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10. 楚世家

第 十. 楚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9. 17:44

      史記 世家

 

第 十. 楚世家(초세가)

 

楚之先祖出自帝顓頊高陽.  高陽者,黃帝之孫,昌意之子也.

高陽生稱, 稱生卷章, 卷章生重黎.  重黎為帝嚳高辛居火正, 甚有功, 能光融天下, 帝嚳命曰祝融.

共工氏作亂,帝嚳使重黎誅之而不盡.  帝乃以庚寅日誅重黎,而以其弟吳回為重黎後,

復居火正,為祝融. 吳回生陸終.  陸終生子六人,坼剖而產焉.

其長一曰昆吾;二曰參胡;三曰彭祖;四曰會人;五曰曹姓;六曰季連,羋姓,楚其後也.

昆吾氏,夏之時嘗為侯伯,桀之時湯滅之.

彭祖氏,殷之時嘗為侯伯,殷之末世滅彭祖氏.  季連生附沮,附沮生穴熊.

[초나라의 선조는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에게서 나왔다. 고양은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고양은 칭(稱)을 낳았으며,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고, 권장은 중려(重黎)를 낳았다.

중려는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의 화정(火正)으로서 공적을 쌓았고,
능히 천하를 밝게 비출 수 있어 제곡이 그에게 축융(祝融)의 칭호를 하사했다.
공공씨(共工氏)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곡은 중려에게 반란자들을 정벌하게 명령했는데, 철저히 소탕하지 못했다.
제곡은 경인일(庚寅日)에 중려를 죽이고, 그의 동생 오회(吳回)로 하여금 중려의 계승자로 삼아,

화정에 임명하고 축융이라 했다. 오회는 육종(陸終)을 낳았다. 육종은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배를 절개해 낳았다. 큰아들은 곤오(昆吾)이고, 둘째 아들은 참호(參胡)며, 셋째 아들은 팽조(彭祖),

넷째 아들은 회인(會人), 다섯째 아들은 조성(曹姓), 여섯째 아들은 계련(季連)이다.
계련의 성은 미(羋)로, 초(楚)나라 왕족은 바로 그의 후손이다.

곤오씨는 하(夏)나라에서 후백(侯伯)을 지냈으며, 걸왕(桀王) 때 탕왕(湯王)에 의해 멸망했다.

팽조씨는 은(殷)나라에서 후백을 지냈으며, 은나라 말기에 멸망했다.

계련은 부저(附沮)를 낳았으며 부저는 혈웅(穴熊)을 낳았다.]

 

其後中微,或在中國,或在蠻夷,弗能紀其世.

周文王之時,季連之苗裔曰鬻熊.  鬻熊子事文王,蚤卒.  其子曰熊麗.  熊麗生熊狂,熊狂生熊繹.

熊繹當周成王之時,舉文、武勤勞之後嗣,而封熊繹於楚蠻,封以子男之田,姓羋氏,居丹陽.

楚子熊繹與魯公伯禽、衛康叔子牟、晉侯燮、齊太公子呂伋俱事成王.

熊繹生熊艾,熊艾生熊亶,熊亶生熊勝.  熊勝以弟熊楊為後。熊楊生熊渠.

[그 후 점점 쇠락해 어떤 사람은 중원 지방에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동남쪽 만이(蠻夷) 지방에 살기도 하여,

그들의 가계(家系)를 기록할 수 없게 되었다. 주문왕 때, 계련의 후손인 죽웅(鬻熊)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죽웅은 아들을 돌보듯이 문왕을 섬겼으나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은 웅려(熊麗)이고, 웅려는 웅광(熊狂)을 낳았으며, 웅광은 웅역(熊繹)을 낳았다. 

웅역은 주성왕 시기에 살았다.  성왕이 문왕과 무왕의 공신 후손들에게 논공행상을 해 웅역을 초만 지방에 봉하고,

자남(子男)의 작위와 토지를 하사하고, 성을 미(羋)라고 해, 단양(丹陽)에 도읍하게 했다.

웅역은 노공(魯公) 백금(伯禽), 위강숙의 아들 모(牟), 진후(晉侯) 섭(燮), 제태공(齊太公)의 아들 여급(呂伋)과 함께

성왕을 섬겼다. 웅역은 웅애(熊艾)를 낳고, 웅애는 웅달을 낳고, 웅달은 웅승(熊勝)을 낳았다.

웅승은 동생 웅양(熊楊)을 후계자로 삼았다. 웅양은 웅거(熊渠)를 낳았다.]

 

熊渠生子三年.  當周夷王之時,王室微,諸侯或不朝,相伐.

熊渠甚得江漢閒民和,乃興兵伐庸、楊蠆,至于鄂.

熊渠曰:「我蠻夷也,不與中國之號謚.」

乃立其長子康為句亶王,中子紅為鄂王,少子執疵為越章王,皆在江上楚蠻之地.

及周厲王之時,暴虐,熊渠畏其伐楚,亦去其王.

後為熊毋康,毋康蚤死.  熊渠卒,子熊摯紅立.  摯紅卒,其弟弒而代立,曰熊延。熊延生熊勇.

[웅거는 아들 셋을 낳았다.

주이왕 때 왕실이 약해지자 제후들 중에서 천자를 알현하지 않은 이도 있었으며, 제후들 간에 서로 공격했다.

웅거는 장강과 한수 일대 농민의 환심을 얻어, 군사를 일으켜 용(庸)과 양월(楊粤)을 공격해 악(鄂)까지 빼앗았다.
웅거는 말하기를 “나는 만이 지방에 있으니 중원 여러 나라처럼 같은 국호와 시호를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하고,
큰아들 웅강(熊康)을 구단왕(句亶王)으로, 둘째 아들 웅홍(熊紅)을 악왕(鄂王)으로,

막내아들 웅집자(熊執疵)를 월장왕(越章王)으로 삼았다. 주여왕(周厲王) 때 여왕이 포악무도하여,

웅거는 여왕이 초나라를 공격할까 두려워 자신들의 왕호를 없앴다.

웅거의 계승자는 큰아들 웅무강(熊毋康)이었는데, 웅무강은 일찍 죽었다.

웅거가 죽자, 둘째 아들 웅철홍(熊摯紅)이 즉위했다. 웅철홍이 죽자 그의 동생이 웅철홍의 아들을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바로 웅연(熊延)이다. 웅연은 웅용(熊勇)을 낳았다.]

 

熊勇六年,而周人作亂,攻厲王,厲王出奔彘.

熊勇十年,卒,弟熊嚴為後.

熊嚴十年,卒.  有子四人,長子伯霜,中子仲雪,次子叔堪,少子季徇.

熊嚴卒,長子伯霜代立,是為熊霜.

熊霜元年,周宣王初立.

熊霜六年,卒,三弟爭立.  仲雪死;叔堪亡,避難於濮;而少弟季徇立,是為熊徇.

[웅용 6년(기원전 841년), 주나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 여왕을 공격하니, 여왕은 체(彘) 지역으로 피난했다.
웅용 10년(기원전 837년)에 웅용이 죽자 동생 웅엄(熊嚴)이 즉위했다.
웅엄 10년(기원전 828년), 웅엄이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백상(伯霜),

둘째 아들은 중설(仲雪), 셋째 아들은 숙감(叔堪), 막내아들은 계순(季徇)이다.

웅엄이 죽자, 큰아들 백상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웅상(熊霜)이다.
웅상 원년(기원전 827년), 주 선왕(周宣王)이 새로 왕위에 올랐다.

웅상 6년, 웅상이 죽자, 세 동생들이 왕위 계승을 놓고 혈육상잔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중설은 죽고, 숙감은 복(濮)으로 피난했고, 막내 동생 계순이 즉위했다. 이 사람이 웅순(熊徇)이다.]

 

熊徇十六年,鄭桓公初封於鄭.

二十二年,熊徇卒,子熊咢立.

熊咢九年,卒,子熊儀立,是為若敖.

若敖二十年,周幽王為犬戎所弒,周東徙,而秦襄公始列為諸侯.

二十七年,若敖卒,子熊坎立,是為霄敖.

霄敖六年,卒,子熊眴立,是為蚡冒.

蚡冒十三年,晉始亂,以曲沃之故.

蚡冒十七年,卒.  蚡冒弟熊通弒蚡冒子而代立,是為楚武王.

[웅순 16년, 정환공(鄭桓公)이 정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다.
웅순 22년, 웅순이 죽자 아들 웅악(熊咢)이 왕위를 계승했다.

웅악 9년, 웅악이 죽자 아들 웅의(熊儀)가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약오(若敖)이다.
약오 20년, 주유왕(周幽王)이 견융에게 피살되어 주 왕실은 동쪽으로 천도하고, 진양공(秦襄公)이 제후에 봉해졌다.

​약오 27년(기원전 764년), 약오가 죽자, 아들 웅감(熊坎)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소오(霄敖)이다.

소오 6년, 소오가 죽자 아들 웅순(熊眴)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분모(蚡冒)이다.

분모 13년, 진(晉)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는데 곡옥(曲沃) 사건이 그 원인이 되었다.
분모 17년, 분모가 죽자 분모의 동생 웅통(熊通)이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초무왕(楚武王)이다.]

 

武王十七年,晉之曲沃莊伯弒主國晉孝侯.

十九年,鄭伯弟段作亂.

二十一年,鄭侵天子之田.

二十三年,衛弒其君桓公.

二十九年,魯弒其君隱公.

三十一年,宋太宰華督弒其君殤公.

三十五年,楚伐隨.  隨曰:「我無罪.」

楚曰:「我蠻夷也.  今諸侯皆為叛相侵,或相殺.  我有敝甲,欲以觀中國之政,請王室尊吾號.」

隨人為之周,請尊楚,王室不聽,還報楚.

三十七年,楚熊通怒曰:「吾先鬻熊,文王之師也,蚤終.  成王舉我先公,乃以子男田令居楚,

蠻夷皆率服,而王不加位,我自尊耳,」乃自立為武王,與隨人盟而去.  於是始開濮地而有之.

五十一年,周召隨侯,數以立楚為王.  楚怒,以隨背己,伐隨.  武王卒師中而兵罷.

[무왕 17년, 진(晉)나라 곡옥의 장백(莊白)이 종주국(宗主國)인 진효후(晉孝侯)를 살해했다.

19년, 정군(鄭君)의 동생 단(段)이 반란을 일으켰다.
21년, 정나라가 주 천자의 장원을 빼앗았다.

23년, 위(衛)나라에서 환공(桓公)이 시해되었다.
29년, 노(魯)나라에서는 은공(隱公)이 시해되었다.

31년, 송(宋)나라의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상공(殤公)을 시해했다.
35년, 초나라가 군사를 들어 수(隨)나라를 정벌했다. 수군(隨君)이 “저에게는 과실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초왕은 “과인은 만이 지방에 살고 있다. 지금 제후들이 주 왕실을 배반하여 서로 침범하고 살육을 자행하니,
과인은 무장하여 중원 지방 정치에 관여하고, 주 왕실에는 과인의 작위를 높여달라고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나라 사람이 그를 위해 주 왕실로 가서 초나라의 국호를 높여줄 것을 요구했으나,

주 왕실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돌아와서 초나라에 보고했다.
37년, 초나라 웅통은 분노하여 말하기를 : “ 과인의 조상 죽웅은 문왕의 스승인데 일찍 돌아가셨다.

성왕이 과인의 조상을 뽑아 단지 자남의 작위와 봉지를 하사하고  초나라 땅에 살게 했다.

만이 부족이 모두 우리 초나라에 복종했으나 주왕실이 작위를 높여주지 않으면 과인이 스스로 높이겠다.”라고 하며,

무왕(武王)으로 자칭하고, 수나라와 맹약을 맺고 떠나갔다. 이때부터 초나라는 복(濮) 지역을 개간하고 점령했다.
51년, 주 천자는 수나라 제후를 불러들여, 초 나라 제후가 칭왕(稱王)하는 것을 수나라가 옹호했다고 질책했다.
초나라 왕은 분노하고, 수나라 제후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여겨, 그 즉시 수나라를 정벌하러 떠났다.

무왕이 행군 중에 병사(病死)하자 군사를 거두어들였다.]

 

子文王熊貲立,始都郢.

文王二年, 伐申過鄧, 鄧人曰「楚王易取」, 鄧侯不許也. 

六年伐, 蔡,虜蔡哀侯以歸, 已而釋之.  楚彊, 陵江漢閒小國, 小國皆畏之. 

十一年, 齊桓公始霸, 楚亦始大. 

十二年,伐鄧,滅之.

十三年,卒,子熊艱立,是為莊敖.

莊敖五年,欲殺其弟熊惲,惲奔隨,與隨襲弒莊敖代立,是為成王.

[무왕의 아들 문왕(文王) 웅자(熊貲)가 왕위를 계승하고 처음으로 영(郢)으로 천도했다.
문왕 2년, 신(申)나라를 정벌하고 등(鄧)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등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초왕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으나, 등나라 제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6년, 채(蔡)나라를 정벌하고 채애후(蔡哀侯)를 사로잡아 돌아왔고, 얼마 후 그를 석방했다.

초나라가 강해져서 장강, 한수 유역의 작은 여러 나라를 괴롭히니, 작은 나라들이 모두 초나라를 무서워했다.
11년, 제환공(齊桓公)이 처음으로 패자(覇者)라고 칭했다. 초나라도 또한 강대해졌다.
12년, 등나라 정벌에 나서 등나라를 멸했다.

13년, 문왕이 죽자 아들 웅간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장오(莊敖)이다.
장오 5년, 그의 동생 웅운(熊惲)을 죽이려고 했으나, 웅운은 수나라로 도망갔다.

그 뒤 수나라 사람과 더불어 장오를 습격해 죽이고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성왕(成王)이다.]

 

成王惲元年,初即位,布德施惠,結舊好於諸侯.  使人獻天子,天子賜胙,

曰:「鎮爾南方夷越之亂,無侵中國.」於是楚地千里.

十六年, 齊桓公以兵侵楚, 至陘山.  楚成王使將軍屈完以兵御之, 與桓公盟.

桓公數以周之賦不入王室, 楚許之, 乃去.

十八年,成王以兵北伐許,許君肉袒謝,乃釋之.

二十二年,伐黃.  二十六年,滅英.

三十三年,宋襄公欲為盟會,召楚. 

楚王怒曰:「召我,我將好往襲辱之.」遂行,至盂,遂執辱宋公,已而歸之.

三十四年,鄭文公南朝楚.  楚成王北伐宋,敗之泓,射傷宋襄公,襄公遂病創死.

三十五年,晉公子重耳過楚,成王以諸侯客禮饗,而厚送之於秦.

三十九年,魯僖公來請兵以伐齊,楚使申侯將兵伐齊,取穀,置齊桓公子雍焉.

齊桓公七子皆奔楚, 楚盡以為上大夫.  滅夔,夔不祀祝融、鬻熊故也.

夏,伐宋,宋告急於晉,晉救宋,成王罷歸.

將軍子玉請戰,成王曰:「重耳亡居外久,卒得反國,天之所開,不可當」

子玉固請,乃與之少師而去.  晉果敗子玉於城濮.  成王怒,誅子玉.

[성왕 운 원년, 웅운은 왕위에 오르자 은덕을 내리고 제후들과 과거의 우호관계를 회복했다.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주 천자에게 바치자,  주 천자는 제육(祭肉)을 하사하며 말하기를 : 

“남방에 있는 이월(夷越)의 반란을 진압하고 중원 각국을 침범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초나라 영토는 천리로 확장되었다.
16년, 제환공은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침범해 형산(陘山)에 이르렀다.

초나라 성왕은 장군 굴완(屈完)에게 군사를 주어 방어하게 하고 환공과 맹약을 맺었다.

환공은 초나라가 주왕실에 바치는 공물을 왕실에 내지 않았다고 질책하니 

초나라는 잘못을 인정해 환공은 물러갔다.

18년, 성왕은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 허(許)나라를 정벌하니,

허나라 제후가 웃통을 벗고 황공히 사죄하므로, 그를 석방했다.
22년, 황(黃)나라를 정벌하였다,

26년, 영(英)나라를 멸했다.
33년, 송양공(宋襄公)은 회맹(會盟)을 조직할 생각으로 초나라를 불렀다.

초나라 왕이 분노하며 말하기를 : “나더러 오라고! 내가 그를 습격해 모욕을 주겠다.”라고 하며,
출병해 우(盂)에서 송양공을 사로잡아 모욕을 준 다음, 얼마 후 그를 돌려 보냈다.
34년, 정문공(鄭文公)이 남하해 초나라 왕을 알현했다. 초나라 성왕은 북상해 송나라 정벌에 나섰다.
홍수(泓水)에서 송나라 군사를 대패시키고 활로 송양공에게 부상을 입히니 송양공은 그 부상으로 인해서 죽었다.
35년,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초나라를 지나가자, 성왕은 제후를 맞는 예의를 갖추어 연회를 베풀어 

를 환대하고, 풍부한 예물을 선물해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39년, 노희공(魯僖公)이 출병해 제나라를 정벌할 것을 요구하자, 초나라는 신후(申侯)에게 군사를 주어

제나라를 치러 가서 곡(穀)을 점령하고, 제환공의 아들 강옹(姜雍)에게 다스리도록 했다.

