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萬石 張叔列傳

第 四十三. 萬石張叔列傳(만석 장숙열전)

덕치/이두진 2023. 11. 30. 17:32

 

 ​    第 四十三.   萬石張叔列傳(만석 장숙열전) 

萬石君名奮,其父趙人也,姓石氏.  趙亡,徙居溫.

高祖東擊項籍,過河內,時奮年十五,為小吏,侍高祖.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으로 그의 부친은 조나라 사람이다. 성은 석(石)씨다.  

조나라가 멸망하자 온현(溫縣)1)으로 옮겨 살았다. 고조가 항적을 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다가 하내를 지날 때 석분의 나이는 15세의 소년으로 하급 관리가 되어

고조의 시중을 들었다.]

 

高祖與語,愛其恭敬,問曰:「若何有?」

對曰:「奮獨有母,不幸失明.  家貧.  有姊,能鼓琴.」

高祖曰:「若能從我乎?」  曰:「願盡力.」 於是高祖召其姊為美人,

以奮為中涓,受書謁,徙其家長安中戚裏,以姊為美人故也. 

[고조는 말을 나눌 때 공손하고 예의가 바른 태도를 견지했던 석분을 매우 총애했다.

고조가 석분에게 묻기를 :" 네 집에는 누가 또 있느냐?"라고 하자. 

석분이 대답하기를 : " 홀어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불행히도 실명하셨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여동생이 모시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거문고를 잘 탑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묻기를 : " 너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라고 하자. 

석분이 대답하기를 : " 원컨대 있는 힘을 다하여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조는 석분의 여동생을 불러 미인(美人)으로 삼고, 석분은 중연(中涓)2)에 임명하여 

올라오는 글과 알현을 청하는 일을 맡아 보도록 했다.

이어서 그의 집을 장안성의 척리(戚里)3)로 옮기도록 했다.

그것은 여동생이 미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其官至孝文時, 積功勞至大中大夫.  無文學, 恭謹無與比.  

文帝時, 東陽侯張相如為太子太傅, 免.

選可為傅者,皆推奮,奮為太子太傅. 

及孝景即位,以為九卿;迫近,憚之,徙奮為諸侯相. 

奮長子建,次子甲,次子乙,次子慶,皆以馴行孝謹,官皆至二千石.

於是景帝曰:「石君及四子皆二千石, 人臣尊寵乃集其門.」 號奮為萬石君.

​[그의 관직은 효문제에 이르러 많은 공로를 쌓아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올랐다.

글 재주나 학문은 없었지만 공손한 태도나 자신에게 엄격함으로는 그와 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문제 때 태자태부였던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가 면직되어

새로운 태부를 뽑으려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석분을 추천하자, 석분은 태자태부가 되었다. 

마침내 효경제가 즉위하자 구경(九卿)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가 너무 예의가 바르고

겸손한 태도를 견지했음으로 경제는 그를 제후국의 승상으로 보냈다.

석분의 장자는 석건(石建)이고 차자는 석갑(石甲), 삼자는 석을(石乙), 사자는 석경(石慶)이다.  

모두 품행이 바르고 부모에게 효성스러웠음으로 관직이 모두 2천 석의 지위에 올랐다.

이에 효경제가 말하기를 : " 석공과 그 네 아들이 모두 2천 석의 관리이니 남의 신하된 자로써

존귀함과 영예가 그 집에 모두 몰려 있도다!"라고 하면서, 

석분에게 만석군(萬石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孝景帝季年,萬石君以上大夫祿歸老于家,以歲時為朝臣.

過宮門闕,萬石君必下車趨,見路馬必式焉.  

子孫為小吏,來歸謁,萬石君必朝服見之,不名.

子孫有過失,不譙讓,為便坐,對案不食.  

然後諸子相責,因長老肉袒固謝罪,改之,乃許.

