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9. 外戚世家

第 十九. 外戚世家

덕치/이두진 2021. 7. 1. 17:19

              史記 世家

 

      ​第 十九.  外戚世家(외척세가)

自古受命帝王及繼體守文之君,非獨內德茂也,蓋亦有外戚之助焉.

夏之興也以涂山,而桀之放也以末喜.  殷之興也以有娀,紂之殺也嬖妲己.

周之興也以姜原及大任,而幽王之禽也淫於褒姒.

[예로부터 천명을 받은 개국 군주(君主)들과 선제(先帝)의 뒤를 이어받고 성법(成法)을 계승한 군주들은

단지 그 개인의 품덕(品德)이 고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외척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夏)나라가 흥기한 것은 도산씨(塗山氏)가 있었기 때문이며, 걸(桀)이 유배된 것은 말희(末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은왕조가 흥기한 것은 유융씨(有娀氏)가 있었기 때문이며, 주왕이 주살당한 것은 달기(妲己)를 총애했기 때문이다.

주(周)나라가 흥기한 것은 강원(姜原)과 대임(大任)이 있었기 때문이며,

주유왕(周幽王)이 포로로 잡히게 된 것은 포사(褒姒)에게 깊이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故易基乾坤,詩始關雎,書美釐降,春秋譏不親迎. 夫婦之際,人道之大倫也.

禮之用, 唯婚姻為兢兢. 夫樂調而四時和, 陰陽之變, 萬物之統也. 可不慎與?人能弘道, 無如命何.

甚哉,妃匹之愛,君不能得之於臣,父不能得之於子,況卑下乎!

既驩合矣,或不能成子姓;能成子姓矣,或不能要其終:豈非命也哉?

孔子罕稱命,蓋難言之也.  非通幽明之變,惡能識乎性命哉?

[그래서 『역경(易經)』은 “건(乾)”, “곤(坤)” 양괘(兩卦)에 기초를 두었으며,

『시경(詩經)』은 「관저(關雎)」편에서 시작되었다.

『상서(尙書)』는 요(堯)가 친히 두 명의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내도록 처리한 일을 찬미했으며,

『춘추(春秋)』는 아내를 맞이하면서 친히 나가서 맞이하지 않는 실례 행위를 풍자했다.

부부간의 화목 관계는 사람들의 도덕규범의 근본 준칙이다. 예제(禮制)는 혼인에서 가장 주의해야 한다.

음조가 잘 어울리는 것은 사계절 절기의 조화가 잘 되는 것이며, 음양의 변화는 만물의 생장과 변화의 근본인데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인륜대도(人倫大道)에 대해서는 확대 발전시킬 수 있으나

천명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찌할 수가 없다. 부부간의 사랑은 군주라고 해서 신하에게서 얻을 수 없으며,

아버지라고 해서 그것을 아들에게서 얻을 수 없다. 하물며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

설령 남녀가 환합(歡合)했을지라도 혹 또 자손이 번성할 수 없을지도 모르며,

설령 자손을 생육할 수 있을지라도 혹 천수를 다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찌 이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자는 천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적었는데, 이는 아마 또 매우 분명하게 말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음양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인성(人性)과 천명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太史公曰:

秦以前尚略矣,其詳靡得而記焉.  漢興,呂娥姁為高祖正后,男為太子.

及晚節色衰愛弛,而戚夫人有寵,其子如意幾代太子者數矣.

及高祖崩,呂后夷戚氏,誅趙王,而高祖後宮唯獨無寵疏遠者得無恙.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진(秦)나라 이전의 외척(外戚)의 정황은 매우 간략해 상세한 정황을 기술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여아후(呂娥姁)는 고조(高祖)의 황후가 되었으며 아들은 태자가 되었다.

여아후가 만년에 이르러 자색(姿色)이 스러져서 총애를 잃게 되자 척부인(戚夫人)이 총애를 받았으며,

그녀의 아들 여의(如意)가 태자의 자리를 빼앗아 대신 들어서는 일이 여러 번 발생했다.
고조가 서거하자 여후(呂后)는 척씨를 멸하고 조왕(趙王) 여의를 주살했다.

고조의 후궁과 비빈 가운데 오직 고조에게 소외당해 총애를 받지 못했던 사람만이 편안히 아무 일도 없었다.]

 

呂后長女為宣平侯張敖妻,敖女為孝惠皇后.  呂太后以重親故,欲其生子萬方,終無子,

詐取後宮人子為子.  及孝惠帝崩, 天下初定未久, 繼嗣不明.

於是貴外家, 王諸呂以為輔, 而以呂祿女為少帝后, 欲連固根本牢甚, 然無益也.

高后崩,合葬長陵.  祿、產等懼誅,謀作亂.  大臣征之,天誘其統,卒滅呂氏.

唯獨置孝惠皇后居北宮.  迎立代王,是為孝文帝,奉漢宗廟.  此豈非天邪?非天命孰能當之?

[여후의 장녀는 선평후(宣平侯) 장오(張敖)의 처가 되었으며, 장오의 딸은 효혜황후(孝惠皇后)가 되었다.

여태후는 효혜황후가 겹사돈이기 때문에 그녀가 자식을 낳게끔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결국은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후궁의 자식을 데려와서 아들로 삼았다.

황위를 계승할 사람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외가를 중용했다.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봉해 보좌하게 했고

그리고 여록의 딸을 소제황후(少帝皇后)로 삼아 왕실의 뿌리를 견고히 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후가 서거하자 장릉(長陵)에 고조와 합장시켰다. 여록, 여산(呂産) 등은 주살당할 것을 두려워해 반란을 음모했다.

대신들은 그들을 정벌했으며, 하늘이 유씨(劉氏) 천하의 통기(統紀)를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하므로

마침내 여씨 집단이 소멸되었다. 단지 효혜황후만 북궁(北宮)에 머물도록 안배했다.

대왕(代王)을 황제로 맞이했는데, 그가 바로 효문제(孝文帝)로 그는 한가(漢家)의 종묘를 받들어 섬기었다.

이것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천명이 아니면 누가 그러한 임무를 담당할 수 있겠는가!]

 

薄太后,父吳人,姓薄氏,秦時與故魏王宗家女魏媼通,生薄姬,而薄案死山陰,因葬焉.

及諸侯畔秦,魏豹立為魏王,而魏媼內其女於魏宮.  媼之許負所相,相薄姬,云當生天子.

是時項羽方與漢王相距滎陽,天下未有所定.

[박태후(薄太后)의 부친은 오나라 사람으로 성은 박씨이다.

진(秦)나라 때에 그는 과거 위(魏)나라 왕의 종가 사람인 위온(魏溫)과 사통해 박희(薄姬)를 낳았다.

