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田叔列傳

第 四十四. 田叔列傳(전숙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4. 16:00

 

​      第 四十四.  田叔列傳(전숙열전) 

田叔者,趙陘城人也.  其先,齊田氏苗裔也.  叔喜劍,學黃老術於樂巨公所.

叔為人刻廉自喜,喜游諸公. 趙人舉之趙相趙午,午言之趙王張敖所,

趙王以為郎中.  數歲,切直廉平,趙王賢之,未及遷.

[전숙(田叔)이라는 사람은 조나라 형성(陘城)1)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제나라 전씨들의 후예다.

전숙은 검술을 즐겨했고 황제()와 노자()의 학술을 악거공(樂巨公)에게 배웠다.

전숙이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렴했으며 이를 스스로 즐겨하며 여러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조나라 사람들이 전숙을 조나라의 재상 조오(趙午)에게 천거하자,

조오는 조왕 장오(張敖)에게 전숙을 천거하여 조왕이 전숙을 랑중으로 삼았다.

몇 년 동안 재직하면서 매사 진지하고 솔직했으며 청렴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했다.

그래서 조나라 왕은 그를 어질게 여겨 눈여겨 보았지만 미처 그의 자리를 옮겨주지 않았다.]

 

會陳豨反代,漢七年,高祖往誅之,過趙,趙王張敖自持案進食,

禮恭甚,高祖箕踞罵之.  是時趙相趙午等數十人皆怒,

謂張王曰:「王事上禮備矣,今遇王如是,臣等請為亂.」 

趙王齧指出血,曰:「先人失國,微陛下,臣等當蟲出.  

公等柰何言若是!毋復出口矣!」

於是貫高等曰:「王長者,不倍德.」

[진회가 대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한 7년(기원전 200년),

고조가 직접 가서 베고 조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조왕 장오가 몸소 상을 바쳐들고 음식을 내오는데 그 태도가 매우 공손했으나

고조는 두 다리를 벌려 앉으면서  조오에게 심한 언사를 퍼부었다.

당시 조나라 재상 조오 등 십수 명이 보고 모두 분노하며 조왕에게 말하기를 :  

" 왕께서는 극진한 예를 다하여 황제를 받들어 모셨는데 지금 황제께서 이와 같이

왕을 푸대접한다면 청하건대 신 등이 반정을 일으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왕이 손가락을 깨물에 피를 흘리며 말하기를 : " 선부가 잃은 나라를 폐하께서 찾아주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시체에서는 구더기기 끓고 있었을 것이오.  

공들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다시는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마시오!"하자.  

이에 관고(貫高) 등이 듣고 말하기를 : " 조왕께서는 덕망이 깊은 장자이시니,

황제의 은덕에 배반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卒私相與謀弒上.  會事發覺,漢下詔捕趙王及群臣反者.  

於是趙午等皆自殺,唯貫高就系.

=1是時漢下詔書:「趙有敢隨王者罪三族.」

唯孟舒、田叔等十餘人赭衣自髡鉗,稱王家奴,隨趙王敖至長安.  

貫高事明白,趙王敖得出,廢為宣平侯,乃進言田叔等十餘人.

上盡召見, 與語, 漢廷臣毋能出其右者, 上說, 盡拜為郡守、諸侯相.

[그래서 결국 그들만 비밀리에 서로 모의 하여 황제를 시해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그들의 거사가 발각되자,  

한나라 조정은 조칙을 내려 조왕과 반란을 주도한 조나라의 신하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했다.  

조오 등은 모두 자살했으나 관고 만이 홀로 죽지 않고 체포되었다. 그때 한나라 조정이

조서를 내리기를 :  " 조나라에 감히 왕을 따라 나선자가 있다면 3족을 멸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독 맹서(), 전숙() 등 10여 명이 검붉은 흙색의 죄수복을 걸치고,

자발적으로 머리를 깎고 목에 쇠칼을 채워서 조왕의 집 노비라고 칭하면서

조왕 장오를 따라서 장안()에 이르렀다.

관고 등의 모반사건이 조왕과는 무관한 것이 명백해지자 조왕 장오는 석방되었으나

왕에서 폐위당하고 선평후()로 강등되었다.  

장오가 황제에게 전숙 등 10여 명의 충신들을 선처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황제는 그들을 가상하게 여겨 모두 불러 접견하고 그들과 담화를 나누고 나서, 

한나라 조정 신하들 중에 그들과 비교해서 뛰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그들을 모두 군수나 혹은 제후국(侯국)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叔為漢中守十餘年, 會高后崩,諸呂作亂,大臣誅之,立孝文帝.

