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8. 宋微子世家

第 八. 宋微子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9. 16:17

           史記 世家

 

     第 八.  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微子開者,殷帝乙之首子而帝紂之庶兄也.  紂既立,不明,淫亂於政,微子數諫,紂不聽.

及祖伊以周西伯昌之修德,滅黎國,懼禍至,以告紂.

紂曰:「我生不有命在天乎? 是何能為!」 於是微子度紂終不可諫,欲死之.

[미자(微子) 개(開)는 은(殷)나라의 왕이었던 제을(帝乙)의 큰아들이며, 주왕(紂王)의 배다른 형(庶兄)다.

주왕이 즉위한 후, 모든 것이 밝지 못하고 정사(政事) 또한 음란해, 미자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간언했으나,

주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주(周)나라의 서백창(西伯昌)이 덕치(德治)를 수행(修行)해 기나라를 멸하자,

조이(祖伊)는 그 화가 장차 미칠 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주왕에게 고했다.
주왕은 말하기를 “내가 태어난 것은 곧 천명(天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소? 

그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미자는 주왕이 끝내 깨우칠 수 없다고 여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及去,未能自決,乃問於太師、少師曰:「殷不有治政,不治四方. 我祖遂陳於上,

紂沈湎於酒,婦人是用,亂敗湯德於下. 殷既小大好草竊姦宄,卿士師師非度,皆有罪辜,

乃無維獲,小民乃并興,相為敵讎. 今殷其典喪!若涉水無津涯. 殷遂喪,越至于今.」

曰:「太師,少師,我其發出往?吾家保于喪?今女無故告予,顛躋,如之何其?」

太師若曰:「王子,天篤下菑亡殷國,乃毋畏畏,不用老長. 今殷民乃陋淫神祇之祀.

今誠得治國,國治身死不恨. 為死,終不得治,不如去.」遂亡.

[그러나 수도를 떠난 후에 혼자서 결정할 수가 없어 이에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에게 물어 말하기를 :

“ 은나라는 밝은 정치를 가지지 못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있소.

우리 시조께서 세상에 여러 공업(功業)을 이루어 놓으셨는데,

주왕은 술에 푹 빠져 아녀자들만을 가까이하다가 결국은 탕(湯)의 덕정(德政)을 어지럽히고 또한 무너뜨렸소.

은나라 왕실의 사람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초야에서 도둑질하기를 좋아하며

또한 내란과 전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오. 조정대신들은 서로 본받아 법도(法度)가 없으며,

죄를 지어도 언제나 잡히는 법이 없소. 이에 일반 백성 또한 더불어 무리지어 서로 적이 되고 원수가 되어 있소.
지금 은나라의 전장(典章)제도는 모두 상실되려 하오! 마치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나루터와 물가가 없는 것과 같소.

은나라가 마침내 망하는 때가 바로 지금인 듯하오.”라고 하고는,

다시 말하기를 : “태사 ! 소사 ! 내가 달리 나설 길이 있겠소 ? 우리나라가 파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소 ?
지금 그대들이 나를 이끌어 줄 좋은 생각을 가지지 못해 결국 멸망의 길로 떨어져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소?”라 하자.

태사가 말하기를 : “ 왕자님, 하늘이 엄중히 재앙을 내려 은나라를 멸하고자 해도,

주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더군다나 원로들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현재 은나라의 백성들조차 천지신명에 대한 제사를 경시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지금 진실로 나라를 다스려,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나,
만약 죽어서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떠나는 편이 나을 겁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미자는 떠나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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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는 주왕의 친척이다.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기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 “ 그가 이미 상아 젓가락을 사용한 이상, 틀림없이 옥잔을 사용할 것이고,

옥잔을 사용하면 곧 먼 지방의 진귀하고 기이한 기물을 사용하려 들 것이다.

장차 수레와 말 그리고 궁실의 사치스러움이 이것으로 시작해 진정시킬 방법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주왕이 황음(荒淫)하고 방종해지자, 이에 기자가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 가히 떠나는 편이 낫습니다.”라고 하자,

기자가 다시 말하기를 “신하된 자가 간했으나 듣지 않는다고 해 떠나버리면, 이것은 군주의 과실을

부추겨 주는 꼴이 되고, 나 자신도 백성들의 기쁨을 뺏는 것이 되니,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 그는 풀려난 후 마침내 숨어 살면서

거문고를 두드리며 스스로 슬픔에 잠기니, 그것을 전해 “기자조(箕子操)”라고 불렀다.]

 

王子比干者,亦紂之親戚也.  見箕子諫不聽而為奴, 則曰:「君有過而不以死爭, 則百姓何辜!」

乃直言諫紂.  紂怒曰:「吾聞聖人之心有七竅,信有諸乎?」乃遂殺王子比干,刳視其心. 

微子曰:「父子有骨肉,而臣主以義屬.  故父有過,子三諫不聽,則隨而號之;

人臣三諫不聽,則其義可以去矣.」 於是太師、少師乃勸微子去,遂行.

[왕자 비간도 주왕의 친척이다. 기자가 주왕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자 물러나 결국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

“군주가 과실이 있어도 사력을 다해서 간쟁(諫爭)하지 않는다면, 백성들만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고는,

직접 주왕에게 달려가 간하니, 주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성인의 마음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정말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며, 왕자 비간을 죽이고는 가슴을 열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미자가 말하기를 : “부자간에는 골육(骨肉)의 정이 있고, 군신 간에는 도의(道義)로 맺어져 있다. 그러므로 부친이

과실이 있으면, 자식된 자가 여러 차례 간할 것이나,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그를 따라다니며 통곡하면 되지만, 

신하된 자가 여러 차례 간해도 군주가 듣지 않는다면 그 도의에 따라 떠나는 편이 낫겠지.”라고 했다.

그러자 태사, 소사들이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니, 미자는 마침내 떠나 버렸다.]

周武王伐紂克殷,微子乃持其祭器造於軍門,肉袒面縛,左牽羊,右把茅,膝行而前以告.

於是武王乃釋微子,復其位如故.  武王封紂子武庚祿父以續殷祀,使管叔、蔡叔傅相之. 

武王既克殷,訪問箕子.  武王曰:「於乎!維天陰定下民,相和其居,我不知其常倫所序.」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주(紂)왕을 정벌해 은왕조를 무너뜨리자, 미자는 종묘 안의 제기(祭器)를 가지고

무왕의 영문(營門)으로 가서 상의를 벗고는 손을 등 뒤로 묶게 한 후, 왼쪽으로는 사람을 시켜 양을 끌게 하고,

오른쪽으로는 사람을 시켜 띠를 쥐게 하고는 무릎을 꿇고 앞으로 나아가, 무왕에게 고했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석방하고 아울러 미자의 작위를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로 하여금 은 왕조의 제사를 계속하게 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했다. 무왕이 은 왕조를 멸망시킨 이후, 기자를 방문했다.
무왕이 이르기를 “아! 하늘은 묵묵히 아래ㅜ세상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또한 서로 화목하게 하는데,
과인은 오히려 하늘이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그 상도(常道)의 순서조차도 모르고 있었소.”라고 하였다.]

 

箕子對曰:「在昔鯀陻鴻水,汨陳其五行,帝乃震怒,不從鴻範九等,常倫所斁.

