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李將軍列傳

第 四十九. 李將軍列傳(이장군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10. 12:31

 

      第 四十九.   李將軍列傳(이장군열전) 

李將軍廣者,隴西成紀人也.  其先曰李信,秦時為將,逐得燕太子丹者也.

故槐裏,徙成紀.  廣家世世受射.

[장군 이광은 농서군(隴西郡) 성기현(成紀縣)1)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이신()인데, 전대의 왕조인 진()나라 때의 장군으로 연나라의 태자 단()을

추격하여 사로잡은 인물이었다. 그의 고향은 원래 괴리현이었으나, 성기현으로 이사하였다. 

이광()의 가문은 대대로 활쏘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 전수했다.]

 

孝文帝十四年,匈奴大入蕭關,而廣以良家子從軍擊胡,用善騎射,

殺首虜多,為漢中郎.  廣從弟李蔡亦為郎,皆為武騎常侍,

秩八百石, 嘗從行,有所衝陷折關及格猛獸,

而文帝曰:「惜乎,子不遇時!如令子當高帝時,萬戶侯豈足道哉!」

及孝景初立,廣為隴西都尉,徙為騎郎將.

[효문제 14년(기원전 166년), 흉노가 대거 소관4)으로 침입할 때에 이광은 양가의 자제

자격으로 종군하여 흉노를 격퇴하였다.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여 참수한 수급과 사로잡은 포

로가 많아 그 공로로 중랑5)이 되었다.  이광의 사촌 동생 이채 역시 중랑이 되어

함께 무기상시(武騎常侍)6)가 되어 800석의 녹봉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이광은 일찍이 문제가 행차할 때에 수행하였으며, 적진 깊숙히 돌격하여 함락시키고,

사나운 맹수와 맞섰기 때문에 문제가 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 

“ 아깝도다, 그대는 때를 만나지 못하였구나!  만약 그대가 고제를 만났더라면

만호후는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효경제가 서자, 이광은 농서도위7)8)가 되었으며 다시 기랑장(騎郞將)9)로 자리를 옮겼다.]

 

吳楚軍時,廣為驍騎都尉,從太尉亞夫擊吳楚軍,取旗,顯功名昌邑下. 

以梁王授廣將軍印,還,賞不行.  徙為上谷太守,匈奴日以合戰. 

典屬國公孫昆邪為上泣曰:「李廣才氣,天下無雙,自負其能,數與虜敵戰,

恐亡之.」 於是乃徙為上郡太守.  後廣轉為邊郡太守,徙上郡. 

嘗為隴西、北地、鴈門、代郡、雲中太守,皆以力戰為名.

[오,초칠국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광은 효기도위가 되어 태위() 주아부를 수행하여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창읍성() 아래에서는

적군의 깃발을 탈취하는혁혁한 공을 세워서 자신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이에 양왕이 이광에게 장군의 인을 내렸으나 조정은 경사에 돌아온 이광에게 상을 수여하지

않았다.11)  다시 이광은 상곡태수(上谷太守)12)로 전보되어 흉노와 매일 싸웠다.

전속국(典屬國)13) 공손곤야(公孫昆邪)는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상주하기를 :  

“ 이광은 재주와 용기는 갖춘 인재로 천하에 그와 견줄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자부하고, 너무 자주 적군과 접전을 벌여 조만간에 목숨을 잃지 않을까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이광을 상군태수로 옮겼다. 그 후에도 이광은 변경을 전전하며

농서, 상군, 상곡 등의 임지를 포함하여 북지(北地), 안문(雁門)、대(代), 운중(雲中) 등의

태수가 되어 그때마다 온 힘을 다하여 싸웠음으로 이름이 얻었다.]

 

匈奴大入上郡,天子使中貴人從廣勒習兵擊匈奴. 

中貴人將騎數十縱,見匈奴三人,與戰. 

三人還射,傷中貴人,殺其騎且盡. 中貴人走廣. 

廣曰:「是必射雕者也.」廣乃遂從百騎往馳三人. 三人亡馬步行,行數十里. 

廣令其騎張左右翼, 而廣身自射彼三人者, 殺其二人, 生得一人,

果匈奴射雕者也.  已縛之上馬, 望匈奴有數千騎, 見廣, 以為誘騎, 皆驚, 上山陳.

[흉노가 대거 상군을 침입하자 천자가 중귀인(환관)14)을 사자로 보내 이광을 따라다니면서 

흉노를 공격하기 위한 싸움을 배우도록 했다. 한번은 중귀인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달리다가 흉노의 군사 세 명과 교전이 벌어졌다. 세 흉노가 몸을 돌려 활을 쏘아

중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가 데리고 갔던 기병들을 거의 살해했다.

대경실색한 환관은 이광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왔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이광이

말하기를 : “저들은 필시 독수리 같은 사나운 맹금류를 잡는 명사수들일 것이다.”라고 하며,  

이광은 그 즉시 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세 사람의 흉노인의 뒤를 추격했다.

그때 세 흉노인은 말을 잃어버리고 걸어서 자기 부족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행을 이끌고

수십 리를 달려가 그들을 발견한 이광은 부하들에게 좌우로 날개를 펼치라고 명하고

자신이 직접 세 사람에게 활을 쏘아 두 사람은 죽이고 한 사람은 사로잡아 확인해보니 

과연이 독수리를 사냥하는 명사수들이었다. 흉노의 포로를 결박지어 말에 태우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멀리서 수천으로 보이는 흉노의 기병이 보였다.

그들은 이광 일행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기병을 유인하려는 술책으로 여겨서 모두 경계하며

산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

 

廣之百騎皆大恐,欲馳還走.  廣曰:「吾去大軍數十里,今如此以百騎走,

匈奴追射我立盡.  今我留,匈奴必以我為大軍之誘,必不敢擊我.」 

廣令諸騎曰:「前!」 前未到匈奴陳二里所,止,令曰:「皆下馬解鞍!」

其騎曰:「虜多且近,即有急,柰何?」

廣曰:「彼虜以我為走,今皆解鞍以示不走,用堅其意.」 於是胡騎遂不敢擊.