[효경제 말년, 만석군이 상대부()의 봉록을 받았는데 노년을 구실로 관직에서 물러나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신년이 되면 대신()의 자격으로 조정에 나가 하례의식에

참가하였다. 궁궐 문을 지날 때에 만석군은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서둘러 걸어 들어갔는데,

거리에서 황제의 어가를 보게 되면 반드시 엎드려 예를 갖추어 경의를 표했다. 

자손들 중 비록 하급 관리직이라 할지라도 집에 와서 인사를 올릴 때는

만석군은 반드시 조복을 챙겨 입고 그들을 대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자손들 중 잘못을 범한 자가 있으면 책망하지 않고 곁방에 들어가 앉아서 밥상을 받아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여러 아들이 서로 꾸짖다가 가장 연장자가

육단(肉袒,웃통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는 일)으로 굳이 사죄하며 자기의 과실을 회개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子孫勝冠者在側,雖燕居必冠,申申如也.  僮仆訢訢如也,唯謹. 

上時賜食於家,必稽首俯伏而食之,如在上前.

其執喪,哀戚甚悼.  子孫遵教,亦如之. 

萬石君家以孝謹聞乎郡國,雖齊魯諸儒質行,皆自以為不及也.

[자손들이 성인이 되어 관모를 쓴 자가 곁에 있으면 쉴 때도 반드시 관모를 쓰고 지내며

단정하고 삼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집안의 하인들과도 즐겁게 보냈으나 근엄한 태도는

잃지 않았다. 황제가 하사한 음식을 가끔 집으로 보내면 석분은 반드시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받은 후에 먹었다. 그가 상을 당했을 때는 애통해 함이 매우 깊었다.

자손들도 역시 그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석분과 같이 행동했다.

만석군의 집은 효성과 근신으로 이름이 나서 각 군현()과 제후국에 명성을 떨쳤다.

비록 질박한 태도로 생활하는 제,노나라의 유생(儒生)들도 스스로가 만석군에

결코 미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建元二年,郎中令王臧以文學獲罪.  皇太后以為儒者文多質少,

今萬石君家不言而躬行,乃以長子建為郎中令,少子慶為內史. 

 建老白首,萬石君尚無恙. 建為郎中令, 每五日洗沐歸謁親,入子舍,

竊問侍者, 取親中帬廁牏, 身自浣滌, 復與侍者, 不敢令萬石君知, 以為常.

​[건원(建元) 2년, 랑중령 왕장이 유가의 학설을 두둔하고 도가의 학설을 폄훼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었다. 황태후는 유가들의 글이 문장은 꾸밈이 많지만 질박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지금 만석군의 집안은 말없이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여겨 만석군의 장자 석건을 랑중령으로

막내 석경을 내사(內史)로 삼았다.  

석건이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되었으나 만석군은 여전히 병치래 없이 건강했다.

랑중령이 된 석건이 5일마다 휴가를 얻어 부친에게 문안인사를 다녔다.

그때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몰래 시자에게 부친의 안부를 묻고, 

친히 부친의 내의를 빨고 요강을 깨끗하게 씻어 하인에게 주며

만석군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당부하기를 항상 이와 같이 했다.]

 

建為郎中令,事有可言,屏人恣言,極切;至廷見,如不能言者.

是以上乃親尊禮之.  萬石君徙居陵裏.  內史慶醉歸,入外門不下車. 

萬石君聞之,不食.  慶恐,肉袒請罪,不許.

舉宗及兄建肉袒,萬石君讓曰:「內史貴人,入閭里,里中長老皆走匿,

而內史坐車中自如,固當!」乃謝罷慶.

[석건은 낭중령이 되어서 황제에게 간언을 올릴 일이 있으면 남들을 물리치고

바로 하고 싶은 말을 다했는데 그 태도가 매우 간절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론에 있을 때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이로 인해 황제는 석건을 매우 예를 갖춰 존중했다.  만석군은 거처를 능리(陵里)4)로 옮겼다.

