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南越列傳

第 五十三. 南越列傳(남월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13. 17:27

 

             第 五十三. 南越列傳(남월열전)

南越王尉佗者,真定人也,姓趙氏. 秦時已并天下,略定楊越,置桂林、

南海、象郡,以謫徙民,與越雜處十三歲. 佗,秦時用為南海龍川令.

[남월왕 위타는 진정(真定)1) 사람이다. 성은 조(趙)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할 때

양월(楊越)2)을 공략하여 평정하고 계림군(桂林郡), 남해군(南海郡), 상군(象郡)을

설치한 후에 죄를 지은 백성들을 이주시켜 ​월인들과 섞여 살게 하기를 13년이 되었다.

위타는 진나라 때 남해군 관하 용천(龍川)3)의 현령(縣令)이었다.]

 

至二世時, 南海尉任囂病且死, 召龍川令趙佗語曰:「聞陳勝等作亂, 秦為無道,

天下苦之,項羽、劉季、陳勝、吳廣等州郡各共興軍聚眾,虎爭天下.

中國擾亂,未知所安,豪傑畔秦相立.

南海僻遠,吾恐盜兵侵地至此,吾欲興兵絕新道,自備,待諸侯變,會病甚.

​且番禺負山險,阻南海,東西數千里,頗有中國人相輔,此亦一州之主也, 可以立國. 

郡中長吏無足與言者,故召公告之.」 即被佗書,行南海尉事.

[진나라의 2세 황제 때에 남해군위 임효(任囂)가 병이 들어 들어 죽게 되자,

용천현령 조타를 불러 말하기를 : " 내가 듣기로 진승 등이 난을 일으켰으나 무도한 진나라로

인하여 천하가 고통을 당하자, 항우(項羽), 유방(劉邦),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등이

주군(州郡)의 백성들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천하를 다투고 있다고 하오.

이에 중원은 혼란에 빠져 언제 안정될지 알 수 없고 호걸들은 진나라를 배반하여

서로 자립하여 왕을 칭하고 있소. 이곳 남해는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도적들이 이곳까지 쳐들어 올까 나는 걱정하고 있소.

그래서 내가 군사를 동원하여 중원과 새로 만든 길을 끊고 스스로 방비태세를 갖추어

제후들의 변란에 대비했는데, 공교롭게도 병이 심해졌다오. 이곳 반우(番禺)는 험준한 산을

등지고 남해의 바다로 막혀 있으며 동서로 수천 리나 뻗쳐있을 뿐만 아니라 중원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있어 한 주의 중심지로 나라를 세울 수 있소. 군내의 높은 직위의 관리들 중에

함께 의논할만한 사람이 없기에 공을 불러서 의논한 것이오."라고 하였다.

임호는 즉시 조타를 남해군위에 임명하는 문서를 만들어 그로 하여금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

 

囂死, 佗即移檄告橫浦· 陽山· 湟谿關曰:「 盜兵且至,急絕道聚兵自守!」

因稍以法誅秦所置長吏, 以其黨為假守. 秦已破滅, 佗即擊并桂林· 象郡,

自立為南越武王.  ​高帝已定天下,為中國勞苦,故釋佗弗誅.

[마침내 임효가 죽자, 조타는 횡포、양산(陽山)、황계관(湟谿關)4)에 격문을 돌려 알리기를 :

" 중원의 도적떼들이 쳐들어 오려고 한다. 서둘러 길을 끊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지키도록

하라 !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법령을 이용하여 진나라가 임명한 군내의

높은 관리들을 죽이고 자기 사람을 대리하게 했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위타는 바로 계림군과 상군(象郡)을 공격하여 합병하고, 자립하여 남월의 무왕이 되었다.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평정한 후, 중원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여 조타를 주살하지 않고

추방하였다.]

漢十一年, 遣陸賈因立佗為南越王, 與剖符通使,和集百越, 毋為南邊患害,

與長沙接境.  高后時,有司請禁南越關市鐵器.

佗曰:「高帝立我,通使物,今高後聽讒臣,別異蠻夷,隔絕器物,

此必長沙王計也, 欲倚中國,擊滅南越而并王之,自為功也.」

​於是佗乃自尊號為南越武帝,發兵攻長沙邊邑,敗數縣而去焉.

[한고조 11년(기원전 196년), 한나라는 육가(陸賈)를 사자로 보내 조타를 남월왕으로 봉하고

부절을 나누어 주고 사신을 교환했으며 백월의 백성들을 한 데 모아 화목하게 만들어

한나라의 남쪽 변경이 침범을 받지 않도록 했다.

남월은 한나라의 장사국(長沙國)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고후 때 한나라의 관리들이 남월의 철기를 관시(關市)5)에서 사고팔지 못하도록 상소했다.

소식을 들은 조타가 말하기를 : " 고제가 나를 남월왕으로 세우고 사신을 통하여

물자의 교역을 허락하였는데 지금 고후가 신하들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우리를 만이로

차별하여 철기와 물자의 교역을 끊어버렸으니 이것은 장사왕(長沙王)의 계략이 틀림없다.

중국의 힘을 빌려 우리 남월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여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타는 즉시 자신을 남월무제라고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장사국의 변경 성읍을 공격하여 몇 개의 현을 부수고 물러갔다.]