박희의 부친은 산음(山陰)에서 죽었는데, 그로 인해서 그곳에 매장되었다.

제후들이 진(秦)나라에 반역을 하자 위표(魏豹)는 위나라 왕이 되었는데, 위온은 그녀의 딸을 궁에 들어가게 했다.

위온은 허부(許負)에게 관상을 보게 했는데 박희가 천자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이때에 항우는 마침 한왕 유방과 형양(滎陽)에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천하는 아직 형세가 정해지지 않았다.]

 

豹初與漢擊楚,及聞許負言,心獨喜,因背漢而畔,中立,更與楚連和.

漢使曹參等擊虜魏王豹,以其國為郡,而薄姬輸織室.

豹已死,漢王入織室,見薄姬有色,詔內後宮,歲餘不得幸.

始姬少時,與管夫人、趙子兒相愛,約曰:「先貴無相忘.」已而管夫人、趙子兒先幸漢王.

漢王坐河南宮成皋臺,此兩美人相與笑薄姬初時約.  漢王聞之,問其故,兩人具以實告漢王.

漢王心慘然,憐薄姬,是日召而幸之.  薄姬曰:「昨暮夜妾夢蒼龍據吾腹.」

高帝曰:「此貴徵也,吾為女遂成之.」 一幸生男,是為代王.  其後薄姬希見高祖.

[위표는 당초 한(漢)나라와 연합해 초(楚)나라를 공격했는데, 허부의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이 때문에 한왕을 배반하고 중립을 지켰으며 더 나아가 초나라와 연합해 화목했다.
이리하여 한나라는 조참(曹參) 등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여 위표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나라는 군(郡)으로 삼았다.

이때 박희는 옷감을 짜는 직실(織室)로 보내졌다. 위표는 이미 죽었다. 한왕은 몇 차례 직실에 드나들었는데,

박희가 자색이 있음을 보고 후궁으로 들이라고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1년여 동안 동침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 박희가 젊었을 때에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 등과 친하게 지냈다.

세 사람은 약속하기를 :" 누가 먼저 부귀하게 되든지 간에 서로를 잊지 말자."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관부인, 조자아가 먼저 한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왕은 하남궁의 성고대(成皐臺)에 앉아 있었는데 두 명의 미인은 박희와 당초에 했던 약속을 조롱하며 비웃었다.

한왕은 이러한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물었으며 이에 두 사람은 사실을 한왕에게 말해 주었다.

한왕은 듣고서 마음속으로 매우 슬퍼했으며 박희를 불쌍히 여겼다. 그날로 박희를 불러 동침했다.

박희가 말하기를 : " 어제 밤 저는 창룡(蒼龍)이 저의 배 위에 드러누워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라고 하자,

한왕은 말하기를 : " 이것은 귀히 될 징조이다. 나는 너를 도와서 일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동침을 하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뒤에 나올 대왕(代王) 효문제이다.

그러나 그 동침 이후에 박희는 한왕 고조를 만나는 일이 아주 적었다.]

 

高祖崩,諸御幸姬戚夫人之屬,呂太后怒,皆幽之,不得出宮.

而薄姬以希見故,得出,從子之代,為代王太后.  太后弟薄昭從如代.  代王立十七年,高后崩.

大臣議立後,疾外家呂氏彊,皆稱薄氏仁善,故迎代王,立為孝文皇帝,

而太后改號曰皇太后,弟薄昭封為軹侯.  薄太后母亦前死,葬櫟陽北.

[고조가 서거하자 고조의 시중을 들며 총애를 받던 척부인 등 비빈에 대해 여태후는 매우 분노하여

그녀들을 모두 가두고 궁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박희는 고조의 시중을 들며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매우 적었던 연유로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며,

아들을 따라 대(代)나라로 가서 대왕(代王)의 태후가 되었다. 태후의 동생 박소(薄昭) 또한 함께 대나라로 갔다.

대왕이 보위에 오른 지 17년이 지나서 고후(高后)가 서거했다. 대신들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것을 상의했다.

그들은 외척 여씨 세력이 강대해짐은 적대시했지만 박씨가(薄氏家)는 어질고 착하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서 대왕(代王)을 영접해 효문제(孝文帝)로 세웠고 박태후(薄太后)를 황태후(皇太后)로 고쳐 불렀으며,

태후의 동생 박소를 지후(軹侯)에 봉했다. 태후의 모친은 이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역양(櫟陽)의 북쪽에 묻혔다.]

 

於是乃追尊薄案為靈文侯,會稽郡置園邑三百家,長丞已下吏奉守冢,寢廟上食祠如法.

而櫟陽北亦置靈文侯夫人園,如靈文侯園儀.

薄太后以為母家魏王後, 早失父母, 其奉薄太后諸魏有力者, 於是召復魏氏,

[及尊]賞賜各以親疏受之.  薄氏侯者凡一人.

薄太后後文帝二年,以孝景帝前二年崩,葬南陵.  以呂后會葬長陵,故特自起陵,近孝文皇帝霸陵.

[이리하여 박태후의 부친에게 영문후(靈文侯)라는 존호(尊號)가 추서되었으며,

회계군에 3백호(戶)를 분할해 원읍(園邑)을 두었다. 장승(長丞) 이하 관리들이 파견되어 능원(陵園)을 지켰으며,

사당에 음식을 바쳐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모두 후위(侯位)의 예의에 따라서 진행되었다.

낙양 북쪽에 영문후 부인의 원(園)을 세웠는데 모든 예의는 영문후의 능원과 같았다.
박태후는 모가(母家)가 위나라 왕임을 알았으며, 부모는 일찍 서거했으나 자신을 도우며 힘을 냈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부역 또는 각종 세금을 면제하게 명령을 내렸다. 또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각기 달리 상을 하사했다.

박씨(薄氏) 가족 중 후(侯)에 봉해진 사람은 모두 한 명뿐이다.
박태후는 문제(文帝)보다 2년 늦은 효경제(孝景帝) 2년에 서거해 남릉(南陵)에 묻혔다.

여후가 고조와 장릉(長陵)에 합장되었기 때문에 박태후의 능묘(陵墓)는 특별히 단독으로 만들어졌는데,

위치는 효문제의 패릉(霸陵)에서 가깝게 하였다.]

 

竇太后,趙之清河觀津人也.  呂太后時,竇姬以良家子入宮侍太后.

太后出宮人以賜諸王,各五人,竇姬與在行中.

竇姬家在清河, 欲如趙近家, 請其主遣宦者吏:「必置我籍趙之伍中.」宦者忘之, 誤置其籍代伍中.

