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1. 越王句踐世家

第 十一. 越王句踐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9. 18:05

 

 

 

   第 十一 越王句踐世家(월왕구천세가)

越王句踐,其先禹之苗裔,而夏后帝少康之庶子也.  封於會稽,以奉守禹之祀.

文身斷發,披草萊而邑焉.  後二十餘世,至於允常.

允常之時,與吳王闔廬戰而相怨伐.  允常卒, 子句踐立,是為越王.

[월왕 구천의 조상은, 하후(夏后) 임금의 후예이며, 소강(少康)의 서자로서 우(禹)임금의 자손이다.
그의 선조는 회계(會稽) 땅에 봉해졌고,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그들은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초목을 제거하고 황무지를 개척해 도읍을 건설했다.  이때로부터 20여 대가 흘러 윤상(允常)의 시대에 이르렀다.

윤상이 왕으로 있을 때, 오왕(吳王) 합려(闔廬)와 싸우게 되니 그들은 서로 미워해 공격했다.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즉위하니, 그가 곧 월왕이다.]

 

元年,吳王闔廬聞允常死,乃興師伐越.  越王句踐使死士挑戰,三行,至吳陳,呼而自剄.

吳師觀之,越因襲擊吳師,吳師敗於檇李,射傷吳王闔廬.

闔廬且死,告其子夫差曰:「必毋忘越.」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 오왕 합려는 윤상이 죽은 것을 알고는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공격했다.
구천이 죽기를 각오한 병사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니, 그들은 세 줄을 이루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크게 외치고 자살했다. 오나라 군대가 쳐다만 보고 있는 사이 월나라의 군대는 그들을 습격해

(檇李)에서 물리치고, 오왕 합려를 쏘아 상처를 입혔다.

합려가 죽으려 할 때 그 아들 부차(夫差)를 불러 말하기를 : “월나라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三年,句踐聞吳王夫差日夜勒兵,且以報越,越欲先吳未發往伐之.

范蠡諫曰:「不可.  臣聞兵者凶器也,戰者逆德也,爭者事之末也.

陰謀逆德,好用凶器,試身於所末,上帝禁之,行者不利.」

越王曰:「吾已決之矣.」遂興師.  吳王聞之,悉發精兵擊越,敗之夫椒.

越王乃以餘兵五千人保棲於會稽.

吳王追而圍之.  越王謂范蠡曰:「以不聽子故至於此,為之柰何?」

蠡對曰:「持滿者與天,定傾者與人,節事者以地.  卑辭厚禮以遺之,不許,而身與之市.」 

句踐曰:「諾.」

[구천 3년, 오왕 부차가 밤낮으로 군대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복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월왕 구천은 오나라가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선수를 쳐서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범려(范蠡)가 간하기를 : “안 됩니다. 제가 듣기로 무기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이고,

전쟁은 도리를 거스르는 것으로서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저급한 것입니다.

음모를 꾸며 도리를 거스르고, 흉기 사용하기를 즐겨 전쟁에 친히 관여하시려 함은 하늘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서,

행해도 이득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구천은 말하기를 : “내가 이미 결정했다.”라고 하면서, 즉시 군사를 일으켰다.

부차는 이 소식을 듣고, 정예 병사를 모두 동원해 월나라 군사를 부초산(夫椒山)에서 패퇴시켰다.
이에 구천은 남은 병사 5,000명을 후퇴시켜 회계산(會稽山)을 지키게 했는데, 부차는 추격해 그들을 포위했다.
구천은 범려에게 묻기를 :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빠졌소. 어찌해야 좋단 말이오?”라고 하자,
범려가 대답하기를, “충만함을 지속하려면 하늘의 도리를 본받아야 하고, 넘어지려는 것을 안정시키고자 하면

사람의 도리를 알아야 하며, 사리를 통제하고자 하면 땅의 이치를 본받아야 합니다.

겸허한 말과 두둑한 예물을 갖추어 그에게 보내십시오. 만약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께서 스스로 볼모가 되어 그를 섬기십시오.”라고 하자.

구천이 대답하기를 : “그렇게 하겠소.”라고 하였다.]

 

乃令大夫種行成於吳,膝行頓首曰:「君王亡臣句踐使陪臣種敢告下執事:

句踐請為臣,妻為妾.」吳王將許之.

子胥言於吳王曰:「天以越賜吳,勿許也.」種還,以報句踐.  句踐欲殺妻子,燔寶器,觸戰以死.

種止句踐曰:「夫吳太宰嚭貪,可誘以利,請閒行言之.」於是句踐以美女寶器令種閒獻吳太宰嚭.

嚭受,乃見大夫種於吳王.

[이에 대부 문종(文種)을 오나라로 보내 강화를 청하게 하였다.
문종은 무릎걸음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부차에게 말하기를 : “ 군왕의 망한 신하인 구천이 저를 보내어

군왕의 하급관원에게 ‘구천은 신하가 되고, 처는 첩이 되기를 청합니다.’라고 감히 고하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부차가 이를 승낙하려 하였다.

오자서가 오왕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월나라를 우리 오나라에 주는 것이니, 응낙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문종이 돌아와 구천에게 이를 보고하자, 구천은 생각하기를 부인과 자녀는 죽이고 보물은 불태운 다음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려 했다.
문종은 구천을 제지하며 말하기를 : “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 뇌물으로써

그를 유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몰래 이 일을 백비에게 알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구천은 문종을 시켜 미녀와 보물을 은밀히 백비에게 바치게 하였다.

백비는 뇌물을 받고 나서, 문종을 부차에게 알현시켜 주었다.]

