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朝鮮列傳

第 五十五. 朝鮮列傳(조선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14. 17:48

 

              ​第 五十五. 朝鮮列傳(조선열전)

 

 

朝鮮王滿者,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
秦滅燕,屬遼東外徼.

[조선(朝鮮)1)의 왕 만(滿)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었다.
애초 연나라는 전성기 때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귀속시키고는 관리를 파견하여
장성 밖에 요새를 쌓아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진(秦)나라는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요동(遼東) 바깥의 변방을 경계로 삼았다.]

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진나라의 뒤를 이어 한나라가 일어나자 조선의 땅은 멀어 지키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옛날 진나라 때 세운 요동의 요새를 다시 수리하여 패수를 한나라의 경계로 정하고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 5)이 배반해 흉노에 들어가니,
만이 망명해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머리에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가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서 진나라의 옛 비어 있는 지역을 점거하고
변방을 오가며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과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검(王險)6)을 도읍으로 정했다.]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遼東太守即約滿為外臣,保塞外蠻夷,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勿得禁止.  以聞,
上許之,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真番、臨屯皆來服屬,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
真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又擁閼不通.

[그때가 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의 시기로서, 천하가 처음으로안정을 찾자,
요동 태수는 곧 만과 외신이 되어 요새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만이의 군장(君長)들이 들어와 천자를 만나고자 할 때 금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요동 태수가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했고, 이로써 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그 주위의 작은 나라를 침략해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이 다 복속했고,
그 땅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만이 죽자) 왕위가 아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손자 우거(右渠)에게 이르러 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을 받아 들이자,
백성들은 점점 많아졌고, 또 입조해 황제를 뵙지도 않았다. 또한 진번의 주위 여러 나라들이
상서를 올려 황제를 뵙고자 하면 가로막고 소통하지 못하게 했다.]

 

元封二年,漢使涉何譙諭右渠,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 即渡,馳入塞,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為其名美,即不詰,拜何為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원봉(元封) 2년, 한나라는 섭하를 시켜 우거를 꾸짖고 타이르게 했으나, 끝내 그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섭하가 조선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를 앞두고는 ​수레를 끄는
사람을 시켜 전송하던 조선의 비왕 장(長) 7)을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말을 달려서 요새로
들어가 마침내 황제에게 귀국 보고를 하며 말하기를 : “ 조선의 장수를 죽였습니다.”라고 하자.
황제는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는 명분으로 인해서 꾸짖지 않고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 8)로
임명했다. 조선이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습격해 섭하를 죽여버렸다.
이에 황제는 죄인들을 모아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其秋,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窺知樓船軍少,即出城擊樓船,樓船軍敗散走.
將軍楊仆失其眾,遁山中十餘日,稍求收散卒,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天子為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나라 땅을 출발해 발해를 건너게 하고, 
군사가 5만여 명이었는데 좌장군 순체(荀彘)로 하여금 군사가 5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서
출병하여 우거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우거는 군대를 징발하여 험지를 이용해서 대항했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적군을 공격했으나
패해 흩어지고, 다(多)는 돌아왔으나 군법을 어겨 참형되었다.
누선장군은 제나라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성에 도착했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염탐해 알아내고 즉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이 패해 흩어져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자신의 무리를 잃고
산중에 도망해 10여 일 숨어 있다가 점차 흩어진 군사들을 찾아 거두어 다시 모았다. 
좌장군이 조선의 패수 서쪽의 군사를 공격했으나, 이를 깨뜨리고 전진할 수 없었다.
황제는 두 장군만으로는 불리하다고 여기고,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세로써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服降.」
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眾萬餘,持兵,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為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 山還報天子,天子誅山.

[우거가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 " 항복하기를 원했으나 두 장군이
속임수로 신을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이제 진짜 부절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하오.”하자.
이에 태자를 한나라에 파견해 사죄하게 하고 말 5천필을 헌납하고 군량을 보내기로 했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막 패수를 건너려고 하자, 사자 및 좌장군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의심해, ​태자가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속여 자신을 죽일까 의심해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무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처벌하였다.]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 樓船亦往會,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入海,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因辱亡卒,卒皆恐,將心慚,其圍右渠,常持和節.
左將軍急擊之,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往來言,尚未肯決.