제환공의 일곱 아들이 초나라로 도망쳐 오자, 초나라 왕은 그들을 상대부(上大夫)에 봉했다.
기(夔)나라가 그의 선조 축융(祝融)과 죽웅(鬻熊)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자 기나라를 멸했다.
그해 여름, 송나라를 치러 가자, 송나라가 진(晉)나라에 위급함을 알리니, 진나라가 송나라에 구원병을 보내어,

성왕은 회군하고자 했다. 장군 자옥(子玉)이 맞서 싸우자고 요구하자,

성왕은 말하기를 : “ 중이(重耳)는 나라 밖으로 떠돌아 다닌 지 오래이나, 결국은 진나라로 돌아올 것이오.

이것은 하늘이 그를 인도하는 것이니, 막을 수는 없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옥이 싸울 것을 굽히지 않자 그에게 소수의 군사를 주어 보냈다.
진나라 군대는 성복(城濮)에서 자옥을 물리쳤다. 성왕은 노기에 차서 자옥을 죽였다.]

 

四十六年,初,成王將以商臣為太子,語令尹子上.

子上曰:「君之齒未也,而又多內寵,絀乃亂也.  楚國之舉常在少者.

且商臣蜂目而豺聲,忍人也,不可立也.」王不聽,立之. 後又欲立子職而絀太子商臣.

商臣聞而未審也,告其傅潘崇曰:「何以得其實?」

崇曰:「饗王之寵姬江羋而勿敬也.」商臣從之.

江羋怒曰:「宜乎王之欲殺若而立職也.」 商臣告潘崇曰:「信矣.」

崇曰:「能事之乎?」曰:「不能.」「能亡去乎?」曰:「不能.」「能行大事乎?」曰:「能.」

冬十月,商臣以宮衛兵圍成王. 成王請食熊蹯而死, 不聽.

丁未,成王自絞殺.  商臣代立,是為穆王.

[성왕 46년, 처음, 성왕은 상신(商臣)을 태자로 삼으려는 생각을 영윤(令尹) 자상(子上)에게 말했다.
자상이 말하기를 : “주군의 나이가 아직 젊고, 거느리는 처첩 또한 많아서,

태자에 봉했다가 폐하시면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 초나라가 봉한 태자는 언제나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상신은 두 눈이 독사와 같고 음성 또한 차고 잔인한 사람이니 태자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성왕은 자상의 말을 듣지 않고 상신을 태자로 삼았다. 후에 다시 태자 상신을 폐하고 태자를 세우려고 했다.
상신은 이 소식을 듣고 사실 여부를 조사하지 않고 그의 선생인 반숭(潘崇)에게 묻기를 :

“ 어떤 방법으로 진실된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하고 하자.

반숭이 대답하기를 : “ 태자께서는 왕이 총애하는 강미(江羋)를 식사에 초대하되,

그녀에게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상신이 반숭의 말을 쫓아 그대로 했다.
강미는 화가 나서 말하기를 : “ 대왕께서 당신을 죽이고 태자를 따로 봉하려 하는 것도 당연하지.”라고 하였다.

상신은 반숭에게 “확실합니다.”라고 알렸다. 

반숭이 묻기를 : “태자께서 대왕을 섬길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상신이 대답하기를 :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반숭이 다시 묻기를 :“다른 나라로 도망치시겠습니까?” 하고 하자,

상신은 대답하기를 :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반숭이 또 묻기를 : “정변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하고 하자,

상신은 대답하기를 :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상신은 궁중 경비병으로 성왕을 에워쌌다.

성왕은 곰발바닥 요리를 먹은 후 죽여 달라고 요구했으나, 상신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미일, 성왕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 상신이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목왕(穆王)이다.]

 

穆王立,以其太子宮予潘崇,使為太師,掌國事.

穆王三年,滅江.

四年,滅六、蓼.  六、蓼,皋陶之後.

八年,伐陳. 

十二年,卒.  子莊王侶立.

[목왕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이 살던 태자궁을 반숭에게 하사하고, 그를 태사에 임명해 국가 대사를 관장케 했다.

 목왕 3년, 강(江)나라를 멸했다.

4년, 육(六)나라와 요(蓼)나라를 멸했다. 육나라와 요나라는 모두 고요(皐陶)의 후손들이다.
8년, 진(陳)나라를 토벌했다.

12년, 목왕이 죽고 아들 장왕(莊王) 웅려(熊侶)가 왕위를 계승했다.]

 

莊王即位三年,不出號令,日夜為樂,令國中曰:「有敢諫者死無赦!」伍舉入諫.

莊王左抱鄭姬,右抱越女,坐鐘鼓之閒.

伍舉曰:「願有進隱。」曰:「有鳥在於阜,三年不蜚不鳴,是何鳥也?」

莊王曰:「三年不蜚,蜚將沖天;三年不鳴,鳴將驚人.  舉退矣,吾知之矣.」

居數月,淫益甚.  大夫蘇從乃入諫.  王曰:「若不聞令乎?」對曰:「殺身以明君,臣之願也.」

於是乃罷淫樂, 聽政, 所誅者數百人, 所進者數百人, 任伍舉、蘇從以政, 國人大說.  是歲滅庸.

六年,伐宋, 獲五百乘。

[장왕은 즉위하고 나서 3년 동안 호령(號令)도 발하지 않고, 밤낮으로 향락만을 즐기면서, 국중(國中)에게 명령했다.
“감히 간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치 않고 죽음으로 다스리도록 하라.” 오거(伍擧)가 간하러 입궐해 보니,

장왕은 왼손으로 정희(鄭姬)를 껴안고, 오른손으로 월나라의 여인을 껴안고 무희들 속에 앉아 있었다.

오거가 말하기를 : “제가 수수께끼를 내고자 합니다. 새 한 마리가 언덕에 앉아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지저귀지도 않았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라고 하자. 
장왕이 대답하기를 :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나, 날면 하늘을 치솟아 오를 것이고, 3년 동안 지저귀지 않았으나,

한 번 지저귀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오거, 그대는 가도 좋다. 과인이 그대의 뜻을 알겠노라.”라고 하였다.
몇 달이 지나도록 장왕은 계속 더욱더 황음에 빠져들었다. 대부 소종(蘇從)이 입궐해 간했다.

장왕이 말하기를 : “ 그대는 금지령을 듣지 못했느냐 ? ”라고 하자.
소종이 대답하기를 : “죽음으로써 주군을 깨닫게 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라고 하였다.

장왕은 비로소 황음을 그만두고 정사를 처리했다.
이때 그에게 죽임을 당한 나쁜 무리들이 수백을 헤아렸으며, 등용된 사람들도 수백을 헤아렸다.
장왕은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다스리게 해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그해에 용(庸)나라를 멸망시켰다.
6년, 송(宋)나라를 정벌하고 5백여 대에 달하는 마차를 노획했다.]

 

八年,伐陸渾戎,遂至洛,觀兵於周郊.  周定王使王孫滿勞楚王.

楚王問鼎小大輕重,對曰:「在德不在鼎.」

莊王曰:「子無阻九鼎!楚國折鉤之喙,足以為九鼎.」

王孫滿曰:「嗚呼!君王其忘之乎?昔虞夏之盛, 遠方皆至, 貢金九牧, 鑄鼎象物, 百物而為之備,

使民知神姦.  桀有亂德,鼎遷於殷,載祀六百.  殷紂暴虐,鼎遷於周.  德之休明,雖小必重;

其姦回昏亂,雖大必輕.  昔成王定鼎于郟鄏,卜世三十,卜年七百,天所命也. 

周德雖衰,天命未改.  鼎之輕重,未可問也.」 楚王乃歸.

[장왕 8년, 장왕은 육혼(陸渾)에 사는 융족(戎族)을 정벌하고, 낙하(洛河)에 이르렀다.

주(周)나라 도성 교외에서 열병식을 가지며 힘을 과시했다.
주정왕(周定王)은 왕손만(王孫滿)을 보내어 장왕을 위로했다. 장왕이 구정(九鼎)의 대소경중을 물으니,
왕손만이 대답하기를 : “그것은 덕행에 있지, 보정(寶鼎)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왕이 말했다. “그대는 구정을 막을 수 없소. 초 나라가 창칼의 예봉을 꺾는다면 구정을 만들기에 족하오.” 하자.
왕손만이 말하기를 : “아! 주군에서는 잊으셨는지요? 옛날 순임금과 하우(夏禹)가 흥성할 때는 주변의 국가들이 

모두 조공을 바치러 왔고, 구주(九州)의 제후들이 금속을 헌납해 구정을 만들어 많은 나라들이 여러 가지 

괴이한 물건을 그려 넣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괴이한 물건들이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혼란에 빠지자 구정은 은(殷)나라로 옮겨가 6백 년 동안 나라가 지속되었습니다.

은나라 주왕(紂王)이 포학해 구정은 주나라로 넘어갔습니다. 세상에 덕행이 행해지면 구정은 작아지나 무거워져서

옮기기 어렵고, 세상이 혼란해 간사한 사람이 들끓으면 구정은 커지나 가벼워져서 쉽게 옮길 수 있습니다.
옛날 성왕(成王)이 겹욕(郟鄏)에 구정을 안치했을 때, 대대로 30대에 걸쳐 7백 년 동안 나라가 지속될 것이라는

복점(卜占)이 나왔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주 왕실의 덕정(德政)이 비록 미약하기기는 하지만,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구정의 경중(輕重)을 물으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왕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돌아갔다.]

 

九年,相若敖氏.  人或讒之王,恐誅,反攻王,王擊滅若敖氏之族.

十三年,滅舒.

十六年,伐陳,殺夏徵舒.  徵舒弒其君,故誅之也.  已破陳,即縣之.

群臣皆賀,申叔時使齊來,不賀.

王問,對曰:「鄙語曰,牽牛徑人田,田主取其牛.  徑者則不直矣,取之牛不亦甚乎?

且王以陳之亂而率諸侯伐之,以義伐之而貪其縣,亦何以復令於天下!」莊王乃復國陳後.

[장왕 9년, 약오씨(若敖氏)를 재상에 임명했다. 어떤 사람이 장왕의 면전에서 약오씨를 모함하자,

약오씨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오히려 장왕을 공격했다. 장왕이 반격해 약오씨의 가족을 주살했다.
13년, 서(舒)나라를 멸망시켰다.
16년, 장왕은 진(陳)나라를 정벌하고, 하징서(夏徵舒)를 죽였다. 하징서가 자신의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그를 처벌한 것이다. 진(陳)나라를 점령한 후, 진나라 지역을 현으로 편입시켰다.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는데,
신숙시(申叔時)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도 장왕에게 축하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장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 “옛 속담에 이르기를, 소를 끌고 다른 사람 밭에 들어가면

밭주인이 소를 빼앗는다고 합니다. 밭에 들어가는 것이 잘못한 것이니, 그의 소를 빼앗아도 지나친 것이 아니겠지요 ?

다시 말해서, 대왕이 진나라에 난이 일어나 제후들을 이끌고 그 난을 평정한 것은 도의(道義)로 한 것인데,

오히려 진나라의 토지를 탐한다면, 어떻게 천하를 호령하시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장왕은 그 즉시 진나라 후손들에게 나라를 재건시켜 주었다.]

 

十七年春,楚莊王圍鄭,三月克之. 入自皇門,鄭伯肉袒牽羊以逆,

曰:「孤不天,不能事君,君用懷怒,以及敝邑,孤之罪也. 敢不惟命是聽!

賓之南海,若以臣妾賜諸侯,亦惟命是聽.  若君不忘厲、宣、桓、武,不絕其社稷,

使改事君,孤之願也,非所敢望也.  敢布腹心.」 楚群臣曰:「王勿許.」

莊王曰:「其君能下人, 必能信用其民, 庸可絕乎!」

莊王自手旗, 左右麾軍, 引兵去三十里而舍, 遂許之平.  潘尪入盟,子良出質.

夏六月,晉救鄭,與楚戰,大敗晉師河上,遂至衡雍而歸.

二十年,圍宋,以殺楚使也.  圍宋五月,城中食盡,易子而食,析骨而炊.  宋華元出告以情.

莊王曰:「君子哉!」遂罷兵去. 

二十三年,莊王卒,子共王審立.

[장왕 17년 봄, 초나라 장왕은 정나라를 포위해 3개월간 공격했다.

황문(皇門)으로 들어가니 정양공(鄭襄公)이 상반신을 드러내고 양을 끌면서 영접하며 말하기를 : 

“ 저는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대왕을 섬기지 못해, 대왕께서 진노하시어 친히 저희 나라에 오셨으니,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어떻게 감히 대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저를 남해로 귀양을 보내시거나 저를 노예로 삼아 제후에게 준다 하더라도 대왕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만약에 대왕이 주나라 여왕(厲王), 선왕(宣王) 그리고 환공(桓公), 무공(武公)의 얼굴을 봐서

그들의 사직에 제사 지내게 하고 대를 끊지 않게 하고, 저의 지위를 낮추어서 대왕을 모시게 한다면,

그것은 저의 더 바랄 것이 없을 소망입니다. 그러나 제가 감히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감히 대왕에게 저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초나라 대신들이 말하기를 : “주군께서는 허락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장왕이 말하기를 : “정나라의 군주가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니 틀림없이 그의 백성들을 믿을 수 있겠노라.

어떻게 대를 끊는단 말이오 ! ”라고 하였다. 
장왕은 친히 군기를 들어 좌우 군대를 지휘해 30 리 떨어진 곳에 후퇴해 주둔하고 정나라와의 강화를 허락했다.
조나라 대부 반왕(潘尫)이 정나라에 가서 맹약을 체결하고, 정나라 군주의 동생 자량(子良)을 인질로 삼아

초나라로 데려왔다.  여름 6월, 진(晉)나라 군대가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초나라 군대와 교전했으나,

황하변에서 크게 패하고, 위옹(衛雍)에서 회군했다.
20년, 송나라 도성을 공격했는데, 이는 송나라 사람이 초나라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송나라 도성을 포위한 지 다섯 달이 지나자, 성안에 양식이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아이들을 바꾸어 먹고,

죽은 사람의 뼈를 땔나무로 삼기까지 했다. 송나라 화원(華元)이 성 밖으로 나와서 이 사실을 초나라 왕에게 알리자,

장왕은 “군자로다!”라는 말을 하고,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23년, 장왕이 죽고, 아들 공왕(共王) 웅심(熊審)이 왕위를 계승했다.]

 

共王十六年,晉伐鄭.  鄭告急, 共王救鄭.  與晉兵戰鄢陵, 晉敗楚, 射中共王目. 

共王召將軍子反.  子反嗜酒,從者豎陽穀進酒醉.  王怒,射殺子反,遂罷兵歸.

三十一年,共王卒,子康王招立.  康王立十五年卒,子員立,是為郟敖.

康王寵弟公子圍、子比、子皙、棄疾.

郟敖三年,以其季父康王弟公子圍為令尹,主兵事.

四年,圍使鄭,道聞王疾而還.

十二月己酉,圍入問王疾,絞而弒之,遂殺其子莫及平夏.  使使赴於鄭.  伍舉問曰:「誰為後?」

對曰:「寡大夫圍.」伍舉更曰:「共王之子圍為長.」子比奔晉,而圍立,是為靈王.

[공왕 16년, 진(晉)나라가 정나라에 쳐들어왔다. 정나라가 초 나라에게 위급함을 알리니,

공왕은 정나라에 구원병을 보냈다. 언릉(鄢陵)에서 진나라 군대와 교전했는데,

진나라 군대가 초 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공왕의 눈에 부상을 입혔다. 공왕은 장군 자반(子反)을 불러들였다.

자반은 술을 좋아해, 호위병 수양곡(豎陽穀)이 보낸 술을 마시고 때마침 술에 취해 있었다.

공왕은 노기를 띠고 자반을 죽이고 회군했다.
31년, 공왕이 죽고, 아들 강왕(康王) 웅초(熊招)가 왕위를 계승했다. 강왕이 15년 동안 재위하고 죽자,

아들 웅원(熊員)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겹오(郟敖)이다.
강왕이 총애하는 동생으로는 자위(子圍), 자비(子比), 자석(子晳), 기질(棄疾) 등이 있었다.
겹오 3년, 숙부인 강왕의 동생 자위를 영윤(令尹)으로 삼아 군사권을 장악하게 했다.
4년, 공자 위가 정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 국왕이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12월 기유일(己酉日)에 공자 위는 입궐해 국왕의 병세를 살피고, 갓끈으로 겹오를 목을 매어 죽이고,

겹오의 아들 막(莫)과 평하(平夏)를 죽였다. 초나라는 사신을 정나라에 파견해 비보를 알려야 했다.

오거(伍擧)는 사신에게 묻기를 : “ 누가 후계자가 될 것 같습니까 ? ”라고 하자. 
사신이 대답하기를 : “ 저희 나라 대부이신 자위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오거는 사신의 부음을 고쳐서 말하게 하면서 : “ 당신은 정나라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시오.

‘공왕의 아들 자위가 장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자 자비는 진(晉)나라로 도망치고, 자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왕(靈王)이다.]

 

靈王三年六月,楚使使告晉,欲會諸侯.  諸侯皆會楚于申.

伍舉曰:「昔夏啟有鈞臺之饗,商湯有景亳之命,周武王有盟津之誓,成王有岐陽之閒,

康王有豐宮之朝,穆王有涂山之會,齊桓有召陵之師,晉文有踐土之盟,君其何用?」

靈王曰:「用桓公.」時鄭子產在焉.  於是晉、宋、魯、衛不往.  靈王已盟,有驕色.