高後遣將軍隆慮侯灶往擊之. 會暑溼, 士卒大疫,兵不能踰嶺.

歲餘,高后崩,即罷兵.  佗因此以兵威邊, 財物賂遺閩越、西甌、駱, 役屬焉,

東西萬餘里. 乃乘黃屋左纛, 稱制, 與中國侔.

[고후는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竈)6)를 장군으로 삼아 남월을 정벌하도록 했으나

마침 더위와 우기를 만나 사졸들 사이에 큰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오령(五嶺)7)을 넘어

남월의 경내로 쳐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일 년 후인 기원전 180년에 고후가 죽자, 한나라 군대는 곧 정벌을 멈추고 물러갔다.

이에 그 기회를 이용한 조타가 군사를 내어 한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고 재물을 내어

민월(閩越), 서구(西甌)8), 낙월(駱越)9) 등을 회유하여 복속시켜 강역을 만여 리나 넓혔다.

이어서 천자만이 타고 다니는 황옥(黃屋)10)에 좌독(左纛)11)을 꽂고 다니며

자기의 호칭을 제(制)라고 하면서 그 지위를 한나라와 대등하게 했다.]

及孝文帝元年,初鎮撫天下,使告諸侯四夷從代來即位意,喻盛德焉.

乃為佗親冢在真定,置守邑,歲時奉祀. 召其從昆弟,尊官厚賜寵之.

詔丞相陳平等舉可使南越者,平言好畤陸賈,先帝時習使南越.

乃召賈以為太中大夫,往使. 因讓佗自立為帝,曾無一介之使報者.

[효문제 원년(기원전 180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천하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달랬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제후들과 사방 오랑캐의 군장(君長)에게 효문제가 대국(代國)에서 들어와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이유와 크고 훌륭한 덕(德)을 알리도록 했다.

이어서 진정에 있는 위타의 부모 무덤에 민호(民戶)를 설치하여 해마다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그의 종형제들을 불러 관직에 임명하여 높이고 후한 상급을 하사하여 총애한다는 뜻을 밝힌

효문제가 승상 진평 등에게 남월에 사자로 보낼만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했다.

진평이 호치(好畤) 출신의 육가가 선제 때 남월에 사자로 다녀온 적이 있어 그곳 사정에

익숙하다고 아뢰었다.  황제가 육가를 불러 태중대부로 삼은 후에 남월에 사자로 보내

위타가 스스로 황제가 된 일과 그 후로는 한 사람의 사절도 보내지 않은 행위를 꾸짖도록 했다.]

 

陸賈至南越, 王甚恐, 為書謝, 稱曰:「蠻夷大長老夫臣佗, 前日高后隔異南越,

竊疑長沙王讒臣, 又遙聞高后盡誅佗宗族, 掘燒先人冢, 以故自棄, 犯長沙邊境.

​且南方卑溼,蠻夷中閒,其東閩越千人眾號稱王,其西甌駱裸國亦稱王.

老臣妄竊帝號, 聊以自娛, 豈敢以聞天王哉!」乃頓首謝, 願長為藩臣, 奉貢職.

[육가가 남월에 당도하자, 위타가 매우 두려워하며 상서를 올려 사죄하기를 :

" 만이의 대장인 노신 위타는 옛날 고후께서 남월을 차별하신 것은 장사왕의 참소 때문이라고

의심했었습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소문에 신 조타의 종족들을 모두 주살하고

선조들의 분묘를 파헤쳤다고 해서 이에 자포자기하여 장사국의 변경을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곳 남방은 지대가 낮고 습한 지역으로 만이 사이에 있어 그 중 동월과 민월에서는

천 명의 군장에 불과한 자도 왕이라고 칭하고 서쪽의 구락(甌駱)과 나국(裸國)까지도

역시 왕호를 칭하고 있습니다. 노신이 망녕되게 제호를 칭한 것은 스스로 즐겨서 한 것 뿐인데

어찌 감히 이 일을 천자께 알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월왕은 육가를 만나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 영원히 번신(藩臣)이 되어 조공을 받들어

올릴 것을 맹세했다.]

 

於是乃下令國中曰:「吾聞兩雄不俱立,兩賢不并世. 皇帝,賢天子也.

自今以後,去帝制黃屋左纛.」陸賈還報,孝文帝大說.

遂至孝景時, 稱臣, 使人朝請.  然南越其居國竊如故號名, 其使天子, 稱王朝命如諸侯.

至建元四年卒. 佗孫胡為南越王.

[그리고 즉시 남월왕은 나라 안에 명을 내리기를 : " 나는 듣기로 두 사람의 영웅은 동시에

설 수 없고 두 사람의 현능한 자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황제는 현능한 천자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처럼 처신하지 않을 것이고, 제(制)라는 칭호와 황옥 및 좌독을 버리겠다."

라고 하였다. 육가가 돌아와 보고하자 효문제는 크게 기뻐했다.

이어서 효경제 때 신하를 칭하여 사자를 보내 조현을 올렸다.

그러나 남월은 자기 본국에서는 조정 몰래 제호를 사용했으며, 단지 천자에게 사자를 보내

알현할 때에만 ‘왕’이라 칭하며 다른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을 받도록 하였다.

남월왕 위타는 건원(建元) 4년(기원전 137년) [한무제 4년]에 죽었다.

위타의 손자 호(胡)가 남월왕에 올랐다.]

