸子. 近幸子,乃為所欲,顧不易邪?

何乃殘身苦形,欲以求報襄子,不亦難乎!」
豫讓曰:「既已委質臣事人,而求殺之,是懷二心以事其君也. 且吾所為者極難耳!
 

然所以為此者,將以愧天下後世之為人臣懷二心以事其君者也.」 

[예양의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묻기를 : “ 자네의 재주라면 몸을 의탁하여 조양자를 받든다면 양자는 틀림없이

자네를 곁에 두고 총애할 것이네. 그대가 조양자의 곁에서 총애를 받은 후에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하면

일을 쉽게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몸을 상하게 하고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양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라고 하자.
예양이 대답하기를 : “ 몸을 맡겨 남의 신하가 되어 받드는 자가 그를 죽이려고 함은 두 마음을 품고

그 주인을 섬기는 일과 같다. 또한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으나

구태여 하려고 하는 이유는 장차 두 마음을 품고 그 군주를 섬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품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였다.]

 

既去,頃之,襄子當出,豫讓伏於所當過之橋下. 襄子至橋,馬驚,襄子曰:「此必是豫讓也.」

使人問之,果豫讓也.
於是襄子乃數豫讓曰:「子不嘗事范、中行氏乎?智伯盡滅之,而子不為報讎,

而反委質臣於智伯. 智伯亦已死矣,而子獨何以為之報讎之深也?」

[친구와 헤어진 예양은 얼마 후에 양자가 외출하면 통과해야만 하는 다리 밑에 매복했다.

양자의 일행이 이윽고 당도하여 다리를 건너려고 하는데 말이 놀라 울자,
양자가 말하기를 : “ 이는 필시 예양이 숨어 있음이라! ”라고 하여,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하니 과연 예양이 다리 밑에 숨어 있었다. 양자가 예양의 죄를 열거하며 묻기를 :
“ 그대가 옛날 모시던 범씨와 중항씨 두 가문이 지백에게 멸했음에도 그때는 그들을 위해 지백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백에게 몸을 맡겨 그를 섬겼다. 지백 역시 지금 죽고 없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지백만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고 이리 심하게 하는가? ”라고 하자.] 

豫讓曰:「臣事范、中行氏,范、中行氏皆眾人遇我,我故眾人報之.

至於智伯,國士遇我,我故國士報之.」
襄子喟然嘆息而泣曰:「嗟乎豫子!子之為智伯,名既成矣,而寡人赦子,亦已足矣.

子其自為計,寡人不復釋子!」使兵圍之. 

[예양이 대답하기를 : “ 내가 범씨와 중항씨 두 종족을 받들었으나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으로써 나를 대했소.

그래서 나는 보통사람으로써 그들에게 보답했소. 그러나 내가 지백에게 몸을 의탁하자

그는 나를 국사(國士)로써 나를 대했소. 그래서 나는 지백에서 국사로써 보답하려고 할 뿐이오.”라고 하였다. 
조양자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 아아, 예양이여, 그대의 지백을 위한 충절으로 명예를 이미 이루었고

나 또한 그대를 용서하여 그대에게 할 만큼 했소. 그대가 옛 주인의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은 이미 세상에 알려져

그 이름이 이루어졌소. 또한 나는 그대를 이미 용서했음으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소.
그대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나는 다시 그대를 놓아주지 않겠소!”라고 하면서,
조양자는 군사들을 시켜 예양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豫讓曰:「臣聞明主不掩人之美,而忠臣有死名之義. 前君已寬赦臣,天下莫不稱君之賢.

今日之事,臣固伏誅,然願請君之衣而擊之,焉以致報讎之意,則雖死不恨.

非所敢望也,敢布腹心!」 

[예양이 말하기를 : “ 제가 듣기에 현명한 군주는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가리지 않으며,

충신은 죽음으로써 의로운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군후께서는 이미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여

천하의 그 누구도 군후의 어진 마음을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신이 엎드려 죽음을 청하겠으나, 군후께 청컨대 군후의 옷에 제가 칼질을 한 번 해서

원수를 갚을 마음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저는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제가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오나, 그냥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 놓았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襄子大義之,乃使使持衣與豫讓.

豫讓拔劍三躍而擊之,曰:「吾可以下報智伯矣!」遂伏劍自殺.
死之日,趙國志士聞之,皆為涕泣.  其後四十餘年而軹有聶政之事.
 

[이에 양자는 예양이 대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사람을 시켜 자기 옷을 벗어 예양에게 주도록 했다.

예양이 칼을 뽑아 세 번 옷 위에서 뛰고 이어서 칼로 찌르며 말하기를 : 

“ 내가 지백의 원수를 갚게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즉시 칼 위에 엎어져 죽었다.

예양이 죽자 조나라의 뜻 있는 인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그리고 40여 년 후에 지(軹)8) 땅에서 섭정(聶政)의 일이 발생했다.]

 

 

聶政者,軹深井里人也.  殺人避仇,與母、姊如齊,以屠為事. 

[섭정은 지읍(軹邑) 심정리(深井里)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그의 누이와 함께 제나라로 도망쳐 백정을 직업으로 삼고 살았다.]

 

之,濮陽嚴仲子事韓哀侯,與韓相俠累有卻.  嚴仲子恐誅,亡去,游求人可以報俠累者. 

至齊,齊人或言聶政勇敢士也,避仇隱於屠者之閒.

[긴 시간이 지나, 복양 사람 엄중자가 한애후(9)를 받들고 있었는데 한나라 재상 협루(俠累)10)와 틈이 벌어졌다.

협루에게 살해 될 것을 두려워한 엄중자는 도망쳐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기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을 찾았다.

이윽고 제나라에 들어간 엄중자는 제나라 사람들로부터 원수를 피해 백정으로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는 섭정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嚴仲子至門請,數反,然後具酒自暢聶政母前.

酒酣,嚴仲子奉黃金百溢,前為聶政母壽.  聶政驚怪其厚,固謝嚴仲子.
嚴仲子固進,而聶政謝曰:「臣幸有老母,家貧,客游以為狗屠, 可以旦夕得甘毳以養親.

親供養備, 不敢當仲子之賜. 」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사귀자고 하며 여러 번 오고간 뒤에 어느 날 술을 준비하여 섭정의 모친에게 잔을 올렸다.

이윽고 술이 거나하게 되자 엄중자는 황금 백 일(鎰)11)을 바쳐 섭정의 모친을 위해 장수를 빌었다.

엄중자가 막대한 황금으로 후하게 대하자 매우 놀라고 한편 괴이하게 생각하여 황금을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엄중자가 고집함으로 섭정이 받아들이고 감사하다며 말하기를 : “ 제가 다행히 늙은 모친을 모시고 있으나

집이 가난하여 객지를 떠돌다가 소를 잡는 백정 일로 아침저녁으로 맛잇고 부드러운 음식이나마 얻어

늙은 어머님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할 음식은 모두 준비가 되어 있으니

선생께서 주시는 예물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嚴仲子辟人,因為聶政言曰:「臣有仇,而行游諸侯眾矣;然至齊,竊聞足下義甚高,

故進百金者,將用為大人麤糲之費,得以交足下之驩,豈敢以有求望邪!」

[엄중자가 사람의 이목이 없는 곳으로 가서 섭정에게 자기의 사정 이야기하기를 : 
“ 저에게 원수가 있어 제후의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마침 제나라에 들어와 가만히 들어보니 귀하께서 의기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백금을 바쳐 노모에게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봉양해드리도록 함으로 해서

귀하와 교우를 맺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함이지 어찌 감히 달리 바라는 바가 있어서이겠습니까? ”라고 하자.]

 

聶政曰:「臣所以降志辱身居市井屠者,徒幸以養老母;老母在,政身未敢以許人也.」

嚴仲子固讓,聶政竟不肯受也.  然嚴仲子卒備賓主之禮而去. 