한번은 내사로 있던 석경이 술에 취해 집에 올 때 외문 밖에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고 탄 채로

그냥 들어왔다.  만석군이 듣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

석경이 두려워하며 육단으로 죄의 용서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온 식구와 맏형인 석건도 함께 육단을 행하자 만석군이 석경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 

" 내사는 신분이 귀한 사람으로, 마을로 들어서면 마을에 사는 나이 많은 어른들도

모두 달아나거나 도망가 숨는데, 내사라는 자가 수레에 앉은 채 태연자약하다니 

참으로 마땅한 것인가!”라고 하며. 마침내 석경을 용서했다.]

慶及諸子弟入里門,趨至家.   萬石君以元朔五年中卒. 

長子郎中令建哭泣哀思,扶杖乃能行.

歲餘,建亦死.  諸子孫咸孝,然建最甚,甚於萬石君.  

建為郎中令,書奏事,事下,建讀之,

曰:「誤書!『馬』者與尾當五,今乃四,不足一. 上譴死矣!」甚惶恐. 

其為謹慎,雖他皆如是.

[그 후로 석경과 그 형제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올 때면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집에 들어왔다.  

만석군은 무제 원삭 5년(기원전 124년), 세상을 떠났다.  

장자인 랑중령 석건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했는데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후에 석건도 역시 세상을 떴다.

여러 자손들도 모두 효성스러웠으나 석건이 만석군보다 더 심했다.  

석건이 랑중령으로 있었을 때 어떤 일에 대해 상주문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에 대한 황제의 회답이 내려왔다.

석건은 그 내용을 다시 읽다가 말하기를 : " 글을 잘못 썼구나!말 마(馬)는 꼬리에

반드시 5획으로 썼어야 했는데, 지금보니 네 획만 있고 한 획이 부족하다. 

폐하께서 책망하시면 나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하며. 매우 두려워했다.

그가 근신하는 것은 비록 다른 일이라고 해도 모두 이와 같았다.]

 

萬石君少子慶為太仆, 御出, 上問車中幾馬, 慶以策數馬畢, 舉手曰:「六馬.」

慶於諸子中最為簡易矣,然猶如此.  

為齊相,舉齊國皆慕其家行,不言而齊國大治,為立石相祠.

[만석군의 막내아들 석경이 태복의 신분으로 황제가 타는 수레의 마부가 되어 출행 나갔을 때 

황제가 수레에 앉아서 앞에 말이 몇 마리가 있냐고 물었다. 석경이 채찍으로 말의 수를 가리켜

직접 센 후에 손을 들어 말하기를 : " 여섯 필입니다.”라고 하였다. 

형제들 중 석경이 가장 예절을 까다롭게 행하지 않아 귀기가 쉬웠으나 

그래도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고 신중했다.

후에 석경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만석군의 집의 행실을 앙모했다. 

정령을 반포하지 않았는데도 제나라에 치세가 오게 했음으로 제나라 사람들은 그를 위해

석상사를 세웠다.]

 

元狩元年,上立太子,選群臣可為傅者,慶自沛守為太子太傅,

七歲遷為御史大夫.

元鼎五年秋, 丞相有罪,罷.  制詔御史:「萬石君先帝尊之, 子孫孝,

其以御史大夫慶為丞相, 封為牧丘侯.」 

是時漢方南誅兩越,東擊朝鮮,北逐匈奴,西伐大宛,中國多事.

天子巡狩海內,修上古神祠,封禪,興禮樂.

[무제 원수(元狩) 원년(기원전 122년), 태자를 세운 황제가 군신들 중에서 태부를 뽑았는데,  

당시 패군 태수로 있던 석경을 태자태부로 임명했다. 그리고 7년 만에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무제 원정(元鼎) 5년 가을,승상이 죄를 얻어 파면되자. 황제가 조명을 어사에게 내렸다.

" 만석군은 선제께서 존중했던 대신이며 그의 자손들은 모두 효성스럽다.

이에 어사대부 석경을 승상에 명하고 목구후(牧丘侯)에 봉한다."

