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4. 魏世家

第 十四. 魏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30. 18:14

 

            史記 世家

 

 

     第 十四. 魏世家(위세가)

魏之先,畢公高之後也.  畢公高與周同姓.  武王之伐紂,而高封於畢,於是為畢姓.

其後絕封,為庶人,或在中國,或在夷狄.  其苗裔曰畢萬,事晉獻公.

[위(魏)나라의 선조는 필공(畢公) 희고(姬高)의 후손이다. 필공 희고와 주(周)나라의 왕족은 성이 같았다.
주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의 주(紂)를 정벌하고, 희고를 필(畢)에 봉한 까닭에 성을 필로 썼다.
그의 후손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평민이 되어 어떤 이는 중원에 살았고, 어떤 이는 변방 오랑캐 땅에 살았다.
그의 후손 중에 필만(畢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진헌공(晉獻公)을 섬겨 벼슬을 했다.]

獻公之十六年, 趙夙為御, 畢萬為右, 以伐霍、耿、魏,滅之.  以耿封趙夙,以魏封畢萬,為大夫.

卜偃曰:「畢萬之後必大矣,萬,滿數也;魏,大名也.  以是始賞,天開之矣,天子曰兆民,

諸侯曰萬民.  今命之大,以從滿數,其必有眾.」

初,畢萬卜事晉,遇屯之比.  辛廖占之,曰:「吉. 屯固比入,吉孰大焉,其必蕃昌.」

畢萬封十一年,晉獻公卒,四子爭更立,晉亂.  而畢萬之世彌大,從其國名為魏氏.  生武子.

魏武子以魏諸子事晉公子重耳.

[헌공 16년에 조숙이 어자(御者)가 되고 필만은 우위(右衛)가 되어 곽(霍), 경(耿), 위(魏)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경 땅에는 조숙을 대부로 봉했고, 위 땅에는 필만을 대부로 봉했다.
복언(卜偃)이 말하기를 : “필만의 후손은 반드시 크게 번창할 것이다. ‘만(萬)’자는 만수(滿數)이고,

‘위(魏)’자는 높고 큰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볼 때 이는 개천(開天)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천자는 억만 명의 백성을 거느린다고 하고, 제후는 만 명의 백성을 거느린다고 한다.
지금 이름의 크기가 만수(滿數)이니 반드시 많은 백성이 모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필만이 진(晉)나라를 섬길 때 얻은 점괘는 “둔(屯)” 괘에서 “비(比)” 괘로 변했다.

신료(辛廖)가 이를 풀어 말하기를 : “길하다. ‘둔괘’는 견고함을 뜻하고, ‘비괘’는 진입을 뜻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점괘가 또 어디에 있으리오? 그의 후손이 반드시 번창하리라!”라 했다.
필만이 녹봉을 받은 지 11년 되던 해에 진헌공이 죽었고, 그의 네 아들이 왕위를 쟁탈하느라 나라가 어지러웠다.
필만의 자손들은 날로 번창해 자신들이 제후로 봉해진 곳의 지명을 따서 위씨(魏氏)로 했다.
필만의 후손이 무자(武子)를 낳았고, 위무자는 위씨 집안의 자손 자격으로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重耳)를 섬겼다.]

 

晉獻公之二十一年,武子從重耳出亡.

十九年反,重耳立為晉文公,而令魏武子襲魏氏之後封,列為大夫,治於魏.  生悼子.

魏悼子徙治霍.  生魏絳.  魏絳事晉悼公.

悼公三年,會諸侯.  悼公弟楊干亂行,魏絳僇辱楊干.

悼公怒曰:「合諸侯以為榮,今辱吾弟!」將誅魏絳.  或說悼公,悼公止.

卒任魏絳政,使和戎、翟,戎、翟親附.

[진헌공 21년, 무자는 중이를 따라서 망명길에 나섰다.
19년 뒤에 돌아와서 중이가 즉위해 진문공(晉文公)이 되어, 위무자로 하여금 위씨 집안의 봉토를 세습하게 했다.
또 그를 대부(大夫)의 대열에 올려주고, 위 땅을 통치하게 했다. 위무자는 위도자(魏悼子)를 낳았다.

위도자는 위의 통치구역을 곽 땅으로 옮겼다. 그는 아들 위강(魏降)을 낳았다.  위강은 진도공(晉悼公)을 섬겼다.

도공 3년, 제후들과 회맹했다. 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의 군대 대열이 문란하자, 위강이 양간에게 모욕을 주었다.
도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 “제후들을 회맹한 것이 명예 때문인데, 지금 과인의 동생을 욕되게 했도다!”라고 하며,

위강을 죽이려고 했다. 어떤 이가 도공을 설득해 도공이 멈추었다.

마침내 위강을 행정관에 임명해 그로 하여금 융족, 적족과 화약을 맺도록 해, 융족과 적족을 속국으로 삼았다.]

 

悼公之十一年,曰:「自吾用魏絳,八年之中,九合諸侯,戎、翟和,子之力也.」

賜之樂,三讓,然後受之.  徙治安邑.  魏絳卒,謚為昭子.  生魏嬴.  嬴生魏獻子.

獻子事晉昭公.  昭公卒而六卿彊,公室卑. 

[진도공 11년, 도공이 말하기를 : “과인이 위강을 임용한 이래 8년 동안에 수없이 제후들을 규합하고

융족, 적족과 화약을 맺었으니, 이는 그대의 공이로다.”라고 하며, 악기를 하사하니,

그가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악기를 받았다. 그 후 안읍(安邑)으로 옮겨서 통치했다.

위강이 죽은 후 시호를 소자(昭子)라 했다. 그는 위영(魏嬴)을 낳았다.  위영은 위헌자(魏獻子)를 낳았다.
헌자는 진소공(晉昭公)을 섬겼다. 소공이 죽고 나서 육경(六卿)이 강해졌고, 공실은 약해졌다.]

 

晉頃公之十二年,韓宣子老,魏獻子為國政.

晉宗室祁氏、羊舌氏相惡,六卿誅之,盡取其邑為十縣,六卿各令其子為之大夫.

獻子與趙簡子、中行文子、范獻子并為晉卿.  其後十四歲而孔子相魯.

後四歲,趙簡子以晉陽之亂也,而與韓、魏共攻范、中行氏.  魏獻子生魏侈.

魏侈與趙鞅共攻范、中行氏.  魏侈之孫曰魏桓子,與韓康子、趙襄子共伐滅知伯,分其地.

桓子之孫曰文侯都.

[진경공(晉頃公) 12년에 한선자(韓宣子)가 퇴임했고, 위헌자가 국정을 맡게 되었다.

진나라의 종족인 기씨(祁氏)와 양설씨(羊舌氏)가 서로 증오하며 공격해, 육경들이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봉읍을 모두 빼앗아 10현으로 나누고, 육경들이 각기 자신들의 자식들로 하여금 현의 대부가 되게 했다.

헌자와 더불어서 조간자(趙簡子), 중항문자(中行文子), 범헌자(范獻子)가 함께 진경(晉卿)으로 있었다.
그 후 14년이 지나서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에서 국정을 도왔다.
또 4년이 지나서는 조간자가 진양의 난으로 인해 한(韓), 위(魏)와 같이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를 공격했다.
위헌자는 위치(魏侈)를 낳았다. 위치는 조앙(趙鞅)과 함께 범씨와 중항씨를 공격했다.
위치의 손자가 위환자(魏桓子)인데, 한강자(韓康子), 조양자(趙襄子)와 더불어서 지백(知伯)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환자의 손자는 문후도(文侯都)이다.]

 

魏文侯元年,秦靈公之元年也.  與韓武子、趙桓子、周威王同時.

六年,城少梁.

十三年,使子擊圍繁、龐,出其民.

十六年,伐秦,筑臨晉元裏.

十七年,伐中山,使子擊守之,趙倉唐傅之.  子擊逢文侯之師田子方於朝歌,引車避,下謁.

田子方不為禮.  子擊因問曰:「富貴者驕人乎?且貧賤者驕人乎?」

子方曰:「亦貧賤者驕人耳.  夫諸侯而驕人則失其國,大夫而驕人則失其家. 

貧賤者,行不合,言不用,則去之楚、越,若脫屣然,柰何其同之哉!」子擊不懌而去.

西攻秦,至鄭而還,筑雒陰、合陽.

二十二年,魏、趙、韓列為諸侯.

二十四年,秦伐我,至陽狐. 

[위문후(魏文侯) 원년은 진영공(秦靈公) 원년이다.

