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4. 燕召公世家

第 四. 燕召公世家

덕치/이두진 2021. 6. 28. 17:41

            史記 世家

 

    第 四. 燕召公世家(연소공세가)

 

 

召公奭與周同姓,姓姬氏.  周武王之滅紂,封召公於北燕.

其在成王時,召王為三公:自陜以西,召公主之;自陜以東,周公主之.

成王既幼,周公攝政,當國踐祚,召公疑之,作君奭.  君奭不說周公.
周公乃稱「湯時有伊尹,假于皇天;在太戊時,則有若伊陟、臣扈,假于上帝,巫咸治王家;

在祖乙時, 則有若巫賢;在武丁時,則有若甘般:率維茲有陳,保乂有殷」.  於是召公乃說.

[소공(召公) 석(奭)은 주(周)나라 왕실과 같은 성인 희씨(姬氏)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킨 후에, 소공을 북연(北燕) 지역의 제후에 봉했다.
성왕(成王) 때 소공은 삼공(三公) 중의 하나인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섬(陝)의 서쪽 지역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쪽 지역은 주공(周公)이 관할하게 되었다.
성왕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주공이 국정을 대행해 국사를 관장하자,

소공은 주공이 천자의 지위를 탐하지는 않을지 의심했다. 이에 주공은 「군석(君奭)」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래도 소공이 주공을 고깝게 생각하자, 주공은 일컫기를 :

“상나라 탕왕(湯王)에게는 이윤(伊尹)이라는 어진 분이 계시어 하늘의 뜻에 따름으로써 훌륭한 업적을 쌓았고,

태무제(太戊帝) 때에는 이척(伊陟)이나 신호(臣扈) 같은 분이 계시어 하늘의 뜻에 따라 큰 공적을 쌓았으며,

무함(巫咸) 같은 대신이 왕가(王家)를 보필했다.  조을제(祖乙帝) 때에는 무현(巫賢) 같은 어진 신하가 있었으며,

무정제(武丁帝) 때에는 감반(甘般) 같은 어진 신하가 있었다.

이분들이 모두 현신(賢臣)으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함과 동시에 온갖 힘을 다 기울여 군왕을 보필함으로써

상나라 왕조가 안정되었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제에서야 비로소 소공은 주공이 국사를 관장하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했다.]

召公之治西方,甚得兆民和.  召公巡行鄉邑,有棠樹,

決獄政事其下,自侯伯至庶人各得其所,無失職者.

召公卒,而民人思召公之政,懷棠樹不敢伐,哥詠之,作甘棠之詩.  自召公已下九世至惠侯.

[소공이 섬서(陝西) 지역을 다스릴 때 널리 많은 백성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가 여러 향촌과 도시를 순시할 때에는 으레 팥배나무[甘棠樹]를 심어 놓고

그 아래에서 송사(訟事)를 판결했고 정사(政事)를 처리했다. 

그리고 후(侯)와 백(伯) 같은 귀족에서부터 농사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적절하게 일을 맡김으로써 직무나 직업을 잃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했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소공의 정치적 공적을 사모하고 팥배나무를 그리워한 나머지 그 나무를 잘 보존하고

잘 길렀으며 “감당(甘棠)”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서 그의 공덕을 가송(歌頌)했다.

소공으로부터 9대를 내려오면 혜후(惠侯)에 이른다.]

燕惠侯當周厲王奔彘,共和之時.  惠侯卒,子釐侯立.  是歲,周宣王初即位.

釐侯二十一年,鄭桓公初封於鄭.

三十六年,釐侯卒,子頃侯立.

頃侯二十年,周幽王淫亂,為犬戎所弒.  秦始列為諸侯.

二十四年,頃侯卒,子哀侯立.  哀侯二年卒,子鄭侯立.  鄭侯三十六年卒,子繆侯立.