伍舉曰:「桀為有仍之會,有緡叛之.  紂為黎山之會,東夷叛之.

幽王為太室之盟,戎、翟叛之.  君其慎終!」

七月,楚以諸侯兵伐吳,圍朱方.

八月,克之,囚慶封,滅其族.  以封徇,曰:「無效齊慶封弒其君而弱其孤,以盟諸大夫!」

封反曰:「莫如楚共王庶子圍弒其君兄之子員而代之立!」於是靈王使(棄)疾殺之.

[영왕 3년 6월, 초나라는 사신을 진(晉)나라에 파견해 제후와 회합을 가질 것이라고 통보했다.

제후들이 모두 신(申) 지역에 와서 초나라 왕과 회합을 가졌다.
오거가 말하기를 : “옛날 하계(夏啓)가 균대(鈞臺)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상나라 탕왕(湯王)은 경박(景亳)에서 명령을 내렸으며, 주나라 무왕은 맹진(盟津)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했으며,

성왕은 기양(岐陽)에서 모여 사냥을 했으며, 강왕(康王)은 풍궁(豐宮)에서 만조백관을 접견했으며,

목왕(穆王)은 도산(塗山)에서 회합을 가졌으며, 제환공은 소릉(召陵)에서 초나라와 맹약을 맺었으며,

진문공(晉文公)은 천토(踐土)에서 맹세했는데, 대왕께서는 어떤 예의를 갖추시겠습니까 ? ” 라고 하자.
영왕이 대답하기를 : “ 제환공의 방법을 택하겠소.”라고 하였다. 

그 당시, 정나라 자산(子産)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진(晉)나라, 송나라, 노나라, 위(衛)나라는 참가하지 않았다.

영왕은 제후들과 맹약을 맺은 후, 교만한 기색을 드러냈다.
오거가 말하기를 : “ 하나라의 걸왕은 유잉(有仍)에서 회맹을 거행했는데, 유민(有緡)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상나라 주왕(紂王)은 여산(黎山)에서 회맹을 하자 동이(東夷)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 유왕(周幽王)이 태실(太室)에서 맹약의 모임을 가졌는데, 융족(戎族)과 적족(翟族)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대왕께서는 반드시 신중하게 뒷일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 ”라고 하였다.
7월, 초 나라 왕은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주방(朱方)을 포위했다.

주방을 점령해 경봉(慶封)을 가두고 그의 일족을 멸했다.
경봉을 본보기로 군중들에게 보이면서 선포했다. “ 여러분, 제나라 경봉을 본받지 마시오. 자기의 국왕을 죽이고,

어린 군주를 속이고, 대부들을 위협해 자신을 지지하게 했습니다.”
경봉이 반박하며 말했다. “초나라 공왕의 서자 위(圍)를 본받지 마시오. 자신의 국왕인 형의 아들 원(員)을

시해하고 왕위에 등극했습니다!”  이때, 영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였다.]

 

七年,就章華臺,下令內亡人實之. 

八年,使公子棄疾將兵滅陳.

十年,召蔡侯,醉而殺之.  使棄疾定蔡,因為陳蔡公.

十一年,伐徐以恐吳.  靈王次於乾豀以待之.

王曰:「齊、晉、魯、衛,其封皆受寶器,我獨不.  今吾使使周求鼎以為分,其予我乎?」

析父對曰:「其予君王哉!昔我先王熊繹辟在荊山,蓽露藍蔞以處草莽,跋涉山林以事天子,

唯是桃弧棘矢以共王事.  齊,王舅也;晉及魯、衛,王母弟也:楚是以無分而彼皆有.

周今與四國服事君王,將惟命是從,豈敢愛鼎?」

靈王曰:「昔我皇祖伯父昆吾舊許是宅,今鄭人貪其田,不我予,今我求之,其予我乎?」

對曰:「周不愛鼎,鄭安敢愛田?」

靈王曰:「昔諸侯遠我而畏晉,今吾大城陳、蔡、不羹,賦皆千乘,諸侯畏我乎?」

對曰:「畏哉!」 靈王喜曰:「析父善言古事焉.」

[영왕 7년, 영왕은 장화대(章華臺)를 세우려고, 영을 내려 유랑민들을 마을에 머물게 하고 부역에 종사하게 했다.
8년, 공자 기질(棄疾)에게 군사를 주어 진(陳)나라를 멸하게 했다.

10년, 채후(蔡侯)를 불러 술에 취하게 한 다음 그를 죽였다.
공자 기질을 파견해 채나라를 평정하고 그를 진채공(陳蔡公)에 임명했다.
11년, 서(徐)나라를 정벌하고 오(吳)나라를 위협했다. 영왕은 간계(乾谿)에 주둔해 동정을 살폈다.
영왕이 말하기를 : “ 제나라, 진나라, 노나라, 위나라는 제후에 봉해질 때 모두 주 왕실로부터 보물을 받아갔는데,

우리나라는 없었소. 지금 내가 사신을 파견해 주 왕실에 구정을 요구해 제후의 보물로 삼으려고 하는데,

과연 나에게 주겠소 ? ”라고 하자.
석보(析父)가 대답하기를 : “ 반드시 국왕에게 줄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의 선조 웅역이 멀리 형산에 있으면서,

낡은 수레를 타고 해어진 옷을 입고 초원지방에 살면서도 산과 물을 건너 천자를 받들고,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을 주 왕실에 공급했습니다. 제나라 제후는 주 천자의 큰아버지이고,

진(晉)나라의 제후와 노나라의 제후 그리고 위(衛)나라의 제후는 각각 주나라 성왕 혹은 무왕과 같은

어머니의 형제들이어서, 초나라가 받지 못한 보물을 그들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주 왕실은 지금 쇠퇴해 네 나라와 함께 모두 국왕을 섬기고 있으니, 국왕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고,

어떻게 감히 어리석게 구정을 아까워하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영왕이 말하기를 : “ 옛날에 나의 먼 조상인 계련(季連)의 큰형 곤오(昆吾)가 원래 허(許)나라에 살았는데,
지금 정나라 사람들이 그곳을 탐해 점령하고 나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데,

만약에 내가 그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주겠소 ? ”라고 하자. 
석보가 대답하기를 : “주나라가 구정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정나라가 어떻게 감히 허나라 땅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영왕이 말하기를 : “옛날에 제후들이 나를 멀리하고 진(晉)나라를 두려워했는데,

지금 내가 진(陳), 채(蔡), 불갱(不羹)의 성지(城池)를 크게 수리하고 이곳에 천승(千乘)의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제후들이 나를 두려워하겠소?”라고 하자. 
석보가 대답하기를 : “ 두려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영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 “석보는 정말로 옛 일을 잘 아는군.” 하였다.]

 

十二年春,楚靈王樂乾豀,不能去也.  國人苦役.  初,靈王會兵於申,僇越大夫常壽過,

殺蔡大夫觀起.  起子從亡在吳,乃勸吳王伐楚,為閒越大夫常壽過而作亂,為吳閒.

使矯公子棄疾命召公子比於晉,至蔡,與吳、越兵欲襲蔡.  令公子比見棄疾,與盟於鄧.

遂入殺靈王太子祿,立子比為王,公子子皙為令尹,棄疾為司馬.

先除王宮,觀從從師于乾豀,令楚眾曰:「國有王矣.  先歸,復爵邑田室.  後者遷之.」

楚眾皆潰,去靈王而歸.  靈王聞太子祿之死也,自投車下,而曰:「人之愛子亦如是乎?」

侍者曰:「甚是.」 王曰:「余殺人之子多矣,能無及此乎?」

右尹曰:「請待於郊以聽國人.」 王曰:「眾怒不可犯.」 曰:「且入大縣而乞師於諸侯.」

王曰:「皆叛矣.」 又曰:「且奔諸侯以聽大國之慮.」 王曰:「大福不再,祗取辱耳.」

於是王乘舟將欲入鄢.  右尹度王不用其計,懼俱死,亦去王亡.  靈王於是獨傍偟山中,

野人莫敢入王.  王行遇其故鋗人,謂曰:「為我求食,我已不食三日矣.」

鋗人曰:「新王下法,有敢閒王從王者,罪及三族,且又無所得食.」王因枕其股而臥.

鋗人又以土自代,逃去. 王覺而弗見,遂饑弗能起.

芋尹申無宇之子申亥曰:「吾父再犯王命, 王弗誅, 恩孰大焉!」乃求王, 遇王饑於釐澤, 奉之以歸.

[영왕12년 봄, 초나라 영왕은 간계를 좋아해 그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했다. 초나라 백성들이 요역으로 고생을 했다.

먼저 영왕은 신읍에서 제후들과 모임을 가지고, 월(越)나라 대부 상수과를 모욕하고, 채나라 대부 관기를 죽였다.

관기의 아들 관종(觀從)은 오나라로 도망쳐서 오나라 왕에게 초나라를 공격하고 월나라 대부 상수과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하고 자신은 오나라 첩자가 되었다.
사람을 파견해 공자 기질의 명령을 거짓으로 유포시키고, 진(晉)나라에서 공자 비(比)를 채읍으로 불러들였으며,
관종은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대와 연합해 채읍을 습격할 준비를 했다. 공자 비로 하여금 공자 기질을 만나게 하고,

등읍(鄧邑)에서 맹약을 맺었다. 그리고 영도(郢都)에 들어가 영왕의 태자 녹(祿)을 죽이고,

공자 비를 초왕에 옹립하고, 공자 석(晳)을 영윤에 임명했으며, 공자 기질을 사마(司馬)로 삼았다.
먼저 왕궁을 평정하고, 관종은 군대를 이끌고 간계에 가서 초나라 군사들에게 선포했다.

“ 나라에 왕이 새로 들어섰으니 먼저 돌아가는 사람은 원래 가지고 있던 관직과 봉지· 전답· 가옥을 

회복시켜 줄 것이며, 늦게 돌아가는 사람은 귀양을 보낼 것이다.”

초 나라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치고 영왕 혼자만 남게 되었다.

영왕은 태자 녹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차 아래로 쓰러지면서 말하기를 : 

“ 사람들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나와 같단 말인가 ? ” 라고 하자.
시종이 대답하기를 : “ 이것보다 훨씬 더합니다.” 라고 하였다.

영왕이 말하기를 : “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자식을 많이 죽였으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소 ? ”라고 하자.
우윤(右尹)이 말하기를 : “ 왕께서는 영도(郢都) 교외로 돌아가셔서 백성들의 처분을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영왕이 말하기를 : “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배반했는데도···.”라고 하자. 
우윤이 다시 대답하기를 : “ 그러면 잠시 제후에게 의탁하시고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영왕이 말하기를 : “ 복을 다시 누릴 수 없을 것이니 내 스스로 치욕을 당하는 수밖에 없구려.” 라고 하였다.
이때 영왕은 배를 타고 언성(鄢城)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우윤은 영왕이 그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자, 죽는 것이 걱정되어 영왕을 떠나 도망쳤다.

영왕이 단신으로 산속을 헤매었지만, 산야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날 견인(鋗人)을 만나 그에게 말하기를 : “나에게 먹을 것을 좀 주시오.

나는 벌써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소.”라고 하자. 
견인이 말하기를 : “ 새 왕이 조서를 내려, 당신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삼족(三族)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음식을 찾을 만한 곳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영왕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견인은 흙더미를 가져다가 다리를 대신하고 도망쳤다.
영왕이 깨어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배가 고파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우윤(芋尹)의 지방관 신무우의 아들 신해(申亥)가 말하기를 : “ 저의 부친께서 두 번이나 국왕의 명령을 어겼는데도,

국왕은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 은덕이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방으로 영왕을 찾아다녔다.

이택(釐澤)에서 영왕이 배가 고파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부축해 집으로 데리고 왔다.]

 

夏五月癸丑,王死申亥家,申亥以二女從死,并葬之.  是時楚國雖已立比為王,畏靈王復來,

又不聞靈王死,故觀從謂初王比曰:「不殺棄疾,雖得國猶受禍.」

王曰:「余不忍.」 從曰:「人將忍王.」王不聽,乃去.  棄疾歸.

國人每夜驚,曰:「靈王入矣!」乙卯夜,棄疾使船人從江上走呼曰:「靈王至矣!」國人愈驚.

又使曼成然告初王比及令尹子皙曰:「王至矣!國人將殺君, 司馬將至矣!君蚤自圖, 無取辱焉.

眾怒如水火, 不可救也.」初王及子皙遂自殺.

丙辰,棄疾即位為王,改名熊居,是為平王.

[여름 5월 계축일에 영왕은 신해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해는 두 딸로 하여금 순절하게 해 영왕과 함께 묻었다.
이때, 초나라는 공자 비(比)를 왕으로 옹립했으나 영왕이 살아 돌아올까 걱정만 할 뿐,

영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관종은 초왕(初王) 비에게 말하기를 : 

“공자 기질을 죽이지 않으면, 왕께서 비록 나라를 얻기는 했지만 화를 당할 것입니다. ”라고 하자. 

초왕이 말하기를 : “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라고 하였다. 

관종이 말하기를 : “사람들이 대왕을 해치려고 참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초왕이 말을 듣지 않자 관종은 비의 곁을 떠났다.
공자 기질이 귀국하자, 도성 사람들이 밤마다 놀라 허둥대며 말하기를 : “영왕이 성으로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을묘일 저녁, 공자 기질은 사람을 보내어 강에서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치게 했다.

“ 영왕이 돌아왔다 ! ” 도성 사람들은 더욱더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만성연(曼成然)을 파견해 초왕 비와 영윤 자석(子晳)에게 알리기를 : “ 군왕이 돌아왔습니다!

성 안의 사람들이 대왕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마(司馬), 즉 기질이 곧 돌아올 것입니다.

대왕께서 빨리 방책을 세워 치욕을 당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이 분노해, 물이 넘치고 불이 타오르는 것같이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초왕과 자석은 자살했다. 병진일에 기질이 왕으로 등극하고 이름을 웅거라고 바꾸니, 이 사람이 평왕(平王)이다.]

 

平王以詐弒兩王而自立, 恐國人及諸侯叛之, 乃施惠百姓.  復陳蔡之地而立其後如故, 歸鄭之侵地.

存恤國中,修政教.  吳以楚亂故,獲五率以歸.  平王謂觀從:「恣爾所欲.」欲為卜尹,王許之.

初,共王有寵子五人,無適立,乃望祭群神,請神決之,使主社稷,而陰與巴姬埋璧於室內,

召五公子齋而入.  康王跨之,靈王肘加之,子比、子皙皆遠之.  平王幼,抱其上而拜,壓紐.

故康王以長立,至其子失之;圍為靈王,及身而弒;子比為王十餘日,子皙不得立,又俱誅.

四子皆絕無後.  唯獨棄疾後立,為平王,竟續楚祀,如其神符.

[평왕은 속임수로 두 왕을 죽이고 등극해, 백성들과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땅을 되돌려 주고, 두 나라의 후예를 그곳의 제후로 삼았으며,

빼앗았던 정(鄭)나라 땅을 되돌려 주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정령(政令)을 내려 교화에 힘썼다.

오나라는 초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초나라 장군 5명을 사로잡아 회군했다.

평왕은 관종에게 말하기를 : “ 그대는 어떤 관직을 원하오 ? ”라고 하자. 

관종이 복윤(卜尹)을 원해 평왕은 그것을 그에게 허락했다.

공왕(共王)에게 총애하는 아들 5명이 있었지만, 적자(嫡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지 않고,

산천 군신들에게 제사 지내어 신령이 그중에서 한 사람을 점지하면 그에게 나라를 맡기고자 했다.

그래서 공왕과 파희(巴姬)는 사당에 몰래 옥벽을 묻어두고, 다섯 아들에게 목욕재계하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강왕(康王)은 옥벽을 뛰어넘었고, 영왕(靈王)은 팔꿈치를 옥벽 위에 올려놓았고,

자비(子比)와 자석(子晳)은 옥벽에서 멀리 떨어졌다.
평왕(平王)은 나이가 어려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데, 그것이 옥벽의 중심을 내리누르게 되었다.
그래서 강왕은 나이가 들어 등극했으나 그의 아들 손에 왕위를 빼앗겼고, 공자 위(圍)는 영왕이 되어 살해되었고,

공자 비(比)는 10여 일 동안 왕이 되었으며, 공자 석은 등극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 네 아들은 후손이 끊어져 멸문했다. 오직 공자 기질만이 후에 등극해 평왕이 되어 초나라 종묘사직에

계속 제사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신령스러운 부적 때문인 것 같다.]

 

初,子比自晉歸,韓宣子問叔向曰:「子比其濟乎?」對曰:「不就.」

宣子曰:「同惡相求,如市賈焉,何為不就?」

對曰:「無與同好,誰與同惡?取國有五難:有寵無人,一也;有人無主,二也;有主無謀,

三也;有謀而無民,四也;有民而無德,五也.

子比在晉十三年矣,晉、楚之從不聞通者,可謂無人矣;族盡親叛,可謂無主矣;

無釁而動, 可謂無謀矣;為羈終世,可謂無民矣;亡無愛徵,可謂無德矣.

王虐而不忌,子比涉五難以弒君,誰能濟之!有楚國者,其棄疾乎?君陳、蔡,方城外屬焉.

