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西南夷列傳

第 五十六. 西南夷列傳(서남이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15. 17:55

 

        第 五十六.   西南夷列傳(서남이열전) 

西南夷君長以什數,夜郎最大;其西靡莫之屬以什數,滇最大;

自滇以北君長以什數,邛都最大:此皆魋結,耕田,有邑聚. 

[서남이의 군장(君長)은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야랑(夜郞)1)의 세력이 가장 강대했고 ;  

그 서쪽의 미막2)의 부족들도 역시 수십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 전(滇)3)이 가장 컸으며 ;

전의 북쪽으로도 수십 명의 군장이 있었고 그 중에서 공도(邛都)4)가 가장 컸는데 ;  

그들은 모두 머리에 상투를 틀고 밭에 농사를 지으며 성읍과 촌락을 이루며 살았다.]

其外西自同師以東, 北至楪榆, 名為巂、昆明, 皆編發, 隨畜遷徙, 毋常處,

毋君長, 地方可數千里.  自冄以東北,君長以什數,徙、筰都最大;

自筰以東北,君長以什數,冄駹最大.  其俗或士箸,或移徙,在蜀之西. 

自冄駹以東北,君長以什數,白馬最大,皆氐類也.  此皆巴蜀西南外蠻夷也.

[그들의 바깥 서쪽으로는 동사5), 북쪽으로는 접유(楪榆)6)에 이르기까지 수(嶲)와

곤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들은 머리를 길게 땋고 가축을 방목하면서 옮겨 다녔는데,

일정한 거주지도 우두머리도 없었지만 그들이 활동한 반경은 사방 수천 리나 되었다.

염(冄)으로부터 동북쪽에도 군장이 수십 명을 헤아렸는데 사(徙)와 작도가 가장 강대했고 ; 

작도에서부터 동북쪽에도 군장이 수십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염방()의 세력이 가장 컸다.

그들의 풍습은 어떤 때는 정착하여 살고 어떤 때는 옮겨 다녔는데, 모두 촉 땅 서쪽에 위치했다.  

​염방으로부터 동북쪽에도 군장이 수십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에서 백마(白馬)가 가장 컸는데,

이들은 저족과 같은 종족이었다. 이들은 모두 파와 촉 서남쪽 바깥에 사는 만이(蠻夷)들이다.]  

始楚威王時,使將軍莊蹻將兵循江上,略巴、黔中以西. 

莊蹻者,故楚莊王苗裔也.  蹻至滇池,地方三百里, 旁平地,肥饒數千里,

以兵威定屬楚.  欲歸報, 會秦擊奪楚巴、黔中郡, 道塞不通, 因還, 以其眾王滇,

變服,從其俗,以長之.  秦時常頞略通五尺道,諸此國頗置吏焉.

十餘歲,秦滅.  及漢興,皆棄此國而開蜀故徼. 

巴蜀民或竊出商賈,取其筰馬、僰僮、髦牛,以此巴蜀殷富.

[처음 초위왕7) 때, 장군 장교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巴)와 검중(黔中)

서쪽의 땅을 공략하게 했다. 장교는 본래 초장왕의 후손이다.

장교가 전지(滇池)에 도착해 보니, 그 지방은 사방이 300리나 되었으며,

그 일대는 평지로 비옥한 평야가 수천 리에 펼쳐 있었다.

이에 장교는 무력으로 그곳을 평정한 뒤 초나라에 복속시키고 돌아가 보고하려 했으나,

마침 진나라가 초나라의 파군과 검중군을 공격하여 빼앗아가는 바람에 길이 막혀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을 이끌고 전 땅으로 돌아간 장교는 그곳 사람들의

왕이 되어 복장을 바꾸고 그들의 풍속을 따랐다.  진()나라 때 상알()이 이 지방을

공략해 오척도()8)를 개통시키고, 이곳의 여러 나라에 관리를 두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진나라가 멸망하였다. 한나라가 일어나 이곳의 여러 나라들을 포기하고

촉 땅에 요새를 쌓아 경계로 삼았다. 파군과 촉군의 백성들 중에 간혹 몰래 요새를 넘어 

작국()의 말, 북국()의 노예와 야크를 가져와 장사하여 파군, 촉군의 세력이 왕성해져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建元六年,大行王恢擊東越,東越殺王郢以報. 