이광의 일백여 기병들도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말을 달려 도망쳐 본진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이광이 보고 말하기를 : “ 우리의 대군은 수십 리 밖에 있는데 백여 명의 기병으로 도망친다면 

흉노가 우리 뒤를 추격해 활로 우리를 모두 사살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머문다면 흉노는 틀림없이 우리가 대군을 위해 자기들을 유인하려는

부대로 오인하여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이광은 부하 기병들에게 명령하기를 : “ 앞으로 전진하라! ” 라고 하였다. 

이윽고 흉노의 진영 2리 되는 곳에 이르자, 말을 멈추고 다시 명령을 내리기를 :

 “ 모두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라고 하였다.  부하 기병이 묻기를 :

 “ 흉노의 대군이 가까이 있어 사태가 매우 급한데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자.

이광이 말하기를 :  그들은 우리가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말안장을 풀어 달아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가 그들을 유인하기 위한

부대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게 된다.”라고 하였다.  

결국 이광이 생각대로 흉노의 기병은 감히 이광의 부대를 공격하지 못했다.]

 

有白馬將出護其兵,李廣上馬與十餘騎奔射殺胡白馬將,而復還至其騎中,

解鞍,令士皆縱馬臥.  是時會暮,胡兵終怪之,不敢擊.  

夜半時,胡兵亦以為漢有伏軍於旁欲夜取之,胡皆引兵而去.

平旦,李廣乃歸其大軍.  大軍不知廣所之,故弗從.

[그때 백마를 탄 흉노의 장수가 호위병을 이끌고 그들의 진영에서 나왔다.

이광은 10여 기의 기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백마를 탄 장수를 사살하고는 다시 그의 부대로

돌아와 말안장을 풀고 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누워 뒹굴도록 했다. 그때 시간은

일몰 때였는데 흉노의 기병들이 이광의 행동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밤중이 되자 흉노도 역시 이광의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한군의 본대가

자기들을 야습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물러가고 말았다. 

이윽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광은 마침내 본대의 대군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광의 본대에서는 이광의 소재지를 몰랐기 때문에 뒤따라가서 돕지 못했다.]

 

居久之, 孝景崩, 武帝立, 左右以為廣名將也, 於是廣以上郡太守為未央衛尉,

而程不識亦為長樂衛尉.  程不識故與李廣俱以邊太守將軍屯. 

及出擊胡,而廣行無部伍行陳,就善水草屯,舍止,人人自便,

不擊刀鬬以自衛,莫府省約文書籍事,然亦遠斥候,未嘗遇害.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효경제가 죽고 효무제가 새로 섰다.

황제 좌우 사람들이 이광이 명장이라고 천거하자,  

황제는 상군태수로 있던 이광을 불러 미앙궁(未央宮)의 위위(衛尉)15)로 삼았고,  

정불식(程不識)도16) 함께 불려와 장락궁(長樂宮)의 위위가 되었다.  

정불식은 예전에 이광과 마찬가지로 변경 군의 태수와 주둔지의 장군을 겸임한 인물이었다.

그들이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격할 때 이광의 부대는 대오나 진형을 갖추지 않은 채

행군하고 마실 물이 있거나 목초지가 있으면 쉬고 자게 하여 군사들 각자가 스스로 편한 대로

행동하게 했다. 밤이 되어 숙영할 때도 경계를 하기 위해 조두(刁斗)17)도 치지 않게 했다.

또한 막부에서는 각종 문서나 장부 작성도 간소화했다. 그러나 척후병을 멀리 배치하여

적의 동향을 정찰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큰 피해를 당한 적이 없었다.]

 

程不識正部曲行伍營陳, 擊刀鬬, 士吏治軍簿至明, 軍不得休息, 然亦未嘗遇害. 

不識曰:「李廣軍極簡易,然虜卒犯之,無以禁也;而其士卒亦佚樂,

咸樂為之死.  我軍雖煩擾,然虜亦不得犯我.」是時漢邊郡李廣、

程不識皆為名將,然匈奴畏李廣之略,士卒亦多樂從李廣而苦程不識.  

程不識孝景時以數直諫為太中大夫.  為人廉,謹於文法.

[반면에 정불식의 군대는 편제와 대오 및 진영을 세우는 법이 정연하고

밤에는 조두를 쳐서 경계를 엄히 했으며 군리들은 군사들의 공적과 고과를 문서로 작성하고

공문서와 장부등을 다음 날 새벽까지 정리하느라 군사들은 쉴 틈이 없었으나

그들 역시 그때까지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정불식이 말하기를 : “ 이광의 군대는 기율이 지극히 간소하여 적군이 습격한다면 그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군사들 역시 안락하게 지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죽으려고 한다. ​반면에 내가 지휘하는 군대는 비록 번거롭고 성가신 점이 있어도

적들은 감히 우리를 침범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당시 한나라 변경지역을 지키던 이광과 정불식은 모두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흉노는 이광의 군대를 두려워하고 사졸 역시 이광에게 속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정불식을 따르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효경제 때 정불식은 직간을 서슴치 않아

태중대부 18)가 되었다. 그는 청렴하고 조정의 법을 엄격하게 지켰다.]

 

後漢以馬邑城誘單于, 使大軍伏馬邑旁谷, 而廣為驍騎將軍, 領屬護軍將軍. 

是時單于覺之, 去, 漢軍皆無功.  其後四歲, 廣以衛尉為將軍, 出鴈門擊匈奴.

匈奴兵多, 破敗廣軍, 生得廣. 單于素聞廣賢,令曰:「得李廣必生致之.」

胡騎得廣,廣時傷病,置廣兩馬閒, 絡而盛臥廣. 

[그 후 한나라는 마읍(馬邑)19)으로 흉노의 선우를 유인하고, 대군을 마읍 부근의 계곡에

매복시키는 작전을 짰다. 이때 이광은 효기장군(驍騎將軍)20)의 신분으로

호군장군(護軍將軍)21) 한안국의 부대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읍으로 들어오던 선우가 깨닫고 도망치자 한군은 아무도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이광은 위위에서 장군으로 임명되어 안문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흉노가 많은 병력으로 이광이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는 포로가 되었다.  

평소에 이광이 유능한 장군이라는 소식을 듣고 있었던 선우가 부하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 “ 이광을 만나거든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흉노의 기병이 이광을 생포했으나, 그때 그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두 필의 말 사이에

그물망 운구를 만들어 이광을 눕혀서 끌고 갔다.]

 

行十餘里,廣詳死,睨其旁有一胡兒騎善馬,廣暫騰而上胡兒馬,因推墮兒,

取其弓,鞭馬南馳數十里,復得其餘軍,因引而入塞.   