이때 한나라는 남쪽으로는 남월과 동월을 토벌했으며, 동쪽으로 조선을 치고, 북쪽으로는

흉노를 멀리 쫓아냈으며, 서쪽으로는 대완을 정벌하는 등 중국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천자가 전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상고 시대로 전해 내려오는 신사(神祠)를 수리하고

복원했으며, 태산에 가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크게 예악()을 일으켰다.]

 

公家用少, 桑弘羊等致利, 王溫舒之屬峻法, 兒寬等推文學至九卿, 更進用事,

事不關決於丞相,丞相醇謹而已.  在位九歲,無能有所匡言. 

嘗欲請治上近臣所忠、九卿咸宣罪, 不能服,反受其過,贖罪.

[국가의 재정이 적어지자, 상홍양(桑弘羊)5) 등으로 하여금 국가의 재정을 보충하도록 하고, 

왕온서(王溫舒)6)와 같은 관리들은 법을 엄혹하게 적용했으며 아관(兒寬) 등으로 하여금 

유학을 진작시켜  그들의 관직이 모두 구경()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교대로 차지하며

조정의 일은 굳이 승상의 결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승상은 한결 같이 온후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뿐이었다.

​석경은 승상의 자리에 9년 동안 있으면서 잘못된 바를 고치게 할만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일찍이 황제의 가까운 신하 소충과 구경의 지위에 있었던 함선()의 죄를 황제에게

치죄토록 청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들을 무고했다는 죄로 벌을 받고 속죄한 일이 있었다.]

元封四年中,關東流民二百萬口,無名數者四十萬,

公卿議欲請徙流民於邊以適之.

上以為丞相老謹, 不能與其議, 乃賜丞相告歸, 而案御史大夫以下議為請者. 

丞相慚不任職, 乃上書曰:「慶幸得待罪丞相, 罷駑無以輔治, 城郭倉庫空虛,

民多流亡, 罪當伏斧質, 上不忍致法.  願歸丞相侯印, 乞骸骨歸, 避賢者路.」

[무제 원봉 4년(기원전 107년), 관동()에 유민이 2백만 명이 살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그중에 호적이 없는 사람이 40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공경대신들은 상의 끝에 유민들을

변경의 적당한 곳으로 이주시킬 것을 주청하기로 했다. 황제는 승상이 연로하고 각별히

신중하므로 이 논의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이내 승상에게 휴가를 주어 집에서 쉬도록 하고

안건은 어사대부 이하의 관원들이 의논하여 주청을 올리도록 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이를 부끄럽게 여긴 승상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 이 석경은 총애를 받아 승상의 직을 맡았으나 원래 둔하고 어리석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성곽은 무너지고 창고는 비어 수많은 백성들이 유민이 되어

떠돌고 있으니, 그 죄는 마땅히 부질(斧質)로 참수형에 해당하나 폐하께서는 법대로 차마

치죄를 못하셨습니다. 원컨대 승상과 후작의 인장을 돌려드리고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저로 하여금 현능한 자의 진로를 막는 행위를 피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天子曰:「倉廩既空, 民貧流亡, 而君欲請徙之, 搖蕩不安, 動危之, 而辭位,

君欲安歸難乎?」 以書讓慶,慶甚慚, 遂復視事.  

慶文深審謹,然無他大略,為百姓言.

後三歲餘,太初二年中,丞相慶卒,謚為恬侯.  

慶中子德, 慶愛用之, 上以德為嗣, 代侯. 後為太常, 坐法當死, 贖免為庶人.  

慶方為丞相,諸子孫為吏更至二千石者十三人.

及慶死後,稍以罪去,孝謹益衰矣.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 " 창고는 이미 비었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유랑하고 있는데,

승상은 그들을 변경으로 옮기자고 해서 사회는 뒤숭숭하고 인심은 불안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이러한 시기에 승상이 직위에서 물러나 사임한다면

승상은 그 책임과 난국을 누구에게 맡겨 수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문서로 석경을 책망하자 석경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다시 승상의 업무를 보았다. 

