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本紀(사기본기)/5. 秦本紀

第 五. 秦本紀(진본기)

덕치/이두진 2021. 6. 27. 08:53

 

            史記 本紀

 

 

    第 五.  秦本紀(진본기)

 

秦之先, 帝顓頊之苗裔孫曰女修.  女修織, 玄鳥隕卵, 女修吞之, 生子大業.  

大業取少典之子, 曰女華.  女華生大費, 與禹平水土. 

(진지선, 제전욱지묘예손왈여수. 여수직, 현조운란, 여수탄지, 생자대업.  

대업취소전지자, 왈여화. 여화생대비, 여우평수토. )  

  

[진나라의 원조는 오제 가운데 한사람인 '전욱'의 피를 이어 받은 후손 '여수'를 말한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을때 제비 한마리가 날아와 알을 떨어뜨리자 '여수'는 그 알을 얼른 집어 삼키고 
 

아들 '대업'을 낳았다.'대업'은 동이족 '소전'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여화'라고 불렸다. 

'여화'는 '대비'를 낳았으며, '우'와 함께 물과 땅을 관리하였다.] 

已成, 帝錫玄圭.  禹受曰:“ 非予能成, 亦大費為輔. ” 

帝舜曰:“ 咨爾費, 贊禹功, 其賜爾皁游.  爾後嗣將大出. ”
(이성, 제석현규.  우수왈 : " 비여능성, 역대비위보. "  
 

제순왈 : " 자이비, 찬우공, 기사이조유.  이후사장대출. ") 


[관리가 이미 이루어지자, 순임금은 '우'에게 검은 옥으로 만든 홀(笏)을 하사하였다. 
'우'는 그것을 받아 들며 말하기를 : " 치수의 공업은 제가 혼자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비'의 보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자.
순임금이 말하기를 : " 아,  '대비' 여 !  그대는 '우'를 도와서 공을 이루었으니, 

그대에게 검은 비단 깃발을 하사할 것이다.  그대의 후손은 장차 크게 번성하리라. "라고 하였다.] 

乃妻之姚姓之玉女.  大費拜受, 佐舜調馴鳥獸, 鳥獸多馴服, 是為柏翳.  舜賜姓嬴氏.

大費生子二人:一曰大廉, 實鳥俗氏;二曰若木, 實費氏.  其玄孫曰費昌, 子孫或在中國, 或在夷狄.
(내처지요성지옥녀.  대비배수, 좌순조순조수, 조수다훈복, 시위백예.  순사성영씨.

대비생자이인 : 일왈대렴, 실조속씨 ; 이왈약목, 실비씨.  기현손왈비창, 자손혹재중국, 혹재이적. )

[그리고 나서 '요씨' 성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었다.  '대비'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임금을 도와 새와 짐승들을 선별하여 훈련시켰으며 많은 새와 짐승들이 길들여져서 복종을 잘 하였으니,

이 사람이 바로 '백예'(익)이다.  순임금은 '익'에게 영씨 성을 하사하였다.

'대비'는 자식 둘을 낳았다 : 첫째는 '대렴'이라고 불렀으며 '조속'씨가 되었고 ;  

둘째는 '약목'으로 마침내 '비'씨가 되었다.  그 현손에 '비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자손중에 어떤 이는 천하의 중심에 살았으며, 어떤 이는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살았다.] 

費昌當夏桀之時, 去夏歸商, 為湯御, 以敗桀於鳴條.  大廉玄孫曰孟戲· 中衍, 鳥身人言.

帝太戊聞而卜之使御, 吉, 遂致使御而妻之.   

自太戊以下, 中衍之后, 遂世有功, 以佐殷國, 故嬴姓多顯, 遂為諸侯.
(비창당하걸지시, 거하귀상, 위탕, 이패걸어명조.  대렴현손왈맹희· 중연, 조신인언.

제태무문이복지사어, 길, 수치사어이처지.   

자태무이하, 중연지후, 수세유공, 이좌은국, 고영성다현, 수위제후. )

['비창'은 하나라 '걸왕'때에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에 몸을 의탁하여 '탕왕'의 수레를 몰았으며, 

'걸왕'을 "명조"에서 물리쳤다. '대렴'의 현손을 '맹희', '중연'이라 하는데 새의 몸을 하고 인간의 말을 하였다.

상나라 제'태무'가 이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수레를 몰게 해야 할지를 점을 치게 하니 길하게 나왔다. 
마침내 그들에게 수레를 몰게하고 아내를 얻어 주었다.  '태무' 이래로 '중연'의 후손들은 드디어 대대로 
공을 세우며

은나라를 도왔으므로, 영씨 성이 세상에 널리 드러났으며 마침내 제후가 되었다. ]

其玄孫曰中潏, 在西戎, 保西垂.  生蜚廉.  蜚廉生惡來.   

惡來有力, 蜚廉善走, 父子俱以材力事殷紂.  周武王之伐紂, 并殺惡來.
(기현손왈중휼, 재서융, 보서수.  생비렴.  비렴생악래.  
 

악래유력, 비렴선주, 부자구이재력사은주.  주무왕지벌주, 병살악래. ) 

 

['중연'의 현손은 '중휼'인데, 서융 지역에 살면서 은나라의 군사적 변경인 "서수"를 지키고 있었다.   

'중휼'은 '비렴'을 낳았다.  '비렴'은 '악래'를 낳았다. '악래'는 체력이 좋았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 하였으며,

부자 두 사람은 재주와 체력으로 은나라 '주왕'을 섬겼다. 
주'무왕'이 '주왕'를 정벌하고 은나라를 멸하면서 '악래'도 함께 죽였다. ]

是時蜚廉為紂石北方, 還, 無所報, 為壇霍太山而報, 得石棺,  

銘曰“ 帝令處父不與殷亂, 賜爾石棺以華氏. ”  死, 遂葬於霍太山.
(시시비렴위주석북방, 환, 무소보, 위단곽태산이보, 득석관, 
 

명왈" 제령처부불여은란, 사이석관이장씨. "  서, 수장어곽태산. ) 


[이때 '비렴'은 '주왕'에게 바칠 돌을 캐기 위해 북방에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보고할 곳이 없게 되자, 
 

'비렴'은 "곽태산"에서 제단을 쌓아 '주왕'에게 고하였다.

후일 석관 하나가 발굴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명문이 발견되었다.  

"천제께서는 처보인 나로 하여금 은나라에 난리가 나지 못하게 하고, 

너희에게 석관을 하사하여 씨족을 번창하게 하노라. "  '비렴'이 죽자,  마침내 "곽태산"에 장사 지내졌다. ] 

 

蜚廉復有子曰季勝.  季勝生孟增.  孟增幸於周成王, 是為宅皋狼.  皋狼生衡父, 衡父生造父. 

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驥· 溫驪· 驊騮· 騄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비렴복유자왈계승.  계승생맹증.  맹증행어주성왕, 시위택고랑.  고랑생형보, 형보생조보.

조보이선어행어주목왕, 득기· 온여· 화류· 록이지사, 서순수, 낙이망귀. )

['비렴'에게는 다른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계승'이라 불렀다.  '계승'은 '맹증'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맹증'은 周'성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 사람이 바로 "택고랑" 이다. 

'고랑'은 '형보'를 낳았으며, '형보'는 '조보'라는 자식을 두었다. 

'조보'는 수레를 훌륭하게 몰아 주'목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주'목왕'은 기(천리마), 온려(털빛이 온통 검은 말),

화류(털빛이 붉고 갈기가 검은 준마), 녹이(준마의 이름) 등  4마리의 좋은 말로 어가수레를 만들어,

서쪽으로 순행을 다니며 즐기느라 돌아가는 것 조차 잊었다. ]

徐偃王作亂, 造父為繆王御, 長驅歸周, 一日千里以救亂.  繆王以趙城封造父, 造父族由此為趙氏.

自蜚廉生季勝已下五世至造父, 別居趙.  趙衰其后也.  惡來革者, 蜚廉子也, 蚤死.  有子曰女防.
(서언왕작난, 조보위목왕어, 장구귀주, 일일천리이구난.  목왕이조성봉조보, 조보족유차위조씨.

자비렴생계승이하오세지조보, 별거조.  조쇠기후야.  악래혁자, 비렴자야, 조사.  유자왈여방. )

[서나라의 군주 '서언왕'이 난을 일으키자, '조보'는 네 마리 준마가 끄는 수레에 주'목왕'을 태우고  

하루에 천리를 달려 반란에 휩쓸린 나라를 구했다.주'목왕'은 "조성"을 '조보'에게 봉지로 주었는데,

'조보' 일족은 이 봉지로 말미암아 조씨가 되었으니, 후세 조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비렴'이 '계승'을 낳은 이후 5대째인 '조보'에 이르러 "조성"에서 따로 살았다.   

진나라의 대부 '조최'는 그 후손이다. '악래'는 '비렴'의 아들이며,

무왕이 '주'(紂)를 정벌할 때 이른 나이에 죽었다. '악래'에게 자식이 있었는데 '여방'이라 불렀다. ]

女防生旁皋, 旁皋生太幾, 太幾生大駱, 大駱生非子.  以造父之寵, 皆蒙趙城, 姓趙氏.

非子居犬丘, 好馬及畜, 善養息之.  犬丘人言之周孝王, 孝王召使主馬于汧渭之閒, 馬大蕃息.   

孝王欲以為大駱適嗣.  申侯之女為大駱妻, 生子成為適.
(여방생방고, 방고생태기, 태기생대락, 대락생비자.  이조보지총, 개몽조성, 성조씨.

비자거견구, 호마급축, 선양식지.  견구인언지주효왕, 효왕소사주마우견위지간, 마대번식.   

효왕욕이위대락적사.  신후지녀위대락처, 생자성위적. )

['여방'은 '방고'를 낳고, '방고'는 '태기'를 낳고, '태기'는 '대락'을 낳고, '대락'은 '비자'를 낳았다.  
'비렴'이 씨뿌린 이 한 갈래 후예는 주'목왕' 때에 '조보'의 총애로 말미암아 모두 "조성"에 모여 살게 되었으며,

성이 조씨가 되었다. '비자'는 성장하면서 "견구"라는 곳에 살았는데,

말을 기르고 목축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사육과 번식하는 방법에도 능통하였다. 

당시의 주'효왕'은 그곳 견구인이 이룩한 일을 듣고 '비자'를 불러 "견수"와 "위수" 사이의 언덕과 들에 말을 기르게

하니 말이 크게 번식했다. 주'효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비자'를 "대락"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신후'가 딸을 시집보내 '대락'의 처가 되어 '성'을 낳아, 

'성'이 "대락"의 적사(정실의 자손이 계승)가 되었다.

申侯乃言孝王曰:“ 昔我先酈山之女, 為戎胥軒妻, 生中潏, 以親故歸周, 保西垂, 西垂以其故和睦.  
今我復與大駱妻, 生適子成.  申駱重婚, 西戎皆服, 所以為王.  王其道之. ”
(신후내언효왕왈 : " 석아선역산지녀, 위융서헌처, 생중휼, 이친고귀주, 서보수, 서수이기고화목.
금아부여대락처, 생적자성.  신락중혼, 서융개복, 소이위왕.  왕기도지." )


['신후'가 이에 '효왕'을 보고 말하기를 : " 아주 오래 전에, 저의 선조이신 "여산"의 여인이 '중연'의 증손 
융족인

'서헌'의 처가 되어 '중휼'을 낳고, '중휼'의 후손이 친척이 되어 주나라에 귀의 한 후 "서수"를 지키게 되었고

그로인해 "서수"가 평화롭고 화목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다시 '대락'에게 딸을 시집보내 적자 '성'을 낳았습니다. 

저와 '대락'이 거듭하여 혼인 관계를  맺어 서융족이 모두 복종하여 대왕께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이점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

於是孝王曰:“ 昔伯翳為舜主畜, 畜多息, 故有土, 賜姓嬴.   

今其後世亦為朕息馬, 朕其分土為附庸. ”
(어시효왕왈 : " 석백예위순주축, 축다식, 고유토, 사성영.  금기후세역위짐식마, 짐기분토위부용. " )


[이에 '효왕'이 말하기를 : " 옛날에 '백예'는 순임금을 위해 가축을 책임지고 사육했는데 
가축이 많이 번식하여

봉지를 얻고 영씨 성을 하사 받았다. 지금 그 후손들이 또한 짐을 위해 말을 번식시켰으니,

짐은 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부용국으로 삼겠노라. "라고 하였다. ]

邑之秦, 使復續嬴氏祀, 號曰秦嬴.  亦不廢申侯之女子為駱適者, 以和西戎.

秦嬴生秦侯, 秦侯立十年, 卒.  生公伯.  公伯立三年, 卒.  生秦仲.
(읍지진, 사부속영씨사, 호왈진영.  역불폐신후지녀자위락적자, 이화서융.

진영생진후, 진후립십년, 졸.  생공백.  공백립삼년, 졸.  생진중. )


[그리고는 진땅에 봉지를 주어 그에게 다시 영씨의 제사를 잇게 하여 '진영'이라고 불렀다.
또한 '신후'의 딸이 낳은 자식을 폐하지 않고 '대락'의 적자로 삼아서 서융과 평화롭게 지내게 하였다.

'진영'이 '진후'를 낳았고, '진후'는 즉위한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진후'는 '공백'을 낳았다.
'공백'은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공백'은 '진중'을 낳았다. ]

秦仲立三年, 周厲王無道, 諸侯或叛之.  西戎反王室, 滅犬丘大駱之族.   

周宣王即位, 乃以秦仲為大夫, 誅西戎.  西戎殺秦仲.  秦仲立二十三年, 死於戎.
(진중립삼년, 주려왕무도, 제후혹반지.  서융반왕실, 멸견구대락지족.  
 

주선왕즉위, 내이진중위대부, 주서융.  서융살진중.  진중립이십삼년, 사어융. )


['진중'이 재위한지 3년, 주'려왕'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자, 제후들 가운데 일부가 반기를 들었다. 
서융도 주나라 왕실에 반기를 들고 "견구"와 "대락"에 거주하고 있는 일족을 멸하였다.  
주'선왕'이 즉위하여 '진중'을 대부로 삼아 서융을 징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융이 먼저 '진중'을 살해하였다. 

이로써 '진중'은 재위 23년 만에 서융에게 목숨을 잃었다. ] 

           

有子五人, 其長者曰莊公.  周宣王乃召莊公昆弟五人, 與兵七千人, 使伐西戎, 破之.   

於是復予秦仲後, 及其先大駱地犬丘并有之, 為西垂大夫. 
(유자오인, 기장자왈장공.  주선왕내소장공곤제오인, 여병칠천인, 사벌서융, 파지.  
 

어시부여진중후, 급기선대락지견구병유지, 위서수대부. )


['진중'에게는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맏아들을 '장공'이라고 불렀다.  
 

주'선왕'은 '장공'을 포함해 다섯 형제를 불러 병사 7천 명을 주고 서융을 정벌하게 하여 그들을 무찔렀다. 

이에 주'선왕'은 다시 '진중'의 후손들에게 상을 내리고, 마침내 그 선조들이 머물러 살던 "대락" 땅에서

"견구"까지 겸하여 소유하게 하고 "서수"의 대부로 삼았다. ] 
         
莊公居其故西犬丘, 生子三人, 其長男世父.  世父曰:“ 戎殺我大父仲, 我非殺戎王則不敢入邑. ” 

遂將擊戎, 讓其弟襄公.  襄公為太子. 
(장공거기고서견구, 생자삼인, 기장남세보.  세보왈 : " 융살아대부중, 아비살융왕즉불감입읍. "  
 

수장격융, 양기제양공.  양공위태자장. )


['장공'은 선조들이 머물러 살던 "서견구"에 살면서 세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세보'이다.
'세보'가 말하기를 : " 서융이 우리 할아버지 '진중'을 죽였으니, 내가 융족의 왕을 죽이지 않고서는 
감히 봉읍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서융을 공격하려고 아우인 '양공'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리하여 '양공'이 태자가 되었다. ] 

           

莊公立四十四年, 卒, 太子襄公代立.  襄公元年, 以女弟繆嬴為豐王妻.   

襄公二年, 戎圍犬丘, 世父擊之, 為戎人所虜.  歲餘, 復歸世父.
(장공립사십사년, 졸, 태자양공대립.  양공원년, 이녀제무영위풍왕처.  
 

양공이년, 융이견구, 세보격지, 위융인소로.  세여, 복귀세보. )


['장공'이 재위한지 44년에 세상을 떠나자, 태자 '양공'이 대신하여 자리에 올랐다.  
 

'양공' 원년, '양공'의 여동생 '무영'이 '풍왕'의 아내가 되었다.
'양공' 2년, 융족이 "견구"를 포위하자, '세보'가 공격을 하였으나 오히려 융족의 포로가 되었다.  
 

일년이 넘자, 융족은 '세보'를 돌려 보냈다. ] 

           

七年春, 周幽王用褒姒廢太子, 立褒姒子為適, 數欺諸侯, 諸侯叛之.   

西戎犬戎與申侯伐周, 殺幽王酈山下.  而秦襄公將兵救周, 戰甚力, 有功. 

周避犬戎難, 東徙雒邑, 襄公以兵送周平王. 
(칠년춘, 주유왕용포사폐태자, 입포사자위적, 삭기제후, 제후반지. 

서융견융여신후벌주, 살유왕역산하. 이진양공장병구조, 전심력, 유공. 

주피견융난, 동사낙읍, 양공이병송주평왕.)


['양공' 7년 봄, 주나라 '유왕'은 총희 '포사'의 말을 듣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포사'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면서 제후들을 자주 기만하자, 제후들이 반기를 들었다.   

'신후'는 서융과 견융을 동원하여 주나라를 공격하고 "역산" 아래서 '유왕'을 살해하였다.

이에 진나라 '양공'이 병력을 인솔하여 주나라를 구원하러 가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운 결과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주나라가 견융의 난을 피하여 동쪽의 "낙읍"으로 이사할때 '양공'은 병력을 이끌고 주'평왕'을 호송하였다.]
         
平王封襄公為諸侯, 賜之岐以西之地, 曰:“ 戎無道, 侵奪我岐· 豐之地, 秦能攻逐戎, 即有其地. ”  與誓, 封爵之. 

襄公於是始國, 與諸侯通使聘享之禮, 乃用騮駒· 黃牛· 羝羊各三, 祠上帝西畤. 
(
평왕봉양공위제후, 사지기이서지지. 왈 : " 융무도, 침탈아기· 풍지지, 진능공축융, 즉유기지. "  
 

여서, 봉작지.  양공어시시국, 여제후통사빙향지례, 내용유구· 황우· 저양각삼, 사상제서치. )

 

['평왕'은 '양공'을 제후로 봉하고 "기산"의 서쪽 땅을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 

"융족은 도의가 없어 우리의 "기산"과 "풍수" 지역을 침범하여 빼앗았으니,

진나라가 공격하여 융족을 몰아낼 수 있다면, 그 땅을 모두 진나라 영토로 인정 하겠소. "라고 하였다.  
'평왕'은 '양공'과 서약하고, 제후로 봉한 후 봉지와 작위를 주었다. '양공'은 이때에 처음으로 나라를 갖게 
되었으며,

기타 제후국들과 더불어 사절을 통하여 서로 방문하고 예로써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검은색 갈기에 몸이 붉은 어린 말과 누런 소와 숫양 각 한필를 써서 제사터인 서치에서 
상제께 제사를 지냈다.]

