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2. 鄭世家

第 十二. 鄭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30. 17:28

 

          史記 世家

 

      

    第 十二.  鄭世家(정세가)

 


 

鄭桓公友者, 周厲王少子而宣王庶弟也.  宣王立二十二年, 友初封于鄭. 封三十三歲, 百姓皆便愛之.

幽王以為司徒.  和集周民,周民皆說,河雒之閒,人便思之.

為司徒一歲,幽王以褒后故,王室治多邪,諸侯或畔之.

[정환공(鄭桓公) 희우(姬友)는 주려왕(周厲王)의 작은아들이고, 주선왕(周宣王)의 서제(庶弟)이다.
주선왕이 왕위에 오른 지 22년 만에 희우는 비로소 정에 봉지를 받았다.
희우가 봉지를 받은 33년 동안 백성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주유왕(周幽王)이 그를 사도(司徒)에 임명했다.
그는 주 왕실의 직할지 백성들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고,

황하(黃河), 낙하(雒河) 일대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사모했다. 

그가 사도로 지내는 1년 동안에 유왕이 포사(褒姒)를 총애하고 조정의 정사는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제후들은 그를 배반했다.]

 

於是桓公問太史伯曰:「王室多故, 予安逃死乎?」太史伯對曰:「獨雒之東土,河濟之南可居.

公曰:「何以?」 對曰:「地近虢· 鄶, 虢· 鄶之君貪而好利, 百姓不附.  今公為司徒, 民皆愛公,

公誠請居之, 虢· 鄶之君見公方用事, 輕分公地.  公誠居之, 虢· 鄶之民皆公之民也.」

公曰:「吾欲南之江上,何如?」

對曰:「昔祝融為高辛氏火正,其功大矣,而其於周未有興者,楚其後也.

周衰,楚必興. 興,非鄭之利也.」

公曰:「吾欲居西方,何如?」對曰:「其民貪而好利,難久居.」

公曰:「周衰,何國興者?」 對曰:「齊、秦、晉、楚乎?夫齊, 姜姓, 伯夷之後也,

伯夷佐堯典禮.  秦,嬴姓,伯翳之後也,伯翳佐舜懷柔百物。及楚之先,皆嘗有功於天下.

而周武王克紂後,成王封叔虞于唐,其地阻險,以此有德與周衰并,亦必興矣.」

桓公曰:「善.」 於是卒言王,東徙其民雒東,而虢、鄶果獻十邑,竟國之.

[당시 정환공이 태사 백에게 묻기를 : “조정에 재난이 많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 죽음을 면할 수 있겠소?”라고 하자,

태사 백이 대답하기를 : “낙하 이동 지역과 황하, 제수(濟水) 이남에서는 편안히 지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다시 묻기를 : “왜 그런가?”라고 하자,

태사 백이 대답하기를 : “그곳은 괵(虢), 회(鄶)와 가까이 있습니다.
괵(虢), 회(鄶)의 군왕들은 이익에만 눈이 어둡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께서 사도가 되신다면 백성들은 모두 당신을 경애할 것이고, 당신이 만약 그곳에 살기를 희망하면

괵, 회의 국왕은 당신이 권력을 쥐고 있음을 보고서 즐거운 마음으로 토지를 떼어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로 그곳에 사신다면 괵, 회의 백성들은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묻기를 : “나는 남쪽의 장강(長江)가로 가고 싶은데, 어떻겠소?”라고 하자,
태사 백이 대답하기를 : “옛날 축융(祝融)이 고신씨(高辛氏)의 화관(火官)을 지내면서 그는 커다란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은 주나라에서 번성하지 못했습니다. 초(楚)나라가 곧 그의 후예입니다.

주나라가 쇠퇴하면 초나라는 반드시 융성할 것입니다.
초나라가 흥성하면 정나라의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다시 묻기를 : “내가 서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 생각은 어떻소?”라고 하자,
태사 백이 대답하기를 : “그곳의 백성들은 이익만 탐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머물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묻기를 : “주나라가 쇠퇴한 후에는 어느 나라가 흥성할 것 같소?”라고 하자,
태사 백이 대답하기를 : “아마도 제(齊)나라, 진(秦)나라, 진(晉)나라, 초(楚)나라가 흥성할 것입니다.

제나라는 성이 강씨(姜氏)로 백이(伯夷)의 후손입니다. 백이는 당요(唐堯)를 보좌해 예의를 맡아보았습니다.

진(秦)나라의 성은 영씨(嬴氏)로 백예(伯翳)의 후손입니다.
백예는 우순(虞舜)을 도와 모든 사물을 순하게 길들였습니다. 또 초 나라의 조상들도 천하에 공로를 세웠습니다.
무왕(周武王)이 상 주왕(商 紂王)을 정벌한 후, 주 성왕(周成王)은 숙우(叔虞)에게 당(唐)을 봉지로 주었습니다.

그곳은 산천이 험악합니다. 이처럼 덕 있는 자손과 쇠락한 주 왕실이 병존하는 것으로 볼 때,

진(晉)나라도 반드시 흥성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환공이 말하기를 : “ 좋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속히 유왕에게 청해 그의 봉지 안의 백성들을 동쪽의 낙하 동쪽으로 옮겨 살게 하였더니
괵, 회 지역에서 과연 10개의 읍(邑)을 정환공에게 내놓았다. 환공은 마침내 그곳에서 정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二歲,犬戎殺幽王於驪山下,并殺桓公.  鄭人共立其子掘突,是為武公.

武公十年,娶申侯女為夫人,曰武姜.  生太子寤生,生之難,及生,夫人弗愛.

後生少子叔段,段生易,夫人愛之.

二十七年,武公疾.  夫人請公,欲立段為太子,公弗聽.  是歲,武公卒,寤生立,是為莊公.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견융(犬戎)이 여산(驪山)에서 주유왕을 살해하고, 또 정환공도 살해했다.
이에 정나라 사람들이 공동으로 그의 아들 굴돌(掘突)을 옹립하니, 그가 곧 무공(武公)이다.
정무공 10년, 신후(申侯)의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으니, 그녀가 곧 무강(武姜)이다.

무강은 태자 오생(寤生)을 낳을 때 난산이었기 때문에, 낳고 나서 그녀는 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후 무강은 숙단(叔段)을 낳았다. 숙단을 낳을 때에는 순산이었기 때문에, 낳은 후에 그 아기를 좋아했다.
27년, 무공이 병이 나자 부인은 무공에게 숙단을 태자로 옹립하자고 요구했으나 무공은 듣지 않았다.
이해에 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오생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장공(莊公)이다.]

 

莊公元年,封弟段於京,號太叔.  祭仲曰:「京大於國,非所以封庶也.」

莊公曰:「武姜欲之,我弗敢奪也.」段至京,繕治甲兵,與其母武姜謀襲鄭.

二十二年,段果襲鄭,武姜為內應.  莊公發兵伐段,段走.  伐京,京人畔段,段出走鄢.

鄢潰,段出奔共.  於是莊公遷其母武姜於城潁,

誓言曰:「不至黃泉,毋相見也.」 居歲餘,已悔思母.  潁谷之考叔有獻於公,公賜食.

考叔曰:「臣有母,請君食賜臣母.」 莊公曰:「我甚思母,惡負盟,柰何?」

考叔曰:「穿地至黃泉,則相見矣.」 於是遂從之,見母.

[장공 원년, 동생 단에게 경읍(京邑)을 봉지로 주고 태숙(太叔)이라고 칭했다.
제중이 아뢰기를: “경읍은 수도보다 큽니다. 그러니 서출의 형제에게 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장공이 대답하기를 : “무강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내가 감히 거역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단은 경읍에 가서 무기를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어머니 무강과 정나라 수도를 습격하기로 비밀리에 계획했다.
22년, 과연 단이 수도를 습격하자, 무강이 성내에서 그를 맞이했다. 장공이 파병해 단을 토벌하자, 단은 도주했다.