[연혜후가 제후에 봉해진 시기는 바로 주 여왕(周厲王)이 체(彘) 지방으로 도망친 후에

공화정(共和政)이 실시되던 시기에 상당한다. 연 혜후가 죽은 다음 그의 아들인 희후(釐侯)가 그 뒤를 이었다.

그해에 주나라에서는 선왕(宣王)이 새로 즉위했다.
희후 21년, 정(鄭)나라에서는 환공(桓公)이 처음으로 제후에 봉해졌다.
36년, 희후가 죽자 그의 아들인 경후(頃侯)가 즉위했다.
경후 20년, 주나라에서는 여색에 빠져서 정사를 소홀히 하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리고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에 봉해졌다.
24년, 경후가 죽자 아들인 애후(哀侯)가 즉위했다. 애후가 2년 만에 죽고 아들 정후(鄭侯)가 뒤를 이었다.
정후는 36년간 후위에 머물다가 죽고 아들인 목후(繆侯)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繆侯七年,而魯隱公元年也.  十八年卒,子宣侯立.

宣侯十三年卒,子桓侯立.  桓侯七年卒,子莊公立.

莊公十二年,齊桓公始霸.

十六年,與宋、衛共伐周惠王,惠王出奔溫,立惠王弟穨為周王.

十七年,鄭執燕仲父而內惠王于周.
二十七年,山戎來侵我,齊桓公救燕,遂北伐山戎而還.

燕君送齊桓公出境,桓公因割燕所至地予燕,使燕共貢天子,如成周時職;使燕復修召公之法.
三十三年卒,子襄公立.

[연나라 목후 7년은 노 은공(魯隱公) 원년에 상당한다. 목후는 18년 만에 죽고 아들인 선후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선후는 13년 만에 죽고 아들 환후(桓侯)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환후는 7년 만에 죽고 아들 장공이 후위를 이었다.
연나라 장공 12년에 제(齊)나라에서는 환공(桓公)이 처음으로 칭패(稱覇)했다.
장공 16년에는 송(宋)나라, 위(衛)나라와 함께 주나라 혜왕(惠王)을 공격했다.

혜왕이 온읍(溫邑)으로 도망을 치자 혜왕의 아우인 희퇴(姬頹)를 주나라 왕으로 옹립했다.
장공 17년에 정나라가 연나라 중보를 체포 구금하고 나서 그곳에 붙잡혀 있던 혜왕을 풀어주어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장공 27년에 산융(山戎)이 연나라를 침범하자 제나라 환공이 연나라를 구원했다.

덕택에 산융을 북쪽으로 쫓아 보내는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연나라 임금이 제나라 환공을 배웅하기 위해 국경 밖에까지 나가자,

제나라 환공은 곧 연나라 임금이 친히 배웅 나온 땅까지를 연나라에 떼어주었고,

연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는데,

조공으로 바친 물품이 성주(成周) 때와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또 연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예전에 하던 소공(召公)의 법도를 어기지 않고 다시 잘 따르도록 했다.
장공이 후위에 오른 지 33년 만에 죽자 아들인 양공(襄公)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襄公二十六年,晉文公為踐土之會,稱伯.

三十一年,秦師敗于殽.

三十七年,秦穆公卒.

四十年,襄公卒,桓公立.

桓公十六年卒,宣公立.  宣公十五年卒,昭公立.

昭公十三年卒,武公立.  是歲晉滅三郤大夫.

武公十九年卒,文公立.  文公六年卒,懿公立.

懿公元年,齊崔杼弒其君莊公.  四年卒,子惠公立.

[양공 26년에 진 문공(晉文公)은 천토(踐土)에서 제후의 회맹(會盟)을 소집해 패주(覇主)로 뽑혔다.
31년에는 진(秦)나라 군사가 효산(殽山)에서 진(晉)나라 군사에게 패했고,
37년에 진 목공(秦穆公)이 죽었다.

40년에 양공이 죽고 환공(桓公)이 즉위했다.
환공은 16년 만에 죽고 선공(宣公)이 즉위했다.