[섭정이 말하기를 : “ 저는 마음속의 뜻을 접고 몸을 굽혀 시정에서 백정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노모나마 봉양을 할 수 있는 처지를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노모가 살아계시니 이 몸을 감히 다른 사람에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도 엄중자가 굳이 황금을 주려고 했으나 섭정은 결국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엄중자와는 끝내 주인과 손님으로써의 예를 행하고 서로 헤어졌다.]

 

久之,聶政母死.  既已葬,除服,聶政曰:「嗟乎!政乃市井之人,鼓刀以屠;

而嚴仲子乃諸侯之卿相也,不遠千里,枉車騎而交臣. 臣之所以待之,至淺鮮矣,

未有大功可以稱者,而嚴仲子奉百金為親壽,我雖不受,然是者徒深知政也.
夫賢者以感忿睚真諼而親信窮僻之人,而政獨安得嘿然而已乎!且前日要政,政徒以老母;
 

老母今以天年終,政將為知己者用.」

[오래 지나지 않아 섭정의 노모가 죽었다. 장례를 마치고 거상 기간을 끝낸 섭정이 말하기를 : 
“ 아아, 이 섭정은 시정에 살면서 방울달린 칼로 소를 잡는 일을 하고 있는 하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후의 경상(卿相) 신분에 있는 엄중자가 불원천리하고 거마를 타고와 몸을 굽혀 나와 교우를 맺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접대한 정도는 매우 박하여 아직까지 그를 위해 큰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엄중자는 황금 백일을 들고 와서 모친을 축수했다. 내가 황금을 비록 받지 않았으나 그와 같은 일은

엄중자가 나의 마음을 깊이 알아주는 행위이다. 무릇 현능한 사람이 분노를 느끼고 눈을 들어 홀기면서 나 같은

궁벽한 사람과 친교를 맺고 믿음을 주는 행위는 다 뜻이 있어서인데 어찌 나만이 묵연히 모른 체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에 엄중자가 나를 필요로 했을 때는 그때는 다만 늙은 모친이 계시기 때문에 사양했다.

그런데 지금 모친께서 천수를 다하시고 임종하셨으니 나는 장차 지기를 위해 쓰임을 당하리라!”라고 하였다.] 


乃遂西至濮陽,見嚴仲子曰:「前日所以不許仲子者,徒以親在;今不幸而母以天年終.

仲子所欲報仇者為誰? 請得從事焉!」

[섭정은 그 즉시 서쪽의 복양(濮陽)으로 달려가 엄중자를 만나 말하기를 :
“ 옛날 중자(仲子)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음은 모친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불행히도 모친께서 천수를 다하시고 임종을 하셨습니다. 중자께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청컨대 그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嚴仲子具告曰:「臣之仇韓相俠累,俠累又韓君之季父也,宗族盛多,居處兵衛甚設,

臣欲使人刺之, 終莫能就. 今足下幸而不棄,請益其車騎壯士可為足下輔翼者.」

[엄중자가 자기의 사연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를 : “나의 원수는 한나라 재상 협루로 한나라 군주의 

막내 숙부입니다. 종족들이 매우 많아 거처하는 곳에 수많은 호위병을 세워 두어 내가 사람을 시켜 그를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은 일을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대가 다행히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내가 기마와 수레에 장사를 태워 보내 그대를 돕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聶政曰:「韓之與衛,相去中閒不甚遠,今殺人之相,相又國君之親,此其勢不可以多人,
多人不能無生得失,生得失則語泄,語泄是韓舉國而與仲子為讎,豈不殆哉!」

遂謝車騎人徒,聶政乃辭獨行.

​[섭정이 듣고 말하기를 : “ 한나라와 위(衛)나라는 서로 중간 위치에 있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지금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일국의 재상입니다. 또한 그는 한 나라의 군주에게 친족이 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많으면 이해관계가 생기지 않을 수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면 일이 누설되고 맙니다.

일이 누설되면 한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그대를 원수로 여길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며. 
섭정은 엄중자가 자기를 돕기 위해 고용하겠다는 수레와 말, 장사들을 사양하고 혼자서 길을 떠났다.]

 

杖劍至韓,韓相俠累方坐府上, 持兵戟而衛侍者甚眾. 聶政直入, 上階刺殺俠累,左右大亂.

聶政大呼, 所擊殺者數十人,因自皮面決眼,自屠出腸,遂以死.

韓取聶政尸暴於市,購問莫知誰子.  於是韓(購)縣[購]之,有能言殺相俠累者予千金.

之莫知也.

[칼을 지니고 한나라에 당도한 섭정은 협루가 거처하는 상국(相國) 부중(府中)으로 들어갔다.

협루는 관부의 당상에 앉아 있었고 그를 지키기 위해 극으로 무장한 호위병과 시자들이 매우 많았다.

섭정이 다짜고짜로 부중으로 돌입하여 당상에 앉아있던 협루를 칼로 찔러 죽이자 상국부에는 혼란에 빠졌다.

섭정이 크게 소리치며 칼을 휘둘러 수 십 명을 죽인 후 스스로 자기의 얼굴을 가죽을 벗기고 눈을 뽑고,

자신의 배를 갈라 창자를 쏟은 후 이내 숨을 거뒀다.
한나라 관리들이 섭정의 시체를 길거리에 내놓고 그가 누구인지 현상하여 물었으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나라는 누구든지 협루를 죽인 자에 대해 고한다면 그에게 천금의 상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섭정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政姊榮聞人有刺殺韓相者,賊不得,國不知其名姓,暴其尸而縣之千金, 

乃於邑曰:「其是吾弟與?嗟乎,嚴仲子知吾弟!」
立起,如韓,之市,而死者果政也,伏尸哭極哀,曰:「是軹深井里所謂聶政者也.」

[섭정의 누이 섭영(聶榮)은 어떤 사람이 한나라 상국 협루를 칼로 찔러 죽였으나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여 나라에서는 그 사람의 성과 이름을 알지 못해 천금의 상금을 걸고

그 시체를 시가에 전시하여 범인의 신상을 알아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

“ 그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엄중자가 내 동생의 능력을 알아주었구나!”라고 하며. 
섭영은 그 즉시 길을 떠나 한나라로 들어가 시체가 전시되어 있는 거리로 가서 보니

과연 죽은 사람은 동생 섭정이었다. 섭영이 동생의 시체 위에 엎어져 통곡을 하며 말하기를 :
“ 이 사람은 지읍(軹邑)의 심정리(深井里) 출신의 섭정이라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다.] 


市行者諸眾人皆曰:「此人暴虐吾國相,王縣購其名姓千金,夫人不聞與?何敢來識之也?」
榮應之曰:「聞之. 然政所以蒙污辱自棄於市販之閒者,為老母幸無恙,妾未嫁也.

親既以天年下世,妾已嫁夫,嚴仲子乃察舉吾弟困污之中而交之,澤厚矣,可柰何!

士固為知己者死,今乃以妾尚在之故,重自刑以絕從, 妾其柰何畏歿身之誅,終滅賢弟之名!」

大驚韓市人.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 “ 이 사람은 우리 한나라의 상국을 잔혹하게 살해한 자로써

왕이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그 성과 이름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부인은 듣지 못했소?

어찌 감히 달려와 자신의 동생이라고 밝히는 것이오? ”라고 하자. 
섭영이 대답하기를 : “ 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오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저잣거리의 상인들 사이에

몸을 던져 살았던 이유는 늙은 모친께서 다행히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저 또한 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모친께서 천명을 다하시어 돌아가시고 저도 역시 출가하여 남의 아내가 되자 비록 동생이 곤궁하고

더러운 곳에 몸을 두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 현능함을 알아본 엄중자가 찾아와 교우관계를 맺고

은혜를 크게 베풀었으니 동생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했으나 엄중자와 제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몸을 해쳐 다른 사람을 연좌시키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어떻게 주살됨을 두려워하여 현능한 동생의 이름을 없애버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나라의 시정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乃大呼天者三,卒於邑悲哀而死政之旁. 

