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8. 陳涉世家

第 十八. 陳涉世家

덕치/이두진 2021. 7. 1. 17:06

 

          史記 世家

 

    第 十八.  陳涉世家(진섭세가)

 


陳勝者,陽城人也,字涉.  吳廣者,陽夏人也,字叔.

陳涉少時,嘗與人傭耕,輟耕之壟上,悵恨久之,曰:「茍富貴,無相忘.」

庸者笑而應曰:「若為庸耕,何富貴也?」陳涉太息曰:「嗟乎,燕雀安知鴻鵠之志哉!」

[진승(陳勝)은 양성(陽城) 사람으로 자(字)는 섭(涉)이다. 오광(吳廣)은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진섭(陳涉)은 젊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머슴살이를 했다. 밭갈이를 멈추고 밭두둑에서 일손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는데, 그는 불평과 원망을 하며 말하기를 : “만약 부귀하게 된다면 모두 서로를 잊지 맙시다”하였다.

머슴들은 비웃으며 말하기를 : “당신은 고용당해 머슴살이를 하는 주제에 어떻게 부귀를 누릴 수 있겠소?”하자,

진섭은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 “오호! 참새와 제비가 어찌 큰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라고 하였다.]

二世元年七月,發閭左適戍漁陽,九百人屯大澤鄉.  陳勝、吳廣皆次當行,為屯長.

會天大雨,道不通,度已失期.

失期,法皆斬.  陳勝、吳廣乃謀曰:「今亡亦死,舉大計亦死,等死,死國可乎?」

陳勝曰:「天下苦秦久矣.  吾聞二世少子也,不當立,當立者乃公子扶蘇.

扶蘇以數諫故,上使外將兵.  今或聞無罪,二世殺之.  百姓多聞其賢,未知其死也.

項燕為楚將,數有功,愛士卒,楚人憐之.  或以為死,或以為亡.

今誠以吾眾詐自稱公子扶蘇、項燕,為天下唱,宜多應者.」吳廣以為然.

[진(秦) 2세 황제 원년 7월, 조정에서는 마을 어구의 문인 여문(閭門) 왼쪽에 거주하는 빈민들을

변경 근처인 어양(漁陽)으로 옮겨 가도록 명령했다. 9백여 명이 가는 도중 대택향(大澤鄕)에 주둔했다.

진승과 오광은 모두 이 행렬 가운데 끼어들어 둔장(屯長)을 맡았다.

이때 마침 천하에 큰비가 내려 도로가 불통되었으므로 기한 내에 도착하기란 이미 어려웠다.

만약 기한을 어기면 모두 법률에 의거해 참수를 당해야만 했다. 이에 진승과 오광은 서로 상의하기를 :

“지금 도망을 해도 죽고 의거(義擧)를 일으켜도 또한 죽는다.

이왕 똑같이 죽을 바에는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진승이 호응하며 말하기를 : “천하의 사람들이 진나라 통치의 가혹함에 고통받은 것이 오래되었다.

나는 2세 황제가 막내아들이므로 제위를 계승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제위를 계승해야 하는 것은 장자인 부소(扶蘇)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부소가 여러 차례 간언을 했다는 까닭으로 진시황제(秦始皇帝)는 그가 병사를 이끌고 외지로 나가도록 했다.

지금 사람들이 그는 죄가 없다고 하자 2세(二世)가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

백성들은 모두 부소가 어질고 재능이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가 이미 죽었는지를 또 모른다.

항연은 초나라의 장군으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며 병사들을 사랑해 초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 받든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외지로 도망을 가서 숨었다고도 한다.

지금 만약 우리가 부소와 항연을 가장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앞장선다면

당연히 호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광은 옳다고 생각했다.]

 

乃行卜. 卜者知其指意,曰:「足下事皆成,有功.  然足下卜之鬼乎!」

陳勝、吳廣喜,念鬼,曰:「此教我先威眾耳.」

乃丹書帛曰「陳勝王」,置人所罾魚腹中.  卒買魚烹食,得魚腹中書,固以怪之矣.

又彊令吳廣之次所旁叢祠中,夜篝火,狐鳴呼曰「大楚興,陳勝王」.

卒皆夜驚恐.  旦日,卒中往往語,皆指目陳勝.

[이리하여 곧 점을 치러 갔는데, 점쟁이는 그들이 온 의도를 알고는 말하기를 : “당신네들의 일이 성공한다면

커다란 공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귀신에게 점을 쳐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승과 오광은 매우 기뻐했으며, 마음속으로 귀신에게 점칠 일을 모두 생각해 두고는 말하기를 :

“이것은 우리들이 먼저 귀신인 척해서 사람들에게 위신을 얻으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비단 위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 세 글자를 써서 몰래 남들이 그물로 잡아온 물고기의

뱃속에 쑤셔 넣었으며, 수졸(戍卒)들이 이 물고기를 사서 먹은 후 물고기 뱃속에서 비단에 쓴 글을 보게 했는데,

이것은 이미 기괴(奇怪)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진승은 또 오광에게 몰래 주둔지의 나무숲에 있는 신사(神祠)에 가서 야밤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여우로 위장을 해 큰소리로 “대흥초(大興楚), 진승왕(陳勝王)”을 외치도록 했다.

수졸들은 모두 심야에 무서워서 불안해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수졸들은 도처에서 이 일을 이야기했는데,

모두 진승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吳廣素愛人,士卒多為用者.  將尉醉,廣故數言欲亡,忿恚尉,令辱之,以激怒其眾. 尉果笞廣.