장공이 또 경읍을 토벌하자, 경읍의 백성들은 단을 배반했다. 단은 또 언읍(鄢邑)으로 도주했다.

언읍의 백성들이 흩어지자, 단은 또 공(共)나라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장공은 그의 어머니 무강을 성영(城穎)으로 내쫓으면서 맹서해 이르기를 : 

“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나자 장공은 후회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영곡(穎谷)의 고숙(考叔)이 장공에게 예물을 바치자, 장공은 그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고숙이 간청하기를 : “신에게 어머니가 계신데, 군왕의 음식물을 모친께 상으로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장공이 묻기를 : “나도 어머니가 매우 그리운데, 맹서를 저버릴까 두렵소.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고숙이 대답하기를 : “황천(黃泉)까지 땅을 파서, 그곳에서 만나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공은 그의 말에 따라 땅을 파서 어머니를 만났다.]

 

二十四年,宋繆公卒,公子馮奔鄭.  鄭侵周地,取禾.

二十五年,衛州吁弒其君桓公自立,與宋伐鄭,以馮故也.

二十七年,始朝周桓王.  桓王怒其取禾,弗禮也.

二十九年,莊公怒周弗禮,與魯易祊、許田.

三十三年,宋殺孔父.

三十七年,莊公不朝周,周桓王率陳、蔡、虢、衛伐鄭.  莊公與祭仲、高渠彌發兵自救,

王師大敗。祝聸射中王臂.  祝聸請從之,鄭伯止之,曰:「犯長且難之,況敢陵天子乎?」

乃止.  夜令祭仲問王疾.

三十八年,北戎伐齊,齊使求救,鄭遣太子忽將兵救齊.

齊釐公欲妻之,忽謝曰:「我小國,非齊敵也.」

時祭仲與俱,勸使取之,曰:「君多內寵,太子無大援將不立,三公子皆君也.」

所謂三公子者,太子忽,其弟突,次弟子亹也.

四十三年,鄭莊公卒.  初,祭仲甚有寵於莊公,莊公使為卿;

公使娶鄧女,生太子忽,故祭仲立之,是為昭公.

[장공 24년, 송목공(宋繆公)이 세상을 떠나자 왕자 풍(馮)이 정나라로 도피해 왔다.

정나라는 주 왕실의 직할지를 침범해 농작물을 훔쳐갔다.
25년, 위(衛)나라의 주우가 그의 군왕 환공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송나라와 연합해 정나라를 공격했는데,

그것은 공자 풍이 정나라로 도망했기 때문이었다.
27년, 정장공이 비로소 주환왕을 조회했다.

환왕은 장공이 주나라 땅의 농작물을 훔쳐갔기 때문에 화를 냈으며, 예로써 그를 대우하지 않았다.
29년, 장공은 주 환공이 예로써 그를 접대하지 않음에 원한을 품고,

노(魯)나라와 멀지 않은 팽읍(祊邑)을 정나라에 붙어 있는 허전(許田)과 바꾸어 버렸다.
33년, 송나라는 공보(孔父)를 살해했다.
37년, 장공이 주나라에 조회하지 않자, 주환공은 진(陳),채,괵(虢),위(衛)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토벌했다.
장공은 제중(祭仲), 고거미(高渠彌)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방어하고, 주나라 왕실의 군대를 대파했다.

축첨(祝瞻)은 화살로 환공의 팔을 맞추었다. 축첨이 추격하기를 요청하자, 장공이 저지시키면서 말하기를 :

" 윗사람을 침범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물며 천자를 욕되게 해서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만두었다.

밤에 장공은 제중을 보내어 환공의 상처를 위문했다.
38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는 사자를 보내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정나라는 태자 홀(忽)을 파견해 제나라를 구했다. 제희공(釐公)은 공주를 태자 홀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태자 홀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 “저희 나라는 작은 나라여서 제나라와 친척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제중이 함께 있었는데, 태자에게 제희공의 공주와 결혼할 것을 권하면서 :

“우리 군왕은 총애하는 여자들이 많아서, 태자께서는 큰 나라의 원조가 없으면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어렵습니다.

지금이라도 세 명의 공자가 모두 국왕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세 명의 공자는 태자 홀(忽), 그의 아우 돌(突), 그 다음 동생 미(亹)를 말한다.
43년, 정장공이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제중이 장공의 신임을 얻자, 장공은 그를 경(卿)에 임명했다.
장공은 제중을 등(鄧)나라에 보내 등나라의 여자를 데려와 결혼했다.

그리하여 태자 홀을 낳았으므로 제중은 태자 홀을 옹립했는데, 그가 곧 소공(昭公)이다.]

 

莊公又娶宋雍氏女,生厲公突.  雍氏有寵於宋.  宋莊公聞祭仲之立忽,乃使人誘召祭仲而執之,

曰:「不立突,將死.」亦執突以求賂焉.  祭仲許宋,與宋盟.  以突歸,立之.

昭公忽聞祭仲以宋要立其弟突,九月(辛) [丁]亥,忽出奔衛.  己亥,突至鄭,立,是為厲公.

[장공이 또 송나라에서 옹씨의 여자와 결혼해, 여공(厲公) 돌(突)을 낳았다. 옹씨는 송나라 왕의 총애를 받았다.
송장공(宋莊公)은 제중이 태자 홀을 옹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제중을 속여 납치하고,
그를 억압해 말하기를 : “만약 왕자 돌을 옹립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라고 하였다.

동시에 왕자 돌을 체포하고 그의 재물을 취했다. 제중이 송장공의 요구를 받아들여 송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왕자 돌을 데리고 정나라로 돌아와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소공 홀은 제중이 송장공의 강요에 의해서 그의 동생 돌을 옹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9월 정해일(丁亥日)에 위(衛)나라로 도망했다.
기해일(己亥日)에 왕자 돌이 정나라의 수도로 돌아와 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곧 려공(厲公)이다.]

 

厲公四年,祭仲專國政.  厲公患之,陰使其婿雍糾欲殺祭仲.

糾妻,祭仲女也,知之,謂其母曰:「父與夫孰親?」

母曰:「父一而已,人盡夫也.」女乃告祭仲,祭仲反殺雍糾,戮之於市.

厲公無柰祭仲何,怒糾曰:「謀及婦人,死固宜哉!」

夏,厲公出居邊邑櫟.  祭仲迎昭公忽,六月乙亥,復入鄭,即位.

秋,鄭厲公突因櫟人殺其大夫單伯,遂居之.  諸侯聞厲公出奔,伐鄭,弗克而去.

宋頗予厲公兵,自守於櫟,鄭以故亦不伐櫟.

[려공 4년, 제중이 국가의 대권을 잡자, 려공은 이 일을 걱정되 몰래 제중의 사위 옹규에게 제중을 살해하게 했다.

옹규의 처는 제중의 딸로, 이 일을 알고 어머니에게 묻기를 :“아버지와 남편 중에 누구와 더 가깝습니까?”라고 하자,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 “아버지는 단지 한 명밖에 없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남편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이 일을 제중에게 알리자, 제중은 옹규를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거리에 전시해

군중들로 하여금 구경하게 했다. 려공은 제중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중은 옹규에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말하기를 : “부녀자와 공모하다니, 죽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여름에 려공은 쫓겨나 변경의 역읍(櫟邑)에 거주했다. 제중은 소공 희홀을 맞이해,

6월 을해일(乙亥日)에 소공이 다시 정나라의 수도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했다.
가을에, 정려공 희돌은 역읍 사람들로 하여금 역읍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정나라에서 파견된

대부 선백(單伯)을 살해하게 하고 결국 그곳에 정착했다.

제후들이 려공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함께 정나라를 토벌했으나 정복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송나라는 려공에게 매우 많은 원병을 주어 스스로 역읍을 지키게 했다.

정나라 왕은 이러한 이유로 역읍을 토벌하지 않았다.]