   

十二年, 伐戎而至岐, 卒.  生文公. 

文公元年, 居西垂宮.  三年, 文公以兵七百人東獵.  四年, 至汧渭之會.   

曰:“ 昔周邑我先秦嬴於此, 後卒獲為諸侯. ”  乃卜居之, 占曰吉, 即營邑之.
(십이년, 벌융이지기, 졸.  생문공.

문공원년, 거서수궁.  삼년, 문공이병칠백인동렵.  사년, 지견위지회.   

왈 : " 석주읍아선진영어차, 후졸획위제후. "  내복거지, 점왈길, 즉영읍지. )

['양공' 12년, '양공'은 서융을 공격하여 "기산"까지 몰아 냈으나 이 정벌 중에 죽었으며 "서수"에 묻혔다. 

'양공'은 '문공'을 낳았다.

'문공' 원년, '문공'은 서수궁에서 지냈다.   

'문공' 3년, '문공'은 병사 7백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수렵을 떠났다.   

'문공' 4년, "견수"와 "위수"가 만나는 곳에 이르자. 말하기를 :

" 옛날 주나라가 이곳을 우리 선조인 '진영'에게 봉읍을 하사하자, 그 후 마침내 제후가 되었다. "라고 하며.

 과연 그곳이 살 만한 곳인지 점을 치게 하였는데 점괴가 길하게 나오자, 즉시 그곳에 신도를 건설하였다. ]
          
十年, 初為鄜畤, 用三牢.  十三年, 初有史以紀事, 民多化者.  
 

十六年, 文公以兵伐戎, 戎敗走.  於是文公遂收周餘民有之, 地至岐, 岐以東獻之周.
(십년, 초위부치, 용삼뢰.  십삼년, 초유사이기사, 민다화자.  
 

십육년, 문공이공벌융, 융패주.  어시문공수수주여민유지, 지지기, 기이동헌지주. )


['문공' 10년, 처음으로 "부성"에 제사터 부치를 만들어 삼뢰(소, 양, 돼지)를 사용하여 제사를 지냈다.
'문공' 13년, 처음으로 사관을 설치하여 국가 대사등을 기록하였고, 많은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문공' 16년, '문공'이 병력을 이끌고 서융을 토벌하자, 서융은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문공'은 西周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영토를 "기산"까지 확장하였으며, 

"기산"의 동쪽 땅을 주'평왕'에게 바쳤다. ]  

 

十九年, 得陳寶.  二十年, 法初有三族之罪.  二十七年, 伐南山大梓, 豐大特.           

四十八年, 文公太子卒, 賜謚為竫公.  竫公之長子為太子, 是文公孫也.   

五十年, 文公卒, 葬西山.  竫公子立, 是為寧公.
(십구년, 득진보.  이십년, 법초유삼족지죄.  이십칠년, 벌남산대재, 풍대특.

사십팔년, 문공태자졸, 사시위정공.  정공지장자위태자, 시문공손야.   

오십년, 문공졸, 장서산.  정공자립, 시위영공. )

['문공' 19년, 진기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  '문공' 20년, 처음으로 삼족의 죄를 묻는 형법을 제정하였다.
'문공' 27년, "남산"에 있는 큰 가래나무를 벌목하자, 거기서 한마리 큰 소가 "풍수"로 도망쳤다.

'문공' 48년, 태자가 죽자, 시호를 '정공'으로 하사하였다.   

'정공'의 장자를 태자로 책봉하니, 이 사람이 바로 '문공'의 손자이다.
'문공' 50년, '문공'이 죽자, "서산"에 안장하였다.  '정공'의 아들이 재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영공'이다. ]
 

      

寧公二年, 公徙居平陽.  遣兵伐蕩社.  三年, 與亳戰, 亳王奔戎, 遂滅蕩社.   

四年, 魯公子翚弒其君隱公.  十二年, 伐蕩氏, 取之.
(영공이년, 공사거평양.  견병벌탕사.  삼년, 여박전, 박왕분융, 수멸탕사.  
 

사년, 노공자휘시기군은공.  십이년, 벌탕씨, 취지. )


['영공' 2년, '영공'은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또 군대를 파견하여 "탕사"를 정벌하였다.
'영공' 3년, 박나라와 일전을 벌여 박나라 왕이 서융으로 달아나자 마침내 "탕사"를 멸하였다.
'영공' 4년, 노나라 공자 '휘'가 임금 '은공'을 시해하였다.  
 

'영공' 12년, 탕씨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았다. ] 

 

寧公生十歲立, 立十二年卒, 葬西山. 生子三人, 長男武公為太子. 武公弟德公, 同母魯姬子. 生出子.

寧公卒, 大庶長弗忌· 威壘· 三父廢太子而立出子為君.  出子六年, 三父等復共令人賊殺出子.   

出子生五歲立, 立六年卒.  三父等乃復立故太子武公.
(영공생십세립, 입십이년졸, 장서산.  생자삼인, 장남무공위태자.  무공제덕공, 동모노희자.  생출자.

영공졸, 대서장불기· 위루· 삼보폐태자이립출자위군.  출자육년, 삼보등부공령인적살출자.   

출자생오세립, 입육년졸.  삼보등내복립고태자무공. )

['영공'이 10살때 재위하여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서산"에 안장하였다.   

'영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인 '무공'이 태자였다.
'무공'과 아우 '덕공'은 같은 어머니인 '노희'의 아들이었고, 막내 '출자'는 '왕희'의 아들이었다.

'영공'이 세상을 떠나자, 대서장인 '불기'와 '위루'와 '삼보'가 태자 '무공'을 폐위시키고, 

막내 '출자'를 임금으로 옹립하였다.
'출자'가 즉위한지 6년 뒤 '삼보'등이 다시 모의하여 도둑으로 하여금 '출자'를 살해하도록 시켰다.
'출자'는 다섯살때 재위하여 6년 만에 죽었다.  '삼보'등은 다시 옛 태자인 '무공'을 옹립하였다.]
 

     

武公元年, 伐彭戲氏, 至于華山下, 居平陽封宮.   

三年, 誅三父等而夷三族, 以其殺出子也.  鄭高渠瞇殺其君昭公. 

十年, 伐邽· 冀戎, 初縣之.
(무공원년, 벌팽희씨, 지우화산하, 가평양봉궁.  
 

삼년, 주삼보등이이삼족, 이기살출자야.  정고거미살기군소공.  십년, 벌규· 기융, 초현지. ) 

 

['무공' 원년, 진'무공'은 '팽희씨'를 정벌하러 갔다가 "화산" 아래에 이르렀으나,

산세가 높고 험준하여 도성인 "평양"의 봉궁에 머물렀다.
'무공' 3년, '삼보'등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하였으며, 이는 그들이 '출자'를 시해하였기 때문이다.
정나라 간신 '고거미'가 그 임금인 정'소공'을 시해하고 공자 '미'를 옹립하였다. 
'무공' 10년, "규"와 "기융"을 정벌하여 처음으로 현제(縣制)를 실시해 획득한 땅을 다스렸다. ]
          
 

十一年, 初縣杜· 鄭.  滅小虢.  十三年, 齊人管至父, 連稱等殺其君襄公而立公孫無知.   

晉滅霍, 魏, 耿.  齊雍廩殺無知, 管至父等而立齊桓公.  齊, 晉為彊國.
(십일년, 초현두· 정.  멸소괵.  십삼년, 제인관지보, 연칭등살기군양공이립공손무지.  
 

진멸곽, 위, 경.  제옹름살무지, 관지보등이립제환공.  제, 진위강국. ) 

['무공' 11년, 처음으로 "두", "정" 두 땅을 침략해 점거하고 현을 설치하였으며, "소괵"을 멸망시켰다. 
13년, 제나라 장수 '관지보'와 '연칭'등이 임금인 '양공'을 살해하고 '양공'의 사촌 아우 '공손무지'를 옹립하였다. 

진(晉)나라가 "곽", "위", "경"나라를 멸망시켰다.  제나라에서 대부 '옹름'이 '공손무지'를 살해하였으며,

'관지보'와 '연칭'등도 처형하고, 공자 '소백'을 제'환공'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제나라와 진나라는 강국이 되었다. ] 

     

十九年, 晉曲沃始為晉侯.  齊桓公伯於鄄.  二十年, 武公卒, 葬雍平陽.   

初以人從死, 從死者六十六人.  有子一人, 名曰白, 白不立, 封平陽.  立其弟德公.
(십구년, 진곡옥시위진후.  제환공백어견.  이십년, 무공졸, 장옹평양.  
 

초이인종사, 종사자육십육인.  유자일인, 명왈백, 백불입, 봉양평.  입기제덕공. )


['무공' 19년, 진나라의 '곡옥'이 처음으로 진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제나라 '환공'은 "견" 지방에서 패주가 되었다.

20년, '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옹"땅의 "평양"에 안장하였다. 처음으로 순장을 실시해 따라 죽은 이가 66명이었다.
'무공'에게는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이름을 '백'이라고 불렀으며 '백'은 즉위하지 못하고 "평양"에 봉하였다. 

'무공'의 동생인 '덕공'이 즉위하였다. ] 

 

德公元年, 初居雍城大鄭宮.  以犧三百牢祠鄜畤.  卜居雍.  後子孫飲馬於河.  梁伯· 芮伯來朝. 

二年, 初伏, 以狗御蠱.  德公生三十三歲而立, 立二年卒.   

生子三人:長子宣公, 中子成公, 少子穆公.  長子宣公立.
(덕공원년, 초거옹성대정궁.  이희삼백뢰사부치.  복어옹.  후자손음마어하.  양백· 예백래조.

이년, 초복, 이구어고.  덕공생삼십삼세이립, 입이년졸.   

생자삼인 : 장자선공, 중자성공, 소자목공.  장자선공립. )

['덕공' 원년, 처음으로 "평양"에서 "옹성"으로 천도하여 대정궁에 머물렀다.   

이때 제사 지낼 희생으로 소, 양, 돼지 각 3백 마리를 골라 부치에서 제사 지냈다.
또 "옹성"에 계속 머물러도 좋을지를 첨쳤다.  점괘에 후대 자손들이 동쪽으로 "용문"의 황하에서 

말에게 물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나왔다.  양나라의 군주와 예나라의 군주가 조회를 왔다.

'덕공' 2년, 처음으로 복날을 정하여 개고기를 먹음으로써 독기를 막았다.   

'덕공'은 33세에 즉위하여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덕공'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선공'이고, 둘째는 '성공'이며, 막내는 '목공'이다.  맏아들 '선공'이 즉위하였다. ]  

     

宣公元年, 衛· 燕伐周, 出惠王, 立王子穨.  三年, 鄭伯· 虢叔殺子穨而入惠王.   

四年, 作密畤.  與晉戰河陽, 勝之.  十二年, 宣公卒.  生子九人, 莫立, 立其弟成公.
(선공원년, 위· 연벌주, 출혜왕, 입왕자퇴.  삼년, 정백· 괵숙살자퇴이입혜왕.  
 

사년, 작밀치.  여진전하양, 승지.  십이년, 선공졸.  생자구인, 막립, 입기제성공. )


['선공' 원년, 위나라와 연나라가 주나라를 공격하여 '혜왕'을 몰아내고 왕자 '퇴'를 옹립하였다. 
'선공' 3년, '정백'과 '괵숙'이 왕자 '퇴'를 죽이고 정나라로 달아난 '혜왕'을 복위시켰다.
'선공' 4년, "위남"에 밀치를 세워 '청제'에게 제사를 지내고, 진나라와 황하 이북 "하양"에서 싸워 이겼다.
'선공' 12년, '선공'이 죽었다.  그는 아들을 아홉이나 낳았지만 아무도 즉위하지 못하고, 
 

그의 동생이자 '덕공'의 차남인 '성공'이 즉위하였다. ] 

 

成公元年, 梁伯· 芮伯來朝.  齊桓公伐山戎, 次于孤竹.  成公立四年卒.  子七人, 莫立, 立其弟繆公.

繆公任好元年, 自將伐茅津, 勝之.  四年, 迎婦於晉, 晉太子申生姊也.  其歲, 齊桓公伐楚, 至邵陵.
(성공원년, 양백· 예백래조.  제환공벌산융, 차우고죽.  성공립사년졸.  자칠인, 막립, 입기제목공.

목공임호원년, 자장벌모진, 승지.  사년, 영부어진, 진태자신생자야.  기세, 제환공벌초, 지소릉. )

['성공' 원년, 양나라의 군주와 예나라의 군주가 조회를 왔다. 

제'환공'은 산융을 정벌하면서 이어서 "고죽국"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성공'이 즉위한지 4년 만에 죽었다. 

'성공'에게 아들이 일곱이나 있었지만 아무도 즉위하지 못하고, '성공'의 동생 '목공'이 즉위하였다.

목공 '임호' 원년, '목공'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모진"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목공' 4년, 진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진나라 태자 '신생'의 누이인 '목희'였다.  
 

그해 제'환공'은 초나라를 공격하여 "소릉"에 이르렀다. ] 

     

五年, 晉獻公滅虞· 虢, 虜虞君與其大夫百里傒, 以璧馬賂於虞故也.   

既虜百里傒, 以為秦繆公夫人媵於秦.  百里傒亡秦走宛, 楚鄙人執之.
(오년, 진헌공멸우· 괵, 로우군여기대부백리해, 이벽마뢰어우고지.  
 

기로백리해, 이위진목공부인잉어진.  백리해망진주완, 초비인집지. )

['목공' 5년, 진'헌공'이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멸망시켰으며,

우나라 임금과 대부 '백리해'를 포로로 잡았다. 이는 진'헌공'이 둥근 옥과 말을 우임금에게 뇌물로 주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미 포로가 된 '백리해'는 진(晉)'헌공'이 딸 '목희'를 진(秦)'목공'에게 시집 보낼때
'백리해'를 잉신으로 진(秦)나라에 딸려 보냈다.  
 

이때 '백리해'는 진나라에서 초나라 "완" 땅으로 달아났다는데 초나라의 시골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 

            

繆公聞百里傒賢, 欲重贖之, 恐楚人不與,  

乃使人謂楚曰:“ 吾媵臣百里傒在焉, 請以五羖羊皮贖之. ”  楚人遂許與之.
(목공문백리해현, 욕중속지, 공초인불여, 
 

내사인위초왈 : " 오잉신백리해재언, 청이오고양피속지. "  초인수허여지. ) 

 

[진(秦)'목공'은 '백리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돈이 들더라도 데려 오려고 하였으나,  

초나라 사람들이 보내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이에 사람을 보내 초나라에 알리기를 :

" 나의 잉신 '백리해'가 여기에 있는데, 청컨데 검은 암양 가죽 다섯장으로 그의 몸값을 치르고자 한다. "라고 하자.

초나라 사람들은 마침내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백리해'를 풀어 주었다. ] 


當是時, 百里傒年已七十餘.  繆公釋其囚, 與語國事.  謝曰:“ 臣亡國之臣, 何足問!”           
繆公曰:“ 虞君不用子, 故亡, 非子罪也. ”  固問, 語三日, 繆公大說, 授之國政, 號曰五羖大夫.
(당시시, 백리해연이칠십여.  목공석기수, 여어국사.  사왈 : " 신망국지신, 하족문 ! "

목공왈 : " 우군불용자, 고망, 비자죄야. "  고문, 어삼일, 목공대열, 수지국정, 호왈오고대부. )

[이때에 '백리해' 의 나이가 70이 넘었다.  '목공'은 석방된 그 죄인과 더불어 국사를 논의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백리해'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 " 신은 망한 나라의 신하인데, 어떤 질문을 하시려는지요 ! "라고 하자.

'목공'이 말하기를 : " 우임금이 그대를 중용하지 않아서 망한 것이니 그대의 죄라고 할 수 없소. "하였다.
그리고 거듭하여 묻기를 3일 동안 이야기 한 후 '목공'은 크게 기뻐하며 정사를 맡기면서, 
 

다섯 장의 염소 가죽으로 사 온 사람이라 하여 '오고대부'라 불렀다.

百里傒讓曰:“ 臣不及臣友蹇叔, 蹇叔賢而世莫知.  臣常游困於齊而乞食铚人, 蹇叔收臣.   

臣因而欲事齊君無知, 蹇叔止臣, 臣得脫齊難, 遂之周.  周王子穨好牛, 臣以養牛干之. 

及穨欲用臣, 蹇叔止臣, 臣去, 得不誅.  事虞君, 蹇叔止臣.  臣知虞君不用臣, 臣誠私利祿爵, 且留.

再用其言, 得脫, 一不用, 及虞君難:是以知其賢. ”  於是繆公使人厚幣迎蹇叔, 以為上大夫.
(백리해양왈 : " 신불급신우건숙, 건숙현이세막지.  신상유곤어제이걸식질인, 건숙수신. 
 

신인이욕사제군무지, 건숙지신, 신득탈제난, 수지주.  주왕자퇴호우, 신이양우간지.

급퇴욕용신, 건숙지신, 신거, 득불주.  사우군, 건숙지신.  신지우군불용신, 신성사리녹작, 차유. 

재용기언. 득탈, 일불용, 급우군난 : 시이지기현. "  어시목공사인후폐영건숙, 이위상대부. )

['백리해'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 " 신은 저의 친구 '건숙'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건숙'은 어질고 현명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사람들은 그를 알아 보지 못합니다.
신은 자주 유람을 하는데 한번은 제나라에서 곤경에 빠져 "질현"에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였는데 
 

이때 '건숙'이 저들 받아들였습니다.  신은 그래서 '건숙'에게 제나라 임금 '공손무지'를 섬기자고 하였으나,

'건숙'이 저를 만류하여, 신은 제나라의 난에서 벗어나 마침내 주나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왕자 '퇴'가 소를 좋아 한다고 하여, 신이 소를 사육하는 재능을 이용해 접근하였습니다.

'퇴'가 신을 기용하기에 이르렀을때 '건숙'이 또 저를 만류하였기에 신은 그곳을 떠나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신이 우임금을 섬기자,  '건숙'은 또 저를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우임금이 신을 기용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신은 녹봉과 작위같은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해 일단 머물렀던 것입니다. 결국 두번은 그의 말을 들어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한번을 듣지 않아 우임금의 재난을 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

이런 까닭으로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목공'은 사람을 시켜 많은 폐백을 보내 '건숙'을 맞이하여 상대부로 대우하였다. ] 

秋, 繆公自將伐晉, 戰於河曲.  晉驪姬作亂, 太子申生死新城, 重耳· 夷吾出奔.   

九年, 齊桓公會諸侯於葵丘.
(추, 목공자장벌진, 전어하곡.  진여희작란, 태자신생사신성, 중이· 이오출분.  구년, 제환공회제후어규구. )


[가을이 되자, '목공'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여 "하곡"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진나라에서는 '헌공'의 총애를 받아 왕비의 자리까지 오른 '여희'가 '헌공'의 묵인 하에 난을 일으켜, 
 

태자 '신생'을 "신성"에서 죽이고, '중이'와 '이오'를 모함하자 두사람은 진나라를 탈출하여 도망쳤다.   

'목공' 9년, 제'환공'은 "규구"에서 제후들과 회합을 가졌다. ] 

晉獻公卒.  立驪姬子奚齊, 其臣里克殺奚齊.  荀息立卓子, 克又殺卓子及荀息.   