此時閩越王郢興兵擊南越邊邑,胡使人上書曰:「兩越俱為藩臣,

毋得擅興兵相攻擊. 今閩越興兵侵臣,臣不敢興兵,唯天子詔之.」

於是天子多南越義,守職約,為興師,遣兩將軍往討閩越.

兵未踰嶺,閩越王弟餘善殺郢以降,於是罷兵. 天子使莊助往諭意南越王,

胡頓首曰:「天子乃為臣興兵討閩越,死無以報德!」遣太子嬰齊入宿衛.

[이때 민월왕 영(郢)이 군사를 일으켜 남월의 변방 고을을 침입하자, 이에 호가 사자를 보내

황제에게 상소하기를 : " 민월과 남월은 한나라의 번신임으로 제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서로를 공격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민월이 군사를 일으켜 신을 침범했으나,

신은 감히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지 못하니, 천자께서 조서를 내려 이 일을 처리해

주시길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자는 남월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행위를 하고

번신으로서의 직분과 맹약을 준수한다고 칭찬하고, 남월을 위해서 군대를 일으키고

두 장군을 파견하여 민월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한나라의 군대가 양산령을

넘기도 전에, 민월왕의 아우 여선(餘善)이 영을 죽이고 한나라로 투항했기 때문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한나라 천자는 장조(莊助)를 파견하여 남월왕에게

조정의 뜻을 명백하게 밝혀주도록 하였다. 이에 조호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

“천자께서 신을 위해 군대를 출동시켜 민월을 토벌하려 하셨으니,

죽어도 그 은덕에 보답할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태자 영제(嬰齊)를 한나라에 보내서 숙위(宿衛)13)를 서게 했다.]

 

謂助曰:「國新被寇,使者行矣. 胡方日夜裝入見天子.」

助去後,其大臣諫胡曰:「漢興兵誅郢,亦行以驚動南越. 且先王昔言,

事天子期無失禮,要之不可以說好語入見. 入見則不得復歸,亡國之勢也.」

於是胡稱病, 竟不入見. 後十餘歲, 胡實病甚,太子嬰齊請歸. 胡薨, 謚為文王.

[남월왕은 장조에게 말하기를 : " 나라가 적에게 침략을 당하여 어수선합니다.

사자께서 먼저 가시면 ​저도 밤낮으로 행장을 준비한 후 서둘러 입조하여 천자께 조현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조가 떠난 후에 대신들의 남월왕에게 간언하기를 :

" 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민월왕 영(郢)을 주살한 일은 우리 남월에게도 두려운 일입니다.

이에 예전에 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자를 받들기를 예를 잃으면 안 되고

또한 그들의 달콤한 말에 입조하여 조현을 올리는 것도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입조해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라고 하자.

남월왕 호는 병을 핑계하고 결국은 입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이 되는 해에 호가 중병에 걸리자 태자 영제(嬰齊)가 귀국을 요청했다.

이윽고 호가 죽자, 시호를 문왕(文王)이라고 했다.]

嬰齊代立, 即藏其先武帝璽. 嬰齊其入宿衛在長安時,取邯鄲樛氏女,生子興.

及即位,上書請立樛氏女為后,興為嗣. 漢數使使者風諭嬰齊,

嬰齊尚樂擅殺生自恣,懼入見要用漢法,比內諸侯,固稱病,遂不入見.

遣子次公入宿衛. 嬰齊薨,謚為明王.

[영제는 남월왕의 자리를 계승한 뒤에 곧바로 그의 증조부였던 무제의 옥새를 감추어두었다.

영제가 한나라 장안(長安)에 들어가 숙위를 설 때에 한단의 규씨(樛氏) 딸을 아내로 취하여

아들 흥(興)을 낳았다. 영제는 왕으로 즉위한 뒤에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서 규씨의 딸을

왕후로 삼고, 흥을 태자로 세우겠다고 청했다. 한나라 조정은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영제를 설득하여 한나라에 들어가 조현을 행하기를 넌지시 권유했으나 영제는 오히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즐겼고 행동을 멋대로 했음으로 그가 들어가 입조하게 되면

한나라 법에 따라 제후들처럼 처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한사코 병을 칭하고

결국은 조현을 올리지 않았다. 영제는 그의 아들 차공(次公)을 입조케 하여 숙위하게 했다.

이윽고 영제가 죽자, 시호를 명왕(明王)이라 했다.]

太子興代立,其母為太后. 太后自未為嬰齊姬時,嘗與霸陵人安國少季通.

及嬰齊薨後,元鼎四年,漢使安國少季往諭王、王太后以入朝,比內諸侯;

令辯士諫大夫終軍等宣其辭,勇士魏臣等輔其缺,衛尉路博德將兵屯桂陽, 待使者. 

王年少,太後中國人也,嘗與安國少季通,其使復私焉.

國人頗知之,多不附太后.  太后恐亂起,亦欲倚漢威,數勸王及群臣求內屬.

即因使者上書, 請比內諸侯, 三歲一朝, 除邊關.

[태자 흥이 뒤를 이어 남월왕에 오르고 그의 모친은 태후가 되었다.

태후가 미처 영제의 희첩이 되기 전에 패릉(覇陵) 사람 안국소계와 정을 통한 적이 있었다.

