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遠盎 晁錯列傳

第 四十一. 遠盎鼂錯列傳(원앙 조조열전)

덕치/이두진 2023. 11. 28. 17:08

 

       第 四十一.  遠盎鼂錯列傳(원앙 조조열전) 

袁盎者,楚人也,字絲.  父故為群盜,徙處安陵. 

高后時,盎嘗為呂祿舍人.  及孝文帝即位,盎兄噲任盎為中郎.  

絳侯為丞相,朝罷趨出,意得甚.  上禮之恭,常自送之.

[원앙은 초나라 출신으로 자는 사(絲)다. 그의 부친는 과거에 도적떼였다가 안릉()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고후(高后) 시절 원앙은 여록(呂祿)의 사인(舍人)으로 있었다.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형인 원쾌(袁噲)의 추천으로 중랑(中郞)이 되었다.
강후 주발(周勃)이 승상으로 있었는데,

조회가 끝날 때는 항상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오는 그 모습이 의기양양했다. 

황제가 예로써 그를 극히 공경하게 대하며 항상 그를 친히 전송해 주곤 하였다.]

 

袁盎進曰:「陛下以丞相何如人?」 上曰:「社稷臣.」

盎曰:「絳侯所謂功臣,非社稷臣,社稷臣主在與在,主亡與亡. 

方呂后時,諸呂用事,擅相王,劉氏不絕如帶.  

是時絳侯為太尉,主兵柄,弗能正.  呂后崩,大臣相與共畔諸呂,

太尉主兵,適會其成功,所謂功臣,非社稷臣.  丞相如有驕主色. 

陛下謙讓,臣主失禮,竊為陛下不取也.」

​[원앙이 황제 앞에 나가 아뢰기를 :

" 승상은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십니까? "라고 하자.  

황제가 대답하기를 : " 사직지신(社稷之臣 :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기 때문이오."하였다.
원앙이 말하기를 : " 강후는 공신(功臣)이지 사직지신이 아닙니다. 

사직지신이란 군주가 살고 있으면 같이 살고, 군주가 죽으면 같이 죽는 사람입니다.

여태후가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에 여씨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여 자기들 멋대로

제후왕을 칭하니 유씨들은 겨우 명맥만 이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강후 주발은

태위의 직분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여후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대신들과 함께 여씨 일족을 배반하고 태위의 직분을 되찾아

군사를 장악하여 거사에 성공했음으로 공신이 되었지 사직지신은 아니었습니다. 

승상의 직위에 있는 신하의 몸으로 그 주군에게 교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겸양하시니 것은 신하와 군주가 서로 예를 잃는 행위로써

제 생각에 폐하께서 취하실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後朝,上益莊,丞相益畏. 

已而絳侯望袁盎曰:「吾與而兄善,今兒廷毀我!」盎遂不謝.

及絳侯免相之國,國人上書告以為反,徵系清室,宗室諸公莫敢為言,

唯袁盎明絳侯無罪.  絳侯得釋,盎頗有力.  絳侯乃大與盎結交.  

淮南厲王朝,殺辟陽侯,居處驕甚.

[그 후 조회가 있을 때부터 황제는 점차 위엄을 되찾게 되었고,

승상도 점차 황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일이 이미 그렇게 되자 강후 주발은 원앙을 원망하며 말하기를 : " 나는 그대의 형과 교분이

깊은 친구 사이거늘 지금 어린 그대가 조정에서 감히 나를 비방하다니!"라고 하였으나,  

원앙은 결코 강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마침내 강후가 승상의 직에서 면직되어

자기의 봉국으로 낙향하자, 그곳의 사람들이 상서를 올려 강후가 반란을 획책한다고

고변하니 그는 포승줄에 묶여 잡혀와 청실(淸室)1)에 갇혔다.  

종실의 여러 공들이 아무도 감히 그를 위해 변호를 하지 못했으나 오직 원앙만이

강후는 죄가 없다고 증명하였다. 강후의 석방은 오로지 원앙이 힘써 변호한 덕분이었다.

강후는 비로소 원앙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  

회남여왕 유장(劉長)2)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입조했다가 벽양후(辟陽侯)3)를 죽였는데 

 태도가 매우 거만했다.]

 

袁盎諫曰:「諸侯大驕必生患,可適削地.」上弗用. 淮南王益橫. 

及棘蒲侯柴武太子謀反事覺, 治, 連淮南王, 淮南王徵, 上因遷之蜀, 轞車傳送.

袁盎時為中郎將, 乃諫曰:「陛下素驕淮南王, 弗稍禁, 以至此, 今又暴摧折之. 

淮南王為人剛,如有遇霧露行道死,陛下竟為以天下之大弗能容,

有殺弟之名,柰何?」上弗聽,遂行之.

[원앙이 황제게 간언하기를 : " 제후가 지나치게 교만하면 반드시 재난이 생기니,

적당히 봉지를 삭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나. 

황제는 원앙의 말을 듣지 않았다. 회남여왕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급기야 극포후(棘蒲侯) 시무(柴武)4)의 아들 시기와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

그의 죄를 추적조사를 하다 보니 회남왕도 연루 되어 징계하게 되었다. 

황제는 그를 촉(蜀) 땅으로 유배형에 처해 함거에 가두어 압송하도록 했다.

그때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원앙이 황제에게 간언하기를 : " 폐하께서는 평소에 회남왕을

스스럼없이 대하여 그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어 조금도 금하지 않아 

지금의 이런 상황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를 꺾어버리시고

험한 길을 가게 하셨으니 만일 그가 길을 가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서는 큰 천하를 갖고 계시면서 동생 하나를 용납하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죄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시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황제가 듣지 않고 마침내는 원래 명한 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淮南王至雍,病死,聞,上輟食,哭甚哀.  盎入,頓首請罪. 

上曰:「以不用公言至此.」

盎曰:「上自寬, 此往事, 豈可悔哉!且陛下有高世之行者三, 此不足以毀名.」

上曰:「吾高世行三者何事?」

[회남왕은 옹() 지방에 이르러 병사하자, 소식을 들은 황제는 음식을 끊고 심히 애통해 하며

통곡했다.  원앙이 입조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리며 자신의 죗값을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 “ 공의 간언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라고 하였다.

원앙이 말하기를 : " 폐하께서는 스스로 마음을 넓게 하십시오. 

