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3. 趙世家

第 十三. 趙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30. 17:57

          史記 世家

 

    第 十三趙世家(조세가)

趙氏之先,與秦共祖.  至中衍,為帝大戊御.

其後世蜚廉有子二人, 而命其一子曰惡來,事紂,為周所殺,其後為秦.  惡來弟曰季勝,其後為趙.

[조씨(趙氏)의 선대(先代)는 진(秦)나라와 조상이 같다. 중연에 이르러 은(殷)나라 대무(大戊)의 마부가 되었다.
그의 후예 비렴(蜚廉)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한 아들의 이름을 오래(惡來)라고 지었다.

오래는 주왕(紂王)을 섬기다가 주(周)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 후 손이 바로 진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오래의 동생은 이름이 계승(季勝)이었는데, 그의 후손은 조(趙)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季勝生孟增.  孟增幸於周成王,是為宅皋狼.  皋狼生衡父,衡父生造父.  造父幸於周繆王.

造父取驥之乘匹,與桃林盜驪、驊騮、綠耳,獻之繆王.

繆王使造父御,西巡狩,見西王母,樂之忘歸.

而徐偃王反,繆王日馳千里馬,攻徐偃王,大破之.  乃賜造父以趙城,由此為趙氏.

[계승은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성왕(周成王)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가 바로 택고랑(宅皐狼)이다.

고랑은 형보(衡父)를 낳고, 형보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주목왕(周繆王)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도림(桃林)의 도려(盜驪), 화류(驊騮), 녹이(綠耳) 등 여덟 필의 준마를 얻어 목왕에게 바쳤다.
목왕은 조보를 마부로 삼고 서쪽을 순수하던 중,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함께 즐거이 노닐다가 돌아갈 것을 잊었다.

이때 서언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목왕은 마차를 타고 하루에 천리 길을 달려가서 서언왕을 공격해 대파했다.
그리고는 조보에게 조성(趙城)을 하사했으니 이로부터 조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自造父已下六世至奄父,曰公仲,周宣王時伐戎,為御.  及千畝戰,奄父脫宣王.  奄父生叔帶.

叔帶之時,周幽王無道,去周如晉,事晉文侯,始建趙氏于晉國.

自叔帶以下,趙宗益興,五世而(生)[至]趙夙.

[조보로부터 6대 후손인 엄보(奄父)는 자(字)가 공중이며, 주선왕이 융(戎)을 정벌할 때 그의 마부 노릇을 했다.

엄보는 천무(千畝)에서의 전쟁에서 선왕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다. 엄보는 숙대(叔帶)를 낳았다.

숙대 때에 주유왕(周幽王)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자, 그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가서 진문후를 섬기니,

이로써 진나라에서 조씨 가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숙대 이래 조씨 종족은 더욱 흥성했으며 5대를 지나 조숙(趙夙)에 이르게 된다.]

 

趙夙,晉獻公之十六年伐霍、魏、耿 而趙夙為將伐霍.  霍公求奔齊.

晉大旱,卜之,曰「霍太山為祟」. 使趙夙召霍君於齊,復之,以奉霍太山之祀,晉復穰.

晉獻公賜趙夙耿.  夙生共孟,當魯閔公之元年也.  共孟生趙衰,字子餘.

[조숙은 진헌공 16년에 진(晉)나라가 곽(霍), 위(魏), 경(耿) 등 삼국을 정벌할 때, 장군이 되어 곽나라를 공격했다.
곽공(霍公) 구(求)는 제(齊)나라로 도망했다. 그해 진(晉)나라에 크게 가뭄이 들어 점을 치자,

“곽태산(霍太山) 신령님께서 재앙을 내리셨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리하여 헌공은 조숙을 제나라에 파견해 곽공을 소환하고 그의 군주 지위를 회복시켜 곽태산 신령에게

제사를 봉헌하게 하니 진나라에는 다시 풍년이 들었다. 진헌공은 조숙에게 경(耿)나라 땅을 하사했다.

조숙이 공맹(共孟)을 낳은 것은 바로 노민공(魯閔公) 원년의 일이었다.

공맹은 조최(趙衰)를 낳고 자를 자여(子餘)라 했다.]

 

趙衰卜事晉獻公及諸公子, 莫吉;卜事公子重耳, 吉,即事重耳.  重耳以驪姬之亂亡奔翟,趙衰從.

翟伐廧咎如,得二女,翟以其少女妻重耳,長女妻趙衰而生盾.

初,重耳在晉時,趙衰妻亦生趙同、趙括、趙嬰齊。趙衰從重耳出亡,凡十九年,得反國.

重耳為晉文公,趙衰為原大夫,居原,任國政.  文公所以反國及霸,多趙衰計策,語在晉事中.

趙衰既反晉,晉之妻固要迎翟妻,而以其子盾為適嗣,晉妻三子皆下事之.

[조최는 진헌공과 여러 공자 중 누구를 섬기면 좋을지 점을 쳐서 결정하려 했으나 점괘가 모두 길하지 않았다.
다만, 공자 중이(重耳)를 섬기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바로 그를 섬기었다.

중이는 여희(驪姬)의 난으로 인해 적(翟) 땅으로 도망가자 조최가 그를 따랐다.
적인(翟人)이 장고여(嗇咎如)를 침략해 두 여자를 잡아 젊은 여자는 중이에게 시집을 보내고,

나이 든 여자는 조최에게 시집을 보냈다. 조최는 조순(趙盾)을 낳았다.
당초 중이가 진(晉)나라에 있을 때, 조최와 본부인 사이에는 이미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가 있었다.

조최는 중이를 따라 망명생활을 했는데 1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진(晉)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이가 진 문공으로 즉위하자, 조최는 원(原)의 대부(大夫)가 되어 원에 거주하면서 국정을 돌보았다.
문공이 귀국하고 또한 패자(覇者)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대부분 조최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조최가 진나라로 돌아오자 진나라에 있던 본부인이 적(翟) 땅에서 얻은 부인을 데려오라고 한사코 권하며,

또 그녀의 소생인 조순을 적자로 삼으니 진나라 본부인의 세 아들은 모두 아래 자리에서 조순을 받들게 되었다.]

 

晉襄公之六年,而趙衰卒,謚為成季.  趙盾代成季任國政二年而晉襄公卒,太子夷皋年少.

盾為國多難,欲立襄公弟雍.  雍時在秦,使使迎之.

太子母日夜啼泣,頓首謂趙盾曰:「先君何罪,釋其適子而更求君?」趙盾患之,

恐其宗與大夫襲誅之, 乃遂立太子, 是為靈公. 發兵距所迎襄公弟於秦者.  靈公既立, 趙盾益專國政.

[진양공(晉襄公) 6년, 조최가 죽자 시호(諡號)를 성계(成季)라 했다.
조순이 성계를 대신해 국정을 맡은 지 2년 만에 진양공이 죽었다. 태자 이고(夷皐)가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조순은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을 감안해 양공의 동생 옹(雍)을 옹립하려고 했다.

옹은 당시 진(秦)나라에 있었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를 영접하려고 했다.
그러자 태자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울며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조순에게 말하기를 :

“선왕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그의 적자를 버리고 달리 군주를 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조순은 이 일로 고심하다가, 그녀의 종친과 대부들이 자기를 습격해 주살할까 두려워서 태자를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영공(靈公)이다.
동시에 군대를 보내 양공의 동생을 영접하러 진(秦)나라에 간 일행을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영공이 즉위하고 나자 조순은 더욱더 국정을 제 멋대로 하였다.]

 

靈公立十四年, 益驕.  趙盾驟諫,靈公弗聽.  及食熊蹯,胹不熟,殺宰人,持其尸出,趙盾見之.

靈公由此懼, 欲殺盾.  盾素仁愛人, 嘗所食桑下餓人反捍救盾, 盾以得亡.

未出境, 而趙穿弒靈公而立襄公弟黑臀, 是為成公.

趙盾復反, 任國政.  君子譏盾「為正卿,亡不出境,反不討賊」,

故太史書曰「趙盾弒其君」. 晉景公時而趙盾卒,謚為宣孟,子朔嗣.

[영공은 재위한 지 14년이 지나자 날이 갈수록 오만해졌다. 조순이 여러 차례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한번은 곰발바닥 요리를 먹다가 잘 익지 않았다며 요리사를 죽이고는 그 시체를 들고 나가게 했는데

조순이 그것을 보았다. 영공은 이 일로 두려운 나머지 조순을 죽이려고 했다.
조순은 평소에도 인자하고 동정심이 많았으며, 일찍이 뽕나무 아래에 굶주려 쓰러진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

살려준 적이 있었는데, 조순이 위험에 처하자 그 사람이 조순을 보호해 주어, 조순은 비로소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기도 전에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동생 흑둔(黑臀)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성공(成公)이다. 조순은 다시 돌아와서 국정에 임했다.
군자들은 조순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 “정경(正卿)의 몸으로서 도망하면서 국경도 넘지 못하고,

되돌아와서는 역적들을 토벌(討伐)하지도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관 담당인 태사(太史)는 글로 : “조순이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적었다.

진경공(晉景公) 때에 조순이 죽자 시호를 선맹(宣孟)이라고 했고 그의 아들 삭(朔)이 뒤를 이었다.]

 

趙朔,晉景公之三年,朔為晉將下軍救鄭,與楚莊王戰河上. 朔娶晉成公姊為夫人.

晉景公之三年, 大夫屠岸賈欲誅趙氏.  初, 趙盾在時, 夢見叔帶持要而哭, 甚悲;已而笑, 拊手且歌.

盾卜之,兆絕而後好.  趙史援占之,曰:「此夢甚惡,非君之身,乃君之子,然亦君之咎.

至孫,趙將世益衰.」

[조삭은 진경공 3년에 진(晉)나라의 하군을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황하 강변에서 초장왕과 교전했다.
삭은 진성공(晉成公)의 손위 누이를 부인으로 삼았다.  같은 해에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조씨를 주멸하려고 했다.
당초 조순이 살아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숙대(叔帶)가 자기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우 슬피 울다가

잠시 후 크게 웃으며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조순이 점을 쳐보니 불로 지진 거북 껍질의 균열이 끊어졌다가 후에 다시 좋아졌다.
조나라의 사관 원(援)이 점쳐 보고 말하기를 : “이 꿈은 매우 흉한 것으로 당신 대(代)가 아니고,

당신 아들 대에 들어맞겠으나, 그것 역시 당신의 잘못 때문입니다.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조씨 가문이 더욱 쇠락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屠岸賈者, 始有寵於靈公, 及至於景公而賈為司寇, 將作難, 乃治靈公之賊以致趙盾,

遍告諸將曰:「盾雖不知, 猶為賊首.  以臣弒君, 子孫在朝, 何以懲罪? 請誅之. 」

韓厥曰:「靈公遇賊,趙盾在外,吾先君以為無罪,故不誅. 今諸君將誅其後,

是非先君之意而今妄誅. 妄誅謂之亂. 臣有大事而君不聞,是無君也.」屠岸賈不聽.

[도안고라는 사람은 처음에 영공의 총애를 받다가 경공 때에 이르러 사구(司寇)가 되었다.
난을 일으키기 위해서 먼저 영공을 시해한 역적을 처벌한다는 빌미로 조순을 연루시켰다.
그리고는 두루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 “조순이 비록 사건의 내막을 몰랐으나 역시 역적의 두목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도 그의 자손이 조정에서 관직을 맡고 있으니

어떻게 죄 있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 조씨를 주멸합시다.”라고 하였다.
한궐(韓厥)이 말하기를 : “ 영공께서 살해를 당하실 때 조순은 외지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군(先君)께서 그가 무죄라고 여기시어 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그의 후손을 죽이시려고 하는 것은 선군의 뜻이 아니고 멋대로 주살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주살하는 것은 난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하가 큰일을 도모하는 데 군주에게 알리지 않음은 군주를 안중에 두지도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나,

도안고는 듣지 않았다.]

 

韓厥告趙朔趣亡.  朔不肯,曰:「子必不絕趙祀,朔死不恨.」韓厥許諾,稱疾不出.

賈不請而擅與諸將攻趙氏於下宮,殺趙朔、趙同、趙括、趙嬰齊,皆滅其族.

趙朔妻成公姊,有遺腹,走公宮匿.

[한궐이 조삭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일렀다. 그러나 조삭은 도망가지 않고 말하기를 : 

“ 그대가 틀림없이 조씨 가문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해주신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라고 하였다.

이를 응낙한 한궐은 병을 핑계삼아 외출하지 않았다.

도안고는 경공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여러 장군들과 하궁(下宮)에서 조씨를 공격해

조삭(趙朔),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 등을 죽였다. 마침내 그 일족을 모두 멸했다.
조삭의 아내는 성공(成公)의 누나로 그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경공의 궁으로 도망가 숨었다.]

 

趙朔客曰公孫杵臼,杵臼謂朔友人程嬰曰:「胡不死?」

程嬰曰:「朔之婦有遺腹,若幸而男,吾奉之;即女也,吾徐死耳.」居無何,而朔婦免身,生男.

屠岸賈聞之, 索於宮中. 夫人置兒叱罅祝曰:「趙宗滅乎, 若號;即不滅, 若無聲.」及索, 兒竟無聲.

已脫,程嬰謂公孫杵臼曰:「今一索不得,後必且復索之,柰何?」

公孫杵臼曰:「立孤與死孰難?」程嬰曰:「死易,立孤難耳.」

公孫杵臼曰:「趙氏先君遇子厚, 子彊為其難者, 吾為其易者, 請先死.」

乃二人謀取他人嬰兒負之, 衣以文葆, 匿山中.

[조삭의 문객 중에 공손저구(公孫杵臼)라는 자가 있었다.
공손저구가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에게 “왜 같이 죽지 않는가?”라고 물으니,

정영은 대답하기를 :“ 조삭의 부인이 임신 중인데 만약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내가 부양하고,

딸을 낳는다면 나는 조금 천천히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조삭의 부인이 분만했는데 아들을 낳았다.
도안고가 이 소식을 듣고 궁중을 수색했다. 부인이 갓난아기를 속바지 가랑이 사이에 넣고,

“ 조씨 종족이 멸망하려면 네가 크게 울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라.”라고 기도했다.

수색할 때에 아이는 의외로 울지 않았다.  위험을 벗어나자 정영이 공손저구에게 말하기를 :

“ 이번 한 차례 수색해 잡지 못했으니 다음에 또 수색할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할까?”라고 하였다,
공손저구가 묻기를 : “고아를 부양하는 일과 죽는 일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라고 하자.

정영이 대답하기를 : “죽는 일은 쉬우나 고아를 부양하는 일은 어렵지”라고 하니,
공손저구가 말하기를 : “조씨의 선군이 당신을 후대했으니 당신은 힘을 다해서 어려운 일을 맡아주게.

나는 쉬운 일을 담당해 먼저 죽을 것일세.”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상의한 끝에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 등에 업고 화려한 강보로 덮고서는 산속에 숨었다.]

 

程嬰出,謬謂諸將軍曰:「嬰不肖,不能立趙孤.  誰能與我千金,吾告趙氏孤處.」

諸將皆喜,許之,發師隨程嬰攻公孫杵臼.

杵臼謬曰:「小人哉程嬰!昔下宮之難不能死, 與我謀匿趙氏孤兒, 今又賣我. 縱不能立,

而忍賣之乎!」

抱兒呼曰:「天乎天乎!趙氏孤兒何罪?請活之,獨殺杵臼可也.」諸將不許,遂殺杵臼與孤兒.

諸將以為趙氏孤兒良已死,皆喜.  然趙氏真孤乃反在,程嬰卒與俱匿山中.

[정영이 산에서 내려와 거짓으로 여러 장군에게 말하기를 : “이 정영은 불초해 조씨 고아를 부양할 능력이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천금을 주신다면 조씨 고아가 숨어 있는 장소를 말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그 조건을 수락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정영을 따라가서 공손저구를 공격했다.
공손저구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 “이 소인배 정영아! 예전에 하궁의 난(亂) 때 죽지 않고,

나와 함께 조씨 고아를 숨기기로 상의했건만, 지금 또 나를 배반하는구나. 아무리 네가 부양할 수 없었기로서니 

어찌 그를 배신할 수가 있단 말이냐?”라고 욕하며, 아이를 안고 “ 하늘이여! 하늘이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발 그를 살려주시고 저만 죽여주소서.”라고 외쳤다.

여러 장수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공손저구와 고아를 죽였다.

여러 장수들은 조씨 고아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진짜 조씨 고아는 오히려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 정영은 마침내 그와 함께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居十五年,晉景公疾,卜之,大業之後不遂者為祟.  景公問韓厥,厥知趙孤在,

乃曰:「大業之後在晉絕祀者, 其趙氏乎?夫自中衍者皆嬴姓也.  中衍人面鳥噣, 降佐殷帝大戊,

及周天子, 皆有明德. 下及幽厲無道,而叔帶去周適晉,事先君文侯,至于成公,世有立功,

未嘗絕祀.  今吾君獨滅趙宗,國人哀之,故見龜策.  唯君圖之.」

景公問:「趙尚有後子孫乎?」韓厥具以實告.  於是景公乃與韓厥謀立趙孤兒,召而匿之宮中.

[15년이 흐른 후, 진경공이 병이 나자 점을 쳤는데,

조씨 선조인 고요(皐陶)의 후대가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 재앙이 생긴다는 점괘가 나왔다.
경공이 한궐에게 물으니 한궐은 조씨 고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말하기를 : 

“대업(조씨의 선조)의 후대 자손 중에 진(晉)나라에서 제사가 끊긴 것은 조씨가 아닙니까 ? 