 

種頓首言曰:「願大王赦句踐之罪, 盡入其寶器. 不幸不赦, 句踐將盡殺其妻子, 燔其寶器,

悉五千人觸戰, 必有當也.」

嚭因說吳王曰:「越以服為臣,若將赦之,此國之利也.」吳王將許之.

子胥進諫曰:「今不滅越,後必悔之.  句踐賢君,種、蠡良臣,若反國,將為亂.」

吳王弗聽,卒赦越,罷兵而歸.  句踐之困會稽也,喟然嘆曰:「吾終於此乎?」

種曰:「湯系夏臺, 文王囚羑里, 晉重耳奔翟, 齊小白奔莒, 其卒王霸. 由是觀之, 何遽不為福乎?」

[문종은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 “원컨대 대왕께서는 구천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보물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구천은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불태운 후 5천의 병사로서 

결전을 할 터인즉, 그러면 틀림없이 대왕께서는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틈을 이용해 백비가 부차에게 설득하기를 : “ 월나라가 이미 신하로 항복하니, 만약 용서해 주신다면

이는 나라의 이익이 됩니다.”라고 하자, 부차는 이를 허락하려 하였다.
오자서가 간곡히 아뢰기를 : “ 지금 월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구천은 어진 왕이고, 범려와 문종은 훌륭한 신하입니다. 만약 지금 그들을 월나라로 돌려보낸다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부차는 이를 듣지 않고 마침내 용서해 주자, 철병해 돌아갔다.
구천이 회계산에 포위되어 있을 때 탄식해 말하기를 : “ 나는 이렇게 끝나는가 ? ”라고 하자,
문종이 말하기를 : “ 탕(湯)은 하대(夏臺)에 갇히었고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구속되었습니다.

중이(重耳)는 적(翟)나라로 도망쳤고,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도망쳤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천하를 얻었습니다.

이를 볼 때, 지금 이 상황 역시 복이 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 ”라고 하였다.]

 

吳既赦越,越王句踐反國,乃苦身焦思,置膽於坐,坐臥即仰膽,飲食亦嘗膽也.

曰:「女忘會稽之恥邪?」

身自耕作,夫人自織,食不加肉,衣不重采,折節下賢人,厚遇賓客,振貧弔死,與百姓同其勞.

欲使范蠡治國政,蠡對曰:「兵甲之事,種不如蠡;填撫國家,親附百姓,蠡不如種.」

於是舉國政屬大夫種,而使范蠡與大夫柘稽行成,為質於吳.  二歲而吳歸蠡.

[부차가 구천을 사면해 주자 구천은 월나라로 돌아가서, 고통을 받으며 고심을 하는데,

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서,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이를 쳐다보며, 음식을 먹을 때도 

이것을 핧곤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 “너는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잊지 않았겠지?”라고 하였다.

스스로 밭을 갈고, 부인은 길쌈을 하며, 음식으로는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의복은 이중으로 된 옷을 입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어 어진 이를 공경하고, 손님을 후하게 접대하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죽은 자를 애도하며

백성과 함께 수고를 같이했다. 범려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범려가 말하기를 : “군사의 일이라면, 제가 문종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따르게 하는 일은 문종이 더 뛰어납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국정을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대부 자계(柘稽)를 보내 강화를 맺고 오나라에 인질로 남게 했다.

2년이 지나자 오나라는 범려 등을 보내 주었다.]

 

句踐自會稽歸七年,拊循其士民,欲用以報吳.

大夫逢同諫曰:「國新流亡,今乃復殷給,繕飾備利,吳必懼,懼則難必至.  且鷙鳥之擊也,

必匿其形.  今夫吳兵加齊、晉,怨深於楚、越,名高天下,實害周室,德少而功多,必淫自矜.

為越計,莫若結齊,親楚,附晉,以厚吳.  吳之志廣,必輕戰.

是我連其權,三國伐之,越承其弊,可克也.」 句踐曰:「善.」

[구천이 회계산에서 돌아온 지 7년 되던 해에, 군대와 백성을 훈련시켜 오나라에 복수하려 했다.
대부 봉동(逢同)이 간곡히 말하기를 : “ 나라가 망했다가 이제서야 조금 나아졌습니다.

우리가 군대를 정돈하면, 오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면 재난은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매나 수리와 같은 사나운 새는 습격을 할 때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는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치고 있으며, 초나라와 월나라에 깊은 원한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름은 천하에 떨치고 있으나, 실제로는 주 왕실을 해하고 있습니다.

덕은 적은데 무력으로 이룬 공이 많아 틀림없이 자만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위해서 계략을 도모하자면, 제나라와 교류를 하고 초 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진(晉)나라에 의지하고 오나라를 후하게 받드는 것이 좋습니다.

오나라가 야심이 커지면 틀림없이 경솔하게 전쟁을 도발할 것입니다.

이렇다면 우리는 제, 초, 진(晉) 나라의 힘을 한데 묶어 이들 세 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오나라가 지친 틈을 이용하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구천이 말하기를 : “좋은 계책이오.”라고 하였다.]

 

居二年,吳王將伐齊. 子胥諫曰:「未可. 臣聞句踐食不重味, 與百姓同苦樂.

此人不死,必為國患.  吳有越,腹心之疾,齊與吳,疥癬也。願王釋齊先越.」

吳王弗聽,遂伐齊,敗之艾陵,虜齊高、國以歸.  讓子胥.

子胥曰:「王毋喜!」王怒,子胥欲自殺,王聞而止之.

越大夫種曰:「臣觀吳王政驕矣,請試嘗之貸粟,以卜其事.」

請貸,吳王欲與,子胥諫勿與,王遂與之,越乃私喜.

