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7. 孔子世家

第 十七. 孔子世家

덕치/이두진 2021. 7. 1. 16:37

                          史記 世家

 

                        〈  만년의 공자 〉

 

     

     第 十七.  孔子世家(공자세가)

 


孔子生魯昌平鄉陬邑.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顏氏女野合而生孔子, 禱於尼丘得孔子.  魯襄公二十二年而孔子生.

生而首上圩頂,故因名曰丘云.  字仲尼,姓孔氏.

[공자(孔子)는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防叔)이다.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양흘(叔梁紇)을 낳았다. 흘은 안씨(顔氏)와 야합(野合)해 공자를 낳았는데,

이구(尼丘)에서 기도를 한 뒤, 공자를 얻게 되었다. 노양공(魯襄公)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 중간이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에 구(丘)라고 이름했다. 자는 중니(仲尼)이고 성은 공씨이다.]

 

丘生而叔梁紇死,葬於防山.  防山在魯東,由是孔子疑其父墓處,母諱之也.

孔子為兒嬉戲,常陳俎豆,設禮容.  孔子母死,乃殯五父之衢,蓋其慎也.

郰人輓父之母誨孔子父墓,然後往合葬於防焉.

孔子要絰,季氏饗士,孔子與往.  陽虎絀曰:「季氏饗士,非敢饗子也.」孔子由是退.

[공구가 태어난 후 숙양흘이 세상을 떠나 방산(防山)에서 장사를 지냈다.
방산은 노나라의 동부에 있어서 공자는 아버지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의심했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숨겼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늘 제기(祭器)를 펼쳐 놓고 예를 올렸다.

공자는 어머니가 죽자 곧 오보지구(五父之衢)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대개 부모를 함께 매장하는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추읍 사람 만보(輓父)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소를 알려주어 그 후에 비로소 두 분을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가 아직 상복을 입고 있을 때, 계씨(季氏)가 명사(名士)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공자도 참석하러 갔다.
양호(陽虎)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말하기를 : “계씨는 명사들에게 연회를 베풀려고 한 것이지,

감히 마을 자제들에게 베풀려고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오.”라고 하자. 이에 공자는 물러나고 말았다.]

 

孔子年十七,魯大夫孟釐子病且死,誡其嗣懿子曰:「孔丘,聖人之後,滅於宋.

其祖弗父何始有宋而嗣讓厲公.  及正考父佐戴、武、宣公,三命茲益恭,故鼎銘云:

『一命而僂,再命而傴,三命而俯,循墻而走,亦莫敢余侮.  饘於是,粥於是,以餬余口.』

其恭如是.  吾聞聖人之後,雖不當世,必有達者.  今孔丘年少好禮,其達者歟?

吾即沒,若必師之.」

[공자 나이 17세 때, 대부 맹희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는데, 그는 후계자인 의자에게 훈계하며 

말하기를 : “ 공구(孔丘)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송나라에 있을 때 멸망당했다.

그 조상 불보하(弗父何)는 원래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아우 여공(厲公)에게 양보했다.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길 때, 세 번이나 명을 받았는데,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鼎)에 새겨 놓은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 절을 한 뒤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중앙을 걷지 않고 담장가를 따라 다녀서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입에 풀칠할 정도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 했다.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才德)에 통달한 자가 있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라고 하였다.] 

 

及釐子卒,懿子與魯人南宮敬叔往學禮焉.  是歲,季武子卒,平子代立.

孔子貧且賤.  及長,嘗為季氏史,料量平;嘗為司職吏而畜蕃息.  由是為司空.

已而去魯,斥乎齊,逐乎宋、衛,困於陳蔡之間,於是反魯.

孔子長九尺有六寸,人皆謂之「長人」而異之.  魯復善待,由是反魯.

[맹희자(孟釐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이해에 계무자(季武子)가 죽고 계평자(季平子)가 대를 이어 경(卿)의 자리에 올랐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다. 커서 일찍이 계씨(季氏)의 위리(委吏)로 있을 때, 그의 저울질은 공평했고,

그가 직리(職吏)의 일을 맡고 있을 때 가축은 번성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공(司空)이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노나라를 떠났다.
제(齊) 나라에서 배척되고, 송과 위(衛) 나라에서 쫓겨나고, 진(陳)과 채(蔡) 나라 사이에서 곤궁에 빠지자,

이에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그를 ‘키다리’라고 부르고 그를 괴이하게 여겼다.

노나라가 다시 그를 잘 대우하니 이에 노나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魯南宮敬叔言魯君曰:「請與孔子適周.」魯君與之一乘車, 兩馬, 一豎子俱, 適周問禮, 蓋見老子云.

辭去, 而老子送之曰:「吾聞富貴者送人以財, 仁人者送人以言. 吾不能富貴, 竊仁人之號, 送子以言,

曰:『聰明深察而近於死者, 好議人者也. 博辯廣大危其身者, 發人之惡者也.

為人子者毋以有己, 為人臣者毋以有己.』」孔子自周反于魯,弟子稍益進焉.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하기를 : “ 공자와 더불어 주(周)나라에 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하나, 말 두 필, 어린 시종 한 명을 주어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묻게 했다.

이리하여 이때에 노자(老子)를 만났다고 한다. 공자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때, 노자가 그를 송별하며 말하기를 :

“ 내가 들으니 부귀한 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 재물로써 하고, 어진 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 말로써 한다고 합니다.

나는 부귀하지 못하나 인자(仁者)라고 자처하기를 좋아하니 다음 말로써 그대를 전송하겠습니다.
‘총명하고 깊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위험이 따르는데 이는 남을 잘 비판하기 때문이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결점을 잘 지적해내기 때문입니다.
자녀된 자는 아버지 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하된 자는 임금 앞에서 자기를 치켜세우지 않는 법입니다.”

공자가 주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니 제자들이 더욱 늘어났다.]

 

是時也,晉平公淫,六卿擅權,東伐諸侯;楚靈王兵彊,陵轢中國;齊大而近於魯.

魯小弱,附於楚則晉怒;附於晉則楚來伐;不備於齊,齊師侵魯.

[이때에 진평공(晉平公)이 음탕했기에 육경(六卿)이 권력을 잡고 동쪽으로 제후들을 공격했다.
초영왕(楚靈王)은 군대가 강해서 중국(中國)을 침략했다. 제나라는 대국으로 노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노나라는 약소해 초(楚)나라에 붙으면 진(晉)나라가 노했고, 진(晉)나라에 붙으면 초나라가 침공했고,
제나라를 경계하지 않으면 제나라 군대가 노나라를 침략했다.]

魯昭公之二十年,而孔子蓋年三十矣.

齊景公與晏嬰來適魯,景公問孔子曰:「昔秦穆公國小處辟,其霸何也?」

對曰:「秦,國雖小,其志大;處雖辟,行中正.  身舉五羖,爵之大夫,起纍紲之中,

與語三日,授之以政.  以此取之,雖王可也,其霸小矣.」景公說.

[노소공(魯昭公) 20년, 공자는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제경공(齊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노나라에 갔는데,
경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 “ 옛날 진목공(秦穆公)은 나라도 작고 외진 지역에 위치했지만

패자(覇者)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진(秦)나라는 비록 나라는 작아도 그 뜻이 원대했고, 비록 외진 곳에 처했어도

정치를 베푸는 것이 매우 정당했습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몸소 등용해 대부의 벼슬자리를 내리고

감옥에서 석방시켜 더불어 3일간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면 목공은 왕도 될 수 있었는데, 패자가 된 것은 오히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은 매우 기뻐했다.]

 

孔子年三十五,而季平子與郈昭伯以鬬雞故得罪魯昭公,昭公率師擊平子,

平子與孟氏、叔孫氏三家共攻昭公,昭公師敗,奔於齊,齊處昭公乾侯.

其後頃之,魯亂.  孔子適齊,為高昭子家臣,欲以通乎景公.

與齊太師語樂,聞韶音,學之,三月不知肉味,齊人稱之.

[공자가 35세 되었을 때,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과 닭싸움 끝에 노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대를 이끌고 평자를 공격하자, 평자는 맹씨, 숙손씨(叔孫氏)와 연합해 3가(家)가 함께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의 군대는 패해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乾侯)에 거하게 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 경공과 통하려고 했다.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토론했는데 “소(韶)”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워,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

 

景公問政孔子,孔子曰:「君君,臣臣,父父,子子.」

景公曰:「善哉!信如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雖有粟,吾豈得而食諸!」

他日又復問政於孔子,孔子曰:「政在節財.」 景公說,將欲以尼谿田封孔子.

晏嬰進曰:「夫儒者滑稽而不可軌法;倨傲自順,不可以為下;崇喪遂哀,破產厚葬,

不可以為俗;游說乞貸,不可以為國.  自大賢之息,周室既衰,禮樂缺有間. 今孔子盛容飾,

繁登降之禮, 趨詳之節, 累世不能殫其學, 當年不能究其禮.  君欲用之以移齊俗,, 非所以先細民也.」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라고 하자. 
경공이 말하기를 : “ 옳은 말이오! 만약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소!”하였다. 

다른 날 경공이 다시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하기를 : “정치의 요점은 재물을 절제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경공은 기뻐하며 장차 이계(尼谿)의 땅에 공자를 봉하려고 했다.
안영이 나서며 말하기를 : “ 무릇 유학자는 말재간이 있고 융통성을 잘 부려 법으로 규제할 수 없으며,

거만하고 제멋대로 하니 아랫사람으로 두기 어려우며, 상례를 중시해 슬픔을 다한다며 파산까지 하면서

큰 장례를 치르니 그들의 예법을 풍속으로 삼기 어렵고, 도처에 유세 다니며 관직이나 후한 녹을 바라니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도 없습니다. 현자(賢者)가 사라진 이래로 주(周) 왕실이 쇠미해졌고

예악(禮樂)이 붕괴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를 성대히 꾸미고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은 몇 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으며 평생을 다해도 그 예를 터득할 수 없습니다.

군주께서 그를 채용해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려고 하신다면 이는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하였다.]

 

後景公敬見孔子,不問其禮. 異日,景公止孔子曰:「奉子以季氏,吾不能.」以季孟之間待之.

齊大夫欲害孔子,孔子聞之.  景公曰:「吾老矣,弗能用也.」孔子遂行,反乎魯.

孔子年四十二,魯昭公卒於乾侯,定公立.