匈奴捕者騎數百追之,廣行取胡兒弓,射殺追騎,以故得脫.  

於是至漢,漢下廣吏.  吏當廣所失亡多,為虜所生得,當斬,贖為庶人. 

[행군하기를 10여 리쯤 했을 때 죽은 채 하고 누워있던 이광이 곁눈질로 살펴보니 자기 곁에

흉노의 한 소년이 좋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광이 별안간 운구에서 몸을 일으켜

흉노 소년이 타고 있는 말에 올라타 그 소년을 밀어 땅에 떨어뜨리고  그가 매고 있던

활과 전통을 빼앗아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남쪽을 향해 달렸다.  

10여 리를 달린 이광은 그의 잔병들을 만나 그들을 이끌고 요새로 들어갔다.

이광을 생포했던 흉노의 기병 수백 기가 그의 뒤를 추격했으나

이광은 흉노 소년에게 빼앗은 활로 추격병을 사살했기 때문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이윽고 한나라 조정은 돌아온 이광을 형리에게 넘겨 심문하도록 했다.

형리는 이광이 많은 부하들을 잃고 자신은 살아서 포로가 되었음으로 참수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광은 속죄금으로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頃之,家居數歲.  廣家與故潁陰侯孫屏野居藍田南山中射獵.  

嘗夜從一騎出,從人田間飲.  還至霸陵亭,霸陵尉醉,呵止廣.  

廣騎曰:「故李將軍.」  尉曰:「今將軍尚不得夜行, 何乃故也!」止廣宿亭下. 

居無何,匈奴入殺遼西太守, 敗韓將軍,後韓將軍徙右北平. 

 於是天子乃召拜廣為右北平太守.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광이 집에 머문 지도 수년이 되었다.

이광은 영음후(潁陰侯)22)의 손자와 함께 은퇴하여 초야에 묻혀 살면서 남전의 남산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다.  한 번은 밤에 말을 모는 시종 한 명만을 데리고 출타하여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돌아다가 패릉정23)에 이르렀다.

그 때에 이곳을 지키던 정위()가 술에 취해 호통을 치며 이광의 통행을 저지했다.

이광의 시종이 말하기를 : “ 이 분은 이광 장군님이십니다.”라고 하자. 

정위가 말하기를 : “ 현직 장군이라도 야간통행은 불가한데 옛날 장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라고 하며. 곧 바로 이광의 통행을 제지시키고, 패릉정 밑에서 밤을 새게 했다.

얼마 후에 흉노가 침입하여 요서태수를 죽이고 재관장군25)의 신분으로 어양에 주둔하고 있던

한안국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니, 한장군은 그 책임을 지고 우북평군의 태수로

전출시켰다. ​그곳에서 한장군이 병사하자, 천자는 이광을 불러 우북평의 태수로 임명했다.]

 

廣即請霸陵尉與俱, 至軍而斬之.  廣居右北平, 匈奴聞之, 號曰「漢之飛將軍」,

避之數歲,不敢入右北平.  廣出獵,見草中石, 以為虎而射之,中石沒鏃,

視之石也.  因復更射之,終不能復入石矣.  廣所居郡聞有虎,嘗自射之. 

及居右北平射虎,虎騰傷廣, 廣亦竟射殺之. 

[이 때에 이광은 황제에게 패릉의 정위도 함께 데리고 갈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패릉의 정위가 군영에 이르렀는데, 이광은 곧바로 그 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윽고 이광이 우북평에 주둔하자 흉노가 듣고,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부르며

몇 년 간을 피해다니며 감히 우북평을 침입하지 못했다.

한 번은 이광이 사냥 나갔다가 풀섶에 바위 하나를 발견했는데 마치 호랑이처럼 보였음으로

활을 쏘았다.  화살이 바위에 맞았는데 화살촉이 보이지 않아 보니 바위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다시 활을 쏴봤으나 아무리 해도 바위에 박히지 않았다.  이광은 부임한 군의

관할 내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항상 스스로 사냥을 나가 활로 쏘아 잡았다.

우북평에서도 호랑이 사냥 중에 호랑이가 이광을 덮쳐 상처를 입었으나 결국 활로 쏘아 죽였다.] 

 

廣廉,得賞賜輒分其麾下,飲食與士共之.  終廣之身,為二千石四十餘年,

家無餘財,終不言家產事.  廣為人長,猨臂,其善射亦天性也,

雖其子孫他人學者,莫能及廣.  廣訥口少言,與人居則畫地為軍陳,

射闊狹以飲.  專以射為戲,竟死.  廣之將兵,乏絕之處,見水,

士卒不盡飲,廣不近水,士卒不盡食,廣不嘗食.

[이광은 청렴하고 상을 받으면 그 즉시 그 부하장수들에게 나누어주고 음식을 먹을 때는

그들과 함께 했다. 이광이 죽을 때는 그가 2천석 녹봉의 관리로 40여 년간을 재직했지만

집에는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으나 시종일관 재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광은 신장이 크고 원숭이 같이 긴 팔을 갖고 있어 그는 천성적으로 활쏘기를 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비록 그의 자손이나 남들이 궁술을 아무리 배워도 이광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이광은 눌변이었음으로 말이 적었다.  사람들과 함께 기거할 때는 땅에 그림을 그려

군진을 표시하고 활쏘기로 원근을 판별하여 지는 자에게 술을 먹였다.

그는 오로지 활쏘기만을 놀이로 취미로 삼아 일생을 마쳤다.  

이광이 장병을 거느리는 방법은 행군 중에 식수와 식량이 떨어진 경우라도

일단 물을 발견하면, 사졸들이 모두 마신 뒤에야 이광도 물을 마시고,

사졸들이 음식을 다 먹기 전에는 이광은 먹지 않았다.]

 

寬緩不苛,士以此愛樂為用.  其射,見敵急,非在數十步之內,

度不中不發,發即應弦而倒.  用此,其將兵數困辱,其射猛獸亦為所傷云.  

居頃之,石建卒,於是上召廣代建為郎中令.