중연(中衍)으로부터는 모두 성이 영씨(嬴氏)입니다.

중연은 사람의 얼굴에 입은 새부리 모양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은나라 왕 대무(大戊)를 보좌했으며,
그 후손은 주나라의 천자를 보좌하는 등 모두 빛나는 덕행이 있었습니다. 그 후 유왕(幽王), 려왕(厲王)이 무도하자,

숙대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와서 선군 문후(文侯)를 섬겼고, 성공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공을 세웠으며,

제사가 끊긴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오직 군왕께서 조씨 종족을 멸하셨으니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슬퍼한 까닭에

거북 껍질과 시초(蓍草)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경공이 묻기를 : “ 조씨 가문에 아직 후대 자손이 있는가?”라고 하자, 한궐은 모두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경공은 조씨 고아를 세우기로 한궐과 상의하고, 조씨 고아를 불러다가 궁중에 숨겨 두게 하였다.]

 

諸將入問疾,景公因韓厥之眾以脅諸將而見趙孤.  趙孤名曰武.

諸將不得已, 乃曰:「昔下宮之難, 屠岸賈為之, 矯以君命, 并命群臣.  非然, 孰敢作難!

微君之疾, 群臣固且請立趙後.  今君有命,群臣之願也.」

於是召趙武、程嬰遍拜諸將,遂反與程嬰、趙武攻屠岸賈,滅其族.  復與趙武田邑如故.

[여러 장수들이 문병 차 입궁하자, 경공은 한궐의 많은 병력을 이용해 조씨 고아를 만날 수 있게 장수들을 협박했다. 

조씨 고아의 이름은 무(武)였다.  장수들은 마지못해 말하기를 : “지난번 하궁의 난은 도안고가 책동한 것으로,

군주의 명이라고 사칭해 여러 신하에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누가 감히 난을 일으켰겠습니까?

만약 군왕께서 병이 나지 않으셨더라도 저희들은 본래 조씨의 후예를 세울 것을 청원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군왕께서 명령하시니, 그것은 저희들이 진실로 바라던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무(趙武)와 정영을 불러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절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이번에는 반대로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고를 공격해 그 종족을 멸하였다.

경공은 다시 원래대로 조씨의 옛 전읍(田邑)을 조무에게 하사했다.]

 

及趙武冠, 為成人, 程嬰乃辭諸大夫, 謂趙武曰:「昔下宮之難,皆能死.  我非不能死,

我思立趙氏之後.  今趙武既立, 為成人, 復故位, 我將下報趙宣孟與公孫杵臼. 」

趙武啼泣頓首固請,曰:「武願苦筋骨以報子至死,而子忍去我死乎!」

程嬰曰:「不可.  彼以我為能成事,故先我死;今我不報,是以我事為不成.」遂自殺.

[조무가 20세가 되어 관례를 행하고 성인이 되자, 정영이 여러 대부들에게 하직하며 조무에게 말하기를 : 

“ 예전에 하궁의 난 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때 제가 죽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조씨의 후예를 부양해 가업을 잇게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가업을 잇고 성인이 되었으며,

원래의 작위를 되찾았으니 저는 장차 지하에 가서 조선맹과 공손저구에게 보고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무가 소리내어 울며 머리를 조아려 한사코 말리며 말하기를 : “제가 모든 힘을 다해 그대가 죽을 때까지

보답하고자 하는데, 그대가 차마 저를 버리고 죽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정영은 말하기를 : “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저기 공손저구는 제가 대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죽은 것입니다. 이제 제가 가서 보고하지 않으면 그는 제가 맡은 일을 완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趙武服齊衰三年,為之祭邑,春秋祠之,世世勿絕.

趙氏復位十一年, 而晉厲公殺其大夫三郤. 欒書畏及, 乃遂弒其君厲公, 更立襄公曾孫周, 是為悼公.

晉由此大夫稍彊.  趙武續趙宗二十七年,晉平公立.

平公十二年,而趙武為正卿.

[조무는 3년 동안 자최(齊衰)를 입었으며 그를 위해서 제읍(祭邑)을 마련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대대로 끊이지 않게 했다.  조씨가 복위한 지 11년 만에 진려공(晉厲公)은 극씨(郤氏) 대부 3명을 죽였다.

난서(欒書)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급기야는 군주 려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증손 주(周)를 바꾸어 세우니,

그가 바로 도공(悼公)이다. 진나라는 이로부터 대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다.
조무가 조씨 종족을 유지한 지 27년 만에 진평공(晉平公)이 즉위했다.

평공 12년, 조무는 정경(正卿)이 되었다.]

 

十三年,吳延陵季子使於晉,曰:「晉國之政卒歸於趙武子、韓宣子、魏獻子之後矣.」

趙武死,謚為文子.  文子生景叔.  景叔之時,齊景公使晏嬰於晉,晏嬰與晉叔向語.

嬰曰:「齊之政後卒歸田氏.」叔向亦曰:「晉國之政將歸六卿.  六卿侈矣,而吾君不能恤也.」

趙景叔卒,生趙鞅,是為簡子.  趙簡子在位,晉頃公之九年,簡子將合諸侯戍于周.

其明年,入周敬王于周,辟弟子朝之故也.

晉頃公之十二年,六卿以法誅公族祁氏、羊舌氏,分其邑為十縣,六卿各令其族為之大夫.

晉公室由此益弱.

[13년에 오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와서는 말하기를 :

“진나라의 정권이 마침내 조무자(趙武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의 후손에게 돌아가겠구나!”라고 하였다.

조무가 죽으니 시호를 문자(文子)라 했다. 문자는 경숙(景叔)을 낳았다.

경숙 때에 제경공이 안영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안영과 숙향(叔向)이 서로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안영이 말하기를 : “앞으로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전씨(田氏)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라고 하자.
숙향도 말하기를 : “진(晉)나라의 정권은 장차 육경(六卿)에게로 돌아갈 것이오.

육경이 오만방자하거늘 우리 군왕은 걱정할 줄도 모른다오.”라고 하였다.

조경숙이 죽자 그가 낳은 아들 조앙(趙鞅)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간자(簡子)이다.

조간자가 정경의 지위에 있었던 진경공(晉頃公) 9년에, 간자는 제후들과 회합해 그들을 이끌고 주나라를 지켰다.
그 이듬해 주경왕(周敬王)을 호송해 주나라로 돌아왔는데,

이는 경왕이 그의 동생 자조(子朝)를 피해 외지에 유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경공 12년, 육경은 법도로써 군주의 친족인 기씨(祁氏), 양설씨를 죽이고 그들의 봉읍을 10현으로 나누어,

각기 자기의 동족들을 현의 대부로 삼았는데 진(晉)나라의 공실(公室)은 이로부터 더욱 쇠약해지게 되었다.]

 

後十三年,魯賊臣陽虎來奔,趙簡子受賂,厚遇之. 趙簡子疾,五日不知人,大夫皆懼.

醫扁鵲視之,出,董安于問.

扁鵲曰:「血脈治也,而何怪!在昔秦繆公嘗如此,七日而寤.

寤之日,告公孫支與子輿曰:『我之帝所甚樂。吾所以久者,適有學也.

帝告我:「晉國將大亂,五世不安;其後將霸,未老而死;霸者之子且令而國男女無別.」』

公孫支書而藏之, 秦讖於是出矣.  獻公之亂, 文公之霸, 而襄公敗秦師於殽而歸縱淫, 此子之所聞.

今主君之疾與之同,不出三日疾必閒,閒必有言也.」居二日半,簡子寤. 

語大夫曰:「我之帝所甚樂,與百神游於鈞天,廣樂九奏萬舞,不類三代之樂,其聲動人心.

有一熊欲來援我,帝命我射之,中熊,熊死.  又有一羆來,我又射之,中羆,羆死.

帝甚喜,賜我二笥,皆有副.

吾見兒在帝側,帝屬我一翟犬,曰:『及而子之壯也,以賜之.』

帝告我:『晉國且世衰,七世而亡,嬴姓將大敗周人於范魁之西,而亦不能有也.

今余思虞舜之勳,適余將以其胄女孟姚配而七世之孫.』」

董安于受言而書藏之.

[13년 후, 노(魯)나라의 난신(亂臣) 양호(陽虎)가 도망오자 조간자는 뇌물을 받고 그를 후대했다.
조간자가 병이 나서 5일 동안 인사불성이 되자 대부들은 모두 걱정이 대단했다.

명의 편작(扁鵲)이 진찰을 하고 나오니 동안우(董安于)가 병세를 물었다.
편작은 말하기를 : “ 혈맥(血脈)이 정상인데 뭐 걱정할 게 있겠는가? 이전에 진목공(秦繆公)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7일 만에 깨어났소. 깨어난 날에 공손지(公孫支)와 자여(子輿)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오.

'내가 상제(上帝)가 사는 곳에 갔었는데 매우 즐거웠소.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머문 이유는

마침 배울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소. 상제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소.
진(晉)나라는 장차 대란이 일어나 금후 5대 동안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의 후예가 장차 패자가 되겠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며, 패자의 아들이 그대 나라의 남녀 사이를 문란하게 만들 것이다.’

손지가 이를 적어 보존했는데 진(秦)나라의 참어(讖語)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오.
헌공(獻公) 때의 변란이나 문공(文公)이 패자가 된 것, 그리고 양공(襄公)이 효산(殽山)에서 진군(秦軍)을 대파하고

돌아가서는 육욕에 빠져 음란을 자행했던 것, 이러한 사실들은 그대가 모두 들은 바 있을 것이오.

지금 주군(主君)의 병이 목공의 것과 같으니 3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반드시 호전될 것이며
병세가 호전되면 틀림없이 할 말이 있을 것이오.”라고하였다. 그리고 이틀하고도 한나절이 지나자 간자가 깨어났다.

그리고는 대부들에게 말하기를 : “내가 상제가 사는 곳에 갔는데 매우 즐거웠소.

여러 신들과 하늘 한가운데서 노닐었고, 여러 악기로 웅장한 음악이 여러 차례 연주되는 것을 들었으며,

또한 “만무(萬舞)”를 보았는데, 삼대(三代)의 음악과 같지는 않았으나 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소.

그때 곰 한 마리가 나를 붙잡으려고 하자, 상제께서 나에게 쏘라고 명령하셔서 곰을 쏘아 맞추어 곰을 죽였소.

또 큰 곰 한 마리가 오자 내가 또 쏘아 맞추어 큰 곰을 죽이니 상제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나에게 대나무 상자 두 개를 주셨는데 모두 보조 상자가 달려 있었소.
나는 한 어린애가 상제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나에게 적나라 개 한 마리를 주시면서

‘너의 아들이 장성한 후에 적견(翟犬)을 그에게 주어라.’라고 하셨소.
상제께서는 또 나에게 ‘진(晉)나라가 장차 대대로 쇠락하다가 7대에 이르러 멸망할 것이다.
영성(嬴姓)의 사람들이 범괴(范魁) 서쪽에서 주나라 군대를 대파하겠지만 그 땅을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내가 우순(虞舜)의 공적을 생각해서 때가 되면 내가 순의 후손인 맹요(孟姚)라는 여자를 너의 7대손에게

시집보내겠다.’라고 하셨소.”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동안우는 기록해 보관했다.]

 

以扁鵲言告簡子,簡子賜扁鵲田四萬畝. 他日, 簡子出, 有人當道, 辟之不去, 從者怒, 將刃之. 

當道者曰:「吾欲有謁於主君.」從者以聞.

簡子召之,曰:「譆,吾有所見子晣也.」當道者曰:「屏左右,願有謁.」簡子屏人.

當道者曰:「主君之疾,臣在帝側.」 簡子曰:「然,有之.  子之見我,我何為?」

當道者曰:「帝令主君射熊與羆,皆死.」 簡子曰:「是,且何也?」

當道者曰:「晉國且有大難,主君首之.  帝令主君滅二卿,夫熊與羆皆其祖也.」

簡子曰:「帝賜我二笥皆有副,何也?」當道者曰:「主君之子將克二國於翟,皆子姓也.」

簡子曰:「吾見兒在帝側,帝屬我一翟犬,曰『及而子之長以賜之』. 夫兒何謂以賜翟犬?」

當道者曰:「兒,主君之子也.  翟犬者,代之先也.  主君之子且必有代.

及主君之後嗣,且有革政而胡服,并二國於翟.」簡子問其姓而延之以官.

當道者曰:「臣野人,致帝命耳.」遂不見.  簡子書藏之府.

[그는 편작의 말을 간자에게 고하니 간자는 편작에게 밭 4만 무(畝)를 하사했다. 어느 날 간자가 외출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길을 막고서는 쫓아도 비키지를 않자 시종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길을 막은 사람이 말하기를 : “나는 주군을 배알할 일이 있소.”라고 하니, 시종이 간자에게 보고했다.
간자가 그를 불러 보고는 말하기를 : “아하, 나는 전에 당신을 똑똑히 본 적이 있소.”라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 “ 좌우를 물리쳐주십시오. 긴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간자는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길을 막은 사람이 말하기를 : “ 주군께서 병이 나셨을 때에 제가 상제 곁에 있었습니다.”라고 하니,
간자가 말하기를 : “ 예, 그랬지요. 그대가 나를 보았을 때 내가 무얼 하고 있던가요?”라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 “ 상제께서 주군에게 곰과 큰 곰을 쏘라고 하시어 모두 죽이시더군요.”라고 하였다.
간자가 묻기를 : “그랬소. 그런데 그건 무엇을 뜻하는 거요?”라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 “진(晉)나라에는 앞으로 대란이 있을 것인데 주군이 제일 먼저 그 피해를 당하게 되므로,

상제께서 주군에게 두 상경(上卿)을 주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곰과 큰 곰은 그들의 선조입니다.”라고 하였다.
간자가 묻기를 : “상제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대나무 상자에 모두 보조 상자가 달려 있던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 “주군의 아들이 장차 적(翟) 땅에서 두 나라를 쳐서 이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모두 동성(同姓)의 나라입니다.”라고 하였다.
간자가 또 묻기를 : “ 어린아이가 상제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나에게 적견을 한 마리 주시면서

‘너의 아들이 장성한 후에 적견을 그에게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적견을 주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 “ 그 어린애는 주군의 아들이고 적견은 대(代)나라의 선조입니다.

주군의 아들은 장차 틀림없이 대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주군의 후예는 정치를 개혁하고 오랑캐 복장을 입을 것이며 적 땅에서 두 나라를 합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간자가 그 사람의 성명을 묻고 초빙해 관직을 주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 “나는 일개 야인(野人)으로 상제의 명령만 전할 뿐입니다.”라고 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간자는 이 일을 기록해 관청의 창고에 깊숙히 보관해 두었다.]

 

異日,姑布子卿見簡子,簡子遍召諸子相之.  子卿曰:「無為將軍者.」簡子曰:「趙氏其滅乎?」

子卿曰:「吾嘗見一子於路, 殆君之子也.」簡子召子毋卹. 毋卹至, 則子卿起曰:「此真將軍矣!

簡子曰:「此其母賤,翟婢也,奚道貴哉?」

子卿曰:「天所授,雖賤必貴.」自是之後,簡子盡召諸子與語,毋卹最賢.

簡子乃告諸子曰:「吾藏寶符於常山上,先得者賞.」諸子馳之常山上,求,無所得.

毋卹還,曰:「已得符矣.」 簡子曰:「奏之.」

毋卹曰:「從常山上臨代,代可取也.」簡子於是知毋卹果賢,乃廢太子伯魯,而以毋卹為太子.

[또 어느 날 고포자경(姑布子卿)이 간자를 배견(拜見)하니 간자는 여러 아들을 모두 불러 관상을 보게 했다.

자경이 말하기를 : “장군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간자가 묻기를 : “ 그러면 조씨 가문이 멸망한다는 말이오?”라고 하자.

자경이 대답하기를 : “ 제가 길에서 한 어린애를 보았는데 아마 당신의 아들이겠지요.”라고 하였다.
간자가 아들 무휼(毋恤)을 불렀다. 무휼이 오자 자경이 일어나 “ 이 아드님이 정말로 장군감이십니다.”라고 했다.
간자가 말하기를 : “이 아이의 어미는 미천한 적(翟)나라의 비녀(婢女) 출신인데 어찌 귀하다고 말하시오?”하자,

자경이 “하늘이 내려주신 인재는 비록 태생이 비천하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틀림없이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했다.

그 후로 간자가 모든 아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어보았는데 무휼이 가장 현명했다.

한번은 간자가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 “내가 귀중한 부절을 상산에 숨겨 두었는데,

먼저 찾은 사람에게 상으로 주겠다.”라고 하였다.

여러 아들이 상산으로 말을 달려 산에 올라가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무휼이 돌아와 말하기를 : “이미 부절을 찾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간자가 말하기를 : “말해 보아라.”라고 하자. 

그러자 무휼이 대답하기를 : “상산의 위에서 대(代)나라를 내려다보았는데,

대나라는 탈취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휼이 과연 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간자는 태자 백로(伯魯)를 폐위시키고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後二年,晉定公之十四年,范、中行作亂.

明年春,簡子謂邯鄲大夫午曰:「歸我衛士五百家,吾將置之晉陽.」

午許諾,歸而其父兄不聽,倍言.  趙鞅捕午,囚之晉陽.

乃告邯鄲人曰:「我私有誅午也,諸君欲誰立?」遂殺午.  趙稷、涉賓以邯鄲反.

晉君使籍秦圍邯鄲.  荀寅、范吉射與午善,不肯助秦而謀作亂,董安于知之.

十月,范、中行氏伐趙鞅,鞅奔晉陽,晉人圍之.