苛慝不作, 盜賊伏隱, 私欲不違, 民無怨心.  先神命之, 國民信之. 羋姓有亂, 必季實立, 楚之常也.

子比之官,則右尹也;數其貴寵,則庶子也;以神所命,則又遠之;民無懷焉,將何以立?」

[처음, 공자 비가 진(晉)나라에서 돌아오자,

한선자(韓宣子)가 숙향(叔向)에게 묻기를 : “공자 비가 성공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숙향이 대답하기를 :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선자가 다시 묻기를 : “초나라 백성들이 모두 초왕을 싫어해, 장사꾼이 이익만을 취하는 것과 같이

새 임금을 세우려고 하는데 왜 성공할 수 없습니까 ? ”라고 하자. 
숙향이 대답하기를 : “그와 친밀한 사람도 없으며, 그와 원망을 함께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라를 취하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총애하는 사람은 있지만 현인이 없는 것이 그 하나요,

현인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지지기반이 없는 것이 그 두 번째요,

중요한 지지기반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계략이 없는 것이 그 세 번째요,

전반적인 계략은 있지만 백성들의 호응이 없는 것이 그 네 번째요,
백성들의 호응은 있지만 자신에게 덕행이 없는 것이 그 다섯 번째입니다.
공자 비는 진(晉)나라에서 13년 동안 있었는데, 진나라와 초나라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 중에

학식이 박학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현인이 없는 것이고,

가족이 없고 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배반했으니 중요한 지지기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정변을 일으키고자 하니 전반적인 계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동안 국외에서 살았으니 백성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국외를 떠돌아다녔는데 그 누구도 그의 행적을 기록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덕행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왕이 포학해 거리끼는 바가 없어 자멸했지만, 공자 비가 이 다섯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임금을 죽이려 하는데

누가 그를 도와 성공시키겠습니까?  초나라를 얻는 사람은 아마 기질이 아니겠습니까 ?
기질은 진(陳)나라와 채나라 땅을 통치하고 있고, 방성(方城) 이외의 지역도 모두 그에게 귀속되었습니다.
혼란스럽고 사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도적들이 숨을 죽이고 숨어있고,

사리사욕으로 백성들의 이익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조상들이 그를 점지해 주셨으니 초나라 백성들이 신임합니다.

미성(羋姓)은 난이 일어나면 반드시 막내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초나라의 관례입니다.
자비의 관직은 우윤(右尹)일 뿐이고, 그의 귀천을 논하자면 서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령의 뜻에 의하면 

아주 요원하고 백성들이 그를 생각치 않으니,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宣子曰:「齊桓、晉文不亦是乎?」

對曰:「齊桓,衛姬之子也,有寵於釐公.  有鮑叔牙、賓須無、隰朋以為輔,有莒、衛以為外主,有高、國以為內主. 

從善如流, 施惠不倦. 有國, 不亦宜乎? 昔我文公, 狐季姬之子也, 有寵於獻公.好學不倦.  

生十七年,有士五人,有先大夫子餘、子犯以為腹心,有魏犫、賈佗以為股肱,

有齊、宋、秦、楚以為外主,有欒、郤、狐、先以為內主. 亡十九年,守志彌篤.

惠、懷棄民,民從而與之.  故文公有國,不亦宜乎?子比無施於民,無援於外,去晉,晉不送;

歸楚,楚不迎.  何以有國!」

子比果不終焉,卒立者棄疾,如叔向言也.

[한선자가 묻기를 :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 ”라고 하자. 
숙향이 대답하기를 : “제환공은 위희(衛姬)의 아들로 희공(釐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포숙아(鮑叔牙), 빈수무(賓須無), 습붕(隰朋)이 보좌했고, 거(莒)와 위(衛) 나라가 밖에서 지원했으며,

고씨(高氏)와 국씨(國氏)가 안에서 도왔습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확한 의견을 듣고,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었으니, 제나라를 향유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옛날 우리나라 진문공(晉文公)은 호계희(狐季姬)의 아들로, 헌공(獻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7세에 5명의 현사가 있었고, 대부 자여(子餘)와 자범(子犯)이 심복이 되었으며,

위주와 가타(賈佗)가 힘을 다해 보좌했고, 제나라, 송나라, 진(秦)나라, 초나라가 밖에서 지지했고,

난(欒), 극(郤), 호(狐), 선(先) 네 집안이 안에서 도왔습니다.
19년 동안 떠돌아다녔지만 부국강병에 대한 의지가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혜공(惠公)과 회공(懷公)이 백성을 배신해, 백성들이 서로를 이끌며 문공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문공이 진(晉)나라를 향유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습니까? 공자 비는 백성들에게 이익을 준 적이 없고,

밖에서도 지원하지 않고, 진나라를 떠나는데 진나라에서 호위하지 않았으며, 초나라에 돌아왔는데도 

초나라가 환대하며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초나라를 향유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공자 비는 과연 나쁜 종말을 맞았고, 결과적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기질이었다. 숙향이 말한 그대로였다.]

 

平王二年,使費無忌如秦為太子建取婦。婦好,來,未至,無忌先歸,

說平王曰:「秦女好,可自娶,為太子更求. 」 平王聽之,卒自娶秦女,生熊珍.  更為太子娶.

是時伍奢為太子太傅,無忌為少傅.  無忌無寵於太子,常讒惡太子建.

建時年十五矣,其母蔡女也,無寵於王,王稍益疏外建也.

[평왕 2년, 비무기(費無忌)를 진(秦)나라에 보내 태자 건(建)을 위해서 태자비를 맞아들이려고 했다.

태자비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비무기는 태자비를 영접해 오는 도중에 먼저 성으로 돌아와서 평왕을 부추기며

말하기를 : “진나라 여자가 아름다우니 대왕께서 그녀를 취하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사람을 구해 주시지요.”하자.
평왕은 그의 말에 따라 자신이 진나라 여자를 취해 웅진(熊珍)을 낳았다. 태자에게는 따로 신부를 구해 결혼시켰다.
이때 오사(伍奢)가 태자의 태부(太傅)가 되고 비무기는 소부(少傅)가 되었다.

비무기는 태자의 총애를 얻지 못하자 자주 태자 건을 모함했다. 태자 건은 이 당시 15세였고,

그의 모친은 채나라 사람으로 평왕의 총애를 얻지 못해, 평왕은 점점 태자 건을 소원하게 대했다.]

 

六年, 使太子建居城父, 守邊.  無忌又日夜讒太子建於王曰:「自無忌入秦女, 太子怨,

亦不能無望於王, 王少自備焉.  且太子居城父, 擅兵, 外交諸侯, 且欲入矣.」

平王召其傅伍奢責之.  伍奢知無忌讒,乃曰:「王柰何以小臣疏骨肉?」

無忌曰:「今不制,後悔也.」 於是王遂囚伍奢.[而召其二子而告以免父死]

乃令司馬奮揚召太子建,欲誅之.  太子聞之,亡奔宋.

無忌曰:「伍奢有二子,不殺者為楚國患.  盍以免其父召之,必至.」

於是王使使謂奢:「能致二子則生,不能將死.」 奢曰:「尚至,胥不至.」 王曰:「何也?」

奢曰:「尚之為人,廉,死節,慈孝而仁,聞召而免父,必至,不顧其死.

胥之為人,智而好謀,勇而矜功,知來必死,必不來.  然為楚國憂者必此子.」

於是王使人召之,曰:「來,吾免爾父.」

伍尚謂伍胥曰:「聞父免而莫奔, 不孝也;父戮莫報,無謀也;度能任事,知也.

子其行矣, 我其歸死.」 伍尚遂歸.

伍胥彎弓屬矢,出見使者,曰:「父有罪,何以召其子為?」將射,使者還走,遂出奔吳.

伍奢聞之,曰:「胥亡,楚國危哉.」楚人遂殺伍奢及尚.

[평왕 6년, 태자 건을 성보(城父)에 머물게 하고 변방을 지키게 했다.

비무기는 다시 밤낮으로 평왕 면전에서 태자 건을 모함하기를 : 
“ 제가 진나라 여자를 대왕의 후궁으로 모셔온 그날부터 태자 건은 저를 미워하고 있으니,

대왕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좀 더 경계하셔야 합니다.

더구나 태자는 성보에서 병권을 쥐고 대외적으로 제후와 결탁해 쳐들어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평왕은 태자의 태부 오사를 불러 이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라고 명했다.
오사는 비무기가 태자를 모함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어찌해 하찮은 소인의 말을 듣고 혈육을 멀리하십니까 ? ” 라고 하자.

비무기가 말하기를 : “지금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평왕은 오사를 옥에 가두고, 사마 분양(奮揚)을 보내어 태자 건을 불러오게 해 태자 건을 죽이려고 했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송나라로 도망쳤다.

비무기가 말하기를 : “ 오사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함께 죽이지 않으면 초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부친의 죄를 사해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들을 불러 들인다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평왕은 사신을 보내어 오사에게 보내어 말을 전하게 했다.

“ 너의 두 아들을 불러오면 살려 줄 것이고, 불러오지 못하면 죽음뿐이다.”라고 하자. 

오사가 말하기를 : “상(尙)은 오겠지만 서(胥)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평왕이 말하기를 :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 ”라고 하자. 
오사가 대답하기를 : “ 상의 사람됨은 품행이 단정하고 절개를 위해서 죽을 수 있고, 효가 지극하고 어질어서,

왕명을 받고 부친의 죄를 면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와서,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서의 사람됨은 기지가 있고 계략을 꾸미기를 좋아하고, 용감하면서 공명을 바라고,

오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초나라는 이 아이 때문에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평왕은 그들을 소환하기 위해서 사람을 파견했다. “자, 내가 너희 부친의 죄를 사해주겠노라.”라고 하자. 
오상(伍尙)이 오서(伍胥)에게 말하기를 : “ 아버지의 죄를 사해준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는 것은 불효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복수할 사람이 없다면 지모가 없는 것이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헤아리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다. 너는 도망치고 나는 돌아가서 죽겠다.”라고 하면서, 오상은 도성 영으로 갔다.
오서는 활에 화살을 메겨 사신에게 말했다. “ 부친에게 죄가 있는데 어찌해 아들을 불러들인단 말입니까? ”라고 하며,

활을 쏘려고 하자 사신은 도망치고, 오서는 오나라에 망명했다.
오사는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 “ 서가 도망쳤으니, 초나라가 위험하겠군!”이라고 하였다.

초나라 왕은 오사와 오상을 죽였다.]

 

十年,楚太子建母在居巢,開吳.  吳使公子光伐楚,遂敗陳、蔡,取太子建母而去. 

楚恐,城郢.  初,吳之邊邑卑梁與楚邊邑鐘離小童爭桑,兩家交怒相攻,滅卑梁人.

卑梁大夫怒,發邑兵攻鐘離.  楚王聞之怒,發國兵滅卑梁.

吳王聞之大怒,亦發兵,使公子光因建母家攻楚,遂滅鐘離、居巢.  楚乃恐而城郢.

十三年,平王卒.  將軍子常曰:「太子珍少,且其母乃前太子建所當娶也.」欲立令尹子西.

子西,平王之庶弟也,有義.  子西曰:「國有常法,更立則亂,言之則致誅.」

乃立太子珍,是為昭王.

[평왕 10년, 초나라 태자 건의 모친은 거소(居巢)에서 몰래 오나라 군사와 내통했다.

오나라는 공자 광(光)을 파견해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격퇴하고,

태자 건의 모친을 오나라로 데려갔다. 초나라는 겁을 먹고 영성(郢城)을 옮기고 다시 성을 쌓았다.
예전에, 오나라의 변경 마을 비량(卑梁)과 초나라 변경 마을 종리(鍾離)의 아이들이 뽕나무 잎을 서로 빼앗으려고

싸움이 나서, 두 집안이 발끈해 싸우다가 비량 일가가 죽임을 당했다. 이에 비량의 대부(大夫)가 발끈해

병사를 보내 종리를 공격했다. 초나라 왕이 이 사건을 듣고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비량을 초토화시켰다.

오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군대를 보내, 태자 건의 모친이 거소에 사는 것을 이유로

공자 광으로 하여금 종리와 거소를 공격하게 했다. 초나라는 두려워해 다시 영성을 보수했다.
13년, 평왕이 서거했다. 장군 자상(子常)이 말하기를 : “ 태자 진(珍)이 나이가 어리고,

그의 모친은 전 태자 건에게 시집갔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영윤(令尹) 자서를 옹립하려고 했다.

자서는 평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절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서가 말하기를 : “ 나라에는 정상적으로 시행해야 할 법도가 있는데, 계승질서를 바꾸면 나라가 어지러워 집니다.
그리고 자상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태자 진을 옹립하니, 이 사람이 소왕(昭王)이다.]

 

昭王元年,楚眾不說費無忌,以其讒亡太子建,殺伍奢子父與郤宛.

宛之宗姓伯氏子及子胥皆奔吳,吳兵數侵楚,楚人怨無忌甚.  楚令尹子常誅無忌以說眾,眾乃喜.

四年,吳三公子奔楚,楚封之以捍吳.

五年,吳伐取楚之六、潛.

七年,楚使子常伐吳,吳大敗楚於豫章.

[소왕 원년(元年), 초나라 백성들은 모두 비무기를 싫어했다. 그의 모함으로 태자 건이 도망했고,

오사(伍奢) 부자와 극완(郤宛)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완과 동성동본인 백씨(伯氏)의 아들 비(嚭)와 오자서는 모두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나라 군대가 여러 차례 초나라에 쳐들어오자 초나라 백성들은 비무기를 몹시 원망했다.

영윤 자상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비무기를 죽이니 백성들이 기뻐했다.
4년, 오나라 공자 세 사람이 초나라에 투항했다. 초왕은 그들에게 토지와 관직을 주고 오나라에 대항하게 했다.

5년, 오나라는 초나라의 육읍(六邑)과 잠읍(潛邑)을 공격해 점령했다.
7년, 초나라는 자상을 파견해 오나라를 공격했지만, 오나라 군대가 예장(豫章)에서 초나라 군대를 크게 격퇴했다.]

 

十年冬, 吳王闔閭、伍子胥、伯與唐、蔡俱伐楚, 楚大敗, 吳兵遂入郢, 辱平王之墓, 以伍子胥故也.

吳兵之來,楚使子常以兵迎之,夾漢水陣.  吳伐敗子常,子常亡奔鄭.  楚兵走,吳乘勝逐之,

五戰及郢.  己卯, 昭王出奔.  庚辰, 吳人入郢.  昭王亡也至雲夢.  

雲夢不知其王也, 射傷王. 王走鄖.

鄖公之弟懷曰:「平王殺吾父,今我殺其子,不亦可乎?」鄖公止之, 然恐其弒昭王, 乃與王出奔隨.

吳王聞昭王往,即進擊隨,謂隨人曰:「周之子孫封於江漢之閒者,楚盡滅之.」欲殺昭王.

王從臣子綦乃深匿王,自以為王,謂隨人曰:「以我予吳.」隨人卜予吳,不吉,

乃謝吳王曰:「昭王亡,不在隨.」 吳請入自索之, 隨不聽, 吳亦罷去.

昭王之出郢也, 使申鮑胥請救於秦.  秦以車五百乘救楚, 楚亦收餘散兵, 與秦擊吳.

[소왕 10년 겨울, 오왕 합려(闔閭), 오자서(伍子胥), 백비(伯嚭)가 당(唐)나라, 채나라와 연합해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도성 영에 입성했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을 가하는 모욕을 

주었다.오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초나라는 자상을 보내어 응전하게 해 두 나라 군대는 한수(漢水)를 마주하고 

진을 쳤다.

오나라 군대가 자상을 격퇴시키니, 자상은 정(鄭)나라로 도망쳤다. 초 나라 군대가 패해 후퇴하니,

오나라 군대는 승기를 타고 줄곧 추격해 다섯 번의 싸움을 거쳐서 영도로 쳐들어갔다.

기묘일에 소왕이 성을 벗어나 도망쳤다. 경진일에 오나라 군대가 영도에 입성했다. 소왕은 운몽으로 도망쳤다.

운몽 사람들은 그가 국왕인지 모르고 활을 쏘아 상처를 입혔다. 소왕이 운읍(鄖邑)으로 도망치니,

운공(鄖公)의 동생 회(懷)가 말하기를 : 

“ 평왕이 나의 부친을 죽였으니, 이제 우리가 그의 아들을 죽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 ” 라고 하자.
운공은 그를 제지했으나 그가 소왕을 살해할까봐 걱정이 되어 소왕과 함께 수(隨)나라로 도망쳤다.
오나라 왕은 소왕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즉시 수나라로 쳐들어와서 수나라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
 “ 주(周)의 자손이 장강(長江)· 한강(漢江) 지역의 제후에 봉해졌으나, 초나라가 그들을 전부 없앴다.”라고 하면서

소왕을 죽이려고 했다. 소왕의 시종 자기(子綦)가 소왕을 은밀하게 숨기고, 자신이 소왕으로 분장하고 나서,

수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 “ 나를 오나라 군대에 넘겨주시오.”라고 하였다. 
수나라 사람들이 점괘를 보니, 소왕을 오나라에 넘기는 것이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오나라 왕에게 거절하며

말하기를 : “소왕이 도망치고 수나라에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나라 군대가 성에 들어와 직접 수색하겠다고 요구했으나 수나라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자, 

오나라 군대도 철수했다.  소왕은 영도에서 피신할 때, 신포서(申包胥)를 진(秦)나라에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했다.