籍奏,詔可,當行.  竇姬涕泣,怨其宦者,不欲往,相彊,乃肯行.

至代,代王獨幸竇姬,生女嫖,後生兩男.  而代王王后生四男.

先代王未入立為帝而王后卒.  及代王立為帝,而王后所生四男更病死.

[두태후(竇太后)는 조나라 청하의 관진(觀津) 사람이다.

여태후가 살아 있었을 때 두희(竇姬)는 양갓집 처자로 입궁해 여후의 시중을 들었다.

후에 여후는 궁녀들을 내보내 여러 왕들에게 하사했는데, 왕 한 명당 5명씩으로 했다.

두희 또한 이 출궁(出宮) 행렬 가운데 동행했다. 희의 집은 청하군에 있었는데,

조나라가 집에서 가까운 것을 생각해 내고는 그 궁녀의 송환을 주관하는 환관(宦官)에게 간청하기를 :

" 저의 명부를 반드시 조나라로 가는 궁녀의 대오 가운데 놓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환관은 이 일을 잊고 잘못해 그녀의 명부를 대(代)나라로 가는 궁녀의 대오 가운데 놓았다.

명부가 위로 보고되자 여태후는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렸으며 이것에 따라 출발해야만 했다.

두희는 흐느껴 울면서 그 환관을 원망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으며, 강제로 동원하자 비로소 이에 따랐다.
대나라에 이르자 대왕(代王)은 오로지 두희만을 총애해 딸 표(嫖)를 낳았으며, 후에 두 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대왕후(代王后)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대왕이 아직 황제가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났다.

대왕이 황제에 오르자 왕후가 낳은 네 명의 아들들 또한 잇달아서 병사(病死)했다.]

 

孝文帝立數月,公卿請立太子,而竇姬長男最長,立為太子.  立竇姬為皇后,女嫖為長公主.

其明年,立少子武為代王,已而又徙梁,是為梁孝王.  竇皇后親蚤卒,葬觀津.

於是薄太后乃詔有司,追尊竇后父為安成侯,母曰安成夫人.

令清河置園邑二百家,長丞奉守,比靈文園法.  竇皇后兄竇長君,弟曰竇廣國,字少君.

少君年四五歲時,家貧,為人所略賣,其家不知其處.  傳十餘家,至宜陽,為其主入山作炭,

(寒)[暮]臥岸下百餘人, 岸崩, 盡壓殺臥者, 少君獨得脫, 不死.  自卜數日當為侯,從其家之長安.

[효문제가 제위(帝位)를 이은 지 몇 개월 안 되어 공경대신(公卿大臣)들은 태자를 세우기를 간청했기에,

두희의 장남이 가장 연장자인지라 그를 태자로 세웠다. 이로써 두희는 황후가 되었고 딸 표는 장공주가 되었다.

그 다음해 막내아들 무(武)를 대왕으로 세웠으며, 머잖아 그는 다시 양나라로 옮겨갔는데 그가 바로 양효왕이다.
두황후의 양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관진에 묻혔다. 이리하여 박태후는 관리에게 명령을 해 두황후의 부친을

안성후(安成侯)에 추서하게 했으며 그녀의 모친을 안성부인이 되게 했다. 청하군(淸河郡)에 원읍을 설치해

2백 호(戶)를 할당했으며 장승(長丞)이 받들어 지키게 했는데, 영문후의 능원의 예의와 똑같게 했다.
두황후의 오빠는 두장군(竇長君)이며, 동생은 두광국(竇廣國)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자(字)는 소군(少君)이다.

소군이 4, 5세 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어떤 사람에게 유괴를 당해 팔려갔다.
그를 판 집이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10여 집에 팔려 다닌 끝에 의양(宜陽)에 이르렀다.

소군은 주인을 위해서 산으로 들어가 숯을 구웠다. 저녁에 1백여 명이 절벽에서 잠을 잤는데,

절벽이 무너져 내려 거기에서 잠자던 사람들은 모두 압사했다. 

다만 소군 한 사람만이 그곳에서 벗어나 죽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점을 쳐보니 수일 내에 후(侯)에 봉해진다는 점괘가 나오자 주인집에서 나와 장안으로 달려갔다.]

 

聞竇皇后新立,家在觀津,姓竇氏.  廣國去時雖小,識其縣名及姓,又常與其姊採桑墮,

用為符信,上書自陳.  竇皇后言之於文帝,召見,問之,具言其故,果是. 又復問他何以為驗?

對曰:「姊去我西時,與我決於傳舍中,丐沐沐我,請食飯我,乃去.」

於是竇后持之而泣,泣涕交橫下.  侍御左右皆伏地泣,助皇后悲哀.

乃厚賜田宅金錢,封公昆弟,家於長安.

[이때 두황후가 새로 즉위했는데, 그 고향이 관진(觀津)이고 성이 두씨(竇氏)라는 것을 들었다.

광국은 집을 떠날 때에 비록 어렸을지라도 현의 이름과 성씨, 또 누이와 함께 뽕잎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졌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이것을 증거로 해 상서를 올려 자신을 설명했다. 두황후는 이 일을 문제(文帝)에게 알렸다.

문제가 광국을 불러들여 그에게 물어보자 광국은 그때의 정황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는데 과연 같았다.

또다시 그에게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를 묻자 ,광국은 대답하기를 : "

누이는 제가 서쪽으로 갈 때 저와 역참의 숙박소에서 헤어졌는데 쌀 씻은 물을 구해다가 저의 머리를 씻어주었으며,

또 밥을 구해다가 저를 먹인 후 비로소 헤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두황후는 그를 붙잡고서 울었으며 눈물과 콧물이 엉키어 흘러내렸다.

시자들 또한 좌우에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함으로써 황후가 동생과 만나는 비애의 분위기를 증가시켰다.

이에 광국에게 논밭, 그리고 집과 돈 등을 후하게 하사했으며, 두씨 형제들까지 봉해 장안으로 집을 옮기게 했다.]

 

絳侯、灌將軍等曰:「吾屬不死,命乃且縣此兩人.  兩人所出微,不可不為擇師傅賓客,

又復效呂氏大事也.」於是乃選長者士之有節行者與居.

竇長君、少君由此為退讓君子,不敢以尊貴驕人.  竇皇后病,失明.

文帝幸邯鄲慎夫人、尹姬,皆毋子.  孝文帝崩,孝景帝立,乃封廣國為章武侯.

長君前死, 封其子彭祖為南皮侯.  吳楚反時, 竇太后從昆弟子竇嬰, 任俠自喜, 將兵,

以軍功為魏其侯.  竇氏凡三人為侯.

[강후, 관장군 등이 말하기를 : "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 우리들의 운명은 곧 이 두 사람의 손 안에 달려 있다.