范吉射、荀寅仇人魏襄等謀逐荀寅,以梁嬰父代之;逐吉射,以范皋繹代之.

荀櫟言於晉侯曰:「君命大臣,始亂者死.  今三臣始亂而獨逐鞅,用刑不均,請皆逐之.」

十一月,荀櫟、韓不佞、魏哆奉公命以伐范、中行氏,不克.

范、中行氏反伐公,公擊之,范、中行敗走.

丁未,二子奔朝歌. 韓、魏以趙氏為請.

十二月辛未,趙鞅入絳,盟于公宮.

[그로부터 2년 후, 진정공(晉定公) 14년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난을 일으켰다.
이듬해 봄에 간자가 한단(邯鄲)의 대부 오(午)에게 “위(衛)나라 백성 5백호를 나에게 돌려주시오.

내가 그들을 진양(晉陽)에 안둔시키겠소.”라고 하자, 오가 승낙하고 돌아갔으나,

그의 부형(父兄)들이 말을 듣지 않아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조앙(趙鞅)은 오를 체포해 진양에다 감금했다.
그리고 한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나는 독자적으로 오를 죽이려고 결심했소.

여러분은 후임으로 누구를 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오 ?”라고 하고는, 마침내 오를 죽였다. 

그러자 조직(趙稷)과 섭빈(涉賓)이 한단을 근거지로 하여 모반했다.

진정공은 적진(籍秦)을 보내 한단을 포위하게 했다. 순인(荀寅)과 범길석(范吉射)은 조오와 관계가 친밀했기에,

이들이 적진을 도울 생각은 않고 오히려 반란을 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동안우(董安于)가 알게 되었다.
10월에 범씨와 중항씨가 조앙을 공격하자 조앙이 진양으로 달아나니, 진(晉)나라 사람들이 진양을 포위했다.

범길석과 순인의 원수인 위양(魏襄) 등은 순인을 몰아낼 계책을 꾸며 양영보(梁嬰父)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하고,

범길석을 몰아내어 범고역(范皐繹)으로 대치하려고 했다.
순력이 진정공에게 말하기를 : “선군께서 대신들에게 명령하기를 난을 일으킨 주동자는 죽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 명의 대신이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이거늘 단지 조앙만 쫓아내신다면 이는 형벌의 집행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쫓아내십시오.”라고 하였다.

11월에 순력, 한불녕(韓不佞), 위치(魏哆)가 정공의 명을 받들어 범씨, 중항씨를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범씨, 중항씨가 반대로 정공을 공격했으나 정공이 반격하자 범씨, 중항씨는 패해 달아났다.

정미일(丁未日)에 그 두 사람은 조가(朝歌)로 도망갔다. 한불녕과 위치는 조앙을 사면해 달라고 정공에게 호소했다.
12월 신미일(辛未日)에 조앙이 강성(絳城)으로 들어와 정공의 궁에서 맹세를 했다.]

 

其明年, 知伯文子謂趙鞅曰:「范、中行雖信為亂, 安于發之, 是安于與謀也. 晉國有法, 始亂者死.

夫二子已伏罪而安于獨在.」 趙鞅患之.

安于曰:「臣死,趙氏定,晉國寧,吾死晚矣.」 遂自殺.  趙氏以告知伯,然後趙氏寧.

孔子聞趙簡子不請晉君而執邯鄲午,保晉陽,故書春秋曰「趙鞅以晉陽畔」.

[그 이듬해 지백(知伯) 문자가 조앙에게 말하기를 : “범씨와 중항씨가 확실히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동안우가 중간에서 그 사정을 알고 도발한 것이니, 이는 동안우도 난을 도모하는 데 참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나라 국법으로는 반란을 주동한 자는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범씨와 중항씨는 이미 그 죄를 받았으나 오직 동안우만이 건재합니다.”라고 하자, 조앙이 이 일로 고민을 했다.
동안우는 말하기를 : “제가 죽으면 조씨가 안정되고 진(晉)나라가 평안해질 텐데,

제가 죽는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조앙은 이 사실을 지백에게 알렸다. 이후로부터 조씨는 비로소 안정되었다.
공자(孔子)는 조간자가 진나라 군주의 허락도 없이 한단의 대부 조오를 체포하고 결국에는 진양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춘추(春秋)』에 “조앙이 진양을 근거지로 해 모반했다.”라고 기록했다.]

 

趙簡子有臣曰周舍,好直諫.  周舍死,簡子每聽朝,常不悅,大夫請罪.

簡子曰:「大夫無罪.  吾聞千羊之皮不如一狐之腋.  諸大夫朝,徒聞唯唯,不聞周捨之鄂鄂,

是以憂也.」 簡子由此能附趙邑而懷晉人.

[조간자의 가신 중에 주사(周舍)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했다.
주사가 죽은 후, 간자가 매번 조회를 열어 정사를 처리할 때마다 언제나 언짢아하자, 대부들이 용서를 빌었다.
간자는 말하기를 : “대부들은 죄가 없소. 내가 듣기에 천 마리 양의 가죽이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하다고 하더이다. 여러 대부들이 조회에 참가할 때마다 오로지 ‘예, 예’ 하는 공손한 응답만 들리고

주사와 같은 기탄없는 직언은 들을 수 없으니 이를 걱정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간자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조읍(趙邑)의 백성을 순종하게 하고 진(晉)나라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

 

晉定公十八年,趙簡子圍范、中行于朝歌,中行文子奔邯鄲.  明年,衛靈公卒.

簡子與陽虎送衛太子蒯聵于衛,衛不內,居戚.

晉定公二十一年,簡子拔邯鄲,中行文子奔柏人.  簡子又圍柏人,中行文子、范昭子遂奔齊.

趙竟有邯鄲、柏人.  范、中行餘邑入于晉.  趙名晉卿,實專晉權,奉邑侔於諸侯.

晉定公三十年,定公與吳王夫差爭長於黃池,趙簡子從晉定公,卒長吳.

定公三十七年卒,而簡子除三年之喪,期而已.  是歲,越王句踐滅吳.

[진정공 18년, 조 간자가 범씨와 중항씨를 조가에서 포위하자, 중항문자(中行文子)는 한단으로 도망갔다.

이듬해 위영공(衛靈公)이 죽었다.
간자와 양호는 위나라 태자 괴외(蒯聵)를 위나라로 호송했으나 위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자 척(戚)에 거주하게 했다.
진정공 21년, 간자가 한단을 함락시키자, 중항문자는 백인(柏人)으로 도망갔다.

간자가 또 백인을 포위하니 중항문자와 범소자(范昭子)는 결국 제(齊)나라로 도망쳤다.
조씨는 마침내 한단과 백인을 차지했다. 범씨와 중항씨의 나머지 성읍은 진(晉)나라에 귀속되었다.
조간자는 명의상으로는 진나라의 상경(上卿)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진나라의 정권을 독차지했으며

봉지는 제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진정공 30년, 정공은 황지(黃池)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맹주(盟主)의 자리를 놓고 겨루었다.

조간자가 진정공을 수행했는데 마침내 오왕이 맹주가 되었다.
정공이 37년에 죽자, 간자는 3년 상을 폐지하고 1년으로 끝냈다. 이해에 월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晉出公十一年, 知伯伐鄭. 趙簡子疾, 使太子毋卹將而圍鄭. 知伯醉, 以酒灌擊毋卹. 毋卹群臣請死之.

毋卹曰:「君所以置毋卹,為能忍.」然亦慍知伯.  知伯歸,因謂簡子,使廢毋卹,簡子不聽.

毋卹由此怨知伯.

晉出公十七年,簡子卒,太子毋卹代立,是為襄子.

[진출공 11년, 지백이 정나라를 침략했다. 조간자는 병이 났기 때문에 태자 무휼을 보내 정나라를 포위하게 했다.

지백이 술에 취해 무휼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구타했다. 무휼의 수행신하들이 지백을 죽일 것을 청했다.

무휼이 말하기를 : “ 주군께서 나를 태자로 삼으신 것은 내가 치욕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오.”라고 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지백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지백이 돌아와서는 이 일을 간자에게 말하고 무휼을 폐위시키도록 했으나 간자는 듣지 않았다.

무휼은 이로 인해 지백을 원망하게 되었다.
진출공 17년에 간자가 죽고 태자 무휼이 지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양자(襄子)이다.]

 

趙襄子元年,越圍吳.  襄子降喪食,使楚隆問吳王.  襄子姊前為代王夫人.

簡子既葬,未除服,北登夏屋,請代王.  使廚人操銅枓以食代王及從者,行斟,

陰令宰人各以枓擊殺代王及從官,遂興兵平代地.  其姊聞之,泣而呼天,摩笄自殺.

代人憐之,所死地名之為摩笄之山.  遂以代封伯魯子周為代成君.

伯魯者,襄子兄,故太子.  太子蚤死,故封其子.

[조양자 원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포위했다.

양자는 거상 기간 동안에 음식의 질을 낮추고 가신 초륭(楚隆)을 사신으로 보내 오왕을 위문했다.

양자의 누나는 이전에 대왕(代王)의 부인이었다.

간자를 안장하고 아직 상복도 벗기 전에, 양자는 북쪽의 하옥산(夏屋山)에 올라서 대왕(代王)을 초대했다.
요리사에게 놋쇠로 만든 국자를 들고 대왕과 그 시종들에게 음식을 권하게 하고,

술을 따를 때에 은밀히 백정 낙(各)을 시켜 국자로 대왕과 그 시종들을 쳐죽이게 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일으켜 대나라를 평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누나는 울부짖다가 비녀를 뾰족하게 갈아서는 자살했다.
대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가엾게 여겨서 그녀가 자살한 곳을 마계산(麻笄山)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양자는 대 땅을 백로(伯魯)의 아들 조주(趙周)에게 봉해 대성군(代成君)으로 삼았다.

백로는 양자의 형으로 원래 태자였으나,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봉한 것이다.]

 

襄子立四年,知伯與趙、韓、魏盡分其范、中行故地.  晉出公怒,告齊、魯,欲以伐四卿.

四卿恐,遂共攻出公.  出公奔齊,道死.  知伯乃立昭公曾孫驕,是為晉懿公.

知伯益驕.  請地韓、魏,韓、魏與之.  請地趙,趙不與,以其圍鄭之辱.

知伯怒,遂率韓、魏攻趙.  趙襄子懼,乃奔保晉陽.

原過從,後,至於王澤,見三人,自帶以上可見,自帶以下不可見.  與原過竹二節,莫通.

曰:「為我以是遺趙毋卹.」原過既至,以告襄子.

[양자가 즉위한 지 4년, 지백은 조(趙), 한(韓), 위(魏) 세 가문과 함께 범씨, 중항씨의 옛 영토를 전부 나누어 가졌다.
진출공은 노하여 이 사실을 제나라와 노나라에 알리고 그들의 힘을 빌려 사경(四卿)을 토벌하려고 했다.

겁이 난 사경은 연합해 출공을 공격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 도중에 죽었다.

지백은 소공(昭公)의 증손 교(驕)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진의공(晉懿公)이다.
지백은 더욱 교만해져 한씨와 위씨에게 땅을 요구하자 한씨와 위씨가 땅을 주었다.
또 조씨에게 땅을 요구했으나 양자가 정나라를 포위했을 때에 지백이 그를 모욕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씨는 그에게 땅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지백은 한씨와 위씨를 이끌고 조씨를 공격했다.

두려워진 조양자는 진양으로 도망쳐서 수비했다.
원과(原過)가 양자의 뒤를 따라 수행하던 중, 왕택(王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허리띠 위로는 보이지만 허리띠 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원과에게 두 마디로 된 대나무 토막을 주었는데 가운데가 뚫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를 대신해 이것을 무휼에게 가져다주어라.”라 했다.
원과는 진양에 도착해 그 일을 조양자에게 알렸다.]

 

襄子齊三日, 親自剖竹,有朱書曰:「趙毋卹,余霍泰山山陽侯天使也.

三月丙戌,余將使女反滅知氏. 女亦立我百邑,余將賜女林胡之地.  至于後世,且有伉王,

赤黑,龍面而鳥噣,鬢麋髭髯,大膺大胸,修下而馮,左袵界乘,奄有河宗,至于休溷諸貉,

南伐晉別,北滅黑姑.」襄子再拜,受三神之令.

[양자는 3일 동안 목욕재계한 후에 친히 대나무 토막을 가르니,

안에 붉은 색 글씨로 : “조무휼아, 우리들은 곽태산(霍泰山) 산양후(山陽侯)의 천사(天使)이니라.

3월 병술일(丙戌日)에 우리들이 장차 너로 하여금 되돌아가 지씨를 멸망시키도록 할 것이다.

너 역시 우리들을 위해서 백 개의 성읍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면, 우리는 너에게 임호(林胡)의 땅을 주리라.
너의 후대에 굳세고 용맹스러운 왕이 나타날 것이니, 그는 검붉은 피부, 용의 얼굴에 새 부리 같은 입,

서로 어우러진 귀밑머리와 눈썹 그리고 무성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가졌고, 넓고 큰 가슴에 하체는 길고

상체는 우람하며,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탈 것이다.
그는 하종(河宗)을 모두 다 차지해 휴혼(休溷)과 제맥(諸貉)의 지역까지 이를 것이며,

남쪽으로는 진(晉)나라의 다른 성읍을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흑고(黑姑)를 멸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양자는 재배(再拜)하고 삼신(三神)의 명을 받아들였다.]

 

三國攻晉陽, 歲餘, 引汾水灌其城, 城不浸者三版.  城中懸釜而炊, 易子而食.

群臣皆有外心, 禮益慢, 唯高共不敢失禮.  襄子懼乃, 夜使相張孟同私於韓、魏.

韓、魏與合謀, 以三月丙戌, 三國反滅知氏, 共分其地.  於是襄子行賞, 高共為上.

張孟同曰:「晉陽之難,唯共無功.」

襄子曰:「方晉陽急,群臣皆懈,惟共不敢失人臣禮,是以先之.」

於是趙北有代,南并知氏,彊於韓、魏.  遂祠三神於百邑,使原過主霍泰山祠祀.

其後娶空同氏,生五子.  襄子為伯魯之不立也,不肯立子,且必欲傳位與伯魯子代成君.

成君先死,乃取代成君子浣立為太子.  襄子立三十三年卒,浣立,是為獻侯.

[지백, 한씨, 위씨 세 나라가 진양을 공격한 지 1년이 넘도록 분수(汾水)의 물을 끌어다 성에 대니,

물에 잠기지 않은 성벽이 3판(三版) 높이에 불과했다.
성 안에서는 솥을 공중에 걸어둔 채 음식을 만들었으며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었다.
신하들은 모두 딴마음을 품고 예절에 더욱 소홀해졌으나 오로지 고공(高共)만은 감히 예의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겁이 난 양자는 밤중에 재상 장맹동(張孟同)을 파견해 비밀리 한씨, 위씨와 내통하게 했다.
그리고는 한씨, 위씨와 함께 결탁해 3월 병술일에 세 나라가 반대로 지씨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이에 양자가 논공행상을 할 때, 고공을 일등공신으로 쳤다.

그러자 장맹동이 말하기를 : “진양이 난을 당했을 때 오직 고공만이 공로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양자가 말하기를 : “ 진양이 가장 위급했을 때 모든 대신들이 모두 나태해졌으나

오직 고공만은 감히 신하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았으니 그를 제일로 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조씨는 북쪽으로 대(代) 땅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지씨를 합병해 한씨, 위씨보다 강대해졌다.
마침내 백 개의 성읍에 삼신의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원과를 파견해 곽태산 사당의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그 후 양자는 공동씨(空同氏)를 아내로 얻어 다섯 아들을 낳았다.
양자는 백로(伯魯)가 지위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않고

백로의 아들 대성군에게 지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대성군이 일찍 죽자 대성군의 아들 완(浣)을 태자로 세웠다.

양자가 재위 33년 만에 죽고 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헌후(獻侯)이다.]

 

獻侯少即位,治中牟.  襄子弟桓子逐獻侯,自立於代,一年卒.

國人曰桓子立非襄子意,乃共殺其子而復迎立獻侯.

十年,中山武公初立.  十三年,城平邑.  十五年,獻侯卒,子烈侯籍立.

[헌후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궁실을 중모(中牟)에 설치했다.
양자의 동생 환자(桓子)가 헌후를 내쫓고 대(代) 땅에서 스스로 자리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었다.
백성들은 환자가 즉위한 것은 양자의 뜻이 아니라고 하며, 

환자의 아들을 죽이고 다시 헌후를 맞이해 즉위하게 했다.
헌후 10년, 중산국(中山國)의 무공(武公)이 처음으로 즉위했다.

13년, 평읍(平邑)에 성을 쌓았다.

15년, 헌후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열후(烈侯) 조적(趙籍)이 즉위했다.]

 

烈侯元年,魏文侯伐中山,使太子擊守之.

六年,魏、韓、趙皆相立為諸侯,追尊獻子為獻侯.

烈侯好音,謂相國公仲連曰:「寡人有愛,可以貴之乎?」公仲曰:「富之可,貴之則否.」

烈侯曰:「然. 夫鄭歌者槍、石二人,吾賜之田,人萬畝.」

公仲曰:「諾.」不與.  居一月,烈侯從代來,問歌者田.

公仲曰:「求,未有可者.」有頃,烈侯復問.  公仲終不與,乃稱疾不朝.

番吾君自代來,謂公仲曰:「君實好善,而未知所持.  今公仲相趙,於今四年,亦有進士乎?」

公仲曰:「未也.」 番吾君曰:「牛畜、荀欣、徐越皆可.」公仲乃進三人.