恢因兵威使番陽令唐蒙風指曉南越.  南越食蒙蜀枸醬,蒙問所從來,

曰「道西北牂柯,牂柯江廣數里,出番禺城下」.  蒙歸至長安,問蜀賈人,

賈人曰:「獨蜀出枸醬,多持竊出市夜郎.  夜郎者,臨牂柯江,

江廣百餘步,足以行船.  南越以財物役屬夜郎,西至同師,然亦不能臣使也.」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대행 왕회가 동월을 공격하자, 동월은 자신들의 왕 영(郢)을 죽이고 

왕희에게 그 사실을 통보했다. 왕회는 이 기회에 자신의 군사들의 위세를 가지고

파양() 현령 당몽()으로 하여금 남월에 사자로 보내 귀순을 넌지시 권하게 했다.

남월은 당몽에게 촉나라에서 생산되는 구장(枸醬)9)을 대접하니, 당몽이 그 구장을 어디서

구했는지를 묻자, : 남월 사람이 대답하기를 : " 서북쪽의 장가강(牂柯江)에서 가져왔습니다.

장가강은 너비가 몇 리나 되며 동남으로 흘러 반우성 밑을 지나 남해로 들어갑니다.”하였다.  

장안으로 돌아온 당몽이 촉나라 상인을 불러 물어보니, 그 상인이 대답하기를 :

촉나라에서만 구장을 만드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래 야랑으로 가지고 나가 팔아넘깁니다.

야랑이 있는 장가강은 너비가 백 보가 넘어 배로 건널 수 있습니다.

남월은 재물을 이용하여 야랑을 귀속시키고 서쪽으로 동사(同師)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 그들은 신하처럼 부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蒙乃上書說上曰:「南越王黃屋左纛,地東西萬餘里, 名為外臣,實 一州主也.

今以長沙、豫章往,水多絕,難行.  竊聞夜郎所有精兵,可得十餘萬, 浮船牂柯江,

出其不意,此制越一奇也.  誠以漢之彊,巴蜀之饒,通夜郎道,為置吏,易甚.」

上許之.  乃拜蒙為郎中將,將千人,食重萬餘人,從巴蜀筰關入,遂見夜郎侯多同.

[당몽은 곧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아뢰기를 : " 남월왕 조호(趙胡)10)는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좌독(左纛)을 꽂은 황옥(黃屋)으로 덮개를 씌운 수레를 타고 다니며, 다스리는 땅은 동서로

만여 리나 되어, 비록 한나라의 외신(外臣)이라고 칭하나 실상은 한 주(州)의 군주입니다.  

이제 장사(長沙)와 예장군(豫章郡)의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도, 물길이 끊어지는 곳이 많아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이 가만히 들어보니, 야랑이 가지고 있는 정예 병사가

10여 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  그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장가강을 내려가 불시에 남월을

습격한다면 이것이 남월을 누를 수 있는 훌륭한 계책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만일 한나라의 강대함과 파군과 촉군의 풍요로움으로 야랑까지 가는 길을 연다면

관리를 두는 일은 아주 쉬울 것입니다.”라고 하자.  황제는 그의 주장을 허락하였다.

이에 당몽을 랑중장에 임명하여 천 명의 군사와 식량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인부 만여 명을

주었다.  당몽은 군사를 이끌고 파,촉을 나가 작관(筰關)을 통해 서남이로 들어가

야랑의 군장 다동(多同)을 만났다.]

 

蒙厚賜,喻以威德,約為置吏,使其子為令.  

夜郎旁小邑皆貪漢繒帛, 以為漢道險,終不能有也,乃且聽蒙約. 

還報,乃以為犍為郡.  發巴蜀卒治道,自僰道指牂柯江. 

蜀人司馬相如亦言西夷邛、筰可置郡. 

 使相如以郎中將往喻,皆如南夷,為置一都尉,十餘縣,屬蜀.  

