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匈奴列傳

第 五十. 匈奴列傳(흉노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10. 17:07

 

        第 五十.   匈奴列傳(흉노열전)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

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後氏)의 후예로 순유(淳維)1)라고 한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이후에는 산융(山戎)、험윤(獫狁)、훈육(葷粥)2)으로 불리며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목축을 하며 이리저리 옮겨 살았다.]  

 

其畜之所多則馬、牛、羊,其奇畜則橐駞、驢、驘、駃騠、騊駼、騨騱.

逐水草遷徙,毋城郭常處耕田之業,然亦各有分地.  毋文書,以言語為約束.

兒能騎羊,引弓射鳥鼠;少長則射狐兔:用為食.  士力能毋弓,盡為甲騎.

[그들이 기르는 가축은 주로 말, 소, 양이고 진기한 가축으로는 낙타, 나귀, 노새, 결제(駃騠)·

도도(騊駼)· 탄해(驒騱) 3) 등이다.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니며 성곽과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각 부족은 영역을 분명히 나누어 가졌다. 글이나 서적이 없었으므로

말로써 서로 약속을 했다. 어린 아이들도 양(羊)을 타고 활로 새나 쥐를 잡았으며,

조금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를 사냥하여 양식으로 먹었다.  

장정이 되면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其俗,寬則隨畜,因射獵禽獸為生業,急則人習戰攻以侵伐,其天性也.

其長兵則弓矢,短兵則刀鋋.  利則進,不利則退,不羞遁走. 

茍利所在,不知禮義. 

[그들의 풍속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며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긴급할 때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싸움을 연습하여 다른 부족들을 침략하여 약탈했다.

이것은 그들의 타고난 천성이었다. 그들이 먼 곳을 공격할 때는 활과 화살을 사용했고,

가까이 접근하여 싸울 때에는 칼과 자루가 짧은 창을 사용했다.

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퇴각하면서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예의(禮義)를 차리지 않았다.]  

 

自君王以下,咸食畜肉,衣其皮革,被旃裘.  壯者食肥美,老者食其餘. 

貴壯健,賤老弱.  父死,妻其後母;兄弟死,皆取其妻妻之. 

其俗有名不諱,而無姓字.  夏道衰,而公劉失其稷官,變于西戎,邑于豳.

[군왕(君王)을 비롯한 모두가 가축의 고기를 먹으며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어 입고 털이 달린

모피는 외투로 입었다. 장정들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은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자를 귀히 여기고 노약한 자를 천하게 여겼다. 부친이 죽으면 그 후처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형수나 제수 등은 남은 형제가 취해 아내로 삼았다.  

그들의 풍속에서는 이름이 있고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성(姓)이나 자(字)는 없다.  

하(夏)나라의 사회기강이 무너지고, 공유(公劉)4)가 농사일을 관장하는 벼슬인 직관을 잃자  

서융(西戎)으로 들어가 빈(豳) 땅에 도읍을 정했다.]

 

其後三百有餘歲, 戎狄攻大王亶父, 亶父亡走岐下, 而豳人悉從亶父而邑焉,

作周.  其後百有餘歲,周西伯昌伐畎夷氏.  後十有餘年, 武王伐紂而營雒邑,

復居于酆鄗,放逐戎夷涇、洛之北,以時入貢,命曰「荒服」.

[그리고 3백여 년 후에 융적이 고공단보5)를 공격하자 고공단보는 기산 아래로 도망쳤고,

이에 빈 사람들은 고공단보를 따라 옮겨와서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주()나라를 일으켰다.

그 후 백여 년 후에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견이씨(畎夷氏)6)를 정벌했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낙읍에 도읍을 정한 후에 

다시 풍호(酆鎬)에 살며 ​융이()들을 경수()와 낙수() 이북으로 쫓아내

철따라 조공을 바치게 하고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황복()’이라고 불렀다.]

其後二百有餘年,周道衰,而穆王伐犬戎,得四白狼四白鹿以歸. 

自是之後,荒服不至.  於是周遂作甫刑之辟.  

穆王之後二百有餘年,周幽王用寵姬褒姒之故,與申侯有卻.

申侯怒而與犬戎共攻殺周幽王于驪山之下,遂取周之焦穫,

而居于涇渭之閒,侵暴中國. 

[그후 2백여 년 후에 주나라의 국운이 쇠해지기 시작했을 때 주목왕8)이 견융을 정벌하여

네 마리의 흰 이리와 사슴을 잡아서 돌아오자 이때부터 황복의 이족들은 조현을 행하지 않았다.

이에 주나라는 보형(甫刑)9))이라는 법을 만들었다. 목왕 이후 2백여 년이 지난 주나라 말년에 

주유왕이 포사(褒姒)에게 빠져 왕비를 내치자 왕비의 친정아버지 신후와 틈이 생겼다.  

신후가 노하여 견융과 함께 쳐들어와 여산 밑에서 주유왕을 죽이자,

견융은 주나라의 초호()10)를 점령하고 경수와 위수() 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중원의 제후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秦襄公救周,於是周平王去酆鄗而東徙雒邑.  

當是之時,秦襄公伐戎至岐, 始列為諸侯.

是後六十有五年,而山戎越燕而伐齊,齊釐公與戰于齊郊. 

其後四十四年,而山戎伐燕.  燕告急于齊,齊桓公北伐山戎,山戎走.

其後二十有餘年,而戎狄至洛邑,伐周襄王,襄王奔于鄭之氾邑.

[한편 진나라 양공()11)이 주나라를 구원하여 주나라 평왕은 풍호를 떠나 동쪽 낙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당시 진양공은 융족을 정벌하기 위해 기현(岐縣)에 이르자,

비로소 제후들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65년(기원전 706년)후에 산융은 연()나라를 넘어와서 제()나라를 침범하여

제희공(齊僖公)이 이끄는 제나라군과 제나라의 교외에서 싸웠다.

그리고 다시 44년(기원전 664년)후에 산융은 다시 연나라를 침공했다.  연나라가 위급함을

제나라에 알리자, 제환공이 북쪽으로 원정을 행하여 정벌했음으로 산융은 도망쳤다.  

그 후 다시 20여 년(기원전 636년) 후에 융적은 낙읍에 이르러 주양왕을 공격했다.

이에 주양왕은 정나라의 범읍(氾邑)으로 달아났다.]

 

初, 周襄王欲伐鄭, 故娶戎狄女為后, 與戎狄兵共伐鄭.  已而黜狄后, 狄后怨, 

而襄王後母曰惠后, 有子子帶,欲立之,於是惠后與狄后、子帶為內應,

開戎狄,戎狄以故得入,破逐周襄王, 而立子帶為天子.  

於是戎狄或居于陸渾,東至於衛,侵盜暴虐中國. 中國疾之,

故詩人歌之曰「戎狄是應」,「薄伐獫狁,至於大原」, 「出輿彭彭,城彼朔方」.

[처음에 주나라 양왕은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융적의 부족장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융적의 지원병과 더불어 정나라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양왕은 융적 출신의 왕후를 내쫓으니, 융적의 군주가 원한을 품었다.

그때 양왕의 계모 혜후에게는 자대라는 아들이 있었다. 자대를 주왕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혜후는 적후(狄后) 및 자대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었으므로 융적이 입성하여

주나라 군사들을 격파하고 양왕을 나라 밖으로 쫓아낸 후에 자대를 주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때부터 융적은 육혼(陸渾)12)에 거주하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위(衛)나라 국경까지

진출하는 등 중원의 제후국들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자 중원의 제후국들은 그들을 싫어했으므로 시인들은 그들의 포학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 戎狄是膺(융적시응) ”,융적을 응징하도다. 

 薄伐獫狁,至於大原, (박벌험윤, 지어대원),  험윤을 쳐부시어, 태원에 이르렀도다

" 出輿彭彭,城彼朔方, (출여팽팽, 성피삭방),  수많은 수레를 내어, 저 삭방에 성을 쌓았다."] 

 

周襄王既居外四年,乃使使告急于晉.

晉文公初立, 欲修霸業, 乃興師伐逐戎翟, 誅子帶, 迎內周襄王, 居于雒邑. 

當是之時, 秦晉為彊國.  晉文公攘戎翟, 居于河西圁, 洛之閒, 號曰赤翟, 白翟.

[주나라 양왕은 도성 밖에서 4년 동안 살면서 사신을 진()나라로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그때 진(晉)나라 문공는 막 자리에 올라 패업을 이루려는 군사를 일으켜 융적을 토벌하여

쫓아내고 자대를 죽여 주양왕을 영립하여 낙읍으로 모셔 주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그 당시 섬진(陝秦)과 당진(唐晉)은 강국이었다. 진문공은 융적을 쫓아내

하서의 은수()와 낙수() 사이로 내쫓고, 그들을 적적과 백적으로 나누어 불렀다.]

 

秦穆公得由余,西戎八國服於秦,故自隴以西有綿諸、緄戎、翟、獂之戎,

岐、梁山、涇、漆之北有義渠、大荔、烏氏、朐衍之戎.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 

各分散居谿谷,自有君長,往往而聚者百有餘戎,然莫能相一. 

[또한 진목공(秦穆公)은 유여(由餘)를 얻어 서융(西戎)의 여덟 나라를 진나라에 복속시켰다.

그 여덟의 융족 나라는 농서 서쪽의 면제(綿諸), 곤융(緄戎)、적(翟)、원지융(豲之戎)과 기산,

양산과、경수와 칠수(漆水)의 북쪽으로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지(烏氏), 구연 등이었다.

그리고 당진(唐晉)의 북쪽에는 임호와 루번의 융족들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 산융

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산의 계곡에 거주하면서 각기 군장들이 있어

때때로 100여 개의 부족들이 합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하나로 통일하지는 못했다.]

 

自是之後百有餘年, 晉悼公使魏絳和戎翟, 戎翟朝晉. 

後百有餘年, 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分晉地而有之,則趙有代、句注之北,魏有河西、

上郡,以與戎界邊.

其後義渠之戎筑城郭以自守,而秦稍蠶食,至於惠王,遂拔義渠二十五城.

惠王擊魏,魏盡入西河及上郡于秦.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진도공(晉悼公)16)은 위강을 시켜 융적과 강화를 맺게 하자

융적은 당진에게 조현을 행했다. 다시 백여 년 후에 조양자17)가 구주산18)을 넘어

대(代)를 무찔러 조씨 종족을 병합하고 호,맥(胡,貉)에 이르렀다.  

그후 한위(韓魏) 두 종족과 힘을 합쳐 지백(智伯)을 멸하고 당진국을 셋으로 분할하여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즉 조나라는 대(代)와 구주산 이북의 땅을 점령하고

위나라는 하서와 상군을 차지하여 융족과 경계를 접했다.  

그후 의거(義渠)의 융족들은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켰으나 진나라에 의해 서서히 잠식당해

진혜왕 대에 이르러 의거의 25개 성을 함락시켰다.

진혜왕은 위나라를 쳐서 위나라의 서하와 상군에 이르는 모든 땅을 점령했다.]  

 

秦昭王時,義渠戎王與宣太后亂,有二子.  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

遂起兵伐殘義渠.  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筑長城以拒胡.  

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

筑長城,自代并陰山下,至高闕為塞.  而置雲中、鴈門、代郡.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

[진소왕(秦昭王) 때 의거의 융왕과 선태후(宣太后)와 밀통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군사를 내어 의거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진나라는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연결하는 장성을 축조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았다.  한편 조나라의 무령왕(武寧王)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변시켜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말을 타고 활쏘는 방법을 가르쳐 북쪽의 임호(林胡)와 루번(樓煩)을

무찌르고 장성을 쌓아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 산맥의 기슭을 따라 고궐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안문(雁門)、대(代) 등의 군을 설치했다.

그 후에 연나라의 현능한 장군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잡혀가 그들의 신임을 얻은 후에

연나라에 귀국해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동호를 패주시켰다.

동호는 이로써 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當是之時, 冠帶戰國七, 而三國邊於匈奴.  其後趙將李牧時, 匈奴不敢入趙邊.

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悉收河南地.  

因河為塞,筑四十四縣城臨河, 徙適戍以充之.  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

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 又度河據陽山北假中.

當是之時,東胡彊而月氏盛.  匈奴單于曰頭曼,頭曼不勝秦,北徙.

[연나라 역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군을 설치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막았다. 

당시 중원에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전국칠웅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후에 조나라의 장군 이목이 있는 동안은 흉노는 감히 조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후에 육국을 멸한 진나라 시황제는 몽염(蒙恬)을 시켜 10만의 군사로

흉노를 공격하여 하투(河套)의 남쪽 지역을 모두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황하를 요새로 삼아 황하의 강변을 따라 44개의 현, 성을 축조하고 죄수들을 사로 보충하여

지키게 했다. 직도(直道)를 건설하여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개통시켰다.  

또한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계곡을 참호로 삼아 수선이 가능한 곳은 보수하여

임조(臨洮)에서 요동까지 만여 리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했다.

또 황하를 건너 양산에 거점을 마련하고 북가(北假)를 점령했다.  

당시에는 동호의 세력이 강하고 월지(月氏)가 번성했다. 그때 흉노의 선우는 두만(頭曼)이었다.  

두만은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자 북쪽으로 옮겨 살았다.]

 

十餘年而蒙恬死,諸侯畔秦,中國擾亂,諸秦所徙適戍邊者皆復去,

於是匈奴得寬,復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單于有太子名冒頓.

後有所愛閼氏, 生少子, 而單于欲廢冒頓而立少子, 乃使冒頓質於月氏.  

冒頓既質於月氏, 而頭曼急擊月氏.  月氏欲殺冒頓, 冒頓盜其善馬, 騎之亡歸.

頭曼以為壯,令將萬騎.  冒頓乃作為鳴鏑,習勒其騎射,令曰:

「鳴鏑所射而不悉射者,斬之.」 行獵鳥獸,有不射鳴鏑所射者,輒斬之.

[그리고 10여 년 후에 몽염이 죽고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중국은 혼란에 빠졌으며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 보냈던 죄수들로 이루어졌던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흉노는 마음 놓고 서서히 황하를 건너와 살면서 옛날의 요새를 경계로 삼아 

중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두만 선우에게는 묵돌(冒頓)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후에 연지를 사랑하여 작은 아들을 낳은 선우가 묵돌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두만은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에 즉시 월지를 기습했다.

이에 월지는 묵돌을 살해하려고 했다. 묵돌은 좋은 말을 훔쳐 타고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두만이 묵돌의 행위를 장하게 여겨 그에게 만 명의 기병을 주어 이끌게 했다.

그러자 묵돌은 명적(鳴鏑)21)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말타고 활을 쏘는

훈련을 시키며 명령을 내리기를 : “ 명적이 향하는 곳으로 활을 쏘아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인다. ” 라고 하였다.

이윽고 짐승을 사냥할 때 명적이 향하는 곳을 향해 화살을 쏘지 않은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 

 

已而冒頓以鳴鏑自射其善馬,左右或不敢射者,冒頓立斬不射善馬者.

居頃之,復以鳴鏑自射其愛妻,左右或頗恐,不敢射,冒頓又復斬之.

居頃之, 冒頓出獵, 以鳴鏑射單于善馬, 左右皆射之. 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

從其父單于頭曼獵,以鳴鏑射頭曼,其左右亦皆隨鳴鏑而射殺單于頭曼,

遂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聽從者.  冒頓自立為單于.

[얼마 후에 묵돌은 명적을 자기의 애마에게 날렸다. 그러자 자기 좌우의 기병들 중에서

차마 쏘지 못한 자가 있었다. 묵돌은 자기의 애마를 향해 활을 쏘지 않은 자를 모두 참수했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다시 명적을 자기의 사랑하는 처에게 날렸다.

좌우의 기병들은 겁이 난 나머지 감히 활을 쏘지 못한 자가 있자 묵돌은 역시 그들을 죽였다.  

또 얼마 후에 묵돌이 사냥을 나가 명적을 선우의 애마를 향해 날리자 좌우의 기병들이

모두 활을 쏘았다.  이로써 묵돌은 그의 좌우 기병들을 모두는 쓸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자기의 아버지인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나간 묵돌은 명적을 두만을 향해 쐈다.

그의 좌우 기병들은 모두 명적이 향하는 곳을 따라 화살을 쏘아 두만 선우를 죽이고,

그의 계모와 동생 및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자들을 모조리 주살했다. 