晉、楚、齊、衛聞之,皆曰:「非獨政能也,乃其姊亦烈女也.  鄉使政誠知其姊無濡忍之志,

不重暴骸之難,必絕險千里以列其名, 姊弟俱僇於韓市者,亦未必敢以身許嚴仲子也.

嚴仲子亦可謂知人能得士矣!」  其後二百二十餘年秦有荊軻之事.

​[마침내 섭영은 하늘을 향해 크게 세 번 외쳐대고 슬퍼하다가 섭정의 시체 곁에서 죽었다. 

진(晉), 초(楚), 제(齊), 위(衛) 등의 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  
“ 현능한 사람은 단지 섭정뿐만이 아니라 그 누이 역시 열녀로다! 만일 섭정이 그의 누이가 참고 견디는

성격이 아닐뿐 아니라 필시 해골을 드러내는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천리의 험하고 먼 길을 달려와

그의 이름을 들어내고 남매가 같이 한나라의 시정에서 죽게 되는 운명을 알았다면 섭정은 결코 엄중자에게

자기의 몸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중자 역시 현사를 얻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220년 후에 진나라에서 형가(荊軻)의 사건이 일어났다.]  

 

 

荊軻者,衛人也.  其先乃齊人,徙於衛,衛人謂之慶卿.  而之燕,燕人謂之荊卿.

荊卿好讀書擊劍,以術說衛元君,衛元君不用.  其後秦伐魏,置東郡,徙衛元君之支屬於野王.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이다. 그 선조는 원래 제나라에 살다가 위나라로 옮겨와 살았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경(慶卿)이라고 불렀다. 후에 연나라에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들은 그를 형경이라고 불렀다.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던 형경은 위원군(衛元君)12)에게 유세했으나 위원군은 쓰지 않았다.

그 후에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빼앗은 땅에 동군(東郡)13)을 설치할 때,

위(衛)나라 땅을 포함시키고 위원군과 그 족속들을 야왕(野王)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荊軻嘗游過榆次,與蓋聶論劍,蓋聶怒而目之.  荊軻出,人或言復召荊卿. 

蓋聶曰:「曩者吾與論劍有不稱者,吾目之;試往,是宜去,不敢留.」
使使往之主人,荊卿則已駕而去榆次矣.

[일찍이 형가가 유람을 할 때 유차(楡次)14)를 들렀다가 갑섭(蓋聶)과 검술에 관해 논쟁했다.

갑섭이 노하여 형가를 노려보았다. 형가가 나가자 사람들이 다시 형경을 불러오려고 하였다.

갑섭이 말하기를 : “ 얼마 전에 내가 그와 검술에 관해 논하다가 그가 승복을 하지 않기에 내가 그를 노려봤소.

시험 삼아 한 번 가보시오. 그는 틀림없이 이 곳을 이미 떠났을 것이오.

그는 감히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을 찾아가 물어보게 한 결과 그때는 이미 형경은 수레를 몰아 유차를 떠난 뒤였다.]

 

使者還報,蓋聶曰:「固去也,吾曩者目攝之!」 

荊軻游於邯鄲,魯句踐與荊軻博,爭道,魯句踐怒而叱之,荊軻嘿而逃去,遂不復會.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자 갑섭이 말하기를 :
“ 그는 당연히 떠났을 것이오. 내가 며칠 전에 그를 노려보아 겁을 주었으니까! ”라고 하였다. 
형가가 한단을 유람할 때 노구천(魯句踐)과 장기(博)15)을 두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노구천이 화를 내며 호통을 치자 형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荊軻既至燕,愛燕之狗屠及善擊筑者高漸離.  荊軻嗜酒,日與狗屠及高漸離飲於燕市,

酒酣以往,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於市中,相樂也,已而相泣,旁若無人者.

荊軻雖游於酒人乎,然其為人沈深好書; 其所游諸侯,盡與其賢豪長者相結.

其之燕,燕之處士田光先生亦善待之,知其非庸人也.

[형가는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에 도착하여 개를 잡는 사람들과 비파(筑)의 명인 고점리(高漸離)와 사이좋게 지냈다.

술을 좋아한 형가는 매일 개백정 및 고점리 등과 저잣거리에서 술을 마셨다.

술자리의 취흥이 무르익게 되면 고점리의 축에 맞춰 노래를 불러 서로 즐거워하다가

다시 서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자기들 앞에 사람이 없는 듯이 행동했다.

형가가 비록 술꾼들하고 섞여서 지냈지만 위인이 침착하고 신중했으며 독서를 즐겨했다.

그가 제후국들을 돌아다닐 때 그가 사귄 사람들은 모두 현능하거나, 호협하고 장자의 풍모를 갖춘 인사들이었다.

그가 연나라에 있을 때 알게 된 처사 전광(田光) 선생도 역시 형가를 잘 대해 주었는데,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居頃之,會燕太子丹質秦亡歸燕.  燕太子丹者,故嘗質於趙,而秦王政生於趙,其少時與丹驩. 

及政立為秦王,而丹質於秦. 秦王之遇燕太子丹不善,故丹怨而亡歸.

歸而求為報秦王者,國小,力不能.

​[그리고 얼마 후에 진(秦)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도망쳐 돌아왔다.

연나라의 태자단이 옛날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을 때 조나라에서 태어난 진왕 정(政)과 어렸을 때

사이좋게 지낸 적이 있었다. 이어서 정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태자단은 다시 진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진왕 정은 태자단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단은 진왕을 원망하며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왔다. 태자단은 진왕에게 복수를 하려 했으나 국력이 약해 어쩔 방법이 없었다.]

 

其後秦日出兵山東以伐齊、楚、三晉,稍蠶食諸侯,且至於燕,燕君臣皆恐禍之至.
太子丹患之,問其傅鞠武.  武對曰:「秦地遍天下,威脅韓、魏、趙氏,北有甘泉、谷口之固,

南有涇、渭之沃,擅巴、漢之饒,右隴、蜀之山,左關、殽之險,民眾而士厲,兵革有餘.

意有所出,則長城之南,易水以北,未有所定也.  柰何以見陵之怨,欲批其逆鱗哉!」

[그 후에 진나라는 매일 군사를 일으켜 산동의 제(齊), 초(楚) 및 삼진(三晋) 등을 공격하여 서서히 제후국들의

영토를 잠식하여 이윽고 연나라까지 그 전화가 이르게 되자 연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모두 그 화를 두려워했다.

태자단이 근심한 나머지 그의 태부인 국무(鞠武)에게 대책을 물었다. 국무가 대답하기를 :
“ 온 천하에 영토를 두루 갖고 있는 진나라가 한, 위, 조(韓魏趙) 삼진(三晋)을 위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감천(甘泉)과 곡구(谷口)의 험고에, 남쪽으로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강안의 비옥한 토지에,

파(巴)와 한중(漢中)의 풍요로움에, 오른 쪽으로는 농서(隴西)와 촉(蜀)의 험준한 산악에,

왼쪽으로는 동관과 효산의 험고함에 의지하며 백성들은 많고 군사들은 용감하며 병기와 군비는 여유가 있습니다.

진나라가 출병을 일단 정하기라도 한다면 장성의 남쪽과 역수 북쪽 땅의 장래는 불안정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능욕을 당했다는 원한만으로 역린(逆鱗)을 행하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丹曰:「然則何由?」對曰:「請入圖之.」 

居有閒,秦將樊於期得罪於秦王,亡之燕,太子受而捨之. 