尉劍挺,廣起,奪而殺尉.  陳勝佐之,并殺兩尉.

召令徒屬曰:「公等遇雨,皆已失期,失期當斬. 藉弟令毋斬,而戍死者固十六七.

且壯士不死即已,死即舉大名耳,王侯將相寧有種乎!」

徒屬皆曰:「敬受命.」乃詐稱公子扶蘇、項燕,從民欲也.  袒右,稱大楚.  為壇而盟,祭以尉首.

陳勝自立為將軍,吳廣為都尉.

[오광은 평소에 사람들을 자상하게 돌봐주었으므로 수졸들 대부분은 기꺼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수졸을 인솔하는 장위가 술에 취하자 오광은 일부러 여러 차례 도망가자고 떠벌리어 장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장위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광 자신을 모욕하게 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과연 장위는 채찍으로 오광을 때렸다. 장위가 검을 빼어들려고 하자, 

오광은 일어나서 검을 빼앗고 장위를 살해했다. 진승 또한 오광을 거들어주었으며 함께 두 명의 장위를 살해했다.

아울러 부하들을 불러 모아 호소하기를 : “너희들은 비를 만났으므로 모두 기한을 어기게 되었다. 

기한을 어기면 마땅히 모두 죽음을 당해야 한다.

만약 죽지 않는다고 해도 변경을 지키다 죽는 사람이 열에 6~7명은 된다. 하물며 장사(壯士)는 죽지 않을 뿐인데,

만약 죽으려면 즉 세상에 커다란 명성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왕후장상은 어디 하늘에서 나는 것이냐?”라고 하자,
부하들은 모두 말하기를 : “삼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곧 부소와 항연을 사칭해 의거를 일으켜 백성들의 욕구를 따랐다.

수졸들은 모두 오른쪽 팔을 드러내어 ‘대초(大楚)’라고 칭했다. 그들은 단을 높이 쌓고 맹서를 했는데,

장위들의 머리를 제물로 사용했다. 진승은 스스로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都尉)가 되었다.]

 

攻大澤鄉,收而攻蘄.  蘄下,乃令符離人葛嬰將兵徇蘄以東.

攻铚、酂、苦、柘、譙皆下之.  行收兵. 比至陳,車六七百乘,騎千餘,卒數萬人.

攻陳,陳守令皆不在,獨守丞與戰譙門中.  弗勝,守丞死,乃入據陳.

數日,號令召三老、豪傑與皆來會計事.

三老、豪傑皆曰:「將軍身被堅執銳,伐無道,誅暴秦,復立楚國之社稷,功宜為王.」

陳涉乃立為王,號為張楚.

[그들은 대택향을 공격했으며, 병사를 모집하고 군비를 확장해 기현(蘄縣)으로 진공했다.
기현을 함락시킨 후 부리(符離) 사람 갈영(葛嬰)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기현 동쪽 지역을 공략하게 했다.

그들은 질(銍), 찬(酇), 고(苦), 자(柘), 초(譙)등의 성을 공격해 모두 함락시켰다.

공격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병사들을 모집하고 군비를 확장했다. 진현((陳縣))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미 전차(戰車)가 6백~7백 량(輛), 기병(騎兵)이 1천여 명, 병사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진현(陳縣)을 공격했을 때 수령(守令)은 모두 있지 않았으며, 

단지 부수령인 수승(守丞)만이 홀로 적의 동정을 살피는 초문(譙門)에서 저항을 했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다. 

수승은 전사했으며, 그들은 마침내 입성해 진현을 점령했다.

며칠이 지나 진승은 향리의 삼로, 지방호걸(地方豪杰)을 모두 초대하라고 명해 놓고 회의를 열었다.

삼로와 향신들은 모두 말하기를 : “장군께서는 몸에는 갑옷을 걸치시고 손에는 예리한 무기를 드시고서

무도(無道)를 토벌(討伐)하고 폭진(暴秦)을 제거하시어 초나라의 사직(社稷)을 중건하시려고 하시니,

공을 논한다면 칭왕(稱王)하셔야 마땅합니다.”라고 하자. 이리하여 진섭은 왕이 되었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

當此時,諸郡縣苦秦吏者,皆刑其長吏,殺之以應陳涉.  乃以吳叔為假王,監諸將以西擊滎陽.

令陳人武臣、張耳、陳餘徇趙地, 令汝陰人鄧宗徇九江郡. 當此時, 楚兵數千人為聚者, 不可勝數.

葛嬰至東城,立襄彊為楚王.  嬰後聞陳王已立,因殺襄彊,還報.  至陳,陳王誅殺葛嬰.

陳王令魏人周市北徇魏地.  吳廣圍滎陽. 李由為三川守,守滎陽,吳叔弗能下.

陳王徵國之豪傑與計,以上蔡人房君蔡賜為上柱國.

[이때에 여러 군현(郡縣)은 진나라 관리의 폭정으로 고생을 했기에 그러한 장리(長吏)를 모두 처벌했으며,

또 그들을 죽이고서 진섭(陳涉)에 호응했다. 이리하여 오숙(吳叔)을 임시 왕으로 임명했으며,

여러 장령(將領)들을 이끌고서 서쪽의 형양(滎陽)을 공격했다.

진현(陳縣) 사람 무신(武臣), 장이(張耳), 진여(陳餘)에게 조(趙)나라 땅을 공격하게 명령했으며,

여음(汝陰) 사람 등종(鄧宗)에게 구강군(九江郡)을 공격하게 명했다.