묵돌은 흉노의 선우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冒頓既立,是時東胡彊盛,聞冒頓殺父自立,乃使使謂冒頓,

欲得頭曼時有千里馬. 冒頓問群臣, 群臣皆曰:「千里馬, 匈奴寶馬也, 勿與.」

冒頓曰:「柰何與人鄰國而愛一馬乎?」

遂與之千里馬.  居頃之, 東胡以為冒頓畏之, 乃使使謂冒頓, 欲得單于一閼氏.

冒頓復問左右,左右皆怒曰:「東胡無道,乃求閼氏!請擊之.」

冒頓曰:「柰何與人鄰國愛一女子乎?」 遂取所愛閼氏予東胡.

[묵돌이 흉노의 선우가 되었을 때 동호의 세력이 강성했는데, 묵돌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호가 사자를 보내 두만이 타고 다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했다. 묵돌은 여러 군신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자 모두 말하기를 : 

"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이므로 그들에게 주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자. 

묵돌이 말하기를 : “ 어찌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데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라고 하며, 

천리마를 동호의 사신에게 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묵돌이 자기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동호가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閼氏) 중 한 명을 달라고 말했다.

묵돌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노하여 말하기를 :

동호가 무도하여 연지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청을 물리치십시오.”라고 하자.  

묵돌이 말하기를 : “ 어찌 남의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면서 여자 한 명을 아끼겠는가?”라고 하며.  

즉시 자기가 사랑하는 연지를 동호에게 주었다.]

 

東胡王愈益驕, 西侵.  與匈奴閒, 中有棄地, 莫居, 千餘里, 各居其邊為甌脫.

東胡使使謂冒頓曰:「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 匈奴非能至也, 吾欲有之.」 

冒頓問群臣,群臣或曰:「此棄地,予之亦可,勿予亦可.」

於是冒頓大怒曰:「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 

諸言予之者,皆斬之.  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遂東襲擊東胡.

[동호가 더욱 교만하게 되어 서쪽으로 나아가 흉노의 변경을 침범했다.

동호와 흉노 사이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땅이 천여 리나 되었다.  

두 나라는 그 땅 변경에 각각 초소를 세워 수비하고 있었다. 동호가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말하기를 : “ 흉노와 우리나라 경계를 지키는 초소 밖의 땅은 버려진 땅으로 흉노에게는

어차피 소용이 없으니 우리가 갖도록 하겠소!. ”라고 하였다. 

묵돌이 역시 좌우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신하들 중에 어떤자가 말하기를 :

이 땅은 어차피 버려진 땅이라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묵돌이 대노하여 말하기를 : “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하여 남에게 주자고 하는가? ”하며,  

땅을 동호에게 주자고 말한 자들을 모두 참수하였다. 묵돌이 말에 올라 나라 안에 영을 내려

이번 출전에서 도망가는 자는 그 자리에 즉시 죽이겠다라고 하며, 

마침내 묵돌은 동쪽으로 달려가 동호를 습격했다.]

 

東胡初輕冒頓, 不為備.  及冒頓以兵至, 擊, 大破滅東胡王, 而虜其民人及畜產.

既歸,西擊走月氏,南并樓煩、白羊河南王. 

[侵燕代]悉復收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與漢關故河南塞,

至朝那、膚施,遂侵燕、代. 

是時漢兵與項羽相距, 中國罷於兵革, 以故冒頓得自彊, 控弦之士三十餘萬.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歲, 時大時小, 別散分離, 尚矣, 其世傳不可得而次云. 

[동호는 처음부터 묵돌을 얕보고 있었던 터라 아무런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묵돌은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여 동호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들의 왕을 죽였으며 

백성들과 가축들을 노획했다.  본국으로 개선한 흉노는 서쪽의 월지국을 공격하고

남쪽의 루번과 백양(白羊)의 하남왕 땅을 병탄했다.  또 연과 대를 공격해 일찍이

진(秦)나라가 몽염(蒙恬)을 시켜 빼앗은 흉노 땅을 모두 다시 되찾아간 흉노는

한나라와 더불어 옛 하남의 요새에서 관문을 맞대고 조나23), 부시(膚施)24)에까지 이르렀고, 

마침내 연(燕), 대(代)를 침범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국이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묵돌이 스스로 강성해질 수 있었고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군사만도 30여 만에 달했다. 흉노의 선우는 순유()에서 두만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혹은 강성하고 혹은 약소해지기를 반복했으며 이합집산하기를 오래 했으니, 

흉노 선우의 계보를 차례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 ] 

 

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 盡服從北夷, 而南與中國為敵國,

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  置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大將,

左右大都尉,左右大當戶,左右骨都侯.

匈奴謂賢曰「屠耆」,故常以太子為左屠耆王.  自如左右賢王以下至當戶,

大者萬騎,小者數千,凡二十四長,立號曰「萬騎」. 諸大臣皆世官.

呼衍氏,蘭氏,其後有須卜氏,此三姓其貴種也.

[그러나 묵돌의 대에 이르러 흉노가 가장 강해졌으며 북쪽의 이족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적했다. 그래서 대대로 전해오는 그들의 관호(官號)를 다음과 같이

기록할 수 있다.  좌우현왕,좌우곡려왕,좌우대장,좌우대도위,좌우대당호,좌우골도후

등의 관직을 두었다.  흉노의 말에 현능한 자를 ‘도기(屠耆)’라고 했다.

그래서 태자를 ‘좌도기(左屠耆)’라고 불렀다. 좌우현왕부터 당호에 이르기까지

큰 자는 만 명부터 적은 자는 천 명의 기병을 거느린 자가 모두 24명이 있었는데

부르기를 모두 만기(萬騎)라 했다. 여러 대신들의 관직은 세습했다.

호연씨, 란씨(蘭氏), 뒤의 수복씨(須卜氏) 등의 세 성은 흉노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이었다.]  

 

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以往者,東接穢貉、朝鮮;

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以西,接月氏、氐、羌; 而單于之庭直代、雲中:

各有分地, 逐水草移徙.  而左右賢王、左右谷蠡王最為大國, 左右骨都侯輔政.

諸二十四長亦各自置千長, 百長, 什長, 裨小王, 相, 封都尉, 當戶, 且渠之屬.

[모든 좌방의 왕들과 장수들은 동쪽에 거주하며 상곡군()에서부터 동쪽으로

예맥(),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 우방()의 왕들과 장수들은 서쪽에 거주하고,

상군에서부터 월지와 저(), 강() 등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며 ; 

또 선우의 왕정()은 대군(), 운중군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일정한 영역이 있었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는데,

그 중에서 좌우현왕과 좌우녹려왕의 영역이 가장 크고, 좌우골도후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했다. 

여러 24장(長)은 각자 천장(千長), 백장(百長), 십장(什長), 비소왕(裨小王), 상봉(相封),

도위(都尉), 당호(當戶), 저거(且渠)와 같은 속관을 두었다.]  

 

歲正月,諸長小會單于庭,祠.  五月,大會蘢城,祭其先、天地、鬼神.

秋,馬肥,大會蹛林,課校人畜計.  其法,拔刃尺者死,坐盜者沒入其家;

有罪小者軋,大者死.  獄久者不過十日,一國之囚不過數人.  

而單于朝出營,拜日之始生,夕拜月.  其坐,長左而北鄉.  日上戊己.

[매년 정월에는 선우가 머물렀던 왕정에서 24장() 모두가 모여 소회를 열고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롱성26)에서 대회를 열고 그들의 선조와, 하늘과 땅, 그리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가을에 말이 살찌면 대림(蹛林)27)에서 대회를 열어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렸다.

흉노의 법에서는 칼을 한 척(尺) 이상 뽑으면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하면 그의 가산(家)을

몰수하였다. 작은 죄를 저지르면 알형(軋刑)28)에 처하고 큰 죄를 지으면 사형에 처하였다.

오래도록 옥에 가두어도 열흘을 넘지 않고 나라 전체를 통틀어 죄수가 수 명을 넘지 않았다.  

선우는 아침에 영(營)을 나와 솟아오르는 해에게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향해 절을 하였다.

그들이 자리에 앉을 때는 장자가 왼쪽을 차지하고 북쪽을 향했다.

날은 무일(戊日), 기일(己日)을 길하게 여겼다.]

 

其送死, 有棺槨金銀衣裘, 而無封樹喪服; 近幸臣妾從死者, 多至數千百人.  

舉事而候星月,月盛壯則攻戰,月虧則退兵.  其攻戰,斬首虜賜一卮酒,

而所得鹵獲因以予之,得人以為奴婢. 

故其戰,人人自為趣利,善為誘兵以冒敵.  故其見敵則逐利,如鳥之集;

其困敗,則瓦解雲散矣.  戰而扶輿死者, 盡得死者家財.

[그들의 장례 풍속은 관곽()에 시신을 넣고, 그 속에 금은과 의복 및 갖옷을 같이 합장했으나,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지 않았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선우가 죽으면 총애했던

신하나 애첩들을 순장했는데, 많을 때에는 수천 수백 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나라에 큰일을 치를 때는 별과 달을 살펴 달이 차면 공격하고 달이 이지러지면 물러갔다.

그들이 싸울 때는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은 자에게 한 잔의 술을 내리고 노획품을 주고

포로는 노비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들이 싸울 때는 사람들이 각자 이익을 다투며

적을 유인하는 군사를 따로 두어 적을 포위하는데 능했다. 그래서 그들이 적을 발견하면

이익을 쫓아 새처럼 모여들고 그들이 궁지에 몰려 싸움에 질 때는 구름처럼 흩어졌다.

싸울 때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가지고 귀환한 자는 그 전사자의 재산을 모두 얻었다.]  

 

後北服渾庾、屈射、丁零、鬲昆、薪犁之國. 

於是匈奴貴人大臣皆服,以冒頓單于為賢.

是時漢初定中國,徙韓王信於代,都馬邑.  匈奴大攻圍馬邑,韓王信降匈奴.

匈奴得信,因引兵南踰句注,攻太原,至晉陽下.  高帝自將兵往擊之. 

會冬大寒雨雪,卒之墮指者十二三,於是冒頓詳敗走,誘漢兵. 

漢兵逐擊冒頓,冒頓匿其精兵,見其羸弱,於是漢悉兵,

多步兵,三十二萬,北逐之.

[그 후에 묵돌은 북쪽으로 혼유, 굴역, 정령, 격곤(), 신려() 등의 나라를 복속시켰다.29)

이로써 흉노의 귀족과 대신들은 모두 탄복하여 묵돌 선우를 현명하다 여겼다.

이때 한나라가 중국 천하를 평정하고 한왕() 한신을 대()의 땅으로 옮겨 마읍에 도읍을

정하게 하고 횽노를 막게 했다. 흉노의 대군이 마읍을 포위하자 한왕 신이 흉노에게 항복했다.

한왕 신을 얻은 흉노는 군사를 이끌고 구주산을 넘어와 태원을 공격하고 진양을 함락시켰다.

고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몰아친 큰 추위와 눈, 비를 만나

사졸들 가운데 10의 2-3이 동상에 걸렸다. 이에 묵돌은 거짓으로 싸움에 져서 도망치는 것처럼

가장하고 한나라 군사들을 유인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묵돌의 뒤를 추격하자,

묵돌은 정예병들을 숨겨두고 노새와 노약자로 가장한 군대를 보여주었다. 이에 주로 보졸로

이루어진 32만에 달하는 한나라는 모든 군사들은 묵돌의 뒤를 추격하여 북진했다.]  

 

高帝先至平城,步兵未盡到,冒頓縱精兵四十萬騎圍高帝於白登,

七日,漢兵中外不得相救餉.  匈奴騎,其西方盡白馬,東方盡青駹馬,

北方盡烏驪馬,南方盡騂馬.  高帝乃使使閒厚遺閼氏, 閼氏乃謂冒頓曰:

「兩主不相困.  今得漢地, 而單于終非能居之也. 且漢王亦有神, 單于察之.」

[고제가 먼저 평성30)으로 들어가고 보졸들이 미처 당도하기 전에 묵돌은 40만의 기병을 이끌고

고제를 백등산(白登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이윽고 포위된 지 7일이 동안 한군의 안팎에서

연락이 두절되어 구원이나 식량을 보급 받지 못했다. 백등산을 포위한 흉노의 기병들은

그 서쪽에는 모두 백마를, 동쪽에는 청색말을, 북쪽에는 모두 흑색말을,

남쪽에는 붉은 말을 타고 있었다. 고제가 사자를 보내 흉노의 연지에게 많은 선물을 주자,

연지가 묵돌에게 말하기를 : “ 두 나라 군주는 서로 곤궁한 처지에 몰아넣으면 안 됩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는 결국 이곳에 살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왕에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는 것 같으니 선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하였다.]

 

冒頓與韓王信之將王黃、趙利期, 而黃、利兵又不來, 疑其與漢有謀,,

亦取閼氏之言, 乃解圍之一角.  於是高帝令士皆持滿傅矢外鄉,從解角直出,

竟與大軍合,而冒頓遂引兵而去.  漢亦引兵而罷,使劉敬結和親之約.

[묵돌은 전에 한왕 신의 장수 왕황、조리의 군사들과 합류하기로 약속했으나 기일이 지나도

군사가 오지 않자, 묵돌은 그들이 한나라와 공모하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연지의 말을 쫓아

그들의 포위망 한 곳을 풀어 주었다.  그래서 고제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모두 활시위를

힘껏 잡아 당겨 밖을 향해 겨누게 하고 포위망이 풀린 쪽을 통하여 성을 곧바로 나가

본대의 대군과 합류했다. 그러자 묵돌도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한나라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간 후에 유경을 사자로 보내 화친의 조약을 맺도록 했다.]

 

是後韓王信為匈奴將,及趙利、王黃等數倍約,侵盜代、雲中.  

居無幾何,陳豨反, 又與韓信合謀擊代.  漢使樊噲往擊之, 復拔代、鴈門、

雲中郡縣, 不出塞.  是時匈奴以漢將眾往降, 故冒頓常往來侵盜代地.  

於是漢患之,高帝乃使劉敬奉宗室女公主為單于閼氏,

歲奉匈奴絮繒酒米食物各有數,約為昆弟以和親,冒頓乃少止.

[그 뒤 한왕 한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어 화친의 조약을 무시하고 조리, 왕황 등과 함께

대군()과 운중군에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희가 반란을 일으켜

한왕 신과 연합하여 대(代) 땅을 공격했다. 한나라는 번쾌를 시켜 진희를 토벌하도록 했다. 

번쾌는 대, 안문, 운중의 여러 현성들을 함락시켜 수복했으나 장성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때 수많은 한나라 장군들이 찾아와 항복을 받은 흉노는 수시로 대 땅을 침범하여 

노략질해 갔다. 이를 걱정한 고제는 유경을 시켜 종실의 공주를 자기의 딸이라고 속여

선우의 연지로 보내고 매년마다 흉노에게 무명, 비단, 술, 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하고

형제의 의로써 화친을 맺게 했다.  그러자 묵돌도 잠시 한나라 땅에서 노략질을 중지했다.]

 

後燕王盧綰反,率其黨數千人降匈奴,往來苦上谷以東.  

高祖崩, 孝惠、呂太后時, 漢初定, 故匈奴以驕.  冒頓乃為書遺高后,妄言. 

高后欲擊之,諸將曰:「以高帝賢武,然尚困於平城.」

於是高后乃止,復與匈奴和親.  至孝文帝初立,復修和親之事.

[그 후에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자신의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흉노에게 항복하자,

묵돌은 상곡군 동쪽지역에 출몰하여 그곳의 주민들을 괴롭혔다.

고조가 죽자, 효혜제가 즉위하고 여태후가 집정했을 때는 한나라가 천하를 안정시킨 지

얼마되지 않음을 틈타 흉노의 태도는 매우 교만했다.  

묵돌이 편지를 써서 여후에게 보내 함께 살면 어떻겠냐고 하면서 망언했다.

대노한 여후가 흉노를 치려고 하자, 여러 장군들이 말하기를 : “ 현능하시고 무예가 출중하신

고제께서도 옛날 평성에서 곤란을 당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여후는 흉노를 정벌할 생각을

그만두고 그들과 화친했다. 한나라의 문제()가 즉위하자, 화친의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

 

其三年五月,匈奴右賢王入居河南地,侵盜上郡葆塞蠻夷,殺略人民.

於是孝文帝詔丞相灌嬰發車騎八萬五千,詣高奴,擊右賢王. 