선공은 15년 만에 죽고 소공(昭公)이 뒤를 이었다.
소공은 13년 만에 죽고 무공(武公)이 뒤를 이었다.

그해에는 진(晉)나라가 삼극대부(三郤大夫)를 주멸(誅滅)시킨 일도 일어났다.
무공은 19년 만에 죽고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문공은 6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의공(懿公)이 즉위했다.
의공 원년에 제(齊)나라에서는 대부인 최저(崔杼)가 임금인 장공(莊公)을 시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의공은 재위 4년 만에 죽고 아들인 혜공(惠公)이 즉위했다.]

惠公元年,齊高止來奔.

六年,惠公多寵姬,公欲去諸大夫而立寵姬宋,大夫共誅姬宋,惠公懼,奔齊.
四年,齊高偃如晉, 請共伐燕, 入其君.  晉平公許, 與齊伐燕, 入惠公.  惠公至燕而死.  燕立悼公.

悼公七年卒,共公立. 共公五年卒,平公立. 晉公室卑,六卿始彊大.

平公十八年,吳王闔閭破楚入郢.

十九年卒,簡公立. 簡公十二年卒,獻公立. 晉趙鞅圍范、中行於朝歌.

[혜공 원년, 제(齊)나라의 고지(高止)가 연나라로 도망쳐 왔다.
6년, 혜공은 많은 총신(寵臣)들을 두고 있었는데, 혜공이 여러 대부들을 배제하고 총신 송(宋)을 중용하려고 하자,

낌새를 눈치 챈 대부들이 힘을 합쳐 송을 죽여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혜공은 두려운 나머지 제나라로 도망갔다.

4년, 제나라의 고언(高偃)이 진(晉)나라로 가서 함께 연나라를 토벌해 연 혜공을 돌려보내자고 청했다.
진(晉)나라의 평공(平公)이 그 계획을 받아들여 제나라와 함께 연나라를 토벌해 혜공을 연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혜공이 연나라로 돌아와서 곧 죽어버리자 연나라 사람들은 도공(悼公)을 옹립했다.
도공이 재위 7년 만에 죽자 공공(共公)이 즉위했다. 공공은 5년 만에 세상을 하직했고 평공(平公)이 뒤를 이었다.
진(晉)나라에서는 군권(君權)이 쇠약한 틈을 타서 육경(六卿)들의 세력이 점차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평공 18년,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초(楚)나라를 공략해 수도인 영(郢)에까지 진입했다.
평공은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후위를 물려받았던 간공(簡公)이 재위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헌공(獻公)이 즉위했다.
진(晉)나라에서는 대신 조앙(趙鞅)이 조가(朝歌)에서 대신인 범길석(范吉射)과 중항인(中行寅)을 포위했다.]

獻公十二年,齊田常弒其君簡公. 

十四年,孔子卒.

二十八年,獻公卒,孝公立.

孝公十二年,韓、魏、趙滅知伯,分其地,三晉彊. 

十五年,孝公卒,成公立.  成公十六年卒,湣公立.

湣公三十一年卒,釐公立.  是歲,三晉列為諸侯.

釐公三十年,伐敗齊于林營.  釐公卒,桓公立.

桓公十一年卒,文公立.  是歲,秦獻公卒. 秦益彊.

文公十九年,齊威王卒.

二十八年,蘇秦始來見,說文公.  文公予車馬金帛以至趙,趙肅侯用之.

因約六國,為從長.  秦惠王以其女為燕太子婦.

[헌공 12년, 제나라 전상(田常)이 자기 나라의 임금인 간공(簡公)을 시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14년, 공자가 죽었다.