그 두 사람은 출신이 미천하므로 그들을 위해서 스승이나 빈객(賓客)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또 여씨가 대사를 일으킨 것을 재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이가 많고 너그럽고 관대한 학자 가운데서 양호하고 절조가 있으며,

품행이 방정한 사람을 선택해 그 둘과 함께 거하게 했다.

두장군과 소군은 이로부터 공손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군자가 되었으며,

감히 존귀한 지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 면전에서 자만해하지 않았다. 황후가 중병을 얻어서 두 눈이 실명되었다.

한편 문제는 한단(邯鄲) 신부인(愼夫人), 윤희(尹姬)를 총애했으나 그녀들에게서는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다.

효문제가 서거하자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했으며, 그는 광국을 장무후(章武侯)에 봉했다.

두장군은 이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팽조(彭祖)를 남피후(南皮侯)에 봉했다. 

오초칠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두태후의 사촌 형제 두영(竇嬰)은 협사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번에 군대를 통솔해 군공을 세움으로써 위기후에 봉해졌다. 두씨는 이로써 세 사람이 모두 후에 봉해졌다.]

 

竇太后好黃帝、老子言,帝及太子諸竇不得不讀黃帝、老子,尊其術. 

竇太后後孝景帝六歲(建元六年)崩,合葬霸陵.  遺詔盡以東宮金錢財物賜長公主嫖.

[두태후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설을 좋아했기에, 경제(景帝)와 태자 및 두씨의 외척들은

모두 황제, 노자의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학술을 공경해 받들었다.
두태후는 효경제보다 6년 늦게 서거했는데 문제와 패릉에 합장되었으며,

모든 동궁(東宮)의 금전 재물을 장공주 표에게 주라는 조서를 남겨놓았다.]

 

王太后,槐裏人,母曰臧兒.  臧兒者,故燕王臧荼孫也.

臧兒嫁為槐裏王仲妻,生男曰信,與兩女.  而仲死,臧兒更嫁長陵田氏,生男蚡、勝.

臧兒長女嫁為金王孫婦,生一女矣,而臧兒卜筮之,曰兩女皆當貴.  因欲奇兩女,乃奪金氏.

金氏怒,不肯予決,乃內之太子宮.  太子幸愛之,生三女一男.  男方在身時,王美人夢日入其懷.

以告太子,太子曰:「此貴徵也.」未生而孝文帝崩,孝景帝即位,王夫人生男.

[왕태후(王太后)는 괴리(槐里) 사람으로 어머니는 장아(藏兒)라고 부른다.

장아는 과거 연(燕)나라 왕인 장다(藏茶)의 손녀이다. 장아는 괴리 사람인 왕중(王仲)에게 시집을 와서

신(信)이라고 부르는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았다. 왕중이 죽자 장아는 장릉(長陵) 전씨(田氏)에게로 개가했으며,

아들 전분(田蚡), 전승(田勝)을 낳았다. 장아의 큰딸은 김왕손(金王孫)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하나 낳았다.

장아가 그녀의 자녀들을 위해 점을 쳐보자 그녀의 두 딸이 모두 귀인이 될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 때문에 그녀는 두 딸을 기이하고 비범하게 키우고자 김씨 집안에서 딸을 빼앗아 왔다.

김씨는 분노하여 이혼하지 않으려고 했다. 장아는 곧 딸을 태자궁으로 들여보냈으며,

태자는 그녀를 몹시 총애해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남자 아이를 잉태했을 때 왕미인(王美人)은 태양이 그녀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이 일을 곧 태자에게 알리었으며 태자는 말하기를 : " 이것은 크게 귀히 될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왕미인이 아직 분만하지 않았는데 효문제가 서거해, 곧 효경제가 즉위했고 왕부인(王夫人)은 아들을 낳았다.]

 

先是臧兒又入其少女兒姁,兒姁生四男.  景帝為太子時,薄太后以薄氏女為妃.

及景帝立,立妃曰薄皇后.  皇后毋子, 毋寵.  薄太后崩, 廢薄皇后.

景帝長男榮, 其母栗姬.  栗姬, 齊人也.  立榮為太子.  長公主嫖有女, 欲予為妃.

栗姬妒,而景帝諸美人皆因長公主見景帝,得貴幸,皆過栗姬,栗姬日怨怒,謝長公主,不許.

長公主欲予王夫人,王夫人許之.  長公主怒,而日讒栗姬短於景帝曰:

「栗姬與諸貴夫人幸姬會,常使侍者祝唾其背,挾邪媚道.」景帝以故望之.

[이전에 장아는 또 그녀의 막내딸 아후(兒姁)를 궁으로 들여보냈는데, 아후는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경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박태후는 박가(薄家)의 여자 한 명을 택해 그에게 보내 태자의 비(妃)가 되게 했다.

경제가 즉위하자 이 비는 박 황후(薄皇后)가 되었지만, 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총애를 받지 못했다.

박태후가 서거하자 경제는 박 황후를 폐했다. 경제의 장남은 영(榮)이라고 부르며 그의 모친은 율희(栗姬)이다.

율희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영은 태자가 되었다. 장공주 표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태자에게 보내 비가 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율희는 질투가 심했다. 경제의 여러 미인들은 모두 장공주를 통해

경제를 만났는데, 존귀와 총애를 받는 정도가 모두 율희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율희는 원한이 날로 깊어져 장공주에게 사절을 표명하고 혼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공주는 딸을 왕부인의 아들에게 보내 비가 되게 하고자 했는데, 이때 왕부인은 이에 응했다.

장공주는 화가 나서 늘상 경제의 면전에서 율희를 비방하기를 : "율희는 여러 귀부인이나 총희들과 모임을 

가지는데, 시자(侍者)에게 그들의 뒤에서 저주하며 욕하게 함으로써 옳지 않은 행동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경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율희를 미워했다.]

 

景帝嘗體不安, 心不樂, 屬諸子為王者於栗姬,曰:「百歲後,善視之.」栗姬怒, 不肯應, 言不遜.

景帝恚, 心嗛之而未發也. 長公主日譽王夫人男之美, 景帝亦賢之, 又有曩者所夢日符, 計未有所定.

王夫人知帝望栗姬,因怒未解,陰使人趣大臣立栗姬為皇后.

大行奏事畢,曰:「『子以母貴,母以子貴』,今太子母無號,宜立為皇后.」

景帝怒曰:「是而所宜言邪!」遂案誅大行,而廢太子為臨江王.

栗姬愈恚恨,不得見,以憂死.  卒立王夫人為皇后,其男為太子,封皇后兄信為蓋侯.

景帝崩,太子襲號為皇帝.