及朝,烈侯復問:「歌者田何如?」 公仲曰:「方使擇其善者.」

牛畜侍烈侯以仁義,約以王道,烈侯逌然.  明日,荀欣侍,以選練舉賢,任官使能.

明日,徐越侍,以節財儉用,察度功德.  所與無不充,君說.

烈侯使使謂相國曰:「歌者之田且止.」 官牛畜為師,荀欣為中尉,徐越為內史,賜相國衣二襲.

九年,烈侯卒,弟武公立.  武公十三年卒,趙復立烈侯太子章,是為敬侯.  是歲,魏文侯卒.

[열후 원년, 위문후(魏文侯)가 중산국을 함락시키고 태자 격(擊)을 파견해 지키도록 했다.
6년, 위씨, 한씨, 조씨가 모두 서로 제후가 되고 조씨는 헌자(獻子)를 헌후(獻侯)로 추존했다.
열후는 음악을 좋아해 재상 공중련(公仲連)에게 묻기를 :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존귀한 지위를 주어도 될까?” 라고 하자, 

공중련이 대답하기를 : “부유하게 해주는 것은 괜찮지만 존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열후가 말하기를 : “옳은 말이오. 정나라 가수 창(槍)과 석(石) 두 사람에게 나는 전지 각 만 무(畝)씩을 하사하겠소.”

공중련은 대답하기를 : “좋습니다.”라고 하고서는 주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열후가 대(代) 땅에서 돌아와 공중련에게 가수에게 전지를 하사하기로 한 일에 대해서 물었다.
공중련은 대답하기를 : “마땅한 곳을 물색하고 있는데 적합한 곳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서 열후가 다시 물었다. 끝내 주지 않았던 공중련은 병을 핑계대며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파오군(番吾君)이 대(代) 땅에서부터 와서 공중련에게 묻기를 : “그대는 진실로 선정을 베푸시려는 마음이

있으시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계십니다.

지금 그대가 조나라 재상의 지위에 있은 지 4년이나 되었는데 일찍이 인재를 추천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하자, 

공중련이 대답하기를 :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파오군이 말하기를 : “우축(牛畜), 순흔(荀欣), 서월(徐越)은 모두 추천할 만합니다.”라고 하자.

공중련은 이 세 사람을 추천했다.
공중련이 조정에 나가자, 열후가 다시 묻기를 : “가수의 전지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하자.

공중련이 대답하기를 : “마침 좋은 곳을 고르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축은 열후를 모시면서 인의(仁義)의 도리를 충고하고 왕도로써 제약하기를 권유하니 열후는 흔쾌히 동의했다.
다음날 순흔이 열후를 모시면서 뛰어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로 임명할 때도 재능 있는 사람을 쓸 것을

건의했다.  그 다음날, 서월이 열후를 모시면서 재물을 절약하고 씀씀이를 절제하며 신하들의

공적과 덕행을 살펴 헤아릴 것을 건의했다. 그들이 건의한 말은 충분한 일리가 있어 열후는 매우 기뻐했다.

열후는 사람을 재상에게 보내 “가수에게 전지를 하사하는 일은 잠시 중단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우축을 사(師)에, 순흔을 중위(中尉)에, 서월을 내사(內史)에 임명하고, 재상에게 옷 두 벌을 하사했다.

9년, 열후가 죽자 동생 무공(武公)이 즉위했다. 무공이 재위 13년 만에 죽자,

조나라는 다시 열후의 태자 장(章)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경후(敬侯)이다. 이해에 위문후(魏文侯)가 죽었다.] 

 

敬侯元年,武公子朝作亂,不克,出奔魏.  趙始都邯鄲.

二年,敗齊于靈丘.

三年,救魏于廩丘,大敗齊人.

四年,魏敗我兔臺.  筑剛平以侵衛.

五年,齊、魏為衛攻趙,取我剛平.

六年,借兵於楚伐魏,取棘蒲.

八年,拔魏黃城.

九年,伐齊.  齊伐燕,趙救燕.

十年,與中山戰于房子.

十一年,魏、韓、趙共滅晉,分其地.  伐中山,又戰於中人.

十二年,敬侯卒,子成侯種立.

[경후 원년, 무공의 아들 조조(趙朝)가 난을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위(魏)나라로 도망갔다.

조나라는 처음으로 한단에 도읍을 정했다.
2년, 영구(靈丘)에서 제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3년, 늠구(廩丘)에서 위(魏)나라 군대를 구원하고 제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4년, 위(魏)나라 군대가 토대(兎臺)에서 조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조나라에서는 강평(剛平)에 성을 쌓아서 위(衛)나라 공략의 근거지로 삼았다.
5년, 제나라와 위(魏)나라가 위(衛)나라를 대신해서 조나라를 침공해 조나라의 강평을 점령했다.
6년, 초나라에서 병력을 빌려서 위(魏)나라를 공격해 극포(棘蒲)를 점령했다.

8년, 위(魏)나라의 황성(黃城)을 함락시켰다.
9년, 제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가 연(燕)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연나라를 구원했다.

10년, 중산국과 방자(房子)에서 교전했다.
11년, 위(魏), 한(韓), 조(趙) 세 나라가 공동으로 진(晉)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중산국의 도성을 공격했고, 또 중인(中人)에서 교전했다.
12년, 경후가 죽자 아들 성후(成侯) 조종(趙種)이 즉위했다.]

 

成侯元年,公子勝與成侯爭立,為亂.

二年六月,雨雪.

三年,太戊午為相.  伐衛,取鄉邑七十三.  魏敗我藺.

四年,與秦戰高安,敗之.

五年,伐齊于鄄.  魏敗我懷.  攻鄭,敗之,以與韓,韓與我長子.

六年,中山筑長城.  伐魏,敗湪澤,圍魏惠王.

七年,侵齊,至長城.  與韓攻周.

八年,與韓分周以為兩.

九年,與齊戰阿下.

十年,攻衛,取甄.

十一年,秦攻魏,趙救之石阿.

十二年,秦攻魏少梁,趙救之.

十三年,秦獻公使庶長國伐魏少梁,虜其太子、痤.  魏敗我澮,取皮牢. 成侯與韓昭侯遇上黨.

十四年,與韓攻秦.

十五年,助魏攻齊.

十六年,與韓、魏分晉,封晉君以端氏. 

十七年,成侯與魏惠王遇葛孽.

十九年,與齊、宋會平陸,與燕會阿.

二十年,魏獻榮椽,因以為檀臺.

二十一年,魏圍我邯鄲.

二十二年,魏惠王拔我邯鄲,齊亦敗魏於桂陵.

二十四年,魏歸我邯鄲,與魏盟漳水上.  秦攻我藺.

二十五年,成侯卒.  公子紲太子肅侯爭立,紲敗亡奔韓.

[성후 원년, 공자(公子) 조승(趙勝)이 성후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2년 6월, 하늘에서 비와 눈이 내렸다.
3년, 태무우(太戊牛)가 재상이 되었으며, 위(衛)나라를 공격해 73개의 향읍(鄕邑)을 빼앗았다.

위(魏)나라는 인(藺)에서 조나라의 군대를 무찔렀다.
4년, 진(秦)나라와 고안(高安)에서 싸워 진나라를 무찔렀다.
5년, 견(鄄)에서 제나라를 공격했으며, 위(魏)나라가 회(懷)에서 조나라를 무찔렀다.
정(鄭)나라를 공격해 무찌르고 그 땅을 한(韓)나라에게 주니 한나라는 장자(長子)를 조나라에 주었다.
6년, 중산국이 장성(長城)을 쌓았다. 위(魏)나라를 공격해 탁택(涿澤)에서 패배시키고 위혜왕(魏惠王)을 포위했다.

7년, 제나라를 침공해 장성까지 이르렀다. 한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했다.
8년, 한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양분(兩分)했다.

9년, 제나라와 아성(阿城) 아래에서 교전했다.
10년, 위(衛)나라를 공격해 견(甄)을 차지했다.

11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하니 조나라가 석아(石阿)로 가서 위나라를 구원했다.
12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소량(小梁)을 공격하니 조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했다.
13년, 진헌공(秦獻公)이 서장(庶長) 국(國)을 보내 위나라의 소량을 공격해 태자와 좌(痤)를 포로로 잡아갔다.
위(魏)나라가 회수(澮水)에서 조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피뢰(皮牢)를 빼앗았다. 성후는 한소후와 상당에서 만났다.
14년, 한나라와 연합해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15년, 위(魏)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16년, 한(韓), 위(魏)나라와 더불어 진(晉)나라를 나누어 가지고 진군(晉君)을 단지(端氏)에 봉했다.
17년, 성후는 위혜왕(魏惠王)과 갈얼(葛孽)에서 만났다.

19년, 제(齊), 송(宋) 나라와 평륙(平陸)에서 회합하고, 연(燕)나라와 아(阿)에서 회합했다.
20년, 위(魏)나라가 최고급 목재(木材)로 만든 서까래를 헌상해 이것으로 단대(檀臺)를 건조했다.
21년, 위(魏)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했다.

22년, 위혜왕이 조나라 한단을 함락시키고, 제나라 역시 계릉(桂陵)에서 위(魏)나라를 무찔렀다.
24년, 위(魏)나라가 조나라에게 한단을 돌려주어 위(魏)나라 왕과 장수(漳水)가에서 회맹했다.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인(藺) 땅을 공격했다.
25년, 성후가 죽었다. 공자 설(緤)과 태자 숙후(肅侯)가 지위를 다투다가 조설이 패해 한(韓)나라로 도망했다.]

 

肅侯元年,奪晉君端氏,徙處屯留.

二年,與魏惠王遇於陰晉.

三年,公子范襲邯鄲,不勝而死.

四年,朝天子.

六年,攻齊,拔高唐.

七年,公子刻攻魏首垣.

十一年,秦孝公使商君伐魏,虜其將公子卬.  趙伐魏.

十二年,秦孝公卒,商君死.

十五年,起壽陵.  魏惠王卒.

十六年,肅侯游大陵, 出於鹿門, 大戊午扣馬曰:「耕事方急, 一日不作, 百日不食.」肅侯下車謝. 

十七年,圍魏黃,不克.  筑長城.

十八年,齊、魏伐我,我決河水灌之,兵去.

二十二年,張儀相秦.  趙疵與秦戰,敗,秦殺疵河西,取我藺、離石.

二十三年,韓舉與齊、魏戰,死于桑丘. 

二十四年,肅侯卒.  秦、楚、燕、齊、魏出銳師各萬人來會葬.  子武靈王立.

[숙후 원년, 진군(晉君)의 단씨현을 빼앗고 그를 둔류(屯留)로 이주시켰다.

2년, 위혜왕과 음진(陰晉)에서 만났다.
3년, 공자 조범(趙范)이 한단을 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4년, 주(周) 천자를 조현(朝見)했다.

6년, 제나라를 공격해 고당(高唐)을 빼앗았다.
7년, 공자 조각(趙刻)이 위(魏)나라의 수원(首垣)을 공격했다.
11년, 진효공(秦孝公)이 상군(商君)을 시켜 위(魏)나라를 정벌하게 해 장군인 공자 앙(卬)을 포로로 잡았다.

조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12년, 진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상군도 죽었다.

15년, 수릉(壽陵)을 축조했다. 위혜왕이 죽었다.
16년, 숙후가 대릉(大陵)을 유람하고 녹문(鹿門)을 나섰다. 대무오(大戊午)가 말고삐를 잡고서 말하기를 :

“지금은 농사 일이 급한 때입니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백일 동안 먹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숙후는 말에서 내려 사죄했다.
17년, 위(魏)나라의 황성(黃城)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성(長城)을 쌓았다.
18년, 제나라와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황하의 물을 끌어대 적들에게 부어대니 적병은 도망갔다.

 22년,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조자(趙疵)가 진(秦)나라와 싸워 패하니

진나라 군사는 하서(河西)에서 조자를 죽이고 조나라의 인(藺)과 이석(離石) 지방을 빼앗았다.
23년, 한거(韓擧)가 제나라, 위(魏)나라와 싸우다 상구(桑丘)에서 전사했다.
24년, 숙후가 죽었다. 진(秦), 초, 연, 제(齊), 위(魏) 각 나라가 정예 병사 만 명씩을 보내 장례에 참석했다. 

아들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했다.]

 

武靈王元年,陽文君趙豹相.  梁襄王與太子嗣,韓宣王與太子倉來朝信宮.

武靈王少,未能聽政,博聞師三人,左右司過三人.

及聽政,先問先王貴臣肥義,加其秩;國三老年八十,月致其禮.

三年,城鄗.

四年,與韓會于區鼠.

五年,娶韓女為夫人. 

八年,韓擊秦, 不勝而去. 五國相王, 趙獨否. 曰:「無其實, 敢處其名乎!」令國人謂已曰「君」.

九年,與韓、魏共擊秦,秦敗我,斬首八萬級.  齊敗我觀澤.

十年,秦取我中都及西陽.  齊破燕.  燕相子之為君,君反為臣.

十一年,王召公子職於韓,立以為燕王,使樂池送之.

十三年,秦拔我藺,虜將軍趙莊.  楚、魏王來,過邯鄲.

十四年,趙何攻魏.

十六年,秦惠王卒.  王遊大陵.  他日, 王夢見處女鼓琴而歌詩曰:「美人熒熒兮, 顏若苕之榮.

命乎命乎, 曾無我嬴!」 異日,王飲酒樂,數言所夢,想見其狀.

吳廣聞之,因夫人而內其女娃嬴.  孟姚也.  孟姚甚有寵於王,是為惠后.

十七年,王出九門,為野臺,以望齊、中山之境.

十八年,秦武王與孟說舉龍文赤鼎,絕臏而死.

趙王使代相趙固迎公子稷於燕,送歸,立為秦王,是為昭王.

[무령왕 원년, 양문군(陽文君) 조표(趙豹)가 재상이 되었다.

양양왕(梁襄王)과 태자 사(嗣), 그리고 한선왕(韓宣王)과 태자 창(倉)이 신궁(信宮)에 와서 조회하였다.
무령왕이 어려서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식한 관리 세 사람과

측근으로 과실을 감찰하는 사과(司過) 세 사람이 두었다.
정무를 처리하게 되었을 때에 먼저 선왕 때의 현신인 비의(肥義)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그의 봉록을 높여주었으며,
나라 안의 80세 이상 되는 덕망 높은 노인에게 매월 선물을 보냈다.
3년, 호(鄗)에 성을 건축했다.

4년, 한나라와 우서(區鼠)에서 회합했다.

5년, 한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8년, 한나라가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섯 나라가 서로 ‘왕(王)’을 칭했으나,

조나라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실질적인 알맹이도 없으면서 어찌 허황된 명분에 안주하겠는가?”라고 말하고서는

나라 사람들에게 자기를 ‘군(君)’이라고 부르도록 명령했다.
9년, 한나라, 위(魏)나라와 더불어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는 세 나라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8만 명의 목을 베어갔다. 제나라가 관택(觀澤)에서 조나라를 무찔렀다.
10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중도(中都)와 서양(西陽)을 빼앗았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무찔렀다.

연나라 재상 자지(子之)가 군주가 되고 군주는 반대로 신하가 되었다.
11년, 무령왕이 공자(公子) 직(職)을 한나라에서 불러들여 연왕(燕王)으로 세우고 악지(樂池)를 시켜 호위하게 했다.
13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인(藺) 지방을 함락시키고 장군 조장(趙莊)을 포로로 잡아갔다.

초나라와 위(魏)나라의 왕이 한단을 방문했다.
14년, 조하(趙何)가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16년, 진혜왕(秦惠王)이 죽었다. 무령왕이 대릉(大陵)을 유람했다. 어느 날 왕이 꿈속에서 처녀가 거문고를 타며

시 한 수를 노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미인이여! 광채가 눈부시도다. 그 모습 농염한 능소화(凌霄花)

같아라. 운명이여! 내 가련한 운명이여, 뜻밖에 이 왜영(娃嬴)을 몰라주다니.”라는 것이었다.
다른 날 왕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몇 번이나 꿈 이야기를 하며 꿈에 보았던 미인의 용모를 상상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오광(吳廣)이 부인을 통해 그의 딸 왜영을 궁중에 들여보냈는데, 이가 바로 맹요(孟姚)이다.
맹요는 왕의 총애를 듬뿍 받았으니 그녀가 바로 혜후(惠后)이다.
17년, 왕이 구문(九門)을 나와 조망대를 만들어 제나라와 중산국의 경내를 살피었다.
18년, 진무왕(秦武王)이 맹열(孟說)과 용 무늬의 적색 정(鼎)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져 죽었다.
무령왕은 대(代)의 재상 조고(趙固)를 시켜 공자 직(稷)을 연나라에서 영접해 진(秦)나라로 호송하고

진왕(秦王)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소왕(昭王)이다.]

 

十九年春正月,大朝信宮.  召肥義與議天下,五日而畢.

王北略中山之地,至於房子,遂之代,北至無窮,西至河,登黃華之上.

召樓緩謀曰:「我先王因世之變,以長南藩之地,屬阻漳、滏之險,立長城,又取藺、郭狼,

敗林人於荏,而功未遂.  今中山在我腹心,北有燕,東有胡,西有林胡、樓煩、秦、韓之邊,

而無彊兵之救,是亡社稷,柰何? 夫有高世之名,必有遺俗之累. 吾欲胡服.」

樓緩曰:「善.」群臣皆不欲.

於是肥義侍,王曰:「簡、襄主之烈,計胡、翟之利.  為人臣者,寵有孝弟長幼順明之節,

通有補民益主之業,此兩者臣之分也.  今吾欲繼襄主之跡,開於胡、翟之鄉,而卒世不見也.