[그 후 경공은 공자를 공손히 접견했으나 다시는 예를 묻지 않았다.
훗날 경공이 공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 “내가 그대를 계씨와 똑같은 지위로 대우하는 것은 할 수가 없소”라고 하며,
공자에게 계씨와 맹씨(孟氏) 중간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 주었다.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공자도 이 소문을 들었다.

경공이 말하기를 : “ 나는 늙었소. 그대를 등용할 수가 없소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의 나이 42세 때, 노소공이 건후에서 죽자,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즉위하였다.]

 

定公立五年,夏,季平子卒,桓子嗣立.  季桓子穿井得土缶,中若羊,問仲尼云「得狗」.

仲尼曰:「以丘所聞,羊也.  丘聞之,木石之怪夔、罔閬,水之怪龍、罔象,土之怪墳羊.」

吳伐越,墮會稽,得骨節專車. 吳使使問仲尼:「骨何者最大?」

仲尼曰:「禹致群神於會稽山,防風氏後至,禹殺而戮之,其節專車,此為大矣.」

吳客曰:「誰為神?」仲尼曰:「山川之神足以綱紀天下,其守為神,社稷為公侯,皆屬於王者.」

客曰:「防風何守?」

仲尼曰:「汪罔氏之君守封、禺之山, 為釐姓.  在虞、夏、商為汪罔, 於周為長翟, 今謂之大人.」

客曰:「人長幾何?」仲尼曰:「僬僥氏三尺,短之至也.  長者不過十之,數之極也.」

於是吳客曰:「善哉聖人!」

桓子嬖臣曰仲梁懷,與陽虎有隙.  陽虎欲逐懷,公山不狃止之.  其秋,懷益驕,陽虎執懷.

桓子怒,陽虎因囚桓子,與盟而醳之.  陽虎由此益輕季氏.  季氏亦僭於公室,陪臣執國政,

是以魯自大夫以下皆僭離於正道.  故孔子不仕, 退而脩詩書禮樂, 弟子彌眾, 至自遠方, 莫不受業焉.

[정공 5년 여름, 계평자가 죽고 환자(桓子)가 자리를 이었다. 계환자는 우물을 파다가 흙으로 만든 그릇을 얻었다.
그 안에 양(羊)과 같은 것이 있었는데 공자에게 “개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 “ 제가 들은 바로는 그것은 양입니다. 제가 듣기로 산의 요괴는 기(夔)와 망량(罔閬)이고,
물의 요괴는 용(龍)과 망상(罔象)이며, 흙의 요괴는 분양(墳羊)입니다.”라고 하였다.
오(吳)나라가 월(越)나라를 공격해서 수도 회계(會稽)를 격파해 수레 하나에 가득 찰 만큼 큰 해골을 얻었다.
오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공자에게 묻기를 : “ 해골은 누구의 것이 가장 큽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우(禹)임금이 회계산(會稽山)에서 여러 신들을 불러 보았을 때 방풍씨(防風氏)가 늦게 오자,

우임금이 그를 죽였는데 그 해골이 수레 하나에 가득 찼다고 하는데 그것이 가장 큰 해골이오.”라고 하였다.

오나라의 사자가 다시 묻기를 : “ 누가 신입니까 ?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산천의 신령은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려서 천하에 복을 가져올 수 있으니 그 산천을 지키고

제사를 책임지는 것이 신이며, 토신과 곡신을 지키는 것이 공후인데 이는 모두 왕자(王者)에 속하오.”라고 하였다.
사자가 또 묻기를 : “ 방풍씨는 무엇을 지켰습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왕망씨(汪罔氏)의 군장(君長)은 봉산과 우산(禺山)을 지켰는데 그는 성이 희씨(釐氏)였소.
우(虞), 하(夏), 상(商) 나라 때에는 왕망(汪罔), 주(周)나라 때에는 장적(長翟)이라고 했고,

지금은 대인(大人)이라고 하오.”라고 하였다.  사자가 말하기를 : “사람들의 키는 어느 정도입니까 ? ”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초요씨(僬僥氏)는 3척(尺)으로 가장 작고, 가장 큰 사람이라도 이것의 열배를 넘지 않는데

이것이 가장 큰 키요.”라고 하였다. 이에 오나라의 사자가 말하기를 : “ 정말 훌륭하신 성인이십니다!”라고 하였다.

환자(桓子)가 총애하는 신하 중에 중양회(仲梁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호(陽虎)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호는 중양회를 내쫓으려고 했으나 공산불뉴(公山不狃)가 그것을 말렸다.

그해 가을, 중양회가 더욱 교만해지자 양호는 그를 체포했다. 환자가 노하자 양호는 환자마저 가두었는데,

더불어 맹약을 한 연후에야 그를 풀어주었다. 양호는 이로 인해서 더욱 계씨(季氏)를 가볍게 여겼다.
계씨 또한 분수를 모르고 공실(公室)보다 지나치게 행동했기 때문에 배신(陪臣)이 국정을 잡은 꼴이 되었다.
이에 노나라에서는 대부(大夫) 이하 모두가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편찬했다.
제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글을 배우지 않은 자가 없었다.]

 

定公八年,公山不狃不得意於季氏,因陽虎為亂,欲廢三桓之適,更立其庶孽陽虎素所善者,

遂執季桓子.  桓子詐之,得脫.

定公九年,陽虎不勝,奔于齊.  是時孔子年五十.  公山不狃以費畔季氏,使人召孔子.

孔子循道彌久, 溫溫無所試, 莫能己用,曰:「蓋周文武起豐鎬而王, 今費雖小, 儻庶幾乎!」欲往.

子路不說,止孔子.  孔子曰:「夫召我者豈徒哉?如用我,其為東周乎!」然亦卒不行.

其後定公以孔子為中都宰,一年,四方皆則之.  由中都宰為司空,由司空為大司寇.

[노정공 8년, 공산불뉴는 계씨에게 뜻을 얻지 못하자 양호에게 의탁해 함께 반란을 일으켜 삼환의 적장자를 폐하고,

평소 양호와 사이가 좋은 서자를 세우고자 하여 마침내 계환자를 체포했다. 환자는 그를 속여 도망칠 수 있었다.
정공 9년, 양호는 계획이 실패하자 제나라로 도망갔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50세였다.
공산불뉴는 계씨의 비(費)에서 계씨에게 반기를 들고, 사람을 시켜 자기를 도와달라고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도를 추구한 지 오래되었고,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했으나 아무도 자신을 등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공자는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풍(豐)과 호(鎬)처럼 그렇게 작은 지방에서 왕업을 일으켰다.
지금 비 땅은 비록 작기는 하지만 대체로 풍, 호와 같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면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자로(子路)는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공자를 말렸다.
공자가 말하기를 : “ 나를 부르는 것이 어찌 무용한 일이겠는가? 그가 만약 나를 등용한다면

나는 훌륭한 동방의 주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공자는 결국 가지 않았다.
그 후 정공(定公)은 공자를 중도(中都)의 장(長)으로 삼았는데, 1년 만에 사방이 모두 공자의 통치방법을 따랐다.
공자는 중도의 장에서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定公十年春,及齊平.  夏,齊大夫黎鉏言於景公曰:「魯用孔丘,其勢危齊.」

乃使使告魯為好會, 會於夾谷.  魯定公且以乘車好往.

孔子攝相事,曰:「臣聞有文事者必有武備,有武事者必有文備. 古者諸侯出疆,必具官以從.

請具左右司馬.」

定公曰:「諾.」具左右司馬. 會齊侯夾谷,為壇位,土階三等,以會遇之禮相見,揖讓而登.

獻酬之禮畢,齊有司趨而進曰:「請奏四方之樂.」

景公曰:「諾.」於是旍旄羽袚矛戟劍撥鼓噪而至.

孔子趨而進, 歷階而登, 不盡一等, 舉袂而言曰:「吾兩君為好會, 夷狄之樂何為於此!請命有司!」

有司卻之,不去,則左右視晏子與景公.  景公心怍,麾而去之.

有頃,齊有司趨而進曰:「請奏宮中之樂.」

景公曰:「諾.」優倡侏儒為戲而前.  孔子趨而進,歷階而登,不盡一等,

曰:「匹夫而營惑諸侯者罪當誅!請命有司!」有司加法焉,手足異處.

景公懼而動,知義不若,歸而大恐,

告其群臣曰:「魯以君子之道輔其君,而子獨以夷狄之道教寡人,使得罪於魯君,為之奈何?」

有司進對曰:「君子有過則謝以質,小人有過則謝以文.  君若悼之,則謝以質.」

於是齊侯乃歸所侵魯之鄆、汶陽、龜陰之田以謝過.

[정공 10년 봄, 제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그해 여름, 제나라의 대부 여서(黎鉏)가 경공(景公)에게 말하기를 : 

“ 노나라가 공구(孔丘)를 중용했으니, 그 세가 반드시 제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노나라에 사자를 보내 친목을 도모하기로 하고 협곡(夾谷)에서 만나기로 했다.

노정공은 수레를 타고 아무런 방비 없이 그곳에 가려고 했다. 그때 공자는 재상(宰相)의 일을 임시로 보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신이 듣기에 문사(文事)에는 반드시 무(武)를 갖추어야 하며, 무사(武事)에는 반드시

문(文)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제후가 국경을 나설 때 반드시 문무관원을 수행시켰다고 합니다.
좌우사마(左右司馬)를 대동하고 가십시오.”라고 하자, 

정공이 대답하기를 : “그렇게 하겠소.”라고 하며, 좌우사마를 데리고 갔다.
정공이 협곡에서 제경공과 만났다. 제사에 쓸 고대(高臺)를 마련하고 흙 계단을 3단 만든 뒤 제경공과 노정공은

예에 따라 상견례를 했다.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대 위에 올라 술잔을 주고받는 예가 끝나자 제나라의 관리가

앞으로 달려 나와 말하기를 : “사방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자.
경공이 말하기를 : “좋다.”라고 하자, 깃발과 우불(羽祓), 창칼과 방패를 든 악대가 북을 치며 떠들썩하게 나왔다.
공자가 빨리 앞으로 나와 한 발에 한 계단씩 빠른 걸음으로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긴 소매를 쳐들고 말했다. “ 두 군주께서 친목을 위해서 만나셨는데 어찌해 여기서 이적(夷狄)의 음악을 연주하는가!