이때에 초병(楚兵) 수천 명이 일제히 모여들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갈영은 동성(東城)에 이르러 양강(襄彊)을 초왕(楚王)으로 세웠다. 갈영은 후에 진승이 이미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고 양강을 살해하고 되돌아와서 보고했다. 진현에 이르자 진왕은 즉시 갈영을 주살하였다.

진왕은 위(魏)나라 사람 주불(周市)에게 북쪽 위(魏)나라 땅을 공격하게 했고, 오광은 형양을 포위했다.

이유(李由)가 삼천(三川) 군수(郡守)에 임명되어 형양을 지켰는데, 오숙은 이곳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리하여 진왕은 국내 호걸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상의했으며,

상채(上蔡)의 사람 방군(房君)인 채사(蔡賜)를 상주국(上柱國)으로 삼았다.]

 

周文,陳之賢人也,嘗為項燕軍視日,事春申君,自言習兵,陳王與之將軍印,西擊秦.

行收兵至關,車千乘,卒數十萬,至戲,軍焉.  秦令少府章邯免酈山徒、人奴產子生,

悉發以擊楚大軍,盡敗之.  周文敗,走出關,止次曹陽二三月.

章邯追敗之,復走次澠池十餘日.  章邯擊,大破之.  周文自剄,軍遂不戰.

[주문(周文)은 진(陳)의 현인으로 일찍이 항연의 군중에서 시일(視日)을 역임했으며, 또 춘신군을 받들어 모셨다.

스스로 군사에 능통하다고 말했기에 진왕은 그에게 장군인을 수여했으며 서쪽으로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가는 도중 병마(兵馬)들을 수습해 함곡관에 이르렀는데, 그때 전차가 천 승(千乘), 병사가 수 십 만이 되었다.

희(戱)에 도달해 병사를 주둔시켰다. 진 2세는 소부(少府) 장한에게 역산에서 복역하는 형도(刑徒), 

노예의 자식들을 사면해 모두 초나라 대군을 공격하게 내보내라고 명령했으며, 이로써 초나라 군을 모두 물리쳤다.

주문은 패하자 함곡관을 도망쳐 나와서 조양(曹陽)에서 2, 3 개월 머물렀다. 장한이 추격해 그들을 대패시키자,

다시 또 퇴각해 민지(澠池)에 10여 일간 주둔했다. 장한은 그들을 공격해 대파시켰다.

주문은 자살했고 군대는 마침내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었다.]

 

武臣到邯鄲,自立為趙王,陳餘為大將軍,張耳、召騷為左右丞相.

陳王怒,捕系武臣等家室,欲誅之.

柱國曰:「秦未亡而誅趙王將相家屬,此生一秦也.  不如因而立之.」

陳王乃遣使者賀趙,而徙系武臣等家屬宮中,而封耳子張敖為成都君,趣趙兵亟入關.

[무신은 한단에 이르러 스스로 조왕이 되었으며, 진여를 대장군에, 장이와 소소(召騷)를 좌우 승상에 임명했다.

진왕은 격노하여 무신 등의 가족들을 체포해 옥에 가두었으며, 그들을 살해하려고 했다.

상주국 채사(蔡賜)가 건의하기를 : “진(秦)나라를 아직 멸하지 못했는데 조왕(趙王)과 장상의 가족들을 살해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하나의 진(秦)나라를 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니,

차라리 이 기회에 무신을 조왕으로 세우시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왕은 곧 사신을 조나라로 파견해 축하를 했으며, 감금했던 무신 등의 가족을 궁중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리고 장이의 아들 장오를 성도군에 봉했으며, 조나라 병사들이 신속하게 함곡관으로 진군하게 재촉했다.]

趙王將相相與謀曰:「王王趙,非楚意也.  楚已誅秦,必加兵於趙.

計莫如毋西兵,使使北徇燕地以自廣也.  趙南據大河,北有燕、代,楚雖勝秦,不敢制趙.

若楚不勝秦,必重趙.  趙乘秦之獘,可以得志於天下.」

趙王以為然,因不西兵,而遣故上谷卒史韓廣將兵北徇燕地.

[조왕과 장상들은 서로 계책을 논의한 후 말하기를 : “진왕이 조나라에 왕을 세운 것은 초나라의 본의가 아닙니다.

초나라는 진나라를 멸한 후 반드시 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묘책은 서쪽으로 진군하기보다는

차라리 북쪽으로 사자(使者)를 보내 연(燕)의 땅을 공략해 우리의 영토를 확충하는 것이 낫습니다.

조나라 남쪽으로는 황하(黃河)가 있고, 북쪽으로는 연(燕), 대(代)의 광대한 지역이 있으므로

초나라가 비록 진(秦)나라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감히 조나라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초 나라가 진나라를 이길 수 없다면 반드시 조나라를 중시할 것입니다.

조나라는 진나라의 쇠약함을 틈타서 천하를 얻는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왕은 옳다고 생각되었으므로 서쪽으로 출병시키지 않고 상곡(上谷)의 졸사(卒史)인 한광(韓廣)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북으로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燕故貴人豪傑謂韓廣曰:「楚已立王,趙又已立王.  燕雖小,亦萬乘之國也,願將軍立為燕王.」

韓廣曰:「廣母在趙,不可.」 燕人曰:「趙方西憂秦,南憂楚,其力不能禁我.