 

昭公二年,自昭公為太子時,父莊公欲以高渠彌為卿,太子忽惡之,莊公弗聽,卒用渠彌為卿.

及昭公即位, 懼其殺己, 冬十月辛卯, 渠彌與昭公出獵, 射殺昭公於野.

祭仲與渠彌不敢入厲公, 乃更立昭公弟子亹為君, 是為子亹也,無謚號.

[소공 2년, 소공이 태자였을 때, 그의 부친 장공은 고거미를 대신에 임명하려고 하자,

태자 홀이 그를 미워해 반대했다. 그러나 장공은 듣지 않고 마침내 고거미를 대신에 임명했다.
소공이 즉위한 뒤에, 고거미는 살해될까 두려워 이해 겨울 10월 신묘일에 소공과 사냥을 나갔다가 야외에서 

소공을 쏘아 죽였다. 제중과 고거미는 여공을 입조시킬 수 없어서 소공의 동생 자미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

자미(子亹)라고 칭하는 것은 시호(諡號)가 없기 때문이다.]

 

子亹元年七月,齊襄公會諸侯於首止,鄭子亹往會,高渠彌相,從,祭仲稱疾不行.

所以然者,子亹自齊襄公為公子之時,嘗會鬬,相仇,及會諸侯,祭仲請子亹無行.

子亹曰:「齊彊,而厲公居櫟,即不往,是率諸侯伐我,內厲公. 

我不如往,往何遽必辱,且又何至是!」卒行.

於是祭仲恐齊并殺之,故稱疾.  子亹至,不謝齊侯,齊侯怒,遂伏甲而殺子亹.

高渠彌亡歸,歸與祭仲謀,召子亹弟公子嬰於陳而立之,是為鄭子.

是歲,齊襄公使彭生醉拉殺魯桓公.

[자미 원년 7월, 제양공(齊襄公)이 수지(首止)에서 제후들과 회합했다.

정자미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고거미가 보좌해 동행했고, 제중은 병 때문에 가지 않았다. 

자미는 제양공이 왕자였을 때 서로 싸운 적이 있어서 그들은 원수관계였다.

제후들과 회합하려고 할 때 제중은 자미에게 가지 말 것을 건의했다.
자미는 말하기를 : “제나라는 강대한 나라요. 려공이 역읍에 있는데, 만약 가지 않으면 제후들을 이끌고

우리를 정벌해 려공에게 되돌려 줄 것이오. 그러므로 내가 안 가느니만 못하오.

간다고 해서 어떻게 꼭 욕을 당한다고만 할 수 있겠소?

또 어찌 그대가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할 수가 있겠소?”라고 하고서, 자미는 끝내 참석하러 갔다. 

당시 제중은 제양공에게 자신도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자미가 수지에 도착해 제양공에게 사과하지 않자, 제양공은 화가 나서 복병으로 하여금 자미를 살해하게 했다.
고거미는 도망쳐 돌아와서, 제중과 모의한 끝에, 진(陳)나라에 가서 자미의 동생 영(嬰)을 데리고 와서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곧 정자(鄭子)이다.
이해에 제양공은 팽생(彭生)을 시켜 노환공(魯桓公)이 술에 취했을 때를 틈타 늑골을 부러뜨려 죽게 하였다.]

 

鄭子八年,齊人管至父等作亂,弒其君襄公.

十二年,宋人長萬弒其君湣公.  鄭祭仲死.

十四年,故鄭亡厲公突在櫟者使人誘劫鄭大夫甫假,要以求入.

假曰:「捨我,我為君殺鄭子而入君.」厲公與盟,乃捨之.

六月甲子, 假殺鄭子及其二子而迎厲公突, 突自櫟復入即位. 

初, 內蛇與外蛇鬬於鄭南門中, 內蛇死.

[정자 8년,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 등이 난을 일으켜 그들의 국왕 양공을 살해했다.
12년, 송나라 사람 장만(長萬)이 그의 국왕 민공(湣公)을 살해했다. 정나라 대신 제중이 죽었다.
14년, 옛날 정나라에서 도망해 역읍에 있는 여공 희돌이 사람을 보내 정나라 대부 보가(甫假)를 유인해 협박했다.
곧 려공이 조정에 되돌아가 즉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보가가 말하기를 : “나를 풀어주면, 당신을 위해서 정자를 죽이고 당신을 모셔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려공이 그와 함께 신 앞에서 맹서하고, 그를 석방했다.
그로부터 6월 갑자일(甲子日), 보가가 정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려공 희돌을 영접하자,

려공은 조정으로 되돌아와 왕이 되었다.
처음에 정나라 수도의 남문(南門)에서 성 안쪽의 뱀과 성 바깥쪽의 뱀이 싸웠는데, 결국 안쪽의 뱀이 죽었다.]

 

居六年,厲公果復入. 入而讓其伯父原曰:「我亡國外居,伯父無意入我,亦甚矣.」

原曰:「事君無二心,人臣之職也. 原知罪矣.」遂自殺.

厲公於是謂甫假曰:「子之事君有二心矣.」遂誅之.  假曰:「重德不報,誠然哉!」

[6년 만에, 려공은 과연 조정으로 되돌아와 다시 왕이 되었던 것이다.

려공이 조정에 되돌아온 후에 그의 백부(伯父) 희원(姬原)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

“ 내가 도망해 국외에 살았는데, 백부는 나를 입조하게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너무하오.”라고 하자,
희원이 말하기를 : “ 군주를 섬김에 두 가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신하로서 가져야 할 직무입니다.

저는 저의 죄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곧 자살했다.
그러자 려공은 보가에게 : “너는 군주를 섬기면서 두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곧 그를 죽였다.
죽음에 이르러 보가가 말하기를 : “ 은혜는 갚지 않고 정말 이래도 되는 거요!”라고 하였다.]

厲公突後元年,齊桓公始霸.

五年,燕、衛與周惠王弟穨伐王,王出奔溫,立弟穨為王.

六年,惠王告急鄭,厲公發兵擊周王子穨,弗勝,於是與周惠王歸,王居于櫟.

七年春,鄭厲公與虢叔襲殺王子穨而入惠王于周.

秋,厲公卒, 子文公踕立.  厲公初立四歲, 亡居櫟, 居櫟十七歲,復入,立七歲,與亡凡二十八年.

[려공 후(後) 원년, 제환공이 패(覇)라고 칭했다.
5년, 연(燕)나라와 위(衛)나라가 주혜왕(周惠王)의 동생 희퇴(姬頹)와 함께 주혜왕을 공격해,

혜왕을 온읍(溫邑)으로 내쫓고 혜왕의 동생 희퇴를 주나라 왕으로 옹립했다.
6년, 혜왕이 정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정려왕은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 왕자 퇴를 공격했으나 정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려왕은 주혜왕과 함께 정나라로 되돌아와 혜왕을 역읍에 살게 했다.
7년 봄, 정려공은 괵숙(虢叔)과 함께 왕자 퇴를 공격해 죽이고, 혜왕을 주나라 수도로 되돌려 보냈다.
가을에 려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문공(文公) 희첩(姬踕)이 왕위를 계승했다.

려공은 즉위한 지 4년이 지나 역읍으로 도망갔다가, 역읍에서 17년간 살았으며, 다시 되돌아와 7년간 재위했다.

밖으로 도망했던 시기까지 합하면 재위 기간은 모두 28년이다.]

 

文公十七年齊桓公以兵破蔡遂伐楚至召陵.

二十四年, 文公之賤妾曰燕姞, 夢天與之蘭, 曰:「余為伯鯈. 余, 爾祖也. 以是為而子, 蘭有國香.」

以夢告文公,文公幸之,而予之草蘭為符.  遂生子,名曰蘭.

