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6. 陳丞相世家

第 二十六. 陳丞相世家(진승상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3. 17:33

                史記 世家

 

  ​第 二十六.  陳丞相世家(진승상세가)

陳丞相平者,陽武戶牖鄉人也.  少時家貧,好讀書,有田三十畝,獨與兄伯居.

伯常耕田,縱平使游學.

[승상 진평(陳平)은 양무현(陽武縣)의 호유향() 사람이다.

그의 젊은 시절에 집은 가난했으나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재산은 30무(畝)의 땅이 있었는데, 그는 혼자서 형 진백(陳伯)과 함께 살았다.

진백은 늘 농사 일을 하면서도 진평에게는 마음 편히 다른 지방으로 가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

 

平為人長[大]美色.  人或謂陳平曰:「貧何食而肥若是?」

其嫂嫉平之不視家生產,曰:「亦食糠覈耳. 有叔如此,不如無有.」伯聞之,逐其婦而棄之.

[진평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았으므로 사람들 중에는 간혹 그에게 말하기를 :

“집도 가난한데 무얼 먹었기에 이토록 살이 쪘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형수는 진평이 집안일을 돌보지도, 농사일을 거들지도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말하기를 :

"아무래도 쌀겨나 먹을 수밖에 없어, 시동생이라고 있는 사람이 저와 같으니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해.”라고 하자,

형 진백이 그 소리를 듣고 자기 아내를 내쫓아 버렸다.]

 

及平長,可娶妻,富人莫肯與者,貧者平亦恥之.

久之,戶牖富人有張負,張負女孫五嫁而夫輒死,人莫敢娶.  平欲得之.

邑中有喪,平貧,侍喪,以先往後罷為助.  張負既見之喪所,獨視偉平,平亦以故後去.

[진평이 성장해 장가를 갈 나이가 되었는데, 부잣집에서는 그에게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가난한 집에 장가드는 것은 또 그 자신이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한참 뒤, 호유에 장부(張負)라는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손녀가 다섯 번이나 시집을 갔으나
그때마다 남편이 죽어버려 사람들이 감히 그녀에게 더 이상 장가를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평은 비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다.
당시 마을에 초상을 당한 집이 생기자, 진평은 집안이 가난했기에 상가 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그는 남들보다 먼저 가서 늦게 돌아오는 방법으로 보탬이 되고자 했다.
장부는 상가에서 진평을 보고 특히 그의 뛰어난 풍채를 주시했고,

진평 역시 장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맨 나중에 자리를 떴다.]

 

負隨平至其家,家乃負郭窮巷,以獘席為門,然門外多有長者車轍.

張負歸,謂其子仲曰:「吾欲以女孫予陳平.」

張仲曰:「平貧不事事,一縣中盡笑其所為,獨柰何予女乎?」

負曰:「人固有好美如陳平而長貧賤者乎?」卒與女.

[장부가 진평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보았더니, 그의 집은 성벽을 등진 후미진 골목에 있었고,
비록 해진 자리로 문을 만들어놓았지만 문 밖에는 많은 귀인들의 수레가 멈추었던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장부가 집으로 돌아와 아들 장중(張仲)에게 말하기를 : “나는 손녀를 진평에게 시집보내고자 한다.”라고 하자,
장중이 말하기를 : “진평은 집이 가난한데도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위를 비웃고 있는데,

어찌해 제 딸아이를 굳이 그에게 주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장부가 말하기를 : “사람 중에서 진평과 같이 훌륭한 용모를 지녔으면서도

끝까지 빈천하게 지낼 이가 있겠느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손녀를 진평에게 출가시키기로 하였다.]

 

為平貧,乃假貸幣以聘,予酒肉之資以內婦.

負誡其孫曰:「毋以貧故,事人不謹. 事兄伯如事父,事嫂如母.」

平既娶張氏女,齎用益饒,游道日廣.

[진평이 가난했기 때문에 장부는 그에게 예단감을 빌려주어 약혼을 하게 했고,

또 술과 고기를 살 비용을 주어 아내를 맞게 했다.

장부는 또 그 손녀에게 타이르며 말하기를 : “진평이 가난하다고 하여 섬김에 있어 불손하게 행동하지 말아라.

그리고 시숙 섬기기를 아버님 섬기듯 하고, 형님 섬기기를 어머님 섬기듯 하여라”라고 하였다.
진평은 장부의 손녀에게 장가를 든 후, 쓸 재물이 나날이 넉넉해졌고 교유의 범위도 날로 넓어졌다.]

 

裏中社,平為宰,分肉食甚均.  父老曰:「善,陳孺子之為宰!」

平曰:「嗟乎,使平得宰天下,亦如是肉矣!」

陳涉起而王陳,使周市略定魏地,立魏咎為魏王,與秦軍相攻於臨濟.

[진평이 사는 마을에 사제(社祭)가 있었는데, 진평이 재(宰)가 되자, 고기 나누는 것이 매우 공평해졌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말하기를 : “진씨네 젊은이가 재(宰) 노릇을 참으로 잘한다!”라고 하자,
진평은 말하기를 : “아! 슬프다. 이 진평을 천하의 재상으로 삼더라도 고기를 나누듯 공평할 것인데!”라고 하였다.
진섭(陳涉)이 기병해 진(陳) 땅에서 왕이라 칭한 후, 주불(周市)로 하여금 원래의 위(魏)나라 땅을 평정한 뒤
위구(魏咎)를 세워 위왕(魏王)으로 삼고, 임제(臨濟)에서 진(秦)나라 군대와 싸우게 하였다.]

 

陳平固已前謝其兄伯,從少年往事魏王咎於臨濟.  魏王以為太仆.

說魏王不聽,人或讒之,陳平亡去.

久之,項羽略地至河上,陳平往歸之,從入破秦,賜平爵卿.