[사졸을 대할 때, 언제나 관대하고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기에 사졸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기꺼이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가 활을 쏠 때는 적이 가까이 다가와 위급하게 되어

수십 보 내에 들어오지 않거나 쏘아도 맞지 않을 것 같으면 쏘지 않았으며, 쏘기만 하면

활시위 소리와 함께 적군은 쓰러졌다. 이 때문에 그는 병사를 거느리고 출격할 때면

자주 곤욕을 치렀고, 그가 맹수를 쏠 때에도 이런 태도 때문에 부상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얼마 후에 낭중령(郎中令) 석건(石建)26)이 죽자,

이에 황제는 이광을 불러 석건을 대신해서 낭중령으로 삼았다.]

 

元朔六年, 廣復為後將軍, 從大將軍軍出定襄, 擊匈奴. 

諸將多中首虜率, 以功為侯者, 而廣軍無功.

後二歲,廣以郎中令將四千騎出右北平, 博望侯張騫將萬騎與廣俱,異道.

行可數百里, 匈奴左賢王將四萬騎圍廣, 廣軍士皆恐, 廣乃使其子敢往馳之.

[원삭 6년(기원전 123년), 이광은 다시 후장군()27)으로 임명되어 대장군 위청이 이끄는

군대를 따라 정양군에서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이 때에 여러 장수들이 적을 참수하거나

생포한 전공을 세워 후()에 봉해졌는데, 이광의 부대는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이광은 낭중령으로 기병 4천을 이끌고 우북평으로 출격할 때 

박망후 장건(張騫)도 일만 명을 거느리고 이광과 함께 출병했는데 서로 다른 길을 취했다.

이광의 부대가 수백 리를 행군했을 때,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4만의 기병으로

이광의 군대를 포위하였으며, 이광의 군사들이 모두 두려움에 당황하자,

이광은 즉시 자신의 아들인 이감()을 적진으로 보냈다.] 

 

敢獨與數十騎馳,直貫胡騎,出其左右而還,告廣曰:「胡虜易與耳.」

軍士乃安.  廣為圜陳外向,胡急擊之,矢下如雨.  漢兵死者過半,漢矢且盡.

廣乃令士持滿毋發, 而廣身自以大黃射其裨將,殺數人,胡虜益解.

會日暮,吏士皆無人色,而廣意氣自如,益治軍.  軍中自是服其勇也.

[이감은 홀로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재빠르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단번에

흉노의 기병의 포위를 뚫고, 적진 좌우로 돌아 나와 이광에게 보고하기를 : 

“ 흉노 오랑캐 따위는 상대하기 너무 쉽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군사들이 비로소 안심했다. 이광은 원형의 진을 치고 모두 밖을 향해 대항토록 했는데,

흉노가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 때 흉노가 이광의 부대로 쏜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이광은 사졸들에게 명하여 화살을 장전한 상태로 유지한 채 쏘면 안 된다는 명을 내리고

자신은 대황(大黃)이라는 쇠뇌로 흉노의 비장을 쏘고 또 몇 명을 쏴서 죽이자,

흉노의 기세가 조금 누구려졌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지친 군관과 병사들은 모두 핏기가 가셔

창백해졌지만 이광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더욱 힘을 내서 군대를

통솔하였다. 이로 인해 군중에서는 이광의 용기에 감탄하며 믿고 따르게 되었다.]

 

明日,復力戰,而博望侯軍亦至,匈奴軍乃解去.  漢軍罷,弗能追.  

是時廣軍幾沒,罷歸.  漢法,博望侯留遲後期,當死,贖為庶人. 

廣軍功自如,無賞.   初,廣之從弟李蔡與廣俱事孝文帝. 

景帝時,蔡積功勞至二千石.  孝武帝時,至代相.

以元朔五年為輕車將車,從大將軍擊右賢王,有功中率,封為樂安侯.

[다음날 다시 온 힘을 다해 싸우던 중에 박망후의 군대가 당도했음으로 흉노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때 한나라 군사들은 지쳤음으로 흉노의 군사들 뒤를 쫓을 수 없었다.  

그 때 이광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기 직전에서 싸움이 끝나 귀환했다.  

한나라 법에는 박망후가 약속한 기일에 늦게 당도한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이광의 군대는 공적과 과실이 반반이라 포상은 없었다. 

처음에 이광은 그의 사촌 동생 이채와 함께 효문제를 모셨다.

경제 때에 이채는 공적을 쌓아 2천석의 봉록을 받게 되는 지위에 올랐다. 효무제 때는

대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이채는 이어 원삭(元朔) 5년에는 경거장군(輕車將軍)이 되어

대장군 위청의 원정에 참여하면서,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을 공격하여 세운 공로로

락안후(樂安侯)에 봉해졌다.]

 

元狩二年中,代公孫弘為丞相.  蔡為人在下中,名聲出廣下甚遠,

然廣不得爵邑,官不過九卿,而蔡為列侯,位至三公. 

諸廣之軍吏及士卒或取封侯.  廣嘗與望氣王朔燕語,

曰:「自漢擊匈奴而廣未嘗不在其中, 而諸部校尉以下, 才能不及中人, 

然以擊胡軍功取侯者數十人,  而廣不為後人,然無尺寸之功以得封邑者,

何也? 豈吾相不當侯邪?且固命也?」

[원수 2년(기원전 121년), 이채는 공손홍(公孫弘)의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다.

당시 이채의 인품에 대한 평가는 하품에서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정도였고,

명성도 이광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그러나 이광은 작위에 따르는 식읍을 얻을 수 없었고

관직도 구경을 넘지 못했으나 이채는 열후에 봉해졌고 관직은 삼공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이광의 부대에 종군했던 군리와 사졸들 중에도 후에 봉해진 사람도 있었다.

일찍이 이광은 운기(雲氣)를 보고 길흉을 점쳤던 유명한 점성가 왕삭이라는 사람에게 묻기를 :  

“ 한나라가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그 현장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소.

그런데 재능이 중간에도 못 미치는 여러 부대의 교위(校尉) 이하의 장졸들이 흉노의 군대를

공격하여 군공을 세워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수십 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나는 남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아닌데도 봉읍()을 얻을만한 작은 공마저 없는 것은

무슨 원인입니까? 설마 나의 관상이 제후로 적합하지 않아서요?

아니면 이미 정해진 내 운명 탓이오?”라고 하자.]

朔曰:「將軍自念,豈嘗有所恨乎?」 

廣曰:「吾嘗為隴西守, 羌嘗反,吾誘而降,降者八百餘人, 吾詐而同日殺之.