為敵弱,用力少而功多,可以毋盡百姓之勞,而序往古之勳.  夫有高世之功者,負遺俗之累;

有獨智之慮者,任驁民之怨.  今吾將胡服騎射以教百姓,而世必議寡人,柰何?」

肥義曰:「臣聞疑事無功, 疑行無名, 王既定負遺俗之慮, 殆無顧天下之議矣. 夫論至德者不和於俗,

成大功者不謀於眾.  昔者舜舞有苗,禹袒裸國,非以養欲而樂志也,務以論德而約功也.

愚者闇成事,智者睹未形,則王何疑焉.」

王曰:「吾不疑胡服也,吾恐天下笑我也.  狂夫之樂,智者哀焉;愚者所笑,賢者察焉.

世有順我者,胡服之功未可知也.  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於是遂胡服矣.

使王紲公子成曰:「寡人胡服,將以朝也,亦欲叔服之.  家聽於親而國聽於君,古今之公行也.

子不反親, 臣不逆君,兄弟之通義也.  今寡人作教易服而叔不服,吾恐天下議之也.

制國有常,利民為本;從政有經,令行為上.  明德先論於賤,而行政先信於貴.

今胡服之意,非以養欲而樂志也;事有所止而功有所出,事成功立,然後善也.

今寡人恐叔之逆從政之經,以輔叔之議。且寡人聞之,事利國者行無邪,因貴戚者名不累,

故願慕公叔之義,以成胡服之功. 使紲謁之叔,請服焉.」

公子成再拜稽首曰:「臣固聞王之胡服也.  臣不佞,寢疾,未能趨走以滋進也.  王命之,臣敢對,

因竭其愚忠.  曰:臣聞中國者, 蓋聰明徇智之所居也, 萬物財用之所聚也, 賢聖之所教也,

仁義之所施也, 詩書禮樂之所用也.  異敏技能之所試也, 遠方之所觀赴也, 蠻夷之所義行也.

今王捨此而襲遠方之服,變古之教,易古人道,逆人之心,而怫學者,離中國,故臣願王圖之也.

使者以報. 王曰:「吾固聞叔之疾也,我將自往請之.」

王遂往之公子成家, 因自請之, 曰:「夫服者,所以便用也;禮者,所以便事也.  聖人觀鄉而順宜,

因事而制禮,所以利其民而厚其國也. 夫翦發文身,錯臂左衽,甌越之民也. 黑齒雕題,卻冠秫絀,大吳之國也.  

故禮服莫同,其便一也.  鄉異而用變,事異而禮易.  是以聖人果可以利其國,

不一其用;果可以便其事,不同其禮.  儒者一師而俗異,中國同禮而教離,況於山谷之便乎?

故去就之變,智者不能一;遠近之服,賢聖不能同.  窮鄉多異,曲學多辯.  不知而不疑,

異於己而不非者,公焉而眾求盡善也.  今叔之所言者俗也, 吾所言者所以制俗也. 

吾國東有河、薄洛之水, 與齊、中山同之, 無舟楫之用.  自常山以至代、上黨,東有燕、東胡之境,

而西有樓煩、秦、韓之邊,今無騎射之備.  故寡人無舟楫之用,夾水居之民,

將何以守河、薄洛之水;變服騎射,以備燕、三胡、秦、韓之邊.

且昔者簡主不塞晉陽以及上黨,而襄主并戎取代以攘諸胡,此愚智所明也.

先時中山負齊之彊兵,侵暴吾地,系累吾民,引水圍鄗,微社稷之神靈,則鄗幾於不守也.

先王丑之,而怨未能報也。今騎射之備,近可以便上黨之形,而遠可以報中山之怨.

而叔順中國之俗以逆簡、襄之意,惡變服之名以忘鄗事之丑,非寡人之所望也.」

公字成再拜稽首曰:「臣愚,不達於王之義,敢道世俗之聞,臣之罪也.

今王將繼簡、襄之意以順先王之志,臣敢不聽命乎!」 再拜稽首.  乃賜胡服.

明日,服而朝.  於是始出胡服令也. 趙文、趙造、周袑、趙俊皆諫止王毋胡服,如故法便.

王曰:「先王不同俗,何古之法?帝王不相襲,何禮之循? 虙戲、神農教而不誅,

黃帝、堯、舜誅而不怒.  及至三王,隨時制法, 因事制禮. 法度制令各順其宜, 衣服器械各便其用.

故禮也不必一道,而便國不必古.  聖人之興也不相襲而王,夏、殷之衰也不易禮而滅.

然則反古未可非,而循禮未足多也.  且服奇者志淫,則是鄒、魯無奇行也;

俗辟者民易,則是吳、越無秀士也.  且聖人利身謂之服,便事謂之禮.

夫進退之節,衣服之制者,所以齊常民也,非所以論賢者也.  故齊民與俗流,賢者與變俱.

故諺曰『以書御者不盡馬之情,以古制今者不達事之變』.

循法之功,不足以高世;法古之學,不足以制今. 子不及也.」遂胡服招騎射.

[무령왕 19년 봄 정월, 신궁에서 성대한 조회를 개최했다. 비의를 불러 천하 대사를 의논했는데 5일 후에야 

끝마쳤다.  왕은 북쪽으로 중산국의 영토를 공략하고 방자(房子) 지역에 이르러 대(代) 땅으로 갔으며,

북상해 무궁(無窮)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러 황화산(黃華山) 꼭대기에 올랐다.
누완(樓緩)을 불러 의논하기를 : “나의 선왕은 세사의 변화에 따라 남방 속국의 우두머리를 하시고

장수(漳水)와 부수(滏水)의 험난한 지세를 연결해 장성을 쌓으셨으며,

인(藺)과 곽랑(郭狼)을 탈취하시고 임(荏)에서 임호(林胡)를 무찌르셨으나 대업은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지금 중산국은 우리나라의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연나라, 동쪽으로는 동호(東胡),

서쪽으로는 임호, 누번(樓煩), 진(秦)나라, 한나라의 국경과 접하고 있지만,

강력한 병력의 보호가 없어 이러다가는 사직이 망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習俗)을 위배했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니,

나는 호복(胡服)을 입고자 한다.”라고 하자,

누완이 대답하기를 :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모두 이를 원하지 않았다. 

이때 비의가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말하기를 : “간자와 양자 두 주군의 업적은 호(胡)와 적(狄)에 대해

이로움을 꾀한 데 있소. 신하된 자로서 총애를 받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장유(長幼)를 알며

명리(明理)에 순종하는 절조가 있어야 하고, 현달했을 때에는 백성을 돕고 군주에게 이롭게 하는 업적이 있어야 

하니, 이 두 가지가 신하의 본분이오. 이제 나는 양자의 업적을 계승해 호와 적의 영토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죽을 때까지 현신을 만나지 못할 것 같소. 내가 호복을 입는 것은 적을 약하게 해 힘은 적게 들이고

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으니,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고서도 순리적으로 간자와 양자 두 선왕의 

업적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이오.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며, 심오한 지략(智略)을 지니고 있는 자는 오만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 마련이오.

이제 나는 앞으로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세상에서는 틀림없이 과인에 대해 의론이 분분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비의가 아뢰기를 : “ 신이 듣기에 일을 하려고 할 때 머뭇거리면 성공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에 주저하면

명예를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왕께서 기왕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시려고 결심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의 의론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최고의 덕행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적인 것에

부화뇌동 하지 않으며, 큰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범부(凡夫)와 모의하지 않는 법입니다.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의 춤을 추어 그들을 감화시켰고 우임금은 나국(裸國)에서 옷을 벗었는데,

이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정을 선양해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이미 성사된 뒤에도 그 연유를 모르지만, 

현명한 자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거늘 왕께서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 나는 호복을 입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고 천하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소.

무지한 자의 즐거움은 현명한 자의 슬픔이며, 어리석은 자가 비웃은 일은 어진 자가 통찰하고 있는 일이오.

세상에서 나를 따르는 자가 호복의 효능을 이루 다 짐작할 수가 없을 것이니,

설사 세상 사람들이 이 일로 나를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오랑캐 땅과 중산국은 내가 꼭 차지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왕은 마침내 호복을 입었다.
왕은 왕설(王緤)을 파견해 공자(公子) 성(成)에게 전하기를 : “ 과인이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할 것이니

숙부께서도 입으시기 바라오. 집 안에서는 부모의 말씀에 따라야 하고,

나라 안에서는 군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고금의 공인된 행동원칙이오.

아들은 부모에게 반대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군주를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하간의 통념이오.

지금 과인이 교지를 내려 복장을 바꾸어 입게 했는데 숙부께서 입지 않으시면, 천하 사람들이 비난할까 두렵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상도(常道)가 있으니 백성을 이롭게 함이 그 근본이며,

정치에 참여하는 데 원칙이 있으니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덕정을 펴려면 먼저 평민 백성들을 이해시켜야 하며, 정령을 시행하려면 먼저 귀족들에게서 신임을 얻어야 하오.
지금 호복을 입는 목적은 욕망을 만족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일을 하는 데에는 목적한 바에

도달해야 공적이 이루어지며, 일이 완성되어 공적을 이룬 후에야 비로소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소.

지금 과인은 숙부께서 정치참여의 원칙에 어긋나게 행동해 세상의 비난을 자초할까 두렵소.
과인이 듣기에 국익에 관련된 일은 행함에 사악함이 없고, 귀척(에 의지하면 명예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고 하니,

나는 숙부의 위엄과 명망을 빌려서 호복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하오.

왕설을 시켜 숙부를 뵙도록 하오니 호복을 입어주시오.”라고 하였다.
공자 성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신은 본래 이미 왕께서 호복을 입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재주도 없고 병들어 누워 있는 몸이라 조정에 나가 자주 진언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명령하시니 신이 감히 이에 응대함으로써 저의 우매한 충정을 다하고자 합니다.
신이 듣건대 중국은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만물과 재화가 모이는 곳이며,

성현이 교화를 행한 곳이고, 인의가 베풀어진 곳이며,『시(詩)』,『서(書)』와 예악(禮樂)이 쓰이는 곳이고,

특이하고 우수한 기능이 시험되는 곳이며, 먼 곳의 사람들이 관람하러 오는 곳이고,

만이(蠻夷)가 모범으로 삼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를 버리시고 먼 나라의 복장을 입으시니,

이것은 고대의 교화를 개변함이요, 고대의 도를 바꾸는 것이며,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고,

학자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며, 중국의 풍속과는 동떨어진 것이니,

신은 왕께서 이 일을 신중히 고려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이 말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말하기를 : “ 내가 숙부께서 병이 드셨다고 들었는데 친히 가서 부탁드려야겠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윽고 공자 성의 집에 친히 찾아가 부탁하기를 :
“ 무릇 의복이란 입기에 편리하기 위한 것이고 예의란 일을 도모하는 데 편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인은 지방의 풍속을 관찰해 그에 적합하게 행동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예의를 제정하니

이는 국민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팔에 무늬를 아로새기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은 구월(甌越) 일대 백성들의 습관입니다.

이를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어피(魚皮)로 만든 모자를 쓰고 조악하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것은

오(吳)나라의 풍습입니다. 그러므로 예법이나 복장은 같지 않으나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방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함에 변화가 있고 일이 다르기 때문에 예법도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그 방법을 일치시킬 필요가 없으며,

정말로 일하는데 편리하다면 그 예법을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유자(儒者)는 동일한 스승에게서 전수받지만 예속(禮俗)은 천차만별이며,

중국에도 예의는 동일하나 교화가 서로 차별이 있는데, 하물며 산간벽지의 편리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세에 따른 취사선택의 변화에서는 총명한 사람도 억지로 일치함을 요구할 수 없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의복에 대해는 성인도 일치됨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궁벽한 벽촌은 다른 풍속이 많으며 천박한 견해에는 궤변이 많은 법입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 의견과 달라도 비난하지 않는 것은, 공개적으로 널리 중지를 모아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숙부께서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고

제가 말하는 것은 풍속을 조성하는 이치입니다.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황하와 장수(漳水)가 있어

제나라, 중산국과 공유하고 있으나 선박 시설이 없습니다. 상산(常山)에서부터 대(代), 상당(上黨)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연나라, 동호(東胡)와의 변경이 있고 서쪽으로는 누번, 진(秦)나라, 한나라와의 변경이 있거늘,

지금 기병과 사수(射手)의 방비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인은 선박 시설도 없는데 물가에 사는 주민들이 어떻게 황하와 장수를 지킬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복장을 바꾸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배워 연나라 삼호(三胡), 진(秦)나라, 한나라의 변경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전에 간자께서는 진양에서부터 상당에 이르는 요충지를 두절하지 않으셨고,

양자께서는 융(戎)을 병합하고대(代)를 점거해 오랑캐 각 부족을 물리치셨으니 이는 어리석은 자나 총명한 자나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력한 병력을 믿고 우리 땅을 침범해 짓밟았으며,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대어 호성(鄗城)을 포위했는데, 만약 사직의 신령이 보우하지 않았더라면

호성은 거의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셨으나, 이 원한은 아직 보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기병과 사수로써 방비하면 가까이는 상당의 지형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고, 멀리는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부께서는 풍속에 순종하느라 간자, 양자 두 분의 유지를 어기고

있으니 복장을 개변했다는 평판을 싫어해 호성의 수치를 망각하는 것은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공자 성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신이 어리석어 왕의 깊은 뜻을 모르고

감히 세속의 견문을 아뢰었으니이는 신의 잘못입니다. 지금 왕께서 간자, 양자의 유지를 계승하고

선왕의 뜻에 따른다고 하시니 신이 감히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다시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왕은 이에 호복을 하사했다.

다음날 공자 성이 호복을 입고 조회에 나가니 그제에서야 호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공포했다.
조문, 조조, 주소(周祒), 조준은 모두 왕에게 호복을 입지 말고 옛날 방식이 편하다고 간언하며 말렸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 “ 선왕들의 풍속이 같지 않은데 어떤 옛 방식을 본받을 것인가 ?

제왕들이 서로 답습하지 않는데 어떤 예법을 따를 것인가?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은 교화에 치중하고

형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황제(黃帝)와 요(堯), 순(舜)은 형벌을 사용하되 잔혹하지 않았소.
삼왕(三王)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법규를 제정했으며 실제 상황에 따라 예법을 규정했소.

법령과 제도가 각각 실제 필요에 부합되었고, 의복과 기계는 각각 그 쓰임에 편리했소. 그러므로 예법 또한

꼭 한 가지 방식일 필요가 없고 국가의 편의를 추구하는 데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할 필요는 없소.
성인이 나타나자 서로 답습하지 않았는데도 왕이 되었으며, 하나라,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예법을 바꾸지 않았어도

멸망했소. 그렇다면 옛 것을 위반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으며, 옛날의 예법을 따랐다고 해서 찬양할 것도 없소.

만약 기이한 의복을 입는 자는 마음이 음탕하다고 한다면 추(鄒)나라와 노(魯)나라에는 기행(奇行)이 없을 것이며,
풍속이 바르지 못한 곳에서는 백성이 경솔해진다면 오나라, 월나라에는 덕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가 없을 것이오.
하물며 성인께서는 신체에 편리한 것을 의복이라고 하셨고, 일할 때에는 편리한 것을 예법이라고 하셨소.
무릇 진퇴의 예절과 의복의 제도는 일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지, 현자(賢者)를 논평하기 위한 것이 아니오.
그러므로 평민은 세속과 어울리고 현인은 변혁과 함께 하는 것이오.

옛 속담에 “책 속의 지식으로 말을 모는 자는 말의 속성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옛날 법도로 지금을 다스리는 자는 사리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라고 했으니,

옛날 법도만을 따라서는 세속을 초월하기 어렵고, 옛날 학문만을 본받아가지고는 지금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오.

그대들은 이런 점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오.”라고 하자. 마침내 호복을 보급하고 기병과 사수를 모집했다.]

 

二十年,王略中山地,至寧葭;西略胡地,至榆中.  林胡王獻馬.

歸,使樓緩之秦,仇液之韓,王賁之楚,富丁之魏,趙爵之齊.  代相趙固主胡,致其兵.

二十一年,攻中山.  趙袑為右軍,許鈞為左軍,公子章為中軍,王并將之.

牛翦將車騎,趙希并將胡、代.  趙與之陘,合軍曲陽,攻取丹丘、華陽、鴟之塞.

王軍取鄗、石邑、封龍、東垣.  中山獻四邑和,王許之,罷兵.

二十三年, 攻中山.

二十五年, 惠后卒.  使周袑胡服傅王子何.

二十六年, 復攻中山, 攘地北至燕、代, 西至雲中、九原.

二十七年五月戊申,大朝於東宮,傳國,立王子何以為王.  王廟見禮畢,出臨朝.

大夫悉為臣,肥義為相國,并傅王.  是為惠文王.  惠文王,惠后吳娃子也.  武靈王自號為主父.

[무령왕 20년, 왕은 중산국의 영토를 공략해 영가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호(胡) 땅을 침략해 유중에 이르렀다.

임호왕은 무령왕에게 말을 헌상했다.  정벌하고 돌아와서 누완(樓緩)을 진(秦)나라에, 구액(仇液)을 한나라에,

왕분(王賁)을 초나라에. 부정(富丁)을 위(魏)나라에, 조작(趙爵)을 제나라에 각각 사신으로 보냈다.
대(代) 땅의 재상 조고(趙固)가 호(胡) 땅에 주둔해 관리하며 호병(胡兵)을 모집했다.
21년, 중산국을 공격했다. 조소가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허균(許鈞)이 좌군(左軍)을 거느리며,

공자 장(章)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왕이 그들을 통괄해 지휘했다.
우전(牛翦)이 전차와 기병을 이끌고, 조희(趙希)는 호와 대의 병사를 통괄해 거느렸다.
조희는 여러 군사와 더불어 골짜기를 지나 곡양에서 합류해 단구, 화양, 그리고 치(鴟)의 요새를 공격해 점령했다.