右賢王走出塞. 文帝幸太原.  是時濟北王反,文帝歸,罷丞相擊胡之兵.

[그 후 한문제 3년(기원전 177년) 5월, 흉노의 우현왕이 하투(河套. 오르도스)의 남쪽을 침입하여

주둔하며 상군의 요새를 공격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나라 편의 오랑캐들을 살해했다.  

효문제는 승상 관영에게 조칙을 내려 전차와 기병 8만 5천을 동원하여 고노(高奴)에 주둔한

우현왕을 공격하게 했다. 우현왕은 도망쳐 요새 밖으로 나갔다. 문제가 태원에 순행을 나갔다. 

이때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켜서 문제는 서둘러 장안으로 돌아오고,

승상의 흉노 공격도 중지되고 말았다.]

 

其明年,單于遺漢書曰:「天所立匈奴大單于敬問皇帝無恙. 

前時皇帝言和親事,稱書意,合歡.  漢邊吏侵侮右賢王,右賢王不請,

聽後義盧侯難氏等計,與漢吏相距,絕二主之約,離兄弟之親.

皇帝讓書再​至,發使以書報,不來,漢使不至,漢以其故不和,鄰國不附. 

今以小吏之敗約故,罰右賢王,使之西求月氏擊之. 

 以天之福,吏卒良,馬彊力,以夷滅月氏,盡斬殺降下之.

[그 다음 해에 선우가 한나라에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
“ 하늘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가 삼가 황제께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그간 무양하십니까?

지난 번 황제께서 화친을 말씀하신 뜻이 제 마음에도 합당했습니다.

한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관리들이 우리 우현왕의 영지를 침범하여 모욕을 가하자,

우현왕 역시 선우에게 상의함이 없이 휘하의 후의, 로후, 난지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나라 관리들과 다투어 우리 두 군주들의 약속을 깨뜨리고 형제의 정을 이간시켰습니다.  

황제로부터 그 일을 책망하는 편지가 두 번이나 도착했음으로 우리도 사신을 보내 편지로

알렸으나 그 사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한나라의 사신 또한 오지 않았소.

이런 이유로 한나라가 우리와 화친하지 않겠다면 우리도 한나라와 더 이상 친할 수 없습니다.

지금 흉노의 작은 관리가 우리의 화친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 우현왕에게

벌로써 서쪽의 월지국을 정벌하도록 했습니다. 하늘이 돕고, 관리와 사졸들은 우수하고,

강건한 말로 월지국을 멸하고 항복한 적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定樓蘭· 烏孫· 呼揭及其旁二十六國,皆以為匈奴.  諸引弓之民,并為一家. 

北州已定,願寢兵休士卒養馬,除前事,復故約,以安邊民,以應始古,

使少者得成其長,老者安其處,世世平樂.  未得皇帝之志也,

故使郎中系雩淺奉書請,獻橐他一匹,騎馬二匹,駕二駟. 

皇帝即不欲匈奴近塞,則且詔吏民遠舍.  使者至,即遣之.」

[그리고 루란, 오손, 호게를 포함하여 부근의 26개 국을 평정하여 모두 흉노에게

복속시켰습니다.이로써 활을 당길 수 있는 모든 유목민들은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북변의 땅이 이미 안정되었으니 원컨대 싸움을 중지하여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말을 길러

이전의 일을 잊어 옛날의 약속을 회복하여 변경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친선관계로

돌아가 젊은이들을 탈 없이 자라고 노인들은 처소에서 평안한 생활을 세세대대로 누리게

하고 싶습니다.  황제의 뜻이 어떤지 알지 못하므로 낭중(郎中) 계우천(係雩淺)을 보내

서신을 받들고 가서 뵙기를 청합니다.  낙타 1필, 기마(騎馬) 2필,

수레를 끄는 말 2사(駟)를 바칩니다. 우리 흉노가 요새 가까이 접근하는 일을 황제께서

바라지 않는다면 관리와 백성들에게 조령을 내려 멀리 떨어져 머물도록 하십시오.  

사자가 도착하면 곧바로 되돌려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以六月中來至薪望之地.  書至,漢議擊與和親孰便. 

公卿皆曰:「單于新破月氏,乘勝,不可擊. 且得匈奴地,澤鹵,非可居也. 

和親甚便.」漢許之.

[6월 중순에 흉노의 사자가 신망(薪望)31) 땅으로 왔다. 편지가 도착하자 한나라는 흉노를

공격하는 것과 화친하는 것 중 어떤 편이 유리한 지를 의논했다.
공경들이 모두 말하기를 : “ 선우가 이제 막 월지를 격파해 승세를 타고 있으니 공격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흉노 땅을 얻어도 소금기가 많은 땅이라 그곳에 거주할 수 없습니다.

화친하는 쪽이 유리합니다.”라고 하자.  한나라는 선우의 요청을 허락했다.]

 

孝文皇帝前六年,漢遺匈奴書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使郎中系雩淺遺朕書曰:『右賢王不請, 聽後義盧侯難氏等計, 絕二主之約,

離兄弟之親, 漢以故不和, 鄰國不附.  今以小吏敗約, 故罰右賢王使西擊月氏,

盡定之.  願寢兵休士卒養馬, 除前事, 復故約, 以安邊民, 使少者得成其長,

老者安其處,世世平樂.』朕甚嘉之,此古聖主之意也.

[효문제(孝文帝) 전원 6년(기원전 174년), 한나라가 흉노 선우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 
“ 황제가 삼가 묻노니 흉노 대선우는 무양(無恙)하십니까. 낭중 계우천을 시켜 짐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씀하시기를 ' 우현왕이 나에게 청하지도 않고 후의, 노후(盧侯), 난지(難氏)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나라 관리와 서로 다투어 두 나라 임금의 약속을 끊고 형제로서

친애의 정을 떼어 놓았습니다.  한나라가 이런 이유로 우리 흉노와 불화한다면

이웃하는 나라인 우리도 가까이 지낼 수 없습니다. 지금 작은 관리들이 약속을 깨뜨렸으므로

우현왕을 벌하여 그로 하여금 서쪽으로 월지(月氏)를 공격하게 하여 모두 평정했습니다.

원컨대 전쟁을 멈추고 사졸들을 쉬게 하며 말을 기르고 앞서 있었던 일을 청산하고

옛 약속을 회복하여, 이로써 변경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어린아이들은 탈 없이 잘 자라고

노인들은 자신의 거처에서 안거하며 세세토록 평안하게 즐기도록 하게 하십시다.'하셨는데,

짐은 이를 훌륭한 말이라 생각하며 이는 옛 성주(聖主)들의 뜻입니다.

 

漢與匈奴約為兄弟,所以遺單于甚厚.  倍約離兄弟之親者,常在匈奴.

然右賢王事已在赦前,單于勿深誅.  單于若稱書意,明告諸吏,使無負約,

有信,敬如單于書.  使者言單于自將伐國有功, 甚苦兵事.  

服繡袷綺衣、繡袷長襦、錦袷袍各一, 比余一, 黃金飾具帶一, 黃金胥紕一,

繡十匹,錦三十匹,赤綈、綠繒各四十匹,使中大夫意、謁者令肩遺單于.」

[한나라가 흉노와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기에 선우에게 매우 후한 선물을 보냈으나

약속을 어기고 형제의 친애하는 정을 떼어놓는 쪽은 늘 흉노였습니다. 

그러나 우현왕이 벌인 일은 사면령이 내려지기 전의 일이니 선우는 그를 너무 심하게 벌하지는

마십시오. 선우가 만약 이 서신의 뜻이 마음에 맞아 여러 관리들에게 분명히 고해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여 신의를 지킨다면 짐 또한 삼가 선우의 서신에서 말씀하신대로 하겠습니다.

흉노의 사자가 말하길 선우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다른 나라를 정벌하여 공을 세우느라

군사의 일로 인해 매우 수고가 많다고 했습니다. 

짐이 입고 다니는 복식인 수겹기의(繡袷綺衣)32), 수겹장유(繡袷長襦)33),

금겹포(錦袷袍)34) 각 한 벌, 비여(比余)35) 한 개, 황금식구대(黃金飾具帶)36) 한 개, 

황금서비(黃金胥紕)37) 한 개, 수(繡) 놓은 비단 10필, 채색비단 30필, 적제(赤綈)38),

녹증(綠繒)39), 각 40필을 중대부(中大夫) 의(意)와 알자령(謁者令) 견(肩)을 통해

선우에게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後頃之,冒頓死,子稽粥立,號曰老上單于.  老上稽粥單于初立,

孝文皇帝復遣宗室女公主為單于閼氏,使宦者燕人中行說傅公主.

說不欲行,漢彊使之.  說曰:「必我行也,為漢患者.」

中行說既至,因降單于,單于甚親幸之.

[그리고 얼마 후에 묵돌이 죽자, 그의 아들 계육(稽粥)이 즉위하였다.

계육은 노상선우(老上單于)라고 호칭했다.  노상선우가 처음 즉위하자 효문제는 다시

종실의 처녀를 공주라고 속여 선우의 연지로 보내면서 연나라의 환관 중항열(中行說)로 하여금

공주를 보좌하게 했다. 중항열이 흉노에 가는 것을 싫어했으나 한나라가 강제로 보내자

중항열이 말하기를 : " 내가 가서 반드시 한나라에 우환을 안겨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항열이 흉노의 땅에 당도하여 흉노에게 투항하자 선우는 그를 매추 총애했다.]

 

初, 匈奴好漢繒絮食物, 中行說曰:「匈奴人眾不能當漢之一郡, 然所以彊者,

以衣食異,無仰於漢也.  今單于變俗好漢物,漢物不過什二,

則匈奴盡歸於漢矣.  其得漢繒絮,以馳草棘中, 衣袴皆裂敝,

以示不如旃裘之完善也.  得漢食物皆去之,以示不如湩酪之便美也.」

於是說教單于左右疏記,以計課其人眾畜物.

[원래 흉노 사람들은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 및 음식 등을 좋아하였는데 이것을 본 중행열이

말하기를 : “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개 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이유는

입고 먹는 것이 그들과 다르고, 한나라의 것을 부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가 한나라의 풍속과 물건들을 좋아하게 되면 그들의 물자를 10에 2도

소비하기도 전에 흉노의 모든 것은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얻게 되시면 그것들을 입으시고 초원과 가시밭을 달리십시오.

상의와 바지가 모두 찢어지고 해져 우리 흉노가 입고 다니는 모직물이나 가죽으로 만든 옷만큼

튼튼하지도, 좋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한나라에서 보내온 음식은 드시지 마시고

버리십시오. 운반하기 편한 점에서 젖과 유제품을 따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하며, 
선우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조목조목 기록하는 법을 가르쳐 그들의 인구 수와 가축을

헤아려 기록하게 했다.] 

 

漢遺單于書,牘以尺一寸,辭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所遺物及言語云云.  中行說令單于遺漢書以尺二寸牘,及印封皆令廣大長,

倨傲其辭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敬問漢皇帝無恙」,

所以遺物言語亦云云.

[한나라가 선우에게 서신을 보낼 때는 1척 1촌 크기의 독(牘)에 ‘황제가 삼가 묻노니 

흉노 대선우는 무양하십니까.’ 라는 인사말을 쓰고 보내는 물품과 이러저러한 말을 적었다.  

이에 중항열은 선우로 하여금 한나라에 서신을 보낼 때 1척 2촌의 독(牘)에 도장과 봉니(封泥)도

모두 더 넓고 크고 길게 만들도록 하고는 다음과 같이 쓰게 했다. "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한나라 황제에게 문안하노니 무양하십니까."

이와 같이 인사말을 거만하게 쓰고 보내는 물품과 이러저러한 말을 적도록 했다.]  

 

漢使或言曰:「匈奴俗賤老.」  中行說窮漢使曰:「而漢俗屯戍從軍當發者,

其老親豈有不自脫溫厚肥美以齎送飲食行戍乎?」  漢使曰:「然.」

中行說曰:「匈奴明以戰攻為事,其老弱不能鬬,故以其肥美飲食壯健者,

蓋以自為守衛,如此父子各得久相保,何以言匈奴輕老也?」 

漢使曰:「匈奴父子乃同穹廬而臥.  父死, 妻其後母;兄弟死, 盡取其妻妻之.

無冠帶之飾,闕庭之禮.」

[어떤 한나라 사자가 말하기를 : “ 흉노에는 노인을 천대하는 풍속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중항열(中行說)이 한나라 사자를 몰아 붙이며 따져 묻기를 : " 당신네 한나라 풍속에도

군역을 위해 수자리를 나가는 아들에게 그의 늙은 부모가 스스로 자신의 따뜻하고 

두꺼운 옷을 벗어주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아 먹고 마시게 하지 않소?”라고 하자.  

한나라 사자가 대답하기를 : " 그렇소!"라고 하였다.

중항열이 묻기를 : " 흉노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에

노약자는 싸울 수 없으니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건강하고 씩씩한 자에게 먹고 마시게 하여 

이로써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오. 이와 같아야 부자가 각기 오랫동안 몸을 보존할 수가 있는

것이오. 어찌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소?”
한나라 사자가 말하기를 : “ 흉노는 부자(父子)가 같은 천막 속에서 기거하고 잠을 자오.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그 계모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남은 형제가 죽은 이의 처를 취해 

아내로 삼고 있소. 관모속대하는 문화적인 풍속도 없고 조정에서의 의식과 예절도 없소.”하였다.

 

中行說曰:「匈奴之俗, 人食畜肉, 飲其汁, 衣其皮;畜食草飲水, 隨時轉移.

故其急則人習騎射,寬則人樂無事,其約束輕,易行也.  

君臣簡易,一國之政猶一身也.  父子兄弟死,取其妻妻之,惡種姓之失也. 

 故匈奴雖亂,必立宗種.  今中國雖詳不取其父兄之妻,親屬益疏則相殺,

至乃易姓,皆從此類.  且禮義之敝,上下交怨望,而室屋之極,生力必屈.

夫力耕桑以求衣食,筑城郭以自備,故其民急則不習戰功,緩則罷於作業.

嗟土室之人,顧無多辭,令喋喋而佔佔,冠固何當?」

[중항열이 말하기를 : “흉노의 풍습에는 사람들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국물을 마시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 가축은 풀을 뜯어 먹고 물을 마시며 수시로 옮겨 다니며

살고 있소. 그러므로 급박한 때에는 사람들이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익히고 평상시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즐기며, 그들의 약속은 간단해 지키기가 쉽고 군신의 관계는

간편해서 나라의 정치는 한 몸처럼 행해지고 있소. 부자나, 형제가 죽었을 때 그의 처를 취해

아내로 삼는 행위는 종족이 끊길까 꺼려하기 때문이오.

이 때문에 흉노의 혼인 풍습이 비록 어지러워져도 필히 본래의 종족을 세울 수 있는 것이오.

지금 중국이 비록 겉으로는 부형의 처를 취하지는 않으나 친척과 종족들은 더욱 멀어져 서로 

살륙하고 나라의 왕조가 바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이런 데서 비롯된 일이오.  

게다가 예의(禮義)의 폐단으로 위아래가 번갈아 원망하고 궁실과 가옥을 짓는데 지나치게

힘을 들여 지어 백성들의 힘을 소모시키고 있소. 힘써 밭 갈고 누에 쳐서 얻은 옷과 음식에

만족하고 성곽을 쌓아 스스로를 지키니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은 급박할 때는 전공(戰功)을

익히지 못하고 여유로울 때는 작업하느라 피폐해져 있소.

아! 흙과 돌로 지은 집에 사는 한인들이여 여러 말 마시오. 옷자락을 살랑살랑 휘날리며

속삭거리지만, 관을 쓰고 다닌다고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自是之後, 漢使欲辯論者, 中行說輒曰:「漢使無多言, 顧漢所輸匈奴繒絮米糱,

令其量中,必善美而己矣,何以為言乎? 且所給備善則已;不備,苦惡,

則候秋孰,以騎馳蹂而稼穡耳.」日夜教單于候利害處.

[이후로는 한나라가 사자가 와서 변론을 하려고 할 때마다 중항열은 재빨리 말하기를 : 
“ 한나라 사자는 여러 말 마시오. 단지 한나라는 흉노에게 보내기로 한 비단과 무명,

곡식과 누룩의 수량이 정확히 맞고 품질이 좋으면 그만이요.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이오?