[당시 진평은 그 전에 이미 형 진백과 이별하고 몇몇 젊은이들을 따라 임제로 가서 위왕 구(咎)를 섬기고

있었으며, 위왕은 그를 태복(太僕)에 임명했다.
그런데 진평이 위왕에게 큰 계책으로 유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 어떤 사람이 그를 헐뜯었기 때문에 그는 위왕에게서 달아났다.
얼마 뒤 항우(項羽)가 영토를 공략해 황하 부근에까지 이르자, 진평은 그에게로 가서 귀순하고

그를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이에 항우는 진평에게 경(卿)의 작위를 내렸다.]

 

項羽之東王彭城也,漢王還定三秦而東,殷王反楚.

項羽乃以平為信武君,將魏王咎客在楚者以往,擊降殷王而還.

項王使項悍拜平為都尉,賜金二十溢.

[나중에 항우는 동쪽으로 가 팽성(彭城)에서 초왕(楚王)이라 칭했다.
한편 한왕(漢王)은 군대를 돌려 삼진(三秦) 땅을 평정하고 계속 동진했는데, 이때 은왕(殷王)이 초나라를 배반했다.  

항우는 이에 진평을 신무군(信武君)에 봉해 초나라 땅에 있는 위왕 구의 막료들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진평은 은왕을 쳐서 항복시키고 돌아왔다.

항왕(項王)은 항한(項悍)을 보내 진평을 도위(都尉)에 임명하고, 황금 20일(溢)을 상으로 하사했다.]

 

居無何,漢王攻下殷王. 項王怒,將誅定殷者將吏.

陳平懼誅,乃封其金與印,使使歸項王,而平身閒行杖劍亡.

渡河,船人見其美丈夫獨行,疑其亡將,要中當有金玉寶器,目之,欲殺平.

平恐,乃解衣躶而佐刺船,船人知其無有,乃止.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왕이 은 땅을 점령하자, 항왕은 노하여 지난번에 은 땅을 평정했던 장수와

군관들을 죽이려고 했다.  진평은 피살될 것을 두려워해 항왕이 준 황금과 관인(官印)을 싸서

사람을 보내 항왕에게 돌려주고 칼 한 자루를 찬 채 단신으로 사잇길을 택해 달아났다.
그가 황하를 건널 때, 사공은 진평이 기골이 장대한 호남아로서 혼자 가는 것을 보고는,
진평이 분명 도망하는 장수로서 허리에는 틀림없이 황금이나 옥 같은 귀중한 보물을

감추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 그를 주시하며 죽이려고 했다.
진평은 두려운 나머지 옷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사공이 배 젓는 것을 도왔는데,
사공은 그제에서야 그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죽이려던 생각을 그만두었다.]

 

平遂至修武降漢,因魏無知求見漢王,漢王召入.

是時萬石君奮為漢王中涓,受平謁,入見平. 平等七人俱進,賜食.

王曰:「罷,就舍矣.」平曰:「臣為事來,所言不可以過今日.」於是漢王與語而說之,

問曰:「子之居楚何官?」 曰:「為都尉.」是日乃拜平為都尉,使為參乘,典護軍.

[진평은 마침내 수무(修武)에 이르러 한군(漢軍)에 투항했고, 위무지(魏無知)를 통해 한왕을 만나길 청하자,

한왕이 그를 불렀다. 이때 만석군(萬石君) 석분(石奮)이 한왕의 중연(中涓)이 되어 있었는데,

그는 진평의 명함을 접수하고 진평을 데리고 들어가 한왕을 뵙게 했다.
진평 등 일곱 사람이 함께 한왕에게 나아갔는데, 한왕은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 “먹고 난 후 숙소로 가서 쉬도록 하라”라고 하자,
진평은 아뢰기를 : “저는 중요한 일로 왔으므로 제가 드려야 할 말씀은 오늘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왕이 함께 말을 나누고는 기뻐하면서 묻기를 : “그대가 초나라에 있을 때 무슨 벼슬을 했는가?”라고 하자,
진평이 대답하기를 : “도위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날로 진평을 도위에 임명해 황제의 수레에 참승(參乘)하게 하고 호군(護軍)을 맡게 했다.]

 

諸將盡讙,曰:「大王一日得楚之亡卒,未知其高下,而即與同載,反使監護軍長者!」

漢王聞之,愈益幸平.  遂與東伐項王.  至彭城,為楚所敗.

引而還,收散兵至滎陽,以平為亞將,屬於韓王信,軍廣武.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입을 모아 아뢰기를 : “대왕께서는 어찌해 하루 만에 초나라에서 도망한 졸병을 얻어

그 재능의 고하도 알지 못한 채, 함께 수레를 타시고, 또 그로 하여금 오히려 우리 같은 노장(老將)들을

감독하게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왕은 그 소리를 듣고는 진평을 더욱 총애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와 함께 동쪽으로 항왕을 치러 갔는데, 팽성에 이르러 초나라에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한왕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형양(滎陽)에 이르러

진평을 아장(亞將)으로 삼아 한왕(韓王) 한신(韓信)에게 예속시켜 광무(廣武)에 주둔하게 했다.]

 

絳侯、灌嬰等咸讒陳平曰:「平雖美丈夫,如冠玉耳,其中未必有也.

臣聞平居家時,盜其嫂;事魏不容,亡歸楚;歸楚不中,又亡歸漢. 今日大王尊官之,令護軍.

臣聞平受諸將金,金多者得善處,金少者得惡處. 平,反覆亂臣也,願王察之.」

[강후(絳侯), 관영(灌嬰) 등이 모두 진평을 헐뜯으며 아뢰기를 : “진평이 비록 호남아 이지만

관옥(冠玉 :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가 없음)과 같을 뿐으로 그 속에는 틀림없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진평이 집에 있을 때는 형수와 사통했으며, 위(魏)나라를 섬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해 초나라에 귀순했고, 초나라에 귀순해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도망해 우리 한나라에 귀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그를 높여 관직을 주시고 호군을 삼으셨습니다. 또 신들이 듣건대,

진평은 여러 장군에게 금을 받았는데, 금을 많이 준 사람에게는 선처하고 금을 적게 준 사람에게는

나쁜 대우를 했다고 하옵니다. 진평은 변덕스러운 역신(逆臣)이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그를 철저히 살피소서.”라고 하였다.]