孝文帝既立,召田叔問之曰:「公知天下長者乎?」

對曰:「臣何足以知之!」 上曰:「公,長者也,宜知之.」 

叔頓首曰:「故雲中守孟舒,長者也.」

是時孟舒坐虜大入塞盜劫,雲中尤甚,免.

[전숙이 한중 태수가 된 지 10여 년이 되었을 때, 고후가 죽자 여러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의 대신들이 힘을 합쳐 그들을 토벌한 후에 효문제()를 옹립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문제가 전숙을 소환하여 묻기를 : "   

" 공이 천하의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라고 하자.

전숙이 대답하기를 : " 신이 어떻게 덕망이 높은지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 " 공이 바로 덕망 있는 장자이니 마땅히 안다고 생각하오."라고 하자.

전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 운중(雲中) 태수 맹서(守孟)야 말로 장자입니다."하였다.

그때 맹서는 흉노가 대거 장성을 넘어 침입해 약탈했는데 그 중 운중이 더욱 심했다는 이유로

태수직에서 면직된 상태에 있었다.]

 

上曰:「先帝置孟舒雲中十餘年矣,虜曾一人,孟舒不能堅守,

毋故士卒戰死者數百人. 長者固殺人乎?公何以言孟舒為長者也?」 

[황제가 묻기를 : " 선제께서 맹서를 운중태수로 임명하여 10여 년을 두고 보셨는데

흉노가 한 번 침입하자 맹서는 굳게 지키지도 못하고 또한 전사한 사졸들이 수백 명이었소. 

장자가 어찌 그 부하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공은 무슨 이유로 맹서를 장자라고 말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叔叩頭對曰:「是乃孟舒所以為長者也.  夫貫高等謀反, 上下明詔,

趙有敢隨張王,罪三族.  然孟舒自髡鉗,隨張王敖之所在,

欲以身死之,豈自知為雲中守哉! 漢與楚相距,士卒罷敝.

匈奴冒頓新服北夷,來為邊害,孟舒知士卒罷敝,不忍出言,

士爭臨城死敵,如子為父,弟為兄,以故死者數百人.  

孟舒豈故驅戰之哉!是乃孟舒所以為長者也.」

[전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 "그래서 맹서를 장자라고 했습니다.

무릇 관고 등이 모반을 일으켰을 때 황제께서 조칙을 내려 조나라에 만약

조왕 장오를 따르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맹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차꼬를 찬 채로 조왕이 있는 경사로 들어와 몸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어찌 자신이 죽음을 면하고 운중태수가 될 줄 알았겠습니까?

한과 초가 서로 대치했음으로 사졸들이 모두 지쳐있는 정황 하에서 흉노 묵돌(冒頓)이

북이(北夷)를 새로이 정벌하여 복종시킨 여세를 몰아 우리의 변경을 침범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명을 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졸들은 서로 다투어 성에 의지하여 죽을 힘을 다해 

아버지를 위한 자식처럼, 형을 위한 동생처럼 싸웠음으로 전사자가 수백 명이 발생했습니다.  

맹서가 어찌 병사들에게 억지로 싸움을 하라고 시켰겠습니까? 

그런 연유로 맹서를 장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하였다.]

 

於是上曰:「賢哉孟舒!」復召孟舒以為雲中守.

後數歲,叔坐法失官.  梁孝王使人殺故吳相袁盎, 景帝召田叔案梁,

具得其事,還報.

景帝曰:「梁有之乎?」 叔對曰:「死罪!有之.」

上曰:「其事安在?」 田叔曰:「上毋以梁事為也.」

上曰:「何也?」

曰:「今梁王不伏誅,是漢法不行也;如其伏法, 而太后食不甘味,

臥不安席,此憂在陛下也.」 景帝大賢之,以為魯相. 

[이에 황제가 말하기를 : " 아, 맹서는 참으로 어질었도다!"하며, 

황제는 맹서를 불러 다시 운중태수로 삼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전숙은 법에 저촉되어 관직을 잃었다.  양효왕이 자객을 시켜 

오나라 승상 원앙(袁盎)을 살해하자, 경제가 전숙을 불러 양나라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알아오라고 시켰다. 전숙이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아가지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경제가 묻기를 : " 양왕이 자객을 보내 원앙을 암살했다는 것이 사실인가?”라고 하자.

