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5. 韓世家

第 十五. 韓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30. 18:22

 

           史記 世家

 

      第 十五.  韓世家(한세가)

韓之先與周同姓,姓姬氏.  其後苗裔事晉,得封於韓原,曰韓武子.

武子後三世有韓厥,從封姓為韓氏.

[한(韓)나라의 조상은 주(周) 왕조와 동성인 희씨(姬氏)이다.

후에 그 후예들이 진(晉)나라를 섬겨서, 한원(韓原)에서 봉토를 받아 한무자(韓武子)라 했다.
한무자의 3대 후손 중에 한궐(韓厥)이 있었는데, 그는 봉토의 이름을 좇아서 한씨(韓氏)라 했다.]

 

韓厥,晉景公之三年,晉司寇屠岸賈將作亂,誅靈公之賊趙盾. 趙盾已死矣,欲誅其子趙朔.

韓厥止賈,賈不聽.  厥告趙朔令亡.

朔曰:「子必能不絕趙祀,死不恨矣.」韓厥許之.  及賈誅趙氏, 厥稱疾不出.

程嬰、公孫杵臼之藏趙孤趙武也, 厥知之.

[한궐은 진경공(晉景公) 3년, 진나라의 사구(司寇) 도안고(屠岸賈)가 난을 일으켜서,

진영공(晉靈公)의 적신(賊臣)인 조순(趙盾)을 죽이려고 했다.
조순이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 그의 아들 조삭(趙朔)을 죽이려 했다.

한궐이 도안고를 멈추게 했으나, 도안고가 듣지 않았다. 한궐이 조삭에게 알리어 도망치도록 했다.
조삭이 말하기를 : “그대는 분명 조(趙)나라의 사직이 끊어지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니,

내가 죽어도 여한은 없겠지요?”라고 하니, 한궐이 이를 들어 주었다.
도안고가 조삭을 죽일 때에 한궐은 아프다고 하고 나가지 않았다.

정영(程嬰), 공손저구(公孫杵臼)가 조씨 집안의 고아 조무(趙武)를 숨겨둔 것을 한궐은 알고 있었다.]

 

景公十一年,厥與郤克將兵八百乘伐齊,敗齊頃公于鞍,獲逢丑父.

於是晉作六卿,而韓厥在一卿之位,號為獻子.

晉景公十七年,病,卜大業之不遂者為祟.  韓厥稱趙成季之功,今後無祀,以感景公.

景公問曰:「尚有世乎?」厥於是言趙武,而復與故趙氏田邑,續趙氏祀.

[진경공 11년, 한궐과 극극(郤克)이 8백 승(乘)의 전차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해,

제경공(齊頃公)을 안(鞍)에서 패배시키고 봉축보(逢丑父)를 생포했다.
이때 진(晉)나라는 육경(六卿)을 두었는데, 한궐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헌자(獻子)라고 불렸다.
진경공 17년, 경공이 병에 걸려서 점을 쳐보니, 대업(大業)을 잇지 않아서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나왔다.
한궐이 조성계(趙成季)의 공을 찬양하며, 지금 제사 지낼 후사가 없음을 말하면서 경공을 감동시켰다.
경공이 묻기를 : “그에게도 아직 후손이 있는가?”라고 하니, 한궐이 이에 조무(趙武)가 있다고 말하자,
경공이 다시금 그에게 옛 조씨의 전읍(田邑)을 주어 계속 조씨의 제사를 이어가도록 했다.]

 

晉悼公之(十)[七]年,韓獻子老.  獻子卒,子宣子代.  宣字徙居州.

晉平公十四年,吳季札使晉,曰:「晉國之政卒歸於韓、魏、趙矣.」

晉頃公十二年,韓宣子與趙、魏共分祁氏、羊舌氏十縣.

晉定公十五年,宣子與趙簡子侵伐范、中行氏.  宣子卒,子貞子代立.  貞子徙居平陽.

貞子卒,子簡子代. 簡子卒,子莊子代.  莊子卒,子康子代.

