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 齊太公世家

第 二. 齊太公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8. 17:12

 

              史記 世家

 

 

     第 二. 齊太公世家(제태공세가)

 

 

太公望呂尚者,東海上人. 其先祖嘗為四嶽,佐禹平水土甚有功.

虞夏之際封於呂, 或封於申, 姓姜氏.  夏商之時,申、呂或封枝庶子孫, 或為庶人, 尚其後苗裔也.

本姓姜氏,從其封姓,故曰呂尚. 呂尚蓋嘗窮困,年老矣,以漁釣奸周西伯.

西伯將出獵,卜之,曰「所獲非龍非彨非虎非羆;所獲霸王之輔」.

於是周西伯獵,果遇太公於渭之陽,與語大說,
曰:「自吾先君太公曰『當有聖人適周,周以興』. 子真是邪?吾太公望子久矣.」

故號之曰「太公望」,載與俱歸,立為師.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동해(東海) 근처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4악(四嶽)이 되어 우(禹)임금이 물과 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들은 우(虞)와 하(夏) 시대에 여(呂) 또는 신(申) 땅에 봉해졌으며 성(姓)은 강씨(姜氏)였다.
하(夏)와 상(商) 왕조 때에는 그 방계의 자손이 신과 여 땅에 봉해지기도 했고, 또 평민이 되기도 했다.
상(尙)은 그 후예로서 본래의 성은 강씨였으나 그 봉지(封地)를 성으로 해 여상(呂尙)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상은 곤궁하고 연로했던 듯한데, 낚시질로 주서백(周西伯)에게 접근하려고 했다.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려고 하다가 점을 쳤는데, 점괘에 나오기를 “잡히는 것은 용도 이무기[彲]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羆]도 아니다. 잡을 것은 패왕의 업을 보필할 수 있는 신하일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리하여 주서백이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渭水) 북쪽에서 여상을 만났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며
“우리 선대(先代)의 태공(太公) 때부터 이르기를 ‘장차 성인(聖人)이 주(周)나라에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로 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진정 그분이 아닙니까? 우리 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며 수레에 함께 타고 돌아와서 사(師)가 되게 했다.]

 

或曰,太公博聞,嘗事紂. 紂無道,去之. 游說諸侯,無所遇,而卒西歸周西伯.

或曰,呂尚處士,隱海濱. 周西伯拘羑里,散宜生、閎夭素知而招呂尚.
呂尚亦曰「吾聞西伯賢,又善養老,盍往焉」. 三人者為西伯求美女奇物,獻之於紂, 以贖西伯.

西伯得以出,反國. 言呂尚所以事周雖異,然要之為文武師.

[어떤 이의 말로는 ‘태공은 박학다식해 상의 주왕(商紂王)을 섬겼으나 주왕이 포악무도하자 떠나버렸으며,
제후들에게 유세했지만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가 마침내 서쪽으로 가서 주 서백에게 의지하게 된 것’

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 여상은 초야에 묻혀 사는 처사(處士)로서 바닷가에 숨어 지냈는데,

주나라 서백이 유리(羑里)에 구금되자 평소에 여상을 알고 있던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그를 불러냈다.
여상도 “내가 듣기에 서백은 현명하고 또 어른을 잘 모신다고 하니, 어찌 그에게 가지 않겠는가?”라 했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은 서백을 위해 미녀와 보물을 구해서 주왕에게 서백의 죗값으로 바쳤다.

이리하여 서백은 구금에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설에 따라 여상이 주나라를 섬기게 된 경위를 달리 말하지만,

그 요점은 다 같이 그가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師)가 되었다는 것이다.]

 

周西伯昌之脫羑里歸,與呂尚陰謀修德以傾商政,其事多兵權與奇計,

故後世之言兵及周之陰權皆宗太公為本謀.

周西伯政平,及斷虞芮之訟,而詩人稱西伯受命曰文王. 伐崇、密須、犬夷,大作豐邑.

天下三分,其二歸周者,太公之謀計居多. 文王崩, 武王即位.

[주 서백 희창(姬昌)은 유리에서 벗어나 돌아오자 여상과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덕행을 닦아

상(商)나라의 정권을 넘어뜨렸는데, 그 일들은 주로 용병술과 기묘한 계책을 펴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후세에 용병술과 주나라의 권모(權謀)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太公)을 그 주모자로 존숭했다.

주 서백이 공평한 정치를 하며,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의 분쟁을 해결하자,

시인들이 서백을 ‘천명을 받은 문왕(文王)’이라고 칭송했다.
문왕이 숭(崇), 밀수(密須), 견이(犬夷) 등의 나라들을 정벌하고, 풍읍(豐邑)을 크게 건설하고,
천하의 3분의 2를 주나라에 귀순하게 한 것들은 대부분이 태공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문왕이 죽고 나자 무왕이 즉위했다.]

九年, 欲修文王業, 東伐以觀諸侯集否.  師行, 師尚父左杖黃鉞, 右把白旄以誓,
曰:「蒼兕蒼兕,總爾眾庶,與爾舟楫,後至者斬!」遂至盟津。諸侯不期而會者八百諸侯.

諸侯皆曰:「紂可伐也.」武王曰:「未可.」還師,與太公作此太誓.

居二年, 紂殺王子比干, 囚箕子. 武王將伐紂, 卜龜兆, 不吉, 風雨暴至.

群公盡懼, 唯太公彊之勸武王, 武王於是遂行.