夷吾使人請秦, 求入晉.  於是繆公許之, 使百里傒將兵送夷吾.
(진헌공졸.  입여희자해제, 기신이극살해제.  순식립탁자, 극우살탁자급순식.  
 

이오사인청진, 구입진.  어시목공허지, 사백리해장병송이오. )


[진'헌공'이 세상을 떠났다.  '여희'의 아들 '해제'가 즉위하였으나, 한달도 지나지 않아 대부 '이극'이 
'해제'를

살해하였다.  명장 '순식'이 '탁자'를 옹립하였으나, '이극'이 또 '탁자'와 '순식'을 죽였다.   
'이오'는 진(秦)나라에 사람을 보내 자신이 진(晉)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에 '목공'이 허락하고 '백리해'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이오'를 호위하도록 하였다. ]
 

            

夷吾謂曰:“ 誠得立, 請割晉之河西八城與秦. ”   

及至, 已立, 而使丕鄭謝秦, 背約不與河西城, 而殺裏克.
(이오위왈 : " 성득립, 청할진지하서팔성여진."  급지, 이립, 이사비정사진, 배약불여하서성, 이살이극. )

['이오'가 일러 말하기를 : " 이 일이 성사되어 즉위하게 되면 진(晉)나라 "하서"의 8개 성을 떼어 

진(秦)나라에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오'가 진(晉)나라에 도착하여 이미 즉위하였으나,  

'비정'을 보내 진나라에 감사 표시만 했을 뿐, 약속을 어기고 "하서"의 성을 주지 않고, '이극'을 죽였다. ] 

丕鄭聞之, 恐, 因與繆公謀曰:“ 晉人不欲夷吾, 實欲重耳.   

今背秦約而殺裏克, 皆呂甥· 郤芮之計也.  願君以利急召呂· 郤, 呂· 郤至, 則更入重耳便. ”
(비정문지, 공, 인여목공모왈 : " 진인불욕이오, 실욕중이.  
 

금배진약이살이극, 개여생· 극예지계야.  원군이리급소여· 극, 여· 극지, 즉갱입중이편. ")


['비정'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운 나머지 '목공'에게 의지하여 '목공'의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 
 

" 진나라 백성들은 '이오'의 즉위를 바라지 않고, 사실 '중이'를 바라고 있습니다.   

금 '이오'는 진나라와의 약조를 등지고 '이극'을 죽인 것은 모두 '여생'과 '극예'의 계책입니다.
원컨데 임금께서 재물을 이용하여 '여생'과 '극예'를 급히 불러 들이시고, '여생'과 '극예'가 도착하면

다시 '중이'를 들여 보내는 편이 좋을듯 합니다. "라고 하였다. ]

繆公許之, 使人與丕鄭歸, 召呂· 郤.  呂· 郤等疑丕鄭有閒, 乃言夷吾殺丕鄭.    

丕鄭子丕豹奔秦, 說繆公曰:“ 晉君無道, 百姓不親, 可伐也. ” 

繆公曰:“ 百姓茍不便, 何故能誅其大臣? 能誅其大臣, 此其調也. ”  不聽, 而陰用豹.
(목공허지, 사인여비정귀, 소여· 극.  여· 극등의비정유간, 내언이오살비정.  
 

비정자비표분빈, 설목공왈 : " 진군무도, 백성불친, 가벌야. "

목공왈 : " 백성구불편, 하고능주기대신 ?  능주기대신, 차기조야. "  불청, 이음용표.)


['목공'은 이를 허락하고 사람을 시켜 '비정'과 함께 진(晉)나라로 돌아가게 한 다음 
'여생'과 '극예'를 부르게 하였다.

'여생'과 '극예'등은 '비정'이 혹시 첩자가 아닌지 의심하고, 이에 '이오'에게 말하여 '비정'을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비정'의 아들 '비표'는 진나라로 달아나 '목공'을 설득하며 말하기를  : 
 

" 진나라 임금은 도의가 없어 백성들이 가까이 하지 않으므로 정벌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목공'이 말하기를 : " 백성들이 참으로 임금을 불편히 여긴다면, 임금이 어떻게 대신을 함부로 죽일 수 있었겠는가 ? 

임금이 대신을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은, 백성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라고 하며. 

'비표'의 말을 듣지 않고,  '비표'를 몰래 등용하였다. ] 

十二年, 齊管仲· 隰朋死.  晉旱, 來請粟.  丕豹說繆公勿與, 因其饑而伐之.   

繆公問公孫支, 支曰:“ 饑穰更事耳, 不可不與. "
(십이년, 제관중· 습붕사.  진한, 래청속.  비표설목공물여, 인기기이벌지.  
 

목공문공손지, 지왈 : " 기양경사이, 불가불여. " )


['목공' 12년, 제나라에서 '관중'과 '습붕'이 죽었다.  진나라에 가뭄이 들어 식량 원조를 요청하러 왔다.  
'비표'는 '목공'에게 설득하기를 식량을 지원해 주지 말고 이번 흉년을 이용하여 정벌하자고 하였다.  
'목공'이 '공손지'에게 묻자, '공손지'가 대답하기를 : " 흉년과 풍년은 번갈아 일어나는 일이므로, 
 

도와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 

問百里傒, 傒曰:“ 夷吾得罪於君, 其百姓何罪?”  於是用百里傒· 公孫支言, 卒與之粟.   

以船漕車轉, 自雍相望至絳.
(문백리해, 해왈 : " 이오득죄어군, 기백성하죄 ? "  어시용백리해· 공손지언, 졸여지속.  
 

이선조거전, 자옹상망지강. )

[또 '백리해'에게 묻자, '백리해'가 대답하기를 : " '이오'가 임금께 죄를 지은 것이지, 

그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 "라고 하였다.
이에 '목공'은 '백리해'와 '공손지'의 말대로 마침내 식량을 지원하였다.  
 

배로 실어 나르고 수레로 옮기는데 "옹성"에서 "강성"까지 서로 바라 볼 만큼 이어졌다. ] 

十四年, 秦饑, 請粟於晉.  晉君謀之群臣.  虢射曰:“ 因其饑伐之, 可有大功. ” 晉君從之.   

十五年, 興兵將攻秦.  繆公發兵, 使丕豹將, 自往擊之.
(십사년, 진기, 청속어진.  진군모지군신.  괵석왈 : " 인기기벌지, 가유대공. "  진왕종지.  
 

십오년, 흥병장공진.  목공발병, 사비표장, 자왕격지. )

['목공' 14년,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자, 진(晉)나라에 식량 원조를 요청하였다. 

진(晉)'혜공'은 군신들을 불러 상의하였다. 

이때 '괵석'이 말하기를 : " 진나라에 기근이 들었으니 지금 공격한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라고 하자.

진'혜공'은 그의 말을 따랐다.          
'목공' 15년,  진'혜공'은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목공'도 군사를 일으켜 '비표'를 장수로 삼고 직접 전장에 나가 싸웠다. ] 

九月壬戌, 與晉惠公夷吾合戰於韓地.  晉君棄其軍, 與秦爭利, 還而馬騺.   

繆公與麾下馳推之, 不能得晉君, 反為晉軍所圍.  晉擊繆公, 繆公傷.
(구월임술, 여진혜공이오합전어한지.  진군기기군, 여진쟁리, 환이마치.  
 

목공여휘하치추지, 불능득진군, 반위진군소위.  진격목공, 목공상. )


[9월 임술일, 진(晉)혜공 '이오'의 군대는 "한원" 지역에서 '목공'의 군대와 맞붙어 싸움이 벌어졌다.  
 

진'혜공'은 군대를 돌보지 않고 진군의 재물을 빼앗아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가다 수레가 진흙에 빠졌다.   

진(秦)'목공'은 이 기회를 노려 직접 부하들을 지휘하며 추격에 나섰으나, 진'혜공'을 잡을 수 없었고,
도리어 晉나라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포위 당하였다. 
그리고 '목공'은 진나라 군사들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 

於是岐下食善馬者三百人馳冒晉軍, 晉軍解圍, 遂脫繆公而反生得晉君.   

初, 繆公亡善馬, 岐下野人共得而食之者三百餘人, 吏逐得, 欲法之.
(어시기하식선마자삼백인치모진군, 진군해위, 수탈목공이반생득진군.  
 

초, 목공망선마, 기하야인공득이식지자삼백여인, 리축득, 욕법지. )


[이때 "기산" 아래에서 갑자기 이곳 사람 3백 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목공'의 수레를 에워 싸고 
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자, 진나라 군사들은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탈출한 '목공'은 오히려 진'혜공'을 사로 잡았다.  

이전에 '목공'이 이곳 "기산"을 순행나왔다가 수레가 부서져 말이 달아났는데, 이곳 야인 3백 여명이

'목공'의 준마인지 모르고 잡아 먹었다. 그래서 관리들이 그들을 쫓아가 잡아들여, 법으로 처벌하려고 하였다. ]

繆公曰:“ 君子不以畜產害人.  吾聞食善馬肉不飲酒, 傷人. ”  乃皆賜酒而赦之.   

三百人者聞秦擊晉, 皆求從, 從而見繆公窘, 亦皆推鋒爭死, 以報食馬之德.
(목공왈 : " 군자불인축산해인.  오문식선마육불주음, 상인. "  내개사주이사지.  
 

삼백인자문진격진, 개구종, 종이견목공군, 역개추봉쟁사, 이보식마지덕. )

['목공'이 말하기를 : " 군자는 가축 때문에 사람을 해쳐서는 안되오.  내가 듣기에 준마의 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곁들이지 않으면 몸이 상한다고 하였소. "라고 하며,  이에 모두에게 술을 하사하고 사면해 주었다.   

이들 3백 여명은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모두 뒤따를 것을 청하였고,
뒤따르던 중에 '목공'이 포위 당하는 난감한 처지에 놓이자, 역시 모두 칼을 빼 들고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준마를 잡아 먹은 은덕을 보답하려 했던 것이다. ]

於是繆公虜晉君以歸, 令於國, 齊宿, 吾將以晉君祠上帝.  周天子聞之, 曰 “ 晉我同姓 ”, 為請晉君.

夷吾姊亦為繆公夫人, 夫人聞之, 乃衰绖跣, 曰:“ 妾兄弟不能相救, 以辱君命. ”

繆公曰:“ 我得晉君以為功, 今天子為請, 夫人是憂. ”  乃與晉君盟, 許歸之, 更舍上舍, 而饋之七牢.
(어시목공로진군이귀, 령어국, 제숙, 오장이진군사상제.  주천자문지, 왈 " 진아동성 ", 위청진군.

이오자역위목공부인, 부인문지, 내최질선, 왈 : " 첩형제불능상구, 이욕군명. "

목공왈 : " 아득진군이위공, 금천자위청, 부인시우. "  내여진군맹, 허귀지, 경사상사, 이궤지칠뢰.)


[이에 '목공'은 진'혜공'을 포로로 잡고 돌아와서 전국에 령을 내려, 목욕재계하고 하룻밤 지낸 후 
 

진'혜공'을 희생으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주나라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  

" 진'혜공'은 나와 성이 같다 "라고 하며,  진'혜공'을 사면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오'의 맏누이 역시 '목공'의 부인이었는데,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상복에 삼베로 엮은 허리띠를 두르고 맨발로

달려나와 말하기를 : "소첩의 형제들이 서로 구해 줄 수가 없어, 당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목공'이 말하기를 : " 나는 진'혜공'을 사로잡아 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천자께서 진'혜공'을 사면해 줄 것을 요구하며, 부인은 이를 염려하는 구려."라고 하였다. 

이에 '목공'은 진'혜공'과 약속을 하고 돌려 보낼 것을 허락하였으며 고급 객관으로 옮겨 머물게 하고

일곱가지 음식을 대접하였다.] 

十一月, 歸晉君夷吾, 夷吾獻其河西地, 使太子圉為質於秦.  秦妻子圉以宗女.  是時秦地東至河.

十八年, 齊桓公卒.  二十年, 秦滅梁· 芮.   
(십일월, 귀진군이오, 이오헌기하서지, 사태자어위질어진.  진처자어이종녀.  시시진지동지하.

십팔년, 제환공졸.  이십년, 진멸양· 예. )

[11월, 진혜공 '이오'를 돌려보내자, '이오'는 "하서"의 땅을 바치고, 태자 '어'를 진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진나라는 태자 '어'에게 종실의 여자를 아내로 주었다.  이때 진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황하에 이르렀다.

'목공' 18년, 제나라 '환공'이 죽었다.  '목공' 20년, 진나라가 양, 예나라를 멸망시켰다. ]

二十二年, 晉公子圉聞晉君病, 曰:“ 梁, 我母家也, 而秦滅之.   

我兄弟多, 即君百歲後, 秦必留我, 而晉輕, 亦更立他子. ”  子圉乃亡歸晉.
(이십이년, 진공자어문진군병, 왈 : " 양, 아모가야, 이진멸지.  
 

아형제다, 즉군백세후, 진필유아, 이진경, 역경립타자. "  자어내망귀진. )


['목공' 22년, 진(秦)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공자 '어'는 진'혜공'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 
 

" 양나라는 내 어머니의 나라인데 진나라가 멸망시켰고,  나는 형제가 많은데 군왕께서 돌아가시면  

진(秦)나라는 반드시 나를 붙잡아 둘 것이며,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나를 가벼이 여겨, 
역시 다른 아들로 바꾸어 옹립할것 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태자 '어'는 즉시 도망쳐 진나라로 돌아왔다. ] 
 

二十三年, 晉惠公卒, 子圉立為君.  秦怨圉亡去, 乃迎晉公子重耳於楚, 而妻以故子圉妻.   

重耳初謝, 後乃受.  繆公益禮厚遇之.
(이십삼년, 진혜공졸, 자어립위군.  진원어망거. 내영진공자중이어초, 이처이고자어처.  
 

중이초사, 후내수.  목공익례후우지. )


['목공' 23년, 진나라 '혜공'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어'가 즉위하였다.  
 

진나라는 신의를 저버리고 도망간 태자 '어'의 행동이 미워,  초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진(晉)나라

공자 '중이'(문공)를 진(秦)나라로 영접하여, 태자 '어'의 아내를 비롯한 5명의 친족 여인을 주어 후하게 대접하였다.

'중이'는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나중에 이를 받아 들였다.  그러자 '목공'은 더 후한 예로 '중이'를 대우하였다. ] 

二十四年春, 秦使人告晉大臣, 欲入重耳.  晉許之, 於是使人送重耳.   

二月, 重耳立為晉君, 是為文公.  文公使人殺子圉.  子圉是為懷公.   

其秋, 周襄王弟帶以翟伐王, 王出居鄭.
(이십사년춘, 진사인고진대신, 욕입중이.  진허지, 어시사인송중이.  
 

이월, 중이립위진군, 시위문공.  문공사인살자어.  자어시위양공.  

기추, 주회왕제대이책벌왕, 왕출거정.  )


['목공' 24년 봄, 진(秦)나라는 사신을 보내어 진(晉)나라 대신들에게 '중이'를 입국시키겠다고 알렸다. 
진(晉)나라가 이를 허락하자, 진(秦)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중이'를 호송하였다.  
 

2월, '중이'가 진나라 군주로 즉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문공'이다.
'문공'은 사람을 시켜 "고량"에서 태자 '어'를 죽였다.  태자 '어'가 바로 '회공'이다. 
 

그해 가을, 주나라 '양왕'의 동생 '대'가 책나라의 도움을 받아 '양왕'을 공격하자, 

'​양왕'은 도망쳐 정나라에 머물렀다. ] 

二十五年, 周王使人告難於晉· 秦.  秦繆公將兵助晉文公入襄王, 殺王弟帶.   

二十八年, 晉文公敗楚於城濮.
(이십오년, 주왕사인고난어진· 진.  진목공장병조진문동입양왕, 살왕제대. 

이십팔년, 진문공패초어성복. )


['목공' 25년, 주'양왕'은 진(晉), 진(秦)나라에 사신을 보내 난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진'목공'은 군대를 이끌고 진'문공'을 도와 '양왕'을 입국시키고,  '양왕'의 동생 '대'를 죽였다.
'목공' 28년, 진'문공'은 초나라 영윤 '성득신'이 지휘하는 초나라 군사를 위주로 결성된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다섯 나라 연합군을 "성복"에서 대파하였다. ]  

三十年, 繆公助晉文公圍鄭.  鄭使人言繆公曰:“ 亡鄭厚晉, 於晉而得矣, 而秦未有利.   

晉之彊, 秦之憂也. ”  繆公乃罷兵歸.  晉亦罷.   三十二年冬, 晉文公卒.
(삼십년, 목공조진문공위정.  정사인언목공왈 : " 망정후진, 어진이득의, 이진미유리. 
 

진지강, 진지우야. "  목공내파병귀.  진역파.  삼십이년동, 진문공졸. )


['목공' 30년, '목공'은 진'문공'을 도와 정나라를 포위하였다.  
 

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목공'에게 말하기를 : "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와 친하게 지내면,
진(晉)나라는 얻는 것이 있겠지만, 진(秦)나라는 얻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진(晉)나라가 강해지면 진(秦)나라는 근심만 커질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목공'은 바로 군대를 철수시키고 돌아왔다.  진(晉)나라 역시 군대를 철수시켰다.  
 

'목공' 32년 겨울, 진'문공'이 세상을 떠났다. ] 

鄭人有賣鄭於秦曰:“ 我主其城門, 鄭可襲也, ”

繆公問蹇叔· 百里傒, 對曰:“ 徑數國千里而襲人, 希有得利者.   

且人賣鄭, 庸知我國人不有以我情告鄭者乎? 不可. ”  繆公曰:“ 子不知也, 吾已決矣. ”
(정인유매정어진왈 : " 아주기성문, 정가습야. "

목공문건숙· 백리해, 대왈 : " 경수국천리이습인, 희유득리자.   

차인매정, 용지아국인불유이아정고정자호 ?  불가. "  목공왈 : " 자불지야, 오이결의. " )

[정나라 사람이 정나라에 관한 정보를 진나라에 팔면서 말하기를 :

" 내가 정나라의 성문을 책임지고 있으니 정나라를 습격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목공'이 '건숙'과 '백리해'에게 묻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 " 여러 나라를 지나 천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를 습격하여

이득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정나라에 관한 정보를 팔았다고 한다면,

우리 백성들도 우리의 사정을 정나라에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그러므로 습격을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라고 하자.  
 

'목공'이 말하기를 : " 그대들은 내 뜻을 알지 못하므로, 나는 이미 결정하였소. "라고 하였다. ] 

遂發兵, 使百里傒子孟明視, 蹇叔子西乞術及白乙丙將兵.  行日, 百里傒· 蹇叔二人哭之.   

繆公聞, 怒曰:“ 孤發兵而子沮哭吾軍, 何也? ”  
(수발병, 사백리해자맹명시, 건숙자서걸술급백을병장병.  행일, 백리해· 건숙이인곡지.  
 