三十六年, 晉公子重耳過, 文公弗禮. 文公弟叔詹曰:「重耳賢, 且又同姓,窮而過君,不可無禮.」

文公曰:「諸侯亡公子過者多矣, 安能盡禮之!」

詹曰:「君如弗禮, 遂殺之;弗殺, 使即反國, 為鄭憂矣.」文公弗聽.

[문공 17년, 제환공이 군대를 이끌고 채(蔡)나라를 공격하고, 이어서 초나라로 침공해 소릉(召陵)에까지 이르렀다.
24년, 문공의 천첩(賤妾) 연길(燕姞)이라는 여자의 꿈에, 천제(天帝)가 그녀에게 한 포기의 난초를 주면서 말하기를 :
“나는 백조이며, 너의 조상이다. 이 난초를 너의 아들로 삼거라. 난초에는 매우 진한 향기가 있다.”라고 말했다.

연길은 이 꿈을 문공에게 이야기하자, 문공은 곧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녀에게 한 그루의 난초를 주어 증거로 삼게 했다.  그리하여 연길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희란(姬蘭)이라 했다.
36년,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정나라를 지나갔는데, 문공은 그를 예로써 대우하지 않았다.
문공의 동생 희숙첨(姬叔詹)이 말하기를 : “중이는 현명하고, 또 우리와 동성(同姓)이고 곤궁할 때

이곳을 지나다 국왕을 방문했는데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문공이 대답하기를 : “ 각 제후국의 왕자가 도망가다 이곳을 지나가는 일은 흔한 것인데,

내가 어찌 그들을 모두 예로써 대우하겠소?”라고 하였다.
또 숙첨이 말하기를 : “ 왕께서 만약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려면, 곧 그를 죽이십시오.

죽이지 않고 만약 그가 진(晉)나라로 돌아간다면 장차 정나라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문공은 이를 듣지 않았다.]

 

三十七年春,晉公子重耳反國,立,是為文公.

秋,鄭入滑,滑聽命,已而反與衛,於是鄭伐滑.

周襄王使伯服請滑.  鄭文公怨惠王之亡在櫟,而文公父厲公入之,而惠王不賜厲公爵祿,

又怨襄王之與衛滑,故不聽襄王請而囚伯服.  王怒,與翟人伐鄭,弗克.

冬,翟攻伐襄王,襄王出奔鄭,鄭文公居王于氾.

[문공 37년 봄,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진나라로 되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곧 진문공(晉文公)이다.
가을에 정나라가 활(滑)나라를 공격하자, 활나라가 항복을 표시했다.

오래지 않아 활나라가 정나라를 배반하고 위(衛)나라를 따르자 정나라는 또 활나라를 공격했다.
주양왕(周襄王)이 백복(伯犕)을 정나라에 파견해 활나라와 화해할 것을 요청했다.
정문공은 주혜왕이 역읍에 도망가 있는 것을 그의 아버지 여공이 조정에까지 호송해 다시 왕위에 오르게 했음에도

혜왕이 여공에게 작위나 봉록을 주지 않은 것과, 양왕이 위나라와 활 나라를 도운 데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문공은 주양왕의 요청을 따르지 않고 백복을 가두어 버렸다.
주양왕은 화가 나서 적인(翟人)과 함께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정벌하지 못했다.

겨울에 적인(翟人)은 또 주양왕을 공격했다. 양왕이 정나라로 도주하자, 정문공은 양왕을 범읍에 머무르게 했다.]

 

三十八年,晉文公入襄王成周.

四十一年,助楚擊晉. 自晉文公之過無禮,故背晉助楚.

[문공 38년, 진문공(晉文公)이 주양왕을 성주(成周)로 돌려보냈다.
41년, 정나라는 초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공격했다. 옛날 진문공이 정나라를 지나갈 때에도 예로써 대우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나라는 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를 도왔던 것이다.]

四十三年,晉文公與秦穆公共圍鄭,討其助楚攻晉者,及文公過時之無禮也.

初,鄭文公有三夫人,寵子五人,皆以罪蚤死. 公怒,溉逐群公子. 子蘭奔晉,從晉文公圍鄭.

時蘭事晉文公甚謹,愛幸之,乃私於晉,以求入鄭為太子.  晉於是欲得叔詹為僇.

鄭文公恐,不敢謂叔詹言.

詹聞,言於鄭君曰:「臣謂君,君不聽臣,晉卒為患. 然晉所以圍鄭,以詹,詹死而赦鄭國,

詹之願也.」乃自殺.  鄭人以詹尸與晉.  晉文公曰:「必欲一見鄭君,辱之而去.」

鄭人患之, 乃使人私於秦曰:「破鄭益晉,非秦之利也.」秦兵罷.  晉文公欲入蘭為太子,以告鄭.

鄭大夫石癸曰:「吾聞姞姓乃后稷之元妃,其後當有興者.  子蘭母,其後也.

且夫人子盡已死,餘庶子無如蘭賢.  今圍急,晉以為請,利孰大焉!」

遂許晉,與盟,而卒立子蘭為太子,晉兵乃罷去.

四十五年,文公卒,子蘭立,是為繆公.

[문공 43년, 진문공(晉文公)과 진목공(秦穆公)이 공동으로 정나라를 포위해,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공격한데 대해서 징벌하고, 진(晉) 문공이 정나라를 지나갈 때의 무례한 행위에 대해서 응징했다.
일찍이 정문공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고, 5명의 총애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죄를 지어 일찍 죽었다.
정문공이 노하여 여러 왕자들을 모두 추방했다.

왕자 난(蘭)은 진(晉)나라로 도망했는데 진(晉)문공이 정나라를 포위할 때 함께 종군했다.

당시 왕자 난은 진(晉)문공을 섬기면서 그를 매우 공경했고, 진문공도 그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던 중 왕자 난은 진나라에서 정나라로 되돌아가 태자가 되려고 비밀리에 활동했다.
진(晉)나라는 일찍이 숙첨(叔詹)이 진문공을 살해할 것을 주장했기에 그를 체포해 살해하려고 했다.

정문공은 두려워해 감히 숙첨에게 말하지 못했다.
숙첨이 듣고서 정문공에게 말하기를 : “제가 일찍이 왕께 권고했으나, 왕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진나라는 드디어 정나라의 재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정나라를 포위한 원인은 저에게 있으므로,

제가 죽으면 정나라는 포위에서 풀려날 것이니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곧 자살했다.
정나라 사람이 숙첨의 시체를 진(晉)나라에 보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 “반드시 정나라 왕을 한번 보고, 그를 한번 욕보여야만 되돌아가겠다.”라고 하였다.
정나라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서 골머리를 앓다가, 곧 사람을 보내 몰래 진(秦)나라에게 알리기를 :

“정나라가 무너지면 진(晉)나라가 강대해질 것인데, 이것은 진(秦)나라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진(秦)나라의 군대는 후퇴해버렸다.  진문공은 왕자 난을 되돌려 보내 태자로 삼으려고 이 일을 정나라에 알리자,
정나라의 대부 석규(石癸)가 말하기를 : “길씨(姞氏) 성의 딸은 후직(后稷)의 원비(元妃)이고,

그녀의 후손은 반드시 흥성한다고 들었습니다. 왕자 난의 모친은 길씨 성의 후손입니다.

하물며 부인의 아들들은 모두 죽고 없으며, 그 나머지 서자(庶子) 중에서도 난처럼 현능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진(晉)나라의 포위는 견고하고, 진나라는 계속 왕자 난을 태자로 삼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이상 좋은 조건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정나라가 진(晉)나라의 요구를 허락하고, 진나라와 동맹을 맺고 왕자 난을 태자에 앉히자,

진나라의 군대는 비로소 철수했다.

45년, 정 문공이 세상을 떠나자 왕자 난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목공(繆公)이다.]

繆公元年春,秦繆公使三將將兵欲襲鄭,至滑,逢鄭賈人弦高詐以十二牛勞軍,

故秦兵不至而還, 晉敗之於崤.  初,往年鄭文公之卒也,鄭司城繒賀以鄭情賣之,秦兵故來.