물러가게 명하시오!” 라고 하자, 관리가 그들을 물러나게 했으나 그들이 물러가지 않자 좌우의 수행원들이

안자(晏子)와 경공의 눈치를 살폈다. 경공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조금 후 제나라의 관리가 앞으로 달려 나와 말하기를 : “청컨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자.
경공이 대답하기를 : “그렇게 하라.”라고 하니, 광대와 난쟁이가 재주를 부리며 앞으로 나왔다.
공자가 빨리 달려 나아가 한 발에 한 계단씩 빠른 걸음으로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
“필부로 제후를 현혹케 하는 자는 마땅히 처형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처형할 것을 명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관리가 그들의 허리를 두 동강을 내고 말았다. 공자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보자 경공은 도의나 이론 면에서

상대방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면서도 감탄했다.
돌아와서는 크게 두려워하며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 “노나라의 신하는 군자의 도로써 그 군주를 보필하는데,
그대들은 오로지 이적(夷狄)의 도로써 과인을 가르쳐서 노군(魯君)에게 죄를 짓게 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한 관리가 나와서 말했다. “군자는 과오를 범하면 실질적인 물증으로써 사죄하는데,

소인은 과실을 저지르면 허례적인 말로만 사죄한다고 합니다.

군주께서 그 일로 마음이 편하지 않으시거든 실질적인 물건을 내놓고 사과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제경공은 곧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운(鄆), 민양(汶陽), 구음(龜陰)의 땅을 반환함으로써 노나라에 사죄했다.] 

定公十三年夏,孔子言於定公曰:「臣無藏甲,大夫毋百雉之城.」使仲由為季氏宰,將墮三都.

於是叔孫氏先墮郈.  季氏將墮費,公山不狃、叔孫輒率費人襲魯. 

公與三子入于季氏之宮,登武子之臺.  費人攻之,弗克,入及公側.

孔子命申句須、樂頎下伐之,費人北. 國人追之,敗諸姑蔑.  二子奔齊,遂墮費. 

將墮成,公斂處父謂孟孫曰:「墮成,齊人必至于北門.  且成,孟氏之保鄣,無成是無孟氏也.

我將弗墮.」 十二月,公圍成,弗克.

[정공 13년 여름, 공자는 정공에게 말하기를 : “ 신하는 무기를 비축해서는 안 되고, 대부는 1백치(雉)의 성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유(仲由)를 계씨의 가신으로 임명시켜 삼도(三都)를 파괴하려고 했다.

숙손씨가 먼저 후(郈)를 허물었고, 계씨가 곧 비(費)를 파괴하려고 했고, 공산불뉴와 숙손첩은 비인(費人)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습격했다. 정공은 세 아들과 더불어 계씨의 궁으로 피신해 계무자의 누대에 올랐다.

비인(費人)들이 그곳을 공격해 함락시키지는 못했으나 이미 정공의 누대 옆에까지 들어왔다.
공자는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頎)에게 명해서 격퇴하게 하자 비인들이 패퇴했다. 노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해

고멸(姑蔑)에서 격파했다. 공산불뉴와 숙손첩은 제나라로 도망쳤고, 드디어 비를 함락시켰다.
장차 성(成)을 격파하려고 할 때 공렴거보(公斂處父)가 맹손에게 말하기를 : “성읍을 격파하면 제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북문까지 쳐들어올 것입니다. 또 성읍은 맹씨(孟氏)의 보루라, 성읍이 없으면 맹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읍의 성을 파괴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2월, 노정공은 성읍의 성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定公十四年, 孔子年五十六, 由大司寇行攝相事, 有喜色.  門人曰:「聞君子禍至不懼, 福至不喜.」

孔子曰:「有是言也.  不曰『樂其以貴下人』乎?」

於是誅魯大夫亂政者少正卯.  與聞國政三月,粥羔豚者弗飾賈;男女行者別於塗;塗不拾遺;

四方之客至乎邑者不求有司,皆予之以歸.

齊人聞而懼,曰:「孔子為政必霸,霸則吾地近焉,我之為先并矣.  盍致地焉?」

黎鉏曰:「請先嘗沮之;沮之而不可則致地,庸遲乎!」

[정공 14년, 공자는 56세의 나이로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제자가 묻기를 : “제가 듣기에, 군자는 화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이 찾아와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그런 말이 있다. 그러나 ‘귀한 신분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을 공손하게 대하는 데에 낙이 있다’

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후, 공자는 노나라의 정사를 문란케 한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했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다.
남녀가 길을 갈 때 따로 걸었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어졌다.
사방에서 읍에 찾아오는 여행자도 관리에게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모두 잘 접대해서 만족해하며 돌아가게 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 “ 공자가 정치를 하면 노나라는 반드시 패권을 잡을 것이다.
노나라가 패권을 잡게 되면 우리 땅이 가까우니 우리가 먼저 병합될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해 먼저 약간의 땅을 노나라에 내주지 않는가 ? ” 라고 하였다.
여서(黎鉏)가 말하기를 : “ 먼저 시험 삼아 노나라의 선정을 방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해해 보아도 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땅을 내놓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於是選齊國中女子好者八十人,皆衣文衣而舞康樂,文馬三十駟,遺魯君.

陳女樂文馬於魯城南高門外, 季桓子微服往觀再三, 將受, 乃語魯君為周道游, 往觀終日, 怠於政事.

子路曰:「夫子可以行矣.」 孔子曰:「魯今且郊,如致膰乎大夫,則吾猶可以止.」

桓子卒受齊女樂,三日不聽政;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遂行,宿乎屯. 而師己送,

曰:「夫子則非罪.」 孔子曰:「吾歌可夫?」

歌曰:「彼婦之口,可以出走;彼婦之謁,可以死敗.  蓋優哉游哉,維以卒歲!」

師己反,桓子曰:「孔子亦何言?」師己以實告.  桓子喟然嘆曰:「夫子罪我以群婢故也夫!」

孔子遂適衛,主於子路妻兄顏濁鄒家.

[이에 제나라는 미녀 80명을 뽑아 모두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강락무(康樂舞)”를 가르쳐서 무늬 있는 말 120필과

함께 노나라 군주에게 보냈다. 무녀들과 아름다운 마차들을 우선 노나라의 도성 남쪽 높은 문 밖에 늘어 놓았다.

계환자(季桓子)는 평복 차림으로 몰래 몇 차례 가서 그것을 살펴보고, 장차 접수하려고 했으며,

이에 노나라 군주와 각 지역을 순회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곳으로 가서 하루 종일 관람하고, 정사는 게을리 했다.
자로가 말하기를 : “ 선생님이 노나라를 떠날 때가 왔습니다.”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노나라 군주는 이제 곧 교제(郊祭)를 지낼 텐데 만약 그때 군주가 희생 제물을 대부들에게

나누어 주면 나는 그대로 여기에 남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환자(桓子)는 결국 제나라의 무녀들을 받아들이고는 사흘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교제를 지내고도

그 희생 제물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공자는 드디어 노나라를 떠나 둔(屯)에서 하루를 묵었다.

악사 기(己)가 공자를 전송하며 말하기를 : “ 선생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떠나십니까 ?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내가 노래로 대답해도 괜찮겠는가?”라고 하며,  공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 군주가 여인의 말을 믿으면 군자는 떠나가고, 군주가 여인을 너무 가까이하면 신하와 나라는 망하도다.

유유히 자적하며 이렇게 세월이나 보내리라."
악사 기가 돌아오자 환자가 묻기를 : “ 공자는 또 무엇이라고 하던가 ? ”라고 하자.  기가 사실대로 고했다.
환자는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 공자는 내가 제나라의 무녀를 받아들인 것을 가지고 나를 책망하고 있구나!”
공자가 드디어 위(衛)나라에 도착해서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衛靈公問孔子:「居魯得祿幾何?」 對曰:「奉粟六萬.」 衛人亦致粟六萬.

居頃之,或譖孔子於衛靈公.  靈公使公孫余假一出一入.  孔子恐獲罪焉,居十月,去衛.

將適陳,過匡,顏刻為僕,以其策指之曰:「昔吾入此,由彼缺也.」 匡人聞之,以為魯之陽虎.

陽虎嘗暴匡人,匡人於是遂止孔子.  孔子狀類陽虎, 拘焉五日.

顏淵後, 子曰:「吾以汝為死矣.」 顏淵曰:「子在, 回何敢死!」匡人拘孔子益急, 弟子懼.

[위영공(衛靈公)이 공자에게 묻기를 : “ 노나라에 있을 때 봉록을 얼마나 받았소 ? ”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조 6만 두(斗)를 받았습니다.”라고 하니 위(衛)나라에서도 역시 조 6만 두의 봉록을 주었다.
공자가 이곳에 거한 지 얼마 안 되어 누가 위영공에게 공자를 참소했다. 

영공이 공손여가(公孫余假)에게 무장한 채 출입하며 공자를 감시하게 했다. 

공자는 억울한 누명이나 쓰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열 달을 머문 뒤 위나라를 떠났다.

공자가 장차 진(陳)나라로 가려고 광(匡)을 지나갔다. 이때 안각이 말을 몰았는데 말채찍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 “ 전에 제가 이곳에 왔을 때는 저 파손된 성곽의 틈 사이로 들어왔었습니다.”라고 하자. 

광(匡) 지역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또 온 것이라고 여겼다.
양호는 일찍이 광 지역 사람들에게 포악하게 대했었다. 광 지역 사람들은 이에 드디어 공자의 앞길을 막았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했기 때문에 공자는 5일간이나 포위당해 있었다.

안연(顔淵)이 뒤따라 도착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나는 자네가 난중에 이미 죽은 줄로 알았지.”라고 하자.
안연이 말하기를 : “ 선생님이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무모하게 죽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광 지역 사람들이 공자를 향해 더욱 급박하게 포위망을 좁혀오자 제자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孔子曰:「文王既沒,文不在茲乎? 天之將喪斯文也,後死者不得與于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匡人其如予何!」孔子使從者為甯武子臣於衛,然後得去.  去即過蒲.

月餘,反乎衛,主蘧伯玉家.  靈公夫人有南子者,

使人謂孔子曰:「四方之君子不辱欲與寡君為兄弟者, 必見寡小君. 寡小君願見.」

孔子辭謝, 不得已而見之.  夫人在絺帷中.  孔子入門, 北面稽首.  夫人自帷中再拜, 環珮玉聲璆然.

孔子曰:「吾鄉為弗見,見之禮答焉.」子路不說.

孔子矢之曰:「予所不者,天厭之!天厭之!」

[공자가 말하기를 : “ 문왕(文王)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려고 하셨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이 문(文)을 전승할 수 없게 했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공자는 사자를 영무자(寧武子)에게 보내어 위(衛)나라의 신하가 되게 한 후에야 비로소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공자는 광 땅을 떠난 뒤 곧 포(蒲)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 달 남짓 머문 후 다시 위(衛)나라로 돌아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에게는 남자(南子)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이르기를 : “ 사방의 군자들은 우리 군주와 친하게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그 부인을 

만납니다. 우리 부인께서 뵙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부득이 가서 만났다.