 

漢王疑之,召讓魏無知.  無知曰:「臣所言者,能也;陛下所問者,行也.

今有尾生、孝己之行而無益處於勝負之數,陛下何暇用之乎?

楚漢相距,臣進奇謀之士,顧其計誠足以利國家不耳.  且盜嫂受金又何足疑乎?」

[이에 한왕이 진평을 의심하고 진평을 천거한 위무지를 불러 꾸짖으니, 위무지가 이렇게 말했다.
“신이 말씀드린 바는 능력이요, 대왕께서 물으신 바는 행실입니다.

지금 만약 그에게 미생(尾生)이나 효기(孝己)와 같은 행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승부를 다투는 데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을 것이니, 대왕께서 어느 겨를에 그런 사람을 쓰실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바야흐로 초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대항하고 있기 때문에 신이 기발한 능력이 있는 선비를 천거했사오니,
생각컨대 그 계책이 참으로 국가에 이로운가 하는 여부를 따져야지 어찌 형수와 사통했다거나

금을 받은 것에 대해 의심해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漢王召讓平曰:「先生事魏不中,遂事楚而去,今又從吾游,信者固多心乎?」

平曰:「臣事魏王, 魏王不能用臣說, 故去事項王. 項王不能信人, 其所任愛, 非諸項即妻之昆弟,

雖有奇士不能用,平乃去楚. 聞漢王之能用人,故歸大王. 臣躶身來,不受金無以為資.

誠臣計畫有可采者, (顧)[願]大王用之;使無可用者,金具在,請封輸官,得請骸骨.」

漢王乃謝,厚賜,拜為護軍中尉,盡護諸將. 諸將乃不敢復言.

[한왕이 진평을 불러 나무라며 말하기를 : “선생은 위왕을 섬기다 마음이 맞지 않자 마침내 초왕을 섬기러 갔고,

지금은 또 나를 따라 일을 하니 신용있는 사람은 원래 이렇게 여러 가지 마음을 품는 것인가?”라고 하자,
진평이 대답하기를 : " 신이 위왕을 섬김에 위왕은 신의 말을 채용하지 않았으므로 위왕을 떠나서 항왕을 섬겼습니다.

항왕은 다른 사람은 믿지 못했고, 오직 그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사람은 항씨(項氏) 일가가 아니면

곧 그 처남들이었으니, 설령 뛰어난 책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중용되지 않으므로 이에 저는 초나라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듣건대, 대왕께서 사람을 잘 가려 쓰신다기에 대왕께 귀순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맨몸으로 온 탓에 여러 장군들이 보내준 황금을 받지 않고서는 쓸 돈이 없었습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쓸 만한 것이 있다면 원컨대 대왕께서 채용해 주시옵고, 만약 쓸 만한 것이 없다면

황금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청컨대 잘 봉해 관청으로 보내고 사직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한왕이 이에 진평에게 사과하고, 많은 상을 내린 뒤 호군중위(護軍中尉)의 벼슬에 임명하고

모든 장군들을 감독하게 하니, 여러 장군들은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其後,楚急攻,絕漢甬道,圍漢王於滎陽城.  久之,漢王患之,請割滎陽以西以和.  項王不聽.

漢王謂陳平曰:「天下紛紛,何時定乎?」

陳平曰:「項王為人,恭敬愛人,士之廉節好禮者多歸之. 至於行功爵邑,重之,士亦以此不附.

今大王慢而少禮,士廉節者不來;然大王能饒人以爵邑,士之頑鈍嗜利無恥者亦多歸漢.

誠各去其兩短,襲其兩長,天下指麾則定矣. 然大王恣侮人,不能得廉節之士. 顧楚有可亂者,

彼項王骨鯁之臣亞父、鐘離眛、龍且、周殷之屬,不過數人耳. 大王誠能出捐數萬斤金,

行反閒,閒其君臣,以疑其心,項王為人意忌信讒,必內相誅. 漢因舉兵而攻之,破楚必矣.」

漢王以為然,乃出黃金四萬斤,與陳平,恣所為,不問其出入.

[그 후 초나라가 급박하게 한나라를 공격해 군량과 마초(馬草)를 운반하는 한나라의 용도(甬道)를 끊어버리고,
형양성(滎陽城)에서 한왕을 포위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한왕은 그 난국을 걱정해 형양 서쪽의 땅을

할양(割讓)해 강화를 요청했지만 항왕이 듣지 않았다.
한왕이 진평에게 묻기를 : “천하가 몹시도 어지러운데 언제쯤 안정이 되겠는가?”라고 하니,
진평이 대답하기를 : “ 항왕의 사람됨이 사람을 공경하고 사랑해 청렴하고 지조 있고 예를 좋아하는 선비들이

대부분 그에게로 귀순했습니다. 그러나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고 작위와 봉지를 내리는 데에는

오히려 너무도 인색해 선비들이 또 그것 때문에 그에게 완전히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오만하시고 예의를 가볍게 여기시어 청렴하고 절개 있는 선비들은 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작위와 봉지를 아낌없이 내리시니 청렴함과 절개를 돌아보지 않고 이익을 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선비들이 대부분 대왕의 한나라로 귀순했습니다.
만약 양자의 결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신다면 손만 휘저어도 쉽게 천하를 평정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마음 내키시는 대로 사람을 모욕하시기 때문에 청렴하고 절개 있는 선비들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초나라에도 어지러워질 수 있는 요소가 있으니, 항왕의 강직한 신하로는 아부(亞父) 범증,

종리매(鍾離昧), 용차(龍且), 주은(周殷) 등의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대왕께서 만약에 수만 근(斤)의 황금을 내놓으실 수 있다면 이간책을 행해 초나라 군신들의 사이를 떼어놓아
그들로 하여금 서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하신다면 항왕의 사람됨이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 하여 참소를

믿을 것이므로 반드시 내부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나라는 바로 그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면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왕은 그렇다고 생각해 황금 4만 근을 내어 진평에게 주어서 마음대로 쓰게 하고,

그 돈의 출납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陳平既多以金縱反閒於楚軍,宣言諸將鐘離眛等為項王將,功多矣,

然而終不得裂地而王,欲與漢為一,以滅項氏而分王其地.  項羽果意不信鐘離眛等.