이윽고 영제가 죽은 후인, 원정 4년(기원전 113년)에 한나라가 안국소계를 사자로 보내

남월왕과 왕태후를 한나라의 제후들처럼 입조하도록 회유하게 했다.

언변이 좋은 간대부(諫大夫)14) 종군(終軍)15) 등을 수행시켜 그 내용을 선포하고,

용사 위신(魏臣) 등에게는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하게 했다. 위위노박덕16)은 군대를 이끌고 계

양17)에 주둔하며 사자를 기다렸다. 남월왕은 어렸고, 왕태후는 중원 출신으로 일찍이

안국소계와 사통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신으로 오자 왕태후는 다시 사통하였다.

남월국의 사람들이 이 사실이 알고, 대부분 왕태후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

이에 태후는 분란이 발생할 것을 두려웠고, 한나라의 위세에 의지할 생각으로

자주 남월왕과 군신들에게 한나라 조정으로 귀속하기를 권유했다.

남월이 사절을 보내 상서를 올려 한나라의 제후들과 같이 신하 되기를 청하고

3년에 한 번씩 조현을 올리겠으니 변경의 관문을 없애달라고 청했다.]

於是天子許之, 賜其丞相呂嘉銀印, 及內史、中尉、太傅印, 餘得自置.

除其故黥劓刑, 用漢法, 比內諸侯. 使者皆留填撫之.

王、王太后飭治行裝重齎,為入朝具.  其相呂嘉年長矣,相三王,

宗族官仕為長吏者七十餘人,男盡尚王女,女盡嫁王子兄弟宗室, 及蒼梧秦王有連.

其居國中甚重,越人信之,多為耳目者,得眾心愈於王.

[이에 천자는 그들의 청을 허락하고 남월의 승상 여가(呂嘉)에게는 은인(銀印)을,

그 밖에 내사, 중위, 태부 등의 인장을 만들어 보내고 나머지 관직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아서

만들도록 했다. 예전의 경형과 의형을 폐지하고 한나라 법을 채택하여 한나라 제후국과 같은

지위가 되었다.  한나라 사자는 월나라에 계속 머물면서 그들을 위로하게 했다.

왕와 왕태후는 예물을 후하게 갖춘 후에 ​행장을 채비하여 한나라에 입조하여 조현을

행하려고 했다. 남월의 재상 여가(呂嘉)는 나이가 많이 먹도록 세 왕을 오래 모시고

그의 종족들 중 출사하여 높은 관리가 된 자만해도 70여 명에 달했다.

여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왕녀들과 결혼했고, 여자들은 왕자 및 왕의 형제나 종실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창오(蒼梧)18)의 진왕(秦王)과도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남월국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남월 사람들이 믿고 따르며 그를 위해

눈과 귀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여가는 왕보다 민심을 더 얻고 있었다.]

王之上書,數諫止王,王弗聽. 有畔心,數稱病不見漢使者.

使者皆注意嘉, 勢未能誅. 王、王太后亦恐嘉等先事發, 乃置酒, 介漢使者權, 謀誅嘉等. 

使者皆東鄉,太后南鄉,王北鄉,相嘉、大臣皆西鄉,侍坐飲.

嘉弟為將,將卒居宮外.  酒行,太后謂嘉曰:「南越內屬,國之利也,

而相君苦不便者,何也?」以激怒使者.  ​使者狐疑相杖,遂莫敢發.

[남월왕이 천자에게 한나라에 귀속하려는 상서를 올리려고 할 때에 여가는 거듭 만류했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가는 결국 마음 속에 반심을 품기 시작하고 병을 핑계로

한나라 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한나라가 사절들이 여가의 태도를 눈치챘으나 분위기가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월왕과 태후 역시 여가가 먼저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주연을 베풀어

한나라 사신의 권세에 도움을 받아서 여가와 그 무리들을 주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나라 사신들은 서쪽, 태후는 북쪽, 왕은 남쪽, 재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동쪽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여가의 동생은 장군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궁궐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술잔이 몇 번 돌자 태후가 여가를 향해 말하기를 : " 남월이 한나라에 복속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 되는 일이오, 승상은 어찌하여 그 일이 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왕태후는 자기의 말이 한나라 사자들을 화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자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서로 미루며 아무도 감히 나서지 않았다.]

嘉見耳目非是,即起而出. 太后怒,欲鏦嘉以矛,王止太後. 嘉遂出, 分其弟兵就舍,

稱病,不肯見王及使者. 乃陰與大臣作亂. 王素無意誅嘉, 嘉知之,以故數月不發.

太后有淫行,國人不附,欲獨誅嘉等,力又不能.

天子聞嘉不聽王,王、王太后弱孤不能制,使者怯無決.

又以為王、王太后已附漢, 獨呂嘉為亂, 不足以興兵, 欲使莊參以二千人往使.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여가가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연회장에서 나갔다.

태후가 노하여 창을 들고 여가의 뒤를 쫓아가 그를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왕이 태후를 막았다.

여가가 궁궐 밖으로 나가 그의 동생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을 나누어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병을 칭하고 왕과 사자를 만나려 하지 않고 대신들과 음모를 꾸며 난을 일으키려고 했다.

왕은 평소에 여가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여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달 동안이나 난을 감행하지 않았다.

