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吳王濞列傳

第 四十六. 吳王濞列傳(오왕비열전)

덕치/이두진 2023. 12. 7. 17:58

 

       第 四十六.   吳王濞列傳(오왕비열전) 

吳王濞者,高帝兄劉仲之子也.  高帝已定天下七年,立劉仲為代王.

而匈奴攻代,劉仲不能堅守,棄國亡,閒行走雒陽,自歸天子.

天子為骨肉故,不忍致法,廢以為郃陽侯.

​[오왕() 유비()는 한 고제()의 형인 유중()의 아들이다.

고제가 천하를 평정하고 7년째 되던 해(기원전 200년)에 유중을 대왕()에 봉했다.

흉노()가 대()나라를 공격하자 유중은 굳게 지켜내지 못하고 나라를 버리고

샛길로 도망쳐 낙양()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자수했다.

고제는 골육이라 유중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왕을 폐하고 합양후로 강등시켰다.]

 

高帝十一年秋,淮南王英布反,東并荊地,劫其國兵,西度淮,擊楚,

高帝自將往誅之.   劉仲子沛侯濞年二十,有氣力,以騎將從破布軍蘄西,

會甀,布走.  荊王劉賈為布所殺,無後.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가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의 형(荊)1) 땅을 병합하여

그곳의 군사를 빼앗은 후에 서쪽으로 나아가 회수(淮水)를 건너 초(楚)2) 땅을 공격했다.

고제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기 위해 출전할 때 유중의 아들 유비(劉濞)는

당시 패후(沛侯)의 신분이었다.  이 때 유중의 아들 패후() 유비()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용기와 힘을 갖춘 유비는 고제의 기장(騎將)이 되어,

영포의 군대를 기현3)의 서쪽 회추(會甀)4)에서 격파했다. 전쟁에서 패한 영포는 달아났다.

영포에 의해 살해된 형왕 유고(劉賈)5)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다.]

 

上患吳、會稽輕悍,無壯王以填之,諸子少,乃立濞於沛為吳王,

王三郡五十三城.  已拜受印,高帝召濞相之,謂曰:「若狀有反相.」 

心獨悔,業已拜,因拊其背,告曰:「漢後五十年東南有亂者,豈若邪?

然天下同姓為一家也,慎無反!」  濞頓首曰:「不敢.」  

[이에 황제는 민첩하고 사나운 오나라의 회계 사람들을 걱정했으나6) 그들을 제압할 만한

힘이 있는 왕이 없음을 근심했다. 고제의 아들들은 모두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유고의 형국(荊國)을 오국(吳國)으로 개명하고 패후(沛侯)의 신분에 있던

유비를 오왕(吳王)으로 세워 3군(동양군, 장군, 오군) 7)의 53개 성을 다스리게 했다.

고제가 유비를 이미 오왕에 봉하고 왕의 인장을 수여하면서 그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 

“ 너의 관상에 모반할 상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후회했지만 이미 왕으로 봉했음으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 “ 한나라에서 앞으로 50년 뒤에 동남쪽에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아마 너일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유씨 성의 한 집안 것이니 삼가 모반하지 말라.”라고 하자. 

유비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하기를 :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郡國諸侯各務自拊循其民.

吳有豫章郡銅山,濞則招致天下亡命者(益)[盜]鑄錢,煮海水為鹽,

以故無賦,國用富饒.

[효혜제와 고후의 때에 이르자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고 군국의 제후들은 각기

그 백성들을 어루만지는데 힘썼다.  오나라는 예장군(豫章郡)에 구리 광산이 있었으므로

오왕은 천하의 도망자들을 모아 사전(私錢)을 주조하게 하고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어 재정에 충당하여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고도 나라는 부유했다.]

 

孝文時, 吳太子入見, 得侍皇太子飲博.  吳太子師傅皆楚人, 輕悍,又素驕,

博,爭道,不恭,皇太子引博局提吳太子,殺之.  於是遣其喪歸葬.

至吳,吳王慍曰:「天下同宗,死長安即葬長安,何必來葬為!」

復遣喪之長安葬.

​[효문제 때 오나라의 태자가 조정에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고는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장기를 두었다.  오나라의 태자를 가르치는 사부들은 모두 초나라 출신들로써

모두 민첩하고 사나웠으며 또한 오나라 태자도 평소에 거만했다.

장안으로 들어와 기거하던 오나라의 태자와 황태자가 장기를 두다가 다투었다.

오나라 태자가 매우 불손했음으로 황태자가 장기판을 집어 던져 그를 죽여 버렸다.

그래서 한나라 조정은 오나라 태자의 시신을 오나라에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이윽고 태자의 시신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오왕이 원망하며 말하기를 :

 “ 천하는 유씨의 것인데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례를 치러야지,

무엇 때문에 꼭 이 먼 곳까지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한다는 말인가! ”라고 하며,

태자의 시신을 다시 장안으로 돌려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吳王由此稍失藩臣之禮, 稱病不朝. 京師知其以子故稱病不朝, 驗問實不病,

諸吳使來, 輒系責治之.  吳王恐,為謀滋甚.  

及後使人為秋請, 上復責問吳使者, 使者對曰:「王實不病, 漢系治使者數輩,

以故遂稱病.  且夫『察見淵中魚,不祥』.  今王始詐病,及覺,見責急,

愈益閉,恐上誅之,計乃無聊.  唯上棄之而與更始.」

[오왕이 그 일로 인해 점점 번신(藩臣)으로써의 예를 지키지 않게 되고 결국은 병을 칭하고

조현을 행하지 않았다.  오왕이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병을 칭하고 조현을 행하지 않는다고

의심한 조정은 사람을 보내 확인한 바, 오왕은 병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오나라에서 오는 사자들이 들어오는 족족 붙잡아 죄를 물었다.

오왕이 두려워하여 모반할 생각을 더욱 심하게 했다.

후에 가을에 행하는 조현에 다시 다른 사람을 대신 사자로 보내오자

황제가 또다시 오나라 사자를 문책했다.

사자가 대답하기를 : “ 왕께서는 사실 아프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많은 오나라의 사자를 잡아

문책함으로 오왕께서 두려워하여 병을 칭한 것입니다. 또한 ‘깊은 연못 속의 고기를 

살피는 사람은 상서롭지 못하다.’8)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저희 오왕께서 거짓 병을 앓으신

이유는 거짓말이 탄로나서 문책을 당하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하게 되어

더욱 문을 굳게 닫고 황제께서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어쩔 수 없이 꾀를 낸 것입니다.

오로지 황제께서는 옛일은 잊으시고 그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天子乃赦吳使者歸之, 而賜吳王几杖, 老, 不朝.  吳得釋其罪, 謀亦益解.

然其居國以銅鹽故, 百姓無賦.  卒踐更, 輒與平賈.  歲時存問茂材, 賞賜閭里. 

佗郡國吏欲來捕亡人者, 訟共禁弗予.  如此者四十餘年, 以故能使其眾.

[그래서 천자는 오나라 사자들을 사면해 그들을 돌려보내고 오왕을 위해 궤장(几杖)9)을

하사하여 나이가 많음으로 조현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을 내렸다.

죄를 용서받은 오왕은 모반할 생각을 차츰 그만 두게 되었다. 그런 연후에 그는 구리와

소금으로 재정을 충당하여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았다.

사병()으로 병역에 복무한 자에게 그때마다 대역금()을 지불했다. 

사병으로 병역에 복역한 자에게도 대역금(代役金)10)을 지불했다. 매년 때가 되면

나라 안의 인재들을 찾아 안부를 묻고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에게도 상급을 내렸다.

다른 군국의 형리들이 도망자를 추격하여 체포하고자 해도 그들을 비호하며 넘겨주지 않았다.

40여 년 동안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자 그는 능히 오나라의 백성들을 수 있게 되었다.]

 

晁錯為太子家令, 得幸太子, 數從容言吳過可削. 

數上書說孝文帝, 文帝寬, 不忍罰, 以此吳日益橫.

[그때 태자의 가령(家令)이었던 조조(鼂錯)가 태자의 신임을 받아 여러 번에 걸쳐

오나라의 국세가 너무 커지고 지은 과오가 있기 때문에 영토를 삭감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상서는 효문제에게도 올라갔다. 그러나 천성이 관대한 효문제는 차마 오나라에

벌을 내리지 못하자, 오나라는 날이 갈수록 제멋대로 굴었다.]

 

及孝景帝即位, 錯為御史大夫, 說上曰:「昔高帝初定天下, 昆弟少, 諸子弱,

大封同姓, 故王孽子悼惠王王齊七十餘城,庶弟元王王楚四十餘城,

兄子濞王吳五十餘城:封三庶孽,分天下半.  

今吳王前有太子之郄,詐稱病不朝,於古法當誅,文帝弗忍,因賜几杖.