이는 한무자(韓武子), 조환자(趙桓子), 주 위왕(周威王) 등과 같은 시대이다.
위문후 6년, 소량(少梁)에 성을 축성했다.
13년, 자격(子擊)으로 하여금 번(繁), 방(龐) 땅을 공격하게 해 그곳 주민들을 몰아냈다.
16년, 진(秦)나라를 정벌해, 임진(臨晉), 원리(元里)에 성을 축조했다.
17년, 중산(中山)을 토벌해 자격(子擊)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했고, 조창당(趙倉唐)으로 하여금 보좌하게 했다.
자격이 조가(朝歌)에서 위 문후의 사부 전자방(田子方)을 만났다.

자격이 수레를 비키게 하고, 수레에서 내려서 그를 배알했다. 전자방이 답례를 하지 않았다.
자격이 그에게 묻기를 : “부귀한 사람이 남을 교만하게 대합니까?

아니면 빈천한 사람이 남을 교만하게 대합니까?”라고 하자,
자방이 대답기를 : “ 원래는 빈천한 사람만이 남을 교만하게 대할 뿐입니다. 무릇 제후가 남을 교만하게 대한다면

그 나라를 잃을 것이며, 대부가 남을 교만하게 대한다면 제 집을 잃을 것입니다.

빈천한 사람은 행동함에 그 왕의 뜻에 합치하지 못하며, 진언을 함에 왕의 쓰임을 받지 못하니,

그를 떠나서 초(楚), 월(越)나라로 가기를 마치 신을 벗듯이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들을 같게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자격은 불쾌해 하며 그를 떠났다.

이해에 위나라는 서쪽으로 진(秦)나라를 공격해, 정(鄭) 땅에 이르러서 철군했다. 낙음과 합양에 성을 축조했다.
위문후 22년, 위(魏), 조(趙), 한(韓)이 제후의 대열에 들었다.
위문후 24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해 양호(陽狐)까지 진격했다.]

 

二十五年,子擊生子罃.  文侯受子夏經藝,客段干木,過其閭,未嘗不軾也.

秦嘗欲伐魏,或曰:「魏君賢人是禮,國人稱仁,上下和合,未可圖也.」文侯由此得譽於諸侯.

任西門豹守鄴,而河內稱治。 魏文侯謂李克曰:

「先生嘗教寡人曰『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今所置非成則璜, 二子何如?」

李克對曰:「臣聞之,卑不謀尊,疏不謀戚. 臣在闕門之外,不敢當命.」

文侯曰:「先生臨事勿讓.」

李克曰:「君不察故也, 居視其所親,富視其所與,達視其所舉,窮視其所不為,貧視其所不取,

五者足以定之矣,何待克哉!」

文侯曰:「先生就舍,寡人之相定矣.」李克趨而出,過翟璜之家.

翟璜曰:「今者聞君召先生而卜相,果誰為之?」 李克曰:「魏成子為相矣.」

翟璜忿然作色曰:「以耳目之所睹記,臣何負於魏成子?西河之守,臣之所進也.

君內以鄴為憂,臣進西門豹.  君謀欲伐中山,臣進樂羊.  中山以拔,無使守之,臣進先生.

君之子無傅,臣進屈侯鮒.  臣何以負於魏成子!」

李克曰:「且子之言克於子之君者,豈將比周以求大官哉?君問而置相『非成則璜,二子何如』?

克對曰:『君不察故也.  居視其所親,富視其所與,達視其所舉,窮視其所不為,貧視其所不取,

五者足以定之矣,何待克哉!』是以知魏成子之為相也.  且子安得與魏成子比乎?

魏成子以食祿千鐘, 什九在外, 什一在內, 是以東得卜子夏、田子方、段干木.  此三人者,君皆師之.

子之所進五人者,君皆臣之.  子惡得與魏成子比也?」

翟璜逡巡再拜曰:「璜,鄙人也,失對,願卒為弟子.」

[위문후 25년, 자격이 자앵(子罃)을 낳았다.  위문후가 자하(子夏)로부터 경서를 수학했고,

단간목(段干木)을 객(客)으로 대접하면서, 그의 고을을 지날 때면 목례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 “ 위나라의 왕은 예로써 현인(賢人)을 환대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잘 융화되어 진나라가 위나라를 아직은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문후는 이 때문에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위문후는 서문표(西門豹)로 하여금 업(鄴) 땅을 통치하게 해 하내(河內)가 잘 다스려졌다.
위문후가 이극(李克)에게 묻기를 : “ 선생께서 일찍이 과인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시기를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그리게 되고, 나라가 혼란하면 어진 재상을 그리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위나라의 재상을 임명함에 성자(成子) 아니면 적황(翟璜)인데, 두 사람이 어떠합니까 ? ”라고 하자.
이극이 대답하기를 : “ 제가 듣기로는 비천한 자가 존귀한 사람을 평하지 않고,

소원한 사람이 가까운 사람을 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궐문 밖에 있는데, 감히 왕의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문후가 말하기를 : “ 선생께서는 일에 임해서 사양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이극이 대답하기를 : “ 왕께서 세밀히 관찰하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평소에 지낼 때에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 왕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한 상황에서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에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
이 다섯 가지만 살피면 족히 인선을 하실 수 있으신데, 어찌 저의 조언을 기다리십니까!”라고 하였다.
문후가 말하기를 : “ 선생께서는 관부로 돌아가십시오. 과인의 재상은 정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극이 급히 나와서, 적황의 집을 방문했다.  적황이 말하기를 : “지금 듣자하니 왕께서 선생을 불러

재상선임 문제를 물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를 재상으로 정했습니까?”라고 하니,
이극이 말하기를 : “위성자(魏成子)가 재상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적황이 분노한 기색을 하며 말하기를 : “귀로 듣고 눈으로 볼 때, 제가 어찌 위성자보다 못합니까?

서하(西河)의 군수는 제가 천거했습니다. 왕께서 내심 업 땅 때문에 근심하실 때, 제가 서문표를 추천했습니다.

왕께서 중산을 정벌하려고 하실 때, 제가 악양(樂羊)을 천거했습니다.
중산을 토벌한 후에는 이를 지킬 사람을 찾지 못해, 제가 선생을 추천했습니다.

태자가 사부(師傅)가 없어, 제가 굴후부(屈侯鮒)를 추천했습니다. 제가 어찌 위 성자만 못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극이 말하기를 : “ 그대가 그대의 왕에게 나를 진언한 것이 어찌 장차 큰 벼슬을 구하기 위함이었겠습니까 ?
왕께서 재상 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물으시기를 ‘성자(成子) 아니면 적황인데, 두 사람이 어떠합니까 ?’라고 하셔서,
제가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세밀히 관찰하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평소에 지낼 때에는 그의 가까운 사람들을 살피고,
부귀할 때에는 그와 왕래가 있는 사람을 살피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그가 천거한 사람을 살피고,

곤궁한 상황에서는 그가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어려울 때에는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살피십시오.

이 다섯 가지만 살피면 족히 인선을 하실 수 있으신데, 어찌 저의 조언을 기다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위성자가 재상이 된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견줄 만하다는 말입니까?
위성자는 식록(食祿)이 천종(千鍾)인데, 그중 10분의 9는 밖에서 쓰고, 10분의 1만을 집에서 사용했기에

동쪽에서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등 세 사람을 얻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왕께서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대가 올린 다섯 사람은 왕께서 모두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 했다.
적황이 멈칫거리다 절을 두 번 올리며 말하기를 : “제가 비천한 사람입니다. 선생에 대한 저의 질문이 부당했습니다.

원컨대 평생토록 선생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二十六年,虢山崩,壅河. 

三十二年,伐鄭.  城酸棗.  敗秦于注.

三十五年,齊伐取我襄陵.

三十六年, 秦侵我陰晉.

三十八年,伐秦,敗我武下,得其將識.  是歲,文侯卒,子擊立,是為武侯.

[위문후 26년, 괵산(虢山)이 무너져서 황하를 막아버렸다.
32년, 정(鄭)나라를 공격했다. 산조(酸棗)에 성을 축조했다. 주(注) 읍에서는 진(秦)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35년, 제나라 군이 위나라의 양릉(襄陵)을 점령했다.
36년, 진나라 군사가 위나라의 음진(陰晉)을 침공했다.
38년, 진나라를 공격해 무하성(武下城)에서 패전했으나, 진나라 장수 식(識)을 생포했다.

이해에 위문후가 죽고, 자격(子擊)이 즉위하니, 그가 무후(武侯)이다.]

 

魏武侯元年,趙敬侯初立,公子朔為亂,不勝,奔魏,與魏襲邯鄲,魏敗而去.

二年,城安邑、王垣.

七年,伐齊,至桑丘.