28년, 헌공이 죽자 효공(孝公)이 즉위했다.
효공 12년, 진(晉)나라에서는 여섯 대신 중에서 한 강자(韓康子), 위 환자(魏桓子), 조 양자(趙襄子),

세 사람이 같은 여섯 대신 중의 한 사람인 지백(知伯)을 죽이고, 그의 영지(領地)를 나누어 가졌고,

이후 삼진(三晉)의 세력은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15년,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성공(成公)이 즉위했다. 성공은 16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민공(湣公)이 즉위했다.
민공은 3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희공(釐公)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같은 해에 삼진(三晉), 즉 한(韓), 위(魏), 조(趙)는 주 천자에 의해 각각 제후로 공식 인정되었다.
희공 30년, 임영(林營)에서 제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희공이 서거하자 환공(桓公)이 즉위했다.
환공은 11년 만에 서거했고, 문공(文公)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해에 진 헌공(秦獻公)이 서거했다.

그 이후로 진(秦)나라가 더욱 강성해졌다.

문공 19년, 제나라 위왕(威王)이 죽었다.

28년, 소진(蘇秦)이 최초로 연나라 문공을 배견(拜見)하러 와서 문공에게 자신의 주장을 선양(宣揚)했다.
문공이 그에게 말과 수레 그리고 돈과 비단을 주어 조(趙)나라로 보내자 조나라 숙후(肅侯)가 그를 임용했다.
6국(六國)이 연맹을 형성함에 따라 연나라 문공이 그 연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진(秦)나라의 혜왕(惠王)은 자신의 딸을 연나라로 시집보내 태자의 아내가 되게 했다.]

二十九年,文公卒,太子立,是為易王. 

易王初立,齊宣王因燕喪伐我,取十城;蘇秦說齊,使復歸燕十城.

十年,燕君為王. 蘇秦與燕文公夫人私通,懼誅,乃說王使齊為反閒,欲以亂齊.

易王立十二年卒,子燕噲立.  燕噲既立,齊人殺蘇秦.

蘇秦之在燕,與其相子之為婚,而蘇代與子之交.  及蘇秦死,而齊宣王復用蘇代.

[​29년에 문공이 서거하자 태자가 후위를 물려받았으니, 그가 바로 역왕(易王)이다.
역왕이 막 즉위했을 때 제 선왕(齊宣王)은 문공의 장례를 틈타서 연나라를 침략해 10성(城)을 탈취했는데,
소진(蘇秦)이 제나라를 설득시켜 그 10성을 연나라로 되돌려주게 했다.

즉위한 지 10년 되던 해부터 연나라 임금은 왕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소진이 연나라 문공의 부인과 남몰래 간통했다. 그러한 일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움을 느낀 소진은 왕을 꼬여

자신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해서 보내주면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제나라를 교란시킬 묘책을 찾아보겠노라 했다.

역왕은 재위 1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인 희쾌(姬噲)가 왕위에 올랐다.
쾌가 연나라 왕으로 즉위한 후에 제나라 사람이 소진을 죽였다.

소진이 연나라에 있을 때 재상인 자지(子之)와 사돈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우인 소대 또한 자지와 교분을 맺었다.

진이 죽고 나서 제나라 선왕은 다시 소대를 중용하였다.]

 

燕噲三年,與楚、三晉攻秦,不勝而還.  子之相燕,貴重,主斷.

蘇代為齊使於燕,燕王問曰:「齊王奚如?」對曰:「必不霸.」
燕王曰:「何也?」對曰:「不信其臣.」 蘇代欲以激燕王以尊子之也.

於是燕王大信子之.  子之因遺蘇代百金,而聽其所使.

[연왕 쾌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연나라는 초 나라 및 한, 위, 조 삼진(三晉)과 더불어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자지는 연나라의 재상이 된 이후로 지위가 더욱 높아지고 권세가 강해져서 결국에는 국사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소대가 제나라 사신으로 연나라에 당도했을 때 연왕이 그에게 묻기를 : “제나라 왕은 어떠하오 ? ” 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 패주가 되기는 틀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연왕이 되묻기를 : “어찌 그러한가?”라고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 “자신의 신하를 신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소대는 그러한 말로 연왕으로 하여금 자지를 더욱 존중하게 할 속셈이었다.