德至厚, 當改過自新.  乃益驕溢, 即山鑄錢, 煮海水為鹽, 誘天下亡人, 謀作亂. 

今削之亦反,不削之亦反.  削之,其反亟,禍小;不削,反遲,禍大.」

[마침내 효경제가 즉위하자, 조조는 어사대부(御史大夫)11)에 임명되어 황제에게 아뢰기를 :

“ 옛날 고제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하셨을 때 형제들은 적고, 자제들은 어려서 유씨 성을

대거 제후왕으로 봉했습니다. 그래서 서자 도혜왕 유비는 제나라의 70여 개성의 왕이 되고,

동모제(同母弟) 원왕() 유교(劉交)는 초나라의 40여 개 성의 왕이 되었으며,

장조카 유비(劉濞)는 오나라의 50여 개 성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의 황족이 거느리고 있는 땅은 한나라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지금 오왕은

폐하의 옛날 태자시절 생긴 일을 구실로 병을 사칭하여 조현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죄는 법에 따르면 주살에 해당되나 선황께서 차마 법을 집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궤장을

하사하시고 덕을 후하게 베푸셨습니다. 마땅히 잘못을 고쳐 스스로를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왕은 더욱 오만방자하게 되어 광산에서 사전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생긴 돈으로 천하의 도망자들을 모아 반란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지금 봉지를 삭감하면 지금 반란이 일어나고, 삭감하지 않아도 역시 반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삭감하면 반란은 빨리 일어나 그 피해는 적지만, 지금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게 일어나겠지만 그 피해는 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三年冬, 楚王朝,晁錯因言楚王戊往年為薄太后服, 私姦服舍, 請誅之. 

詔赦, 罰削東海郡.  因削吳之豫章郡、會稽郡. 及前二年趙王有罪,

削其河閒郡.  膠西王卬以賣爵有姦,削其六縣.  漢廷臣方議削吳. 

吳王濞恐削地無已,因以此發謀,欲舉事.  念諸侯無足與計謀者,

聞膠西王勇,好氣,喜兵,諸齊皆憚畏,於是乃使中大夫應高誂膠西王.

[효경제 3년(기원전 154년) 겨울, 초왕()이 입조했다. 조조는 초왕 유무(劉戊)12)가

옛날 박태후의 상중에 궁중에서 궁녀와 몰래 간음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주살할 것을 상주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유무에게 사면령을 내렸으나 그 벌로 초나라의 동해군을 빼앗았다.

아울러 오나라는 예장군 및 회계군을 빼았겼다. 그 전에 조왕 유수(劉遂)13)가 죄를 지어

하간군을 빼앗기고, 교서왕 유앙이 매작과 간음한 일로 영지 6개 현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한나라 조정은 마침내 오나라의 영토를 삭감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에 오왕 유비는 자기의 봉지가 계속 삭감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결국 모반할 것을 결심했다.

더불어 같이 일을 도모할만한 제후들이 없음을 생각한 오왕 유비는 교서왕 유앙(劉卬)이

용기와 기개를 갖추고 용병을 즐겨했기 때문에 제나라 지역의 여러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중대부 응고를 사자로 보내 교서왕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無文書,口報曰:「吳王不肖,有宿夕之憂,不敢自外,使喻其驩心.」

王曰:「何以教之?」  高曰:「今者主上興於姦, 飾於邪臣, 好小善,聽讒賊,

擅變更律令, 侵奪諸侯之地,徵求滋多,誅罰良善,日以益甚.  

里語有之,『舐糠及米』吳與膠西,知名諸侯也,一時見察,恐不得安肆矣.

吳王身有內病,不能朝請二十餘年, 嘗患見疑, 無以自白, 今脅肩累足,

猶懼不見釋.  竊聞大王以爵事有適,所聞諸侯削地, 罪不至此,

此恐不得削地而已.」

[응고는 서신 없이 구두로 교서왕에게 오왕의 말을 전하기를 :

“ 오왕이 불초하여 머지않아 닥칠 우환을 걱정하여 감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저

를 보내 그의 호의적인 마음을 전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교서왕이 묻기를 : “ 무엇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오?”라고 하자.

응고가 대답하기를 : “ 지금 황제께서 간신들에게 현혹당하고 사악한 신하들에게 가려져서

사소한 것들을 좋아하시며 참언을 일삼는 도적같은 신하들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이런 간신들과 사악한 신하들은 자기 멋대로 율령을 바꾸고 제후들의 봉지를 침탈해가며

요구하여 거두어가는 것들은 점점 많아지고,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고 벌을 주는 일이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시정에 돌아다니는 말에 ‘쌀겨를 핥다보면 쌀까지

먹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나라와 교서는 그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나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이라고 조정의 감찰을 받게 되면 안녕과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왕께는 몸에 속병이 있어 20여 년간을 조현을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일로 조정의 의심을 받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명백하게 증명을 하지 못해

근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깨를 움츠리고 두 발을 오그리며 조심하고 있지만 오히려

용서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으니 대왕께서는 작위에 관한 일로

문책 받아 영토를 삭감 당할 것이라는 말이 제후들 사이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이 죄는 봉지를 깎일만한 일이 아니나 오히려 이 일로 인해 봉지가 깎이는 것만으로

그칠 일이 아닐 것 같아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王曰:「然, 有之. 子將柰何?」 

高曰:「同惡相助,同好相留,同情相成,同欲相趨, 同利相死.

今吳王自以為與大王同憂, 願因時循理, 棄軀以除患害於天下, 億亦可乎?」 

王瞿然駭曰:「寡人何敢如是?今主上雖急,固有死耳,安得不戴?」

[교서왕이 말하기를 : “ 그렇소. 그런 일이 있었소. 그대라면 내가 장차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겠소?”라고 하자. 

응고가 대답하기를 : “ 미워하는 것이 같은 자는 서로 돕고, 좋아하는 것이 같은 자는 서로

붙들어 머물며,뜻이 같은 자는 함께 이루고, 하고자 하는 일이 같으면 함께 길을 달려가며,

이익을 같이 하는 자는 서로를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왕은 스스로 대왕과 근심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시세의 순리를 쫓아 몸을 던져 천하의 근심거리를

제거해주시기 바랍니다. 생각하면 이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교서왕이 놀라 두려운 기색을 띠며 말하기를 : “ 과인이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지금 황상이 비록 급하게 나를 압박한다면 당연히 죽임을 당할 뿐,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라고 하자.] 

 

高曰:「御史大夫晁錯, 熒惑天子, 侵奪諸侯, 蔽忠塞賢, 朝廷疾怨,

諸侯皆有倍畔之意, 人事極矣.  彗星出, 蝗蟲數起, 此萬世一時,

而愁勞聖人之所以起也.  故吳王欲內以晁錯為討,外隨大王後車,

彷徉天下,所鄉者降,所指者下,天下莫敢不服.  大王誠幸而許之一言,

則吳王率楚王略函谷關,守滎陽敖倉之粟, 距漢兵. 治次舍, 須大王.

大王有幸而臨之, 則天下可并, 兩主分割, 不亦可乎?」

王曰:「善.」高歸報吳王, 吳王猶恐其不與, 乃身自為使, 使於膠西, 面結之.

[응고가 말하기를 : “ 어사대부 조조가 천자를 미혹하고 제후를 봉지를 침탈하며

충신을 덮어 가리고 현사()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의 신료들은

그에 대해 질시하고 원한을 품고 있으며 제후들은 모두 배반할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로써 세상의 일이 극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혜성이 하늘에 출몰하고 황충이 빈번히 발생하니 이것은 만세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

만백성이 고생하고 근심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성인이 몸을 일으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오왕께서는 조정 내부의 조조를 토벌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밖으로는 대왕의

병거 뒤를 따라 천하를 뛰어다니려고 합니다. 대왕의 수레가 향하는 곳은 모두 항복할 것이며

대왕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함락될 것인데 천하에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진실로 허락한다는 다행스러운 말을 해주신다면 오왕 전하께서는

초왕을 이끌고 함곡관을 공략하고 형양(滎陽)의 오창(敖倉)에 쌓여있는 곡식을 지키며

한군의 군사를 막고 군영을 설치해 대왕의 행차를 기다리겠습니다.

대왕께서 다행히 군영에 임해주신다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어 두 왕께서 분할하여

나누어 가질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자.  

교서왕은 대답하기를 : “좋소”라고 하였다. 응고가 오나라에 돌아와 오왕에게 복명하자,

오왕은 여전히 그가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신이 직접 사자가 되어

교서왕을 만나 결맹을 맺었다.]