九年,翟敗我于澮.  使吳起伐齊,至靈丘.  齊威王初立.

十一年,與韓、趙三分晉地,滅其後.

十三年,秦獻公縣櫟陽.

十五年,敗趙北藺.

十六年,伐楚,取魯陽.  武侯卒,子罃立,是為惠王.

[위무후 원년, 조경후(趙敬侯)가 새로 즉위했고, 공자 삭(朔)이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위나라로 도망해 위나라 군과 더불어 한단(邯鄲)을 습격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철수했다.
2년, 안읍(安邑)과 왕원(王垣)에 성을 쌓았다.
7년, 제나라를 공격해 상구읍(桑丘邑)에까지 이르렀다.
9년, 적(狄)이 회(澮)에서 위나라 군을 패퇴시켰다. 오기(吳起)로 하여금 제(齊)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구(靈丘)에까지 이르렀다. 제위왕(齊威王)이 즉위했다.
11년, 한, 조와 더불어서 진(晉)나라 땅을 삼분하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13년, 진헌공(秦獻公)이 역양(櫟陽)으로 천도했다.
15년, 북린(北藺)에서 조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16년에는 초(楚)나라를 공격해 노양(魯陽)을 취했다. 무후가 죽고 자앵(子罃)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혜왕(惠王)이다.]

 

惠王元年,初,武侯卒也,子罃與公中緩爭為太子.  公孫頎自宋入趙, 自趙入韓,

謂韓懿侯曰:「魏罃與公中緩爭為太子, 君亦聞之乎?今魏罃得王錯, 挾上黨,固半國也. 

因而除之,破魏必矣,不可失也.」 

懿侯說,乃與趙成侯合軍并兵以伐魏,戰于濁澤,魏氏大敗,魏君圍.

趙謂韓曰:「除魏君,立公中緩,割地而退,我且利.」

韓曰:「不可.  殺魏君, 人必曰暴;割地而退 人必曰貪.  不如兩分之.

魏分為兩, 不彊於宋、衛,則我終無魏之患矣.」 趙不聽.  韓不說,以其少卒夜去.

惠王之所以身不死,國不分者,二家謀不和也.  若從一家之謀,則魏必分矣.

故曰「君終無適子,其國可破也」.

[혜왕 원년 초, 무후가 죽고, 자앵과 공중완(公中緩)이 태자(太子) 자리를 다투었다.

공손기(公孫頎)가 송(宋)나라로부터 조(趙)나라로, 다시 조나라에서 한(韓)나라로 들어와서,

한의후(韓懿侯)에게 이르기를 : “ 위앵과 공중완이 태자 자리를 다투는데, 왕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지금 위앵은 왕착(王錯)을 얻어 상당(上黨)을 통제하고 있으니, 실로 이것은 위나라의 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제거한다면 위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의후가 기뻐하며 이에 조성후(趙成侯)와 연합해 위나라를 공격하니, 탁택(濁澤)에서 전투가 벌어져 위씨가 대패했고,

위나라 군이 포위당했다.  조(趙)나라가 한(韓)나라에게 이르기를 : “ 위나라 왕을 제거하고 공자 완을 즉위시킨 후에

위나라 땅을 떼어 가지고 철수하면 우리에게 이롭습니다.”라고 하니,
한(韓)나라가 말하기를 : “ 안 됩니다. 위나라 왕을 살해하면 남들이 우리를 잔악하다고 말할 것이며, 

땅을 떼어 가지면 남들이 우리를 탐욕스럽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위나라를 둘로 나누는 것만 못합니다.

위나라를 둘로 나누면  송, 위(衛) 나라보다도 강하지 못하니,

우리는 영원토록 위나라로부터의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조성후가 듣지 않았다.

한의후가 불쾌해해, 정예 부대를 이끌고 한밤에 철수했다.
혜왕(惠王)이 죽지 않고, 나라가 둘로 나뉘지 않은 까닭은 두 집의 모의가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만약에 한집의 모의를 따랐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나누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 “왕이 죽었는데도 맏아들이 없으면, 그 나라는 쳐부술 만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二年,魏敗韓于馬陵,敗趙于懷.

三年,齊敗我觀.

五年,與韓會宅陽.  城武堵.  為秦所敗.

六年,伐取宋儀臺.

九年,伐敗韓于澮.  與秦戰少梁,虜我將公孫痤,取龐.  秦獻公卒,子孝公立.

十年,伐取趙皮牢.  彗星見.

十二年,星晝墜,有聲.

十四年,與趙會鄗.

十五年,魯、衛、宋、鄭君來朝.

十六年,與秦孝公會(社)[杜]平.  侵宋黃池,宋復取之.

十七年,與秦戰元裏,秦取我少梁.  圍趙邯鄲.

十八年,拔邯鄲.  趙請救于齊,齊使田忌、孫臏救趙,敗魏桂陵.

十九年,諸侯圍我襄陵.  筑長城,塞固陽. 

二十年,歸趙邯鄲,與盟漳水上.

二十一年,與秦會彤.  趙成侯卒.

二十八年,齊威王卒.  中山君相魏.

[혜왕 2년, 위나라가 마릉(馬陵)에서 한(韓)나라를 패배시켰고, 회(懷)에서 조(趙)나라를 패배시켰다.
3년, 제나라가 위나라의 관(觀) 땅에서 위나라 군을 물리쳤다.
5년, 한의후와 택양에서 회동했다. 무도(武堵)에 성을 축조했다. 한나라, 위나라 군대가 진(秦)나라에게 패배당했다.
6년, 송(宋)나라의 의대(儀臺)를 공격해 취했다.
9년, 회(澮) 땅에서 한나라를 패배시켰다. 진나라와 소량(少梁)에서 회전했는데,

진나라는 위장(魏將) 공손좌를 포로로 잡아갔고, 방(龐) 땅을 취했다. 진헌공이 죽자 아들 효공(孝公)이 즉위했다.
10년, 조나라를 공격해 피뢰(皮牢)를 취했다. 혜성이 나타났다.
12년, 유성이 낮에 떨어져 큰 소리가 났다.
14년, 조성후와 호(鄗) 땅에서 회맹했다.

15년에는 노, 위(衛), 송, 정 나라의 군주가 위혜왕을 알현하러 왔다.
16년, 진효공(秦孝公)과 두평(杜平)에서 만났다. 송나라를 침공해 황지를 빼앗았다가, 다시 송나라에 빼앗겼다.
17년, 진나라와 원리(元里)에서 전투해, 진나라가 위나라의 소량을 차지했다. 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했다.
I8년, 한단을 함락했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제나라는 전기(田忌), 손빈(孫臏)으로 하여금

조나라를 구원하게 해 계릉(桂陵)에서 위나라 군을 격퇴시켰다.
19년, 제후들이 위나라의 양릉(襄陵)을 포위했다. 위나라는 장성을 축성하고, 고양(固陽)에 관새(關塞)를 만들었다.
20년, 한단을 조나라에 되돌려주고, 장수(漳水) 위에서 맹약을 맺었다.
21년, 동(彤)에서 진나라와 회동했다. 조성후가 죽었다.
28년, 제위왕이 죽었다. 중산군(中山君)이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三十年,魏伐趙,趙告急齊.  齊宣王用孫子計,救趙擊魏.  魏遂大興師,使龐涓將,

而令太子申為上將軍.  過外黃,外黃徐子謂太子曰:「臣有百戰百勝之術.」

太子曰:「可得聞乎?」客曰:「固願效之.」

曰:「太子自將攻齊, 大勝并莒,則富不過有魏,貴不益為王.  若戰不勝齊,則萬世無魏矣.

此臣之百戰百勝之術也.」

太子曰:「諾,請必從公之言而還矣.」

客曰:「太子雖欲還,不得矣.  彼勸太子戰攻,欲啜汁者眾.  太子雖欲還,恐不得矣.」

太子因欲還,其御曰:「將出而還,與北同.」太子果與齊人戰,敗於馬陵.

齊虜魏太子申,殺將軍涓,軍遂大破.

[혜왕 30년,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가 제나라에 급히 고했다.

제선왕(齊宣王)이 손자병법을 사용해 조나라를 구하고 위나라를 격퇴시켰다.

위나라는 이에 군대를 크게 동원해 방연(龐涓)을 장수로 삼고, 태자 신(申)을 상장군으로 삼았다.

위나라 군대가 외황(外黃)을 지날 때, 외황 사람인 서자(徐子)가 태자에게 이르기를 :

“ 신에게는 백전백승의 전략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서자가 말하기를 ; “ 본디 태자께 들려드리고자 했습니다.”라고 하며,

말하기를 : “태자께서 친히 장군으로써 제나라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거(莒) 땅을 병점한다면,

이는 위나라의 부를 차지하는 것에 불과하고, 귀함도 위나라 왕이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제나라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차후로는 위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말하는 백전백승의 전략입니다.”라고 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 “ 좋소. 반드시 공의 말에 따라서 철군하게 하겠소.”라고 하였다.

