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6. 田敬仲完世家

第 十六. 田敬 仲完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30. 18:35

 

          史記 世家

 

   第 十六. 田敬仲完世家(전경중완세가)

 


陳完者,陳厲公他之子也.  完生,周太史過陳,陳厲公使卜完,卦得觀之否:

「是為觀國之光,利用賓于王.  此其代陳有國乎?不在此而在異國乎? 非此其身也,在其子孫.

若在異國,必姜姓.  姜姓,四嶽之後.  物莫能兩大,陳衰,此其昌乎?」

厲公者,陳文公少子也,其母蔡女.  文公卒,厲公兄鮑立,是為桓公.

[진완(陳完)은 진려공(陳厲公) 타(他)의 아들이다. 완이 태어났을 때, 마침 주나라 태사가 진(陳)나라를 지나갔다.
진려공이 그로 하여금 완의 점을 치게 해, “관(觀)” 괘에서 “비(否)”괘로 넘어가는 점괘를 얻었다.
괘의 대의는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나라의 빛을 보고서, 왕의 중신(重臣)으로 쓰임이 적합한 괘입니다.

이는 그의 대에 진씨가 나라를 가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대에서가 아니라 그의 자손 대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른 나라에서라면, 필시 강씨(姜氏) 성의 나라일 것입니다. 강씨 성은 사악(四嶽) 중의 한 후예입니다.
어떤 사물이든지 양강(兩姜)이 병존할 수 없으니, 진이 쇠하면, 그가 창성할 것입니다.”
진려공은 진문공(陳文公)의 작은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채(蔡)나라 사람이었다.

문공이 죽은 후에 려공의 형인 포(鮑)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桓公與他異母.  及桓公病,蔡人為他殺桓公鮑及太子免而立他,為厲公.  厲公既立,娶蔡女.

蔡女淫於蔡人, 數歸,厲公亦數如蔡.  桓公之少子林怨厲公殺其父與兄, 乃令蔡人誘厲公而殺之.

林自立, 是為莊公.  故陳完不得立,為陳大夫.

厲公之殺,以淫出國,故《春秋》曰「蔡人殺陳他」,罪之也.

莊公卒,立弟杵臼,是為宣公.

[환공은 그와 이복형제였다. 환공이 병에 걸렸을 때, 채나라 사람이 그를 위해 환공 포와 태자 면(免)을 죽이고

타(他)를 즉위시켜 려공이 되었다. 려공은 즉위한 뒤에 채나라 여인을 아내로 취했다.

그녀가 채나라 남자와 간음하며, 여러 차례 채나라로 돌아가니, 려공도 자주 채나라에 가서 음란한 행동을 했다.

환공의 작은아들 임(林)이 려공이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채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려공을 유혹하게 해 살해했다.
임이 스스로 즉위해, 장공(莊公)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진완은 즉위하지 못하고, 진나라의 대부가 되었던 것이다.
려공이 살해된 것은 음란해 출국했기 때문으로, 『춘추(春秋)』에는 “채나라 사람이 진타를 죽였다”라고 하여,

그에게 죄를 물었다.  장공이 죽고, 동생 저구(杵臼)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선공(宣公)이다.]

 

宣公[二]十一年,殺其太子御寇.  御寇與完相愛,恐禍及己,完故奔齊.

齊桓公欲使為卿,辭曰:「羈旅之臣幸得免負檐,君之惠也,不敢當高位.」桓公使為工正.

齊懿仲欲妻完,卜之, 占曰:「是謂鳳皇于蜚, 和鳴鏘鏘. 有媯之後, 將育于姜.  并于正卿. 

八世之後, 莫之與京. 」卒妻完.  完之奔齊, 齊桓公立十四年矣.

完卒,謚為敬仲.  仲生稚孟夷.  敬仲之如齊,以陳字為田氏.

[선공 11년, 태자 어구(禦寇)를 죽였다. 어구는 진완과 관계가 친밀했기에,

진완도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제(齊)나라로 도망갔다. 제환공(齊桓公)이 그를 경(卿)으로 삼으려 하자,

사양하며 말하기를 : “ 떠돌이 객이 된 신이 요행히 경제적인 부담을 면한 것도 왕의 은혜인데,

감히 높은 직책을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환공이 그를 공정(工正)으로 삼았다.
제나라의 대부 의중(懿仲)이 여식을 진완에게 아내로 주려고 점을 쳤더니, 점괘에 이르기를

“ 이는 봉황이 비상하는 듯하고, 화음이 조화를 이루어서 내는 기쁨의 소리이다.
유규씨(有嬀氏)의 후예로서 장차 강씨(姜氏) 성의 나라에서 성장할 것이다.

5대 이후로 창성해, 경(卿)의 지위에 이를 것이다. 8대 이후에는 그보다 더 높은 지위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의중은 자신의 여식을 완(完)에게 시집보냈다. 완이 제나라로 도망한 것이 제환공 14년의 일이다.
완이 죽자 경중(敬仲)이라는 시호(諡號)가 추증되었다. 경중은 치맹이(穉孟夷)를 낳았다.

경중이 제나라로 도망하면서, 성을 진(陳)에서 전(田)으로 바꾸었다.]

 

田稚孟夷生湣孟莊,田湣孟莊生文子須無.  田文子事齊莊公.

晉之大夫欒逞作亂於晉,來奔齊,齊莊公厚客之.

晏嬰與田文子諫,莊公弗聽.   文子卒,生桓子無宇.  田桓子無宇有力,事齊莊公,甚有寵.

無宇卒,生武子開與釐子乞.  田釐子乞事齊景公為大夫,其收賦稅於民以小斗受之,

其(粟)[稟]予民以大斗,行陰德於民,而景公弗禁.  由此田氏得齊眾心,宗族益彊,民思田氏.

[전치맹이(田穉孟夷)는 전민맹장(田湣孟荘)을 낳았고, 전민맹장은 전문자수무(田文子須無)를 낳았다.

전문자(田文子)가 제장공(齊莊公)을 섬겼다. 진(晉)나라의 대부 난령(欒逞)이 진나라에서 난을 일으키고,

제나라로 도망하자, 제장공이 그를 후히 대접했다. 안영(晏嬰)과 전문자가 간언했으나, 장공이 듣지 않았다.
문자가 죽었는데, 그는 환자무우를 낳았다. 환자무우는 제 장공을 섬겼는데, 힘이 세어 아주 총애를 받았다.

무우가 죽었는데, 그는 무자개(武子開)와 희자기(釐子乞)를 낳았다. 전희자기는 제경공을 섬겨 대부가 되었고,
백성들로부터 조세를 거둘 때에는 작은 말(小斗)로 거두고, 백성들에게 베풀 때에는 큰 말(大斗)로 하여,

은연중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고, 경공도 이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전씨가 제나라의 민심을 얻었고, 전씨 일족은 날로 강대해져, 민심은 전씨에게로 갔다.]

 

晏子數諫景公,景公弗聽.  已而使於晉,與叔向私語曰:「齊國之政卒歸於田氏矣.」

晏嬰卒後,范、中行氏反晉.  晉攻之急,范、中行請粟於齊.  田乞欲為亂,樹黨於諸侯,

乃說景公曰:「范、中行數有德於齊,齊不可不救.」齊使田乞救之而輸之粟.

景公太子死,後有寵姬曰芮子,生子荼.  景公病,命其相國惠子與高昭子以子荼為太子.

景公卒,兩相高、國立荼,是為晏孺子.

[안자(晏子)가 수 차례 경공에게 간언을 했으나, 경공이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안자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향(叔向)과 사담(私談)으로 말하기를 :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에 가서는 전씨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영이 죽은 후에 범씨(范氏), 중항씨(中行氏)가 진(晉)나라를 배반했다. 진나라의 공격이 극심해지자,

범씨, 중항씨가 제나라에 식량을 청했다. 전기가 반란에 뜻이 있어서, 제후들과 결속해, 경공을 설득해 말하기를 :

“ 범씨, 중항씨가 우리에게 수차례에 걸쳐서 덕을 행했는데, 우리가 구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니,

제나라는 전기(田乞)로 하여금 그들을 돕게 해 식량을 보냈다.
경공의 태자가 죽었다. 경공에게는 후에 예자(芮子)라고 불린 총희(寵姬)가 있었다. 그녀가 아들 다(茶)를 낳았다.
경공은 병이 들자, 재상 국혜자(國惠子)와 고소자(高昭子)에게 명해 다(茶)를 태자로 세웠다.
경공이 죽고, 두 재상이 다(茶)를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안유자(晏孺子)이다.]

 

而田乞不說,欲立景公他子陽生.  陽生素與乞歡.  晏孺子之立也, 陽生奔魯.

田乞偽事高昭子、國惠子者,每朝代參乘,言曰:「始諸大夫不欲立孺子.  孺子既立,君相之,

大夫皆自​危謀作亂.」 又紿大夫曰:「高昭子可畏也,及未發先之.」諸大夫從之.