석경은 법률을 운용함에 용의주도하고 세심하여 조심하고 삼가했지만

백성들을 위해 어떤 원대한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3년 후인 태초 2년 중에 석경은 승상의 직으로 재직 중에 죽었다. 시호는 염후(恬侯)다.  

그의 후사는 가운데 아들인 석덕(石德)이 이었다. 석경이 석덕을 사랑했음으로 항제가

석덕을 후사로 삼고 그의 후작을 대신하게 했다. 석덕은 후에 태상(太常)7)이 되었다가

죄를 연좌되어 사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인이 되었다.

석경이 승상의 자리에 막 올랐을 때는 만석군의 자손들 중 관리가 되어 2천 석의 자리에

오른 자만 13명이나 되었다. 석경이 죽은 후 점점 죄를 짓고 쫓겨나게 되어 

효성과 근신하는 석경의 가풍은 더욱 쇠퇴해졌다.]  

 

建陵侯衛綰者,代大陵人也.  

綰以戲車為郎,事文帝,功次遷為中郎將,醇謹無他.

孝景為太子時,召上左右飲,而綰稱病不行.

文帝且崩時,屬孝景曰:「綰長者,善遇之.」

及文帝崩,景帝立,歲餘不噍呵綰,綰日以謹力.

[건릉후(建陵侯) 위관(衛綰)은 대나라 대릉현(大陵縣) 사람이다.

위관은 수레 위에서 펼치는 곡예로 낭관()이 되어 문제를 모셨다.

공을 세워 중랑장으로 승진했는데, 성품이 온후하고 신중했지만 특별난 재주는 없었다.  

효경제가 태자 시절 좌우의 측근들을 불러 함께 음식을 먹는데 위관만은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문제가 죽을 때 효경제에게 특별히 당부하기를 : " 위관은 명망 있는 사람이니

잘 대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문제가 서거하고 경제가 즉위하였는데,

경제는 한 해 남짓 위관에게 어떤 일로든 책망하거나 꾸짖지 않았고, 

위관은 단지 날마다 신중을 기하여 책무를 다했다.]

 

景帝幸上林,詔中郎將參乘,還而問曰:「君知所以得參乘乎?」 

綰曰:「臣從車士幸得以功次遷為中郎將,不自知也.」 

上問曰:「吾為太子時召君,君不肯來,何也?」

對曰:「死罪,實病!」上賜之劍. 

綰曰:「先帝賜臣劍凡六,劍不敢奉詔.」  

上曰:「劍,人之所施易,獨至今乎?」 

綰曰:「具在.」上使取六劍,劍尚盛,未嘗服也. 

郎官有譴,常蒙其罪,不與他將爭;有功,常讓他將.  

上以為廉,忠實無他腸,乃拜綰為河閒王太傅.

[한번은 경제가 어가를 몰고 상림원으로 사냥을 나가면서 중랑장 위관에게 동승하길 명했다.

궁으로 돌아오면서 경제가 위관에게 묻기를 : " 짐이 경을 동승시킨 이유를 아시오?"라고 하자. 

위관이 대답하기를 : " 신은 수레 위에서 곡예를 부려 총애를 얻고, 공을 쌓아서 중랑장으로

승진되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신을 무슨 연고로 동승시켰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내가 태자 시절 그대를 불렀는데 그때는 오지 않았소.

그 이유가 무엇이었소?"라고 하자. 

위관이 대답하기를 : "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에 공교롭게 병이 났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에게 한 자루의 보검을 하사했다. 위관이 아뢰기를 : " 선제께서 신에게 하사하신

검은 모두 6개나 됩니다. 이에 더 이상 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 보검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선물도 할 수 있고 다른 물건과 교환도

할 수 있는데, 설마 경은 지금까지 그 검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오?라고 하자. 