至今大恨獨此耳.」  朔曰:「禍莫大於殺已降,此乃將軍所以不得侯者也.」 

二歲,大將軍、驃騎將軍大出擊匈奴, 廣數自請行.  

天子以為老,弗許;良久乃許之,以為前將軍.  是歲,元狩四年也. 

[왕삭이 대답하기를 : " 장군께서는 한 번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일찍이 원한을 살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으셨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광이 말하기를 : “ 내가 옛날 농서태수로 있을 때 반란을 일으켰던 강족(羌族)을 유인하여

항복을 받았는데 모두 8백 명에 달했소. 내가 그들을 속여 같은 날 모두 죽였소.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한스럽게 생각하는 일이오.”라고 하자.

왕삭이 말하기를 : " 항복한 사람을 죽여서 받는 화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 일 때문에서 장군께서는 후(侯)의 작위를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2년 후에 대장군과 표기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흉노를 공격할 때

이광도 같이 출전할 것을 청했다. 천자는 이광이 늙었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참 후에 허락하고는 전장군(前將軍)에 임명했다.  

이 해가 원수(元狩) 4년(기원전 119년)의 일이었다.]    

廣既從大將軍青擊匈奴,既出塞, 青捕虜知單于所居,乃自以精兵走之,

而令廣并於右將軍軍. 出東道.  東道少回遠,而大軍行水草少,其勢不屯行.  

廣自請曰:「臣部為前將軍, 今大將軍乃徙令臣出東道, 且臣結發而與匈奴戰,

今乃一得當單于, 臣願居前, 先死單于.」 

大將軍青亦陰受上誡,以為李廣老,數奇,毋令當單于,恐不得所欲.

[이광이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여 멀리 변방으로 나간 뒤에

위청은 흉노의 포로를 잡아서 심문 끝에 선우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자신이 직접 정병을 이끌고

가면서 이광에게 우장군 조이기(趙食其)의 부대와함께 동쪽 길로 출병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동쪽의 길은 좁고 멀리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대군이 행군하기에는 식수와 풀이 부족하여 

주둔하거나 행군하기에도 그 형세가 어려웠다. 이광이 대장군을 찾아가 말하기를 : 

“ 신의 부서는 전장군 임에도 지금 대장군께서는 저의 부대를 동쪽의 길로 돌아서 나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흉노와 싸워 왔습니다. 오늘에서야 마침내 선우와 직접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원컨대 신이 선봉에 나서서 가장 먼저 선우와 싸우다가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장군 위청도 이미 황제로부터 이광은 연로하고

운수가 기구하여 선우와 대적하게 하면 안 될 것이며,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그가 직접 출전하는 것을 만류하라는 훈계를 받았다.]

 

而是時公孫敖新失侯,為中將軍從大將軍,大將軍亦欲使敖與俱當單于,

故徙前將軍廣.  廣時知之,固自辭於大將軍. 

大將軍不聽,令長史封書與廣之莫府, 曰:「急詣部,如書.」

廣不謝大將軍而起行, 意甚慍怒而就部, 引兵與右將軍食其合軍出東道. 

軍亡導, 或失道, 後大將軍.

[이때 공손오는 제후의 작위를 상실하고 중장군으로 강등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다시 전공을 세우길 간절하게 원했다. 대장군도 공손오로 하여금 자기와 더불어 선우를

대적하게 했기 때문에 전장군 이광의 임무을 바꾸어 선우와 직접 대결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광은 당시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으나, 친히 대장군에게 결전의 의사를 표시를 하고

임무를 바꾸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대장군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장사()에게

명령서를 이광의 막사로 보내어  말하기를 :

" 서둘러서 소속 부대로 가서 명령서의 지시대로 따르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이광은 대장군에게 작별인사도 드리지 않고 출발했다. 그는 매우 격노하면서

자신의 부대에 돌아가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우장군 조이기의 군대와 더불어 동쪽 길로 진군했다.

그러나 군대의 길을 인도하는 자가 없어서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가

대장군이 정한 기일을 어기게 되었다.]

 

大將軍與單于接戰,單于遁走,弗能得而還.  南絕幕,遇前將軍、右將軍.

廣已見大將軍, 還入軍.  大將軍使長史持糒醪遺廣, 因問廣、食其失道狀,

青欲上書報天子軍曲折.  廣未對,大將軍使長史急責廣之幕府對簿. 

廣曰:「諸校尉無罪,乃我自失道.  吾今自上簿.」

[대장군은 선우의 군대와 교전했으나 선우가 도주해 버리자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고 있었다.  사막의 남쪽에서 전장군과 우장군의 군사와 만났다.

이광이 대장군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왔다.

대장군은 장사를 시켜 건량과 탁주를 보내고 이광과 조이기에게 길을 잃은 이유를 물어보게 했다.  

위청은 천자에게 이광과 조이기가 길을 잃은 곡절을 서장으로 만들어 보고하려고 했으나

이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장군은 장사를 파견하여 이광의 군영에서 장부를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하는 교위를 소환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광이 말하기를 : “ 여러 교위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길은 잃은 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직접 가서 심문을 받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다.] 

 

至莫府,廣謂其麾下曰;「廣結發與匈奴大小七十餘戰,

今幸從大將軍出接單于兵,而大將軍又徙廣部行回遠,而又迷失道,

豈非天哉! 且廣年六十餘矣,終不能復對刀筆之吏.」

遂引刀自剄.  廣軍士大夫一軍皆哭.  百姓聞之,知與不知,無老壯皆為垂涕.

而右將軍獨下吏,當死,贖為庶人.

[이광이 막사로 돌아와서 자기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 "  

“ 나는 젊을 때부터 흉노와 싸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대소 70여 회의 전투를 벌였다.  

지금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선우의 군사들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대장군은 또 나의 임무을 바꿔서 부대를 멀리 돌아 행군하도록 했고, 

결국은 행군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란 말인가?

60 평생을 살아온 내가 일개 도필리에게 모욕을 당할 수 없다."라고 하며.

즉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광의 부하 관리와 모든 군사들은

모두 대성통곡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이광을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노인이건

청년이건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결국 우장군 혼자 형리에 넘겨져 사형을 판결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廣子三人, 曰當戶, 椒, 敢, 為郎.  天子與韓嫣戲, 嫣少不遜, 當戶擊嫣,嫣走.  