 

膠西群臣或聞王謀, 諫曰:「承一帝,至樂也.  今大王與吳西鄉,弟令事成,

兩主分爭,患乃始結.  諸侯之地不足為漢郡什二,而為畔逆以憂太后,

非長策也.」 王弗聽.  遂發使約齊、菑川、膠東、濟南、濟北,皆許諾,

而曰「城陽景王有義,攻諸呂,勿與,事定分之耳」.

[그때 교서왕의 신하 한 사람이 왕이 모반을 계획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언하기를 :

“ 한 사람의 황제를 모시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지금 대왕과 오왕이 서쪽으로 진격하여

설사 일이 성사된다 할지라도 두 군주께서 갈라서서 다투실 것이니 환란을 그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후들의 봉지는 한나라가 직할하는 군의 10분의 2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모반하신다면 대왕의 태후님이 근심하실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교서왕은 듣지 않고 즉시 사자를 치천, 교동、제남、제북 등의 나라에 보내 모두 군사를

일으키기로 허락을 받고 말하기를 : “ 성양의 경왕은 의리가 있어 옛날 여씨들을 토벌했다.

그를 거사에 참여시키지 말고 일이 성사되어 사세가 정해지고 나서 나누어 주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諸侯既新削罰, 振恐,多怨晁錯.  及削吳會稽、豫章郡書至, 則吳王先起兵,

膠西正月丙午誅漢吏二千石以下, 膠東, 菑川, 濟南, 楚, 趙亦然, 遂發兵西.

齊王後悔, 飲藥自殺, 畔約.  濟北王城壞未完, 其郎中令劫守其王, 不得發兵. 

膠西為渠率, 膠東、菑川、濟南共攻圍臨菑.  趙王遂亦反, 陰使匈奴與連兵.

​[제후들은 이미 새로운 징벌로써 영토를 삭감 당했기 때문에 몹시 두려워하면서 조조를

매우 원망했다. 이윽고 삭지령이 회계군과 예장군에 전해지자 오왕이 즉시 군사을 일으켰다.

교서왕은 정월 병오(丙午) 일에 한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2천석 이하의 관리들을 주살했다.

이에 호응하여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초왕, 조왕도 군사를 일으켜 서쪽의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 제왕 유장려(劉將閭)가 후회하고 약을 먹고 자살하여 약속을 배반했다.

제북왕은 그의 성이 파괴되어 미처 수리가 끝나기 전에 낭중이 그를 납치하여 지켰으므로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교서왕이 우두머리가 되어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등을 이끌고 임치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조왕이 역시 반란에 참가하여 사자를 비밀리에 흉노에 보내 연합하려고 했다.]

 

七國之發也,吳王悉其士卒,下令國中曰:「寡人年六十二,身自將. 

少子年十四,亦為士卒先.  諸年上與寡人比,下與少子等者,皆發.」 

發二十餘萬人.  南使閩越、東越,東越亦發兵從.

[칠국이 군사를 일으키자, 오왕은 그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면서 온 나라에 안에 명령을 

내리기를 : “ 과인은 나이가 이미 62세가 되었으나 스스로 장수가 되었다.

과인의 어린 아들은 나이가 14세인데, 사졸이 되어 역시 선봉에 섰다.

위로는 과인과 같은 나이에서부터 아래로는 과인의 어린 아들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싸움에 나서도록 하라! ”라고 하자.  그렇게 동원한 군사들은 20만 명에 달했다.

남쪽으로 사자를 보내 민월(閩越)과 동월(東越)에 보내자,

두 나라도 역시 군사를 일으켜 오왕의 명을 따랐다.]

 

孝景帝三年正月甲子,初起兵於廣陵.  西涉淮,因并楚兵. 

發使遺諸侯書曰:「吳王劉濞敬問膠西王、膠東王、菑川王、濟南王、

趙王、楚王、淮南王, 衡山王、廬江王、故長沙王子:幸教寡人! 

以漢有賊臣,無功天下,侵奪諸侯地,使吏劾系訊治,以僇辱之為故,

不以諸侯人君禮遇劉氏骨肉, 絕先帝功臣, 進任姦宄, 詿亂天下, 欲危社稷. 

[효경제(孝景帝) 3년(기원전 154년) 정월 갑자일, 오왕은 가장 먼저 광릉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서쪽으로 회수()를 건너 초나라 군사와 합쳤다. 그리고 제후들에게 사신을 파견해

다음과 같은 격문을 전했다. “ 오왕 유비가 삼가 교서왕,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조왕, 초왕,

회남왕, 형산왕, 려강왕, 그리고 돌아가신 장사왕의 왕자님께 묻사오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한나라에 적신이 있어 천하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으면서 제후들의 영토를

침탈하고, 관리들을 시켜 탄핵하고, 구속하고, 심문하고, 치죄를 자행하여 제후들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봉토를 받은 군주에 대한 예로써 유씨의 골육으로 예우하지 않고,

선제()의 공신들의 후손을 끊고 간악한 무리들을 천거하고 임명하여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어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려고 합니다.

 

陛下多病志失, 不能省察. 欲舉兵誅之, 謹聞教. 敝國雖狹,地方三千里;

人雖少,精兵可具五十萬.

寡人素事南越三十餘年,其王君皆不辭分其卒以隨寡人,又可得三十餘萬.

寡人雖不肖, 願以身從諸王.  越直長沙者, 因王子定長沙以北, 西走蜀、漢中.

[황제폐하께서는 지금 병이 많아 정신을 잃어 일을 잘 살필 수 없습니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저 간악한 무리들을 주살하려고 하니 삼가 가르침을 바랍니다.

우리 오나라는 비록 협소하지만 땅은 3천리나 되고 ; 백성들은 적으나 정예 병사들은 50만을

갖출 수 있습니다. 과인이 평소에 남월을 30여 년 동안 받들어 그의 군왕들은 군사를 나누어

과인의 뒤를 따르기를 거절하지 않으니 그들로부터 30만의 군사를 더 얻을 수 있습니다.

과인이 비록 불초하나 이 몸을 바쳐 여러 왕들을 따르고자 합니다.

남월과 장사(長沙)가 접하고 있는 곳은 장사왕의 왕자께서 장사 이북의 땅을 평정한 후에

서쪽의 촉과 한중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告越、楚王、淮南三王, 與寡人西面;齊諸王與趙王定河閒、河內,

或入臨晉關, 或與寡人會雒陽;燕王、趙王固與胡王有約,

燕王北定代、雲中,摶胡眾入蕭關,走長安,匡正天子,以安高廟.

願王勉之. 楚元王子、淮南三王或不沐洗十餘年,怨入骨髓,

欲一有所出之久矣,寡人未得諸王之意,未敢聽.

[동월왕, 초왕, 그리고 회남의 세왕께 고하건대 과인과 함께 서쪽으로 나아가고,

제나라의 여러 왕들과 조왕은 하간, 하내(河內)를 평정한 후에 임진관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낙양에서 과인과 합류하시기 바랍니다.

연왕과 조왕은 원래의 흉노와의 약속이 있으니 연왕은 대(代) 땅과 운중을 평정한 후에

흉노의 군대를 모아 소관(蕭關)으로 들어가십시오. 우리는 곧바로 장안으로 달려가

천자를 바로잡고 고제의 사당을 안정시키겠습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힘써주십시오.

초원왕의 왕자, 회남의 세 왕들은 10여 년 동안이나 목욕과 머리 감는 일조차 잊으며

골수에 맺힌 원한을 한 번 풀려고 생각한지 오래 되었으나,

과인이 아직 여러 왕들의 뜻을 알지 못해, 그래서 감히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今諸王茍能存亡繼絕, 振弱伐暴, 以安劉氏, 社稷之所願也. 

敝國雖貧, 寡人節衣食之用, 積金錢, 彊兵革, 聚穀食, 夜以繼日, 三十餘年矣. 

凡為此,願諸王勉用之.  能斬捕大將者,賜金五千斤, 封萬戶;

列將, 三千斤,封五千戶;裨將,二千斤,封二千戶;

二千石,千斤,封千戶;千石,五百斤,封五百戶:皆為列侯.

[지금 여러 왕들께서 능히 망하여 후사가 끊어진 나라를 존속케 하고, 약자를 도와

난폭한 자들을 벌 주어우리 유씨들을 안정시킨다면 이는 사직이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 오나라가 비록 가난하나 과인은 의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하고 금전을 저축하며,

병사와 무기를 갖추고 양식을 저장하는 일을 밤낮으로 계속하기를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 번 거사를 위해서 였습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힘써 주시기바랍니다. 능히 대장을 참하거나 사로잡을 수 있는 자에게는

황금 5천 근을 상금으로 주고 만호후에 봉하며, 별장(別將)의 경우는 황금 3천 근과 5천 호,

비장(裨將)의 경우는 2천근과 2천 호, 2천석의 관리는 천 근과 천 호에,

천석의 관리는 오백 근과 오백 호에 해당하는 열후에 모두 봉하겠소.