康子與趙襄子、魏桓子共敗知伯,分其地,地益大,大於諸侯.  康子卒,子武子代.

武子二年,伐鄭,殺其君幽公.

十六年,武子卒,子景侯立. 

[진도공(晉悼公) 7년, 한 헌자가 은퇴했다. 헌자가 죽고, 아들 선자(宣子)가 그의 직책을 이었다.

선자는 주(州)로 옮겨 살았다.
진평공(晉平公) 14년,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말하기를 :

“진나라의 정치가 결국에는 한(韓), 위(魏), 조(趙)에 돌아갔군요.”라고 하였다.
진경공(晉頃公) 12년, 한선자(韓宣子)가 조, 위와 함께 기씨(祁氏), 양설씨(羊舌氏)의 10현을 나누어 가졌다.
진정공(晉定公) 15년, 선자와 조간자(趙簡子)가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를 공격했다.

선자가 죽고, 아들 정자(貞子)가 대를 이었다. 정자는 평양(平陽)으로 옮겨 살았다.
정자가 죽고 아들 간자(簡子)가 대를 이었다. 간자가 죽고, 아들 장자(莊子)가 대를 이었다.

장자가 죽고, 아들 강자(康子)가 대를 이었다.
강자와 조양자(趙襄子), 위환자(魏桓子)가 합동으로 지백(知伯)을 공격해 그 땅을 나누어 가졌는데,

그 땅이 너무 커서 제후들보다도 컸다.  강자가 죽고, 아들 무자(武子)가 대를 이었다.

무자 2년, 정(鄭)나라를 공격해 정유공(鄭幽公)을 죽였다.
16년, 무자가 죽고, 아들 경후(景侯)가 즉위했다.]

 

景侯虔元年,伐鄭,取雍丘.

二年,鄭敗我負黍.

六年,與趙、魏俱得列為諸侯. 

九年,鄭圍我陽翟.  景侯卒,子列侯取立.

列侯三年,聶政殺韓相俠累.

九年,秦伐我宜陽,取六邑.

十三年,列侯卒,子文侯立.  是歲魏文侯卒.

文侯二年,伐鄭,取陽城.  伐宋,到彭城,執宋君.

七年,伐齊,至桑丘.  鄭反晉.

九年,伐齊,至靈丘.

十年,文侯卒,子哀侯立.

[경후 건(虔) 원년, 정나라를 공격해 옹구(雍丘)를 탈취했다.
2년, 정나라가 한나라의 부서(負黍)를 함락시켰다.
6년, 조, 위나라와 함께 제후의 열에 들었다.
9년, 정나라가 한나라의 양책(陽翟)을 포위했다. 경후가 죽고, 아들 열후(列侯) 취(取)가 즉위했다.
열후 3년, 섭정(聶政)이 한나라의 재상 협루(俠累)를 죽였다.
9년,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의양(宜陽)을 공격해 6개 읍을 탈취했다.
13년, 열후가 죽고, 아들 문후(文侯)가 즉위했다.
문후 2년, 정나라를 공격해 양성(陽城)을 탈취했다. 송나라를 공격해 팽성에 이르러서 송나라의 군주를 잡았다.

7년, 제(齊)나라를 공격해 상구(桑丘)에까지 이르렀다. 정나라가 진(晉)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9년, 제나라를 공격해 영구(靈丘)에까지 이르렀다.
10년, 문후가 죽고, 아들 애후(哀侯)가 즉위했다.]

 

哀侯元年,與趙、魏分晉國.

二年,滅鄭,因徙都鄭.

六年,韓嚴弒其君哀侯.  而子懿侯立.

懿侯二年,魏敗我馬陵.

五年,與魏惠王會宅陽.

九年,魏敗我澮.

十二年,懿侯卒,子昭侯立.