[그 후 9년, 무왕은 문왕의 유업을 잇고자 해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서 제후들이 자신에게 모이는가의

여부를 시험해 보았다. 군대가 출동하기에 앞서 스승 상보(師尙父)가 왼손에는 황금 장식의 도끼를,

오른손에는 모우(旄牛) 꼬리 장식을 한 흰색의 군기를 들고 출정선서를 했다.
"외뿔소여, 외뿔소여.  너희 무리를 모두 모으라!  너희에게 배의 노를 맡기건대 늦게 닿은 자는 벨 것이다!"
이리하여 정벌군이 맹진(盟津)에 닿았을 때, 미리 기약하지 않고도 모여든 제후가 8백이나 되었다.
모든 제후들이 말하기를 : “주왕(紂王)을 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무왕은 말하기를 : “아직 안 된다”라고 하자, 군대를 돌려 돌아와서, 태공과 함께 이것을 「태서(太誓)」로 썼다.

2년 뒤, 주왕(紂王)이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구금했다.

무왕이 주왕을 치기에 앞서 거북점을 쳤는데 점괘가 불길했고 폭풍우가 내렸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오직 태공만은 무왕에게 강력히 권하자, 무왕은 마침내 출정했다.]

十一年正月甲子,誓於牧野,伐商紂.  紂師敗績.  紂反走,登鹿臺,遂追斬紂.
明日,武王立于社,群公奉明水,衛康叔封布采席,師尚父牽牲,史佚策祝,以告神討紂之罪.
散鹿臺之錢,發鉅橋之粟,以振貧民.  封比干墓,釋箕子囚.  遷九鼎,修周政,與天下更始.

師尚父謀居多.  於是武王已平商而王天下,封師尚父於齊營丘.

[무왕 11년 정월 갑자일, 목야(牧野)에서 출정선서를 하고 상(商)의 주왕을 치니, 주왕의 군대가 무너졌다.
주왕이 도망쳐 녹대(鹿臺)로 올라가자, 무왕은 끝내 추격해 주왕을 베었다.

다음날, 무왕은 토지신의 제단 앞에 서고, 여러 대신들은 맑은 물을 받들고,

위 강숙(衛康叔) 희봉(姬封)은 채색의 자리를 펴고, 스승 상보는 제물의 짐승을 끌고,

사관(史官) 일(佚)은 죽간(竹簡)에 쓴 축문을 읽음으로써 신(神)에게 주왕의 죄를 징벌한 것을 아뢰었다.

그리고 녹대의 돈과 거교의 식량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고, 비간의 묘를 높이 쌓고 기자의 구금을 풀었다.

또한 구정(九鼎)을 주나라의 도읍으로 옮겼고, 주나라의 정치를 정비해 온 천하를 일신시켰다.

이러한 여러 일들이 대부분 스승 상보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무왕은 상나라를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으며 스승 상보를 제(齊)의 영구(營丘)에 봉했다.]

  

東就國,道宿行遲. 逆旅之人曰:「吾聞時難得而易失. 客寢甚安,殆非就國者也.」

太公聞之,夜衣而行,犁明至國.  萊侯來伐,與之爭營丘. 營丘邊萊.

萊人,夷也,會紂之亂而周初定,未能集遠方,是以與太公爭國.

[스승 상보가 봉국(封國)에 부임할 때에 도중에 묵으면서 가는 것이 매우 느렸다.

여관의 주인이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 “내가 듣기에 시기를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했습니다.

손님은 잠자는 것이 매우 편안하니 마치 봉국에 부임하는 이가 아닌 것 같군요.”라고 하였다.
태공은 이 말을 듣고서 야밤에 입는 옷을 입은 채로 행진해 여명에 봉국에 닿았다.

이때 내후(萊侯)가 침공해 와서 태공과 영구(營丘)를 놓고 다투었다. 영구는 내(萊)나라 가까이에 있었고,

내(萊)나라 사람들은 이족(夷族)이었는데, 상나라의 주왕(紂王)의 정치가 혼란스러웠던 데다

주(周) 왕조가 이제 막 성립해 먼 나라들까지는 안정시키지 못하는 것을 틈타서 태공과 영토를 다툰 것이었다.]

 

太公至國,修政,因其俗,簡其禮,通商工之業,便魚鹽之利,而人民多歸齊,齊為大國.
及周成王少時,管蔡作亂,淮夷畔周,乃使召康公命太公曰:

「東至海, 西至河, 南至穆陵, 北至無棣, 五侯九伯, 實得征之.」齊由此得征伐, 為大國. 都營丘.

[태공은 봉국에 도착하자 정치를 가다듬었고, 그곳의 풍속을 따랐으며, 의례를 간소하게 했으며,

상공업(商工業)을 장려했고, 어업생산을 편리하게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제(齊)나라에 귀순해 제나라는 큰 나라가 되었다.

주 성왕(周成王)이 아직 어렸던 때에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 왕실에 반역하자,

주 왕실은 소강공(召康公)을 파견해 태공에게 명하기를 : “동쪽으로는 바다에, 서쪽으로는 황하에,

남쪽으로는 목릉(穆陵)에,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땅에서,

다섯 등급의 제후와 9주(九州)의 백(伯) 등의 잘못을 너희 제나라가 모두 징벌해도 좋다.”라고 하였다. 

제나라는 이리하여 징벌의 권한을 가지게 되어 큰 나라가 되었고 영구에 도읍을 두었다.]

 

蓋太公之卒百有餘年,子丁公呂伋立. 丁公卒,子乙公得立. 乙公卒,子癸公慈母立.

癸公卒,子哀公不辰立. 哀公時,紀侯譖之周,周烹哀公而立其弟靜,是為胡公.

胡公徙都薄泵,而當周夷王之時. 哀公之同母少弟山怨胡公,

乃與其黨率營丘人襲攻殺胡公而自立,是為獻公. 獻公元年,盡逐胡公子,因徙薄泵都,治臨菑.