於是天子以為勇.  當戶早死,拜椒為代郡太守,皆先廣死. 

當戶有遺腹子名陵.  廣死軍時,敢從驃騎將軍. 

廣死明年, 李蔡以丞相坐侵孝景園壖地, 當下吏治, 蔡亦自殺, 不對獄, 國除.

李敢以校尉從驃騎將軍擊胡左賢王,力戰,奪左賢王鼓旗,斬首多,

賜爵關內侯,食邑二百戶.  代廣為郎中令.

[이광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당호、초(椒)、감(敢)으로 모두 낭관이 되었다.  

천자와 후비 한언이 놀고 있는데 나이가 어린 한언이 불손하자 당호가 한언을 때렸음으로

한언은 도망쳤다.  천자는 당호가 용기가 있다고 칭찬했다. 당호가 젊어서 죽자 천자는 이초를

대군태수로 삼았으나 모두 이광보다 먼저 죽었다. 당호에게 이릉(李陵)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광이 군중에서 자살할 때 막내아들 이감은 표기장군 곽거병의 부대에서 종군하고 있었다.

이광이 죽은 다음 해에 승상의 자리에 있었던 이광의 사촌동생인 이채는 효경제의

능원 담장 밖에 있는 빈 땅을 침범한 죄로 형리에게 넘겨져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채는 자살하여 심문을 받지 않아 그의 봉국은 몰수 되었다.

이감이 교위의 신분으로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종군하여 흉노의 좌현왕과 싸울 때 

좌현왕의 북과 깃발을 빼앗고 적의 수급을 많이 베었다. 이감은 그 공로로 관내후에 봉해지고 

2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이감은 이광의 직을 이어 낭중령에 임명되었다.]

 

頃之,怨大將軍青之恨其父,乃擊傷大將軍,大將軍匿諱之. 

居無何,敢從上雍,至甘泉宮獵.  驃騎將軍去病與青有親,射殺敢.  

去病時方貴幸,上諱云鹿觸殺之.  居歲餘,去病死.

而敢有女為太子中人,愛幸,敢男禹有寵於太子,然好利, 李氏陵遲衰微矣.

​[그리고 얼마 후에 이감은 부친에 대한 대장군의 행위에 원한을 품고 마침내 대장군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혔으나, 대장군은 그 사실이 알려질 것을 꺼려해서 숨겼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감이 사냥을 위해 옹현의 감천궁으로 행차한 황제를 따라 갔을 때 

위청의 생질이었던 표기장군 곽거병은 이감이 위청을 공격했던 사실을 알고 괘씸하게

여겨서 활로 쏘아 죽였다. 그때 곽거병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매우 귀한 신분이었음으로

황제는 사실을 감추고 이감은 사슴에 받쳐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곽거병은 병이 들어 죽었다.

이감에게 딸이 있었는데, 태자의 중인()31)이 되어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감의 아들인 이우()도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이익만을 탐하여

이씨 가문은 차츰 쇠락하고 말았다.] 

 

李陵既壯,選為建章監,監諸騎.  善射,愛士卒.  天子以為李氏世將,

而使將八百騎.  嘗深入匈奴二千餘里,過居延視地形,無所見虜而還.

拜為騎都尉,將丹陽楚人五千人,教射酒泉、張掖以屯衛胡.

​[이당호의 아들 이릉이 자라 청년이 되자 건장감(建章監)32)으로 뽑혀 기랑(騎郞)들을 감독했다.  

이릉은 활쏘기에 능하고 사졸들을 사랑했다. 천자는 이씨들이 대를 이어 장수를 배출했음으로 

이릉의 직위를 올려 8백 명의 기랑을 지휘하도록 했다. 한 번은 흉노의 땅 깊숙이 2천여 리를

들어가 거연택33)을 지나 지형을 살폈으나 흉노의 무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황제는 이릉을 기도위에 임명하고 단양 출신의 초나라 출신의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그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쳐 주천(酒泉)과 장액(張掖)34)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을 막게 했다.]

  

數歲,天漢二年秋,貳師將軍李廣利將三萬騎擊匈奴右賢王於祁連天山,

而使陵將其射士步兵五千人, 出居延北可千餘里,欲以分匈奴兵,

毋令專走貳師也.  陵既至期還,而單于以兵八萬圍擊陵軍.  

陵軍五千人,兵矢既盡,士死者過半,而所殺傷匈奴亦萬餘人.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년) 가을, 이사장군 이광리(李廣利)35)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기련산과 천산으로 나아가 흉노 우현왕의 군대를 공격할 때 이릉에게 

휘하의 보졸로 이루어진 궁사 5천 명을 이끌고 거연의 북쪽 1천여 리를 진군하도록 했다.

이는 흉노의 군사들을 분산시켜 이사장군의 본대에 집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릉은 약정한 철수 기일이 되어서 퇴각하려고 할 때에 선우의 8만에 달하는 기병이 

이릉의 부대를 포위했다. 이릉의 군대는 5천 명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화살도 바닥이 나고

전사자도 이미 반이 넘었지만 사살한 흉노의 기병들도 만여 명이 넘었다.]

 

且引且戰, 連鬬八日, 還未到居延百餘里, 匈奴遮狹絕道, 陵食乏而救兵不到,

虜急擊招降陵.  陵曰:「無面目報陛下.」遂降匈奴. 

其兵盡沒,餘亡散得歸漢者四百餘人.  單于既得陵, 素聞其家聲, 及戰又壯,

乃以其女妻陵而貴之.  漢聞,族陵母妻子.

自是之後,李氏名敗,而隴西之士居門下者皆用為恥焉. 

 

[한편으로 후퇴하고 한편으로는 싸움을 하면서 8일 간을 계속해서 전투를 벌였으나

거연에 당도하기에는 아직 1백여 리나 남아 있었다. 흉노가 좁은 길목을 막자

이릉 군대는 양식이 떨어지고 구원병마저도 오지 않았다.

흉노가 이릉의 부대를 급하게 몰아 부치면서 항복을 권하자 이릉이 말하기를 : 

"무슨 면목으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마침내 흉노에 항복했다.

그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고 한나라에 돌아갈 수 있었던 자는 4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릉을 얻은 선우는 평소에 이씨 가문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고 또한 싸움에 임해서도

용감했음으로 그의 딸을 이릉에게 주어 사위로 삼아 귀하게 대했다.

