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衛將軍驃騎列傳

第 五十一. 衛將軍驃騎列傳(위장군 표기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11. 16:52

 

  ​      第 五十一.   衛將軍驃騎列傳(위장군 표기열전) 

 

 

大將軍衛青者, 平陽人也.  其父鄭季, 為吏. 給事平陽侯家, 與侯妾衛媼通, 生青.

青同母兄衛長子,而姊衛子夫自平陽公主家得幸天子,故冒姓為衛氏.  

字仲卿.  長子更字長君. 長君母號為衛媼.  媼長女衛孺, 次女少兒, 次女即子夫. 

後子夫男弟步、廣皆冒衛氏.

[대장군 위청은 평양(平陽)1) 사람이다. 그의 부친 정계(鄭季)는 관리가 되어

평양후2) 조수의 집안을 돌보다가 조수의 첩실 위온(衛媼)과 간통하여 아들 청(靑)을 낳았다.

위청의 동복형제로는 형인 위장자(衛長子)와 동생인 위자부(衛子夫)가 있었다.

위자부는 평양공주를 모시다가 훌륭한 가무(歌舞)로 황제의 총애를 얻었기에

위청도 위()를 성으로 삼았다.  위청은 자를 중경(仲卿)이라고 하였다.

위장자(衛長子)의 자는 장군(長君)이고 장군의 모친 호는 위온이다.

위온의 장녀는 위유(衛孺), 차녀는 소아(少兒)고 그 다음이 바로 위자부다.  

뒷날 위자부의 남자 동생들인 보(步)와 광(廣)도 모두 성을 위씨로 삼았다.]

 

青為侯家人,少時歸其父,其父使牧羊.  先母之子皆奴畜之,不以為兄弟數. 

青嘗從入至甘泉居室,有一鉗徒相青曰:「貴人也,官至封侯.」 

青笑曰:「人奴之生,得毋笞罵即足矣,安得封侯事乎!」

青壯,為侯家騎,從平陽主.

[위청이 평양후 집안의 가인이 되어 지내다가 젊었을 때 그 부친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부친은 위청에게 양을 치게 했다. 정계의 본처 아들들은 모두 위청을

노복처럼 대하며 아무도 그를 형제로 대해주지 않았다. 위청이 한 번은 사람을 따라

감천궁(甘泉宮)3)의 거실(居室)4)에 갇혀 있을 때 겸도(鉗徒)5)가 위청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 " 귀인이 될 상으로 장차 관직이 후(侯)에 오를 것이오.”라고 하자, 

위청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 " 남의 종복 신세에 욕을 먹으며 두들겨 맞지나 않고

살면 다행스러운 일인데 어찌 후에 봉해질 수 있던 말이오 ? ”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청이 장성하자 평양후 집안의 기사가 되어 평양공주6)의 시중을 들었다.]

 

建元二年春,青姊子夫得入宮幸上.  皇后,堂邑大長公主女也,無子,妒.

大長公主聞衛子夫幸,有身,妒之,乃使人捕青.  青時給事建章,未知名.

大長公主執囚青,欲殺之.  其友騎郎公孫敖與壯士往篡取之,以故得不死.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년) 봄, 위청의 누이 위자부7)가 궁중으로 들어가 천자의 총애를

받았다.  그때 황후는 당읍(堂邑)8)의 대장공주9) 딸 진아교(陳阿嬌)로  그때까지 아들을

낳지 못했던 진황후는 투기가 심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장공주가 질투하여 사람을 시켜 위청을 잡아오게 했다.

그때 건장궁(建章宮)10)의 급사로 일하고 있던 위청은 이름이 아직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었다.

위청을 잡아와 감옥에 가둔 대장공주는 위청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때 그의 친구였던 기랑 공손오와 장사들이 건장궁의 감옥으로 쳐들어가 탈옥시켰음으로

위청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上聞,乃召青為建章監,侍中,及同母昆弟貴,賞賜數日閒累千金.

孺為太仆公孫賀妻,  少兒故與陳掌通,上召貴掌.  公孫敖由此益貴. 

子夫為夫人.  青為大中大夫.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위청을 불러 건장궁의 궁감(宮監) 겸 시중(侍中)으로 임명하고,

그의 동복형제자매들도 모두 고귀한 지위에 올라 황제가 며칠 동안 이들에게 내린 하사금이

천금에 이르렀다.  위청의 이부(異父) 여동생 위유를  태복(太僕)11) 공손하에게 시집보내고,

이부 누이동생 위소아는 원래 진장(陳掌)12)과 사통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진장을 불러

귀한 신분으로 만들었다.  ​공손오는 위청을 구해준 일로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위자부는 부인(夫人)의 품계를 받고, 위청은 대중대부(大中大夫)13)에 임명되었다.]  

 

元光五年, 青為車騎將軍, 擊匈奴, 出上谷;太仆公孫賀為輕車將軍, 出雲中;

大中大夫公孫敖為騎將軍, 出代郡;衛尉李廣為驍騎將軍, 出雁門:軍各萬騎.

青至蘢城,斬首虜數百.  騎將軍敖亡七千騎;衛尉李廣為虜所得,得脫歸:

皆當斬,贖為庶人.  賀亦無功.

[원광(元光) 5년(기원전 130년),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상곡에서, 공손하는 경거장군이 되어

운중(雲中)에서, 대중대부 공손오는 기장군 되어 대군(代郡)에서, 위위(衛尉) 이광(李廣)은

효기장군이 되어 안문(雁門)에서 각기 1만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다.

위청은 롱성(蘢城)14)까지 진격하여 흉노 수백 명의 목을 벴다.

기장군 공손오는 7천 명의 기병을 잃었고, 위위 이광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돌아왔지만 모두 참수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공손하 역시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다.]  

 

元朔元年春,衛夫人有男,立為皇后.

其秋,青為車騎將軍,出雁門,三萬騎擊匈奴,斬首虜數千人.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년) 봄, 위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음으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해 가을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안문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해서

흉노 수천 명을 포로로 잡거나 목을 베었다.]

明年, 匈奴入殺遼西太守, 虜略漁陽二千餘人, 敗韓將軍軍. 

漢令將軍李息擊之, 出代;令車騎將軍青出雲中以西至高闕.  

遂略河南地, 至于隴西, 捕首虜數千, 畜數十萬, 走白羊、樓煩王.

遂以河南地為朔方郡.  以三千八百戶封青為長平侯.  青校尉蘇建有功,

以千一百戶封建為平陵侯.  使建筑朔方城.  青校尉張次公有功,封為岸頭侯.

[다음 해, 흉노가 침입해 요서 태수를 살해하고 어양군 백성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장군 한안국의 군사를 패배시켰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장군 이식()에게 대군()에서

출병해 진격하게 하고, 거기장군 위청에게는 운중에서 출병해 서쪽으로 고궐()까지

진격하게 하여 흉노를 공격하였다.  위청이 군대는 하남을 공략하고 농서(隴西)에 이르는 동안

흉노 포로 수천 명과 가축 수십 만 두를 노획했으며 백양왕과 누번왕(藩王)을 쫓아냈다. 

한나라는 하남의 땅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고 위청을 3천 8백호의 장평후를 봉했다. 

위청을 따라 종군하여 공을 세운 소건(蘇建)을 천 백호의 평릉후(平陵侯)에 봉한 후에

삭방에 성을 짓도록 하고,  교위(校尉)15) 장차공(張次公)은 안두후(岸頭侯)에 봉했다.

天子曰:「匈奴逆天理, 亂人倫, 暴長虐老, 以盜竊為務, 行詐諸蠻夷, 造謀藉兵,

數為邊害,故興師遣將,以征厥罪.  詩不云乎,『薄伐玁狁,至于太原』,

『出車彭彭,城彼朔方』. 今車騎將軍青度西河至高闕,獲首虜二千三百級,

車輜畜產畢收為鹵,已封為列侯,遂西定河南地,按榆谿舊塞,絕梓領,

梁北河,討蒲泥,破符離,斬輕銳之卒,捕伏聽者三千七十一級,

執訊獲丑,驅馬牛羊百有餘萬,全甲兵而還,益封青三千戶.」  

[천자가 말하기를 : " 흉노는 천리를 역행하고 인륜을 문란시켰으며 장자를 폭압하고

노인을 학대했으며 도적질에 힘쓰고 여러 만이들을 속이며 모략을 꾸며 군사행동을 일삼아

우리의 변경을 쉴 새 없이 침범해왔기에 우리도 군사를 일으켜 장수를 보내 그들의 죄를

응징하도록 했다. 시경에 노래하지 않았던가 ?  

『험윤을 정벌하여 태원에 이르렀네 ‘ 薄伐玁狁(박벌험윤),至於太原(지어태원)’』17)

『전차소리 요란하고 저 삭방에 성을 쌓네 ‘出車彭彭(출거팽팽),城彼朔方(성피삭방)’』18)

지금 거기장군 위청이 서하를 건너 고궐까지 진격하여 흉노의 포로와 수급 2천 3백을 얻고

수레와 보급 물품 및 가축을 무수히 노획했음으로 그의 공을 기려 이미 열후에 봉하였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하게 하여 하남의 땅을 평정하게 하였으며,

위청은 유계(楡谿)의 옛 요새를 순찰하고 재령(梓領)을 넘어 북하(北河)에 다리를 놓았으며 

포니(蒲泥)를 사로잡고 부리(符離)를 함락시켜 흉노의 재빠르고 정예한 군사들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매복병과 정탐병이 3천 71급이고, 간첩을 잡아 심문하여 적군을 잡아들이고

백여 만 마리의 말, 소, 양을 노획한 후에 아군을 안전하게 이끌고 귀환하였다.

이에 위청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한다.”라고 하였다.]

  

其明年,匈奴入殺代郡太守友,入略鴈門千餘人.

其明年,匈奴大入代、定襄、上郡,殺略漢數千人.