[태공이 대략 1백여 세에 죽자, 아들 정공(丁公) 여급(呂伋)이 즉위했고, 정공이 죽자,

그 아들 을공(乙公) 득(得)이 즉위했고, 을공이 죽자 그 아들 계공(癸公) 자모(慈母)가 즉위했으며,

계공이 죽자 그 아들 애공(哀公) 불신(不辰)이 즉위했다. 애공 때에 기후(紀侯)가 주(周)의 왕에게 애공을 참소했다.

왕은 애공에게 팽(烹)의 형벌을 내리고 그 동생 정(靜)을 세웠는데, 그가 호공(胡公)이다.
호공은 도읍을 박빙(薄泵)으로 옮겼는데, 이때는 주 이왕(周夷王)의 시기였다.
애공과 같은 어머니 소생의 막내 동생인 강산(姜山)이 호공을 원망해, 그 무리와 함께 영구의 사람들을 이끌고

호공을 습격해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는데 그가 헌공(獻公)이다.

헌공은 즉위한 그해에 호공의 아들들을 모두 쫓아냈고 뒤이어 수도를 박빙(薄泵)에서 임치(臨菑)로 옮겼다.]

 

九年,獻公卒,子武公壽立.

武公九年,周厲王出奔,居彘.

十年,王室亂,大臣行政,號曰「共和」.

二十四年,周宣王初立.

二十六年,武公卒,子厲公無忌立. 厲公暴虐,故胡公子復入齊,齊人欲立之,乃與攻殺厲公.

胡公子亦戰死. 齊人乃立厲公子赤為君,是為文公,而誅殺厲公者七十人.

文公十二年卒,子成公脫立.  成公九年卒,子莊公購立.

莊公二十四年,犬戎殺幽王,周東徙雒.  秦始列為諸侯.

五十六年,晉弒其君昭侯.

六十四年,莊公卒,子釐公祿甫立.

[9년, 헌공이 죽고 아들 무공(武公) 수(壽)가 즉위했다.

무공 9년, 주 여왕(周厲王)이 도망쳐 나와 체(彘) 땅에 머물렀다.
10년, 주 왕실이 혼란해져서 대신들이 정권을 행사하면서 ‘공화(共和)’라고 이름했다.

20년, 비로소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무공이 즉위한 지 26년 만에 죽고 아들 여공(厲公) 무기(無忌)가 즉위했는데, 여공은 포악한 정치를 했다.
죽은 호공의 아들이 다시 제나라의 수도에 들어오자 제나라 사람들은 그를 옹립하고 그와 함께 여공을 쳐서 

죽였는데, 호공의 아들도 이 싸움에서 죽었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은 여공의 아들 적(赤)을 임금으로 세웠는데

그가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여공을 죽인 사람 70명을 사형에 처했다.

문공이 즉위한 지 12년 만에 죽자, 아들 성공(成公) 탈(脫)이 즉위했다.

성공이 즉위한 지 9년 만에 죽자, 그 아들 장공(莊公) 구(購)가 즉위했다.
장공 24년, 견융(犬戎)이 주 유왕(周幽王)을 죽이자 주 왕실은 동쪽으로 낙읍(雒邑)에 천도했으며,

진(秦)이 이때 처음으로 제후의 열에 끼었다.
56년, 진(晉)나라 사람들이 임금 소후(昭侯)를 시해했다.
64년, 장공이 죽자 아들 희공(釐公) 녹보(祿甫)가 즉위했다.]

 

釐公九年,魯隱公初立.

十九年,魯桓公弒其兄隱公而自立為君.

二十五年,北戎伐齊. 鄭使太子忽來救齊,齊欲妻之. 忽曰:「鄭小齊大,非我敵.」遂辭之.

三十二年,釐公同母弟夷仲年死. 其子曰公孫無知,釐公愛之,令其秩服奉養比太子.

三十三年,釐公卒,太子諸兒立,是為襄公.

[희공 9년, 비로소 노은공(魯隱公)이 즉위했다.

19년, 노환공(魯桓公)이 형 은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해 임금이 되었다.
25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정(鄭)나라가 태자 홀(忽)을 보내와서 제나라를 도와주었다.
제나라 왕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으나, 홀이 말하기를 :  “정나라는 작고 제나라는 크니,

내게 알맞은 짝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사양했다.
32년, 희공의 같은 어머니 소생의 동생인 이중년(夷仲年)이 죽었다.
희공이 이중년의 아들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사랑해 그 녹봉과 의복 등의 봉양을 태자와 동등하게 하게 명령했다.
33년, 희공이 죽자 태자 제아(諸兒)가 즉위했는데, 그가 양공(襄公)이다.] 

 

襄公元年,始為太子時,嘗與無知鬬,及立,絀無知秩服,無知怨.

四年,魯桓公與夫人如齊. 齊襄公故嘗私通魯夫人. 魯夫人者,襄公女弟也,

自釐公時嫁為魯桓公婦,及桓公來而襄公復通焉.  魯桓公知之,怒夫人,夫人以告齊襄公.

齊襄公與魯君飲,醉之, 使力士彭生抱上魯君車,因拉殺魯桓公,桓公下車則死矣.

魯人以為讓,而齊襄公殺彭生以謝魯.

八年,伐紀,紀遷去其邑.