田乞、鮑牧與大夫以兵入公室,攻高昭子.  昭子聞之,與國惠子救公.  公師敗.

田乞之眾追國惠子,惠子奔莒,遂返殺高昭子.  晏(孺子)[圉]奔魯.

[전기는 이를 불쾌히 여기고, 경공의 다른 아들 양생을 옹립하려고 했다. 양생은 평소에 전기와 사이가 좋았다.

안유자가 즉위하자, 양생은 노(魯)나라로 도망쳤다. 전기는 거짓으로 고소자와 국혜자를 섬기면서,
항상 입조(入朝)할 때면 수행하며 말하기를 : “처음에는 여러 대부들이 유자를 옹립하려 하지 않았는데,

유자가 이미 즉위했고, 그대가 재상이 되니, 대부들이 두려워 모두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라고 하는 동시에,
대부들에게 말하기를  : “ 고소자는 무서운 사람이니, 그가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처치합시다.”라고 하여,

여러 대부들이 그를 따랐다. 전기, 포목과 대부들이 군대를 이끌고 공실(公室)로 들어가서, 고소자를 공격했다.

소자가 이를 듣고, 국혜자와 더불어서 안유자를 구하려고 했지만, 공실의 군대가 패배했다.

전기의 무리가 국혜자를 쫓아내니, 국혜자는 거(莒)나라로 도망쳤다.

이에 전기의 무리가 다시 돌아와서 고소자를 죽였다. 안영의 아들 안어(晏圉)는 노(魯)나라로 도망쳤다.]

 

田乞使人之魯,迎陽生.  陽生至齊,匿田乞家.

請諸大夫曰:「常之母有魚菽之祭,幸而來會飲.」會飲田氏.

田乞盛陽生橐中,置坐中央.  發橐,出陽生,曰:「此乃齊君矣.」大夫皆伏謁.

將盟立之,田乞誣曰:「吾與鮑牧謀共立陽生也.」 鮑牧怒曰:「大夫忘景公之命乎?」

諸大夫欲悔,陽生乃頓首曰:「可則立之,不可則已.」

鮑牧恐禍及己,乃復曰:「皆景公之子,何為不可!」 遂立陽生於田乞之家,是為悼公.

乃使人遷晏孺子於駘,而殺孺子荼.  悼公既立,田乞為相,專齊政.

[전기가 사람을 노나라로 보내어, 양생을 영접했다. 양생은 제나라로 돌아와서 전기의 집에 숨어 있었다.

전기가 제후들에게 청하기를 : “전상의 어머니가 차례 상을 차렸으니, 와서 드시면 영광이겠습니다.”라고 하니, 

대부들이 전씨 집에 와서 회식을 했다. 전기가 양생을 자루에 넣어 자리의 한가운데에 놓았다.

자루를 풀었더니, 양생이 나왔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 “내가 바로 제나라의 군주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들이 모두 엎드려 조아렸다. 곧 그를 옹립하려는데,

전기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 “나와 포목이 양생을 옹립하기로 모의했다.”라고 하니,

포목이 노하여 말하기를 : “대부께서는 경공의 명을 잊었소?”라고 했다. 여러 대부들이 돌이키려 하자,
양생은 이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가능하면 나를 옹립하고, 불가능하면 그만두시오”라고 하였다.
포목은 자신에게 닥칠 화를 두려워해, 다시 말하기를 : “모두가 경공의 아들인데, 어찌 안 되리오!”라고 하고,

이에 전기의 집에서 양생을 옹립하니, 그가 바로 도공(悼公)이다.

이에 사람을 시켜서 안유자를 태(駘) 지방으로 보냈다가, 얼마 뒤 어린 안유자 다(茶)를 죽였다.

도공이 즉위하자 전기가 재상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좌지우지 하였다.]

 

四年,田乞卒,子常代立,是為田成子.  鮑牧與齊悼公有郄,弒悼公.

齊人共立其子壬,是為簡公.  田常成子與監止俱為左右相,相簡公.

田常心害監止,監止幸於簡公,權弗能去. 於是田常復修釐子之政,以大斗出貸,以小斗收.

齊人歌之曰:「嫗乎采芑,歸乎田成子!」

齊大夫朝,御鞅諫簡公曰:「田、監不可并也,君其擇焉.」君弗聽.

[도공 4년, 전기가 죽고, 아들 상(常)이 아버지의 대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전성자(田成子)이다.
포목이 제도공과 불화가 생겨서, 도공을 시해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함께 그의 아들 임(壬)을 옹립하니,

그가 바로 간공(簡公)이다. 전상성자(田常成子)와 감지(監止)가 좌우 재상이 되어 간공을 보필했다.

전상은 감지를 시기했지만, 감지가 간공의 총애를 받아서, 권세를 빼앗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전상은 다시 희자(釐子)의 정치를 재현해, 대두(大斗)로 대여하고, 소두(小斗)로 거두어들였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를 노래로 부르기를 : “할머니가 뜯어온 나물들은 모두 전성자에게 돌아가리라!”라고 했다.

제나라의 대부들이 입조하자, 어앙이 간공에게 간언하기를 :전상성자와 감지를 같이 재상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군왕께서는 하나를 선택하셔야 됩니다.”라고 했으나, 간공은 듣지 않았다.]

 

子我者,監止之宗人也,常與田氏有卻.  田氏疏族田豹事子我有寵.

子我曰:「吾欲盡滅田氏適,以豹代田氏宗.」

豹曰:「臣於田氏疏矣.」不聽.  已而豹謂田氏曰:「子我將誅田氏,田氏弗先,禍及矣.」

子我舍公宮,田常兄弟四人乘如公宮,欲殺子我.  子我閉門.  簡公與婦人飲檀臺,將欲擊田常.

太史子餘曰:「田常非敢為亂,將除害.」簡公乃止.  田常出,聞簡公怒,恐誅,將出亡.

田子行曰:「需,事之賊也.」田常於是擊子我.

子我率其徒攻田氏, 不勝, 出亡.  田氏之徒追殺子我及監止.  簡公出奔, 田氏之徒追執簡公于徐州.

簡公曰:「蚤從御鞅之言,不及此難.」田氏之徒恐簡公復立而誅己,遂殺簡公。簡公立四年而殺.

於是田常立簡公弟驁,是為平公.

[자아(子我)라는 사람은 감지의 동족인데, 전씨와 사이가 나빴다.

그런데 전씨의 먼 동족 전표(田豹)는 자아를 섬기며 그의 총애를 받았다.

자아가 말하기를 : “나는 전씨의 친족들을 모두 멸족시키려 하니, 전표가 전씨의 종가를 대신하라.”라고 하니,

전표가 말하기를 : “저는 전씨와 멉니다.”라고 하며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전표가 전씨에게 이르기를 :

“ 자아가 전씨를 죽이려고 하는데, 전씨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자아가 공실에 들었을 때, 전상의 4형제가 공궁(公宮)에 들어가서 자아를 죽이려고 했다. 자아가 급히 문을 닫았다.
간공은 부인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보내어 전상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태사 자여(子余)가 말하기를 : “전상은 감히 난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간공이 멈추었다.  전상이 물러나와서 간공이 진노했다는 말을 듣고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도망치려고 했다.
전자행(田子行)이 말하기를 : “늦추세요. 이는 일을 망치는 것입니다”라고 해, 전상이 이에 자아를 공격했다.
자아가 자기를 따르는 무리와 전씨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전씨의 무리들이 그들을 쫓아서

자아와 감지를 죽였다. 간공이 도망치자, 전씨의 무리들은 서주(徐州)까지 간공을 쫓아가서 잡았다.

간공이 말하기를 :  “전에 어앙의 말을 들었던들 지금의 재난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했다.
전씨의 무리들은 간공이 다시 자리에 올라, 자신들을 죽일 것을 두려워해, 간공을 죽였다.

이로써 간공은 즉위 4년 만에 죽은 것이다.

이리하여 전상은 간공의 동생인 오를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평공(平公)이다.]

 

平公即位,田常為相. 田常既殺簡公,懼諸侯共誅己,乃盡歸魯、衛侵地,

西約晉、韓、魏、趙氏,南通吳、越之使,修功行賞,親於百姓,以故齊復定.

田常言於齊平公曰:「德施人之所欲,君其行之;刑罰人之所惡,臣請行之.」

行之五年,齊國之政皆歸田常.  田常於是盡誅鮑、晏、監止及公族之彊者,

而割齊自安平以東至瑯邪,自為封邑.  封邑大於平公之所食.

田常乃選齊國中女子長七尺以上為後宮,後宮以百數,而使賓客舍人出入後宮者不禁.

及田常卒,有七十餘男.  田常卒,子襄子盤代立,相齊.  常謚為成子.

[평공이 즉위하고, 전상이 재상이 되었다. 전상은 이미 간공을 죽였으므로,

제후들이 공모해서 자신을 죽일 것이 두려워서 노(魯), 위(衛) 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고,
서쪽으로는 진(晉), 한(韓), 위(魏), 조(趙) 나라와 화약을 맺고, 남쪽으로는 오(吳), 월(越) 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우호를 다졌으며, 논공행상을 백성들에게 베풀어서, 제나라는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전상이 제 평공(齊平公)에게 말하기를 : “ 덕치는 백성들의 바람입니다. 임금께서는 그것을 행하십시오.