전숙이 대답하기를 : "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양왕이 그 일을 저질렀음은 사실이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 그 사건의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자. 

전숙이 대답하기를 : " 폐하께서는 양왕의 일을 지나치게 간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 어찌하여 그렇소?"라고 하자. 

전숙이 대답하기를 : " 지금 만일 양왕을 주살하지 않는다면 한나라의 법은 유명무실해지고,

만일 법대로 양왕을 주살한다면 태후께서 식사를 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또한 침상에

들어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실 것이니, 이는 폐하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제는 전숙을 매우 어질게 여겨서 그를 노나라 승상으로 삼았다.]

 

魯相初到,民自言相,訟王取其財物百餘人. 

田叔取其渠率二十人,各笞五十,餘各搏二十,

怒之曰:「王非若主邪?何自敢言若主!」 

魯王聞之大慚,發中府錢,使相償之.

相曰:「王自奪之,使相償之,是王為惡而相為善也. 

相毋與償之.」於是王乃盡償之.

[전숙이 노나라 승상으로 부임을 하자마자 백성들이 스스로 찾아와 상국에게 노왕이

그들의 재산을 탈취해갔다고 송사를 제기한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전숙은 그 중에 우두머리 20여 명을 붙잡아 곤장 50대를 치고  

나머지는 손바닥을 20대를 때린 후에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노왕은 그대들의 주인이 아니던가? 어찌 감히 그대들의 군주를 비난하는가?"라고 하자. 

노왕이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의 부고에서 돈을 꺼내 상국에게 변상하도록 했다.

그러자 전숙이 말하기를 : " 왕께서 스스로 재물을 탈취하시고 저에게 그것을 상환하도록 하면

이는 군왕께서는 악행을 저지르시고, 승상인 저는 선행을 베푼 것이 됩니다.

이 승상은 백성들에게 재물을 상환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노나라 왕은 자신이 직접 백성들에게 재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魯王好獵, 相常從入苑中, 王輒休相就館舍, 相出, 常暴坐待王苑外.

王數使人請相休, 終不休,曰:「我王暴露苑中, 我獨何為就舍!」

魯王以故不大出游.   數年,叔以官卒,魯以百金祠,

少子仁不受也,曰:「不以百金傷先人名.」

仁以壯健為衛將軍舍人,數從擊匈奴.  衛將軍進言仁,仁為郎中.

[노왕은 사냥을 좋아했다. 그래서 승상 전숙은 항상 왕을 모시고 사냥터가 있는 원림(苑林)에

들어갔다.  노왕은 번번이 상국에게 관사에 쉬라고 명했다.

전숙은 사냥터에서 나와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앉아서 노나라 왕을 기다렸다.

왕이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관사에 가서 쉬라고 했지만 상국은 끝까지 폭염 속에서

왕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 " 왕께서 사냥터에서 햇빛에 쏘이고 이슬을 맞으며 지내는데

내가 어찌 홀로 관사에 들어가 편히 쉴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노왕은 이 때문에 오래 걸리는 사냥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전숙이 관직에 있다가 죽자, 

노왕이 백금의 황금을 주어 그의 장례비용에 보태어 쓰도록 하였다.  막내아들인 전인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 "  백금의 돈으로 선친의 명성을 훼손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숙의 아들 전인(田仁)은 신체가 건장하여 대장군 위청(衛靑)의 사인이 되어

여러 번 흉노 정벌전에 참가했다.  위청이 전인을 천거하자 전인은 낭중에 임명되었다.]

 

數歲,為二千石丞相長史,失官. 

其後使刺舉三河, 上東巡,仁奏事有辭,上說,拜為京輔都尉.

月餘,上遷拜為司直.  數歲,坐太子事. 

時左相自將兵,令司直田仁主閉守城門,坐縱太子,下吏誅死.  

仁發兵,長陵令車千秋上變仁,仁族死.  陘城今在中山國. 

[그리고 몇 년 후에 녹봉이 2천 석인 승상의 장사(長史)2)가 되었다가 직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 후에 황제가 전인을 시켜 삼하3)를 암행 조사하여 죄상을 알아보고 보고하도록 하였다. 

황제가 동쪽을 순수(巡狩)하면서 전인이 조사하여 보고한 안건이 모두 이치에 맞았음으로

기뻐하여 그를 경보도위(京輔都尉)4)에 임명했다.

한 달 남짓 후, 황제는 다시 사직(司直)5)으로 승진시켰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태자의 모반사건에 연좌되었다.