三年,鄭發兵從晉伐秦,敗秦兵於汪.  往年楚太子商臣弒其父成王代立.

二十一年,與宋華元伐鄭.  華元殺羊食士,不與其御羊斟,怒以馳鄭,鄭囚華元.

宋贖華元,元亦亡去.  晉使趙穿以兵伐鄭.

二十二年鄭繆公卒子夷立是為靈公.

[목공 원년 봄, 진목공(秦穆公)이 세 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정나라를 습격하려고,

활나라에 도착했다. 이때 정나라의 상인(商人) 현고(弦高)가 이것을 보고 정나라 국왕의 명령을 받았다고 사칭해,

12마리의 소로써 진나라 군대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래서 진(秦)나라 군대가 아직 정나라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되돌아가자, 진(晉)나라 군대가 효산(崤山)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습격해 대파했다.

원래는 작년 정문공이 죽었을 때 정나라의 사성(司城) 증하(繒賀)가 정나라의 이러한 정보를

진(秦)나라에 팔았기 때문에 진(秦)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공격해 온 것이었다.
3년, 정나라가 파병해 진(晉)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해, 왕읍(汪邑)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그 전 해에, 초나라의 태자 상신(商臣)이 그의 아버지 성왕(成王)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21년, 상신이 송나라 화원(華元)과 연합해 정나라를 정벌했다.

화원이 양(羊)을 잡아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했는데, 그의 마부 양짐(羊斟)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았다.
이에 양짐이 화가 나서 마차를 몰고 정나라 군대로 들어가 버려 정나라는 화원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송나라가 재물로써 화원을 찾아가려고 할 때, 화원은 이미 정나라에서 도망가고 없었다.

진(晉)나라는 조천(趙穿)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22년, 정 목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희이(姬夷)가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곧 영공(靈公)이다.]

 

靈公元年春,楚獻黿於靈公.

子家、子公將朝靈公,子公之食指動,謂子家曰:「佗日指動,必食異物.」

及入,見靈公進黿羹,子公笑曰:「果然!」靈公問其笑故,具告靈公.  靈公召之,獨弗予羹.

子公怒,染其指,嘗之而出.  公怒,欲殺子公.  子公與子家謀先.

夏,弒靈公. 鄭人欲立靈公弟去疾,去疾讓曰:「必以賢,則去疾不肖;必以順,則公子堅長.」

堅者,靈公庶弟,去疾之兄也.  於是乃立子堅,是為襄公.  襄公立,將盡去繆氏.

繆氏者,殺靈公、子公之族家也.  去疾曰:「必去繆氏,我將去之.」 乃止.  皆以為大夫.

[영공 원년 봄, 초 나라 왕이 영공에게 자라[黿]를 보내왔다.

자가(子家), 자공(子公)이 영공을 조회하려 할 때 자공의 집게손가락이 움직이자,

자가에게 이르기를 :“이전에 집게손가락이 떨리면 반드시 진기한 음식을 먹게 되더라.”라고 하였다.

조정에 들어가니, 영공이 마침 자라탕을 먹고 있었다. 자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 “과연 그렇구나!”라고 하였다.

영공이 자공에게 웃는 연유를 묻자, 자공이 영공에게 그 이유를 상세히 아뢰었다.
영공이 그를 올라오게는 해놓고 그에게 자라탕을 먹게 하지는 않았다.

자공이 매우 화가 나서 손가락에 자라탕을 묻혀 맛보고는 곧 나가버렸다. 

영공이 매우 화가 나서 자공을 살해하려고 했다. 자공은 자가와 밀약해서 미리 일을 꾸며, 여름에 영공을 살해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영공의 동생 희거질(姬去疾)을 옹립하려고 하자,

거질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 “반드시 현명한 사람이 등용되어야 하는데 나는 불초하며,

반드시 나이의 순서에 따라야 하는데 그렇다면 왕자 견(堅)이 나보다 연장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자 견은 영공의 서제(庶弟)이고, 거질의 형이었다. 이리하여 왕자 견을 옹립하니, 그가 곧 양공(襄公)이다.

양공이 왕위에 오르자, 목씨(繆氏)를 모두 제거하려 했다. 목씨는 곧 영공을 죽인 자공의 가족이다.
거질이 말하기를 : “꼭 목씨를 제거해야 한다면, 내가 정나라를 떠나겠다.”라고 하자,

양공은 죽이지 않고 그들을 모두 대부(大夫)로 임명했다.]

 

襄公元年,楚怒鄭受宋賂縱華元,伐鄭.  鄭背楚,與晉親.

五年,楚復伐鄭,晉來救之.

六年,子家卒,國人復逐其族,以其弒靈公也.

七年,鄭與晉盟鄢陵.

[양공 원년, 초나라는 정나라가 송나라의 뇌물을 받고 화원을 석방한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고,

정나라를 공격했다. 정나라는 초나라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진(晉)나라와 친선을 맺었다.
5년, 초나라가 또 정나라를 공격하자, 진(晉)나라 군대가 와서 정나라를 도왔다.
6년, 자가(子家)가 세상을 떠나자, 정나라 사람들은 예전 그가 영공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을 추방했다.
7년, 정나라는 진(晉)나라와 언릉(鄢陵)에서 회맹했다.]

 

八年,楚莊王以鄭與晉盟,來伐,圍鄭三月,鄭以城降楚.

楚王入自皇門,鄭襄公肉袒掔羊以迎,曰:「孤不能事邊邑,使君王懷怒以及獘邑,孤之罪也.

敢不惟命是聽.  君王遷之江南,及以賜諸侯,亦惟命是聽.  若君王不忘厲、宣王,桓、武公,

哀不忍絕其社稷, 錫不毛之地, 使復得改事君王, 孤之願也, 然非所敢望也.  敢布腹心, 惟命是聽.」

莊王為卻三十里而後舍.  楚群臣曰:「自郢至此,士大夫亦久勞矣.  今得國捨之,何如?」

莊王曰:「所為伐,伐不服也.  今已服,尚何求乎?」卒去.

晉聞楚之伐鄭, 發兵救鄭. 其來持兩端, 故遲, 比至河, 楚兵已去.  晉將率或欲渡, 或欲還, 卒渡河.

莊王聞,還擊晉.  鄭反助楚,大破晉軍於河上.

[양공 8년, 초장왕(楚莊王)은 정나라가 진(晉)나라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정나라를 침공했다.
정나라의 수도를 3개월간 포위해 공격하자, 정나라는 도성(都城)을 내어주고 초나라에 투항했다.

초장왕이 황문(皇門)에서 정나라 수도로 들어가자, 정양공은 사죄의 뜻으로 윗도리를 벗고 양(羊)을 끌고서

초나라 왕을 영접하면서 말하기를 : “저는 대왕의 변읍(邊邑)을 잘 다스릴 수 없으며 대왕께 불쾌한 마음으로

저의 읍에 오시게 했는데 이것은 다 저의 죄과이니 대왕께서 어떤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저를 강남(江南)으로 귀양 보내고,

정나라를 다른 제후들에게 준다 하더라도 제가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만약 대왕께서 주나라의 려왕, 선왕과 정나라의 환공, 무공을 잊지 않으셨다면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저의 국가를 멸망시키지 마시고 저에게 불모의 땅이라도 조금 주시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대왕을 섬길 기회를 주십시오. 이것은 저의 소원입니다만 감히 그렇게 되리라고 바라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대왕께 진심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다만 대왕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초장왕은 초 나라 군대를 30리 밖으로 후퇴해 주둔하게 했다.
이에 초나라 대신들이 말하기를 : “영도(郢都)에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사대부들도 피곤에 지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정나라를 탈취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방치하려고 하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라고 하자,
장공은  말하기를 : “토벌하러 온 이유는 정나라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오.