鞠武諫曰:「不可. 夫以秦王之暴而積怒於燕,足為寒心,又況聞樊將軍之所在乎?

是謂『委肉當餓虎之蹊』也,禍必不振矣!雖有管、晏,不能為之謀也.

願太子疾遣樊將軍入匈奴以滅口.  請西約三晉,南連齊、楚,北購於單于,其後乃可圖也.」

[태자 단이 묻기를 :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국무가 대답하기를 : “ 청컨대 제가 심사숙고해서 그 방도를 강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나라 장수 번오기(樊於期)16)가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해 오자

태자단이 받아들여 머물게 하였다.

그러자 국무가 간언하기를 : “ 불가합니다. 무릇 포악한 진왕에게 연나라에 대한 분노를 더하게 하여

소름이 끼치는 일임에도 어찌하여 번장군을 거두십니까?

그것은 소위 허기진 호랑이가 다니는 길에 고기를 놓아두는 행위와 같아 그 화를 필시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의 지모가 있다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컨대 태자께서는 속히 번장군을 흉노로 보내시어 진나라에 트집을 잡히지 마십시오.

그리고 서쪽으로는 삼진과 합종을 맺고 남쪽으로는 제와 초 두 나라와 연계하고 북쪽으로는 흉노의 선우(單于)와

강화를 맺도록 하시면 그때는 아마도 진나라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太子曰:「太傅之計,曠日彌久,心惛然,恐不能須臾. 且非獨於此也,夫樊將軍窮困於天下,

歸身於丹,丹終不以迫於彊秦而棄所哀憐之交,置之匈奴是固丹命卒之時也. 願太傅更慮之.」

鞠武曰:「夫行危欲求安,造禍而求福,計淺而怨深,連結一人之後交,不顧國家之大害,

此所謂『資怨而助禍』矣.  夫以鴻毛燎於爐炭之上,必無事矣.

且以鵰鷙之秦,行怨暴之怒,豈足道哉! 燕有田光先生,其為人智深而勇沈,可與謀.」

[태자가 말하기를 : “ 태부의 계책은 너무나 많은 시일이 소요됩니다.

지금도 마음이 너무 혼란하여 잠시라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번장군이 천하에 몸 둘 곳이 없는 곤궁한 처지가 되어 이 단에게 귀의해 왔습니다.

내가 비록 강한 진나라부터 압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애련지교(哀憐之交)를 버리고 번장군을 흉노로 보내는 행위는

결코 이 단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자. 
국무가 말하기를 : “ 무릇 위태로운 일을 행하면서 안정을 구하려고 하는 행동은 화를 자초하면서 복을 구하는 일과

같습니다. 얕은 계책은 원한만 깊게 할 뿐입니다. 한 사람의 새로운 친구와 우정을 맺기 위해 장차 나라에 닥쳐올

대재앙을 고려치 않음은 마치 ‘ 원한을 쌓아 화를 자초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새털을 화로불에 태우는 일과 같아 아무런 성과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물며 흉맹한 독수리와 같은 진나라가

분노하여 원한을 풀려고 하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 이 연나라에 전광선생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위인은 지모가 깊고 용맹스럽습니다. 그라면 도모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太子曰:「願因太傅而得交於田先生,可乎?」鞠武曰:「敬諾.」

出見田先生,道「太子願圖國事於先生也」

田光曰:「敬奉教.」乃造焉.  太子逢迎,卻行為導,跪而蔽席.

田光坐定,左右無人,太子避席而請曰:「燕秦不兩立,願先生留意也.」

[태자가 묻기를 : “ 태부께서 말씀하셨으니 제가 전선생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국무가 대답하기를 : “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국무가 나가서 전선생을 만나 말하기를 : “ 태자께서 선생과 국가의 일을 도모코자 합니다.”라고 하자. 
전광이 말하기를 : “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광은 곧바로 태자를 찾아 인사를 올렸다.
태자가 정중하게 맞이하며 뒷걸음으로 인도하여 안으로 들이고 의자의 먼지를 몸소 닦은 후 앉기를 청했다.

전광이 좌정했는데 좌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태자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전광 앞으로 와서 부탁하기를 : “ 연과 진(秦) 두 나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선생께서는 이 점을 생각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田光曰:「臣聞騏驥盛壯之時,一日而馳千里;至其衰老,駑馬先之.

今太子聞光盛壯之時,不知臣精已消亡矣.  雖然,光不敢以圖國事,所善荊卿可使也.」

[전광이 대답하기를 : “ 제가 듣기에 기기(騏驥)와 같은 명마도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음은 힘이 왕성할 때이지

늙고 병들면 노마도 못 쫓아간다고 했습니다. 오늘 태자께서 나에 대해 들으신 이야기는

제가 혈기가 왕성한 젊었을 때의 일이고 지금 저는 이미 늙고 병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광은 감히 태자님과 나라의 대사를 도모할 수도 없으나,

제가 잘 아는 사람 중에 형경(荊卿)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太子曰:「願因先生得結交於荊卿,可乎?」田光曰:「敬諾.」即起,趨出.

太子送至門,戒曰:「丹所報,先生所言者,國之大事也,願先生勿泄也!」
田光俛而笑曰:「諾.」 僂行見荊卿,曰:「光與子相善,燕國莫不知.

今太子聞光壯盛之時,不知吾形已不逮也, 幸而教之曰『燕秦不兩立,願先生留意也』.

光竊不自外,言足下於太子也,願足下過太子於宮.」  荊軻曰:「謹奉教.」

[태자가 묻기를 : “ 원컨대 선생께서 형경과 친분을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전광이 그렇겠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일어나 집 밖으로 나왔다.

태자가 대문 밖까지 배웅하면서 당부의 말을 하기를 : “ 제가 말씀드린 것이나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나

모두 국가의 대사이니 선생께서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전광이 하늘을 쳐다보고 웃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재빨리 형경을 찾아간 전광이 말하기를 :  
“ 이 광과 그대가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연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소.

오늘 태자가 이 광의 젊은 시절에 대한 소문만을 듣고 내가 이미 늙어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에게 말하기를 ‘ 연(燕)과 진(秦) 두 나라는 양립할 수 없으니 선생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소. 이 광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그대를 태자에게 천거했소.

원컨대 그대는 태자궁에 한 반 들르시오. ”라고 하자. 

형가가 대답하기를 : “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田光曰:「吾聞之,長者為行,不使人疑之.

今太子告光曰:『所言者,國之大事也,願先生勿泄』,是太子疑光也.  夫為行而使人疑之,

非節俠也.」 欲自殺以激荊卿,曰:「願足下急過太子,言光已死,明不言也.」因遂自刎而死.

​[전광이 다시 말하기를 : “ 내가 듣기로 대장부가 일을 할 때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소. 오늘 태자가 이 광에게 헤어질 때 말하기를 ‘ 오늘 선생과 함께 나눈 이야기는 국가의 대사이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시오.’라고 했소. 그것은 태자가 이 광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오.

무릇 일을 행할 때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품게 함은 협객들의 절의가 아니오.”‘라고 하였다. 

전광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형경을 격려하려 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 “ 그대는 속히 태자를 방문하여

이 광은 이미 죽어 다른 사람에게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시오.”라고 하면서 
전광은 그 즉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荊軻遂見太子,言田光已死,致光之言.  太子再拜而跪,膝行流涕,有頃而後言曰:

「丹所以誡田先生毋言者,欲以成大事之謀也.  今田先生以死明不言,豈丹之心哉!」

​[이윽고 형가가 태자를 접견하고 전광이 이미 죽고 그가 한 말을 전했다.