子胥言曰:「王不聽諫,後三年吳其墟乎!」

[2년의 세월이 지나, 부차는 제나라를 치려 했다. 오자서가 간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신이 듣건대,

구천은 음식을 두 가지 이상 맛있는 것을 먹지 않으며, 백성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나라에게 화근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월나라는 뱃속의 큰 질병과 같으며,

제나라는 옴 정도에 불과합니다. 원컨데 왕께서는 제나라는 놔두고 우선 월나라를 공격하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부차는 듣지 않고 제나라를 공격해 애릉(艾陵)에서 물리치고,

제나라의 대신 고장(高張)과 국하(國夏)를 포로로 데리고 돌아와서 오자서를 책망했다.
오자서가 말하기를 : “왕께서는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부차는 크게 노했고 이에 오자서는 자결하려 했는데, 이일을 들은 부차가 그를 제지했다.
월나라 대부 문종이 말하기를 : “ 신이 보건대, 부차는 정치하는 것이 매우 교만합니다.

시험삼아 식량을 빌려달라고 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태도를 짐작해 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하자, 부차는 그렇게 하려 하는데, 오자서가 반대를 했다.

그러나 부차는 이내 빌려주니, 구천은 속으로 기뻐했다.
오자서는 말하기를 : “왕께서 내 간언을 듣지 않으시는구나. 3년 후에 오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太宰嚭聞之,乃數與子胥爭越議,因讒子胥曰:「伍員貌忠而實忍人,其父兄不顧,安能顧王?

王前欲伐齊,員彊諫,已而有功,用是反怨王.  王不備伍員,員必為亂.」與逢同共謀,讒之王.

王始不從,乃使子胥於齊,聞其託子於鮑氏,王乃大怒,曰:「伍員果欺寡人!」

役反,使人賜子胥屬鏤劍以自殺.

子胥大笑曰:「我令而父霸,我又立若,若初欲分吳國半予我,我不受,已,今若反以讒誅我.

嗟乎,嗟乎,一人固不能獨立!」 

報使者曰:「必取吾眼置吳東門,以觀越兵入也!」於是吳任嚭政.

[태재인 백비는 이 말을 듣고서 여러 차례 오자서와 함께 월나라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쟁론을 벌였고,

왕에게 그를 참언해 말하기를 : “ 오자서는 밖으로는 충성스러워 보이나, 실제로는 잔인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어찌 왕을 고려하겠습니까 ? 왕께서 이전에 제나라를 치시려고 할 때,

그는 강하게 반대를 했는데, 전쟁에 이기자 오히려 이 때문에 왕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그를 경계하지 않으시면, 그는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했다. 

백비는 또한 월나라의 대부 봉동과 함께 음모를 꾸며 왕에게 그를 비방했다.

부차가 처음에는 믿지 않고서,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가 자기 아들을 제나라의 대부 포목(鮑牧)에게 맡겼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부차는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오자서가 나를 속였구나!”라고 하였다.

오자서가 돌아오자, 부차는 촉루검(屬鏤劍)을 보내 자결하게 했다.

오자서는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 “나는 이전에 그대의 아버지가 천하를 얻도록 했고, 또 그대를 옹립했다.
그대는 애초에 나에게 오나라의 절반을 주려 했는데, 나는 받지 않았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간신들의 참언을 믿고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아 아! 부차는 혼자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사자에게 말하기를 “: 반드시 내 눈을 오나라의 동쪽 문에 매달아 놓아라.

월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부차는 백비에게 모든 정치를 맡겼다.]

 

居三年,句踐召范蠡曰:「吳已殺子胥,導諛者眾,可乎?」對曰:「未可.」

至明年春, 吳王北會諸侯於黃池, 吳國精兵從王, 惟獨老弱與太子留守.

句踐復問范蠡,蠡曰「可矣」.

乃發習流二千人, 教士四萬人, 君子六千人, 諸御千人, 伐吳.  吳師敗,遂殺吳太子.

吳告急於王,王方會諸侯於黃池,懼天下聞之,乃祕之. 

吳王已盟黃池,乃使人厚禮以請成越.  越自度亦未能滅吳,乃與吳平.

[3년이 지나자, 구천은 범려를 불러 말하기를 : “ 부차는 이미 오자서를 죽였고,

또한 주위에는 아부를 일삼는 자들만 있는데, 공격해도 되겠소 ? ”라고 하자.

범려는 대답하기를 : “아직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봄, 부차는 북쪽으로 가서 황지(黃池)에서 제후와 회맹했는데,

정예 병사들로 하여금 왕을 수행하게 했고, 수도는 노약한 병사와 태자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구천이 다시 범려에게 공격 여부를 묻자, 범려는 대답하기를 : “ 지금이 적합한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수군(水軍) 2천명, 훈련받은 병사 4천명, 친위병 6천명,

그 밖에 영중에서 직무를 관장하는 군관 1천명을 보내 오나라 군대를 패배시키고, 태자를 죽였다.

오나라에서는 부차에게 급박한 상황을 보고했는데, 부차는 황지에서 제후와 회맹중이어서,

천하가 이를 알까봐 두려워 비밀로 했다. 부차가 회맹을 끝내고, 사람을 보내 예를 후하게 해 구천에게 

강화를 청했다. 구천 역시 아직 오나라를 완전히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오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其後四年,越復伐吳.  吳士民罷弊,輕銳盡死於齊、晉.

而越大破吳,因而留圍之三年,吳師敗,越遂復棲吳王於姑蘇之山.