이 때에 좌승상7) 유굴리(劉屈釐)8)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와서 태자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좌승상은 사직 전인에게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라고 명령을 했으나, 전인은 태자를

탈출시켜주는 일에동조했기 때문에 그는 형리에게 넘겨져 심리 끝에 사형을 당했다.

일설에는 장릉령 차천추(車千秋)가 전인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고변하여

전인의 일족이 멸족되었다고 했다. 형성(陘城)은 지금의 중산국(中山國)의 경내에 있다.]

 

太史公曰:

孔子稱曰「居是國必聞其政」

田叔之謂乎!義不忘賢,明主之美以救過. 仁與余善,余故并論之.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가 ‘ 머무르고 있는 나라가 어디이건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관한 말을 듣는다.’했는데  

이는 전숙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의를 생각하여 현능한 사람을 잊지 않았으며 주군의 미덕을

드러내고 과오를 덮었다. 그와 나는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를 함께 논평했다.]  

 

褚先生曰:

臣為郎時,聞之曰田仁故與任安相善.  任安,滎陽人也. 

少孤貧困,為人將車之長安,留,求事為小吏,未有因緣也,

因占著名數.   武功,扶風西界小邑也,谷口蜀道近山.

安以為武功小邑,無豪,易高也,安留,代人為求盜亭父.  

後為亭長.

[저선생(褚先生)이 말한다.

내가 랑의 신분이었 때 전인이 임안(任安)과 서로 친했다고 했다. 임안은 형양(滎陽) 사람이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빈곤하게 살았음으로 남을 위해 수레를 끌다가 어떻게 해서

장안()에까지 이르렀다. 하급 관리의 자리나마 구하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당시는 사람마다 기록된 호적의 근거에 따라 살아야했기 때문에 그는 무공()으로

옮겨 가 살게 되었다. 무공은 부풍(扶風)9)의 서쪽 경계에 있던 작은 고을로 골짜기 입구는

촉으로 통하는 잔도(棧道)가 가까이 있었다.  임안은 무공이 작은 고을이기 때문에

호족이 없어 지위를 쉽게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임안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구도(求盜)와 정보10)가 되었고 후에는 정장(亭長)11)이 되었다.]

 

邑中人民俱出獵,任安常為人分麋鹿雉兔,部署老小當壯劇易處,

眾人皆喜,曰:「無傷也,任少卿分別平,有智略.」

明日復合會,會者數百人. 任少卿曰:「某子甲何為不來乎?」

諸人皆怪其見之疾也.  其後除為三老,舉為親民,出為三百石長,

治民.  坐上行出游共帳不辦,斥免.

[임안은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냥을 나가서 잡은 사슴이나, 꿩, 토끼 등을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사냥할 때의 맡은 일도 노인과 어린아이 및 장정들을 어렵고 쉬운 것을 구분하여 안배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아무 걱정할 일이 없구나!

임소경은 평등하게 분배할 줄 아는 지혜와 꾀가 있도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모이게 하니 참석한 자기 수백 명이었다.  

임소경이 그들에게 묻기를 : " 아무개 갑(甲)은  어째서 오지 않았소?"라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사람을 그렇게 빨리 기억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후에 그는 삼로(三老)12)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친민관(親民官)13)에 천거되어

삼백석(三百石)14)의 봉록을 받는 현령(縣令)이 되어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에 황제가 행차할 때에 공장(共帳)15)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므로

문책을 받고 면직되었다.]

 

乃為衛將軍舍人,與田仁會,俱為舍人,居門下,同心相愛.

此二人家貧,無錢用以事將軍家監,家監使養惡齧馬. 

兩人同床臥,仁竊言曰:「不知人哉家監也!」

任安曰:「將軍尚不知人,何乃家監也!」

衛將軍從此兩人過平陽主,主家令兩人與騎奴同席而食,

此二子拔刀列斷席別坐.  主家皆怪而惡之,莫敢呵.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사인으로 들어가 전인(田仁)을 만나게 되어 두 사람이 같이

위장군 문하가 되었으며,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어 서로를 아꼈다.

이 두 사람은 집이 가난해 장군의 집사에게 비위를 맞출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그러자 집사는 그들을 걸핏하면 말발굽으로 사람을 치는 사나운 말을 기르게 했다.  

두 사람이 같이 침대에 누워 잠을 자다가 전인이 조용히 말하기를 : 

"집사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하자.  그러자 임안이 대꾸하기를 :

 " 장군도 사람을 볼줄 모르는데 어찌 집사인들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위장군이 두 사람을 이끌고 평양공주(平陽公主)16) 집을 방문했다.