[애후 원년, 조, 위나라와 더불어 진(晉)나라를 나누어 가졌다.
2년, 정나라를 멸하고, 정읍(鄭邑)으로 천도했다.
6년, 한엄(韓嚴)이 애후를 시해해, 아들 의후(懿侯)가 즉위했다.
의후 2년, 위나라가 마릉(馬陵)에서 한나라를 패배시켰다.
5년, 위혜왕(魏惠王)과 택양(宅陽)에서 회맹했다.
9년, 위나라가 회수(澮水)가에서 한나라를 격퇴시켰다.
12년, 의후가 죽고, 아들 소후(昭侯)가 즉위했다.]

昭侯元年,秦敗我西山.

二年,宋取我黃池.  魏取朱.

六年,伐東周,取陵觀、邢丘. 

八年,申不害相韓,修術行道,國內以治,諸侯不來侵伐.

十年,韓姬弒其君悼公.

十一年,昭侯如秦.

二十二年,申不害死.

二十四年,秦來拔我宜陽.

二十五年,旱,作高門.  屈宜臼曰:「昭侯不出此門.  何也?不時.

吾所謂時者,非時日也,人固有利不利時.  昭侯嘗利矣,不作高門.

往年秦拔宜陽,今年旱,昭侯不以此時卹民之急,而顧益奢,此謂『時絀舉贏』.」

二十六年,高門成,昭侯卒,果不出此門.  子宣惠王立.

[소후 원년, 진(秦)나라가 서산(西山) 일대에서 한나라를 함락시켰다.
2년, 송나라가 한나라의 황지(黃池)를 탈취했다. 위나라가 한나라의 주(朱)를 빼앗았다.
6년, 동주(東周)를 공격해 능관(陵觀), 형구(邢丘)를 취했다.
8년, 신불해(申不害)가 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10년, 한나라 희가 그 군주 도공을 시해했다.
11년, 소후가 진(秦)나라에 갔다.
22년, 신불해가 죽었다.
24년,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의양을 함락시켰다.
25년, 나라 안 가뭄이 들었는데 크고 높은 문을 세우기 시작했다.

굴의구(屈宜臼)가 말하기를 : “소후는 이 문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때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때라는 것은 시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본디 존재하는 이로운 때와 이롭지 못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

소후가 일찍이 이로움을 알았다면 이 문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의양을 함락시켰고, 지금은 가뭄이 들었다.
소후는 지금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더욱 사치스럽다.

이는 일러 ‘어려운 때일수록 여유 있게 행동한다’라고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26년, 고문이 완성되었고, 소후가 죽었다. 그는 끝내 이 문을 나가지 못했다. 그의 아들 선혜왕이 즉위했다.]

 

宣惠王五年,張儀相秦.

八年,魏敗我將韓舉.

十一年,君號為王.  與趙會區鼠.

十四,秦伐敗我鄢.

[선혜왕 5년,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8년, 위나라가 한나라의 장수 한거(韓擧)를 패배시켰다.
11년, 군(君)의 호칭을 왕이라 했다. 조(趙)나라와 우서(區鼠)에서 회맹했다.
14년,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언(鄢)을 함락시켰다.]

十六年,秦敗我修魚,虜得韓將鯁、申差於濁澤.  韓氏急,公仲謂韓王曰:「與國非可恃也.

今秦之欲伐楚久矣, 王不如因張儀為和於秦, 賂以一名都, 具甲, 與之南伐楚, 此以一易二之計也.」

韓王曰:「善.」乃警公仲之行,將西購於秦.  楚王聞之大恐,召陳軫告之.

陳軫曰:「秦之欲伐楚久矣, 今又得韓之名都一而具甲, 秦韓并兵而伐楚, 此秦所禱祀而求也.

今已得之矣, 楚國必伐矣.  王聽臣為之警四境之內,起師言救韓,命戰車滿道路,發信臣,

多其車, 重其幣, 使信王之救己也.  縱韓不能聽我, 韓必德王也,必不為鴈行以來,是秦韓不和也,

兵雖至,楚不大病也.  為能聽我絕和於秦,秦必大怒,以厚怨韓.  韓之南交楚,必輕秦;

輕秦,其應秦必不敬:是因秦、韓之兵而免楚國之患也.」

楚王曰:「善.」乃警四境之內,興師言救韓.  命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

謂韓王曰:「不穀國雖小,已悉發之矣.  願大國遂肆志於秦,不穀將以楚殉韓.」

韓王聞之大說,乃止公仲之行.