鯀則殛死,禹乃嗣興.  天乃錫禹鴻範九等,常倫所序.

初一曰五行;二曰五事;三曰八政;四曰五紀;五曰皇極;六曰三德;七曰稽疑;

八曰庶徵;九曰嚮用五福, 畏用六極.

[기자가 대답하기를 : "예전에 곤(鯀)이 홍수를 막으면서 5행(五行)의 질서를 어지럽히니,

하늘이 이에 크게 노하여 큰 법칙 아홉 가지를 주지 않자, 상도가 이로 인해서 깨져버렸습니다.

곤이 벌을 받아 죽자, 우(禹)가 그의 일을 이어받아 다시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하늘은 큰 법칙 아홉 가지를 우에게 주니, 상도가 다시 순서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첫째가 5행(五行)이고, 둘째가 5사(五事)이고, 셋째가 8정(八政)이고, 넷째가 5기(五紀)이고,

다섯째가 황극(皇極)이고, 여섯째가 3덕(三德)이고, 일곱째가 계의(稽疑)이고, 여덟째가 서징(庶徵)이고,

아홉째가 5복(五福)을 누리는 것과 육극(六極)을 피하는 것입니다.]

 

五行:一曰水,二曰火,三曰木,四曰金,五曰土。水曰潤下,火曰炎上,木曰曲直,

金曰從革,土曰稼穡.  潤下作鹹,炎上作苦,曲直作酸,從革作辛,稼穡作甘.

[5행이란 : 첫째가 수(水), 둘째가 화(火), 셋째가 목(木), 넷째가 금(金), 다섯째가 토(土)입니다.

물은 만물을 기름지게 하며 또한 아래로 흐르고, 불은 불꽃을 왕성하게 하며 또한 위로 솟고,

나무는 굽기도 하고 또한 곧기도 하며, 쇠는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고, 흙은 씨를 뿌리고 수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이 아래로 흘러 기름지게 된 것은 짜고, 불꽃이 위로 솟아 왕성해진 것은 쓰고,

나무가 굽기도 하고 곧기도 한 것은 시고, 쇠가 마음대로 변형된 것은 맵고,

흙에서 씨를 뿌리고 수확한 것은 감미로운 법입니다.]

五事:一曰貌,二曰言,三曰視,四曰聽,五曰思.

貌曰恭,言曰從,視曰明,聽曰聰,思曰睿.

恭作肅,從作治,明作智,聰作謀,睿作聖.

[5사란 : 첫째가 모(貌), 둘째가 언(言), 셋째가 시(視), 넷째가 청(聽), 다섯째가 사고(思考)입니다.
몸가짐은 공손해야 하고, 말씨는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관찰력은 명확해야 하고, 청취력은 분명해야 하고,

사고력은 예리해야 합니다. 몸가짐이 공손하면 마음은 엄숙해지고, 

말씨가 따를 수 있도록 되면 잘 다스릴 수가 있고, 관찰력이 명확하면 지혜롭게 되고, 

청취력이 분명하면 계책이 따르기 마련이고, 사고력이 예리하면 성스럽게 됩니다.]

 

八政:一曰食,二曰貨,三曰祀,四曰司空,五曰司徒,六曰司寇,七曰賓,八曰師.

[8정이란 : 첫째가 식(食)이고, 둘째가 화(貨)이고, 셋째가 사(祀)이고, 넷째가 사공(司空)이고,

다섯째가 사도(司徒)이고, 여섯째가 사구(司寇)이고, 일곱째가 빈(賓)이고, 여덟째가 사(師)입니다.

 

五紀:一曰歲,二曰月,三曰日,四曰星辰,五曰歷數.

[5기란 : 첫째가 세(歲)이고, 둘째 월(月)이고, 셋째 일(日)이고, 넷째가 성신(星辰)이고, 다섯째가 역수(曆數)입니다.

 

皇極:皇建其有極,斂時五福,用傅錫其庶民,維時其庶民于女極,錫女保極.

凡厥庶民,毋有淫朋,人毋有比德,維皇作極.  凡厥庶民,有猷有為有守, 女則念之.

不協于極, 不離于咎, 皇則受之.  而安而色, 曰予所好德, 女則錫之福.

時人斯其維皇之極. 毋侮寡而畏高明. 人之有能有為, 使羞其行, 而國其昌.  凡厥正人, 既富方穀.

女不能使有好于而家, 時人斯其辜.  于其毋好, 女雖錫之福, 其作女用咎.  毋偏毋頗, 遵王之義.

毋有作好,遵王之道.  毋有作惡,遵王之路.  毋偏毋黨,王道蕩蕩.  毋黨毋偏,王道平平.

毋反毋側,王道正直.  會其有極,歸其有極.  曰王極之傅言,是夷是訓,于帝其順.

凡厥庶民,極之傅言,是順是行,以近天子之光.  曰天子作民父母,以為天下王.

[황극이란 : 군주가 정교(正敎)를 시행하기 위해 세운 준칙을 말하는데, 때가 되어 5복의 도를 구해서 백성들에게

시행하면, 백성들은 왕의 준칙을 따르게 되고, 또한 왕께서는 준칙을 어떻게 유지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왕의 백성들은 사악한 붕당(朋黨)의 풍조를 가지지 않게 되며,

또한 굴종하고 결탁하는 행위도 하지 않게 되어 모두 왕께서 세운 그 준칙을 지키게 됩니다.
무릇 그 백성들은 계획을 가지고 행동하며 아울러 몸가짐도 갖추니, 왕께서는 응당 그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준칙을 지키지 않았더라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왕께서는 응당 그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왕께서는 환한 얼굴과 기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고, 본인 스스로 미덕을 애호한다고 하는 자에게

작록(爵祿)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왕께서 세운 준칙을 지킬 수 있습니다.
홀아비와 과부와 같은 약자들을 모욕하지 말아야 하고, 권세가와 같은 고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이 있고 아울러 실천력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재능을 발휘하게 한다면 국가는 창성할 것입니다.
무릇 정직한 사람에게는 부를 주고 선한 도로써 잘 접대해야 합니다. 만약 왕께서 정직한 사람들을 국가에

잘 이용하지 못하면, 그들은 죄를 범한 것처럼 가장해 왕을 떠날 것입니다.

또한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왕께서 작록을 하사하신다면 왕의 행위를 죄악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사적인 것에 치우치지도 말고, 간사한 것에 기울지도 말며, 오직 성왕의 정의만을 준수해야 합니다.
아울러 편애하지도 말고 오직 성왕의 정도(正道)만을 준수해야 합니다.

악에 치우치지 말고 오직 성왕의 정도만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적인 것에 기울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성왕의 길은 넓어집니다. 사적인 것에 기울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성왕의 길은 평탄해집니다. 배반하지 말며 간사한 것으로도 기울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성왕의 길은 정직해집니다. 군주된 자는 준칙을 지키는 자들을 모아야만 하고,

신하된 자는 준칙을 만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군주는 준칙에 따라 행하고,

또한 신하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전하게 해, 이로써 백성들을 교육하면 곧 천심(天心)을 따르는 것입니다.

무릇 백성들은 준칙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군주가 그것을 받아들여 실행하면 곧 천자가 되어

그 광휘(光輝)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천자는 백성들의 부모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 천하 백성들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三德:一曰正直,二曰剛克,三曰柔克.