其明年,元朔之五年春,漢令車騎將軍青將三萬騎,出高闕;

衛尉蘇建為游擊將軍,左內史李沮為彊弩將軍,太仆公孫賀為騎將軍,

代相李蔡為輕車將軍,皆領屬車騎將軍,俱出朔方;

大行李息、岸頭侯張次公為將軍,出右北平:咸擊匈奴.

[다음 해, 흉노가 쳐들어와 대군태수 공우(共友)를 살해하고 안문을 노략질하여 천여 명의

백성들을 잡아갔다. 다시 다음 해에 흉노가 다시 대군, 정양, 상군을 침입하여 수천 명의

백성들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다시 다음해인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한나라가 거기장군 위청에게 명하여 3만 기의 기병을 이끌고 고궐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고 ; 동시에 위위 소건은 유격장군으로, 좌내사 이저(李沮)는 강노장군으로,

태복 공손하는 기장군으로, 대상(代相) 이채(李蔡)는 경거장군으로 임명하여

모두 위청에게 배속시켜 삭방에서 출발하여 출격하여 위청의 부대와 합류하게 하고  

다시 대행 이식(李息), 안두후 장차공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우북평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협공하도록 하였다.]

匈奴右賢王當衛青等兵,以為漢兵不能至此,飲醉.  漢兵夜至,圍右賢王,

右賢王驚,夜逃,獨與其愛妾一人壯騎數百馳,潰圍北去.  

漢輕騎校尉郭成等逐數百里,不及,得右賢裨王十餘人, 眾男女萬五千餘人,

畜數千百萬,於是引兵而還.  至塞,天子使使者持大將軍印,

即軍中拜車騎將軍青為大將軍,諸將皆以兵屬大將軍,大將軍立號而歸.

[이때 흉노의 우현왕은 위청의 부대 등을 기다리면서 한나라 군사들은 자기가 머무는 곳까지

이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술에 취해 있었다. 한나라 군사들이 밤중에 당도하여

우현왕의 진영을 포위하자, 우현왕이 놀라 야음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우현왕은 단지 그의 애첩 1명과 수백의 기병만을 데리고 말을 달려 포위를 뚫고 북쪽으로

줄행랑 쳤다. 한나라의 경기병부대의 교위 곽성(郭成) 등이 수백 리를 추격했으나 

우현왕은 잡지 못하고, 우현왕 밑의 비왕() 10여 명과 남녀 만 5천여 명을 사로잡고 

가축 수천 수백 만 마리를 노획한 후에 회군했다. 이윽고 위청의 군대가 요새에 이르자,

천자는 사자로 하여금 대장군의 지절과 인장을 보내 여러 장수들과 모든 군사들은

대장군에게 귀속되었으며, 대장군 위청은 대장군의 관호()를 세우고 돌아왔다.]  

天子曰:「大將軍青躬率戎士,師大捷,獲匈奴王十有餘人, 益封青六千戶.」

而封青子伉為宜春侯,青子不疑為陰安侯,青子登為發干侯.

青固謝曰:「臣幸得待罪行閒,賴陛下神靈,軍大捷,皆諸校尉力戰之功也. 

陛下幸已益封臣青.  臣青子在繦緥中,未有勤勞,上幸列地封為三侯,

非臣待罪行閒所以勸士力戰之意也. 伉等三人何敢受封!」 

天子曰:「我非忘諸校尉功也,今固且圖之.」 

[이 때에 천자가 위청에게 말하기를 : " 대장군 위청은 몸소 전사들을 이끌고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흉노왕 10여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이에 위청에게 6천 호의 식읍을 더한다. ”하며.  

이어서 위청의 아들 위항(衛伉), 위불의(衛不疑), 위등(衛登) 모두를 각각 의춘후(宜春侯),

음안후(陰安侯),발간후(發幹侯)에 각각 봉했다. 위청이 한사코 사양하며 말하기를 : 

" 신은 요행히 행오(行伍)19)사이에서 장군으로 발탁되어 폐하의 신령에 힘입어 흉노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교위들이 힘껏 싸운 공로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황공하옵게도 이 청에게 봉지를  더해 주시고 아직 강보에 싸여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세 아들들에게도 땅을 나누어 후에 봉해주셨습니다.  

이는 신이 군대에 몸을 두고 장군이 되어 병사들을 독려하여 힘껏 싸우게 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위항 등이 어찌 감히 봉작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천자가 말하기를 : “ 내가 여러 교위들의 공로를 잊은 것이 아니고, 

지금 그들의 공에 대해 상을 내리려고 하오.” 라고 하였다.] 

 

乃詔御史曰:「護軍都尉公孫敖三從大將軍擊匈奴,常護軍,傅校獲王,

以千五百戶封敖為合騎侯.  都尉韓說從大將軍出窳渾,至匈奴右賢王庭,

為麾下搏戰獲王,以千三百戶封說為龍頟侯. 

騎將軍公孫賀從大將軍獲王,以千三百戶封賀為南窌侯.

輕車將軍李蔡再從大將軍獲王,以千六百戶封蔡為樂安侯. 

校尉李朔,校尉趙不虞,校尉公孫戎奴,各三從大將軍獲王,

以千三百戶封朔為涉軹侯,以千三百戶封不虞為隨成侯,

以千三百戶封戎奴為從平侯.  將軍李沮、李息及校尉豆如意有功,

賜爵關內侯,食邑各三百戶.」 其秋,匈奴入代,殺都尉朱英.

[천자가 즉시 어사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 " 호군도위 공손오는 대장군을 따라 세 번 출전하여

항상 군대를 호위하고 교위들을 이끌어 흉노의 비왕(裨王)들을 포로로 잡았으니

그 공로로 공손오를 1천 5백호의 합기후(合騎侯)에 봉한다. 도위 한열(韓說)은 대장군을 따라

유혼(窳渾)20)에서 출병하여 흉노 우현왕의 왕정(王庭)까지 진격하여 대장군 지휘하에

용감히 싸워 흉노의 비왕들을 사로잡았으니 이에 한열을 1천 3백 호의 용암후에 봉한다.  

기장군 공손하는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비왕들을 사로잡았으니

이에 1천 3백 호의 남교후(南窌侯)에 봉한다.

경거장군 이채는 두 번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비왕들을 사로잡았으니 

이에 1천 6백 호의 낙안후(樂安侯)에 봉한다.

교위 이삭, 교위 조불우, 교위 공손융노 등은 각각 세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비왕을 사로잡았으니, 이삭에게 1천3백호를 하사하고 섭지후()에,

조불우에게 1천3백호를 하사하고 수성후()에, 공손융노에게 1천3백호를 하사하고

종평후()에 봉한다.  장군 이저、이식, 교위 두여의 역시 전공이 있으니

관내후에 봉하고 각기 3백 호의 식읍을 내린다. ”라고 하였다.

그해 가을 흉노가 대군(代郡)에 침입하여 도위 주영(硃英)을 살해하였다.

 

其明年春,大將軍青出定襄,合騎侯敖為中將軍,太仆賀為左將軍,

翕侯趙信為前將軍,衛尉蘇建為右將軍,郎中令李廣為後將軍,,

右內史李沮為彊弩將軍, 咸屬大將軍, 斬首數千級而還.

月餘, 悉復出定襄擊匈奴, 斬首虜萬餘人. 右將軍建、前將軍信并軍三千餘騎,

獨逢單于兵,與戰一日餘, 漢兵且盡.  前將軍故胡人, 降為翕侯, 見急, 

匈奴誘之, 遂將其餘騎可八百, 奔降單于.

[다음 해 봄, 대장군 위청이, 합기후 공손오를 중장군으로, 태복 공손하는 좌장군으로,

흡후 조신은 전장군으로,  위위 소건은 우장군으로, 랑중령 우내사 이저는 강노장군으로 삼아

모두 대장군의 예하에 두고 정양에서 출병하여 흉노의 기병 수천 명의 수급을 베고 돌아왔다.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한 위청은 다시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출병하여 만여 명의 수급과 포로를

얻었다. 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이 휘하의 군사를 합친 3천여 기의 기병을 이끌고

전진하다가 흉노 선우의 대군과 만나 하루가 넘도록 전투를 벌여 한나라 군사들은 거의

전멸하기 직전이었다. 전장군 조신은 원래 흉노 출신으로써 한나라에 귀항하여

흡후가 된 자였다.  그는 상황이 위급되자 흉노의 투항 권유를 받고 마침내 휘하의 8백 기병을

거느리고 선우에게 투항했다.]

 

右將軍蘇建盡亡其軍,獨以身得亡去,自歸大將軍. 

大將軍問其罪正閎、長史安, 議郎周霸等:「建當云何?」 

霸曰:「自大將軍出,未嘗斬裨將.  今建棄軍,可斬以明將軍之威.」

閎、安曰:「不然.  兵法『小敵之堅,大敵之禽也』. 今建以數千當單于數萬,

力戰一日餘, 士盡, 不敢有二心, 自歸. 自歸而斬之, 是示後無反意也.  不當斬.」 

[우장군 소건은 휘하의 사졸들을 모두 잃고 홀로 도망쳐 돌아와 대장군에게 고했다.

대장군이 소건의 죄가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군정(軍正) 굉(閎), 장사(長史) 안(安),

의랑(議郞) 주패(周覇) 등에게 묻기를 : " 소건의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 ? "라고 하자.

주패가 말대답하기를 : " 대장군께서 출전한 이래 아직까지 비장들을 처형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소건이 그의 군사들을 버렸으니 참수형에 처하시어 장군의 위엄을 군사들에게

보이십시오. ”라고 하였다.  

굉과 안이 동시에 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 "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병법에 ‘작은 병력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적의 대군을 만나면 필시 그들의 포로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소건은 수천 명에 불과한 기병으로 선우의 수만 기병과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군사들이 모두 죽었으나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스스로 귀대했습니다. 싸움에 패하고도

스스로 돌아온 장수를 처형한다면 이후로는 패군의 장수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소건을 참수형에 처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大將軍曰:「青幸得以肺腑待罪行閒, 不患無威, 而霸說我以明威, 甚失臣意.