태후는 자신의 음행으로 인하여 국인들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가 등을 주살하고

싶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실행할 수 없었다. 천자는 여가는 왕의 명을 받들지 않고,

왕과 왕태후는 세가 약하고 고립되어 여가를 복종시킬 수 없으며,

사자들은 겁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왕와 태후가 이미 한나라에 복속했음으로 여가 혼자서 난을 일으킨다 해도

군사를 움직일만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장삼(莊參)에게 2천 명의 군사를 주어

남월에 사절로 보내려고 했다.]

 

參曰:「以好往, 數人足矣;以武往, 二千人無足以為也.」辭不可, 天子罷參也.

郟壯士故濟北相韓千秋奮曰:「以區區之越, 有王、太后應, 獨相呂嘉為害,

願得勇士二百人,必斬嘉以報.」

於是天子遣千秋與王太后弟樛樂將二千人往,入越境.

[장삼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 " 친선을 위해 사자로 갈 것 같으면 몇 사람이면 족하고,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갈 것 같으면 2천 명의 군사로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며,

장삼이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자 천자는 장삼을 그만두게 했다.

겹(郟)19) 땅의 장사 출신으로 제북왕의 승상을 지낸 한천추가 강개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

" 보잘 것 없는 월나라에 더욱이 왕과 태후가 내응하고 있는데 단지 재상 여가 혼자만

반대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용사 2백 명만 딸려주시면 반드시 여가의 목을 베어 폐하께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천자는 한천추와 왕태후의 동생 규락(樛樂)에게

2천의 군사를 주어 남월국의 변경으로 들어가게 했다.]

 

呂嘉等乃遂反,下令國中曰:「王年少. 太後,中國人也,又與使者亂,專欲內屬,

盡持先王寶器入獻天子以自媚,多從人,行至長安,虜賣以為僮仆.

取自脫一時之利,無顧趙氏社稷,為萬世慮計之意.」

乃與其弟將卒攻殺王、太后及漢使者.

遣人告蒼梧秦王及其諸郡縣,立明王長男越妻子術陽侯建德為王.

而韓千秋兵入,破數小邑.

其後越直開道給食,未至番禺四十里,越以兵擊千秋等,遂滅之.

使人函封漢使者節置塞上,好為謾辭謝罪,發兵守要害處.

[여가등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남월 백성들에게 알리기를 : " 왕은 어리고 태후는 원래

중국 태생으로 중국의 사신과 간통을 저지르고 있는 태후는 오로지 한나라에 복속하려는

마음뿐으로 선왕의 보기(寶器)들을 모두 한나라 천자에게 바쳐 아첨하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노예로 팔려고 한다.

그녀는 단지 남월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위한 일시적인 이익만을 취하고,

조씨(趙氏)의 사직을 보살피고 대대손손을 위한 장구한 계책을 세울 뜻이 없다."라고 하였다.

여가는 즉시 그의 동생과 군사를 일으켜 왕과 태후, 그리고 한나라의 사절들을 살해했다.

​ 이 사실을 창오의 진왕과 각 군현의 관리에게 알린 다음, 명왕의 장남과 남월 출신의 아내가

낳은 아들인 술양후(術陽侯) 건덕(建德)을 남월왕으로 옹립했다.

그때 월나라의 경계에 진입한 한천추와 그의 군사들이 몇 개의 작은 고을을 깨뜨리자

남월은 즉시 길을 열어주고 식량을 공급했다. 이윽고 한천추의 군사들이 반우에서

40리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남월의 군사들이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고는 한나라의 사절의 부절을 함에다 넣고 봉한 후에 요새에다 감추고

거짓으로 한나라에 사죄하는 척하며 군사를 내어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於是天子曰:「韓千秋雖無成功,亦軍鋒之冠.」封其子延年為成安侯.

樛樂,其姊為王太后,首願屬漢,封其子廣德為龍亢侯.

乃下赦曰:「天子微,諸侯力政,譏臣不討賊.

今呂嘉、建德等反,自立晏如,令罪人及江淮以南樓船十萬師往討之.」

[그러자 천자가 말하기를 : " 한천추는 비록 일을 성사시켜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용감한

군인이었다."라고 하였다. 천자는 천추의 아들 한연년을 성안후(成安侯)에 봉하고,

규락은 그 누이가 왕태후의 신분으로 앞장서서 한나라에 복속되기를 원했음으로

그의 아들 규광덕(樛廣德)을 용항후(龍亢侯)에 봉했다.

황제가 사면령을 내리며 말하기를 : " 천자는 미약하고 제후가 폭정을 일삼는데도

신하가 되어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노라.

지금 여가, 조건덕 등이 반란을 일으켜 태연스럽게 자립하여 왕이라 칭하고 있다.

짐은 이에 령을 내려 지금 죄수들을 사면하니, 그들과 더불어 강회(江淮) 이남의

10만 수군(水軍)들은 남월에서 반역한 무리를 정벌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鼎五年秋, 衛尉路博德為伏波將軍, 出桂陽, 下匯水;

主爵都尉楊仆為樓船將軍, 出豫章, 下橫浦;

​故歸義越侯, 二人為戈船、下厲將軍,出零陵,或下離水,或柢蒼梧;

使馳義侯因巴蜀罪人,發夜郎兵,下牂柯江:咸會番禺.