서자가 말하기를 : “ 태자께서 비록 철군을 하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태자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권한 이들 중에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태자께서 비록 철군하고자 해도, 아마 그리 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태자가 철군하려고 하니,

그의 어자(御者)가 말하기를 : “출정하려다가 귀환하는 것은 패배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는 결국 제나라 군과 교전을 했고, 마릉(馬陵)에서 패했다.

제나라 군대가 태자신을 포로로 삼고, 장수 방연을 죽임으로써 위나라 군대는 이에 대패했다.]

 

三十一年,秦、趙、齊共伐我,秦將商君詐我將軍公子卬而襲奪其軍,破之.

秦用商君,東地至河,而齊、趙數破我,安邑近秦,於是徙治大梁.  以公子赫為太子.

三十三年,秦孝公卒,商君亡秦歸魏,魏怒,不入.

三十五年,與齊宣王會平阿南.

惠王數被於軍旅,卑禮厚幣以招賢者.  鄒衍、淳于髡、孟軻皆至梁.

梁惠王曰:「寡人不佞, 兵三折於外, 太子虜, 上將死, 國以空虛, 以羞先君宗廟社稷, 寡人甚丑之,

叟不遠千里,辱幸至獘邑之廷,將何利吾國?」

孟軻曰:「君不可以言利若是. 夫君欲利則大夫欲利, 大夫欲利則庶人欲利, 上下爭利, 國則危矣.

為人君,仁義而已矣,何以利為!」

三十六年,復與齊王會甄.  是歲,惠王卒,子襄王立.

[혜왕 31년, 진(秦), 조(趙), 제(齊) 삼국이 합동으로 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장수 상앙(商鞅)이 위나라의 장군 공자 인(印)을 속여 그의 군대를 빼앗고, 그를 격파했다.
진나라가 상앙을 임용해, 국토가 동으로는 황하에 이르렀다. 제와 조 두 나라가 위나라를 여러 차례 격파하자,

안읍(安邑)이 진나라에 가까워서 대량(大梁)으로 천도했다. 공자 혁(赫)을 태자로 삼았다.
33년, 진효공(秦孝公)이 죽고, 상앙이 진나라에서 도망해 위(魏)나라에 투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위혜왕은 노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35년, 제선왕과 평아(平阿)의 남쪽에서 회맹했다.
혜왕이 여러 차례 전쟁에서의 고배를 마신 뒤 공손한 예절과 후한 하사품으로 현자(賢者)들을 초빙했다.
추연(鄒衍), 순우곤(淳于髡), 맹가(孟軻) 등이 모두 대량(大梁)에 모였다.
양혜왕(梁惠王)이 말하기를 : “ 과인이 재주가 없어서 세 번에 걸쳐서 장병들을 잃고, 태자가 포로가 되었으며,

상장(上將)이 전사했으니, 나라가 공허하고, 선왕과 종묘사직에 치욕을 주어 과인이 심히 부끄럽소.

노인장께서 천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나라에 왕림해 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소?”라고 하자,

맹가가 말하기를 : “왕께서는 이와 같이 이로움(利)에 대해서 말씀하지 마십시오. 왕께서 이로움을 바라신다면,

대부들도 이로움을 바랄 것이며, 대부들이 이로움을 바란다면, 평민들도 이로움을 바랄 것이니,
상하가 서로 이로움만 다툰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왕이 되는 데에는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이지, 어찌 이(利)를 바라십니까?”라고 하였다.
36년, 제나라 왕과 견(甄)에서 다시 회맹했다. 이해에 혜왕이 죽고, 아들 양왕(襄王)이 즉위했다.]

 

襄王元年,與諸侯會徐州,相王也.  追尊父惠王為王.

五年,秦敗我龍賈軍四萬五千于雕陰,圍我焦、曲沃.  予秦河西之地.

六年,與秦會應.  秦取我汾陰、皮氏、焦.  魏伐楚,敗之陘山.

七年,魏盡入上郡于秦.  秦降我蒲陽.

八年,秦歸我焦、曲沃.

十二年,楚敗我襄陵.  諸侯執政與秦相張儀會齧桑.

十三年,張儀相魏.  魏有女子化為丈夫.  秦取我曲沃、平周.

十六年,襄王卒,子哀王立.  張儀復歸秦.

[양왕 원년, 제후들과 서주(徐州)에서 회맹해, 서로 ‘왕’으로 칭했다. 부친 혜왕을 왕으로 추존했다.
5년, 진(秦)나라가 조음(雕陰)에서 위나라 장군 용고(龍賈)의 군대 4만 5,000명을 격퇴시켰고,

초(焦)와 곡옥(曲沃)을 포위했다. 진나라에 하서(河西) 땅을 넘겨주었다.
6년, 진나라와 응(應)에서 회동했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땅 분음(汾陰), 피지(皮氏), 초(焦)를 취했다.

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형산(陘山)에서 격퇴시켰다.
7년, 위나라가 상군(上郡) 전체를 진나라에게 바쳤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포양(蒲陽)을 함락시켰다.

8년에는 진나라가 초와 곡옥을 돌려주었다.
12년, 초나라가 위나라의 양릉(襄陵)을 격파했다. 제후들이 집권하면서 진나라의 재상 장의와 설상에서 회맹했다.
13년, 장의가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위나라에는 여자에서 남자로 변한 사람이 있었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곡옥과 평주(平周)를 차지했다.
16년, 양왕이 죽고, 아들 애왕(哀王)이 즉위했다. 장의가 다시 진나라로 돌아갔다.]

 

哀王元年,五國共攻秦,不勝而去. 

二年,齊敗我觀津.

五年,秦使樗里子伐取我曲沃,走犀首岸門.

六年,秦(求)[來]立公子政為太子.  與秦會臨晉.

七年,攻齊.  與秦伐燕.

[위애왕 원년, 5개 국이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
2년, 제나라가 위나라의 관진(觀津)을 함락시켰다.
5년, 진나라가 저리자로 하여금 위나라의 곡옥을 공격해 취하게 했는데, 안문에서 서수(犀首)를 쫓아버렸다.

6년, 진나라가 공자 정(政)을 태자로 세웠다. 진나라와 임진(臨晉)에서 회맹했다.
7년, 제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와 같이 연나라의 정벌에 나섰다.]

 

八年, 伐衛, 拔列城二.  衛君患之.  如耳約斬趙, 趙分而為二,所以不亡者, 魏為從主也.

今衛已迫亡, 將西請事於秦.  與其以秦醳衛, 不如以魏醳衛,

見衛君曰:「請罷魏兵, 免成陵君可乎?」衛君曰:「先生果能, 孤請世世以衛事先生.」

如耳見成陵君曰:「昔者魏伐趙,斷羊腸,拔閼與,衛之德魏必終無窮.」 成陵君曰:「諾.」

如耳見魏王曰:「臣有謁於衛.  衛故周室之別也,其稱小國,多寶器.  今國迫於難而寶器不出者,

其心以為攻衛醳衛不以王為主,故寶器雖出必不入於王也.  臣竊料之,先言醳衛者必受衛者也.」

如耳出,成陵君入,以其言見魏王.  魏王聽其說,罷其兵,免成陵君,終身不見.

[애왕 8년, 위(衛)나라를 정벌해, 인접한 성 두 곳을 점령했다. 위(衛)나라 왕이 이를 근심했다.

위(魏)나라의 여이(如耳)가 위(衛)나라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 “청컨대 군사를 철수시키십시오. 성릉군(成陵君)을 면직시켜도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위(衛)나라 왕이 말하기를 : “선생께서는 과연 유능하십니다.