項王既疑之,使使至漢.  漢王為太牢具,舉進. 

見楚使,即詳驚曰:「吾以為亞父使,乃項王使!」

復持去,更以惡草具進楚使.  楚使歸,具以報項王. 項王果大疑亞父. 

亞父欲急攻下滎陽城,項王不信,不肯聽.

[진평이 많은 황금을 써서 초나라 군대에 대량으로 첩자를 파견해 공개적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종리매 등이 항왕의 장수로서 공을 많이 쌓았는데도 항왕이 끝내 땅을 떼어 왕으로 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와 동맹해 항왕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각기 왕이 되려 한다고 선전하였다.
그러자 항왕은 과연 종리매 등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항왕이 이미 그들을 의심하면서 사신을 한나라로 보냈다.
이에 한왕은 사람을 시켜 풍성한 태뢰(太牢)를 마련해 들고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초나라의 사신을 보고 짐짓 놀라는 척하며 말하기를 : “나는 아부의 사신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항왕의 사신이었구려!”라고 하고는 그 풍성한 음식을 가지고 나가게 하고, 다시 나쁜 음식을 사신에게 올리게 했다.

초나라 사신이 돌아가 모든 사실을 항왕에게 보고하니, 항왕은 과연 아부를 매우 의심하였다.
그때 아부는 급히 형양성을 공격해 항복시키려고 했으나, 항왕이 그의 말을 의심해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亞父聞項王疑之,乃怒曰:「天下事大定矣,君王自為之!願請骸骨歸!」

歸未至彭城,疽發背而死.  陳平乃夜出女子二千人滎陽城東門,楚因擊之,

陳平乃與漢王從城西門夜出去.  遂入關,收散兵復東.

[아부는 항왕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는 화를 내며 말하기를 : “천하의 대사가 대체로 확정되었으니

이제 대왕께서 직접 경영하소서. 원컨대 이 늙은 해골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아부는 귀향하는 도중 팽성에 이르기 전에 등에 종기가 나서 죽고 말았다.

이에 진평이 야밤을 틈타 여자 2천명을 형양성 동문으로 내보내자, 초나라가 곧 이를 공격했다.
그 틈에 진평은 한왕과 함께 성의 서문을 통해서 밤중에 달아났다.

한왕은 이렇게 해 관중으로 들어가서 흩어진 병사를 모아 다시 동쪽으로 진군했다.]

 

其明年,淮陰侯破齊,自立為齊王,使使言之漢王.  漢王大怒而罵,陳平躡漢王.

漢王亦悟,乃厚遇齊使,使張子房卒立信為齊王.

封平以戶牖鄉.  用其奇計策,卒滅楚.  常以護軍中尉從定燕王臧荼.

[그 이듬해(기원전 203년) 회음후(淮陰侯)는 제(齊)나라를 격파하고 자립해 제왕(齊王)이 된 후,

사신을 보내어 그 사실을 한왕(漢王)에게 알렸다. 이에 한왕이 크게 노하여 욕을 했는데,

진평이 슬며시 한왕의 발을 밟으니, 한왕 또한 문득 크게 깨닫고 곧 제나라 사신을 후하게 대접했고,

장자방(張子房)을 보내어 결국 한신을 제왕으로 세웠다.

한왕은 호유향(戶牖鄕)을 진평에게 봉해 주고 그의 기묘한 계책을 써서 마침내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진평은 일찍이 호군중위의 신분으로 한왕을 따라 연왕(燕王) 장도(臧荼)를 평정하기도 했다.]

 

漢六年,人有上書告楚王韓信反.  高帝問諸將,諸將曰:「亟發兵阬豎子耳.」高帝默然.

問陳平,平固辭謝,曰:「諸將云何?」上具告之.

陳平曰:「人之上書言信反,有知之者乎?」 曰:「未有.」

曰:「信知之乎?」 曰:「不知.」

陳平曰:「陛下精兵孰與楚?」 上曰:「不能過.」

平曰:「陛下將用兵有能過韓信者乎?」 上曰:「莫及也.」

[한나라 6년, 어떤 사람이 초왕(楚王) 한신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글을 올려 고했다.

고제가 이에 여러 장군들에게 묻자, 그들은 말하기를 :“하루 빨리 군대를 보내 그놈을 매장시켜야 합니다.”라고 했다.

고제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진평에게 물었으사, 진평은 거듭 사양하다가 말하기를 :

“ 여러 장군들은 무어라고 했습니까?”라고 하자,  고제는 그들이 한 말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러자 진평이 말하기를 : “누군가가 한신이 모반한다고 글을 올렸는데,

그러면 이 일을 달리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고제가 대답하기를 : “없소”라고 하였다.

진평이 다시 묻기를 : “한신 자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고제가 대답하기를 : “모르오.”라고 하였다.

진평이 또 묻기를 : “ 폐하의 정예병은 초나라와 비교해서 누가 더 낫습니까?” 라고 하자,
고제가 대답하기를 : “우리가 그들을 능가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진평이 다시 묻기를 : “ 폐하 장수들의 용병술이 한신을 능가합니까?”라고 하자,

고제가 대답하기를 :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平曰:「今兵不如楚精,而將不能及,而舉兵攻之,是趣之戰也,竊為陛下危之.」

上曰:「為之柰何?」

平曰:「古者天子巡狩,會諸侯. 南方有雲夢,陛下弟出偽游雲夢,會諸侯於陳.