한나라가 소식을 듣고 이릉의 모친과 처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이 일이 일어난 이후로 이씨들의 명성은 모두 사라지고, 이씨 집안의 문객으로 있었던

농서(西) 일대의 사대부들은 모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太史公曰:

傳曰:「其身正,不令而行;其身不正,雖令不從.」其李將軍之謂也? 

余睹李將軍悛悛如鄙人,口不能道辭.  及死之日,天下知與不知,皆為盡哀.

彼其忠實心誠信於士大夫也?  諺曰「桃李不言,下自成蹊」.

此言雖小,可以諭大也. 

 

[태사공이 말한다.  

“ 옛말에 전하기를 '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지며,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린다 해도 따르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말은 이광장군을 말하는 바가 아닌가?  내가 이장군을 본 적이 있는데

후덕한 모습이 순박한 시골사람 같았으며 말투는 약간 더듬거렸다.

그가 죽었을 때, 천하는 그를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간에 모두 진심으로 애통했다.

그의 충실한 마음이 사대부들에게 진실로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속담에「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어도, 그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기는 법이다」했다.

이 말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큰 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뜻이다.]  

  

【 각주 】  

1)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진안현(秦安縣)이다.

2) 이신(李信)/ 진나라 때 장군으로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괴리(槐里)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건장하고 용기가 있었다. 일찍이 군사를 이끌고 수천 리를 행군하여

    연나라 태자단을 연수(衍水) 강안까지 추격했다.  

    연수는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와 요양시를 지나 영구시에서 발해에 유입되는 태자하다.

    결국 이신은 연군을 격파하고 태자단을 사로잡아 시황으로부터 현능하고 용기가 있는

    장군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진시황은 그에게 20만의 대군을 주어 초나라 정벌군 대장에

    임명했다. 처음에 초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기세가 오른 이신은 교만하여 적을 가볍게 보아

    싸움에 대패하고 말았다.  

    진시황은 어쩔 수 없이 왕전을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3) 괴리(槐里)/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이다.

4) 소관(蕭關)/ 지금의 영하성 고원현(固原縣) 동남에 있었던 옛날부터 색북(塞北)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5) 중랑(中郞)/ 지금의 영하성 고원현 동남에 있었던 관문으로 옛날부터 색북(塞北)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6) 무기상시(武騎常侍)/ 중랑에서 선발된 황제를 호위하는 호위기병이다.

7) 농서(隴西)/지금의 감숙성 청수현(靑水縣)과 임조현(臨洮縣) 일대를 관할했던 군명으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설치했다. 촉(蜀)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며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이다.  

8) 도위(都尉)/ 전국 때 처음으로 시작되어 진과 한나라가 답습한 무관직으로 고위 무장 밑의

    중급무관이었다.  진과 한나라 초에는 그 직위는 교위(校尉) 보다 낮았으며 관명은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예를 들면 호군도위, 부마도위, 강노도위(强駑都尉) 등으로 호칭되었다.  

    한나라 때의 봉록은 2천 석이었다. 한경제 때 군위(郡尉)의 명칭을 도위(都尉)로 바꾸고

    군수의 보좌하여 군사의 일을 관장토록 했다. 한무제 때 다시 관도위, 농도위, 속국도위 등을  

    전국의 요지에 관에 설치했다. 봉록은 모두 비 2천석이었다.  

9) 기랑장(騎郞將)/ 외랑장의 별칭으로 진나라와 한초에 황제의 호위기마부대의

    기병을 관장하고 충원했다.  봉록은 비2천석이다.  

10) 창읍(昌邑)/ 양나라의 성읍으로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鄕縣) 서북쪽에 있었다.

11) 이광이 싸운 장소는 양나라 경내였음으로 이에 양왕이 이광의 공을 높이 사서

      이광을 장군에 임명했으나 이는 하나라 중앙정부의 법률을 위반한 제후왕의 월권행위였다.

      때문에 이광이 개선 후에 그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상을 내리지 않았다.

      양왕의 월권행위로 인해 이광이 피해를 본 것이다.  

12) 상곡(上谷)/ 지금의 북경시 북쪽에서 장성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했던 군으로

      흉노와 접촉이 잦았던 지역이었다.

13) 전속국(典屬國)/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제로 한무제 때

      도위(都尉), 승(丞), 후(候), 천인(千人) 등의 속관을 두어 기구를 확장했다.

      한성제(漢成帝) 원년(전 28) 대홍려(大鴻臚)에 합병되었다.  

      소수민족의 이민이나 귀항 및 조공 등의 일을 관장했다.

      봉록은 중이천석이고 열경(列卿)의 지위였다.  

14) 중귀인(中貴人)/ 궁중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환관을 말한다.

15) 위위(衛尉)/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명으로 9경의 일원이다.

      봉록은 중2천석이다. 궁중의 위병을 지휘하고 궁내의 숙위를 관할했다.

      한경제 초에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다시 위위로 환원시켰다.  

16) 정불식(程不識)/ 서한의 명장으로 한경제 때 이광과 함께 한나라의 북쪽 변경지역의

      태수로 있으면서  여러 번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부하 사병들을 매우 엄격히

      다뤘음으로 사병들과 함께 생활하여 군기를 관대하게 적용했던 이광과 비교되었다.  

17) 조두(刁斗)/ 군대가 행군할 때 낮에는 솥으로 사용하고 밤에는 야경을 돌며 소리를 내어

      신호로 삼았다.

18) 태중대부(太中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으로 조정의 공론과 고문에

      응하는 직책으로 일정한 일이 없이 황제의 명이 있을 때에 한하여 업무를 보았다.

      궁중에 기거하면서 명의상으로는 낭중령(郎中令 :궁중의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광록훈의 지휘를 받지 않고  황제의 고급 참모 역할을 했다.

      봉록은 1천석으로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으로 불리며  

      황제의 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영향력과 권력이 매우 컸다.  

19) 마읍(馬邑)/ 지금의 산서성 삭현(朔縣)으로 한나라 초에 한왕 신(信)이 도읍으로 삼았다가  

      후에 흉노에게 항복할 때 바쳐 흉노의 땅이 되었다.

      후에 한나라가 한신을 토벌하고 마읍을 되찾았다.  

20) 효기장군(驍騎將軍)/ 한무제 원광 2년에 설치한 잡호(雜號) 장군으로

      그 직위는 경(卿)에 해당했다.