공주의 집안 사람들은 두 사람을 말 모는 노예들과 같은 돗자리에 앉혀 밥을 먹게 했다.

두 사람은 허리의 칼을 뽑아 방석을 잘라 말 모는 노예들과 떨어져 앉아서 밥을 먹었다.   

공주의 집안 사람들이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싫어했으나 감히 질책하지는 못했다. ] 

 

其後有詔募擇衛將軍舍人以為郎,將軍取舍人中富給者,

令具鞌馬絳衣玉具劍,欲入奏之.

會賢大夫少府趙禹來過衛將軍,將軍呼所舉舍人以示趙禹.

趙禹以次問之,十餘人無一人習事有智略者.

[그후에 황제의 명으로 위청 장군의 사인 중에서 자신의 시종할 수 있는 낭관()을

선발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장군은 사인들 중 부유한 자를 골라 그들에게 안장과 마구에

강의(絳衣)와 옥구검(玉具劍)을 갖추게 한 후에 궁궐로 데려가 고하려고 했다. 

그때 마침 현능한 대부라고 이름이 높은 소부(少府)18) 조우(趙禹)19)가 위장군의 집에 들르자,

위장군은 천거하려는 사인들을 불러 그에게 보였다. 조우가 차례로 몇 가지 질문을 해 봤지만 

10여 명 중에 사리에 통달하고 지모가 있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趙禹曰:「吾聞之,將門之下必有將類. 

傳曰『不知其君視其所使,不知其子視其所友』.

今有詔舉將軍舍人者, 欲以觀將軍而能得賢者文武之士也. 

今徒取盎人子上之, 又無智略, 如木偶人衣之綺繡耳, 將柰之何?」 

[조우가 위장군에게 말하기를 : " 장군의 문하에는 반드시 장군이 될 만한 동류의 사람이

있다고 나는 들었습니다. 《공자가어()》에 전하기를 ‘그 주인 된 사람을 알 수 없으면

그가 부리는 사람을 보고, 그의 아들을 알 수 없으면 그가 사귀는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 조명을 따라 장군의 사인을 천거하라고 한 이유는 이 일로써 장군께서 현능한

문무(文武)의 인사들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장군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만을 선택하여 황제에게 천거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지략이 없어  마치 비단 옷을 입혀 놓은 나무인형과 같은 자들입니다.

장군은 장차 어찌 하실 생각입니까?”라고 하였다.] 

 

於是趙禹悉召衛將軍舍人百餘人, 以次問之, 得田仁、 任安,

曰:「獨此兩人可耳,餘無可用者.」

衛將軍見此兩人貧, 意不平. 趙禹去, 謂兩人曰:「各自具樾象絳衣.」

兩人對曰:「家貧無用具也.」

將軍怒曰:「今兩君家自為貧, 何為出此言?鞅鞅如有移德於我者,

何也?」 將軍不得已,上籍以聞.

[이에 조우는 위청 장군의 문객 1백여 명을 모두 불러 모아 다시 차례로 만나서 그들의 식견을

물어본 끝에 전인과 임안을 발견하고 말하기를 : " 오직 이 두 사람만 괜찮을 뿐,

나머지는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

위장군은 두 사람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불편하고 못마땅했다.

조우가 가자 위장군이 두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 " 두 사람은 각자 마구, 안장 및 강의를

새로 준비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자.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 집이 가난하여 마구를 살 돈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장군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 " 지금 두 사람은 자기 집안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가? 내가 그대들을 황제에게 천거하는 은덕을 베풀었는데도 

만족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위장군은 부득이 황제에게 명부를 만들어 보고했다.]

 

有詔召見衛將軍舍人,此二人前見,詔問能略相推第也.

田仁對曰;「提桴鼓立軍門,使士大夫樂死戰鬬,仁不及任安.」 

任安對曰:「夫決嫌疑,定是非,辯治官,使百姓無怨心,

安不及仁也.」  武帝大笑曰:「善.」 

[이윽고 위장군의 사인을 접견한다는 황제의 조명이 내리자,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가 직접 묻자,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하여 상대방을 칭찬했다.  

전인이 먼저 말하기를 : " 손에 북채와 북을 들고 군문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사대부들로

하여금 전투에서 기꺼이 죽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제가 임안에 못 미칩니다."하자.  