平康正直,彊不友剛克,內友柔克,沈漸剛克,高明柔克.  維辟作福,維辟作威,維辟玉食.

臣無有作福作威玉食.  臣有作福作威玉食,其害于而家,凶于而國,人用側頗辟,民用僭忒.

[3덕이란 : 첫째가 정직이고, 둘째가 강극(剛克)이고, 셋째가 유극(柔克)입니다.

천하가 평안하면 정직으로 가르치고, 천하가 강포(强暴)해 불순(不順)하면 강(剛)으로써 다스리고,

천하가 화순(和順)하면 유(柔)로써 다스립니다.

깊이 숨겨진 음모는 강으로써 극복하고, 고명한 군자들은 유로써 다스립니다.
그리하여 군주는 작록과 포상을 공정하게 내리고, 형벌 또한 공평하게 내리며, 좋은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신하는 작록과 포상을 내리지 않으며, 형벌 또한 내리지 않으며, 좋은 음식을 즐기지 못합니다.

신하가 만약 작록과 포상을 내리고, 형벌 또한 내리며, 좋은 음식도 즐긴다면, 그 해(害)는 집안에 미칠 것이며,

그 흉(凶)은 나라에 미치게 되어, 관리들은 모두 부정을 저지르며, 백성들은 각자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稽疑:擇建立卜筮人.  乃命卜筮,曰雨,曰濟,曰涕,曰霧,曰克,曰貞,曰悔,凡七.

卜五,占之用二,衍貣.

立時人為卜筮,三人占則從二人之言.  女則有大疑,謀及女心,謀及卿士,謀及庶人,謀及卜筮.

女則從,龜從,筮從,卿士從,庶民從,是之謂大同,而身其康彊,而子孫其逢吉.

女則從,龜從,筮從,卿士逆,庶民逆,吉. 

卿士從,龜從,筮從,女則逆,庶民逆,吉.

庶民從,龜從,筮從,女則逆,卿士逆,吉.

女則從,龜從,筮逆,卿士逆,庶民逆,作內吉,作外凶.  龜筮共違于人,用靜吉,用作凶.

[계의란 : 복(卜)과 서(筮)에 정통한 사람을 뽑아 관리로 임용해, 그들에게 복과 서를 행하게 시키는 것입니다.

우선 복을 보면, 어떤 것은 비가 내리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비가 그쳐 구름이 위에 떠 있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뜬 구름이 이어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안개 모양이고,

어떤 것은 음양의 양 기운이 서로 침범하는 모양입니다.

다음으로 서를 보면 내괘(內卦)가 있고 또한 외괘(外卦)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일곱 가지가 됩니다.
이중에서 복점은 다섯 가지이고 서점은 두 가지인데, 이것을 추정하고 또한 변화시켜 길흉 여부를 가리게 됩니다.
귀복(龜卜)과 점괘(占卦)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복서의 관직에 임명되는데,

만약 세 사람이 귀조(龜兆)와 괘상(卦象)을 판단하게 된다면, 즉 의견이 같은 두 사람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에 왕께서 큰 의문이 생기면, 내심 깊이 생각한 뒤 관원들과 의논하고,

그 연후에 백성들과 토론을 벌이고, 마지막으로 다시 귀복과 점괘를 쳐봅니다.

왕께서 찬성하시면, 귀복도 찬성하는 것이고, 점괘도 찬성하는 것이고,

관리들도 찬성하는 것이고, 백성들도 찬성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대동(大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왕 스스로도 강해지고, 자손들 또한 흥성해지는 것이니, 바로 대길(大吉)인 것입니다.

만약 왕께서 찬성하시고, 귀복도 찬성하며, 점괘도 찬성하는데, 관리들이 반대하고,

백성들이 반대해도 길리(吉利)인 것입니다.
관리들이 찬성하고, 귀복도 찬성하며, 점괘도 찬성하는데, 왕께서 반대하시고, 백성들이 반대해도 길리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찬성하고, 귀복도 찬성하며, 점괘도 찬성하는데, 왕께서 반대하시고, 관리들이 반대해도 길리인 것입니다.
만약 왕께서 찬성하시고, 귀복도 찬성하는데, 점괘가 반대하고, 관리들이 반대하며, 백성 또한 반대하면,

안으로는 길리이나, 바깥으로는 흉험(凶險)이 따릅니다. 만약 귀복과 점괘가 모두 사람들의 의견과 상반된다면,

조용히 지낼 때에는 길리이나, 거동만 하면 반드시 흉험이 따르게 됩니다.]

 

庶徵:曰雨,曰陽,曰奧,曰寒,曰風,曰時.  五者來備,各以其序,庶草繁廡.

一極備,凶.  一極亡,凶.

曰休徵:曰肅,時雨若,曰治,時暘若;曰知,時奧若;曰謀,時寒若;曰聖,時風若.

曰咎徵:曰狂, 常雨若;曰僭, 常暘若;曰舒, 常奧若;曰急, 常寒若;曰霧, 常風若.

王眚維歲, 卿士維月, 師尹維日.

歲月日時毋易,百穀用成,治用明,畯民用章,家用平康.

日月歲時既易, 百穀用不成, 治用昏不明, 畯民用微, 家用不寧.  

庶民維星,星有好風,星有好雨.  日月之行,有冬有夏.  月之從星,則以風雨.

[서징이란 : 혹 비가 오고, 혹 맑고, 혹 따뜻하고, 혹 한랭하고, 혹 바람이 부는 그러한 징조를 말하는데,

이 다섯 종류의 기상(氣象)이 모두 구비되고 또한 그 순서에 따라 진행되면, 모든 초목은 어김없이 무성해집니다.

중 어느 한 기상이라도 과다해지면, 곧 흉재(凶災)가 따르고, 아울러 부족해도 역시 흉재가 따릅니다.
아름다운 행위의 징표로 말하자면, 군주의 자태가 경건하고 엄숙하면 빗물이 때맞추어 만물을 기름지게 하고,

군주의 정치가 맑고 밝으면 햇빛이 대지를 비추고, 군주의 두뇌가 밝고 지혜로우면 기후가 때맞추어 따뜻해지고,

천자의 생각이 좋은 모략(謀畧)을 갖추고 있으면 때맞추어 추위가 다가오고, 군주의 정리(情理)가 통달해 있으면

때맞추어 바람이 생깁니다. 추악한 행위의 징표로 말하자면, 군주의 행위가 광망(狂妄)하면 자주 비가 내리고,
천자의 행위가 주제넘으면 자주 가뭄이 생기고, 군주가 향락에 안주하면 자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군주가 행하는 일이 성급하면 자주 추위가 찾아들고, 군주의 마음이 어두우면 자주자주 바람이 몰아칩니다.
군주의 직책은 대단히 중요해 일 년을 위주로 하고, 대신들은 각자 직책이 있어 한 달을 위주로 하고,

여러 백관들은 다시 그 직책을 나누어 하루를 위주로 합니다.
년, 월, 일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백곡이 풍성하게 되고, 정치 또한 밝아지며,

어진 신하들은 그 명성을 드높여 국가는 안녕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년, 월, 일이 어긋나게 움직이면 백곡이 보잘것없이 되고,

정치 또한 어두워지며, 어진 신하들은 숨게 되어 국가는 안녕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백성은 곧 여러 별들과 같습니다. 별들 중 어떤 것은 바람을 좋아하고, 어떤 것은 비가 좋아합니다.
해와 달의 운행에는 겨울이 있고 여름이 있는 것처럼 각각 상규(常規)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달이 별을 만나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게 됩니다.]