[양공(襄公) 원년, 양공은 일찍이 태자였을 때 무지(無知)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즉위하자 곧 무지의 녹봉과 의복 등의 봉양을 없애버렸다. 무지는 이에 원한을 품었다.
4년, 노 환공(魯桓公)이 그 부인과 함께 제나라에 왔다. 제 양공은 전에 노부인(魯夫人)과 사통한 적이 있었다.
노부인은 양공의 여동생으로, 희공 때에 노 환공에게 시집가서 그의 부인이 되었는데, 환공과 함께 제나라에 오자

양공이 다시 그녀와 사통했다. 노 환공이 그것을 알고 부인에게 화를 냈고 부인은 그것을 제 양공에게 알렸다.

제 양공은 노 환공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를 몹시 취하게 만든 다음 역사(力士) 팽생(彭生)을 시켜 환공을 안아 

수레에 실으면서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이도록 했다. 노 환공은 수레에서 내려졌을 때 이미 죽어 있었다. 

노나라에서 이 일을 비난하자 제 양공은 팽생을 죽여 노나라에 사과했다.
8년에 기(紀)나라를 치자 기 나라가 도읍을 옮겼다.] 

 

十二年, 初, 襄公使連稱、管至父戍葵丘, 瓜時而往, 及瓜而代. 往戍一歲, 卒瓜時而公弗為發代.

或為請代, 公弗許. 故此二人怒,因公孫無知謀作亂.

連稱有從妹在公宮,無寵,使之閒襄公,曰「事成以女為無知夫人」.
冬十二月,襄公游姑棼,遂獵沛丘. 見彘,從者曰「彭生」. 公怒,射之,彘人立而啼.

公懼,墜車傷足,失屨.  反而鞭主屨者茀三百。茀出宮。而無知、連稱、管至父等聞公傷,

乃遂率其眾襲宮.  逢主屨茀,茀曰:「且無入驚宮,驚宮未易入也.」

無知弗信,茀示之創,乃信之.  待宮外,令茀先入.  茀先入,即匿襄公戶閒.

良久,無知等恐,遂入宮.  茀反與宮中及公之幸臣攻無知等,不勝,皆死.
無知入宮,求公不得.  或見人足於戶閒,發視,乃襄公,遂弒之,而無知自立為齊君.

[12년, 당초에 양공은 대부(大夫) 연칭(連稱), 관지보(管至父)를 규구(葵丘)에 파견해 국경 수비를 하게 했다.
그 기간은 오이가 날 때에 갔다가 오이가 날 때에 교대하는 것이었었다.

그들이 수비를 간지 1년이 되어 오이가 날 때가 지났는데도 양공은 교대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들을 위해서 교대시켜줄 것을 청했으나 양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에 분노하여 무지를 통해 반란을 도모했다.
연칭에게는 궁녀로 있으면서 총애를 받지 못한 사촌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연칭은 그녀를 시켜 양공의 약점을 살피게 하며 말했다. “일이 성공하면 너는 무지의 부인이 된다.”
겨울이 되어 12월에 양공은 고분(姑棼)에 놀러 나갔다가 내쳐 패구(沛丘)에까지 사냥을 나갔다.

양공이 멧돼지를 발견했는데 종자(從者)가 말하기를 : “팽생입니다.”라고 하였다.
양공이 노하여 멧돼지를 쏘아 맞추니, 멧돼지가 사람처럼 서서 울부짖었다. 

양공이 이에 놀라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어버렸다. 

양공은 궁으로 돌아온 뒤 신발을 책임지는 역인 불(茀)에게 3백대의 채찍질을 했다.

양공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무지, 연칭, 관지보 등이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궁을 습격하려는 중에 

왕궁에서 나오던 불과 마주쳤다. 불이 말하기를 : “궁을 들이쳐 놀라게 하는 것을 잠시 멈추시지요. 

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가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무지가 믿지 않자 불이 양공에게 

맞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제에서야 그 말을 믿은 그들은 궁 밖에서 기다리고 불을 먼저 들여보냈다.

불은 먼저 들어가 즉시 양공을 문 틈에 숨겼다. 한참이 지나자 무지 등은 두려워 견디지 못하고 궁 안으로 들이쳤다.
불은 궁중의 호위병 및 양공의 총신(寵臣)들과 함께 무지 등에게 반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무지가 궁에 들어가 양공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아내지 못하던 중, 누군가가 문틈에 발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을 젖혀보니 바로 양공이었다. 무지는 곧 그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해 제의 임금이 되었다.] 

 

桓公元年春,齊君無知游於雍林. 雍林人嘗有怨無知,及其往游,雍林人襲殺無知,
告齊大夫曰:「無知弒襄公自立,臣謹行誅. 唯大夫更立公子之當立者,唯命是聽.」

初, 襄公之醉殺魯桓公, 通其夫人, 殺誅數不當, 淫於婦人, 數欺大臣, 群弟恐禍及, 故次弟糾奔魯.
其母魯女也. 管仲、召忽傅之. 次弟小白奔莒,鮑叔傅之. 小白母,衛女也,有寵於釐公.

小白自少好善大夫高傒. 及雍林人殺無知,議立君,高、國先陰召小白於莒.

魯聞無知死,亦發兵送公子糾,而使管仲別將兵遮莒道,射中小白帶鉤.

小白詳死,管仲使人馳報魯. 魯送糾者行益遲,六日至齊,則小白已入,高傒立之,是為桓公.

桓公之中鉤,詳死以誤管仲,已而載溫車中馳行,亦有高、國內應,故得先入立,發兵距魯.