이번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니 후회한들 어쩌겠습니까 ? 또 폐하께서 이 번 일로 세 가지의

높은 뜻을 행하셨으니 폐하의 명성을 훼손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 짐이 세상에 행한 세 가지의 높은 뜻이란 무엇이오? ”라고 하자.] 

 

盎曰:「陛下居代時,太后嘗病,三年,陛下不交睫,不解衣,

湯藥非陛下口所嘗弗進.  夫曾參以布衣猶難之,今陛下親以王者修之,

過曾參孝遠矣.  夫諸呂用事,大臣專制,然陛下從代乘六傳馳不測之淵,

雖賁育之勇不及陛下.  陛下至代邸,西向讓天子位者再,南面讓天子位者三.  

夫許由一讓,而陛下五以天下讓,過許由四矣. 

且陛下遷淮南王,欲以苦其志,使改過,有司衛不謹,故病死.」

​[원앙이 대답하기를 : “ 폐하께서 대왕(代王)으로 계실 때에 3년 동안 병상의 태후를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옷도 갈아입지 않았으며, 약을 끓여 폐하께서 몸소 맛을 보지 않고는 결코

바치지 않으셨습니다. 무릇 포의(布衣)의 증삼도 행하기 어려웠던 일을 지금 황제폐하께서

존귀한 몸으로 친히 몸가짐을 바르게 하시니 이것은 증삼의 효도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여씨 일족이 권력을 잡고 대신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행할 때 폐하께서는 6승의 수레만을 

이끌고 대(代) 땅을  떠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과 같이 위험한 곳에 납시었으니,

그 용기는 아마 맹분(孟賁)5)과 하육(夏育)6)과 같은  용사라 할지라도 폐하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경사(京師)에 있는 대왕의 저택에 이르시어 서쪽으로 향해 앉아

두 번이나 황제를 자리를 사양했으며 남쪽을 향해 앉아 황제의 자리를 양보한 회수가

세 번이나 됩니다. 허유가 천하를 양보한 것은 단지 한 번뿐인데,

폐하께서는 다섯 번이나 천하를 사양했으니, 이것은 천자의 자리를 네 번 사양한 

허유(許由)7)보다 네 번이나 더 많은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회남왕을 귀양 보낸 것은 

그가 마음속의 고통을 감내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려고 하신 것이었는데,

그만 호송하는 관리들이 그를 신중하지 못하게 보살폈기 때문에 병사한 것입니다."하였다.]

 

於是上乃解,曰:「將柰何?」盎曰:「淮南王有三子,唯在陛下耳.」

於是文帝立其三子皆為王.  盎由此名重朝廷.  袁盎常引大體慨. 

宦者趙同以數幸,常害袁盎,袁盎患之.

盎兄子種為常侍騎,持節夾乘,說盎曰:「君與鬬,廷辱之,使其毀不用.」 

[원앙의 말에 마음이 누그러진 황제가 묻기를 : “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하자. 

원앙이 대답하기를 : “ 회남왕에게 아들 셋이 있는데, 오직 폐하께서 그들을 어떻게

위문해 주시는 것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문제는 회남왕의 세 아들을 모두 제후왕에 봉했다.8) 원앙은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원앙은 이와 같이 대국적인 도리를 이끌어 내어 비분강개했다. 

그때 조동이라는 환관이 황제에게 총애를 받아 항상 원앙을 해치려고 하여 원앙이 근심했다. 

원앙의 조카 원종은 상시기로서 부절을 들고 황제의 곁에서 시종했는데 그가 원앙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원종이 그의 숙부인 원앙에게 말하기를 :“ 숙부께서 조정에서 그와 싸워

욕을 보이시어 그가 비방하는 바를 황제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孝文帝出, 趙同參乘, 袁盎伏車前曰:「臣聞天子所與共六尺輿者, 皆天下豪英.

今漢雖乏人,陛下獨奈何與刀鋸餘人載!」於是上笑,下趙同。趙同泣下車.

文帝從霸陵上,欲西馳下峻阪. 袁盎騎,并車擥轡. 上曰:「將軍怯邪?」

[효문제가 나갈 때 조동이 황제를 수행하며 수레에 동승했다. 그때 원앙이 수레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 “ 신이 듣기에 높이가 6자 높이의 어가를 함께 태우고 가는 사람들은 모두

천하의 호걸이나 영웅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한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나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유독 형벌을 받아 신체의 부위를 훼손당한 자를 태우고 다니십니까? ”라고 하자. 

황제가 웃으면서 조동을 어가에서 내리게 하였다. 조동은 눈물을 흘리며 수레에서 내렸다. 

효문제가 패릉 위에서 서쪽 변두리의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수레를 몰고 내려가려고 했다. 

원앙이 말을 타고 수레와 나란히 하여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게 했다. 

황제가 보고 말하기를 : " 장군은 겁이 나오?"라고 하자.]

 

盎曰:「臣聞千金之子坐不垂堂,百金之子不騎衡,聖主不乘危而徼幸.

今陛下騁六騑, 馳下峻山, 如有馬驚車敗, 陛下縱自輕, 柰高廟、太后何?」

上乃止.  上幸上林,皇后、慎夫人從.  其在禁中,常同席坐.

及坐,郎署長布席,袁盎引卻慎夫人坐. 

慎夫人怒,不肯坐.  上亦怒,起,入禁中.

​[원앙이 대답하기를 : “ 신은 듣기에 천금의 부자집 귀한 자식은 혹시 처마 끝의 기왓장이

떨어져 다칠지도 모르니 마루 끝에 앉지 아니하고, 백금의 부자집 자식은 높은 누각의 난간에

매달리게 하지 않습니다.성군은 위험한 것은 타지 않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6필의 말이 끄는 험준한 산길을 달리려고 하시는데 혹시 말이 놀라

레가 전복되기라도 한다면 막중하신 폐하께서는 결국 몸을 가볍게 처신하게 되는 처사이니

무슨 면목으로 고조의 묘당을 배알할 수 있으며 어떻게 태후를 뵐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황제는 그만두게 하였다.  

황제가 상림원으로 거동할 때 두황후(竇皇后)와 신부인(愼夫人)이 따라왔다.

황후와 신부인이 궁중에 거할 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황제의 일행이 당도하여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랑서장(郞署長)이 동석의 자리를 만들자, 원앙이 일부러

신부인의 좌석을 뒤로 밀어 놓았다. 신부인은 노하여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고,

황제 역시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궁궐로 돌아갔다.]