 

五福:一曰壽,二曰富,三曰康寧,四曰攸好德,五曰考終命.

[5복이란 : 첫째가 수(壽)이고, 둘째가 부(富)이고, 셋째가 강녕(康寧)이고, 넷째가 유호덕(攸好德)이고,

다섯째가 고종명(考終命)입니다.]

 

六極:一曰凶短折,二曰疾,三曰憂,四曰貧, 五曰惡,六曰弱.」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6극은 첫째가 흉(凶)과 단(短) 그리고 절(折)이고, 둘째가 질(疾)이고, 셋째가 우(憂)이고, 넷째가 빈(貧)이고,

다섯째가 악(惡)이고, 여섯째가 약(弱)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해, 그를 신하의 신분으로 대하지 않았다.]

 

其後箕子朝周,過故殷虛,感宮室毀壞,生禾黍,箕子傷之,欲哭則不可,欲泣為其近婦人,

乃作麥秀之詩以歌詠之.

其詩曰:「麥秀漸漸兮,禾黍油油. 彼狡僮兮,不與我好兮!」所謂狡童者,紂也.

殷民聞之,皆為流涕.  武王崩, 成王少, 周公旦代行政當國.

管、蔡疑之, 乃與武庚作亂, 欲襲成王、周公.

周公既承成王命誅武庚,殺管叔,放蔡叔,乃命微子開代殷後,奉其先祀,作微子之命以申之,

國于宋.  微子故能仁賢,乃代武庚,故殷之餘民甚戴愛之.

[그 이후 기자가 주왕을 배알하기 위해 옛 은나라의 도읍지를 지나가다가,

궁실은 이미 파괴되어 거기에 곡식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슬픈 생각이 들어 소리 내어 울고 싶었으나

망설여지는 바가 있었고, 울먹이자니 아녀자의 꼴이 되는 듯하여, “맥수(麥秀)”라는 시를 지어 그것을 노래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보리는 잘 자라 그 끝이 뾰족하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하구나.

개구쟁이 어린애야! 나하고 사이좋게 지냈더라면.” 소위 개구쟁이 어린애는 바로 상(商)나라의 주왕을 가리킨다.

은나라 백성들이 그것을 듣고는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무왕이 죽고, 성왕(成王)이 아직 어리니, 주공(周公) 단(旦)이 대신해 정사를 처리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공에게 회의를 품고 무경(武庚)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성왕과 주공을 습격하려 했다.
이에 주공은 성왕의 명령을 받들어 무경을 주살하고 관숙을 살해했으며 채숙을 추방했다.

이리하여 미자 개에게 명해 은 왕조의 후사로 대체해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이에 미자는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이 뜻을 널리 알리고는 송(宋)나라를 건국했다.
미자는 인자하고 어질었기 때문에 무경을 대신할 수 있었고, 

은나라의 유민들 또한 그를 대단히 사랑하고 존경했다.]

 

微子開卒,立其弟衍,是為微仲.  微仲卒,子宋公稽立.

宋公稽卒,子丁公申立.  丁公申卒,子湣公共立.  湣公共卒,弟煬公熙立.

煬公即位,湣公子鮒祀弒煬公而自立,曰「我當立」,是為厲公.  厲公卒,子釐公舉立.

[미자 개가 죽고, 그의 동생 연(衍)을 내세웠으니, 그가 바로 미중(微仲)이다.

미중이 죽고 다시 그의 아들 송공(宋公) 계(稽)가 즉위했다.

송공 계가 죽자, 아들인 정공(丁公) 신(申)이 즉위했다.

정공 신이 죽자, 아들인 민공(湣公) 공(共)이 즉위했다.

민공 공이 죽자, 동생인 양공(煬公) 희(熙)가 즉위했다.
양공이 즉위하자, 민공의 아들인 부사(鮒祀)가 양공을 살해하고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면서

말하기를 : “ 내가 마땅히 즉위해야지.”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여공(厲公)이다.

여공이 죽자, 아들인 희공(釐公)이 즉위했다.]

 

釐公十七年,周厲王出奔彘.

二十八年,釐公卒,子惠公覵立.

惠公四年,周宣王即位.

三十年,惠公卒,子哀公立.  哀公元年卒,子戴公立.

戴公二十九年,周幽王為犬戎所殺,秦始列為諸侯.

三十四年, 戴公卒, 子武公司空立.  武公生女為魯惠公夫人, 生魯桓公.

十八年, 武公卒, 子宣公力立.  宣公有太子與夷.

十九年, 宣公病, 讓其弟和, 曰:「父死子繼, 兄死弟及, 天下通義也. 我其立和.」和亦三讓而受之.

宣公卒,弟和立,是為穆公.

[희공 17년, 주여왕(周厲王)이 체(彘) 땅으로 달아났다.
희공 28년, 희공이 죽고 아들인 혜공(惠公) 한(覵)이 즉위했다.

혜공 4년,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30년, 혜공이 죽고 아들인 애공(哀公)이 즉위했다. 애공이 원년에 죽자, 아들인 대공(戴公)이 즉위했다.
대공 29년, 주유왕(周幽王)이 견융(犬戎)에 의해서 피살되었고, 진(秦)나라가 제후의 열(列)에 오르게 되었다.
34년, 대공이 죽자 아들인 무공(武公) 사공(司空)이 즉위했다. 무공이 딸을 낳았는데,

그녀는 노혜공(魯惠公)의 부인이 되었고, 노환공(魯桓公)을 낳았다.
18년, 무공이 죽자 아들인 선공(宣公) 역(力)이 즉위했다.  선공에게는 태자 여이(與夷)가 있었다.
19년, 선공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그의 동생 화(和)에게 양위(讓位)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계위(繼位)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계위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도리이다.

그러므로 과인은 화를 이 나라의 군주로 내세우겠노라”라고 하였다.

화는 여러 번 사양했으나 결국은 물려받았다. 선공이 죽고 동생인 화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목공(穆公)이다.

 

穆公九年, 病, 召大司馬孔父謂曰:「先君宣公捨太子與夷而立我, 我不敢忘.  我死, 必立與夷也.」

孔父曰:「群臣皆願立公子馮.」穆公曰:「毋立馮,吾不可以負宣公.」於是穆公使馮出居于鄭.

八月庚辰, 穆公卒, 兄宣公子與夷立, 是為殤公.

君子聞之, 曰:「宋宣公可謂知人矣, 立其弟以成義, 然卒其子復享之.」

[목공 9년, 병이 중해지자 대사마(大司馬) 공보(孔父)를 불러 말하기를 :

“선군(先君)이신 선공은 태자 여이를 두고도 왕위를 과인에게 양위했으니, 과인은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소.

과인이 죽은 후 반드시 여이를 왕으로 세워야 하오.”라고 했다. 

그러자 공보가 아뢰기를 : “대신들은 모두 공자 풍(馮)을 내세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목공이 말하기를 : “풍을 세워서는 아니 되오. 과인은 선공을 배신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목공은 아들인 풍을 정(鄭)나라로 옮겨가 살게 했다.