且使臣職雖當斬將, 以臣之尊寵而不敢, 自擅專誅於境外, 而具歸天子,

天子自裁之,於是以見為人臣不敢專權,不亦可乎?」 

軍吏皆曰「善」. 遂囚建詣行在所.  入塞罷兵.

​[대장군이 말하기를 " 나는 황공하게도 폐하와 인척으로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위엄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위엄을 보이라는 주패의 말은

신하의 신분을 매우 심하게 잃은 처사다.  비록 내 직권으로 장수를 참수에 처할 수

있다하더라도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를 국경 밖에서 함부로 감히 주살할 수 없는 법이니

모두 천자에게 돌려보내 천자께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하겠다. 이렇게 하여 신하된 자가

감히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는 것 역시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군리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 " 훌륭한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건을 함거에 가두어

행재소로 보내 황제를 직접 배알하게 하고 자신은 요새로 들어와 군사를 쉬게 하였다.]

 

是歲也,大將軍姊子霍去病年十八,幸,為天子中.  善騎射, 再從大將軍,

受詔與壯士, 為剽姚校尉, 與輕勇騎八百直棄大軍數百里赴利, 斬捕首虜過當. 

於是天子曰:「剽姚校尉去病斬首虜二千二十八級,及相國、當戶,

斬單于大父行籍若侯產, 生捕季父羅姑比, 再冠軍, 以千六百戶封去病為冠軍侯. 

上谷太守郝賢四從大將軍,捕斬首虜二千餘人,以千一百戶封賢為眾利侯.」

[그해에 대장군 누이의 아들인 곽거병21)은 나이가 18세로서, 황제의 총애를 얻어 시중이

되었다.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곽거병은 위청의 군대에 두 번에 걸쳐 출정했다.  

대장군은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그를 장사()로 인정하고 표요교위()22)로 삼았다.

곽거병은 빠르고 용감한 기병 8백 명을 이끌고 본대의 대군을 떠나 수백 리를 달려가 싸움에서

이기고 참수하거나 사로잡아 온 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

표요교위 곽거병은 흉노 2천 8천의 수급과 포로를 얻었는데 그 중에는 상국 당호(當戶)와

흉노의 조부되는 적양후(籍若侯) 산(產)을 참수하고 선우의 숙부 라고비를 생포했으니

그의 전공은 두 번의 출정에서 으뜸이었다. 그리하여 1천 6백호의 식읍과 함께 관군후로 봉한다. 

​상곡 태수 학현은 네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출정해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적이

2천여 명이니, 1천1백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중리후()에 봉한다.”라고 하였다.] 

 

是歲,失兩將軍軍,亡翕侯,軍功不多,故大將軍不益封. 

右將軍建至,天子不誅,赦其罪,贖為庶人.  大將軍既還,賜千金. 

是時王夫人方幸於上,甯乘說大將軍曰:

「將軍所以功未甚多,身食萬戶,三子皆為侯者,徒以皇后故也. 

今王夫人幸而宗族未富貴,願將軍奉所賜千金為王夫人親壽.」

大將軍乃以五百金為壽.  天子聞之, 問大將軍, 大將軍以實言, 上乃拜甯乘為東海都尉.

[이해에 대장군은 두 장군과 군사를 잃었고 흡후가 흉노로 도망쳤으며 전공이 많지 않아

식읍을 더 늘려 받지 못했다.우장군 소건이 함거에 갇혀 당도하자 천자는 죽이지 않고 그

죄를 감면하여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대장군이 개선하자 천자가 천금의 상금을 내렸다. 이때 왕부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영승(甯乘)이라는 사람이 대장군에게 말하기를 : " 장군께서 공이 그다지 높지 않음에도

식읍을 만 호나 받고 세 아들이 모두 후에 봉해진 이유는 모두 황후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왕부인께서 총애를 받고 계시나 그 종족들은 아직 부귀해지지 않았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상금으로 받은 천금을 바쳐 왕부인의 부모님을 위해 ​축수에 드리십시오.”

라고 하자.  대장군이 즉시 5백금으로 왕부인의 부모님의 축수를 올렸다.

천자가 듣고 대장군에게 그 뜻을 묻자 대장군은 이실직고했다.

천자는 영승을 동해의 도위(都尉)에 임명했다.]  

張騫從大將軍, 以嘗使大夏, 留匈奴中久, 導軍, 知善水草處, 軍得以無饑渴,

因前使絕國功,封騫博望侯.  冠軍侯去病既侯三歲,

元狩二年春,以冠軍侯去病為驃騎將軍,將萬騎出隴西,有功.

[장건이 대장군을 따라 출병했을 때, 일찍이 대하(大夏)23)에 사자로 다녀오다가 흉노에 잡혀

오랫동안 억류되었던 경험으로 토대로 군대를 인도했다. 장건은 마실 수 있는 물이나 숙영에

적합하고 말을 먹일 수 있는 초지가 있는 곳을 잘 알았기에 한나라 군사들은 허기나 갈증을

면할 수 있었다. 더욱이 너무 멀어 길이 끊어진 곳까지 사자의 임무를 띠고 다녀온

공로를 인정하여 장건을 박망후(博望侯)에 봉했다.

곽거병이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진 지 3년이 되던 원수() 2년(서기전 121년) 봄, 

곽거병은 표기장군이 되어 1만 기의 기병을 이끌고 농서에서 출병하여 전공을 세웠다.]

天子曰:「驃騎將軍率戎士踰烏盭, 討遬濮, 涉狐奴, 歷五王國,

輜重人眾懾慴者弗取, 冀獲單于子.

轉戰六日,過焉支山千有餘里,合短兵,殺折蘭王,斬盧胡王,誅全甲,

執渾邪王子及相國、都尉, 首虜八千餘級, 收休屠祭天金人, 益封去病二千戶.」

[천자가 말하기를 : " 표기장군이 병사들을 이끌고 오여24)를 넘어 속복(遬濮)25)을 토벌하고  

호노수26)를 건너 다섯 왕국을 통과하면서 두려워 복종하는 나라들은 치중과 인력들을

약탈하지 않고 선우의 아들을 사로잡기만을 원했다. 6일 동안을 계속 전투를 벌리며

언지산(焉支山)을 넘어 천여 리나 나아가 흉노와 직접 맞부딪쳐 싸워서

흉노의 절란왕(折蘭王)과 노호왕(盧胡王)을 살해하고 그 군사 전부를 참수했다.  

혼야왕의 왕자와 상국, 도위를 포함하여 8천 명의 수급과 포로를 얻었으며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금인상을 얻었음으로 곽거병에게 2천 호의 식읍을 더한다.”하였다.]  

其夏,驃騎將軍與合騎侯敖俱出北地,異道;博望侯張騫、

郎中令李廣俱出右北平,異道:皆擊匈奴.  郎中令將四千騎先至,

博望侯將萬騎在後至.  匈奴左賢王將數萬騎圍郎中令, 郎中令與戰二日,

死者過半, 所殺亦過當. 博望侯至, 匈奴兵引去. 博望侯坐行留, 當斬, 贖為庶人.

而驃騎將軍出北地,已遂深入,與合騎侯失道,不相得,,

驃騎將軍踰居延至祁連山,捕首虜甚多.

[그해 여름, 표기장군은 합기후 공손오와 함께 북지에서 출병하고, 박망후 장건,

낭중령 이광은 우북평에서 출병하여 두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일제히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낭중령이 4천의 기병을 이끌고 먼저 진격하고 박망후의 1만 기병은 그 뒤를 따랐다.

흉노의 좌현왕이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낭중령 이광의 4천 기병을 포위했다.

이광은 연 이틀을 싸우면서 분전하여 전사자가 반이 넘게 되었으나 한군에 의해 살해된

적군의 수는 그보다 많았다.  이윽고 박망후의 군사가 당도하자 흉노의 기병은 물러갔다.

박망후는 진군을 늦게 하여 시간을 어겼기에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표기장군의 군사들은 이미 깊숙이 적지에 침투했는데,

합기후 공손오의 군사들은 도중에 길을 잃었기 때문에 표기장군의 군사들과는 합류하지 못했다. 

표기장군은 거연택(居延澤)27)을 지나 기련산(祁連山)28) 까지 진격해 대단히 많은

흉노의 수급과 포로를 얻었다.]  

天子曰:「驃騎將軍踰居延,遂過小月氏,攻祁連山, 得酋涂王,

以眾降者二千五百人, 斬首虜三萬二百級, 獲五王, 五王母, 單于閼氏、

王子五十九人, 相國、將軍、當戶、都尉六十三人, 師大率減什三,

益封去病五千戶.  賜校尉從至小月氏爵左庶長.

鷹擊司馬破奴再從驃騎將軍斬遬濮王, 捕稽沮王, 千騎將得王、王母各一人,

王子以下四十一人,捕虜三千三百三十人,前行捕虜千四百人,

以千五百戶封破奴為從驃侯. 

校尉句王高不識,從驃騎將軍捕呼于屠王王子以下十一人, 捕虜千七百六十八人,

以千一百戶封不識為宜冠侯.  校尉仆多有功, 封為煇渠侯.」

[천자가 말하기를 : " 표기장군이 거연을 넘어 소월지국를 통과하고 기련산의 흉노를 공격하여

추도왕을 사로잡았고, 이때 투항한 자가 2천 5명에 달했으며 3만 2백의 수급과 포로를 얻고

다섯 왕과 그들의 모친과 선우의 연지, 왕자 59명, 상국, 장군, 당호, 도위 63명을 사로잡았는데

우리의 군사들은 10에 3 밖에 잃지 않았다. 그 공로를 기려 곽거병에게 5천 호의 식읍을 더한다.

또한 곽거병을 따라 종군하여 소월지에 이른 교위들에게는 좌서장(左庶長)의 작위를 내린다.

응격사마 조파노는 두 번 표기장군의 군대를 따라 속복왕을 참수하고 계저왕을 생포했다.