형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니, 신이 집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행한 지 5년에 되어서 제나라의 정권은 모두 전상에게 귀속되었다.

전상은 이리하여 포(鮑), 안(晏), 감지(監止)의 공족(公族)들 가운데 세력이 강한 자들를 모두 죽이고,

제나라의 영토 중 안평(安平)의 동쪽에서 낭야(郎邪)에 이르는 땅을 자신의 봉읍으로 했다.

그 봉읍은 평공의 식읍보다 컸다. 전상은 제나라의 여인 중에서 키가 7척 이상 되는 이를 후궁으로 삼으니,

후궁이 1백여 명이나 되었고, 빈객과 측근들로 하여금 후궁에 드나드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았다.

전상이 죽을 때 아들이 70여 명이나 되었다. 전상이 죽고, 아들 양자반이 대를 이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전상의 시호는 성자(成子)이다.]

 

田襄子既相齊宣公,三晉殺知伯,分其地.

襄子使其兄弟宗人盡為齊都邑大夫,與三晉通使,且以有齊國.

襄子卒,子莊子白立. 田莊子相齊宣公.

宣公四十三年,伐晉,毀黃城,圍陽狐.

明年,伐魯、葛及安陵.

明年,取魯之一城.  莊子卒,子太公和立.  田太公相齊宣公.

宣公四十八年,取魯之城.

明年,宣公與鄭人會西城.  伐衛,取毋丘.

宣公五十一年卒,田會自廩丘反.  宣公卒,子康公貸立.

貸立十四年,淫於酒婦人,不聽政.  太公乃遷康公於海上,食一城,以奉其先祀.

明年,魯敗齊平陸.

[전양자(田襄子)가 이미 제선공의 재상이 되었고, 삼진(三晉)이 지백(知伯)을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양자는 그의 형제 친족들로 하여금 모두 제나라의 도시와 지방의 대부가 되게 하여,

삼진과 서로 사신 왕래를 함으로써 온 제나라 땅을 차지한 듯했다.
양자가 죽고, 아들 장자(莊子) 백(白)이 대를 이었다. 전장자(田莊子)는 제선공의 재상이 되었다.
선공 43년, 진(晉)나라를 공격해, 황성(黃城)을 함락시키고, 양호(陽狐)를 포위했다.
다음해, 노(魯)나라의 갈(葛)과 안릉(安陵)을 공격했다.

다음해, 노나라의 성 하나를 탈취했다.
장자가 죽고, 아들 태공화(太公和)가 대를 이었다. 전태공은 제선왕의 재상이 되었다.
선공 48년, 노나라의 성(郕) 땅을 탈취했다. 다음해에 선공은 정(鄭)나라 사람과 서성(西城)에서 회맹했다.

또 위(衛)나라를 공격해, 무구를 취했다. 선공은 51년에 죽었고, 전회(田會)가 늠구(廩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선공이 죽고, 아들 강공(康公) 대(貸)가 즉위했다. 대(貸)는 14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술과 여자에 빠져서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태공은 이에 강공을 해상(海上)으로 쫓고, 성 하나를 식읍으로 주어,

조상들을 받들게 했다. 다음해, 노나라가 제나라의 평륙(平陸)을 함락시켰다.]

 

三年,太公與魏文侯會濁澤,求為諸侯.

魏文侯乃使使言周天子及諸侯,請立齊相田和為諸侯.  周天子許之. 

康公之十九年,田和立為齊侯,列於周室,紀元年.  齊侯太公和立二年,和卒,子桓公午立.

[강공 3년, 태공과 위문후(魏文侯)가 탁택(濁澤)에서 회맹해, 전씨를 제후로 올려줄 것을 청했다.
위문후는 이에 사자(使者)로 하여금 주 천자(周天子)와 제후들에게 알리어,

제나라의 재상 전화(田和)를 제후로 올릴 것을 청했다. 주 천자가 이를 허락했다.
강공 19년, 전화가 제나라의 제후로 봉해졌고, 주 왕실의 제후에 올라 개원(改元)해 원년으로 삼았다.
제후(齊侯) 태공 화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죽고, 아들 환공(桓公) 오(午)가 즉위했다.]

 

桓公午五年,秦、魏攻韓,韓求救於齊.

齊桓公召大臣而謀曰:「蚤救之孰與晚救之?」 騶忌曰:「不若勿救.」

段干朋曰:「不救,則韓且折而入於魏,不若救之.」

田臣思曰:「過矣君之謀也!秦、魏攻韓、楚,趙必救之,是天以燕予齊也.」 

桓公曰:「善」. 乃陰告韓使者而遣之.  韓自以為得齊之救,因與秦、魏戰.

楚、趙聞之,果起兵而救之.  齊因起兵襲燕國,取桑丘.

六年,救衛.  桓公卒,子威王因齊立.  是歲,故齊康公卒,絕無後,奉邑皆入田氏.

[환공 5년, 진(秦), 위(魏) 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해,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환공이 대신들을 소집해 모의해 말하기를 : “한나라를 일찍 구해 줄 것인가, 아니면 늦게 구원할 것인가?”하니,
추기(騶忌)가 말하기를 : “구원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고,  단간붕(段干朋)이 말하기를 :

“ 구원하지 않으면, 한나라를 쪼개어 위(魏)에 넘길 것이므로, 구원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전신사(田臣思)가 말하기를 : “ 군(君)들의 모의는 지나침이 있군요! 진, 위 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와 조나라가 분명히 구원할 것이므로, 이는 하늘이 제나라에게 연나라를 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말하기를 : “맞소”라고 하고, 이에 한나라의 사자(使者)에게 구원할 것을 몰래 알려주고, 그를 돌려보냈다.

한나라도 제나라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알고서, 진(秦), 위(魏) 나라와 교전했다.

초나라와 조나라에서 이를 듣고는, 과연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도왔다.

제나라는 이때를 이용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습격해, 연나라의 상구(桑丘)를 취했다.
6년, 위(衛)나라를 구원했다. 제환공이 죽고, 아들 위왕(威王) 인제(因齊)가 즉위했다.

이해에 원래 있던 제강공이 죽고, 그의 후손이 없어서, 봉읍이 모두 전씨에게 들어왔다.]

 

齊威王元年,三晉因齊喪來伐我靈丘.

三年,三晉滅晉後而分其地.

六年,魯伐我,入陽關.  晉伐我,至博陵.

七年,衛伐我, 取薛陵.

九年,趙伐我,取甄.  威王初即位以來,不治,委政卿大夫, 九年之閒,諸侯并伐, 國人不治.

於是威王召即墨大夫而語之曰:「自子之居即墨也,毀言日至.  然吾使人視即墨,田野辟,

民人給,官無留事,東方以寧.  是子不事吾左右以求譽也.」封之萬家.

[제위왕(齊威王) 원년, 삼진(三晉)이 제나라의 상사(喪事)를 틈타서 제나라의 영구(靈丘)를 침공했다.
3년, 삼진이 진(晉)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6년, 노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양관(陽關)까지 들어왔다.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박릉(博陵)에 이르렀다.
7년, 위(衛)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설릉(薛陵)을 차지했다.
9년, 조(趙)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견(甄)을 차지했다.
위왕(威王)이 처음 즉위한 이래로 국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경대부(卿大夫)들에게 국정을 위탁하는데,

9년 동안에 제후들이 서로 공격해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 그러자 위왕은 즉묵(卽墨)의 대부를 불러서

말하기를 : “ 그대가 즉묵을 다스린 뒤로,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끊이지 않았소. 그러나 과인이 사람을 시켜서

즉묵을 보니, 밭을 개간해 백성들에게 주고, 관에 공무가 쌓인 일도 없이, 동쪽은 태평했소.
그럼에도 이러한 헛소문이 퍼진 것은 다만 그대가 과인의 측근들에게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라고 하고,

그에게 만호의 식읍을 봉했다.]

 

召阿大夫語曰:「自子之守阿, 譽言日聞. 然使使視阿, 田野不辟, 民貧苦. 昔日趙攻甄, 子弗能救.

衛取薛陵,子弗知. 是子以幣厚吾左右以求譽也.」 是日,烹阿大夫,及左右嘗譽者皆并烹之.

遂起兵西擊趙、衛,敗魏於濁澤而圍惠王.  惠王請獻觀以和解,趙人歸我長城.

於是齊國震懼,人人不敢飾非,務盡其誠.  齊國大治.  諸侯聞之,莫敢致兵於齊二十餘年.

騶忌子以鼓琴見威王,威王說而捨之右室.