임안도 전인에 대해 평가하기를 :「무릇 혐의를 판결하고 시비를 가리며 관리를 다스려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는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능력은 제가 전인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 " 훌륭하다."라고 하였다.] 

 

使任安護北軍,使田仁護邊田穀於河上.  此兩人立名天下. 

 其後用任安為益州刺史,以田仁為丞相長史.  田仁上書言:

「天下郡太守多為姦利,三河尤甚,臣請先刺舉三河.

三河太守皆內倚中貴人,與三公有親屬,無所畏憚,

宜先正三河以警天下姦吏.」 

[황제는 임안으로 하여금 북군을 감독하고 지키게 했고, 전인은 황하 위쪽에 있는

변방 요새의 둔전()과 곡물을 감독하고 돌보게 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금방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후에 임안은 익주자사(益州刺史)20)가 되었고, 전인은 승상부의 장사(長史)로 승진했다.

전인이 황제에게 상서를 아뢰기를 : " 천하의 각 군 태수들 중에 불법을 자행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하서(西), 하동(), 하내()>가

더욱 심하니,  이에 신은 먼저 삼하를 조사하여 밝히도록 윤허해주시길 청합니다. 

삼하의 태수들은 모두 궁중 내의 귀인들에 의지하고 있거나, 승상, 태위, 어사대부 등의 

삼공과 친척관계에 있어, 두려워하거나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먼저 삼하의 지역을 바로잡아 천하에 불법을 자행하는 간사한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是時河南、河內太守皆御史大夫杜父兄子弟也,

河東太守石丞相子孫也.  是時石氏九人為二千石,方盛貴.  

田仁數上書言之.  杜大夫及石氏使人謝,謂田少卿曰:

「吾非敢有語言也,願少卿無相誣汙也.」仁已刺三河, 

三河太守皆下吏誅死.   仁還奏事,武帝說,以仁為能不畏彊御,

拜仁為丞相司直,威振天下.

[당시 하남과 하내 태수는 모두 어사대부 두주(杜周)21)의 부형자제(父兄子弟)들 이었고, 

하동태수는 승상 석경(石慶)의 자손들이었다. 그때 석씨들은 9명이 2천석의 고관 자리에 있어  

바야흐로 권세와 존귀함이 한창 때였다. 전인이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여러 번 이 일을 고했다.  

어사대부 두주와 석씨들은 마침내 사람을 보내 전소경(田少卿)에게 사과하면서 변명하기를 : 

​" 우리가 감히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토로할 수는 없지만, 청컨대 소경께서는 저희들에게

모욕을 주어 치욕스럽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인은 이미 삼하 지역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삼하의 태수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리에

넘겨 사형시켰다.  전인이 경사에 돌아와 아뢰자 무제가 기뻐하며 전인은 권세가 있거나

강포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승상부의 사직(司直)에 임명했다.

이로써 전인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其後逢太子有兵事,丞相自將兵,使司直主城門. 

司直以為太子骨肉之親,父子之閒不甚欲近,去之諸陵過.  

是時武帝在甘泉,使御史大夫暴君下責丞相「何為縱太子」,

丞相對言「使司直部守城門而開太子」. 上書以聞,請捕系司直. 

司直下吏,誅死.

[그후에 태자의 거병사건이 일어나자, 승상 유굴리(劉屈釐)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와

사직이었던 전인에게 성문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전인은 태자가 황제와는 골육지친일

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의 일에는 너무 깊이 간여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태자의 일행으로 하여금 여러 능침이 있는 곳을 통과하게 했다.  

당시 감천궁에 머물고 있던 황제가 어사대부 포승지(暴勝之)를 보내 승상을 책망하기를:  

" 무슨 이유로 태자를 풀어 주었는가?"라고 하자.  승상이 변명하기를 : 

" 성문을 지키던 사직이 명을 위반하고 성문을 열어 태자를 놓아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황제에게 서장을 올려 사직의 죄를 묻기 위해 체포할 수 있다고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전인은 형리에게 넘겨져 사형에 처해졌다.]

 

是時任安為北軍使者護軍,太子立車北軍南門外,召任安,

與節令發兵.  安拜受節,入,閉門不出.

武帝聞之,以為任安為詳邪,不傅事,何也?

任安笞辱北軍錢官小吏,小吏上書言之,以為受太子節,

言「幸與我其鮮好者」. 

[이때 임안은 북군()을 감독하는 호군()의 직위에 있었다.