그의 천기장(千騎將)은 왕과 왕모(王母)를 각 1명 씩을 사로잡고 왕자 이하 41명, 

포로 3천 3백 명과 이전의 싸움에서 잡은 포로 1천 4백 명을 얻었음으로 

조파노를 1천 5백 식읍의 종표후(從驃侯)에 봉한다.

교위 구왕(句王) 고불식은 표기장군의 부대에 종군하여 호우도왕(呼于屠王)과 왕자 11명과 

포로 1천 7백 68명을 사로잡았으니 1천 1백 호 식읍의 의관후(宜冠侯)에 봉하고,

교위 복다(僕多)에게도 전공이 있으니 휘거후(煇渠侯)에 봉한다.”라고 하였다.]

 

合騎侯敖坐行留不與驃騎會, 當斬, 贖為庶人.  諸宿將所將士馬兵亦不如驃騎,

驃騎所將常選. 然亦敢深入, 常與壯騎先其大(將)軍, 軍亦有天幸, 未嘗困絕也.

然而諸宿將常坐留落不遇.  由此驃騎日以親貴,比大將軍.

[합기후 공손오는 행군을 지체하여 표기장군과의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해 죄를 지었음으로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한나라의 전쟁 경험이 많은 장수들이 거느리는 군사와 병마들도 표기장군만 못했다.  

표기장군은 항상 정예병들을 선발하여 과감히 적진 깊숙이 진격했고 언제나 대군에

앞장섰으나, 그의 군대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위험한 상황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경험이 많은 장군들도 번번히 행군을 지체하여 표기장군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해

군법에 저촉되곤 했다. 이런 일로써 표기장군은 더욱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어

대장군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其秋, 單于怒渾邪王居西方數為漢所破, 亡數萬人, 以驃騎之兵也.

單于怒, 欲召誅渾邪王. 渾邪王與休屠王等謀欲降漢,使人先要邊.  

是時大行李息將城河上,得渾邪王使,即馳傳以聞.

天子聞之,於是恐其以詐降而襲邊,乃令驃騎將軍將兵往迎之. 

驃騎既渡河,與渾邪王眾相望.  渾邪王裨將見漢軍而多欲不降者,頗遁去.

[그해 가을,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 머물면서 자주 한나라 군사에게 패하고,

표기장군의 군사들과 싸움에서 수만 명을 잃은 것에 격분하여 마침내 선우는 혼야왕을 소환해

죽이려고 했다. 혼야왕과 휴도왕 등이 모의하여 한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사람을 변경에 보내

알렸다. 그때 하수의 강변에 성을 축조하고 있던 대행(大行) 이식이 혼야왕의 사자를 만나

전해 듣고 즉시 파발마를 조정에 보내 알렸다. 천자가 듣고 혹시 변경을 습격하기 위해

사항계(詐降計)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여 표기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변경으로 가서 혼야왕 일행을 맞이해 오라고 했다. 표기장군이 하수를 건너

혼야왕의 무리들과 서로 마주 바라보게 되었다. 한나라 군사들의 출현하자,

혼야왕의 비장들이 항복하기를 원하지 않아 많은 비장들이 도망쳐 몸을 숨겼다.]

 

驃騎乃馳入與渾邪王相見, 斬其欲亡者八千人, 遂獨遣渾邪王乘傳先詣行在所,

盡將其眾渡河,降者數萬,號稱十萬.  既至長安, 天子所以賞賜者數十巨萬.  

封渾邪王萬戶,為漯陰侯. 封其裨王呼毒尼為下摩侯,鷹庇為煇渠侯,

禽為河綦侯,大當戶銅離為常樂侯.

[그러자 표기장군을 말을 달려 흉노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혼야왕을 만나보고는 도망치려는

자 8천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혼야왕을 먼저 파발마에 태워 천자의 행재소로 보내고,

혼야왕을 따라왔던 자들을 다 인솔해 황하를 건넜다. 그 무리는 어림잡아 수만 명이었으나 

부르기를 10만 명이라 했다. 이윽고 혼야왕이 장안에 당도하자,

천자가 수십 만의 거금을 상금으로 주고 만 호의 후에 봉했다.

또한 그의 비왕 호독니(呼毒尼)는 하마후(下摩侯)로, 응비(鷹庇)는 혼거후(煇渠侯),

금리(禽犁)는 하기후(河綦侯),대당호(大當戶) 동리(銅離)는 상락후에 봉했다.]

 

於是天子嘉驃騎之功曰:「驃騎將軍去病率師攻匈奴西域王渾邪,

王及厥眾萌咸相奔, 率以軍糧接食, 并將控弦萬有餘人,誅獟駻,

獲首虜八千餘級,降異國之王三十二人, 戰士不離傷, 十萬之眾咸懷集服,

仍與之勞,爰及河塞,庶幾無患,幸既永綏矣.

以千七百戶益封驃騎將軍.」 減隴西、北地、上郡戍卒之半,以寬天下之繇.

[이어 천자는 표기장군의 공로를 치하하면서 말하기를 : " 표기장군 곽거병은 솔선수범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서부 지역 왕인 혼야왕을 공격하여 혼야왕과 그 휘하의 소왕을

비롯하여 그 백성들을 모두 투항시켰다. 표기장군은 그들에게 군량을 주고 인솔하였고, 

한편으로는 궁수() 만여 명을 이끌고 투항을 거부하는 거칠고 사나운 흉노의 군사

8천여 명을 주살하였으며, 또한 다른 오랑캐 나라 왕 32명 항복시켰는데,

이는 아군을 손상시키지 않고서 10만의 흉노 무리를 굴복시킨 쾌거이다.

이로써 표기장군이 빈번히 출병한 노고로 말미암아 황하 유역과 장성 부근의 변경 지방은

화근이 사라져 오래도록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표기장군에게 1천7백호의

식읍을 더 늘려준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농서, 북지, 상군의 수졸들을 반으로 줄이고

천하 백성들의 부역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다.]

 

居頃之,乃分徙降者邊五郡故塞外,而皆在河南,因其故俗,為屬國.

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殺略漢千餘人.

其明年, 天子與諸將議曰:「翕侯趙信為單于畫計, 常以為漢兵不能度幕輕留,

今大發士卒,其勢必得所欲.」 是歲元狩四年也.

[그리고 얼마 후, 투항한 흉노의 무리들을 변경지대의 다섯 군의29), 즉 옛날의 변경 밖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은 모두 하남 일대에 살면서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한 채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다음 해, 흉노가 우북평과 정양을 침입하여 한나라 백성들 1천여 명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해, 천자가 여러 장군들과 의논하며 말하기를 :

" 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해 계책을 내고 있는데 그는 항상 한나라 군사들은 사막을 건너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군사를 대거 출병시켜 공격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해는 원수 4년(기원전 119년) [한무제 재위 22년]이었다.]

元狩四年春, 上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將各五萬騎, 步兵轉者踵軍數十萬,

而敢力戰深入之士皆屬驃騎.  驃騎始為出定襄,當單于. 

捕虜言單于東,乃更令驃騎出代郡,令大將軍出定襄. 

郎中令為前將軍,太仆為左將軍,主爵趙食其為右將軍, 平陽侯襄為後將軍,

皆屬大將軍.  兵即度幕,人馬凡五萬騎,與驃騎等咸擊匈奴單于.

[원수 4년 봄, 황제는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명을 내려 각기 5만의 기병을

이끌게 하고 수십 만의 보병 및 보급무대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했다.

그중 적진 깊숙히 들어가 힘껏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은 모두 표기장군의 부대에 배속시켰다.

처음 표기장군이 선우를 상대하기 위해 정양에서 출병하려고 했으나 흉노의 포로를 잡아 

심문한 결과 선우가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천자가 다시 명을 내려 표기장군은

대군에서 출병하게 하고, 대장군의 부대를 정영에서 출병하도록 하였다. 

낭중령 이광은 전장군, 태복 공손하는 좌정군, 주작도위 조이기(趙食其)는 우장군, 

평양후(平陽侯) 조양(曹襄)은 후장군이 되어 모두 대장군의 부대에 배속하였다.

사막을 건넌 표기장군의 5만에 달하는 기병은 일제히 선우의 진영을 공격했다.]

趙信為單于謀曰:「漢兵既度幕, 人馬罷, 匈奴可坐收虜耳.」乃悉遠北其輜重,

皆以精兵待幕北. 而適值大將軍軍出塞千餘里, 見單于兵陳而待,

於是大將軍令武剛車自環為營, 而縱五千騎往當匈奴. 匈奴亦縱可萬騎.  

會日且入,大風起,沙礫擊面,兩軍不相見,漢益縱左右翼繞單于.

單于視漢兵多,而士馬尚彊,戰而匈奴不利,薄莫,單于遂乘六驘,

壯騎可數百,直冒漢圍西北馳去.  時已昏,漢匈奴相紛挐,殺傷大當. 

[조신이 선우에게 계책을 말하기를 : " 한나라 군사들이 사막을 건너고 나면 사람과 말들이

모두 지칠 것이니, 우리는 앉아서 그들을 포로를 잡으면 됩니다.”라고 하자. 

선우는 그들의 보급 물자를 모두 거두어 사막의 먼 북쪽으로 옮겨 숨기고 그들의 정예병을 

이끌고 그곳에서 한나라 군사들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대장군의 군대도 요새를 나와

1천여 리를 행군하여 한병을 기다리고 있던 선우의 진영을 발견했다.

대장군은 무강거(武剛車)30)를 원형으로 배치하여 진영을 세우고 5천의 기병을 출동시켜 

흉노의 공격을 막게 했다. 흉노도 역시 만 명의 기병을 풀어 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해가 저물 무렵 큰 바람이 불고 모래와 자갈이 휘몰아쳐 얼굴에 부딪쳐 양쪽 군사들은

상대방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틈을 이용한 한나라 진영은 좌우익의 기병을 풀어 선우를

겹겹이 에워쌌다.  선우는 한나라 병사가 많은 데다 그들의 기병이 여전히 막강하여

힘써 싸워도 흉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해 질 무렵, 선우는 마침내 6마리의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수백 명 가량의 건장한 기병만을

거느린 채, 한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곧장 서북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한나라 군사들과 흉노의 군사들이 뒤섞여 혼전을 벌려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漢軍左校捕虜言單于未昏而去,漢軍因發輕騎夜追之,大將軍軍因隨其後. 