[위왕은 아읍(阿邑)의 대부를 불러 말하기를 : “ 그대가 아읍을 통치하는데, 칭찬의 소리가 날마다 전해지고 있어,

사람을 시켜서 아읍을 지켜보니, 밭은 개간하지 않고, 백성들은 빈곤했소. 전에 조나라가 견(甄)을 공격했을 때에도,

그대는 구원하지 못했소. 위(衛)나라가 설릉을 차지했을 때에도 그대는 알지 못했소.
이는 그대가 과인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어 명예를 구한 것이오.”라고 하고,

이날 아읍의 대부를 큰 솥에 넣어 삶아(烹刑) 죽였다. 아울러서 그를 칭찬했던 측근들도 모두 팽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조(趙), 위(衛) 나라를 공격했고, 위(魏)나라를 탁택(濁澤)에서 패배시키고,

위혜왕(魏惠王)을 포위했다. 혜왕이 관(觀) 땅을 헌납하고 협상을 청했고, 조나라는 제나라에 장성을 돌려주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국위를 떨치고, 사람들은 모두 가식과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성심껏 임무를 다했다.

비로소 제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는 20여 년 동안 제나라에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추기자(騶忌子)가 거문고를 가지고서 위왕(威王)을 만나니, 위왕이 기쁘게 그를 궁내 우실(右室)에 머물게 했다.]

 

須臾,王鼓琴,騶忌子推戶入曰:「善哉鼓琴!」

王勃然不說,去琴按劍曰:「夫子見容未察,何以知其善也?」

騶忌子曰:「夫大弦濁以春溫者,君也;小弦廉折以清者,相也;攫之深,醳之愉者,政令也;

鈞諧以鳴, 大小相益,回邪而不相害者,四時也:吾是以知其善也.」

王曰:「善語音.」 騶忌子曰:「何獨語音,夫治國家而弭人民皆在其中.」

王又勃然不說曰:「若夫語五音之紀, 信未有如夫子者也. 若夫治國家而弭人民, 又何為乎絲桐之閒?

騶忌子曰:「夫大弦濁以春溫者,君也;小弦廉折以清者,相也;攫之深而捨之愉者,政令也;

鈞諧以鳴, 大小相益,回邪而不相害者,四時也.  夫復而不亂者,所以治昌也;

連而徑者,所以存亡也:故曰琴音調而天下治.  夫治國家而弭人民者,無若乎五音者.」

王曰:「善.」 騶忌子見三月而受相印.

[얼마 후에, 왕이 거문고를 타자, 추기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하기를 : “거문고를 정말 잘 타십니다.”하였다.

왕이 불끈 화를 내면서, 거문고를 놓고, 대검을 잡고 말하기를 :

“무릇 그대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잘 타는 줄 아시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 대체로 대현(大弦)은 넓으면서도 봄과 같이 온화해 군(君)에 비유되며,

소현(小弦)은 청렴하고 맑으니 재상에 비유됩니다. 잡을 때에는 깊게 잡고 놓을 때에는 서서히 풀어주니

법령에 비유되고, 모두 함께 소리를 내지만 크고 작음이 서로 다르며 굴절을 일으키면서 서로의 음을 해치지 않음이

4계절과 같으니, 제가 이로써 훌륭한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 그대는 음률을 잘 구별하는구려.”라고 하자,
추기자가 말하기를 : “어찌 음률만이겠습니까?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도 이에 속합니다.”하였다.

왕이 불끈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그렇다면 과인이 5음(五音)을 다스림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과인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어찌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소?”하자.

추기자가 대답하기를 : “대저 대현(大弦)은 넓으면서도 봄과 같이 온화해 군(君)에 비유되며,

소현(小弦)은 청렴하고 맑으니 재상에 비유됩니다. 잡을 때에는 깊게 잡고 놓을 때에는 서서히 풀어주니

법령에 비유되고, 모두 함께 소리를 내지만 크고 작음이 서로 다르며 굴절을 일으키면서 서로의 음을 해치지 않음이

4계절과 같습니다. 대체로 반복되면서도 어지럽지 않은 까닭은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창성함이요,
상하좌우가 잘 이어지는 것은 보존되고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문고의 음이 다스려지면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무릇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무고한 것은 바로 5음을 다스리는 이치와 같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왕이 말하기를 : “그렇소”라고 하였다. 추기자는 위왕을 만난 지 3개월 만에 재상의 인(印)을 받았다.]

 

淳于髡見之曰:「善說哉!髡有愚志,願陳諸前.」

騶忌子曰:「謹受教.」 淳于髡曰:「得全全昌,失全全亡.」

騶忌子曰:「謹受令,請謹毋離前.」淳于髡曰:「狶膏棘軸,所以為滑也,然而不能運方穿.」

騶忌子曰:「謹受令,請謹事左右.」淳于髡曰:「弓膠昔干,所以為合也,然而不能傅合疏罅.」

騶忌子曰:「謹受令,請謹自附於萬民.」淳于髡曰:「狐裘雖敝,不可補以黃狗之皮.」

騶忌子曰:「謹受令,請謹擇君子, 毋雜小人其閒.」

淳于髡曰:「大車不較, 不能載其常任;琴瑟不較, 不能成其五音.」

騶忌子曰:「謹受令,請謹修法律而督姦吏.」

淳于髡說畢,趨出,至門,而面其仆曰:「是人者,吾語之微言五,其應我若響之應聲,

是人必封不久矣.」 居朞,封以下邳,號曰成侯.

[순우곤(淳于髡)이 추기자를 보고 말하기를 : “말을 참 잘하시는군요! 제게 소견이 있는데,
선생 앞에서 진설(陳說)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추기자가 말하기를 :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 “신하된 자가 군(君)에 대한 예절을 다하면, 몸과 명예가 창성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잃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 삼가 가르침을 받겠으며, 절대로 그 말씀을 마음에서 멀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 “ 돼지기름을 가시나무에 발라서 바퀴 축에다가 칠하는 것은

바퀴의 회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인데, 만약에 구멍을 각이 지게 뚫으면 돌아가지를 않습니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측근들로 하여금 잘 받들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 “ 활을 만들 때 잘 마른 나무에 아교를 칠하는 것은, 잘 맞게 하기 위함인데,

공간이 비고 틈새가 생기면 메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스스로를 온 백성과 거리가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 “ 늑대 가죽옷이 해어졌다고, 누런 개가죽으로 기우면 안 됩니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임명할 때에는 군자를 선택하게 하고,

잡다한 소인배가 그 속에 끼지 못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 “ 큰 수레일지라도 균형을 바로잡지 않으면 본래 실을 수 있는 능력만큼 싣지 못하고,

현악기는 음을 맞춰 놓지 않으면 5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법률을 잘 다듬고, 간사한 관리들을 잘 감독하겠습니다.”했다.

순우곤이 말을 마친 후에 급히 나가면서, 대문에 이르러서 하인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

“내가 5 가지 비유를 했는데도, 그가 나에게 대답한 말들이 마치 소리의 메아리가 그 소리에 호응하는 것같아

이 사람은 멀지 않아서 틀림없이 봉상(封賞)을 받을 것이로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추기자는 과연 하비(下邳)를 봉읍으로 받았고, 성후(成侯)로 불렸다.]

 

威王二十三年,與趙王會平陸.

二十四年,與魏王會田於郊.  魏王問曰:「王亦有寶乎?」威王曰:「無有.」

梁王曰:「若寡人國小也,尚有徑寸之珠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奈何以萬乘之國而無寶乎?」

威王曰:「寡人之所以為寶與王異.  吾臣有檀子者,使守南城,則楚人不敢為寇東取,

泗上十二諸侯皆來朝.  吾臣有子者,使守高唐,則趙人不敢東漁於河.

吾吏有黔夫者,使守徐州,則燕人祭北門,趙人祭西門,徙而從者七千餘家.

吾臣有種首者,使備盜賊,則道不拾遺.  將以照千里,豈特十二乘哉!」梁惠王慚,不懌而去.

[위왕(威王) 23년, 조나라 왕과 평륙에서 회맹했다.
24년, 위(魏)나라 왕과 교외에서 사냥 회동을 했다.

위(魏)나라 왕이 묻기를 : “왕께서도 보물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위왕(威王)이 대답하기를 : “ 없습니다”라고 했다.
양왕(梁王)이 말하기를 : “ 과인과 같이 작은 나라에서도 1촌(寸) 되는 진주가 수레 앞뒤에서 번뜩이는 것이

열두 수레요, 매 수레마다 열 개씩 있습니다. 어찌해 만승의 나라에서 보석이 없단 말입니까 ? ”라고 하니,
위왕(威王)이 말하기를 : “ 과인이 보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왕과 다릅니다.

과인의 신하 중에 단자(檀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남쪽의 성을 지키게 하면,

초나라가 감히 동쪽의 땅을 쳐들어오지 못하고, 사수(泗水)가의 12제후(十二諸侯)가 모두 조공(朝貢)을 합니다.
또 과인의 신하 중에는 반자(盼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고당(高唐) 지방을 지키도록 하면,

조나라 사람들이 감히 동쪽으로 와서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과인의 신하 중에는 검부(黔夫)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서주(徐州)를 지키게 하면,

우리가 침입할까 두려워서 연(燕)나라 사람들이 북문에 제사를 올리고,
조나라 사람들이 서문에 제사를 올리며, 그를 쫓는 무리가 7천여 호에 이릅니다.  과인의 신하 중에는 

종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도적들을 막도록 하면, 길거리 떨어진 것도 주워가지 않습니다.