吳王使公孫雄肉袒膝行而前, 請成越王曰:「孤臣夫差敢布腹心, 異日嘗得罪於會稽, 夫差不敢逆命,

得與君王成以歸.  今君王舉玉趾而誅孤臣, 孤臣惟命是聽,意者亦欲如會稽之赦孤臣之罪乎?」

句踐不忍,欲許之.

范蠡曰:「會稽之事,天以越賜吳,吳不取.  今天以吳賜越,越其可逆天乎?且夫君王蚤朝晏罷,

非為吳邪? 謀之二十二年,一旦而棄之,可乎? 且夫天與弗取,

反受其咎.『伐柯者其則不遠』,君忘會稽之蚯?」

句踐曰:「吾欲聽子言,吾不忍其使者.」 

范蠡乃鼓進兵,曰:「王已屬政於執事,使者去,不者且得罪.」吳使者泣而去.

句踐憐之,乃使人謂吳王曰:「吾置王甬東,君百家.」

吳王謝曰:「吾老矣,不能事君王!」遂自殺.

乃蔽其面,曰:「吾無面以見子胥也!」越王乃葬吳王而誅太宰嚭.

[그 후 4년, 월나라는 다시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 병사와 백성은 지치게 되었고,

정예 병사들은 모두 제나라 및 진(晉)나라와의 싸움에서 죽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크게 물리쳤는데, 3년 동안 포위 공격하다가 마침내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 가두었다.
부차는 대부 공손웅(公孫雄)을 보냈는데, 그는 어깻죽지를 드러내고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구천에게 강화를 청하며 말하기를 :  “ 왕의 신하 부차가 속마음을 털어놓겠습니다. 이전에 회계산에서는

왕께 죄를 지었습니다. 부차는 감히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며, 강화를 맺어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친히 저를 징벌하려 하시는데, 절대적으로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바라건대, 회계산에서 제가 왕께 그러했던 것처럼 역시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구천은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해 그에게 허락하려 했다.

그러자 범려가 말하기를 : “ 회계산에서의 일은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주었던 것인데,

오나라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늘이 오나라를 월나라에게 넘겨주는데,

월나라가 어찌 하늘을 거스른다는 말입니까? 왕께서 조정에 일찍 납시고, 저녁에 늦게 물러나셨던 것은

오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 22년간 도모했는데, 하루아침에 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천벌을 받는 법입니다.

『시경(詩經)』에서도 ‘나무 베어 도끼자루 만들려면, 그 본이 가까운 데 있는 것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께서는 회계산에서의 재난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라고 하자.
구천은 말하기를 : “나는 그대의 말을 따르고 싶으나, 차마 그 사자(使者)를 그렇게 대할 수는 없소.”라고 하였다.
이에 범려는 북을 쳐 병사를 진격시키며 말하기를 : “ 왕께서는 이미 나에게 소임을 맡기셨으니, 사자는 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에게 죄를 묻겠소.”라고 하였다. 부차의 사자는 울면서 돌아 갔다.

구천은 연민을 느껴 사자를 부차에게 보내 : “ 나는 그대에게 용동(甬東)을 맡길터이니,

곳에서 1백호의 통치자가 되시오.”라고 하였으나,  

부차는 사절하며 말하기를 : “ 나는 이미 늙었으니, 왕을 섬길 수 없소.”라고 하고 나서 자결하였다.

부차는 헝겁으로 얼굴을 덮으면서 말하기를 : “ 나는 오자서를 대할 면목이 없다.”라고 하였다.

구천은 부차를 장사지내고, 태재 백비를 주살했다.]

 

句踐已平吳,乃以兵北渡淮,與齊、晉諸侯會於徐州,致貢於周.  周元王使人賜句踐胙,命為伯.

句踐已去,渡淮南,以淮上地與楚,歸吳所侵宋地於宋,與魯泗東方百里.

當是時,越兵橫行於江、淮東,諸侯畢賀,號稱霸王.

范蠡遂去,自齊遺大夫種書曰:「蜚鳥盡,良弓藏;狡兔死,走狗烹.

越王為人長頸鳥喙,可與共患難,不可與共樂.  子何不去?」種見書,稱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越王乃賜種劍曰:「子教寡人伐吳七術,寡人用其三而敗吳,其四在子,

子為我從先王試之.」 種遂自殺.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한 후,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회하(淮河)를 건너,

제나라 및 진(晉)나라 제후와 서주(徐州)에서 회맹하고 주(周) 왕실에 공물을 올렸다.

주 원왕은 구천에게 제사 지낸 고기를 내리고, 제후의 수령으로 삼았다.

구천은 이곳을 떠나, 회하를 건너 남하했다. 회하 유역 일대의 땅을 초나라에게 주고,

오나라가 약탈한 송나라의 땅은 송나라에 다시 돌려주었으며,

노나라에게는 사수(泗水) 동쪽의 사방 백리에 달하는 땅을 주었다.
당시, 월나라의 군대는 양자강 및 회하 동쪽을 주름잡았고, 제후들은 모두 축하하며 구천을 패왕이라고 칭했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도착하여 대부 문종에게 편지로써 알리기를 :

“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거두어지는 것이고, 교활한 토끼가 모두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

월왕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은 새처럼 뾰쪽하니,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소.

그대는 왜 월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문종이 편지를 읽고서 병을 핑계 삼아 

궁궐에 들어가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언했다.

구천은 그에게 칼을 내리며 말하기를 : “그대는 오나라를 칠 수 있는 계책 일곱 가지를 가르쳐 주었소.

나는 그 중 세 가지만을 사용해 오나라를 물리쳤소. 나머지 네 가지는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선왕(先王)을 뒤좇아 가서 나를 위해 그것을 시험해 보기 바라오.”라고 했다. 문종은 이내 자결하고 말았다.]