公仲曰:「不可.  夫以實伐我者秦也,以虛名救我者楚也.  王恃楚之虛名,而輕絕彊秦之敵,

王必為天下大笑.  且楚韓非兄弟之國也,又非素約而謀伐秦也.  已有伐形,因發兵言救韓,

此必陳軫之謀也.  且王已使人報於秦矣,今不行,是欺秦也. 夫輕欺彊秦而信楚之謀臣,

恐王必悔之.」韓王不聽,遂絕於秦.  秦因大怒,益甲伐韓,大戰,楚救不至韓.

[선혜왕 16년, 진나라가 수어에서 한나라 군을 격퇴시키고, 탁택에서 한나라의 장수 신치(申差)를 포로로 잡았다.

한나라가 다급해지자, 공중치가 한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 “ 동맹국을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진(秦)나라가 초를 공격하고자 한 것이 오래인데, 왕께서는 장의로 하여금 진나라와 화친을 맺고,

진나라에 유명한 성 하나를 뇌물로 준 연후에 병력을 정비해, 진나라와 남쪽의 초나라를 공격하시면,

이것이 바로 하나로서 둘을 얻는 계략입니다.”라고 하니,

한나라 왕이 말하기를 : “좋소”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중치(公仲侈)에게 몰래 길을 떠나게 하고,

서쪽으로 진나라와 강화를 맺을 작정이었다. 초나라 왕이 이를 듣고는 몹시 화가 나서,

진진(陳軫)을 불러 이 소식을 전했다.
진진이 말하기를 :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고자 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지금 다시 한나라의 유명한 성 하나를 

얻고, 군대를 준비한다면 진과 한나라가 합동으로 초나라를 공격할 것이고, 이는 진나라가 기구하던 바입니다.

지금 이미 그들은 이것을 얻었으니, 초나라는 반드시 공격당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진나라의 말을 들어서

국경 사방에 경계를 시키고,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구원한다고 말씀하시고, 전차를 길거리에 가득 채우도록 

하시고,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는데, 수레를 몇 대 더 보내고, 그 속에 재물을 많이 넣어,

왕께서 한나라를 구원하고자 하는 뜻을 믿도록 하십시오. 한나라가 우리 뜻을 따를 수는 없다고 해도,

한나라 왕이 왕께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제나라와 합심해 공격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진, 한나라에게 서로 불화를 조장하는 것으로, 비록 공격을 받을지라도 크게 위태롭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말을 듣고서 진나라와 우호를 끊는다면, 필경 진나라가 대노해, 한나라에게 크게 원한을 가질 것입니다.

한나라는 남쪽으로 초 나라와 친교를 맺고, 진나라를 가벼이 볼 것이며, 진나라를 가벼이 보면 진나라를 대하는

태도도 불경스러울 것인즉, 이것이 바로 진, 한 양국의 모순을 이용해 우리나라가 화를 면하는 길입니다.”하였다.
초나라 왕이 말하기를 : “좋소”라고 하고, 국경 사방을 경계하게 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한나라를 구원한다고 

말했다. 전차를 온 길가에 가득 채우고, 사신을 한나라에 보냈는데, 수레를 많이 추가해 재물을 많이 보냈다.
한나라 왕에게 이르기를 : “저희 나라가 비록 작으나, 모든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뜻대로 하시면 저희는 사력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라고 하니,

한나라 왕이 이를 듣고는 크게 기뻐해 공중치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중치가 말하기를 : “안 됩니다. 실제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진나라이고, 명목상으로 우리를 돕겠다고 하는 것은

초나라입니다. 왕께서는 초나라의 헛소리에 강력한 진나라와 가벼이 절교하고 그들과 적이 된다면,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초나라와 우리는 형제 나라도 아니고,

또한 평소에 진나라를 공격할 모의를 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진과 한 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할 움직임이 있자,
군사를 출병해 한나라를 지원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필시 진진의 음모입니다.