8월 경진일(庚辰日)에 목공이 죽자, 형 선공의 아들인 여이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상공(殤公)이다.

군자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길 “송 선공은 가히 지인(知人)이라고 칭할 만하구나.
그의 동생을 군주로 해 도의를 온전히 했고, 또한 그의 아들이 다시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니.”라고 하였다.]

 

殤公元年,衛公子州吁弒其君完自立,欲得諸侯,使告於宋曰:「馮在鄭,必為亂,可與我伐之.」

宋許之,與伐鄭,至東門而還.

二年,鄭伐宋,以報東門之役.  其後諸侯數來侵伐.

九年,大司馬孔父嘉妻好,出,道遇太宰華督,督說,目而觀之.

督利孔父妻,乃使人宣言國中曰:「殤公即位十年耳,而十一戰,民苦不堪,皆孔父為之,

我且殺孔父以寧民.」 是歲,魯弒其君隱公.

十年,華督攻殺孔父,取其妻.  殤公怒,遂弒殤公,而迎穆公子馮於鄭而立之,是為莊公.

[상공 원년, 위(衛)나라의 공자 주우(州吁)가 군주인 완(完)을 시해해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고는,

제후들을 끌어들이려고 사람을 송(宋)나라에 파견해 이르기를 : “ 송나라의 공자 풍이 정나라에 있으니

틀림없이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나와 더불어 그를 토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자,
이에 송나라는 승낙을 하고 주우와 더불어 정나라를 토벌해 동문(東門)까지 이르러서는 돌아왔다.
상공 2년, 정나라가 송나라를 토벌하자 그 보복으로 동문에서 또 한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 이후에 제후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송나라를 침략했다.
상공 9년, 대사마 공보가(孔父嘉)의 처는 용모가 아름다웠다. 그녀가 외출을 했다가,

길에서 태재(太宰) 화독(華督)을 우연히 만났는데, 화독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독은 공보의 처를 탐내어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소문을 퍼뜨리기를 “ 상공이 즉위한 지가 10년이 채 못 되었는데, 11차례의 전쟁을 일으켜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다. 이것은 모두 공보가 조성한 것이니,

나는 그를 죽여서 백성들을 안심시키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노나라는 그들의 군주인 은공(隱公)을 살해했다.
상공 10년, 화독은 공보를 공격해 죽이고 공보의 처를 빼앗았다. 상공이 이에 노하자 화독은 상공마저 살해하고

정나라로 가서 목공의 아들인 풍을 맞아들여 군주로 내세웠으니, 그가 바로 장공(莊公)이다.]

 

莊公元年,華督為相.

九年,執鄭之祭仲,要以立突為鄭君.  祭仲許,竟立突.

十九年,莊公卒,子湣公捷立.

湣公七年,齊桓公即位.

九年,宋水,魯使臧文仲往弔水.  湣公自罪曰:「寡人以不能事鬼神,政不修,故水.」

臧文仲善此言.  此言乃公子子魚教湣公也.

十年夏,宋伐魯,戰於乘丘,魯生虜宋南宮萬.  宋人請萬,萬歸宋.

十一年秋,湣公與南宮萬獵,因博爭行,湣公怒,辱之,曰:「始吾敬若;今若,魯虜也.」

萬有力,病此言,遂以局殺湣公于蒙澤.  大夫仇牧聞之,以兵造公門.  萬搏牧,牧齒著門闔死.

因殺太宰華督,乃更立公子游為君.  諸公子奔蕭,公子御說奔亳.  萬弟南宮牛將兵圍亳.

冬,蕭及宋之諸公子共擊殺南宮牛,弒宋新君游而立湣公弟御說,是為桓公.

[장공 원년, 화독이 국상(國相)이 되었다.

9년, 정나라의 제중(祭仲)을 잡아들이고 돌(突)을 옹립해 정나라의 군주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제중이 승낙하자 마침내 돌을 옹립했다. 19년, 장공이 죽자 아들인 민공(湣公) 첩(捷)이 즉위했다.
민공 7년, 제 환공(齊桓公)이 즉위했다.

9년, 송나라에 수재(水災)가 발생했는데 노나라는 장문중(藏文仲)을 파견해 수재를 위문했다.
민공은 자신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 내가 귀신을 잘 섬기지 못하고, 정치가 또한 밝지 못해서 수재가 발생했도다.”

라고 하자, 장문중이 이 말을 칭찬했다. 이 말은 곧 공자(公子) 자어(子魚)가 민공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10년 여름, 송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 승구에서 전쟁을 치렀는데 노나라는 송나라의 남궁만(南宮萬)을 생포했다.
송나라 사람들이 남궁만을 석방해 줄 것을 간청해서 결국은 남궁만이 송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11년 가을, 민공과 남궁만이 사냥을 나갔는데, 길을 다투다가 남궁만이 싸움을 벌이니 민공이 화를 내며

그를 모욕하면서 말하기를 “ 이전에 과인은 그대를 존경했지만 지금 그대는 노나라의 포로이니라.”라고 했다.
본래 힘이 대단히 세었던 남궁만은 이 말에 반감을 가지고 몽택(蒙澤)에서 바둑판으로 민공을 쳐 죽였다.
대부(大夫) 구목(仇牧)이, 이 사건을 전해 듣고 무기를 들고 민공의 방문에 도달하자,

남궁만이 먼저 구목을 치니 구목은 이가 문짝에 부딪쳐 죽었다.
그리하여 남궁만은 태재 화독을 죽이고 공자 유(游)를 내세워 군주로 삼았다.

몇 명의 공자들은 소(蕭)로 도망했고, 공자 어설(禦說)은 박(亳)으로 도망했다.

남궁만의 동생인 남궁우(南宮牛)는 박을 포위해 공격했다.
겨울, 소 지역의 사람들과 송나라의 도읍에 있던 공자들이 함께 남궁우를 공격해 그를 살해했고,

또한 송나라의 새 군주인 유를 살해하고 민공의 동생인 어설을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宋萬奔陳.  宋人請以賂陳.  陳人使婦人飲之醇酒,以革裹之,歸宋.  宋人醢萬也.

桓公二年,諸侯伐宋,至郊而去.

三年,齊桓公始霸.

二十三年,迎衛公子燬於齊,立之,是為衛文公.  文公女弟為桓公夫人.  秦穆公即位.

三十年,桓公病,太子茲甫讓其庶兄目夷為嗣.  桓公義太子意,竟不聽.

三十一年春,桓公卒,太子茲甫立,是為襄公.

以其庶兄目夷為相。未葬,而齊桓公會諸侯于葵丘,襄公往會.

남궁만은 진(陳)나라로 도망을 갔다. 송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에 뇌물을 보내어 부탁하니,
이에 진나라 사람들은 곧 여자를 보내 좋은 술로써 남궁만을 취하게 했다.

그 연후에 가죽으로 그를 묶어서 송나라로 돌려보냈다. 송나라 사람들은 남궁만을 썰어 염장했다.
환공 2년, 제후들이 송나라를 토벌하려고 수도 근교까지 공격하고는 돌아갔다.