且以楚之彊,不敢害趙王將相之家,趙獨安敢害將軍之家!」 韓廣以為然,乃自立為燕王.

居數月,趙奉燕王母及家屬歸之燕.  當此之時,諸將之徇地者,不可勝數.

[연나라의 옛 귀족과 호걸들이 한광에게 이르기를 : “초나라도 왕을 세웠고 조나라도 왕을 세웠소.

연나라는 비록 작지만 만승병거(萬乘兵車)의 나라이므로 장군이 자립해 연나라의 왕이 되시기를 바라오.”라고 하자.

한광이 말하기를 : “나의 어머니께서 조나라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 “조나라는 바야흐로 서쪽으론 진나라를 걱정하고 있고,

남쪽으론 초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세력으로 우리들을 당해낼 수 없소이다.

하물며 초나라는 그렇게 강대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히 조왕과 장상(將相)의 가족들을 해치지 못했는데,

조나라가 단독으로 어찌 감히 장군의 가족을 해칠 수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한광은 옳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연나라 왕이 되었다. 수개월이 지나자 조나라는 연나라 왕의 모친과 가족들을 연나라로 돌려보냈다.

마침 이때에는 각지의 장군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성을 공략하는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았다.]

周市北徇地至狄,狄人田儋殺狄令,自立為齊王,以齊反擊周市.

市軍散, 還至魏地,欲立魏後故甯陵君咎為魏王.

時咎在陳王所,不得之魏.  魏地已定,欲相與立周市為魏王,周市不肯.

使者五反,陳王乃立甯陵君咎為魏王,遣之國.  周市卒為相.

[주불(周市)은 북쪽으로 진군해 적현(狄縣)에 이르렀다. 적현 사람 전담(田儋)은 적현 현령을 살해하고 자립해

제왕(齊王)이 되었으며, 제나라에서 기병해 주불을 공격했다. 주불의 군사들은 패해 뿔뿔이 흩어져

위(魏)나라의 땅으로 돌아왔으며, 위왕(魏王)의 후예 영릉군(寧陵君) 구(咎)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당시 구는 진왕(陳王)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로 갈수가 없었다.

위나라의 땅이 평정되자 사람들은 주불을 위왕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주불은 이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자(使者)가 진왕과 위나라를 다섯 차례 왕래했다. 진왕은 비로소 영릉군 구를 위왕으로 세우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를 위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주불은 마침내 승상이 되었다.]

將軍田臧等相與謀曰:「周章軍已破矣,秦兵旦暮至,我圍滎陽城弗能下,秦軍至,必大敗.

不如少遺兵, 足以守滎陽,悉精兵迎秦軍.  今假王驕,不知兵權,不可與計,非誅之,事恐敗.」

因相與矯王令以誅吳叔,獻其首於陳王.  陳王使使賜田臧楚令尹印,使為上將.

田臧乃使諸將李歸等守滎陽城,自以精兵西迎秦軍於敖倉. 與戰,田臧死,軍破.

章邯進兵擊李歸等滎陽下, 破之, 李歸等死. 陽城人鄧說將兵居郯, 章邯別將擊破之, 鄧說軍散走陳.

铚人伍徐將兵居許,章邯擊破之,伍徐軍皆散走陳.  陳王誅鄧說.

[장군 전장 등은 함께 계획을 모의하기를 : “주장(周章)의 군대는 이미 뿔뿔이 흩어졌으며, 진(秦)나라의 병사들은

조만간 당도하려 하는데 우리들은 형양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진나라 병사들이 도착하면 반드시 크게 패할 것입니다. 차라리 형양성을 포위하기에 족한 소수의 병력만을 

남겨 놓고 모든 정예 병사들을 이동시켜 진나라 군을 맞이해서 싸우는 것이 낫습니다.

현재 임시 왕 오광은 거만하고 횡포하며, 병권(兵權)을 알지 못하므로 그와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대사를 그르칠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함께 진왕(陳王)의 명령을 위조해 오숙을 주살했으며, 그의 머리를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사자를 보내 전장에게 초나라 영윤(令尹)의 대인(大印)을 하사했으며 그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했다.

전장은 곧 이귀(李歸) 등의 여러 장수들을 형양성 밖에 주둔하게 했으며, 스스로는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서진(西進)해 오창(敖倉)에서 진나라 군대를 맞이해 싸웠다.

쌍방이 교전하는 가운데 전장은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싸움에 패해 뿔뿔이 흩어졌다.

장한은 진군해 형양성 아래의 이귀 등을 공격해 그들을 격파했으며, 그 결과 이귀 등이 전사했다.
양성(陽城) 사람 등열(鄧說)의 군대가 담(郯)에 주둔했는데, 장한의 다른 부대에게 공격을 당해 패하자

흩어져 진현(陳縣)으로 들어갔다. 질현(銍縣) 사람 오서(伍徐)의 부대가 허(許)에 주둔했는데,

장한은 그들을 격파했고 오서의 군대는 모두 흩어져 진현으로 도망했다. 진왕은 등열을 주살했다.]

陳王初立時,陵人秦嘉、铚人董緶符離人朱雞石、取慮人鄭布、徐人丁疾等皆特起,

將兵圍東海守慶於郯.  陳王聞,乃使武平君畔為將軍,監郯下軍.

秦嘉不受命,嘉自立為大司馬,惡屬武平君.

告軍吏曰:「武平君年少,不知兵事,勿聽!」因矯以王命殺武平君畔.