 

盎因前說曰:「臣聞尊卑有序則上下和.  今陛下既已立后,慎夫人乃妾,

妾主豈可與同坐哉!適所以失尊卑矣.  且陛下幸之,即厚賜之.  

陛下所以為慎夫人,適所以禍之.  陛下獨不見『人彘』乎?」

於是上乃說,召語慎夫人.  慎夫人賜盎金五十斤.

[원앙은 황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 “ 신은 듣기에 존귀함과 비천함에 질서가 있으면

위와 아래가 화목해진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이미 황후를 세우셨으니

신부인은 즉 첩실입니다. 첩실과 정부인을 어찌 동석에 같이 앉힐 수 있습니까! 

이것은 다만 존귀함과 비천함의 분별을 잃은 길이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첩실을 사랑하신다면 후하게 상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 방금 하신 행동은

바로 신부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후에 신부인에게 필시 화가 미치게 되는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설마 한고조께서 총애했던 척부인을 여태후가 ‘인체(: 사람 돼지)’로

만든 사건을 알지 못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기뻐하여 신부인을 불러 원앙의 깊은 뜻을 전했다. 

신부인이 원앙에게 황금 50근을 선물로 주었다.]

 

然袁盎亦以數直諫,不得久居中,調為隴西都尉. 

仁愛士卒,士卒皆爭為死.  遷為齊相.

徙為吳相,辭行,種謂盎曰:「吳王驕日久,國多姦. 今茍欲劾治,

彼不上書告君,即利劍刺君矣.  南方卑溼,君能日飲,毋何,

時說王曰毋反而已.  如此幸得脫.」 盎用種之計,吳王厚遇盎.

[그러나 원앙이 직간을 자주하니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하고 외직으로 밀려 농서도위로

좌천되었다. 원앙은 사졸들을 인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니 사졸들은 모두

싸움에 나가 죽음을 다투었다. 뒤에 그는 제()나라의 재상으로 승진하였다.

다시 오나라의 재상으로 옮겨 오나라에 부임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조카 원종이 말하기를 : 

“ 오왕은 교만에 빠진지 오래되었고, 안에는 간사한 무리들로 가득합니다. 

지금 만약 숙부님이 그들을 죄행을 들추어내 다스리려 한다면 그들은 반대로 폐하께

상서를 올려 숙부님을 고발하거나 날카로운 검으로 숙부님의 목숨을 노릴 것입니다. 

남방의 오나라 땅은 지대가 낮고 습하여 숙부님은 매일 술이나 마시며,

아무 일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때때로 오왕에게 모반하지 말라는 말만 하십시오.

그리하면 다행히 화를 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원앙이 원종의 책략을 받아들여 그대로 따르니, 오왕은 원앙을 후하게 대접했다.]

 

盎告歸,道逢丞相申屠嘉,下車拜謁,丞相從車上謝袁盎. 

袁盎還,愧其吏,乃之丞相舍上謁,

求見丞相.  丞相良久而見之.  盎因跪曰:「願請閒.」

丞相曰:「使君所言公事, 之曹與長史掾議, 吾且奏之;即私邪, 吾不受私語.」

袁盎即跪說曰:「君為丞相,自度孰與陳平、絳侯?」丞相曰:「吾不如.」

[원앙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우연히 승상 신도가를 만나 수레에서 내려

배알했지만 승상은 단지 수레 위에서 형식적으로 원앙에게 답례만 했다.

원앙은 집으로 돌아와서 생각하니 자기의 부하 관리들 앞에게 부끄러웠다.

이에 그는 승상의 관저로 가서 직접 뵙기를 청했다. 

승상이 오랜 시간 후에 나와 원앙을 접견했다.  원앙은 바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 

“ 다른 사람들을 물리쳐주십시오. 단독으로 뵙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승상이 말하기를 : “ 그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공적인 일이거든 관청에 가서 장사나 아전들과

상의하게 하시오. 그러면 내가 황제께 보고하겠소. 그러나 만일 사적인 일이라면

나는 그대와 말을 나누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원앙이 다시 무릎을 끓더니 묻기를 : “ 승상의 자리에 계신 대감께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진평과 강후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승상이 대답하기를 : “ 나는 결코 그들보다 못하오.”라고 하였다.] 

 

袁盎曰:「善,君即自謂不如.  夫陳平、絳侯輔翼高帝,定天下,為將相,

而誅諸呂,存劉氏;君乃為材官蹶張,遷為隊率,積功至淮陽守,

非有奇計攻城野戰之功,  且陛下從代來,每朝,郎官上書疏,

未嘗不止輦受其言,言不可用置之,言可受採之,未嘗不稱善.  何也?

則欲以致天下賢士大夫.  上日聞所不聞,明所不知,日益聖智;

君今自閉鉗天下之口而日益愚.  夫以聖主責愚相,君受禍不久矣.」

[원앙이 말하기를 : “ 옳으신 말씀입니다. 공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그 두 사람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진평과 강후는 고제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한 공로로

장군과 재상이 되었으며 다시 여씨 일족을 주살하여 유씨들의 나라를 보전했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무관출신으로 쇠노를 잘 쏘아서 대장으로 승진하셨고,

공을 쌓아 회양의 태수가 되었지, 기묘한 계책이나 야전과 공성전에서 쌓은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대(代) 땅에서 올라오신 황제께서는 매일 조회에서 낭관이 소장을 올리면

어가를 멈추어 그 간언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으며 그 상소가 맞지 않으면 버리고

쓸만하면 받아들여 한 번도 그 훌륭한 점을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즉 천하의 현능한 사대부를 불러들이고자 함이니 

황제께서 듣지 못한 바를 매일 듣고, 알지 못한 것을 보게 되시니 날이 갈수록 현명해지시고 

지혜롭게 되셨습니다. 그런게 공께서 지금 스스로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아 스스로

우둔해지시고 계십니다.  무릇 성군이 우매한 재상을 질책할 때가 되면

공께서 고스란히 그 화를 받을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자.]

 

丞相乃再拜曰:「嘉鄙野人,乃不知,將軍幸教.」引入與坐,為上客.

盎素不好鼂錯,鼂錯所居坐,盎去;盎坐,錯亦去:兩人未嘗同堂語.

及孝文帝崩,孝景帝即位,鼂錯為御史大夫,使吏案袁盎受吳王財物,

抵罪,詔赦以為庶人.