부인은 휘장 안에 있었다. 공자가 문을 들어가 북쪽을 향해 절을 하자, 부인도 휘장 안에서 답례했는데

이때 허리에 찬 구슬 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돌아와서 공자가 말하기를 : “나는 원래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기왕에 부득이해서 만났으니,

이제는 예로 대접해 주어야겠다.”라고 하였으나,  자로는 역시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하기를 : “ 내가 만일 잘못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 ”하였다.]

 

居衛月餘,靈公與夫人同車,宦者雍渠參乘,出,使孔子為次乘,招搖市過之.

孔子曰:「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於是醜之,去衛,過曹.  是歲,魯定公卒.

孔子去曹適宋,與弟子習禮大樹下.  宋司馬桓魋欲殺孔子, 拔其樹. 孔子去. 弟子曰:「可以速矣.」

孔子曰:「天生德於予,桓魋其如予何!」孔子適鄭,與弟子相失,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東門有人,其顙似堯,其項類皋陶,其肩類子產,然自要以下不及禹三寸.

纍纍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形狀,末也.  而謂似喪家之狗,然哉!然哉!」

孔子遂至陳, 主於司城貞子家.

[위(衛)나라에 머문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영공은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인 옹거(雍渠)를 시위관으로

옆에 태우고 궁문을 나서면서, 공자는 뒷 수레를 타고 따라오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고 뽐내며 시내를 지나갔다.
공자가 말하기를 : “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곳의 정치 환경에 실망하고 위나라를 떠나서 조(曹)나라로 갔다. 이해에 노정공(魯定公)이 죽었다.
공자는 조(曹)나라를 떠나 송(宋)나라로 갔다. 공자는 제자들과 큰 나무 아래에서 예의에 대해서 강습했다.
송나라 사마 환퇴(桓魋)가 공자를 죽이려 했고 그 나무도 뽑아버렸다. 이에 공자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이을 사명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자가 정(鄭)나라에 갔는데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서 홀로 성곽(城郭)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子貢)에게 말하기를 : “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요(陶)와 닮았고, 그 어깨는 자산(子産)과 닮았어요.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禹)임금보다 3촌(寸)이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자공은 이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고했다.

공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기를 : “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고 했다는데, 그것은 정말 그랬었지! 그랬었고 말구!”라고 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진(陳)나라에 이르러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머물렀다.]

 

歲餘, 吳王夫差伐陳, 取三邑而去.  趙鞅伐朝歌.  楚圍蔡, 蔡遷于吳.  吳敗越王句踐會稽.

有隼集于陳廷而死,楛矢貫之,石砮,矢長尺有咫.  陳湣公使使問仲尼.

仲尼曰:「隼來遠矣, 此肅慎之矢也. 昔武王克商, 通道九夷百蠻, 使各以其方賄來貢, 使無忘職業.

於是肅慎貢楛矢石砮,長尺有咫.  先王欲昭其令德,以肅慎矢分大姬,配虞胡公而封諸陳.

分同姓以珍玉,展親;分異姓以遠職,使無忘服.  故分陳以肅慎矢.」 試求之故府,果得之.

[1년 남짓 되었을 때 오왕 부차가 진(陳)나라를 쳐서 세 읍을 빼앗아 돌아갔다.

진(晉)나라의 조앙(趙鞅)은 조가(朝歌)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채(蔡)나라를 포위했고,

채나라는 오나라의 땅으로 옮겨가서 오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오나라는 월왕 구천을 회계(會稽)에서 패배시켰다.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진(陳)나라 궁정에 떨어져 죽었는데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 몸에 꽂혀 있었고 그 화살촉은

돌로 되어 있었으며, 화살의 길이는 1척 8촌이었다. 진민공(陳湣公)이 사자를 보내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 매는 멀리서 왔습니다. 이것은 숙신(肅愼)의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후에

여러 소수민족과 교통하고 각각 그 지방의 특산물을 조공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직책과 의무를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이에 숙신은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로 만든 화살촉을 바쳤는데 길이가 1척 8촌이었습니다.

선왕께서는 그의 미덕을 표창하고자 숙신의 화살을 큰딸 대희(大姬)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 장녀를 우(虞)의 호공(胡公)과 결혼을 시키고, 우호공을 진(陳)나라에 봉했지요.
동성 제후들에게는 진귀한 옥을 나누어주어 친척의 도리를 다하게 했고,
이성 제후들에게는 먼 지방에서 들어온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무왕에게 복종할 것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진(陳)나라에게는 숙신의 화살을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민공이 시험 삼아 옛 창고에서 그 화살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 화살을 찾을 수 있었다.]

 

孔子居陳三歲,會晉楚爭彊,更伐陳,及吳侵陳,陳常被寇.

孔子曰:「歸與!歸與!吾黨之小子狂簡,進取不忘其初.」於是孔子去陳.

過蒲,會公叔氏以蒲畔,蒲人止孔子. 弟子有公良孺者,以私車五乘從孔子. 其為人長賢,有勇力,

謂曰:「吾昔從夫子遇難於匡,今又遇難於此,命也已.  吾與夫子再罹難,寧鬬而死.」鬬甚疾.

蒲人懼,謂孔子曰:「苟毋適衛,吾出子.」 與之盟,出孔子東門.  孔子遂適衛.

子貢曰:「盟可負耶?」 孔子曰:「要盟也,神不聽.」

[공자가 진(陳)나라에 머문 지 3년, 때마침 진(晉)과 초나라가 강함을 다투며 서로 차례로 진(陳)나라를 침범했고,

오나라가 진(陳)나라를 침범할 때까지, 진(陳)나라는 항상 침공을 당했다.
공자가 말했다 :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단지 일을 함에는 소홀함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취성이 있고, 그들은 초지를 잊지 않고 있다.”라고 하며, 이에 공자는 진(陳)나라를 떠났다.
포읍(蒲邑)을 지날 때, 마침 공숙씨(公叔氏)가 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포의 사람들이 공자의 앞길을 막았다.
제자 중에 공양유(公良孺)라는 자가 있어 개인의 수레 다섯 대를 가지고 공자를 따라 주유하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사람됨이 어질며 용기와 힘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 

“ 내 이전에 선생님을 모시고 광(匡)에서 난을 당했었는데, 오늘 또다시 여기서 위험에 부딪히니 실로 운명인가보다.

내 선생님과 함께 다시 위험에 빠지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라고 하였다. 싸움이 심히 격해졌다.
포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공자에게 말하기를 : “ 만일 위(衛)나라로 가지 않는다면 그대를 놓아주겠소.”라고 하였다. 
공자가 맹약하자 그들은 공자 일행을 동문(東門)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공자는 끝내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말하기를 : “ 맹약을 저버려도 됩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강요된 맹약은 신(神)도 들어 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衛靈公聞孔子來,喜,郊迎.  問曰:「蒲可伐乎?」 對曰:「可.」

靈公曰:「吾大夫以為不可.  今蒲,衛之所以待晉楚也,以衛伐之,無乃不可乎?」

孔子曰:「其男子有死之志,婦人有保西河之志.  吾所伐者不過四五人.」

靈公曰:「善.」 然不伐蒲.  靈公老,怠於政,不用孔子.

孔子喟然歎曰:「苟有用我者,朞月而已,三年有成.」孔子行.

[위영공(衛靈公)은 공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교외까지 나가 영접하며 묻기를 : 

“포(蒲)를 공격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영공이 말하기를 : “ 우리 대부(大夫)들은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포는 위(衛)나라가 진(晉)과 초나라를

방어하는 요지인데 위나라가 직접 그곳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그곳의 장정들은 모두 위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의지가 있으며,

부녀자들도 그들의 서하(西河) 땅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토벌하려는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우두머리 4~5명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영공이 말하기를 : “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영공은 포를 공격하지 않았다. 영공은 늙어 정사에 태만했고, 또한 공자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공자는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 “만약 나를 등용하는 자가 있으면, 그 나라는 일 년 동안에 자리가

바로 잡힐 것이요, 3년이면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며, 공자는 위나라를 떠났다.]

 

佛肸為中牟宰.  趙簡子攻范、中行,伐中牟.  佛肸畔,使人召孔子.  孔子欲往.

子路曰:「由聞諸夫子,『其身親為不善者,君子不入也』今佛肸親以中牟畔, 子欲往,如之何?」

孔子曰:「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不曰白乎, 涅而不淄. 我豈匏瓜也哉,焉能系而不食?」

孔子擊磬.  有荷蕢而過門者,曰:「有心哉,擊磬乎!硜硜乎,莫己知也夫而已矣!」

[불힐(佛肹)은 중모(中牟) 지역의 지방장관으로 있었다. 진(晉)나라의 조간자가 범씨와 중항씨 격파하려 하자,

중모에서 조간자에게 불복했기에 조간자는 이 지역을 공격했다.

불힐이 이에 중모를 근거지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협조를 구하고자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는 이에 응하려고 했다. 자로가 말하기를 :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는 ‘스스로 좋지 못한 일을 한 자에게

군자는 가지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불힐은 친히 중모에서 반기를 들었는데도

선생님께서 가려고 하시니 이는 어찌 된 연유입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또한 진정으로 강한 것은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진정으로 하얀 것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 어찌 한해살이 덩굴풀이 되란 말이냐?

어찌 매달려 있기만 하고 사람에게 먹히지 않을 수 있는가 말이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경(磬)을 연주했다. 그때 망태를 메고 문 앞을 지나가던 자가 듣고 말하기를 :

“깊은 생각에 빠졌구나, 경을 연주하는 이여! 이렇게 고집스럽게 울리는 것을 보니,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라고 하였다.]

 

孔子學鼓琴師襄子,十日不進.  師襄子曰:「可以益矣.」

孔子曰:「丘已習其曲矣,未得其數也.」有間,曰:「已習其數,可以益矣.」

孔子曰:「丘未得其志也.」有間,曰:「已習其志,可以益矣.」

孔子曰:「丘未得其為人也.」有間,[曰]有所穆然深思焉,有所怡然高望而遠志焉.