章邯已破伍徐,擊陳,柱國房君死. 章邯又進兵擊陳西張賀軍.  陳王出監戰,軍破,張賀死.

臘月,陳王之汝陰,還至下城父,其御莊賈殺以降秦.  陳勝葬碭,謚曰隱王.

[진승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능현(陵縣) 사람 진가(秦嘉), 질현 사람 동설(董緤), 부리(符離) 사람 주계석(朱鷄石),

취려(取慮) 사람 정포(鄭布), 서현(徐縣) 사람 정질(丁疾) 등이 모두 단독으로 병사를 일으켰으며,

군대를 이끌고 담현에서 동해(東海) 군수 경(慶)을 포위하였다. 진왕은 이를 듣고 곧 무평군 반(畔)을 장군으로 삼아

담현성을 포위하고 있는 의군(義軍) 부대를 감독하고 통솔하게 하였다.

진가(秦嘉)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립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으며, 무평군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군리들에게 말하기를 : “무평군은 나이가 어려 군사(軍事)를 알지 못하니 그의 말을 듣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진왕의 명령을 위조해 무평군 반을 살해했다. 장한은 이미 오서를 격파했고 진현을 공격했으며,

상주국 방군 채사는 전사했다. 장한은 또 진군해 진현 서쪽의 장하(張賀)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진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는데 패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장하는 전사했다.
섣달(臘月)에 진왕은 여음(汝陰)에 이르렀고, 방향을 바꾸어 다시 하성보(下城父)에 이르렀는데,

그의 수레를 끄는 장고(莊賈)가 진왕을 살해한 후 진나라 군에 투항하였다.

탕(碭)에서 진승을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를 ‘은왕(隱王)’이라 하였다.]

陳王故涓人將軍呂臣為倉頭軍,起新陽,攻陳下之,殺莊賈,復以陳為楚.

初,陳王至陳,令铚人宋留將兵定南陽,入武關.  留已徇南陽,聞陳王死,南陽復為秦.

宋留不能入武關,乃東至新蔡,遇秦軍,宋留以軍降秦.  秦傳留至咸陽,車裂留以徇.

秦嘉等聞陳王軍破出走,乃立景駒為楚王,引兵之方與,欲擊秦軍定陶下.

使公孫慶使齊王,欲與并力俱進.

齊王曰:「聞陳王戰敗,不知其死生,楚安得不請而立王!」

公孫慶曰:「齊不請楚而立王,楚何故請齊而立王!且楚首事,當令於天下.」田儋誅殺公孫慶.

[진승의 옛 시종으로 장군이 된 여신(呂臣)은 창두군(蒼頭軍)을 조직해 신양(新陽)에서 기병하여

진현(陳縣)을 공격해 함락시켜 장고를 살해했으며, 또 진현을 초도(楚都)로 삼았다.
당시 진왕이 처음 진현에 왔을 때 질현 사람 송류(宋留)에게 군대를 이끌고 남양(南陽)을 평정하고

무관(武關)으로 진입하게 명령했다. 송류는 남양을 공격해 점령했으나, 진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남양은 다시 진(秦)나라 군의 공격으로 점령당했다. 송류는 무관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동쪽에 있는 신채(新蔡)로 갔는데 또 진나라 군과 마주쳤다. 송류는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나라 군은 송류를 함양(咸陽)으로 압송했으며, 거열(車裂)의 형벌을 내려 그 시신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진가 등은 진왕의 군대가 패해 도주했다는 것을 들었으며 곧 경구(景駒)를 초왕(楚王)으로 세웠으며,

군대를 이끌고 방여(方與)에 도착해 정도(定陶) 밖에서 진(秦)나라 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공손경(公孫慶)을 제나라 왕에게 보내어 연합해 함께 공격하고자 했다.
제나라 왕이 말하기를 : “듣자하니 진왕(陳王)은 패해 지금 생사가 불명한데 초나라는 어째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왕을 세웠느냐?”라고 하자.

공손경이 대답하기를 : “제나라는 초나라의 지시를 받지도 않고 왕을 세웠는데,

초나라 역시 어째서 제나라의 지시를 받아야만 비로소 왕을 세울 수 있습니까?

하물며 초나라가 먼저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당연히 천하를 호령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담은 공손경을 주살했다.]

秦左右校復攻陳,下之.  呂將軍走,收兵復聚.  鄱盜當陽君黥布之兵相收,復擊秦左右校,

破之青波,復以陳為楚.  會項梁立懷王孫心為楚王.  陳勝王凡六月.  已為王,王陳.

其故人嘗與庸耕者聞之,之陳,扣宮門曰:「吾欲見涉.」宮門令欲縛之.

自辯數,乃置,不肯為通.  陳王出,遮道而呼涉.  陳王聞之,乃召見,載與俱歸.

入宮,見殿屋帷帳,客曰:「夥頤!涉之為王沈沈者!」

[진(秦)나라의 좌우교(左右校)는 군사를 이끌고 재차 진(陳)으로 쳐들어가 성을 함락시켰다.

여장군(呂將軍)은 패해 도주했는데 다시 병사를 모집해 결집했다.

파양(鄱陽)에서 도적이 된 당양군(當陽君) 경포(黥布)의 군대가 여신의 군대와 서로 연합해서

다시 진(秦)나라 군의 좌우 교위를 공격해 청파(靑波)에서 그들을 격파했으며, 다시 진현을 초도로 삼았다.