이는 천리를 밝히는 것인데, 어찌 열두 수레만을 밝힐 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양혜왕(梁惠王)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불쾌한 표정을 짓고 가버렸다.]

 

二十六年,魏惠王圍邯鄲,趙求救於齊.  齊威王召大臣而謀曰:「救趙孰與勿救?」

騶忌子曰:「不如勿救.」 段干朋曰:「不救則不義,且不利.」  威王曰:「何也?」

對曰:「夫魏氏并邯鄲, 其於齊何利哉?且夫救趙而軍其郊, 是趙不伐而魏全也.

故不如南攻襄陵以獘魏,邯鄲拔而乘魏之獘.」威王從其計.

其後成侯騶忌與田忌不善,公孫閱謂成侯忌曰:「公何不謀伐魏,田忌必將. 戰勝有功,

則公之謀中也;戰不勝,非前死則後北,而命在公矣.」 於是成侯言威王,使田忌南攻襄陵.

十月,邯鄲拔,齊因起兵擊魏,大敗之桂陵.  于是齊最彊于諸侯,自稱為王,以令天下.

[위왕(威王) 26년, 위혜왕(魏惠王)이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위왕이 대신들을 소집해, 모의한 후 말하기를 : “ 구원하는 것이 좋겠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 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했고,
단간붕(段干朋)은 말하기를 : “ 구원하지 않으면 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이롭지도 못합니다.”라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 “ 어째서 그러한가?”라고 하니,

단간붕이 대답하기를 : “ 위씨(魏氏)가 한단을 병점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차라리 조나라를 구원해 조나라의 교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위나라의 군대는 온전하게 보전됩니다. 그러므로 남으로 양릉(襄陵)을 공격해, 위(魏)나라 군을 괴롭히고,

한단이 함락되면, 위나라 군이 지쳐 있는 틈을 이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왕(威王)이 이 계략을 따랐다.

그 후로 성후(成侯) 추기(騶忌)와 전기(田忌)의 사이가 나빠졌으므로, 공손열(公孫閱)이 성후 추기에게 말하기를 :

“ 공은 어찌해 위(魏)나라를 공격하려고 모의하지 않습니까? 전기가 반드시 수장이 될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해 공이 있다면 그대의 모의가 적중한 셈이고,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서

전사하거나, 뒤로 후퇴해 패배할 것인즉, 전기의 목숨은 공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성후가 위왕(威王)에게 진언해, 전기로 하여금 남으로 양릉을 공격하게 했다.
10월에 한단을 함락시켰다.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위(魏)나라를 공격해, 계릉(桂陵)에서 대파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제후 중에서 가장 강하게 되었고, 스스로 왕으로 칭하며, 천하를 호령하기 시작했다.]

 

三十三年,殺其大夫牟辛.

三十五年,公孫閱又謂成侯忌曰:「公何不令人操十金卜於市,

曰『我田忌之人也.  吾三戰而三勝,聲威天下.  欲為大事,亦吉乎不吉乎』?」

卜者出,因令人捕為之卜者,驗其辭於王之所.

田忌聞之,因率其徒襲攻臨淄,求成侯,不勝而奔.

三十六年,威王卒,子宣王辟彊立.

[위왕(威王) 33년, 그의 대부(大夫) 모신(牟辛)을 죽였다.
35년, 공손열이 또 성후 추기에게 이르기를 : “ 공은 어찌하여 사람을 시켜서 황금 2백 냥을 가지고 시장에 가서

점을 치게 하며 말하기를 ‘나는 전기의 사람이다. 우리는 세 번 싸워 세 번을 이겨,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있다.

큰일을 행하고자 하는데, 점괘가 길한가, 불길한가?’라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 ”하자, 성후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점을 치고 나오는 사람을, 사람들을 시켜 점치는 이를 잡아들여, 점괘의 내용을 왕이 듣게 했다.
전기가 이를 듣고 부하를 이끌고서 임치(臨淄)를 습격했다. 그러나 성후를 찾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36년, 위왕이 죽고, 아들 선왕(宣王) 벽강(辟疆)이 즉위했다.]

 

宣王元年,秦用商鞅.  周致伯於秦孝公. 

二年,魏伐趙.  趙與韓親,共擊魏.  趙不利,戰於南梁.  宣王召田忌復故位.

韓氏請救於齊.  宣王召大臣而謀曰:「蚤救孰與晚救?」

騶忌子曰:「不如勿救.」 田忌曰:「弗救,則韓且折而入於魏,不如蚤救之.」

孫子曰:「夫韓、魏之兵未獘而救之,是吾代韓受魏之兵,顧反聽命於韓也.  且魏有破國之志,

韓見亡,必東面而愬於齊矣.  吾因深結韓之親而晚承魏之獘,則可重利而得尊名也.」

宣王曰:「善.」乃陰告韓之使者而遣之.  韓因恃齊,五戰不勝,而東委國於齊.

齊因起兵, 使田忌、田嬰將, 孫子為帥, 救韓、趙以擊魏, 大敗之馬陵,殺其將龐涓,虜魏太子申.

其後三晉之王皆因田嬰朝齊王於博望,盟而去.

[선왕 원년, 진(秦)나라가 상앙(商鞅)을 임용했다. 주 천자가 진효공(秦孝公)에게 패주(覇主)의 칭호를 주었다.
2년, 위(魏)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했다. 조와 한(韓) 나라가 친해, 함께 위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가 불리하게도 남량(南梁)에서 전쟁을 했다. 선왕이 전기를 불러 원래의 직위를 회복시켰다.

한(韓)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선왕이 대신들을 소집해, 모의한 후 말하기를 :

“ 일찍 도와주어야 하나, 늦게 도와주어야 하나?”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 “구원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고,
전기는 말하기를 “구원하지 않으면, 한나라는 더욱 굴욕적으로 위(魏)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일찍 구원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손빈(孫子)이 말하기를 : “ 한과 위나라의 군대가 지치기 전에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한나라를 대신해서

위나라 군과 싸우는 것으로,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한나라의 명령을 듣는 것입니다.

장차 위나라가 한과 조에 대한 공격의 뜻이 있고, 한나라가 멸망에 직면하면, 반드시 동쪽으로 제나라에

호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한나라와 깊은 연맹을 맺고 위나라의 피로한 군대를 뒤늦게 맞이할 것인즉,

이익은 크고 명성 또한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왕이 말하기를 : “옳다”라고 하며, 이에 한나라의 사자(使者)에게 몰래 알려주고, 그를 보냈다.
한나라는 제나라에 의지해 위나라와 전쟁을 했으나, 다섯 번 싸워서 이기지 못하자 동쪽으로 제나라에 의탁했다.

제나라는 이로써 군사를 일으켜, 전기와 전영으로 하여금 장수가 되게 하고,

손빈을 지휘관으로 삼아, 한과 조나라를 구원해 위나라를 공격하니,

마릉(馬陵)에서 그들을 대파하고, 장수 방연(龐涓)을 죽였으며, 위나라 태자 신(申)을 포로로 삼았다.
그 후로 삼진(三晉)의 왕이 모두 전영을 통해 박망성(博望城)에서 제왕(齊王)에게 입조(入朝)해 맹서하고 갔다.]

 

七年,與魏王會平阿南.

明年,復會甄. 魏惠王卒.

明年,與魏襄王會徐州,諸侯相王也.

十年,楚圍我徐州.

十一年,與魏伐趙,趙決河水灌齊、魏,兵罷.

十八年,宣王喜文學游說之士,自如騶衍、淳于髡、田駢、接子、慎到、環淵之徒七十六人,

皆賜列第,為上大夫,不治而議論.  是以齊稷下學士復盛,且數百千人.

十九年,宣王卒,子湣王地立.

[선왕 7년, 위(魏)나라 왕과 평아(平阿)의 남쪽에서 회맹했다.
8년, 견(甄)에서 다시 만났다. 위혜왕(魏惠王)이 죽었다.
9년, 위양왕(魏襄王)과 서주(徐州)에서 회맹해, 제후들 간에 서로 왕으로 칭하기로 승인했다.
10년, 초나라 군이 제나라의 서주를 포위했다.
11년, 위(魏)나라와 함께 조나라를 공격했고, 조나라 군이 황하를 끌어들여서 제와 위나라 군을 잠기게 해,

양국이 철군했다.
18년, 진혜왕(秦惠王)이 왕으로 칭했다.
선왕(宣王)이 문학유사들을 좋아해, 추연(騶衍), 순우곤(淳于髡), 전병(田騈), 접여(接予), 신도(愼到), 환연(環淵)

같은 무리들 76명 모두에게 집을 하사해, 상대부(上大夫)로 삼고,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토론하게 했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직하(稷下)에는 학자들이 많아져서, 그 수가 수백 명에서 천 명을 넘어섰다.
19년에는 선왕이 죽고, 아들 민왕(湣王) 지(地)가 즉위하였다.]