태자는 북군의 남문 밖에서 수레를 세우고 임안을 불러 그에게 부절()을 주고

북군을 동원할 것을 명령했다.

임안은 예를 갖추어 절을 하며 부절을 받은 뒤에 들어가서 성문을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무제는 이 소식을 듣고 임안이 부절을 받고도 태자의 명령을 바로 따르지 않는 까닭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때 마침 임안이 북군의 돈을 관리하는 말단 관리의 부정을 적발하여

태형을 쳐서 모욕을 준 일이 발생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하급 관리는 상서를 올려 임안이 태자에게 부절을 받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모함하기를 : ​“ 다행히 저에게 훌륭한 군대가 있으니,

적당할 때에 명령만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書上聞,武帝曰:「是老吏也,見兵事起,欲坐觀成敗,

見勝者欲合從之,有兩心. 

安有當死之罪甚眾,吾常活之,今懷詐,有不忠之心.」 

下安吏,誅死.  夫月滿則虧,物盛則衰,天地之常也. 

知進而不知退,久乘富貴,禍積為祟.

故范蠡之去越,辭不受官位,名傳後世,萬歲不忘,豈可及哉!

後進者慎戒之.
[상서를 받아 읽어 본 황제가 말하기를 : " 이는 세상 물정에 노련한 관리로다!

거병한 태자를 보고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을 따르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자로다. 임안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내가 항상 살려 주었다.

오늘 다시 속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불충한 자로다!"라고 하며, 

임안을 형리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게 했다. 무릇 달이 차면 기울고 사물이 성하게 되면

쇠하게 됨은 천지 간의 법칙이다.  나아갈 때만 알고 물러날 때를 모르며,

오래 부귀를 누리려고만 하면 재앙이 쌓여서 도리어 흉한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범려(范蠡)가 월나라에서 벼슬과 작위를 사직하고 월나라를 떠나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하여 만세토록잊혀지지 않고 있으니 어찌 그를 지혜를 따를 수 있겠는가 !

후세 사람들은 진퇴를 결정할 때는 전인과 임안을 경계로 삼기 바란다.]


  

【 각주 】 

1) 형성(陘城)/ 지금의 하북성 무극현동북으로 당시의 정식 지명은 고형현(苦陘縣)이었다.

2) 장사(長史)/ 한 대의 승상부 속관으로 승상을 도와 구경(九卿)의 일을 조정했다.  

    승상부에 속하는 관리의 장으로 녹봉은 천석이다..  

3) 삼하(三河)/ 하남(河南), 하동(河東), 하내(河內) 삼군을 말한다.

    하남군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동쪽, 하동군은 산서성 하현(夏縣) 서북,

    하내는 하남성 무척(武陟)현 서남이다.  

4) 경보도위(京輔都尉)/ 한나라 때 황도 장안과 그 12개의 속현을 묶어 내사(內史)를 두었으나  

    한무제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경조윤으로 개칭했다.

    경조윤(京兆尹)의 관할 구역에 군사와 치안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녹봉은 2천 석이다.  

5) 사직(司直)/ 한무제 원수(元狩) 5년 기원전 118년에 설치한 관직으로 승상을 보좌하여  

    관리들을 감찰하고 범법자를 검거하는 책임을 맡았다.

    승상의 속관 중 직급이 가장 높았다. 녹봉은 2천 석이다.

6) 태자의 사건/ 무고(巫蠱)의 란을 말한다. 승상 公孫賀의 부인이 황제를 저주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을 환관 강충(江充)이 조사 책임자가 되면서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태자 유거를 모함하자 유거가 강충을 죽여 일어난 난이다.

    이 사건으로 태자와 태자의 아들을 포함하여 연루되어 살해된 자가 4만 명에 달했다.  

7) 원문은 좌승상이나 서한 초기 설치한 좌.우 2명의 승상을 두던 제도는 한문제 2년(전178)

    한 명의 승상으로 통합되었고 또한 태자의 란을 진압한 당시의 승상은 유굴리였다.

    좌승상은 승상의 연문(衍文)이다.  

8) 유굴리(劉屈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90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중산정왕 유승(劉勝)의 아들로 일찍이 탁군(涿郡) 태수가 되었다가 한무제 51년,

    정화(征和) 2년(한무제 51년)  그의 처가 한무제를 저주한 무고죄(巫蠱罪)에 연루되어

    그의 일족과 함께 요참형에 처해졌다.  