匈奴兵亦散走.  遲明,行二百餘里,不得單于,頗捕斬首虜萬餘級,

遂至窴顏山趙信城,得匈奴積粟食軍.  軍留一日而還,悉燒其城餘粟以歸. 

大將軍之與單于會也,而前將軍廣、右將軍食其軍別從東道, 或失道,

後擊單于.  大將軍引還過幕南,乃得前將軍、右將軍.

[한나라의 좌익부대에서 잡은 포로를 심문하여 선우가 날이 저물기 전에 도망쳤음을 알아내고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날쌘 기병을 풀어 한밤중에 선우의 뒤를 추격하게 하고 대장군은

본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흉노의 기병들은 그 틈을 타고 모두 흩어져 달아날 수 있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2백여 리를 추격했으나 결국 선우를 잡지 못하고 만 명의 흉노를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으며, 마침내 한나라 군대는 전언산의 조신성에 이르러 흉노가 숨겨둔

양식을 획득해 군사들에게 먹일 수 있었다. 한군의 추격대는 그곳에서 하루를 머무른 후에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성채와 양식을 모두 불사르고 돌아왔다.

대장군이 선우와 한창 교전할 때에, 전장군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의 군사는 따로 동쪽으로

진격했는데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선우를 공격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대장군이 본대를 이끌고 사막의 남쪽으로 돌아와 전장군과 우장군의 군대를 만났다.]  

 

大將軍欲使使歸報, 令長史簿責前將軍廣, 廣自殺.  右將軍至, 下吏, 贖為庶人.

大將軍軍入塞,凡斬捕首虜萬九千級.  是時匈奴眾失單于十餘日,

右谷蠡王聞之, 自立為單于.  單于後得其眾,右王乃去單于之號.  

驃騎將軍亦將五萬騎,車重與大將軍軍等,而無裨將.  悉以李敢等為大校,

當裨將,出代、右北平千餘里,直左方兵,所斬捕功已多大將軍.

[대장군이 사자를 보내 흉노와 싸워 올린 전과를 보고하고 장사를 시켜

전장군 이광을 심문하게 하자, 비분강개한 이광은 자살하고 말았다.  

우장군은 장안으로 돌아와 형리에 넘겨져 형을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대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요새로 돌아와 전과를 점검해본 결과 포로로 잡거나 참수한 흉노의  

군사는 1만 9천이나 되었다.  이때 흉노의 선우가 실종 된지 10여 일이 되자,

우곡려왕(右谷蠡王)이 듣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으나 선우가 다시 그의 군사들과

합류하여 돌아오자 우곡려왕은 선우의 칭호를 버렸다.  표기장군이 거느린 5만의 기병과

병거 및 보급 물자를 실은 부대의 규모가 대장군의 부대와 대등할 정도였다.  

그러나 배속된 비장이 없어 이감 등을 모두 대교(大校)로 삼아 대(代)와 우북평에서 출병하여

천여 리를 진군해서 흉노의 좌방 군사들과 싸워 포로로 잡거나 참수한 숫자가

대장군보다 많았다.]  

軍既還, 天子曰:「驃騎將軍去病率師, 躬將所獲葷粥之士, 約輕齎, 絕大幕,

涉獲章渠,以誅比車耆,轉擊左大將,斬獲旗鼓,歷涉離侯.  

濟弓閭, 獲屯頭王、韓王等三人, 將軍、相國、當戶、都尉八十三人,

封狼居胥山,禪於姑衍,登臨翰海.  執鹵獲丑七萬有四百四十三級,

師率減什三, 取食於敵, 閒行殊遠而糧不絕,以五千八百戶益封驃騎將軍.」

[표기장군이 돌아오자 천자가 말하기를 : “ 표기장군 곽거병이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여

포로로 잡은 흉노의 군사를 몸소 이끌고 군량을 가볍게 휴대하고 큰 사막을 가로질러

획장거(獲章渠)를 건너 흉노 비거기(比車耆)를 주살하고 다시 방향을 돌려 좌대장을 공격하여

흉노 군사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깃발과 북을 얻고 이후산(離侯山)을 넘고,

계속해서 궁려(弓閭)를 건너 둔두왕(屯頭王)、한왕(韓王) 등 세 명,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

83명을 사로잡고 랑거서산에서는 천신에게, 고연산에서는 지신에게 각각 제사지내고

한해(翰海)의 높은 곳에 올랐다. 흉노의 무리들 7만 4백 43명의 포로와 수급을 얻었으나,

한나라 병력의 손실은 단지 10의 3 이었고 군량은 모두 적으로부터 취하여 멀리까지

행군하면서도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에 표기장군에게 그 공을 기려 5천 8백 호의 식읍을 더한다.”라고 하였다.]

右北平太守路博德屬驃騎將軍,會與城,不失期,從至梼余山,

斬首捕虜二千七百級,以千六百戶封博德為符離侯.  

北地都尉邢山從驃騎將軍獲王,以千二百戶封山為義陽侯.

故歸義因淳王復陸支、樓專王伊即靬皆從驃騎將軍有功, 

以千三百戶封復陸支為壯侯,以千八百戶封伊即靬為眾利侯. 

從驃侯破奴、昌武侯安稽從驃騎有功,益封各三百戶.

校尉敢得旗鼓,為關內侯,食邑二百戶.  校尉自為爵大庶長. 

軍吏卒為官,賞賜甚多.

[우북평의 태수 노박덕(路博德)은 표기장군의 부대에 배속되어 약속기일을 어기지 않고

여성(與城)에서 본대와 합류하여 도여산까지 진군하여 적군 2천 7백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공으로 1천 6백 호의 식읍을 받아 부리후(符離侯)에 봉해졌다. 북지군의 도위 형산은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흉노의 왕을 사로잡아 1천 2백 호의 식읍을 받아 의양후에 봉해졌다.

원래 흉노에서 귀순한 인순왕(因淳王) 복육지(複陸支)와 루전왕(樓專王) 이즉간이 함께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군공을 세워 복육지는 1천 3백 호의 장후에 이즉간은 1천 8백 호의

중리후(眾利侯)에 봉해졌다. 종표후 조파노, 무창후 안계(安稽)도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공을 세워 각기 3백 호의 식읍을 더했고, 교위 이감은 적군의 깃발과 북을 탈취했음으로

관내후에 봉해져 식읍 2백 호를 받았다.

교위 서자위(徐自爲)는 대서장(大庶長)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 외에도 표기장군에 배속된 군관과 군졸들도 상을 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

而大將軍不得益封, 軍吏卒皆無封侯者. 兩軍之出塞, 塞閱官及私馬凡十四萬匹,

而復入塞者不滿三萬匹.  乃益置大司馬位,大將軍、驃騎將軍皆為大司馬. 

定令, 令驃騎將軍秩祿與大將軍等.  自是之後, 大將軍青日退, 而驃騎日益貴.

舉大將軍故人門下多去事驃騎,輒得官爵,唯任安不肯.  

驃騎將軍為人少言不泄,有氣敢任.

[그러나 대장군에게는 식읍을 더해 주지도 않았고 그에게 배속된 장군과 군관 및 병졸들

후에 봉해진 자가 없었다. 대장군과 표기장군의 두 부대가 요새를 나갈 때 사열한 관마와

사마는 모두 14만 필에 달했으나 다시 요새로 돌아온 말은 3만 필에 불과했다. 

이어서 황제는 대사마(大司馬)라는 직위를 만들어 대장군과 표기장군을 임명했다.

또한 칙령을 내려 표기장군의 녹봉을 대장군과 똑같이 했다. 이때부터 대장군 위청의 위세는

약해지고 표기장군은 날이 갈수록 귀해졌다. 대장군의 옛날 친구들과 문하 중에 많은 사람들이

대장군을 떠나 표기장군을 섬겨 빠른 기일 내에 관작을 얻었으나 오로지 임안(任安)만은

러지 않았다.  표기장군은 원래 과묵하여 말수가 적고 기백이 있어 일을 과감하게 했다.]  

天子嘗欲教之孫吳兵法,對曰:「顧方略何如耳,不至學古兵法.」

天子為治第, 令驃騎視之, 對曰:「匈奴未滅,無以家為也.」由此上益重愛之.

然少而侍中,貴,不省士.  其從軍,天子為遣太官齎數十乘,既還,

重車餘棄粱肉,而士有饑者.  其在塞外,卒乏糧,或不能自振,

而驃騎尚穿域蹋鞠.  事多此類.  大將軍為人仁善退讓,以和柔自媚於上,

然天下未有稱也.  驃騎將軍自四年軍後三年,元狩六年而卒.

[천자가 일찍이 그에게 손오병법()을 가르치려고 하자, 표기장군은 대답하기를 :

“ 어떤 전략을 쓸 것인지 만 생각하면 됩니다. 굳이 옛날 병법까지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하였다. 

또 천자가 그를 위해 저택을 지어놓고 그에게 가서 보도록 하자, 표기장군은 대답하기를 :

“ 흉노를 아직 멸하지 않았음으로 집은 필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표기장군을

더욱 아꼈다. 그러나 표기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귀한 신분이었음으로 사졸들을 아낄줄 몰랐다.

그가 종군할 때 천자가 그를 위해 태관31)을 시켜 음식을 실은 수레 수십 승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그 수레에는 여전히 버려지고 남은 양식과 고기가 있는데도 

사졸들 중에는 굶주린 자가 있었다.  그가 요새 밖에 주둔할 때 양식이 떨어져 어떤 사졸들은

허기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는데도 표기장군은 여전히 구역을 표시해 두고 축국을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행했다. 그와 반면에 대장군의 사람됨은 인자하고

선량하고 겸허했으며 유화한 자세로 황제의 환심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지

않았다. 표기장군은 원수 4년에 전쟁에 나가기 시작해서 3년 후인 원수 6년에 죽었다.] 