21) 호군장군/ 원광 2년에 한무제가 설치한 무관직으로 잡호장군 중 수석이었다.  

22)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손자 관강(灌强)이다.  

23) 패릉(覇陵)/ 한문제의 능으로 지금의 서안시 동쪽 교외의 백록원(白鹿原)에 조성하고  

      이 능의 관리를 위해 현을 설치했다.  

24) 재관장군(材官將軍)/ 한무제가 임시로 설치한 잡호장군의 하나로 활쏘기가 특기인 군사로

      편성된 특종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이다.  

25) 한안국(韓安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7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며 장군이다.  

      자는 장유(长孺)고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인 양국(梁國) 성안(成安) 출신이다.

      처음에 한경제의 동모제인 양효왕 유무(劉武)에게 출사하여 중대부가 되었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장우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힘껏 싸워 반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았다.

      계속해서 양나라의 내사(內史)로 전임되었다가 무제 건원(建元) 연간에 경사에 불려가

      북지군의 도위가 되었다.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대사농이 되었다가 어사대부로 승차했다.

      원광(元光) 2년 기원전 133년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마읍에서 흉노를 무찔렀다.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재관장군(材官將軍)이 되어 어양에 주둔하며 흉노를 막았다.

      일찍이 흉노의 포로를 잡았음으로 흉노는 멀리 도망가 숨었다고 생각하여 상서를 올려

      어양의 둔전병들을 해산시키겠다고 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흉노가 대거 상곡과 어양을

      침입하여 한군이 크게 패했다. 후에 우북평으로 임지를 옮겼다가 울분에 차서 죽었다.  

      그에 관한 열전의 제목을 한장유로 한 것은 사마천이 그의 스승 공안국의 이름을 휘했기

      때문이다.  

26) 석건(石建)/ 열전43. 만석장숙열전 참조

27) 후장군(後將軍)/ 고대 중국의 군대 편제는 중군, 좌군, 우군 등의 삼군으로 구성되어

      중군대장이 원수가 되어 전체 군사를 지휘하고 좌군과 우군은 그를 보좌했다.

      후에 좌우 대신 전후로 바뀌었다. 직위는 상경과 같고 금인자수(金印紫綬)를 사용했다.  

28) 경거장군(輕車將軍)/ 한무제가 설치한 잡호장군의 하나로 전차부대를 통솔했다.

      직위는 열경(列卿)에 준했다.

29) 조이기(趙食其)/ 서한의 장군으로 지금의 섬서성 요현(耀縣)인 대우(祋祤) 출신이다.  

      무제 때 주작도위(主爵都尉)에 임명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 정벌전에 참가하여

      세운 군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원수 4년 다시 우장군의 신분으로 위청을 따라 종군하여 정양(定襄)에서 출격했을 때 

      길을 잃었음으로 군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후의 작위를 잃고

      서인이 되었다.  

30) 공손오(公孫敖)/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93년에 죽은 서한의 장군이다.  

      지금의 감숙성 합수현(合水縣)인 북지군(北地郡) 의거(義渠)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해 기마술과 사격술에 뛰어났다. 

      한경제 때 양가의 자제 신분으로 흉노정벌전에 참전하여 용기와 무예를 드러냈음으로

      궁중으로 불려가 기랑(騎郞)이 되었다. 후에 한무제를 모시다가 위청과 친구가 되었다.

      위청이 평양공주의 가인들에게 잡혀가 감옥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 구한 적도 있었다.

      관직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올랐다.  

      원광(元光) 6년(전129년) 기장군(騎將軍)에 임명되어 거기장군 위청과 함께 길을 나누어  

      흉노를 공격했으나 휘하의 군졸들을 대부분 잃었다.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무용을 발휘하여 힘껏 싸운 것이 인정되어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원삭(元朔) 5년 (전124) 교위로 기용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종군하여 흉노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합기후(合騎侯)에 봉해졌다.

      다음 해에 중장군(中將軍)이 되어 위청을 따라 흉노를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원수(元狩) 2년 (전121년) 곽거병과 길을 나누어 흉노를 공격하기로 했으나 중도에

      길을 잃어 곽거병과의 약속한 기일을 지키지 못해 참수형의 판결을 받았다.

      다시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다시 얼마 후에 교외로 기용되어 태초(太初) 원년(전 104년) 인우장군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음산(陰山)의 북쪽에 수항성(受降城)을 건설했다.

      천한(天漢) 4년(전97) 이광리(李廣利)와 함께 길을 나누어 흉노를 치다가

      흉노의 좌현황의 주력부대를 만나 많은 군사를 잃었음으로 참수형을 선고 받고  

      옥에 갇혔으나 자살을 위장하여 도망쳐 민가에 숨어 살다가 발각되어

      태시(太始) 4년(전 93년)에 사형에 처해졌다.  

31) 중인(中人)/ 위호(位號)를 받지 못한 궁중의 희첩이다.  

      당시의 태자는 후에 일어난 무고(巫蠱)의 난으로 살해된 유거(劉據)였다.  

32) 건장감(建章監)/ 건장궁의 우림군(羽林軍)의 소속인 기랑(騎郞) 들을 감독하는 관리다.  

      건장궁은 무제 때 장안성 내의 미앙궁 서쪽의 맞은편에 건립한 궁전이다.  

33) 거연택(居延澤)/ 지금의 내몽고 최서단의 액제납기(額濟納旗) 북쪽에 있었던 호수 이름으로  

      거연수(居延水)의 물이 흘러들어가 형성된 데서 얻은 이름이다.  

34) 주천(酒泉)과 장액(張掖)/ 모두 감숙성 내의 성읍이다. 한나라는 실크로도의 무역로를

      지키기 위해 감숙성의 하서회랑에 주천군, 장액군, 돈황군 등을 설치해 운영했다.  

35)이광리(李廣利)/ 궁정의 악인(樂人)인으로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이부인(李夫人)의 오빠로

     이부인이 창읍왕(昌邑王) 유박(劉髆)을 낳자 장군이 되었다.

      BC 104년 장건(張騫)의 원정으로 사정이 알려진 서역 대완(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이사장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4년간 고전하면서도 대완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어

     그 공로로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여졌다.

     그후 이부인이 죽은 후에 흉노와의 싸움에 패한 후 항복했다가 선우에 의해 살해당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