[승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원앙에게 재배하며 말하기를 : " 이 사람은 비천한 야인 출신으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다행히 장군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승상은 원앙을 인도하여 상객의 자리에 모셨다,  원앙은 평소에 조조를 싫어했다. 

조조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원앙은 그 자리를 떴고, 원앙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조조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래서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앉아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효경제는 태자시절 사부였던 조조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조조는 밑의 관리를 시켜 원앙이 옛날 오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는지 조사하도록

시켰다. 원앙은 죄에 저촉되었으나 황제는 조명을 내려 사면하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吳楚反,聞,鼂錯謂丞史曰:「夫袁盎多受吳王金錢,專為蔽匿,言不反.

今果反,欲請治盎宜知計謀.」

丞史曰:「事未發,治之有絕.  今兵西鄉,治之何益!且袁盎不宜有謀.」

鼂錯猶與未決.

[오나라와 초나라가 반란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부하 관리인

승()과 사()에게 말하기를 : " 무릇 원앙은 오왕에게 많은 뇌물을 받고 제멋대로 오왕의

죄를 숨기고 반란을 꾀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지금 오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사실로 들어났다. 나는 황제께 원앙을 처벌하게 청하려고 한다.

원앙은 틀림없이 사전에 모반의 음모를 알았을 것이다.”라고 하자.

​승()과 사()가 말하기를 ; " 반란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면 원앙을 치죄하여 그 음모를

끊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 반란군이 이미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으니 원앙을 치죄한다고

해도 아무런 실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앙은 오왕의 음모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주저하며 결정을 하지 못했다.]

 

人有告袁盎者袁, 恐,夜見竇嬰, 為言吳所以反者, 願至上前口對狀.

竇嬰入言上, 上乃召袁盎入見.  鼂錯在前, 及盎請辟人賜閒, 錯去, 固恨甚. 

袁盎具言吳所以反狀, 以錯故, 獨急斬錯以謝吳, 吳兵乃可罷. 其語具在吳事中.

[어떤 사람이 조조의 일을 원앙에게 고하자, 원앙은 두려워하여 야음을 틈타 위기후 두영의 

집을 찾아가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연유를 설명하고 자기가 직접 황제을 알현하여 

정황을 설명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청했다.

두영이 입궐하여 황제에게 원앙의 말을 전하자 황제는 원앙의 접견을 허락했다.

원앙이 입궐하여 황제의 면전에 서자 그 옆에 조조가 있었다. 독대하여 드릴 말씀이 있다고

주위 사람들을 물리쳐 달라는 원앙의 청을 황제가 허락하자, 조조가 물러가면서 마음속으로

매우 한스러워했다.  원앙이 황제에게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가며 오나라의 반란은 순전히

조조 때문이라 하면서 시급히 조조를 참하고 오나라에 잘못을 시인하면

오나라는 군사를 물리쳐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상세한 이야기는 오왕비열전에 있다].

 

使袁盎為太常,竇嬰為大將軍.  兩人素相與善.  逮吳反.

諸陵長者長安中賢大夫爭附兩人,車隨者日數百乘.  

及鼂錯已誅,袁盎以太常使吳.

吳王欲使將,不肯.  欲殺之,使一都尉以五百人圍守盎軍中.

[황제는 원앙을 태상(太常)11)에 두영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두 사람은 평소에 매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안 주변의 여러 능현(陵縣)12)의 벼슬하지 않은 덕망있는 사람들과 장안에 거주하는 

현능한 대부들이 다투어 두 사람에게 달려와 그들이 끌고 온 수레가 하루에 수백 승에 달했다.
조조를 주살한 황제는 태상 원앙을 오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오왕이 원앙을 자신의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원앙이 거절하자 오왕은 살해하려고 했다.

한 도위에게 사졸 오백 명을 주어 원앙을 군중에 연금하고 지키게 했다.]

 

袁盎自其為吳相時,有從史嘗盜愛盎侍兒,盎知之,弗泄,遇之如故.

人有告從史,言「君知爾與侍者通」,乃亡歸.  

袁盎驅自追之,遂以侍者賜之,復為從史.

及袁盎使吳見守,從史適為守盎校尉司馬,乃悉以其裝齎置二石醇醪,

會天寒,士卒饑渴,飲酒醉,西南陬卒皆臥,司馬夜引袁盎起,

曰:「君可以去矣,吳王期旦日斬君.」 盎弗信, 曰:「公何為者?」

司馬曰:「臣故為從史盜君侍兒者.」

​[원앙이 오나라의 재상으로 재직 시에 그 부하 관리 중의 한 사람이 원앙의 시녀를 좋아하여

몰래 사랑을 나누었는데, 원앙은 이를 알아채고도 누설하지 않고 전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어떤 사람이 그 부하 관리를 찾아가 그가 상국의 시녀와 통정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고했다.

그는 곧바로 달아났다. 원앙이 알고 그 뒤를 따라가 데려온 다음 시녀를 부하 관리에게 주고 

예전처럼 부하 관리로 일하게 해주었다.  이때 오나라에 사자로 와서 오왕에 의해 연금된

원앙을 지키는 사졸들의 책임자는 로 오왕의 교위사마인 그 부하 관리였다.

그는 가지고 있던 옷과 물건들을 팔아 독한 술 두 섬을 샀다.  

그때 마침 날씨는 몹시 추웠고 원앙을 감시하던 병사들은 굶주리고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교위사마는 그들에게 수고한다고 술을 마시게 하여 모두 취하게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서남쪽을 지키는 병사들은 모두 만취하여 쓰러져 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사마가 원앙을 침상에서 일어나게 한 다음 말하기를 :

" 공께서는 도망치십시오. 오왕은 내일 아침 일찍 공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원앙이 믿지 못하고 묻기를 : " 그대는 도대체 누구신대 나의 목숨을 구해 주려고 하오? "하자. 
사마가 대답하기를 : " 저는 예전에 공께서 오나라의 상국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종사를 하다가 공의 시녀와 정을 통했던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盎乃驚謝曰;「公幸有親,吾不足以累公.」

司馬曰:「君弟去,臣亦且亡,辟吾親,君何患!」

乃以刀決張,道從醉卒隧出.  司馬與分背,袁盎解節毛懷之,

杖,步行七八里,明,見梁騎,騎馳去,遂歸報.