저는 세세대대로 선생을 위나라에서 섬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여이가 성릉군에게 말하기를 : “전에 위(魏)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해 양장(羊腸) 길을 끊었고,

연여(閼與)를 함락시켰으며, 조나라의 분할을 도모하여, 조나라를 둘로 나누고도 멸망시키지 않은 이유는

위나라를 연맹의 종주국으로 삼은 때문입니다. 지금 위(衛)나라가 이미 멸망에 임박해,

장차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고자 합니다. 진으로 하여금 위(衛)나라를 관용하게 하는 것은 위(魏)나라로 하여금

위(衛)나라를 관용하게 하여, 위(衛)나라가 위(魏)나라에 대한 감은을 그지없게 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성릉군이 말하기를 :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여이가 위(魏)나라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 “제가 위(衛)나라를 대변해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위(衛)나라는 본디 주왕실과는 별개로서 소국(小國)으로 칭해지면서, 진귀한 기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서 진귀한 기물들을 헌납하지 않는 것은, 그들은 위(衛)나라를 공격하든지

위나라를 풀어주던지 간에 왕께서 주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니, 이런즉 진귀한 기물이 비록 나온다 하더라도

왕의 손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작은 소견으로는 먼저 위(衛)나라를 풀어주겠다고 말하는 자가

바로 위(衛)나라의 뇌물을 받은 자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이가 나가고, 성릉군이 들어와서 위(魏)나라 왕에게 위(衛)나라에서의 철군 건의를 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는 그의 군대를 철수하게 하고 성릉군을 면직시키고, 평생토록 보지 않았다.]

 

九年,與秦王會臨晉.  張儀、魏章皆歸于魏. 魏相田需死,楚害張儀、犀首、薛公.

楚相昭魚謂蘇代曰:「田需死,吾恐張儀、犀首、薛公有一人相魏者也.」

代曰:「然相者欲誰而君便之?」 昭魚曰:「吾欲太子之自相也.」

代曰:「請為君北,必相之.」 昭魚曰:「柰何?」

對曰:「君其為梁王,代請說君.」 昭魚曰:「柰何?」

對曰:「代也從楚來,昭魚甚憂,曰:『田需死,吾恐張儀、犀首、薛公有一人相魏者也.』

代曰:『梁王,長主也,必不相張儀.  張儀相,必右秦而左魏.  犀首相,必右韓而左魏.

薛公相,必右齊而左魏.  梁王,長主也,必不便也.』 王曰:『然則寡人孰相?』

代曰:『莫若太子之自相.  太子之自相,是三人者皆以太子為非常相也,皆將務以其國事魏,

欲得丞相璽也.  以魏之彊,而三萬乘之國輔之,魏必安矣.  故曰莫若太子之自相也.』」

遂北見梁王,以此告之.  太子果相魏.

 

[애왕 9년, 진(秦)나라 왕과 더불어 임진에서 회동했다. 장의와 위장(魏章) 등은 모두 위(魏)나라로 돌아왔다.
위나라의 재상 전수(田需)가 죽은 후에 초(楚)나라에서는 장의, 서수, 설공(薛公) 등을 경계했다.
초나라 재상 소어(昭魚)가 소대(蘇代)에게 말하기를 : “전수가 죽었으니 나는 장의, 서수, 설공 중의

한 사람이 위나라의 재상이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소대가 묻기를 : “그렇다면 누가 재상이 되면 당신에게 유리합니까?”라고 하자.

소어가 대답하기를 : “저는 태자께서 친히 재상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소대가 말하기를 : “당신을 위해 북으로 가서 위나라 왕을 뵙고, 반드시 태자가 재상이 되도록 하겠습니다.”했다.

소어가 묻기를 :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당신께서 양왕(梁王)이라면, 제가 당신을 양왕이라고 생각하고 설명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어가 말하기를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라고 하니,

소대가 말하기를 : “ 저는 초(楚)나라에서 왔는데, 소어가 매우 근심하며 말하기를 ‘전수가 죽었으니,
나는 장의, 서수, 설공 중의 한사람이 위나라의 재상이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자,

대답해 말하기를 ‘양왕은 현명한 왕이시니, 반드시 장의를 재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의가 재상이 된다면 반드시 진(秦)을 중시하고 위(魏)를 경시할 것입니다. 서수가 재상이 된다면,

필히 한을 중시하고 위를 경시할 것입니다. 설공을 재상으로 삼는다면, 필히 제를 중시하고 위를 경시할 것입니다.
양왕께서는 현명한 왕입니다. 절대로 불리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그러면 과인은 누구를 재상으로 해야 하오?’라고 하면,

대답하기를 ‘태자께서 친히 재상이 되는 것이 낫습니다. 태자가 재상이 되면, 이 세 사람은 모두 태자를 영원한 

재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모두 힘써 자기 나라로 하여금 위나라를 섬기게 해, 재상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위나라의 강력한 힘에다가, 세 나라의 만승지국(萬乘之國)이 보필한다면, 위나라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태자로 하여금 친히 재상이 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라고 하고,

이에 북으로 가서 양왕을 만나서 이 말들을 고했다. 태자가 과연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十年,張儀死.

十一年,與秦武王會應.

十二年,太子朝於秦.  秦來伐我皮氏,未拔而解.

十四年,秦來歸武王后.

十六年,秦拔我蒲反、陽晉、封陵.

十七年,與秦會臨晉.  秦予我蒲反.

十八年,與秦伐楚.

二十一年,與齊、韓共敗秦軍函谷.

二十三年,秦復予我河外及封陵為和.  哀王卒,子昭王立.

[애왕 10년, 장의가 죽었다.
11년, 진무왕(秦武王)과 응(應)에서 회맹했다.

12년에, 태자가 진(秦)나라에 입조했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피지(皮氏)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14년, 진나라가 무왕후(武王后)를 위나라에 돌려보냈다.
16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포반(蒲反), 양진(陽晉), 봉릉(封陵) 땅을 함락시켰다.
17년, 진나라와 임진에서 회맹했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포반을 돌려주었다.
18년, 진나라와 같이 초나라를 공격했다.
21년, 제(齊), 한(韓)나라와 더불어서 함곡(函谷)에서 진나라 군을 격퇴시켰다.
23년, 진나라가 다시 하외(河外)와 봉릉 땅을 위나라에 돌려주고 강화를 맺었다.

애왕이 죽고 아들 소왕(昭王)이 즉위했다.]

 

昭王元年,秦拔我襄城.

二年,與秦戰,我不利.

三年,佐韓攻秦,秦將白起敗我軍伊闕二十四萬.

六年,予秦河東地方四百里.  芒卯以詐重.

七年,秦拔我城大小六十一.

八年,秦昭王為西帝,齊湣王為東帝,月餘,皆復稱王歸帝.

九年,秦拔我新垣、曲陽之城.

十年,齊滅宋,宋王死我溫.

十二年,與秦、趙、韓、燕共伐齊,敗之濟西,湣王出亡.  燕獨入臨菑.  與秦王會西周.

十三年,秦拔我安城.  兵到大梁,去.

十八年,秦拔郢,楚王徙陳.

十九年,昭王卒,子安釐王立.

[위소왕 원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양성(襄城)을 함락시켰다.
2년, 진나라와 전쟁해 위나라가 열세에 몰렸다.
3년, 한(韓)나라를 도와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장수 백기가 이궐(伊闕)에서 위나라 군 24만 명을 죽였다.
6년, 진나라에게 하동 지방 400리의 땅을 주었다. 제나라 사람 망묘는 지략을 가지고 있기에 위나라에 중용되었다.
7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크고 작은 성을 61곳을 함락시켰다.
8년, 진소왕(秦昭王)이 서제(西帝)라고 칭하고, 제민왕(齊湣王)이 동제(東帝)라고 칭했으나,

한 달여가 지나서 모두 제호를 포기하고 다시 왕으로 칭했다.
9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신원(新垣)과 곡양(曲陽) 성을 함락시켰다.
10년,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송왕(宋王)이 위나라의 온(溫) 땅에서 죽었다.
12년, 진(秦), 조(趙), 한(韓), 연(燕) 나라와 합동으로 제나라를 공격해, 제서(濟西)에서 제나라 군을 물리치자,

제민왕은 도망했다. 연나라 군이 홀로 임치(臨菑)에까지 이르렀다. 진나라 왕과 서주(西周)에서 회맹했다.
13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안성(安城)을 함락시켰다. 진나라의 군사들이 대량(大梁)까지 왔다가 철수했다.
18년, 진나라가 초(楚)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고, 초경양왕(楚頃襄王)은 진읍(陳邑)으로 천도했다.
19년, 소왕이 죽고, 아들 안희왕(安釐王)이 즉위했다.]

 

安釐王元年,秦拔我兩城.

二年,又拔我二城,軍大梁下,韓來救,予秦溫以和.

三年,秦拔我四城,斬首四萬.

四年,秦破我及韓、趙,殺十五萬人,走我將芒卯.  魏將段干子請予秦南陽以和.

蘇代謂魏王曰:「欲璽者段干子也,欲地者秦也.  今王使欲地者制璽,使欲璽者制地,

魏氏地不盡則不知已.  且夫以地事秦,譬猶抱薪救火,薪不盡,火不滅.」

王曰:「是則然也.  雖然, 事始已行, 不可更矣. 」

對曰:「王獨不見夫博之所以貴梟者, 便則食, 不便則止矣. 