曰:「丘得其為人,黯然而黑,幾然而長,眼如望羊,如王四國,非文王其誰能為此也!」

師襄子辟席再拜,曰:「師蓋云文王操也.」

[공자가 악관인 사양자(師襄子)로부터 거문고 연주를 배웠는데 열흘 동안 진전이 없었다.
사양자가 말하기를 : “이제는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나는 이미 그 곡조는 익혔으나 아직 그 연주하는 술수는 터득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사양자가 말하기를 : “이제는 그 연주하는 술수를 익혔으니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나는 아직 그 곡조의 뜻을 터득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사양자가 말하기를 : “이제는 곡조의 뜻을 익혔으니 다른 곡조를 배워도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나는 아직 이 곡중인(曲中人)의 사람됨을 터득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공자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깊이 생각했고, 또 유쾌하게 원대한 뜻을 바라보게 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이제야 나는 그 곡중인의 사람됨을 알았습니다. 피부는 검고, 키는 크며, 눈은 빛나고,

멀리 바라보는데 마치 사방 제후국을 다스리는 것 같았으니, 이는 문왕이 아니면 그 누구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사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며 말하기를 : “저의 스승님도 “문왕조(文王操)”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孔子既不得用於衛, 將西見趙簡子.  至於河而聞竇鳴犢、舜華之死也,

臨河而嘆曰:「美哉水,洋洋乎!丘之不濟此,命也夫!」子貢趨而進曰:「敢問何謂也?」

孔子曰:「竇鳴犢,舜華,晉國之賢大夫也.  趙簡子未得志之時,須此兩人而后從政;

及其已得志,殺之乃從政.  丘聞之也:刳胎殺夭,則麒麟不至郊;竭澤涸漁,則蛟龍不合陰陽;

覆巢毀卵, 則鳳皇不翔.  何則?君子諱傷其類也.  夫鳥獸之於不義也尚知辟之,而況乎丘哉!」

乃還息乎陬鄉,作為陬操以哀之.  而反乎衛,入主蘧伯玉家.

[공자는 위(衛)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하자 장차 서쪽으로 가서 진(晉)나라의 조간자를 만나려고 했다.
황하에 이르러서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피살된 소식을 듣고서 탄식해서 말하기를 : 
“아름답구나 황하여, 넓고 넓도다! 내가 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는 것은 또한 운명이로다!”라고 하였다. 
자공이 달려 나와 묻기를 : “감히 여쭈어 보건데 지금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아직 뜻을 얻지 못했을 때 모름지기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정치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뜻을 이루자 도리어 그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내가 듣기로 배를 갈라 새끼까지 죽이면 기린(麒麟)이 교외에 이르지 아니하고,
연못을 마르게 해 고기잡이를 하면 교룡(蛟龍)이 운우(雲雨)를 일으켜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둥지를 뒤엎어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군자는 자기와 같은 무리가 상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무릇 새와 짐승도 의롭지 못한 것을 오히려 피할 줄 아는데 하물며 나야 더이상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추향(陬鄕)에 되돌아가 쉬면서 “추조(陬操)”를 지어 두명독과 순화를 애도했다.

후에 공자는 위(衛)나라로 돌아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서 살았다.]

 

他日,靈公問兵陳.  孔子曰:「俎豆之事則嘗聞之,軍旅之事未之學也.」

明日,與孔子語,見蜚鴈,仰視之,色不在孔子.  孔子遂行,復如陳.

夏,衛靈公卒,立孫輒,是為衛出公.

六月,趙鞅內太子蒯聵于戚.  陽虎使太子絻,八人衰絰,偽自衛迎者,哭而入,遂居焉.

冬,蔡遷于州來.

[어느 날 위영공(衛靈公)이 군대의 진법(陣法)을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제사 지내는 일은 일찍이 들었으나, 군사의 일은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영공이 공자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쳐다보며 공자의 말에는 열중하지 않았다.
공자는 드디어 그곳을 떠나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
이해 여름, 위영공이 죽자 손자 첩(輒)을 세웠는데, 그가 위출공(衛出公)이다.
6월, 조앙(趙鞅)이 태자 괴외(蒯聵)를 척(戚)으로 받아들였다. 조앙의 명을 받은 양호가 태자에게 상복을 입히고,

여덟 명에게 최질(衰絰 :상중(喪中)에 입는 삼베옷 )을 입혀 위(衛)나라에서 온 영접자로 가장해 울며

척으로 들어와 드디어 거기에서 머물러 살게 되었다.
겨울에 채(蔡)나라는 주래(州來)로 천도했다.]

 

是歲魯哀公三年,而孔子年六十矣.  齊助衛圍戚,以衛太子蒯聵在故也.

夏,魯桓釐廟燔,南宮敬叔救火.  孔子在陳,聞之,曰:「災必於桓釐廟乎?」已而果然.

秋,季桓子病,輦而見魯城,喟然嘆曰:「昔此國幾興矣,以吾獲罪於孔子,故不興也.」

顧謂其嗣康子曰:「我即死,若必相魯;相魯,必召仲尼.」

[그 이듬해는 노애공(魯哀公) 3년, 이때 공자의 나이는 60세였다.
제나라의 도움으로 위나라는 척을 포위했는데, 그것은 위나라의 태자 괴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여름, 노나라의 환공(桓公)과 희공(釐公)의 묘에 불이 났다.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불을 껐다.
그때 공자는 진(陳)나라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

“재해는 틀림없이 환공과 희공의 묘에서 났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과연 나중에 알아보니 그러했다.
가을에 계환자(季桓子)가 병이 들었는데, 마차에 올라 노나라의 도성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
“이전에 이 나라는 흥성할 수가 있었는데 내가 공자를 등용해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까닭에 흥성하지 못했다”
그는 또 후계자인 강자(康子)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노나라의 정권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거든 반드시 공자를 초청해 오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後數日,桓子卒,康子代立.  已葬,欲召仲尼.

公之魚曰:「昔吾先君用之不終,終為諸侯笑.  今又用之,不能終,是再為諸侯笑.」

康子曰:「則誰召而可?」曰:「必召冉求.」於是使使召冉求.

冉求將行,孔子曰:「魯人召求,非小用之,將大用之也.」

是日,孔子曰:「歸乎歸乎!吾黨之小子狂簡,斐然成章,吾不知所以裁之.」

子貢知孔子思歸,送冉求,因誡曰「即用,以孔子為招」云.

冉求既去,明年,孔子自陳遷于蔡.  蔡昭公將如吳,吳召之也.

前昭公欺其臣遷州來,後將往,大夫懼復遷,公孫翩射殺昭公.  楚侵蔡.  秋,齊景公卒.

[그 후 며칠 지나서 계환자가 죽고, 강자가 대를 이었다. 장례가 끝난 뒤 강자는 공자를 부르려고 했다.

공지어(公之魚)가 말하기를 : “지난날에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고자 하셨으나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해

결국 제후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또 그를 등용하려다가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면

이는 또다시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강자가 말하기를 : “그러면 누구를 초빙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공지어가 말하기를 : “반드시 염구(冉求)를 부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염구를 불렀다.
염구가 초빙에 응하려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우리 노나라 사람이 구(求)를 부르는 것을 보니,

이것은 작게 등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크게 등용하려는 것이리라.”라고 하였다.
이날 공자는 또 말하기를 :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행하는 것에서는 

소홀하고 거칠며, 문장은 훌륭하니 나는 어떻게 그들을 지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자공(子貢)은 공자에게 노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있음을 알고 염구를 전송할 때 부탁하며 말하기를 :

“곧 등용되면 선생님을 모셔가도록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염구가 가고 다음해에 공자는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옮겨 갔다.

채소공(蔡昭公)이 장차 오나라에 가려고 했는데, 이는 오나라 왕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소공이 신하들을 속이고 주래(州來)로 천도했는데, 지금 다시 오나라로 가려고 하자,

대부들이 또 천도할까 두려워했고 마침내 공손편(公孫翩)이 소공을 쏘아 죽였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침공했다. 가을에는 제경공(齊景公)이 죽었다.]

 

明年,孔子自蔡如葉.  葉公問政, 孔子曰:「政在來遠附邇.」他日,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孔子聞之,曰:「由,爾何不對曰『其為人也,學道不倦,誨人不厭,發憤忘食,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去葉,反于蔡.  長沮、桀溺耦而耕,孔子以為隱者,使子路問津焉.

長沮曰:「彼執輿者為誰?」子路曰:「為孔丘.」 曰:「是魯孔丘與?」曰:「然.」

曰:「是知津矣.」 桀溺謂子路曰:「子為誰?」曰:「為仲由.」

曰:「子,孔丘之徒與?」 曰:「然.」

桀溺曰:「悠悠者天下皆是也,而誰以易之?且與其從辟人之士,豈若從辟世之士哉!」

耰而不輟. 子路以告孔子,孔子憮然曰:「鳥獸不可與同群.  天下有道,丘不與易也.」

[다음해 공자는 채나라에서 섭(葉)으로 갔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

“정치란 멀리 있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훗날 섭공은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을 물었으나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 “유(由)야, 너는 왜 선생의 사람됨이 도를 배우는 데 권태를 느끼지 않고,

사람을 깨우치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으며, 일에 열중해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으면서, 늙어가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였다.
공자는 섭(葉)을 떠나 채나라로 돌아오는 도중에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같이 밭을 가는 것을 보았다.
공자는 그 사람들이 은자(隱者)라고 생각해 자로로 하여금 그들에게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물어보도록 했다.
장저가 자로에게 말하기를 : “수레 위의 고삐를 잡고 있는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자로가 대답하기를 : “ 공자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장저가 묻기를 : “ 그가 노나라의 공자입니까?”라고 하자. 자로가 대답하기를 : “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다.
장저가 말하기를 : “그렇다면 나루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걸익이 자로를 향해 묻기를 :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자로가 대답하기를 : “ 중유(仲由)입니다.” 라고 하였다.

걸익이 묻기를 : “ 당신은 공자의 제자입니까?”라고 하자,  자로가 대답하기를 :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걸익이 묻기를 : “ 천하가 온통 어지러운데, 그 누가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저와 걸익은 이렇게 말하고 계속해서 자기네들이 하던 흙으로 씨를 덮는 일을 했다.

자로가 이들이 한 말을 공자에게 알리자,
공자가 실망하며 말하기를 : “사람이란 인간 사회를 피해서 짐승들과 무리를 같이해 살 수는 없다.
천하에 도가 통한다면 나도 이를 바꾸려고 여러 나라로 쫓아다니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他日,子路行,遇荷蓧丈人,曰:「子見夫子乎?」

丈人曰:「四體不勤,五穀不分,孰為夫子!」植其杖而芸.

子路以告,孔子曰:「隱者也.」復往,則亡.