[원앙은 놀랐으나 사양하며 말하기를 : " 그대의 양친이 다행히 살아 계신데,

나 때문에 당신까지 연루시킬 생각이 없소.”라고 하자. 

사마가 말하기를 : " 공께서 도망치시면 저의 양친과 가족도 피신시키고

저도 역시 도망치려고 합니다.공은 어찌하여 저의 일을 걱정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말을 마친 사마는 칼로 장막을 찢어 밖으로 인도하여 취해 쓰러진 사졸들 사이를 걸어

탈출한 후에 서로 헤어져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원앙이 절모(節毛)13)에서 깃을 풀어 품에 넣고 깃대를 지팡이 삼아 7-8리를 걸어 갔다.

다음날 새벽녘 그는 양()나라 기병을 만나서 그들의 말을 얻어 타고 

마침내 도성으로 돌아와서 오나라의 정황을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吳楚已破, 上更以元王子平陸侯禮為楚王, 袁盎為楚相. 

嘗上書有所言, 不用. 袁盎病免居家,與閭里浮沈, 相隨行,鬬雞走狗.  

雒陽劇孟嘗過袁盎,盎善待之.

安陵富人有謂盎曰:「吾聞劇孟博徒,將軍何自通之?」

[오, 초 두 나라의 반란군을 격파한 황제는 초원왕 유교(劉交)14)의 아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15)를 초왕으로 봉하고 원앙을 초나라의 상국으로 임명했다.

원앙이 초나라의 재상이 된 후로는 몇 번 황제에게 글을 올려 자기의 뜻을 밝혔으나

황제는 쓰지 않았다. 원앙이 병이 들어 초나라의 상국의 자리를 내놓고 집에 머물면서

마을 사람들과는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 나누고 서로 동무하여 투계장이나 개경주 시합장에 

드나들곤 했다.  낙양의 극맹(劇孟)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길을 가다가 원앙의 집을 들렸는데

원앙이 접대를 극진히 했다.  안릉의 어떤 부자가 원앙에게 묻기를 : “ 제가 들으니 극맹은

도박꾼인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와 같은 사람과왕래하며 지내십니까?"라고 하자.] 

 

盎曰:「劇孟雖博徒,然母死,客送葬車千餘乘,此亦有過人者. 

且緩急人所有.  夫一旦有急叩門,不以親為解,不以存亡為辭,

天下所望者,獨季心、劇孟耳. 今公常從數騎,一旦有緩急,寧足恃乎!」

罵富人,弗與通.  諸公聞之,皆多袁盎.

[원앙이 대답하기를 : “ 극맹이 비록 도박꾼이기는 하나 그의 모친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조문을 온 수레가 천 승이 넘었다고 했소. 이것은 역시 그가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기 때문이오.

또 급하고 어려운 사정은 사람마다 모두 생기게 마련이오. 무릇 어느 날 아침 어떤 사람이

급한 일을 당해서 문을 두드리면 부모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않고, 은 일이 있다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면서 핑계를 대지 않으니, 천하가 우러러보는 사람은 오로지

극맹과 계심(季心)16) 뿐이오. 지금 그대는 항상 몇 명의 말 탄 시종을 거느리고 다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대에게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정녕 그들을 믿을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원앙이 그 부호를 야단치고 다시는 그와 왕래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원앙을 칭송했다.]

 

袁盎雖家居,景帝時時使人問籌策.  梁王欲求為嗣, 袁盎進說, 其後語塞.

梁王以此怨盎,曾使人刺盎.  刺者至關中,問袁盎,諸君譽之皆不容口. 

乃見袁盎曰:「臣受梁王金來刺君,君長者,不忍刺君.

然後刺君者十餘曹,備之!」 袁盎心不樂,家又多怪,乃之棓生所問占. 

還,梁刺客後曹輩果遮刺殺盎安陵郭門外.

[원앙이 비록 관직을 버리고 집에 머물고 있었지만 경제는 때때로 사람을 시켜 계책을 묻곤 했다.

그때 황제의 동생 양왕(梁王)이 황제의 뒤를 잇고자 는 뜻이 있었지만 원앙이 진언을 하자,

그 일은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고 없던 일로 되었다. 양왕은 원앙을 원망하고 자객을 보내

원앙을 죽이려고 했다.  양왕의 자객이 관중에 들어와 원앙에 대해 수소문하니 사람마다

그를 칭송하는데 입이 부족할 정도였다.

자객은 바로 원앙을 찾아가 말하기를 : “ 저는 양왕으로부터 돈을 받고 공을 죽이려고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덕망을 갖춘 분인지라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은 10여 명이 넘으니 대비하셔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불안해 진 원앙은 집안에 또 기괴한 일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배생(掊生)을 찾아가

점을 치고 돌아오는데, 역시나 양왕의 자객들이 안릉(安陵) 현의 외곽 성문 밖에서

원앙이 오는 길을 가로막고 죽였다.] 

 

  

鼂錯者,潁川人也.  學申商刑名於軹張恢先所,與雒陽宋孟及劉禮同師. 

以文學為太常掌故.  錯為人陗直刻深.  

孝文帝時,天下無治尚書者,獨聞濟南伏生故秦博士,治尚書,

年九十餘,老不可徵,乃詔太常使人往受之.

​[조조는 영천(穎川)17) 사람이다. 지읍(軹邑)의 장회 선생으로부터 신불해와 상앙의 

형명학(形名學)을 배웠다.  낙양의 송맹, 유례(劉禮)와 더불어 같은 스승을 섬겼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태상의 장고(掌故)18)가 되었다.
조조는 사람됨이 위엄을 앞세우고 강직했으며 각박하고 비정했다.

효문제 때에는 천하에 『상서()』를 연구한 사람이 드물었다. 

오로지 제남(濟南)의 복생(伏生)만이 진나라의 박사 출신으로 상서에 통달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이미 90이 넘은 노인이었음으로 장안으로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태상(太常)에 조칙을 내려 적당한 사람을 복생에게 보내

그의 학문을 전수받도록 했다.]

 

太常遣錯受尚書伏生所.  還,因上便宜事,以書稱說. 

詔以為太子舍人、門大夫、家令.  以其辯得幸太子,太子家號曰「智囊」. 

數上書孝文時,言削諸侯事,及法令可更定者.

書數十上,孝文不聽,然奇其材,遷為中大夫. 

當是時,太子善錯計策,袁盎諸大功臣多不好錯.