무령왕의 군대는 호(鄗), 석읍(石邑), 봉룡(封龍), 동원(東垣) 등지를 점령했다.

중산국이 4개의 성읍을 바치며 강화하기를 원하자, 왕은 이를 허락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23년, 다시 중산국을 공격했다.

25년, 무령왕의 부인 혜후(惠后)가 죽었다. 주소로 하여금 호복을 입고 왕자 조하(趙何)의 스승이 되게 하였다.
26년, 다시 중산국을 공격했다. 이로써 탈취한 땅이 북쪽으로는 연(燕)과 대(代)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까지 이르렀다.

27년 5월 무신일, 동궁에서 성대한 조회를 거행하고 무령왕은 왕자 하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새 왕은 묘현(廟見)의 예를 마치고 조정에 들어 정사를 처리했다. 대부들은 모두 신하로서 복종하고,

비의는 재상이 되었으며 아울러 새 왕의 사부가 되었다.
그가 바로 혜문왕(惠文王)이다. 혜문왕은 혜후 오왜(吳娃)의 아들이다. 무령왕은 주부(主父)로 자칭했다.]

 

主父欲令子主治國,而身胡服將士大夫西北略胡地,而欲從雲中、九原直南襲秦,

於是詐自為使者入秦.  秦昭王不知, 已而怪其狀甚偉, 非人臣之度, 使人逐之, 而主父馳已脫關矣.

審問之,乃主父也.  秦人大驚.  主父所以入秦者,欲自略地形,因觀秦王之為人也.

[주부는 아들에게 국정을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호복을 입고 대부들을 거느려서 서북 방면의 호(胡) 땅을 공략했다.
운중과 구원에서 곧바로 진(秦)나라를 습격하고자, 자신이 거짓으로 사자로 위장해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소왕(秦昭王)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얼마 후 그의 모습이 매우 위풍당당해 신하된 자의 풍채가

아니었음을 수상히 여기고 사람을 보내 추적하게 했다. 그러나 주부는 말을 달려 이미 진나라의 관문을 벗어났다.

자세히 조사한 후에야 그가 주부라는 것을 알고서, 진나라 사람들은 매우 경악했다. 

주부가 진나라에 잠입한 이유는 친히 지형을 관찰하고 아울러 진왕의 사람됨을 살펴보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惠文王二年,主父行新地,遂出代,西遇樓煩王於西河而致其兵. 

三年, 滅中山, 遷其王於膚施.  起靈壽,北地方從,代道大通. 

還歸,行賞, 大赦, 置酒酺五日, 封長子章為代安陽君. 章素侈,心不服其弟所立。

主父又使田不禮相章也. 李兌謂肥義曰:「公子章彊壯而志驕,黨眾而欲大, 殆有私乎?

田不禮之為人也, 忍殺而驕.  二人相得, 必有謀陰賊起,一出身徼幸.  

夫小人有欲,輕慮淺謀,徒見其利而不顧其害,同類相推,俱入禍門.  以吾觀之,必不久矣.

子任重而勢大,亂之所始,禍之所集也,子必先患.  仁者愛萬物而智者備禍於未形,

不仁不智,何以為國? 子奚不稱疾毋出,傳政於公子成?毋為怨府,毋為禍梯.」

肥義曰:「不可,昔者主父以王屬義也,曰:『毋變而度,毋異而慮,堅守一心,以歿而世.』

義再拜受命而籍之.  今畏不禮之難而忘吾籍, 變孰大焉.  進受嚴命, 退而不全, 負孰甚焉.

變負之臣, 不容於刑.  諺曰『死者復生, 生者不愧』.

吾言已在前矣,吾欲全吾言,安得全吾身!且夫貞臣也難至而節見, 忠臣也累至而行明.

子則有賜而忠我矣, 雖然, 吾有語在前者也, 終不敢失.」

李兌曰:「諾,子勉之矣!吾見子已今年耳.」涕泣而出.  李兌數見公子成,以備田不禮之事.

異日肥義謂信期曰:「公子與田不禮甚可憂也.  其於義也聲善而實惡,此為人也不子不臣.

吾聞之也,姦臣在朝,國之殘也;讒臣在中,主之蠹也.  此人貪而欲大,內得主而外為暴.

矯令為慢, 以擅一旦之命, 不難為也, 禍且逮國. 今吾憂之, 夜而忘寐, 饑而忘食.

盜賊出入不可不備.  自今以來,若有召王者必見吾面,我將先以身當之,無故而王乃入.」

信期曰:「善哉,吾得聞此也!」

[혜문왕 2년, 주부가 새로 확장한 땅을 순시하다가 곧 대(代) 땅을 떠나,

서쪽으로 향해 서하(西河)에서 누번왕(樓煩王)을 만나 그의 병사를 징발했다.

혜문왕 3년, 조나라는 중산국을 멸하고 그 왕을 부시(膚施)로 이주시켰다.

영수궁을 지었으며 이로부터 북방 지역이 조나라에 귀속되어 대 땅으로 향하는 길이 막힘없이 잘 통하게 되었다.

돌아와서는 논공행상을 하고 대사면을 행했으며, 5일 동안 주연을 베풀고 장자 장을 대 땅의 안양군으로 봉했다.

장은 본래 사치스러웠고 내심은 동생이 왕위에 오른 것에 불복했다. 주부는 또 전불례를 보내 장을 보좌하게 했다.
이태(李兌)가 비의에게 말하기를 : “ 공자 장은 신체가 건장하고 마음이 교만하며 따르는 무리가 많고 야심이 크니,

아마도 사심(私心)이 있겠지요?  또 전불례의 사람됨은 잔인하고 오만합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 틀림없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일단 일을 벌이면 요행을 바랄 것입니다.

무릇 소인에게 야심이 있으면 생각이 경솔하고 책략이 천박해, 단지 그 이익만을 생각할 뿐

그 재난은 고려하지 않으니 유유상종해 서로 부추김으로써 함께 재해의 심연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그럴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책임이 막중하고 권세가 크므로 변란이 당신에게서 시작되어 화가 당신에게로 모여들 것이니,

당신은 틀림없이 제일 먼저 해를 입을 것입니다. 인자(仁者)는 만물을 두루 사랑하고 지자(智者)는 재해가 아직

형성되기 전에 방비하나니, 인자하지도 않고 총명하지도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어찌해 병을 핑계삼고 두문불출해 정사를 공자 성(成)에게 맡기지 않습니까 ?

원망의 집합지가 되지도 말고 재앙의 전달자가 되지도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비의는 말하기를 : “안 되오. 당초 주부께서 왕을 나에게 부탁하시면서 ‘너의 법도를 바꾸지 말고

너의 생각을 달리하지 말며 한마음을 굳게 지키면서 너의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라고 하셨을 때,

나는 재배해 명을 받고 기록해 두었소. 이제 전불례의 난을 두려워해 나의 기록을 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변절이 어디 있겠소? 조정에 나가 엄숙한 사명을 받고, 물러나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심한 배신이 어디 있겠소? 변절하고 배신한 신하는 형벌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속담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산자는 그에 대해서 결코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이 있소.

내가 이미 말한 이상에는 나의 언약을 완전히 이루고자 하니, 어찌 일신의 안전을 구하겠소 ?

하물며 지조 있는 신하는 재난이 닥쳐야 절조가 나타나고 충신은 재앙에 연루되어야 행위가 분명해진다고 했소.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충고도 했지만, 나는 내가 한 말에 끝까지 거스르지 않는 행동을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태가 말하기를 : “좋습니다. 최선을 다하십시오. 제가 당신을 볼 수 있는 것도 올해뿐이겠군요.”라고 하고,

흐느끼며 나갔다. 이태는 여러 차례 공자 성을 만남으로써 전불례의 반란에 방비했다.
다른 날, 비의가 신기(信期)에게 말하기를 : “공자 장과 전불례는 정말 우환거리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좋은 말을 

하지만 사실은 악독하니, 그들의 사람됨은 자식으로서는 불효하고 신하로서는 불충합니다.

제가 듣기에 간신이 조정에 있으면 국가의 재앙이요, 참신(讒臣)이 궁중에 있으면 군주의 좀벌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야심이 크며 안에서는 군주의 총애를 얻으면서 밖에서는 잔악하고 포악합니다.
그들은 왕명을 사칭하여 오만무례하게 굴며 명령을 제 마음대로 내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재난이 장차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는 이 일이 걱정되어 밤이 되어도 잘 것을 잊고

배가 고파도 먹는 것을 잊고 삽니다. 도적이 출몰하고 있으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왕을 뵙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먼저 저를 만나도록 할 것입니다.

저가 먼저 몸으로써 그를 막아보고 변고가 없으면 왕께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신기가 말하기를 : “좋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요.”라고 하였다.]

 

四年,朝群臣,安陽君亦來朝.  主父令王聽朝,而自從旁觀窺群臣宗室之禮.

見其長子章傫然也,反北面為臣,詘於其弟,心憐之,於是乃欲分趙而王章於代,計未決而輟.

主父及王游沙丘,異宮,公子章即以其徒與田不禮作亂,詐以主父令召王.  肥義先入,殺之.

高信即與王戰.  公子成與李兌自國至, 乃起四邑之兵入距難, 殺公子章及田不禮, 滅其黨賊而定王室.

公子成為相,號安平君,李兌為司寇.  公子章之敗,往走主父,主主開之,成、兌因圍主父宮.

公子章死,公子成、李兌謀曰:「以章故圍主父,即解兵,吾屬夷矣.」乃遂圍主父.

令宮中人「後出者夷」宮中人悉出. 主父欲出不得, 又不得食, 探爵鷇而食之, 三月餘而餓死沙丘宮.

主父定死,乃發喪赴諸侯.  是時王少,成、兌專政,畏誅,故圍主父.

主父初以長子章為太子,後得吳娃,愛之,為不出者數歲,生子何,乃廢太子章而立何為王.

吳娃死,愛弛,憐故太子,欲兩王之,猶豫未決,故亂起,以至父子俱死,為天下笑,豈不痛乎!

[혜문왕 4년, 조회를 열어 신하들을 부르니 안양군(安陽君)도 와서 조현했다.

주부가 왕에게 정사를 처리하게 하면서 자신은 옆에서 신하와 왕실 종친들의 예의를 살펴 보았다.

그는 장자 장이 의기소침하며 신하로서 북면하고 동생에게 몸을 굽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조나라를 양분해 장을 대(代)의 왕으로 봉하려고 했으나, 이 계획은 결정도 되지 않은 채 중지되었다.
주부가 왕과 함께 사구(沙丘)에 유람을 갔을 때 서로 다른 궁에 묵었는데,

공자 장이 그의 도당과 전불례를 믿고 난을 일으켜 주부의 명이라고 사칭해 왕을 불렀다.

먼저 들어간 비의가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자, 고신(高信)은 즉시 왕과 함께 공자 장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도성에서 달려온 공자 성과 이태가 네 개 읍의 병사를 일으켜 변란에 대항해, 공자 장과 전불례를 죽이고

그들의 도당을 멸해 왕실을 안정시켰다. 공자 성은 재상이 되어 안평군(安平君)이라고 불리고,

이태는 사구(司寇)가 되었다. 이에 앞서 공자 장이 패해 주부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자 주부가 그를 받아들이니,
공자 성과 이태는 주부의 궁을 포위했다. 결국 공자 장이 죽자,  공자 성과 이태는 의논을 한 후 말하기를 :

“공자 장 때문에 주부를 포위했는데 만약 군대를 철수시킨다면 우리는 멸족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여전히 주부를 포위했다.
궁중 사람들에게 명을 내리기를 : “궁에서 늦게 나오는 자는 멸족시키겠다.”라고 하자, 궁중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주부는 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또한 먹을 것이 없어서 참새 새끼를 구해 먹다가 석 달여 후에

사구궁(沙丘宮)에서 굶어 죽었다. 주부가 죽은 것이 확실해지자, 비로소 발상(發喪)하고 제후들에게 부음을 전했다.
그 당시에 혜문왕이 어렸던 관계로, 공자 성과 이태가 대권을 장악하고 주살될 것이 두려워 주부를 포위했던 

것이다. 주부는 원래 장자 장을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오왜를 얻자 그녀를 총애했다.

그래서 몇 년을 그녀의 궁에서 떠나지 않다가 아들 를 낳자, 태자 장을 폐위시키고 하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오왜가 죽자, 하에 대한 사랑이 식고 원래의 태자를 불쌍히 여겨, 두 사람을 모두 왕으로 삼으려다가

우물쭈물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난이 일어나서 부자가 모두 죽는 지경에 이르러,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

 

(主父死惠文王立立)五年,與燕鄚、易.

八年,城南行唐.

九年,趙梁將,與齊合軍攻韓,至魯關下.

及十年,秦自置為西帝.

十一年,董叔與魏氏伐宋,得河陽於魏.  秦取保陽.

十二年,趙梁將攻齊.

十三年,韓徐為將,攻齊.  公主死.

十四年,相國樂毅將趙、秦、韓、魏、燕攻齊,取靈丘.  與秦會中陽.

十五年,燕昭王來見.  趙與韓、魏、秦共擊齊,齊王敗走,燕獨深入,取臨菑.

[주부가 죽고 혜문왕이 즉위한지 5년, 막(鄚)읍과 역(易)읍을 연나라에게 주었다.

8년, 남행당(南行唐)에 성을 쌓았다.
9년, 조량(趙梁)이 장군이 되어 제나라 군사와 연합, 한나라를 공격해 노관(魯關) 아래까지 이르렀다.
10년이 되자, 진(秦)나라는 스스로 서제(西帝)로 자칭했다.
11년, 동숙은 위씨(魏氏)와 송나라를 정벌해, 위(魏)나라에게서 하양을 얻었다. 진(秦)나라가 경양을 탈취했다.
12년, 조량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했다.
13년, 한서(韓徐)는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공주(公主)가 죽었다.
14년, 재상 악의(樂毅)가 조(趙), 진(秦), 한(韓), 위(魏), 연(燕)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해

영구(靈丘)를 빼앗았다. 진(秦)나라와 중양(中陽)에서 회합했다.
15년, 연소왕이 와서 회견했다. 조나라는 한(韓), 위(魏), 진(秦) 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해 제나라가 패퇴했다.

연나라 군대는 단독으로 깊숙이 진공해 임치(臨菑)를 점령했다.]

 

十六年,秦復與趙數擊齊,齊人患之.  蘇厲為齊遺趙王書曰:

臣聞古之賢君,其德行非布於海內也,教順非洽於民人也,祭祀時享非數常於鬼神也.

甘露降,時雨至,年穀豐孰,民不疾疫,眾人善之,然而賢主圖之.

今足下之賢行功力,非數加於秦也;怨毒積怒,非素深於齊也. 秦趙與國,以彊征兵於韓,

秦誠愛趙乎?其實憎齊乎? 物之甚者,賢主察之.  秦非愛趙而憎齊也,欲亡韓而吞二周,

故以齊餤天下.  恐事之不合,故出兵以劫魏、趙.  恐天下畏己也,故出質以為信. 恐天下亟反也,

故徵兵於韓以威之.  聲以德與國,實而伐空韓,臣以秦計為必出於此.  夫物固有勢異而患同者,

楚久伐而中山亡,今齊久伐而韓必亡.  破齊,王與六國分其利也.  亡韓,秦獨擅之. 

收二周,西取祭器,秦獨私之.  賦田計功,王之獲利孰與秦多?

說士之計曰:「韓亡三川,魏亡晉國,市朝未變而禍已及矣.」

燕盡齊之北地, 去沙丘、鉅鹿斂三百里, 韓之上黨去邯鄲百里, 燕、秦謀王之河山, 閒三百里而通矣.

秦之上郡近挺關,至於榆中者千五百里,秦以三郡攻王之上黨,羊腸之西,句注之南,非王有已.

踰句注, 斬常山而守之, 三百里而通於燕,代馬胡犬不東下,昆山之玉不出,此三寶者亦非王有已.

王久伐齊,從彊秦攻韓,其禍必至於此.  願王孰慮之.

且齊之所以伐者,以事王也;天下屬行,以謀王也.  燕秦之約成而兵出有日矣.

五國三分王之地,齊倍五國之約而殉王之患,西兵以禁彊秦,秦廢帝請服,反高平、根柔於魏,

反坙分、先俞於趙.  齊之事王,宜為上佼,而今乃抵罪,臣恐天下後事王者之不敢自必也.

願王孰計之也.  今王毋與天下攻齊,天下必以王為義.  齊抱社稷而厚事王,天下必盡重王義. 

王以天下善秦,秦暴,王以天下禁之,是一世之名寵制於王也.  於是趙乃輟,謝秦不擊齊.

王與燕王遇.  廉頗將,攻齊昔陽,取之.