[환공(桓公) 원년 봄, 제의 임금 무지가 옹림(雍林)에 놀러 갔다. 옹림의 사람 중에 일찍이 무지에게 원한을 품었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가 놀러 온 것을 틈타 습격해 죽인 다음 제의 대부에게 말했다. “무지가 양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기에 저희가 삼가 처단했습니다. 대부께서 새로이 공자(公子)들 가운데서 합당한 이를 세우시면,

저희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당초에 양공이 노 환공을 술에 취하게 해 죽이고 그 부인과 사통했으며,

부당한 처벌로 죽이는 일이 잦았고, 여색에 빠졌으며, 여러 차례 대신들을 속이는 등의 행위를 하자,

여러 동생들은 그 재앙이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둘째 왕자인 규(糾)는 노(魯)나라로 도망쳤는데,

그 어머니는 노후(魯侯)의 딸이었고,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 다음 동생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도망쳤는데, 포숙(鮑叔)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소백의 어머니는 위공(衛公)의 딸로서 희공(釐公)의 총애를 받았다.
소백은 어려서부터 대부 고혜(高傒)를 좋아했는데, 옹림의 사람들이 무지를 죽이고 임금 세우는 일을 의논하게 되자

고혜와 국의중(國懿仲)은 먼저 거나라에 있는 소백을 몰래 불러 들였다. 노나라도 무지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풀어 공자 규를 보내는 한편 관중에게 따로 병사를 이끌고 가서 거나라로 통하는 길을 막게 했다.

관중이 화살로 소백을 쏘아 맞추었다.

소백이 허리띠의 쇠 부분을 맞고서 죽은 시늉을 했는데, 관중은 사람을 시켜 말을 달려가 노나라에 보고하게 했다.

노나라는 공자 규를 호송하는 행군을 좀 늦추어 6일 만에 제나라에 닿았다.

그런데 이때는 공자 소백이 이미 들어와 고혜가 그를 임금으로 세운 뒤였으니, 그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환공은 허리띠쇠를 맞고서 죽은 시늉을 해 관중이 오판하게 한 다음 장막을 친 마차를 타고 내달려 갔으며,

또 안에서는 고혜와 국의중의 호응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먼저 들어가 즉위할 수 있었고 또 군대를 풀어 노나라의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秋,與魯戰于乾時,魯兵敗走,齊兵掩絕魯歸道.
齊遺魯書曰:「子糾兄弟, 弗忍誅, 請魯自殺之. 召忽、管仲讎也, 請得而甘心醢之. 不然, 將圍魯.」
魯人患之,遂殺子糾于笙瀆. 召忽自殺,管仲請囚. 桓公之立,發兵攻魯,心欲殺管仲.

鮑叔牙曰:「臣幸得從君,君竟以立. 君之尊,臣無以增君. 君將治齊,即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霸王,非管夷吾不可. 夷吾所居國國重,不可失也.」於是桓公從之.

乃詳為召管仲欲甘心,實欲用之. 管仲知之,故請往.

鮑叔牙迎受管仲,及堂阜而脫桎梏,齋祓而見桓公. 桓公厚禮以為大夫,任政.

桓公既得管仲,與鮑叔、隰朋、高傒修齊國政,連五家之兵,設輕重魚鹽之利,以贍貧窮,

祿賢能,齊人皆說.

[그해 가을, 노나라와 간시(乾時)에서 싸웠는데, 노나라의 군대가 패주하자 제나라는 노나라 군대의 귀로를 

차단했다. 제환공은 노나라에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 “공자 규는 형제라 차마 죽이지 못하겠으니 

노후(魯侯) 스스로 그를 죽이기 바란다. 소홀과 관중은 나와는 원수지간이니 내 직접 그들을 잡아 죽여 

젓갈을 담아 기분을 풀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노나라 수도를 포위하겠다.”라고 하였다.

노나라 사람들은 이를 걱정해 곧 공자 규를 생독(笙瀆)에서 죽였다. 소홀은 자살했고 관중은 구금되기를 청했다. 

환공이 즉위해 곧 군대를 보내 노나라를 칠 때에는 관중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자 포숙아가 말하기를 : “저는 다행히도 임금을 섬기게 되었는데 임금께서 마침내 즉위하셨습니다.

임금께서는 이미 높이 되시어 저로서는 더 높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임금께서 장차 제나라를 다스리시려고 한다면야 고혜와 저 포숙아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금께서 이제 패왕(覇王)이 되려고 하신다면 관이오(管夷吾) 없이는 안 됩니다.

관이오가 사는 나라는 그 위세가 커지게 될 것이니, 그를 놓치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환공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관중을 잡아 죽여 기분을 풀려는 것으로 가장했으나,

실제로는 그를 등용하려는 것이었다.  관중도 그것을 알고 일부러 구금되어 돌아가기를 청했던 것이다.

포숙아는 관중을 영접해 당부(堂阜)에 이른 다음에 관중의 족쇄와 수갑을 풀어주고,

목욕재계해 복을 빈 다음 환공을 뵙게 했다. 환공은 관중을 두터이 예우하며 대부(大夫)로 삼아 정치를 맡겼다.
환공은 관중을 얻고 나서 포숙, 습붕(隰朋), 고혜 등과 함께 제나라의 정치를 가다듬었다.

다섯 가구를 기초로 하는 군대조직을 시행하고, 화폐 주조와 어로(漁撈), 제염(製鹽) 등의 이용후생의 조치를 하며,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고 능력 있는 현사(賢士)들을 등용하고 우대하니, 제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二年,伐滅郯,郯子奔莒.  初,桓公亡時,過郯,郯無禮,故伐之.

五年,伐魯,魯將師敗.  魯莊公請獻遂邑以平,桓公許,與魯會柯而盟.

魯將盟,曹沬以匕首劫桓公於壇上,曰:「反魯之侵地!」桓公許之.

已而曹沬去匕首,北面就臣位. 桓公後悔,欲無與魯地而殺曹沬.

管仲曰:「夫劫許之而倍信殺之,愈一小快耳,而棄信於諸侯,失天下之援,不可.」
於是遂與曹沬三敗所亡地於魯. 諸侯聞之,皆信齊而欲附焉.