진나라는 전차 5백 대를 초나라에 지원해 주고, 초나라도 패잔병을 모아, 진나라 군대와 함께 오나라를 공격했다.]

 

十一年六月,敗吳於稷.  會吳王弟夫概見吳王兵傷敗,乃亡歸,自立為王.  闔閭聞之,引兵去楚,

歸擊夫概.  夫概敗,奔楚,楚封之堂谿,號為堂谿氏.  楚昭王滅唐九月,歸入郢.

十二年,吳復伐楚,取番.  楚恐,去郢,北徙都鄀.

十六年,孔子相魯.

二十年,楚滅頓,滅胡.

二十一年,吳王闔閭伐越.  越王句踐射傷吳王,遂死.  吳由此怨越而不西伐楚.

[소왕 11년 6월, 직(稷)에서 오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마침 오나라 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오왕의 군사들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하는 광경을 보고, 오왕 합려를 속이고 도성으로 돌아와 스스로 오나라 왕이 되었다.
합려는 이 소식을 듣고 초나라에서 말머리를 돌려 부개를 공격했다. 부개는 패해 초나라로 도망치자,

초나라는 그를 당계(堂谿)에 봉하고 당계씨(堂谿氏)라 했다. 초 소왕이 당나라를 멸했다. 9월, 영도로 돌아왔다.
12년, 오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 번읍(番邑)을 빼앗았다.

초나라는 두려워서 영도를 버리고 북쪽 약읍(鄀邑)으로 천도했다.
16년, 공자(孔子)가 노(魯)나라 국상(國相)에 임명되었다.

20년, 초나라가 돈(頓)나라와 호(胡)나라를 멸했다.
21년, 오나라 합려가 월나라를 공격했다.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을 활로 쏘아, 합려는 부상을 입고 죽었다.

오나라는 이 때문에 월나라를 증오하고 다시는 서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二十七年春,吳伐陳,楚昭王救之,軍城父. 

十月,昭王病於軍中,有赤雲如鳥,夾日而蜚.

昭王問周太史,太史曰:「是害於楚王,然可移於將相.」將相聞是言,乃請自以身禱於神.

昭王曰:「將相,孤之股肱也,今移禍,庸去是身乎!」弗聽. 卜而河為祟,大夫請禱河.

昭王曰:「自吾先王受封,望不過江、漢,而河非所獲罪也.」止不許.

孔子在陳,聞是言,曰:「楚昭王通大道矣.  其不失國,宜哉!」

昭王病甚,乃召諸公子大夫曰:「孤不佞,再辱楚國之師,今乃得以天壽終,孤之幸也.」

讓其弟公子申為王,不可.  又讓次弟公子結,亦不可.

乃又讓次弟公子閭,五讓,乃後許為王.  將戰,庚寅,昭王卒於軍中.

子閭曰:「王病甚, 捨其子讓群臣, 臣所以許王, 以廣王意也.  今君王卒, 臣豈敢忘君王之意乎!」

乃與子西、子綦謀,伏師閉涂,迎越女之子章立之,是為惠王.  然後罷兵歸,葬昭王.

[소왕 27년 봄, 오나라가 진(陳)나라를 공격하자, 초 소왕은 진나라에 구원병을 보내 성보에 진을 치게 했다.
10월, 소왕이 진중에서 병으로 쓰러졌는데, 하늘에 빨간 구름이 새처럼 태양을 끼고 날아가는 것 같았다.

소왕이 주 왕실 태사(太史)에게 물으니, 태사가 말하기를 : “ 이것은 대왕께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재난을 장군과 재상들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장군과 재상들이 이 말을 듣고 신에게 자신들이 소왕의 재난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소왕은 말하기를 : “ 장군과 재상 여러분, 나의 어깨와 다리를 예로 듭시다.

지금 재난을 어깨와 다리로 옮긴다고 해서 내 몸의 병을 없앨 수 있겠소?”라고 하면서,

장군과 재상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점괘로 병의 원인을 점쳐보니, 황하를 숭상해야 한다는 점괘가 나오자, 대부들이 하신(河神)에게 제사 지내며

소원을 빌었다. 소왕이 말하기를 : “ 나의 선조가 제후에 봉해진 이후로 제사를 지낸 강은 장강과 한수이고,

우리는 일찍이 황하 신에게 죄를 범한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자가 진(陳)나라에서 이 말을 듣고 “초소왕은 대의를 통달하고 있으니, 나라를 잃지 않을 것이다! ” 라고 말했다.
소왕의 병이 더욱 심해지자 여러 공자와 대부들을 불러 말하기를 : “ 나는 재능이 없어 두 차례에 걸쳐

초나라 군대에 굴욕을 당하기는 했지만, 지금 천수를 누리고 죽는 것이니 나의 행운이오.”라고 하면서, 

그는 큰아들 신(申)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둘째 아들 결(結)에게 물려주려고 했으나 그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다시 셋째 아들 여(閭)에게 다섯 번에 걸쳐 권해 겨우 국왕이 되겠다는 응답 받아냈다.
초나라가 오나라와 교전하려고 할 때, 경인일(庚寅日)에 소왕이 군영(軍營)에서 죽었다.
공자 여가 말하기를 : “부왕의 병세가 위중해, 자신의 아들을 버려두고, 왕위를 신하들에게 양위하려고 하는

부왕의 말씀을 당시에 내가 받아들인 이유는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제 왕께서 돌아가셨으니 내가 어떻게 감히 왕이 양위하고자 하는 훌륭한 마음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 ”하였다.

그리고 자서(子西), 자기(子綦)와 상의해 몰래 군대를 파견해 월나라 여자가 낳은 아들 자장(子章)을 영접해 와서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이 사람이 혜왕(惠王)이다. 그런 다음 영으로 철수하고 소왕을 안장했다.]

 

惠王二年,子西召故平王太子建之子勝於吳,以為巢大夫,號曰白公.  白公好兵而下士,欲報仇.

六年,白公請兵令尹子西伐鄭.

初,白公父建亡在鄭, 鄭殺之, 白公亡走吳, 子西復召之, 故以此怨鄭, 欲伐之.  子西許而未為發兵.

八年,晉伐鄭,鄭告急楚,楚使子西救鄭,受賂而去.

白公勝怒,乃遂與勇力死士石乞等襲殺令尹子西、子綦於朝,因劫惠王,置之高府,欲弒之.

惠王從者屈固負王亡走昭王夫人宮.  白公自立為王.

月餘,會葉公來救楚,楚惠王之徒與共攻白公,殺之.  惠王乃復位.  是歲也,滅陳而縣之.

十三年,吳王夫差彊,陵齊、晉,來伐楚.

十六年,越滅吳.

四十二年,楚滅蔡.

四十四年,楚滅杞.  與秦平.

是時越已滅吳而不能正江、淮北;楚東侵,廣地至泗上. 

五十七年,惠王卒,子簡王中立.

[혜왕 2년, 자서는 오나라에서 죽은 평왕 태자 건의 아들 승(勝)을 불러와서 그를 소읍(巢邑)의 대부로 임명하고

백공(白公)이라고 불렀다. 백공은 용병을 좋아했고, 겸손하게 선비들을 대함으로써 부친의 원수를 갚을 생각이었다.
6년, 백공은 영윤 자서에게 군대를 일으켜 정나라를 공격하자고 요청했다.
예전에 백공의 부친 태자 건이 정나라로 도망했을 때, 정나라가 그를 죽였기 때문에 백공은 오나라로 도망쳤고

자서가 다시 그를 불러들여 대부가 되었으므로 정나라를 증오해 정나라를 토벌하려고 했다.

자서가 허락하기는 했지만, 군대를 내지는 않았다.

8년,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는 초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초나라는 자서를 보내어 정나라를 구원하게 하고, 재물을 얻어 돌아왔다.

백공 승은 화가 치밀어 죽음을 무릅쓴 용사 석기(石乞) 등과 함께 조회에서 영윤 자서를 습격해 죽이고,

승기를 잡아 혜왕을 납치해 고부(高府)에 가두고 그를 죽일 준비를 했다.
혜왕의 시종 굴고(屈固)가 혜왕을 업고 소왕부인의 궁으로 도망쳤다. 백공은 스스로 왕위를 계승해 국왕이 되었다.
한 달 후, 섭공(葉公)이 초나라 왕을 구원하러 오자, 초혜왕의 잔당들이 섭공과 함께 백공을 공격해 그를 죽였다.

혜왕이 다시 복위했다. 이해에 초나라는 진(陳)나라를 멸해 현(縣)으로 삼았다.
13년, 오왕 부차(夫差)는 세력이 강대해지자,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침범하고 초나라를 공격했다.
16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했다.

42년, 초나라가 채나라를 멸했다.

44년, 초나라가 기(杞)나라를 멸하고 진(秦)나라와 강화했다. 이때, 월나라가 이미 오나라를 멸했지만,

강북(江北)과 회북(淮北) 지방을 통치할 수 없었다. 초나라는 동쪽으로 쳐들어가 땅을 사상(泗上)까지 넓혔다.
57년, 혜왕이 죽고, 아들 간왕(簡王) 중(中)이 왕위에 올랐다.]

 

簡王元年,北伐滅莒.

八年,魏文侯、韓武子、趙桓子始列為諸侯. 

二十四年,簡王卒,子聲王當立.

聲王六年,盜殺聲王,子悼王熊疑立.

悼王二年,三晉來伐楚,至乘丘而還.

四年,楚伐周.  鄭殺子陽.

九年,伐韓,取負黍.

十一年,三晉伐楚,敗我大梁、榆關.  楚厚賂秦,與之平.

二十一年,悼王卒,子肅王臧立. 肅王四年,蜀伐楚,取茲方.  於是楚為捍關以距之.

十年,魏取我魯陽.

十一年,肅王卒,無子,立其弟熊良夫,是為宣王.

[간왕 원년, 북상해 거(莒)나라를 공격해 멸했다.

8년, 위문후(魏文侯), 한무자(韓武子), 조환자(趙桓子)가 제후가 되었다.
24년, 간왕이 죽고, 아들 성왕(聲王) 웅당(熊當)이 즉위했다.

성왕 6년, 강도가 성왕을 살해해 아들 도왕(悼王) 웅의(熊疑)가 즉위했다.
도왕 2년, 한무자, 조환자, 위문후가 초나라를 공격해 승구(乘丘)에까지 이르렀다가 철수했다.
4년, 초나라가 주나라를 공격하고, 정나라가 자양(子陽)을 죽였다.

9년, 한(韓)나라를 공격해 부서(負黍)를 탈취했다.
11년 3월에 위문후, 조환자, 한무자가 초나라를 공격해 대량(大梁)과 유관(楡關)에서 초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초나라가 많은 재물을 진(秦)나라에 보내와서 강화를 맺었다.

 21년, 도왕이 죽자 아들 숙왕(肅王) 장(藏)이 즉위했다.
숙왕 4년, 촉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자방(玆方)을 빼앗았다. 이때 초나라는 한관을 보수해 촉나라를 방어했다.
10년, 위(魏)나라가 초나라의 노양(魯陽)을 빼앗았다.

11년, 숙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서 그의 동생 웅양부(熊良夫)가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선왕(宣王)이다.]

 

宣王六年,周天子賀秦獻公.  秦始復彊,而三晉益大,魏惠王、齊威王尤彊.

三十年,秦封衛鞅於商,南侵楚.  是年,宣王卒,子威王熊商立.

威王六年,周顯王致文武胙於秦惠王. 

七年,齊孟嘗君父田嬰欺楚,楚威王伐齊,敗之於徐州,而令齊必逐田嬰.

田嬰恐,張丑偽謂楚王曰:「王所以戰勝於徐州者,田盼子不用也. 盼子者,有功於國,

而百姓為之用.  嬰子弗善而用申紀.  申紀者,大臣不附,百姓不為用,故王勝之也.

今王逐嬰子,嬰子逐,盼子必用矣.  復搏其士卒以與王遇,必不便於王矣.」楚王因弗逐也.

十一年,威王卒,子懷王熊槐立.  魏聞楚喪,伐楚,取我陘山.

[선왕 6년, 주 천자가 진헌공을 치하했다. 진(秦)나라가 중흥하고, 위문후, 조환자, 한무자의 세력이 더욱 커지고,

위혜왕과 제위왕(齊威王)이 더욱 강성했다.
30년, 진(秦)나라가 위앙(衛鞅)을 상(商)에 봉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침략했다.

이해에 선왕이 죽고, 아들 위왕(威王) 웅상(熊商)이 왕위에 올랐다.
위왕 6년, 주현왕(周顯王)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게 제사를 지낸 제육(祭肉)을 진혜왕(秦惠王)에게 보냈다.
7년,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의 부친 전영(田嬰)이 초나라를 속였다.

초위왕은 제나라를 공격해 서주(徐州)에서 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제나라에게 전영을 축출하게 위협했다.

전영이 두려워하자, 장축(張丑)이 거짓으로 초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 “ 대왕이 서주에서 제나라를 이긴 원인은

제나라가 전반자를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자는 제나라에 공이 있어 백성들이 그를 위해서 힘을 다합니다.

전영은 그를 싫어해 신기(申紀)를 등용했습니다. 대신들은 신기를 가까이하지 않고,

백성들도 신기를 위해서 애쓰지 않기 때문에 대왕이 제나라를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대왕이 제나라에 전영을 축출하라고 한다면 전영이 쫓겨난 후 반자가 틀림없이 중용될 것입니다.

그가 제나라의 군대를 새롭게 정돈해 대왕과 싸운다면 대왕에게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초나라 왕은 전영을 축출하라는 요구를 다시는 들먹이지 않았다.
11년, 위왕이 죽자, 아들 회왕(懷王) 웅괴(熊槐)가 왕위에 올랐다.

위나라는 초나라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나라를 공격해 형산(陘山)을 빼앗았다.]

 

懷王元年,張儀始相秦惠王.

四年,秦惠王初稱王. 

六年,楚使柱國昭陽將兵而攻魏,破之於襄陵,得八邑.  又移兵而攻齊,齊王患之.

陳軫適為秦使齊,齊王曰:「為之柰何?」陳軫曰:「王勿憂,請令罷之.」

即往見昭陽軍中,曰:「願聞楚國之法,破軍殺將者何以貴之?」

昭陽曰:「其官為上柱國,封上爵執珪.」 陳軫曰:「其有貴於此者乎?」 昭陽曰:「令尹.」

陳軫曰:「今君已為令尹矣,此國冠之上.  臣請得譬之.  人有遺其舍人一卮酒者,

舍人相謂曰:『數人飲此,不足以遍,請遂畫地為蛇,蛇先成者獨飲之.』

一人曰:『吾蛇先成.』 舉酒而起,曰:『吾能為之足.』及其為之足,而後成人奪之酒而飲之,

曰:『蛇固無足,今為之足,是非蛇也.』今君相楚而攻魏,破軍殺將,功莫大焉,

冠之上不可以加矣.  今又移兵而攻齊,攻齊勝之,官爵不加於此;攻之不勝,身死爵奪,

有毀於楚:此為蛇為足之說也.  不若引兵而去以德齊,此持滿之術也.」

昭陽曰:「善.」引兵而去. 燕、韓君初稱王.  秦使張儀與楚、齊、魏相會,盟齧桑.

[회왕 원년, 장의(張儀)는 진혜왕(秦惠王)의 재상에 등용되었다.

4년, 진 혜왕이 왕을 칭했다.
6년, 초나라는 주국(柱國) 소양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해 위(魏)나라를 공격해, 양릉에서 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8개의 성을 취했다. 다시 군대를 움직여 제나라를 공격하니, 제나라 왕은 이 일로 근심에 싸였다.

진진(陳軫)이 때마침 진(秦)나라의 사자로서 제나라에 와 있었다. 

제나라 왕이 묻기를 : “ 어떻게 하면 초나라 군과 대적할 수 있겠소 ? ”라고 하자. 

진진이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는 우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초나라에 가서 군대를 멈출 수 있도록 권해 보겠습니다.”라고 하고서는,  

초나라 진영으로 가서 소양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 저는 초나라 군공법을 알고 싶습니다.

적군을 물리치거나 적장을 죽이는 사람에게 어떤 관직을 내리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소양이 대답하기를 : “관직은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하고, 가장 높은 작위인 집규(執珪)를 하사하겠소.”라고 하였다.

진진이 묻기를 : “이보다 존귀한 관직이 또 있습니까?”라고 하자, 

소양이 대답하기를 : “영윤이 있소.” 라고 하였다.
진진이 말하기를 : “지금 당신께서는 이미 영윤이시니, 나라에서 가장 높은 관직입니다.

제가 비유를 들어 설명해 드리지요. 어떤 사람이 그의 문객들에게 술 한 잔을 주자, 문객들이 의논하며 말했습니다.

‘몇 사람이 이 술을 마시려고 한다면 다 마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땅에 뱀을 그려서 먼저 뱀을 그린 사람이

이 술을 마십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린 뱀이 먼저 완성되었어.’라고 하며, 

그는 술잔을 받쳐 들고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나는 뱀에게 다리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며, 

그가 뱀에게 다리를 그려 넣자, 그 사람 다음으로 뱀을 그린 사람이 그의 술잔을 빼앗아 마시고 나서 말했습니다. 