목공문, 노왈 : " 고발병이자저곡오군, 하야 ? " )

['목공'은 끝내 군사를 일으켜, '백리해'의 아들 '백리맹명시'와 '건숙'의 아들 '서걸술', '백을병'을 장수로 삼아

군대를 이끌게 하였다.  출정하는날 '백리해'와 '건숙' 두 사람은 통곡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목공'은 격노하여 말하기를 : " 내가 출정하는데 그대들이 통곡하며 저지하는 연유가 무엇이오 ? "

라고 하자. ] 

二老曰:“ 臣非敢沮君軍.  軍行, 臣子與往;臣老, 遲還恐不相見, 故哭耳. ”   

二老退, 謂其子曰:“ 汝軍即敗, 必於殽阨矣. ” 
(이노왈 : " 신비감저군군.  군행, 신자여왕 ; 신노, 지환공불상견, 고곡이. "  
 

이노퇴, 위기자왈 : " 여군즉패, 필어효액의. " )


[두 노신들이 말하기를 : " 신들이 감히 군왕의 군대를 가로막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출정하면 신들의 자식들도 함께 떠나야 하는데 ; 신들은 늙어서 저들이 늦게 돌아 온다면 

다시는 서로 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래서 통곡하는것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두 노신이 물러나면서

그 자식에게 이르기를 : " 너희 군사가 패한다면, 틀림없이 "효산"의 험난한 지역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三十三年春, 秦兵遂東, 更晉地, 過周北門.  周王孫滿曰:“ 秦師無禮, 不敗何待!”            

兵至滑, 鄭販賣賈人弦高, 持十二牛將賣之周, 見秦兵, 恐死虜, 因獻其牛,  

曰:“ 聞大國將誅鄭, 鄭君謹修守御備, 使臣以牛十二勞軍士. ”
(삼십삼년춘, 진병수동, 경진지, 과주북문.  주왕손만왈 : " 진사무례, 불패하대 ! ")

병지활, 정판매가인현고, 지십이우장매지주, 견진병, 공사로, 인헌기우,  

왈 : " 문대국장주정, 정군근수수어비, 사신이우십이노군사. " )

['목공' 33년 봄, 진나라 군대는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해 진(晉)나라를 거쳐 주나라 도성 북문을 지나갔다. 
이를 본 주나라 대부 '왕손만'이 말하기를 : " 진나라 군사들은 무례하니 패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리 ! "라고 하였다.

진군이 진(晉)나라의 속령인 "활"의 국경에 다다랐을 때, 정나라의 상인 '현고'가 소 12마리를 팔려고 주나라로 가다가

진나라 군대를 만났다. '현고'는 죽거나 포로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소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

" 듣자하니 큰 나라가 정나라를 치기 위해 먼 길을 오신 것으로 아는데, 우리 군주께서는 미리 아시고 방비책을 착실히

강구해 두고 계시며, 신에게 이 소 12마리를 끌고 가서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秦三將軍相謂曰:“ 將襲鄭, 鄭今已覺之, 往無及已. ”  滅滑.  滑, 晉之邊邑也.
(진삼장군상위왈 : " 장습정, 정금이각지, 왕무급이. "  멸활.  활, 진지변읍야. )


[진나라의 세 장수는 서로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 " 정나라를 쳐들어가 봐야 정나라는 이미 다 알고 
있으므로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라고 하며, 목표를 바꿔 그들은 바로 코 앞의 "활"을 정복해 버렸다. 

"활"은 진나라 변방의 읍이었다. ] 

秦三將軍相謂曰:“ 將襲鄭, 鄭今已覺之, 往無及已. ”  滅滑.  滑, 晉之邊邑也.

當是時, 晉文公喪尚未葬.  太子襄公怒曰:" 秦侮我孤, 因喪破我滑. "   

遂墨衰绖, 發兵遮秦兵於殽, 擊之, 大破秦軍, 無一人得脫者.  虜秦三將以歸.
(진삼장군상위왈 : " 장습정, 정금이각지, 왕무급이. "  멸활.  활, 진지변읍야.

당시시, 진문공상상미장.  태자양공노왈 : " 진모아고, 인상파아활. "   

수묵최질, 발병차진병어효, 격지, 대파진군, 무일인득탈자.  로진삼장이귀. )

[진나라의 세 장수는 서로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 " 정나라를 쳐들어가 봐야 정나라는 이미 다 알고 있으므로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라고 하며, 목표를 바꿔 그들은 바로 코 앞의 "활"을 정복해 버렸다. 

"활"은 진나라 변방의 읍이었다.  이 무렵, 진'문공'이 사망하여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 '양공'은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말하기를 : " 진나라는 부친을 잃은 나를 업신여겨,

상중임을 틈타 우리의 "활읍"을 파괴하였다. "라고 하며. 

즉시 상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진나라군을 "효산"에서 가로막고 맹공격을 가하자,
진나라군은 크게 패하여 한 사람도 살아 나오지 못하였다.  
 

진(晉)나라는 진(秦)나라의 '맹명시'와 '서걸술', '백을병' 세 장수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文公夫人, 秦女也, 為秦三囚將請曰:“ 繆公之怨此三人入於骨髓, 願令此三人歸,  

令我君得自快烹之. ”  晉君許之, 歸秦三將.
(문공부인, 진여야, 위진삼수장청왈 : " 목공지원차삼인입어골수, 원령차삼인귀, 
 

령아군득자쾌팽지. "  진군허지, 귀진삼장. ) 

 

['문공'의 부인 '문영'은 진(秦)나라 '목공'의 딸로써, 사로잡힌 진나라의 세 장수를 위해 부탁의 말을 하기를 :

" '목공'은 이 세 사람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 깊이 사무쳐 있을 것이니, 원컨데 이 세 사람을 돌려 보내,

자기들의 임금이 직접 마음대로 팽살하도록 하세요. "라고 하자. 
진'양공'은 이를 허락하고 세 장수를 진나라로 돌려 보냈다. ]
 

            

三將至, 繆公素服郊迎, 向三人哭曰:“ 孤以不用百里傒· 蹇叔言以辱三子, 三子何罪乎?  

子其悉心雪恥, 毋怠. ”  遂復三人官秩如故, 愈益厚之.
(삼장지, 목공소복교영, 향삼인곡왈 : " 고이불용백리해· 건숙언이욕삼자, 삼자하죄호 ?  
 

자기실심설치, 무태. "  수복삼인관질여고, 유익후지. )

[세 장수가 귀국하자, '목공'은 흰 상복을 입고 교외까지 나와서 맞이하며 세 사람을 향해 울면서 말하기를 :

“과인이 그대들 아버님의 충간을 듣지 않아 세 사람이 이런 욕을 당했으니 그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

그대들은 이 치욕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태만하지 말지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세 사람의 관직과 봉록을 그대로 회복시켜 주고, 더욱 후하게 대해 주었다. ]
 

三十四年, 楚太子商臣弒其父成王代立.  繆公於是復使孟明視等將兵伐晉, 戰于彭衙.   

秦不利, 引兵歸.  戎王使由余於秦. 由余, 其先晉人也, 亡入戎, 能晉言.  
(삼십사년, 초태자상신시기부성왕대립.  목공어시부사맹명시등장병벌진, 전우팽아.  
 

진불리, 인병귀.  융왕사유여어진. 유여, 기선진인야, 망입융, 능진언. )


['목공' 34년, 초나라 태자 '상신'이 부친 '성왕'을 시해하고 대신 즉위하였다.  
 

'목공'은 이 기회에 다시 '맹명시' 등을 시켜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팽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진나라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융왕은 사신으로 '유여'를 진나라로 보냈다.

'유여'는 그 조상이 진나라 사람인데 도망쳐 융땅으로 왔기  때문에 진나라 말을 할 수 있었다. ] 

聞繆公賢, 故使由余觀秦.  秦繆公示以宮室· 積聚.   

由余曰:“ 使鬼為之, 則勞神矣. 使人為之, 亦苦民矣. ”  

繆公怪之, 問曰:“ 中國以詩書禮樂法度為政, 然尚時亂, 今戎夷無此, 何以為治, 不亦難乎? ”

(문목공현, 고사유여관진.  진목공시이궁실· 적취. 

유여왈 : " 사귀위지, 즉노신의.  사인위지, 역고민의. "

목공괴지, 문왈 : " 중국이시서예악법도위정, 연상시란, 금융이무차, 하이위치, 불역난호 ? ")


[왕은 '목공'이 어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유여'을 진나라에 보내 내부 사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진'목공'은 궁실과 쌓아 놓은 재물을 보여 주었다.
'유여'가 말하기를 : " 귀신에게 시켰다면, 귀신도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시켜 만들게 하였으니, 백성들 역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목공'은 그 말이 이상하다고 여겨 묻기를 : " 중국은 시, 서, 예악, 법도로 정사를 펼치고 있음에도 

오히려 늘 난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 "융이" 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니, 어떻게 다스리기에 그럴 수 있는가 ? 

또한 어려움은 없는 것인가 ? "라고 하였다. ] 

由余笑曰:“ 此乃中國所以亂也.  夫自上圣黃帝作為禮樂法度, 身以先之, 僅以小治.   

及其後世, 日以驕淫.  阻法度之威, 以責督於下, 下罷極則以仁義怨望於上, 上下交爭怨而相篡弒,  

至於滅宗, 皆以此類也.  夫戎夷不然. 上含淳德以遇其下, 下懷忠信以事其上,  

一國之政猶一身之治, 不知所以治, 此真圣人之治也. ”
(유여소왈 : " 차내중국소이난야.  부자상성황제작위예악법도, 신이선지, 근이소치.  
 

급기후세, 일이교음.  조법도지위, 이책독어하, 하피극즉이인의원망어상, 상하교쟁원이상찬시,  

지어멸종, 개이차류야.  부융이불연.  상함순덕이우기하, 하회충신이사기상,  

일국지정유일신지치, 부지소이치, 차진성인지치야. ")


['유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 " 이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난이 일어 나는 것입니다.  
 

무릇 상고시대때 성인이신 '황제'께서 예악과 법도를 만드시고, 몸소 먼저 모범을 보이시어 가까스로 

작은 다스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세에 이르러서는 군주들이 날로 교만해지고 무절제 하였습니다.
그들은 법도의 위엄에 의거하여 아랫 사람들을 문책하고 감독하였는데, 아랫 사람들의 고달픔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인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윗사람을 원망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맞대고 다투며 미워하여 서로 강탈하고

윗사람을 죽이므로, 일족이 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은 모두 이러한 종류의 일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체로 "융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덕을 품고서 그 아랫사람을 대우하며,

아랫사람은 충성과 믿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윗사람을 섬기므로, 한 나라의 정치가 마치 자기의 한 몸을 다스리는 것

같아서, 다스려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성인의 다스림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於是繆公退而問內史廖曰:“ 孤聞鄰國有圣人, 敵國之憂也.  今由余賢, 寡人之害, 將奈之何? ”

內史廖曰:“ 戎王處辟匿, 未聞中國之聲.  君試遺其女樂, 以奪其志;為由余請, 以疏其閒; 

留而莫遣, 以失其期.   戎王怪之, 必疑由余. 君臣有閒, 乃可虜也. 且戎王好樂, 必怠於政. ”
(어시목공퇴이문내사료왈 : " 고문린국유성인, 적국지우야.  금유여현, 과인지해, 장내지하 ? "

내사료왈 : " 융왕처피닉, 미문중국지성.  군시유기여악, 이탈기지 ; 위유여청, 이소기간 ;  

유이막견, 이실기기.  융왕괴지, 필의유여. 군신유간, 내가로야. 차융왕호악, 필태어정. ")

[이에 '목공'은 물러나서 내시인 '료'에게 말하기를 : " 내가 듣기로 이웃 나라에 성인이 있으면, 적국의 근심거리가

된다고 하였다.  지금 '유여'의 현명함이 과인에게 있어 재앙이 될 수 있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 "라고 하자.

내사 '료'가 대답하기를 : " 융왕은 변방의 오지에 살아 중국의 노래를 아직 들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시험삼아 융왕이 여악(기생들이 하던 노래와 춤)에 빠지게 하여 그의 의지를 잃게 하십시오 ; 
그런 뒤에 우리가 '유여'를 초청하면 그들의 관계가 소원해 질 것이며 ; '유여'가 이곳에 더 머물다가 
귀국하겠다고

요청하게 하여 잡아놓고 돌아갈 때를 놓치게 하면,  융왕은 이를 수상히 여겨 틀림없이 '유여'를 의심할 것입니다.

군신간에 사이가 벌어지면 그를 포로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융왕이 여악에 빠지게 되면 틀림없이 정사를 돌보는데 게을리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繆公曰:“ 善. ”  因與由余曲席而坐, 傳器而食, 問其地形與其兵勢盡察,  

而後令內史廖以女樂二八遺戎王.  戎王受而說之, 終年不還.  於是秦乃歸由余. 

由余數諫不聽, 繆公又數使人閒要由余, 由余遂去降秦.  繆公以客禮之, 問伐戎之形.
(목공왈 : " 선. "  인여유여곡석이좌, 전기이식, 문기지형여기병세진찰,

이후령내사료이여악이팔유융왕.  융왕수이열지, 종년불환.  어시진내귀유여. 

유여수간불청, 목공우수사인간요유여, 유여수거항진.  목공이객례지, 문벌융지형.) 

[그러자 '목공'이 말하기를 : " 좋다. "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목공'은 '유여'와 자리를 맞닿아 앉아 

그릇을 건네가며 식사를 하면서, 융족의 지형과 군사의 세력등 모든 것을 자세히 알아내고,  

나중에 내시 '료'에게 명하여 여악 28명을 융왕에게 보냈다. '유왕'은 여악 28명을 받아 들이고 기뻐하며,

한 해가 지날때 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진나라는 즉시 '유여'를 돌아가게 하였다. 

융왕은 여악에 빠져 소와 말을 돌보지 않아 반이나 죽었으며, '유여'는 융왕에게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목공' 또한 여러 차례 몰래 사람을 보내 진나라에 올 것을 희망하자, 
'유여'는 마침내 융족을 떠나 진나라에 투항하였다. 

'목공'은 그를 빈객의 예로 대우하고, 융족을 정벌할 형세에 대해 물었다. ] 

十六年, 繆公復益厚孟明等, 使將兵伐晉.  渡河焚船, 大敗晉人, 取王官及鄗, 以報殽之役.   

晉人皆城守不敢出.  於是繆公乃自茅津渡河, 封殽中尸, 為發喪, 哭之三日.  
(삼십육년, 목공부익후맹명등, 사장병벌진, 도하분선, 대패진인, 취왕관급호, 이보효지역.  
 

진인개성수불감출.  어시목공내자모진도하, 봉효중시, 위발상, 곡지삼일. )


['목공' 36년, '목공'은 다시 '맹명시' 등을 더욱 후대하고, 그들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들은 황하를 건너고 나서 타고 온 배를 불살라 버리고, 결사의 각오로 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러

"왕관"과 "호"땅을 점령하여,  지난번 "효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성을 지키며 감히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목공'은 몸소 "모진"에서 황하를 건너 "효산"의 계곡에 버려진 옛 군사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루고,

3일 동안 곡을 하였다. ] 

乃誓於軍曰:“ 嗟士卒! 聽無譁, 余誓告汝.  古之人謀黃髪番番, 則無所過. 
以申思不用蹇叔,百里傒之謀, 故作此誓, 令後世以記余過. "  
 

君子聞之, 皆為垂涕,  曰:“ 嗟乎! 秦繆公之與人周也, 卒得孟明之慶. ”
(내서어군왈 : " 차사졸 ! 청무화, 여서고여. 고지인모황발파파, 즉무소과. 
이신사불용건숙, 백리해지모, 고작차서, 렬후세이기여과. " 

군자문지, 개위수체,  왈 : " 차호 !  진목공지여인주야, 졸득맹사지경. " )


[그리고 군사들에게 맹세하며 말하기를 : " 아, 나의 군사들이여 ! 조용히 하고 내 말을 잘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맹세하노라. 옛날 사람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과 의논하여 일을 도모했으므로 

과오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여 '건숙'과 '백리해'의 계책을 받아 들이지 않아 

실패했다고 생각하므로 이 맹세를 통하여 후손에게 나의 과오를 명심하게 하노라. "라고 하였다.
군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 아 ! 진'목공'은 사람을 포용하는데 있어 
주도면밀하여, 

마침내 '맹명시'가 승리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三十七年, 秦用由余謀伐戎王, 益國十二, 開地千里, 遂霸西戎.  天子使召公過賀繆公以金鼓.

三十九年, 繆公卒, 葬雍.  從死者百七十七人, 秦之良臣子輿氏三人名曰奄息· 仲行· 鍼虎,  

亦在從死之中.  秦人哀之, 為作歌黃鳥之詩.
(삼십칠년, 진용유여모벌융왕익, 국십이, 개지천리, 수패서융.  천자사소공과하목공이금고.

삼십구년, 목공졸, 장옹.  종사자백칠십칠인, 진지양신자거씨삼인명왈엄식· 중행· 침호,  

역재종사지중.  진인애지, 위작가황조지시. )

['목공' 37년, 진나라는 '유여'의 계책을 받아들여 융왕을 공격하여 열 두나라를 더하였으며,  

천리의 영토를 개척하여 마침내 서융지역의 패주가 되었다.
천자는 사신으로 소공'과'를 보내 '목공'에게 금으로 만든 북을 하사하며 축하하였다.

'목공' 39년, '목공'이 세상을 떠나자(기원전 621), "옹"땅에 안장하였다.   

이때 순사자가 177명이나 되었으며, 진나라의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 '자거씨'의 세 아들 이름이  

'엄식', '중항', '침호' 라 하였으며, 이들 삼형제도 역시 순사자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이 3형제를 애석히 여겨 〈진풍 황조〉라는 시를 지었다.


 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

(피창자천 섬아양인 여가속혜 인백기신.)

[저 푸르고 푸른 하늘아, 우리 착한 이를 죽였도다.  

만일 속하여 살릴 수 있다면 우리들의 백 몸으로 바꾸겠네. ] 

君子曰:“ 秦繆公廣地益國, 東服彊晉, 西霸戎夷, 然不為諸侯盟主, 亦宜哉.   

死而棄民, 收其良臣而從死.  且先王崩, 尚猶遺德垂法, 況奪之善人良臣百姓所哀者乎?  

是以知秦不能復東征也. ” 繆公子四十人, 其太子罌代立, 是為康公.   
(군자왈 : " 진목공광지익국, 동복강진, 서패융이, 연불위제후맹주, 역의재. 
 

사이기민, 수기양신이종사.  차선왕붕, 상유유덕수법, 황탈지선인양신백성소애자호 ?   

시이지진불능복동정야. "  목공자사십인, 기태자앵대립, 시위강공. )

[군자들은 말하기를 : " 진'목공'은 영토를 확장하고 나라를 더하여 동쪽으로는 강한 진나라를 굴복시키고,

서쪽으로는 "융이"의 패주가 되었으나, 제후들의 맹주가 될 수 없었던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다.   

죽어서 백성들을 버렸으며,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거두어 순사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더욱이 선왕들은 세상을 떠났을때, 오히려 덕을 남기고 법도를 후세에게 물려주었는데, 
 

'목공'은 하물며 선량한 백성과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는가 ?  이로써 진나라가 더 이상 동쪽을 정벌할 수 없었던 까닭을 알겠다. "라고 하였다.
'목공'은 자식을 40명 두었는데 태자 '앵'이 대신 즉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강공'이다. ]
 

康公元年.  往歲繆公之卒, 晉襄公亦卒;襄公之弟名雍, 秦出也, 在秦.   

晉趙盾欲立之, 使隨會來迎雍, 秦以兵送至令狐. 晉立襄公子而反擊秦師, 秦師敗, 隨會來奔. 
(강공원년. 왕세목공지졸, 진양공역졸 ; 양공지제명옹, 진출야, 재진.