[좌장군이 패수 언덕 위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계속 공격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 역시 군사를 모아, 왕검성의 남쪽에 머물렀다.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자,
몇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평소 황궁에서 황제를 받들어 모셔 총애를
받았는데, 그가 이끈 연나라와 대나라의 군졸들은 사나우며 또 이전의 승리를 믿고
대부분의 군사들이 교만해 있었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이용해
조선에 당도했으나 예전에 이미 고립되어 이미 많은 군사들을 잃었었다.
그는 먼저 우거와 싸움을 하다가 싸움에 패하여 곤욕을 치르며 군사들을 잃었기 때문에
그 휘하의 군졸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장수된 자신은 마음속으로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한나라의 군사들이 우거를 포위하고는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강화가 맺어지기만을 바랬다.
그런데 좌장군이 급히 왕검성을 치려고 하자, 조선의 대신들은 몸래 사람을 시켜 사적으로
누선장군에게 항복하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左將軍亦使人求閒卻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疑其有反計,未敢發.

[좌장군은 몇 차례 누선장군에게 함께 싸울 것을 재촉했으나 누선장군은 서둘러 항복하겠다는
약속을 성사시키려는 욕심으로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좌장군도 사람을 시켜 그 틈에서
조선을 항복시키려 했으나 조선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고 마음은 누선장군에게 가 있었다.
이런 까닭에 두 장군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고, 지금은 조선과 더불어 사사로이 친하며, 조선도 또 항복하지 않으니
그가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 있는가 하고 의심했지만 감히 발설하지는 않았다.]

 

天子曰將率不能,前乃使衛山諭降右渠,右渠遣太子,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卒沮約.  今兩將圍城,又乖異,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有便宜得以從事.  遂至,
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今如此不取,恐為大害,非獨樓船,又且與朝鮮共滅吾軍.」

[황제는 장수가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기에 위산을 시켜 우거에게 항복하라고 타일렀다.
이때 우거가 태자를 파견했는데 위산이 사자로서 전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더불어 잘못을 저질러 마침내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다.
이제 두 장군이 성을 포위했지만 또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그런 까닭에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제남 태수 공손수를 시켜 가서 그 일을 바로 처리하게 하고,
편의에 따라 임의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은 말하기를 :
“조선은 벌써 공격해 함락시켰어야 하지만, 아직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누선장군이 여러 차례 싸움을 기약했지만 모이지 않은 것을 말하고,
평소 의심해 온 일들을 전부 공손수에게 이야기했다.
그가 말하기를 : “이제 이와 같은 자를 잡지 않는다면 아마도 큰 해가 될 것이며,
누선장군 혼자뿐만 아니라 또 그는 점차 조선과 함께 우리 군대를 무찌를 것입니다.”하였다. ]

 

遂亦以為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 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并其軍,以報天子. 天子誅遂. 左將軍已并兩軍,即急擊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 將軍王唊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并將, 戰益急, 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공손수 역시 그렇다고 여기고, 부절을 사용해 누선장군을 불러 좌장군의 병영에 들어와서
일을 의논하게 했고, 거기에서 즉시 좌장군의 부하에게 명령해 누선장군을 사로잡게 하고,
그의 군대를 병합해 버렸다.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공손수를 죽였다.
좌장군은 이미 두 군대를 병합해 즉시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조선의 재상 노인(路人)과 재상 한음(韓陰), 이계(尼谿)의 재상 삼(參)과 장군 왕협(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 “ 처음에 누선에게 항복하려고 했으나 누선은 지금 붙잡혀 있고,
좌장군 혼자 군사를 병합해 거느리고 있으니 전세가 더욱 위급하여 아마 더불어
싸울 수 없을 것 같지만 우리의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음, 왕협, 노인은 다 도망해 한나라에 항복했다. 노인은 도망하는 도중에 죽었다.]

 

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為四郡.
封參為澅清侯,陰為荻苴侯,唊為平州侯,長降為幾侯.
最以父死頗有功,為溫陽侯.  左將軍徵至,坐爭功相嫉,乖計,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當待左將軍,擅先縱,失亡多,當誅,贖為庶人.

[원봉 3년 여름, 이계의 재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옛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관리들을 공격했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재상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죽이게 했다. 그런 까닭에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 을 설치했다. 삼을 획청후(澅淸侯)에 봉했고, 한음을 적저후(狄苴侯)에 봉했고,
왕협을 평주후(平州侯)에 봉했으며, 장항을 기후(幾侯)에 봉했다.
최는 아비가 항복하려고 오는 도중에 죽은 공으로 인해서 온양후(溫陽侯)에 봉해졌다.
좌장군은 불려 와서 공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고 계책을 어긋나게 했다는 죄를 받아
기시(棄市)의 형벌을 받았다. 누선장군 역시 군사가 열구(洌口)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으나 자신이 멋대로 먼저 공격하다가 군사를 많이 잃어
죽어야 마땅했지만, 돈으로 죄를 용서받고 대신 평민이 되었다.] 