또한 보내는 물품이 제대로 갖추어지고 질 좋으면 그만이나, 만약 수량도 맞지 않고

질도 나쁠 경우에는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흉노의 기마부대가 농작물을 짓

밟아버릴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항열은 밤낮으로 선우에게 한나라로 쳐들어가는 데

편리한 시기와 지점에 대해 가르쳤다.]

 

漢孝文皇帝十四年,匈奴單于十四萬騎入朝那、蕭關,殺北地都尉卬,

虜人民畜產甚多,遂至彭陽.  使奇兵入燒回中宮, 候騎至雍甘泉.

[한문제 14년(기원전 166년), 흉노의 선우가 14만의 기병을 이끌고 조나와 소관을 침입하여

북지군의 도위 손앙을 죽이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많은 가축들을 노략질하였으며,

그리고 계속해서 팽양(彭陽)40)까지 쳐들어 왔다. 돌격부대를 풀어 회중궁(回中宮)41)을

불태우고 척후로 보낸 기병부대는 옹주(雍州)를 거쳐 감천궁에 이르렀다.]

 

於是文帝以中尉周舍· 郎中令張武為將軍, 發車千乘, 騎十萬,

軍長安旁以備胡寇.  而拜昌侯盧卿為上郡將軍,甯侯魏遬為北地將軍,

隆慮侯周灶為隴西將軍,東陽侯張相如為大將軍, 成侯董赤為前將軍,

大發車騎往擊胡.  單于留塞內月餘乃去,漢逐出塞即還,不能有所殺.

[그러자 문제는 중위 주사(周舍)와 낭중령 장무(張武)를 장군으로 삼아 병거 천 승, 

기병 10만을 동원하여 장안성 주위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다시 창후(昌侯) 노경(盧卿)을 상군장군, 영후(甯侯) 위속(魏遬)을 북지장군(北地將軍),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灶)를 농서장군(隴西將軍),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

성후(成侯) 동적(董赤)을 전장군(前將軍) 등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으로 거기(車騎)를 동원하여

흉노를 치게 했다. 선우는 장성 안의 요새에서 한 달여를 머문 후 마침내 나가자, 

한나라 군사들은 그들을 쫓아 요새 밖으로 출동했지만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匈奴日已驕,歲入邊,殺略人民畜產甚多,雲中、遼東最甚,至代郡萬餘人. 

漢患之,乃使使遺匈奴書.  單于亦使當戶報謝,復言和親事.

[흉노는 날이 갈수록 교만해져서 해마다 국경을 침범하여 백성들과 가축들을 수없이

노략질해 갔다. 특히 운중과 요동 지역의 피해가 컸고 대군(代郡)의 경우는 살해되거나

죽은 사람이 만여 명에 달했다. 한나라는 이 사태를 심히 우려하여 사신을 보내 흉노에게 글을

전하고, 선우도 당호에게 사자로 보내 사과를 하여 다시 화친에 대해서 의논하게 되었다.]

 

孝文帝後二年,使使遺匈奴書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使當戶且居雕渠難, 郎中韓遼遺朕馬二匹,已至,敬受.  

先帝制:長城以北, 引弓之國, 受命單于;長城以內, 冠帶之室, 朕亦制之. 

使萬民耕織射獵衣食,父子無離,臣主相安,俱無暴逆. 

今聞渫惡民貪降其進取之利,倍義絕約,忘萬民之命,離兩主之驩,

然其事已在前矣.

[한문제 후원2년(기원전 162년), 사신을 흉노에게 보내 편지로 알리기를 :
“ 한나라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를 문안합니다. 그간 무양하십니까?

당호 겸 차거(且居)42) 조거난(雕渠難)、낭중(郎中) 한요(韓遼)를 사자로 삼아 짐에게 말 두필을

보내주었는데, 이미 도착해 삼가 잘 받겠습니다. 선제께서 조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 장성 이북의 활쏘기에 능한 나라의 백성들은 선우의 명을 받고 장성 내의 의관속대를 행하는

나라의 백성들은 짐이 다스리겠노라!  천하 만민들에게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며 사냥을 해서

의식을 해결하여 부자가 떨어져 살게 하지 않으며 신하와 군주가 서로 평안한 마음으로 다스려 

포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사악한 무리들이

탐욕스럽게도 이익에 눈이 멀어 의리를 배반하고 약속을 어기며 백성들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두 나라 군주 사이의 우의를 갈라놓았다고 하는데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書曰:『二國已和親,兩主驩說,寢兵休卒養馬,世世昌樂,闟然更始.』

朕甚嘉之.  聖人者日新,改作更始,使老者得息,幼者得長,

各保其首領而終其天年.  朕與單于俱由此道,順天恤民,世世相傳,

施之無窮,天下莫不咸便.  漢與匈奴鄰國之敵,匈奴處北地,寒,殺氣早降,

故詔吏遺單于秫糱金帛絲絮佗物歲有數.  今天下大安,萬民熙熙,

朕與單于為之父母.  朕追念前事, 薄物細故, 謀臣計失, 皆不足以離兄弟之驩.

[선우가 보낸 편지에 ‘두 나라가 이미 화친하여 두 임금이 기쁘고 즐거우니 전쟁을 멈추어

병졸들을 쉬게 하고 말을 기르며 대대로 번성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새로이 출발하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짐은 이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짐과 선우가 성인의 도를 따라

날로 새로워지고 허물을 고쳐 다시 시작하여 노인들은 안식을 얻게 하고,

어린아이들은 잘 자라게 하여 각기 그 생명을 보전해 천수를 누리게 합니다.

짐과 선우가 이 도(道)를 따라 하늘에 순응하고 백성을 돌보며 대대로 서로 전해 무궁토록 

베푼다면 천하에 두루 편안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한나라와 흉노는 이웃하며

대적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흉노는 북쪽에 있어 춥고 무서운 냉기가 일찍 옵니다.

그래서 짐이 관리에게 명을 내려 선우에게 해마다 얼마간의 누룩, 황금, 비단, 무명 및 그 밖의

물건들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천하가 크게 편안하여 천하 만민들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짐과 선우는 백성들의 부모입니다.

짐이 지난 일을 돌이켜보건대 하찮은 일로써 모두 신하들의 잘못된 계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형제의 우의를 떼어 놓을만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朕聞天不頗覆,地不偏載.  朕與單于皆捐往細故,俱蹈大道,墮壞前惡,

以圖長久,使兩國之民若一家子. 元元萬民,下及魚鱉, 上及飛鳥,

跂行喙息蠕動之類,莫不就安利而辟危殆.故來者不止,天之道也. 

 俱去前事:朕釋逃虜民, 單于無言章尼等. 朕聞古之帝王, 約分明而無食言. 

單于留志,天下大安,和親之後,漢過不先.  單于其察之.」

[짐이 듣건대 하늘은 한쪽으로 엎어지는 일이 없고, 땅은 기울어지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짐과 선우는 옛날의 작은 오해들을 모두 버리고 대도를 받들어 과거의 불쾌했던 일들을 잊고

장구한 계책을 세워 두 나라의 백성들이 한 집안의 자녀처럼 살 수 있게 만들고 싶습니다.

선량한 만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래로는 물고기와 자라에서부터 위로는 날아다니는

날짐승에 이르기까지 기어다는 것, 숨을 쉬는 것, 꿈틀대는 것 등까지도 모두 편안하게 살면서

이익을 얻게 하여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고로 찾아오는 자를 막지 않음이 하늘의 도리이니 옛날 일을 모두 잊도록 합시다. 

짐은 옛날 흉노로 달아난 한나라 사람들을 모두 용서했습니다.

선우도 장니(章尼)와 같은 사람에 대해 아무 말 하지 마십시오.

짐은 듣기에 옛날이 제왕들은 약속이 분명하고 식언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선우께서 화친에 뜻이 있다면 천하는 크게 안정되고 화친이 이루어진 후에는 한나라는 결코

먼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선우께서는 이 점을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單于既約和親,於是制詔御史曰:「匈奴大單于遺朕書,言和親已定,

亡人不足以益眾廣地,匈奴無入塞,漢無出塞,犯(令)[今]約者殺之,

可以久親,后無咎,俱便.  朕已許之.  其布告天下,使明知之.」

[마침내 선우가 화친을 약속했음으로 황제가 어사에게 명을 내려 말하기를 :  

“ 흉노의 대선우가 짐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했다.

흉노에서 도망쳐 온 자들은 우리 한나라의 인구를 늘리는데도 땅을 넓히는데도 도움이

될 수 없다. 흉노가 장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한나라도 장성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이 약속을 어기는 자는 죽여 흉노와의 화친을 영원토록 유지할 수 있고

훗날 잘못도 발생하지 않아 서로 이로울 것이다.  짐은 흉노와의 화친을 이미 허락했으니 천

하에 이를 포고하여 모두를 알게 하라! ” 라고 하였다.] 

 

後四歲,老上稽粥單于死,子軍臣立為單于.  既立,孝文皇帝復與匈奴和親.

而中行說復事之.

軍臣單于立四歲,匈奴復絕和親, 大入上郡、雲中各三萬騎,所殺略甚眾而去.

於是漢使三將軍軍屯北地,代屯句注,趙屯飛狐口,緣邊亦各堅守以備胡寇.

又置三將軍,軍長安西細柳、渭北棘門、霸上以備胡. 

胡騎入代句注邊,烽火通於甘泉、長安.

數月,漢兵至邊,匈奴亦去遠塞,漢兵亦罷.

[그 후 4년, 노상선우 계육(稽粥)이 죽고 그의 아들을 군신(軍臣)이 그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효문제가 다시 흉노와 화친의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중항열이 다시 새로운 선우를 모시게 되자,

군신선우 즉위 4년 만에 마침내 흉노가 화친을 끊고 상군과 운중에 각기 3만의 기병을 이끌고

대거 침범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무수히 살륙과 노략질을 자행하고 돌아갔다.

그래서 한나라는 세 장군43)을 보내 북지군, 대 땅의 구주산, 조 땅의 비호구(飛狐口)44)에

주둔시키고 또한 변경의 요새지에도 각기 군사를 파견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굳게

지키도록 했다. 또다시 세 장군45)을 장안 서쪽의 세류(細柳), 위수(渭水) 북쪽의 극문(棘門), 

패상(覇上) 에 진지를 구축하고 흉노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흉노의 기병이 다시 대 땅의 구주산으로 침입해 변경의 봉화불이 감천()과 장안에 사이에

쉬지 않고 올랐다. 몇 개월 뒤 한나라 군사가 변경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흉노는 이미 변방 요새로부터 멀리 떠나가 버린 뒤였다.]

 

後歲餘,孝文帝崩,孝景帝立, 而趙王遂乃陰使人於匈奴. 吳楚反,

欲與趙合謀入邊.  漢圍破趙,匈奴亦止.  自是之後,孝景帝復與匈奴和親,

通關市,給遺匈奴,遣公主,如故約.  終孝景時,時小入盜邊,無大寇.  

今帝即位,明和親約束,厚遇,通關市,饒給之.

匈奴自單于以下皆親漢,往來長城下.

[그리고 1년여 년 후 효문제가 죽고 효경제가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조왕 유수(劉遂)46)가 비밀리에 흉노에 사자를 보내 내통했다. 얼마 후에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흉노는 조나라와 모의하여 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여 함락시키자 흉노 역시 계획을 중지했다.

그 뒤 효경제는 흉노와의 화친을 다시 맺고 변경지역에 교역시장을 열어 흉노에게 물자를

보급하고 공주를 시집보내 옛날처럼 약속을 지켰다. 이로 인하여 효경제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는 때때로 변경을 소규모로 침범하여 노략질 한 적은 있었지만 대대적으로는

행한 적은 없었다.  효무제가 즉위하자, 다시 화친이 약속을 명백하게 밝히고 

흉노를 후하게 대해 요새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풍족히 보급했다.

흉노는 선우 이하 모두가 한나라를 친근하게 여겨 장성 밑을 빈번히 왕래했다.]

 

漢使馬邑下人聶翁壹奸蘭出物與匈奴交,詳為賣馬邑城以誘單于. 

單于信之,而貪馬邑財物,乃以十萬騎入武州塞.  

漢伏兵三十餘萬馬邑旁, 御史大夫韓安國為護軍,護四將軍以伏單于.

單于既入漢塞,未至馬邑百餘里, 見畜布野而無人牧者,怪之,乃攻亭.

[이때 한나라는 마읍성 밑에 사는 섭옹일에게 고의로 금령을 어기고 몰래 국경선을 넘어

흉노와 교역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섭옹일로 하여금 거짓으로 마읍성을 흉노에게 팔아넘기는

것처럼 꾸며 선우를 유인하도록 했다.

선우가 믿고 마읍의 재물이 탐이나서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무주(武州)47)의 요새로 들어왔다.  

그때 한나라는 마읍의 근방에 30여 만의 군사를 매복시키고 있었다.

어사대부 한안국이 호군장군의 신분으로 네 장군을 거느리고 선우를 공격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었다. 이미 한나라 요새 안으로 들어선 선우는 마읍 못 미쳐 백여 리 되는 곳에서 들판에

가축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데 돌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을 보고 괴이하게 생각한 나머지

근방의 한나라 척후 초소인 정(亭)을 공격했다.]

 

是時鴈門尉史行徼,見寇,葆此亭,知漢兵謀,單于得,欲殺之,

尉史乃告單于漢兵所居. 

單于大驚曰:「吾固疑之.」乃引兵還.  出曰:「吾得尉史,天也,天使若言.」

以尉史為「天王」. 漢兵約單于入馬邑而縱,單于不至,以故漢兵無所得.

漢將軍王恢部出代擊胡輜重,聞單于還,兵多,不敢出.

[그때 마침 안문군의 위사(尉史)48)가 순찰하고 있던 중 적군을 발견하고 정(亭)에 들어가

지키고 있었다. 한군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위사를 생포한 선우가 죽이려고 하자,

위사는 한나라 군사가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선우가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 “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라고 하며.
즉시 군사를 이끌고 요새를 빠져나오면서 말하기를 : “ 내가 위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 하늘이 위사를 시켜 알려 준 것이다. ”라고 하며,  위사를 천왕이라고 불렀다.

그때 한나라 군사들은 선우가 마읍성에 들어오면 군사를 풀어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선우가 당도하지 않았으므로 한나라 군사들은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한나라 장군 왕회의 부대는 대군에서 출병하여 흉노의 보급부대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왕회는 선우가 철수할 때에 군사가 많다는 말을 듣고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漢以恢本造兵謀而不進,斬恢.  自是之後,匈奴絕和親,攻當路塞,

往往入盜於漢邊,不可勝數.

然匈奴貪,尚樂關市,嗜漢財物,漢亦尚關市不絕以中之. 

自馬邑軍後五年之秋, 漢使四將軍各萬騎擊胡關市下.  

將軍衛青出上谷,至蘢城,得胡首虜七百人.

公孫賀出雲中,無所得.  公孫敖出代郡,為胡所敗七千餘人.

李廣出鴈門,為胡所敗,而匈奴生得廣,廣后得亡歸. 

漢囚敖、廣,敖、廣贖為庶人.

[한나라는 원래 왕회가 작전을 계획한 당사자임에도 진격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회의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 이후로 화친관계를 단절한 흉노는 화친을 끊고 도로와 통하는 변경의 요새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수시로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자행했는데 회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흉노는 관문에서의 교역을 계속하고 한나라의 재물을 즐겼다.

한나라 또한 여전히 관문의 교역을 계속하게 하여 관계를 끊지 않고 그들 뜻에 부합하려고 했다.

마읍의 사건이 일어난 지 5년 되는 해 가을에 한나라가 네 장군에게 각기 1만의 기병을 주어

관문의 교역시장에서 흉노를 공격했다. 장군 위청은 상곡에서 출격하여 롱성에 이르는 동안

흉노의 수급과 포로 7백을 얻었으나, 운중에서 출격한 공손하 장군은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했다.  

또한 대군(代郡)에서 출격한 공손오 장군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해 7천의 군사를 잃고

안문(雁門)에서 출격한 이광 장군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으나

후에 이광은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나라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광과 공손오를 감옥에 가두었다. 두 장군은 속죄금을 물고 서인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其冬, 匈奴數入盜邊, 漁陽尤甚.  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

其明年秋, 匈奴二萬騎入漢, 殺遼西太守, 略二千餘人.  

胡又入敗漁陽太守軍千餘人, 圍漢將軍安國, 安國時千餘騎亦且盡,

會燕救至, 匈奴乃去.  匈奴又入鴈門, 殺略千餘人.  