 

湣王元年,秦使張儀與諸侯執政會于齧桑.

三年,封田嬰於薛.

四年,迎婦于秦.

七年,與宋攻魏,敗之觀澤

[민왕 원년, 진(秦)나라가 장의(張儀)를 시켜서 제후들의 재상들과 설상(齧桑)에서 회맹하게 하였다.
3년, 설(薛) 땅을 전영(田嬰)에게 봉했다.
4년, 진나라에서 부인을 맞아들였다.
7년, 송(宋)나라와 함께 위(魏)나라를 공격해, 관택(觀澤)에서 격퇴시켰다.]

十二年, 攻魏.  楚圍雍氏,秦敗屈丐.  蘇代謂田軫曰:「臣願有謁於公, 其為事甚完, 使楚利公,

成為福,不成亦為福.  今者臣立於門, 客有言曰魏王謂韓馮、張儀曰:『煮棗將拔, 齊兵又進,

子來救寡人則可矣;不救寡人, 寡人弗能拔。』此特轉辭也。秦、韓之兵毋東,旬餘,

則魏氏轉韓從秦,秦逐張儀,交臂而事齊楚,此公之事成也。」

田軫曰:「柰何使無東?」

對曰:「韓馮之救魏之辭,必不謂韓王曰『馮以為魏』, 必曰『馮將以秦韓之兵東卻齊宋,

馮因摶三國之兵,乘屈丐之獘,南割於楚,故地必盡得之矣』.

張儀救魏之辭,必不謂秦王曰『儀以為魏』,

必曰『儀且以秦韓之兵東距齊宋,儀將摶三國之兵,乘屈丐之獘,南割於楚,名存亡國,

實伐三川而歸,此王業也』. 公令楚王與韓氏地,使秦制和,

謂秦王曰『請與韓地,而王以施三川,韓氏之兵不用而得地於楚』.

韓馮之東兵之辭且謂秦何? 曰『秦兵不用而得三川,伐楚韓以窘魏,魏氏不敢東,是孤齊也』

張儀之東兵之辭且謂何? 曰『秦韓欲地而兵有案,聲威發於魏,魏氏之欲不失齊楚者有資矣』.

魏氏轉秦韓爭事齊楚,楚王欲而無與地,公令秦韓之兵不用而得地,有一大德也.

秦韓之王劫於韓馮、張儀而東兵以徇服魏,公常執左券以責於秦韓,此其善於公而惡張子多資矣.」

[민왕 12년,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 군이 옹지(雍氏)를 포위했고, 진나라가 초나라 장수 굴개를 격퇴시켰다.

소대가 전진(田軫)에게 일러 말하기를 : “ 제가 선생을 배알하고자 함은 선생을 위해 멋진 일을 한 가지 할 것인즉,

초나라로 하여금 당신께 이익이 되도록 할 것이니, 그것이 성사가 되어도 복을 얻는 것이요,

성사가 되지 않아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근자에 제가 문에 서 있는데, 어떤 손님이 위(魏)나라 왕이

한풍(韓馮), 장의(張儀)에게 이야기 하기를 ‘자조(煮棗)는 곧 함락될 것이고, 제나라 군이 계속 진군하면,

그대들이 와서 과인을 구해 주면 되오. 과인을 구해 주지 않으면, 과인은 함락시킬 수가 없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특별히 전한 말입니다. 진과 한나라의 군사들이 동으로 위나라를 구원하러 가기 전에, 10여 일 지나면,

위나라는 한나라를 떠나서 진나라에 복종할 것이고, 진나라는 장의의 계획을 좇아서 손을 잡고

제와 초 나라에 대처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생이 성공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전진이 묻기를 :“ 어떻게 진나라로 하여금 동쪽으로 출병하지 않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 한풍이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 말은 필경 한나라 왕에게 '한풍이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한풍이 진과 한의 군대를 이용해, 동쪽의 제와 송을 격퇴시키고, 한풍은 삼국의 군사를 규합해,

초나라 장수 굴개가 지친 틈을 타서, 남쪽 초나라의 땅을 빼앗으면, 옛 땅을 완전히 되찾는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장의가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필경 진나라 왕에게 ‘장의가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라고 말하지 않고,
'장의가 진과 한나라의 군대로서 동쪽의 제와 송나라의 군대에 저항하게 하고, 장의가 삼국의 군대를 취합해,

굴개가 실패한 틈을 타서, 남쪽의 초나라 땅을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은 명목상으로는 망하는 나라를 보존하기 위함이나, 실질적으로는 한나라의 삼천(三川) 땅을 되찾는 것으로,

이것이 왕업입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초나라 왕으로 하여금 한나라의 영토를 주게 하고,

진나라로 하여금 강화조약을 맺도록 하며, 진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초나라로 하여금 한나라 땅을 주게 하십시오.

왕께서는 삼천 지역에 군대를 포진하고, 한나라의 군대는 쓰지 않고 초나라의 땅을 얻는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
전진이 묻기를 : “ 한풍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은 진나라 왕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 ”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진나라의 군대는 쓰지 않고서 삼천을 얻고, 초와 한 나라를 공격해 위나라를 궁하게 하니,

위나라의 군대가 감히 동쪽으로 진군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제나라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하십시오.”하였다. 
전진이 묻기를 : “장의가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소대가 대답하기를 : “‘진과 한나라가 땅을 얻기 위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위나라에 성위(聲威)를 떨칠 것이고,

위나라는 제와 초나라의 지원을 잃지 않고, 의지하려 할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

위나라가 진과 한 나라로 돌아서려 하면서, 한편으로는 제와 초나라와도 우호를 지키려는 것은,

초나라 왕이 위나라로 하여금 자신을 받들도록 하는 욕심은 있으면서도 한나라의 땅은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으로,

선생께서 진과 한나라의 군대를 쓰지 않고 땅을 얻을 수 있게 한다면, 양국에 커다란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한나라의 국왕이 한풍과 장의의 속임수를 받아들여서 동쪽으로 군대를 파병해 위나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면,
선생께서는 주도권을 잡고서 진과 한나라에서 중책을 맡을 것으로, 이것이 바로 왕께서 선생을 좋아하고,

장의의 군사력 낭비를 증오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十三年,秦惠王卒.

二十三年,與秦擊敗楚於重丘.

二十四年,秦使涇陽君質於齊.

二十五年,歸涇陽君于秦.  孟嘗君薛文入秦,即相秦.  文亡去.

二十六年,齊與韓魏共攻秦,至函谷軍焉.

二十八年,秦與韓河外以和,兵罷.

二十九年,趙殺其主父.  齊佐趙滅中山.

[민왕 13년, 진혜왕(秦惠王)이 죽었다.
23년, 진나라와 함께 중구(重丘)에서 초나라 군을 격퇴시켰다.
24년, 진나라가 경양군(涇陽君)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5년, 경양군이 진나라로 돌아왔다. 맹상군(孟嘗君) 설문(薛文)이 진나라에 들어와서 재상에 임명되었지만

다시 진에서 도망쳤다.
26년, 제와 한, 위 세 나라가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러 주둔했다.
28년, 진나라가 한나라에게 하외(河外)의 땅을 주고 강화를 맺어 군대를 철수시켰다.
29년, 조나라 사람이 주부(主父) 무령왕(武靈王)을 죽였다. 제나라가 조나라를 도와서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三十六年,王為東帝,秦昭王為西帝.  蘇代自燕來,入齊,見於章華東門.

齊王曰:「嘻,善,子來!秦使魏冉致帝,子以為何如?」

對曰:「王之問臣也卒,而患之所從來微,願王受之而勿備稱也.  秦稱之,天下安之,

王乃稱之,無後也.  且讓爭帝名, 無傷也。秦稱之, 天下惡之, 王因勿稱, 以收天下, 此大資也.

且天下立兩帝, 王以天下為尊齊乎?尊秦乎?」

王曰:「尊秦.」 曰:「釋帝,天下愛齊乎?愛秦乎?」

王曰:「愛齊而憎秦.」 曰:「兩帝立約伐趙,孰與伐桀宋之利?」

王曰:「伐桀宋利.」 對曰:「夫約鈞, 然與秦為帝而天下獨尊秦而輕齊, 釋帝則天下愛齊而憎秦,

伐趙不如伐桀宋之利,故願王明釋帝以收天下,倍約賓秦,無爭重,而王以其閒舉宋.

夫有宋,衛之陽地危;有濟西,趙之阿東國危;有淮北,楚之東國危;有陶、平陸,梁門不開.

釋帝而貸之以伐桀宋之事,國重而名尊,燕楚所以形服,天下莫敢不聽,此湯武之舉也.

敬秦以為名,而後使天下憎之,此所謂以卑為尊者也.  願王孰慮之.」

於是齊去帝復為王,秦亦去帝位.