 

句踐卒,子王鼫與立.  王鼫與卒,子王不壽立.  王不壽卒,子王翁立.  王翁卒,子王翳立.

王翳卒,子王之侯立.  王之侯卒,子王無彊立.  王無彊時,越興師北伐齊,西伐楚,與中國爭彊.

當楚威王之時,越北伐齊,齊威王使人說越王曰:「越不伐楚,大不王,小不伯.

圖越之所為不伐楚者, 為不得晉也. 韓、魏固不攻楚. 韓之攻楚, 覆其軍, 殺其將, 則葉、陽翟危;

魏亦覆其軍,殺其將,則陳、上蔡不安.  故二晉之事越也,不至於覆軍殺將,馬汗之力不效.

所重於得晉者何也?」

[구천이 죽자, 그의 아들 석여(鼫與)가 뒤를 잇고, 석여가 죽자, 그의 아들 불수(不壽)가 즉위했다.

불수가 죽자, 그의 아들 옹(翁)이 뒤를 잇고, 옹이 죽자, 그의 아들 예(翳)가 즉위했다.

예가 죽자, 그의 아들 지후(之侯)가 뒤를 잇고, 지후가 죽자, 그의 아들 무강(無彊)이 즉위했다.

무강이 왕으로 있을 때, 월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공격하고, 서쪽으로는 초나라를 치며,

중원의 각 제후들과 힘을 다투었다. 초나라 위왕(威王) 때, 월나라가 북쪽으로 제나라를 치려 하자,

제나라 위왕(威王)은 사신을 보내 무강에게 권하기를 : “ 월나라가 초나라를 치지 않으면,

크게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고, 작게는 제후들의 맹주도 될 수 없습니다.

월나라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 한나라와 위(魏)나라의 도움을 얻지 못해서인 듯합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본래부터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면, 군대가 전멸하고 장수가 죽으며 섭(葉)과 양책(陽翟) 두 읍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위나라 역시 군대가 전멸하고 그 장수가 죽으며 진(陳)과 상채(上蔡) 두 읍이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나라와 위나라가 월나라를 섬기는 이유는, 장수와 병사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이지,

월나라를 위해 전공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한나라와 위나라의 협조를 중시하십니까?”라고 하였다.]

 

越王曰:「所求於晉者, 不至頓刃接兵, 而況于攻城圍邑乎?

願魏以聚大梁之下, 願齊之試兵南陽莒地, 以聚常、郯之境,則方城之外不南,淮、泗之閒不東,商、於、析、酈、

宗胡之地,夏路以左,不足以備秦,江南、泗上不足以待越矣.

則齊、秦、韓、魏得志於楚也,是二晉不戰分地,不耕而穫之.

此之為,而頓刃於河山之閒以為齊秦用,所待者如此其失計,柰何其以此王也!」

[월왕 무강은 말하기를 : “내가 한나라와 위나라에 바라는 것은 초나라와 서로 베어 죽이면서 싸우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성을 공격하거나 읍을 포위하는 것을 기대하겠소? 원하는 것은 위나라 군대가 대량(大梁) 아래에 집결하고,

제나라 군사가 남양(南陽)과 거(莒) 땅에서 훈련을 해 상(常)과 담(郯) 두 읍 경계에 집결하는 것이오.

이렇게 하면 초나라 군대는 방성산 이북에서 남하하지 못하고, 회하와 사수 사이에서 동진하지 못하며,

상(商), 오(於), 석(析), 역(酈), 종호(宗胡) 읍 등의 땅과 초나라의 서북부 일대에서 진(秦)나라를 방비하지 못하며,

강남(江南)과 사수(泗水) 유역에서 월나라를 대비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러하면 제(齊), 진(秦), 한(韓), 위(魏) 네 나라는 초나라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수 있소.
한과 위 두 나라는 싸우지 않고 땅을 가를 수 있고, 경작하지 않고서도 양식을 수확할 수 있게 되오.
이러하지 않으면 황하와 화산(華山) 사이에 군대를 배치해 제나라와 진나라를 경계하게 될 것이오.
한나라와 위나라가 이처럼 오산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이 방법을 사용해 천하를 얻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齊使者曰:「幸也越之不亡也!吾不貴其用智之如目,見豪毛而不見其睫也.

今王知晉之失計,而不自知越之過,是目論也.  王所待於晉者,非有馬汗之力也,

又非可與合軍連和也,將待之以分楚眾也.  今楚眾已分,何待於晉?」

[제나라의 사신은 말하기를 : “ 참 운 좋게도 아직까지 월나라가 망하지 않았군요 !

저는 이 계략을 중하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눈동자는 다른 곳의 미세한 솜털은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속눈썹은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지금 왕께서 한과 위 나라의 오산은 아시면서도, 자신의 실수는 보지 못하시는 것이 방금 말한 눈동자와 같습니다.

왕께서 이 두 나라에 바라는 것은 전공을 세우는 것도 아니요, 함께 연합해 동맹을 결성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초 나라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초나라 병사는 이미 분산되어 있는데,
이 두 나라로부터 무엇을 바랄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까?”라고 하였다.]

 

越王曰:「柰何?」

曰:「楚三大夫張九軍, 北圍曲沃、於中, 以至無假之關者三千七百里, 景翠之軍北聚魯、齊、

南陽,分有大此者乎? 且王之所求者,鬬晉楚也;晉楚不鬬,越兵不起,是知二五而不知十也.

此時不攻楚,臣以是知越大不王,小不伯.  復讎、龐、長沙,楚之粟也;竟澤陵,楚之材也.