陳, 楚之西界, 信聞天子以好出游, 其勢必無事而郊迎謁. 謁, 而陛下因禽之, 此特一力士之事耳.」

[진평이 말하기를  : “ 지금, 군대도 초나라의 정예병만 못하고, 장수 또한 한신에 미치지 못하면서

군사를 보내어 공격한다면 이는 곧 그들에게 군대를 일으켜 반항하게 재촉하는 것이니,

삼가 생각컨대 폐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위험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제가 묻기를 : “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자,
진평이 대답하기를 : " 옛날에는 천자가 지방을 순수(巡狩)하며 제후를 불러 접견했습니다.
남방에 운몽(雲夢)이라는 곳이 있는데, 폐하께서는 그냥 나가시어 거짓으로 운몽을 순수하시면서

제후들을 진(陳) 땅으로 불러 모으십시오. 진 땅은 초나라의 서쪽 경계인데, 한신은 천자가 즐겁게

출유(出遊)하심을 듣고, 틀림없이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교외에서 맞아 뵐 것입니다.
그가 뵈러 올 그때 폐하께서 그를 잡으시면, 이는 단지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도 될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高帝以為然,乃發使告諸侯會陳,「吾將南游雲夢」.

上因隨以行.  行未至陳,楚王信果郊迎道中.  高帝豫具武士,見信至,即執縛之,載後車.

信呼曰:「天下已定,我固當烹!」

高帝顧謂信曰:「若毋聲!而反,明矣!」武士反接之.  遂會諸侯于陳,盡定楚地. 

還至雒陽,赦信以為淮陰侯,而與功臣剖符定封.

[고제도 그렇다고 생각해 사신을 제후들에게 보내 진 땅에 모이도록 통고하고

“짐이 장차 남쪽 운몽을 순수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길을 떠났다.
고제가 아직 진 땅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초왕 한신이 과연 교외의 큰길에서 그를 맞이했다.
고제는 미리 무사들을 준비했다가 한신이 이르는 것을 보고 즉각 그를 묶어 뒤따르는 수레에 실었다.
한신이 소리치며 말하기를 : “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마땅히 삶겨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고제가 돌아보며 한신에게 말하기를 : “너는 크게 소리치지 마라. 네가 모반한 것은 이미 명백하다!”라고 했고,

무사들은 한신의 두 손을 등 뒤로 교차시켜 묶었다.
마침내 고제는 진 땅에서 제후들을 회견하고 초나라 땅을 완전히 평정했다.
고제는 돌아오다가 낙양에 이르러 한신을 사면해 회음후(淮陰侯)에 봉했고,

공신들에게 부절(符節)을 쪼개주며 봉지(封地)를 확정지어 주었다.]

 

於是與平剖符,世世勿絕,為戶牖侯.  平辭曰:「此非臣之功也.」

上曰:「吾用先生謀計,戰勝剋敵,非功而何?」平曰:「非魏無知臣安得進?」

上曰;「若子可謂不背本矣.」乃復賞魏無知.

[또한 고제는 진평에게도 부절을 쪼개어주고, 대대로 그 효력이 단절되지 않도록 그를 호유후(戶牖侯)에 봉해 주었다.

그러나 진평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 “이는 신의 공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고제가 말하기를 : “ 짐이 선생의 계책을 써서 적을 무찔렀는데, 선생의 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하자,

진평이 대답하기를 : “ 위무지가 아니었으면 신이 어찌 천거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제는 말하기를 :  “그대는 근본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라고 하고, 이에 다시 위무지에게 상을 내렸다.]

 

其明年,以護軍中尉從攻反者韓王信於代.  卒至平城,為匈奴所圍,七日不得食.

高帝用陳平奇計,使單于閼氏,圍以得開.  高帝既出,其計祕,世莫得聞.

[그 이듬해, 진평은 호군중위의 신분으로 고제를 따라 반역자 한왕(韓王) 신(信)을 대(代) 땅에서 공격하여, 
곧장 평성(平城)에 이르렀는데, 흉노에게 포위되어 7일 동안 음식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고제는 진평의 기이한 계책을 써서 선우(單于)의 연지(閼氏)에게 사신을 보내어

비로소 포위를 풀 수가 있었다. 그런데 고제가 포위를 벗어난 이후에도 진평의 기이한 계책은

줄곧 비밀에 붙여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高帝南過曲逆,上其城,望見其屋室甚大,曰:「壯哉縣!吾行天下,獨見洛陽與是耳.」

顧問御史曰:「曲逆戶口幾何?」

對曰:「始秦時三萬餘戶,閒者兵數起,多亡匿,今見五千戶.」

於是乃詔御史,更以陳平為曲逆侯,盡食之,除前所食戶牖.

[고제가 남쪽으로 곡역(曲逆)을 지나가다가 그 성루에 올라 성 안의 집들이 매우 큰 것을 보고 말하기를 :
“ 고을이 참으로 장관이구나 ! 짐이 천하를 두루 다녔지만 이렇듯 장관인 곳은 오직 낙양과 이곳 뿐이로다”

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려 어사에게 묻기를 : “ 이곳 곡역현의 호구(戶口)가 얼마인가?”라고 하자,
어사가 대답하기를 : “당초 진(秦)나라 때에는 3만여 호였는데, 근래에 병란이 여러 차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도망하고 숨어버려 지금은 5천 호만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제는 어사에게 명해서 진평을 곡역후(曲逆侯)로 바꾸어 봉해 곡역현 전체를 식읍으로 주고,

앞서 봉했던 호유향은 취소하였다.]

 

其後常以護軍中尉從攻陳豨及黥布.  凡六出奇計,輒益邑,凡六益封.