[복생에게 상서를 배운 후 돌아온 조조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상서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황제의 명으로 태자의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문대부(門大夫), 가령(家令)19)으로 승직했다.  

변설에 능해 태자의 총애를 받아 태자부의 사람들은 그를 지낭(지혜 주머니)이라 불렀다.  

문제 재위시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제후들의 봉지에 대한 삭감책과 법률에 대한 정비책을 간했다.  

상소장이 수 십 번에 걸쳐 황제에게 올라갔지만 문제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의 재주가 비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대부(中大夫)에 승직시켰다.

당시 태자는 조조의 계책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원앙 등 여러 대부들 대부분은 조조를 좋아하지 않았다.] 

 

景帝即位, 以錯為內史.  錯常數請閒言事, 輒聽, 寵幸傾九卿, 法令多所更定.

丞相申屠嘉心弗便,力未有以傷. 內史府居太上廟壖中,門東出,不便,

錯乃穿兩門南出,鑿廟壖垣.  丞相嘉聞,大怒,欲因此過為奏請誅錯.

錯聞之,即夜請閒,具為上言之. 

丞相奏事,因言錯擅鑿廟垣為門,請下廷尉誅.

[경제가 즉위하자, 조조를 내사(內史)20)로 임명했다.

조조가 항상 경제에게 독대를 청하여 주청을 올리면 경제는 그때마다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조조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구경(九卿)을 능가하여 많은 법령이 바뀌게 되었다.

승상 신도가(愼屠嘉)는 마음속으로 조조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그를 해칠만한

힘이 없었다.  내사(內史)의 집무실은 태상황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출입문은 동쪽으로 나 있어서 궁궐을 드나들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조조는 태상황 사당의 바깥 쪽 담을 허물어 두 개의 문을 내고 남쪽을 통해 궁궐을

출입했다.  승상 신도가가 알고 크게 노하여 그것은 조조의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여

상소문을 올려 조조를 처형하려고 생각했다. 

조조가 풍문을 듣고 그날 밤으로 황제에게 독대를 청해 그 정황을 상세하게 고했다.

다음 날 승상이 주청을 올려 조조가 함부로 태상황 사당의 담장을 허물어 문을 만들었음으로

정위에 넘겨 죄를 물어 처형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上曰:「此非廟垣,乃壖中垣,不致於法.」 丞相謝. 

罷朝,怒謂長史曰:「吾當先斬以聞,乃先請,為兒所賣,固誤.」

丞相遂發病死.  錯以此愈貴.

遷為御史大夫,請諸侯之罪過,削其地,收其枝郡. 

奏上,上令公卿列侯宗室集議,莫敢難,獨竇嬰爭之,由此與錯有卻. 

 錯所更令三十章,諸侯皆諠譁疾鼂錯.

[황제가 말하기를 : " 조조가 뚫은 담은 태상황 사당의 담이 아니고, 사당바깥에 있는 공터의

담이기 때문에 법령에 저촉되었다고 할 수 없소."라고 하자.  승상이 황제에게 사죄했다.

이윽고 조회가 파하자 분노한 승상이 장사에게 말하기를 : " 조조가 사당의 담장을 허물고

문을 내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바로 처형을 하고 황제에게 주청을 올려야 했었는데

내가 오히려 나이 어린 자에게 농락을 당했으니 진실로 내가 일을 잘못 처리 했음이다!"하였다.   

그리고 승상은 얼마 후에 병이 나서 죽었다. 이로써 조조는 더욱 귀한 몸이 되었다.
어사대부로 자리를 옮긴 조조는 제후들이 저지른 죄가 너무 큼으로 그 봉지를 삭감하고

휘하의 군현을 조정에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가 공경, 열후, 종친(宗親)들을 모이게 해서 의논해 보도록 명했다.  

아무도 감히 조조의 상소문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만이 반대했다.  

이 일로 인해 두영과 조조는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30개에 이르는 법령의 조항을 고치자, 제후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조조를 비난했다.]

 

錯父聞之,從潁川來,謂錯曰:「上初即位,公為政用事,侵削諸侯,

別疏人骨肉,人口議多怨公者,何也?」 

鼂錯曰:「固也.  不如此,天子不尊,宗廟不安.」

錯父曰:「劉氏安矣,而鼂氏危矣,吾去公歸矣!」遂飲藥死, 

曰:「吾不忍見禍及吾身.」 死十餘日,吳楚七國果反,以誅錯為名.

[조조의 부친이 이 소식을 듣고 영천에서 올라와 조조에게 타이르며 말하기를 :   

"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네가 정사를 멋대로 주물러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하고 ,

골육간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다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느라 의견이 분분한데,

무엇 때문에 그리 행동하느냐?”라고 하자. 
조조가 대답하기를 : " 사정이 본래 그렇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황제는 존귀해지지 못하고, 종묘가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조조의 부친이 말하기를 : " 정녕 그렇게 한다면 유씨의 천하는 편안해지겠지만, 우리 조씨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나는 너와의 인연을 끊고 먼저 세상을 떠나가야겠다.”라고 하며,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면서 말하기를 :

 " 나는 차마 화가 내 몸에 미치는 것을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부친이 죽고 10여 일 후에

과연 오, 초(吳, 楚)가 난을 일으켜 조조를 처벌하여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及竇嬰、袁盎進說,上令鼂錯衣朝衣斬東市.  

鼂錯已死, 謁者仆射鄧公為校尉, 擊吳楚軍為將.  還, 上書言軍事, 謁見上. 

上問曰:「道軍所來,聞鼂錯死,吳楚罷不?」 

鄧公曰:「吳王為反數十年矣,發怒削地,以誅錯為名,其意非在錯也.

且臣恐天下之士噤口,不敢復言也!」

​[그때 두영과 원앙이 황제에게 조조를 처벌하여 난리를 조기에 수습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리자, 황제는 조조에게 조의를 입게 한 후 동쪽 저잣거리에서 처형하도록 했다.

조조가 죽고 얼마 후에 알자복야(謁者僕邪)21) 등공(鄧公)은 교위(校尉)가 되어

오, 초(吳, 楚)의 반란군 토벌하는 장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서장으로 올렸다.

황제가 등공에게 묻기를 : " 오, 초의 반란군들이 조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군사를 물리치지 않았는데 그대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라고 하자. 