진조돈욕입지, 사수회래영옹, 진이병송지령호. 진입양공자이반격진사, 진사패, 수회래분.)

 

[강공원년. 일년이 지난 사이에 '목공'이 죽고, 진'양공'도 역시 죽었다 ; '양공'의 동생 이름이 '옹'이었는데

진(秦)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 살고 있었다.  진(晉)나라의 '조돈'은 '옹'을 옹립하려고,  

'수회'를 사신으로 보내 '옹'을 맞이하니, 진(秦)나라는 군사들을 보내 "영호"까지 호송하였다.
그러나 진(晉)나라는 '양공'의 어린 아들 '이고'를 옹립하고 '옹'을 호위해 오는 진(秦)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패배시키자, '수회'는 도망쳐 버렸다.]

二年, 秦伐晉, 取武城, 報令狐之役.  四年, 晉伐秦, 取少梁.  

六年, 秦伐晉, 取羈馬. 戰於河曲, 大敗晉軍.  

晉人患隨會在秦為亂, 乃使魏讎餘詳反, 合謀會, 詐而得會, 會遂歸晉.  
(이년, 진벌진, 취무성, 보영호지역.  사년, 진벌진, 취소량.

육년, 진벌진, 취기마. 전어하곡, 대패진군.   

진인환수회재진위난, 내사위수여상반, 합모회, 사이득회, 회수귀진. )

['강공' 2년, 진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무성'을 빼앗아, 지난번 "영호"에서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강공' 4년,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공격하여 "소량"을 빼앗았다.

'강공' 6년, 진나라가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기마"를 빼앗았다. 진(晉)'영공'은 노하여 "하곡"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진(晉)나라 사람들은 '수회'가 진나라에 있으면서 진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이에 '위수여'로 하여금 진(晉)나라를 배반하는 척 하며 '수회'를 만나 계략을 꾸몄고,

'수회를 속여서 "위읍"까지 데려온 후 '위수여'는 즉시 '수회'를 붙잡아 진나라로 돌아왔다. ]

公立十二年卒, 子共公立.  共公二年, 晉趙穿弒其君靈公.   

三年, 楚莊王彊, 北兵至雒, 問周鼎.  共公立五年卒, 子桓公立.
(강공립십이년졸, 자공공립.  공공이년, 진조천시기군영공.  
 

삼년, 초장왕강, 북병지낙, 문주정.  공공립오년졸, 자환공립. ) 


['강공'이 즉위한지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공공'이 즉위하였다.  
 

'공공' 2년, 진나라 '조천'이라는 자가 도원에서 군주인 '영공'을 시해하였다.
'공공' 3년, 초나라 '장왕'은 강력해진 군대를 이끌고 북쪽의 "낙읍"에 이르러 주나라의 구정에 대해 물었다.
 

'공공'이 즉위 5년 만에 죽자, 그 아들 '환공'이 즉위하였다. ] 

桓公三年, 晉敗我一將.  十年, 楚莊王服鄭, 北敗晉兵於河上.  當是之時, 楚霸, 為會盟合諸侯.

二十四年, 晉厲公初立, 與秦桓公夾河而盟.  歸而秦倍盟, 與翟合謀擊晉.    

二十六年, 晉率諸侯伐秦, 秦軍敗走, 追至涇而還.  桓公立二十七年卒, 子景公立.
(환공삼년, 진패아일장.  십년, 초장왕복정, 북패진병어하상.  당시지시, 초패, 위회맹합제후.

이십사년, 진여공초립, 여진환공협하이맹.  귀이진배맹, 여책합모격진.   

이십육년, 진솔제후벌진, 진군패주, 추지경이환.  환공립이십칠년졸, 자경공립. )

['환공' 3년, 진(秦)나라는 진(晉)나라에 패하여 장수 한 명이 포로로 잡혔다.
'환공' 10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정복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황하 상류의 "필지"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패 시켰다. 이때 초나라가 패주가 되어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였다.

'환공' 24년, 진'여공'은 즉위하자 마자 진'환공'과 황하를 사이에 두고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진(秦)나라는 돌아와서 맹약을 어기고, 책나라와 연합하여 모의한 진(晉)나라를 공격하였다. 
'환공' 26년, 진(晉)나라는 제후들을 거느리고 진(秦)나라를 정벌하자, 진군은 패하여 도망갔으며, 
 

진(晉)나라는 계속 추격하여 "경수"지역 까지 몰아내고 돌아왔다.
'환공'은 27년 동안 즉위한 후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경공'이 즉위하였다. ] 

景公四年, 晉欒書弒其君厲公.  十五年, 救鄭, 敗晉兵於櫟.  是時晉悼公為盟主.

十八年, 晉悼公彊, 數會諸侯, 率以伐秦, 敗秦軍.  秦軍走, 晉兵追之, 遂渡涇, 至棫林而還.   

二十七年, 景公如晉, 與平公盟, 已而背之.
(경공사년, 진란서시기군려공.  십오년, 구정, 패진병어력.  시시진도공위맹주.

십팔년, 진도공강, 수회제후, 솔이벌진, 패진군.  진군주, 진병추지, 수도경, 지역림이환.   

이십칠년, 경공여진, 여평공맹, 이이배지. )

['경공' 4년, 진나라 대부 '난서'가 '중행언'과 함께 사람을 시켜 '여공'을 시해하였다.
'경공' 15년, 정나라를 구원하고 "역읍"에서 진(晉)군을 물리쳤다. 이때 진나라 '도공'이 맹주가 되었다.] 

'경공' 18년, 진(晉)'도공'의 부국강병으로 나라가 강해지자,

수 차례 제후들과 회맹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진나라를 정벌하여 진군을 물리쳤다.
진(秦)군이 달아나자, 진(晉)군은 계속 추격하여 마침내 "경수"를 건너 "역림"에 이르러서야 돌아왔다.
'경공' 27년, '경공'은 진'평공'과 맹약을 맺었으나 이내 배신하였다. ] 

三十六年, 楚公子圍弒其君而自立, 是為靈王.   

景公母弟後子鍼有寵, 景公母弟富, 或譖之, 恐誅, 乃奔晉, 車重千乘. 

晉平公曰:“ 后子富如此, 何以自亡? ”  對曰:“ 秦公無道, 畏誅, 欲待其後世乃歸. ”
(삼십육년, 초공자위시기군이자립, 시위영왕.  
 

경공모제후자침유총, 경공모제부, 혹참지, 공주, 내분진, 거중천승.

진평공왈 : " 후자부여차, 하이자망 ? "  대왈 : " 진공무도, 외주, 욕대기후세내귀. ") 

 

['경공' 36년, 초나라 공자 '위'는 강왕 서거 후 그 아들인 '겹오'가 왕위를 계승하자, 

'겹오'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으니, 이 사람이 바로 '영왕'이다.
'경공'의 동생 '후자침'은 총애를 받았으며 매우 부유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참소하자, 
주살될 것이 두려워 진나라로 달아나면서 수레에 싣고간 재물이 천 대나 되었다.

진'평공'이 묻기를 : " '후자'는 이처럼 부유한데, 어찌하여 몸소 도망쳐 왔는가 ? 라고 하자.  
'후자침'이 대답하기를 : " 진'경공'은 무도하여 주살될 것이 두려워, 

기다렸다가 그가 죽은 후에 돌아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三十九年, 楚靈王彊, 會諸侯於申, 為盟主, 殺齊慶封.  景公立四十年卒, 子哀公立.  后子復來歸秦.

哀公八年, 楚公子棄疾弒靈王而自立, 是為平王.   

十一年, 楚平王來求秦女為太子建妻.  至國, 女好而自娶之.
(삼십구년, 초영왕강, 회제후어신, 위맹주, 살제경봉.  경공립사십년졸, 자애공립. 후자부래귀진.

애공팔년, 초공자기질시영왕이자립, 시위평왕.  십일년, 초평왕래구진녀위태자건처. 지국, 여호이자취지. )

['경공' 39년, 초'영왕'이 강해지자, 제후들을 "신"으로 불러 모아 맹주가 되어 오나라를 공격하여

"주방"을 격파하고 제나라 간신 '경봉'을 살해했다. 

'경공'이 즉위한지 4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애공'이 즉위하였다.  '후자침'은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다.

'애공' 8년, 초나라 공자 '기질'은 '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으니, 이 사람이 바로 '평왕'이다.
'애공' 11년, 초'평왕'은 태자 '건'의 아내로 진나라에서 온 여자를 맞이하였다. 

진나라 여자가 초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 '평왕'은 자기의 아내로 만들었다. ] 

十五年, 楚平王欲誅建, 建亡;伍子胥奔吳.  晉公室卑而六卿彊, 欲內相攻, 是以久秦晉不相攻.

三十一年, 吳王闔閭與伍子胥伐楚, 楚王亡奔隨, 吳遂入郢. 楚大夫申包胥來告急,  

七日不食, 日夜哭泣.  於是秦乃發五百乘救楚, 敗吳師. 吳師歸, 楚昭王乃得復入郢.   

(십오년, 초평왕욕주건, 건망 ; 오자서분오.  진공실비이육경강, 욕내상공, 시이구진진불상공.

삼십일년, 오왕합려여오자서벌초, 초왕망분수, 오수입영.  초대부신포서래고급,  

칠일불식, 일야곡읍.  어시진내발오백승구초, 패오사. 오사귀, 초소왕내득복입영.  )

['애공' 15년, 초'평왕'은 간신 '비무기'의 참언으로 태자 '건'을 죽이려고 하자, '건'은 송나라로 도망쳤다. 

'오자서'는 오나라로 달아났다.  진나라는 제후들의 권한이 낮아지고 육경이 권력이 강해지자,  

내부에서 서로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진나라와 진(晉)나라는 오랫동안 서로 공격하지 않았다.

'애공' 31년, 오왕 '합려'와 '오자서'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초왕은 급히 수나라로 도망쳤으므로 오나라는 마침내

초나라의 도성 "영"에 입성하였다. 초나라 대부이자 장수인 '신포서'는 급히 진나라로  달려와서 이 사실을 알렸으며,

7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낮으로 소리내어 슬피 울었다.  

이에 진나라는 즉시 전거 5백승을 보내 초나라를 구원하여 오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오군이 돌아가자, 초'소왕'은 다시 도성 "영"으로 입성하였다. ] 

哀公立三十六年卒.  太子夷公, 夷公蚤死, 不得立, 立夷公子, 是為惠公.

惠公元年, 孔子行魯相事.  五年, 晉卿中行, 范氏反晉, 晉使智氏, 趙簡子攻之, 范,中行氏亡奔齊.  惠公立十年卒, 子悼公立.  悼公二年, 齊臣田乞弒其君孺子, 立其兄陽生, 是為悼公.
(애공립삼십육년졸.  태자이공, 이공조사, 부득립, 입이공자, 시위혜공.

혜공원년, 공자행노상사.  오년, 진경중행, 범씨반진, 진사지씨, 조간자공지, 범, 중행씨망분제.   

혜공립십년졸, 자도공립.  도공이년, 제신전걸시기군유자, 입기형양생, 시위도공. )

['애공'이 즉위한지 3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태자 '이공'이 있었는데 일찍 죽은 탓에 즉위하지 못하고,

'이공'의 아들이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혜공'이다.

'혜공' 원년, '공자'가 노나라 재상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혜공' 5년, 진나라의 경인 '중행씨'와 '범씨'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나라는 '지씨'와 '조간자'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중행씨'와 '범씨'는 제나라로 도망쳐 달아났다. 

'혜공'이 즉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도공'이 즉위하였다.  

'도공' 2년, 제나라 대부 '전걸'은 군주 '유자'를 시해하고, 그의 형 '양생'을 옹립하니 이가 '도공'이다. ] 

六年, 吳敗齊師.  齊人弒悼公, 立其子簡公.  九年, 晉定公與吳王夫差盟, 爭長於黃池, 卒先吳.   

吳彊, 陵中國. 十二年, 齊田常弒簡公, 立其弟平公, 常相之. 

十三年, 楚滅陳.  秦悼公立十四年卒, 子厲共公立.  孔子以悼公十二年卒.
(육년, 오패제사.  제인시도공, 입기자간공.  구년, 진정공여오왕부차맹, 쟁장어황지, 졸선오. 
 

오강, 능중국. 십이년, 제전상시간공, 입기제평공, 상상지.

십삼년, 초멸진.  진도공립십사년졸, 저려공공립.  공자이도공십이년졸.)


['도공' 6년, 오나라가 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제나라 사람들은 '도공'을 시해하고, 
 그 아들 '간공'을 옹립하였다.

'도공' 9년, 진'정공'과 오왕 '부차'가 회맹하여 "황지"에서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나,  

마침내 오나라가 먼저 차지하였다. 오나라가 강성해지자, 중원의 모든 나라들을 업신여겼다.   

'도공' 12년, 제나라 '전상'이 '간공'을 시해하였으며 동생 '평공'을 옹립하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도공' 13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하였다.  진'도공'은 즉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아들 '여공공'이 즉위하였다.  '공자'는 '도공' 12년에 세상을 떠났다.] 

     

厲共公二年, 蜀人來賂.  十六年, 塹河旁.  以兵二萬伐大荔, 取其王城.   

二十一年, 初縣頻陽.  晉取武成.   二十四年, 晉亂, 殺智伯, 分其國與趙· 韓· 魏. 
(여공공이년, 촉인래뢰.  십육년, 참하방.  이병이만벌대려, 취기왕성.  
 

이십일년, 초현빈양.  진취무성.  이십사년, 진난, 살지백, 분기국여조· 한· 위. )


['여공공' 2년, 촉나라 사람이 와서 재물을 바쳤다.  '여공공' 16년, 황하 주변에 해자를 만들었다.  
 

군사 2만을 파견하여 "대려"를 정벌하여 그 왕성을 빼앗았다.
'여공공' 21년, 처음으로 "빈양"을 현으로 삼았다.  진나라가 "무성"을 취하였다. 
'여공공' 24년, 진나라에서 조씨, 위씨, 한씨가 난을 일으켜 진나라의 최대 권력 가문이었던, 

지씨 가문의 수장인 '지백'을 살해하고 진나라를 삼등분 하였다. ] 

 

二十五年, 智開與邑人來奔.  三十三年, 伐義渠, 虜其王.  三十四年, 日食.  厲共公卒, 子躁公立.

躁公二年, 南鄭反.  十三年, 義渠來伐, 至渭南.  十四年, 躁公卒, 立其弟懷公.
(이십오년, 지개여읍인래분.  삼십삼년, 벌의거, 로기왕.  삼십사년, 일식. 여공공졸, 자조공립.

조공이년, 남정반.  십삼년, 의거래벌, 지위남.  십사년, 조공졸, 입기제회공. )

 

['여공공' 24년, 지씨 가문이 몰락하자 그 읍 사람들이 도망쳐 왔다.   '여공공' 33년, "의거"를 정벌하여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여공공' 34년, 일식이 나타났다.  '여공공'이 죽자, 그 아들 '조공'이 즉위하였다.

'조공' 2년, "남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조공' 13년, "의거"에서 쳐들어와 "위수" 남쪽에 이르렀다.
'조공' 14년, '조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동생 '회공'이 즉위하였다. ] 

懷公四年, 庶長朝與大臣圍懷公, 懷公自殺.  懷公太子曰昭子, 蚤死, 大臣乃立太子昭子之子,  

是為靈公.  靈公, 懷公孫也.   靈公六年, 晉城少梁, 秦擊之.  
(회공사년, 서장조여대신위회공, 회공자살.  회공태자왈소자, 조사, 대신내립태자소자지자, 
 

시위영공.  영공, 회공손야.  영공육년, 진성소량, 진격지. )


['회공 4년, 서자 출신의 장자인 '조'와 대신들이 '회공'을 에워싸자 '회공'이 자살하였다.  
 

'회공'에게 태자 '소자'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으므로, 대신들은 즉시 태자 '소자'의 아들을 옹립하였으니,

이 사람이 '영공'이다.  '영공'은 '회공'의 손자이다. ] 

靈公六年, 晉城少梁, 秦擊之.  十三年, 城籍姑.   

靈公卒, 子獻公不得立, 立靈公季父悼子, 是為簡公.  簡公, 昭子之弟而懷公子也. 
(영공육년, 진성소량, 진격지.  십삼년, 성적고.  
 

영공졸, 자헌공불득립, 입영공계부도자, 시위간공.  간공, 소자지제이회공자야. )


['영공' 6년, 진(晉)나라가 "소량"에 성을 쌓자, 진(秦)나라가 공격하였다.
'영공' 13년, 진나라는 "방읍"의 성을 수축하고 "적고" 땅에 성을 쌓았다.  '영공'이 죽었으나, 
 

그 아들 '헌공'이 즉위하지 못하고, '영공'의 막내 숙부 '도자'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간공'이다.   

'간공'은 '소자'의 아우이며 '회공'의 아들이다. ] 

簡公六年, 令吏初帶劍, 塹落.  城重泉.  十六年卒, 子惠公立.    

惠公十二年, 子出子生.  十三年, 伐蜀, 取南鄭.  惠公卒, 出子立.
(간공육년, 영리초대검, 참락.  성준천.  십육년졸, 자혜공립.  
 

혜공십이년, 자출자생.  십삼년, 벌촉, 취남정.  혜공졸, 출자립. )


['간공' 6년, 관리들에게 처음으로 칼을 차게 하였고, "낙수"에 해자를 팠다.  
 

'간공' 16년, '간공'이 세앙을 떠나자, 그 아들 '혜공'이 즉위하였다.
'혜공' 12년, 아들 '출자'가 태어났다. 

'혜공' 13년, 촉나라를 정벌하였고, "남정"을 취하였다.   

'혜공'이 죽자, '출자'가 즉위하였다. ] 

出子二年, 庶長改迎靈公之子獻公于河西而立之.  殺出子及其母, 沈之淵旁.   

秦以往者數易君, 君臣乖亂, 故晉復彊, 奪秦河西地.
(출자이년, 서장개영영공지자헌공우하서이입지.  상출자급기모, 침지연방.  
 

진이왕자수역군, 군신괴난, 고진부강, 탈진하서지. ) 

['출자' 2년, 서자 출신의 장자인 '개'가 '영공'의 아들 '헌공'을 "하서"에서 영접하여 옹립하였다. 

리고 '출자'와 그 모친을 살해해 깊은 연못에 수장해버렸다.
진(秦)나라는 여러 차례 임금을 바꾸는 과정에서 군신의 관계가 사리에 어그러져 어지러운 반면, 
진(晉)나라는 다시 강대해져 진(秦)나라의 "하서" 땅을 빼앗았다. ]
 

獻公元年, 止從死.  二年, 城櫟陽.  四年, 正月庚寅, 孝公生.   

十一年, 周太史儋見獻公曰:“ 周故與秦國合而別, 別五百歲復合, 合十七歲而霸王出. ”
(헌공원년, 지종사.  이년, 성역양.  사년정월경인, 효공생.  
 

십일년, 주태사담현헌공왈 : " 주고여진국합이별, 별오백세부합, 합십칠세이패왕출. " )

['헌공' 원년, 순장제를 폐지하였다. 

'헌공' 2년, "역양"에 성을 쌓았다.   