[혜문왕 16년, 진(秦)나라가 다시 조나라와 여러 차례 제나라를 공격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매우 걱정했다.
소려(蘇厲)가 제나라를 위해 조나라 왕에게 서신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고대의 현군(賢君)은 그의 덕행이 천하에 퍼지지도 않았고, 교화가 모든 백성에게

널리 베풀어지지도 않았으며, 사시사철의 제사 공품(供品)도 항상 조상에게 바쳐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감로(甘露)가 내리고 때에 알맞게 비가 오며 오곡이 풍성하고 백성들은 역질에 걸리지 않아,
모든 사람이 이를 찬양했지만, 오히려 현명한 군주는 더욱더 분발했다고 합니다.
지금 물론 대왕에게는 선행과 공로가 있습니다만 그것들이 은혜로서 항상 진(秦)나라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진나라도 제나라에 대해서 원래 그렇게 심한 원망이나 쌓인 분노가 특별히 심한 것은 아닙니다.
진(秦), 조(趙) 양국은 서로 연합해 강제로 한(韓)나라에 출병하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진나라가 진실로 조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진나라가 정말로 제나라를 증오하는 것입니까?

일이 너무 도에 지나치다면 현명한 군주는 냉정하게 관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결코 조나라를 사랑하거나 제나라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고,

한나라를 멸망시켜 동주, 서주의 두 소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제나라를 미끼로 삼아 천하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군대를 동원해 위(魏)나라와 조나라를 협박하고 있으며,

천하의 제후들이 자기를 경외할까 걱정되자 인질을 보내 신임을 얻고,

또 천하의 제후들이 바로 반기를 들까 두려워서 한나라에서 군사를 징집해 위협했습니다.

겉으로는 우방(友邦)에 덕을 베푼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력이 비어 있는 한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니,

신은 진(秦)나라의 계책이 틀림없이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세상일은 본래 형세가 다르면서도 우환은 같은 법입니다.
초나라가 오랫동안 공격을 당했으나 중산국이 멸망했는데, 이제 제나라가 오랫동안 공격을 당하니

한나라는 틀림없이 멸망할 것입니다. 제나라를 무찌르면 왕께서는 여섯 나라와 그 이익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라를 멸망시키면 진(秦)나라에서 그것을 독점할 것이며, 또 동주와 서주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주(周) 왕실의 제기(祭器)를 빼앗으면 진나라가 혼자 그것을 소유할 것입니다.
전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라도 그 효과를 따지는 법이거늘,

왕께서 얻는 이익은 진(秦)나라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많겠습니까 ? 유사(游士)의 분석에 의하면

“한나라가 삼천(三川)을 잃고 위(魏)나라가 진(秦)나라 땅이었던 지역을 잃으면,

얼마 안 있어 재앙이 이미 조나라에 미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연나라가 제나라의 북부 지역을 모두 점령하면, 진나라의 사구(沙丘), 거록(鉅鹿)까지는 3백 리도 되지 않으며,

한나라의 상당(上黨)에서 조나라의 한단까지는 1백 리입니다.
연나라와 진(秦)나라가 왕의 영토를 빼앗으려 한다면 지름길로 3백 리이면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秦)나라의 상군은 정관(挺關)에서 가까우며, 유중(楡中)까지는 1천 5백리이니 진나라가 삼군(三郡)의 병력으로써

왕의 상당(上黨)을 공격한다면 양장(羊腸) 서쪽과 구주산(句注山) 남쪽의 땅은 왕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구주산을 넘어 상산을 차단하고 그곳에 주둔한다면 3백 리 거리로 연나라와 직통할 수 있으며

대 땅의 준마와 호 땅의 양견(良犬)은 더 이상 동쪽 조나라로 내려오지 못하고,

곤산의 옥 또한 조나라로 운반되어 나오지 못할 것이니, 이 세 가지 보물도 역시 왕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오랫동안 제나라를 정벌하셨고 강력한 진(秦)나라를 따라 한나라를 공격했으니

그 화가 틀림없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제나라가 정벌을 당한 이유는 제나라가 대왕을 섬겼기 때문이며, 천하의 제후들이 연합해 군대를 일으킨 것은

대왕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연나라와 진(秦)나라가 맹약해 출병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다섯 나라가 대왕의 토지를 삼분(三分)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나라는 다섯 나라의 맹약을 어기고

대왕의 우환을 없애드리기 위해서 희생하겠습니다. 즉 서쪽으로 출병해 강한 진(秦)나라를 제압하고,
진나라로 하여금 제호(帝號)를 폐지하게 하고 고평(高平)과 근유(根柔)를 위(魏)나라에 돌려주도록 하며

경분(巠分)과 선유(先兪)를 조나라에 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제나라는 대왕을 섬기는 것이 최상의 친교(親交)가 틀림없는데, 지금 대왕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치죄하시니,
신은 후에 대왕을 섬기려는 천하 사람들이 자신 있게 실행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지금 대왕께서 천하 제후들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으신다면, 천하는 틀림없이 대왕께서 정의롭다고 여길 것이고, 제나라는 사직을 보존했기에 더욱더 충실히 

대왕을 받들 것이며, 천하 제후들은 틀림없이 대왕의 정의로우심을 존중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천하의 제후를 

거느리고서 진(秦)나라와 우호를 다지실 수 있으며, 만약 진나라가 포악하게 굴면 천하의 제후들을 거느리고서 

그 나라를 제지하실 수도 있으니 이는 일대의 영예와 영광이 모두 대왕께서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나라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진(秦)나라의 제의를 거절해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조나라 왕은 연나라 왕과 만났다. 조나라의 염파(廉頗)는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석양(昔陽)을 공격해 탈취했다.]

 

十七年,樂毅將趙師攻魏伯陽.  而秦怨趙不與己擊齊,伐趙,拔我兩城.

十八年,秦拔我石城。王再之衛東陽,決河水,伐魏氏. 大潦,漳水出.  魏冉來相趙.

十九年,秦(敗)[取]我二城.  趙與魏伯陽.  趙奢將,攻齊麥丘,取之.

二十年,廉頗將,攻齊.  王與秦昭王遇西河外. 

二十一年,趙徙漳水武平西.

二十二年,大疫.  置公子丹為太子.

二十三年,樓昌將,攻魏幾,不能取.  十二月,廉頗將,攻幾,取之.

二十四年,廉頗將,攻魏房子,拔之,因城而還.  又攻安陽,取之.

二十五年,燕周將,攻昌城、高唐,取之.  與魏共擊秦.  秦將白起破我華陽,得一將軍.

二十六年,取東胡歐代地.

二十七年,徙漳水武平南.  封趙豹為平陽君.  河水出,大潦. 

二十八年,藺相如伐齊,至平邑.  罷城北九門大城.  燕將成安君公孫操弒其王.

二十九年,秦、韓相攻,而圍閼與.  趙使趙奢將,擊秦,大破秦軍閼與下,賜號為馬服君.

三十三年,惠文王卒,太子丹立,是為孝成王.

[혜문왕 17년, 악의가 조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위(魏)나라의 백양(伯陽)을 공격했다.
진나라는 조나라가 자기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원망해 조나라를 공격하고 두개의 성을 빼앗았다.
18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석성(石城)을 빼앗았다. 조나라 왕은 다시 위(衛)나라의 동양(東陽)으로 가서

황하의 물줄기를 터서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큰 비가 내려 장수(漳水)가 범람했다.

진(秦)나라의 위염(魏冉)이 와서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19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두 성을 탈취했다. 조나라가 백양을 위(魏)나라에게 돌려주었다.

조사(趙奢)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맥구(麥丘)를 공격해 점령했다.
20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왕은 진소왕(秦昭王)과 서하(西河)에서 만났다.
21년, 조나라는 장수의 물줄기를 바꾸어 무평(武平) 서쪽으로 흐르게 했다.

22년, 역질이 크게 유행했다. 공자 단(丹)을 태자로 삼았다.
23년, 누창(樓昌)이 장수가 되어 위(魏)나라의 기(幾)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12월, 염파가 장수가 되어 기를 공격해 점령했다.
24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위(魏)나라의 방자(房子)를 공격해 빼앗고 거기에 성을 쌓은 다음 돌아왔다.

또 안양(安陽)을 공격해 점령했다.
25년, 연주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창성과 고당을 공격해 탈취했다. 위(魏)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는 조나라 군사를 화양에서 쳐부수고 장수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26년, 동호(東胡)에게 점령당했던 대(代) 땅을 도로 빼앗았다.
27년, 장수의 물줄기를 바꾸어 무평의 남쪽으로 흐르게 했다. 조표(趙豹)를 평양군(平陽君)으로 봉했다.

황하가 범람해 큰 홍수가 났다.
28년, 인상여(藺相如)가 제나라를 공격해 평읍에 이르더니, 행진을 멈추고는 북쪽 구문(九門)에 큰 성을 쌓았다.
연나라 장수 성안군(成安君) 공손조(公孫操)가 그의 왕을 시해했다.

29년, 진(秦)나라와 한나라가 연합해 조나라를 공격해 연여(閼與)를 포위했다.
조나라는 조사를 장수로 삼아 진(秦)나라를 공격해 연여성 아래에서 진나라 군사를 대파하니

왕은 조사에게 마복군(馬服君)이라는 호를 하사했다.
33년, 혜문왕이 죽고 태자 단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효성왕(孝成王)이다.]

 

孝成王元年,秦伐我,拔三城.  趙王新立,太后用事,秦急攻之.

趙氏求救於齊,齊曰:「必以長安君為質,兵乃出.」太后不肯,大臣彊諫.

太后明謂左右曰:「復言長安君為質者,老婦必唾其面.」左師觸龍言願見太后,太后盛氣而胥之.

入,徐趨而坐, 自謝曰:「老臣病足, 曾不能疾走, 不得見久矣.  竊自恕, 而恐太后體之有所苦也,

故願望見太后.」 太后曰:「老婦恃輦而行耳.」 曰:「食得毋衰乎?」 曰:「恃粥耳.」

曰:「老臣閒者殊不欲食,乃彊步,日三四里,少益嗜食,和於身也.」

太后曰:「老婦不能.」 太后不和之色少解.

左師公曰:「老臣賤息舒祺最少, 不肖, 而臣衰, 竊憐愛之, 願得補黑衣之缺以衛王宮, 昧死以聞.」

太后曰:「敬諾。年幾何矣?」 對曰:「十五歲矣.  雖少,願及未填溝壑而託之.」

太后曰:「丈夫亦愛憐少子乎?」 對曰:「甚於婦人.」

太后笑曰:「婦人異甚.」 對曰:「老臣竊以為媼之愛燕后賢於長安君.」

太后曰:「君過矣,不若長安君之甚.」

左師公曰:「父母愛子則為之計深遠.  媼之送燕后也,持其踵,為之泣,念其遠也,亦哀之矣.

已行,非不思也,祭祀則祝之曰『必勿使反』,豈非計長久,為子孫相繼為王也哉?」

太后曰:「然.」 左師公曰:「今三世以前,至於趙主之子孫為侯者,其繼有在者乎?」

曰:「無有.」 曰:「微獨趙,諸侯有在者乎?」曰:「老婦不聞也.」

曰:「此其近者禍及其身,遠者及其子孫.  豈人主之子侯則不善哉? 位尊而無功,奉厚而無勞,

而挾重器多也.  今媼尊長安君之位, 而封之以膏腴之地, 多與之重器, 而不及今令有功於國,

一旦山陵崩, 長安君何以自託於趙? 老臣以媼為長安君之計短也, 故以為愛之不若燕后. 」

太后曰:「諾,恣君之所使之.」於是為長安君約車百乘,質於齊,齊兵乃出。

子義聞之,曰:「人主之子,骨肉之親也,猶不能持無功之尊,無勞之奉,而守金玉之重也,

而況於予乎?」 齊安平君田單將趙師而攻燕中陽,拔之.  又攻韓注人,拔之.

[효성왕 원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세 개의 성을 빼앗았다. 조나라 왕이 막 즉위해 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진(秦)나라가 이 기회를 틈타 재빨리 공격해온 것이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 왕은 말하기를 : “ 장안군(長安君)을 인질로 보내주어야만 구원병을 파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응하려고 들지 않자 대신들이 극력 간언했다.
태후는 좌우 사람들에게 명백히 밝히기를 : “또다시 장안군을 인질로 삼자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노부(老婦)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야 말겠다.”라고 하였다. 좌사(左師) 촉룡(觸龍)이 태후를 뵙고 싶다고 말하자,

태후는 노기등등해 그를 기다렸다. 촉룡이 입궁해 천천히 잰걸음으로 걸어와 앉은 후 사죄하며 말하기를 :
“ 노신이 발에 병이 있어 빨리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노쇠해진 제 몸으로 미루어보니,
태후님의 옥체 또한 불편하지나 않으신지 걱정되어 태후님을 뵙고자 했습니다.”라고 하자.

그러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노부는 가마를 타고 다니오.”라고 하였다.
촉룡이 묻기를 : “식사량은 줄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죽을 좀 먹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촉룡이 묻기를 : “노신은 근래 식욕이 좋지를 않아 하루에 억지로 3-4리를 걸어 다소 식욕을 증진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몸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노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태후의 불쾌했던 기색이 약간 누그러졌다.
좌사공(左師公)이 말하기를 : “노신의 아들 서기(舒祺)는 나이가 가장 어리고 불초합니다만

신이 이미 노쇠해 마음속으로 그를 매우 사랑하고 있사오니, 원컨대 궁중의 시위대(侍衛隊)가 입는 

흑의(黑衣)를 걸치고 왕궁을 지키도록 해주시기를 황공함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묻기를 : “ 알았소. 나이가 얼마나 되었소?”라고 하자,

좌사공은 대답하기를 : “15세입니다. 아직 어리지만 제가 죽기 전에 그 애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묻기를 : “ 당신네 남자들도 어린 자식을 사랑하오?”라고 하자,

좌사공은 대답하기를 : “부인네들보다 더합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 “부인네들은 각별히 더하다오.”라고 하니,
좌사공은 말하기를 : “노신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태후께서는 장안군보다 연후를

훨씬 더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후가 말하기를 : “ 틀렸소. 장안군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소.”라고 했다.
좌사공이 묻기를 : “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심원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태후께서 연후를 시집보내실 때 그녀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그녀를 위해 우셨는데,

딸이 멀리 떠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도 하셨겠지요. 이미 시집을 가버린 후에도 그리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사를 지낼 때 축원하기를 ‘절대로 연후가 돌아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실 것이니,

그것은 생각을 멀리해 그녀의 자손이 대를 이어 연나라의 왕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그렇소.”라고 하였다.
좌사공이 묻기를 : “지금으로부터 3대 이전에 조나라 역대 군주의 자손으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의

후사(後嗣) 가운데 아직 재위하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없소.”라고 하였다.
좌사공이 묻기를 : “조나라뿐 아니라 다른 제후국 자손의 후사 가운데 아직도 재위하는 자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태후가 대답하기를 : “노부는 본 적이 없소.”라고 하였다.
좌사공이 말하기를 : “이는 가까이 있는 화는 자신에게 미치고 멀리 있는 화는 자손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찌 군주의 자손으로서 후(侯)에 봉해진 자 모두가 악하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지위는 존귀하면서도 공훈이 없고,

봉록이 후하면서도 공적이 없으며, 단지 진귀한 보물만을 많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태후께서 장안군의 지위를 올려주시고 비옥한 토지를 봉해 주시며 귀중한 보물을 많이 주셨으나,

지금 그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우게 하지 않으신다면 태후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장안군이 어떻게 조나라에서 몸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노신은 태후께서 장안군을 위해 세운 계획이

너무 짧다고 생각해 그를 사랑하심이 연후만 못하다고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후가 말하기를 : “알았소. 그대 마음대로 그를 파견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안군을 위해서 백 대의 마차를 준비해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니 제나라는 비로소 구원군을 보내주었다.
자의(子義)가 이 일을 듣고 말하기를 : “군주의 아들은 군주와 서로 피를 나눈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공훈 없이 누리는 존귀한 지위나 공로 없이 받는 봉록으로는 자신의 귀중한 보물을 지킬 수 없으니

하물며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제나라 안평군(安平君) 전단(田單)이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의 중양을 공격해 점령했다.

또한 한(韓)나라의 주인(注人)을 공격해 점령했다.]

 

二年,惠文后卒.  田單為相.

四年,王夢衣偏裻之衣,乘飛龍上天,不至而墜,見金玉之積如山.

明日,王召筮史敢占之,曰:「夢衣偏裻之衣者,殘也.  乘飛龍上天不至而墜者,有氣而無實也.

見金玉之積如山者,憂也.」

後三日,韓氏上黨守馮亭使者至,曰:「韓不能守上黨,入之於秦.  其吏民皆安為趙,不欲為秦.

有城市邑十七,願再拜入之趙,財王所以賜吏民.」

王大喜,召平陽君豹告之曰:「馮亭入城市邑十七,受之何如?」 對曰:「聖人甚禍無故之利.」

王曰:「人懷吾德,何謂無故乎?」 對曰:「夫秦蠶食韓氏地,中絕不令相通,

固自以為坐而受上黨之地也.  韓氏所以不入於秦者,欲嫁其禍於趙也.

秦服其勞而趙受其利,雖彊大不能得之於小弱,小弱顧能得之於彊大乎?豈可謂非無故之利哉!

且夫秦以牛田之水通糧蠶食,上乘倍戰者,裂上國之地,其政行,不可與為難,必勿受也.」

王曰:「今發百萬之軍而攻,踰年歷歲未得一城也.  今以城市邑十七幣吾國,此大利也.」

趙豹出,王召平原君與趙禹而告之.

對曰:「發百萬之軍而攻,踰歲未得一城,今坐受城市邑十七,此大利,不可失也.」

王曰:「善.」
乃令趙勝受地,告馮亭曰:「敝國使者臣勝,敝國君使勝致命,以萬戶都三封太守,

千戶都三封縣令,皆世世為侯,吏民皆益爵三級,吏民能相安,皆賜之六金.」

馮亭垂涕不見使者, 曰:「吾不處三不義也:為主守地, 不能死固, 不義一矣;入之秦, 不聽主令,

不義二矣;賣主地而食之,不義三矣.」 趙遂發兵取上黨.  廉頗將軍軍長平.