[원정 5년[기원전 112년(한무제 재위 29년)] 가을, 위위(衛尉) 노박덕이 복파장군이 되어

계양20)에서 출병하여 회수(匯水)21)의 강변을 따라 진군하고 ; 주작도위22) 양복(楊僕)23)은  

누선장군이 되어 예장(豫章)24)에서 출병하여 횡포관(橫浦關)25)으로 진군하였으며 ;

옛날 한나라에 귀순하여 후에 봉해진 월인 두 사람은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이 되어

영릉(零陵)에서 출병하여 한 사람은 이수(離水)의 순류를 타고 진격하고,

한 사람은 창오(槍梧)로 나아가게 했다.

다시 치의후(馳義侯)에게는 파촉(巴蜀)의 죄인들과 야량(夜郎)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장가강(牂柯江)을 따라 내려가 : 나중에 반우에서 모두 모이기로 했다.]

元鼎六年冬,樓船將軍將精卒先陷尋陜,破石門,得越船粟,因推而前, 挫越鋒,

以數萬人待伏波.  伏波將軍將罪人,道遠,會期後, 與樓船會乃有千餘人,

遂俱進. 樓船居前,至番禺.

建德、嘉皆城守. 樓船自擇便處,居東南面;伏波居西北面.

會暮,樓船攻敗越人,縱火燒城. 越素聞伏波名,日暮,不知其兵多少.

[원정 6년(기원전 111년) 겨울, 루선장군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먼서 심협26)을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반우로 들어가는 관문 석문27)을 깨뜨리고 남월의 군량과 전선을 노획했다.

이에 승세를 타고 앞으로 진군하여 남월의 선봉부대를 무찌르고 수만 명의 군졸들과 함께

복파장군의 부대를 기다렸다. 복파장군의 군사들은 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행군 거리가

멀었기에 약속한 기일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루선장군의 부대와 만났을 때는

휘하의 군졸들은 천여 명에 불과했다. 두 장군은 즉시 반우성을 향해 진격했다.

​루선장군의 부대가 선두에 서서 반우로 진군하자 건덕과 여가가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다.

루선장군이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여 성의 동남에 주둔했고 뒤따라온 복파장군은

성의 서북에 주둔했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루선장군이 남월의 군사를 패주시키고

화공을 행하여 반우성을 불태웠다. 평소에 복파장군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남월 사람들은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그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伏波乃為營,遣使者招降者,賜印,復縱令相招.

樓船力攻燒敵,反驅而入伏波營中.

犁旦,城中皆降伏波. 呂嘉、建德已夜與其屬數百人亡入海,以船西去.

​伏波又因問所得降者貴人,以知呂嘉所之,遣人追之.

以其故校尉司馬蘇弘得建德,封為海常侯;越郎都稽得嘉,封為臨蔡侯.

[복파장군이 영채를 세우고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투항자들에게는 한나라가 임명하는

관직의 인장을 주고 다시 그들을 성안으로 보내 다른 사람들을 항복시켜 데려오게 했다.

루선장군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적군을 화공으로 공격하여 그들을 복파장군의 진영으로

몰아부쳤다. 새벽 무렵 성안의 적병들은 모두 복파장군에게 항복했다. 여가와 건덕은

한밤중에 이미 그의 부하 수백 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서쪽으로 달아났다.

복파장군이 투항한 남월의 귀족들을 통해 여가가 달아난 곳을 알고 사람을 보태 그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그 결과 교위 사마소홍(司馬蘇弘)은 건덕을 사로잡아 해상후에 봉해졌고 ;

남월의 랑관(郞官) 도계(都稽)는 여가를 붙잡아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졌다.]

蒼梧王趙光者,越王同姓,聞漢兵至,及越揭陽令定自定屬漢;

越桂林監居翁諭甌駱屬漢:皆得為侯.

戈船、下厲將軍兵及馳義侯所發夜郎兵未下,南越已平矣. 遂為九郡.

伏波將軍益封. 樓船將軍兵以陷堅為將梁侯.

自尉佗初王後,五世九十三歲而國亡焉.

[한편 남월왕과 동성(同姓)인 창오왕 조광(趙光)은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남월의 게양령(揭陽令) 정(定)과 함께 스스로 한나라에 항복했다.

또한 남월의 계림감(桂林監) 거옹(居翁)은 구월(甌越)과 락월(駱越) 두 종족을 설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게 했음으로 후의 작위를 얻었다.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의 군사들과

야랑에서 징발한 치의후(馳義侯)의 군사들이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남월은 이미 평정되었다.

한나라는 남월의 땅에 아홉 개의 군을 설치했다28). 복파장군은 봉지에 식읍을 늘렸고,

루선장군은 반우성을 함락시킨 공을 세웠음으로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남월은 이로써 위타가 나라를 세운 이래 5대까지 이어졌으나 93년 만에 나라가 멸망되었다.] 

 

太史公曰:

尉佗之王,本由任囂. 遭漢初定,列為諸侯. 隆慮離溼疫,佗得以益驕.

甌駱相攻,南越動搖. 漢兵臨境,嬰齊入朝.

其後亡國,徵自樛女;呂嘉小忠,令佗無後.

樓船從欲, 怠傲失惑;伏波困窮, 智慮愈殖, 因禍為福.  成敗之轉, 譬若糾墨.

[태사공이 말한다.

위타(尉佗)가 남월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임효(任囂) 때문이었다.