[경제는 늘 몸이 편안하지 않았기에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왕으로 봉해진 아들들에 대해서 율희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그들을 잘 돌보아주기를 바라오.’라 했다. 율희는 화가 나서 대답을 하지 않고 불손함을 나타냈다.
경제는 화가 나서 속으로 그녀를 몹시 증오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때 공주는 날마다 왕부인의 아들이 미덕(美德)함이 있다고 칭찬했으며, 경제 또한 그가 매우 현능하며

또 이전에 왕 부인이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꾼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를 바꾸어 세운다는 생각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왕부인은 경제가 율희를 미워하는 것을 알고 곧 경제의

노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을 이용해 몰래 사람을 보내 대행(大行)이 율희를 황후로 세우라는 청을 하게 재촉했다.
어느 날 대행이 주청하는 일이 끝났을 때 이르기를 ‘아들은 어머니를 귀히 여기고 어머니는 자식을 귀히 여기는데,

현재 태자의 모친은 봉호가 없으니 마땅히 황후로 세우셔야만 합니다.’라 했다.

그러자 경제는 화를 내며 이르기를 ‘이것이 네가 감히 해야 할 말이냐?’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대행을 죄를 물어 주살시켰으며, 태자를 폐해 임강왕(臨江王)이 되게 했다.

이로써 율희는 더욱 원한이 깊어졌으며 경제를 만날 수도 없었으므로 우울해하다가 죽었다.

마침내 왕 부인이 황후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이 태자가 되었고, 황후의 오빠 신(信)은 개후(蓋侯)에 봉해졌다. 

제가 서거하자 태자가 이를 계승해 황제가 되었다.]

 

尊皇太后母臧兒為平原君.  封田蚡為武安侯,勝為周陽侯.

景帝十三男,一男為帝,十二男皆為王.  而兒姁早卒,其四子皆為王.

王太后長女號日平陽公主,次為南宮公主,次為林慮公主.  蓋侯信好酒. 田蚡、勝貪,巧於文辭.

王仲蚤死,葬槐裏,追尊為共侯,置園邑二百家.  及平原君卒,從田氏葬長陵,置園比共侯園.

而王太后後孝景帝十六歲,以元朔四年崩,合葬陽陵.  王太后家凡三人為侯.

[존황(尊皇) 태후(太后)의 모친인 장아는 평원군(平原君)이 되었으며, 전분은 무안후(武安侯)에 봉해졌고,

전승은 주양후(周陽侯)가 되었다. 경제에게는 모두 1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은 황제가 되었고,

12명은 모두 왕에 봉해졌다. 그리고 아후(兒姁)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네 아들은 모두 왕에 봉해졌다.

왕태후(王太后)의 장녀는 평양공주(平陽公主)가 되었고, 차녀는 남궁공주(南宮公主) 가 되었으며,

3녀는 임려공주(林慮公主)가 되었다. 개후(蓋侯) 신(信)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전분, 전승은 매우 탐욕스러워 감언이설을 잘했다. 왕중(王仲)은 일찍 죽었으며 괴리에 묻혔다.

이때 공후(共侯)라는 존호(尊號)가 추서되었으며, 2백호를 마련하여 그의 원읍(園邑)으로 삼았다.

평원군이 세상을 떠나자 전씨(田氏)와 장릉(長陵)에 합장되었으며, 능원을 세우는 것은 공후의 법도와 같게 했다.

왕태후는 효경제보다 16년 늦은 원삭(元朔) 4년에 서거했는데, 경제와 양릉(陽陵)에 합장되었다.

왕태후의 집안에서는 세 사람이 모두 후가 되었다.]

 

衛皇后字子夫,生微矣.  蓋其家號曰衛氏,出平陽侯邑.

子夫為平陽主謳者.  武帝初即位,數歲無子.  平陽主求諸良家子女十餘人,飾置家.

武帝祓霸上還,因過平陽主.  主見所侍美人.  上弗說.  既飲,謳者進,上望見,獨說衛子夫.

是日, 武帝起更衣, 子夫侍尚衣軒中, 得幸. 上還坐,驩甚. 賜平陽主金千斤. 主因奏子夫奉送入宮.

子夫上車,平陽主拊其背曰:「行矣,彊飯,勉之!即貴,無相忘.」

[위황후(衛皇后)의 자는 자부(子夫)인데 그의 출신은 미천하였다.

그녀의 가호(家號)는 위씨로 평양후(平陽侯)의 영읍(領邑) 사람이다. 위자부는 원래 평양공주의 가희(歌姬)였다.
무제(武帝)는 처음 즉위해 여러 해 동안 자식이 없었다. 평양공주는 양갓집 규수 10여 명을 물색해 화장을 시켜

집안에 배치해 두었다. 무제가 패상(霸上)에서 재앙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불계(祓禊)를 끝내고 돌아올 때

길에서 평양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시중을 드는 미인들을 바쳤으나 무제는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

술을 마신 후 가희가 들어와 노래를 했는데, 무제가 이를 바라보더니 위자부(衛子夫) 한 사람만을 좋아했다.
이날 무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자 위자부는 휘장을 두른 수레 안에서 시중을 들며, 총애를 받았다.

무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는데 기분이 매우 좋았으므로, 평양공주에게 금 1천 근(斤)을 하사했다.

공주는 이 기회를 이용해 위자부를 입궁시키라고 주청했다.
위자부(子夫)가 가마에 오를 때 평양공주는 그녀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

"가거라. 몸조심하고 위로 올라가도록 노력하라! 만약 존귀하게 된다면 나를 잊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入宮歲餘,竟不復幸.  武帝擇宮人不中用者,斥出歸之.  衛子夫得見,涕泣請出.

上憐之,復幸,遂有身,尊寵日隆.  召其兄衛長君弟青為侍中.

而子夫後大幸,有寵,凡生三女一男.  男名據. 初,上為太子時,娶長公主女為妃.

立為帝,妃立為皇后,姓陳氏,無子.  上之得為嗣,大長公主有力焉,以故陳皇后驕貴.

聞衛子夫大幸,恚,幾死者數矣.  上愈怒.  陳皇后挾婦人媚道,其事頗覺,於是廢陳皇后,

而立衛子夫為皇后.

[위자부가 입궁한 지 1년여가 되었지만 마침내 더 이상은 무제와 동침하지 못했다.

무제는 그런 중용되지 못한 궁인들을 골라서 궁에서 내보내 집으로 돌려보냈다.

위자부는 무제를 볼 기회가 있자 눈물을 흘리면서 출궁(出宮)을 간청했다.

무제는 그녀를 매우 가련히 여겨 다시 동침을 했으며, 마침내 자부가 잉태하자, 

이로써 존귀와 총애가 날로 더해갔다.