'헌공' 4년, 정월 경인일에 '효공'이 태어났다.
'헌공' 11년, 주나라 태사 '담'이 '헌공'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

" 주나라는 옛날에 진나라와 하나였고 지금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따로 떨어진지 5백년 만에

다시 합쳐질 것이며, 합쳐진지 17년이 지나면 패왕이 나타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十六年, 桃冬花.  十八年, 雨金櫟陽.  二十一年, 與晉戰於石門, 斬首六萬, 天子賀以黼黻.

二十三年, 與魏晉戰少梁, 虜其將公孫痤.  二十四年, 獻公卒, 子孝公立, 年已二十一歲矣.
(십육년, 도동화.  십팔년, 우금역양.  이십일년, 여진전어석문, 참수팔만, 천자하이보불.

이십삼년, 여위진전소량, 로기장공손좌.  이십사년, 헌공졸, 자효공립, 연이이십일세의. )

['헌공' 16년, 겨울인데 복숭아 나무에 꽃이 피었다. '헌공' 18년, "역양"에 누런 비가 내렸다.

'헌공' 21년, 진나라와 "석문"에서 전투를 벌여 병사 6만 명의 목을 베자, 천자가 수놓은 예복을 보내 축하하였다.

'헌공' 21년, 위진과 "소량"에서 전투를 벌여 그 장수 '공손좌'를 포로로 잡았다.  
'헌공' 24년, '헌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효공'이 즉위하니 나이가 벌써 스물한 살이나 되었다. ]
 

孝公元年, 河山以東彊國六, 與齊威· 楚宣· 魏惠· 燕悼· 韓哀· 趙成侯并.   

淮泗之閒小國十餘.  楚· 魏與秦接界.  魏筑長城, 自鄭濱洛以北, 有上郡.  
(효공원년, 하산이동강국육, 여제위· 초선· 위혜· 연도· 한애· 조성후병.  
 

회사지간소국십여.  초· 위여진접계.  위축장성, 자정빈낙이북, 유상군. )

['효공' 원년, 황하와 태산의 동쪽으로 여섯 강대국이 있었으며, '효공'은 제'위왕', 초'선왕', 위'혜왕',

연'도후', 한'애후', 조'성후'와 나란히 하였다.  "회수"와 "사수" 사이에 작은 나라가 10여개 있었다.   

초나라와 위나라는 진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위나라는 장수 '용가'가 서쪽 변경에 장성을 쌓았는데

"정현"에서 '낙수"를 따라 북쪽으로 '상군"까지 이어졌다. ] 

楚自漢中, 南有巴· 黔中. 周室微, 諸侯力政, 爭相併. 秦僻在雍州, 不與中國諸侯之會盟, 夷翟遇之. 

孝公於是布惠, 振孤寡, 招戰士, 明功賞.
(초자한중, 남유파· 검중.  주실미, 제후역공, 쟁상병.  진피재옹주, 불여중국제후지회맹, 이책우지.  
 

효공어시포혜, 진고과, 초전사, 명공상. )


[초나라는 "한중"에서 부터 남쪽으로 "파군"과 "검중"까지 소유하였다.  
 

주나라 왕실이 약해지자, 제후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서로 투쟁을 통해 합쳤다.
진나라는 변방 "옹주"에 떨어져 있어 중원지역 제후들의 회맹에 함께 하지 않았으므로 오랑캐 대우를 받았다.
이에 '효공'은 은혜를 베풀어 고아나 과부들을 구휼하고 전사들을 불러 공적과 포상을 명확히 하였다. ]
 

下令國中曰:“ 昔我繆公自岐雍之閒, 修德行武, 東平晉亂, 以河為界, 西霸戎翟, 廣地千里,  

天子致伯, 諸侯畢賀, 為後世開業, 甚光美.  會往者厲, 躁, 簡公, 出子之不寧, 國家內憂, 未遑外事,

三晉攻奪我先君河西地, 諸侯卑秦, 醜莫大焉.   獻公即位, 鎮撫邊境, 徙治櫟陽,  

且欲東伐, 復繆公之故地, 修繆公之政令. 寡人思念先君之意, 常痛於心.   

賓客群臣有能出奇計彊秦者, 吾且尊官, 與之分土. ”   於是乃出兵東圍陜城, 西斬戎之獂王.
(하령국중왈 : " 석아목공자기옹지간, 수덕행무, 동평진란, 이하위계, 서패융적, 광지천리, 
 

천자치백, 제후필하, 위후세개업, 심광미.  회왕자려, 조, 간공, 출자지불녕, 국가내우, 미황외사,  

삼진공탈아선군하서지, 제후비진· 추막대언.  헌공즉위, 진무변경, 사치역양,  

차욕동벌, 복목공지고지, 수목공지정령.  과인사념선군지의, 상통어심.   

빈객군신유는출기계강진자, 오차존관, 여지분토. "  어시내출병동위섬성, 서참융지원왕. )


['효공'은 나라 안에 령을 내려 알리기를 : " 옛날에 우리의 '목공'께서는 "기산"과 "옹읍" 사이에서 
덕을 익히고

무위를 행하여 동쪽으로는 진나라의 난을 평정하고, 황하를 경계로 하여 서쪽으로는 융적의 패주가 되셨으며,

영토를 천리나 넓히자, 천자께서 백의 지위를 내려 치하하시니, 제후들도 따라 모두 축하 하였고

후세를 위하여 기초를 개척하시니 매우 빛나고 아름다웠다.   

이전 모임의 '여공', '조공', '간공', '출자'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였으며, 나라 안에 우환이 있었으므로  

외부의 일에 관여할 여유가 없어지자, 한· 조· 위 삼진이 우리 선조의 "하서" 땅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제후들도 진나라를 깔보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수치스러움은 없을 것이다.  
 

'헌공'께서 즉위하여 변방지역을 달래어 진정시키고, "역양"으로 천도하여 다스렸으며 또 동쪽을 정벌하고자 하여

'목공'께서 지배했던 옛 영토를 다시 찾아 '목공'께서 닦아 놓은 정치 강령을 정비하였다.
과인은 선왕의 뜻을 근심하고 염려되어 항상 마음이 아팠다. 

빈객과 여러 신하들 중에 우리 진나라를 강대하게 해 줄 기묘한 계책을 내놓는 자가 있다면,

과인 또한 그에게 관직을 높여 주고, 더불어 토지를 나누어 줄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군대를 출정시켜 동쪽으로는 "섬성"을 포위하고, 서쪽으로는 융족을 정벌하여 '원왕'을 참수하였다. ] 

衛鞅聞是令下, 西入秦, 因景監求見孝公.  二年, 天子致胙.

三年, 衛鞅說孝公變法修刑, 內務耕稼, 外勸戰死之賞罰, 孝公善之.  甘龍· 杜摯等弗然, 相與爭之.

卒用鞅法, 百姓苦之;居三年, 百姓便之.  乃拜鞅為左庶長.  其事在商君語中.
(위앙문시령하, 서입진, 인경감구현효공.  이년, 천하치조.

삼년, 위앙설효공변법수형, 내무경가, 외권전사지상벌, 효공선지.  감용· 두지등불연, 상여쟁지.

졸용앙법, 백성고지 ; 거삼년, 백성편지.  내배앙위좌서장.  기사재상군어중.) 

['위앙'은 이같은 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의 진나라에 들어가서 환관인 '경감'에게

'효공'을 알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효공' 2년, 천자가 제사에 쓸 고기를 보내왔다.

'효공' 3년, '위앙'은 '효공'을 설득하여 법규를 고치고 형벌을 정리하여, 내부적으로는 경작에 힘쓰고,  

외부적으로는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자들에 대한 상벌을 확실히 할 것을 권하자, '효공'은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대표인 '감용'과 '두지'등은 그렇지 않다고 여겨, '위앙'과 서로 다툼이 많았다.

마침내 '위앙'의 변법이 시행되자, 백성들은 고생스러웠지만 ;  3년이 지나면서 백성들은 오히려 편하게 여겼다. 

이에 '위앙'에게 좌서장의 벼슬을 주었다.  이 일은 상군 이야기(열전) 가운데 있다.] 

 

七年, 與魏惠王會杜平.  八年, 與魏戰元裏, 有功.  十年, 衛鞅為大良造, 將兵圍魏安邑, 降之.

十二年, 作為咸陽, 筑冀闕, 秦徙都之.  并諸小鄉聚, 集為大縣, 縣一令, 四十一縣.   

為田開阡陌.  東地渡洛.  十四年, 初為賦.   十九年, 天子致伯.
(칠년, 여위혜왕회두평.  팔년, 여위전원리, 유공.  십년, 위앙위대량조, 장병위위안읍, 항지.

십이년, 작위함양, 축기궐, 진사도지,  병제소향취, 집위대현, 현일령, 사십일현.   

위전개천맥.  동지도락.  십사년, 초위부.  십구년, 천자치백. )

['효공' 7년, 위나라 '혜왕'과 "두평"에서 회맹하였다.   

'효공' 8년, 위나라와 "원리"에서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다.
'효공' 10년, '위앙'은 대량조에 임명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 "안읍"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 냈다.

'효공' 12년, 진나라는 도읍을 "역양"에서 "함양"으로 옮겨 기궐(궁문)을 축조하였다.  
여러 곳의 작은 마을을 합하여 큰 현을 만들고 각 현마다 한 명의 현령을 두어 41개 현이 생겨났다.
 

정전제를 폐지하고 밭두둑길을 동서남북으로 개간하였다.  동쪽으로 영토가 낙수를 넘었다.   

'효공' 14년, 처음으로 부세를 거두어 들였다.  

'효공' 19년, 천자는 '효공'에게 패자의 칭호를 내렸다. ] 

 

二十年, 諸侯畢賀.  秦使公子少官率師會諸侯逢澤, 朝天子.   二十一年, 齊敗魏馬陵.

二十二年, 衛鞅擊魏, 虜魏公子卬.  封鞅為列侯, 號商君.  二十四年, 與晉戰雁門, 虜其將魏錯.
(이십년, 제후필하.  진사공자소관솔사제후봉택, 조천자.  이십일년, 제패위마릉.

이십이년, 위앙격위, 로위공자앙.  봉앙위열후, 호상군.  이십사년, 여진전안문, 로기장위착. )

['효공' 20년, 제후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진나라는 공자 '소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봉택"에서 제후들과 회맹한 후 천자를 조현하게 하였다.    

'효공' 21년, 제나라가 위나라를 "마릉"에서 무찔렀다.

'효공' 22년, '위앙'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공자 '앙'을 포로로 잡았다.   

'위앙'을 열후로 봉하고, '상군'이라 불렀다.
'효공' 24년, 삼진의 위나라와 "안문"에서 싸워 위나라 장수 '위착'을 포로로 잡았다. ] 
 

孝公卒, 子惠文君立.  是歲, 誅衛鞅.  鞅之初為秦施法, 法不行, 太子犯禁.    

鞅曰:“ 法之不行, 自於貴戚.  君必欲行法, 先於太子.  太子不可黥, 黥其傅師. ”

於是法大用, 秦人治.  及孝公卒, 太子立, 宗室多怨鞅, 鞅亡, 因以為反, 而卒車裂以徇秦國.
(효공졸, 자혜문군립.  시세, 주위앙.  앙지초위진시법, 법불행, 태자범금.  
 

앙왈 : " 법지불행, 자어귀척.  군필욕행법, 선어태자.  태자불가경, 경기부사. "

어시법대용, 진인치.  급효공졸, 태자립, 종실다원앙, 앙망, 인위위반, 이졸거열이순진국.)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혜문군'이 즉위하였다.  이 해에 '위앙'을 주벌하였다.  
 

'위앙'이 처음 진나라를 위해 편법을 시행할때, 법이 잘 시행되지 못하였는데, 마침 태자가 금지법을 어겼다. 

'위앙'이 말하기를 : "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왕실의 친,인척부터 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반드시 법을 시행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태자부터 처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태자는 임금의  

대를 이을 사람이므로 직접적으로 형을 가할 수 없기에 그 스승이 경형을 받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다.

이처럼 법령을 크게 활용하여 진나라 백성들을 다스렸다.  마침내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고,

왕실의 종친 가운에 '위앙'을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위앙'이 도망치자,  

공자 '건'은 '위앙'이 모반을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밀고하여, 마침내 거열형에 처해지고, 

그 시신은 진나라를 돌며 백성들에게 내보였다.] 

惠文君元年, 楚· 韓· 趙· 蜀人來朝.  二年, 天子賀.  三年, 王冠. 

四年, 天子致文武胙.  齊· 魏為王.

五年, 陰晉人犀首為大良造.  六年, 魏納陰晉, 陰晉更名寧秦.   

七年, 公子卬與魏戰, 虜其將龍賈, 斬首八萬.  八年, 魏納河西地.

(혜문군원년, 초· 한· 조· 촉인래조.  이년, 천자하.  삼년, 왕관.  사년, 천자치문무조.  제· 위위왕. )

오년, 음진인서수위대량조.  육년, 위납음진, 음진경명녕진.   

칠년, 공자앙여위전, 로기장용가, 참수팔만.  팔년, 위납하서지. )

['혜문군' 원년, 초· 한· 조· 촉나라 사람들이 와서 조현하였다. 

'혜문군' 2년, 천자가 축하하였다.  
'혜문군' 3년, 왕의 관례를 치렀다. 

'혜문군' 4년, 천자가 '문왕', '무왕'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 왔다. 제· 위나라도 왕이라 호칭하였다.

'혜문군' 5년, 위나라 "음진" 사람 '서수'(공손연)가 대량조에 임명되었다.   

'혜문군' 6년, 위나라가 "음진"을 바치자, "음진"을 "영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혜문군' 7년, 공자 '앙'이 위나라와 싸워 장수 '용가'를 사로잡고 병사 8만의 목을 베었다.  
 

'혜문군' 8년, 위나라가 "하서" 땅을 헌납하였다. ] 

九年, 渡河, 取汾陰· 皮氏.  與魏王會應.  圍焦, 降之.  十年, 張儀相秦.  魏納上郡十五縣.   

十一年, 縣義渠.  歸魏焦· 曲沃.  義渠君為臣.  更名少梁曰夏陽.  
(구년, 도하, 취분음· 피지.  여위왕회응.  위초, 항지.  십년, 장의상진.  위납상군십오현.  
 

십일년, 현의거.  귀위초· 곡옥.  의거군위신.  경명소량왈하양. )

['혜문군' 9년, 황하를 건너 "분음"과 "피지"를 취하였다. 위나라 왕과 "웅" 땅에서 회맹하였다. 

"초"를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혜문군' 10년, '장의'가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위나라가 "상군"의 15개 현을 헌납하였다.
'혜문군' 11년, "의거"를 현으로 삼았다.  "초성"과 "곡옥"을 위나라에 반환하였다.  
 

"의거"의 군주를 신하로 삼았다.  "소량"의 지명을 "하양"으로 고쳤다. ] 

十二年, 初臘.  十三年四月戊午, 魏君為王, 韓亦為王.  使張儀伐取陜, 出其人與魏.

十四年, 更為元年.  二年, 張儀與齊· 楚大臣會齧桑.   

三年, 韓· 魏太子來朝.  張儀相魏.   五年, 王游至北河.
(십이년, 초랍.  십삼년사월무오, 위군위왕, 한역위왕.  사장의벌취섬, 출기인여위.

십사년, 경위원년.  이년, 장의여제· 초대신회설상. 

삼년, 한· 위태자래조.  장의상위.  오년, 왕유지북하. )

['혜문군' 12년, 처음으로 납일(동지 뒤의 셋째 술일)에 제사를 모셨다.   

'혜문군' 13년 4월 무오일, 위나라 군주가 왕으로 칭하자, 한나라도 역시 왕으로 칭하였다.
'장의'에게 위나라 "섬" 땅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고, 그곳 사람들을 위나라로 내쫓았다.  

'혜문군' 14년, '혜문왕' 원년으로 바꾸었다. 

'혜문왕' 2년, '장의'가 제나라, 초나라 대신들과 "설상"에서 회맹하였다.
'혜문왕' 3년, 한· 위나라 태자가 조현하러 왔다.  '장의'가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혜문왕' 5년, '혜문왕'이 유람하다 "북하"에 이르렀다. ] 

七年, 樂池相秦.  韓· 趙· 魏· 燕· 齊帥匈奴共攻秦.   

秦使庶長疾與戰修魚, 虜其將申差, 敗趙公子渴, 韓太子奐, 斬首八萬二千.

八年, 張儀復相秦.  九年, 司馬錯伐蜀, 滅之.  伐取趙中都· 西陽.    

十年, 韓太子蒼來質.  伐取韓石章.  伐敗趙將泥.  伐取義渠二十五城.
(칠년, 악지상진.  한· 조· 위· 연· 제솔흉노공공진.   

진사서장질여전수어, 로기장신차, 패조공자갈, 한태자환, 참수팔만이천.

팔년, 장의 부상진.  구년, 사마조벌촉, 멸지.  벌취조중도· 서양.   

십년, 한태자창래질.  벌취한석장.  벌패조장니.  벌취의거이십오성. )

['혜문왕' 7년, '악지'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한· 조· 위· 연· 제나라가 흉노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는 서출 중에 장자인 '질'로 하여금 "수어"에서 한· 조· 위 삼진 연합군과 싸우게 하여 

한나라 장수 '신차'를 포로로 잡고, 조나라 공자 '갈'과 한나라 태자 '환'을 무찔러 8만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혜문왕' 8년, '장의'가 다시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혜문왕' 9년, '사마조'가 촉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조나라의 "중도"와 "서양"을 정벌하여 취하였다.
'혜문왕' 10년, 한나라 태자 '창'이 진나라에 볼모로 왔다.  한나라의 "석장"을 정벌하여 취하였다.
조나라를 공격하여 장수 '니'를 무찔렀다.  "의거"를 정벌하여 25개 성을 빼앗았다. ]
 

 

十一年, 㯉裏疾攻魏焦, 降之.  敗韓岸門, 斬首萬, 其將犀首走.  公子通封於蜀.  燕君讓其臣子之. 

十二年, 王與梁王會臨晉.  庶長疾攻趙, 虜趙將莊.  張儀相楚.  
(십일년, 저리질공위초, 항지.  패한안문, 참수만, 기장서수주.  공자통봉어촉.  연군양기신자지.  
 

십이년, 왕여양왕회임진.  서장질공조, 로조장장.  장의상초. ) 


['혜문왕' 11년, 저리질(저리자, 지낭)이 위나라 "초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한나라 군대를 "안문"에서 무찌르고 군사 만명의 목을 베었으며, 그 장수 '서수'(공손연)는 달아났다.   

공자 '통'을 "촉"에 봉하였다.  연나라 군주 '쾌'는 승상 '자지'에게 선양하였다. 
'혜문왕' 12년, '혜문왕'이 양나라 왕과 "임진"에서 회맹하였다. 

서출 중에 장자인 '질'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나라 장수 '장'을 사로잡았다.  '장의'가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 

十三年, 庶長章擊楚於丹陽, 虜其將屈丐, 斬首八萬;又攻楚漢中, 取地六百里, 置漢中郡.   

楚圍雍氏, 秦使庶長疾助韓而東攻齊, 到滿助魏攻燕. 

十四年, 伐楚, 取召陵. 丹· 犁臣, 蜀相壯殺蜀侯來降. 惠王卒, 子武王立.  韓· 魏· 齊· 楚· 越皆賓從.
(십삼년, 서장장격초어단양, 로기장굴개, 참수팔만 ; 우공초한중, 취지육백리, 치한중군.  
 

초위웅지, 진사서장질조한이동공제, 도만조위공연.