태자가 재배를 한 후에 무릎을 꿇은 후에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눈물을 흘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태자는 입을 열어 말하기를 : “ 이 단이 전선생과 일을 의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한 부탁은

대사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오늘 전선생께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일이

어찌 이 단의 본심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荊軻坐定,太子避席頓首曰:「田先生不知丹之不肖,使得至前,敢有所道,

此天之所以哀燕而不棄其孤也.  今秦有貪利之心,而欲不可足也.

非盡天下之地,臣海內之王者,其意不厭.  今秦已虜韓王,盡納其地.
又舉兵南伐楚,北臨趙;王翦將數十萬之眾距漳、鄴,而李信出太原、雲中.

趙不能支秦,必入臣,入臣則禍至燕.  燕小弱,數困於兵,今計舉國不足以當秦.
諸侯服秦,莫敢合從.  丹之私計愚,以為誠得天下之勇士使於秦,闚以重利;

秦王貪,其勢必得所願矣.  誠得劫秦王,使悉反諸侯侵地,若曹沫之與齊桓公,則大善矣;

則不可,因而刺殺之.  彼秦大將擅兵於外而內有亂,則君臣相疑,以其閒諸侯得合從,

其破秦必矣.  此丹之上願,而不知所委命,唯荊卿留意焉.」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 전광선생께서는 이 단이 불초하다는 사실을 모르시고 그대의 앞으로 나아가 감히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것은 하늘이 연나라를 가엽게 여겨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진나라는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만족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영토로 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신하로 삼기 전까지는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는 지금 한왕을 이미 붙잡아가고 그 땅을 모두 병탄했습니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남으로는 초나라를 정벌하고 북으로는 조나라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진나라의 장군 왕전(王翦)은 수십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장수(漳水)와 업성(鄴城)을 사이에 두고

조군과 대치하고 있으며 장군 이신(李信)은 태원과 운중에서 출병하여 조나라의 북쪽 방면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조나라는 결코 진나라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진나라의 신하가 되어 진왕을 받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화는 머지않아 연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연나라는 작고 약하며 군사의 수도 적어 

온나라의 장정들을 모아도 결코 진나라의 한 부대도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굴복하여 합종도 감히 행하지 못합니다.

이 단은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비밀스러운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천하의 용사를 구하여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 커다란 이익으로 유인한다면 진왕은 탐욕스러운 사람이라 일의 형세는 필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진왕을 위협하여 그로 하여금 진나라가 빼앗아간 땅을

제후들에게 돌려주게 한다면 옛날 조말이 제환공을 위협하여 빼앗긴 땅을 찾은 일과 같이 되어

그것은 바로 크게 좋은 일이 되고, 불행히도 그 계획이 불가하게 되어도

진왕을 칼로 찔로 죽이면 그뿐입니다. 진왕이 죽게 되면 진나라의 장군들이 밖에서 자기 멋대로 군사를 부리고 있는

와중에 안에서 란이 일어나게 된다면 진나라의 군신 간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제후들이 합종을 행한다면 진나라는 필시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 단이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이나 아직 이 일에 목숨을 맡길만한 사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형경께서는 이 점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久之,荊軻曰:「此國之大事也,臣駑下,恐不足任使.」太子前頓首,固請毋讓,然後許諾.

於是尊荊卿為上卿,舍上舍.  太子日造門下,供太牢具,異物閒進,車騎美女恣荊軻所欲,

以順適其意.  久之,荊軻未有行意.  秦將王翦破趙,虜趙王,盡收入其地,進兵北略地至燕南界.

​[오랜 침묵 끝에 형가가 말하기를 : 

“ 이것은 나라의 큰 대사라 신은 노둔하여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형가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지 말기를 간청하자 그때야 형가는 태자의 청을 허락했다.

그래서 태자 단은 형가를 상경(上卿)으로 삼고 큰 저택을 주어 머물게 했다.

태자가 매일 집을 방문하여 태뢰(太牢)의 음식을 제공하고 세상의 진기한 물건들을 선물로 주었다.

또한 수레나 말, 미녀를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형가가 원하면 모두 취하도록 하여 그의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접대를 했지만 형가는 아직 길을 떠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진나라 장군 왕전이 조나라를 깨뜨리고 조왕을 포로로 잡아 그 땅을 모두 진나라 영토로 삼은 후에

군사를 계속 북쪽으로 진군시켜 연나라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太子丹恐懼,乃請荊軻曰:「秦兵旦暮渡易水,則雖欲長侍足下,豈可得哉!」
荊軻曰:「微太子言,臣願謁之. 今行而毋信,則秦未可親也.

夫樊將軍,秦王購之金千斤,邑萬家.
誠得樊將軍首與燕督亢之地圖,奉獻秦王,秦王必說見臣,臣乃得有以報.」 

[태자단이 몹시 두려워하며 형가에게 간청하기를 :  
“ 진나라 군사들이 조석지간에 역수를 건너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단이 그대를 받들기를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찌하면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형가가 대답하기를 : “ 태자께서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신이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 길을 떠나면 진왕이 믿을 수 있는 신물이 없어 진왕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진왕이 번장군의 목에 천금의 황금과 만호의 식읍을 상금으로 걸어 놓고 있습니다.

원컨대 번장군의 목을 얻은 후에 진왕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독항(督亢)17)의 지적도를 가져가

진왕에게 바친다고 한다면 진왕은 틀림없이 신의 접견을 허락할 것이며

그때에는 신은 태자를 위해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太子曰:「樊將軍窮困來歸丹,丹不忍以己之私而傷長者之意,願足下更慮之!」 

荊軻知太子不忍,乃遂私見樊於期曰:「秦之遇將軍可謂深矣,父母宗族皆為戮沒. 

今聞購將軍首金千斤,邑萬家,將柰何?」
於期仰天太息流涕曰:「於期每念之,常痛於骨髓,顧計不知所出耳!」

​[그러자 태자가 말하기를 : “ 번장군은 곤공한 처지가 되어 이 단에게 귀의해 왔습니다.

단은 도저히 개인적인 일로 인해 장자의 뜻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원컨대 형경께서는 그 점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형가는 즉시 몰래 번오기를 찾아가 말하기를 : 
“ 장군에 대한 처우를 너무 심하게 한 진나라에 대해 장군의 원한이 매우 깊다고 들었습니다.

부모와 종족들이 모두 장군으로 인하여 멸족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들으니 진나라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장군의 머리에 천금의 황금과 만호의 식읍을 현상금으로 걸었다고 합니다.

장군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자. 
번오기가 하늘을 쳐다보고 긴 한숨을 쉬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이 번오기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그 원한이 내 골수에 사무쳐 왔으나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계책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荊軻曰:「今有一言可以解燕國之患,報將軍之仇者,何如?」
於期乃前曰:「為之柰何?」荊軻曰:「願得將軍之首以獻秦王,秦王必喜而見臣,

臣左手把其袖,右手揕其匈,然則將軍之仇報而燕見陵之愧除矣. 將軍豈有意乎?」 

樊於期偏袒搤捥而進曰:「此臣之日夜切齒腐心也,乃今得聞教!」遂自剄.

太子聞之,馳往,伏尸而哭,極哀.  既已不可柰何,乃遂盛樊於期首函封之.

[형가가 말하기를 : “지금 연나라의 우환을 해결하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방법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번오기가 앞으로 나아가 묻기를 : “ 어떤 방법입니까? ”라고 하자. 
형가가 대답하기를 : “ 장군의 머리를 얻어 진왕에게 바치면 진왕은 틀림없이 기뻐하며 나의 접견을 허락할 

것입니다. 그때 내가 왼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칼을 들어 그의 가슴을 찔러 죽인다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진나라로부터 능욕을 받아 생긴 연나라의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습니다. 

장군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라고 하였다. 