於是漢使將軍衛青將三萬騎出鴈門,李息出代郡,擊胡.  得首虜數千人.

[그해 겨울 흉노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해 갔는데 특히 어양의 피해가 심했다. 

한나라는 장군 한안국을 어양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그 다음 해 가을, 흉노가 2만의 병력으로 한나라 국경을 침입하여 요서태수를 살해하고

그곳의 백성 2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시 어양태수가 지휘하는 천여 명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장군 한안국을 포위했다. 한안국의 군사는 그때 1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마저 전멸 당하기 직전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때마침 연나라로부터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흉노가 철수함으로써 위기를 면했다. 

흉노는 후에 다시 안문을 침범해서 천여 명의 백성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래서 한나라는 위장군 위청에게 3만의 기병을 주어 안문에서, 이식은 대군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한군은 흉노의 포로 천여 명을 얻었다.] 

 

其明年, 衛青復出雲中以西至隴西, 擊胡之樓煩, 白羊王於河南, 得胡首虜數千,

牛羊百餘萬.於是漢遂取河南地, 筑朔方, 復繕故秦時蒙恬所為塞, 因河為固. 

漢亦棄上谷之什辟縣造陽地以予胡.  是歲,漢之元朔二年也.  

其后冬,匈奴軍臣單于死.  軍臣單于弟左谷蠡王伊稚斜自立為單于,

攻破軍臣單于太子於單.  於單亡降漢,漢封於單為涉安侯,數月而死.  

伊稚斜單于既立,其夏,匈奴數萬騎入殺代郡太守恭友,略千餘人.  

其秋,匈奴又入鴈門,殺略千餘人.

[그 다음 해, 위청이 다시 운중에서 출격하여 서쪽으로 나아가 농서에 이르는 동안

흉노의 누번과 백양(白羊)의 왕들을 하투(河套)의 남쪽에서 공격하여 흉노의 포로 수천 명과

소와 양 백여 만 마리를 노획했다.  한나라는 이로써 하남지역을 수복하여 삭방군을 설치하고

옛날 진나라 때 몽염이 축조했던 요새를 수리하여  하남의 땅을 굳게 지키려고 했다.

한나라 역시 상곡의 멀리 떨어져 흉노의 땅에 깊숙이 들어간 조양(造陽) 등의  십여 개의 현을

흉노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해는 한나라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이었다.  

그해 겨울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고 그의 동생 좌곡려왕(左谷蠡王) 이치사(伊稚斜)가

군신선우의 태자 오단(於單)을 물리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한나라에 항복하고 망명한 오단을 한나라 조정은 섭안후에 봉했으나 몇 개월 후에 죽고 말았다.

선우의 자리를 확고히 한 이치사는 그해 여름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대군으로 쇄도해 쳐들어가

대군태수 공우(恭友)를 죽이고 그 백성 천여 명을 노략질해 갔다.

해 가을 흉노가 다시 안문을 침입하여 천여 명의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갔다.]

 

其明年,匈奴又復復入代郡、定襄、上郡,各三萬騎,殺略數千人.

匈奴右賢王怨漢奪之河南地而筑朔方,數為寇,盜邊,及入河南,

侵擾朔方,殺略吏民其眾. 

[그 다음해, 흉노가 다시 대군, 정양군(定襄郡), 상군 등에 각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가

수천 명의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흉노의 우현왕은 한나라가 자신의 하남 땅을

빼앗은 다음 삭방군을 설치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자주 변경과 하남 일대를 침입하여

삭방군을 휩쓸고 다니며 수많은 관리들과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갔다.]

 

其明年春,漢以衛青為大將軍,將六將軍,十餘萬人,出朔方、高闕擊胡.

右賢王以為漢兵不能至,飲酒醉,漢兵出塞六七百里,夜圍右賢王. 

右賢王大驚,脫身逃走,諸精騎往往隨后去.  漢得右賢王眾男女萬五千人,

裨小王十餘人.  其秋,匈奴萬騎入殺代郡都尉朱英,略千餘人.

[그 다음해 봄, 한나라가 위청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그 휘하에 여섯 장군49)과 10만 명의

군사를이끌고 삭방과 고궐(高闕)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감히 그렇게 깊숙이 쳐들어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우현왕은 술을 마셔

취해 있었다. 한군이 요새에서 나와 6-7백 리를 진격해 들어가 밤에 우현왕의 진영을 포위하자 

우현왕은 단신으로 도망쳐 달아나자, 정예기병들도 그 뒤를 따라 서둘러 달아났다.

한군은 우현왕에 속한 남녀 1만 5천 명과 비소왕(裨小王) 10여 명도 포로로 잡았다.

그해 가을, 흉노의 기병 만여 명이 대군에 침입하여 도위 주영(朱英)을 살해하고 

천여 명의 백성들을 잡아갔다.]

 

其明年春, 漢復遣大將軍衛青將六將軍, 兵十餘萬騎, 乃再出定襄數百里擊匈奴,

得首虜前后凡萬九千餘級,而漢亦亡兩將軍,軍三千餘騎. 

右將軍建得以身脫,而前將軍翕侯趙信兵不利,降匈奴.

趙信者,故胡小王,降漢,漢封為翕侯,以前將軍與右將軍并軍分行,

獨遇單于兵,故盡沒.   單于既得翕侯,以為自次王,用其姊妻之,與謀漢.

信教單于益北絕幕,以誘罷漢兵,徼極而取之,無近塞.  單于從其計.

[다음 해 봄, 한나라가 다시 대장군 위청에게 장군 6명 50)과 기병 10여 만 명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위청은 다시 정양에 진출해서 흉노를 공격하였는데,

전후를 통해서 적의 수급, 포로 등 모두 약 만 9천여 명을 얻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도 두 장군이 전사했고 3천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우장군 소건은 단신으로 탈출하였고, 전장군 흡후 조신은 전세가 불리하자 흉노에게 항복했다. 

원래 조신은 흉노의 소왕(小王) 출신이었는데 한나라에 항복하자 흡후로 봉해진 사람이었다.

전장군 조신은 우장군의 군대와 함께 본대와 떨어져 행군하다가 선우의 군사를 만나

전군이 모두 전멸했기 때문에 혼자 선우에게 항복한 것이었다.

선우는 조신을 선우 다음 가는 자차왕(自次王)으로 임명하고

그의 누이를 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선우가 조신에게 한군에 대한 계책을 물었다.

조신은 선우에게 사막 북쪽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한병을 유인해 피로하게 만든 후에

그들이 극도로 지쳤을 때 공격하고 한나라의 요새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선우는 조신의 계책을 따랐다.]

 

其明年,胡騎萬人入上谷,殺數百人. 

其明年春, 漢使驃騎將軍去病將萬騎出隴西, 過焉支山千餘里,擊匈奴,

得胡首虜騎 萬八千餘級, 破得休屠王祭天金人.

其夏,驃騎將軍復與合騎侯數萬騎出隴西、北地二千里,擊匈奴.  

過居延,攻祁連山,得胡首虜三萬餘人,裨小王以下七十餘人.  

是時匈奴亦來入代郡、鴈門,殺略數百人.

[그 다음 해에 흉노의 기병 1만 기가 상곡을 침범하여 수백 명의 백성들을 살해했다.  

그 다음 해 봄, 한나라가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농서에서 출격하여  

언지산을 지나 천여 리나 깊숙히 들어가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의 수급과 포로 1만 8천을 얻었다.  

곽거병은 휴도왕(休屠王)을 무찌르고 그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황금상을 노획했다.  

그해 여름 표기장군이 다시 합기후 공손오와 함께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농서와 북지에서

출병하여  2천 리나 진격해서 흉노를 공격했다. 그는 거연을 지나 기련산의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 3만여 명의 수급과 포로 및 비소왕(裨小王) 이하의 귀족 72명을 잡았다.

그때 흉노 역시 대군과 안문을 침범하여 그곳의 백성 수백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漢使博望侯及李將軍廣出右北平,擊匈奴左賢王.  左賢王圍李將軍,

卒可四千人,且盡,殺虜亦過當.  會博望侯軍救至,李將軍得脫. 

漢失亡數千人,合騎侯後驃騎將軍期,及與博望侯皆當死,贖為庶人.

[한나라가 박망후 소무(蘇武)와 장군 이광으로 하여금 우북평에서 출격하여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하도록 했다. 좌현왕은 이광 장군이 이끄는 군사 4천 명을 포위하여 한군을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한군이 적의 군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은 숫자는 더 많았다. 

때마침 박망후의 군사가 당도하여 구원했기 때문에 이광 장군은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의 손실은 수천 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표기장군과 약속한 기일을 지키지 못한 합기후 공손오와 박망후 장건은

사형을 당할 처지였으나 두 사람 다 속죄금을 물고 서민이 되었다.]

 

其秋, 單于怒渾邪王、休屠王居西方為漢所殺虜數萬人, 欲召誅之. 

渾邪王與休屠王恐, 謀降漢, 漢使驃騎將軍往迎之. 

渾邪王殺休屠王, 并將其眾降漢.  凡四萬餘人, 號十萬. 

於是漢已得渾邪王,則隴西、北地、河西益少胡寇,

徙關東貧民處所奪匈奴河南、新秦中以實之,而減北地以西戍卒半.

[그해 가을, 선우는 흉노의 서쪽 지방을 지키던 혼야왕()과 휴도왕이 한나라 군사들에게

그의 병사 수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된 것에 대해 분노하여 그들을 소환하여 죽이려고 했다.

혼야왕과 휴도왕은 선우가 두려워 한나라에 항복하려고 하자, 한나라는 표기장군을 시켜

그들을 맞이해오도록 했다.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이고 휴도왕의 군사와 자신의 종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항복한 흉노는 모두 4만 명에 달했는데 말로는 10만 명이라고 했다.

한나라가 혼야왕을 얻자 농서, 북지, 하서 등의 지역에는 흉노의 침범이 더욱 줄어들었다.  

이에 관중의 빈민들을 흉노로부터 빼앗은 하남과 신진중(新秦中)51) 지방으로 이주시켜

그 지역에 백성들을 보충하고 북지군 서쪽에 있는 수비병의 수를 절반으로 감축했다.]

 

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各數萬騎,殺略千餘人而去.

其明年春, 漢謀曰「翕侯信為單于計, 居幕北, 以為漢兵不能至」

乃粟馬發十萬騎, 私負從馬凡十四萬匹, 糧重不與焉.

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中分軍,大將軍出定襄,驃騎將軍出代,

咸約絕幕擊匈奴.  單于聞之,遠其輜重,以精兵待於幕北.

[그 다음해, 흉노의 기병 수만 명이 우북평, 정양을 침범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 다음 해 봄, 한나라 조정이 전략을 세우며 말하기를 : “ 선우가 흡후 조신의 계책을 듣고 

사막의 북쪽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한나라 군사들이 그곳까지 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말에게 먹이를 충분히 먹인 후에 10만 명의 기병을 출동시켰다.

이 때에 식량과 보급을 위한 말은 제외하고 개인의 소지품을 싣고 따라가는 말이

약 14만 마리나 되었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도 군사를 반으로 나눠

각기 인솔하게 하고 대장군 위청은 정양에서, 표기장군 곽거병은 대(代) 땅에서 출격하여

사막을 가로질러 흉노를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선우는 이 소식을 듣자,

군수물자를 먼 곳으로 대피시킨 다음 정예 부대를 이끌고 사막 북쪽에서 한군을 기다렸다.]

 

與漢大將軍接戰一日,會暮,大風起,漢兵縱左右翼圍單于.

單于自度戰不能如漢兵,單于遂獨身與壯騎數百潰漢圍西北遁走. 

漢兵夜追不得. 行斬捕匈奴首虜萬九千級,北至闐顏山趙信城而還.  

單于之遁走,其兵往往與漢兵相亂而隨單于.

單于久不與其大眾相得,其右谷蠡王以為單于死,乃自立為單于. 

真單于復得其眾,而右谷蠡王乃去其單于號,復為右谷蠡王.

[흉노와 대장군 위청의 부대는 교전에 들어가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는데 저녁무렵에 

갑자기 큰 바람이 불자, 그 틈을 이용하여 좌우의 기병을 풀어 선우를 포위했다. 

선우는 전투에서 한나라 군사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마침내 홀몸으로

겨우 수백 명의 기병들만을 데리고 한나라 포위를 뚫고 서북방으로 달아났다.

한나라 군사는 밤을 세워 선우를 추격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달아나는 흉노 군사들의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은 수가 만 9천이나 되었다.

한군은 북쪽의 전언산(闐顏山)에서 조신성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왔다.

선우가 달아날 때 그의 군사들은 무수히 한군과 혼전을 벌리며 선우의 뒤를 쫓았기 때문에

선우는 오랫동안  자기의 본대와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우곡려왕(右谷蠡王)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에 원래의 선우가 살아서 돌아와 그의 군대와 다시 만나 군권을 장악했음으로  

우곡려왕은 선우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우곡려왕으로 돌아갔다.]

 

漢驃騎將軍之出代二千餘里,與左賢王接戰,漢兵得胡首虜凡七萬餘級,

左賢王將皆遁走.  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而還.  

是後匈奴遠遁,而幕南無王庭.  漢度河自朔方以西至令居,往往通渠置田,

官吏卒五六萬人, 稍蠶食,地接匈奴以北. 

[한편 한나라의 표기장군 곽거병의 군대는 대군에서 2천여 리나 나가서 좌현왕과 싸워 죽이고

포로로 잡은 수가  7만여 명이나 되었으나, 좌현왕과 그의 장군들은 모두 놓치고 말았다.

표기장군은 낭거서산에서는 봉제(封祭)를 지내고, 고연산에서는 선제(禪祭)를 지낸 후에

한해(翰海)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그 후로 흉노는 멀리 달아났기 때문에 사막의 남쪽에는

왕정(王庭)이 없었다. 한나라가 하수를 건너 삭방(朔方) 서쪽의 영거(令居)에 이르기까지

도랑을 파서 농사를 짓고 관리와 병졸 5-6만 명을 파견하여 서서히 흉노의 땅을 잠식하자,

흉노는 접경지역을 북쪽으로 옮겼다.] 

 

初,漢兩將軍大出圍單于,所殺虜八九萬,而漢士卒物故亦數萬,

漢馬死者十餘萬.  匈奴雖病,遠去,而漢亦馬少,無以復往.  

匈奴用趙信之計, 遣使於漢, 好辭請和親. 天子下其議, 或言和親, 或言遂臣之.

丞相長史任敞曰:「匈奴新破, 困, 宜可使為外臣, 朝請於邊.」

漢使任敞於單于.  單于聞敞計,大怒,留之不遣. 

先是漢亦有所降匈奴使者,單于亦輒留漢使相當.

[애초 한나라 두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선우를 공격하기 시작해서 포로로 잡거나 살해한

흉노인들은 모두 8-9만 명에 달했으나 한나라 사졸도 수만 명이 전사하고 죽은 전마도

십수 만 마리에 달하고 소비한 물자도 막대했다. 흉노가 피로에 지쳐서 멀리 달아났지만

한나라 역시 전마가 줄어들어 다시 대군을 흉노의 땅으로 출병시킬 수 없었다.

흉노는 조신의 계책을 사용하여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했다.

황제가 화친 여부를 조정에서 의논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화친하자 하고, 

어떤 사람은 흉노를 신하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승상부의 장사 임창(任敞)이 말하기를 :

 “ 흉노는 이제 피폐해져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어 마땅히 귀순한 속국으로서 변경에서

매년 한나라에 조현을 행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한나라는 임창을 사자로 삼아 선우에게 보냈다. 선우는 임창의 계획을 듣고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전에 흉노의 사신이 한나라에 구금된 일이 있었기에

선우도 한나라 사신을 감금해 이에 상응한 행동을 한 것이다.]

 

漢方復收士馬,會驃騎將軍去病死,於是漢久不北擊胡.

數歲,伊稚斜單于立十三年死,子烏維立為單于.  是歲,漢元鼎三年也.

烏維單于立,而漢天子始出巡郡縣. 

其後漢方南誅兩越,不擊匈奴,匈奴亦不侵入邊. 

[이에 한나라는 다시 병졸과 군마를 징발하여 흉노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표기장군 곽거병이

병으로 죽어 중지했다. 이후로 한나라는 오랫동안 흉노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이치사(伊稚斜) 선우가 재위 13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오유가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이해가 한나라 원정() 3년(서기전 113년)이었다.