天子悼之,發屬國玄甲軍,陳自長安至茂陵,為冢象祁連山.

謚之, 并武與廣地曰景桓侯.  子嬗代侯.  嬗少, 字子侯, 上愛之, 幸其壯而將之. 

居六歲,元封元年,嬗卒,謚哀侯.  無子,絕,國除.

自驃騎將軍死後,大將軍長子宜春侯伉坐法失侯.

後五歲,伉弟二人,陰安侯不疑及發干侯登皆坐酎金失侯.  

失侯後二歲,冠軍侯國除.

[천자는 애통해하며 속국의 현갑군(玄甲軍)32)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무릉33)까지 도열시켜 

장례행렬을 보내고 그의 묘총은 기련산(祁連山)의 모습을 본떠서 조성하도록 했다.

천자는 표기장군이 무위를 빛내 영토를 넓혔음으로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곽선(郭嬗)이 표기장군의 후작을 물려받았으나 그때 나이가 어렸다.  

곽선의 자는 자후로 천자가 매우 총애했다. 곽선을 사랑한 천자는 그가 장성하면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곽선은 곽거병이 죽은 지 6년 후에 죽고 아들이 없었음으로 대가 끊겨

후국도 없어지고 말았다.  표기장군이 죽은 후로 대장군의 장자 의춘후(宜春侯) 위항(衛伉)이

법에 저촉되는 죄를 지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  

그리고 5년 후에 위항의 두 동생 음안후 위불의(衛不疑)와 발간후 위등(衛登)도

모두 주금법(酎金法)34)에 연좌되어 후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후국은 없어졌다. 

그리고 2년 후에 관군후(冠軍侯)의 후국도 취소되었다.]  

其後四年,大將軍青卒,謚為烈侯.  子伉代為長平侯. 

 自大將軍圍單于之後,十四年而卒.  竟不復擊匈奴者,以漢馬少,

而方南誅兩越,東伐朝鮮,擊羌、西南夷,以故久不伐胡.

大將軍以其得尚平陽長公主故,長平侯伉代侯.  六歲,坐法失侯.

[그 후 4년, 대장군 위청이 죽자, 열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남 위항이 뒤를 이어

평후()가 되었다. 대장군 위청은 14년 동안 선우를 포위하고 토벌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흉노를 다시 공격하지 않은 것은 한나라의 군마()가 적은 데다,

때마침 남쪽으로는 동월과 남월, 동쪽으로는 조선(), 서쪽으로 강족() 및 서남 지역의

오랑캐를 정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로 오랫동안 흉노를 정벌하지 않았다.

대장군이 평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기에 장평후 위항이 대신 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6년 뒤에 위항은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하고 그의 봉국은 취소되었다.]

 

左方兩大將軍及諸裨將名:最大將軍青, 凡七出擊匈奴, 斬捕首虜五萬餘級.

一與單于戰,收河南地,遂置朔方郡,再益封,凡萬一千八百戶.

封三子為侯,侯千三百戶.  并之,萬五千七百戶. 

其校尉裨將以從大將軍侯者九人. 其裨將及校尉已為將者十四人.  

為裨將者曰李廣,自有傳.  無傳者曰:

[다음은 두 장군과 더불어 여러 비장들의 이름과 공적을 기술한 것이다.

대장군 위청은 도합 7번 출정하여 흉노와 싸워 5만여 명의 적병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선우와 한 차례 교전을 통해 하남 지역을 탈취하여 삭방군을 설치하고 그 공로로 두 차례

식읍을 더 받았는데, 모두 만 천 8백호였다. 그의 세 아들들도 후작에 봉해져 각 후마다

1,300호를 받았다. 이들 부자의 식읍을 합하면 모두 만 5천7백호였다.

대장군을 따라 종군한 교위와 비장들 중에서 후작에 봉해진 자가 모두 9명이었고,

그의 비장이나 교위들 중에 장군이 된 자는 14명이었다. 비장으로는 이광(李廣)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별도로 전기가 있고, 전기가 없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將軍公孫賀.  賀, 義渠人, 其先胡種.  賀父渾邪, 景帝時為平曲侯, 坐法失侯.

賀,武帝為太子時舍人.  武帝立八歲,以太仆為輕車將軍,軍馬邑. 

後四歲,以輕車將軍出雲中.

後五歲,以騎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南窌侯. 

後一歲,以左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無功.

後四歲,以坐酎金失侯.  後八歲,以浮沮將軍出五原二千餘里,無功.

後八歲,以太仆為丞相,封葛繹侯.

賀七為將軍,出擊匈奴無大功,而再侯,為丞相. 

坐子敬聲與陽石公主姦,為巫蠱,族滅,無後.

[장군 공손하는 의거(義渠)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흉노로 그의 부친 혼야(渾邪)는 한경제 때 

평곡후에 봉해졌으나 법을 어겨 후작을 잃었다. 공손하는 무제가 태자였을 때 사인이었다.  

무제 재위 8년(기원전 133년), 공손하는 태복의 신분으로 경거장군이 되어 마읍에 주둔했다.  

그리고 4년 후, 그는 경거장군으로 운중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다시 5년 후에 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공을 세웠음으로 남교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1년 후 좌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정양(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그때는 공을 세우지 못했다. 4년 후, 주금법에 저촉되어 후작을 잃었다.

8년 후, 부저장군이 되어 오원에서 출병하여 흉노의 땅으로 들어가 2천여 리나 진격했지만 

공을 세우지 못했다.  다시 8년 후, 태복에서 승상이 되어 갈역후(葛繹侯)에 봉해졌다.

공손하는 7번 장군이 되어 출병하여 흉노와 싸웠으나 큰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 번 후에 봉해지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승상의 자리에 있을 때 그의 아들 공손경과 양석공주가 간통한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巫蠱)를 행했다가 멸족당했음으로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將軍李息, 郁郅人.  事景帝.  至武帝立八歲, 為材官將軍, 軍馬邑;

後六歲, 為將軍, 出代;後三歲, 為將軍, 從大將軍出朔方:皆無功. 

凡三為將軍, 其後常為大行. 

[장군 이식(李息)은 욱질(郁郅) 사람이다. 한경제를 모시다가 무제 재위 8년(기원전 133년) 

재관장군이 되어 마읍에 주둔했다. 6년 후 장군이 되어 대에서 출전했다.  

3년 후,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에서 출전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는 모두 세 차례 장군이 되었고, 그 후에는 항상 대행()의 관직을 맡았다.]

 

將軍公孫敖,義渠人.  以郎事武帝.

武帝立十二歲,為(驃)騎將軍,出代,亡卒七千人,當斬,贖為庶人.

後五歲,以校尉從大將軍有功,封為合騎侯.  後一歲,以中將軍從大將軍,

再出定襄,無功. 後二歲, 以將軍出北地, 後驃騎期, 當斬, 贖為庶人. 

後二歲, 以校尉從大將軍, 無功.

後十四歲,以因杅將軍筑受降城.  七歲,復以因杅將軍再出擊匈奴,至余吾,

亡士卒多,下吏,當斬,詐死,亡居民閒五六歲. 

後發覺,復系.  坐妻為巫蠱,族.  凡四為將軍,出擊匈奴,一侯.

[장군 공손오(公孫敖)는 의거(義渠) 사람이다. 낭관(郞官)의 신분으로 무제를 모셨다.  

무제 재위 12년(기원전 129년), 기장군이 되어 대군(代郡)에서 출전했다가

부하 군졸 7천 명을 잃었다.  참수형의 죄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인이 되었다.

그후 5년, 교위의 직책으로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군공을 세워 합기후(合騎侯)에 봉해졌다.

1년 후, 중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정양에서 출전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2년 후, 장군이 되어 북지군(北地郡)에서 출전하여 표기장군과의 약속기일을 어겨 참수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인이 되었다. 

그 후 2년, 교위가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14년 후, 인우장군(因杅將軍)이 되어 수항성을 쌓았다.  

7년 후, 다시 인우장군이 되어 출전하여 흉노를 공격하여 여오수(余吾水)에 이르렀으나

많은 사졸들을 잃어 형리에게 넘겨져 참수형의 판결을 받았다.

옥중에서 거짓 죽음을 가장하여 탈옥하여 몸을 숨기고 민가에 살다가 5-6년 만에 발각되어

다시 구금되었다. 그의 처가 무고죄에 연루되어 일족이 멸족되었다.  

공손오는 모두 4번 장군이 되어 흉노를 공격하였으나, 한 차례 공을 세워 후(侯)에 봉해졌다.]

 

將軍李沮,雲中人.  事景帝.  武帝立十七歲,以左內史為彊弩將軍. 

後一歲,復為彊弩將軍.

[장군 이저(李沮)는 운중 사람이다. 한경제를 모시다가 무제 재위 17년(기원전 124년), 

좌내사의 신분으로 강노장군(彊弩將軍)이 되었다. 1년 후, 다시 강노장군이 되었다.]  

 

將軍李蔡,成紀人也.  事孝文帝、景帝、武帝. 

以輕車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樂安侯.  已為丞相,坐法死. 

[장군 이채(李蔡)는 성기(成紀) 사람이다. 효문제, 경제, 무제를 섬겼다. 경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공을 세워 락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그 후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법에 저촉되어 처형당했다.]

將軍張次公,河東人.  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封為岸頭侯. 

其後太后崩,為將軍,軍北軍.

後一歲, 為將軍, 從大將軍, 再為將軍, 坐法失侯. 

次公父隆, 輕車武射也.  以善射, 景帝幸近之也.

[장군 장차공(張次公)은 하동(河東) 사람이다. 교위의 직책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출전해

전공을 세우자, 평릉후에 봉해졌다. 그 후 왕태후가 죽자 장군이 되어 북군을 이끌었다.

1년 후,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했다. 다시 장군이 되었으나 법에 저촉되는 죄를 지어

후작을 잃었다.  장차공의 부친 장륭()은 경거() 부대의 사수()였는데

활을 잘 쏘아 경제가 총애하고 측근으로 두었다.]  