무제는 그녀의 오빠 위장군(衛長君), 동생 위청(衛靑)을 불러들여 시중(侍中)이 되게 했다.

그리고 위자부는 후에 항상 무제와 동침을 하는 커다란 총애를 받았으며 모두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거(據)이다. 당초에 무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장공주(長公主)의 딸 아교를 간택하여 비가 되게 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비는 황후가 되었으나, 성이 진씨(陳氏)인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무제는 황위 계승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대장공주(大長公主)는 적지 않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진황후(陳皇后)는 교만하고 거만했다. 그녀는 위자부가 커다란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분노를 느꼈으며 화가 나서 거의 죽을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무제는 더욱더 노했다. 진황후는 몰래 여자를 시켜 저주하게 했는데 그 일은 발각이 되었다.

이리하여 진황후는 폐출되었고 위자부가 황후가 되었다.]

 

陳皇后母大長公主,景帝姊也,數讓武帝姊平陽公主曰:「帝非我不得立,已而棄捐吾女,

壹何不自喜而倍本乎!」 平陽公主曰:「用無子故廢耳.」

陳皇后求子,與醫錢凡九千萬,然竟無子.  衛子夫已立為皇后,先是衛長君死,

乃以衛青為將軍, 擊胡有功,封為長平侯.  青三子在襁褓中,皆封為列侯.

及衛皇后所謂姊衛少兒,少兒生子霍去病,以軍功封冠軍侯,號驃騎將軍. 

青號大將軍。立衛皇后子據為太子.  衛氏枝屬以軍功起家,五人為侯.

[진황후의 모친 대장공주는 경제의 누이였는데, 무제의 누이인 평양공주를 여러 차례 꾸짖으며 말하기를 : 

" 황제는 내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설 수가 없었는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딸을 버렸으니

자애(自愛)를 알지 못하고 본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평양공주가 말하기를 : "자식이 없는 이유 때문에 폐출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황후는 아들을 낳으려고 모두 9천 만전이나 되는 의약비를 썼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했다.
위자부는 이미 황후가 되었다. 이 이전에 위장군(衛長君)이 죽었으므로 위청이 장군(將軍)이 되었다.

그는 호족(胡族)을 물리친 공적이 있어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위청의 아들 중 세 명은 아직 강보(襁褓)에 있었는데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른바 위황후의 언니는 위소아(衛少兒)를 말한다. 소아는 아들 곽거병(霍去病)을 낳았다.

그는 군공이 있음으로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져 표기장군(驃騎將軍)이라고 불렸으며, 위청은 대장군으로 불렸다.

위황후의 아들 거(據)는 태자로 세워졌다. 위씨 종족은 군공으로 집안이 일어나 다섯 사람이 후에 봉해졌다.]

 

及衛后色衰, 趙之王夫人幸, 有子, 為齊王. 王夫人蚤卒. 而中山李夫人有寵, 有男一人, 為昌邑王.

李夫人蚤卒,其兄李延年以音幸,號協律.  協律者,故倡也.  兄弟皆坐姦,族.

是時其長兄廣利為貳師將軍,伐大宛,不及誅,還,而上既夷李氏,後憐其家,乃封為海西侯.

他姬子二人為燕王、廣陵王.  其母無寵,以憂死.  及李夫人卒,則有尹婕妤之屬,更有寵.

然皆以倡見,非王侯有土之士女,不可以配人主也.

[위황후의 얼굴이 노쇠해지자, 조(趙)나라 왕부인(王夫人)이 총애를 받았다.

왕부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국(中山國) 이부인(李夫人)이 총애를 받았다.

그녀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창읍왕(昌邑王)에 봉해졌다. 이부인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오빠 이연년(李延年)은 음률에 정통함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협률(協律)이 되었다.

협률이라는 관직은 과거에는 예인(藝人)이었다.

그들 형제는 모두 음란함을 범한 후 궁죄(宮罪)로 다스려져 멸족을 당했다.

이때에 마침 그의 맏형 이광리는 이사장군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대완을 토벌하러 갔으므로 죽음을 면했다.

그가 돌아왔으나 무제는 이미 이씨를 멸족시켰으며, 후에 그의 일가를 가련히 여겨 그를 해서후(海西侯)에 봉했다.

른 희비(姬妃)가 낳은 두 명의 아들은 연왕(燕王), 광릉왕(廣陵王)에 봉해졌다.

그들의 모친은 총애를 받지 못했기에 이 때문에 우울해 하다가 죽었다.
이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윤첩여(尹婕妤)의 무리가 계속해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노래하는 예인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사람들로서,

왕후가 봉지를 소유한 집안의 규수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서 황제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었다.]

 

褚先生曰:臣為郎時, 問習漢家故事者鐘離生. 

曰:王太后在民閒時所生(子)[一]女者, 父為金王孫.

王孫已死, 景帝崩後, 武帝已立, 王太后獨在.

而韓王孫名嫣素得幸武帝, 承閒白言太后有女在長陵也.

武帝曰:「何不蚤言!」乃使使往先視之,在其家.  武帝乃自往迎取之.

蹕道,先驅旄騎出橫城門,乘輿馳至長陵.  當小市西入里,里門閉,暴開門,

乘輿直入此里,通至金氏門外止,使武騎圍其宅,為其亡走,身自往取不得也.

[저선생(褚先生)은 말했다.
“내가 낭(郎)이었을 때 일찍이 한가(漢家)의 고사(故事)를 모두 알고 있는 종리생(鍾離生)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왕 태후는 입궁하기 전 민간에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김왕손(金王孫)이었다.

김왕손은 이미 죽었고, 경제(景帝)가 서거한 후 무제(武帝)가 황위를 계승했으며, 왕태후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한왕손(韓王孫)이 이름은 언(嫣)으로 평소에 무제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기회를 타서 태후에게 장릉(長陵)에 딸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제는 말하기를 : ‘어째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질책하였다.

곧 사람을 보내 먼저 살펴보니 과연 그 집에 살고 있었다. 무제는 친히 그녀를 맞이하러 갔다.

거리의 통행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앞에는 기병이 기치를 앞세우고 횡성문(橫城門)을 나갔고

무제의 어거(御車)가 뒤이어서 장릉으로 달려갔다. 골목길에서 마을로 들어섰는데 마을의 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세차게 문을 열었다. 황제의 어거가 곧장 마을로 들어섰으며 김씨의 집, 문 밖에서 멈춰섰다.
무제는 기병들에게 김씨의 집 주위를 포위하게 했는데, 이는 그녀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으며,

친히 갔는데도 만날 수 없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即使左右群臣入呼求之.  家人驚恐, 女亡匿內中床下.  扶持出門, 令拜謁.