當是時,巴蜀四郡通西南夷道,戍轉相馕.

[당몽은 황제가 내린 많은 하사품을 주고 천자의 위세와 덕망을 일깨운 뒤 그곳에 관리를

두기로 약속하고  야량후의 아들을 현령에 임명했다. 야랑 주변의 작은 부락들은 한결같이

한나라 비단과 명주를 탐내고 있었고,  한나라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험하기 때문에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 당몽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당몽이 장안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하자, 한나라는 그곳에 건위군(犍為郡)을 설치하고

파촉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북도(僰道)에서 장가강(牂柯江)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하게 했다.

촉군 사람 사마상여도 황제에게 서이(西)의 공(), 작()은 군을 설치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에 황제는 그를 낭중장(郎中將)으로 임명하여 그곳으로 보내 회유하도록 했다.  

사마상여는 모든 것을 남이처럼 행하고 그곳에 한 사람의 도위와 열 개의 현을 설치하고

모두 촉에 속하게 했다.  이때 파와 촉 등의 4군에서는 서남이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수자리하면서 군량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數歲,道不通,士罷餓離溼死者甚眾;西南夷又數反,發兵興擊,秏費無功.

上患之,使公孫弘往視問焉.  還對,言其不便.  及弘為御史大夫,

是時方筑朔方以據河逐胡,弘因數言西南夷害,可且罷,專力事匈奴. 

上罷西夷,獨置南夷夜郎兩縣一都尉,稍令犍為自葆就.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 길은 개통되지 않았고, 군사들은 지치고 굶주린 데다 습기에 시달려

죽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서남이들의 잦은 반란으로 군사를 보내 진압했으나,

낭비만 늘어날 뿐 성과가 없었다. 황제는 이를​ 염려하여 공손홍을 보내 살펴보고 물어보게 했다.

공손홍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익이 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얼마 뒤에 공손홍이 어사대부()가 되었는데, 이때가 삭방군에 성벽을 수축하고

황하에 의지하여 오랑캐()를 축출하려고 했다.  공손홍은 기회를 보아 여러 차례 서남이로

통하는 길을 개통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폐해를 말했다.

이 때에 그 사업을 잠시 멈추고 역량을 집중하여 흉노에 쏟아야한다고 주장했다.

황제가 공손홍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남이로 통하는 도로에 대한 공사를 중지하고

오직 남이와 야량 두 현에 한 사람의 도위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모든 군현은 철폐했다. 

서남이와 통하는 길은 건위군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서히 완성시키도록 했다.]  

及元狩元年, 博望侯張騫使大夏來, 言居大夏時見蜀布, 邛竹, 杖, 使問所從來, 

曰「從東南身毒國,可數千里,得蜀賈人市」. 或聞邛西可二千里有身毒國.

騫因盛言大夏在漢西南,慕中國,患匈奴隔其道,誠通蜀, 身毒國道便近,有利無害.

[원수 2년[기원전 121년(한무제 20년)] 박망후 장건이 대하(大夏)에 사자로 다녀와서 고했다.

“ 제가 대하에 있을 때, 촉(蜀)의 베와 공(邛)의 대나무 지팡이를 보고 어디서 들여온 것이냐고

물었더니 ‘ 동남쪽에 있는 신독국(인도)에서 들여왔는데, 그곳은 대략 수천 리나 되는데, 

촉의 상인에게서 사가지고 온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신독국은 공(邛)의 서쪽 2천 리쯤 되는 곳에 있다고도 했습니다.”  

장건이 또 힘주어 말하기를  대하13)는 한나라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우리 한나라와

통호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흉노가 길을 막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만일 촉에서부터

신독국에 이르는 길을 개통시키면 편리하고 가까워 이익이 있을 뿐 해는 없다고 하였다.] 

於是天子乃令王然于、柏始昌、呂越人等,使閒出西夷西,指求身毒國.

至滇,滇王嘗羌乃留,為求道西十餘輩.  歲餘,皆閉昆明,莫能通身毒國.

滇王與漢使者言曰:「漢孰與我大?」及夜郎侯亦然.