더욱이 왕께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진나라에 알렸는데, 지금 가지 않는다면, 이는 진나라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대저 왕께서 강력한 진나라를 가벼이 속이고, 초나라의 신하 말을 믿는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나라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진나라와 절교했다. 진나라가 이 때문에 대노하여 군사를 보충해 한나라를 공격했다.
큰 전쟁이 벌어졌으나, 초나라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十九年,大破我岸門.  太子倉質於秦以和.

二十一年,與秦共攻楚,敗楚將屈丐,斬首八萬於丹陽.  是歲,宣惠王卒,太子倉立,是為襄王.

[선혜왕 19년, 진나라 군이 안문(岸門)에서 한나라 군을 대파했다. 태자 창(倉)이 인질로 잡히고 강화를 맺었다.
21년,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의 장수 굴개를 격침시키고, 단양에서 초나라 군 8만 명을 죽였다.

이해에 선혜왕이 죽고 태자 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양왕(襄王)이다.]

 

襄王四年, 與秦武王會臨晉.  其秋, 秦使甘茂攻我宜陽.

五年, 秦拔我宜陽, 斬首六萬.  秦武王卒.

六年, 秦復與我武遂.

九年,秦復取我武遂.

十年,太子嬰朝秦而歸.

十一年,秦伐我,取穰.  與秦伐楚,敗楚將唐眛.

十二年,太子嬰死.  公子咎、公子蟣蝨爭為太子.  時蟣蝨質於楚.

蘇代謂韓咎曰:「蟣蝨亡在楚,楚王欲內之甚.  今楚兵十餘萬在方城之外,

公何不令楚王筑萬室之都雍氏之旁,韓必起兵以救之,公必將矣.

公因以韓楚之兵奉蟣蝨而內之,其聽公必矣,必以楚韓封公也.」韓咎從其計.

楚圍雍氏,韓求救於秦.  秦未為發,使公孫昧入韓.  公仲曰:「子以秦為且救韓乎?」

對曰:「秦王之言曰『請道南鄭、藍田, 出兵於楚以待公』, 殆不合矣.」

公仲曰:「子以為果乎?」

對曰:「秦王必祖張儀之故智.  楚威王攻梁也, 張儀謂秦王曰:『與楚攻魏, 魏折而入於楚,

韓固其與國也, 是秦孤也.  不如出兵以到之,魏楚大戰,秦取西河之外以歸.』今其狀陽言與韓,

其實陰善楚.  公待秦而到,必輕與楚戰.  楚陰得秦之不用也, 必易與公相支也.

公戰而勝楚, 遂與公乘楚, 施三川而歸.  公戰不勝楚, 楚塞三川守之, 公不能救也.

竊為公患之. 司馬庚三反於郢,甘茂與昭魚遇於商於,其言收璽,實類有約也.」

公仲恐, 曰:「然則柰何?」

曰:「公必先韓而後秦, 先身而後張儀. , 公不如亟以國合於齊楚, 齊楚必委國於公. 

公之所惡者張儀也, 其實猶不無秦也.」於是楚解雍氏圍.

蘇代又謂秦太后弟羋戎曰:「公叔伯嬰恐秦楚之內蟣蝨也,公何不為韓求質子於楚?

楚王聽入質子於韓,則公叔伯嬰知秦楚之不以蟣蝨為事,必以韓合於秦楚.  秦楚挾韓以窘魏,

魏氏不敢合於齊,是齊孤也.  公又為秦求質子於楚,楚不聽,怨結於韓.

韓挾齊魏以圍楚,楚必重公.  公挾秦楚之重以積德於韓,公叔伯嬰必以國待公.」

於是蟣蝨竟不得歸韓. 韓立咎為太子.  齊、魏王來.

十四年,與齊、魏王共擊秦,至函谷而軍焉.

十六年,秦與我河外及武遂.  襄王卒,太子咎立,是為釐王.