마침 이때 항량(項梁)은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초왕으로 세웠다.
진승이 왕으로 불린 것은 모두 6개월간이었다. 그는 왕이 된 후 진현을 왕도(王都)로 삼았다.
진승의 옛 친구가 자신과 함께 머슴살이를 했던 사람에게서 그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진나라로 왔다.

그 사람은 궁문(宮門)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 “나는 진섭을 만나려고 합니다.”라고 하자.

궁문령이 그를 묶으려고 했다. 그가 여러 차례 해명을 하자 비로소 풀어주었지만 진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진왕이 궁문을 나섰을 때 그는 길을 막고 큰소리로 진섭을 불렀다.

진왕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를 불러 만났으며 함께 수레를 타고 궁으로 돌아갔다.

왕궁으로 돌아와서 궁전과 둘러쳐진 휘장을 본 손님은 말하기를 :

“정말 화려하구나! 진섭이 왕이 되니 궁전이 높고 크고 심오하구나!”라고 하였다.]

楚人謂多為夥,故天下傳之,夥涉為王,由陳涉始.  客出入愈益發舒,言陳王故情.

或說陳王曰:「客愚無知,顓妄言,輕威.」陳王斬之.  諸陳王故人皆自引去,由是無親陳王者.

陳王以朱房為中正, 胡武為司過, 主司群臣.  諸將徇地, 至, 令之不是者,系而罪之,以苛察為忠.

其所不善者,弗下吏,輒自治之.  陳王信用之. 諸將以其故不親附,此其所以敗也.

陳勝雖已死,其所置遣侯王將相竟亡秦,由涉首事也.  高祖時為陳涉置守冢三十家碭,至今血食.

[초나라 사람들은 ‘다(多)’를 ‘화(夥)’라고 불렀으므로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화섭위왕'이라는 말은

바로 진섭에게서 시작되었다. 이 손님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가면 갈수록 더욱 방자하고 구애됨이 없었으며,

제멋대로 진왕의 지나간 일을 떠들어댔다. 어떤 사람이 진왕에게 말하기를 : “손님이 우매하고 무지하며,

계속 허튼 소리만 떠들어대니 왕의 위엄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라고 하자. 진왕은 곧 그 손님을 참수했다.
그러자 진왕의 옛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떠났으며 이로부터 진왕에 접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진왕은 주방(朱房)을 중정관(中正官)에 임명했고, 호무(胡武)를 사과관(司過官)에 임명해

군신의 과실을 전문적으로 심사하고 규찰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서 복명(復命)할 때

주방과 호무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잡아다 죄를 다스렸는데,

그 다스림은 가혹했으며 또 하찮은 일도 지나치게 처리함으로써 진왕에 대한 충성을 표현했다.
무릇 이 두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나 죄상을 조사하는 관리에게 관계 자료를 주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그들 두 사람이 친히 가서 그 죄를 다스렸다. 진왕은 이 두 사람을 신임했으며,

여러 장수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진왕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진왕이 실패한 까닭이다.
진왕은 비록 이미 죽었을지라도 그러나 그가 봉하고 파견한 왕후장상들이 마침내 진(秦)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이것은 진섭에 의해서 처음으로 반란이 시작되어 그 같은 결과를 촉진한 것이다. 고조(高祖) 때에는 진섭을 위해서

분묘를 간수하는 30가구를 탕(碭)에 배치해 놓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때가 되면 가축을 잡아 그를 제사지낸다.]

 

褚先生曰:地形險阻,所以為固也;兵革刑法,所以為治也.  猶未足恃也.

夫先王以仁義為本,而以固塞文法為枝葉,豈不然哉!吾聞賈生之稱曰:

秦孝公據殽函之固,擁雍州之地,君臣固守,以窺周室.

有席卷天下,包舉宇內,囊括四海之意,并吞八荒之心.

當是時也,商君佐之,內立法度,務耕織,修守戰之備;外連衡而鬬諸侯.

於是秦人拱手而取西河之外.

[저선생(褚先生)은 말했다.
“지형이 험준하고 두절되어 있는 곳은 방비를 공고히 하기에 좋은 것이며, 군대와 형법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반드시 절실하게 의지해야 할 만한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무릇 선왕은 인의를 나라를 세우는 근본으로 삼았으며, 견고한 요새와 법률 제정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는데,

어찌 일의 도리가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가생(賈生)의 다음과 같은 평론(評論)을 들었다.
진효공(秦孝公)은 효산(殽山), 함곡관의 그 같은 견고한 천해의 요새에 의탁해 옹주(雍州)의 광대한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군신들은 착실하게 자기의 근거지를 지키고 있으면서 주 왕실을 엿보고 있었다.

천하를 석권하고, 통괄하고, 차지할 뜻과 팔황(八荒)을 병탄할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상군(商君)이 그를 보좌했다. 상군은 대내적으로는 법령과 제도를 건립했고 경작과 직조를 장려했으며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작전의 군비를 정돈했다. 대외적으로는 연횡(連衡)을 도모해 그 외 다른 제후국들이

서로 투쟁하게 부추기었다. 이리하여 진나라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서하(西河) 밖의 커다란 땅을 차지했다.]

孝公既沒,惠文王、武王、昭王蒙故業,因遺策,南取漢中,西舉巴蜀,東割膏腴之地,

收要害之郡.  諸侯恐懼,會盟而謀弱秦.  不愛珍器重寶肥饒之地,以致天下之士.