[민왕 36년, 제나라 왕이 동제(東帝)라고 칭했고, 진소왕(秦昭王)이 서제(西帝)라고 칭했다.
소대(蘇代)가 연나라에서부터 제나라로 들어오다 장화궁(章華宮)의 동문(東門)에서 왕을 만났다.
제나라 왕이 말하기를 : “아! 잘됐소. 선생이 오셨구려! 진나라가 위염(魏冉)을 시켜서

제(帝)라는 호칭을 가지고 오게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오 ? ”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 왕께서 신에게 하신 질문이 갑작스럽습니다.

화가 닥치는 것은 언제나 희미하고 서서히 오는 것이니, 왕께서는 제호를 받으시되 즉각 사용하지는 마십시오.

진나라가 제(帝)로 칭해 천하가 조용하면, 왕께서 제로 칭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帝)를 사양해도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진나라가 제(帝)로 칭해서 천하가 증오하면,

왕께서는 제로 칭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천하의 인심을 받을 것으로 큰 밑천이 됩니다.

더군다나 천하에 두 명의 제(帝)가 있다면, 왕께서는 천하가 제나라를 받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진(秦)나라를 받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진나라를 존경할 것이오.”라고 하자.
소대가 묻기를 : “제호를 포기하면, 천하가 제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진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 “ 제나라를 사랑하고, 진나라를 증오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소대가 묻기를 : “ 양제(兩帝)가 협약을 맺고서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이롭습니까?

아니면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는 것이 이롭습니까?”라고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 “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는 것이 이롭소.”라고 하였다.
소대가 이어 말하기를 : “대체로 맹약은 균등하지만, 진나라와 함께 제(帝)라고 칭하면 천하는 진나라만을 존경하고,

제나라는 가벼이 대할 것이나, 제(帝) 칭호를 포기하면, 제나라를 사랑하고, 진나라를 증오할 것입니다.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는 것보다 이로울 것이 없으므로,
원컨대 왕께서는 제(帝) 칭호를 포기하고 천하의 인심을 거두어서, 맹약을 어기고 진나라에 항거해,

두 번째 제(帝) 칭호를 다투지 마십시오. 그리고서 기회를 보아 송나라를 공격하십시오.

송나라를 차지하면 위(衛)나라의 양지(陽地)가 위험하며, 제서(濟西)를 차지하면 조나라의 아(阿) 땅이 위험하며,

회북(淮北)을 차지하면 초나라의 하동이 위협을 받을 것이며, 도(陶)와 평륙(平陸)을 차지하면,

위나라가 성문을 감히 열지 못할 것입니다.
제(帝) 칭호를 포기하고, 대신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면, 나라의 지위도 높아지고 명성도 높아져서,

연과 초 나라가 위세에 복종하게 되고, 천하에 저항하는 나라가 없을 것이니,

이는 탕왕(湯王), 주 무왕의 업적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진나라를 존경한다는 미명하에 천하로 하여금 진나라를 증오하게 한다면,

이는 낮은 지위로서 높은 명예를 얻는 것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심사숙고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제(帝) 칭호를 포기하고 다시 왕으로 복귀했고, 진나라도 제위를 포기했다.]

 

三十八年, 伐宋. 秦昭王怒曰:「吾愛宋與愛新城、陽晉同. 韓聶與吾友也, 而攻吾所愛,何也?」

蘇代為齊謂秦王曰:「韓聶之攻宋,所以為王也.  齊彊,輔之以宋,楚魏必恐,恐必西事秦,

是王不煩一兵,不傷一士,無事而割安邑也,此韓聶之所禱於王也.」

秦王曰:「吾患齊之難知.  一從一衡,其說何也?」

對曰:「天下國令齊可知乎?齊以攻宋,其知事秦以萬乘之國自輔,不西事秦則宋治不安.

中國白頭游敖之士皆積智欲離齊秦之交, 伏式結軼西馳者, 未有一人言善齊者也, 伏式結軼東馳者, 

未有一人言善秦者也.  何則? 皆不欲齊秦之合也.  何晉楚之智而齊秦之愚也!

晉楚合必議齊秦,齊秦合必圖晉楚,請以此決事.」 秦王曰:「諾.」

於是齊遂伐宋,宋王出亡,死於溫. 齊南割楚之淮北,西侵三晉,欲以并周室,為天子.

泗上諸侯鄒魯之君皆稱臣,諸侯恐懼.

[민왕 38년, 송나라를 공격했다. 진소왕이 분노하여 말하기를 : “ 과인이 송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신성, 양진과 

같다. 한섭(韓聶)은 과인과 친구인데, 과인이 좋아하는 바를 공격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소대가 위나라를 위해 진나라 왕에게 이르기를 : “한섭이 송나라를 공격한 것은 왕을 위한 것입니다.
제나라는 강한데, 송나라가 제나라를 돕는다면, 초와 위나라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고,

두려우면 그들은 필시 서쪽의 진나라를 섬길 것이니, 이는 왕께서 병력의 소모나 병사의 희생 하나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읍(安邑)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것은 한섭이 왕께 기대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 왕이 묻기를 : “ 과인은 제나라가 알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오.

때로는 합종(合縱)하고, 때로는 연횡(連橫)하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되는가?”라고 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 “천하의 모든 나라들의 명령을 어찌 제가 다 알 수 있습니까?

제나라가 이미 송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진나라를 섬기는 데는 만승지국(萬乘之國)의 역량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야 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송나라 땅은 안정을 꾀할 수 없음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원 각국의 능구렁이 같이 늙고 간사한 유사들이 모두 지혜를 모아 제와 진 사이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려고 하고,
빈번하게 서쪽으로 달려가는 무리들은 어느 사람도 제나라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빈번하게 동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어느 사람도 진나라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제와 진(秦)나라의 연합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해 진(晉)과 초나라가 지혜로운데,

제와 진(秦)나라가 우매하겠습니까! 진(晉)과 초나라가 합치면 반드시 제와 진(秦) 사이의 연합을 해치려고

모의할 것이며, 제와 진(秦)나라가 합치면 반드시 진(晉)과 초나라를 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의거해 대사를 결행하십시오.”라고 하자,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 "좋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고, 송나라 왕이 도망해 온(溫) 땅에서 죽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회북을 탈취하고, 서쪽으로는 삼진을 침공해, 주 왕실과 나란히 천자가 되려고 했다.

사수(泗水)가의 제후인 추(鄒), 노(魯)나라의 군주들은 모두 자신을 제나라의 신하로 칭했고,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를 두려워하였다.]

 

三十九年,秦來伐,拔我列城九. 

四十年,燕、秦、楚、三晉合謀,各出銳師以伐,敗我濟西.  王解而卻.  燕將樂毅遂入臨淄,

盡取齊之寶藏器.  湣王出亡,之衛.  衛君辟宮捨之,稱臣而共具.  湣王不遜,衛人侵之.

湣王去,走鄒、魯,有驕色,鄒、魯君弗內,遂走莒.  楚使淖齒將兵救齊,因相齊湣王.

淖齒遂殺湣王而與燕共分齊之侵地鹵器.  湣王之遇殺,其子法章變名姓為莒太史敫家庸.

太史敫女奇法章狀貌,以為非恒人,憐而常竊衣食之,而與私通焉.

淖齒既以去莒,莒中人及齊亡臣相聚求湣王子,欲立之.  法章懼其誅己也,久之,

乃敢自言「我湣王子也」. 於是莒人共立法章,是為襄王.

[민왕 39년, 진(秦)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제나라의 성읍 9개를 함락시켰다.
40년에는 연(燕), 진(秦), 초(楚), 삼진(三晉)이 공모해, 각기 정예부대를 출병시켜서 제나라를 공격해,
제서(濟西)에서 제나라를 물리쳤다. 제나라 왕의 군대가 와해되어 퇴각했다.
연나라 장수 악의가 임치(臨淄)에 들어가 제나라의 보물들을 모두 탈취했다. 민왕이 도망해 위(衛)나라로 갔다.
위(衛)나라 군주가 스스로 궁을 피해 민왕이 묵도록 하고, 민왕을 신하로 칭하면서 기물들을 함께 썼다.

민왕이 불손해, 위(衛)나라 사람이 그를 습격했다. 민왕이 위(衛)나라를 떠나서 추, 노나라로 도망갔는데,

교만한 기색이 있자, 추와 노나라의 군주도 그를 거두지 않았고, 이에 거(莒)나라로 갔다.
초나라는 요치(淖齒)의 군사로 하여금 제나라를 구원하게 해, 그가 제민왕의 재상이 되게 했다.
요치가 민왕을 죽이고서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의 영토와 보물들을 나누어 가졌다.
민왕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법장(法章)이 이름을 바꾸어 거(莒)나라의 태사 교(敫)의 하인이 되었다.
태사 교의 여식이 법장의 용모를 보고는 그가 범상하지 않음을 알고서 흠모해 몰래 그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하고,

그와 정을 통했다. 요치가 이미 거나라를 떠나고, 거나라 사람들과 제나라의 유신(遺臣)들이

민왕의 아들을 찾아서 즉위시키려고 했다. 