과연 연왕이 자지를 크게 신임하자, 자지는 소대에게 1백 금(金)을 마음대로 쓰도록 주고,

그를 등용하여 의견을 두루 청취하였다.]​

 

鹿毛壽謂燕王:「不如以國讓相子之.  人之謂堯賢者,以其讓天下於許由,許由不受,

有讓天下之名而實不失天下.  今王以國讓於子之,子之必不敢受,是王與堯同行也.」

燕王因屬國於子之,子之大重.
或曰:「禹薦益,已而以啟人為吏.  及老,而以啟人為不足任乎天下,傳之於益.

已而啟與交黨攻益,奪之.  天下謂禹名傳天下於益,已而實令啟自取之.

今王言屬國於子之,而吏無非太子人者,是名屬子之而實太子用事也.」

王因收印自三百石吏已上而效之子之.  子之南面行王事, 而噲老不聽政, 顧為臣, 國事皆決於子之.

[녹모수(鹿毛壽)가 연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 “나라를 국상(國相)인 자지에게 모두 양위함은 옳지 못하옵니다.

사람들이 요(堯)임금을 현인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가 임금의 지위를 허유(許由)에게 넘겨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허유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런 일로 인해 그는 임금의 지위를 양위하려고 했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
실제로 임금의 지위를 잃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지금 임금께서 국가를 자지에게 양위하겠다고 하신다면 자지는 감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임금께서 요임금과 똑같은 덕행을 쌓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연나라 왕은 나라를 자지에게 맡겼고, 자지는 지극히 존귀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 “우(禹)임금이 익(益)을 후계자로 천거했고,

이어서 자신의 아들인 계(啓)와 친한 사람들을 관리로 임용했다. 

우임금은 자신이 노약해져서 정무를 돌보지 못할 입장이 되자,

아들인 계가 천하를 맡을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여기고는 임금의 자리를 익에게 물려주었다.
얼마 되지 아니해 계가 자신의 무리들과 힘을 합쳐 익을 공격해 왕권을 탈취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세상 사람들은 우 임금이 명의상으로는 나라를 익에게 물려준 셈이나

실제로는 얼마 후 아들 계로 하여금 스스로 왕권을 차지하게 한 것일 따름이라 했다.

지금 연나라 왕이 나라를 자지에게 맡겼으나 관리들은 모두 태자 쪽 사람이 아닌 자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명의상으로 자지에게 맡겼을 따름일 뿐이며 실제로는 태자로 하여금 권리를 쥐게 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비꼬았다.
연나라 왕은 그것 때문에 3백 석 이상의 봉록(俸祿)을 받는 고관의 임용권을 자지에게 위양해 주었다.

자지는 임금의 자리에 앉아 국왕의 직권을 행사했고, 연나라 왕 쾌(噲)는 늙어서 정사를 처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지의 신하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의 모든 일이 자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三年,國大亂,百姓恫恐。將軍市被與太子平謀,將攻子之.

諸將謂齊湣王曰:「因而赴之,破燕必矣.」
齊王因令人謂燕太子平曰:「寡人聞太子之義,將廢私而立公,飭君臣之義,明父子之位.

寡人之國小,不足以為先後.  雖然,則唯太子所以令之.」
太子因要黨聚眾, 將軍市被圍公宮, 攻子之, 不克.  將軍市被及百姓反攻太子平, 將軍市被死, 以徇.
因搆難數月,死者數萬,眾人恫恐,百姓離志.

[자지가 왕권을 차지한 지 3년 되던 해에 연나라에서 큰 난리가 나서 고관들이 공포에 떨게 되었다.