‘뱀은 본래 다리가 없는데, 뱀에 다리를 그렸으니 그것은 뱀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초나라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위나라를 공격해 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위나라 장군을 죽였으니

공로가 이보다 큰 것은 없는데도, 높은 관직에 있어 다른 것을 더 첨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다시 군대를 정비해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시는데, 제나라를 물리쳐도 관직은 이보다 더 높아질 수 없습니다.

만약에 공격해 이기지 못하면 생명을 잃거나 관직을 잃을 것이며, 초나라에 손실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설명했던 뱀에게 다리를 그린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군대를 이끌고 떠나 제나라에

이익을 주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양이 대답하기를 : “좋소.”라고 하며,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이해, 연(燕)나라와 한(韓)나라가 왕을 칭했다.

진(秦)나라는 장의를 파견해 초나라, 제나라, 위나라의 대신들과 회합을 가지게 해, 설상(齧桑)에서 맹약을 맺었다.]

 

十一年,蘇秦約從山東六國共攻秦,楚懷王為從長.

至函谷關,秦出兵擊六國,六國兵皆引而歸,齊獨後.

十二年,齊湣王伐敗趙、魏軍,秦亦伐敗韓,與齊爭長.

[회왕 11년, 소진(蘇秦)은 산동 여섯 나라와 연합해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하고, 초회왕이 합종의 맹주가 되었다.

연합군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진(秦)나라는 출병해 여섯 나라를 맞아 싸웠다.

여섯 나라 군대가 모두 철수하고, 제나라 군대만 나중에 철수했다.
12년, 제민왕(齊湣王)이 조(趙)와 위(魏) 나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진(秦)나라도 한(韓)과 조(趙)나라의 군대를 물리친 후, 제나라와 패권을 다투었다.]

 

十六年,秦欲伐齊,而楚與齊從親,秦惠王患之,乃宣言張儀免相,使張儀南見楚王,

謂楚王曰:「敝邑之王所甚說者無先大王,雖儀之所甚願為門闌之廝者亦無先大王.

敝邑之王所甚憎者無先齊王,雖儀之所甚憎者亦無先齊王.  而大王和之,是以敝邑之王不得事王,

而令儀亦不得為門闌之廝也. 王為儀閉關而絕齊,今使使者從儀西取笔秦所分楚商於之地方六百里,

如是則齊弱矣.  是北弱齊,西德於秦,私商於以為富,此一計而三利俱至也.」

懷王大悅,乃置相璽於張儀,日與置酒,宣言「吾復得吾商於之地.」 群臣皆賀,而陳軫獨弔. 

懷王曰:「何故?」陳軫對曰:「秦之所為重王者,以王之有齊也.  今地未可得而齊交先絕,

是楚孤也. 夫秦又何重孤國哉,必輕楚矣.  且先出地而後絕齊,則秦計不為.

先絕齊而後責地,則必見欺於張儀.  見欺於張儀,則王必怨之.  怨之,是西起秦患,北絕齊交.

西起秦患,北絕齊交,則兩國之兵必至. 臣故弔.」 楚王弗聽,因使一將軍西受封地.

張儀至秦,詳醉墜車,稱病不出三月,地不可得.

楚王曰:「儀以吾絕齊為尚薄邪?」乃使勇士宋遺北辱齊王.  齊王大怒,折楚符而合於秦.

秦齊交合,張儀乃起朝,謂楚將軍曰:「子何不受地?從某至某,廣袤六里.」

楚將軍曰:「臣之所以見命者六百里,不聞六里.」即以歸報懷王.  懷王大怒,興師將伐秦.

陳軫又曰:「伐秦非計也. 不如因賂之一名都, 與之伐齊, 是我亡於秦,取償於齊也,吾國尚可全.

今王已絕於齊而責欺於秦,是吾合秦齊之交而來天下之兵也,國必大傷矣.」

楚王不聽,遂絕和於秦,發兵西攻秦.  秦亦發兵擊之.

[회왕 16년, 진(秦)나라는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초나라가 제나라와 친선을 맺고 합종하니,

진(秦)혜왕은 이 상황을 걱정해, 장의를 재상의 자리에서 해임한다고 선포했고,

장의를 남쪽으로 내려 보내 초나라 왕을 알현하게 했다.

장의가 초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 “저의 국왕께서 가장 좋아하는 분은 대왕임에 틀림이 없고,

만약 저 장의가 문지기가 된다면, 대왕이 저의 주인이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국왕께서 증오하는 사람이 제나라 왕임에 지나침이 없고, 저 장의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도 제나라 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대왕이 제나라 왕과 우호관계를 맺으신다면 저의 국왕께서는 대왕을 모실 수 없고,

저 장의도 대왕의 문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만약에 저를 위해 동쪽의 관문을 봉쇄해 제나라와 단교하고,

지금 저와 함께 사신을 서쪽으로 보내시어, 진(秦)나라가 빼앗았던 사방 6백 리에 달하는 상오(商於) 땅을

되돌려 받으신다면 제나라는 약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약화시키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됨과 동시에, 초나라는 상오 지방을 보유함으로써 부유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계책으로 세 가지 이익을 손에 넣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회왕은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재상 직인을 장의에게 건네주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어 환대하고, 널리 선포했다.

“우리 초나라가 다시 상오 지방을 되찾았다.” 대신들이 모두 초나라 왕에게 축하인사를 했지만,

진진만이 애도의 뜻을 표했다. 회왕이 묻기를 : “무슨 까닭인고 ? ” 라고 하자.

진진이 대답하기를  : “ 진나라가 대왕을 중히 여기는 까닭은 대왕께서 제나라를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땅을 얻지도 않았는데 제나라와 먼저 단교하신다면 초나라는 고립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어떻게 고립되고 지원이 없는 나라를 중히 여기겠습니까? 반드시 초나라를 얕잡아 볼 것입니다.
먼저 진나라에게서 땅을 되돌려 받으신 다음, 제나라와 단교한다면 진나라의 계략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제나라와 단교하고 난 다음 진나라에게 땅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장의에게 속는 것으로,

대왕께서는 틀림없이 그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미워하는 것은 머지않아 서쪽에서 진나라가 도발해

우환이 되게 하는 것이고, 북쪽으로 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단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쪽에서 도발한 진나라가 우환이 되고 북쪽으로 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단절하신다면,

한(韓)나라와 위(魏)나라 군대가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애도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나라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서쪽에 가서 땅을 받아 올 장군을 파견했다.
장의는 진나라에서 돌아오자 거짓으로 술에 취한 척하고 마차에서 떨어져 병을 핑계로 3개월 동안 외출하지 않고

상오 지방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초나라 왕이 말하기를 : “ 장의는 내가 제나라와 단교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그래서 용사(勇士) 송유(宋遺)를 북쪽으로 보내어 제나라 왕을 업신여기고 능멸했다.

제나라 왕은 대노하여 초나라의 부절(符節)을 끊고 진(秦)나라와 연합했다. 진나라와 제나라가 국교를 맺자,

장의는 비로소 조정에 나와서 초나라 장군에게 말하기를 : “당신은 왜 아직도 땅을 받지 않았소?

어디에서 어디까지 사방 6리 말이요?”라고 하자, 
초나라 장군이 말하기를 : “ 내가 위임받고 받으러 온 땅은 6백리이지 6리는 들어보지도 못했소!” 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이 상황을 초회왕에게 알렸다. 회왕은 대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진진이 다시 말하기를 :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나라에게 큰 도시를 주어

그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느니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는 진나라에게 땅을 잃기는 하지만,

제나라에서 보상받을 수 있고, 나라도 온전할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제나라와 단교하시고

다시 진나라에 기만죄를 문책하신다면, 이것은 우리가 진나라와 제나라의 우의를 돈독하게 해주는 것일 뿐 아니라,

여러 나라 군대가 우리나라를 포위하는 상황을 초래해, 나라에 크게 해가 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은 진진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나라와 단교하고, 군대를 서쪽으로 보내어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秦)나라 왕도 군사를 내어 초나라 군대를 맞아 싸웠다.]

 

十七年春,與秦戰丹陽,秦大敗我軍,斬甲士八萬,虜我大將軍屈丐、裨將軍逢侯丑等七十餘人,

遂取漢中之郡.  楚懷王大怒,乃悉國兵復襲秦,戰於藍田,大敗楚軍.

韓、魏聞楚之困,乃南襲楚,至於鄧.  楚聞,乃引兵歸.

[회왕 17년 봄, 진(秦)나라 군대와 단양(丹陽)에서 교전해,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 군대를 크게 이겼다.
병사 8만 명을 죽이고, 대장군 굴개, 부장군 봉후축(逢侯丑) 등 70여 명을 사로잡고, 한중의 군현을 빼앗았다.

초회왕은 대노하여 전국에 징집령을 내려 군사를 모집해 다시 진나라를 공격했다.

남전(藍田)에서 교전했으나 다시 크게 패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초나라가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남하해 초나라를 습격하고, 등읍(鄧邑)에 이르렀다. 초회왕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인솔해 철수했다.]

 

十八年,秦使使約復與楚親,分漢中之半以和楚.  楚王曰:「願得張儀,不願得地.」

張儀聞之,請之楚.  秦王曰:「楚且甘心於子,柰何?」

張儀曰:「臣善其左右靳尚,靳尚又能得事於楚王幸姬鄭袖,袖所言無不從者.

且儀以前使負楚以商於之約,今秦楚大戰,有惡,臣非面自謝楚不解.  且大王在,楚不宜敢取儀.

誠殺儀以便國,臣之願也.」儀遂使楚.  至, 懷王不見, 因而囚張儀, 欲殺之.

儀私於靳尚, 靳尚為請懷王曰:「拘張儀, 秦王必怒.  天下見楚無秦, 必輕王矣.」

又謂夫人鄭袖曰:「秦王甚愛張儀,而王欲殺之,今將以上庸之地六縣賂楚,以美人聘楚王,

以宮中善歌者為之媵.  楚王重地,秦女必貴,而夫人必斥矣.  夫人不若言而出之.」

鄭袖卒言張儀於王而出之.  儀出,懷王因善遇儀,儀因說楚王以叛從約而與秦合親,約婚姻.

張儀已去, 屈原使從齊來, 諫王曰:「何不誅張儀?」懷王悔, 使人追儀,弗及. 是歲,秦惠王卒.

[회왕 18년, 진(秦)나라가 초나라와 다시 우호관계를 맺자고 사신을 보냈다.

한중의 반을 돌려주고 초나라와 화친을 맺자고 하는 것이었다.

초나라 왕이 말하기를 : “장의를 바랄 뿐, 땅은 필요 없다.”라고 하자. 

장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 “ 초나라 왕이 그대를 잡아 들여야만 만족할 텐데 어찌하면 좋겠소 ? ”라고 하자.
장의가 대답하기를 : “ 저는 초나라 왕의 대신 근상(靳尙)과 잘 알고 지냅니다. 근상은 초왕이 총애하는 애첩인

정수(鄭袖)를 모시고 있습니다. 정수의 말이라면 초나라 왕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지난번에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초나라에 상오 지방을 되돌려준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가 크게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초나라 왕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원한을 풀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제게는 대왕께서 계시니, 초나라가 무모하게 저를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초나라가 정말로 저를 죽인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하였다.

그리고 장의는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장의가 초나라 도성에 도착했으나,

회왕은 장의를 접견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장의는 몰래 근상과 내통했다.
근상은 장의를 위해서 회왕에게 간청하기를 : “ 장의를 옥에 가두면 진(秦)나라 왕이 반드시 대노할 것입니다. 
또 여러나라들은 초나라가 진나라와 관계가 석연치 않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대왕을 경시할 것입니다.”하였다.

그리고 부인 정수에게 말하기를 : “진나라 왕이 장의를 대단히 총애하는데 대왕께서는 장의를 죽이시려 합니다.

지금 진나라는 상용(上庸)의 여섯 마을을  초나라에 돌려주고, 미인을 보내 대왕과 결혼시키고,

궁중에서 가무에 뛰어난 사람을 대왕께 보내어 시녀로 삼게 하려고 합니다. 대왕께서는 땅을 중히 여기시고,
진나라 여자는 틀림없이 총애를 받게 될 터인데, 그러면 부인은 물러나야 합니다.

부인이 장의를 석방하라고 대왕을 설득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라고 하자.

정수는 마침내 초회왕에게 장의를 석방해달라고 간청해 장의는 풀려났다.

장의를 석방한 후, 회왕이 정중하게 장의를 환대하자, 장의는 이 기회를 틈타 초나라 왕에게 합종의 맹약을 파기하고,

진나라와 연합해 진나라와 친선을 맺어 형제지국이 되자고 권했다.
장의가 떠난 후, 굴원이 제나라에서 돌아와 초회왕에게 충언하기를 : “왜,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자, 
회왕은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어 장의를 뒤쫓게 했으나 장의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해에 진혜왕(秦惠王)이 죽었다.]

 

二十年,齊湣王欲為從長,惡楚之與秦合,乃使使遺楚王書曰:「寡人患楚之不察於尊名也.

今秦惠王死, 武王立, 張儀走魏, 樗裏疾、公孫衍用, 而楚事秦. 夫樗裏疾善乎韓, 而公孫衍善乎魏;

楚必事秦,韓、魏恐,必因二人求合於秦,則燕、趙亦宜事秦.  四國爭事秦,則楚為郡縣矣.

王何不與寡人并力收韓、魏、燕、趙,與為從而尊周室,以案兵息民,令於天下?莫敢不樂聽,

則王名成矣.  王率諸侯并伐,破秦必矣.  王取武關、蜀、漢之地,私吳、越之富而擅江海之利,韓、魏割上黨,

西薄函谷,則楚之彊百萬也. 且王欺於張儀,亡地漢中,兵銼藍田,

天下莫不代王懷怒.  今乃欲先事秦!願大王孰計之.」

楚王業已欲和於秦,見齊王書,猶豫不決,下其議群臣.  群臣或言和秦,或曰聽齊.

昭雎曰:「王雖東取地於越,不足以刷恥;必且取地於秦,而後足以刷恥於諸侯.

王不如深善齊、韓以重樗裏疾,如是則王得韓、齊之重以求地矣.

秦破韓宜陽,而韓猶復事秦者,以先王墓在平陽,而秦之武遂去之七十里,以故尤畏秦.

不然,秦攻三川,趙攻上黨,楚攻河外,韓必亡.  楚之救韓,不能使韓不亡,然存韓者楚也.

韓已得武遂於秦,以河山為塞,所報德莫如楚厚,臣以為其事王必疾.  齊之所信於韓者,

以韓公子眛為齊相也.  韓已得武遂於秦,王甚善之,使之以齊、韓重樗裏疾,疾得齊、韓之重,

其主弗敢棄疾也.  今又益之以楚之重,樗里子必言秦,復與楚之侵地矣.」

於是懷王許之,竟不合秦,而合齊以善韓.

[회왕 20년, 제민왕은 합종의 맹주가 되려는 생각에, 초나라와 진나라가 연합하는 것이 싫어

초회왕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전했다 : “ 과인은 대왕이 존귀한 칭호를 돌보지 않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秦)나라는 혜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고, 장의가 위나라로 도망치고, 저리질과 공손연이 중용되었는데도,

초나라는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리질은 한(韓)나라와 우호적이고 공손연은 위(魏)나라와 사이가 좋습니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섬긴다면 한나라와 위나라는 두려워서 두 사람을 통해 진나라와 연합하고자 할 것이고,

연나라와 조(趙)나라도 따라서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네 나라가 다투어 진나라를 섬긴다면,

초나라는 진나라의 군현으로 위상이 떨어질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찌해 과인과 일심동체가 되어

한나라, 위나라, 연나라, 조나라 등 네 나라를 끌어들여 그들과 합종연맹해 주 왕실을 섬기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호령하시려 하지 않습니까 ? 

세상에 감히 대왕에게 복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대왕의 위명이 크게 떨쳐질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대왕께서 여러 나라를 통솔해 진나라를 토벌하신다면 진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때, 대왕이 진나라의 무관, 파촉 그리고 한중 땅을 얻고, 오나라와 월나라의 풍부한 물자를 독차지하고,

장강과 동해(東海)의 이익을 독점하고, 한나라와 위나라가 상당(上黨)을 분할해 주고,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핍박하신다면, 초나라의 강대함이 지금보다 백만 배가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 장의에게 기만 당해 한중을 잃고 대군이 남전에서 크게 패해,

천하에 대왕을 위해서 마음속으로 분노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경솔히 진나라를 섬기려 하는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은 진(秦)나라와 강화를 맺을 준비를 하다가, 제나라 왕의 편지를 보고 주저해 결정하지 못하고

이 일을 대신들과 의논했다. 대신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진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자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제나라 왕의 의견에 따르자고 주장했다.
소저가 말하기를 : “대왕께서 설령 동방의 월나라로부터 땅을 빼앗는다 해도 설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진나라로부터 땅을 되돌려 받으신 연후에야 비로소 제후들 사이에서 설욕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제나라와 한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저리질(樗里疾)의 권위를 높여 주시는 것이 낫습니다.