 

其以軍若城邑降者,卒萬人,邑萬戶,如得大將;人戶五千,如得列將;

人戶三千, 如得裨將;人戶千, 如得二千石; 其小吏皆以差次受爵金.  

佗封賜皆倍軍法.  其有故爵邑者,更益勿因.

願諸王明以令士大夫, 弗敢欺也. 寡人金錢在天下者往往而有, 非必取於吳,

諸王日夜用之弗能盡.  有當賜者告寡人,寡人且往遺之.  敬以聞.」

[자기의 성읍이나 군대를 이끌고 항복해 오는 자로써 군졸이 만 명, 읍이 만 호인 경우는

대장을 참하거나 포로로 잡는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입니다.

군졸이나 읍호가 5천인 경우는 열장(列將)을 얻는 경우와 같이 대우하고, 군졸이 5천 명이고

읍호()가 5천호인 경우에는 일반 장수를 얻은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입니다.

군졸이 3천 명이고, 읍이 3천호인 경우에는 비장을 얻은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입니다.

군졸이나 읍호가 천인 경우는 2천 석의 관리를 얻는 경우처럼 대우하겠습니다.

그 아래 하급관리들이 투항해오면 모두 등급에 따라 작위와 상금을 내릴 것입니다.

그 외에 모든 봉작과 상급은 지금의 한나라 군법에 정한 것보다 2배로 하겠습니다.

원래 작위와 식읍이 있는 자는 따지지 않고 그대로 두고 다시 그 위에 더하겠습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명을 사대부들에게 분명히 밝히십시오. 과인은 속이지 않겠습니다.

과인의 금전은 천하의 어디를 가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오나라에서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왕들은 오나라의 돈을 밤낮으로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상금을 주어야할 사람이 있으면 과인에게 알려주십시오.

과인이 달려가 주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알립니다.”라고 하였다.]

 

七國反書聞天子,天子乃遣太尉條侯周亞夫將三十六將軍,往擊吳楚;

遣曲周侯酈寄擊趙;將軍欒布擊齊;大將軍竇嬰屯滎陽,監齊趙兵.  

吳楚反書聞,兵未發,竇嬰未行,言故吳相袁盎.  盎時家居,詔召入見.

[칠국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하는 문서가 천자에게 보고되자,

천자는 즉시 태위 주아부(周亞父)16)를 장군으로 삼아 36명의 장군을 통솔하게 하여

오초(吳楚)를 향해 진격시켰다.

곡주후(曲周侯) 역기(酈寄)는 조나라를, 장군 란포(欒布)는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대장군 두영(竇嬰)은 형양(滎陽)에 주둔시켜 제와 조 두 나라의 연계를 끊으라고했다. 

오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문서가 올라왔지만 아직 군사를 출동시키기 전으로

두영이 떠나기 전에 오나라 승상을 지냈던 원앙(袁鞅)이라는 사람을 천자에게 천거했다.

그때 원앙은 집에 있었는데 천자의 조명을 받고 입조했다.]

 

上方與晁錯調兵笇軍食, 上問袁盎曰:「君嘗為吳相, 知吳臣田祿伯為人乎?

今吳楚反,於公何如?」  對曰:「不足憂也,今破矣.」

[그때 마침 천자와 조조는 군대의 병력과 식량의 조달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황제가 원앙을 보더니 묻기를 : “ 옛날 오나라 상국을 지낸 그대는 오나라의 대장군 전록백이

어떤 인물인지 혹시 알고 있소? 그리고 지금 오, 초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아시오? ”하자. 

원앙이 대답하기를 : “ 전록백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上曰:「吳王即山鑄錢,煮海水為鹽,誘天下豪桀,白頭舉事.  若此,

其計不百全,豈發乎?何以言其無能為也?」

 袁盎對曰:「吳有銅鹽利則有之,安得豪桀而誘之!誠令吳得豪桀,

亦且輔王為義, 不反矣.  吳所誘皆無賴子弟, 亡命鑄錢姦人, 故相率以反.」 

[황제가 묻기를 : “ 오왕은 산에서 생산되는 구리로 화폐를 주조하고, 바다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그 돈으로 천하의 호걸을 불러 모아 머리가 하얗게 된 나이에 난을 일으켰소.

일이 이와 같은데 그에게 완벽한 계책이 없다면 어찌 군사를 일으켰겠소?

어찌하여 그들이 무능하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원앙이 대답하기를 : “ 오나라가 구리와 소금의 이득이 있다고 하지만 어찌 천하의 호걸들을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오왕이 천하의 호걸들을 끌어 모았다면 그들 역시 의로써

오왕을 보좌했을 것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나라가 불러 모은 자들은 모두가 무뢰한 자들 뿐이고 도망 다니며 사전()이나 주조하는

간교한 무리들로 그런 자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晁錯曰:「袁盎策之善.」上問曰:「計安出?」 盎對曰:「願屏左右.」

上屏人,獨錯在.  盎曰:「臣所言,人臣不得知也.」乃屏錯. 

錯趨避東廂,恨甚.  上卒問盎,盎對曰:「吳楚相遺書,

曰『高帝王子弟各有分地,今賊臣晁錯擅適過諸侯,削奪之地』.

故以反為名,西共誅晁錯,復故地而罷.  方今計獨斬晁錯,

發使赦吳楚七國,復其故削地,則兵可無血刃而俱罷.」

[조조가 듣고 말하기를 : “ 원앙의 말이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가 원앙에게 묻기를 : “ 무슨 좋은 계책이 있소?”라고 하자.  

원앙이 대답하기를 : “ 원컨대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쳐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람들을 내보냈으나 조조는 물러가지 않고 혼자 남았다.

원앙이 다시 말하기를 : “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신하된 자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다.”하자. 

황제는 조조에게 자리를 떠나라고 명했다. 조조는 빠른 걸음으로 동상17)으로 물러나면서

심히 한스러워했다.  황제가 마침내 묻자,

원앙이 대답하기를 : “ 오, 초가 서로 주고 받은 서한의 내용은 ‘고제께서 왕자들과 자제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지금 적신 조조가 제 멋대로 제후들의 잘못을 문책한다고 하면서

제후들의 땅을 삭탈하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즉 오, 초가 반란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조조를 주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자기들 봉지를 찾게 되면

군사를 해산할 것입니다. 지금의 유일한 계책은 조조를 참하고 사자를 오초칠국에게 보내

그들의 삭감당한 옛 땅을 회복시켜 준다고 한다면 병사들의 피를 칼에 묻히지 않고도

그들 군사들을 물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上嘿然良久,曰:「顧誠何如, 吾不愛一人以謝天下.」

盎曰:「臣愚計無出此, 願上孰計之.」 乃拜盎為太常, 吳王弟子德侯為宗正. 

盎裝治行.  後十餘日,上使中尉召錯,紿載行東市. 錯衣朝衣斬東市. 

則遣袁盎奉宗廟,宗正輔親戚,使告吳如盎策.

[황제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마지못해 말하기를 : “ 진실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짐이 한 사람의 목숨에 연연하지 말고 천하에 사죄해야 한단 말이오? ”라고 하자. 

원앙이 대답하기를 :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 계책 외는 없사오니 폐하께서는 심사숙고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황제는 즉시 원앙을 태상(太常)18)으로 임명하여

오왕의 조카 덕후(德侯)19)를 종정(宗正)20)으로 삼았다. 원앙은 행장을 꾸려 사자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10여 일 후에 황제는 중위(中尉)를 시켜 조조를 불렀다.

중위는 조조를 속여 수레에 태워 동시(東市)로 나아갔다. 조조는 조복 차림으로 동시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곧바로 원앙은 종묘를 받들고, 종정은 황족들을 바르게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파견해 원앙의 계책대로 오나라에 알리도록 하였다.]

 

至吳,吳楚兵已攻梁壁矣.  宗正以親故,先入見,諭吳王使拜受詔.

吳王聞袁盎來,亦知其欲說己,笑而應曰:「我已為東帝,尚何誰拜?」

不肯見盎而留之軍中, 欲劫使將.  盎不肯, 使人圍守, 且殺之, 盎得夜出,

步亡去, 走梁軍, 遂歸報.

[이윽고 원앙의 일행이 오나라에 당도했을 때는 오초의 군사들은 이미 양나라의 보루를

공격하고 있었다. 종정은 오왕의 조카였으므로 먼저 들어가 접견한 오왕에게 절을 올려

황제의 명을 받들라고 말했다. 원앙도 함께 왔다는 말을 듣자 오왕은 그도 역시 자기를

설득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 

“ 내가 이미 동제(東帝)가 되었는데, 누구에게 절하고 조서를 받으라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오왕이 원앙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군중에 잡아두고 위협을 가하여 자신의 장군으로

쓰려고 했다. 원앙이 거부하자 오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잡아 가두어 지키게 하고 

장차 죽이려고 하였다.원앙은 밤을 이용하여 오왕의 진영을 탈출하여 도보로 도망치다가

양나라 군사들을 만나 장안으로 돌아와 오나라에서의 일을 보고하였다.]