3년, 제환공은 패(覇)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23년, 위(衛)나라 사람들은 제나라로 와서 위나라의 공자인 훼(燬)를 맞이해 위나라 군주로 내세웠으니,

그가 바로 위문공(衛文公)이다. 문공의 여동생이 송환공의 부인이다. 진목공(秦穆公)이 즉위했다.

30년, 환공의 병이 위중해지자, 태자인 자보(玆甫)가 서형인 목이(目夷)로 하여금 군주의 자리를 계승하게 했으나,

이에 환공은 태자의 뜻이 도의에 맞다고는 여겼지만 결국 따르지 않았다.
31년 봄, 환공이 죽자 태자 자보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양공(襄公)이다. 그의 서형 목이를 국상으로 삼았다.
환공이 안장이 채 되기도 전에, 제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과 회합하니, 양공은 곧 나아가 회맹에 참가했다.]

 

襄公七年,宋地茀星如雨,與雨偕下;六鶂退蜚,風疾也.

八年,齊桓公卒,宋欲為盟會.

十二年春, 宋襄公為鹿上之盟, 以求諸侯於楚, 楚人許之. 公子目夷諫曰:「小國爭盟,禍也.」不聽.

秋, 諸侯會宋公盟于盂.  目夷曰:「禍其在此乎?君欲已甚, 何以堪之!」於是楚執宋襄公以伐宋.

冬,會于亳,以釋宋公.  子魚曰:「禍猶未也.」

[양공 7년, 송나라의 땅에 유성이 비처럼 떨어졌고, 빗방울도 뒤섞여 함께 떨어졌다.

여섯 마리의 익조(鷁鳥)가 뒤로 날아가니, 그것은 바람이 너무 세고 빨랐기 때문이다.
8년, 제환공이 죽자, 송나라는 회맹을 소집하고자 했다.

12년 봄, 송 양공은 녹상(鹿上)에서 회맹을 소집해, 제후들로 하여금 그를 옹호해 줄 것을 초 나라에 요구하니,
초나라 사람들은 이에 승낙했다. 공자 목이가 간해 말하기를 “ 작은 나라가 다투어 회맹을 주재(主宰)하겠다고

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라고 해도 양공은 듣지 않았다.
가을, 제후들이 우(盂)에서 송 양공을 만나 동맹을 맺으니, 목이가 말하기를 “화가 장차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군주의 욕망이 너무 지나치니 어찌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 ”라고 했다.

과연 초나라는 송 양공을 체포하고 송나라를 토벌했다.
겨울, 제후들이 박(亳)에서 집회를 가지자 초나라는 송 양공을 석방했다.

자어가 말하기를 “그 화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十三年夏,宋伐鄭.  子魚曰:「禍在此矣.」秋,楚伐宋以救鄭.

襄公將戰,子魚諫曰:「天之棄商久矣,不可.」

冬,十一月,襄公與楚成王戰于泓.  楚人未濟,目夷曰:「彼眾我寡,及其未濟擊之.」公不聽.

已濟未陳,又曰:「可擊.」 公曰:「待其已陳.」陳成,宋人擊之.

宋師大敗,襄公傷股.  國人皆怨公.

公曰:「君子不困人於阸,不鼓不成列.」

子魚曰:「兵以勝為功,何常言與!必如公言,即奴事之耳,又何戰為?」

楚成王已救鄭,鄭享之;去而取鄭二姬以歸.

叔瞻曰:「成王無禮,其不沒乎?為禮卒於無別,有以知其不遂霸也.」

是年,晉公子重耳過宋,襄公以傷於楚,欲得晉援,厚禮重耳以馬二十乘.

[양공 13년 여름, 송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니 자어가 말하기를 : “그 화가 바로 여기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가을, 초나라가 송나라를 토벌하면서 정나라를 구하려고 했다. 이에 양공이 응전을 하려고 하자,

자어가 간해 말하기를 : “하늘이 상왕조를 포기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라고 하였다.
11월 겨울, 양공은 초성왕(楚成王)과 홍수(泓水)에서 교전을 했는데, 초 나라 군사가 미처 강을 다 건너지 못했을 때,
목이가 말하기를 : “초나라는 병사가 많고 우리들은 병사가 적으니 그들이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기회를 이용해,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양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나라의 병사가 이미 완전히 강을 건너기는 했으나 전열을 채 갖추지 못했을 때,

목이가 다시 말하기를 : “지금 공격해도 괜찮습니다.”라고 하자,

양공은 말하기를 : “그들이 전열을 갖추기를 기다리세.”라고 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이 전열을 다 갖추고 난 뒤, 송나라 사람들은 비로소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송나라의 군대는 크게 패했고 양공은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양공을 원망했다.
양공은 말하기를 : “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을 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자어가 말하기를 : “전쟁을 하면 승리를 얻는 것이 공적인데, 어찌 실제와 동떨어진 공담(空談)만을 늘어놓으십니까 ?
주군의 말씀대로라면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지,

어찌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로써 초성왕이 정나라를 구해 주니 정나라는 술과 음식으로써 그를 정중히 대접했다.

성왕은 그곳을 떠날 때 정나라 군주의 두 딸을 아내로 맞이해 돌아갔다.
숙첨(叔瞻)이 말하기를 : “성왕은 예를 알지 못해서 일생을 곱게 마칠 수는 없을 거야.

향연(饗宴)의 예를 받고 마지막에는 남녀를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가 패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해 13년,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송나라를 지나고 있었는데,

양공은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진나라의 원조를 얻고 싶어 했기 때문에,

중이를 융성하게 대접하고는 20승(乘), 즉 80필의 말까지 선물하였다.]

 

十四年夏,襄公病傷於泓而竟卒,子成公王臣立. 

成公元年,晉文公即位.

三年,倍楚盟親晉,以有德於文公也.

四年,楚成王伐宋,宋告急於晉.

五年,晉文公救宋,楚兵去.

九年,晉文公卒.

十一年,楚太子商臣弒其父成王代立.

十六年,秦穆公卒.

十七年,成公卒.  成公弟御殺太子及大司馬公孫固而自立為君.

宋人共殺君御而立成公少子杵臼,是為昭公.

[양공 14년 여름, 양공이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발병해 죽으니, 아들인 성공(成公) 왕신이 즉위했다.
성공 원년, 진문공(晉文公)이 즉위했다.

3년, 성공은 초나라와의 맹약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것은 양공이 진문공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4년, 초성왕이 송나라를 토벌하니 송나라는 위급함을 진나라에 알렸다.

5년, 진문공이 송나라를 구원하니 이에 초 나라 군사는 퇴각해버렸다.
9년, 진문공이 죽었다.

11년, 초나라의 태자 상신(商臣)이 그의 부친 성왕을 살해해 그 자리에 올랐다.

16년, 진목공(秦穆公)이 죽었다.
17년, 성공이 죽었다. 성공의 동생인 어(御)는 태자와 대사마 공손고(公孫固)를 죽이고 스스로 제후가 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연합해 제후인 어를 죽이고 성공의 작은아들인 저구를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소공(昭公)이다.]

 

昭公四年,宋敗長翟緣斯於長丘.

七年,楚莊王即位.

九年,昭公無道,國人不附.  昭公弟鮑革賢而下士.

先,襄公夫人欲通於公子鮑,不可,乃助之施於國, 因大夫華元為右師.

昭公出獵, 夫人王姬使衛伯攻殺昭公杵臼. 弟鮑革立, 是為文公.