武帝下車泣曰:「嚄!大姊,何藏之深也!」

詔副車載之,迴車馳還,而直入長樂宮.  行詔門著引籍,通到謁太后.

太后曰:「帝倦矣,何從來?」 帝曰:「今者至長陵得臣姊,與俱來.」

顧曰:「謁太后!」 太后曰:「女某邪?」 曰:「是也.」 太后為下泣,女亦伏地泣.

武帝奉酒前為壽,奉錢千萬,奴婢三百人,公田百頃,甲第,以賜姊.

[좌우의 신하들에게 집으로 들어가 그녀를 찾으라 했다.

집안의 사람들은 두려워했으며, 여인은 도망쳐 내실의 침대 아래에 숨었다.

신하들이 그녀를 부축해 문을 나왔으며 황상(皇上)을 배알하게 했다.

무제는 수레에서 내려 흐느끼며 말하기를 : " 아 ! 큰누님. 어찌 이같이 깊은 곳에 숨어 있었습니까?"라고 하였다.

뒤따르던 부거(副車)에 그녀를 태우고서 수레 머리를 돌려 궁성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장락궁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문 간수에게 궁문 통행 증서를 다 써놓으라고 명령했기에 곧장 궁궐에 이르러 태후를 배알할 수 있었다.

태후가 묻기를 : " 황제께서 피곤해 보입니다. 어디에 다녀 오는 길입니까?’라고 하자.

무제가  대답하기를 : " 지금 장릉에 가서 누이를 만났으며 함께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고개를 돌려 그의 누이에게 말하기를 : " 태후를 알현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태후가 묻기를 : " 정말 나의 그 딸이더냐?’라고 하자,  그녀가 대답하기를 : "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는 흑흑 흐느껴 울었으며, 딸 또한 땅바닥에 엎드려 흑흑 흐느꼈다.
무제는 술을 받들고 앞으로 나와서 태후를 위해 축수(祝壽)를 했으며,

돈 1천 만, 노비 3백여 명, 논밭 1백경(頃)을 내놓았으며, 또 상등(上等)의 저택을 누이에게 하사했다.]

 

太后謝曰:「為帝費焉.」於是召平陽主、南宮主、林慮主三人俱來謁見姊,因號曰修成君.

有子男一人,女一人.  男號為修成子仲,女為諸侯王王后.  此二子非劉氏,以故太后憐之.

[태후는 감사해 이르기를 ‘황제에게 돈을 너무 많이 쓰게 하는구려.’라 했다.

이리하여 평양공주, 남궁공주, 임려공주 세 사람을 모두 불러 언니를 배알하게 했으며,

그녀를 수성군(修成君)에 봉했다. 수성군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수성자중(修成子仲)으로 불렸고, 딸은 제후왕(諸侯王)의 왕후(王侯)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유씨(劉氏) 성이 아니므로 태후는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

 

修成子仲驕恣,陵折吏民,皆患苦之.  衛子夫立為皇后,后弟衛青字仲卿,以大將軍封為長平侯.

四子,長子伉為侯世子,侯世子常侍中, 貴幸.

其三弟皆封為侯,各千三百戶,一曰陰安侯,二曰發干侯,三曰宜春侯,貴震天下.

天下歌之曰:「生男無喜,生女無怒,獨不見衛子夫霸天下!」

是時平陽主寡居,當用列侯尚主.  主與左右議長安中列侯可為夫者,皆言大將軍可.

主笑曰:「此出吾家,常使令騎從我出入耳,柰何用為夫乎?」

左右侍御者曰:「今大將軍姊為皇后, 三子為侯, 富貴振動天下, 主何以易之乎?」於是主乃許之.

言之皇后,令白之武帝,乃詔衛將軍尚平陽公主焉.

[수성자중은 교활하고 방자해 관리와 백성을 괴롭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위자부가 황후가 될 때 그녀의 동생 위청(衛靑)은 자가 중경(仲卿)인데 대장군의 신분으로서 장평후에 봉해졌다.

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항(伉)은 후세자(侯世子)가 되었다.

후세자는 시중에 임명되었으므로 존귀와 총애를 받았다. 그의 세 동생들은 모두 후(侯)에 봉해졌는데,

각각에게는 식읍 1천3백호(戶)가 주어졌다. 한 사람은 음안후(陰安侯)로, 한 사람은 발간후(發干侯)로,

한 사람은 의춘후(宜春侯)로 불렸는데, 그들의 부귀함과 높은 신분은 천하를 진동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하지 말고, 딸을 낳았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어찌 위자부(衛子夫)가 천하를 제패함을 보지 못했더냐.’라고 하는 가요 한 수(首)가 유행되었다.

이때 평양공주는 남편이 병으로 인해 경성을 떠나 봉국(封國)으로 갔기 때문에 홀로 지내고 있었으므로

마땅히 열후(列侯)를 한 명 택해 그녀에게 짝을 지어주어야만 했다.

공주는 좌우의 사람과 장안성에서 어떤 열후가 남편이 될 수 있는가를 상의했는데, 모두 대장군이 좋다고 말했다.

공주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 " 이 사람은 우리 집에서 나왔으며 기병이 되어 나를 호위하고 따라다니게끔 했는데,

어떻게 그를 남편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좌우의 시종들이 말하기를 :  " 현재 대장군의 누이는 황후이고 세 아들은 모두 후(侯)로서

부귀함이 천하를 진동시킵니다. 그런데 공주께서는 어찌해 그사람들을 하찮게 여기십니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공주는 비로소 이 혼사를 허락했다. 이 일은 황후에게 알려졌고 무제에게 보고되었으며,

위장군(衛將軍)은 평양공주를 맞이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褚先生曰:

丈夫龍變.  傳曰:「蛇化為龍,不變其文;家化為國,不變其姓. 」

丈夫當時富貴,百惡滅除,光耀榮華,貧賤之時何足累之哉!武帝時,幸夫人尹婕妤.

邢夫人號娙娥,眾人謂之「娙何」.  娙何秩比中二千石,容華秩比二千石,婕妤秩比列侯.

常從婕妤遷為皇后.  尹夫人與邢夫人同時并幸,有詔不得相見.

尹夫人自請武帝,願望見邢夫人,帝許之.  即令他夫人飾,從御者數十人,為邢夫人來前.

尹夫人前見之,曰:「此非邢夫人身也.」 帝曰:「何以言之?」

對曰:「視其身貌形狀,不足以當人主矣.」 於是帝乃詔使邢夫人衣故衣,獨身來前.

尹夫人望見之,曰:「此真是也.」 於是乃低頭俛而泣,自痛其不如也.