[양왕 4년, 진무왕(秦武王)과 임진에서 회맹했다. 그해 가을에 진나라가 감무를 시켜서 한나라의 의양을 공격했다.
5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의양을 함락시키고, 군사 6만 명을 죽였다. 진무왕이 죽었다.
6년, 진나라가 한의 무수(武遂)를 다시 돌려주었다.
9년, 진나라가 다시 한나라의 무수를 빼앗았다.
10년, 태자 영(嬰)이 진나라에 입조(入朝)하고 돌아왔다.
11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해 양(穰)을 빼앗았다. 진나라와 함께 초 나라를 공격해,

초나라의 장수 당매(唐昧)를 격퇴시켰다.
12년, 태자 영이 죽었다. 공자 구(咎)와 공자 기슬(蟣蝨)이 서로 태자 자리를 다투었다.

이때 기슬은 초나라에 인질로 있었다.  소대(蘇代)가 한구(韓咎)에게 이르기를 :

“ 기슬이 초 나라에 잡혀 있는데, 초나라 왕은 그를 돌려보내고 싶어합니다. 지금 초나라 군사 10만여 명이

방성(方城) 밖에 있는데, 당신은 왜 초나라 왕에게 옹지(雍氏) 옆으로 만호의 성읍을 만들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나라가 분명히 군사를 일으켜서 옹지를 구원할 것이고, 그대는 장수가 될 것입니다.

그대는 한과 초 양국의 군대를 이용해 기슬을 도와 그를 데려오면, 그가 필경 당신의 말을 들을 것이므로,

초와 한 나라 경계의 땅을 당신에게 봉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구가 그 계획에 따랐다.
초나라가 옹지를 포위하고, 한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도와 출병하지 않고,

공손매를 시켜 한나라로 가게 했다.  공중치가 묻기를 : “그대는 진나라가 한나라를 도와줄 것 같습니까?”하니,

소대가 대답하기를 : “진나라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정, 남전을 지나서 초나라로 출병해 그대를 기다리겠다.’

라고 하셨으니, 단지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중치가 묻기를 : “그대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니,
소대가 대답하기를 : “진나라 왕은 반드시 장의(張儀)의 낡은 수법을 쓸 것입니다.

초위왕(楚威王)이 양(梁)을 공격할 때, 장의가 진나라 왕에게 아뢰기를 ‘초나라와 함께 위(魏)나라를 공격하면

위나라는 꺾여서 초나라에 항복할 것이고, 한나라는 본디 그의 동맹이니, 진나라만 고립될 것입니다.

출병해 그들을 기만시키면 위와 초나라가 크게 싸울 것이고, 진나라는 이를 이용해 서하 밖의 땅을 탈취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황이 바로 진나라가 거짓으로 한나라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암암리에 초나라와 우호를 다질 것입니다. 그대는 진나라 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초나라와 가볍게 교전하십시오. 초나라는 암암리에 진나라가 그대를 위해 출병하지 않을 것을 알고,

가볍게 그대의 군대를 대할 것입니다. 공이 초나라에 승리하면, 진나라는 공과 함께 초나라를 통제할 것이고,
삼천(三川) 지역까지 위세를 떨친 후에 돌아오십시오. 공이 전쟁에서 초나라에 승리하지 못하면,

초나라는 삼천 지역을 봉쇄해 지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대를 도울 방도가 없습니다.

저는 사력을 다해 그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마경(司馬庚)이 세 차례에 걸쳐서 영(郢)을 드나들고,

감무와 소어가 상(商), 오(於)에서 만나 말로는 군부(軍符)를 거두어들여 초나라의 한나라에 대한 공격을 금지시키기

위함이라지만, 실제로는 다른 약속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중치가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소대가 말하기를 : “ 공께서는 반드시 한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진나라를 뒤에 생각해야 하며,

본인의 책략을 먼저 고려한 연후에 장의의 권모술수를 생각하십시오.