 

條侯將乘六乘傳,會兵滎陽. 至雒陽,見劇孟,喜曰:

「七國反,吾乘傳至此,不自意全.  又以為諸侯已得劇孟,劇孟今無動.  

吾據滎陽,以東無足憂者.」 至淮陽,問父絳侯故客鄧都尉曰:「策安出?」

[조후() 주아부가 여섯 마리 말이 이끄는 느린 수레를 타고는 출전하여 형양에 주둔하고

군사들과 합류하려 했다. 주아부의 수레가 낙양에 이르렀을 때 극맹(劇孟)22)을 만나게 되자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오초가 반란을 일으켜 내가 육전승을 타고 가다가 이곳에 이르기는

했지만 안전하게 당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또 제후들이 이미 당신을 데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았구려.

내가 형양에 주둔해도 형양 동쪽으로는 족히 근심할 만한 인물이 없을 것 같소.”라고 하였다.

이윽고 회양(淮陽)23)에 당도한 조후는 옛날 부친 강후의 문객이었던 등도위에게 묻기를 : 

“ 무슨 좋은 수가 없습니까? ”라고 하자.] 

 

客曰:「吳兵銳甚,難與爭鋒.  楚兵輕,不能久.  方今為將軍計,

莫若引兵東北壁昌邑,以梁委吳,吳必盡銳攻之.  將軍深溝高壘,

使輕兵絕淮泗口,塞吳馕道.彼吳梁相敝而糧食竭,乃以全彊制其罷極,

破吳必矣.」  條侯曰:「善.」從其策,遂堅壁昌邑南,輕兵絕吳馕道.

[등도위가 대답하기를 : “ 오나라 군사들은 매우 정예하므로 그들과 예봉을 다툴 수 없고,

초나라의 군사들은 경무장으로 조급하니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제가 장군을 위해 계책을

말씀드린다면 지금 군사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나아가 창읍(昌邑)24)에 누벽을 쌓고

양나라는 오나라에 맡겨버리십시오. 오나라는 필시 정예병들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양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장군께서는 해자를 깊이파고 보루를 높여 굳게 지키고

있다가 발이 빠른 군사를 내어 회사구25)를 막아 오나라 군사들의 양도를 끊으십시오.

오와 양 두 나라는 서로 싸움에 지치고 또한 오군은 양식이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때 온전하고 강한 군사로 극도로 지친 군대를 제압하게 되면,

오나라 군대를 반드시 격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후가 말하기를 : " 훌륭한 계책입니다. ”라고 하며.  등도위의 계책을 쫓아 창읍의 남쪽에

견고한 방벽을 세우고 경무장한 군사를 내어 오나라의 양도를 끊게 했다.]

 

吳王之初發也, 吳臣田祿伯為大將軍. 

田祿伯曰:「兵屯聚而西, 無佗奇道, 難以就功.   臣願得五萬人,

別循江淮而上, 收淮南· 長沙, 入武關, 與大王會, 此亦一奇也. 」 

吳王太子諫曰:「王以反為名,此兵難以藉人, 藉人亦且反王,柰何?

且擅兵而別,多佗利害,未可知也,徒自損耳.」吳王即不許田祿伯.

[오왕이 처음으로 군사를 발진할 때 오나라의 신하 전록백(田祿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전록백이 계책을 말하기를 : " 대군이 한 군데에 모여 서쪽을 진격하려고 하는데

특별한 계책이 없으면 공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5만의 장병을 주시면

별동대로 만들어 강수와 회수를 돌아 북상하여 회남(淮南), 장사(長沙)를 점령하고

무관(武關)으로 들어가 폐하의 본대와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의 특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이에 오왕의 태자가 반대하며 말했다.  “ 부왕께서는 반란을 명분으로 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군사를 다른 사람의 지휘 하에 두는 일은 불가합니다. 이 사람 또한 부왕에게 반하면

그때는 어찌하시렵니까? 장차 다른 사람이 병권을 장악하여 단독으로 행동하면 얼마나 많은

다른 이해관계가 생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단지 명백한 손해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오왕은 결국 전록백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吳少將桓將軍說王曰:「吳多步兵,步兵利險;漢多車騎,車騎利平地. 

願大王所過城邑不下, 直棄去,疾西據雒陽武庫,食敖倉粟,

阻山河之險以令諸侯,雖毋入關,天下固已定矣. 即大王徐行,留下城邑,

漢軍車騎至,馳入梁楚之郊,事敗矣.」 吳王問諸老將,

老將曰:「此少年推鋒之計可耳,安知大慮乎!」於是王不用桓將軍計. 

吳王專并將其兵, 未度淮, 諸賓客皆得為將, 校尉, 候, 司馬, 獨周丘不得用.

[오나라의 젊은 장군 환(桓)이 오왕에게 말하기를 : “ 오나라 군사들은 보병이 많으니

보병은 험지에 이점이 많고, 한군은 병거와 기병이 많으니 평지에 이점이 많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진군하다가 함락되지 않은 성이 있으면 곧바로 버리고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고를 점거하고 오창의 양식을 군량으로 삼은 후에 산하의 험지에 의지하여

제후들을 호령하면 비록 관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해도 천하는 이미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대왕께서 천천히 진군하시고 성읍을 공략하는데 지체하게 되면

그사이에 한나라 군대의 수레와 기병이 당도하여 양나라와 초나라의 들판에 달려가게 되면

우리의 작전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왕이 주위의 여러 노장들에게 물었다.

노장들이 말하기를 : “이것은 한갓 어린아이가 무기를 들고 돌격하여 적의 예봉과 접전할 때나

쓰는 작전입니다. 어찌 원대한 계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오왕은 환장군의 계책도 쓰지 않았다. 오왕은 모든 군사들을 통합하여 지휘하여 진군하다가

회수를 미처 건너기 전에 여러 빈객들을 장군, 교위, 후(候)26), 사마 등으로 임명했으나

오직 주구(周丘)만 임용하지 않았다.]

 

周丘者,下邳人,亡命吳,酤酒無行,吳王濞薄之,弗任.  周丘上謁,

說王曰:「臣以無能,不得待罪行閒. 臣非敢求有所將,願得王一漢節,

必有以報王.」王乃予之.  周丘得節,夜馳入下邳.  下邳時聞吳反,皆城守. 

至傳舍,召令.  令入戶,使從者以罪斬令.

[주구는 원래 하비(下邳) 사람으로 오나라에 망명하여 술장사를 하면서 품행이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나서 오왕이 박대하고 결국은 그를 임용하지 않았다. 주구가 오왕을 찾아와 말하기를 : 

“ 신이 무능하여 죄를 받아 군중에 있으면서 임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신이 장수의 직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왕께서 한나라의

부절 한 개를 저에게 주시면 제가 반드시 왕께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오왕은 주구에게 부절을 주었다. 부절을 얻은 주구는 밤낮으로 말을 달려 하비로 갔다.

그때 하비 사람들은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하비의 전사(傳舍)27)에 당도한 주구는 현령을 불렀다.

현령이 들어오자 그의 죄명을 열거하고 따라온 종자들을 시켜 목을 베었다.]

 

遂召昆弟所善豪吏告曰:「吳反兵且至, 至, 屠下邳不過食頃. 

今先下,家室必完,能者封侯矣.」 出乃相告, 下邳皆下.  

周丘一夜得三萬人, 使人報吳王, 遂將其兵北略城邑. 比至城陽, 兵十餘萬,

破城陽中尉軍.  聞吳王敗走,自度無與共成功,即引兵歸下邳. 

未至,疽發背死.

[이어서 평소에 지방의 아전들과 친하게 지내던 그의 집안 형제들을 불러 자기의 말을 전하기를 : 

“ 오나라가 반군을 일으켜 조만간에 이곳에 이를 것이며 그들이 오면 이곳 하비는 한 식경도

안 걸려 도륙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먼저 항복하면 집안을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고,

현능한 자들은 모두 후에 봉해질 것이다.”라고 하자. 

이에 그들이 나가서 이런 소식을 서로 알리고 다니자, 하비 사람들은 모두 항복했다.

주구는 하루 밤 사이에 3만 명의 군사를 얻은 후에 그 사실을 오왕에게 보고했다.

이어서 그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아가 성읍들을 공략하여 마침내 성양에 이르렀을 때는

군사들은 10만 명으로 불어났다.주구는 성양의 중위가 이끄는 군사를 격파했다.