한나라가 일어서서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는 제후의 반열에 섰다.

융려후(隆廬侯)가 남월을 정벌에 나섰다가 전염병으로 물러가자 위타는 더욱 교만해졌다.

구월과 낙월이 서로 공격하자 남월이 동요되었다.

한나라 군사들이 변경에 이르렀음으로 영제(嬰齊)는 입조하여 조현을 올렸다.

그 후에 나라가 망한 것은 모두 왕후 규씨 때문이었다.

여가(呂嘉)는 작은 충성심으로 한나라에 반기를 듬으로써 위타의 후사가 끊기게 만들었다.

루선장군은 욕심이 많아 태만하고 오만하게 굴었기 때문에 미혹에 빠져들었고,

복파장군은 곤궁한 처지에 빠졌지만 지혜롭고 사려깊은 행동으로 군사들의 수를 늘려

화를 복으로 만들었다. 일의 성공과 실패는 마치 먹줄을 긋는 것과 같았다.]

 

【 각주 】

 

1) 진정(眞定) :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경내다.

2) 양월(楊越) : 양월(揚越) 혹은 양오(楊奧)이라고도 하며 전국시대부터 위진(魏晉) 시기까지

    월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로써 원래 양주의 관할구역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3) 용천(龍川) : 지금의 광동성 용천현 서북이다.

4) 횡포(橫浦) : 지금의 광동성 북쪽의 남웅시(南雄市) 부근으로 강서성과의 접경지역、

    양산(陽山) : 지금의 광동성 북쪽의 양산시로 호남성과의 접경지역、

    황계관 : 지금의 광동성 광주시 북쪽 100키로의 영덕시로 당시 남월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5) 관시(關市) : 한나라 때 이민족들과 교역을 행하기 위해 변방으로 통하는 관문에 설치한

    시장을 말한다.

6) 조(竈)/ : 성은 주(周)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63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이다.

    지금의 하남성 영성현인 탕(碭) 출신으로 진2세 2년 기원전 208년, 유방이 탕에 들렸을 때

    그의 사졸로 입대했다. 유방이 무관을 통하여 진나라에 들어가 멸할 때 종군하여

    연오(連敖)로 승진하고 다시 유방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진나라로 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 함께 종군하여 공을 세웠음으로 장피도위(長鈹都尉)가 되었다.

    후에 해하에서 항우를 멸하는 데 공을 세워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융려후에 봉해졌다.

    고후 8년 기원전 180년, 남월왕 조타(趙佗)가 장사국(長沙國)의 변경을 공격하자   

    장군이 되어 남월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때가 여름철이고 우기까지 겹쳐 군영에 전염병이

    돌았음으로 남월을 공격하지 못하고 철군했다. 한문제 전원(前元) 2년 기원전 166년,

    흉노의 노상선우가 14만에 달하는 기병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장안을 향해 쳐들어오자

    농서장군(隴西將軍)으로 대장군 장상여(張相如)에 속해 흉노군에 반격을 가해

    장성 밖으로 몰아냈다. 한문제 후원 원년 기원전 163년에 죽었다.

7) 오령(五嶺) : 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강서성, 등의 변경을 이루는 다섯 개의 큰 산맥을

    합칭하는 지명으로 즉 대수령(大廋嶺), 시안령(始安嶺), 임하령(臨賀嶺), 계양령(桂陽嶺),

    게양령(揭陽嶺) 등을 말한다.

8) 서구(西甌)/ 고대 중국의 남방에 거주하던 월족의 지족이다. 진나라 때 영남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았다.

9) 낙월(駱越)/ 낙월(雒)이라고도 하며 고대 중국의 광동, 광서, 해남도, 운남 및 월남의 북부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하여 살았던 백월(百越)의 일족이다.

    락(駱)은 수경(水耕)을 의미하는 말로 농업을 위주로 살았다.

    전국시대부터 광서에 살었던 락월인들을 서구(西甌)라고 칭하고

    옛문헌에는 락월과 서구를 함께 칭했다가 후에 남월로 통합되었다

10) 황옥(黃屋)/ 노란 비단으로 덮개를 씌운 수레로 황제가 누리는 의전의 일종이다.

11) 좌독(左纛)/ 천자의 수레 좌측이 꽂는 쇠꼬리로 만든 깃발로 천자의 의전용 장식이다.

12) 장조(莊助)/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2년에 죽은 서한의 관리이며

      사부가(辭賦家)로 후에 한명제(漢明帝)의 이름 장(莊)을 휘(諱)하여 성을 엄으로 바꾸어

      엄조(嚴助)라고 불렀다. 회계(會稽) 오현(吳縣) 출신이다. 사부가 엄기(嚴忌)의 아들로

      한무제 원년 기원전 140년 책문으로  현량(賢良)을 뽑을 때 무제의 눈에 띄어 중대부로

      발탁되었다. 조정의 공론을 주도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년 민월이 동구를 쳐들어가 포위하자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회계의 군사를 발하여

      바다로 나아가 동구를 구했다. 6년 남월을 안무하기 위해 남월에 들어가 남월왕을

      설득하여그의 태자를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조현을 올리게 했다.

      얼마 후에 회계태수가 되었다가 다시 시중(侍中)이 되어 황제의 측근에서 모시며

      부(賦)와 송(頌) 수 십 편을 지었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을 획책했을때 평소에 맺은 회남왕과의 친교관계 때문에 연좌되어 주살되었다.