이렇게 하면 대왕께서는 제나라와 한나라의 국력을 빌려 진나라가 점령했던 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나라는 일찍이 의양(宜陽)에서 한나라를 이겼지만, 한나라는 여전히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한나라 왕 조상의 묘가 평양(平陽)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의 무수(武遂)는 평양에서 7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특히 진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진나라가 삼천(三川)을 공격하고, 조나라가 상당(上黨)을 공격하고,

초나라가 하외(河外)를 공격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초나라가 한나라를 도와주면 한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지만,

한나라를 보전하게 할 수 있는 나라는 초나라뿐입니다.
한나라가 진나라에게서 무수 지역을 빼앗고 황하와 효산(崤山)을 요새로 삼고 있으니,

보답해야 할 은덕으로 말한다면 초나라보다 큰 나라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저는 한나라가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대왕을 섬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 제나라가 한나라를 신임하고 있는 것은 한나라 공자 매(眛)가 제나라 재상을 역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가 이미 진나라로부터 무수를 되돌려 받은 것에 대해 대왕께서 축하하시면 제나라와 한나라의 실력으로

저리질의 권위를 높일 수 있고, 저리질이 제나라와 한나라의 지지를 받으면 그 주인은 저리질을 버릴 수 없습니다.

지금 초나라가 그를 지지한다면 저리질은 진나라 왕에게 진언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시 초나라가 점령했던 땅을 되돌려 받으실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당시 회왕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결국 진나라와 연합하지 않고 제나라와 연합해 한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었다.]

 

二十四年,倍齊而合秦.  秦昭王初立,乃厚賂於楚.  楚往迎婦.

二十五年,懷王入與秦昭王盟,約於黃棘.  秦復與楚上庸.

二十六年,齊、韓、魏為楚負其從親而合於秦,三國共伐楚.  楚使太子入質於秦而請救.

秦乃遣客卿通將兵救楚,三國引兵去.

二十七年,秦大夫有私與楚太子鬬,楚太子殺之而亡歸.

二十八年,秦乃與齊、韓、魏共攻楚,殺楚將唐眛,取我重丘而去.

二十九年,秦復攻楚, 大破楚, 楚軍死者二萬, 殺我將軍景缺.  懷王恐,乃使太子為質於齊以求平.

[회왕 24년, 초나라는 제나라를 버리고 진나라와 연합했다. 이해에 진소왕이 새로 왕위에 오르자,

많은 재물을 초나라 왕에게 보냈다. 초나라도 사람을 보내어 신부를 영접했다.

25년, 회왕은 진나라에 가서 진소왕과 회합을 가지고 황극(黃棘)에서 맹약을 맺었다.

진나라는 다시 초나라에 상용(上庸)을 돌려 주었다.

26년,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는 초나라가 합종맹약을 파기하고 진나라와 연합하자,
세 나라는 함께 초나라 정벌에 나섰다. 초나라는 태자(太子)를 진나라에 보내어 인질로 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진나라가 객경(客卿) 통(通)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구원하자, 세 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후퇴했다.
27년, 진나라에 초나라 태자와 다투는 대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초나라 태자는 그를 죽이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28년, 진나라는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 장군 당매(唐眛)를 죽이고,

초나라의 중구(重丘)를 빼앗고 물러갔다.
29년, 진나라는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 군을 대파했으니, 전사한 초나라 병사가 2만 명에 달했으며,

초나라 장군 경결(景缺)도 전사했다.

회왕은 두려워서 태자를 제나라에 보내어 인질로 있게 하고 제나라와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三十年,秦復伐楚,取八城. 秦昭王遺楚王書曰:「始寡人與王約為弟兄,盟于黃棘,

太子為質,至驩也. 太子陵殺寡人之重臣,不謝而亡去,寡人誠不勝怒,使兵侵君王之邊.

今聞君王乃令太子質於齊以求平.  寡人與楚接境壤界,故為婚姻,所從相親久矣.  而今秦楚不驩,

則無以令諸侯.  寡人願與君王會武關,面相約,結盟而去,寡人之願也.  敢以聞下執事.」

楚懷王見秦王書,患之.  欲往,恐見欺;無往,恐秦怒.

昭雎曰:「王毋行,而發兵自守耳.  秦虎狼,不可信,有并諸侯之心.」

懷王子子蘭勸王行,曰:「柰何絕秦之驩心!」於是往會秦昭王.

昭王詐令一將軍伏兵武關,號為秦王.  楚王至,則閉武關,遂與西至咸陽,朝章臺,如蕃臣,

不與亢禮.  楚懷王大怒,悔不用昭子言.  秦因留楚王,要以割巫、黔中之郡.

楚王欲盟,秦欲先得地.  楚王怒曰:「秦詐我而又彊要我以地!」不復許秦.  秦因留之.

楚大臣患之,乃相與謀曰:「吾王在秦不得還,要以割地,而太子為質於齊,齊、秦合謀,

則楚無國矣.」乃欲立懷王子在國者.

昭雎曰:「王與太子俱困於諸侯,而今又倍王命而立其庶子,不宜.」

乃詐赴於齊,齊湣王謂其相曰:「不若留太子以求楚之淮北.」

相曰:「不可,郢中立王,是吾抱空質而行不義於天下也.」

或曰:「不然.  郢中立王, 因與其新王市曰『予我下東國, 吾為王殺太子, 不然, 將與三國共立之』然則東國必可得矣.」 

齊王卒用其相計而歸楚太子.  太子橫至,立為王,是為頃襄王.

乃告于秦曰:「賴社稷神靈,國有王矣.」

[회왕 30년, 진나라는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 8성을 빼앗았다. 진소왕은 초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 과인은 군왕과 결의형제를 맺어 황극(黃棘)에서 맹약을 맺었으며,

군왕은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관계가 아주 원만했습니다. 그런데 군왕의 태자가 과인을 기만하고,

과인의 중신을 죽이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귀국으로 도망치니, 과인은 정말로 화를 억누를 길 없어

군대를 보내어 군왕의 변경을 침범한 것입니다. 이제 군왕께서는 태자를 인질로 해 제나라와 강화를 맺고자 합니다.
과인은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대대로 서로 혼인관계를 맺어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초나라와 진나라는 관계가 악화되어 제후들을 호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과인은 군왕과 무관에서만나 동맹을 맺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동맹을 맺은 다음 물러가는 것이 

과인의 바람입니다.  과인은 우둔함을 무릅쓰고 이 생각을 군왕께 알려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초회왕은 진나라 왕의 이 편지를 보고 걱정에 싸였다. 가자니 속을까봐 걱정이 되었고,

가지 않자니 진나라 왕이 진노할까봐 염려되었다. 소저가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가시지 말고,

군대를 보내어 국경을 굳게 수비하시면 됩니다. 진나라는 속이 검은 늑대와 같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평소에 제후들을 제압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회왕의 아들 자란(子蘭)이 회왕에게 가도록 권하면서 말하기를 : “왜 진나라의 호의를 거절해야 합니까!”라고 하자.
회왕은 진소왕을 만나러 갔다. 진소왕은 회왕을 속이기 위해서,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무관에 매복하게 한 다음

진나라 왕의 깃발을 내걸게 했다. 초나라 왕이 도착하자 무관을 걸어 잠그고 회왕을 사로잡아 서쪽으로 가서

함양(咸陽)에 도착했다. 회왕은 장대(章臺)에서 진소왕을 만났으나 속국의 신하와 같은 대우를 받았고,

진소왕은 회왕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초회왕은 화를 내고 소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진나라는 초나라 왕을 억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무(巫)와 검중의 군현을 떼어달라고 협박했다.
초회왕은 맹약을 맺으려고 했지만, 진나라는 오히려 먼저 땅을 얻으려고 하였다.
초회왕은 분노하며 말하기를 : “진나라가 나를 속이고, 또 나에게 땅을 달라고 핍박하다니!”라고 하며 

다시 진소왕의 청을 거절하자, 진 소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초나라 대신들은 이 일을 걱정하며 함께 상의하기를 : “우리나라 대왕께서 진나라에서 돌아오실 수 없고,

진나라가 그를 협박해 땅을 달라고 하고, 태자는 제나라에 인질로 있으니, 만약 제와 진 두 나라가 공모한다면

우리는 나라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국내에 있는 회왕의 아들을 옹립하려고 했다.
소저가 말하기를 : “ 대왕과 태자가 모두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는데, 지금 우리가 다시 대왕의 명령을 어기고

서자를 옹립하려 한다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거짓으로 제나라에 국상이 났음을 알렸다.
제민왕은 재상에게 말하기를 : “ 태자를 억류하는 것보다 초나라의 회북 지방을 얻는 편이 낫겠소.”라고 하였다. 
재상이 말하기를 : “안 됩니다. 영에서 만약 따로 새 왕을 옹립한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인질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불의를 드러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그렇지 않습니다. 영에서 만약에 새 왕을 옹립한다면 그 새 왕과 교섭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하동국(下東國)을 주면, 우리가 초나라를 대신해서 태자를 죽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이렇게 세 나라가 공동으로 태자를 옹립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동국은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제나라 왕은 재상의 의견을 듣고 초나라 태자를 돌려보냈다.

태자 횡(橫)은 초나라에 돌아와서 국왕에 오르니, 이 사람이 경양왕(頃襄王)이다.

그리고 진나라에 통고하기를 : “ 우리는 신령스러운 사직의 가호 아래 새 왕을 옹립했습니다.”라고 하였다.]

 

頃襄王橫元年,秦要懷王不可得地,楚立王以應秦,秦昭王怒,發兵出武關攻楚,大敗楚軍,

斬首五萬,取析十五城而去.

二年,楚懷王亡逃歸,秦覺之,遮楚道,懷王恐,乃從閒道走趙以求歸.  趙主父在代,

其子惠王初立,行王事,恐,不敢入楚王.  楚王欲走魏,秦追至,遂與秦使復之秦.  懷王遂發病.

頃襄王三年,懷王卒于秦,秦歸其喪于楚.  楚人皆憐之,如悲親戚.  諸侯由是不直秦.  秦楚絕.

六年,秦使白起伐韓於伊闕,大勝,斬首二十四萬.

秦乃遺楚王書曰:「楚倍秦,秦且率諸侯伐楚,爭一旦之命.  願王之飭士卒,得一樂戰.」

楚頃襄王患之,乃謀復與秦平.

七年,楚迎婦於秦,秦楚復平.

[경양왕 원년, 진나라는 회왕을 협박해도 땅을 얻을 수 없었는데, 초나라가 새 왕을 옹립해 진나라에 대항하자,
진소왕(秦昭王)은 노기를 띠고 출병해 무관에서 초나라를 공격해 초나라 군대를 대파해 5만 명을 죽이고

석읍(析邑) 등 15개 읍을 빼앗고 물러갔다.
2년, 초나라 회왕은 몰래 도망쳐 귀국하려는데, 진나라가 그 사실을 알고 초나라로 통하는 길을 봉쇄했다.
회왕은 두려워 계획을 바꾸어 조그만 길을 이용해 조(趙)나라로 가서 길을 빌려 도망치려고 했다.
이때, 조 주부(趙主父)는 이미 은퇴하고 대(代)에 머물고, 그의 아들 혜왕이 새로 즉위해 왕의 직무를 대행했다.
조혜왕은 진나라를 두려워해 회왕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회왕이 위(魏)나라로 도망치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가 추격해 와서 하는 수 없이 진나라 사자를 따라 진나라로 돌아갔다. 회왕은 이 때문에 병을 얻었다.
경양왕 3년, 회왕이 진나라에서 죽자, 진나라는 그의 시신을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사람들이 그를 애도하며 자신의 부모형제가 죽은 것처럼 애통해 했다.
여러 나라는 이 일로 진나라가 부도덕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진나라와 초나라는 단교했다.
경양왕 6년, 진(秦)나라는 백기(白起)를 이궐(伊闕)에 보내어 한(韓)나라를 공격하게 해 대승을 거두고,

한나라 병사 24만 명을 죽였다. 그리고 나서 진나라 왕은 초나라 경양왕에게 편지를 썼다.

“ 초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해, 진나라가 여러 나라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해 승부를 다투고자 합니다.
군왕이 군대를 재정비해 우리와 시원하게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초나라 경양왕은 걱정이 되어 다시 진나라에게 강화를 맺자고 건의했다.
7년, 초나라가 진나라에 가서 신부를 맞아들임으로써 진나라와 초나라 두 나라는 다시 강화를 맺었다.]

 

十一年,齊秦各自稱為帝;月餘,復歸帝為王.

十四年,楚頃襄王與秦昭王好會于宛,結和親.

十五年,楚王與秦、三晉、燕共伐齊,取淮北.

十六年,與秦昭王好會於鄢.  其秋,復與秦王會穰.

[경양왕 11년, 제나라와 진나라 왕은 스스로 제왕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한 달 후, 다시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왕이라 했다.
14년, 초나라 경양왕과 진나라 소왕은 우호적으로 완읍(宛邑)에서 회합을 가져서 강화를 맺고 친척관계를 맺었다.
15년, 초나라 경양왕은 진나라,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연나라 등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해 회북 지방을 빼앗았다.
16년, 초나라 왕은 진나라 소왕과 언(鄢)에서 우호적인 회합을 가졌다.

이해 가을, 다시 진나라 왕과 양읍(穰邑)에서 회합을 가졌다.]

 

十八年,楚人有好以弱弓微繳加歸鴈之上者,頃襄王聞,召而問之.

對曰:「小臣之好射鶀鴈,羅鸗,小矢之發也,何足為大王道也.  且稱楚之大,因大王之賢,

所弋非直此也.  昔者三王以弋道德,五霸以弋戰國.  故秦、魏、燕、趙者,鶀鴈也;

齊、魯、韓、衛者,青首也;騶、費、郯、邳者,羅鸗也.  外其餘則不足射者.

見鳥六雙,以王何取?王何不以聖人為弓,以勇士為繳,時張而射之?

此六雙者,可得而囊載也.  其樂非特朝昔之樂也,其獲非特鳧鴈之實也.

王朝張弓而射魏之大梁之南,加其右臂而徑屬之於韓,則中國之路絕而上蔡之郡壞矣.

還射圉之東,解魏左肘而外擊定陶,則魏之東外棄而大宋、方與二郡者舉矣.

且魏斷二臂, 顛越矣;膺擊郯國, 大梁可得而有也. 王綪繳蘭臺, 飲馬西河, 定魏大梁, 此一發之樂也.

若王之於弋誠好而不厭,則出寶弓,碆新繳,射噣鳥於東海,還蓋長城以為防,朝射東莒,

夕發浿丘,夜加即墨,顧據午道,則長城之東收而太山之北舉矣.  西結境於趙而北達於燕,

三國布鶴,則從不待約而可成也.  北遊目於燕之遼東而南登望於越之會稽,此再發之樂也.

若夫泗上十二諸侯,左縈而右拂之,可一旦而盡也.  今秦破韓以為長憂,得列城而不敢守也;

伐魏而無功,擊趙而顧病,則秦魏之勇力屈矣,楚之故地漢中、析、酈可得而復有也.

王出寶弓,碆新繳,涉鄳塞,而待秦之倦也,山東、河內可得而一也.  勞民休眾,南面稱王矣.

故曰秦為大鳥,負海內而處,東面而立,左臂據趙之西南,右臂傅楚鄢郢,膺擊韓魏,垂頭中國,

處既形便, 勢有地利, 奮翼鼓鶴,, 方三千里, 則秦未可得獨招而夜射也.」欲以激怒襄王, 故對以此言.

[경양왕 18년, 초나라에는 가벼운 화살과 가느다란 실로 북쪽으로 돌아가는 기러기를 쏘아 맞추는 사람이 

있었는데,  경양왕이 이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 물었다. 

그는 대답해 하기를 : “ 저는 작은 기러기나 작은 새를 맞추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조그마한 화살이 발휘하는 작용인데 어떻게 대왕께 말씀 드릴 가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초나라의 우세를 이용하고 대왕의 현명함을 빌린다면, 얻을 수 있는 수확은 조그마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에 삼왕(三王)께서는 도덕으로써 천하를 영유하셨고, 오패(五覇)께서는 여러 나라의 지지를 받으셨습니다.
지금의 진(秦)나라, 위(魏)나라, 연나라, 조나라 등은 작은 기러기와 같고, 제나라, 노나라, 한나라, 위(衛)나라 등은

들새와 같으며, 추(騶)나라, 비(費)나라, 담(郯)나라, 비(邳)나라 등은 작은 새와 같습니다.

나머지 나라들은 쏘아 잡을 가치도 없습니다. 이 열두 마리의 작은 새를 대왕께서는 어떻게 잡으시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해 성인을 화살로 삼고 용사를 실로 삼아 적당한 시기를 보아 활을 쏘아 잡으시지 않으십니까 ?

이 열두 마리의 새는 활을 쏘시기만 하시면 자루에 담아서 잡아오실 수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고, 이 수확은 오리나 기러기 같은 사냥물이 아닙니다.