공께서는 즉각 제, 초와 연합하면 제와 초는 분명히 먼저 공에게 국사를 맡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초나라는 옹지에 대한 포위망을 풀었다.
소대는 또 진태후(秦太后)의 아우 미융(羋戎)에게 말하기를 : “ 공숙백영(公叔伯嬰)은 진, 초 양국이 기슬의 귀환을

지지할까 두려워하는데, 공께서는 어찌해 한나라를 대신해 초나라에 질자(質子) 기슬을 귀환시키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초나라 왕이 기슬을 한나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공숙 백영은 진, 초가 기슬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으므로, 반드시 한이 진, 초와 연합하게 할 

것입니다. 진, 초가 한나라를 끼고서 위나라를 궁지에 몰면, 위나라는 제나라와 감히 연합하지 못할 것이고,

이에 제나라는 고립될 것입니다. 공께서는 또다시 진나라를 위해 초나라에 기슬의 귀환을 청하고,

초나라가 승낙하지 않으면, 한나라의 원한을 사는 것이 됩니다. 한나라가 제, 위를 끼고서 초 나라를 포위하면,

초나라는 반드시 공을 중시할 것입니다. 공께서 진, 초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한나라에 덕을 쌓는다면,

공숙 백영은 반드시 공에 의지해 국정을 운영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했지만 기슬은 끝내 한나라로 귀국하지 못했다. 한나라는 구(咎)를 태자로 삼았다.

제와 위 나라 왕이 한나라를 방문했다.
14년, 한나라 왕과 제와 위나라의 왕이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러서 병력을 주둔시켰다.
16년, 진나라가 한나라에 황하 이남 지역과 무수를 주었다.

양왕이 죽고, 태자 구(咎)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희왕(釐王)이다.]

 

釐王三年,使公孫喜率周、魏攻秦.  秦敗我二十四萬,虜喜伊闕.

五年,秦拔我宛.

六年,與秦武遂地二百里.

十年,秦敗我師于夏山.

十二年,與秦昭王會西周而佐秦攻齊.  齊敗,湣王出亡.

十四年,與秦會兩周閒.

二十一年,使暴捐救魏,為秦所敗,捐走開封.

二十三年,趙、魏攻我華陽.  韓告急於秦,秦不救.

韓相國謂陳筮曰:「事急,願公雖病,為一宿之行.」陳筮見穰侯.

穰侯曰:「事急乎?故使公來.」 陳筮曰:「未急也.」

穰侯怒曰:「是可以為公之主使乎?夫冠蓋相望,告敝邑甚急,公來言未急,何也?」

陳筮曰:「彼韓急則將變而佗從,以未急,故復來耳.」

穰侯曰:「公無見王,請今發兵救韓.」八日而至,敗趙、魏於華陽之下.

是歲,釐王卒,子桓惠王立.

[희왕 3년, 공손희(公孫喜)로 하여금 주(周), 위(魏)나라 군을 이끌고서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가 한나라 군 24만 명을 격퇴시켰고, 이궐산(伊闕山)에서 희를 포로로 잡았다.
5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완성(宛城)을 함락시켰다.
6년, 진나라에 무수 지역 2백 리 땅을 떼어주었다. 10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의 군대를 하산(夏山)에서 격파했다.
12년, 진소왕과 서주에서 회맹해, 진나라를 도와서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가 패배하자 제 민왕이 도망쳤다.
14년, 진나라와 동주, 서주 사이에서 회맹했다.
21년, 폭원을 시켜서 위나라를 구원하게 했으나, 진나라에 패배해, 원이 개봉(開封)으로 도망쳤다.
23년에는 조와 위나라가 한나라의 화양산을 공격했다. 한나라가 급히 진나라에 알렸으나,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한나라의 상국이 진서(陳筮)에게 말하기를 : “ 일이 급하니, 공이 비록 병중이나,

밤을 새워서 진나라에 한번 다녀오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진서가 양후(穰侯)를 만났다. 

양후가 말하기를 : “ 일이 급합니까 ? 그래서 그대가 온 것이겠지요? ”라고 하니,
진서가 말하기를 : “ 급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양후가 화가 나서 말하기를  : “ 그대가 이와 같이 말하면서 그대 나라 왕의 사신이라고 할 수 있소?