奇計或頗祕,世莫能聞也.  高帝從破布軍還,病創,徐行至長安.

燕王盧綰反,上使樊噲以相國將兵攻之.  既行,人有短惡噲者.

高帝怒曰:「噲見吾病,乃冀我死也.」

用陳平謀而召絳侯周勃受詔床下,曰:「陳平亟馳傳載勃代噲將,平至軍中即斬噲頭!」

[그 후에도 진평은 일찍이 호군중위의 벼슬로 황제를 따라 진희(陳豨)와 경포(黥布)를 쳤는데,
모두 여섯 번이나 기이한 계책을 내었으며, 그때마다 봉읍이 더해져서 모두 여섯 차례나 되었다.
그의 기이한 계책 가운데 어떤 것은 아주 비밀에 부쳐졌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고제가 경포를 친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올 때, 부상이 심해 천천히 행군해서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이때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모반을 했는데, 고제는 번쾌(樊噲)를 시켜 상국(相國)의 신분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했다. 번쾌가 출발한 뒤, 그를 헐뜯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 “번쾌가 짐이 병이 난 것을 보고 짐이 죽기를 고대하고 있었단 말인가!”라고 하며, 
진평의 계책을 써서 강후(絳侯) 주발(周勃)을 병상 아래로 불러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
“진평은 급히 역참의 수레로 주발을 태우고 가서 번쾌의 군대를 대신 통솔하게 하고,

또 진평은 군중에 이르는 즉시 번쾌의 머리를 베어라!”라고 하였다.]

 

二人既受詔,馳傳未至軍,行計之曰:「樊噲,帝之故人也,功多,且又乃呂后弟呂媭之夫,

有親且貴,帝以忿怒故,欲斬之,則恐後悔.  寧囚而致上,上自誅之.」

未至軍, 為壇, 以節召樊噲.  噲受詔, 即反接載檻車, 傳詣長安, 而令絳侯勃代將,將兵定燕反縣.

[두 사람은 조칙을 받은 후, 역참의 수레를 타고 가면서 군중에 이르기 전에 서로 상의해 말하기를 :
" 번쾌는 황제의 오랜 친구이면서 공로도 많고, 또 여후(呂后)의 동생 여수(呂嬃)의 남편이니 황제와는 친척이고

또 지위도 높습니다. 황제께서 일시의 분노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하시지만, 나중에 후회하실까 두렵소.
그러니 차라리 그를 묶어 황제께 보내 황제께서 직접 그를 죽이시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리하여 그들은 군영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단(壇)을 쌓아 황제가 내린 부절로 번쾌를 불렀다.
번쾌가 조칙을 받자 곧바로 두 손을 뒤로 묶어 죄수의 수레에 실어 장안으로 보내고,
강후 주발에게는 번쾌 대신 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에 참여한 연나라의 각 현을 평정하게 하였다.]

 

平行聞高帝崩,平恐呂太后及呂媭讒怒,乃馳傳先去.  逢使者詔平與灌嬰屯於滎陽.

平受詔,立復馳至宮,哭甚哀,因奏事喪前.

呂太后哀之,曰:「君勞,出休矣.」平畏讒之就,因固請得宿衛中.

太后乃以為郎中令,曰:「傅教孝惠.」是後呂媭讒乃不得行.  樊噲至,則赦復爵邑.

[진평은 돌아오는 도중에 고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수가 참소해 여태후(呂太后)가 노할까 두려워해 서둘러 역참 수레를 몰아 번쾌의 일행보다 한발 앞서 달려갔다.

도중에 조정의 사신을 만났는데, 그는 진평과 관영에게 형양에 주둔하라는 조칙을 전했다.
진평은 조칙을 받은 즉시 다시 수레를 몰아 황궁(皇宮)으로 가서 매우 애절하게 통곡하고,
그 기회를 틈타 고제의 영구(靈柩) 앞에서 여후에게 지난 일(번쾌에 관한 일)을 아뢰었다.
여후가 진평을 가련히 여기며 말하기를 : “그대는 수고했으니 나가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진평은 참소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숙위(宿衛)의 벼슬을 단단히 청했다.
이에 여후가 진평을 낭중령(郎中令)에 임명하고 이르기를 : “새 황제를 잘 보좌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여수의 참언은 비로소 별 효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번쾌는 장안에 이르러 사면을 받고 원래의 작위와 봉읍을 회복했다.]

 

孝惠帝六年,相國曹參卒,以安國侯王陵為右丞相,陳平為左丞相.

王陵者,故沛人,始為縣豪,高祖微時,兄事陵.  陵少文,任氣,好直言.

及高祖起沛,入至咸陽,陵亦自聚黨數千人,居南陽,不肯從沛公.

及漢王之還攻項籍,陵乃以兵屬漢.  項羽取陵母置軍中,陵使至,則東鄉坐陵母,欲以招陵.

陵母既私送使者,泣曰:「為老妾語陵,謹事漢王.

漢王,長者也,無以老妾故,持二心. 妾以死送使者.」遂伏劍而死. 

項王怒,烹陵母.  陵卒從漢王定天下.

[혜제 6년, 상국 조참(曹參)이 죽자, 안국후(安國侯) 왕릉(王陵)을 우승상으로, 진평을 좌승상으로 삼았다.
왕릉은 옛 패현(沛縣) 사람으로, 처음에는 그 현의 호협(豪俠)이었는데, 한 고제가 미천했을 때,

그를 형님처럼 섬겼다. 왕릉은 예의가 부족하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했으며 직언을 좋아했다.
패공 유방이 패현에서 봉기해 관중으로 들어가 함양에 도착했을 때,

왕릉은 독자적으로 무리 수천 명을 모아 남양에 있으면서 패공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한왕 유방이 회군해 항우를 공격할 때, 왕릉은 비로소 군사를 한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때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잡아다 군중에 두고는 왕릉의 사자가 도착하자,

왕릉의 어머니를 윗자리에 앉게 해 왕릉을 귀순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왕릉의 어머니는 비밀리에 심부름꾼을 보내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이 늙은이를 위해서 왕릉에게 한왕을 잘 섬기라고 전해주시오. 한왕은 훌륭한 어른이시니 이 늙은이 때문에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시오. 이 늙은 아낙이 죽음으로써 당신을 전송하리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 자살을 했다. 이에 항왕은 대노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삶아버렸다.