[소공 4년, 송나라는 장구(長丘)에서 장적(長翟)의 연사(緣斯)와 싸워 이겼다.

7년, 초 장왕(楚莊王)이 즉위했다.
9년, 소공이 정도(正道)를 가지 못하자 나라 사람들은 그를 떠받들지 않았다.

소공의 동생 포(鮑)는 재능과 덕행이 뛰어났고 선비들을 겸양으로 대할 줄 알았다.

원래 양공의 부인은 공자 포와 개인적으로 통하고 싶었으나 공자 포가 허락하지 않자,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를 도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또한 대부 화원(華元)으로 하여금 추천토록 해 그를 우사(右師)로 삼았다.
소공이 사냥하러 나가자 양공의 부인 왕희(王姬)는 위백(衛伯)을 파견해 소공 저구를 공격해 살해했다.

이에 동생 포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문공(文公)이다.]

 

文公元年,晉率諸侯伐宋,責以弒君.  聞文公定立,乃去.

二年,昭公子因文公母弟須與武、繆、戴、莊、桓之族為亂,文公盡誅之,出武、繆之族.

四年春,(鄭)[楚]命(楚)[鄭]伐宋.  宋使華元將,鄭敗宋,囚華元.

華元之將戰,殺羊以食士,其御羊羹不及,故怨,馳入鄭軍,故宋師敗,得囚華元.

宋以兵車百乘文馬四百匹贖華元.  未盡入,華元亡歸宋.

十四年,楚莊王圍鄭.  鄭伯降楚,楚復釋之.

十六年,楚使過宋,宋有前仇,執楚使.  九月,楚莊王圍宋.

十七年,楚以圍宋五月不解,宋城中急,無食,華元乃夜私見楚將子反.  子反告莊王.

王問:「城中何如?」曰:「析骨而炊,易子而食.」

莊王曰:「誠哉言!我軍亦有二日糧.」以信故,遂罷兵去.

二十二年,文公卒,子共公瑕立.  始厚葬.  君子譏華元不臣矣.

[문공 원년, 진(晉)나라는 제후들을 이끌고 송나라를 토벌해, 소공을 시해한 것에 대해서 견책했다.

그러나 문공이 이미 정식으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철수했다.

2년, 소공의 아들이 문공의 친동생인 수(須)와 무공, 목공, 대공, 장공 그리고 환공의 후손들을 믿고 난을 일으키자,

문공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무공과 목공의 후손들은 내쫓아버렸다.
4년 봄, 초왕은 정나라로 하여금 송나라를 토벌하게 했다. 송나라는 화원을 대장으로 파견해 대항하게 했으나,

정나라는 송나라를 싸워 이겨 화원을 포로로 잡았다.

교전이 벌어질 즈음, 화원은 양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도록 주었으나, 그의 마부가 양고기 국을 먹지 않았다.

이에 기분이 상한 화원이 바로 정나라의 군사들을 향해 돌진하게 하니 송나라의 군사는 크게 패했고,

또한 정나라의 군사들에게 화원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송나라는 병거(兵車) 1백승(乘)과 문마(紋馬) 4백필(匹)로 화원과 교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완전히 보내기도 전에 화원은 송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다.
14년, 초장왕은 정나라를 포위하며 공격했다. 정나라의 군주가 초나라에 투항하니 초나라는 포위를 풀고 떠났다.
16년, 초나라의 사자가 송나라를 지나고 있었는데, 송나라는 초나라와 옛 원수지간인지라 초나라 사자를 억류했다.

9월, 초장왕은 송나라의 도읍을 포위했다.

17년, 초나라가 송나라의 도읍을 5개월간이나 포위하고도 풀지를 않자, 송나라의 도성 안에서는

먹을 것이 없게 되어 다급해지자, 화원은 밤에 비밀리에 초나라의 주장(主將) 자반(子反)과 회견을 했다. 

자반이 장왕에게 이 일을 고하니, 장왕이 묻기를 : “성 안이 어떠하다 하오 ? ”라고 하자,
자반은 대답하기를 :“사람의 뼈를 쪼개 밥을 짓고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을 지경까지 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왕은 다시 말하기를 : “정말 틀림없는 말이로구려! 아군의 식량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장왕은 믿는 바가 있었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물리어 돌아갔다.
22년, 문공이 죽자 아들인 공공(共公) 하(瑕)가 즉위했다. 이때부터 후장(厚葬)을 시작했다.

군자들은 화원이 신하 같지 않다고 비난했다.]

 

共公(元)[十]年,華元善楚將子重,又善晉將欒書,兩盟晉楚.

十三年,共公卒.  華元為右師,魚石為左師.

司馬唐山攻殺太子肥,欲殺華元,華元奔晉,魚石止之,至河乃還,誅唐山.

乃立共公少子成,是為平公.

[공공 원년, 화원은 초나라 장군 자중(子重)과 사이가 좋았고, 또한 진(晉)나라의 장군 난서(欒書)와 사이가 좋았다.

따라서 진, 초 양국과 모두 동맹을 맺었다.

13년, 공공이 죽었다. 화원은 우사(右師)가 되었고, 어석(魚石)은 좌사(左師)가 되었다.

사마(司馬)인 당산(唐山)이 태자 비(肥)를 공격해 죽이고 화원도 죽이려고 하자,

화원은 진(晉)나라로 도망가다가, 어석이 그를 가로막자 황하 물가에서 되돌아와 당산을 죽였다.
그리하여 공공의 작은아들 성(成)을 옹호해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평공(平公)이다.]

 

平公三年,楚共王拔宋之彭城,以封宋左師魚石.

四年,諸侯共誅魚石,而歸彭城於宋.
三十五年,楚公子圍弒其君自立,為靈王.

四十四年,平公卒,子元公佐立.

元公三年,楚公子棄疾弒靈王,自立為平王.

八年,宋火.

十年,元公毋信,詐殺諸公子,大夫華、向氏作亂.

楚平王太子建來奔,見諸華氏相攻亂,建去如鄭.

十五年,元公為魯昭公避季氏居外,為之求入魯,行道卒,子景公頭曼立.

[평공 3년, 초 나라의 공왕(共王)은 송나라의 팽성(彭城)을 공격해, 그곳을 송나라의 좌사인 어석에게 봉했다.
4년, 제후들이 힘을 합쳐 어석을 죽이려고 하자 팽성을 송나라에 돌려주었다.
35년, 초 나라의 공자 위(圍)가 그의 왕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영왕(靈王)이다.
44년, 평공이 죽자 아들인 원공(元公) 좌(佐)가 즉위했다.
원공 3년, 초 나라의 공자 기질(棄疾)이 영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해 평왕(平王)이 되었다.

8년, 송나라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10년, 원공은 신의를 지키지 않고 사기수법을 써서 많은 공자를 죽였다. 대부 화씨와 상씨(向氏)가 난을 일으켰다.
초평왕의 태자 건(建)이 투항하러 와서, 화씨가 난을 일으켜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나 정나라로 향했다.

15년, 원공은 노(魯)나라의 소공(昭公)이 계씨(季氏)를 피해 국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노나라로 돌아오게 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죽으니, 아들인 경공(景公) 두만(頭曼)이 즉위했다.]