以道不通故,各自以為一州主,不知漢廣大. 

使者還,因盛言滇大國,足事親附.  天子注意焉.

[이에 천자는 왕연우ㆍ백시창ㆍ여월인등을 사자로 삼아 흉노가 모르게 서이의 서쪽으로 나가서

신독국을 찾아보게 했다. 그들이 전(: 운남 곤명 일대)에 도달하니 전왕 상강이 그들을 남게하고,

더불어 그들이 파견하여 서쪽으로 길을 찾아 나선 10여 명을 억류시켰다. 

1년 남짓 지나도록 그들은 모두 곤명에 갇혀 결국 신독국까지 가려고 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전왕이 한나라 사자에게 묻기를 : “ 한나라와 우리나라 중 어느 쪽이 더 큰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에서 방면된 한나라 사자들이 돌아오는 길에 만난 야랑후 역시 이같이 물어 보았다.  

길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저마다 한 주의 군주라고 여기고 한나라의 넓고 큼을 몰랐다.

사신들은 돌아와 전(滇)은 큰 나라이니 한나라와 가까이할 만한 하다고 강조하였다. 

황제는 그 말에 관심을 가졌다.]

及至南越反,上使馳義侯因犍為發南夷兵.  且蘭君恐遠行,旁國虜其老弱,

乃與其眾反,殺使者及犍為太守.  漢乃發巴蜀罪人嘗擊南越者八校尉擊破之. 

會越已破,漢八校尉不下,即引兵還,行誅頭蘭.  頭蘭,常隔滇道者也.  

已平頭蘭,遂平南夷為牂柯郡.

夜郎侯始倚南越,南越已滅,會還誅反者,夜郎遂入朝.  上以為夜郎王.

[남월이 란을 일으켰을 때, 천자는 치의후에게 건위군에서 남이의 군사를 동원시키도록 했다. 

그런데 차란(且蘭)14)의 군주는 자신의 군대가 멀리 가면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노약자들을

잡아갈 것을 겁내 자신의 무리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사자와 건위군 태수를 죽였다.

그래서 한나라는 파와 촉의 죄인들 가운데 일찍이 남월을 공격한 일이 있는 자와 팔교위15)를

보내 남월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팔교위는 때마침 월나라가 격파되었으므로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와서 차란으로 가서 두란(頭蘭)16)을 정벌했다.

두란은 한나라의 사절이 전(滇)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나라이다.  

두란을 평정하고 드디어 남이도 평정하여 장가군(牂柯郡)을 두었다.

야랑후는 원래 남월에 의지하고 있었으나 남월이 멸망하고 한나라의 군사들이 모반한 자를 베고

돌아오자, 마침내 입조했다.  천자는 그를 야랑왕으로 삼았다.]

 

南越破後,及漢誅且蘭、邛君,并殺筰侯,冄駹皆振恐,請臣置吏.

乃以邛都為越巂郡,筰都為沈犁郡,冄駹為汶山郡,廣漢西白馬為武都郡.

上使王然于以越破及誅南夷兵威風喻滇王入朝. 

滇王者,其眾數萬人,其旁東北有勞寖、靡莫,皆同姓相扶,未肯聽. 

勞寖、靡莫數侵犯使者吏卒.

[남월이 멸망한 뒤 한나라가 차란과 공(邛)의 군주를 베어 죽이고 또 작후(筰侯)를 죽이자,  

염(冄)과 방(駹)의 두 군주는 두려운 나머지 한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며 한나라의 관리를

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공도(邛都)에는 월수군을, 작도(筰都)에는 침리군(沈犁郡)을,

염과 방에는 문산군(汶山郡)을, 광한(廣漢) 서쪽의 백마(白馬)에는 무도군(武都郡)을 각

각 설치하여 한나라의 관리들을 파견했다. 황제는 왕연오(王然於)를 보내 월나라를 깨뜨리고,

남이를 무찌른 한나라 군사의 위세를 자랑하여 전왕(滇王)에게 입조하라고 권고토록 했다.