오유가 선우 자리에 오르자, 이때부터 한나라 천자가 군현으로 순행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에 한나라는 남쪽의 동월과 민월을 정벌해야 했기 때문에 흉노를 공격하지 않자,

흉노 역시 한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지 않았다.] 

 

烏維單于立三年,漢已滅南越,遣故太仆賀將萬五千騎出九原二千餘里,

至浮苴井而還, 不見匈奴一人.  漢又遣故從驃侯趙破奴萬餘騎出令居數千里,

至匈河水而還,亦不見匈奴一人.

是時天子巡邊, 至朔方, 勒兵十八萬騎以見武節, 而使郭吉風告單于.

[오유선우가 즉위한지 3년 되는 해에 한나라는 이미 남월을 정벌하여 태복()을 지냈던

공손하에게 기병 만 5천 명을 주어 북쪽으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공손하는 구원(九原)에서 출병하여 2천여 리나 진격하여 부저정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나 

그 사이에 흉노인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한나라는 또 전 종표후 조파노에게 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영거에서 수천 리나 진격하여

흉하수()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나 역시 흉노인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그때 천자는 변경으로 순행을 나가 삭방에 이르러 18만 명의 기병을 사열하여

그 군세와 절도를 과시하고 곽길(郭吉)을 사신으로 선우에게 보내 깨우쳐주도록 했다.]

 

郭吉既至匈奴, 匈奴主客問所使,郭吉禮卑言好.曰:「吾見單于而口言.」

單于見吉,吉曰:「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 

今單于(能)即[能]前與漢戰, 天子自將兵待邊;單于即不能, 即南面而臣於漢.

何徒遠走,亡匿於幕北寒苦無水草之地,毋為也.」

語卒而單于大怒,立斬主客見者,而留郭吉不歸,遷之北海上.

而單于終不肯為寇於漢邊,休養息士馬, 習射獵, 數使使於漢, 好辭甘言求請和親.

[곽길이 흉노에 당도하자 흉노의 주객(主客)52)이 사자로 온 뜻을 묻자, 곽길은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좋은 말로 말하기를 : " 제가 선우를 뵌 뒤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선우를 만나게 된 곽길은 말하기를 : " 남월왕의 머리는 이미 한나라의 궁궐 북문에

걸렸습니다. 지금 선우께서는 자신이 있으면 나아가 한나라와 싸우십시오.

한나라 천자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럴 자신이 없으면 항복하고 한나라의 신하가 되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헛되이 멀리 달아나 사막 북쪽의 추운 곳에서 고통스러움을 참아가며

물도 풀도 없는 땅에 숨어서 계십니까?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곽길이 말을 마치자, 대노한 선우는 주객을 참(斬)하고는,곽길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북해 근처로 옮겼다. 그리고 선우는 끝내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지는 않았고 

병졸과 군마를 충분히 쉬게 하고 사냥을 하면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는 동시에 여러 차례

사신을 한나라로 보내 감언이설로 화친을 청했다.]

漢使王烏等窺匈奴.  匈奴法,漢使非去節而以墨黥其面者不得入穹廬. 

王烏,北地人,習胡俗,去其節,黥面,得入穹廬.  

單于愛之,詳許甘言,為遣其太子入漢為質,以求和親.  漢使楊信於匈奴. 

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為郡,而西置酒泉郡以鬲絕胡與羌通之路.

漢又西通月氏、大夏,又以公主妻烏孫王,以分匈奴西方之援國.

又北益廣田至胘雷為塞,而匈奴終不敢以為言.

한나라는 왕오(王烏) 등으로 하여금 흉노의 동정을 살펴보게 했다.  흉노의 법에 의하면

한나라 사신이라도 부절을 버리지 않고 얼굴에 먹물을 들이지 않은 사람은 흉노의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북지(北地) 출신으로 흉노의 풍속에 익숙한 왕오는 그의 부절을 뗀 후에 

얼굴에 먹물을 들이고 흉노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는 왕오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고, 감언이설로 자신의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 볼모로 삼게

하고 화친을 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한나라가 다시 양신(楊信)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 예맥(濊貉)과 조선을 함락해 그 땅에 군을 설치하고

서쪽으로는 주천군(酒泉郡)을 흉노와 강(羌)이 통하는 길을 두절시켰다.  

한나라는 또한 서쪽으로 월지, 대하와 통하고 공주를 보내 오손왕의 처로 삼게 하여53)  

흉노 서쪽의 동맹국들로부터 고립시켰다.54) 또한 북쪽으로 농지를 더욱 확대하여

현뢰(胘靁)55)에까지 요새를 건설했으나, 흉노는 끝내 이에 관해 감히 말하지 못했다.] 

 

是歲,翕侯信死,漢用事者以匈奴為已弱,可臣從也. 

楊信為人剛直屈彊,素非貴臣,單于不親.

單于欲召入,不肯去節,單于乃坐穹廬外見楊信.

楊信既見單于,說曰:「即欲和親,以單于太子為質於漢.」

[이 해에 흉노에 투항한 흡후 조신도 죽었기 때문에 한나라 집정자들은 흉노가 이미 쇠약해져

충분이 복종시켜 신하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신의 인물됨은 성격이 강직하고 굴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양신의 지위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우는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  

선우가 천막 안으로 불러 만나려고 했으나 양신이 결코 한나라 사자를 표시하는 부절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우는 직접 장막 안에서 나와 양신을 만났다. 양신이 선우를 보고

설득하며 말하기를 : “화친을 하고 싶으면 선우의 태자를 한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합니다.”하자.]  

 

單于曰:「非故約.  故約,漢常遣翁主,給繒絮食物有品,以和親,

而匈奴亦不擾邊. 今乃欲反古,令吾太子為質,無幾矣.」

匈奴俗,見漢使非中貴人,其儒先,以為欲說,折其辯;

其少年,以為欲刺,折其氣.  每漢使入匈奴,匈奴輒報償.

漢留匈奴使,匈奴亦留漢使,必得當乃肯止. 

[선우가 대답하기를 : “ 그것은 옛날 한나라가 우리와 한 약속과는 틀리오.

옛날 약속한 바에 따르면 한나라는 항상 옹주를 우리의 연지로 보내고 비단, 무명, 먹을 것과

물자들을 보내어 화친을 행하고 그 보답으로 우리 흉노는 한나라의 변경지방을 소란스럽게

만들지 않았소. 그런데 본래의 약속과는 달리 우리에게 태자를 볼모로 보내라고 하니

한나라가 이와 같이 한다면 화친을 맺을 수 없소.”라고 하였다.  

흉노의 풍습에 한나라의 사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이 아니고 유생 출신이면

자기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온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변설을 꺾으려고 했고

나이가 어리면 자객으로 온 것으로 알고 그의 용기를 꺾으려고 했다.

그리고 한나라가 흉노로 들어올 때마다 흉노도 그 즉시 대응하는 사자를 보내

한나라가 자신들의 사자를 억류시키면  흉노도 같이 한나라 사자를 억류시켜

반드시 한나라와 대등한 수단을 취하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楊信既歸,漢使王烏,而單于復肴甘言,欲多得漢財物,紿謂王烏曰:

「吾欲入漢見天子,面相約為兄弟.」王烏歸報漢,漢為單于筑邸于長安. 

匈奴曰:「非得漢貴人使,吾不與誠語.」

匈奴使其貴人至漢,病,漢予藥,欲愈之,不幸而死.

[양신이 돌아온 뒤 한나라는 왕오를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흉노가 다시 감언으로 아첨하며 한나라 재물을 많이 얻어내기 위해 왕오를 속이며 말하기를 : 

​" 내가 한나라에 들어가 천자를 만나 면전에서 서로 형제의 의를 맺고자 하오.”라고 하였다.

흉노에 돌아온 왕오가 그런 내용을 한나라에 보고하자,

한나라에서는 선우를 위해서 장안에다 관저를 지었다. 

선우가 듣고 말하기를 : " 한나라에서 황제가 총애하는 고관을 사신으로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그와 참된 마음으로 대화를 하지 않겠소.”라고 하면서,  

흉노는 귀족 한 사람을 한나라에 사자로 보내 왔는데, 그는 한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병이 들어, 

한나라가 약을 주어 치유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죽고 말았다.]

 

而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往使, 因送其喪, 厚葬直數千金, 曰「此漢貴人也」.

單于以為漢殺吾貴使者,乃留路充國不歸.  諸所言者,單于特空紿王烏,

殊無意入漢及遣太子來質.  於是匈奴數使奇兵侵犯邊. 

漢乃拜郭昌為拔胡將軍,及浞野侯屯朔方以東,備胡.

路充國留匈奴三歲,單于死.  烏維單于立十歲而死,子烏師廬立為單于. 

年少,號為兒單于.  是歲元封六年也.

[이에 한나라는 노충국에게 2천 석 관리의 인장과 인끈을 패용시켜 그의 영구를 호송하고

수천 금에 달하는 후한 폐물을 들려 보내며 이르기를 : 

 이 사람이야 말로 한나라의 귀인이오.”라고 하였다. 

한나라가 자신의 사자를 죽였다고 생각한 선우는 노충국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때까지 선우가 한 말은 다만 왕오를 속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 친히 한나라로 들어오거나,

태자를 볼모로 보낼 뜻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선우는 여러 차례 기병을 보내 한나라 변경을 

침범했다. 이에 한나라는 곽창을 발호장군으로 삼아 착야후(浞野侯) 조파노와 함께

삭방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를 방비했다.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 지 3년 만에 선우가 죽었다.  

13년 동안 선우의 자리에 있었던 오유선우의 뒤를 아들 오사려(烏師廬)가 이어

흉노의 새로운 선우가 되었다. 당시 오사려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선우라고 불렸다.

이해가 원봉() 6년(서기전 105년)이었다.]

 

自此之後,單于益西北,左方兵直雲中,右方直酒泉、燉煌郡.  

兒單于立,漢使兩使者,一弔單于,一弔右賢王,欲以乖其國.  

使者入匈奴,匈奴悉將致單于.  單于怒而盡留漢使.

漢使留匈奴者前後十餘輩,而匈奴使來,漢亦輒留相當.

是歲,漢使貳師將軍廣利西伐大宛,而令因杅將軍敖筑受降城.

[이 후로 선우는 근거지를 더욱 서북쪽으로 옮겨, 좌측의 군사들은 운중군(雲中郡),

우측의 병사들은 주천군(酒泉郡), 돈황군(敦煌郡)과 마주 보게 하였다.   

아선우(兒單于)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사자 두 명을 동시에 보내 한 명은 선우를 조문하고,

한 명은 우현왕을 조문하여 흉노를 이간시키려고 했다. 두 사자가 당도하자 흉노는 그들 모두를

선우에게로 보냈다. 선우가 분노하여 한나라 사자를 모두 억류했다.

흉노에 의해 억류된 한나라 사자는 전후로 10여 명에 이르렀고,  

한나라도 또한 흉노의 사자들을 오는 대로 억류하여 흉노와 똑같이 대응했다.

이 해에 한나라는 이사장군 이광리56)를 서쪽의 대원을 치게 하고, 

인우장군 공손오를 시켜 수항성57)을 쌓게 했다.]

 

其冬,匈奴大雨雪,畜多饑寒死.  兒單于年少,好殺伐,國人多不安. 

左大都尉欲殺單于, 使人閒告漢曰:「我欲殺單于降漢,漢遠,即兵來迎我,

我即發.」 初,漢聞此言,故筑受降城,猶以為遠.

​[그해 겨울, 흉노에 많은 눈과 비가 내려 많은 가축들이 굶거나 얼어서 죽었다

​그런데도 어린 선우는 살육과 전쟁을 좋아하니 대부분의 흉노사람들이 불안해 했다.  

흉노의 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기 위해 한나라 진영에 사람을 보내 은밀히 말하기를 : 

​" 내가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고 싶소. 그러나 한나라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만일 한나라가 군사를 보내 나를 맞이하러 와주기만 한다면 곧 거사를 일으키겠습니다."하였다.

원래 한나라는 이 일로 인해 수항성을 축조했었는데 한나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고 여겼다.]

 

其明年春, 漢使浞野侯破奴將二萬餘騎出朔方西北二千餘里, 期至浚稽山而還.

浞野侯既至期而還,左大都尉欲發而覺,單于誅之,發左方兵擊浞野.  

浞野侯行捕首虜得數千人.  還, 未至受降城四百里, 匈奴兵八萬騎圍之.

浞野侯夜自出求水, 匈奴閒捕, 生得浞野侯, 因急擊其軍.

[그 이듬해 봄, 한나라는 착야후(浞野侯) 조파노(趙破奴)에게 2만여 명의 기병을 주어 

방(朔方)으로부터 출병하여 북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준계산(浚稽山)58)에까지 나아가

좌대도위를 맞이해서 되돌아오겠다고 약정했다. 착야후는 약속한 곳에 도착했으나

좌대도위(左大都尉)는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선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좌대도위를 주살한 선우는 좌방의 군사를 보내 착야후를 공격했다.

착야후는 후퇴하면서 그들과 싸워 수천 명의 수급을 얻었으나 수항성 못미처 4백 리 지점에 

이르렀을 때 흉노병(匈奴兵)의 8만에 달하는 기병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착야후는 밤중에 몸소 물을 구하러 진영 밖으로 나왔다가 잠복해 있던 흉노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흉노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한군을 기습했다.]  

 

軍中郭縱為護, 維王為渠, 相與謀曰:「及諸校尉畏亡將軍而誅之, 莫相勸歸.」

軍遂沒於匈奴. 匈奴兒單于大喜, 遂遣奇兵攻受降城.  不能下, 乃寇入邊而去.

其明年,單于欲自攻受降城,未至,病死.  兒單于立三歲而死.

子年少, 匈奴乃立其季父烏維單于弟右賢王呴犁湖為單于.  是歲太初三年也.

[그때 한군의 군중에는 호군(護軍)59) 곽종(郭縱)과 거수(渠帥)60)유왕(維王)가 서로 모의하며

말하기를 : “ 여러 교위들이 장군을 잃은 죄로 치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있소.” 라고 하였다. 조파노의 군대는 마침내 흉노의 기병에게 패하고 말았다.

흉노의 아선우가 크게 기뻐하며 기병(奇兵)을 보내  수항성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변경으로 쳐들어왔다가 물러갔다.

다음 해, 선우는 자신이 장수가 되어 수항성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미처 당도하기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아선우는 선우의 자리에 오른지 3년 만에 죽었다.

그의 아들 역시 어렸기에 흉노는 즉시 그의 작은 아버지이며 오유선우의 동생인 우현왕

구리호(呴犁湖)를 선우의 자리에 추대했다. 이해가 태초 3년(기원전 102년)이었다.]  

 

呴犁湖單于立,漢使光祿徐自為出五原塞數百里,遠者千餘里,

筑城鄣列亭至廬朐, 而使游擊將軍韓說、長平侯衛伉屯其旁,

使彊弩都尉路博德筑居延澤上. 

其秋,匈奴大入定襄、雲中,殺略數千人,敗數二千石而去,

行破壞光祿所筑城列亭鄣.  又使右賢王入酒泉、張掖,略數千人.  

會任文擊救,盡復失所得而去.

是歲,貳師將軍破大宛,斬其王而還.  匈奴欲遮之,不能至.

[구리호가 흉노의 선우에 오르자, 한나라는 광록훈(光綠勳)61) 서자위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오원에서 수백 리, 멀게는 천여 리에 성벽과 장벽을 건설하고 그 사이를 성책과 망루를 지어

연결하여 여구(廬胊)62)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유격장군 한열(韓說)과 장평후에게는

그 주변에 주둔하여 지키게 하고 강노도위 노박덕(路博德)에게는 거연택에 성을 짓도록 했다.  

그해 가을 흉노가 대거 정양과 운중을 침범하여 그곳의 백성 수천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면서

2천석의 여러 고관들을 패주시키고 돌아가는 길에 예전에 광록훈이 건설했던 성채를 파괴했다.

다시 우현왕을 시켜 주천(酒泉)과 장액(張掖)을 침범하여 수천 명을 죽이거나 노략질했지만

마침 임문() 장군이 공격하여 구원했기 때문에 흉노는 얻은 것을 모두 잃고 퇴각했다.