孔子遷于蔡三歲,吳伐陳.  楚救陳,軍于城父.  聞孔子在陳蔡之間,楚使人聘孔子.

孔子將往拜禮,陳蔡大夫謀曰:「孔子賢者,所刺譏皆中諸侯之疾.  今者久留陳蔡之間,

諸大夫所設行皆非仲尼之意.  今楚,大國也,來聘孔子.  孔子用於楚,則陳蔡用事大夫危矣.」

於是乃相與發徒役圍孔子於野.  不得行,絕糧.  從者病,莫能興.  孔子講誦弦歌不衰.

[어느 날 자로가 길을 가다가 다래끼를 메고 있는 노인을 만나 묻기를 : “우리 선생님을 보지 못했습니까?”하자,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 “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구별하지 못할 터인데,

당신의 선생이 누군지 내가 어찌 알겠소!”라고 하였다. 그는 계속 지팡이를 세워두고 풀을 뽑았다.

자로가 이를 고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그는 은자임에 틀림없다.”라고 하며. 

다시 가보았으나 그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공자가 채나라로 옮긴 지 3년이 되던 해에

오나라는 진(陳)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는 진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진보(陳父)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초나라에서는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 지역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가 가서 예를 갖추려고 하자,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 “ 공자는 현인이다.

그가 비난하는 바는 모두 제후들의 잘못과 들어맞는다. 지금 그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에 오래 머물고 있는데,

그간 여러 대부들이 한 행실은 모두 공자의 뜻에 맞지 않는다. 

지금의 초나라는 큰 나라인데 공자를 초빙하려고 한다.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되면 우리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일하는 대부들은 모두 위험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각각 노역자들을 보내어 들판에서 공자를 포위했다.
그래서 공자는 초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어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러나 공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학술강의도 하고 책도 낭송하고 거문고도 타면서 지냈다.]

 

子路慍見曰:「君子亦有窮乎?」 孔子曰:「君子固窮,小人窮斯濫矣.」子貢色作.

孔子曰:「賜,爾以予為多學而識之者與?」曰:「然. 非與?」

孔子曰:「非也. 予一以貫之.」孔子知弟子有慍心,

乃召子路而問曰:「《詩》云『匪兕匪虎,率彼曠野』. 吾道非邪?吾何為於此?」

子路曰:「意者吾未仁邪?人之不我信也. 意者吾未知邪?人之不我行也.」

孔子曰:「有是乎!由,譬使仁者而必信,安有伯夷、叔齊?使知者而必行,安有王子比干?」

子路出,子貢入見.

[자로가 화가 나서 공자에게 따져 묻기를 :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군자는 곤궁해도 절개를 지키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분수에 지나친 행동을 한다.”하였다.
자공이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했다.

공자가 묻기를 : “사(賜)야, 너는 내가 박학다식해서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 그렇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 “그렇지 않다. 나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을 가지고 전체의 지식을 통찰한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마음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곧 자로를 불러서 묻기를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라고 하자. 
자로가 대답하기를 : “아마도 우리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게지요.
아마도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게지요.”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중유(仲由)야, 만약에 어진 사람이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는다면
어째서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또 만약에 지혜로운 사람이 반드시 장애 없이 

실행할 수 있다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심장을 해부당했겠느냐?”라고 하였다.

자로가 나가자 자공(子貢)가 들어와 공자를 뵈었다.]

 

孔子曰:「賜,《詩》云『匪兕匪虎,率彼曠野』. 吾道非邪?吾何為於此?」

子貢曰:「夫子之道至大也,故天下莫能容夫子.  夫子蓋少貶焉?」

孔子曰:「賜,良農能稼而不能為穡,良工能巧而不能為順.  君子能脩其道,綱而紀之,

統而理之,而不能為容.  今爾不脩爾道而求為容.  賜,而志不遠矣!」子貢出,顏回入見.

[공자가 말하기를 : “사(賜)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라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라고 하자.
자공이 대답하기를 :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자신의 도를 약간 낮추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 “사야, 훌륭한 농부가 비록 씨 뿌리기에 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곡식을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고,
훌륭한 장인(匠人)이 비록 정교한 솜씨를 가졌을지라도 반드시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군자가 그 도를 잘 닦아서 기강을 세우고 통치를 잘 할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세상에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너는 너의 도는 닦지 않고서, 스스로의 도를 낮추어서까지 남에게 수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야, 너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구나.”라고 하였다. 자공이 나가고 안회(顔回)가 들어와서 공자를 뵈었다.]

 

孔子曰:「回, 《詩》云『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吾何為於此?」

顏回曰:「夫子之道至大, 故天下莫能容.  雖然,夫子推而行之, 不容何病,不容然後見君子!

夫道之不修也, 是吾醜也. 夫道既已大修而不用, 是有國者之醜也.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孔子欣然而笑曰:「有是哉顏氏之子!使爾多財,吾為爾宰.」  

於是使子貢至楚.  楚昭王興師迎孔子,然後得免.

[공자가 묻기를 : “ 회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

라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라고 하자.
안회가 대답하기를 :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선생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도를 추진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후에 더욱 군자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치욕입니다. 그리고 무릇 도가 잘 닦여진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수치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후에 더욱더 군자의 참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기뻐서 웃으며 하기를 ; “ 그렇던가, 안씨 집안의 자제여! 자네가 만약 큰 부자가 된다면

나는 자네의 재무 관리자가 되겠네.”라고 하며, 그리하여 자공을 초나라에 보냈다.

초소왕(楚昭王)이 군대를 보내 공자를 보호하고 맞이하자 비로소 공자는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昭王將以書社地七百里封孔子.  楚令尹子西曰:「王之使使諸侯有如子貢者乎?」

曰:「無有.」「王之輔相有如顏回者乎?」曰:「無有.」

「王之將率有如子路者乎?」曰:「無有.」「王之官尹有如宰予者乎?」曰:「無有.」

「且楚之祖封於周,號為子男五十里.  今孔丘述三五之法,明周召之業,王若用之,

則楚安得世世堂堂方數千里乎?夫文王在豐,武王在鎬,百里之君卒王天下.

今孔丘得據土壤,賢弟子為佐,非楚之福也.」 昭王乃止.  其秋,楚昭王卒于城父.

[소왕이 장차 서사(書社)의 땅 7백 리로 공자를 봉하려고 했다. 그러자 초나라의 재상 자서(子西)가 묻기를 : 
"왕의 사신으로 제후에게 보낼 사람 중에서 자공만한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소왕이 대답하기를 : “그럴만한 사람이 없소.”라고 하였다. 

자서(子西)가 묻기를 : “왕을 보필할 신하 중에서 안회만한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소왕이 대답하기를 : “그럴만한 사람이 없소.”라고 하였다.
자서(子西)가 묻기를 : “왕의 장수 중에서 자로만한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소왕이 대답하기를 : “그럴만한 사람이 없소.”라고 하였다.

자서(子西)가 묻기를 : “왕의 장관 중에서 재여(宰予)만한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소왕이 대답하기를 : “그럴만한 사람이 없소.”라고 하였다.
자서는 이어서 말하기를 : " 하물며 초나라의 선조가 주나라로부터 봉함을 받았는데 그때 봉호는 자남작이었고,

봉지는 50 리였습니다. 지금 공자는 삼황오제의 치국방법을 말하고 주공(周公), 소공(召公)의 덕치를 본받고 있으니,

왕께서 만약 공자를 등용하신다면 초나라가 어떻게 대대로 당당하게 다스려온 수천 리 땅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문왕(文王)은 풍(豐) 땅에서 일어났고, 무왕(武王)은 호(鎬) 땅에서 일어났지만 백리밖에 안 되는

작은 땅을 가진 군주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던 것입니다.

지금 공자가 근거할 땅을 얻고 저렇게 많은 현명한 제자들이 그를 보좌한다면

이것은 우리 초나라에 결코 좋은 일이 못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왕은 이 말을 듣고 본래의 계획을 취소했다.

그해 가을, 초소왕은 성보(城父)에서 세상을 떠났다.]

 

楚狂接輿歌而過孔子曰:「鳳兮!鳳兮!何德之衰?往者不可諫兮,來者猶可追也!

已而, 已而!今之從政者殆而!」孔子下,欲與之言.  趨而去,弗得與之言. 

於是孔子自楚反乎衛.  是歲也,孔子年六十三,而魯哀公六年也. 

其明年,吳與魯會繒,徵百牢.  太宰嚭召季康子.  康子使子貢往,然後得已.

孔子曰:「魯衛之政,兄弟也.」 是時,衛君輒父不得立,在外,諸侯數以為讓.

而孔子弟子多仕於衛,衛君欲得孔子為政.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接與)가 공자 앞을 지나가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 봉황새야, 봉황새야!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했나!  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지금 정치하는 자 다 위험할 것이로다!"
공자는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으나 그가 급히 피해버려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때 공자는 초나라에서 위(衛)나라로 돌아왔다. 이해 공자의 나이는 63세였고, 때는 노애공 6년이었다.
그 다음해 오나라는 노나라와 증(繒)에서 회합하고 노나라에게 제사에 쓸 백뢰(百牢)를 요구했다.
태재(太宰) 비(嚭)가 계강자를 소환했다. 강자(康子)는 자공을 초나라로 보내어 응대케 함으로써 비로소

가축을 바치는 일을 모면하게 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처럼 비슷하다.”

이때 위나라의 군주 첩(輒)의 부친 괴외(蒯聵)는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국외에 망명 중이었는데,

제후들은 위나라 군주에 대해 부친에게 양위해야 한다고 수차례 책망했다.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위나라 군주는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싶어했다.]

 

子路曰:「衛君待子而為政,子將奚先?」孔子曰:「必也正名乎!」

子路曰:「有是哉,子之迂也!何其正也?」

孔子曰:「野哉由也!夫名不正則言不順,言不順則事不成,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刑罰不中則民無所錯手足矣.  夫君子為之必可名,言之必可行.

君子於其言,無所苟而已矣.」

[자로가 묻기를 : “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께 정사를 맡기고자 하는데 맡으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슨 일을 제일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자로가 묻기를 :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을 절실하지 못하고 현실에 맞지 않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습니다.

무슨 명분을 바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정말 거칠구나, 유(由)야! 대저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성취되지 않으며, 일이 성취되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않고, 형벌이 적중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그래서 군자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명분에 부합되어야 하고,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군자의 말에는 경솔함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其明年,冉有為季氏將師,與齊戰於郎,克之.  季康子曰:「子之於軍旅,學之乎?性之乎?」

冉有曰:「學之於孔子.」 季康子曰:「孔子何如人哉?」

對曰:「用之有名;播之百姓,質諸鬼神而無憾.  求之至於此道,雖累千社,夫子不利也.」

康子曰:「我欲召之,可乎?」對曰:「欲召之,則毋以小人固之,則可矣.」

而衛孔文子將攻太叔,問策於仲尼.