그러나 전왕은 그 무리가 수만 명이나 되고, 그 동북쪽에 노침(勞浸)과 미막(扉莫)이 있었는데,

모두 같은 성을 가지고 있어 서로가 도왔기 때문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노침과 미막에서 한나라 사자와 관리 및 군졸들을 침범하는 일이 잦았다.]  

 

元封二年, 天子發巴蜀兵擊滅勞寖、靡莫, 以兵臨滇.  滇王始首善, 以故弗誅.

滇王離難西南夷,舉國降,請置吏入朝.  於是以為益州郡,賜滇王王印, 復長其民.   

西南夷君長以百數,獨夜郎、滇受王印.  滇小邑,最寵焉.

[원봉(元封) 2년, 천자는 파와 촉의 군사를 동원하여 노침과 미막을 쳐서 멸망시키고 군대를

전(滇)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전왕은 처음부터 한나라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전왕은 서남이에서 떨어져 나와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한나라 관리를 두며 입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곳을 익주군(益州郡)으로 삼고 

전왕에게 왕의 인을 주어 예전처럼 그곳 백성들의 군장으로 있게 했다.

서남이의 군장은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야랑과 전(滇) 만이 왕의 인을 받았다.

전은 작은 나라였지만 오히려 한나라로부터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 

 

太史公曰:

楚之先豈有天祿哉?在周為文王師,封楚.  及周之衰,地稱五千里.

秦滅諸候,唯楚苗裔尚有滇王.  漢誅西南夷,國多滅矣,唯滇復為寵王.

然南夷之端,見枸醬番禺,大夏杖、邛竹.  西夷后揃,剽分二方,卒為七郡.

 

[태사공은 말한다.
초나라 조상은 하늘의 복을 받았을까 ?  주나라 때에는 문왕의 스승이었던 죽웅(鬻熊)이

초나라에 봉해져,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그 땅을 5,000리나 넓혔다. 이어서 진나라가 제후들을

멸망시켰을 때에도 초나라의 후예 장교(莊蹻)만이 전왕(滇王)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가 있었다.  

한나라가 서남이를 무찔러 많은 나라들이 멸망했지만, 전(滇)만은 다시 천자의 총애를 받아

왕의 신분을 유지했다. 그러나 서남이 정벌의 발단은 당몽이 반우에서 구장을 맛본 데서

시작했고,  대하(大夏)의 사건은 공(邛)에서 만든 대나무 지팡이를 본 데서 시작했다.

서이는 뒤에 서쪽과 남쪽 둘로 갈라졌고, 마침내 7개 군 17)이 되었다.] 

 

【 각주 】 

1) 야랑(冶郞)/ 지금의 귀주성 서부, 운남성 동북, 사천성 남부에 걸쳐 있었던

    중국 고대 이민족 국가

2) 미막(靡莫)/ 지금의 운남성 심전(尋甸) 회족자치현 일대

3) 전(滇)/ 지금의 운남성 동쪽 전지(滇池) 일대에 있었던 중국 고대 이민족 국가다.

    전국시대 말 초나라의 장군 장교(莊蹻)가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점령했으나 초

    나라의 서쪽 땅이 진나라에 의해 점령당하자, 길이 끊겨 돌아오지 못하고 전에 머물며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했다.  

4) 공도(邛都)/ 지금의 사천성 서남부 서창시(西昌市) 일대다.

5) 동사(同師)/ 지금의 운남성 용릉현(龍陵縣) 일대

6) 접유(楪楡)/ 지금의 운남성 대리시(大理市) 서쪽의 용해이다. 洱海湖 서안에 있었다.

7) 초위왕(楚威王)/ 기원전 339년에 즉위하여 329년에 죽은 전국 때 초나라의 군주다.  

    미(羋) 성에 이름은 웅상(熊商)이고 초선왕(楚宣王)의 아들이다.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며 초도왕 이후 초나라의 국세를 가장 강대하게 발전시킨 군주다.