 

將軍蘇建,杜陵人.  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為平陵侯,以將軍筑朔方.

後四歲,為游擊將軍,從大將軍出朔方.

後一歲,以右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亡翕侯,失軍,當斬,贖為庶人.

其後為代郡太守,卒,冢在大猶鄉.

[장군 소건은 두릉(杜陵) 사람이다. 교위의 신분으로 위장군을 따라 출병하여 공을 세워

평릉후(平陵侯)에 봉해졌고, 장군이 되어 삭방에 성을 건설했다.

4년 후, 유격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에서 출전했다.  

1년 후, 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병했으나 흉노의 대군을 만나 흡후 조신은

도망가고군사를 잃었기 때문에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인이 되었다.  

그 후 대군태수가 되었다가 죽었다. 그의 무덤은 대유향(大猶鄉)에 있다.]  

將軍趙信,以匈奴相國降,為翕侯. 

武帝立十七歲,為前將軍,與單于戰,敗,降匈奴.

[장군 조신(趙信)은 흉노의 상국(相國) 출신으로 한나라에 항복하여 흡후에 봉해진 사람이다.  

무제 재위 17년(기원전 124년), 전장군이 되어 선우와 싸우다가 패하여 흉노에 항복했다.] 

 

將軍張騫,以使通大夏,還,為校尉.  從大將軍有功,封為博望侯. 

後三歲,為將軍,出右北平,失期,當斬,贖為庶人. 

其後使通烏孫,為大行而卒,冢在漢中.

[장군 장건(張騫)은 한나라의 사자가 되어 대하(大夏)와 국교를 맺고 귀국하여 교위가 되었다.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워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3년 후, 장군이 되어 우북평에서 출격했으나 대장군과의 약속한 기일을 맞추지 못해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그 후에 다시 사자가 되어 오손(烏孫)과 

국교를 맺고 돌아와 대행(大行)의 직책에 있다가 죽었다. 그의 묘는 한중(漢中)에 있다.]  

 

將軍趙食其,祋祤人也.  武帝立二十二歲,以主爵為右將軍,

從大將軍出定襄,迷失道,當斬,贖為庶人.

[장군 조이기(趙食其)는 대우 사람이다. 무제 제위 22년(기원전 119년), 주작도위의 신분으로

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정양에서 출격했으나 행군 중에 길을 잃었기 때문에

참수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將軍曹襄,以平陽侯為後將軍,從大將軍出定襄.  襄,曹參孫也.

[장군 조양은 평양후의 신분으로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정양에서 출병했다.  

조양은 상국 조참의 후손이다.]  

 

將軍韓說,弓高侯庶孫也.  以校尉從大將軍有功,為龍頟侯,坐酎金失侯.

元鼎六年,以待詔為橫海將軍,擊東越有功,為按道侯. 

以太初三年為游擊將軍, 屯於五原外列城. 為光祿勳, 掘蠱太子宮, 衛太子殺之.

[장군 한열(韓說)은 궁고후 한퇴당(韓頹當)36)의 아들 한칙의 서자이다.

교위의 직책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워 용암후에 봉해졌다가 주금법에 저촉되어

후작을 잃었다.  원정 6년, 황제의 명으로 횡해장군(橫海將軍)이 되어 동월을 공격하여

공을 세워 접도후(按道侯)에 봉해졌다.  

태초 3년(기원전 102년), 유격장군이 되어 오원의 여러 성을 전전하며 주둔했다.  

후에 광록훈이 되어 태자궁에서 무속의 일종인 나무 인형을 파냈가다 태자에게 살해되었다.]  

將軍郭昌,雲中人也.  以校尉從大將軍. 

元封四年,以太中大夫為拔胡將軍,屯朔方.  還擊昆明,毋功,奪印.

[장군 곽창(郭昌)은 운중(雲中) 사람이다. 교위의 직책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정했다.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년),  태중대부의 신분으로 발호장군이 되어 출전하여 삭방에

주둔했다.  다시 곤명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음으로 장군의 직위를 잃었다.]  

 

將軍荀彘, 太原廣武人.  以御見,侍中,為校尉,數從大將軍.

以元封三年為左將軍擊朝鮮,毋功.  以捕樓船將軍坐法死.

[장군 순체(荀彘)는 태원(太原) 광무(廣武) 사람이다.

그는 마차를 잘 몰았음으로 황제의 인정을 받아 시중이 되었다.

후에 교위가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했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조선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누선장군 양복(楊僕)을 무단으로 체포한 행위로 법에 저촉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最驃騎將軍去病,凡六出擊匈奴,其四出以將軍,斬捕首虜十一萬餘級.

及渾邪王以眾降數萬,遂開河西酒泉之地,西方益少胡寇.  

四益封,凡萬五千一百戶.  其校吏有功為侯者凡六人,而後為將軍二人.

[표기장군 곽거병은 모두 6번 출격하여 흉노와 싸웠는데 그 중 네 번은 장군으로 출격하여 

적군 11만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수만 명에 이르는 혼야왕의 부족들을 항복시켜

하서와 주천(酒泉) 지역을 개척하여  흉노의 침입을 크게 감소시켰다.

네 번에 걸쳐 받은 그의 식읍은 모두 합쳐 1만 5천 1백 호나 되었다.  

그를 따라 출정했던 교위와 군리들로써 공을 세워 후에 봉해진 자는 모두 6명이었고

장군이 된 사람은 2명이었다.]

 

將軍路博德,平州人.  以右北平太守從驃騎將軍有功,為符離侯.

驃騎死後,博德以衛尉為伏波將軍,伐破南越,益封. 

其後坐法失侯.  為彊弩都尉,屯居延,卒.

​[장군 노박덕(路博德)은 평주 사람이다. 우북평 태수로 표기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워  

부리후((符離侯)에 봉해졌다. 표기장군이 죽은 후 로박덕은 위위(衛尉)의 직책으로

복파장군이 되어  남월을 공격하여 무찔러 봉지를 늘렸다. 후에 법을 어겨 후의 작위를 잃었다.  

강노도위로 복직되어 거연에 주둔하던 중에 죽었다.]

  

將軍趙破奴,故九原人.  嘗亡入匈奴,已而歸漢,為驃騎將軍司馬.

出北地時有功,封為從驃侯.  坐酎金失侯. 

後一歲,為匈河將軍,攻胡至匈河水,無功.

後二歲,擊虜樓蘭王,復封為浞野侯.

後六歲,為浚稽將軍,將二萬騎擊匈奴左賢王,左賢王與戰,

兵八萬騎圍破奴,破奴生為虜所得,遂沒其軍.  居匈奴中十歲,

復與其太子安國亡入漢.  後坐巫蠱,族. 

[장군 조파노는 원래 구원(九原) 사람이다. 예전에 흉노로 도망쳤다가 다시 한나라에 귀순하여

표기장군 밑에서 사마(司馬)가 되었다. 북지에서 출병하여 공을 세워 종표후에 봉해졌다.  

후에 주금법에 저촉되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

1년 후, 흉하장군이 되어 흉하수까지 진격하여 흉노를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2년 후, 누란왕(樓蘭王)을 공격하여 사로잡아 촉야후(浞野侯)에 봉해졌다.  

6년 후, 준계장군(浚稽將軍)이 되어 2만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했다.  

8만에 달하는 좌현왕의 군대가 조파노의 군대를 포위하여 전멸시키고 조파노를 포로로

잡아갔다.  

조파노는 흉노에서 10년을 살다가 흉노의 태자 안국이 망명할 때 같이 한나라에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무고()의 난에 연루되어 일족이 몰살당했다.]

 

自衛氏興,大將軍青首封,其後枝屬為五侯. 

凡二十四歲而五侯盡奪,衛氏無為侯者.

[위씨 일족이 흥기하면서 대장군 위청이 처음으로 후로 봉해졌고,

그의 후손과 친족 중에서 다섯 명이 후로 봉해졌다.

그러나 24년 동안에 다섯 명의 후들은 모두 작위를 박탈당하고

위씨 일족 중에는 더 이상 후에 봉해진 사람이 없게 되었다.]

太史公曰:

蘇建語余曰:「吾嘗責大將軍至尊重,而天下之賢大夫毋稱焉,

願將軍觀古名將所招選擇賢者,勉之哉.

大將軍謝曰:『自魏其、武安之厚賓客,天子常切齒.  彼親附士大夫,

招賢絀不肖者,人主之柄也.  人臣奉法遵職而已,何與招士!』」

驃騎亦放此意,其為將如此.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 소건(蘇建)이 나에게 말했다.
“ 내가 한 번은 대장군에게 ‘지극히 존귀한 지위에 있으신 대장군을 천하의 현능한 대부들이

칭송하지 않으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옛날의 명장들이 현능한 자들을 초빙한 행위를 본받는데

힘쓰십시오.’라고 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대장군께서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 옛날 위기후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빈객들을 모아 후하게 대접하자

천자는 항상 그것을 절치부심하여 한을 품으셨소. 사대부들을 가까이 두고 현능한 자들을

초빙하고 불초한 자들을 쫓아내는 일은 황제의 권한이오. 남의 신하된 자는 법을 받들고

직책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어찌 사대부들을 초빙하여 그들과 무리를 지을 수 있겠소?’

라고 대답했습니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뜻도 역시 이와 같아 대장군의 행동을 본받았다.  

장군으로써의 그들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 각주 】 

1)평양(平陽)/ 당시 하동군(河東郡) 관하의 현으로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다.

2)평양후(平陽侯)/ 조참의 증손자 조시(曹時)다. 한무제의 누이가 조시에게 시집을 가서

   호칭을 평양공주라고 했다. 조시가 후에 악질에 걸려 봉국에 거하자

   한무제는 장안에 혼자 남게 된 평양공주를 위청에게 개가시켰다.

3) 감천궁(甘泉宮)/ 진시황(秦始皇)이 기원전 220년에 섬서성 함양시 서북의 50키로 떨어진  

    지금의 순화현(淳化縣) 경내의 감천산(甘泉山) 자락에 짓기 시작한 궁전이다.  