번오기가 한 쪽 어깨를 들어내고 팔을 움켜쥐더니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

 “ 경의 말이야말로 내가 매일 밤낮 절치부심하며 듣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가르침을 받았소.”라고 하며,

말을 마친 번오기가 즉시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

태자가 듣고 달려와 시신 위에 엎드려 통곡하며 매우 애통해 했다.

그러나 이미 어찌 할 수가 없어 즉시 번오기의 머리를 베어 상자에 넣고 봉했다.]

 

於是太子豫求天下之利匕首,得趙人徐夫人匕首,取之百金,使工以藥焠之,以試人,

血濡縷, 人無不立死者.  乃裝為遣荊卿.  燕國有勇士秦舞陽,年十三,殺人,人不敢忤視.

乃令秦舞陽為副.  荊軻有所待,欲與俱;其人居遠未來,而為治行.

[그 전에 태자는 미리 천하에 예리하기로 이름난 비수를 구하다가 조나라 사람 서부인이 가지고 있던 비수를

백금의 황금을 주고 사들였다. 공인에게 시켜 독약을 발라 사람에게 시험해 본 결과

겨우 한 오라기의 실날같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에 태자단은 행장을 갖추어 형가를 진나라에 보내기로 했다. 연나라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용사가 있었는데

나이가 13살 때 벌써 살인을 저질러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태자단은 진무양을 부사로 삼았다. 그때 형가는 어떤 사람과 함께 떠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먼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길을 떠날 행장은 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頃之,未發,太子遲之,疑其改悔,乃復請曰:「日已盡矣,荊卿豈有意哉?丹請得先遣秦舞陽.」

荊軻怒,叱太子曰 : 「何太子之遣?往而不返者,豎子也!
且提一匕首入不測之彊秦,仆所以留者,待吾客與俱. 今太子遲之,請辭決矣!」遂發.

​[이에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길을 떠나지 않자 태자는 형가가 후회한다고 의심하며,

형가에게 다시 재촉하며 말하기를 : “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났음에도 어찌하여 형경께서는 주저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건대 먼저 진무양을 보내면 어떻습니까? ”라고 하자. 
형가가 화를 내며 태자에게 소리치며 말하기를 : “ 어찌하여 태자께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낸다 하십니까?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행차인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놈을 보낸단 말입니까?

한 자루의 비수만을 지닌 체 강포한 진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어떻게 진행될 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이렇게 출발을 하지 않고 있음은 어떤 사람을 기다려 같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태자께서 출발을 재촉하시니 그럼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겠습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출발하였다.]

 

太子及賓客知其事者,皆白衣冠以送之.  至易水之上,既祖,取道,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

為變徵之聲,士皆垂淚涕泣.  又前而為歌曰:「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復還!」

復為羽聲慨,士皆瞋目,發盡上指冠.  於是荊軻就車而去,終已不顧. 

[태자와 빈객들은 일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흰색의 의관을 차려 입고 형가를 배웅하였다.

이윽고 역수 강변에 이르러 로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 장도를 기원한 후에 길을 떠날 때 고점리가 축을 타자,

형가가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변치(變徵)18)의 곡조로 부르는 형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말은 다음과 같았다.

" 風蕭蕭兮易水寒(풍소소혜역수한)
바람은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복환)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또 곡조를 우(羽)로 바꿔 부르니 전송 나온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관을 밀어낼 듯이 머리털을 세웠다.

이윽고 형가가 수레에 올라타 길을 떠나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遂至秦,持千金之資幣物,厚遺秦王寵臣中庶子蒙嘉.

嘉為先言於秦王曰:「燕王誠振怖大王之威,不敢舉兵以逆軍吏,願舉國為內臣, 比諸侯之列,

給貢職如郡縣,而得奉守先王之宗廟.  恐懼不敢自陳,謹斬樊於期之頭,及獻燕督亢之地圖,

函封,燕王拜送于庭,使使以聞大王,唯大王命之.」

秦王聞之,大喜,乃朝服,設九賓,見燕使者咸陽宮.

[마침내 진나라에 당도한 형가는 천금의 돈과 귀중한 보물을 진왕의 총신인 중서자(中庶子)19) 몽가에게 주었다.

몽가가 형가를 위해 진왕에게 먼저 말하기를 : “ 연왕이 진실로 대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군사를 일으켜

우리 군사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나라를 받치며 대왕의 신하가 되려고 합니다.

또한 제후의 대열에 서서 군현이 하는 듯이 조공을 바치면서 선조들의 종묘나 받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왕의 위세를 두려워한 연왕은 감히 스스로 자기의 뜻을 개진하지 못하고 삼가 번오기를 참해

그 머리와 독항의 지적도와 함께 상자에 넣고 연왕이 직접 궁정의 뜰에서 절을 올려 증정식을 거행한 후에

사자를 보내 대왕의 뜻을 듣고자 대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며 조복 차림에 구빈(九賓)의 예20)를 갖추어 연나라 사자를 함양궁에서 접견하기로 했다.]

 

荊軻奉樊於期頭函,而秦舞陽奉地圖柙,以次進.  至陛,秦舞陽色變振恐,群臣怪之.
荊軻顧笑舞陽, 前謝曰:「北蕃蠻夷之鄙人, 未嘗見天子, 故振慴. 願大王少假借之,

使得畢使於前.」 秦王謂軻曰:「取舞陽所持地圖.」軻既取圖奏之,秦王發圖,圖窮而匕首見.

​[형가는 번오기의 목이 든 함을 받들고, 진무양이 독항의 지도가 든 갑을 받들고 차례로 나아갔다.

이윽고 계단에 이르자 진무양이 얼굴색을 바꾸며 벌벌 떨자 도열해 있던 진나라의 군신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형가가 무양을 돌아보며 웃으면서 진왕을 향해 말하기를 : “ 북쪽 변방의 오랑캐 땅에서 천박하게 살던 자라

아직 천자를 본 적이 없어 그 위엄에 놀라 벌벌 떨고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사람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대왕 앞에서 저 사람의 임무를 마치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진왕이 형가에게 말하기를 : “ 진무양이 갖고 있는 지도를 받아오라! ”라고 하였다. 

형가가 지도를 바치자 진왕이 지도를 펼쳤다. 지도가 다 펼쳐지자 숨겨 놓은 비수가 드러났다.]

 

因左手把秦王之袖, 而右手持匕首揕之.  未至身, 秦王驚, 自引而起, 袖絕.  拔劍,劍長,操其室.
時惶急,劍堅,故不可立拔.  荊軻逐秦王,秦王環柱而走.  群臣皆愕,卒起不意,盡失其度.
而秦法,群臣侍殿上者不得持尺寸之兵;諸郎中執兵皆陳殿下,非有詔召不得上. 

方急時,不及召下兵,以故荊軻乃逐秦王.

而卒惶急,無以擊軻,而以手共搏之, 是時侍醫夏無且以其所奉藥囊提荊軻也.

[형가가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 손으로 비수를 들어 찔렀으나 미처 진왕의 몸에 못 미쳤다.

진왕이 놀라 자리에 일어나 형가에게 잡힌 소매를 끊고 검을 뽑으려고 했으나 길이가 길어 칼집만 손에 잡혔다.

일이 순간에 일어났고 칼은 단단히 칼집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칼을 뽑을 수 없었다.

형가가 진왕의 뒤를 쫓자 진왕은 달아나 기둥 주위를 돌았다.

군신들은 모두 경악하고 일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어떻게 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진나라에 법에 따르면 전상에 도열해 있는 군신들은 그 누구도 사소한 병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전하(殿下)에 무기를 들고 도열해 있던 낭중들은 왕명이 없으면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

사태가 위급한 처지에 있었으나 아무도 군사들을 부를 생각을 못했음으로 형가가 진왕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창졸지간에 상황이 급박했으나 형가를 공격할 무기가 없었음으로 군신들은 맨 손으로 형가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어의(御医) 하무저(夏無且)가 들고 있던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다.]