 

[효성왕 2년, 혜문후가 죽었다. 전단이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4년, 왕이 꿈에 좌우 색깔이 다른 옷을 입고 비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끝가지 이르지 못하고 떨어졌는데,

금과 옥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왕은 서사(筮史) 감(敢)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니,

감이 점을 보고 나서 말하기를 : “ 꿈에 좌우 색깔이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불완전함을 뜻합니다.

비룡을 타고 날다가 이르지 못하고 떨어진 것은 기세는 있지만 힘이 없음을 상징합니다.

금과 옥이 산처럼 쌓여 있음을 본 것은 우환이 있음을 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한나라 상당(上黨)의 태수 풍정(馮亭)의 사자가 와서 말하기를 :

“한나라는 상당을 지킬 수가 없어서 진(秦)나라에 편입시키려고 하는데,

상당의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에 귀속되기를 희망하며 진나라에 편입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상당에 성읍 17개가 있는데, 재배(再拜)하며 조나라에 귀속되기를 원하오니,

왕께서는 상당의 관리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실지 여부를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평양군 표(豹)를 불러 묻기를 :“풍정이 성읍 17개를 준다고 하니 받는 게 어떠한가?”라고 하자,
표는 대답하기를 : “성인은 이유 없는 이익을 큰 재앙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 “그곳 사람들이 내 덕을 사모해 그러는데 왜 이유 없다고 말하는가?”라고 하니,
표가 대답하기를 :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토지를 잠식해 중간에서 도로를 단절하고,

양쪽을 서로 통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럼으로써 본래 가만히 앉아서 상당의 토지를 얻겠거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라가 진나라에 편입시키지 않으려는 이유는 화를 조나라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의도입니다.

진나라가 수고를 했는데 조나라가 앉아서 그 이익만 얻다니, 강대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약소국가에서 손쉽게

이익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약소국가로서 강대한 나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을 어찌 이유 없는 이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진나라는 우전(牛田)의 수로를 이용해 양식을 운반하고 한나라를 잠식하며,

가장 좋은 말과 정예 군사로 상국(上國)을 분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책이 이미 실행되고 있는 마당에

진(秦)나라에 대적해서는 아니 되오니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지금 우리가 백만 대군을 출동시켜 공격해도 여러 해를 넘기도록 성 하나 얻을 수 없었소.
그런데 지금 성읍 17개를 우리나라에 바친다고 하니, 이는 크나큰 이익이오.”라고 하였다.
조표가 나가자 왕은 평원군(平原君)과 조우(趙禹)를 불러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 “백만 대군을 출동시켜 공격해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성 하나 얻을 수 없는데
지금 앉아서 성읍 17개를 얻으니 이렇게 큰 이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 “좋소.”라고 하며, 곧 평원군 조승(趙勝)을 보내 토지를 받게 했다.
조승이 풍정에게 말하기를 : “폐국(敝國)의 신하 조승이온대, 군주께서 명령을 전달하게 저를 파견하셨습니다. 
우리 나라 군주께서는 만 호(萬戶)의 성읍 3개를 태수에게 봉하시고 1천호의 성읍 3개를 각 현령에게 봉하시며

모두 대대로 후(侯)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관리와 백성에게는 모두 세 계급씩 작위를 올려주고

그들이 모두 평안하게 지내도록 모두에게 여섯 근의 황금을 하사하셨습니다.”라고 하자,
풍정이 눈물을 흘리며 사자를 보지 않은 채로 말하기를 : “저는 세 가지 불의(不義)를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군주를 위해 토지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쳐 고수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첫 번째 불의요,
진(秦)나라에 귀속시키라고 했는데 군주의 명령을 듣지 않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불의이며,
군주의 토지를 팔아서 상을 받으니 이것이 세 번째 불의입니다.”라고 하였다.
조나라는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켜 상당을 점령했다. 염파는 군대를 이끌고 장평(長平)에 주둔했다.]

 

七(年)[月],廉頗免而趙括代將.  秦人圍趙括,趙括以軍降,卒四十餘萬皆阬之.

王悔不聽趙豹之計,故有長平之禍焉.

王還,不聽秦,秦圍邯鄲.  武垣令傅豹、王容、蘇射率燕眾反燕地.  趙以靈丘封楚相春申君.

八年,平原君如楚請救.  還,楚來救,及魏公子無忌亦來救,秦圍邯鄲乃解.

十年,燕攻昌壯,五月拔之.  趙將樂乘、慶舍攻秦信梁軍,破之.  太子死. 

而秦攻西周,拔之.  徒父祺出.

十一年,城元氏,縣上原.  武陽君鄭安平死,收其地.

十二年,邯鄲廥燒.

十四年,平原君趙勝死.

[효성왕 7년 ?월, 염파가 면직당하고 조괄(趙括)이 대신 군대를 지휘했다.

진(秦)나라 군대가 조괄을 포위하자 조괄은 군대를 이끌고 항복했는데, 군사 40만여 명이 모두 생매장당했다.

왕은 조표의 의견을 듣지 않아 장평의 화(禍)가 일어나게 된 것을 후회했다.

왕이 한단으로 돌아와 진(秦)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진나라는 한단을 포위했다.

무원(武垣)의 현령 부표(傅豹)와 왕용(王容), 소석(蘇射) 등은 연나라 백성을 이끌고 연나라로 되돌아갔다.

조나라는 영구(靈丘)를 초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에게 봉해주었다.
8년, 평원군이 초나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 그가 귀국한 뒤 초나라에서 구원병이 왔고,

위(魏)나라 공자 무기(無忌)도 역시 도와주러 오자, 진(秦)나라는 한단의 포위망을 비로소 풀었다.
10년, 연나라가 창장(昌壯)을 공격해 5월에 점령했다. 조나라 장수 악승(樂乘)과 경사(慶舍)는

진(秦)나라 장수 신량(信梁)의 군대를 공격해 무찔렀다. 태자가 죽었다.

진(秦)나라는 서주(西周)를 공격해 점령했다. 도보기(徒父祺)가 군대를 이끌고 출경(出境)했다.
11년, 원지(元氏)에 성을 쌓고 상원을 현으로 삼았다. 무양군(武陽君) 정안평(鄭安平)이 죽자 그 봉지를 회수했다.
12년, 한단의 사료(飼料) 창고에 불이 나서 타버렸다.

14년, 평원군 조승이 죽었다.]

 

十五年,以尉文封相國廉頗為信平君.  燕王令丞相栗腹約驤,以五百金為趙王酒,還歸,

報燕王曰:「趙氏壯者皆死長平,其孤未壯,可伐也.」王召昌國君樂閒而問之.

對曰:「趙,四戰之國也,其民習兵,伐之不可.」 王曰:「吾以眾伐寡,二而伐一,可乎?」

對曰:「不可.」 王曰:「吾即以五而伐一,可乎?」

對曰:「不可.」 燕王大怒.  群臣皆以為可.

燕卒起二軍,車二千乘,栗腹將而攻鄗,卿秦將而攻代.  廉頗為趙將,破殺栗腹,虜卿秦、樂閒.

[효성왕 15년, 위문(尉文) 지방을 재상 염파에게 봉하고, 그의 봉호를 신평군(信平君)이라 했다.
연왕(燕王)은 승상 율복(栗腹)을 보내 조나라와 우호를 다짐하고 황금 5백 근을 조나라 왕에게 예물로 보냈다.
율복이 돌아가 연나라 왕에게 보고 하기를 : “조나라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에서 죽었고,

그들의 고아들은 아직 크지 않았으니 정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연왕은 창국군(昌國君) 악간(樂間)을 불러 이 일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악간이 대답하기를 : “조나라는 사방에서 적과 싸우는 국가이므로 그 백성들은 병법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니

정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 “나는 많은 군사로 적은 군대를 치려 하는데, 둘이 하나를 정벌하면 되겠는가?”라고 하자,

악간이 대답하기를 :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왕은 다시 묻기를 : “그렇다면 내가 다섯 사람으로써 한 사람과 싸우면 되겠는가?”라고 하자,

역시 대답하기를 :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매우 노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하자,

연나라 왕은 마침내 상군과 하군 두 부대와 전차 2천승을 출동시키고, 율복은 장수가 되어 호성을 공격했으며,

경진(卿秦)도 장수가 되어 대(代) 지방을 공격했다.

염파는 조나라 장수로서 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율복을 죽였으며, 경진과 악간을 포로로 붙잡았다.]

 

十六年,廉頗圍燕.  以樂乘為武襄君.

十七年,假相大將武襄君攻燕,圍其國.

十八年,延陵鈞率師從相國信平君助魏攻燕.  秦拔我榆次三十七城.

十九年,趙與燕易土:以龍兌、汾門、臨樂與燕;燕以葛、武陽、平舒與趙.

二十年,秦王政初立.  秦拔我晉陽.

二十一年, 孝成王卒.  廉頗將, 攻繁陽,取之.  使樂乘代之,廉頗攻樂乘, 樂乘走,廉頗亡入魏.

子偃立, 是為悼襄王.

[효성왕 16년, 염파가 연나라를 포위했다. 악승을 무양군(武襄君)으로 봉했다.

17년, 임시 재상인 대장(大將) 무양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그 수도를 포위했다.
18년, 연릉(延陵)의 장수 균(鈞)이 군사를 이끌고 재상 신평군을 따라서 위(魏)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했다.

진(秦)나라가 조나라 유차(楡次)의 37성을 빼앗았다.
19년, 조나라와 연나라는 토지를 교환해 용태(龍兌), 분문(汾門), 임락(臨樂)을 연나라에게 주고,

연나라는 갈(葛), 무양(武陽), 평서(平舒)를 조나라에게 주었다.
20년, 진왕(秦王) 정(政)이 처음으로 즉위했다.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진양(晉陽)을 빼앗았다.
21년, 효성왕이 죽었다. 염파가 장수가 되어 위(魏)나라의 번양(繁陽)을 공격해 점령했다.

악승을 파견해 염파를 대신하게 했는데, 염파가 악승을 공격하니 악승은 패주하고 염파는 위(魏)나라로 도망했다.

효성왕의 아들 언(偃)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도양왕(悼襄王)이다.

 

悼襄王元年,大備魏.  欲通平邑、中牟之道,不成.

二年, 李牧將, 攻燕, 拔武遂、方城.  秦召春平君, 因而留之.

泄鈞為之謂文信侯曰:「春平君者, 趙王甚愛之而郎中之, 故相與謀曰『春平君入秦,秦必留之』

故相與謀而內之秦也.  今君留之,是絕趙而郎中之計中也.  君不如遣春平君而留平都.

春平君者言行信於王,王必厚割趙而贖平都.」  文信侯曰:「善.」 因遣之.  城韓皋.

三年,龐煖將,攻燕,禽其將劇辛.

四年,龐煖將趙、楚、魏、燕之銳師,攻秦蕞,不拔;移攻齊,取饒安.

五年,傅抵將,居平邑;慶舍將東陽河外師,守河梁.

六年,封長安君以饒。魏與趙鄴.

九年,趙攻燕,取貍、陽城.  兵未罷,秦攻鄴,拔之.  悼襄王卒,子幽繆王遷立.

[도양왕 원년, 성대한 의식을 거행해 위(魏)나라와 친선을 도모했다.

평읍(平邑)과 중모(中牟) 사이의 도로를 개통시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년, 이목(李牧)이 장수가 되어 연나라를 공격하고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탈취했다.

진(秦)나라는 춘평군(春平君)을 불러들여 그를 억류했다.
진나라 대신 설균(泄鈞)이 태자를 위해서 문신후 여불위에게 말하기를 : “춘평군은 조나라 왕이 매우 총애해

낭중들이 시기하는 인물이므로, 낭중들이 서로 상의하기를 ‘춘평군이 진(秦)나라로 들어가면

진(秦)나라는 틀림없이 그를 억류할 것이다.’라고 하며, 공모해 그를 진나라로 떠밀어 넣은 것입니다.

​지금 당신께서 그를 억류하시면 조나라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낭중들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차라리 춘평군을 돌려보내시고 평도를 억류하십시오. 춘평군의 언행은 조나라 왕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왕은 틀림없이 후하게 조나라를 떼어내어 우리에게 주고 평도를 되찾아갈 것입니다.”라고 하니,

​문신후가 말하기를 : “좋소.”라고 하며, 춘평군을 보내주었다. 조나라는 한고(韓皐)에 성을 쌓았다.

3년, 방훤(龐煖)이 장수가 되어 연나라를 공격하고, 연나라 장수 극신(劇辛)을 포로로 잡았다.
4년, 방훤은 조, 초, 위(魏), 연나라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진(秦)나라의 최(蕞)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이동해 제나라를 공격, 요안(饒安)을 탈취했다.
5년, 부저(傅抵)가 장수가 되어 평읍(平邑)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경사는 동양(東陽)과 황하의 남쪽에 있던 군사를 거느리고 황하의 교량을 지켰다.
6년, 장안군(長安君)에게 요(饒)를 봉해 주었다. 위(魏)나라는 조나라에게 업(鄴)을 주었다.
9년,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해 이양성(貍陽城)을 탈취했다.

군대가 아직 철수하기도 전에 진(秦)나라가 업을 공격해 빼앗았다.

도양왕이 죽고 아들 유목왕(幽繆王) 천(遷)이 즉위했다.


幽繆王遷元年,城柏人.

二年,秦攻武城,扈輒率師救之,軍敗,死焉.

三年,秦攻赤麗、宜安,李牧率師與戰肥下,卻之.  封牧為武安君.

四年,秦攻番吾,李牧與之戰,卻之.

五年,代地大動,自樂徐以西,北至平陰,臺屋墻垣太半壞,地坼東西百三十步.

六年,大饑,民訛言曰:「趙為號,秦為笑.  以為不信,視地之生毛.」

七年,秦人攻趙,趙大將李牧、將軍司馬尚將,擊之.  李牧誅,司馬尚免,趙怱及齊將顏聚代之.

趙怱軍破,顏聚亡去.  以王遷降.

八年十月,邯鄲為秦.

[유목왕 조천 원년, 백인(柏人)에 성을 쌓았다.

2년, 진(秦)나라가 무성(武城)을 공격하자, 호첩(扈輒)이 군대를 이끌고 구원했으나 군대는 패하고 호첩은 전사했다.
3년, 진(秦)나라가 적려와 의안(宜安)을 공격하자, 이목이 군대를 이끌고 진(秦)나라 군과 비(肥) 성 아래에서 싸워

그들을 물리치니 그는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4년, 진(秦)나라가 파오(番吾)를 공격했으나 이목이 그들과 싸워 물리쳤다.
5년, 대(代) 땅에 대지진이 일어나 악서(樂徐) 서쪽에서부터 북쪽으로 평음(平陰)에 이르기까지

누대, 가옥, 담벽 등이 대부분 무너지고 땅이 동서로 130보 정도 갈라졌다.
6년,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 사이에 유언비어가 퍼지기를 : “조나라 사람은 크게 울고 진나라 사람은 크게 웃네.

믿지 못하겠거든 땅에 난 농작물을 보소.”라는 것이 유행했다.

7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으나 조나라 대장 이목과 장군 사마상(司馬尙)이 장수가 되어 반격했다.

후에 이목은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은 면직당하자, 조총(趙怱)과 제나라 장수 안취(顔聚)가 그들을 대신했다.

조총의 군대가 패배하고 안취는 도망쳐버리니, 조나라 왕 천(遷)은 항복했다.
8년 10월, 한단은 진(秦)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太史公曰.

吾聞馮王孫曰:「趙王遷,其母倡也,嬖於悼襄王.  悼襄王廢適子嘉而立遷.

遷素無行,信讒,故誅其良將李牧,用郭開.」豈不繆哉!

秦既虜遷,趙之亡大夫共立嘉為王,王代六歲,秦進兵破嘉,遂滅趙以為郡.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풍왕손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조나라 왕 천(遷)의 어머니는 창기(倡妓)로서 도양왕의 총애를 받았다.

도양왕은 적자 가(嘉)를 폐하고 천을 태자로 세웠다.

천은 원래부터 품행이 단정하지 못했고 참언을 믿어 훌륭한 장수 이목을 죽이고 곽개를 기용했다’라고 하였다.
이 어찌 황당한 행동이 아니랴! 진(秦)나라가 이미 천(遷)을 포로로 잡자,

도망쳤던 조나라 대신들이 함께 가(嘉)를 왕으로 옹립해 대(代) 땅에서 6년 동안 칭왕(稱王)했다.
진(秦)나라 군대가 진격해 가(嘉)를 대파하니 마침내 조나라는 멸망해 진(秦)나라의 군(郡)이 되었다.”]

 

 

※ 조조(趙朝) 역대 제후, 왕 연표

 

 

헌후(獻侯)
열후(列侯)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무후(武侯)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87년)
경후(敬侯) (기원전 387년 - 기원전 375년)
성후(成侯) (기원전 375년 - 기원전 350년)
숙후(肅侯) (기원전 350년 - 기원전 326년)
무령왕(武靈王) (기원전 326년 - 기원전 299년)
혜문왕(惠文王) (기원전 299년 - 기원전 266년)
효성왕(孝成王) (기원전 266년 - 기원전 245년)
도양왕(悼襄王) (기원전 245년 - 기원전 236년)
유목왕(幽穆王) (기원전 236년 - 기원전 228년)
대왕 가(代王嘉)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2년)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