장군 시피(市被)가 태자 평(平)과 모의해서 자지를 공격하려고 하자,
제나라 여러 장군들은 민왕(湣王)에게 말하기를 : “연나라가 대란에 휘말려 있을 기회를 틈타서 공격하면

반드시 연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제나라 왕이 사람을 보내 연나라 태자 평에게 전하기를 : “과인이 듣기로는, 태자께서 큰 뜻을 품어,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의(公義)를 수립하고 군신의 대의를 바로잡고 부자의 지위를 명확히 할 계획을 꿈꾸고 계신다고

하더이다. 과인의 나라는 규모가 적어 선봉(先鋒)이나 후위(後衛)가 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겠으나

태자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소.”라고 하였다.
때문에 태자는 무리를 짓고 군대를 모아서 장군 시피에게 공궁(公宮)을 포위해 자지를 습격하게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장군 시피는 백관들과 함께 기수를 돌리어 태자 평을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태자는 시피가 죽은 후 그 시체를 뭇사람들이 보도록 거리에 내다놓았다.
이리하여 수개월간에 걸친 동란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백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孟軻謂齊王曰:「今伐燕,此文、武之時,不可失也.」

王因令章子將五都之兵,以因北地之眾以伐燕.  士卒不戰,城門不閉,燕君噲死,齊大勝.

燕子之亡二年,而燕人共立太子平,是為燕昭王.  燕昭王於破燕之後即位,卑身厚幣以招賢者.

[맹자(孟子)가 제나라 왕에게 건의하기를 : “이 기회에 연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한 것과 같은 호기이니 이 기회를 놓치면 아니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제나라 왕이 장자(章子)로 하여금 5도(五都)의 군사와 북방의 군인들을 이끌고 가 연나라를 공격하게 명했다. 

연나라 군사들은 방어할 마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문(城門)도 닫지 않고 활짝 열어 놓았고,

마침 연나라 임금 쾌가 죽었으므로 제나라가 대승을 거두었다.
연나라의 국상 자지가 죽은 지 2년 뒤에 연나라 사람들은 태자 평을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연나라 소왕(昭王)이다.
연나라 소왕은 나라가 침략을 당해 망하기 일보 직전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공손한 태도로 많은 예물을 갖추어 현자들을 널리 초빙하였다.]

 

謂郭隗曰:「齊因孤之國亂而襲破燕,孤極知燕小力少,不足以報.

然誠得賢士以共國,以雪先王之恥,孤之願也.

先生視可者,得身事之.」  郭隗曰:「王必欲致士,先從隗始.  況賢於隗者,豈遠千里哉!」
於是昭王為隗改筑宮而師事之.  樂毅自魏往,鄒衍自齊往,劇辛自趙往,士爭趨燕.

燕王噲死問孤,與百姓同甘苦.

[그는 대신인 곽외(郭陴)에게 당부하기를 “제나라가 우리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해 와서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소.

우리는 국토가 좁고 힘이 약하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원수를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현사(賢士)를 얻어서 함께 국가를 다스리는 데 매진해 선왕의 치욕을 말끔히 씻는 것이 과인의 소망이오. 

그대가 만약 마땅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일러주시오. 그러면 과인이 직접 찾아가서 모셔오겠소.”라고 하자.
곽외가 그 말을 듣고 나서 대답하기를 : “임금께서 현사를 초빙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먼저 저를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 먼 길을 마다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소왕은 곽외에게 주택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군사 전략가인 악의(樂毅)가 위(魏)나라로부터 달려왔고,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鄒衍)이 제나라로부터 달려왔으며,

힘이 세기로 이름난 극신(劇辛)이 조(趙)나라로부터 귀순해 오는 등 많은 인사들이앞을 다투어 연나라로 몰려왔다.

연나라 왕은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면 일일이 찾아가 애도를 표하고 유족들을 위문하는 등

신하와 더불어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二十八年,燕國殷富,士卒樂軼輕戰,於是遂以樂毅為上將軍,與秦、楚、三晉合謀以伐齊.