合從締交,相與為一.  當此之時,齊有孟嘗,趙有平原,楚有春申,魏有信陵:

此四君者,皆明知而忠信,寬厚而愛人,尊賢而重士.

約從連衡,兼韓、魏、燕、趙、宋、衛、中山之眾.

[진효공은 이미 죽었어도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왕(昭王)이 구업(舊業)을 계승하고

선인(先人)의 유책(遺策)을 따라서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점령했고, 서쪽으로는 파촉(巴蜀)을 점령했으며,

동쪽으로는 제후들의 비옥한 토지를 잘라서 점령했으며, 지형과 산천이 험준한 주군(州郡)을 빼앗아 점령했다.
제후 각국들은 심히 두려워 불안을 느꼈으며 동맹을 맺어 진나라를 약화시킬 계책을 도모했다.

그들은 진귀한 물품과 귀중 보화와 비옥한 땅을 아까워하지 않고 이를 사용해 널리 천하의 인재를 불러 모았다.

그들은 상호 연합해 동맹을 맺어 함께 항진(抗秦)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되자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초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이,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이 네 명의 봉군(封君)은 모두 지혜가 명철하고 충신을 중히 여겼으며,

후덕하고 백성을 사랑했고 현자(賢者)를 존경하고 인재를 중시했다.

각국은 연맹해 조약을 맺었으며, 한, 위(魏), 연, 조, 송, 위(衛), 중산 등의 국가가 연합군대를 결성했다.]

於是六國之士有甯越、徐尚、蘇秦、杜赫之屬為之謀,

齊明、周聚、陳軫、邵滑、樓緩、翟景、蘇厲、樂毅之徒通其意,

吳起、孫臏、帶他、兒良、王廖、田忌、廉頗、趙奢之倫制其兵.

嘗以什倍之地, 百萬之師, 仰關而攻秦.  秦人開關而延敵, 九國之師遁逃而不敢進.

秦無亡矢遺鏃之費, 而天下固已困矣.  於是從散約敗,爭割地而賂秦.

秦有餘力而制其獘,追亡逐北,伏尸百萬,流血漂櫓,因利乘便,宰割天下,

分裂山河,彊國請服,弱國入朝.  施及孝文王、莊襄王,享國之日淺,國家無事.

[여기에 6국의 재사(才士)인 영월(寧越),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 등이 그들을 위해서 꾀를 획책했다.

제명, 주최(周冣), 진진(陳軫), 소활(邵滑), 누완(樓緩), 적경(翟景), 소려, 악의(樂毅) 등은 그 뜻을 설명했다.

오기, 손빈(孫臏), 대타(帶他), 아량, 왕료(王廖), 전기, 염파, 조사(趙奢) 등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통솔했다.

진나라의 10배나 되는 영토와 백만대군으로서 함곡관을 향해 진나라로 공격해 들어갔다.

진나라는 문을 열고 적군을 유인했으나 9국(九國) 군대는 오히려 도망을 가면서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진나라는 한발의 화살도 낭비하지 않았는데, 제후 각국은 이미 몹시 피곤해 했다.

이리하여 합종은 와해되고 조약은 파괴되었으며, 다투어서 땅을 할양해 진나라에 뇌물로 바쳤다.

진나라는 풍족한 힘으로 각 제후국의 약점을 제압했으며, 흩어져서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추격했는데

엎어져 있는 시체는 백 만을 헤아렸고 흐르는 피는 방패를 뜨게 할 정도였다.

진나라는 유리한 지세와 편리한 시기를 이용해 온 천하를 침략해 압박하고 착취했으며 각국의 영토를 분열시켰다.

이에 강한 나라는 귀순을 요청하게 되었고, 약소국가는 조정에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어 복종하게 되었다.
계속된 효문왕, 장양왕 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재위한 날은 매우 짧았으나 나라에는 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及至始皇,奮六世之餘烈,振長策而御宇內,吞二周而亡諸侯,履至尊而制六合,

執敲樸以鞭笞天下,威振四海.  南取百越之地,以為桂林、象郡,百越之君俛首系頸,委命下吏.

乃使蒙恬北筑長城而守藩籬,卻匈奴七百餘里,胡人不敢南下而牧馬,士亦不敢貫弓而報怨.

於是廢先王之道,燔百家之言,以愚黔首.

墮名城,殺豪俊,收天下之兵聚之咸陽,銷鋒鍉,鑄以為金人十二,以弱天下之民.

然後踐華為城,因河為池,據億丈之城,臨不測之谿以為固.  良將勁弩,守要害之處,信臣精卒,

陳利兵而誰何.  天下已定,始皇之心,自以為關中之固,金城千里,子孫帝王萬世之業也.

[진시황에 이르러서 조부 6대(六代)의 풍요한 공업(功業)이 장대해져서 긴 채찍을 휘두르며 천하를 지배했으며,

동서 2주(二周)를 병탄해 제후 각국을 멸망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6합(六合)을 제압하는 대권을 장악했다.

손에는 형장(刑杖)을 들고서 천하를 위협했는데 그 위력은 사해(四海)를 진동시켰다.