今王曰『事始已行, 不可更』 是何王之用智不如用梟也?」

九年,秦拔我懷.

十年,秦太子外質於魏死.

[안희왕 원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켰다.
2년, 또다시 위나라의 두 성을 함락시켰고, 대량성(大梁城)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한(韓)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왔고, 온성(溫城)을 떼어주고 평화협상을 맺었다.
3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4성을 함락시켜, 4만 명의 목을 베었다.
4년, 진나라가 위나라와 한(韓), 조 나라를 연파하고, 15만 명을 죽였으며, 위나라의 장수 망묘(芒卯)를 쫓아버렸다.
위나라의 장수 단간자(段干子)가 진나라에게 남양(南陽)을 주고 휴전을 청했다.
소대(蘇代)가 위나라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 “작위(爵位)를 노리는 자는 단간자요, 땅을 탐내는 자는 진나라입니다.
지금 왕께서 땅을 탐내는 자로 하여금 작위를 노리는 자를 장악하게 하고, 작위를 노리는 자로 하여금

땅을 탐내는 자를 장악하게 하면, 이것은 위나라의 땅을 완전히 잃지 않는 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땅을 바치면서 진나라를 섬긴다면, 이는 마치 장작을 안고서 불을 끄러 가는 것이니,

장작이 모두 타버리지 않으면 불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 “사실인즉 그러하오. 그러나 일이 이미 행해졌으니, 다시 바꿀 수는 없소”라고 하였다.
소대가 대답해 말하기를 : “왕께서는 박희(博戲)에서 올빼미를 중시하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유리하면 말을 먹어버리고, 불리하면 멈춥니다.

지금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이 이미 행해졌으니, 다시 바꿀 수는 없다’라고 하시면,

이는 왕께서 지혜를 쓰심이 올빼미를 사용하는 지혜만도 못한 것 아니십니까?”라 했다.
9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회읍(懷邑)을 함락시켰다.
10년, 진태자가 위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죽었다.]

 

十一年,秦拔我郪丘.  秦昭王謂左右曰:「今時韓、魏與始孰彊?」對曰:「不如始彊.」

王曰:「今時如耳、魏齊與孟嘗、芒卯孰賢?」 對曰:「不如.」

王曰:「以孟嘗、芒卯之賢,率彊韓、魏以攻秦,猶無柰寡人何也.

今以無能之如耳、魏齊而率弱韓、魏以伐秦,其無柰寡人何亦明矣.」 左右皆曰:「甚然.」

中旗馮琴而對曰:「王之料天下過矣.  當晉六卿之時,知氏最彊,滅范、中行,

又率韓、魏之兵以圍趙襄子於晉陽,決晉水以灌晉陽之城,不湛者三版.  

知伯行水,魏桓子御, 韓康子為參乘.  知伯曰:『吾始不知水之可以亡人之國也,乃今知之.』

汾水可以灌安邑,絳水可以灌平陽.  魏桓子肘韓康子,韓康子履魏桓子,肘足接於車上,

而知氏地分, 身死國亡, 為天下笑.  今秦兵雖彊, 不能過知氏;韓、魏雖弱,尚賢其在晉陽之下也.

此方其用肘足之時也,願王之勿易也!」於是秦王恐.

[안희왕 11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처구(郪丘)를 함락시켰다.
진소왕(秦昭王)이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 “지금 한과 위나라가 초기와 비교해 볼 때 언제가 더 강한가?”라고 하자,
측근들이 대답해 말하기를 : “초기만큼 강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왕이 묻기를 : “지금의 여이(如耳), 위제(魏齊)와 예전의 맹상군, 망묘는 누가 더 현명한가?”라고 하자, 

측근들이 대답해 말하기를 : “여이(如耳), 위제(魏齊)는 예전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소왕이 말하기를 : “맹상군, 망묘가 현명함을 가지고서, 강한 한과 위나라 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한다 해도,

과인을 어찌하지 못했소. 지금 무능한 여이, 위제가 약한 한과 위나라 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한다면,

과인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측근들이 모두 말하기를 :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라고 하자,
중기풍(中旗馮)이 거문고에 기대어 있다가 말하기를 : “왕의 추측은 천하의 형세를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지씨(知氏)가 가장 강해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를 멸하고,

한, 위나라의 군대를 이끌고서 진양에서 조양자(趙襄子)를 포위해, 결진수(決晉水)로서 진양성을 잠기게 하니,

잠기지 않은 곳이 세 판(版) 넓이 뿐이었습니다. 지백이 수세(水勢)를 순시했는데 위환자(魏桓子)가 수레를 몰고,

한강자(韓康子)가 동승했습니다.  지백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는 물이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이를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분수(汾水)는 안읍(安邑)을 잠기게 할 수 있으며,

강수(絳水)는 평양을 잠기게 할 수 있습니다. 위환자는 한강자를 팔꿈치로 치고, 한강자는 위환자를 발로 밟으니,

팔꿈치와 발이 수레에서 마주치자 지씨는 그 땅은 나뉘고,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진나라 군이 비록 강하지만 지씨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며, 한, 위나라가 비록 약하나

진양성의 아래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들이 연합해 진나라에 공격할 때로서,

청컨대 왕께서는 그들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진(秦)나라 왕이 두려워했다.]

 

齊、楚相約而攻魏,魏使人求救於秦,冠蓋相望也,而秦救不至.魏人有唐雎者,年九十餘矣,

謂魏王曰:「老臣請西說秦王,令兵先臣出.」魏王再拜,遂約車而遣之.  唐雎到,入見秦王.

秦王曰:「丈人芒然乃遠至此,甚苦矣!夫魏之來求救數矣,寡人知魏之急已.」

唐雎對曰:「大王已知魏之急而救不發者,臣竊以為用策之臣無任矣.  夫魏,一萬乘之國也,

然所以西面而事秦,稱東藩,受冠帶,祠春秋者,以秦之彊足以為與也.

今齊、楚之兵已合於魏郊矣,而秦救不發,亦將賴其未急也.  使之大急,彼且割地而約從,

王尚何救焉? 必待其急而救之,是失一東藩之魏而彊二敵之齊、楚,則王何利焉?」

於是秦昭王遽為發兵救魏.  魏氏復定.

[제와 초나라가 약속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위나라는 사람을 보내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오가는 사신들이

수레의 덮게가 보일 정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진나라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위나라에는 당저(唐雎)라는 나이가 90여 세 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왕에게 이르기를 : “늙은 이 몸이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 왕을 설득해, 신보다 먼저 진나라의 구원병이 출발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거듭 인사를 하고, 수레를 준비해 당저를 진나라에 파견했다. 당저가 도착해 진나라 왕을 알현했다.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 “노인장께서 아득히 멀리 이곳까지 오시느라 심히 고생하셨구려!

위나라에서 구원요청이 수차례 있었는데, 과인은 위나라의 다급함을 잘 알고 있소.”라고 하자.
당저가 대답해 말하기를 : “왕께서 이미 위나라의 다급함을 아시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것이,

신의 소견으로는 왕을 위해 정책을 행하는 신하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무릇 위나라는 만승의 나라입니다. 그러면서도 서쪽을 바라보고 진나라를 섬기며 동쪽의 번신으로 칭하고 있으며,

관제(官制)를 받아들이고, 봄가을로 조공을 바치는 까닭은 진나라가 강대해 족히 혈맹국이 될 만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초나라의 군대가 이미 연합해 위나라의 근교에 모였는데 진나라는 구원병을 보내지 않고,

또한 다급하지 않다고 핑계만 대고 있습니다. 위나라가 아주 화급을 다투게 되면 위나라는 땅을 떼어주고

협약을 맺을 것인데, 그때가서 왕께서는 어떻게 구원하시겠습니까? 끝까지 다급할 때를 기다려서 그들을 

구하시려면, 이는 동쪽의 속국인 위나라를 잃고, 두 개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제와 초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이니,

그때는 왕께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진소왕은 바로 군대를 보내어 위나라를 구원했다.

위나라는 다시 안정을 찾았다.]

 

趙使人謂魏王曰:「為我殺范痤,吾請獻七十里之地.」魏王曰:「諾.」使吏捕之,圍而未殺.

痤因上屋騎危,謂使者曰:「與其以死痤市,不如以生痤市.

有如痤死,趙不予王地,則王將柰何?故不若與先定割地,然後殺痤.」魏王曰:「善.」

痤因上書信陵君曰:「痤,故魏之免相也,趙以地殺痤而魏王聽之,有如彊秦亦將襲趙之欲,

則君且柰何?」信陵君言於王而出之.  魏王以秦救之故,欲親秦而伐韓,以求故地.