仲尼辭不知,退而命載而行,曰:「鳥能擇木,木豈能擇鳥乎!」文子固止.

會季康子逐公華、公賓、公林,以幣迎孔子,孔子歸魯.

[그 다음해 염유(冉有)는 계씨(季氏)의 명을 받고 장군이 되어 낭(郎)에서 제나라와 싸워서 이겼다.
계강자가 묻기를 : “그대는 군사에 관한 것을 배웠는가? 아니면 본래 그 방면에 재주가 있는 것인가?”라고 하자. 
염유가 대답하기를 : “공자에게서 배웠습니다.”라고 하였다. 

계강자가 묻기를 :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자. 
염유가 대답하기를 : “공자를 등용하면 나라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정치방법은 백성들에게 시행하거나,

여러 신들에게 고하거나 간에 아무런 유감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나와 같은 이 길을 걷게 한다면

비록 8만 5천 호인 천 사(千社)를 준다 해도 공자는 그 이익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계강자가 말하기를 : “나는 공자를 초빙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라고 하자.

염유가 대답하기를 : “그를 부르고자 하신다면 그를 신임하시어 소인들이 그를 방해하지 못하게만 하신다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위(衛)나라의 공문자(孔文子)는 장차 태숙(太叔)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그 계책을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모른다고 사양하고, 곧 물러나 수레를 준비시켜 떠나면서 말하기를 :

“새는 나무를 선택하며 서식할 수 있지만, 나무가 어찌 새를 택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문자는 공자를 한사코 만류했으나 마침 이때 계강자가 공화(公華), 공빈(公賓), 공림(公林)을 내쫓고,

예물을 갖추어서 공자를 초빙했기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孔子之去魯凡十四歲而反乎魯.  魯哀公問政,對曰:「政在選臣.」

季康子問政,曰:「舉直錯諸枉,則枉者直.」

康子患盜,孔子曰:「苟子之不欲,雖賞之不竊.」 然魯終不能用孔子,孔子亦不求仕.

孔子之時, 周室微而禮樂廢, 詩書缺. 追跡三代之禮, 序書傳, 上紀唐虞之際, 下至秦繆, 編次其事.

曰:「夏禮吾能言之,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宋不足徵也.  足,則吾能徵之矣.」

觀殷夏所損益,曰:「後雖百世可知也,以一文一質.  周監二代,郁郁乎文哉.  吾從周.」

故《書傳》,《禮記》自孔氏.

孔子語魯大師:「樂其可知也.  始作翕如, 縱之純如, 皦如, 繹如也, 以成.」

「吾自衛反魯,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노애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 정치의 근본은 신하를 잘 뽑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계강자도 정치에 관해서 질문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정직한 사람을 뽑아서 부정직한 사람 위에 놓으면,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해집니다.”라고 하였다. 
계강자가 도적이 횡행함을 근심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 “ 진실로 당신 자신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으며 공자 또한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시대에는 주(周)왕실이 쇠퇴해져 예악(禮樂)은 폐지되었고, 『시경』과 『서경』은 훼손되었다.
이에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해 서전(書傳)의 편차를 정하되, 위로는 요(堯)와 순(舜) 임금의 시대부터,
아래로는 진목공(秦繆公)에 이르기까지 그 사적을 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 “하(夏)나라의 예는 내가 능히 그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 후 대인 기(杞)나라의 것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은(殷)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송나라의 것에 대해서는 증명하기에

부족하다. 만약에 기나라와 송나라의 문헌이 충분했다면 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또 은과 하나라의 예(禮) 가운데 부족하거나 더해진 것을 보고 말하기를 : 

“차후로 비록 백세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예제(禮制)의 변천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은나라는 질박함을 귀히 여겼고,

주나라는 문화(文華)함을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주(周) 왕조는 하와 은 2대의 제도를 귀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문화는 참으로 풍성하고 화려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는 공자로부터 처음으로 편찬되어 나왔다고 한다.
공자가 노나라의 태사(太師)에게 말하기를 : “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은 이해할 수 있다.

연주를 시작할 때에는 5음이 조화를 이루고, 그 다음으로는 청순하고 잘 어울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여운을 남김으로써 비로소 한 곡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

비로소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雅)」와 「송(頌)」이 각기 제자리를 찾았다.”라고 하였다.]

 

古者詩三千餘篇,及至孔子,去其重,取可施於禮義,上采契后稷,中述殷周之盛,至幽厲之缺,

始於衽席,故曰「關雎之亂以為風始,鹿鳴為小雅始,文王為大雅始,清廟為頌始」.

三百五篇孔子皆弦歌之,以求合韶武雅頌之音.  禮樂自此可得而述,以備王道,成六藝.

孔子晚而喜易,序彖、繫、象、說卦、文言.  讀易,韋編三絕.

曰:「假我數年,若是,我於易則彬彬矣.」

孔子以詩書禮樂教,弟子蓋三千焉,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  如顏濁鄒之徒,頗受業者甚眾.

[옛날에는 시(詩)가 3천여 편이었으나 공자에 이르러 그 중복된 것을 빼고 예의에 응용할 수 있는 것만 취했다.
위는 설(契)과 후직(后稷)에 관한 시이고, 중간은 은과 주 나라의 성대함을 서술한 시이며,

아래는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의 실정(失政)에 관한 시에까지 이르렀다.
시의 내용은 임석(衽席) 등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풍(風)」은 「관저(關雎)」 편으로 시작하고, 「소아(小雅)」는 「녹명(鹿鳴)」 편으로 시작하고,

「대아(大雅)」는 「문왕(文王)」 편으로 시작하고, 「송(頌)」은 「청묘(淸廟)」 편으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정리한 305편의 시에 공자는 모두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부름으로써 “소(韶)”, 「무(武)」, 「아(雅)」,

「송(頌)」의 음악에 맞추려고 했다.
예와 악이 이로부터 회복되어 서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六藝)가 완성되었다.
공자는 만년에 『주역』을 좋아해 「단(彖)」「계(繫)」「상(象)」「설괘(說卦)」「문언(文言)」 편을 정리했다.
공자는 죽간을 꿴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만큼 『주역(周易』을 무수히 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 만약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을 더 준다면 나는 『주역(周易』에 대해서는

그 문사(文辭)와 의리(義理)에 다 통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교재로 삼아 가르쳤는데, 제자가 약 3천명에 이르렀고,

그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안탁추(顔濁鄒)와 같이 다방면으로 가르침을 받고도 72명의 제자 중에 들지 못한 자도 대단히 많았다.]

 

孔子以四教:文,行,忠,信.  絕四:毋意,毋必,毋固,毋我.  所慎:齊,戰,疾.

子罕言利與命與仁.  不憤不啟,舉一隅不以三隅反,則弗復也.  其於鄉黨,恂恂似不能言者.

其於宗廟朝廷,辯辯言,唯謹爾.  朝,與上大夫言,誾誾如也;與下大夫言,侃侃如也.

入公門,鞠躬如也;趨進,翼如也.  君召使儐,色勃如也.  君命召,不俟駕行矣.

魚餒,肉敗,割不正,不食.  席不正,不坐.  食於有喪者之側,未嘗飽也. 

是日哭,則不歌.  見齊衰、瞽者,雖童子必變.

[공자는 네 방면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것은 문, 행, 충, 신이다. 그리고 네 가지를 금기시켰는데,

그것은 즉 ‘억측하지 말 것’, ‘독단하지 말 것’, ‘고집하지 말 것’,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가 신중히 생각했던 것은 곧 재계(齋戒), 전쟁, 질병이었다. 공자는 이익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익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에는 반드시 운명과 결부시켜 말하거나 인덕(仁德)과 결부시켜 말했다.
공자는 제자를 가르칠 때 발분하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았고,

또 한 가지 문제를 가르쳐서 이와 유사한 다른 세 가지 문제를 물어오지 않으면, 다시 되풀이해서 가르치지 않았다.

공자는 향당(鄕黨)에서는 공손해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과도 같았으나,

종묘나 조정에서는 조리 있게 말을 잘하면서도 오로지 신중히 했다.

조정에서 상대부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태연하면서도 할 말을 능히 다했으며,
하대부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온화하면서도 즐겁게 대했다.
공자는 군주의 궁문을 들어갈 때에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고,

그 앞으로 빨리 걸어 나아갈 때에는 단정하게 예의를 차렸다. 왕이 그에게 손님을 접대하게 명하면,

정성을 다하는 표정이었으며, 왕의 부름이 있을 때에는 마차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달려갔다.
공자는 생선이 상했거나 고기가 부패했거나 또는 아무렇게나 잡아서 멋대로 잘라 놓은 고기는 먹지 않았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고, 상(喪)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할 때에는 배불리 먹은 일이 없었다.
곡(哭)한 날은 종일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사람이나 맹인을 보면 비록 그가 어린애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표정을 바꾸어 동정을 표시했다.]

 

「三人行,必得我師.」「德之不脩,學之不講,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是吾憂也.」

使人歌,善,則使復之,然后和之.  子不語:怪,力,亂,神.

子貢曰:「夫子之文章,可得聞也.  夫子言天道與性命,弗可得聞也已.」

顏淵喟然嘆曰:「仰之彌高,鑽之彌堅.  瞻之在前,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約我以禮,欲罷不能.  既竭我才,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蔑由也已.」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사람이 있다”라고 했으며,

“덕을 닦지 않고, 학문을 강습하지 않고, 의로운 이치를 듣고도 좇아가 행하지 않고,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은 것, 이 몇 가지가 바로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노래를 시켜서 잘 부르면 다시 부르게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를 따라 불렀다
공자는 괴이한 것, 폭력, 문란한 것 그리고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자공이 말하기를 : " 선생님의 시, 서, 예, 악에 대한 가르치심은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의 천도(天道)와 성명(性命)에 대한 가르치심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자.

연이(顔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선생님의 도학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깊이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앞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면 홀연 뒤에 가 있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고,

풍부한 전적과 문장으로 나를 박학하게 해주시고, 예의와 도덕으로 나를 절제하게 하시니,

내가 학문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 재주를 다해 보았지만,
선생님의 학문은 내 앞에 우뚝 서 있어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방법이 없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達巷黨人童子曰:「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曰:「我何執?執御乎?執射乎?我執御矣.」 牢曰:「子云『不試, 故藝』」

魯哀公十四年春,狩大野.  叔孫氏車子鉏商獲獸,以為不祥.