등공이 대답하기를 : " 오왕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수십 년째 된 것으로,

자기의 봉지를 삭감한다는 조칙에 노하여 조조를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은 그의 뜻은 조조를 죽이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장차 신이 걱정하는 바는 이 일을 계기로 천하의 선비들이 입을 다물고,

감히 황제께 진언을 올리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라고 하였다.]

 

上曰:「何哉?」 

鄧公曰:「夫鼂錯患諸侯彊大不可制,故請削地以尊京師,萬世之利也.

計畫始行, 卒受大戮, 內杜忠臣之口, 外為諸侯報仇, 臣竊為陛下不取也.」 

於是景帝默然良久,曰:「公言善,吾亦恨之.」乃拜鄧公為城陽中尉.

[황제가 등공에게 묻기를 : " 어째서인가? "라고 하자. 

등공이 대답하기를 : " 조조는 제후들의 세력이 강대해지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해서 천자의 권위를 높여 만세의 이익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정책을 시행하다가 종족이 멸족당했으니 ​이는 안으로는 충신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도리어 제후를 위해 원수를 갚아 준 결과가 되었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폐하께서 취하실 바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하기를 : " 그대의 말이 옳도가! 나 역시 그것을 후회하고

있음이라!"라고 하며, 이에 황제는 등공을 성양(城陽)의 중위로 삼았다.]

 

鄧公,成固人也,多奇計. 

建元中,上招賢良,公卿言鄧公,時鄧公免,起家為九卿. 

一年,復謝病免歸.  其子章以修黃老言顯於諸公閒. 

[등공은 성고(成固)22) 사람으로 기발한 계책을 많이 냈다.  

건원(建元)23) 연간에 황제가 현량(賢良)24)을 천하에서 구할 때 공경들이 등공은 천거했다.
그때 등공은 관직에 물러나 있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구경(九卿)의 일원이 되었다.  

1년 후에 다시 병으로 직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 등장(鄧章)이 황노(黃老)의 학을 배워 공경들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太史公曰:

袁盎雖不好學,亦善傅會,仁心為質,引義慨.  遭孝文初立,資適逢世. 

時以變易,及吳楚一說,說雖行哉,然復不遂.  好聲矜賢,竟以名敗. 

鼂錯為家令時,數言事不用;後擅權,多所變更. 

諸侯發難,不急匡救,欲報私讎,反以亡軀. 

語曰「變古亂常,不死則亡」,豈錯等謂邪!  

[태사공이 말한다.
원앙은 비록 학문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시의에 맞춰 일을 처리하는데 능했다.

마음이 어질고 질박하며 의를 들어 비분강개했다. 문제가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의 자질이 때를 만났다.  시국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오, 초(吳, 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에게 유세하니 그의 말이 한 번 시행되었으나, 그 후 다시는 성공하지 못했다. 

명성을 좋아하고 현능함을 좋아했으나 결국은 그 명성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조조는 태자부의 가령(家令)이 되어 자주 시책을 내었으나 번번이 쓰임을 당하지 못하다가

후에 영달하자,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법령을 많이 바꿨다.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속하게 수습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원한만을 갚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몸을 망쳤다.  

속담에 말하기를 ‘ 옛 것을 바꾸고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히면, 죽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했으니  

그것은 바로 조조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 각주 】 

1)청실(淸室)/ 관리나 귀족들을 조사했던 감옥을 말한다.

2)유장(劉長)/ 고조의 여덟 아들 중 7남으로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회남왕에 봉해졌다.  

   효문제 때 교만한 나머지 입조할 때는 항상 황제와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갔다.

   봉지에 있을 때는 한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정해 다스렸다.

   문제 6년 기원전 174년 흉노 및 민월(閩越)의 수령들과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려고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촉군(蜀郡)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를 가던 중 절식하여 굶어 죽었다. 회남려왕은 그의 시호다.  

3)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의 봉호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7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으로 패현 출신이다. 진말 유방이 패현에서 기의할 때 사인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유방이 정벌을 위해 밖으로 출전할 때 그는 패현에 남아서 여태후와 아들 유영을 받들었다.  

   이윽고 초한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태후와 유영이 항우에게 사로잡히게 되자 

   그는 곁에서 극진히 모셨다. 후에 초한이 홍구를 경계로 강화를 맺을 때 태공 등의

   유방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어 한나라에 돌아왔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벽양후(辟陽侯)에 봉해졌다.

   섭정이 된 여후는 심이기를 좌승상에 임명하고 매우 신임하고 총애했다.

   문제 3년 기원전 177년 회남왕 유장(劉長)애 의해 살해되었다. 

   유장의 모친 조희는 원래 조왕 장오의 미인으로 조나라를 지나가던 고조에게 바쳐졌다.

   조희는 그 날로 임신하여 유장을 낳았다. 후에 관고 등이 고조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가 발각되자, 그들과 함께 장안으로 압송된 조희는 옥리에게 고조의 총애를 받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옥리가 고조에게 그 사실을 고했으나 그때는 자기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장오에게 매우 노해 있었기 때문에 유장의 모친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조희의 동생 조겸(趙兼)이 그 사실을 벽양후 심이기를 통해 여태후에게 알렸으나

   질투심으로 인해 여후는 고조에게 말하지 않고 벽양후 역시 여후에게 힘써 간하지 않았다.

   조희는 유장을 낳은 후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고조는 후회하여 회남왕 경포의 반란을 평정하고 유장을 대신 봉했다.  

   회남여왕 유장은 자기의 모친이 죽은 것은 당시 여후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던 심이기가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벽양후를 죽인 것이다.( 열전 58. 회남형산)  

4)시무(柴武)/ 진무(陳武)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63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이다.  진2세 원년 기원전 209년, 설(薛) 땅의 대중들을 이끌고

   유방의 기의에 합류하여 장군이 되어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멸했다.

   이어서 항우가 마련한 홍문(鴻門)의 연(燕)에 참석한 유방을 수행했다.  

   초한 전쟁 중 역하(曆下)에서 제군(齊軍)을 대파한 한신의 군대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해하(垓河)의 싸움에서는 주발(周勃)과 함께 한나라의 후로(後路) 대군을 지휘했다.

   한고조 6년 기원전 201년, 극포후(棘蒲侯)에 봉해졌다.

   한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한왕 신(信)이 흉노와 내통하여 한나라의 변경을 침범하자

   시무는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삼합(參合)에서 한왕과 흉노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한왕 신의 목을 벴다. 고후의 치세시 대장군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함께 문제를 영립했다.