    후에 한무제(漢武帝)가 건원(建元 전140∼135년) 연간에 고광궁(高光宮)·영풍관(迎風館)·

    통천대(通川臺) 등을 증축하여, 주위 19리(里;약 7.7㎞)에 걸쳐 12궁(宮), 11대(臺) 등을

    짓고 모두 감천궁(甘泉宮)이라 했다. 또한 산곡(山谷)을 따라서 운양(雲陽) 주위의

    500리(약 200㎞)에 감천원을 조성하여 궁전대각을 지었는데 100개소 이상이었다.

    한(漢)의 양웅(楊雄)의 《감천부(甘泉賦)》에 그 위용(偉容)이 묘사되어 있다.  

4) 거실(居室)/ 보궁(保宮)이라고도 하며 법을 어긴 관원과 그 가족들을 가두어 놓은

    감옥을 말한다.  일설에는 관직명이라는 설도 있다.

    한나라 때 감천거실영승(甘泉居室令丞)이라는 직책이 있었다.  

5) 겸(鉗)/ 겸(鉗)은 감옥에 갇힌 죄수가 목에 찬 칼로 즉 항쇄(項鎖)고 도(徒)는 죄수다.

6) 평양공주(平陽公主)/ 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다. 원래는 양신장공주라고 불렀으나  

    조참(曹參)의 증손 평양이후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여 평양공주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 무제에게 이연년(李延年)을 천거하고 다시 무제에게 원래 자기 집에서 노래부르는

    가희였던 위자부(衛子夫)를 무제에게 보여 후에 황후가 되게 하였다.  

    조시가 일찍 죽어 과부가 되었다가 무제의 조칙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개가했다.  

7) 위자부(衛子夫)/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91년에 죽은 한무제의 두 번째 황후다.  

    자부는 그녀의 자다. 하동군 평양(平陽) 출신으로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다.

    대장군 위청은 그녀의 동모이부 동생이다. 평양공주의 소개로 궁궐에 들어가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 유거(劉據)를 낳아 황후가 되었다. 

    정화(征和) 2년은 기원전 91년으로 한무제 재위 50년이다.

    환관 강충이 한무제에게 태자가 무고로  무제를 저주했다고 모함하자 무제는 군사를 보내

    태자를 체포하려고 하자 태자가 두려워하여 출두하여 결백을 밝히지 못하고 군사를 모아

    강충을 죽이고 저항했다가 싸움에서 지고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난 위자부는 자살했다.  

8) 당읍(堂邑)/ 지금의 강소성 육합 북쪽의 성읍으로 한고조의 공신 진영(陳嬰)의 후국이다.  

    그때 당읍후는 진영의 손자 진오(陳午)가 잇고 있었다.  

9) 대장공주/ 한문제의 장녀이고 한경제의 누이인 유표(劉嫖)로 당읍후 진오에게 시잡갔다.  

    한나라 때 황제의 고모를 대장공주라고 불렀다.  

10) 건장궁(建章宮)/

11) 태복(太僕)/ 주왕조 때 하관의 속관이었으며 진한(秦漢) 왕조가 전례를 쫓아 설치했다.  

      황제의 수레와 말을 관리했으며 질록은 2천 석에 구경의 한 명이다.  

12) 진장(陳掌)/ 곡역후 진평(陳平)의 증손으로 그의 부친 진하(陳何)가 법을 범해 살해되고

      후국이 없어졌기 때문에 후의 작위를 잇지 못했다.

      한무제 때 첨사(詹事)가 되어 위청의 이부 누이동생 위소아와 사통하고 있던 중,

      위자부가 황후에 오르자 진장은 위소아를 처로 삼아 권세가 높았으나

      후의 작위는 얻지 못했다.  

13) 대중대부/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으로 조정의 공론과 고문에 응하는

      직책으로 일정한 직책이 없이 황제의 명이 있을 때에 한하여 업무를 보았다.

      궁중에 기거하면서 명의상으로는 낭중령(郎中令 : 후의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광록훈의 지휘를 받지 않았던 황제의 고급 참모에 해당했다.

      봉록은 1천석으로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으로 불리며  

      황제의 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권력이 매우 컸다.  

14) 롱성(蘢城)/ 한서에는 “용성(龍城)”으로 적혀 있고 또는 “롱(蘢)”으로도 적혀있다.  

      “서방의 호(胡)는 모두 용신을 섬기니 이 때문에 대회를 여는 곳을 용성이라 불렀다.”했다.

     「후한서」에서 “흉노의 풍속에서는 매년 세 번의 용사(龍祠)를 지내며 천신에 제사지낸다.”

      라고 했다. 지금의 몽고공화국 중앙부를 흐르는 Tamir 강(塔米尔河) 부근으로 비정된다.  

15) 교위(校尉)/ 진한 때의 중급 무관직이다. 교는 군대편제의 단위이고 위는 군관을 말한다.  

      전국 말에 생기기 시작해서 진나라 때 중급군관으로 설치되었고 한나라 때에 이르자

      극성을 이루었다. 그 지위는 장군의 다음갔다. 서한 때 한무제가 장안성을 수비하기 위해

      중루(中垒)、둔기(屯骑)、보명(步兵)、월기(越骑)、장수、호기(胡骑)、사성(射声)、

      호분(虎贲) 등의 8교위를 두었다. 질록은 비이천석으로 속관에는 승(承)과 사마가 있었다.  

16) 험윤(玁允)/흉노의 주나라 때 이름으로 당시에는 감숙성(甘肅城), 섬서성(陝西城) 북부 및  

      내몽고자치구 남쪽 일대에 분포하여 거주했다.  

17) 시경 소아(小雅) 6월

18) 시경 소아 출거(出車)

19) 행오(行伍)/ 옛날 군대의 편제로 오는 5명으로 편성된 분대에 해당하고 행은 25인으로 된

      소대에 해당한다. 후에 일반적으로 군대를 의미하는 말로 변했다.  

20) 유혼(窳渾) / 삭방군 경내의 요새이름으로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항금후기 서남이다.

21) 위청은 평양후의 첩실 위온(衛媼)이 평양후국의 소리 정계와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그리고 위온은 다시 평양후와의 사이에서 위자부 및 위소아의 두 자매와 네 아들을 낳았다.  

      위소아가 또 다른 평양후국의 소리 곽중유(郭仲儒)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 곽거병이다.  

      후에 다시 곽중유는 정실을 맞이하여 한선제(漢宣帝) 때 승상을 지낸 곽광(郭光)을 낳았다.  

      즉 곽거병은 위청의 동모이부(同母異父)의 여동생 아들로 생질이 된다.  

22) 표요교위(剽姚校尉)/ 표요(嫖姚) 혹은 표요(票姚)라고도 하며 한무제가 만든 무관직으로  

      재빠르고 용감하다는 뜻이다.  

23) 대하(大夏)/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제국 이름으로 Bactria의 중국 이름이다.  

      원래 페르시아제국의 일 개 행정구역이었으나 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제국에

      속했다가 알렉산더가 죽자, 후계국가 중의 하나였던 셀레우코스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3세기 중엽 독립했다.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를 맞이했던 박트리아제국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걸쳐 전성기 초 국력이 강성해진 박트리아는 북쪽으로는

      아무다리아(Amudarya)강 상류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후에 분열되어 쇠락해진 박트리아는

      기원전 140-130년에 대월지에 의해 점령당했다.

24) 오여(烏盭)/ 지금의 감숙성 란주(蘭州) 동북이다.

25) 속복(遬濮)/ 흉노의 부락명으로 오여산(烏盭山) 북록에 거주했다.

26) 狐奴/ 지금의 감숙성 영창현(永昌縣) 서쪽의 장랑하(莊浪河)다.

27) 거연택(居延澤)/ 지금의 내몽고 최서단의 액제납기 북쪽에 있었던 호수 이름으로  

      거연수(居延水)의 물이 흘러들어가 형성된 데서 얻은 이름이다.  

28) 기련산(祁連山)/ 지금의 감숙성 주천시(酒泉市) 남쪽의 산맥이다.

29) 5군/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 운중(雲中), 삭방(朔方) 등의 군이다. ,

30) 무강거(武剛車)/ 방어기구를 갖춘 전차다.

31) 태관(太官)/ 궁중의 먹을 것을 관장하는 관리

32) 현갑군(玄甲軍)/ 검은 색의 철갑으로 무장한 군사를 말한다.

33) 무릉(茂陵)/ 한무제의 능으로 장안성에서 서북 쪽 40키로의 지금의 흥평시(興平市)에 있다.  

      한무제 2년인 기원전 139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해서 그가 사망한 연도인 기원전 87년인

      53년 동안 조성했다. 지금 남아있는 봉분의 높이는 46미터, 분의 둘레는 420미터로

     주변에 이부인, 위청, 곽거병, 곽광, 김일제 등의 묘가 집중되어 있다.  

34) 주금법(酎金法)/ 한나라 때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그 경비를 제후왕들과 열후들이

      부담해야한다는 법이다.  

      바쳐지는 헌금이나 공물이 적거나 불량하면 불경죄에 해당하여 후작과 봉지를 박탈당했다.  

35) 대유향(大猶鄉)/ 지금의 섬서성 고릉현(固陵縣) 서남이다.

36) 한퇴당(韓頹當)/ 봉호는 궁고후다. 한왕 신(信)이 한고조 유방의 의심을 받아 죽음을 피해  

      흉노로 달아나 살다가 흉노의 퇴당성(頹當城)에서 낳았음으로 이름으로 삼았다.  

      퇴당은 후에 흉노의 상국이 되었다가 한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조카 한영(韓嬰)과 함께

      일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2년 후인 기원전 164년 퇴당은 궁고후에 봉해지고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서신으로

      교서왕(膠西王)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냈으나 그 공을 모두 휘하의 장수들에게 돌렸다.

      퇴당의 봉호는 아들이 한칙에게 전해졌다가 적자가 없었음으로 후국은 폐지되었다.

      한언은 한칙의 서자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