 

秦王方環柱走,卒惶急,不知所為,左右乃曰:「王負劍!」負劍,遂拔以擊荊軻,斷其左股.
 荊軻廢,乃引其匕首以擿秦王,不中,中桐柱.  秦王復擊軻,軻被八創.

軻自知事不就,倚柱而笑, 箕踞以罵曰:「事所以不成者,以欲生劫之,必得約契以報太子也.」

於是左右既前殺軻,秦王不怡者良久.  已而論功,賞群臣及當坐者各有差,

而賜夏無且黃金二百溢,曰:「無且愛我,乃以藥囊提荊軻也.」 

於是秦王大怒,益發兵詣趙,詔王翦軍以伐燕。十月而拔薊城.

[진왕은 기둥 주위를 돌면서 도망치기에 급급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좌우의 군신들이 외치기를 : “ 왕께서는 칼을 등에 지십시오.”라고 하였다. 

진왕이 칼을 등에 지고 칼을 뽑아 형가를 내리쳐 그 다리를 잘랐다. 형가가 쓰러지면서 그 비수를 진왕을 향해

던졌으나 빗나가 구리 기둥에 맞았다. 진왕이 다시 형가를 계속 칼로 내리쳐 여덟 군데의 상처를 입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안 형가가 기둥에 의지하여 웃으면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꾸짖어 말하기를 : 

“ 일이 실패한 까닭은 진왕 너를 생포하여 겁을 준 후에 약속을 얻어내 태자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였다.”하였다. 

좌우의 군신들이 형가에게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다. 진왕은 그 후 오랫동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이어서 논공행상을 행하여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진 자들은 벌을 내려 차등있게 처리했다.

하무저에게 황금 2백 일을 하사하며 말하기를 : “ 무저는 나를 사랑해 그의 약낭으로 형가에게 던졌다.”하였다. 

이로써 진왕이 대노하여 더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조나라에 보내고, 

왕전에게 조서를 내려 연나라를 정벌토록 했다.

왕전의 진나라 군사들은 10월에 계성(薊城)을 함락시켰다.]

 

燕王喜、太子丹等盡率其精兵東保於遼東.
秦將李信追擊燕王急,代王嘉乃遺燕王喜書曰:「秦所以尤追燕急者,以太子丹故也.
 

今王誠殺丹獻之秦王,秦王必解,而社稷幸得血食.」其後李信追丹,丹匿衍水中,

燕王乃使使斬太子丹,欲獻之秦.  秦復進兵攻之.  後五年,秦卒滅燕,虜燕王喜.

[연왕 희는 태자단 등과 함께 연나라의 모든 정예병들을 이끌고 동쪽의 요동으로 들어가 지키려고 했다.

진나라 장군 이신(李信)이 연왕의 뒤를 긴급히 추격하자 대왕(代王) 가(嘉)가 서신을 보내며 말하기를 : 

“ 진나라가 연나라의 뒤를 급하게 추격하는 이유는 태자단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단을 죽여 진왕에게 바친다면 진왕은 마음을 풀어 다행히 사직은 보전되어

혈식을 바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신은 계속 태자단의 뒤를 쫓았으나 단은 해상의 섬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연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

태자단의 목을 베어오게 하여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다시 군사를 진군시켜 연왕을 공격하게 했다.

그 후 5년 만에 진나라는 결국 연나라를 멸하고 연왕 희를 포로로 잡아갔다.]

 

其明年,秦并天下,立號為皇帝.  於是秦逐太子丹、荊軻之客,皆亡.

高漸離變名姓為人庸保,匿作於宋子.  久之,作苦,聞其家堂上客擊筑,傍偟不能去.
每出言曰:「彼有善有不善.」從者以告其主,曰:「彼庸乃知音,竊言是非.」

家丈人召使前擊筑,一坐稱善,賜酒.

[그 다음 해 진나라는 천하를 병탄하고 스스로 황제(皇帝)라고 칭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다시 태자 단과 형가의 문객들을 수색하자 그들은 모두 도망쳤다.

고점리는 이름을 바꾸고 남의 집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21)에서 일했다. 그는 오랫동안 괴롭게 지냈는데, 

주인 집 마루 위에서 객이 축을 타는 소리를 들으면, 주변을 방황하며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매 번 말하기를 : “ 어떤 곳은 잘 타지만, 어떤 곳은 잘 타지 못하는군! ”라고 하자. 

하인이 보고 그 주인에게 고하기를 : “ 저 머슴이 아마 음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말로 잘하느니 잘못하느니 평가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인이 고점리를 불러오게 하여 축을 타게 하였다. 고점리가 단상에 올라 좌정하고 한 번 축을 타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솜씨를 칭찬하며 술을 주었다.]


而高漸離念久隱畏約無窮時,乃退,出其裝匣中筑與其善衣,更容貌而前.

舉坐客皆驚,下與抗禮,以為上客.  使擊筑而歌,客無不流涕而去者.
宋子傳客之,聞於秦始皇.  秦始皇召見,人有識者,乃曰:「高漸離也.」

秦皇帝惜其善擊筑,重赦之,乃矐其目.

[이에 고점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숨어서 두려움과 가난 속에 살아보아야 끝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 상자 속에 숨겨 놓은 축과 좋은 의상을 꺼내어 용모를 바꾸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자리에 일어나 서로 동등하게 예를 나누고 그를 상객으로 삼았다.

고점리가 축을 타고 노래를 부르니 손님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자리를 뜨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송자의 손님들을 그를 돌려가며 손님으로 삼았다.  그 소문이 진시황의 귀에 들어가자 진시황이 불러 접견했다.

그때 고점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 “ 저 사람은 고점리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점리의 축 타는 솜씨를 아깝게 생각한 진시황은 그를 죽이지 않고 용서했으나 눈을 멀게 하였다.]


使擊筑,未嘗不稱善.  稍益近之,高漸離乃以鉛置筑中,復進得近,舉筑樸秦皇帝,不中.

於是遂誅高漸離,終身不復近諸侯之人.  魯句踐已聞荊軻之刺秦王,私曰:

「嗟乎,惜哉其不講於刺劍之術也!甚矣吾不知人也!曩者吾叱之,彼乃以我為非人也!」 

[고점리의 축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진시황은 칭찬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진시황과 사이가 가깝게 된 고점리는 어느 날 축 속에 납덩어리를 넣은 뒤에 진시황의 곁에 가까이 갔을 때,

축을 들어 진시황을 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고점리를 주살하고 종신토록 다시는 제후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노구천은 형가가 진왕을 찌르려 했다는 소문을 듣고 혼자 말하기를 :

“ 아! 애석하구나, 그가 검술에 능숙하지 않았음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심했구나!

옛날 내가 그를 비난 했을 때 그는 나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太史公曰:世言荊軻,其稱太子丹之命,「天雨粟,馬生角」也,太過. 又言荊軻傷秦王,皆非也.

始公孫季功、董生與夏無且游,具知其事,為余道之如是.
自曹沫至荊軻五人,此其義或成或不成,然其立意較然,不欺其志,名垂後世,豈妄也哉!

[태사공이 말한다.

“ 세상에 형가의 일 중 태자 단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를 ‘ 하늘에서 곡식비가 내리고 말 머리에 뿔이 났다.’했는데

그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다. 또 형가가 진왕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는 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공손계공(公孫季公)과 동생(董生)22)이 하무저와 교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직접 들어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한 이야기를 기록했다.23) 조말로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사람은 의기로써,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세운 뜻은 비교적 명확하고,

또한 그들이 마음을 속이지 않아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긴 일을 어찌 망령되었다고 하겠는가?”]

 

【 각주 】

1) 노장공(魯莊公)/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94년부터 662년까지 재위한 노나라 군주다.