지금 정나라는 이미 복종했는데, 또 무엇을 요구하자는 것이오?”라고 하고, 끝내 군대를 철수했다.
진(晉)나라는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병해 정나라를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진나라가 출병하려고 할 때,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늦게 도착했다.

황하에 도착했을 때, 초나라 군대는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진(晉)나라 장수 중에 어떤 사람은 강을 건너 추격하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려고 했다.

끝내 진(晉)나라는 황하를 건너 추격했다. 초장왕이 이 소식을 듣고서 되돌아와서 진(晉)나라 군대를 습격했다.

그런데 정나라는 오히려 초나라를 도왔기 때문에, 황하에서 진(晉)나라 군대는 대패했다.]

 

十年,晉來伐鄭,以其反晉而親楚也.

十一年,楚莊王伐宋,宋告急于晉.  晉景公欲發兵救宋,伯宗諫晉君曰:「天方開楚,未可伐也.」

乃求壯士得霍人解揚,字子虎,誆楚,令宋毋降.  過鄭,鄭與楚親,乃執解揚而獻楚.

楚王厚賜與約,使反其言,令宋趣降,三要乃許.  於是楚登解揚樓車,令呼宋.

遂負楚約而致其晉君命曰:「晉方悉國兵以救宋,宋雖急,慎毋降楚,晉兵今至矣!」

楚莊王大怒,將殺之.

解揚曰:「君能制命為義,臣能承命為信.  受吾君命以出,有死無隕.」

莊王曰:「若之許我,已而背之,其信安在?」

解揚曰:「所以許王,欲以成吾君命也.」 將死,顧謂楚軍曰:「為人臣無忘盡忠得死者!」

楚王諸弟皆諫王赦之,於是赦解揚使歸.  晉爵之為上卿.

十八年,襄公卒,子悼公沸立.

[양공 10년, 진(晉)나라는 또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는 정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11년, 초장왕이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는 진(晉)나라에 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진경공(晉景公)이 출병해 송나라를 구하려고 하자, 백종(伯宗)이 경공에게 권고하기를 :

“ 하늘이 바야흐로 초나라를 흥성하게 하려는데,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장사(壯士)를 보내어 초나라를 속여 송나라로 하여금 항복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 장사는 곽인(霍人) 해양(解揚)으로 자(字)가 자호(子虎)였다.
해양이 정나라를 지나자, 정나라는 초나라와 친선관계이므로 곧 해양을 체포해 초나라로 압송했다.
초나라 왕은 해양에게 수많은 재물을 상으로 주어 그와 약속하기를 그가 생각을 바꾸어서 송나라로 하여금

빨리 투항하게끔 말하게 했다. 여러 번 강요가 거듭되매 해양은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초나라 군에서는 해양을 망루에 오르게 해 그가 송나라에 큰 소리로 말하게 했다.
이때 해양은 결국 초나라 왕과 한 약속을 어기고 진(晉)나라 왕의 명령을 전달하며 외치기를 :

“진(晉)나라는 지금 전군을 동원해 송나라를 구원하러 오고 있으니, 송나라는 비록 위급하더라도

제발 초나라에 투항하지 말라. 진나라의 군대는 오늘 곧 도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초장왕이 격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해양이 말하기를 : “국왕이 명령을 할 때에는 의(義)로써 해야 하고, 신하는 명령을 받아 관철시키기를 믿음으로써

해야 합니다. 제가 국왕의 명령을 받았으니, 죽는다 하더라도 국왕의 명령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왕이 묻기를 : “네가 나의 요구에 응답했다가 배반했는데, 너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자,
해양이 대답하기를 : “제가 당신의 요구에 응답한 것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국왕의 명령을 달성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초나라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 “신하된 자는 충성을 다하고서도 결국 얻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초나라 왕의 동생들이 모두 초나라 왕에게 그를 사면하게 권하므로, 결국 초나라 왕은 해양을 사면해 

돌아가게 했다. 진(晉)나라에서는 그를 상경(上卿)에 임명했다.
18년, 정 양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도공(悼公) 희비가 왕위를 이었다.]

 

悼公元年,鄦公惡鄭於楚,悼公使弟睔於楚自訟.  訟不直,楚囚睔.

於是鄭悼公來與晉平,遂親.  睔私於楚子反,子反言歸睔於鄭.

二年,楚伐鄭,晉兵來救.  是歲,悼公卒,立其弟睔,是為成公.

[도공 원년, 허(鄦)영공(靈公)이 초나라에서 정나라를 비방하자,

도공이 그의 동생 희곤(姬睔)을 초나라에 보내어 이를 해명했다.
초나라 왕이 그의 해명을 믿지 않고 희곤을 감금했다. 그래서 정도공은 진(晉)나라와 강화를 맺고 친해졌다.
희곤은 초나라에서 자반(子反)과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자반이 건의해 희곤을 정나라로 되돌아가게 했다.
2년,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진(晉)나라가 파병해 구원했다. 이해에 도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 희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성공(成公)이다.

 

成公三年,楚共王曰「鄭成公孤有德焉」,使人來與盟.  成公私與盟.

秋,成公朝晉,晉曰「鄭私平於楚」,執之.  使欒書伐鄭.

四年春,鄭患晉圍,公子如乃立成公庶兄繻為君.

其四月,晉聞鄭立君,乃歸成公.  鄭人聞成公歸,亦殺君繻,迎成公.  晉兵去.

十年,背晉盟,盟於楚.  晉厲公怒,發兵伐鄭.  楚共王救鄭.

晉楚戰鄢陵,楚兵敗,晉射傷楚共王目,俱罷而去.

十三年,晉悼公伐鄭,兵於洧上.  鄭城守,晉亦去.

十四年,成公卒,子惲立.  是為釐公.

[성공 3년, 초공왕(楚共王)이 말하기를 : “내가 정성공(鄭成公)에게 은혜를 입었다.”라고 하고,

사람을 보내와 성공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정성공이 은밀히 초공왕과 조약을 체결했다.

가을에 성공이 진(晉)나라 왕을 조회했는데,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 “정나라는 몰래 초나라와 강화를 맺지 않았소!”라고 하면서, 그를 체포했다. 
그리고는 난서(欒書)로 하여금 정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4년 봄, 정나라에서 진(晉)나라 군대의 포위를 걱정하자,

공자 여(如)가 성공의 배다른 형 희수(姬繻)를 옹립해 왕이 되게 했다.

이해 4월, 진(晉)나라 왕이 정나라가 새로운 왕을 옹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공을 석방해 돌려보냈다.
정나라 사람들은 성공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희수를 살해하고 성공을 영접해서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자,

진나라 군대는 비로소 철수했다.
10년, 정나라는 진(晉)나라와 수립한 맹약을 위반하고, 초나라와 결맹했다.

진려공(晉厲公)이 진노해, 군대를 파견해 정나라를 공격했다. 초공왕이 군사를 파견해 정나라를 구했다.

진, 초 양군이 언릉(鄢陵)에서 교전했는데, 초나라 군대가 대패했다.
진나라 병사는 또 초공왕의 눈에 화살을 쏘아 상처를 입혔다. 곧 쌍방이 철수했다.
13년, 진도공(晉悼公)이 정나라를 공격해, 군대를 유수(洧水)에 주둔시켰다.

정나라가 성 안에서 방어만 하자, 진나라 군대도 철수했다.
14년, 성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희운(姬惲)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희공(釐公)이다.]

 

釐公五年,鄭相子駟朝釐公,釐公不禮.  子駟怒,使廚人藥殺釐公,赴諸侯曰「釐公暴病卒」.

立釐公子嘉,嘉時年五歲,是為簡公.

[희공 5년, 정나라 재상 자사(子駟)가 희공을 조회했는데, 희공이 예로써 대우하지 않았다.
자사가 화가 나서 요리사를 시켜 독약으로 희공을 살해하고,

제후들에게 부고를 띄워 “희공께서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희공의 아들 희가(姬嘉)를 옹립하니, 이때 희가의 나이 겨우 5세였다. 그가 곧 간공(簡公)이다.]