대왕께서 아침에 활을 쏘아 위(魏)나라 대량(大梁)의 남쪽을 맞추시면, 그의 오른팔에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직접 한나라에 영향을 미쳐서 중원 지방으로 통하는 길을 끊어, 상채 일대는 공격하지 않고도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어(圉)의 동쪽을 향해서 쏘는 것은 위나라의 어깨를 절단하는 것이며,

다시 밖으로 눈을 돌려 정도(定陶)를 공격하시면 위나라 동쪽은 핍박을 당해 포기하게 되고,

그러면 대송(大宋)과 방여(方與) 두 고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위나라의 좌우 어깨가 절단되면 혼란스러워질 것이고, 정면으로 담(郯)나라를 공격하시면

대량은 초나라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난대(蘭臺)에서 화살을 거두어 들이고,

서하(西河)에서 말에게 물을 먹인 다음 위나라의 대량을  평정하시면, 이것이 활을 쏘는 첫 번째 즐거움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사냥을 정말 좋아하시고 싫증내지 않으신다면, 보궁(寶弓)을 꺼내 돌 화살촉과 새 줄을 준비해

동해로 가셔서 갈고리 모양의 부리가 있는 큰 물새를 잡아 수레의 덮개를 씌우고 ​장성(長城)을 수리해

방어선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 연후에 아침에 동거(東莒)를 취하시고, 저녁에 패구(浿丘)를 취하시고,

밤에 즉묵(卽墨)을 취하시고, 돌아오는 길에 오도(午道)를 점거하신다면,

장성의 동쪽과 태산(泰山)의 북쪽이 손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서쪽으로는 조나라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연나라와 직통하고 있어, 제나라, 조나라, 연나라 세 나라는 새가 날려고 날개를 펼치는 형상과 같아,

합종은 맹약을 맺을 필요도 없이 자연히 형성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북쪽으로 연나라의 요동(遼東)을 유람하실 수 있고, 

남쪽으로 월나라의 회계(會稽)를 살펴보실 수 있으니, 이것은 활을 쏘는 두 번째 즐거움입니다.

사수(泗水) 유역을 기반으로 한 12명의 제후들은 왼손을 들어 가리키고 오른손을 들어 흔들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전부 잡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랜 걱정거리가 되었으며, 한나라의 성들을 획득했으면서도 점령한 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고,

위(魏)나라를 공격했으나 진전이 없고, 조나라를 습격했으나 오히려 손해를 입었습니다.

진나라와 위나라의 사기와 세력이 곧 없어질 것이므로,
초나라가 잃었던 한중(漢中), 석(析), 역(酈) 등의 땅은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보궁을 꺼내시어 새 줄을 준비해 명새(鄳塞)에 가셔서 진나라가 피곤할 때를 기다리시면,

산동과 하내의 광대한 땅을 하나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다스려 위로하고 군사를 쉬게 하시면,

남쪽을 바라보고 왕으로 칭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진(秦)나라는 큰 새가 되어 등 뒤로는 대륙을 의지하고 살고, 얼굴은 동쪽을 향하고 서 있어,

왼쪽 어깨로 조(趙)나라의 서남쪽을 제어하고 있고, 오른쪽 어깨로는 초 나라의 언(鄢)과 영(郢)을 위협하고 있고,

가슴으로 한나라· 위나라를 대하고 있고, 아래로는 중원의 여러 나라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살고 있는 지형이 편리하고, 지세가 유리해,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 3천 리를 종횡무진하니,

진나라는 하룻밤 사이에 초나라를 제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초경양왕을 격노하게 할 생각으로 말한 것이다.

 

襄王因召與語,遂言曰:「夫先王為秦所欺而客死於外,怨莫大焉. 今以匹夫有怨,尚有報萬乘,

白公, 子胥是也. 今楚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 猶足以踴躍中野也, 而坐受困, 臣竊為大王弗取也.」

於是頃襄王遣使於諸侯, 復為從, 欲以伐秦. 秦聞之, 發兵來伐楚. 楚欲與齊韓連和伐秦, 因欲圖周.

周王赧使武公謂楚相昭子曰:「三國以兵割周郊地以便輸,而南器以尊楚,臣以為不然.

夫弒共主,臣世君,大國不親;以眾脅寡,小國不附. 大國不親,小國不附,不可以致名實.

名實不得,不足以傷民. 夫有圖周之聲,非所以為號也.」

昭子曰:「乃圖周則無之. 雖然,周何故不可圖也?」

對曰:「軍不五不攻, 城不十不圍. 夫一周為二十晉, 公之所知也. 韓嘗以二十萬之眾辱於晉之城下, 銳士死,

中士傷,而晉不拔. 公之無百韓以圖周,此天下之所知也. 夫怨結兩周以塞騶魯之心,

交絕於齊,聲失天下,其為事危矣. 夫危兩周以厚三川,方城之外必為韓弱矣. 何以知其然也?

西周之地,絕長補短,不過百里. 名為天下共主,裂其地不足以肥國,得其眾不足以勁兵.

雖無攻之,名為弒君. 然而好事之君,喜攻之臣,發號用兵,未嘗不以周為終始. 是何也?

見祭器在焉,欲器之至而忘弒君之亂. 今韓以器之在楚,臣恐天下以器讎楚也. 臣請譬之.

夫虎肉臊,其兵利身,人猶攻之也.  若使澤中之麋蒙虎之皮,人之攻之必萬於虎矣.

裂楚之地,足以肥國;詘楚之名,足以尊主.  今子將以欲誅殘天下之共主,居三代之傳器,

吞三翮六翼, 以高世主, 非貪而何?《周書》曰『欲起無先』 故器南則兵至矣.」 於是楚計輟不行.

[경양왕이 다시 그를 소환해 자세하게 묻자,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 “선왕께서 진나라에게 속임을 당해

국외에서 돌아가셨으니 원한도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
큰 나라의 왕에게 보복할 수 있는 사람은 백공(白公)과 오자서(伍子胥)뿐입니다. 지금 초나라 국토는 종횡으로

5천 리에 달하고 백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어서 전쟁터에서 위세 등등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앉아서 속박만 당하시고 계시니 제가 은밀히 대왕께 이런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경양왕은 사신을 여러 나라로 보내어 다시 합종연맹을 계획하고 연합으로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진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 왕은 제나라, 한나라와 강화를 맺고 연합해 진나라를 공격하고, 기회를 틈타 주 왕실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주난왕(周赧王)이 보낸 무공(武公)이 초나라 재상 소자(昭子)에게 말하기를 :
“세 나라가 무력으로 주나라 교외를 나누어 자신들의 물자 운송을 편하게 하고

주나라의 보기(寶器)를 남쪽으로 옮겨 초나라 왕을 받들고자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세상 사람들이 공동으로 받드는 종주(宗主)를 시해하고, 천하의 군왕을 신하로 만들어 통치한다면

큰 나라가 그를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오.

사람이 많은 것을 믿고 사람이 적은 나라를 핍박하면 작은 나라가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이오.
큰 나라가 가까이하지 않고 작은 나라가 복종하지 않으면 위명(威名)과 실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오.
위명과 실리를 얻지 못하면서 이렇게 백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가치가 없소.

주 왕실을 모해하는 명성으로 호령을 할 수 없소.”라고 하였다.
소자가 말하기를 : “ 만약에 주 왕실을 모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주 왕실을 왜 없애서는 안 됩니까 ? ”라고 하자.
무공이 대답하기를 : “ 병력이 적의 다섯 배가 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고,

적의 열 배가 넘지 않으면 성을 포위하지 않는 법이오.

주 왕실은 모든 나라가 받드는 군주인 관계로 20개의 진(晉)나라에 해당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 것이오.

한나라가 일찍이 20만의 병력으로 진(晉)나라의 성 아래에서 모욕을 당해,

적진 깊숙이 들어간 정예 군사들이 전사했으며, 일반 군사들도 부상당했으나 성은 빼앗을 수 없었소.
당신이 백 개의 한나라 병력으로 주 왕실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오.

서주와 동주 두 나라와 깊은 원한을 맺으면 예의지국인 추(鄒)나라, 노(魯)나라 백성들의 초나라를 향한 마음이

단절될 것이며, 제나라와 국교를 단절하면 세상에서 명성을 잃어, 하는 일마다 위험할 것이오.
다시 말해서, 당신들이 서주와 동주를 약화시키면 한(韓)나라가 강해져, 당신들의 방성 이외에 다른 곳은 틀림없이

한나라에 의해서 약화될 것이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아느냐고요 ?

서주 땅은 이것저것 다 합쳐도 종횡으로 백리밖에 되지 않소. 명의상 천하가 받드는 군주이지,

그 땅을 나누어 가져도 나라를 부유하게 할 수 없고, 그 군사를 포로로 해도 군대를 강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오.

비록 그곳을 공격하러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군주를 시해할 죄명은 있소.

그러나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군주들과 전쟁을 좋아하는 권신들이 호령을 발하고 군대를 지휘하면서도

어찌해 시종 창칼을 주 왕실에 겨누지 않았겠소?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소?
제기(祭器)와 보정(寶鼎)이 주나라에 있는 것을 알고 단지 그것을 옮겨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을 뿐,

군주를 시해하고자 하는 화를 자초하지는 않았소. 지금 한나라가 제기와 보정을 초 나라로 옮기려 한다면

나는 세상 사람들이 제기 때문에 초나라와 적이 될까 걱정이 되오. 예를 들어 이야기하리다.
원래 호랑이는 고기가 비려서 식용으로 적당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는 예리한 발톱과 이빨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호랑이를 사냥하려고 하오. 만약에 호수 가에 사는 미록(麋鹿)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우면,

미록을 사냥하는 사람은 호랑이를 잡는 것보다 수만 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소.
초나라 땅을 나누어 가지면 각 나라가 부강해지고, 초나라의 죄명을 질책하면 각 나라의 제후들에게 존경받기에

족할 것이오. 지금 당신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천하가 받드는 군주를 살해해,

하, 은, 주 삼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을 점유하고 구정을 삼키려고 하는 것은,

스로 지금의 제후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탐욕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주서(周書)」에는 다음과 쓰여 있소. ‘정치적으로 일가를 세우려면 먼저 소요를 주동하지 않아야 한다.’

주 왕실의 보기(寶器)를 남쪽으로 옮기면 초나라를 토벌하고자 하는 대군이 바싹 따를 것이오.”라고 하자. 

초나라는 계획을 포기하고 실행하지 않았다.]

 

十九年,秦伐楚,楚軍敗,割上庸、漢北地予秦.

二十年,秦將白起拔我西陵.

二十一年,秦將白起遂拔我郢,燒先王墓夷陵.  楚襄王兵散,遂不復戰,東北保於陳城.

二十二年,秦復拔我巫、黔中郡.

二十三年,襄王乃收東地兵,得十餘萬,復西取秦所拔我江旁十五邑以為郡,距秦.

二十七年,使三萬人助三晉伐燕.  復與秦平,而入太子為質於秦.  楚使左徒侍太子於秦.

三十六年,頃襄王病, 太子亡歸.

秋, 頃襄王卒, 太子熊元代立, 是為考烈王.  考烈王以左徒為令尹, 封以吳, 號春申君.

[경양왕 19년, 진(秦)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 군대가 패해 상용(上庸), 한북 땅을 진나라에게 할양했다.
20년,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는 초나라 서릉(西陵)을 점령했다.
21년, 백기는 다시 초나라 영도(郢都)를 점령하고 초나라 선왕의 묘지 이릉(夷陵)을 불태웠다.
초경양왕의 군대가 전부 흩어져 도망쳐 다시 응전할 수 없어서, 동북쪽으로 물러나 진성(陳城)에서 안전을 꾀했다.
22년, 진나라가 다시 초나라의 무군(巫郡)과 검중군(黔中郡)을 점령했다.
23년, 경양왕은 동부지역에서 10여 만 명의 군대를 모아, 다시 서쪽으로 가서 진(秦)나라가 점령했던

장강 연안 15개 읍을 빼앗고 군(郡)을 설치하고 진나라를 제어했다.
27년, 3만 명의 병사를 보내어 연나라를 공격하는 삼진(三晉)을 도왔다. 다시 진(秦)나라와 화해하고

태자(太子)를 인질로 진나라에 보냈다. 초나라 왕은 좌도(左徒)를 진나라에 보내어 태자를 받들게 했다.
36년, 경양왕이 병이 들어 태자가 도망쳐 돌아왔다.

이해 가을, 경양왕이 죽자 태자 웅원(熊元)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은 좌도를 영윤(令尹)에 봉해 오(吳) 땅을 하사하고 춘신군(春申君)이라 했다.]

 

考烈王元年, 納州于秦以平.  是時楚益弱. 

六年,秦圍邯鄲,趙告急楚,楚遣將軍景陽救趙.

七年,至新中.  秦兵去.

十二年,秦昭王卒,楚王使春申君弔祠于秦。

十六年,秦莊襄王卒,秦王趙政立.

二十二年,與諸侯共伐秦,不利而去.  楚東徙都壽春,命曰郢.

二十五年,考烈王卒,子幽王悍立.  李園殺春申君.

幽王三年,秦、魏伐楚.  秦相呂不韋卒.

九年,秦滅韓.

十年, 幽王卒, 同母弟猶代立, 是為哀王.

哀王立二月餘, 哀王庶兄負芻之徒襲殺哀王而立負芻為王.  是歲, 秦虜趙王遷.

王負芻元年,燕太子丹使荊軻刺秦王.

二年,秦使將軍伐楚,大破楚軍,亡十餘城.

三年,秦滅魏.

四年,秦將王翦破我軍於蘄,而殺將軍項燕.

五年,秦將王翦、蒙武遂破楚國,虜楚王負芻,滅楚名為[楚]郡云.

[고열왕 원년, 주(州)를 진나라에 주고 강화를 맺었다. 이때 초나라는 더욱 약화되었다.
6년, 진나라가 한단을 포위하니, 조나라는 초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초나라는 장군 경양을 보내 조나라를 구원했다.

7년, 초나라 군대가 신중(新中)으로 진격하자, 진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12년, 진소왕(秦昭王)이 죽자, 초나라 왕은 춘신군을 진나라에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16년, 진(秦)나라 장양왕(莊襄王)이 죽자, 진왕(秦王) 조정(趙政)이 왕위에 올랐다.
22년, 초나라가 여러 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패해 물러났다.

초나라는 동쪽 수춘(壽春)으로 천도해 그곳을 영(郢)이라 했다.
25년, 고열왕이 죽고 아들 유왕(幽王) 한(悍)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원(李園)이 춘신군을 죽였다.
유왕 3년, 진(秦)나라와 위(魏)나라의 연합군이 초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죽었다.
9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했다.
10년, 유왕이 죽고 같은 어머니 형제 중 동생 유(猶)가 왕위를 계승하니 이 사람이 애왕(哀王)이다.

애왕의 서형(庶兄) 부추(負芻)의 무리들이 갑자기 애왕을 죽이고, 부추를 왕으로 옹립해,

애왕은 단 2개월 동안 재위했을 뿐이다. 이해에 진나라는 조왕(趙王) 천(遷)을 사로잡았다.
부추 원년,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柯)를 보내어 진왕(秦王)을 암살하게 했다.
2년, 진나라는 장군을 파견해 초나라의 군대를 대파함으로써, 10여 개의 성읍을 빼앗았다.
3년,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멸했다.
4년, 진나라 장군 왕전(王翦)은 기(蘄)에서 초나라 군대를 이기고 장군 항연(項燕)을 죽였다.
5년, 진나라 장군 왕전과 몽무(蒙武)는 마침내 초나라를 멸하고, 초나라 왕 부추를 사로잡고

초나라 국호를 없앤 후 삼군(三郡)을 설치했다.]

 

 

太史公曰:

楚靈王方會諸侯於申,誅齊慶封,作章華臺,求周九鼎之時,志小天下;

及餓死于申亥之家,為天下笑.

操行之不得,悲夫!勢之於人也,可不慎與?棄疾以亂立,嬖淫秦女,甚乎哉,幾再亡國!

[태사공은 말한다.
“초 영왕(楚靈王)은 신읍(申邑)에서 제후들과 회합을 가지고 제나라 경봉(慶封)을 죽이고,

장화대(章華臺)를 세우고, 주 왕실의 구정(九鼎)을 빼앗으려고 할 때에는 의기양양해 천하를 깔보았으나,

후에 신해(申亥)의 집에서 굶어 죽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지조와 품행이 없으니 정말로 슬프도다! 

사람이 권세가 있다고 해서 남을 대하는 데 신중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기질이 변란을 이용해 왕위에 오르고, 진(秦)나라 여자를 총애함이 너무 지나쳐, 다시 나라가 망하게 되었도다!”]

 

※  초조(朝) 역대 제후, 왕 연표

 

웅조(熊蚤)
웅려(熊麗)
웅광(熊狂)
웅역(熊繹)
웅애(熊艾)
웅(흑단) 熊(黑旦)
웅승(熊勝)
웅양(熊楊)
웅거(熊渠)
웅지(熊摯)
웅연(熊延) (기원전 848년)
웅용(熊勇)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웅엄(熊厳)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웅상(熊霜)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웅순(熊徇)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웅악(熊咢)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약오(若敖)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소오(霄敖)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분모(蚡冒)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무왕(武王)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문왕(文王)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도오(堵敖)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성왕(成王)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목왕(穆王)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장왕(壯王)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공왕(共王)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강왕(康王)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겹오(郟敖)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영왕(靈王)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비 (기원전 529년 ~ 기원전 529년)
평왕(平王)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소왕(昭王)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혜왕(惠王)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간왕(簡王)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성왕(声王)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도왕(悼王)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숙왕(肅王)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선왕(宣王)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위왕(威王)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회왕(懐王)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경양왕(頃襄王)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고열왕(考烈王)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유왕(幽王)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애왕(哀王)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28년)
부추(負芻)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