    희(姬) 성에 이름은 동(同)이다. 기원전 694년 부군 환공(桓公)이 제나라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피살되자

    노후의 자리를 이었다. 재위 기간 중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위를 두고 다툴 때

    규를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이어서 제나라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제환공이 된 소백에 의해 압력을 받은

    노장공은 공자규를 살해하고 규의 참모였던 관중을 함거에 실어 제나라에 송환했다.

    재위 13년 기원전 681년 조귀(曹劌)의 계책으로 제나라 군사를 장작(長勺)에서 대파했다.

    기원전 681년 제환공과 지금의 산동성 양곡(陽谷)의 가(柯) 땅에서 회맹할 때 대동한 조말(曹沫)이

    제환공을 칼로써 위협하여 제나라에 빼앗겼던 노나라 땅을 돌려받았다. 32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2) 수읍(遂邑)/ 지금의 산동성 비성(肥城)으로 춘추 때 제후국이었으나 주희왕(周僖王) 원년 기원년 681년

    제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노장공이 수읍을 제나라에 바쳐 강화를 맺었다는 ‘乃獻遂邑之地以和’는

    제태공세가나 본 자객열전의 기사는 사마천의 착오다.

    <사기지의(史記志疑)에 의하면 제환공 5년은 노장공 13년으로, 제환공이 북행(北杏)에서 회맹을 소집했으나

    불참한 수(遂)나라를 제환공이 멸해 수나라는 노나라와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했다.

3) 제환공과 노장공이 가(柯) 땅에서 회맹에서 조말이 제환공을 위협하여 빼앗긴 땅을 찾은 해는

    기원전 681년의 일이고 오나라의 자객 전제가 오왕 료(僚)를 암살한 해는 기원전 541년이다.

4) 당읍(堂邑)/ 지금의 강소성 육합(六合) 경내로 남경의 장강 북안이다.

5) 초평왕이 죽은 해는 오왕 요 11년으로 기원전 516년이고 합려가 오왕 요를 전제를 시켜 살해한 해는

    그 다음 해인 기원전 515년의 일이다. 오왕 9년은 사마천의 착오다.

6) 골경지신(骨鯁之臣)/ 강직하여 임금의 허물을 직간하는 충직한 신하를 말한다. 경(鯁)은 생선뼈를 말한다.

7) 士爲知己者死,女爲說己者容

8) 지(軹)/ 전국 때 한나라와 국경을 접한 위(魏)나라의 성읍으로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濟源縣)이다.

9) 한애후(韓哀侯)/ 기원전 376년에 즉위하여 371년에 죽은 전국 때 한나라 군주다.

    즉위년에 조(趙)와 위(魏) 등과 함께 진(晉)나라를 멸하고 삼분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멸하고

    그 수도를 신정(新鄭)으로 옮겼다. 재위 6년 만에 한나라 귀족 출신의 한엄(韓嚴)에게 살해되고

    그의 아들 의후(懿侯)가 뒤를 이었다.

10) 협루(俠累)/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으로 한(韓) 씨에 이름은 괴(傀)다.

      일찍이 친구이며 부자인 엄수(嚴遂)의 도움으로 한나라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협루가 엄수를 박대했다.

      이에 한열후(韓烈侯) 3년 기원전 376년 분노한 엄수에 의해 고용된 자객 섭정(聶政)에 의해 살해되었다.

11) 일(鎰)/ 춘추전국시대 때 한 일은 20량 혹은 24량이고 한 량은 16그람임으로 320그람 혹은 384그람임.

      즉 황금 백 일은 32키로 혹은 38키로에 해당하는 중량임.

12) 위원군(衛元君)/ 전국 말 위(衛)나라 군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52년 즉위하여 230년 죽었다.

      위회군(衛懷君)의 동생으로 위나라가 조현을 드리러 방문한 회군을 억류시키고 그를 위나라 군주로 앉혔다.

      재위 기간 중 국세는 더욱 쇠약해져 진(秦)나라의 도움으로 간신히 나라를 유지했다.

      기원전 241년 제구(帝丘)에서 야왕으로 나라를 옮겨 진나라의 부용(附庸)이 되었다.

13) 동군(東郡)/ 기원전 242년 진나라가 위나라 동쪽에 있던 땅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 땅에 설치한 군으로 후에

      위(衛)나라의 령이었던 복양(濮陽) 일대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진나라는 중원의 중앙부를 장악하여

      산동 6국의 합종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관할은 산동 동아(東阿), 양산(梁山) 이서, 정도(定陶),

      성무(成武) 이북, 하남성 연진(延津), 청풍(淸風) 이남, 장원(長垣) 이북이다.

14) 유차(楡次)/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서성 유차현(楡次縣)이다.

15) 박(博)/ 올빼미(梟 : 효), 사냥개(盧 : 노), 꿩(雉 : 치), 송아지(犢 : 두), 주사위(塞 : 색) 등의 다섯 가지 모양을

      나무로 깎아 장기와 흡사하게 행마를 하며 노는 놀이이나 자세한 행마법과 은 실전되어 알 수 없다.

16) 번오기(樊於期)/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27년에 죽은 전국 말 진나라 장수다.

      진시황에게 반기를 들어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연나라로 도망쳐 태자단에게 몸을 의탁했다.

      진시황이 진나라에 남아있던 그의 부모와 처 및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했으며 그가 연나라로 도망갔다는 것을 알자 대군을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했다.

      형가(荊軻)가 태자단에게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서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면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적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자단이 번오기를 차마 죽일 수 없다고 말하자 형가가 은밀히 번오기를 만나

      진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의 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번오기는 형가의 말을 듣고 스스로 자기의 목을 베어 죽었다. 형가가 번오기의 목과 비수가 감쳐진

      독항의 지적도를 가지고 진왕을 배알하다가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7) 독항(督亢)/ 지금의 하북성 탁현(?縣)과 고안현(固安縣) 일대의 땅이다.

18) 변치(變徵)/ 중국 고대 음조는 궁(宮), 상(商), 각(角), 변치(變徵) 치(徵), 우(羽), 변궁(變宮)의 7조로

      서양의 C, D, E, F, G, A, B 등의 음조에 해당한다. 변치(變徵)는 F조에 해당한다.

19) 중서자(中庶子)/ 주나라 때 서자라는 관제로 주로 제후와 경대부(卿大夫)들의 서자들의 계율과   

      교리(敎理)를 관장했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 그들은 모두 태자에게 귀속되어 그 지시를 받았다.

      전국 때 각 제후국들은 이를 본 땨 중서자라는 관제를 만들어 운용했다.

20) 구빈지례(九賓之禮)/ ① 천자가 외국이나 제후의 나라에서 보내온 사자를 맞이할 때 구빈에 해당하는

      모든 관원들이 참석하여 행하는 가장 성대한 의례식. 구빈(九賓)이란 공(公), 후(侯), 백(伯),자(子), 남(男),

      고(孤), 대부(大夫), 사(士)를 말한다. ② 구헌례(九獻禮)라고도 하며

      고대에 있어서 국가간의 외교상 가장 성대한 의식이다.

      9명의 영접관이 구주의 이름 순서에 의해 도열했다가 호명하면 차례대로 나와 사자를 전당으로 인도했다.

21) 송자(宋子)/ 지금의 하북성 조현(趙縣) 동북으로 전국 때 조나라 땅이다.

22) 동중서(董仲舒)/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년에 태어나서 104년에 죽은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로

      하북성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 출신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를 서한의 통치철학으로 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무제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23) 형가에 의한 진시황 암살사건은 기원전 227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동중서는 기원전 179년에 태어났고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생이다. 형가사건과 사마천이 사기를 지은 해수는 100여 년 시차가 있지만

      동중서와 공손계공이 사건의 직접 목격자인 하무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사마천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