齊兵敗, 湣王出亡於外.  燕兵獨追北,入至臨淄,盡取齊寶,燒其宮室宗廟.

齊城之不下者,獨唯聊、莒、即墨,其餘皆屬燕,六歲.

武成王七年,齊田單伐我,拔中陽.

十三年,秦敗趙於長平四十餘萬.

十四年,武成王卒,子孝王立.

[소왕 28년, 연나라는 생활이 부유해짐에 따라 병사들은 쾌락에 빠졌고 안일해져서 전쟁에는 관심도 없어졌다.
그래서 악의를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해 진(秦), 초, 그리고 한, 조, 위 다섯 나라와 모의해서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 병사들은 전쟁에 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민왕은 도성을 버리고 외지로 달아났다. 다섯 나라 중에서

오직 연나라 병사들만은 패주하는 제나라 병사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제나라의 도성인 임치(臨淄)에까지 진입해,
제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보물들을 노획했으며, 궁실과 종묘를 불살라버렸다.

제나라의 여러 성 중에서 함락되지 않은 것으로는 오로지 요읍(聊邑), 거읍(莒邑), 그리고 즉묵(卽墨)밖에 없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예속되었다. 그러한 상태는 6년간이나 오래 지속되었다.

​【소왕이 재위 33년 만에 죽자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했다.
혜왕이 태자로 있을 때 악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혜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 그를 신임하지 않았으므로

기겁(騎劫)으로 하여금 악의가 맡고 있던 사령관직을 대행하게 했다. 악의는 조나라로 도망갔다.

제나라의 전단(田單)은 즉묵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연나라 군사를 물리쳤고,
대장인 기겁이 죽자 연나라 군사들이 모두 자기 나라로 철수했기에 제나라는 예전의 성들을 모두 되찾게 되었다.
민왕이 거성(莒城)에서 서거하자 그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그가 바로 양왕(襄王)이다.
연 혜왕(燕惠王)은 재위 7년 만에 죽었다. 한, 위, 초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에서는 무성왕(武成王)이 즉위했다.】
무성왕 7년, 제나라의 전단이 연나라에 쳐들어와서 중양(中陽) 땅을 차지했다.

13년, 진(秦)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 군사 40여 만 명을 격파했다.
14년, 무성왕이 죽고 아들 효왕(孝王)이 즉위했다.]

 

孝王元年,秦圍邯鄲者解去.  三年卒,子今王喜立.

今王喜四年,秦昭王卒.  燕王命相栗腹約歡趙,以五百金為趙王酒.

還報燕王曰:「趙王壯者皆死長平,其孤未壯,可伐也.」王召昌國君樂閒問之.
對曰:「趙四戰之國,其民習兵,不可伐.」王曰:「吾以五而伐一.」

對曰:「不可.」燕王怒,群臣皆以為可.
卒起二軍,車二千乘,栗腹將而攻鄗,卿秦攻代.

[효왕 원년, 한단(邯鄲)을 포위하고 있던 진(秦)나라 군사들의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났다가 3년 후에 세상을 떠났고,

왕위는 아들인 금왕(今王) 희(喜)가 물려받았다.
금왕 희(喜) 4년, 진(秦)나라에서는 소왕(昭王)이 죽었다. 연나라 왕은 재상인 율복(栗腹)에게 명을 내려

조나라와 우호동맹을 맺게 하고 5백 금(金)을 보내어 조나라 왕의 무병장수를 빌게 했다.

율복이 돌아와 연나라 왕에게 보고하기를 “조나라 백성들 중에 장성한 사람들은 장평(長平) 전쟁 때 모두 죽었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성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이 기회를 틈타서 공격해 들어가면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창국군(昌國君) 악간(樂間)을 불러 이 일에 대해서 자문을 구했다.
악간이 대답하기를 : “조나라는 동서남북 사면에 적국을 두고 있고 사면에서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국가인 데다가

백성들 모두가 전쟁이라면 이력이 난 사람들이므로 공격해 보았자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되묻기를 : “우리가 다섯으로 하나를 칠 정도로 수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도 말인가?”라고 하자,

악간이 대답하기를 : “그래도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화를 냈고, 여러 신하들은 한결같이 된다고 여겼다.