그러나 오왕이 한군과의 싸움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불어 거사에 성공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곧 병사들을 이끌고 하비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비에 도달하기 전에 그만 등창이 발병하여 죽고 말았다.]

 

二月中, 吳王兵既破, 敗走, 於是天子制詔將軍曰:「 蓋聞為善者天報之以福;

為非者天報之以殃.  高皇帝親表功德, 建立諸侯, 幽王、悼惠王絕無後,

孝文皇帝哀憐加惠, 王幽王子遂、悼惠王子卬等,令奉其先王宗廟, 為漢藩國,

德配天地,明并日月.  吳王濞倍德反義,誘受天下亡命罪人,亂天下幣,

稱病不朝二十餘年,有司數請濞罪,孝文皇帝寬之,欲其改行為善.

[이월 중에 오왕의 군대가 이미 싸움에서 지고 패주하자, 천자가 장군들에게 제조(制詔)28)의

명을 내려 말하기를 : “ 무릇 듣건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하늘이 복을 내려주고 그렇지 않은

자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고 했다. 고황제께서 친히 공덕을 표창하여 제후들을 세웠는데

후사가 끊긴 유왕(幽王)29)과 도혜왕(悼惠王)은 왕위를 후손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효문제가 이를 가여위 여겨 은혜를 베풀어 유왕의 아들 수(遂)를 조왕으로 세우고

도혜왕의 아들 유앙(劉卬) 등을 제후왕으로 세워 그들의 선왕의 종묘를 받들게 하고

한나라의 번국으로 삼으셨다. 그 덕은 하늘과 땅 만큼 크고, 해와 달처럼 밝다고 하겠다.

덕을 배반하고 의리를 저버린 오왕 비는 천하의 도망 다니는 죄인들을 불러 모아

사전을 주조하여 천하에 통용되는 화폐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병을 거짓으로 칭해 20여 년 동안 조현을 행하지 않았다. 이에 유관 관리들이 여러 차례

유비의 죄를 거론하여 징벌하길 청했으나 효문황제께서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여

그가 잘못을 고쳐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今乃與楚王戊、趙王遂、膠西王卬、濟南王辟光、菑川王賢、

膠東王雄渠約從反,為逆無道,起兵以危宗廟,賊殺大臣及漢使者,,

迫劫萬民, 夭殺無罪, 燒殘民家, 掘其丘冢,甚為暴虐. 今卬等又重逆無道,

燒宗廟,鹵御物,朕甚痛之.  朕素服避正殿,將軍其勸士大夫擊反虜.

擊反虜者,深入多殺為功,斬首捕虜比三百石以上者皆殺之, 無有所置.

敢有議詔及不如詔者,皆要斬.」 

[그러나 지금 오왕 비는 초왕 무(戊), 조왕 수(遂), 교서왕 앙(卬), 치천왕 현(賢),

교동왕 웅거(雄渠)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대역무도한 짓을 행하고 군사를 일으켜

종묘를 위험에 빠뜨리고 대신들과 조정의 사자들을 죽였으며 죄 없는 많은 백성을 겁주어

무고한 사람을 일찍 죽게 만들었다. 또한 민가를 불태우고 분묘를 파헤치는 등

매우 포악한 행위를 저질렀다. 지금 교서왕 등은 대역무도한 짓을 거듭 행하여

종묘를 불사르고 황실의 기물을 노략질했으니 짐이 이를 매우 애통해 하고 있다.

이에 짐은 정전에 감히 머무를 수 없어 소복을 입고 피해 있으니 장군들은 사대부들을

독려하여 반역도들을 공격하라. 반역도들을 공격하는 자들은 깊이 쳐들어가 많이 죽인 것을

공으로 여기겠으며, 사로잡은 자들 중에 비삼백석(比三百石) 이상의 역도들은 모두 죽여

놓아주지 말라! 감히 이 조서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이 조서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요참형에 처하리라!”라고 하였다.]

 

初,吳王之度淮,與楚王遂西敗棘壁,乘勝前,銳甚. 

梁孝王恐,遣六將軍擊吳,又敗梁兩將,士卒皆還走梁.  

梁數使使報條侯求救,條侯不許. 又使使惡條侯於上,上使人告條侯救梁,

復守便宜不行.  梁使韓安國及楚死事相弟張羽為將軍,乃得頗敗吳兵.

吳兵欲西,梁城守堅,不敢西,即走條侯軍,會下邑.

[반란 초기에 오왕이 회수를 건너 초왕 유무(劉戊)와 함께 서쪽으로 진군하여

극벽(棘壁)31)을 함락시키고 승세를 타고 전진할 때는 그 기세가 매우 날카로웠다.

양효왕이 두려워서 6명의 장군을 보내 오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게 했으나

다시 양나라의 두 장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사졸들은 모두 달아나 양나라로 돌아왔다.

양왕이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조후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했으나 조후는 결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조후에게 원한을 품은 양왕이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사자를 조후에게 보내 양나라를

구원하라고 명했으나 조후는 여전히 창읍을 굳게 지키기만 할 뿐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양왕이 한안국과 초왕에게 간하다가 살해당한 초나라 승상의 동생 장우를 장군으로 삼아

간신히 오나라 군사를 얼마간 꺾을 수 있었다. 오나라 군사들이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양나라가 굳게 지키자, 감히 서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즉시 조후의 군영이 있는 쪽으로

진격하여 하읍(下邑)32)에서 조우하였다.]

欲戰,條侯壁,不肯戰.  吳糧絕,卒饑,數挑戰,遂夜奔條侯壁,驚東南. 

條侯使備西北,果從西北入.  吳大敗,士卒多饑死,乃畔散. 

於是吳王乃與其麾下壯士數千人夜亡去,度江走丹徒,保東越.  

東越兵可萬餘人,乃使人收聚亡卒.  漢使人以利啗東越,東越即紿吳王,

吳王出勞軍,即使人鏦殺吳王,盛其頭,馳傳以聞.

[오나라 군대는 싸우고 싶었으나 조후는 영채()만 굳게 지키며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오나라는 군량이 다 떨어져 병사들이 굶주리게 되자 더욱 자주 싸움을 걸다가,

마침내 야음()을 틈타 조후의 영채를 습격했다. 오나라 군대는 먼저 조후 영채 동남쪽에서

소란을 떨었으나 조후는 서북쪽을 수비하게 했다. 얼마 후 과연 오나라 군대는 서북쪽에서

침입해 왔다. 오나라 군대는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많은 사졸들이 아사했으며 대부분은

흩어져 달아났다. 이에 오왕은 그 휘하 장사들 수천 명과 함께 야음을 틈타 도망쳐

강수를 건너 단도33)로 들어가 동월왕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

동월에서 만여 명의 군사를 모을 수 있어 사람들을 시켜 도망치던 사졸들을 모으게 했다.

한나라 사자가 이익으로써 동월왕을 유혹하자, 동월왕은 오왕이 나가서 군사를 위로할 때

사람을 시켜 창으로 오왕을 찔러 죽이고 오왕의 머리를 잘라 그릇에 담아

치전(馳傳)34)에 실어 한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吳王子子華、子駒亡走閩越. 吳王之棄其軍亡也, 軍遂潰, 往往稍降太尉、

梁軍. 楚王戊軍敗,自殺.  三王之圍齊臨菑也,三月不能下. 

漢兵至,膠西、膠東、菑川王各引兵歸. 膠西王乃袒跣, 席槁, 飲水謝太后.

王太子德曰:「漢兵遠,臣觀之已罷,可襲,願收大王餘兵擊之,

擊之不勝,乃逃入海,未晚也.」

王曰:「吾士卒皆已壞,不可發用.」弗聽. 

[오나라의 왕자 자화(子華)와 자구(子駒)는 도망쳐 민월(閩越)로 들어갔다.

오왕이 그의 군사들을 버리고 도망치자, 그의 군대는 마침내 무너지고 속속 태위와 양나라에

투항했다. 초왕 유무는 그의 군대가 싸움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교서, 교동, 치천 등의

세 왕에 의해 포위 당해 공격을 받고 있던 제나라의 임치성은 3개월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윽고 한나라의 구원병이 당도하자 세 왕의 군대는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교서왕은 육단에 맨발로 짚 위에 앉아 물을 마시며 왕의 태후에게 사죄했다.

교서왕의 태자 유덕(劉德)이 말하기륽 : “ 한나라 군대는 멀리 왔기 때문에 제가 살펴보니

그들은 이미 지쳐있으니 기습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한군을

기습해서 혹시 이기지 못한다면 그때는 바다로 들어가 도망쳐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자. 

교서왕이 대답하기를 : “ 나의 병사들은 모두 이미 피폐해져 다시 일으켜 쓸 수가 없다.”하며,

태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漢將弓高侯穨當遺王書曰:「奉詔誅不義,降者赦其罪,復故;不降者滅之. 