七年,諸侯會桓公於甄,而桓公於是始霸焉.

[환공 2년, 담(郯)나라를 쳐서 멸망시키니 담의 임금은 거(莒)나라로 도망쳤다.
예전에 환공이 도망치던 때에 담나라를 지나갔는데 담나라가 무례히 굴었기 때문에 그들을 친 것이었다.
5년, 노(魯)나라를 쳐서 노나라 장수의 군대를 깨뜨렸다. 노 장공(魯莊公)이 수(遂)를 바쳐 화평을 청하자
환공이 이를 허락해 가(柯)에서 노후(魯侯)와 회맹(會盟)하게 되었다. 노후가 맹세하려고 할 때

조말(曹沬)이 단(壇) 위에서 비수로 환공을 위협하며 말하기를 : “빼앗은 노나라 땅을 반환하시오!”라고 하자, 

환공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조말은 비수를 치우고 북쪽을 바라보며 신하의 자리에 섰다.
환공은 후회가 되어 노나라의 땅을 반환하지 않고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관중이 말했다. “협박당해 승낙했다가 약속을 저버리고 그를 죽인다면, 작은 기분풀이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제후들에게 신의를 저버렸음을 보이게 되고 그러면 천하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니,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곧 조말이 세 번의 싸움에서 잃은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제나라를 믿고 의지하려고 했다.
7년, 제후들이 견(甄)에서 환공을 회견했고 이리하여 환공이 처음으로 패권을 잡았다. 

 

十四年,陳厲公子完,號敬仲,來奔齊. 齊桓公欲以為卿,讓;於是以為工正. 田成子常之祖也.

二十三年, 山戎伐燕, 燕告急於齊. 齊桓公救燕,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  燕莊公遂送桓公入齊境.
桓公曰:「非天子,諸侯相送不出境,吾不可以無禮於燕.」

於是分溝割燕君所至與燕,命燕君復修召公之政,納貢于周,如成康之時.  諸侯聞之,皆從齊.

二十七年,魯湣公母曰哀姜,桓公女弟也.  哀姜淫於魯公子慶父,

慶父弒湣公,哀姜欲立慶父,魯人更立釐公.  桓公召哀姜,殺之.

[14년, 진여공(陳厲公)의 아들로 시호가 경중(敬仲)인 진완(陳完)이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제환공은 그를 경(卿)으로 등용하려고 했으나 그가 사양하므로 공정(工正)으로 삼았다.

가 바로 전성자상(田成子常)의 선조이다.
23년,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해 산융을 쳐서 고죽(孤竹)에까지 이른 다음에 돌아왔다.

연장공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나라의 경내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환공이 말하기를 : “천자가 아니면 제후가 영토 밖에까지 나가 전송하지 아니한다.

나는 연나라에 대해서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도랑을 파서 경계로 하고 장공이 온 곳까지의 땅을 연나라에 주었다.

그리고 장공에게 옛 소공(召公)의 덕정을 다시 펼 것과, 옛 주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와

같이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칠 것을 명령했다. 제후들이 이것을 듣고 모두 제나라를 따랐다.
27년, 노민공(魯湣公)의 어머니 애강(哀姜)은 환공의 여동생이었는데, 노나라의 공자 경보(慶父)와 간음했다.
경보가 민공을 시해하자 애강은 경보를 옹립하려고 했는데 노나라 사람들은 따로 희공(釐公)을 옹립했다.

제환공은 애강을 소환해 죽였다.] 

 

二十八年,衛文公有狄亂,告急於齊.  齊率諸侯城楚丘而立衛君.

二十九年,桓公與夫人蔡姬戲船中. 蔡姬習水, 蕩公, 公懼, 止之, 不止, 出船,怒,歸蔡姬,弗絕.

蔡亦怒,嫁其女.  桓公聞而怒,興師往伐.

[28년, 위문공(衛文公)이 적(狄)나라 사람들의 침략을 당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나라는 제후들을 이끌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위(衛)의 임금을 옹립했다.
29년, 환공이 부인 채희(蔡姬)와 배 위에서 장난을 쳤다. 물에 익숙한 채희가 배를 흔드니 환공이 두려워하며

지했지만, 채희는 그치지 않았다. 환공은 배에서 내린 다음 화를 내며 채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는데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채후(蔡侯) 역시 화가 나서 채희를 재가(再嫁)시켰다.

환공은 그것을 분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채나라로 쳐들어갔다.] 

 

三十年春,齊桓公率諸侯伐蔡,蔡潰.  遂伐楚.  楚成王興師問曰:「何故涉吾地?」
管仲對曰:「昔召康公命我先君太公曰:『五侯九伯,若實征之,以夾輔周室.』賜我先君履,

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  楚貢包茅不入,王祭不具,是以來責.

昭王南征不復,是以來問.」

楚王曰:「貢之不入,有之,寡人罪也,敢不共乎!昭王之出不復,君其問之水濱.」
齊師進次于陘.  夏,楚王使屈完將兵捍齊,齊師退次召陵.  桓公矜屈完以其眾.
屈完曰:「君以道則可;若不,則楚方城以為城,江、漢以為溝,君安能進乎?」
乃與屈完盟而去.  過陳,陳袁濤涂詐齊,令出東方,覺.  秋,齊伐陳.  是歲,晉殺太子申生.