仲尼視之,曰:「麟也.」取之. 曰:「河不出圖,雒不出書,吾已矣夫!」

顏淵死,孔子曰:「天喪予!」及西狩見麟,曰:「吾道窮矣!」喟然嘆曰:「莫知我夫!」

[달항(達巷)이라는 마을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 공자는 참으로 위대하도다.

그러나 아깝게도 박학하면서도 일예(一藝)에는 명성을 세우지 못했다!”라고 하자.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 “나는 어떤 일에 마음을 다해야 했겠는가? 마부가 되어야 했겠는가?

궁수가 되어야 했겠는가? 나는 마부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뢰가 말하기를 : “선생님께서는 ‘나는 등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기예를 배울 수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노애공 14년 봄, 대야(大野)에서 수렵을 했다. 숙손씨(叔孫氏)의 마부 서상(鉏商)이 괴상한 짐승을 잡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공자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 " 그것은 기린이다.”라고 하자, 그제에서야 그들은 그것을 취해 돌아왔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기를 : “옛날처럼 황하에서 다시는 용이 도판(圖版)을 메고 나타나지 않고,
낙수(洛水)에서 다시는 거북이 서판(書版)을 지고 나타나지 않으니, 나의 희망도 이제는 끝나는가보다.”라고 하였다.
안연이 죽자 공자는 말하기를 :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하였다. 
곡부(曲阜)의 서쪽에서 잡힌 기린을 보자 공자는 말하기를 : “도(道)를 행하려는 나의 희망도 이제는 다 끝났구나.”
공자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 “나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구나!”라고 하였다.] 

 

子貢曰:「何為莫知子?」子曰:「不怨天,不尤人,下學而上達,知我者其天乎!」

「不降其志,不辱其身,伯夷、叔齊乎!」謂「柳下惠、少連降志辱身矣」.

謂「虞仲、夷逸隱居放言,行中清,廢中權」.「我則異於是,無可無不可.」

子曰:「弗乎弗乎,君子病沒世而名不稱焉.  吾道不行矣,吾何以自見於後世哉?」

乃因史記作春秋,上至隱公,下訖哀公十四年,十二公.

[자공이 묻기를 : “어째서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래에서 인간사를 배워 위로 천명에 이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뿐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백이와 숙제가 아닌가!”
또 말하기를 :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했다.”라고 하면서, 
또 말하기를 :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은 은거해 세상사를 논하지 않았고, 행동은 깨끗했으며,

자리에서 물러나 화를 면하는 방법도 시의적절했다.”라고 하며,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다르다.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 “안 되지, 안 돼.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라고 하면서,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이것은 위로는 은공(隱公)에서 아래로는 애공(哀公) 14년까지 모두 열 두 군주의 역사를 다루었다.]

 

據魯,親周,故殷,運之三代.  約其文辭而指博.  故吳楚之君自稱王,

而春秋貶之曰「子」;踐土之會實召周天子,而春秋諱之曰「天王狩於河陽」: 推此類以繩當世.

貶損之義,後有王者舉而開之.  春秋之義行,則天下亂臣賊子懼焉.

孔子在位聽訟, 文辭有可與人共者, 弗獨有也.  至於為春秋, 筆則筆, 削則削, 子夏之徒不能贊一辭.

弟子受春秋,孔子曰:「後世知丘者以春秋,而罪丘者亦以春秋.」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나라를 종주로 하고 은나라의 제도를 참작해

하(夏), 상(商), 주(周)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지만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그래서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주가 왕을 자칭했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본래의 작위인

자작(子爵)으로 칭했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은 실제로는 제후가 주나라의 천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수렵을 나갔다”라고 기록했다.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해 폄하하고 꾸짖는 이유는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해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해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공자는 지난날 소송안건을 심리했을 때에도 문사상(文辭上)의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에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전수받은 뒤,

공자는 말하기를 :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明歲,子路死於衛.  孔子病,子貢請見.  孔子方負杖逍遙於門,曰:「賜,汝來何其晚也?」

孔子因歎,歌曰:「太山壞乎!梁柱摧乎!哲人萎乎!」因以涕下.

謂子貢曰:「天下無道久矣,莫能宗予.  夏人殯於東階,周人於西階,殷人兩柱閒.

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予始殷人也.」後七日卒.

孔子年七十三,以魯哀公十六年四月己丑卒.

[그 다음해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 공자가 병이 나서 자공이 뵙기를 청했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에 의지해 문 앞을 거닐고 있다가 묻기를 : “사(賜)야,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라고 하며, 

탄식하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기둥이 부러진다는 말인가! 

철인(哲人)이 죽어간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또 자공을 보고 말하기를 :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고,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제 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  그후 7일이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73세로, 그것은 노애공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의 일이었다.]

 

哀公誄之曰:「旻天不弔,不愸遺一老,俾屏余一人以在位,煢煢余在疚.

嗚呼哀哉!尼父,毋自律!」

子貢曰:「君其不沒於魯乎!夫子之言曰:『禮失則昬,名失則愆.  失志為昬,失所為愆.』

生不能用,死而誄之,非禮也.  稱『余一人』,非名也.」 孔子葬魯城北泗上,弟子皆服三年.

三年心喪畢,相訣而去,則哭,各復盡哀;或復留.  唯子貢廬於冢上,凡六年,然後去.

[애공이 그를 애도하는 글을 지어 말하기를 : “하늘도 무심해 이 한 노인마저 남겨 놓지 않고 데려가고,
나 한 사람만 여기다가 버려두어 외로움에 울게 하는구나! 아, 슬프다! 이부(尼父)여,

내 다시는 스스로에 얽매이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자공이 말하기를 : “군주는 아마도 노나라에서 천명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시기를 ‘예절을 잃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명분을 잃으면 허물이 생긴다.

의지를 잃게 되면 혼란이 오고, 당위성을 잃는 것은 과실이다’라고 하셨는데,

살아 생전에 중용하지 못하고서 죽은 후에 애도하는 것은 곧 예의에 합당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또 제후의 신분으로 ‘나 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은 실로 명분에 맞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의 사수(泗水) 부근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으로 3년 상을 다 마치고 서로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는데,
헤어질 때 한바탕 통곡하고 각자 다시금 애도를 다했으며, 어떤 제자는 다시 머무르기도 했다.
오직 자공만은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6년을 더 지키다가 떠나갔다.]

 

弟子及魯人往從冢而家者百有餘室,因命曰孔里.

魯世世相傳以歲時奉祠孔子冢,而諸儒亦講禮鄉飲大射於孔子冢.  孔子冢大一頃.

故所居堂弟子內,後世因廟藏孔子衣冠琴車書,至于漢二百餘年不絕.

高皇帝過魯,以太牢祠焉.  諸侯卿相至,常先謁然後從政.

[후에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무덤가에 와서 집을 짓고 산 사람들이 1백여 가구나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곳을 ‘공자 마을’이라 했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으며,

많은 유생들도 이곳에 모여서 예의를 논하고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활쏘기를 했다.
공자의 무덤은 크기가 1경(頃)이나 되었다.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쓰던 내실은 훗날 공자의 묘(廟)로 만들어져,
공자가 사용하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서적 등이 소장되었는데, 그것은 한(漢)나라에 이르기까지 2백여 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고황제(高皇帝)가 노나라를 지나게 되었을 때 태뢰(太牢)로써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제후, 경대부,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연후에 정사에 임했다.]

 

孔子生鯉,字伯魚.  伯魚年五十,先孔子死. 

伯魚生伋,字子思,年六十二.  嘗困於宋.  子思作中庸.

子思生白,字子上,年四十七.

子上生求,字子家,年四十五.

子家生箕,字子京,年四十六.

子京生穿,字子高,年五十一.

子高生子慎,年五十七,嘗為魏相.

子慎生鮒,年五十七, 為陳王涉博士, 死於陳下. 

鮒弟子襄,年五十七, 嘗為孝惠皇帝博士,遷為長沙太守.  長九尺六寸.

子襄生忠,年五十七.

忠生武,武生延年及安國.  安國為今皇帝博士,至臨淮太守,蚤卒.  安國生卬,卬生驩.

[공자는 이(鯉)를 낳았는데, 그의 자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伋)을 낳았는데, 그의 자는 자사(子思)이고,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宋)나라에서 고생을 했고, 『중용(中庸)』을 지었다.
자사는 백(白)을 낳았는데, 백의 자는 자상(子上)이고, 47세에 죽었다.

자상은 구(求)를 낳았는데, 구의 자는 자가(子家)이고, 45세까지 살았다.
자가는 기(箕)를 낳았는데, 기의 자는 자경(子京)이고, 46세까지 살았다.

자경은 천(穿)을 낳았는데, 천의 자는 자고(子高)이고, 51세까지 살았다.
자고는 자신(子愼)을 낳았는데, 자신은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자신은 부(鮒)를 낳았는데 부는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진왕(陳王) 섭(涉)의 박사가 되었고, 진(陳)에서 죽었다.

​부의 아우 자양(子襄)은 57세까지 살았는데, 일찍이 효혜황제(孝惠皇帝)의 박사가 되었다가,

장사(長沙)의 태수로 옮겨갔다. 키가 9척 6촌이었다.
자양은 충(忠)을 낳았는데, 충은 57세까지 살았다. 충은 무(武)를 낳았고, 무는 연년(延年)과 안국(安國)을 낳았다.
안국은 지금의 황제의 박사가 되었다가, 관직이 임회(臨淮) 태수에까지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안국은 앙(卬)을 낳았고, 앙은 환(驩)을 낳았다.]


太史公曰:

《詩》有之:「高山仰止,景行行止.」雖不能至,然心鄉往之.  余讀孔氏書,想見其為人.

適魯,觀仲尼廟堂車服禮器,諸生以時習禮其家,余祗回留之不能去云.

天下君王至於賢人眾矣,當時則榮,沒則已焉.

孔子布衣,傳十餘世,學者宗之.  自天子王侯,中國言六藝者折中於夫子,可謂至聖矣!

[태사공은 말한다.
“『시경』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라는 말이 있다.

내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항상 그를 동경하고 있다.
나는 공자(孔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 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禮器)를 참관했고,

여러 유생들이 때때로 그 집에서 예를 익히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우러나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생존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일단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포의(布衣)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 제후로부터 중원의 각 나라 중에 육예(六藝)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자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