王何處,須以從事.」 王肉袒叩頭漢軍壁,

謁曰:「臣卬奉法不謹, 驚駭百姓, 乃苦將軍遠道至于窮國, 敢請菹醢之罪.」

弓高侯執金鼓見之,曰:「王苦軍事,願聞王發兵狀.」

[한나라 장수 궁고후 한퇴당(韓頹當)35)이 교서왕에게 편지를 보내 알리기를 :

“나는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불의한 자들을 주벌하고 항복하는 자는 그 죄를 사면하여

옛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항복하지 않는 자는 그를 멸할 것입니다.

왕은 어느 쪽으로 처신할 것입니까? 회답을 기다려 일을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교서왕이 육단으로 고두(叩頭)를 행하며 한군의 벽루 앞에 와서 퇴당을 보고 말하기를 : 

“ 신 유앙은 법을 받들어 삼가지 않고 백성들을 놀라게 했으며 장군으로 하여금 먼 길을 오는

수고로움을 끼쳐 궁벽한 나라에 임하게 만들었으니 감히 청컨대 저를 죽여 육젓을 담그는

형벌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궁고후는 군대를 지휘할 때 사용하는

징과 북을 가지고 와서 교서왕을 보고 말하기를 : “ 왕께서는 군사의 일로 고통을 받고 계신데

원컨대 군사를 일으킨 자초지종을 듣고 싶습니다. ”라고 하자.] 

 

王頓首膝行對曰:「今者, 晁錯天子用事臣, 變更高皇帝法令, 侵奪諸侯地.

卬等以為不義,恐其敗亂天下, 七國發兵,且以誅錯. 

今聞錯已誅,卬等謹以罷兵歸.」 

將軍曰:「王茍以錯不善,何不以聞?未有詔虎符,擅發兵擊義國.

以此觀之,意非欲誅錯也.」

[교서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걸음으로 기어와서 말하기를 : 

“ 지금까지 조조는 천자가 임용한 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황제가 만드신 법령을 멋대로

바꾸어 제후들의 영지를 침탈했습니다. 이 유앙을 포함한 여러 왕들이 그것이 잘못된 일로써

천하를 어지럽히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칠국이 군사를 일으켜 조조가 주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조조는 이미 주살되었다고 해서 이 유앙을 포함한 여러 왕들은

이미 군사를 파해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퇴당이 말하기를 :

“ 왕께서 진실로 조조가 옳지 못했다고 생각했다면 어찌하여 황제께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병부도 받기도 전에 마음대로 군대를 동원하여 의로운 나라를 공격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왕의 뜻은 조조를 주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라고 하였다.

 

乃出詔書為王讀之. 讀之訖,曰:「王其自圖.」

王曰:「如卬等死有餘罪.」遂自殺.

太后、太子皆死.  膠東、菑川、濟南王皆死,國除,納于漢.

酈將軍圍趙十月而下之,趙王自殺.  濟北王以劫故,得不誅,徙王菑川.

初,吳王首反,并將楚兵,連齊趙.  正月起兵,三月皆破,獨趙後下. 

復置元王少子平陸侯禮為楚王, 續元王後.  徙汝南王非王吳故地, 為江都王. 

[이어서 황제의 조서를 꺼내어 교서왕에게 읽어 주었다.

퇴당은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말하기를 : "왕께서는 마땅히 스스로 잘 생각하여 하십시오.”하자.

교서왕이 대답하기를 : “신과 같은 사람은 죽어서도 죄가 남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후와 태자도 그 뒤를 따랐다.

교동, 치천, 제남의 왕들도 역시 자살하고 봉국은 폐해져 한나라에 귀속되었다.

한편 장군 역기가 조나라의 도성을 포위한지 10개 월 만에 함락시키자 조왕은 자살했다.

제북왕은 협박을 받았다고 인정되었으므로 주살되지 않고 봉국을 치천으로 옮겼다.

처음에 오왕이 맨 먼저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의 군사와 합치고 다시 조나라와 연합했다.

정월에 기병하여 3월에 모두 싸움에 졌으나 조나라만은 후에 함락되었다.

다시 초원왕의 막내아들 유평이 평륙후의 신분에서 초왕으로 올라 원왕의 후사를 잇게 했다.

오나라의 옛 땅에는 여남왕 유비36)를 옮겨 가게한 후에 강도왕으로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太史公曰:

吳王之王, 由父省也.  能薄賦斂, 使其眾, 以擅山海利.  逆亂之萌, 自其子興. 

爭技發難,卒亡其本;親越謀宗,竟以夷隕.  晁錯為國遠慮,禍反近身.

袁盎權說,初寵後辱.  故古者諸侯地不過百里,山海不以封.

「毋親夷狄, 以疏其屬」,蓋謂吳邪?「毋為權首, 反受其咎」, 豈盎、錯邪?

 

[태사공이 말한다.

“ 오왕 유비가 왕이 된 것은 그의 부친이 유중이 강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세를 가볍게 거두고, 무리들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산과 바다의 이익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란의 싹은 그의 아들로 인해 일어났다.

태자와 장기를 두다가 다투는 데서 재앙이 발생하여 마침내는 그 근본을 망하게 했고, 

월과 가까이 하여 동종을 도모하려고 했다가 결국은 이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조조는 나라의 먼 장래를 내다봤으나 화는 오히려 자신의 몸에 가까이 있었다.

원앙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유세를 잘해 처음에는 총애를 받다가 후에 그 몸은 욕됨을 입었다.

그래서 옛날 제후들의 땅은 백리를 넘지 않았고 산과 바다가 있는 땅에는 봉하지 않았던

것이다. ‘ 이적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말고 동족들과는 소원하게 지내지 말라.’라고 한 말들은 

어찌 오나라에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 ‘ 권모를 쓰는데 앞장서지 말라,  그 화는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조조와 원앙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각주 】

1) 형(荊)/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荊州市) 일대를 가리킨다.

2) 초(楚)/ 지금의 강소송 서주시로 초한 쟁패시 항우가 도읍으로 삼았던 팽성(彭城)을 일대다.

3) 기현(蘄縣)/ 지금의 안휘성 북부의 숙주시(宿州市) 남쪽으로 지금의 지명도 기현이다.

    진승이 진나라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대택향(大澤鄕)은 기현의 동쪽의 고을이었다.

4) 회추(會甀)/ 지금의 안휘성 기현집(蘄縣集) 서쪽이다.

5) 유고(劉賈)/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96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으로 제후왕이다.

    한고조 유방의 사촌형제다. 한왕 원년 기원전 206년, 고조가 한중에서 나가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장군이 되어 종군했다. 계속 동쪽으로 나가 항우를 공격할 때 전공을 쌓았다.

    한왕 5년 기원전 202년 제후군과 힘을 합하여 해하에서 항우를 공격하여 격멸시켰다.

    한고조 6년 한고조에 의해 형왕(荊王)에 봉해져 재위 6년 차에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 영포의

    공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도망치다가 부릉(富陵)에서 잡혀 살해되었다.

    부릉은 지금의 강소성 홍택(洪澤) 서다.

6) 이 말은 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놓고 다툰 항우와 강동 자제 8천 명으로 이루어진

    초군의 주력군이 오나라의 회계군 출신임을 말한다.

    한고조는 초한쟁패시 내내 용맹한 항우와 초나라 군사들을 매우 두려워했다.

7) 3군/ 동양군(東陽郡), 장군(鄣郡), 오군(吳郡)이다. 한서(漢書) 유비전의 기사다.

    上患吳、會稽輕悍”(《漢書·吳王濞傳》,苦於自己兒子年幼,加之荊王劉賈無後,

    劉邦改荊國爲吳國,封劉濞爲吳王,統治三郡五十三城,以廣陵爲都. 

    廣陵是戰國時期楚懷王熊懷在邗城舊址上所建之城,

    因爲這裏當時是一片丘陵,就取“廣被丘陵”之意而名.  揚州別稱廣陵也就始於此時 .

8) 원문은 察見淵中魚(찰견연중어),不祥(불상)이다. 한비자 세림(說林) 편에 나오는 말로

    ‘ 군주가 신하의 은밀한 곳을 알게 되면 그 신하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고를 일으키게 되어 화란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9) 궤장(几杖)/ 궤(几)는 연로한 사람이 앉을 때 기대는 책상이고 장(杖)은 지팡이다.

    옛날 왕조시대에는 나이든 사람을 공경한다는 표시로 왕이 직접 궤장을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10) 대역금(代役金)/ 원문은 천경(踐更)으로 자신이 직접 군영에 복무하는 자를 말하고

      대역금을 내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복역시키는 자는 과경(過更)이라고 한다.

      즉 자신이 직접 병역에 복무하는 자에게도 정부의 재정으로 대역금을 지불했다는 뜻이다.