9) 부풍(扶風)/ 한나라 때 장안을 포함한 수도 주위에 설치한 행정구역 중 하나로

    위성(渭城) 이서를 관할하는  우부풍(右扶風)의 준말이다. 장안을 관할하는 경조윤(京兆尹),

    장릉(長陵) 이북을 관할하는 좌풍익(左馮翊)과 함께  삼보(三輔)라고 했다.  

10) 구도(求盜)/ 정장의 부하로 도적을 쫓아 체포하는 하급관리다.  

      정보(亭父)/ 정장의 부하로 문을 여닫고 청소하는 하급관리다.  

11) 정장(亭長)/ 진(秦)나라가 제정한 말단 지방행정조직으로 한나라가 답습했다.  

      매 10리 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인 정장에게 치안과 소송사건을 관장하게 했다.  

      한나라를 창건한 한고조는 산동성 패현(沛縣)의 사수정(泗水亭)의 정장 출신이다.  

12) 삼로(三老)/ 매 10정을 묶어 향(鄕)이라 했는데 향에는 현에서 지명하는 삼로 한 명을 두어  

      향민들의 교화를 담당하게 했다.  

13) 친민(親民)/ 향읍의 일을 관장하는 지방관리로 백성들을 교화하여 선으로 이끄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14) 삼백석의 관리/ 한나라 제도에 만 호 이상 고을의 현령의 녹봉은 천 석에서 육백석이고,  

      만 호 이하의 현령은 오백 석에서 삼백 석이었다.

      즉 임안은 만 호 이하의 현령에 임명되었음을 말한다.  

15) 공장(共帳)/ 즉 공장(供帳)으로 황제가 출행할 때 소요되는 장막과 휘장 등을

      공급하는 일이다.

16) 평양공주(平陽公主)/ 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다.

      원래는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라고 불렀으나 조참(曹參)의 증손 평양이후(平陽夷侯)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여 평양공주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 무제에게 이연년(李延年)을 천거하고 다시 무제에게 원래 자기 집에서 노래부르는

      가희였던 위자부(衛子夫)를 무제에게 보여 후에 황후가 되게 하였다.  

      조시가 악질에 걸려 별거하다가 무제의 조칙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개가했다.  

17) 강의(絳衣)와 옥구검(玉具劍)/ 한나라 때 궁궐을 지키고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들이 입는  

      아주 진한 붉은 옷을 말하고 옥구검은 칼집의 입구와 칼자루에 옥으로 장산한 검을 말한다.  

18) 소부(少府)/ 전국시대 때 시작된 관제로써 진한(秦漢)이 답습했다.  

      진한 때의 9경 중의 한 명으로 산과 바다, 소택지에서 나오는 수입 및 황실에서 운영하는

      수공업을 관장하여 황제의 사적인 재산을 관리하는 장관이다. 녹봉은 중2천석이다.  

19) 조우(趙禹)/ 서한의 대신으로 지금의 섬서성 무공시(武功市) 서남 태(斄) 출신이다.  

      현의 말단 관리인 좌사(左史)의 신분으로 경사로 불려가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가

      청렴함으로 승진되어 영사(令史)가 되어 승상 주아부를 모셨다.

      무제 때 직급이 태중대부로 올랐고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한 혹리로써 장탕과 함께 율령을 제정했다.(혹리열전)  

20) 자사(刺史)/ 한무제 원봉 5년(전 106) 전국의 행정구역을 13자사부로 나누고  

      매 주마다 자사를 두어 관할지역의 관리들을 감찰하게 했다.

      봉록은 600석으로 군의 태수보다 낮았다.  

21) 두주(杜周)/ 태어난 해은 알 수 없고 기원전 94년에 죽은 한무제 때의 혹리다.

      자는 장유(長孺)다.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남 경내의 두연(杜衍) 출신이다.

      원봉(元封) 2년(전109년) 정위 직을 맡았던 혹리 장탕(張湯)의 속관인 사(史)가 되었다.

      무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어사중승(御史中升)이 되었다.  

      옥사를 다스릴 때 법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황제의 뜻에 부합했음으로 장탕의 후임으로

      정위가 되어 옥에 갇히는 백성들이 날이 갈 수록 늘어나 10만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천한(天漢) 2년 (전99) 정위의 직에서 물러나 집금오(執金吾)로 자리를 바꾸었다.   

      천한 3년 도적을 소탕하고 상홍양 등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어사대부로 승진시켰다. 후에 자손들은 모두 관리가 되고 자신은 삼공의 작위를 누리며 

      재산은 수만 관에 달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