[30년 봄, 제환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채나라를 치니, 채나라가 무너졌다. 그리고 초 나라를 쳤다.
초성왕(楚成王)이 군대를 일으켜 와서 묻기를 : “무슨 연고로 내 땅을 밟았소?”라고 하자, 
관중이 환공을 대신해 대답하기를 : “전에 소강공(召康公)이 우리의 선대 임금인 태공(太公)에게 말하기를 :

‘다섯 등급의 제후와 구주(九州)의 백(伯) 등의 잘못을 너희 제나라가 징벌해 주 왕실을 보좌하라.’라고 하셨소.

그리고 우리 선대 임금에게 동쪽으로는 바다에, 서쪽으로는 황하에, 남쪽으로는 목릉(穆陵)에,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땅을 밟게 하셨소. 초 나라의 공물인 포모(包茅)가 들어오지 않아

왕의 제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으므로 질책하러 온 것이오.
또 소왕(昭王)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아니하셨기에 그것을 문책하러 왔소.”라고 하였다.
초왕이 말하기를  : “공물이 들어가지 않은 일은 있으니 과인의 잘못이오. 이후 어찌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있겠소?
소왕이 순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한수(漢水)가에 가서 물어보시오.”라고 하였다.
제나라의 군대가 형(陘) 땅에 진주했다. 여름이 되어 초왕이 굴완을 시켜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에 대항하게 하자,
제나라의 군대는 소릉(召陵)으로 물러났다. 환공이 굴완에게 제나라 군대의 수가 많음을 뽐내자,
굴완이 말하기를 : “임금께서 도의를 따져서 행동하신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지 않으신다면

초나라는 방성(方城)의 이어진 봉우리를 성으로 하고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해자(垓子)로 삼아 대항할 터이니,

임금께서 어떻게 전진할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이에 환공은 굴완과 맹약을 맺고 물러갔다.
환공이 진(陳)나라를 경유했는데 진나라의 원도도(袁濤涂)가 제나라의 군대를 속여서 동쪽으로 돌아가도록 했다가

발각되었다. 가을이 되어 제나라는 진(陳)나라를 쳤다. 이해에 진(晉)나라에서 태자 신생(申生)이 피살되었다.] 

 

三十五年夏,會諸侯于葵丘.  周襄王使宰孔賜桓公文武胙、彤弓矢、大路,命無拜.

桓公欲許之,管仲曰「不可」,乃下拜受賜.
秋,復會諸侯於葵丘,益有驕色.  周使宰孔會.  諸侯頗有叛者. 晉侯病,後,遇宰孔.

宰孔曰:「齊侯驕矣,弟無行.」從之.
是歲, 晉獻公卒, 裏克殺奚齊、卓子,秦穆公以夫人入公子夷吾為晉君.

桓公於是討晉亂, 至高梁, 使隰朋立晉君, 還.

是時周室微,唯齊、楚、秦、晉為彊.  晉初與會,獻公死,國內亂.  秦穆公辟遠,不與中國會盟.
楚成王初收荊蠻有之,夷狄自置.  唯獨齊為中國會盟,而桓公能宣其德,故諸侯賓會.
於是桓公稱曰:「寡人南伐至召陵,望熊山;北伐山戎、離枝、孤竹;西伐大夏,涉流沙;

束馬懸車登太行,至卑耳山而還.  諸侯莫違寡人.

寡人兵車之會三,乘車之會六,九合諸侯,一匡天下.  昔三代受命,有何以異於此乎?

吾欲封泰山,禪梁父.」管仲固諫,不聽;乃說桓公以遠方珍怪物至乃得封,桓公乃止.

[35년 여름, 제후들을 규구(葵丘)에서 회맹하게 했다. 주양왕(周襄王)이 재공을 보내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께

제사지낸 고기와 주홍색의 화살 및 큰 수레를 하사하면서 엎드려 절하지 말도록 명했다.

환공은 이에 응낙하려다가 ,관중이 아뢰기를 : "아니 되옵니다."라고 하자, 내려가서 엎드려 절하고 하사품을 받았다.
가을, 다시 제후들을 규구에 회맹하게 했는데, 환공은 더욱 교만한 기색을 띠었다. 주 왕실은 재공을 회맹에 보냈다.

제후들 속에는 이반하는 자들이 꽤 있었다. 진헌공(晉獻公)은 병이 나서 늦게 오다가 재공과 마주쳤는데

재공이 말하기를 : “제후(齊侯)는 교만해졌소, 가지 마시오.”라고 하자, 이에 따랐다.
이해에 진헌공이 죽고 대부 이극(里克)이 공자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죽였다.
진목공(秦穆公)이 부인과의 관계로 인해 공자 이오(夷吾)를 진(晉)에 들여보내 임금이 되게 하려고 했다.
이때 제환공도 진(晉)의 변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고량(高梁)에 이른 다음 습붕(隰朋)을 보내,

새 임금을 옹립한 뒤에 돌아갔다. 이때에는 주 왕실은 쇠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의 나라들만이 강성했다.

진(晉)나라는 처음으로 회맹에 참여했던 데다가 헌공이 죽고 나서는 국내가 혼란해졌다.
진목공은 나라가 멀고 외져서 중원(中原) 국가들의 회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초성왕은 이제 막 형만(荊蠻)의 땅을 복속해 이적(夷狄)의 나라라고 자처했다.
오직 제(齊)나라만이 중원 각국의 회맹을 주재했고 환공이 자신의 덕(德)을 잘 선양했기 때문에 제후들이 복종하며

회맹했다. 이에 환공은 공언하기를 : “과인은 남쪽을 정벌해 소릉(召陵)에까지 이르러 웅산(熊山)을 바라보았고,

북쪽으로 산융(山戎), 이지(離枝), 고죽(孤竹)을 정벌했으며, 서쪽으로 대하(大夏)를 정벌해 유사(流沙)를 경유했고,

말발굽을 싸고 수레를 매달면서 태행산(太行山)에 올라 비이산(卑耳山)에 이른 다음에 돌아왔소.
제후들 가운데 아무도 과인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했으니, 과인은 전쟁을 위한 회맹 셋과, 평화를 위한 회맹 여섯으로

제후들을 아홉 번 규합했고 천하의 주 왕실의 일을 한 번 바로잡았소.