[조나라에서 사람을 시켜서 위나라 왕에게 이르기를 : “ 저희 나라를 위해 범좌(范痤)를 죽여주신다면,

사방 70리의 땅을 왕께 헌상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위나라 왕이 말하기를 : “ 좋다 ”라고 했다. 사람을 시켜서 그를 잡도록 해 그의 집을 포위했으나 죽이지는 않았다.
범좌가 지붕 타고 위로 올라가서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 “ 죽은 범좌를 가지고서 교역을 하느니,

차라리 살아 있는 범좌를 가지고서 교역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조나라는 왕께 땅을 떼어주지 않을 것인데 왕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

그러니 먼저 땅을 떼어받은 연후에 저를 죽여도 됩니다.”라고 하니,
위나라 왕이 말하기를 : “그렇게 하겠다. ”라고 했다.
범좌가 신릉군(信陵君)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 “ 저는 본디 재상에서 면직된 사람인데,

조나라는 위나라 왕에게 땅을 주고서 저를 죽이려고 하며, 위나라 왕은 이를 들어주었으니,

만약에 강력한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답습해 군(君)을 죽이려고 한다면, 군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 ”라고 했다.

이리하여 신릉군이 왕에게 진언해 범좌를 석방시키게 했다.
위나라 왕은 진나라가 구원해 주었기 때문에 진나라와 가까이하고자 했다.

이어 한(韓)나라를 공격해 예전에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했다.]

 

無忌謂魏王曰: 秦與戎翟同俗,有虎狼之心,貪戾好利無信,不識禮義德行.

茍有利焉,不顧親戚兄弟,若禽獸耳,此天下之所識也,非有所施厚積德也.

故太后母也,而以憂死;穰侯舅也,功莫大焉,而竟逐之;兩弟無罪,而再奪之國.

此於親戚若此,而況於仇讎之國乎? 今王與秦共伐韓而益近秦患,臣甚惑之.

而王不識則不明,群臣莫以聞則不忠. 今韓氏以一女子奉一弱主,內有大亂,外交彊秦魏之兵,

王以為不亡乎? 韓亡,秦有鄭地,與大梁鄴,王以為安乎? 王欲得故地,今負彊秦之親,

王以為利乎? 秦非無事之國也,韓亡之後必將更事,更事必就易與利,就易與利必不伐楚與趙矣.

是何也?夫越山踰河,絕韓上黨而攻彊趙,是復閼與之事,秦必不為也.

[위무기(魏無忌)가 위나라 왕에게 고()하기를 : " 진나라는 융족(戎族), 적족(狄族)과 풍습이 같고,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잔폭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며, 신용이 없으며, 예의와 덕행도 모릅니다.

만약 이익이 있다면 친척이나 형제도 돌보지 않을 것이며, 금수와 같음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로

그들은 후덕한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왕의 어머니이신 선태후(宣太后)가 이를 우려하다 죽었으며,
진왕의 외삼촌인 양후는 공로가 지대한데도 결국에는 쫓겨났으며, 두 동생은 무고하게 봉읍을 빼앗겼습니다.

그가 친척에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원수의 나라에게는 어떠하리오! 지금 왕께서 진나라와 함께

한(韓)나라를 공격하면 진나라의 화(禍)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니, 신은 그것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왕께서 이를 모르신다면 이는 곧 명석하지 못한 것이요, 신하들이 이러한 이치를 왕께 설명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곧 불충인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한 여자가 나약한 왕을 보좌하고 있으니, 안으로는 큰 내란이 있고,

밖으로는 강력한 진(秦), 위나라의 군사와 교전하고 있는데, 왕께서는 한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한나라가 망하면, 진나라가 정(鄭) 땅을 차지하고, 대량과 인접하게 되는데, 왕께서는 안전하다고 여기십니까?

왕께서 옛 땅을 찾고자 하시면, 지금 강력한 진나라와의 친분에 의지하면 이익이 된다고 여기십니까?
진이 섬길 만한 나라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반드시 다른 일을 찾을 것이고,

다른 일은 바로 가장 쉽고 가장 이로운 것인데, 쉽고 이로운 일은 분명 초나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어째서입니까?  무릇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한나라의 강한 곳을 뚫고 지나서 강력한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연여(閼與)의 일을 답습하는 것으로, 진나라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若道河內,倍鄴、朝歌,絕漳滏水,與趙兵決於邯鄲之郊,是知伯之禍也,秦又不敢.

伐楚,道涉谷,行三千里.  而攻冥阸之塞,所行甚遠,所攻甚難,秦又不為也.

若道河外,倍大梁,右(蔡左)[上蔡]、召陵,與楚兵決於陳郊,秦又不敢.

故曰秦必不伐楚與趙矣,又不攻衛與齊矣.  夫韓亡之後,兵出之日,非魏無攻已.

秦固有懷、茅、邢丘,城垝津以臨河內,河內共、汲必危;有鄭地,得垣雍,決熒澤水灌大梁,

大梁必亡.  王之使者出過而惡安陵氏於秦,秦之欲誅之久矣.  秦葉陽、昆陽與舞陽鄰,

聽使者之惡之,隨安陵氏而亡之,繞舞陽之北,以東臨許,南國必危,國無害已乎?

夫憎韓不愛安陵氏可也,夫不患秦之不愛南國非也.  異日者,秦在河西晉,國去梁千里,

有河山以闌之,有周韓以閒之.  從林鄉軍以至于今,秦七攻魏,五入囿中,邊城盡拔,文臺墮,

垂都焚,林木伐,麋鹿盡,而國繼以圍.  又長驅梁北,東至陶衛之郊,北至平監.

所亡於秦者,山南山北,河外河內,大縣數十,名都數百. 

秦乃在河西晉,去梁千里,而禍若是矣,又況於使秦無韓,有鄭地,無河山而闌之,

無周韓而閒之,去大梁百里,禍必由此矣.  異日者,從之不成也,楚、魏疑而韓不可得也.

[만약 하내를 지나 업성, 조가를 등지고, 장수(漳水), 부수(滏水)를 건너서, 조나라 군과 한단의 교외에서

교전하는 것은 지백(智伯)의 화(禍)를 재연하는 것으로, 진나라는 이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협곡을 지나서 3천 리를 행군해, 명액의 요새를 공격해야 되는데,

가야 할 길이 매우 멀고, 공격할 곳이 매우 어려우니, 진나라는 이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외(河外)를 지나 대량을 등지고, 우측으로는 상채, 소릉을 끼고서 초나라 군과 진읍의 교외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도 진나라는 감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분명 초와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요,

또한 위(衛), 제(齊)나라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 진나라 군이 출동하는 날에는

반드시 위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나라는 본래 회(懷), 모(茅), 형구(邢丘) 등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궤진(垝津)에 축성했다가 또다시 하내까지 핍박하니 하내의 공(共), 급(汲) 읍도 위태롭습니다.
진나라가 정(鄭) 땅을 차지하고, 원옹(垣雍)을 얻었으며, 형택수(熒澤水)를 몰아서 대량성을 수몰시키면,

대량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왕의 사신이 진나라로 향해 진나라에서 안릉군(安陵君)을 중상(中傷)하니,

진나라가 안릉군을 죽이려고 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진나라의 섭양, 곤양은 위나라의 무양과 인접해 있으니,

사신의 중상을 듣는다면 안릉씨는 망할 것이고, 무양 이북을 돌아서 동으로 허(許) 땅에 이르면

남쪽 지역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니, 위나라에 해가 없겠습니까?  대체로 보아 한나라를 증오하고 안릉군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무방하나, 진나라가 남방의 나라를 아끼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은 잘못입니다.
전에 진나라가 하서(河西)의 옛 진(晉)나라 땅에 있을 때는 대량과 천리나 떨어져 있었으며, 산하가 막고 있었고,

주(周)와 한(韓)나라를 사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임향전투 이후로 지금까지 진나라가 위나라를 일곱 차례 공격해,

5차에 걸쳐서 그들은 위나라의 유(囿) 안까지 들어왔고, 변경 지방의 성읍들을 모두 함락시켰고,

문대도 부수었고, 수도(垂都)도 불태웠으며, 산림을 벌채했고, 산 짐승을 모두 잡아갔고, 수도 대량도 포위했습니다.
또한 빠른 속도로 대량성 북쪽을 지나 동으로 도(陶), 위(衛)의 근교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평감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진나라에게 잃은 땅이 화산(華山)의 남북, 하외·하내로 큰 현이 수십 개이고, 명도(名都)가 수백 개입니다.

진나라가 하서의 옛 진(晉) 땅에 있으면서, 대량과 천리 길을 떨어져 있을 때에도 화가 이와 같았습니다.