越窺兵通無假之關,此四邑者不上貢事於郢矣.  臣聞之,圖王不王,其敝可以伯.

然而不伯者,王道失也. 故願大王之轉攻楚也.」 於是越遂釋齊而伐楚.

楚威王興兵而伐之,大敗越,殺王無彊,盡取笔吳地至浙江,北破齊於徐州.

而越以此散,諸族子爭立,或為王,或為君,濱於江南海上,服朝於楚.

後七世,至閩君搖,佐諸侯平秦.  漢高帝復以搖為越王,以奉越後.  東越,閩君,皆其後也.

[월왕 무강이 묻기를 :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지금 초나라는 세 명의 대부가 모든 군대를 넓게 펼쳐 놓았습니다. 북쪽을 향해서는 

곡옥(曲沃), 오중(於中)을 포위해 곧장 무가관(無假關)에 이르니 3천 7백리 길이의 전선에 배치했고,

경취(景翠)의 군대는 북쪽의 노나라, 제나라 및 남양(南陽) 일대에 집결되어 있으니, 분산으로 말하자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습니까? 또한 왕께서 바라시는 바는 한나라와 위나라가, 초나라와 싸우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싸우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키지 않을 생각이시니, 이는 두 개의 5는 알고 10은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이때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으시면, 신은 월나라가 크게는 왕 노릇을 할 수 없고 작게는 제후의 맹주 노릇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또한 수(讎), 방(龐), 장사(長沙) 등은 초나라의 곡창지대이며,

경택릉(竟澤陵)은 목재가 나는 곳입니다. 월나라가 군대를 내보내 무가관을 뚫으면, 이 네 읍은 초나라에 물품을

보낼 수 없게 됩니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왕이 되려다가 실패하면 제후들의 맹주라도 되는데,

왕도를 잃으면 제후의 맹주도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군대를 돌려 초나라를 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월나라는 제나라를 놔두고, 초나라를 치러 갔다. 초나라 위왕은 출병해 월나라를 대패시키고,

월왕 무강을 죽였으며, 절강(浙江)까지 이르는 옛날 오나라 땅을 다 취하고, 북쪽으로 나아가 서주(徐州)에서

제나라를 물리쳤다. 이에 월나라는 분산되어 일족형제들의 아들들이 서로 다투는데,

어떤 이는 왕이라 칭하고 또 어떤 이는 군(君)이 되어, 강남(江南) 연해 일대에 흩어져 초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그 후 일곱 세대가 지나, 민군(閩君) 요(搖)에 이르렀는데, 그는 제후를 도와 진(秦)나라의 전복을 꾀했다.
훗날 한(漢)나라 고제(高帝)는 요를 월왕(越王)으로 삼아 월나라의 뒤를 잇게 하였으니,

동월(東越)과 민군(閩君)은 모두 월나라의 후예인 것이다.]

 

范蠡事越王句踐, 既苦身力, 與句踐深謀二十餘年, 竟滅吳, 報會稽之恥, 北渡兵於淮以臨齊、晉,

號令中國,以尊周室,句踐以霸,而范蠡稱上將軍.  還反國,范蠡以為大名之下,難以久居,

且句踐為人可與同患,難與處安,為書辭句踐曰:「臣聞主憂臣勞,主辱臣死.

昔者君王辱於會稽,所以不死,為此事也.  今既以雪恥,臣請從會稽之誅.」

句踐曰:「孤將與子分國而有之.  不然,將加誅于子.」 范蠡曰:「君行令,臣行意.」

乃裝其輕寶珠玉, 自與其私徒屬乘舟浮海以行, 終不反.  於是句踐表會稽山以為范蠡奉邑.

[범려는 월왕 구천을 보필하는 데에 고생을 겪으며 힘써 노력하고 20여 년간 계획을 세워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갚게 되었다.
이후 북쪽으로 출병해 회하를 건너,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압박해 중원 여러 나라에 명령을 발하게 되었으며,

주나라 왕실을 잘 받들었다. 구천은 패왕이 되었으며, 범려는 상장군이 되었다.

월나라로 돌아와서, 범려는 너무 커진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게다가 구천의 사람됨이 어려울 때는 같이할 수 있어도, 편안할 때는 함께 하기 어렵다고 여겨,

사직서를 써서 구천에게 말하기를 : “ 신이 듣건대, 국왕이 심려하시면 신하는 고생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국왕이 모욕을 당하시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전에 왕께서 회계에서 모욕을 당하셨는데, 제가 죽지 않았던 것은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그 치욕도 설욕했으니, 저는 회계의 모욕에 대한 죄를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구천은 말하기를 : “ 나는 월나라를 둘로 나누어 그대에게 주려 하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그대를 벌하겠소.”라고 하자.  

범려는 말하기를 : “ 군주는 자신의 명령을 집행하고, 신하는 자기의 희망을 실행할 뿐입니다.”라고 하고,
가벼운 보물을 간단히 챙겨 집안 식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구천은 회계산에 표시를 해 범려의 봉읍지로 삼았다.]

 

范蠡浮海出齊, 變姓名, 自謂鴟夷子皮, 耕于海畔, 苦身戮力, 父子治產.

居無幾何, 致產數十萬.  齊人聞其賢, 以為相.

范蠡喟然嘆曰:「居家則致千金,居官則至卿相,此布衣之極也。久受尊名,不祥.」

乃歸相印,盡散其財,以分與知友鄉黨,而懷其重寶,閒行以去,止于陶,以為此天下之中,

交易有無之路通,為生可以致富矣.  於是自謂陶朱公.

