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0. 楚元王世家

第 二十. 楚元王世家(초원왕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2. 18:41

          史記 世家

 

 

  第 二十.  楚元王世家(초원왕세가)

 

 

楚元王劉交者, 高祖之同母少弟也, 字游.  高祖兄弟四人, 長兄伯, 伯蚤卒.

始高祖微時, 嘗辟事, 時時與賓客過巨嫂食.  嫂厭叔,叔與客來,嫂詳為羹盡,櫟釜,賓客以故去.

已而視釜中尚有羹,高祖由此怨其嫂.  及高祖為帝,封昆弟,而伯子獨不得封.

太上皇以為言,高祖曰:「某非忘封之也,為其母不長者耳.」

於是乃封其子信為羹頡侯.  而王次兄仲於代.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는 한고조(漢高祖)의 친동생으로 자는 유(游)이다.
한고조의 형제는 네 명이었는데, 맏형은 유백(劉伯)으로 요절했다.

당초 고조가 미천한 신분일 때, 일이 잘못되어 피해 살아야 했기에 때때로 손님들과 큰형수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형수는 고조를 싫어해, 그가 손님들과 함께 오면 거짓으로 밥과 국을 다 먹은 체했으며, 주걱으로 솥을 긁었고,

그것 때문에 손님들은 중간에 돌아가곤 했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 그는 솥에 아직 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고,

이 일로 인해서 그는 형수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황제가 되었고, 형제들을 제후로 삼아 봉지를 주었는데, 유독 큰형의 아들에게만 그러지 않았다.
태상황(太上皇)이 그 일을 말하자, 고조가 말하기를 : “제가 조카를 봉하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어미가 후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곧 그녀의 아들인 조카 신(信)을 갱힐후(羹頡侯)로 봉했다.

그리고 둘째형 유중(劉仲)을 대(代)의 왕으로 봉했다.]

 

高祖六年,已禽楚王韓信於陳,乃以弟交為楚王,都彭城.  即位二十三年卒,子夷王郢立.

夷王四年卒,子王戊立.  王戊立二十年,冬,坐為薄太后服私姦,削東海郡.

春,戊與吳王合謀反,其相張尚、太傅趙夷吾諫,不聽.

戊則殺尚、夷吾,起兵與吳西攻梁,破棘壁.  至昌邑南,與漢將周亞夫戰.

漢絕吳楚糧道,士卒饑,吳王走,楚王戊自殺,軍遂降漢.

漢已平吳楚,孝景帝欲以德侯子續吳,以元王子禮續楚.

[한고조 6년(기원전 201년), 초나라 왕 한신을 진현(陳縣)에서 체포했고, 동생 유교를 초나라 왕으로 삼았으며,

팽성(彭城)에 도읍하게 했다.  유교는 재위 23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이왕(夷王) 유영(劉郢)이 왕위를 계승했다.

유영은 재위 4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유무(劉戊)가 왕위를 계승했다. 초나라 왕 유무가 왕이 되고 

20년이 흐른 겨울, 유무는 박태후(薄太后)의 복상(服喪) 때에, 사간(私奸)의 죄로 인해 동해군(東海郡)을 빼앗겼다.

이듬해 봄, 유무는 오왕(吳王) 유비(劉濞)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재상인 장상(張尙)과 태부인 조이오(趙夷吾)가 간언했으나 듣지 않은 것은 물론 즉시 장상과 조이오를 죽였다.
오왕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양(梁)을 침공해 극벽(棘璧)을 격파하고, 창읍(昌邑)의 남쪽에 이르러,

한(漢)나라의 장수 주아부(周亞夫)와 접전했다. 한나라는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군량보급로를 차단했고,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는 기아에 허덕였다. 

오왕은 도망했고, 초왕은 자결했으며, 결국 군사들은 한나라에 투항했다.

오와 초의 반란이 평정된 후, 한경제(漢景帝)는 덕후(德侯) 유광(劉廣)의 아들로 하여금 오왕을 잇게 했고,
원왕(元王) 유교의 아들 유찰(劉札)로 하여금 초왕을 잇게 하고자 하였다.]

 

竇太后曰:「吳王,老人也,宜為宗室順善.  今乃首率七國,紛亂天下,柰何續其後!」

不許吳,許立楚後.  是時禮為漢宗正.  乃拜禮為楚王,奉元王宗廟,是為楚文王.

文王立三年卒,子安王道立.  安王二十二年卒,子襄王注立.  襄王立十四年卒,子王純代立.

王純立,地節二年,中人上書告楚王謀反,王自殺,國除,入漢為彭城郡.

[두태후(竇太后)는 말하기를 : “ 오왕 그 늙은이는 마땅히 종실을 위해 충성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오히려 7국(七國)의 두목이 되어 천하를 어지럽혔다. 무엇 때문에 그의 후사를 잇게 하는가!”라고 하면서,

오왕의 후사는 윤허하지 않았고, 다만 초왕의 후사만을 윤허했다. 이 당시 유찰은 한 조정의 종정(宗正)이었는데,

그는 곧 초왕으로 봉해졌고 원왕의 종묘에 제사를 지냈으니, 그가 바로 초문왕(楚文王)이다.