십사년, 벌초, 취소릉.  단· 리신, 촉상장살촉후래항.  혜왕졸, 자무왕립.  한위제초월개빈종.)

['혜문왕' 13년, 서출 중에 장자인 '장'이 "단양"에서 초나라를 공격하여 장수 '굴개'를 포로로 잡고, 

군사 8만 명의 목을 베었다 ; 또 초나라 "한중"을 공격하여 6백리 땅을 빼앗아 "한중군"을 설치하였다.   

초나라가 "웅지"를 포위하자,  진나라는 서출 중에 장자인 '질'로 하여금 한나라를 돕고  

동쪽의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도만'은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혜문왕' 14년, 초나라를 정벌하여 "소릉"을 빼앗았다.  "단", "리"가 신하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였으며,  

촉나라 재상 '진장'이 '촉후'를 살해하고 항복해 왔다.  '혜문왕'이 죽자, 아들 '무왕'이 즉위하였다.   

한· 위· 제· 초· 월나라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고 따르기로 하였다. ]

武王元年, 與魏惠王會臨晉.  誅蜀相壯.  張儀· 魏章皆東出之魏.  伐義渠· 丹· 犁.    

二年,初置丞相, 㯉裏疾· 甘茂為左右丞相.  張儀死於魏.
(무왕원년, 여위혜왕회임진.  주촉상장.  장의· 위장개동출지위.  벌의거· 단· 리.  
 

이년, 초치승상, 저리질· 감무위좌우승상.  장의사어위. )


['무왕' 원년, 위나라 '혜왕'과 "임진"에서 회맹하였다.  촉나라 재상 '진장'을 주벌하였다.  
 

'장의'와 '위장'을 동쪽에 위나라로 내쫓았다.  "의거", "단", "리"를 정벌하였다.   

'무왕' 2년, 처음 승상을 만들어  '저리질'과 '감무'를 좌우승상이 되었다.  '장의'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 

三年, 與韓襄王會臨晉外.  南公揭卒, 㯉裏疾相韓.   

武王謂甘茂曰:“ 寡人欲容車通三川, 窺周室, 死不恨矣. ”  其秋, 使甘茂· 庶長封伐宜陽.
(삼년, 여한양왕회임진외.  남공게졸, 저리질상한.  
 

무왕위감무왈: " 과인욕용거통삼천, 규주실, 사불한의. "  기추, 사감무· 서장봉벌의양.)

['무왕' 3년, 한나라 '양왕'과 "임진" 에서 회맹하였다. '남공게'가 죽자, '저리질'이 한나라 재상이 되었다.
'무왕'이 '감무'에게 말하기를 : " 내가 용거(왕의 전용 수레)를 타고 "삼천"을 지나 주나라 왕실을 엿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하였다.  그해 가을 '감무'와 서장 '봉'으로 하여금 한나라의 "의양"을 정벌하게 하였다. ]

四年, 拔宜陽, 斬首六萬.  涉河, 城武遂.  魏太子來朝.   

武王有力好戲, 力士任鄙, 烏獲, 孟說皆至大官.  王與孟說舉鼎, 絕臏.
(사년, 발의양, 참수육만.  섭하, 성무수.  위태자래조.  
 

무왕유력호의, 역사임비, 오획, 맹열개지대관.  왕여맹열거정, 절빈. )


['무왕' 4년, "의양"을 함락시키고 6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황하를 건너 "무수"에 성을 쌓았다.  
 

위나라 태자가 조회하러 왔다. '무왕'은 힘이 장사여서 겨루기를 좋아하였으며,

힘이 센 '임비', '오획', '맹열'(맹분)이 모두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무왕'은 '맹열'과 주왕실의 보기인 구정 중 옹정 들어 올리기를 겨루다 종지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 

八月, 武王死.  族孟說.  武王取魏女為后, 無子.  立異母弟, 是為昭襄王.   

昭襄母楚人, 姓羋氏, 號宣太后.  武王死時, 昭襄王為質於燕, 燕人送歸, 得立.
(팔월, 무왕사.  족맹열.  무왕취위녀위후, 무자.  입이모제, 시위소양왕.  
 

소양모초인, 성미씨, 호선태후.  무왕사시, 소양왕위질어연, 연인송귀, 득립. )


[8월에,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우승상 '저리질'이 '맹열'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무왕'은 위나라 여자를 취하여 왕후로 삼았으나 자식이 없었다.
이복 동생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소양왕'이다.  '소양왕'의 어머니는 성이 미씨로 '선태후'라고 불렀다.
'무왕' 사망때에 '소양왕'은 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연나라에서 그를 돌려 보내 즉위할 수 있었다. ] 

昭襄王元年, 嚴君疾為相.  甘茂出之魏.    

二年, 彗星見.  庶長壯與大臣· 諸侯· 公子為逆, 皆誅, 及惠文后皆不得良死.  悼武王后出歸魏.
(소양왕원년, 엄군질위상.  감무출지위.  
 

이년, 혜성견.  서장장여대신 제후 공자위역, 개주, 급혜문후개불득량사. 도무왕, 후출귀위. )


['소양왕' 원년,  엄군 '질'(저리자)이 진나라 승상이 되었다.  
 

'감무'는 '상수'와 '공손석'의 참소로 인해 두려운 나머지 위나라로 달아났다.
'소양왕' 2년, 혜성이 나타났다.  서출 중에 장자인 '장'이 대신, 제후, 공자와 함께 반역을 하다 
 

모두 '위염'에게 주살되고, 마침내 '혜문후'(소양왕 생모)도 이 여파로 인해 제명대로 살지 못하였다.   

'도무왕후'도 도망쳐 친정인 위나라로 돌아갔다. ] 

三年, 王冠.  與楚王會黃棘, 與楚上庸.  四年, 取蒲阪.  彗星見.  五年, 魏王來朝應亭, 復與魏蒲阪.

六年, 蜀侯煇反, 司馬錯定蜀.  庶長奐伐楚, 斬首二萬.  涇陽君質於齊.  日食, 晝晦.   

(삼년, 왕관.  여초왕회황극, 여초상용.  사년, 취포판.  혜성견.  오년, 위왕래조응정, 부여위포판.

육년, 촉후휘반, 사마조정촉.  서장환벌초, 참수이만.  경양군질어제.  일식, 주회. )

['소양왕' 3년, '소양왕'이 관례를 행하였다.  초왕과 "황극"에서 회맹하여 초나라의 "상용" 땅을 돌려주었다.
'소양왕' 4년, 위나라의 "포판", "진양", "봉릉" 등지를 점령하였다.  혜성이 나타났다.
'소양왕' 5년, 위나라 '양왕'이 "응정"으로 조현하러 오자, "포판"을 다시 위나라에 돌려 주었다.

'소양왕' 6년, 촉후 '휘'가 모반을 하자, '사마조'가 촉나라를 평정하였다.   

서출 중에 장자인 '환'이 초나라를 정벌하여 2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소양왕'의 동생 '경양군'을 제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일식이 나타나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

七年, 拔新城. 摢裏子卒.  八年, 使將軍羋戎攻楚, 取新市.  齊使章子, 魏使公孫喜,  

韓使暴鳶共攻楚方城, 取唐眛.   趙破中山, 其君亡, 竟死齊.  魏公子勁· 韓公子長為諸侯.
(칠년, 발신성. 저리자졸.  팔년, 사장군미융공초, 취신시.  제사장자, 위사공손희, 
 

한사포연공공초방성, 취당매.  조파중산, 기군망, 경사제.  위공자경· 한공자장위제후. )


['소양왕' 7년, "신성"을 함락하였다. '저리자'가 죽었다. 
 

'소양왕' 8년, 장군 '미융'으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하여 "신시"를 빼앗았다.   

제나라는 '장자'에게, 위나라는 '공손희'에게, 한나라는 '포연'을 파견하여 함께 초나라 "방성"을 공격하여  

초나라 재상 '당매'를 사로 잡았다.  조나라가 "중산"을 무찌르자, 왕은 도망가서 마침내 제나라에서 죽었다.
위나라 공자 '경'과 한나라 공자 '장'이 제후가 되었다. ]
 

九年, 孟嘗君薛文來相秦.  奐攻楚, 取八城, 殺其將景快.    

十年, 楚懷王入朝秦, 秦留之.  薛文以金受免.  樓緩為丞相.
(구년, 맹상군설문래상진.  환공초, 취팔성, 살기장경쾌.  
 

십년, 초회왕입조진, 진유지.  설문이금수면.  누완위승상.)


['소양왕' 9년, 맹상군 '설공'이 진나라에 와서 승상이 되었다.  
 

한나라 태자 '환'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8개 성을 빼앗고 장수 '경쾌'를 죽였다.
'소양왕' 10년,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에 조현하러 왔다가 억류되었다.   

'설공'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파면되었다.  제나라 사람 '누완'이 승상이 되었다. ] 

十一年, 齊· 韓· 魏· 趙· 宋· 中山五國共攻秦, 至鹽氏而還.  秦與韓· 魏河北及封陵以和.   

彗星見.  楚懷王走之趙, 趙不受, 還之秦, 即死, 歸葬.
(십일년, 제한위조송중산오국공공진, 지염지이환.  진여한위하북급봉릉이화.  
 

혜성견.  초회왕주지조, 조불수, 환지진, 즉사, 귀장. )


['소양왕' 11년, 제· 한· 위· 조· 송· 중산 등이 진나라를 공격하여 "염지"까지 진격하였다가 철수하였다. 
진나라는 위나라에 황하 이북의 "봉릉"을, 한나라엔 "무수"를 각각 할양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혜성이 나타났다.  초'회왕'이 조나라로 달아났지만 조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아 진나라로 돌아와서 곧 죽자,

유해를 초나라로 돌려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 

十二年, 樓緩免, 穰侯魏冉為相.  予楚粟五萬石.   

十三年, 向壽伐韓, 取武始.  左更白起攻新城.  五大夫禮出亡奔魏.  任鄙為漢中守.
(십이년, 누완면, 양후위염위상.  여초속오만석.  
 

십삼년, 상수벌한, 취무시.  좌경백기공신성.  오대부예출망분위.  임비위한중수. )


['소양왕' 12년, '누완'이 면직되고, 양후'위염'이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초나라에 식량 5만 석을 주었다.
'소양왕' 13년, '상수'가 한나라를 정벌하여 "시무"를 빼앗았다.  좌경 '백기'가 "신성"을 공격하였다.
오대부 '예'가 진나라를 빠져 나와 위나라로 도망쳐 달아났다.  역사 '임비'에게 "한중"을 지키게 하였다. ]
 

十四年, 左更白起攻韓· 魏於伊闕, 斬首二十四萬, 虜公孫喜, 拔五城.   

十五年, 大良造白起攻魏, 取垣, 復予之.  攻楚, 取宛.
(십사년, 좌경백기공한· 위어이궐, 참수이십사만, 로공손희, 발오성.  
 

십오년, 대량조백기공위, 취원, 부여지.  공초, 취완. )

['소양왕' 14년, 좌경 '백기'가 "이궐"에서 한· 위나라 연합군을 공격하여

24만여 명의 목을 베고  위나라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잡고, 5개 성을 함락시켰다. 
'소양왕' 15년, 대량조의 직위에 오른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원" 땅을 취하였으나 
나중에 다시 돌려 주었다. 

초나라를 공격하여 "완성"을 취하였다. ]

十六年, 左更錯取軹及鄧.  冉免, 封公子市宛, 公子悝鄧, 魏冉陶, 為諸侯.   

十七年, 城陽君入朝, 及東周君來朝.  秦以垣為蒲阪· 皮氏.  王之宜陽.
(
십육년, 좌경조취지급등.  염면, 봉공자불완, 공자리등, 위염도, 위제후.  
 

십칠년, 성양군입조, 급동주군래조.  진이원위포판· 피지.  왕지의양. )

['소양왕' 16년, 좌경 '사마조'는 "지"와 "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위염'을 면직시키고, 공자 '불'에게 "완", 공자 '리'는 "등", '위염'은 "도"에 봉지를 하사하여 각각 제후로 봉하였다.
'소양왕' 17년, 한나라의 '성양군'이 입조 하였고, 마침내 동주의 군주도 조현을 왔다.  
 

진나라는 "원" 땅을 "포판", "피지"와 바꾸었다.  왕이 "의양"을 방문하였다. ] 

十八年, 錯攻垣· 河雍, 決橋取之.   

十九年, 王為西帝, 齊為東帝, 皆復去之.  呂禮來自歸.  齊破宋, 宋王在魏, 死溫.  任鄙卒.
(십팔년, 조공원· 하웅, 결교취지.  
 

십구년, 왕위서제, 제위동제, 개복거지.  여례래자귀.  제파송, 송왕재위, 사온.  임비졸. )

['소양왕' 18년, '사마조'가 "원"과 "하웅"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리를 끊어 버렸다.  
'소양왕' 19년, 진나라 왕이 서제로, 제나라 왕이 동제로 칭하였다가 모두 다시 제의 호칭를 거두어 들이고

왕으로 칭하였다. '여례'가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격파하자, 송왕은 위나라로 달아나서 "온" 땅에서 죽었다.  '임비'도 죽었다. ] 

二十年, 王之漢中, 又之上郡· 北河.   

二十一年, 錯攻魏河內.  魏獻安邑, 秦出其人, 募徙河東賜爵, 赦罪人遷之.  涇陽君封宛.
(이십년, 왕지한중, 우지상군· 북하.  
 

이십일년, 조공위하내.  위헌안읍, 진출기인, 모사하동사작, 사죄인천지.  경양군봉완. )


['소양왕' 20년, '소양왕'이 "한중"으로 해서 "상군"을 거쳐 "북하"까지 순수하였다.
 

'소양왕' 21년, '사마조'가 위나라 "하내"를 공격하였다.  위나라가 "안읍"을 헌납하자,  

진나라는 그곳에 살던 위나라 사람들을 내쫓아 "하동"으로 이주시키고 작위를 하사하였으며,  

죄인들은 그 죄를 사면시켜 "하동"으로 옮겨가서 살게 하였다.  '경양군'을 "완"에 봉하였다. ] 

二十二年, 蒙武伐齊.  河東為九縣.  與楚王會宛.  與趙王會中陽.    

二十三年, 尉斯離與三晉· 燕伐齊, 破之濟西.  王與魏王會宜陽, 與韓王會新城.
(이십이년, 몽무벌제.  하동위구현.  여초왕회완.  여조왕회중양.  
 

이십삼년, 위사리여삼진· 연벌제, 파지제서.  왕여위왕회의양, 여한왕회신성. )


['소양왕' 22년, '몽무'가 제나라를 정벌하였다.  "하동"에 9개 현을 두었다.  
 

초'경양왕'과 "완"에서 회맹하였다.  조'혜문왕'과 "중양"에서 회맹하였다.
'소양왕' 23년, 국위 '사리'가 군사를 이끌고 삼진, 연나라 연합군과 함께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수" 서쪽에서 제나라를 무찔렀다. 

'소양왕'은 "의양"에서 위'소왕'과 회맹하였고, "신성"에서 한'이왕'과 회맹하였다. ] 

            

二十四年, 與楚王會鄢, 又會穰.  秦取魏安城, 至大梁, 燕· 趙救之, 秦軍去.  魏冉免相.    

二十五年, 拔趙二城.  與韓王會新城, 與魏王會新明邑.  二十六年, 赦罪人遷之穰. 侯冉復相.  

(이십사년, 여초왕회언, 우회양.  진취위안성, 지대량, 연· 조구지, 진군거.  위염면상.   

이십오년, 발조이성.  여한왕회신성, 여위왕회신명읍.  이십육년, 사죄인천지양. 후염부상. )

['소양왕' 24년, 초왕과 "언"에서 회맹한 후 또 "양"에서 회맹하였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안성"을 빼앗고

"대량"까지 진격하였으나 연나라와 조나라 연합군의 구원으로 진나라 군대는 철수하였다.   

'위염'이 승상 직에서 면직되었다.  '소양왕' 25년, 조나라의 2개 성을 빼앗았다.   

한왕과 "신성"에서 회맹을 하고,  위왕과는 "신명읍"에서 회맹을 행하였다.  

'소양왕' 26년, 죄인들을 사면하여 "양성"으로 옮겨와 살게 하였다. 양후 '위염'이 다시 승상 직위에 복귀하였다. ] 

二十七年, 錯攻楚.  赦罪人遷之南陽.  白起攻趙, 取代光狼城.   

又使司馬錯發隴西, 因蜀攻楚黔中, 拔之.
(이십칠년, 조공초.  사죄인천지남양.  백기공조, 취대광랑성.  우사사마조발롱서, 인촉공초검중, 발지. )

 
[27년, '사마조'가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죄인들을 사면하여 "남양"으로 옮겨와 살게 하였다.  
 

'백기'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대" 땅의 "광랑성"을 빼앗았다.
또 '사마조'에게 "롱서"에서 군사들을 징발하여 촉나라를 통해 초나라의 "검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
 

二十八年, 大良造白起攻楚, 取鄢· 鄧, 赦罪人遷之.    

二十九年, 大良造白起攻楚, 取郢為南郡, 楚王走.  周君來.  王與楚王會襄陵.  白起為武安君.
(이십팔년, 대량조백기공초, 취언· 등, 사죄인천지.  
 

이십구년, 대량조백기공초, 취영위남군, 초왕주.  주군래.  왕여초왕회양릉.  백기위무안군. )


['소양왕' 28년,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과 "등"을 빼앗고 죄인들을 사면하여 
그곳에 살게 하였다.

'소양왕' 29년,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영"을 빼앗아 "남군"이라고 하자, 초왕은 달아났다.   

주나라 군주가 왔다. 진왕은 초왕과 "양릉"에서 회맹하였다. '백기'가 무안군에 봉해져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

 

三十年, 蜀守若伐楚, 取巫郡, 及江南為黔中郡.  

三十一年, 白起伐魏, 取兩城.  楚人反我江南.

三十二年, 相穰侯攻魏, 至大梁, 破暴鳶, 斬首四萬, 鳶走, 魏入三縣請和.

三十三年, 客卿胡陽攻魏卷· 蔡陽· 長社, 取之.  擊芒卯華陽, 破之, 斬首十五萬.  魏入南陽以和.
(삼십년, 촉수약벌초, 취무군, 급강남위검중군.  삼십일년, 백기벌위, 취양성.  초인반아강남.

삼십이년, 상양후공위, 지대량, 파포연, 참수사만, 연주, 위입삼현청화.

삼십삼년, 객경호양공위권· 채양· 장사, 취지.  격망묘화양, 파지, 참수십오만.  위입남양이화. )

 

['소양왕' 30년, 촉군 태수 '장약'이 초나라를 정벌하여 "무군"과 "강남"을 빼앗아 "검중군"을 설치하였다. 

'소양왕' 31년, '백기'가 위나라를 정벌하여 두개 성을 빼앗았다. 초나라가 "강남"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소양왕' 32년, 승상 양후 '위염'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대량"에 이르러, '포연'의 군대를 무찌르고  

4만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포연'은 달아나고, 위나라는 3개 현을 헌납하고 강화를 요청해 왔다.