11) 어사대부(御史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진한시대의 중앙정부 최고의

      관직이다. 관리의 감찰과 법의 집행, 중요문서와 도적(圖籍)의 관리 등을 맡았다.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 행정부의 장인 승상(丞相)과 함께 삼공(三公)이라고 칭했다.

12) 유무(劉戊)/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54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이다.

      한고조 유방의 동모제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손자이고 유영(劉郢)의 아들이다.

      한문제 6년(전 174년) 부왕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경제(漢景帝) 3년 (전 154년) 한나라 조정이 그의 봉지에서 동해군(東海郡)을 삭감하자

      불만을 품고 오왕 유비(劉濞)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상 이를 오초칠국지란(吳楚七國之亂)이라고 한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일으켜 결국 양도가 끊겨 싸움에 패한 유무는 자살했다.

13) 유수(劉遂)/ 한고조 유방의 아들인 유우(劉友)의 아들이다.

      여후 7년 기원전 181년 그의 부왕 조유왕(趙幽王) 유우가 고후의 핍박을 받아 자살하자

      한문제 원년(전179년) 유수가 그 뒤를 이어 조왕의 자리에 앉았다.

      조왕 재위 26년(한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조조의 주장에 따라 상산군(常山郡)이

      그의 봉지에서 삼감되자, 원한을 품은 그는 오나라 및 흉노와 내통하여 반란을 모의했다.

      그의 상국 건덕(建德)과 내사 왕한(王悍)이 간하여 그만두기를 간했으나 두 사람을 살해하고

      북흉노와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의 서쪽 변경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한나라 장군 역기(酈寄)가 이끄는 관군에게 포위를 당한 후에 공격을

      당했다. 오초(吳楚)가 싸움에서 패하자 제나라를 격파한 한나라 장수 난포(欒布)의

      공격을 받아 자살하고 말았다.

14) 원래 산동성의 제나라는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 유비(劉肥)가 봉해진 나라다.

      기원전 179년 제도혜왕이 죽자 제왕의 자리는 아들 애왕(哀王) 유양(劉襄)에 이어졌다가,

      기원전 178년 문왕 유칙(劉則)을 거쳐 다시 기원전 164년 유비의 아들 유장려(劉將閭)가

      그 뒤를 이어져 기원전 154년에 발발한 오초칠국의 난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여씨들의 반란에 공을 세운 도혜왕의 다른 아들인 유장(劉章)과

      유흥거(劉興居)를 성양왕(城陽王)과 제북왕에 봉할 때 그들의 다른 형제들도 함께 봉했다.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치천왕(菑川王) 유현(劉賢),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의 형제들이 그들이다.

      제북왕 유흥거는 기원전 177년 반란을 일으켜 살해당하고 그 자리는 동생 유지(劉志)가

      이었음으로 오초칠국의 난 당시 제나라 지역의 제후왕들은 모두 제도혜왕의

      일곱 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5) 회남의 세 세왕/ 회남왕(淮南王), 형산왕(衡山王), 려강왕(廬江王)을 말한다.

16) 주아부(周亞父)/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43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며 장군이다.

      지금의 강소성 패현(縣)인 패(沛) 출신으로 주발(周勃)의 아들이다.

      그의 형 주승이 주발의 작위인 강후 자리를 이었으나 후에 죄를 짓고 후의 작위를 잃었다.

      주발의 공을 잊지 못한 한문제가 그의 재위 후원2년(전162년)에 주아부를 조후에 봉했다.

      이윽고 흉노가 대거 침공하자 그는 하남을 지키는 장수가 되어 세류(細柳)에 주둔하며

      군령을 엄정하게 행했다. 세류는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서남이다.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문제가 친히 군영에 임하기 위해 전령이 먼저 고하려고

      했으나 군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군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 우리는 단지 장군의 명만

      따를 뿐이지 천자의 조명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문제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 ‘ 주아부야말로 진정한 장수로다!’라고 칭찬했다.

      후에 중위가 되었다. 이윽고 문제가 죽고 경제가 서자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옳겼다.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태위(太尉)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오초(吳楚)의 반군을 공격하여 3개 월만에 평정하고 돌아와

      승상이 되어 경제로부터 신임을 크게 받았다. 후에 경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하자,

      그는 완강하게 반대했음으로 황제와 사이가 소원해졌다.

      중원 3년(기원전 147년) 병을 칭하고 승상의 자리에 물러나 집에 은거했다.

      후에 그의 아들이 황제가 사용하는 물품을 몰래 사들였다가 연좌되어 옥에 갇히자

      음식을 끊고 죽고 그의 후국은 없어졌다.

17) 동상(東廂)/ 상(廂)은 중심이 되는 방이나 가옥의 곁채나 곁방을 말한다.

      즉 궁궐의 동쪽 곁에 있는 대기실과 같은 방을 말한다.

18) 태상(太常)/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19) 덕후(德侯)/ 원래 유비의 동생 유광(劉廣)을 덕후에 봉했으나 이 때는 유광은 죽고

      그의 아들 유통(劉通)이 작위를 잇고 있었다.

20) 종정(宗正)/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정부기구로

      원래 주나라의 소종백(小宗伯)이 그 효시다.

      9경에 속하고 황실의 친족의 일을 주관하고 황족과 외척의 명부를 작성하고 관리했다.

      황족들이 지은 범죄 중 곤형(髡刑) 이상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은 먼저 종백에게 고하고

      다시 황제에게 보고하게 하고 일반 사법기관의 관리들은 심문할 수 없도록 했다.

      녹봉은 중2천석이고 속관으로는 사공(司空), 령(令), 승(丞), 내관장(內管長) 등이 있었다.

21) 육승전(六乘傳)/ 고대에 역참(驛站)에 준비해 두고 정부의 공문을 전달하기 위한

      6마리의 말이 끌었던 전거(傳車)를 말한다.

22) 당시의 유명한 협격으로 하남 일대에 명성이 대단했다.

23) 회양(淮陽)/ 회양국(淮陽國)의 치소로 지금의 하남성 회양시(淮陽市)다.

      오초칠국의 난 때 회양왕은 한경제의 동모제 유무(劉武)였다.

24) 창읍(昌邑)/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巨野縣) 남쪽이다.

25) 회사구(淮泗口)/ 사수(泗水)가 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강소성 회음시(淮陰市) 서남쪽의

      홍택호(洪澤湖)에서 회수에 유입되는 지점을 말한다.

26) 후(候)/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다 답습한 직관으로 변경지역 군(郡)의 도위 밑에

      후관(候官)을 설치하고 그 밑에 전투를 담당하는 후(候)와 봉화(烽火)를 담당하는

      수(燧)를 거느리게 했다.

27) 전사(傳舍)/ 옛날 행인이나 손님을 위해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관사다.

28) 제조(制詔)/ 한나라 때 황제가 내린 명령으로 모두 네 가지로 구분되었다.

      제(制)는 制書로 황제가 삼공을 통하여 주군에 전달하는 명령이고,

      조(詔)는 조서(詔書)로 황제가 일반 백성들에게 포고문을 통하여 명을 내리는 행위다.

      책서(策書)는 관리들의 임면에 관한 명령서이며 계서(戒書)는 자사나 태수들에게

      훈계하는 명령이다. 한경제가 조와 제의 형식을 겸용하여 명을 내린 것은

      칠국의 반란사건을 엄격히 다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9) 조유왕(趙幽王)/ 한고조의 6남 유우(劉友)로 고조 11년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가

      혜제(惠帝) 원년 기원전 194년 조왕(趙王)으로 봉국을 옮겼다.

      기원전 181년 여후가 자신의 전권에 반대한 그를 경사로 불러 연금시키고 굶겨죽였다.

      시호는 유(幽)로 조유왕이다. 오초칠국의 난에 참가한 조왕 유수(劉遂)는 그의 아들이다.

30) 비삼백석(比三百石)/ 한나라 때 가장 낮은 관리의 녹봉이다. 삼공에 해당하는 만석부터

      말단 관리인 비삼백석까지 있었다. 비삼백석의 녹봉은 실제로 월 37석으로

      년봉으로는 444석이다. 한나라 때 1석은 지금이 단위로 말하면 약 20리터에 해당한다.

31) 극벽(棘壁)/ 지금의 하남성 영릉현 서남으로 당시 양(梁)나라 남쪽의 접경지역이었다.

32) 하읍(下邑)/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이다.

33) 단도(丹徒)/ 지금의 강소성 단도현이다.

34) 치전(馳傳)/ 속도가 빠른 역마다.

35) 한퇴당(韓頹當)/ 한왕 신(信)의 아들이다.

      한신이 싸움에서 죽고 흉노에 남겨진 퇴당은 후에 한나라에 귀순했다. (한신노관열전)

36) 유비(劉非)/ 한경제의 아들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