      한서 예문지에 그가 지은 사부 35편이 전해진다. 

13) 숙위(宿衛)/ 원래 숙위는 주나라 때부터 왕궁을 지키는 친위병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한나라 때부터는 주변의 이민족국가들이 인질로 보낸 왕자들이 황제를 호위하는

      위병이 되어 기거하는 제도를 말한다.  주변의 이민족 국가들을 제어하기 위한

      인질의 역할과 그들의 환국하여 왕위를 올렀을 때 친중정책을 펼치고

      중국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한 제도였다.

14) 간대부(諫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으로 조정의 의논을 조정하고

      황제의 고문직을 수행했다. 상설직은 아니었으나 많을 때는 수십 명에 달하기도 했다.

      한나라에 초에는 두지 않다가 한무제가 원수(元狩) 5년 기원전 118년(재위 23년)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녹봉은 월 80斛인 비천석과 70곡인 육백석 사인엔 비팔백석이다.

      궁궐에 상주하며 근무했으므로 명의상으로는 광록훈(光綠勛)의 속관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황제에게 직속된 고급참모로서 급사중(給事中)이나 시중(侍中)의 직을

      겸임하여 정무에 참여하여 권세가 컸다.

15) 종군(終軍)/ 서한의 관리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2년에 죽었다.

      자는 자운(子雲)이다. 지금의 산동성 장구현(章丘縣)인 제남(濟南)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문명을 크게 떨치고 나이18세에 박사의 자자로 뽑혔다.

      장안에 머물면서 책문을 올려 무제의 인정을 받아 알자(謁者)와 급사중에 임명되고

      후에 간대부(諫大夫)의 직을 맡았다.

      원정(元鼎) 4년(전 114년) 남월에 사절로 파견되어 남월왕을 회유하여 조현을 올리도록

      권했다. 다음 해 군사릉 일으켜 한나라에 반기를 든 남월의 상국 여가에 의해 피살되었다.

​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이십 몇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종동이라고

      칭했다.  한서 예문지에 그가 지은 저술이 8편이 있다고 전하는데 본문은 망실되었다.

16) 노박덕(路博德)/ 평주인(平州人)이다. 우북평(右北平) 태수로 표기장군을 쫓아 종군하여

      공을 세워 부리후((符離侯)에 봉해졌다. 표기장군이 죽은 후 로박덕은 위위의 직책으로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어 남월을 공격하여 무찔러 봉지를 늘렸다.

      후에 법을 어겨 후의 작위를 잃었다.강노도위로 복직되어 거연에 주둔하던 중 죽었다

17) 계양(桂陽)/ 지금의 호남성 침주시(郴州市)다.

18) 창오(蒼梧)/ 지금의 광동성, 광서성, 호남성 경계에 존재했던 남월의 분국이다.

      당시 진나라가  설치한 계림군에 속했다가 한무제가 멸하고 그 땅에 창오군을 설치했다.

19) 겹(郟)/ 지금의 하남성 겹현(郟縣)

20) 계양(桂陽)/ 지금의 호남성 침주시(郴州市)로 당시 계양군(桂陽郡)의 치소가 있었다.

21) 회수(匯水)/ 호남성과 광동성을 가르는 구의산 동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주강(珠江)의 지류인 진수(秦水)와 합류하는 강으로 지금의 연강(連江)이다.

22) 주작도위(主爵都尉)/ 한경제 중원 원년 기원전 144년 주작중위를 개칭해서 설치하고

      제후들의 봉작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녹봉은 2천석으로 구경 중의 한 명이다.

      무제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 104년, 다시 우부풍으로 개편되어 내사의 좌우의 관할 중

      우측 땅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의 명칭이 되고 봉작에 관한 일은 대홍려가 담당하게 되었다.

23) 양복(楊僕)/ 지금의 하남성 의양시(宜陽市)인 의양 출신으로 처음에 오대부의 신분으로

      관직에 나가 점차 승진하여 주작도위가 되어 구경의 반열에 섰다.

      무제 때 루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되어 남월을 정벌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워

      원정(元鼎) 6년 기원전 111년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원봉(元封) 4년 기원전 107년, 좌장군 순체와 함께 조선정벌군 대장이 되어 출전했다가

      싸움에 패해 벌을 받아 후의 작위를 잃고 서인이 되었다.

24) 예장(豫章)/ 한초 쟁패시 설치한 예장군의 치소로 관할구역은 지금의 강서성 일대이며

      지금의 강서성 성도인 남창시(南昌市)다.

25) 횡포관(橫浦關)/ 옛 관문으로 이름으로 지금의 광동성 남웅시(南雄市) 서북과 강서성

      대여현(大余縣)서남 사이에 있는 대유령(大庾嶺) 상의 소매관(小梅關)을 말한다.

26) 심협(尋陜)/ 지금의 광동성 영덕시 부근의 정양협(湞陽峽)으로

      지금의 광주시 정북 100키로 지점이다.

27) 석문(石門)/ 광주시(廣州市) 서북

28) 남월의 땅에 새로 설치한 9개의 군은 남해(南海), 창오(槍梧), 울림(鬱林), 합포(合浦),

      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 주애(珠厓), 담이(儋耳) 등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