'소양왕' 33년, 조, 위나라 연합군이 한나라를 공격하자, '백기'와 객경 '호양'을 파견해 한나라를 구원하여

위나라 장수 '망묘'가 이끄는 군대를 "화양"에서 크게 무찌르고 15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위나라의 "권", "채양", "장사"와 조나라의 "관진"을 빼앗았다. 
그 여세를 몰아 위나라 도성 "대량"을 포위하자, 위나라는 "남양"을 헌납하고 강화를 요청하였다. ]
 

三十四年, 秦與魏· 韓上庸地為一郡, 南陽免臣遷居之. 

三十五年, 佐韓· 魏· 楚伐燕.  初置南陽郡.  

三十六年, 客卿灶(竈)攻齊, 取剛· 壽, 予穰侯.  

三十八年, 中更胡陽攻趙閼與, 不能取.
(삼십사년, 진여위· 한상용지위일군, 남양면신천거지.  
 삼십오년, 좌한· 위· 초벌연.  초치남양군. 

삼십육년, 객경조공제, 취강· 수, 여양후.  삼십팔년, 중경호양공조알여, 불능취. )

['소양왕' 34년, 진나라는 위· 한나라의 "상용" 땅을 한 개 군으로 만들어 "남양"의 포로들을 사면하여 

그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소양왕' 35년, 한· 위· 초나라가 서로 공조하여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진나라는 처음으로 "남양군"을 설치하였다.
'소양왕' 36년, 객경 '조'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 "수"를 빼앗아 '양후'에게 바쳤다. 
 

'소양왕' 38년, 장수 '호양'을 파견해 한의 "상당"을 지나 조나라의 "알여"를 공격하였으나,  

조나라 장군 '조사'의 용의주도한 작전으로 인해 빼앗지 못하였다.

四十年, 悼太子死魏, 歸葬芷陽.  四十一年夏, 攻魏, 取邢丘· 懷.

四十二年, 安國君為太子.  十月, 宣太后薨, 葬芷陽酈山.  九月, 穰侯出之陶.    

四十三年, 武安君白起攻韓, 拔九城, 斬首五萬.
(
사십년, 도태자사위, 귀장지양.  사십일년하, 공위, 취형구· 회.

사십이년, 안국군위태자.  시월, 선태후훙, 장지양여산.  구월, 양후출지도.   

사십삼년, 무안군백기공한발구성, 참수오만. )

['소양왕' 40년, 도태자가 위나라에서 죽자, 유해를 진나라로 돌려보내 "지양"에서 장사 지냈다.
'소양왕' 41년 여름, 위나라를 공격하여 "형구"와 "회" 땅을 점령하였다.

'소양왕' 42년,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다.  10월에 '선태후'가 죽자, "지양" 여산에 장사 지냈다.   

9월에 '양후'는 봉지인 "도읍"으로 떠났다.
'소양왕' 43년, 무안군 '백기'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9개 성을 빼앗고 5만 명의 목을 베었다. ]
 

四十四年, 攻韓南陽, 取之.  

四十五年, 五大夫賁攻韓, 取十城.  葉陽君悝出之國, 未至而死.

四十七年, 秦攻韓上黨, 上黨降趙, 秦因攻趙, 趙發兵擊秦, 相距.   

秦使武安君白起擊, 大破趙於長平, 四十餘萬盡殺之.
(사십사년, 공한남양, 취지.  사십오년, 오대부분공한, 취십성.  섭양군회출지국, 미지이사.

사십칠년, 진공한상당, 상당항조, 진인공조, 조발병격진, 상거.   

진사무안군백기격, 대파조어장평, 사십여만진살지. )

['소양왕' 44년, 한나라의 "남양"을 공격하여 이곳을 점령하였다.
'소양왕' 45년, 오대부 '분'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10개 성을 빼앗았다.   

섭양군 '회'는 도읍을 떠나 봉지에 미처 도달하기 전에 죽었다.

'소양왕' 45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을 공격하자, "상당" 군수 '풍정'은 조나라에 항복해 귀순하였고,

이로인해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조나라 장수 '염파'는 군대를 일으켜 군사를 "장평"에 주둔시키고

진나라의 공격을 지구전을 펴서 서로 대치하며 저지하였다.   

진나라는 무안군 '백기'로 하여금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마침내 양군이 "장평"에서 교전하여 조군을 대파하고,

조나라 포로 40만 명을 하룻밤 사이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四十八年十月, 韓獻垣雍.  秦軍分為三軍, 武安君歸.  王龁將伐趙皮牢, 拔之.   

司馬梗北定太原, 盡有韓上黨.  正月, 兵罷, 復守上黨.  其十月, 五大夫陵攻趙邯鄲.

四十九年正月, 益發卒佐陵. 陵戰不善免, 王龁代將. 其十月, 將軍張唐攻魏, 為蔡尉捐弗守, 還斬之.
(사십팔년시월, 한헌원옹.  진군분위삼군.  무안군귀.  왕흘장벌조피뢰, 발지.   

사마경북정태원, 진유한상당.  정월, 병파, 복수상당.  기시월, 오대부릉공조한단.

사십구년정월, 익발졸좌능.  능전불선, 면, 왕흘대장.  기시월, 장군장당공위, 위채위연불수, 환참지. )

['소양왕' 48년 10월, 한나라는 "원옹"을 진나라에 헌납하였다.  진나라는 군대를 삼군으로 나누고, 

승상 '범수'는 '백기'에게 귀환토록 하였다.
진나라는 '왕흘'을 좌서장으로 임명하여 조나라의 "피뢰"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사마경'이 조나라 북쪽 "태원"을 평정하고 한나라의 "상당"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정월, 전쟁을 중지하고 병력을 보충하여 "상당"을 수비하였다.  
 

10월에 오대부 '왕릉'이 조나라 도성 "한단"을 공격하였다.

'소양왕' 49년 정월, 병력을 증원하여 오대부 '왕릉'을 도왔다.   

그러나 '왕릉'이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면직시키고, 대신 '왕흘'에게 "한단"을 공격하게 하였다.
10월, 장군 '장당'이 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채위'가 수비를 잘못하여 포기하고 돌아오자 참수하였다. ]
 

五十年十月, 武安君白起有罪, 為士伍, 遷陰密.  張唐攻鄭, 拔之.   

十二月, 益發卒軍汾城旁.  武安君白起有罪, 死.  龁攻邯鄲, 不拔, 去, 還奔汾軍.

二月餘攻晉軍, 斬首六千, 晉楚流死河二萬人. 攻汾城, 即從唐拔寧新中, 寧新中更名安陽. 初作河橋.
(오십년시월, 무안군백기유죄, 위사오, 천음밀.  장당공정, 발지.  
 

십이월, 익발졸군분성방.  무안군백기유죄, 사.  흘공한단, 불발, 거, 환분분군. 

이월여공진군, 참수육천, 진초류사하이만인.  공분성, 즉종당발영신중, 영신중경명안양.  초작하교.)


['소양왕' 50년 10월, 무안군 '백기'는 조나라 도성 "한단"을 포위했다가 실패하여 그 죄를 물어 

대량조의 직책에서 사오(일반 사병)로 강등되어 "음밀"로 보내졌다.
'장당'이 정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12월, 진나라는 군사를 증원하여 "분성" 주변에 진을 쳤다.  
진'소양왕'은 '백기'의 죄를 물어 사자를 보내 자결을 명하자, 
 

'백기'는 '내가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는가 ? '라고 하며 자결하였다. 
'왕흘'이 "한단"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군대를 철수하여 "분성"으로 돌아왔다.

진(秦)나라는 두달 동안 진(晉)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6천여 명의 목을 베자, 진, 초나라 병사 2만여 구의 시체가

황하에 떠다녔다.  "분성"을 공격하고 바로 '장당'을 좇아 "영신중"을 점령하여

"영신중"의 지명을 "안양"으로 바꾸었다.  처음으로 황하에 다리를 만들었다. ]  

五十一年, 將軍摎攻韓, 取陽城· 負黍, 斬首四萬.  攻趙, 取二十餘縣, 首虜九萬.   

西周君背秦, 與諸侯約從, 將天下銳兵出伊闕攻秦, 令秦毋得通陽城.  於是秦使將軍摎攻西周.

西周君走來自歸, 頓首受罪, 盡獻其邑三十六城, 口三萬.  秦王受獻, 歸其君於周.

(오십일년, 장군규공한, 취양성· 부서, 참수사만.  공조, 취이십여현, 수로구만.   

서주군배진, 여제후약종, 장천하예병출이궐공진, 령진무득통양성.  어시진사장군규공서주.

서주군주래자귀, 돈수수죄, 진헌기읍삼십육성, 구삼만.  진왕수헌, 귀기군어주. )


['소양왕' 51년, 장군 '규'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양성"과 "부서"를 빼앗고, 
 

한군 4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조나라를 공격하여 20여개 현을 빼앗고, 적장과 포로 9만 명을 잡았다.   

서주의 '난왕'이 진나라에 등을 돌려 제후들과 맹약을 맺고, 

천하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이궐"을 나와 진나라를 공격하고, 진나라가 "양성"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령을 내렸다.

그러자 진나라는 장군 '규'로 하여금 서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서주의 '난왕'은 몸소 달려와 진나라에 의탁하며, 머리를 조아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서주의 36개 성과 백성 3만을 진나라에 헌납하였다.  
 

진'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서주의 '난왕'을 서주로 돌려 보냈다. ]  

五十二年, 周民東亡, 其器九鼎入秦.  周初亡.  

五十三年, 天下來賓.  魏后, 秦使摎伐魏, 取吳城.  韓王入朝, 魏委國聽令.  

五十四年, 王郊見上帝於雍.
(오십이년, 주민동망, 기기구정입진.  주초망.  오십삼년, 천하내빈.  위후, 진사규벌위, 취오성.  
 

한왕입조, 위위국청령.  오십사년, 왕교견상제어옹. )

['소양왕' 52년, 주나라 백성들은 동쪽으로 도망쳤고, 주왕실의 보기인 구정이 진나라 수중으로 들어왔다. 

주나라는 처음으로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소양왕' 53년, 천하가 모두 진나라에 복종하였다.  위나라가 마지막 까지 버티자, 
 

장군 '규'로 하여금 정벌하게 하여 "오성"을 빼앗았다.
한나라 '환혜왕'이 진왕을 조현하였으며, 위나라도 진나라에 귀복하여 명을 따르기로 하였다.
'소양왕' 54년, '소양왕'이 "옹성"의 외곽지역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
 

五十六年秋, 昭襄王卒, 子孝文王立.  尊唐八子為唐太后, 而合其葬於先王.   

韓王衰绖入弔祠, 諸侯皆使其將相來弔祠, 視喪事.  
(오십육년추, 소양왕졸, 자효문왕립.  존당팔자위당태후, 이합기장어선왕.  
 

한왕최질입조사, 제후개사기장상래조사, 시상사. )


['소양왕' 56년(BC 250) 가을, '소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니, 이가 '효문왕'이다. 
'효문왕'은 생모 '당팔자'을 높여 당태후로 추존하고, 선왕 '소양왕'과 합장하였다.
한나라 '환혜왕'이 상옷을 입고 머리에 수질을 두르고 조문을 왔고, 
 

모든 제후들도 자국의 장군과 재상으로 하여금 조문에 참석하여 상례를 보게 하였다. ] 

孝文王元年, 赦罪人, 修先王功臣, 褒厚親戚, 弛苑囿.   

孝文王除喪, 十月己亥即位, 三日辛醜卒, 子莊襄王立.
(
효문왕원년, 사죄인, 수선왕공신, 포후친척, 이원유.  
 

효문왕제상, 시월기해즉위, 삼일신축졸, 자장양왕립. ) 


['효문왕' 원년,  죄인들을 사면하고, 선왕때 나라에 공로가 있는 신하들을 포상하였고, 
 

친척들은 두터이 기리고, 궁궐 안에 있는 동산을 없애 버렸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기를 마치고, 10월 기해일에 즉위하였으나, 
 

삼일 후인 신축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장양왕'이 즉위하였다. ]  

莊襄王元年, 大赦罪人, 修先王功臣, 施德厚骨肉而布惠於民.   

東周君與諸侯謀秦, 秦使相國呂不韋誅之, 盡入其國.  秦不絕其祀, 以陽人地賜周君, 奉其祭祀. 

使蒙驁伐韓, 韓獻成皋· 鞏.  秦界至大梁, 初置三川郡.
(장양왕원년, 대사죄인, 수선왕공신, 시덕후골육이포혜어민.  
 

동주군여제후모진, 진사상국여불위주지, 진입기국. 진불절기사, 이양인지사주군, 봉기제사. 

사몽오벌한, 한언성고· 공.  진계지대량, 초치삼천군.)


['장양왕' 원년, 많은 죄인들을 사면하고, 선왕때 나라에 공로가 있는 신하들을 포상하였으며, 
 

덕을 베풀어 친족들을 두터이 예우하였고 백성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
동주의 군주가 제후들과 합종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도모하자, 
 

진나라는 상국 '여불위'로 하여금 동주의 군주를 죽이고, 그 나라를 모두 진나라에 병합하였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양인" 지역을 주나라 군주에게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몽오'로 하여금 한나라를 정벌하게 하자, 한나라는 "성고"와 "공현"을 헌납하였다.  
 

진나라의 경계가 "대량"에 까지 이르자, 처음으로 "삼천군"을 설치하였다. ]  

二年, 使蒙驁攻趙, 定太原.   

三年, 蒙驁攻魏高都· 汲, 拔之.  攻趙榆次· 新城· 狼孟, 取三十七城.  四月日食. 
(이년, 사몽오공조, 정태원.  
 

삼년, 몽오공위고도· 급, 발지.  공조유차· 신성· 낭맹, 취삼십칠성.  사월일식. )

['장양왕' 2년, '몽오'로 하여금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태원" 일대를 평정하였다.
'장양왕' 3년,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고도"와 "급"을 점령하였다. 

조나라를 공격하여  "유차", "신성", "낭맹"과 37개의 성을 빼앗았다.  4월에 일식이 나타났다.]  

四年, 王龁攻上黨.  初置太原郡.  魏將無忌率五國兵擊秦, 秦卻於河外.  蒙驁敗, 解而去.   

五月丙午, 莊襄王卒, 子政立, 是為秦始皇帝.
(사년, 왕흘공상당.  초치태원군.  위장무기솔오국병격진, 진각어하외.  몽오패, 해이거.  
 

오월병오, 장양왕졸, 자정립, 시위진시황제. )


['장양왕' 4년, '왕흘'이 "상당"을 공격하였다.  처음으로 "태원군"을 설치하였다.  
위나라 장수 신릉군 '무기'가 위, 조, 초, 한, 연 5국의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는 "하외"로 퇴각하였다. 연합군은 '몽오'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함곡관" 까지 진군을  몰아냈다. 

5월 병오일,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정'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진시황제'이다. ] 

秦王政立二十六年, 初并天下為三十六郡, 號為始皇帝.   

始皇帝五十一年而崩, 子胡亥立, 是為二世皇帝.

三年, 諸侯并起叛秦, 趙高殺二世, 立子嬰.  子嬰立月餘, 諸侯誅之, 遂滅秦.  其語在始皇本紀中.
(진왕정립이십육년, 초병천하위삼십육군, 호위시황제. 

시황제오십일년이붕, 다호해립, 시위이세황제.

이세황제 삼년, 제후병기반진, 조고살이세, 입자영.  자영입월여, 수멸진.  기어재시황본기중. )

[진왕 '정'은 즉위한지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36군으로 합병하고 시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시황제가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호해'가 즉위하였으니 이가 바로 이세황제이다.

이세황제 3년,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환관 '조고'는 이세황제를 살해하고,  

시황제의 장남 '부소'의 아들 '자영'을 즉위시켰다. '자영'이 즉위한지 40여일 만에 제후들에게 죽음을 당하므로써

마침내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이 이야기는 《시황본기》 가운데 있다.] 


   

太史公曰:秦之先為嬴姓.  其後分封, 以國為姓, 有徐氏· 郯氏· 莒氏· 終黎氏· 運奄氏· 菟裘氏·  

將梁氏· 黃氏· 江氏· 修魚氏· 白冥氏· 蜚廉氏· 秦氏.  然秦以其先造父封趙城, 為趙氏.
(태사공왈 : 진지선위영성.  기후분봉, 이국위성, 유서씨· 담씨· 거씨· 종려씨· 운엄씨· 도구씨·

장량씨· 황씨· 강씨· 수어씨· 백명씨· 비렴씨· 진씨.  연진이기선조보봉조성, 위조씨. )


[태사공이 말하기를 : 진나라 조상의 성은 영씨였다.  그 후손들이 봉지를 나누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성씨로 만들어, '서씨', '담씨', '거씨', '종려씨', '운엄씨', '도구씨', '장량씨',

'황씨', '강씨', '수어씨', '백명씨', '비렴씨', '진씨'가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조상은 옛날에 말을 잘 몰던 '조보'라는 사람으로 주(周)'목왕'에게 팔준마를 바쳐

총애를 받아 "조성"에 봉지를 하사 받고 조씨가 되었다.] 

 


   ※ 진(秦)의 역대 왕


   비자(非子) (기원전 900년—기원전 846년)
   진공백(秦公伯) (기원전 846년—기원전 844년)
   진중(秦仲) (기원전 845년—기원전 822년)
   장공(莊公) (기원전 821년-기원전 778년)
   양공(襄公) (기원전 777년-기원전 766년)
   문공(文公) (기원전 765년-기원전 716년)
   정공(静公) (기원전 716년-기원전 716년)
   헌공(獻公) (기원전 715년-기원전 704년)
   출자(出子) (기원전 703년-기원전 698년)
   무공(武公) (기원전 697년-기원전 678년)
   덕공(德公) (기원전 677년-기원전 676년)
   선공(宣公) (기원전 675년-기원전 664년)
   성공(成公) (기원전 663년-기원전 660년)
   목공(穆公) (기원전 659년-기원전 621년)
   강공(康公) (기원전 620년-기원전 609년)
   공공(共公) (기원전 608년-기원전 604년)
   환공(桓公) (기원전 603년-기원전 577년)
   경공(景公) (기원전 576년-기원전 537년)
   애공(哀公) (기원전 536년-기원전 501년)
   이공(夷公) (기원전 501년-기원전 500년)
   혜공(惠公) (기원전 500년-기원전 491년)
   도공(悼公) (기원전 490년-기원전 477년)
   여공공(厉共公) (기원전 476년-기원전 443년)
   조공(躁公) (기원전 442년-기원전 429년)
   회공(懷公) (기원전 428년-기원전 425년)
   영공(靈公) (기원전 424년-기원전 415년)

   전국시대
   간공(簡公) (기원전 414년-기원전 400년)
   혜공(惠公) (기원전 399년-기원전 387년)
   출공(出公) (기원전 386년-기원전 385년)
   헌공(獻公) (기원전 384년-기원전 362년)
   효공(孝公) (기원전 361년-기원전 338년)
   혜문왕(惠文王) (기원전 337년-기원전 311년)
   무왕(武王) (기원전 310년-기원전 307년)
   소양왕(昭襄王) (기원전 306년-기원전 251년)
   효문왕(孝文王) (기원전 250년-기원전 250년)
   장양왕(莊襄王) (기원전 249년-기원전 247년)
   시황제영정(始皇帝嬴政) (기원전 246년-기원전 222년)
 

   천하통일 후
   시황제영정(始皇帝嬴政) (기원전 221년-기원전 210년)
   이세황제영호해(二世皇帝嬴胡亥) (기원전 209년-기원전 207년)
   삼세황제영자영(三世皇帝嬴子嬰) (기원전 206년)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