문왕은 재위 3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안왕(安王) 유도(劉道)가 왕위를 계승했다.
안왕은 재위 22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양왕(襄王) 유주(劉注)가 계승했다.
양왕은 재위 14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유순(劉純)이 계승했다.
유순이 왕위에 오른 후인 지절(地節) 2년, 어떤 환관이 초왕 유순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해 초왕은 자결했고,
초나라는 없어졌으며, 봉지는 한나라 조정으로 반환되어서 팽성군(彭城郡)으로 개편되었다.]

 

趙王劉遂者,其父高祖中子,名友,謚曰「幽」.  幽王以憂死,故為「幽」.

高后王呂祿於趙,一歲而高后崩.  大臣誅諸呂呂祿等,乃立幽王子遂為趙王.

孝文帝即位二年,立遂弟辟彊,取趙之河閒郡為河閒王, (以)[是]為文王.

立十三年卒,子哀王福立.  一年卒,無子,絕後,國除,入于漢.

[조왕(趙王) 유수(劉遂)의 아버지는 한 고조의 가운데 아들로, 이름은 우(友), 시호는 유(幽)이다. 
유왕은 근심으로 말미암아 죽었기 때문에 시호를 유(幽)라고 한 것이다. 

고후(高后)가 여록(呂祿)을 조왕으로 봉했고, 그 1년 후에 죽었다. 

한 조정의 대신들은 여록 등 여씨 일족을 죽이고, 유왕의 아들인 유수를 조왕으로 삼았다.

효문제(孝文帝)는 즉위한 이듬해 유수의 동생인 벽강(辟疆)을 왕으로 봉하고

조나라의 하간군(河間郡)을 떼어내어 그를 하간왕으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문왕(文王)이다.

문왕은 재위 13년 만에 죽었고, 아들인 애왕(哀王) 유복(劉福)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1년 만에 죽었는데 자식이 없어 후대가 끊기었다. 나라는 없어졌고, 봉지는 한 조정으로 반환되었다.]

 

遂既王趙二十六年, 孝景帝時坐晁錯以適削趙王常山之郡.  吳楚反, 趙王遂與合謀起兵.

其相建德、內史王悍諫, 不聽.  遂燒殺建德、王悍,發兵屯其西界,欲待吳與俱西.

北使匈奴,與連和攻漢.  漢使曲周侯酈寄擊之.

趙王遂還,城守邯鄲,相距七月.  吳楚敗於梁,不能西.  匈奴聞之,亦止,不肯入漢邊.

欒布自破齊還,乃并兵引水灌趙城.  趙城壞,趙王自殺,邯鄲遂降.  趙幽王絕後.

[유수가 조왕으로 재위한 지 26년이 지난 경제 때에, 조조(晁錯)에 의해서 조왕의 상산군 봉지가 줄어들게 되었다.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왕 유수는 이때문에 곧 그들과 연합해 군사를 일으키기로 모의했다.

그는 그의 재상인 건덕(建德)과 내사(內史)인 왕한(王悍)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고 건덕과 왕한을 태워 죽였고,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의 서쪽 경계에 주둔시켰는데, 이것은 오의 군사를 기다렸다가 함께 서쪽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북으로 흉노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들과 함께 한 조정을 공격할 생각도 했다.

한나라 조정은 곡주(曲周)의 제후인 역기(酈寄)로 하여금 유수를 치게 했다.
이에 유수는 퇴각해 한단(邯鄲)을 지켰고, 서로 버티기를 7개월을 끌었다.

오와 초의 군대는 양(梁) 지역에서 패했고, 유수는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흉노는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정지시켰으며 한나라의 경계로 들어오지 못했다.
난포(欒布)가 제(齊)나라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돌아오다가, 한나라의 군사와 연합해,

물을 끌어다 조(趙)나라의 도성으로 흘러들어가게 했다. 조나라의 도성은 무너졌고, 왕은 자결했으며,

마침내 한단은 투항했으니, 이로써 유왕은 후대가 끊기었다.]


太史公曰:國之將興,必有禎祥,君子用而小人退國.  之將亡,賢人隱,亂臣貴.

使楚王戊毋刑申公,遵其言,趙任防與先生,豈有篡殺之謀,為天下僇哉?

賢人乎,賢人乎!非質有其內,惡能用之哉?甚矣,「安危在出令,存亡在所任」,誠哉是言也!

[태사공은 말한다.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고, 군자는 쓰이고 소인은 배격당한다.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어진 사람은 숨고 난신(亂臣)들이 귀한 몸이 된다.
만약 초왕 유무(劉戊)가 신공(申公)을 벌하지 않고 그의 말을 따랐더라면,
또 조나라가 방여(防與) 선생을 등용했더라면 어찌 찬탈의 음모가 있었을 것이며 천하의 죄인이 되었겠는가?
어진 사람이여! 어진 사람이여! 그 안에 자질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능히 그를 등용하느냐는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

'나라의 안위는 명령을 내리는 데에 있고, 나라의 존망은 신하의 등용에 있다’라는 말은 진실로 이 말인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