    그는 일생의 사업을 초장왕이 이룩한 패업을 회복하는데 두고 기타 열국들의 맨 앞에

    서기 위해 힘썼다. 초위왕 7년 기원전 333년 그는 월왕 무강(無疆)을 패주시키고

    그의 오나라 땅을 모두 점령하여 장강의 남안에 석두성을 쌓아 지금의 남경성의 효시인  

    금릉읍을 설치했다. 같은 해에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 장군 신박(申縛)이 이끄는 제군과

    사수(泗水) 강변에서 싸워 물리치고 서주(西州)를 포위했다.

    이로써 초나라의 강역은 사수유역에서 장강 중하류까지 확대되고  

    초위왕의 명성은 중국을 진동시켰다. 재위 10년에 죽고 아들 회왕이 뒤를 이었다.  

8) 오척도(五尺道)/ 진나라가 건설한 중국고대의 도로이름으로 지금의 사천성 의빈시에서

    시작하여 운남성 곡정현에 이르렀다. 중국 고대에 사천분지에서 귀주성과 운남성 일대의

    서북고원과 통하는 유일한 교통로 였으며 도로의 폭이 5척이었음으로 얻은 이름이다.

    전국.진한 시대 때의 한 척은 22.5cm로 5척은 1.2미터다. 

9) 구장(枸醬)/ 구는 호깨나무로 열매는 당도가 높아 맛이 있다.

    즉 호깨나무 열매로 담근 장이다.  

10) 조호(趙胡)/ 남월 무제 조타의 손자다.  

11) 작관(筰關)/ 수경주(水經注)에는 부관으로 나와있다. 부관은 지금의 사천성 합강시다.

12) 신독국(身毒國)/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과 접경을 이루는 지역으로 건독(乾毒)

      혹은 천축(天竺)이라고 했다.

13) 대하(大夏)/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제국 이름으로 Bactria의 중국이름이다.

      원래 페르시아제국의 일 개 행정구역이었으나 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제국에

      속했다가 알렉산더가 죽자 후계국가 중의 하나였던  셀레우코스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3세기 중엽 독립했다.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를 맞이했던  박트리아제국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걸쳐 전성기 초 국력이 강성해진 박트리아는 북쪽으로는 

      아무다리아(Amudarya)강 상류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후에 분열되어 쇠락해진 박트리아는 기원전 140-130년에

      대월지에 의해 점령당했다. (사기 대원열전)  

14) 차란(且蘭)/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초 때까지 존재했던 고대 왕국으로 지금의 귀주성

      도균(都勻)、복천(福泉)、황평(黃平)、귀정(貴定) 일대를 영토로 했다.

      후에 한나라에 반기를 들어 건위군 태수를 죽였으므로  남월을 평정한 한나라 군사들이

      귀환하는 길에 차란의 군주를 죽이고 그 땅에 차란현을 설치했다.  

15) 팔교위(八校尉)/ 한무제 때 설치된 직책으로 중루(中壘), 둔기(屯騎), 보병(步兵),

      월기(越騎), 장수(長水),  호기(胡騎), 재성(財聲), 호분(虎賁) 등의 교위(校尉)를 말한다.  

16) 두란(頭蘭)/ 지금의 귀주성 귀양시와 황평현(黃平縣) 일대에 있었던

      중국 고대의 남이(南夷)에 속한 왕국이다.

17) 서남이의 7개군 :

      건위군(犍爲郡) : 치소는 북도(僰道) 지금의 사천성 의빈시(宜賓市),

      장가군(牂柯郡) : 치소는 차란(且蘭) 지금의 귀주성 황평현(黃平縣),

      월수군(越嶲郡) : 치소는 공도(邛都), 지금의 사천성 서창시(西昌市)

      익주군(益州郡) : 치소는 전지(滇池), 지금의 운남성 곤명시(昆明市) 남

      무도군(武都郡) : 치소는 무도(武都), 지금의 감숙성 무도현 북 50키로

      침리군(沈犁郡) : 치소는 작도(筰都), 지금의 사천성 한원현(漢源縣) 4년 후인 전97년 철폐

      문산군(汶山郡) : 치소는 문강(汶江), 지금의 사천성 무문(茂汶),

                                 한선제 때 철폐되어 촉군에 편입되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