또 하물며 진나라를 섬기고 한(韓)나라가 없고, 정(鄭) 땅을 진나라가 가지고 있으며, 산하의 가로막음도 없는

상황에서 주, 한나라의 간격도 없고, 대량으로부터 백리 길 떨어져 있으니, 화는 반드시 여기서 올 것입니다.
일찍이 합종(合縱)이 실패한 것은 초와 위(魏)나라가 서로 의심하고 한나라가 참여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今韓受兵三年,秦橈之以講,識亡不聽,投質於趙,請為天下鴈行頓刃,楚、趙必集兵,

皆識秦之欲無窮也.  非盡亡天下之國而臣海內, 必不休矣.  是故臣願以從事王,

王速受楚趙之約(趙)[而]挾韓之質以存韓, 而求故地, 韓必效之.  此士民不勞而故地得,

其功多於與秦共伐韓,而又與彊秦鄰之禍也.  夫存韓安魏而利天下,此亦王之天時已.

通韓上黨於共、甯,使道安成,出入賦之,是魏重質韓以其上黨也.

今有其賦, 足以富國.  韓必德魏愛魏重魏畏魏, 韓必不敢反魏, 是韓則魏之縣也.

魏得韓以為縣, 衛、大梁、河外必安矣.

今不存韓,二周、安陵必危,楚、趙大破,衛、齊甚畏,天下西鄉而馳秦入朝而為臣不久矣.

[지금 한나라가 진나라의 공격을 3년이나 받고, 진나라가 한나라를 꺾으며 협상을 요구하나,

한나라가 망할 줄을 알면서도 이를 듣지 않고, 조나라에 인질을 보내어 천하의 제후들과 합종해

진나라에 대항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초와 조는 반드시 군대를 모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 진나라의 욕심이 무궁해, 온 천하를 다 멸망시키고, 중원이 진에게 속국이 되지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합종의 책략으로 왕을 섬기고자 하니,

왕께서는 빨리 초, 조나라의 맹약을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인질을 잡고서 한나라를 살려두어,

옛 땅을 요구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이를 돌려줄 것입니다. 이는 군민을 힘들이지 않고 잃은 땅을 되찾는 것으로,

그 공은 진나라와 더불어 한나라를 공멸해, 강력한 진나라와 이웃하는 화를 초래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한나라를 지키고 위나라를 안정해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에는 지금이 왕께 주어진 절호의 기회입니다.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지나 공(共),영(寧) 읍에 이르는 길을 개방해, 그들로 하여금 안성(安城)을 지나게 하고,

출입세를 받으면, 이는 한나라의 상당을 저당잡는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은 세수(稅收)가 있으면 우리는 한나라와 함께 족히 부국이 됩니다.
한나라는 반드시 위나라에 감격하게 되어 위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위나라를 존중하게 되며, 위나라를 두려워하게

되어, 감히 위나라를 배반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한나라가 위나라의 속현(屬縣)이 되는 것입니다.

위나라가 능히 한나라를 속현으로 삼으면 위(衛), 대량(大梁), 하외(河外)는 분명 안정될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동주(東周), 서주(西周)와 안릉(安陵)이 위태롭습니다.

초와 조나라를 대파하면 위(衛)나라와 제(齊)나라가 심히 두려워할 것이고,

천하의 제후들이 서쪽으로 진나라에 달려가서, 진왕을 알현하고 속국이 될 날도 멀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二十年,秦圍邯鄲,信陵君無忌矯奪將軍晉鄙兵以救趙,趙得全.  無忌因留趙.

二十六年,秦昭王卒.

三十年,無忌歸魏,率五國兵攻秦,敗之河外,走蒙驁.  魏太子增質於秦,秦怒,欲囚魏太子增.

或為增謂秦王曰:「公孫喜固謂魏相曰『請以魏疾擊秦, 秦王怒, 必囚增. 魏王又怒, 擊秦, 秦必傷』

今王囚增,是喜之計中也.  故不若貴增而合魏,以疑之於齊、韓.」秦乃止增.

三十一年,秦王政初立.

三十四年,安釐王卒,太子增立,是為景湣王.  信陵君無忌卒.

[안희왕 20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해 신릉군 위무기가 왕명을 가탁해 장군 진비(晉鄙)의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해 조나라가 온전할 수 있었다. 위무기가 이에 조나라에 머물렀다.
26년에는 진소왕(秦昭王)이 죽었다.
30년에는 위무기가 위나라로 돌아와서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해,

하외(河外)에서 진나라를 격파하고 몽오를 쫓아버렸다.
위 태자 증(增)이 진나라에 인질로 있었으므로, 진나라 왕이 노하여 위 태자 증을 가두려고 했다.
어떤 이가 증을 위해 진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 “ 공손희(公孫喜)가 일찍이 위나라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위나라 군을 신속히 파견해 진나라를 공격하십시오. 진나라 왕이 화가 나서 반드시 태자 증을 가둘 

것입니다.  위나라 왕은 또 이 때문에 화가 나서 진나라를 공격할 것이고, 

진나라는 반드시 태자 증을 해칠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지금 왕께서 증을 가두는 것은 공손희의 음모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을 환대해 위나라와 화약을 맺고, 위나라로 하여금 제, 한 나라의 의심을 받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진나라 왕은 비로소 증을 가두지 않았다.
31년에는 진왕(秦王) 정(政)이 새로이 즉위했다.
34년에는 안희왕(安釐王)이 죽고 태자 증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경민왕(景湣王)이다. 신릉군 위무기가 죽었다.]

 

景湣王元年,秦拔我二十城,以為秦東郡.

二年,秦拔我朝歌.  衛徙野王.

三年,秦拔我汲.

五年,秦拔我垣、蒲陽、衍.

十五年,景湣王卒,子王假立.

王假元年,燕太子丹使荊軻刺秦王,秦王覺之. 

三年,秦灌大梁,虜王假,遂滅魏以為郡縣.

[위경민왕 원년, 진나라 군이 위나라의 20여 성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동군(東郡)으로 삼았다.
2년, 진나라 군이 위나라의 조가(朝歌)를 함락시켰다. 위(衛)나라는 야왕(野王)으로 수도를 옮겼다.

3년에는 진나라 군이 위(魏)나라의 급읍(汲邑)을 함락시켰다.
5년, 진나라 군이 위나라의 원읍(垣邑), 포양(蒲陽), 연읍(衍邑)을 함락시켰다.
15년, 위경민왕이 죽고, 아들 위왕가(魏王假)가 즉위했다.
위왕가 원년,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보내어 진나라 왕을 살해하려다가 진나라 왕에게 발각되었다.
3년, 진나라 군이 물을 끌어서 대량을 수몰시키고, 위왕가를 포로로 삼았다.

이리하여 위나라는 멸망당했고 그 땅은 진나라의 군현(郡縣)이 되었다.]

 

太史公曰:

吾適故大梁之墟,墟中人曰:「秦之破梁,引河溝而灌大梁,三月城壞,王請降,遂滅魏.」

說者皆曰魏以不用信陵君故,國削弱至於亡,余以為不然.

天方令秦平海內,其業未成,魏雖得阿衡之佐,曷益乎?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일찍이 옛날의 대량성(大梁城)을 찾았는데, 그곳 사람이 말하기를 ‘진(秦)나라 군이 대량을 공격할 때,

강물을 끌어들여서 대량성을 수몰시킴에, 3개월이 지나자 성이 물에 잠겼고,

위나라 왕이 투항함으로써 위나라가 멸망했다’라고 했는데, 평론가들이 말하기를 ‘위나라가 신릉군(信陵君)을

등용하지 않은 까닭에 나라가 쇠약해졌고, 멸망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허나, 내 생각은 그러하지 않다.
당시에 하늘의 뜻이 진나라 하여금 천하를 평정하게 한 것으로, 아직 그 과업이 완수되지 못했기 때문에
위나라가 비록 대신급의 현신(賢臣)의 보좌를 받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으리요?”]

 

 

※ 위조(魏朝) 역대 제후, 왕 연표

 

 

문후(文侯) (기원전 403 - 기원전 387)
무후(武侯) (기원전 387 - 기원전 371)
혜왕(惠王) (기원전 371 - 기원전 335)
양왕(襄王) (기원전 335 - 기원전 319)
소왕(昭王) (기원전 319 - 기원전 296)
애왕(哀王) (기원전 296 - 기원전 277)
안희왕(安釐王) (기원전 277 - 기원전 243)
경민왕(景閔王) (기원전 243 - 기원전 228)
왕가(王假) (기원전 228 - 기원전 225)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