위관이 대답하기를 : " 아직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그 여섯 개의 검을 가져오라고 해서 살펴봤는데 모두 여전히 칼집 속에서 한 번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그는 부하인 랑관에게 잘못이 있으면 항상 그 죄를 대신 받고

다른 장군들과는 다투지 않았다.  공이 있으면 항상 다른 장군들에게 양보했다.

황제는 그가 청렴하고 충성스러우며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하간왕(河間王)의 태부로 삼았다.]

 

吳楚反,詔綰為將,將河閒兵擊吳楚有功,拜為中尉. 

三歲,以軍功,孝景前六年中封綰為建陵侯. 

其明年,上廢太子,誅栗卿之屬. 

上以為綰長者,不忍,乃賜綰告歸,而使郅都治捕栗氏.

既已,上立膠東王為太子,召綰,拜為太子太傅.  久之,遷為御史大夫.

[오, 초나라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위관을 불러 장군으로 삼아 하간국의 장병들을 이끌고

오와 초를 공격하게 했는데, 위관이 공로를 세우자 중위()로 승진시켰다.

3년 후(기원전 152년),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 인해 건릉후(建陵侯)에 봉해졌다.   

그 다음 해에 황제가 율태자(栗太子)8)를 폐하고 태자의 외삼촌 율경을 주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황제는 위관이 덕망이 높은 인물이라 율태자의 일당을 차마 치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위관을 집으로 돌려보내 쉬게 하고 질도(郅都)를 시켜 율씨들을 체포케 하여 치죄토록 했다.

율태자의 일이 마무리되자 황제는 교동왕 유철(劉徹)을 태자로 세우고 위관을 불러

태자태부로 삼았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위관은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五歲, 代桃侯舍為丞相, 朝奏事如職所奏.  然自初官以至丞相, 終無可言.

天子以為敦厚, 可相少主, 尊寵之, 賞賜甚多.  為丞相三歲, 景帝崩, 武帝立.

建元年中, 丞相以景帝疾時諸官囚多坐不辜者, 而君不任職, 免之.

其後綰卒, 子信代. 坐酎金失侯.

[그리고 5년 후에 위관은 도후() 유사()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단지 자기 직분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만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관리가 되어 승상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

한 번도 훌륭한 계책을 올리거나 책임을 질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천자는 그런 위관이 돈후하여 어린 태자를 보좌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존중하고 총애하여

하사한 상이 매우 많았다. 승상이 된지 3년 후에 경제가 죽고 무제가 즉위하였다.

건원 연간에 경제가 병들어 자리에 누웠을 때 여러 관리들이 연루된 옥사가 발생하였는데

그때 무고하게 벌을 받은 자가 많았던 이유는 위관이 승상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그후에 위관은 죽고 그 아들 위신(衛信)이 그 뒤를 이었으나, 

후에 위신은 주금(酎金)9) 사건에 연루되어 후(侯)의 작위를 잃었다.]

 

塞侯直不疑者,南陽人也.  為郎,事文帝. 

其同舍有告歸, 誤持同舍郎金去, 已而金主覺, 妄意不疑, 不疑謝有之, 買金償.  

而告歸者來而歸金,而前郎亡金者大慚,以此稱為長者.

文帝稱舉,稍遷至太中大夫.  

朝廷見,人或毀曰:「不疑狀貌甚美,然獨無柰其善盜嫂何也!」

不疑聞,曰:「我乃無兄.」 然終不自明也.

[새후(塞侯) 직불의(直不疑)는 남양(南陽) 사람이다. 낭관()이 되어 문제를 섬겼다.

직불의와 같이 방을 쓰던 동료가 휴가를 얻어 집에 갈 때에 실수로 같은 방을 쓰던

다른 동료의 황금을 가지고 갔다. 이윽고 주인이 황금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직불의를 의심했다. 