   문제3년 기원전 177년, 대장군이 되어 제북왕 유흥거(劉興居)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문제6년, 회남왕 유장(劉長)이 일으킨 반란에 참여한 그의 아들 시기(柴奇)가 주살되었으나

   그가 세운 높은 공적으로 연좌되지 않아 죄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위와 후국은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당대에 끝났다.  

5)맹분(孟賁)/ ① 춘추때 위(衛)나라 사람으로 <사기정의>에 의하면 그가 일단 노하여

   고함을 치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자(尸子)>에 “ 맹분은 물속에서는

   교룡(蛟龍)도 피하지 않고, 산속을 다닐 때는 흉포한 호랑이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②전국 때 진무왕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산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 진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 들기 시합을 맹열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그 죄를 추궁 받아 살해되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6)하육(夏育)/ 춘추 때 위(衛)나라 출신의 전설상의 용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전박에게 살해 되었다는 설도 있다.  

7)허유(許由)/ 요임금 때의 은사(隱士).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그는 기산(箕山)으로 도망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다시 요임금이 구주의 지방관을

   다스리는 장관에 임명하자  그는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8)회남여왕 유장(劉長)의 네 아들이 후(侯)에 봉해진 해는 문제 8년 기원전 172년이고

   회남왕에는 성양왕 유희를 옮겼다. 유희는 성양왕 유장(劉章)의 아들이다.  

   회남왕의 세 아들이 제후왕에게 봉해진 해는 그로부터 8년 후인 문제8년 기원전 164년이다.

   문제는 원래의 회남왕의 봉지를 회남(淮南), 형산(衡山), 려강(廬江) 셋으로 나누어  

   유안(劉安), 유발(劉勃), 유석(劉錫)을 각각 봉했다(회남형산열전).  

9)상시기(常侍騎)/ 말을 타고 천자를 좌우에서 수행하는 낭관이로 진나라가 설치하여

   한나라가 그대로 답습했다.  

   질록(秩祿)은 8백 석이다.  

10)사람돼지/ 원문은 인체(人彘)다. 고조가 황제의 나리에 오른 후에 척부인(戚夫人)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소생 여의(如意)를 조왕(趙王)에 봉하고 태자로 세워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조가 죽자 척부인에게 앙심을 품은 고후는 여의를 독살하고 척부인을 잡아

     코, 귀, 팔, 다리 등을 자른 후에 돼지우리에 가두어 인체라고 부르고 굶겨 죽였다.

     원앙은 적실과 첩실의 사이를 분명하게 해두지 않으면 사후에 인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11) 태상(太常)/ 구경(九卿)의 하나로 종묘의 의례를 관장했다.

12) 원문은 제릉(諸陵)으로 장안 근처의 장릉(長陵), 안릉(安陵), 패릉(霸陵), 고릉(高陵),

      창릉(昌陵), 두릉(杜陵) 등의 황제릉을 가리킨다.

      장안 주변에는 황제능을 중심으로 주변에 형성된 마을에 현을 설치했다.  

13) 절모(節毛)/ 황제가 사자를 보낼 때 주어 징표로 삼은 깃발이다. 모(旄)라고 한다.  

      깃대는 대나무로 길이가 8척이고 깃은 쇠꼬리다.  

14) 유교(劉交)/ 고조의 막내 동생으로 사기 초원왕세가에는 동모유제(同母幼弟)라 했으나  

      한서(漢書)에는 동부소제(同父少弟) 즉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되어 있다.

      독서를 좋아하고 예술방면에 재주가 있었다.

      어렸을 때 진나라의 유자(儒者) 부구백(浮丘伯)으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  

      진나라 말기에 고조의 거병에 참여했으며 관중에 들어가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

      다시 고조가 항우를 공격할 때 종군하면서 고조의 측근에 있으면서 시중을 들었다.

      고조 6년에 초왕이 되고 26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시호는 원(元)이다.
15) 원래 초왕(楚王)은 회음후 한신이었다. 한신을 모함하여 초왕의 자리에서 내 쫓은

      한고조 유방은 그 자리에 그의 동모제 유교(劉交)를 봉했다. 유교는 재위 23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유영이 이었다가 유영이 4년 만에 죽고 다시 유영의 아들 유무가 계승했다.

      유무는 오나라와 모의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신은 자살했다. 유무는 유교의 손자이고 유례는 아들이다.

16) 계심(季心)/ 서한 때의 관리로 팽성(彭城) 출신이며 명장 계포(季布)의 동생이다.

      젊었을 때 협객으로 자처하여 의기를 논하며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했다.  사방 수천 리의 땅에서 다투어 그를 찾아와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문제 때 살인을 하고 도망쳐 오나라로 들어가 오나라 상국으로 있던

      원앙의 집에 숨어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아 랑(郞)에 천거되었다. 

      경제 7년 기원전 150년, 중위사마(中尉司馬)로 승진했다.

      ​그때 중위(中尉)는 혹리로 유명한 질도(郅都)였으나 질도 역시 계심을 대할 때

      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심은 진정한 용기를 갖춘 인사로 이름이 높았다.  

17) 영천(穎川)/ 지금의 하남성 허창시 우현(禹縣)이다. 전국 때는 양책(陽翟)이라 했다.

18) 장고(掌故)/ 태상의 속관으로 고사(故事)의 일을 관장했다.

19) 사인(舍人), 문대부(門大夫)는 태자태부(太子太傅)의 속관으로 봉록은 공히 6백석이고  

      가령(家令)은 태자의 속관으로 봉록은 1천석이다. .  

20) 내사(內史)/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명으로 경사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봉록은 2천석이다. 후에 좌우로 나뉘었다가 무제 때 다시

      경조윤(京兆尹), 좌풍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 등으로 분구하여 삼보(三輔)라 칭했다.  

21) 알자복야(謁者僕邪)/ 알자는 낭중령의 소관으로 황제에게 온 손님의 안내를 맡았다.  

      복야는 그 장관이다.  

22) 지금의 성서성 성고현(成固縣)이다.

23) 건원(建元)/ 한무제가 사용한 11개 중 최초로 사용한

      기원전 140년부터 135년까지의 연호다.  

24) 현량(良)/ 한문제 때부터 시작된 과거 제도로, 책문을 통해 직언과 간언에 능한 인사.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