 

簡公元年,諸公子謀欲誅相子駟,子駟覺之,反盡誅諸公子.

二年,晉伐鄭,鄭與盟,晉去.  冬,又與楚盟. 子駟畏誅,故兩親晉、楚.

三年,相子駟欲自立為君,公子子孔使尉止殺相子駟而代之.  子孔又欲自立.

子產曰:「子駟為不可,誅之,今又效之,是亂無時息也.」於是子孔從之而相鄭簡公.

四年,晉怒鄭與楚盟,伐鄭,鄭與盟.  楚共王救鄭,敗晉兵.  簡公欲與晉平,楚又囚鄭使者.

[간공 원년, 여러 공자가 모의해 재상 자사를 죽이려고 했는데,

자사가 이 일을 미리 알고서 오히려 여러 공자들을 모두 살해했다.
2년,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정나라가 진나라와 맹약을 맺자, 진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겨울에 정나라는 또 초나라와 조약을 체결했다.

자사는 피살될까 두려워해, 진나라와 초나라 양국과 서로 가깝게 지냈다.
3년, 승상 자사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자, 공자 자공(子孔)이 위지(尉止)로 하여금 자사를 살해하게 하고

그를 승상에 임명했다. 자공이 또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자,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 “자사가 이렇게 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신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또 그를 본받으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어지러움은 끝날 날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공은 자산의 말을 듣고 정간공의 재상이 되었다.
4년, 진(晉)나라는 정나라가 초나라와 동맹을 맺은 것에 격노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는 또 진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초공왕이 정나라에 구원병을 보내 진나라 병사들을 물리쳤다.

정간공이 진나라와 조약을 맺으려 하자, 초나라는 또 정나라의 사신을 구금했다.]

 

十二年,簡公怒相子孔專國權,誅之,而以子產為卿.

十九年,簡公如晉請衛君還,而封子產以六邑.  子產讓,受其三邑.

二十二年,吳使延陵季子於鄭,見子產如舊交,

謂子產曰:「鄭之執政者侈, 難將至, 政將及子. 子為政, 必以禮;不然,鄭將敗.」子產厚遇季子.

二十三年,諸公子爭寵相殺,又欲殺子產.

公子或諫曰:「子產仁人,鄭所以存者子產也,勿殺!」乃止.

[간공 12년, 간공이 재상 자공이 국가의 전권을 휘두르는 데 분노해, 그를 죽이고 자산을 대신(大臣)에 임명했다.
19년, 간공은 진(晉)나라로 가서 위(衛)나라 왕을 돌려보내 주도록 요청하고, 여섯 읍(邑)을 자산에게 봉지로 주었다.

자산은 사양하고, 세 읍만 받아들였다.
22년, 오(吳)나라는 연릉(延陵) 계자(季子)를 정나라에 파견했다. 계자는 자산을 만났는데,

마치 옛 친구를 만나는 것같이 하면서  자산에게 말하기를 : “ 정나라의 집정자는 방종 무례해,

곧 큰 난리가 닥칠 것이고, 정권은 장차 당신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정권을 잡는다면

반드시 예법에 따를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나라는 장차 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자산은 계자를 극진히 대접했다.
23년, 여러 공자들이 총애를 얻으려고 서로 살해했고, 또 자산도 죽이려고 했다.
공자 중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 “자산은 인덕이 있는 사람이고, 정나라가 생존하려면 자산이 있어야 하니

죽이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그를 죽이지 않았다.]

 

二十五年,鄭使子產於晉,問平公疾。平公曰:「卜而曰實沈、臺駘為祟,史官莫知,敢問?」

對曰:「高辛氏有二子,長曰閼伯,季曰實沈,居曠林,不相能也,日操干戈以相征伐.

后帝弗臧,遷閼伯于商丘,主辰,商人是因,故辰為商星. 遷實沈于大夏,主參,唐人是因,

服事夏、商, 其季世曰唐叔虞.  當武王邑姜方娠大叔,夢帝謂己:『余命而子曰虞,乃與之唐,

屬之參而蕃育其子孫.』及生有文在其掌曰『虞』,遂以命之.  及成王滅唐而國大叔焉.

故參為晉星.  由是觀之,則實沈,參神也.  昔金天氏有裔子曰昧,為玄冥師,生允格、臺駘.

臺駘能業其官,宣汾、洮,障大澤,以處太原.  帝用嘉之,國之汾川.  沈、姒、蓐、黃實守其祀.

今晉主汾川而滅之.  由是觀之,則臺駘,汾、洮神也.  然是二者不害君身.

山川之神, 則水旱之菑禜之;日月星辰之神, 則雪霜風雨不時禜之;若君疾, 飲食哀樂女色所生也.」

平公及叔向曰:「善,博物君子也!」厚為之禮於子產.

[간공 25년, 정나라는 자산을 진(晉)나라에 보내어 진평공(晉平公)의 병을 위문했다.
평공이 묻기를 : “점(占)에 실침(實沈), 대태(臺駘)가 이상하게 나왔는데, 사관도 그들의 내력을 알지 못하는데,

당신은 그들이 무슨 신(神)인지 아시오?”라고 하자.
자산이 대답하기를 : “고신씨(高辛氏)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알백(閼伯)이고,

은아들이 실침(實沈)이었습니다. 그들은 깊은 숲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무기를 들고 서로 공격했습니다. 요(堯)임금은 그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알백을 상구(商丘)로 옮겨 신성(辰星)에 제사 지내도록 했습니다.

상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계승해 왔기 때문에, 신성을 상성(商星)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또 실침을 대하(大夏)로 옮겨 삼성(參星)에 제사 지내도록 했습니다. 당(唐)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계승하고,

하(夏)나라와 상(商)나라를 섬겨왔습니다. 그 말대(末代)에는 당숙우(唐叔虞)라고 불렀습니다.
주무왕의 읍강(邑姜)이 대숙(大叔)을 임신했을 때, 꿈에 천제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 ‘내가 너에게 아들을 줄 테니

우(虞)라고 이름짓고, 그에게 당나라를 주어 삼성에 제사 지내도록 하면, 그의 자손은 번성하리라’라고 했다 합니다.

대숙을 낳자, 손바닥에 무늬가 있었는데 ‘우(虞)’자와 같아 곧 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후 주 성왕이 당나라를 멸하고, 대숙에게 그곳을 봉지로 주었기 때문에 삼성을 진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실침은 곧 삼성의 신입니다. 또 옛날에 금천씨가 있었는데, 그 후예 중에 매(昧)가 있었습니다.

그는 현명(玄冥)의 우두머리였으며, 윤격(允格)과 대태(臺駘)를 낳았습니다.
대태는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아 분수와 조수를 통하게 하고, 대택의 제방을 개수하고 태원(太原)에서 살았습니다.
전욱(顓頊)이 그를 칭찬해 그에게 분수 유역에 봉지를 주고, 심(沈), 사(姒), 욕(蓐), 황(黃)의 네 국가에서

그의 제사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진(晉)나라가 분수 유역을 통치하면서 이러한 나라들을 없애버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태는 분수, 조수의 신입니다. 그러나 이 두 신은 국왕을 해칠 수 없습니다.

산천의 신령에게는 홍수나 가뭄의 재해를 만나면 그들에게 제사 지내 재해를 막아줄 것을 부탁하면 되고,
일월성수(日月星宿)의 신령에게는 풍우상설(風雨霜雪)이 제때에 내리지 않으면 그들에게 제사 지내

재난을 막아줄 것을 부탁하면 되는 것입니다.

국왕의 질병은 음식, 애악(哀樂), 여색(女色)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평공과 숙향(叔嚮)이 말하기를 : “잘 들었소. 정말 지식이 풍부하신 군자이시구려.”라고 하며,

풍부한 예물을 자산에게 선물했다.]