왕릉은 마침내 한왕을 수행해 천하를 평정하였다.]

 

以善雍齒,雍齒,高帝之仇,而陵本無意從高帝,以故晚封,為安國侯.

安國侯既為右丞相,二歲,孝惠帝崩.  高后欲立諸呂為王,問王陵,王陵曰:「不可.」

問陳平,陳平曰:「可.」呂太后怒,乃詳遷陵為帝太傅,實不用陵.

陵怒,謝疾免,杜門竟不朝請,七年而卒.

[왕릉은 옹치(雍齒)와는 사이가 좋았으나 옹치가 한왕의 원수였고,

게다가 왕릉도 본래 한왕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늦게 봉을 받아 안국후(安國侯)가 되었던 것이다.

안국후가 우숭상(右丞相)이 된 지 2년 만에 혜제(惠帝)가 붕어했다.
여후가 여러 여씨를 세워 왕으로 삼고자 해 우승상 왕릉에게 묻자, 왕릉이 말하기를 : “안 됩니다.”라고 하니,

다시 진평에게 물었는데, 진평은 대답하기를 : “됩니다.”라고 하였다.
여후는 이에 노하여 곧 왕릉을 승진시키는 것처럼 하여 태부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왕릉은 화가 나서 병을 핑계삼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며 끝내 조회하지 않다가 7년 만에 죽었다.]

 

陵之免丞相,呂太后乃徙平為右丞相,以辟陽侯審食其為左丞相.  左丞相不治,常給事於中.

食其亦沛人.  漢王之敗彭城西,楚取太上皇、呂后為質,食其以舍人侍呂后.

其後從破項籍為侯,幸於呂太后.  及為相,居中,百官皆因決事.

[왕릉이 승상에서 면직된 후, 여후는 곧 진평을 우승상으로 옮기고 벽양후 심이기(審食其)를 좌승상으로 임명했다.

좌승상 심이기는 일을 처리할 장소가 없어 늘 궁중에서 정사를 처리했다. 심이기도 역시 패현 사람이었다.

한왕이 팽성에서 패하고 서쪽으로 달아날 때, 초왕은 한왕의 아버지와 여후를 잡아다가 인질로 삼았는데,

심이기는 가신으로서 여후를 받들어 모셨다.

그 후 심이기는 한왕을 따라 항우를 쳐부수고 후(侯)로 봉해지고, 여후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가 좌승상이 되어 궁중에 머무르자 모든 관리들은 다 그를 경유해 정사를 결정, 처리했다.]

 

呂媭常以前陳平為高帝謀執樊噲,數讒曰:「陳平為相非治事,日飲醇酒,戲婦女.」

陳平聞,日益甚.  呂太后聞之,私獨喜.

面質呂媭於陳平曰:「鄙語曰『兒婦人口不可用』,顧君與我何如耳. 無畏呂媭之讒也.」

呂太后立諸呂為王,陳平偽聽之. 

及呂太后崩,平與太尉勃合謀,卒誅諸呂,立孝文皇帝,陳平本謀也.  審食其免相..

[여수(呂嬃)는 늘 진평이 지난날 고제에게 번쾌를 체포하려는 계책을 내었던 일로 인해 여러 차례 여후에게

참소하기를 : “진평은 승상이 되어 정사는 처리하지 않고 매일 좋은 술이나 마시며 부녀자를 희롱합니다”라고 하자, 

진평은 그 소리를 듣고 날로 더욱 그 도가 심하게 행동했다. 여후는 그 사실을 알고는 혼자서 은근히 기뻐했다.
어느날 여후는 여수의 면전에서 진평에게 말하기를 : “속담에 이르기를 ‘어린 아이와 부녀자의 말은 신용할 수가 없다’

라고 했으니, 나는 다만 그대가 나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볼 따름이니, 여수의 참언을 두려워할 것은 없소”라고 하였다. 

여후가 여러 여씨들을 세워 왕으로 삼는 일에 대해서 진평은 일찍이 짐짓 동의하는 척했다.
그러나 여후가 죽자 진평과 태위 주발은 함께 모의해 마침내 여러 여씨들을 죽이고 문제(文帝)를 옹립했는데,
사실은 진평이 그 주모자였다. 심이기는 좌승상에서 면직되었다.]

 

孝文帝立, 以為太尉勃親以兵誅呂氏, 功多;陳平欲讓勃尊位, 乃謝病. 孝文帝初立, 怪平病,問之.

平曰:「高祖時,勃功不如臣平. 及誅諸呂,臣功亦不如勃. 願以右丞相讓勃.」

於是孝文帝乃以絳侯勃為右丞相,位次第一;平徙為左丞相,位次第二. 賜平金千斤,益封三千戶.

[문제가 즉위해, 태위 주발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씨들을 죽였으므로 그 공로가 아주 많다고 여기자,
진평은 우승상의 지위를 주발에게 양보하고 병을 핑계로 사퇴하려고 하였다.
이에 문제는 자신이 막 즉위했는데 진평이 병을 핑계 삼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진평이 아뢰기를 : “ 고제 폐하 때 주발의 공로는 저만 못했습니다만 여씨를 죽이는 것에서는 저의 공로가

또한 주발만 못했습니다. 원컨대 우승상의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문제는 강후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해 최고의 벼슬자리에 앉히고,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겨 다음 자리에 앉혔다.