이해에 이사장군 이광리가 대완을 공격하여 무찌르고, 그들 왕의 목을 베어 개선하려고 했으나

흉노가 중간에 길을 차단하여 돌아올 수가 없었다.]

 

其冬,欲攻受降城,會單于病死.  呴犁湖單于立一歲死. 

匈奴乃立其弟左大都尉且鞮侯為單于.  漢既誅大宛, 威震外國.

天子意欲遂困胡, 乃下詔曰:「高皇帝遺朕平城之憂, 高后時單于書絕悖逆.

昔齊襄公復九世之讎,春秋大之.」是歲太初四年也. 

且鞮侯單于既立,盡歸漢使之不降者.  路充國等得歸.

그해 겨울 선우가 수항성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병으로 죽고 말았다.

구리호는 선우가 된지 1년 만에 죽은 것이다.  흉노는 즉시 그의 동생 좌대도위 차제후를

선우로 세웠다. 한나라가 대완국을 정벌하고 그들의 왕을 죽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나라의 위세는 주변의 나라를 진동시켰다. 천자가 흉노를 더욱 세차게 몰아 부치기 위해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  “ 고황제께서는 짐에게 평성에서 당하신 원한을 남기셨고,

또 고후 때에는 선우가 패역을 저지르는 편지를 보냈다.  옛날 제양공이 9대나 묵은 원수를

갚은 일은 춘추의 대의라고 할 수 있다. ”63)라고 하였다.  

이해가 태초 4년 한무제 40년(기원전 101년) 때 일이다.  차제후가 선우의 자리에 오르자,

한나라 사신들 중 흉노에 귀순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귀환시켰다.

이때 노충국(路充國) 등도 돌아올 수 있었다.]

 

單于初立, 恐漢襲之, 乃自謂 「 我兒子, 安敢望漢天子!漢天子, 我丈人行也 」. 

漢遣中郎將蘇武厚幣賂遺單于.  單于益驕,禮甚倨,非漢所望也. 

其明年,浞野侯破奴得亡歸漢.

[선우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한 차제후 선우가 스스로 말하기를 :  

“ 나는 어린 아이인데 어찌 감히 한나라 천자와 대등하기를 바라겠는가!

한나라 천자는 나의 장인 항렬에 속한다.”라고 하자.  

한나라 조정은 중랑장 소무(蘇武)를 사자로 삼아 많은 예물을 들려 선우에게 보냈다.

이에 선우가 더욱 교만하고 무례해졌음으로 이는 한나라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 다음 해에 촉야후 조파노도 흉노로부터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왔다.] 

 

其明年,漢使貳師將軍廣利以三萬騎出酒泉,擊右賢王於天山,

得胡首虜萬餘級而還.  匈奴大圍貳師將軍,幾不脫.  漢兵物故什六七.

漢復使因杅將軍敖出西河,與彊弩都尉會涿涂山, 毋所得. 

又使騎都尉李陵將步騎五千人,出居延北千餘里,與單于會,合戰,

陵所殺傷萬餘人, 兵及食盡,欲解歸,匈奴圍陵,陵降匈奴,其兵遂沒,

得還者四百人.  單于乃貴陵,以其女妻之.

[그 다음 해에 한나라가 이사장군 이광리를 시켜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주천에서 출병하여

천산의 우현왕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사장군은 1만이 넘는 흉노의 수급과 포로를 얻어서

돌아왔다. 흉노는 대군을 동원하여 회군 중의 이사장군을 포위하자,

한군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한군은 6-7/10이 전사했다. 한나라가 다시 인우장군 공손오에게 서하에서 출병하여,

강노도위 로박덕과 탁도산(涿塗山)64)에서 합류하도록 했으나 아무런 전과를 올릴 수 없었다.

또 기도위 이릉에게는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거연에서 진군하도록

했다. 천여 리를 행군한 이릉의 군대는 거연 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서 선우의 대군을 만나

교전에 들어갔다.  이릉의 군대는 흉노의 군사 만여 명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으나

병사들도 거의 죽고 양식도 떨어져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려고 했다. 흉노가 이릉을 포위하자

힘이 다한 이릉은 흉노에 항복하고 그의 5천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단지 4백 명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선우가 이릉을 귀하게 대하여 그의 딸을 이릉에게 주었다.]  

 

後二歲,復使貳師將軍將六萬騎,步兵十萬,出朔方.  

彊弩都尉路博德將萬餘人,與貳師會.  游擊將軍說將步騎三萬人,出五原.  

因杅將軍敖將萬騎步兵三萬人,出鴈門.

匈奴聞, 悉遠其累重於余吾水北, 而單于以十萬騎待水南, 與貳師將軍接戰.

[그리고 2년 후에 다시 이사장군은 6만의 기병과 10만의 보병을 이끌고 삭방에서 출병했다.  

강노도위 로박덕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사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유격장군 한열은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원으로 나갔다.

인우장군 공손오는 3만여 명의 기병과 보졸을 이끌고 안문에서 출병했다.

흉노는 그 소식을 듣고 그들의 가족과 재산을 전부 모아 멀리 여오수65) 북쪽에 숨겨두고

선우는 직접 10만의 기병을 이끌고 여오수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사 장군과 접전을 벌였다.]

 

貳師乃解而引歸,與單于連戰十餘日.

貳師聞其家以巫蠱族滅,因并眾降匈奴,得來還千人一兩人耳.  

游擊說無所得.  因杅敖與左賢王戰,不利,引歸.  

是歲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功不得御.

有詔捕太醫令隨但,言貳師將軍家室族滅,使廣利得降匈奴.

[이사장군은 개활지를 벗어나기 위해 후퇴하기까지 선우와 10여 일을 계속해서 싸웠다.

이사장군은 그의 가족이 무고의 난66)으로 멸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군사들과 함께

흉노에게 항복하자, 한나라로 살아 돌아온 자는 1천 명 중에 겨우 한두 사람에 불과했다.

유격장군 한열은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인우장군 공손오도 좌현왕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이해에 한나라 군사로서 흉노로 출격한 사람들 중에 공을 논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한편 황제는 조칙을 내려, 태의령() 수단()을 체포했다.

그는 이사장군의 가족이 멸족되었다는 소식을 누설해 이사장군을 흉노에 투항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太史公曰

孔氏著春秋,隱桓之閒則章,至定哀之際則微,為其切當世之文而罔褒,

忌諱之辭也.   世俗之言匈奴者,患其徼一時之權,而務莖讇納其說,

以便偏指, 不參彼己; 將率席中國廣大, 氣奮, 人主因以決策, 是以建功不深.

堯雖賢,興事業不成,得禹而九州寧.  且欲興聖統,唯在擇任將相哉!

唯在擇任將相哉!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가 춘추를 저술하면서 노나라의 은공(隱公)67)과 환공(桓公)68) 사이에 있었던 일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자신의 시대에 재위했던 정공(定公)69)과 애공(哀公)70) 사이의 일은

애매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당세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었으므로 칭찬과 나무람을

구분하지 못하고 꺼리어 피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 흉노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때의 권세를 얻기 위해 요행을 바라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이도록 아첨하는데 애쓸 뿐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흉노와 한나라의

실제적인 정황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나는 근심한다.

장수들은 중국의 크고 넓은 땅만을 믿고 기고만장하고 천자는 또한 그것을 믿고

정책을 결정했음으로 크고 깊은 공업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요임금이 비록 현능하다고 했으나 혼자서는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지 못하다가 

우임금을 얻고서야 구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성왕들의 뜻을 이어받아 공업을

일으키려한다면 오로지 현능한 장수와 재상을 가려서 쓰는데 있을 뿐이다. 

오로지 장수와 재상을 가려서 쓰는데 있을 뿐이다! ] 

 

【 각주 】 

1) 순유(淳維)/ 은(殷)나라 때에 북변(北邊)으로 달아난 흉노의 시조다.

    상탕(商湯)이 무도한 하걸(夏桀)을 명조(鳴條)에서 토벌한 후 3년 뒤에 죽었다.

    ‘걸의 아들 훈육(獯粥)이 걸(桀)의 여러 첩들을 아내로 삼아 북야로 피해 도망쳐 들어가

    방목생활을 하자, 중국에서 이를 흉노라고 했다. 하후(夏后)의 묘예(苗裔)란 말의 어원이다.

    이 때문에 후한의 응소는 그의 풍속통에서 은나라 때 훈육을 고쳐 흉노라고 불렀다."고 했다.

    또한 후한의 복건(服虔)은 ‘요임금 때는 훈육(葷粥)이라 하고

    주(周)나라 때는 험윤(獫狁)이라 하고  진(秦)나라 때는 흉노(匈奴)’라고 했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위소(韋昭)도 ‘한나라 때 흉노라 했고 훈육(葷粥)은 그 별명.’이라고 했다.  

    즉 순유(淳維)는 그들의 시조(始祖)로 훈육(獯粥)과 동일인이라고 했다.  

2) 요임금 때는 훈육(葷粥), 주나라 때는 험윤(獫狁), 진(秦)나라 때 흉노(匈奴)라 불렀다

3) 결제(駃騠)는 북적(北狄)의 준마로 숫말과 암노새 사이에 태어난 라(驘)라는 노새의 새끼다.  

    " 태어난 지 7일이 되면 (몸집이) 어미보다 커진다.”고 했다.  

    도도(騊駼)는 푸른색의 말로 음은 ‘도도(淘塗)’와 같다고 했다. 탄해는 야생마의 일종으로  

    청색 가라말에 흰색 비늘(青驪白鱗)을 지녔고 그 무늬가 악어와 같다고 했다.  

4) 공유(公劉)/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의 후예로 선조들을 따라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종족들을 위해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공유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잇고 빈(豳) 땅에 도읍 하여 나라를 세웠다.  

5) 고공단보(古公亶父)/ 주문왕의 조부. 원래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인 빈(豳) 땅에 살던

    주족을 고공단보가 이끌고 기산(岐山) 밑으로 이주하였다.

    고공단보의 증손인 주무왕이 천하를 통일하고 주왕조를 세우자 고공단보를 태왕으로 높였다.  

6) 견이씨(畎夷氏)/ 융적의 일파인 견융(犬戎)을 말한다.

7) 황복(荒服)/ 고대 왕조의 수도 일대를 말하는 왕기(王畿) 이외의 지역을 거리로 구분해

    불렀던 용어로 왕기로부터 가까운 순서대로 후복(侯服), 전복(甸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 등이다.  복(服)은 천자에게 복종한다는 뜻이다.  

8) 주목왕(周穆王)/ 이름은 희만(姬滿)이고 기원전 977년에 왕위에 올라 922년에 죽은

    서주의 5대 왕이다. 주소왕(周召王)의 아들로 소왕이 초나라 원정 도중에 행방불명되자

    임시로 왕위에 즉위했다가 소왕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자 정식으로 즉위했다.

    팔준마(八駿馬)라는 천리마를 타고 다니며 중국을 여행했으며 견융을 정벌하고 

    서언왕의 반란을 평정했다. 팔준마는 흙을 밟지 않을 정도로 빠른 「절지(絶地)」,

    새를 추월하는 「번우(翻羽)」, 하룻밤에 5,000km를 달리는 「분소(奔霄)」,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하는 「월영(越影)」,  빛보다 빠른 「유휘(踰輝)」와「초광(超光)」,

    구름을 타고 달리는 「등무(謄霧)」, 날개가 있는 「협익(挟翼)」등의 8마리이다.

    또 그는 서쪽의 저 멀리 있는 신들이 산다고 여겨진 곤륜산을 방문하여 서왕모를 만났고  

    서왕모가 나중에 입조했다고 했다. 목천자전(穆天子傳)은 신화와 전설이 가미된

    목왕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9) 보형(甫刑)/ 주목왕이 사구(司寇) 여후에게 명해 『여형(呂刑)』으로 불리는 형법을 정해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지만 3천개나 되는 많은 조항 때문에 오히려 제후나 민중의

    반감을 샀다. 여후는 후에 보후로 개봉(改封) 되었기 때문에 여형도 보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10) 초획(焦獲)/ 중국 고대의 늪지대의 이름으로 초호(焦護)라고도 한다.  

      소재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금의 섬서성 경양 북쪽 혹은 산서성 양성 서쪽이라는 설이 있다.  

11) 진양공(秦襄公)/ 기원전 780-766년에 재위한 섬진(陝秦)의 군주다.

      서주가 견융의 침입으로 호경(鎬京)에서 낙양으로 천도할 때 당시 진나라는 주나라의

      부용국(附庸國)에 불과했었으나 진양공이 군사를 보내와  

      주평왕(周平王)을 도와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에 주평왕은 진양공을 진백에 봉하여 정식 제후국으로 삼아 호경(鎬京) 이서의 땅에서

      견융을 몰아 낼 경우 그 땅은 모두 진나라에 속한다고 명했다.  

12) 육혼(陸渾)/ 지금의 하남성 숭현(嵩縣 14) 小雅.六月

15) 시경(詩經) ․ 소아(小雅) ․ 녹명지습(鹿鳴之什) ․ 출거(出車)

16) 진도공(晉悼公)/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58년에 죽은 춘추 때 당진국의 군주다.  

      이름은 주(周)고 진양공의 증손이다. 기원전 572년에 폭정을 행한 려공(厲公)을 습격하여

      살해한 당진국의 대신 란서와 순언은 공실의 방계로써 당시 주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던

      그를 데려와 군위을 잇게 했다. 즉위 후,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는 대신 7명을 쫓아냈으며

      옛날에 세운 공업을 새로이 밝히고, 덕과 은혜를 펼쳐 문공이래 구 대신들을 거두어

      문공과 양공이 이룩했던 공업을 자기가 이어 받고자 했다.

      3년 기원전 570년 대신이 기해(祁奚)의 천거를 받아 기오(祁午)와 양설적(羊舌赤)

      즉 숙향(叔向)을 중군정위(中軍正尉)와 중군부위에 각각 기용했다.

      4년 위강(魏絳)을 융(戎)에 파견하여 강화를 맺도록 하자 융족들이 모두 찾아와 귀의했다.  

      8년 제후들을 9번에 걸쳐 소집하여 회맹을 행하자 초나라가 감히 당진국과 다투지

      못함으로써 당진국은 진문공이 이룩한 패권을 차지했다. 재위 15년 만에 죽었다.  

17) 조양자(趙襄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25년에 죽은 춘추 말 당진국의 대부로 

      영성(嬴姓) 조씨에 이름은 무휼이다. 조간자조앙의 아들로 당진국의 육경 중의 한 사람이었다.

      조간자가 아들 가운데 비록 천비 소생이기는 하지만 무휼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적자이며

      큰 아들인 백로(伯魯)를 폐하고 그의 후계자로 삼았다. 이윽고 조앙이 죽고 조양자가 집정하자

      그는 지(智), 한(韓), 위(魏) 등의 삼가와  힘을 합하여 육경 중 범씨와 중항씨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후에 세력이 강성해진 지씨들의 종주 지백(智伯)이 당진국의 군주

      출공(出公)을 쫓아내고 의공(毅公)을 세워 정권을 멋대로 휘두르며 발호했다.  

      이어서 지백이 공개적으로 조씨들을 향해 영지의 할양을 요구하자 조양자가 거절했다.

      이에 지백은 한(韓)과 위(魏) 두 종족과 연합하여 조씨들을 공격했다. 세가 불리했던 조양자는

      지금의 산서성 태원(太原)의 진양으로 들어가 농성하며 대항했다.

      지백은 분수(汾水)의 물을 막아 진양성으로 흘려보내 잠기게 했다. 

      이에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조양자는 그의 가신 장맹담(張孟談)을 보내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에게 당진국의 패권을 혼자 차지하려는 지백의 야욕을

     설파하고 조씨들과 연합할 경우의 이해득실을 논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백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 주정왕(周定王) 16년 기원전 453년 조, 한, 위 삼가가  지가(智家)에게

      반격을 가하여 멸하고 지가의 영지와 당진국의 공실의 땅 전부를 삼분하여 나누어 가졌다.  

      이 일을 역사상 삼가분진(三家分晋)이라 한다.  

18) 구주산(句注山)/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서북에 산의 모양이 갈고리를 돌려 놓은 것 처럼

      생긴 것이 마치 물이 쏟아지는 모습을 띠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서형산(西陘山), 형령(陘嶺). 안문산(雁門山)이라는 별명이 있다. 