법장은 그들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해 한참 뒤에야 “내가 민왕의 아들이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거나라 사람들이 함께 법장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양왕(襄王)이다.]

 

以保莒城而布告齊國中:「王已立在莒矣.」

襄王既立,立太史氏女為王后,是為君王后,生子建.

太史敫曰:「女不取媒因自嫁,非吾種也,汙吾世.」

終身不睹君王后.  君王后賢,不以不睹故失人子之禮.

襄王在莒五年, 田單以即墨攻破燕軍, 迎襄王於莒, 入臨菑.  齊故地盡復屬齊.  齊封田單為安平君.

十四年,秦擊我剛壽.

十九年,襄王卒,子建立.

[양왕은 거나라 성을 지키고서 제나라 백성들에 알리기를 “왕은 이미 거 나라에서 즉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양왕이 즉위한 뒤에 태사의 여식을 왕후로 삼으니, 그가 바로 군 왕후(君王后)로 그녀는 아들 건(建)을 낳았다.
태사 교가 말하기를 : “ 여식이 중매인도 없이 스스로 시집을 갔으니, 내 자식도 아니다.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라고 하고, 평생토록 군 왕후를 보지 않았다.

군 왕후는 어진 여인이라 이로 인해 자식의 예를 벗어난 적이 없다. 양왕이 거나라에서 산 지 5년이 되었을 때,

전단(田單)이 즉묵(卽墨)의 군대를 근거지로 해 연나라 군을 격파했고, 거나라에서 양왕을 맞이해 임치로 들어갔다.

제나라의 옛 땅은 모두 다시금 제나라에 귀속 되었다. 제나라는 전단을 안평군(安平君)으로 삼았다.
14년, 진(秦)나라가 제나라의 강(剛)과 수(壽)를 공격하였다.
19년, 양왕이 죽고, 아들 건(建)이 즉위하였다.]

 

王建立六年,秦攻趙,齊楚救之.  秦計曰:「齊楚救趙,親則退兵,不親遂攻之.」

趙無食,請粟於齊,齊不聽.

周子曰:「不如聽之以退秦兵, 不聽則秦兵不卻, 是秦之計中而齊楚之計過也.

且趙之於齊楚, 捍蔽也, 猶齒之有脣也,脣亡則齒寒.  今日亡趙,明日患及齊楚.

且救趙之務,宜若奉漏甕沃焦釜也.  夫救趙,高義也;卻秦兵,顯名也.

義救亡國,威卻彊秦之兵,不務為此而務愛粟,為國計者過矣.」

齊王弗聽. 秦破趙於長平四十餘萬,遂圍邯鄲.

[제나라 왕 건이 즉위한 지 6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제와 초나라가 조나라를 구원했다.
진나라에서는 모의해 말하기를 : “제와 초나라가 조나라를 구원하는데, 그들의 관계가 친밀하면 철군시키고,

친밀하지 않으면 공격하기로 합시다.”라고 하였다.

조나라는 식량이 부족해 제나라에 곡식을 청했으나 제나라가 승낙하지 않았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 “ 승낙해 진나라 군이 퇴각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승낙하지 않아서 진나라 군대가

철수하지 않는다면, 진나라의 계략이 적중하는 것이고, 제와 초나라의 계략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조나라는 제와 초나라에는 방해물로서, 치아가 입술을 얻는 격으로, 입술이 상하면 치아가 시리게 됩니다.
오늘 조나라가 망하면, 훗날 화가 제와 초나라에 미칩니다.

또한 조나라를 구하는 일은 마치 새는 항아리를 들고서 달구어진 솥단지에 물을 부어야 하듯 다급한 일입니다.
대저 조나라를 구하는 것은 고매한 일이고, 진나라 군을 물리치는 것은 명성을 떨치는 일입니다.
망하는 나라를 의롭게 구원하고, 강력한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는 것은 위세를 떨치는 것인데,
이에 힘쓰지 않고서 곡식을 아끼는 일에 힘쓴다면, 나라를 위해 계획하는 이의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나라 왕이 듣지 않았다. 진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 군 40만여 명을 무찌르고, 한단을 포위했다.]

 

十六年,秦滅周. 君王后卒.

二十三年,秦置東郡.

二十八年,王入朝秦,秦王政置酒咸陽.

三十五年,秦滅韓.

三十七年,秦滅趙.

三十八年,燕使荊軻刺秦王,秦王覺,殺軻.

明年,秦破燕,燕王亡走遼東.

明年,秦滅魏,秦兵次於歷下.

四十二年,秦滅楚.

明年,虜代王嘉,滅燕王喜.

[건왕 16년,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멸망시켰다. 군왕후가 죽었다.
23년, 진나라가 동군(東軍)을 설치했다.
28년, 제나라 왕이 진나라에 입조(入朝)했고, 진왕(秦王) 정(政)이 함양(咸陽)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그를 환대했다.
35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37년에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38년, 연나라가 형가(荊軻)를 시켜서 진왕을 살해 하려다, 진왕에게 발각되어, 진왕이 가(軻)를 죽였다.
39년, 진나라가 연나라를 격파하고, 연나라 왕은 요동(遼東)으로 도망쳤다.
40년,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 군을 역하(歷下)에 주둔시켰다.
42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다음해에는 대왕(代王) 가(嘉)를 생포했고, 연나라 왕 희(喜)를 죽였다.]

四十四年,秦兵擊齊.  齊王聽相后勝計,不戰,以兵降秦.  秦虜王建,遷之共.  遂滅齊為郡.

天下壹并於秦,秦王政立號為皇帝.  始,君王后賢,事秦謹,與諸侯信,齊亦東邊海上,

秦日夜攻三晉、燕、楚,五國各自救於秦,以故王建立四十餘年不受兵.  君王后死,后勝相齊,

多受秦閒金,多使賓客入秦,秦又多予金,客皆為反閒,勸王去從朝秦,不修攻戰之備,

不助五國攻秦,秦以故得滅五國.  五國已亡,秦兵卒入臨淄,民莫敢格者.

王建遂降,遷於共.  故齊人怨王建不蚤與諸侯合從攻秦,聽姦臣賓客以亡其國,

歌之曰:「松耶柏耶?住建共者客耶?」疾建用客之不詳也.

[건왕 44년, 진나라 군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 왕은 재상 후승(后勝)의 책략을 듣고서,

전쟁을 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서 진나라에 투항했다.
진나라가 제나라 건왕을 생포해, 공읍(共邑)으로 보내 살게 하였다. 이에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군(郡)으로 삼았다.
이윽고 천하는 진나라 하나로 통일되었고, 진왕 정(政)이 즉위해 황제(皇帝)로 불렸다.
초기에는 군왕후가 현명해, 진나라를 섬김이 근엄했고, 제후들과도 믿음이 깊었다.
또 제나라는 동쪽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진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진나라는 날마다 삼진, 연, 초나라를 공격했고, 다섯 나라는 각기 진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기 바빠서,
제나라 건왕이 즉위한 지 40여 년이 되도록 적군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군왕후가 죽은 후에 후승이 재상이 되어, 진나라 첩자의 뇌물을 많이 받았고,

자주 빈객들을 진나라에 입조하게 했으니, 진나라는 금품을 더 많이 주어, 객들이 돌아와서 첩자가 되게 했다.
그들은 왕에게 진나라에 입조하게 권유했다. 침공에 대한 대비를 하지 말고,
5개국이 서로 도와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게 함으로써 진나라가 5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5개국이 이미 멸망하고, 진나라 군이 끝내 임치에 들어오니, 백성들이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제나라 건왕이 이내 항복하고, 공읍(共邑)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제나라 사람들은 건왕이 일찌감치 제후들과

합종(合縱)해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간신과 빈객들의 말을 듣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원망해,

노래하기를 “소나무인가 ? 잣나무인가 ? 건왕을 공(共)에서 살게 한 사람은 빈객들인가?”라고 하며,

건왕이 빈객들을 신중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한 것이다.]


太史公曰:

蓋孔子晚而喜易.  易之為術,幽明遠矣,非通人達才孰能注意焉!

笔周太史之卦田敬仲完,占至十世之後;及完奔齊,懿仲卜之亦云.

田乞及常所以比犯二君,專齊國之政,非必事勢之漸然也,蓋若遵厭兆祥云.

[태사공은 말한다.
“공자(孔子)는 만년(晩年)에 『주역(周易)』을 즐겨 읽었다.

역(易)이라는 학문은 너무도 심오해 사물에 통달하고 전적(典籍)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이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나라의 태사가 전경중완(田敬仲完)에게 점을 쳐서, 10대 이후의 일까지 추산한 것이다.

완이 제나라로 도망쳤을 때, 의중(懿仲)이 그에게 이와 같은 점을 쳤다.

전기(田乞)와 전상(田常)이 연이어 제나라의 두 왕을 살해하고, 제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것은,
형세가 점차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점괘의 예언에 따라서 진행된 듯 싶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