직불의는 자기가 가져갔다고 사죄하고 시장에서 황금을 사서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고향에 다녀온 사람이 돌아와서 황금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황금의 주인이 대단히

부끄러워했다. 이 일로 인해 직불의는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문제가 그 일을 칭송하여 얼마 후에 태중대부로 올렸다. 조정에서 조현을 올릴 때

어떤 사람이 그를 폄하하며 말하기를 : " 직불의는 용모가 매우 그럴싸하게 훌륭하지만

그러나 유독 형수와 사통을 했으니,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직불의는 말하기를 : “ 나에게는 형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말만 했을 뿐, 끝까지 그 일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다.]

 

吳楚反時, 不疑以二千石將兵擊之. 景帝後元年, 拜為御史大夫.

天子修吳楚時功, 乃封不疑為塞侯.

武帝建元年中,與丞相綰俱以過免.  不疑學老子言. 

其所臨,為官如故,唯恐人知其為吏跡也.

不好立名稱,稱為長者.  不疑卒,子相如代.  孫望,坐酎金失侯. 

[오, 초나라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직불의는 2천 석의 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경제 후원년, 직불의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천자는 오초의 반란군을 진압한 공로로 직불의를 새후(塞侯)로 봉했다.

무제 건원 연간에 승상 위관(衛綰)과 함께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 

직불의는 노자()의 학설을 익혔다.

그는 매번 지방을 감독할 때에 담당 관리들로 하여금 모두 앞서서 임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단지 그는 남들이 자신을 관리로서 남긴 치적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는 또한 명성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음으로 사람들은 그를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여겼다.

직불의가 죽자 아들 직상여(直相如)가 그 작위를 물려받았다.  

손자 직망(直望)은 주금(酎金)의 일에 연좌되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  

 

郎中令周文者,名仁,其先故任城人也.

以醫見. 景帝為太子時,拜為舍人,積功稍遷,孝文帝時至太中大夫.

景帝初即位,拜仁為郎中令.

仁為人陰重不泄,常衣敝補衣溺袴,期為不絜清,以是得幸.

景帝入臥內,於後宮祕戲,仁常在旁.

[낭중령 주문(周文)은 이름이 인(仁)이다. 그 선조는 원래 임성 사람이다.

그는 의사로써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연공이 쌓여 점차적으로 직위가 올라, 효문제 때 태중대부가 되었다.

경제 즉위 초기에 주인()을 낭중령으로 임명했다.

주인(周仁)은 인품이 주의 깊고 세심하며 입이 무거워 무슨 일이던 입밖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헤진 옷을 기워 입고 떼에 찌든 속옷을 입고 다니며 결코 빨아 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제의 총애를 받았다. 경제가 침실에 드나들며 후궁에서 비밀스러운 희극을 볼 때도

주인은 항상 황제 곁에 있었다.]

 

至景帝崩,仁尚為郎中令,終無所言.  

上時問人,仁曰:「上自察之.」然亦無所毀. 

以此景帝再自幸其家.  家徙陽陵.  上所賜甚多,然常讓,不敢受也.

諸侯群臣賂遺,終無所受. 

武帝立, 以為先帝臣, 重之.  仁乃病免, 以二千石祿歸老, 子孫咸至大官矣. 

[경제가 서거하자, 주인은 여전히 낭중령이었으나 끝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 관해 물었다.  

주인은 아뢰기를 :" 폐하께서 스스로 살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헐뜯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경제가 친히 그의 집에 두 번이나 방문했다.  

주인은 후에 그의 집을 두 번이나 양릉으로 옮겼다. 황제가 하사한 물품이 심히 많았으나

그는 항상 겸양하며 감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후와 군신들도 그에게 뇌물을 바치려고 햇으나 그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무제가 즉위하자, 선제의 신하라는 이유로 중책을 맡겼다. 주인이 이윽고 병으로 면직되자,  

주인은 2천 석의 고관의 신분으로 고향에 돌아가 노후를 지내게 되었다. 

자손들도 모두 고관대작의 자리에 올랐다.]

 

 

御史大夫張叔者,名歐,安丘侯說之庶子也.  孝文時以治刑名言事太子.