남쪽으로는 백월 지역을 탈취해 계림군, 상군을 설립했는데 백월의 군장(君長)들은 스스로 목에 새끼를 매고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들었으며, 진나라 관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또 몽염(蒙恬)을 북방으로 보내 장성을 축조해 변새를 지키게 했고 흉노(匈奴)를 7백여 리 밖으로 몰아냈다.
오랑캐(胡人)들은 감히 남하해 약탈과 소요를 일으킬 수가 없었으며, 6국의 유민들 또한 감히 병사를 일으켜

복수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진시황은 곧 선왕이 국가를 다스리던 방법을 폐기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를 불태움으로써 백성을 우롱했다. 6국의 명성(名城)의 방위공사를 파괴했으며,

제후 각국의 영웅호걸들을 살해했다. 천하의 병기를 수집해 함양(咸陽)에 집중시켰고,

칼, 창, 활, 화살 등을 녹여서 동상(銅像) 12개를 주조함으로써 천하 인민의 반항을 약화시켰다.
그런 후 화산(華山)을 의지해 성곽을 쌓았고 황하를 의지해 성호(城濠)를 만들었는데,

위로는 억장(億仗)의 견성(堅城)을 쌓았고 아래로는 밑바닥이 없는 심계(深溪)를 따라 견고한 장벽을 만들었다.

훌륭한 장수와 강한 군사들에게 군사적인 요충지대를 지키게 했으며, 충실한 신하와 정예의 병사들에게

예리한 무기를 가지고 요도(要道)를 지키면서 오고가는 행인들을 검문하게 했다.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진시황은 마음속으로 관중(關中)의 형세는 험고(險固)하고 금성(金城)이 천리(千里)나 되므로

이는 자자손손 제왕(帝王)을 계승할 만세의 업(業)이라고 생각했다.]

始皇既沒,餘威振於殊俗.  然而陳涉甕牖繩樞之子,甿隸之人,而遷徙之徒也.

材能不及中人, 非有仲尼、墨翟之賢,陶朱、猗頓之富也.

躡足行伍之閒,俛仰仟佰之中,率罷散之卒,將數百之眾,轉而攻秦.

斬木為兵,揭竿為旗,天下雲會響應,贏糧而景從,山東豪俊遂并起而亡秦族矣.

且天下非小弱也;雍州之地,殽函之固自若也.  陳涉之位,非尊於齊、楚、燕、趙、韓、魏、

宋、衛、中山之君也;鉏耰棘矜,非铦於句戟長鎩也;適戍之眾,非儔於九國之師也;

深謀遠慮,行軍用兵之道,非及鄉時之士也.  然而成敗異變,功業相反也.

嘗試使山東之國與陳涉度長絜大,比權量力,則不可同年而語矣.  然而秦以區區之地.

致萬乘之權,抑八州而朝同列,百有餘年矣.  然後以六合為家,殽函為宮.

一夫作難而七廟墮,身死人手,為天下笑者,何也?仁義不施,而攻守之勢異也.

[진시황은 이미 죽었을지라도 여위(餘威)는 여전히 먼 국경지역에까지 진동했다.

그러나 진섭은 깨진 항아리의 주둥이로 창을 만들고 새끼줄을 엮어 문지도리를 맬 정도로 매우 가난한 집에 

살았으며, 땅을 갈고 파종하는 고용살이 농민으로 변경에 수자리로 떠나는 정부(征夫)에 불과 하였다.

재능은 보통 사람에도 미치지 못했고, 중니(仲尼), 묵적(墨翟)의 현덕도 없었고,

또한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猗頓) 같은 재력을 모우는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사병행렬에 투신해 수많은 사람을 굽어보는 대장이 되어 피곤하고 산란한 오합의 수졸들을 

통솔했으며, 수백 대오(隊伍)의 모두(矛頭)를 돌려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들은 수목을 베어 병기를 만들었고

죽간(竹竿)을 높이 들어 기치로 삼았는데, 천하의 백성들이 풍운과 같이 모여들어 호응해 봉기했다.

양식을 휴대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봉기에 참가했으며, 효산 그리고 함곡관 이동(以東)의 

광대한 지역의 제후들이 동시에 병사를 일으켜서 마침내 이로 인해서 진 왕실을 멸망시켰다.

하물며 진(秦)나라의 천하에는 축소(縮小)와 변약(變弱)은 없었으며,

옹주(雍州)의 지리적 우세함과 효산과 함곡관의 험요(險要)하고 견고한 바는 지난날과 다름이 없었다.

진섭의 지위와 위망(威望)은 결코 제, 초, 연, 조, 한, 위, 송, 위, 중산의 국왕보다 존귀하지도 않았다.

호미 끝이나 곰방메와 같은 농기구는 끝이 굽은 창이나 긴 창에 비해서 결코 예리하지도 않았다.

변방에 배치된 그 몇 백 명의 사람도 9국의 군대처럼 결코 그렇게 강대하지도 않았다.

심모원려(深謀遠慮)와 용병술은 이전의 모사(謀士)와는 필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는 완전히 다른 것이며 공업(功業)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그해 산동 제후와 진승의 재주의 많고 적음과 권력의 힘을 비교해 보면 함께 논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秦)나라는 가지각색의 지반(地盤)과 만승(萬乘)에 해당하는 권력으로서 8주(八州)를 제압했으며,

제후들로 하여금 조공을 드리러 오도록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1백여 년이나 되었다.

최후에 천하를 통일해 동서남북 천지를 사유물(私有物)로 삼았으며, 효산과 함곡관을 궁궐의 담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진승 한 사람이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해서 진나라의 일곱 종묘(宗廟)는 모두 파괴되었으며,

진황제 2세(二世), 즉 자영(子嬰)은 사람들에게 살해되어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인의정책을 실시하지 않음에 있으며, 그리고 공격하고 수비하는 형세가 서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