무릇 한나라의 사신은 왕래가 빈번한 법인데, 이는 우리나라에 다급한 상황을 알리려고 하기 때문이오.

그대가 와서 급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요?”라고 하니,
진서가 말하기를 :  “한나라가 다급해지면,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상황이 급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다시 한 번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후가 말하기를 : “그대는 진나라 왕을 만날 필요가 없소. 지금 출병해 한나라를 구원하겠소.”라고 하고,
8일 만에 진나라 군이 와서 조, 위나라의 군대를 화양산 아래에서 격퇴시켰다.

이해에 희왕이 죽고, 아들 환혜왕(桓惠王)이 즉위했다.]

 

桓惠王元年,伐燕.

九年,秦拔我陘,城汾旁.

十年,秦擊我於太行,我上黨郡守以上黨郡降趙.

十四年,秦拔趙上黨,殺馬服子卒四十餘萬於長平.

十七年,秦拔我陽城、負黍.

二十二年,秦昭王卒.

二十四年,秦拔我城皋、滎陽.

二十六年,秦悉拔我上黨.

二十九年,秦拔我十三城.

三十四年,桓惠王卒,子王安立.

王安五年,秦攻韓,韓急,使韓非使秦,秦留非,因殺之.

九年,秦虜王安,盡入其地,為潁州郡. 韓遂亡.

[환혜왕 원년, 연(燕)나라를 공격했다.
9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형(陘) 땅을 빼앗았고, 분수(汾水)가에 성을 세웠다.
10년, 진나라가 태행산에서 한나라 군을 공격해, 한나라의 상당군의 군수가 상당군을 바치고 조나라에 투항했다.
14년, 진나라가 상당을 빼앗았고, 장평(長平)에서 마복군(馬服君)의 아들의 졸병 40만여 명을 죽였다.
17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양성, 부서를 함락시켰다.
22년, 진 소왕이 죽었다. 24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의 성고(城皐), 형양(滎陽)을 함락시켰다.
26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군을 완전히 차지했다.
29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13성을 함락시켰다.
34년에는 환혜왕이 죽고, 아들 왕안(王安)이 즉위했다.
왕안 5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해, 한나라가 다급해지자, 한비(韓非)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고,

진나라 왕은 비를 억류시키고는 기회를 틈타서 그를 죽였다.
9년, 진나라가 안왕을 포로로 해, 그 땅 전체를 거두어들이고, 영천(穎川)이라 했다. 한나라는 이로써 멸망했다.]

 

太史公曰:

韓厥之感晉景公,紹趙孤之子武,以成程嬰、公孫杵臼之義,此天下之陰德也.

韓氏之功,於晉未睹其大者也.  然與趙、魏終為諸侯十餘世,宜乎哉!

[태사공은 말한다.
“한궐(韓厥)이 진경공(晉景公)의 마음을 움직여, 조씨의 고아 조무(趙武)로 하여금 조씨의 대를 잇게 했다.
이로써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천하의 음덕(陰德)이다.
한씨의 공로가 진(晉)나라에는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으나 한씨가 조씨, 위씨와 더불어서

10여 대 동안 제후를 지낸 것은 마땅하도다!”]

 

 

※ 한조(韓朝) 역대 제후, 왕 연표

 

 

경후(景侯)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열후(烈侯)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87년)
문후(文侯) (기원전 387년 - 기원전 377년)
애후(哀侯) (기원전 377년 - 기원전 371년)
장후(壯侯) (기원전 371년 - 기원전 359년)
소후(昭侯) (기원전 359년 - 기원전 333년)
선혜왕(宣惠王) (기원전 333년 - 기원전 312년)
양왕(襄王) (기원전 312년 - 기원전 296년)
희왕(釐王) (기원전 296년 - 기원전 273년)
환혜왕(桓惠王)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9년)
왕안(王安) (기원전 239년 - 기원전 230년)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