      고대 중국의 북방을 지키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19) 하투(河套)/ 북쪽으로 흐르는 황하 음산(陰山)산맥의 남쪽 기슭에서 만곡하는 부분과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 사막 ·초원 ·염호(鹽湖)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르도스란 15세기 중엽 이후 이곳이 내몽골 여러 부(部)의 하나인 오르도스부의

      목축지를 이룬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현재 어얼둬쓰[鄂爾多斯]라고 표기하나, 

      본래 중국에서는 BC 3세기 이래 하남, 후에는 하투(河套) ·투중(套中) 등으로 불렀으며, 

      몽골 유목민과의 교섭 또는 공방(攻防)의 요지로 삼아 왔다.

20) 직도(直道)/ 진시황이 건설했던 중국 고대의 도로 명이다.

      진시황 35년 기원전 212년 몽염에게 명하여 건설하도록 했다.

      북쪽 변경의 구원(九原 : 지금의 내몽고 포두시(包頭市) 서북)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운양(雲陽)에 이르렀다. 관중평원과 하투(河套) 지구를 통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21) 명적(鳴鏑)/ 발사하면 소리를 내는 화살

22) 白羊河南王/ 백양은 흉노의 일족인데 하투 이남으로 남하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23) 조나(朝那)/ 한나라 때 조나(朝那)의 옛 성이 원주 백천현 서쪽 7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안정군(安定郡)에 속했다. 안정군은 한무제 원정(元正) 3년(B.C 114년)에 새로 설치되어  

      이때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조나(朝那)는 북지군 소속이었다.

     「漢書新注」에서는 조나를 현재 영하회족자치구 固原市 남동쪽이라고 했는데

     진혜왕이 오지(烏氏)를 멸망시키고 설치했다.  

24) 부시(膚施)/ 당시 상군(上郡)의 치소로 지금의 섬서성 楡林市 魚河堡 부근이다.

25) 정(庭)/ 선우가 머무는 곳으로 유목민들에게는 치소에 해당한다.  

      당시의 선우의 정이 있던 곳은 지금이 몽고공화국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었다.  

26) 롱성(蘢城)/ 한서에는 “용성(龍城)”으로 적혀 있고 또는 “롱(蘢)”으로도 적혀있다.  

      " 서방의 호(胡)는 모두 용신(龍神)을 섬기니 이 때문에 대회를 여는 곳을

     용성(龍城)이라 불렀다.”고 했다. 「후한서」에서 “흉노의 풍속에서는

     매년 세 번의 용사(龍祠)를 지내며 천신에 제사지낸다.”라고 했다.  

     지금의 몽고공화국 중앙부를 흐르는 Tamir 강(塔米尔河) 부근으로 비정된다.  

27) 대림(蹛林)/ 흉노가 추사(秋社)를 지내기 위해 8월 중에 모두 모이는 곳이다.

      대(蹛)의 음은 대(帶)라 했다.

28) 알(軋)/ 죄인의 몸에 수레바퀴를 지나가게 하는 형벌.

      혹은 칼로 죄인이 얼굴을 새기는 형벌이라고 했다.

29)「魏略」에 정령(丁零)은 강거의 북쪽에 있고 흉노의 왕정이 있는 접습수(接習水)로부터  

      7천 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또한 흉노 북쪽에 혼유국(渾窳國)이 있다고 했다.

      접습수는 安習水라고도 했다.

30)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大同市)다.

31) 신망(薪望)/ 한나라이 국경지대의 지명으로 추측되나 어디를 뜻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신망은 봉수대의 척후(斥堠)라는 설도 있다.  

32) 수겹기의(繡袷綺衣)/ 천자가 입는 옷으로 繡(수)는 겉에 입고 綺(기)는 안에 입었다.  

      모두 비단으로 만든 옷이다. 袷衣(겹의)는 솜[絮]이 없다.  

33) 수경장유(繡袷長襦)/비단에 수를 놓아 지은 긴 겹옷

34) 금겹포(錦袷袍)/ 겉 감에 큰 꽃무니로 채색하고 속은 솜을 댄 비단옷

35) 비여(比余)/ 금으로 만든 빗

36) 황금식구대(黃金飾具帶)/ 황금으로만든 허리띠

37) 황금서비(黃金胥紕)/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 고리

38) 적제(赤綈)/ 붉고 두꺼운 비단

39) 록증(綠繒)/ 푸른색 비단

40) 팽양(彭陽)/ 지금의 감숙성 진원현(鎭原縣) 동남이다.

41) 회중궁(回中宮)/ 지금의 섬서성 농현(隴縣) 동남에 있었던 행궁 이름으로

      진시황 26년 기원전 220년에 시황이 농서로 순행나갔다가 축조한 궁전이다.  

42) 차거(且居)/ 차거(且渠)라고도 하며 흉노의 중하급 지휘관이다.

      흉노의 기병 지휘관은 좌우현왕부터 대당호(大當戶)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사를 나누어

      통솔했는데 많게는 만 기 이상, 적게는 수천 기를 거느렸다. 만 기 이상을 거느리는

      지휘관은 모두 24장으로 각자는 휘하에 천장(千長), 백장(百長) 등의 속관을 두었다.  

      차거는 그들의 속관 중 하나다.  

43) 세 장군/ 장무(張武), 소의(蕭意), 영면(令勉)이다.

44) 비호구(飛狐口)/ 지금의 하북성 래원현과 울현(蔚縣) 사이의 우뚝 솟은 산맥 가운에 나 있는  

      좁은 통로로 중국의 고대 때 하북평원과 북방의 변경을 연결하는 인후에 해당했다.  

45) 여기서는 주아부(周亞父), 서려(徐厲), 유례(劉禮)다.

46) 유수(劉遂)/ 유수의 부친은 고조의 가운데 아들 조유왕(趙幽王) 유우(劉友)다.

      여씨들의 전횡에 반대했음으로 여태후의 미움을 받아 장안에서 연금되어 굶어 죽자

      한문제가 그의 아들 조수를 조왕에 세웠다.  

47) 무주(武州)/ 즉 무주색으로 지금의 산서성 좌운현에서 대동시 일대의 요새를 말한다.

48) 위사(尉史)/ 현위(縣尉)에 소속된 무관으로 도적을 잡고 야경군의 복무를 감시했다.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제도로 매 백리마다 위(尉)를 설치하고

      그 밑에 사사(士史)와 위사(尉史) 각 2명을 두어 국경의 요새를 순행하며 감독하게 했다.  

49) 위청이 거느린 여섯 장군 / 원삭(元朔) 5년 봄, 한나라가 거기장군 위청(衞靑)에게 명해

      3만 기를 거느리고 고궐을 나가게 하고 위위(衞尉) 소건(蘇建)을 유격장군(游擊將軍),  

      좌내사(左內史) 이저(李沮)를  강노장군(彊弩將軍),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를 기장군,

      대상(代相) 이채를 경거장군(輕車將軍)으로 삼고 이들을 모두 거기장군의 영을 받으며  

      함께 삭방(朔方)을 나가게 하고, 대행(大行) 이식(李息), 안두후(岸頭侯) 장차공(張次公)을

      장군으로 삼고 우북평을 나가게 하여 모두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위장군표기열전)  

50) 6장군/ 이때의 위청 휘하의 6장군은 중장군(中將軍) 공손오, 좌장군 공손하, 전장군 조신,  

      우장군 소건(蘇建), 후장군 이광(李廣), 강노장군(强弩將軍) 이저(李沮) 등이다.  

51) 신진중(新秦中)/ 하남으로 불리우며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 이남 지역으로

      영하성 청수하(淸水河) 유역, 감숙성 환현(環縣), 섬서성 오기현(吳旗縣) 일대를 포함한다.  

      관중을 의미하는 진중(秦中)과 연접한 땅이라고 해서 얻은 지명이다.  

52) 주객(主客)/ 외국의 사신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흉노의 관직 이름이다.

53) 한무제 원봉(元封) 6년 기원전 105년, 한경제의 손자 강도왕 유건의 딸 유세군(劉細君)을  

      오손왕에게 시집보냈다. 오손(烏孫) 은 전한 때 서역 지방인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할거하던  

      터키계(系)의 유목 민족으로, 그 세력권은 천산 산맥 북쪽의 이시크를 호수 부근으로부터  

      이리하(伊犁河: 일리 강) 유역의 분지를 포함하여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강 상류의 나린강 계곡에 있던 적곡성(赤谷城:본거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오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성했던 흉노는 북방 몽골 땅을

      근거지로 삼고 한나라를 끊임없이 침범했다.  

54) 한서 서역전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흉노는 오손(烏孫)이 한나라와 교통한다는 말을 듣고 노하여 오손을 공격하려고 했다.

      또한 한나라가 오손에 사자를 보내고는 그 남쪽을 나가 대원(大宛), 월지(月氏)에 이르러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오손이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말을 바치며

      한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서로 형제가 되기를 원했다. 천자가 신하들에게 물으니

      이를 의논하여 허락하되 필히 먼저 혼수를 들인 뒤에 여자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오손이 말 1천 필을 혼수로 보냈다. 한나라 원봉(元封) 중(B.C 110-105) 강도왕 건(建)의 딸  

      세군(細君,사람이름)을 공주로 삼아 처로 주었다. 승여(乘輿)와 황제가 쓰는 물품을 하사하고,

      관속(官屬), 환관(宦官), 시어(侍御)하는 자 수백명을 갖추어주었고 선물로 보내주는 것이

      매우 풍성했다. 오손의 곤막(昆莫)이 그녀를 우부인(右夫人)으로 삼았고

      흉노 또한 여자를 보내 곤막의 처로 삼게 하니  

      그녀는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았다.」  

55) 현뢰(胘雷)/ 지금의 신강성위그루자치구 경내의 탑성현(塔城縣) 부근이다.

56) 이광리(李廣利)/ 서한의 음악가인 이연년이 그의 여동생 이부인을 절세가인이라고 노래로

      소개하여 한무제에 의해 총애를 받자 이연년의 동생 이광리도 천거되어 장군이 되었다.  

      한무제 37년(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장건(張騫)의 원정으로 서역의 사정이 알려지자

      이광리가 군사를 이끌고 대원(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한무제에게 바쳤음으로 이광리는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후 4년간 고전하면서도 대원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어 

      그 공로로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여졌다. 그후 이부인이 죽고 형 이연년이 실각하자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흉노에 투항한 후 선우에 의해 살해당했다.  

57) 수항성(受降城)/ 지금의 몽고공화국 남과벽성 노목강현(瑙岡縣)의 파음포랍격에  

      옛 성터가 있다. 한무제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축조했다.  

58) 준계산(浚稽山)/ 지금의 몽고공화국 내의 고비알타이[戈壁阿爾泰] 산맥의

      토랍하(土拉河)와 악이혼하(鄂尔浑河) 상류 일대를 말한다.  

59) 호군(護軍)/ 진한 시대에 임시로 설치한 무관직으로 여러 장군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했다.

60) 거수(渠帥)/ 한나라에 항복한 흉노의 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의 대장을 말한다.

61) 광록훈(光綠勳)/ 진나라가 설치한 낭중령을 한무제가 바꾼 명칭으로 9경 중 한 명이다.  

      궁궐의 숙위(宿衛), 수문(守門), 총관(總管), 궁내사(宮內事)로 실제적으로 궁내의 일을

      총괄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속관으로는 대부, 랑, 알자, 기문(期門), 우림(羽林) 등이 있다.  

62) 여구(廬胊)/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다음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➀ 양산(陽山)의 북록의 산 이름으로 이곳에 방책과 척후 초소를 축조하여 요새 밖에서

      구원(九原)과 삭방(朔方)을 기지로 삼았다.  

      ➁ 강이름으로 즉 여구하(廬胊河) 혹은 용거하(龍居河)로 지금의 몽고공화국 영토 내의  

      극로윤하(克魯倫河 : Keruelen River)를 말한다고 했다.  

63) 기(紀)나라는 산동성 익도현(益都縣) 부근에 있던 제후국으로 제나라 도성 임치성과는  

      그 동쪽으로 약 30키로 떨어져 있었다. 기원전 690년 제양공에 의해 제나라에 병합되었다.  

      제나라와 동성인 강성(姜姓)의 제후국이다. 주이왕 때 주나라의 경사(卿士) 직에 있던

      기국의 군주가 제애공(齊哀公)을 참소하자 주이왕은 제애공을 팽살했다.

      이후로 제와 기 두 나라는 원수로 지내다가  

      제양공이 기나라를 멸해 9대 조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 것이다.  

64) 탁도산(涿塗山)/ 지금의 몽고공화국의 체체아르크[車車爾勒格,Tsetser-leg] 남쪽에 있는

      산이다. 울란바토르 남서쪽 600키로다.  

65) 여오수(余吾水)/ 지금의 몽고공화국 내의 토랍하(土拉河)다.

66) 무고(巫蠱)의 란/정화(征和) 2년 기원전 91년 한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환관 강충이

      태자가 나무인형을 만들어 무제를 저주했다고 모함했다. 태자가 선발제인하여

      강충을 살해함으로 난이 발생하여 태자의 군대와 한무제의 군대가 장안성 내에서

      5일 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수만여 명이 죽은 사건이다.  

      이 난으로 태자는 자살하고 태자의 두 아들은 살해당했다. 후에 무고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제가 승상 유굴리 및 관련자를 모두 처형했다.  

67) 노은공(魯隱公)/기원전 722년에 올라 711년에 죽은 춘추 초기의 노나라 군주로

      희(姬) 성에 이름은 식고(息姑)다. 선군 혜공(惠公)의 서장자로 혜공이 죽었을 때

      적자인 윤(允)의 나이가 어렸음으로 그가 대신 섭정을 행했다.

      재위 11년 태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태자 윤이 노환공이다.

      공자가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인 춘추는 노은공 원년부터 시작해서

      노애공 14년인 기원전 481년에 이르는 242년 동안의 기록이다.  

68) 노환공(魯桓公)/기원전 711년부터 694년까지 재위한 노나라 군주다.

      희(姬) 성에 이름은 윤(允)이다.  

      사기 본기에는 궤(軌)라 되어 있으며 송무공의 딸 소생으로 노혜공(魯惠公)의 적자다.  

      기원전 712년 공자휘(公子揮)와 모의하여 그의 서형인 노은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노후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처 문강은 제양공(齊襄公)의 여동생이었으나

      그녀는 출가 전 남매가 서로 정을 통한 사이였다.  

      주장왕 3년 기원전 694년 노환공이 그의 처 문강을 데리고 제나라에 들렸다가

      문강이 다시 옛날처럼 자기의 오라비와 간통한 사실을 알게 되어 추궁했다.

      문강으로부터 그 일을 전해들은 제양공은 노환공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살해했다.  

69) 노정공(鲁定公)/ 기원전 509년 재위에 올라 495년에 죽은 노소공의 아들로

      이름은 송(宋)이다. 그의 재위 기간 중인 전 500년 공자를 대동하고 협곡에서 제나라와

      회맹을 행했다. 회맹 중에 제후(齊侯)가 정공(定公)을 습격하여 포로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공자가 의례를 주제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 제나라의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악인(樂人)들을 질책하여 물리쳤다. 제후(齊侯)가 감히 정공을 해치지 못하고

      오히려 제나라가 빼앗아 간 문양의 땅을 사죄의 뜻으로 돌려주었다.  

      이에 노정공은 공자를 더욱 신임한 노정공은 공자를 대사구(大司寇)에 임명했다.

      이로써 노나라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의 재위 12년에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를 시켜 당시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하고 있던 삼환(三桓) 씨들의

      성읍의 성벽을 허물고 그들의 사병들을 해산시키려고 했으나 맹씨들이 불복하자  

      정공이 토벌군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여 삼환씨들의 성읍을 허물지 못했다.

      후에 계환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여자 악사들을 받아들여

      정사가 문란해졌기 때문에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고 정공은 3년 후에 죽었다.  

70) 노애공(魯哀公)/ 기원전 494년 노정공의 뒤를 이어 노후에 자리에 올랐다가 기원전 468년

      삼환씨에게 축출되어 오나라에 망명하여 그 다음해인 467년에 죽은 노나라 군주다.

      이름은 장(將)이다.  기원전 481년, 제나라 간공의 재상 전항(田恒)에 살해당하자,

      공자가 다시 제나라 정벌을 세 차례나 권하지만, 애공은 들어주지 않았다.

      기원전 468년에 삼환씨에게 무력을 행사했으나,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삼환씨의 군사력에 굴복당해, 월나라로 추방되어 기원전 467년에 그 땅에서 죽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