復約要父子耕畜,廢居,候時轉物,逐什一之利.  居無何,則致貲累巨萬.  天下稱陶朱公.

[범려는 배를 타고 나아가 제나라에 도착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칭했다.
그는 해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고생을 하며 온 힘을 다해, 아들과 함께 생산에 노력했다.

오래되지 않아서 재산이 수십만 금(金)에 달하게 되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서 그를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범려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 “집에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살이로는 상국에까지 이르렀으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정점까지 간 것이다. 존귀한 이름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것은 불길한 것이다.”라고 하며.
그는 상국의 인장을 돌려주고, 재산을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귀중한 보물만 챙겨 몰래 빠져나갔다.

도(陶) 땅에 도착하여 보니 그곳은 천하의 중심이므로 교역을 하면 각지와 통해서 재산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칭하고,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물건을 사서 쌓아 놓았다가 시기를 기다려 되팔아 1할의 이윤을 남겼다.

그는 곧 않아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세상 사람들은 도주공을 찬양했다.]

 

朱公居陶,生少子.  少子及壯,而朱公中男殺人,囚於楚.

朱公曰:「殺人而死,職也.  然吾聞千金之子不死於市.」告其少子往視之.

乃裝黃金千溢,置褐器中,載以一牛車.  且遣其少子,朱公長男固請欲行,朱公不聽.

長男曰:「家有長子曰家督,今弟有罪,大人不遣,乃遺少弟,是吾不肖.」欲自殺.

其母為言曰:「今遣少子,未必能生中子也,而先空亡長男,柰何?」

朱公不得已而遣長子,為一封書遺故所善莊生.

曰:「至則進千金于莊生所,聽其所為,慎無與爭事.」長男既行,亦自私齎數百金.

[주공(朱公), 즉 범려는 도 땅에 살면서, 막내아들을 낳았다. 이 막내가 청년이 될 무렵,

둘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나라에 갇혔다. 주공은 말하기를 : “ 살인했으면,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듣자하니,

재력가의 자식은 처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라고 하며, 막내아들을 시켜 살피게 했다.
그리고 황금 1천일(鎰)을 가져가게 하면서, 그것을 베로 짠 헝겊 자루에 넣어 한 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에 실었다.
막내아들을 막 보내려고 하는데, 큰아들이 자신이 가겠다고 하자 주공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큰아들은 말하기를 : “ 집안에 장남이 있으면 집안일을 살펴야하므로 그를 ‘가독(家督)’이라 부릅니다.

지금 동생이 죄를 지었는데, 아버님께서 저를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는 것은 제가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며 자결하려 하였다. 

그의 어머니도 말하기를 : “ 지금 막내를 보내 둘째 애를 반드시 살려낼지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보다 먼저 큰애를 잃게 생겼으니 어떻게 하면 좋지요 ? ”라고 하였다.
주공은 할 수 없이 장남을 보냈는데, 편지 한 통을 써서 오랜 친구인 장생에게 건네주게 하면서 말하기를 : 
“ 그곳에 도착하면, 장생 댁에 이 황금 천 일을 갖다드려라.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되,

절대 그 분과 논쟁될 만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장남은 떠날 때, 자신도 수백 금의 황금을 따로 챙겼다.]

 

至楚,莊生家負郭,披藜藋到門,居甚貧.  然長男發書進千金,如其父言.

莊生曰:「可疾去矣,慎毋留!即弟出,勿問所以然.」

長男既去,不過莊生而私留,以其私齎獻遺楚國貴人用事者.

莊生雖居窮閻,然以廉直聞於國,自楚王以下皆師尊之.

及朱公進金,非有意受也,欲以成事後復歸之以為信耳.

故金至,謂其婦曰:「此朱公之金.  有如病不宿誡,後復歸,勿動.」

而朱公長男不知其意,以為殊無短長也.

[초나라에 도착하니, 장생의 집은 외성 벽에 붙어 있었는데,

명아주 풀숲을 헤치고서 겨우 문 앞에 당도해 보니, 사는 것이 매우 빈곤하였다.

장남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편지와 황금 천 일을 건네 주었다.
장생이 말하기를 : “ 어서 빨리 떠나거라. 절대 머물러 있지 마라. 동생이 나오거든, 절대 그 까닭을 묻지 마라.”

라고 하였다. 장남은 그 집을 나와, 이후로 장생을 찾아가 사사로이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따로 가져간 황금을 초나라의 실력자에게 바쳤다. 장선생은 비록 빈민촌에서 살고 있을 망정,

그의 청렴결백이 온 나라에 알려져, 왕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스승처럼 존경했다.
그는 주공이 보내온 황금을 가지고 싶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일이 성사된 후에 돌려주고 신용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래서 황금이 도착하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주공의 것이오. 내가 병들어 죽어 미리 주공에게 건네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잊지 말고 돌려주도록 하시오. 절대 손대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주공의 장남은 그의 속마음을 몰랐기에, 황금이 별다른 작용을 못한 것으로 짐작했다.]

 

莊生閒時入見楚王, 言「某星宿某, 此則害於楚」.

楚王素信莊生, 曰:「今為柰何?」莊生曰:「獨以德為可以除之.」

楚王曰:「生休矣,寡人將行之.」王乃使使者封三錢之府.

楚貴人驚告朱公長男曰:「王且赦.」曰:「何以也?」

曰:「每王且赦,常封三錢之府.  昨暮王使使封之.」

朱公長男以為赦,弟固當出也,重千金虛棄莊生,無所為也,乃復見莊生.