諺曰:「美女入室,惡女之仇.」

[저선생은 말한다.
“남편은 용과 같이 변화하는구나. 『좌전』에 이르기를 : "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데, 그것의 무늬는 변하지 않는다.

가주(家主)에서 국주(國主)가 되었지만 그 성씨(姓氏)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남편이 부귀할 때에는 온갖 결함이 모두 가려져 영화(榮華)만이 빛나지만,

빈천할 때에는 조그만 어려운 일이라도 어떻게 그때의 권력과 지위에 연루시킬 수 있겠는가!” 

제는 부인 윤첩여를 총애했다. 또 형부인은 형아(娙娥)라고 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형하(娙何)’라고 불렀다.

형하의 품급(品級)은 중2천석(中二千石)에 상당하며, 용화(容華)의 품급은 2천석(二千石)에 상당하며,

윤첩여의 품급은 열후에 상당한다. 일반적으로 첩여 중에서 황후를 선발했다.
윤부인은 형부인과 동시에 총애를 받았는데, 무제는 그녀 둘이 만나서는 안 된다는 조서를 내렸다.

윤부인은 친히 가서 무제에게 형부인을 만나보기를 희망한다고 간청하자 무제는 그녀에게 허락했다.
곧 다른 부인에게 분장을 시켜 시종을 드는 수십 명에게 형부인을 모시고 앞으로 나오게 했다.

윤부인은 앞으로 나와 그녀를 보더니 ‘이 사람은 형부인 본인이 아니옵니다.’라 했다.

무제가 ‘어떤 근거로 그와 같이 말하오?’라고 하자,

윤부인이 대답하기를 : " 그녀의 용모와 자태를 보건대 군주의 배필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무제는 형부인에게 원래 입었던 옷을 입고서 혼자 앞으로 걸어나오라 했다.

윤부인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이르기를 : " 이제야 정말이로구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흑흑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으며, 자신이 남보다 못함을 비통해 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 " 미녀가 방 안에 들어가면 추녀의 원수가 된다."라고 하였다.]

 

褚先生曰:

浴不必江海, 要之去垢;馬不必騏驥, 要之善走;士不必賢世, 要之知道;女不必貴種, 要之貞好.

傳曰:「女無美惡,入室見妒;士無賢不肖,入朝見嫉.」美女者,惡女之仇.  豈不然哉!

鉤弋夫人姓趙氏,河閒人也.  得幸武帝,生子一人,昭帝是也.

武帝年七十,乃生昭帝.  昭帝立時,年五歲耳.

衛太子廢後,未復立太子.  而燕王旦上書,願歸國入宿衛.  武帝怒,立斬其使者於北闕.

上居甘泉宮,召畫工圖畫周公負成王也.  於是左右群臣知武帝意欲立少子也.

[저선생은 말한다.
“목욕을 하는 데 반드시 강이나 바다에 가서 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오물을 씻을 수는 있어야 한다.

말은 반드시 준마를 쓸 필요는 없지만 다만 잘 달릴 수 있어야 한다.

선비는 반드시 세상 사람보다 현명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도리를 알아야만 한다.

여자는 반드시 귀한 집안 출신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절개가 곧고 착해야만 한다.
『좌전』에서 말했다. " 여자는 곱던 밉던 관계없이 일단 궁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질투를 받는다.

독서인은 현능과 천박에 관계없이 일단 조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시기를 받는다.’"

아름다운 여인이 추녀의 원수인 것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성이 조씨이며 하간(河間) 사람이다. 그녀는 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소제(昭帝)이다. 무제가 70세 때에 비로소 소제가 태어났으며,

소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에는 나이가 겨우 5세였다.
위태자(衛太子)는 폐출당한 후 더 이상은 태자로 있지 못했다.

연왕(燕王) 단(旦)이 상서를 올려 국도(國都)로 돌아가 입궁해 숙위를 담당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무제는 몹시 화가 나서 즉각 사자를 북궐로 보내 그를 참형에 처했다.
무제는 감천궁(甘泉宮)에 살았는데, 화공(畵工)을 불러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은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좌우의 군신들은 무제가 작은아들을 태자로 옹립하려는 것을 알았다.]

 

後數日,帝譴責鉤弋夫人.  夫人脫簪珥叩頭.

帝曰:「引持去,送掖庭獄!」夫人還顧,帝曰:「趣行,女不得活!」夫人死雲陽宮.

時暴風揚塵,百姓感傷.  使者夜持棺往葬之,封識其處.

其後帝閒居,問左右曰:「人言云何?」左右對曰:「人言且立其子,何去其母乎?」

帝曰:「然. 是非兒曹愚人所知也.  往古國家所以亂也,由主少母壯也.

女主獨居驕蹇,淫亂自恣,莫能禁也. 女不聞呂后邪?」

故諸為武帝生子者,無男女,其母無不譴死,豈可謂非賢聖哉!

昭然遠見,為後世計慮,固非淺聞愚儒之所及也.  謚為「武」,豈虛哉!

[며칠이 지나자 무제는 구익부인을 책망했다. 부인은 비녀와 장식들을 뽑아버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무제는 말하기를 : " 끌어내서 액정옥(掖庭獄)에 가두어라!’라고 하였다. 부인이 머리를 돌려 무제를 바라보자,

무제는 말하기를 : " 빨리 가거라, 너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운양궁(雲陽宮)에서 죽었다.

그때 광풍이 먼지를 일으켰으며, 백성들 또한 애상함을 느꼈다.

사자(使者)가 밤에 관재(棺材)를 가지고 가서 그녀를 묻어주었으며 분묘 위에 표지를 해두었다.
후에 무제가 한가해 일이 없을 때 좌우의 사람들에게 묻기를 : "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더냐?’라고 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 " 사람들은 그녀의 아들을 세우려고 하면서 어째서 그녀의 모친을 제거해야만 했느냐?’

라고 말한다고 했다.
무제가 말하기를 : "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은 소인배나 우인(愚人)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자고로 국가에 난동이 있었던 까닭은 황제의 젊은 어미가 혈기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황후가 독단적이며 교만 방자하고 음탕하기 이를 데 없으면 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너희들은 여후(呂后)를 들어보지도 못했느냐?’라고 하였다.

그래서 무릇 무제를 위해 아이를 낳은 비빈은 남자를 낳든 여자를 낳든 관계없이 그들의 모친은 문책당해

죽음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어찌 현성지주(賢聖之主)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현명하고 탁월한 식견은 사후에 국가의 운명을 위한 계산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천문(淺聞)하고 이루(耳陋)한 멍청한 유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는 ‘무(武)’라는 시호를 가졌는데, 설마 유명무실한 것이겠는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