옛날 하, 상, 주 삼대(三代)의 왕들이 천명(天命)을 받든 것과 이 일들이 무엇이 다르오?
과인도 옛날의 제왕들처럼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받들고, 양보산에서 땅에 제사를 받들려고 하오.”라고 하였다.
관중이 이를 굳이 만류했으나 듣지 않다가, 먼 지방에서 진기한 보물들이 이르고 나서야

봉선(封禪)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니 환공은 그제에서야 중지했다.] 

 

三十八年,周襄王弟帶與戎、翟合謀伐周,齊使管仲平戎於周.

周欲以上卿禮管仲,管仲頓首曰:「臣陪臣,安敢!」 三讓,乃受下卿禮以見.
三十九年,周襄王弟帶來奔齊.  齊使仲孫請王,為帶謝.  襄王怒,弗聽.

四十一年, 秦穆公虜晉惠公, 復歸之. 是歲, 管仲、隰朋皆卒. 管仲病, 桓公問曰:「群臣誰可相者?」

管仲曰:「知臣莫如君.」公曰:「易牙如何?」對曰:「殺子以適君,非人情,不可.」

公曰:「開方如何?」對曰:「倍親以適君,非人情,難近.」
公曰:「豎刀如何?」對曰:「自宮以適君,非人情,難親.」

管仲死,而桓公不用管仲言,卒近用三子, 三子專權.

[38년, 주양왕(周襄王)의 동생 희대(姬帶)가 융(戎), 적(翟)의 사람들과 공모해 주나라를 쳤다.

제(齊)나라는 관중을 보내 융과 주 왕실을 화해시키도록 했다.
주양왕이 관중을 상경(上卿)의 예로 접견하려고 하자 관중은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 “저는 신하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처럼 세 번을 사양한 다음에 하경(下卿)의 예를 받아들여 주양왕을 알현했다.

39년, 주양왕의 동생 희대가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제나라는 중손(仲孫)을 보내어 왕에게 희대 대신 사죄를 청했다. 주양왕은 화를 내며 듣지 않았다.
41년, 진목공(秦穆公)이 진혜공(晉惠公)을 사로잡았다가 다시 돌려 보내주었다. 이해에 관중과 습붕이 모두 죽었다.

관중이 병이 나자 환공이 묻기를 : “뭇 신하들 가운데 재상을 시킬 만한 이는 누구인가?”라고 하자,

관중이 대답하기를 : “임금보다 더 신하를 잘 알 사람은 없지요.”라고 하였다. 
환공이 묻기를 : “역아(易牙)는 어떤가?”라고 하자,

관중이 대답하기를 : “제 자식을 죽여 임금에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다시 묻기를 : “개방(開方)은 어떤가?”라고 하자, 

관중이 대답하기를 :“부모를 배반하고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했다. 
환공이 다시 묻기를 : “수도(豎刀)는 어떤가?” 라고 하자, 

관중이 대답하기를 : 제 생식기를 갈라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친애하기 어렵습니다.”했다.

관중이 죽고 나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까이 두어 중용했고,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정권을 전횡하게 되었다.] 

 

四十二年,戎伐周,周告急於齊,齊令諸侯各發卒戍周.  是歲,晉公子重耳來,桓公妻之.

四十三年.  初, 齊桓公之夫人三:曰王姬、徐姬、蔡姬,皆無子.

桓公好內, 多內寵, 如夫人者六人, 長衛姬,生無詭;少衛姬,生惠公元;鄭姬,生孝公昭;

葛嬴,生昭公潘;密姬,生懿公商人;宋華子,生公子雍.

桓公與管仲屬孝公於宋襄公,以為太子.
雍巫有寵於衛共姬, 因宦者豎刀以厚獻於桓公, 亦有寵, 桓公許之立無詭.  管仲卒,五公子皆求立.
冬十月乙亥,齊桓公卒.  易牙入,與豎刀因內寵殺群吏,而立公子無詭為君.  太子昭奔宋.

桓公病,五公子各樹黨爭立.  及桓公卒,遂相攻,以故宮中空,莫敢棺.

桓公尸在床上六十七日,尸蟲出于戶.

十二月乙亥,無詭立,乃棺赴.  辛巳夜,斂殯.

桓公十有餘子,要其後立者五人:無詭立三月死,無謚;次孝公;次昭公;次懿公;次惠公.

[42년, 융(戎)이 주나라를 치자 주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나라는 제후들에게 명해 각기 군사를 보내 주 왕실을 수비하게 했다.

이해에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重耳)가 제나라에 오자 환공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43년, 원래 제 환공에게는 부인이 왕희(王姬), 서희(徐姬), 채희(蔡姬) 이렇게 셋이 있었는데, 모두 아들이 없었다.
환공은 여색을 좋아해서 총애한 희첩(姬妾)이 많았다. 부인과 같은 예우를 받는 자가 여섯 명이 있었는데,

큰 위희[長衛姬]는 공자 무궤(無詭)를 낳았고, 작은 위희[少衛姬]는 혜공 원(惠公元)을 낳았고,

정희(鄭姬)는 효공 소(孝公昭)를 낳았고, 갈영(葛嬴)은 소공 반(昭公潘)을 낳았고,
밀희(蜜姬)는 의공 상인(懿公商人)을 낳았고, 송화자(宋華子)는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