莊生驚曰:「若不去邪?」長男曰:「固未也。初為事弟,弟今議自赦,故辭生去.」

[장생은 적당한 때 입궐해 왕을 알현하고 아뢰기를 : “ 어떤 별이 모처로 움직였는데, 이는 초나라에 해가 됩니다.”

라고 했다.  왕은 평소 장생을 신임했기에 묻기를 :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하자.

장생은 대답하기를 “오로지 덕을 베푸셔야만 이를 없앨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그대는 가만히 있어 주시오. 과인은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리다.”라고 했다.

이에 왕은 사자를 시켜 금, 은, 동의 세 창고를 봉쇄시켰다.
뇌물을 받은 그 실력자는 깜짝 놀라 주공의 장남에게 말하기를 : “왕께서 대사면을 하실 것이오.”라고 하니,

장남은 묻기를 : “어떻게 그걸 아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그는 말하기를 : “왕께서 매번 대사면을 할 때는 항상 그 세 창고를 봉쇄시켰소.

어제 밤에 왕께서 사자를 보내 봉쇄시키셨다고 하오.”라고 하였다.

장남은 대사면이 있다면 동생은 당연히 나올 텐데, 장생에게 보낸 황금은 별 의미도 없게 되어 아깝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장생을 다시 찾아가니, 그는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 “ 아니, 자네는 아직도 안 떠났단 말인가 ? ”라고 하자.

장남이 대답하기를 : “ 그렇습니다. 저번에는 동생 일로 찾아뵈었는데, 지금 대사면이 의논되고 있다 하니

동생은 당연히 풀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직인사나 드리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莊生知其意欲復得其金,曰:「若自入室取金.」長男即自入室取金持去,獨自歡幸.

莊生羞為兒子所賣,乃入見楚王曰:「臣前言某星事,王言欲以修德報之.  

今臣出,道路皆言陶之富人朱公之子殺人囚楚,其家多持金錢賂王左右,故王非能恤楚國而赦,乃以朱公子故也,」

楚王大怒曰:「寡人雖不德耳, 柰何以朱公之子故而施惠乎!」

令論殺朱公子, 明日遂下赦令.  朱公長男竟持其弟喪歸.

[장생은 그가 황금을 다시 가져가고 싶어함을 알고 말하기를 : “자네는 방으로 들어가 황금을 가져가게.”라고 하니,

장남은 곧장 들어가서 황금을 가지고 떠나면서 매우 기뻐했다.

장생은 주공의 장남에게 배신당한 것이 수치로 느껴져, 이내 입궐해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

“ 신이 저번에 별의 움직임에 대해 말씀 드리자, 왕께서는 덕을 베풀어 보답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밖에서 듣자하니 오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를 도 땅의 부자 주공의 아들이 살인을 저질러 갇혔는데,

그 집에서 황금으로 왕의 측근을 매수했고, 이번 대사면도 백성을 아껴서가 아니라,

주공의 아들을 위해서라고 한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부덕하다 하더라도, 어찌 주공의 아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푼단 말이오!”라고 

하고, 판결을 내려 둘째 아들을 처형시켰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서야 대사면령을 내리니, 주공의 장남은 동생의 시신을 지니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至, 其母及邑人盡哀之, 唯朱公獨笑, 曰:「吾固知必殺其弟也!彼非不愛其弟,顧有所不能忍者也.

是少與我俱,見苦,為生難,故重棄財.  至如少弟者,生而見我富,乘堅驅良逐狡兔,

豈知財所從來,故輕棄之,非所惜吝.  前日吾所為欲遣少子,固為其能棄財故也.

而長者不能,故卒以殺其弟,事之理也,無足悲者.  吾日夜固以望其喪之來也.」 

故范蠡三徙,成名於天下,非茍去而已,所止必成名.  卒老死于陶,故世傳曰陶朱公.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데,

주공만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 “나는 큰애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할 줄 원래부터 알았다.

그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아까워서 돈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큰애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했고, 살기 위해서 고난을 겪었으므로,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한다.

막내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부유한 것을 보았고, 좋은 마차와 말을 타고 다니며 사냥이나 하고 다녔으니,
돈이 어떻게 생기는 줄 알기나 하겠느냐? 따라서 쉽게 돈을 쓰고, 아까워하지 않는다.

저번에 내가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은 그가 돈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큰애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 동생이 죽은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거늘, 슬퍼할 것 없다. 나는 밤낮으로 둘째 애의 시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라고 하였다.
범려는 세 번이나 옮기고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단지 떠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멈추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름을 떨쳤다.

범려가 마침내 도 땅에서 늙어 죽으니, 세상에서는 그를 ‘도주공’이라 했다.]

 

太史公曰:

禹之功大矣,漸九川,定九州,至于今諸夏艾安.

及苗裔句踐,苦身焦思,終滅彊吳,北觀兵中國,以尊周室,號稱霸王.

句踐可不謂賢哉!蓋有禹之遺烈焉.  范蠡三遷皆有榮名,名垂後世.  臣主若此,欲毋顯得乎!

[태사공은 말한다.
“우(禹)임금의 공로는 매우 크도다! 아홉 개의 하천을 소통시켜 아홉 개의 주(州)를 안정시키니,

오늘날까지 온 중국이 평안하구나. 그의 후예 구천(句踐)에 이르러 몸과 마음으로 고생하고 숙고해,

마침내 힘센 오나라를 물리치고, 북쪽으로 중원 지방까지 위세를 떨치며,

주 왕실을 받들어서 패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구천을 어찌 현명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우임금이 남겨준 업적이 있었던 것 같다.
범려(范蠡)는 세 번 옮기고도, 모두 이름을 떨쳐,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임금과 신하가 이러하거늘 드러나지 않고자 해도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