진평에게는 황금 1천근을 상으로 내리고 식읍 3천호를 더 봉해 주었다.]

 

居頃之,孝文皇帝既益明習國家事,朝而問右丞相勃曰:「天下一歲決獄幾何?」

勃謝曰:「不知.」 問:「天下一歲錢穀出入幾何?」

勃又謝不知,汗出沾背,愧不能對.  於是上亦問左丞相平.  平曰:「有主者.」

上曰:「主者謂誰?」 平曰:「陛下即問決獄,責廷尉;問錢穀,責治粟內史.」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는 국가 대사에 더욱 밝아졌으며, 한번은 조회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묻기를 :

“온 나라에 일 년 동안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건수가 얼마인가?”라고 하자,

주발이 사죄하며 대답하기를 :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묻기를 : “ 온 나라에 일 년 동안 재정상(財政上)의 수입과 지출이 얼마인가?”라고 하니,
주발은 또 모른다고 사죄하며 땀으로 등을 적시면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이에 문제가 다시 좌승상 진평에게 물으니, 진평이 대답하기를 : “주관하는 관리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주관하는 관리가 누구인가?”라고 하자,

진평이 대답하기를 : “폐하께서 옥사 판결에 대해서 궁금하시면 정위(廷尉)에게 물으시고,

재정에 대해서 궁금하시면 치속내사(治粟內史)에게 물으시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上曰:「茍各有主者,而君所主者何事也?」

平謝曰:「主臣!陛下不知其駑下,使待罪宰相. 宰相者,上佐天子理陰陽,順四時,

下育萬物之宜,外鎮撫四夷諸侯,內親附百姓,使卿大夫各得任其職焉.」 孝文帝乃稱善.

右丞相大慚,出而讓陳平曰:「君獨不素教我對!」

陳平笑曰:「君居其位,不知其任邪?且陛下即問長安中盜賊數,君欲彊對邪?」

於是絳侯自知其能不如平遠矣.  居頃之,絳侯謝病請免相,陳平專為一丞相.

황제가 말하기를 : “각기 주관하는 자가 있다면 그대가 주관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하자,
진평이 사죄하며 대답하기를 : “ 신하들을 주관합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노둔함을 알지 못하시고,

재상에 봉직하게 하셨습니다. 무릇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며 음양을 다스려 사시(四時)를 순조롭게 하고,
아래로는 만물이 제때에 성장하게 어루만져주며,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압하고 어루만지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친밀히 복종하게 해 경대부로 하여금 그 직책을 제대로 이행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문제는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우승상 주발은 크게 부끄러워해 조정에서 나온 후,
진평에게 원망하며 말하기를 : “그대는 어찌해 평소에 나에게 대답하기를 가르쳐주지 않았소!”라고 하자,
진평이 웃으며 말하기를 말하기를 : “그대는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승상의 임무를 모르시오?
만약 폐하께서 장안의 도적 수를 물으셨다면 그대는 억지로 대답하려고 했소?”라고 하였다.
이에 강후 주발은 자신의 능력이 진평에 훨씬 못 미침을 알았다.

얼마 후, 강후 주발은 병을 핑계 삼아 재상의 자리를 내놓기를 청하니, 이로써 진평만이 유일한 승상이 되었다.]

孝文帝二年,丞相陳平卒,謚為獻侯.  子共侯買代侯.

二年卒,子簡侯恢代侯.

二十三年卒,子何代侯.

二十三年,何坐略人妻,棄市,國除.

始陳平曰:「我多陰謀,是道家之所禁. 吾世即廢,亦已矣,終不能復起,以吾多陰禍也.」

然其後曾孫陳掌以衛氏親貴戚,願得續封陳氏,然終不得.

 

​[한 문제 2년, 승상 진평이 죽자 시호를 헌후(獻侯)라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공후(共侯) 진매(陳買)가 후작을 세습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공후가 죽자 그의 아들 간후(簡侯) 진회(陳恢)가 후작을 세습했다.
그로부터 23년 후, 간후가 죽자 그의 아들 진하(陳何)가 후작을 세습했는데,
그로부터 23년 뒤 진하가 남의 아내를 강탈한 죄로 사형당하면서, 후국(侯國)은 폐지되었다.
진평이 일찍이 말하기를 : “ 나는 은밀한 계책을 많이 세웠는데, 이는 도가(道家)에서 꺼려하는 바이다.
만약 내 후손이 후작에서 폐지되면 그것으로 끝이어서 끝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곧 내가 은밀한 계책을 많이 쓴 화근 탓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훗날 그의 증손 진장(陳掌)이 위씨(衛氏)와의 친척관계에 힘입어 현귀(顯貴)해져서
진씨의 원래 봉호(封號)를 계속 이어가기를 바랐지만, 끝내 이룰 수가 없었다.]

 

太史公曰:

陳丞相平少時,本好黃帝、老子之術.  方其割肉俎上之時,其意固已遠矣.

傾側擾攘楚魏之閒,卒歸高帝.  常出奇計,救紛糾之難,振國家之患.

及呂后時,事多故矣,然平竟自脫,定宗廟,以榮名終,稱賢相,豈不善始善終哉!

非知謀孰能當此者乎?

태사공은 말한다.
“승상 진평(陳平)이 젊었을 때 본래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설을 좋아했는데,
그가 일찍이 도마 위의 제육(祭肉)을 나눌 때 그 포부는 이미 원대했다.
그가 나중에 초나라와 위(魏)나라 사이에서 배회하며 분주했으나 결국은 한 고제에게로 귀순했다.
그는 늘 기이한 계책을 내어 복잡한 분규를 해결했고, 국가의 환난을 제거했다.

여후 때에 이르러서는 국사(國事)에 변고가 많았으나, 진평은 끝내 스스로 화를 면탈했고,

나라의 종묘사직을 안정시켜서 영광스러운 명성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되었다.
이 어찌 시작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지혜와 책략이 없었다면 그 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