 

二十七年夏,鄭簡公朝晉.  冬,畏楚靈王之彊,又朝楚,子產從.

十八年,鄭君病,使子產會諸侯,與楚靈王盟於申,誅齊慶封.

三十六年,簡公卒,子定公寧立.  秋,定公朝晉昭公.

[간공 27년 여름, 정간공이 진(晉)나라 왕을 조회했다.

겨울에, 정간공은 초영왕(楚靈王)의 강대함을 두려워해, 또 초나라 왕을 조회했다. 이때 자산도 수행했다.
28년, 정간공이 병이 나자, 자산을 파견해 제후들과 회합하고, 초영공과 신(申)에서 동맹을 맺었다.

초나라 왕은 제나라의 대부 경봉(慶封)을 살해했다.
36년, 정간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정공(定公) 희녕(姬寧)이 왕위를 이었다.

가을에 정공이 진소공(晉昭公)을 조회했다.]

 

定公元年,楚公子棄疾弒其君靈王而自立,為平王.  欲行德諸侯.  歸靈王所侵鄭地于鄭.

四年,晉昭公卒,其六卿彊,公室卑.  子產謂韓宣子曰:「為政必以德,毋忘所以立.」

六年,鄭火,公欲禳之. 子產曰:「不如修德.」

八年,楚太子建來奔.

十年,太子建與晉謀襲鄭.  鄭殺建,建子勝奔吳.

十一年,定公如晉.  晉與鄭謀,誅周亂臣,入敬王于周.

十三年,定公卒,子獻公蠆立.

獻公十三年卒,子聲公勝立.  當是時,晉六卿彊,侵奪鄭,鄭遂弱.

[정공 원년,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그의 왕 영공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제후들에게 인덕을 베풀 생각으로, 영공이 점령한 정나라의 토지를 정나라에 되돌려주었다.
4년, 진소공이 세상을 떠나자, 진(晉)나라 육경(六卿)의 세력이 강대해지고 국가 권력은 쇠퇴했다.
자산이 한선자(韓宣子)에게 말하기를 : “정권을 잡으면 반드시 인덕에 의해서 다스려야 하오.

정권이 무엇에 의해서 공고해지는지를 잊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다.
6년, 정나라에 화재가 발생하자, 정공은 재난을 막아달라고 신에게 제사 지냈다.

자산은 말하기를 : “ 덕을 닦는 것이 더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8년, 초나라 태자 건(建)이 정나라로 도망쳐왔다.
10년, 태자 건이 진(晉)나라와 모의해 정나라를 습격했다. 정나라에서 태자 건을 살해하자,

건의 아들 승(勝)은 오(吳)나라로 도망했다.
11년, 정정공이 진(晉)나라로 갔다. 진나라는 정나라와 일을 꾸며, 주 왕실의 난신(亂臣)들을 죽이고,

주경왕(周敬王)을 성주(成周)로 되돌려 보냈다.
13년, 정정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헌공(獻公) 희채(姬蠆)가 왕위를 계승했다.

헌공이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성공(聲公) 희승(姬勝)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진(晉)나라의 육경이 강대해져 정나라의 영토를 침범하자, 정나라는 쇠약해졌다.]

 

聲公五年,鄭相子產卒,鄭人皆哭泣,悲之如亡親戚.

子產者,鄭成公少子也.  為人仁愛人,事君忠厚.

孔子嘗過鄭,與子產如兄弟云.  及聞子產死,孔子為泣曰:「古之遺愛也!」

八年,晉范、中行氏反晉,告急於鄭,鄭救之.  晉伐鄭,敗鄭軍於鐵.

十四年,宋景公滅曹.

二十年,齊田常弒其君簡公,而常相於齊.

二十二年,楚惠王滅陳.  孔子卒.

三十六年,晉知伯伐鄭,取九邑.

三十七年,聲公卒,子哀公易立.

[성공 5년, 정나라 재상 자산이 세상을 떠나자, 정나라 백성들은 모두 통곡했고, 마치 친척을  잃은 듯이 하였다.

자산은 정성공(鄭成公)의 작은아들이었다. 그는 인자했고 백성을 사랑했다. 또 충성심과 진실로 국왕을 모셨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정나라를 지난 적이 있었는데, 자산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공자는 자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

“그는 고인(古人)의 유풍(遺風)을 이어 내려와 백성을 사랑했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8년, 진(晉)나라의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진나라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정나라는 그들을 구원했다.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해 철구(鐵丘)에서 정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14년, 송경공(宋景公)이 조(曹)나라를 멸망시켰다.
20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국왕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22년, 초혜왕(楚惠王)이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났다.
36년, 진(晉)나라의 지백(知伯)이 정나라를 공격해, 9개의 성(城)을 탈취했다.
37년, 정성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애공(哀公) 희역(姬易)이 왕위에 올랐다.]

 

哀公八年,鄭人弒哀公而立聲公弟丑,是為共公.

共公三年,三晉滅知伯.

三十一年,共公卒,子幽公已立.

幽公元年,韓武子伐鄭,殺幽公.  鄭人立幽公弟駘,是為繻公.

[애공 8년, 정나라 사람이 애공을 살해하고 성공의 동생 희축(姬丑)을 옹립하니, 그가 곧 공공(共公)이다.
공공 3년, 삼진(三晉)이 지백을 멸망시켰다.
31년, 공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공(幽公) 희이(姬已)가 왕위에 올랐다.
유공 원년, 한무자(韓武子)가 정나라를 공격해, 유공을 살해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유공의 동생 희태(姬駘)를 옹립하니, 이가 곧 수공(繻公)이다.] 

 

繻公十五年,韓景侯伐鄭,取雍丘.  鄭城京.

十六年,鄭伐韓,敗韓兵於負黍.

二十年,韓、趙、魏列為諸侯.

二十三年,鄭圍韓之陽翟.

二十五年,鄭君殺其相子陽.

二十七,子陽之黨共弒繻公駘而立幽公弟乙為君,是為鄭君.

鄭君乙立二年,鄭負黍反,復歸韓.

十一年,韓伐鄭,取陽城。.

二十一年,韓哀侯滅鄭,并其國.

[수공 15년, 한경후(韓景侯)가 정나라를 공격해, 옹구(雍丘)를 탈취했다. 정나라는 경읍(京邑)에 성을 쌓았다.
16년, 정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해, 부서(負黍)에서 한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20년, 한, 위, 조 삼가가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23년, 정나라가 한나라의 양책(陽翟)을 포위하며 공격했다.
25년, 정수공이 그의 재상 자양(子陽)을 살해했다.
27년, 자양의 무리들이 공동으로 수공 희태를 살해하고, 유공의 동생 희을(姬乙)을 옹립하니,

그가 곧 정군(鄭君)이다.
정군 희을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는 해에, 정나라의 부서 지역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한나라에 귀속했다.
11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해, 양성(陽城)을 탈취했다.
21년, 한애후(韓哀侯)가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병합했다.]

 


太史公曰:

語有之,「以權利合者,權利盡而交疏」,甫瑕是也.

甫瑕雖以劫殺鄭子內厲公,厲公終背而殺之,此與晉之裏克何異?

守節如荀息,身死而不能存奚齊.  變所從來,亦多故矣!

태사공은 말한다.
“속담에 ‘권력에 의지해서 이익을 도모하면, 권세와 재물은 없어지고 서로의 관계도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보하(甫瑕)가 곧 이와 같았다. 보하는 비록 정자(鄭子)를 살해하고 정려공(鄭厲公)을 다시 옹립했지만,

려공도 끝내는 맹서를 저버리고 그를 살해했다. 이것은 진(晉)나라의 이극(里克)과 다른 점이 어디 있는가?

순식(荀息)처럼 절개를 지켜 자신을 희생했지만, 해제(奚齊)를 보전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변란이 발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이리라!”]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