然歐雖治刑名家,其人長者.  景帝時尊重,常為九卿.

[어사대부(御史大夫) 장숙(張叔)은 이름은 구(歐)로 안구후(安丘侯) 장열(張說)의 서자다.  

효문제 때에 법가의 학설인 형명학()을 연구했고 태자를 섬겼다.

그러나 장구가 비록 형명학에 밝기는 했으나 그의 인품은 도리어 덕이 있는

장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경제 때에 이르러 각별하게 존중받아 항상 구경(九卿)의 반열에 있었다.]

  

至武帝元朔四年,韓安國免,詔拜歐為御史大夫.

自歐為吏,未嘗言案人,專以誠長者處官.  官屬以為長者,亦不敢大欺.

上具獄事,有可卻,卻之;不可者,不得已,為涕泣面對而封之. 

其愛人如此.  老病甐,請免.  於是天子亦策罷,以上大夫祿歸老于家. 

家於陽陵.  子孫咸至大官矣.

 

[무제 원삭 4년(기원전 125년)에 이르러 어사대부 한안국이 면직되자 조칙으로

장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장구가 관리가 된 이래로 남을 처벌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실한 태도로써 관직에 임했다.  

그의 속관들은 그를 장자로 여기며 감히 그를 속이지 않았다.

황제가 그에게 처리하고 옥사를 넘기려고 하면,  그가 능히 사양할만 하면 받지 않았고,

사양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받아 처결하면서 해당자의 면전에서 결옥 문서를 읽어준 후에

봉함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의 사람 사랑하기는 이와 같았다.  

장숙이 노년으로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음으로 벼슬에 물러나기를 청했다.  

그래서 천자는 책서(策書)10)를 특별히 내려 면관시켜 상대부의 봉록으로 퇴직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집은 양릉에 있었고 자손들은 모두가 고관대작이 되었다.]

 

太史公曰:

仲尼有言曰「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其萬石、建陵、張叔之謂邪? 

是以其教不肅而成,不嚴而治.  

塞侯微巧,而周文處讇君子譏之,為其近於佞也.  然斯可謂篤行君子矣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가 일찍이 말씀하셨다." 군자는 말을 하는데는 어눌해야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했다.  

만석(萬石)、건릉(建陵)、장숙(張叔)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엄숙하지 않고도 이루어지고 엄숙하지 않고도 다스려진 것이다.  

새후는 참으로 교묘했으며 주문은 지나치게 공손했음으로 군자들이 그들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행은 위선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만을 봤을 때는 군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각주 】 

1) 온(溫)/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이다.

2) 중연(中涓)/ 청소를 담당한 관리다.

3) 척리(戚里)/ 한나라가 조성한 장안성 내의 외척들이 거주하던 동네다.

4) 능리(陵里)/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으로

5) 상홍양(桑弘羊)/ 대사농과 어사대부를 지낸 한무제 때 사람이다.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행하고 염철의 전매제도를 주창했다.  

6) 왕온서(王溫舒)/ 중위(中尉)와 소부(少府)를 지낸 사람으로 법을 가혹하게 적용한

    혹리로 유명하다.(혹리열전)

7) 태상(太常)/ 종묘(宗廟)의 의례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8) 율태자(栗太子)/ 경제의 폐태자 유영(劉榮)을 말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47년에 죽었다.

    그의 생모가 율비(栗妃) 였음으로 율태자라고 불렀다.

    경제 전7년 기원전 150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해져 임강왕으로 재직 중 3년 되던 해에

    종묘의 빈터에 궁실을 지은 사실이 조정에 전해져 경사로 소환되었다가 옥중에서 자살했다.  

9) 주금(酎金)/ 한나라 때의 제도로써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제후들이 제사의 비용을 돕기 위해

    헌남하는 금품이다.

10) 책서(策書)/ 황제가 신하에 내리는 사령장으로 식읍에 봉하거나, 벌을 내리거나,  

      관직을 면한다는 명령을 적은 간책(簡冊)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