太史公曰:
右渠負固,國以絕祀. 涉何誣功,為兵發首. 樓船將狹,及難離咎.
悔失番禺,乃反見疑. 荀彘爭勞,與遂皆誅. 兩軍俱辱,將率莫侯矣.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右渠)는 왕검성의 견고하고 험난한 것만 믿고 한나라에 항거하다가
조선의 사직이 끊기게 되었다.
섭하(涉何)는 거짓으로 공로를 세워 나라와 조선 사이에 병화를 일으키는 시초가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누선장군(樓船將軍)도 마음이 좁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반우(番禺)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결국은 서로 반목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순체(荀彘)는 공을 다투다가 공손수(公孫遂)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누선장군과 좌장군 모두가 욕됨을 입어 그 중 아무도 열후의 반열에 서지 못했다.]

【 주석 】
1) 조선(朝鮮) : 사기정의(史記正義)에 고려의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은 왕검성을 말하고 또 옛부터 말하기를, 조선 땅이라 불러왔다고 했다.
    조선(朝鮮), 고려(高麗), 맥(貊), 동옥저(東沃沮), 5국의 땅은, 동서 1200리, 남북 2000리이며,
    그 서울은 동쪽에 있다.  조선의 동쪽으로 400리를 나가면 대해(大海)가 있고,
    북쪽의 경계인 '영주(營州)'까지는 920리이다.
    남으로 '신라국' 까지 600리, 북으로는 '말갈국'까지 1400리이다
2) 시황 21년 기원전 226년 왕분(王賁)이 연나라의 도성 계성(薊城)을 공격하였다.
     진왕이 왕전(王翦)으로 하여금 증원군을 이끌고 가서 왕분을 돕게 했다.
     왕전은 연나라 태자 단(丹)이 이끌던 연군(燕軍)을 격파하고 계성(薊城)을 점령하였으며
     태자 단의 목을 얻었다. 연왕은 동쪽의 요동(遼東)으로 도망가서 그곳의 왕이 되었다.
3) 시황 25년 기원전 222년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왕분(王賁)을 장수로 삼아 요동의
     연왕을 공격하게 했다. 왕분이 싸움 끝에 연왕(燕王) 희(喜)를 사로잡았다.(진시황본기)
4) 패수(浿水) : 패(浿)는 패(沛)이다. 패수는 요동의 요새 밖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낙랑의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패수는 보(普)에서 크게 꺾인다.
     요동에 번한현이라고 있었다. (普)는 번(番)과, 한(汗)은 한(寒)과 통한다.(한서지리지)
5) 노관(盧綰) : 노관의 부친과 한고조 유방의 부친인 태상황과는 매우 친한 친구였다.
    태상황이 한고조를 낳자 그 부친도 노관을 낳았다. 한고조와 노관은 같은 날에 태어나서
    동무하며 같이 자랐다. 고조가 패현에서 궐기할 때 노관은 객의 자격으로 종사했다.
    고조가 항우를 파하고 한나라를 세우자 노관은 장안후가 되었다.
    이어서 연왕 장도(臧荼)가 한나라에 투항하자 그 빈자리에 노관이 봉해졌다.
    이어서 한고조와 여후(呂后)가 유씨가 아닌 공신들로서 제후에 봉해진 사람들을 차례로
    주살하자 노관도 위협을 느끼고 황제에게 조현을 올리기 위해 경사에 올라가지 않았다.
    한고조는 번쾌(樊噲)를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노관은 가솔들을 거느리고 흉노로 도망친 것이다.
6) 왕험성 : 한서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요동(遼東)에 험독현<險瀆縣>을 말한다고 했다.
    험독현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를 말한다. 조선왕이 도읍을 삼은 왕검성은
    낙랑군 경내를 흐르던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
7) 장(長)은 비왕(裨王)의 이름이다. 비왕은 섭하를 전송하기 위해 패수까지 따라온 것을
    섭하가 그 호위를 시켜 죽인 것이다.
8) 동부도위 : 요동군(遼東郡) 무차현(武次縣)은 당시 동부도위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