 

景公十六年, 魯陽虎來奔, 已復去.

二十五年,孔子過宋,宋司馬桓魋惡之,欲殺孔子,孔子微服去.

三十年,曹倍宋,又倍晉,宋伐曹,晉不救,遂滅曹有之.

三十六年,齊田常弒簡公.

三十七年,楚惠王滅陳.  熒惑守心.  心,宋之分野也.  景公憂之.  司星子韋曰:「可移於相.」

景公曰:「相,吾之股肱.」曰:「可移於民。」 景公曰:「君者待民.」曰:「可移於歲.」

景公曰:「歲饑民困,吾誰為君!」

子韋曰:「天高聽卑.  君有君人之言三,熒惑宜有動.」於是候之,果徙三度.

六十四年,景公卒.  宋公子特攻殺太子而自立,是為昭公.

[경공 16년, 노나라 양호(陽虎)가 투항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떠나버렸다.

25년, 공자(孔子)가 송나라를 지나갔다. 송나라 사마 환퇴(桓魋)는 공자를 증오해 죽이려고 했다.

공자는 평민복으로 갈아입고 위기를 벗어났다.

30년, 조(曹)나라가 송나라를 배반했고 진(晉)나라까지도 배반했다. 이에 송나라가 조나라를 토벌하니,

진나라가 구원을 해주지 않았어도 결국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들 땅을 차지했다.

36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제간공(齊簡公)을 살해했다.
37년, 초혜왕(楚惠王)은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화성(火星)이 하늘의 심수(心宿) 구역을 침범했는데,

이 심수에 해당하는 땅이 바로 송나라였다. 경공은 그것을 걱정했다.
사성(司星)인 자위(子韋)가 말하기를 : “재화(災禍)를 재상들에게로 옮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경공이 말하기를 : “재상의 중요함이란 과인의 팔다리에 견줄 수가 있소.”라고 하자.
자위가 다시 말하기를 : “ 백성들에게로 옮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경공은 말하기를 : “ 군주란 반드시 백성에게 의지해야만 하오.”라고 하자.
자위가 다시 말하기를 : “ 한 해의 수확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경공은 말하기를 : “한 해의 수확이 좋지 않아 기황(饑荒)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 빠지게 되면,

과인은 누구를 믿고 군주 노릇을 해야 하겠소 ? ”라고 하자.
자위가 말하기를 “ 하늘은 고명해 인간의 미세한 일까지 모두 살필 수 있습니다.

군주께서 하신 말씀 세 마디로 볼 때 군주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계신 것으로 사료되므로,

화성은 틀림없이 옮겨 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다시 관측해보니 과연 3도(三度)를 옮겨갔다.
64년, 경공이 죽었다. 송나라의 공자인 특(特)이 태자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소공(昭公)이다.]

昭公者,元公之曾庶孫也.  昭公父公孫糾,糾父公子褍秦,褍秦即元公少子也.

景公殺昭公父糾,故昭公怨殺太子而自立.

昭公四十七年卒,子悼公購由立.  悼公八年卒,子休公田立.  休公田二十三年卒,子辟公辟兵立.

辟公三年卒,子剔成立.  剔成四十一年,剔成弟偃攻襲剔成,剔成敗奔齊,偃自立為宋君.

君偃十一年,自立為王.  東敗齊,取五城;南敗楚,取地三百里;西敗魏軍,乃與齊、魏為敵國.

盛血以韋囊,縣而射之,命曰「射天」. 淫於酒婦人.

群臣諫者輒射之.  於是諸侯皆曰「桀宋」.「宋其復為紂所為,不可不誅」. 告齊伐宋.

王偃立四十七年,齊湣王與魏、楚伐宋,殺王偃,遂滅宋而三分其地.

[소공은 원공(元公)의 증서손(曾庶孫)이다.

소공의 부친은 공손규(孔孫糾)이고, 공손규의 부친은 공자 단진이고, 공자 단진은 곧 원공의 작은아들이다.

경공이 소공의 부친 공손규를 죽였으니 소공은 그 원한으로 태자를 죽여 스스로 즉위한 것이다.

소공이 재위 47년 만에 죽자, 아들 도공(悼公) 구유(購由)가 즉위했다.

도공이 재위 8년 만에 죽자, 아들 휴공(休公) 전(田)이 즉위했다. 휴공 전이 재위 23년 만에 죽자,

아들 벽공(辟公) 벽병(辟兵)이 즉위했다. 벽공이 재위 3년 만에 죽자, 아들 척성(剔成)이 즉위했다.
척성 재위 41년에 그의 동생 언(偃)이 그를 습격하니, 척성은 패해 제나라로 도망을 갔다.

언은 스스로 즉위해 송나라 군주가 되었다. 언은 11년에 스스로 왕(王)이라고 칭했다.

동쪽으로는 제나라를 싸워 이겨 다섯 채의 성을 탈취했다. 남쪽으로는 초 나라와 싸워 이겨 토지 3백리를 탈취했다.
서쪽으로는 위(魏)나라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 그리하여 제와 위(魏) 나라는 송나라의 적국이 되었다.
그가 쇠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걸고는 활을 쏘아 맞추니, 그것을 ‘사천(射天)’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술과 여인에 빠졌다. 대신들 중에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그를 쏘아 죽이곤 했다.

그리하여 제후들은 모두 그를 걸송(桀宋)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 

“ 송나라 왕은 다시 그의 조상인 주(紂)의 전철을 밟고 있으니, 죽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모두들 제나라가 송나라를 토벌하기를 요구했다. 송나라 왕 언이 재위 47년에 이르렀을 때,
제민왕(齊湣王)이 위(魏)나라 그리고 초나라와 더불어 송나라를 정벌해 왕인 언을 죽여 송나라를 멸망시키고는

그 토지를 세 나라가 나누어 가졌다.]

 

 

太史公曰:

孔子稱「微子去之,箕子為之奴,比干諫而死,殷有三仁焉」.

春秋譏宋之亂自宣公廢太子而立弟,國以不寧者十世.

襄公之時,修行仁義,欲為盟主.  其大夫正考父美之,故追道契、湯、高宗,殷所以興,作商頌.

襄公既敗於泓,而君子或以為多,傷中國闕禮義,褒之也,宋襄之有禮讓也.

[태사공은 말한다.
“공자(孔子)는 이르기를 ‘미자(微子)는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떠났고, 기자(箕子)는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은 왕조에는 이와 같은 세 사람의 어진 자가 있었다.’라 했다.
『춘추(春秋)』에서 송나라의 혼란은 선공(宣公)이 태자를 폐하고 동생을 내세워 군주가 되게 한 것에서 시작해,
이로부터 10대에 이르기까지 안녕을 얻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양공(襄公) 때에는 인의(仁義)를 수행해 제후들의 맹주(盟主)가 되고자 했다.
그의 대부(大夫) 정고보(正考父)는 그를 찬미하며, 설(契), 탕(湯), 고종(高宗) 시대를 회상해

은 왕조의 흥성이치를 바탕으로 「상송(商頌)」을 지었다.
송 양공이 홍수(泓水)에서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어떤 군자는 대단히 칭찬할 만하다고 여겼다.
당시 중원 지방의 국가들이 예의가 없는 것을 비탄하면서,

그를 포상한 것은 송 양공이 예의와 겸양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