결국에는 군사를 발동하기로 결정을 짓고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편성하고 전차 2천량(輛)을 마련해,
군대 하나는 율복이 이끌어 호(鄗)로 공격하고, 또 하나는 경진(卿秦)이 이끌고 대(代)로 진공하기로 했다.]

唯獨大夫將渠謂燕王曰:「與人通關約交, 以五百金飲人之王, 使者報而反攻之, 不祥, 兵無成功.」
燕王不聽,自將偏軍隨之.  將渠引燕王綬止之曰:「王必無自往,往無成功.」王蹵之以足.
將渠泣曰 :「臣非以自為,為王也!」燕軍至宋子, 趙使廉頗將, 擊破栗腹於鄗.

[樂乘]破卿秦(樂乘)於代.  樂閒奔趙.

廉頗逐之五百餘里,圍其國.  燕人請和,趙人不許,必令將渠處和.

燕相將渠以處和.  趙聽將渠,解燕圍.

[오직 대부 장거(將渠) 한 사람만이 왕에게 이르기를 : “조나라와 우호동맹을 맺기로 하고 또 5백금을 보내어

그 나라 왕의 무병장수를 빌어놓고는 사신이 돌아와 하는 보고만 믿고 도리어 그네들을 공격해 들어간다면

그것은 상서로운 일이 되지 못하니 그러한 전쟁은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연나라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가담했다.
장거가 말하기를 : “왕께서 친히 가셔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가셔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왕의 옥새 끈을 잡아당기며 적극 만류했다.  왕이 그를 발로 걷어차 버리자,

장거는 울면서 말하기를 : “신은 저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해서 입니다!”라고 하였다.

연나라 군사가 송자(宋子) 땅에 이르자 조나라에서는 염파(廉頗)를 보내어 응전하게 했는데,

그는 호읍으로 가서 율복이 이끄는 연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그리고 악승(樂乘)은 대읍에서 경진의 군사를 대파시켰다. 악간은 조나라로 달아나버렸다.

염파는 연나라 군대를 5백여 리나 뒤쫓아가 연나라의 수도를 포위했다. 연나라가 강화를 요청해 오자,

조나라는 이에 응하지 않다가, 반드시 장거로 하여금 강화에 관한 일을 요청해 오도록 요구했다.
연나라에서는 하는 수 없이 장거를 재상으로 임명해 강화 회담을 처리하게 했다.

조나라는 장거의 청을 받아들여서 연나라를 포위하고 있던 군사를 풀어주었다.]

 

六年,秦滅東(西)周,置三川郡.

七年,秦拔趙榆次三十七城,秦置大原郡.

九年,秦王政初即位.
十年,趙使廉頗將攻繁陽,拔之.  趙孝成王卒,悼襄王立.

使樂乘代廉頗,廉頗不聽,攻樂乘,樂乘走,廉頗奔大梁.

[​연왕 희(喜) 6년, 진(秦)나라가 동주(東周)를 멸망시키고 그곳에다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했다.
7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유차(楡次) 등 37성을 공략해서 그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는 그곳에다 태원군을 설치했다.
9년, 진나라 왕 영정(嬴政), 즉 뒤의 진시황(秦始皇)이 처음으로 즉위했다.

10년, 조나라가 염파를 보내 번양(繁陽)을 진공(進攻)해 탈취했다.

조나라에서는 효성왕(孝成王)이 죽자 도양왕(悼襄王)이 즉위했다.
도양왕이 악승을 파견해 염파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자,

염파가 이를 듣지 않고 악승을 치자 악승은 달아났고, 염파는 대량(大梁)으로 도망을 쳤다.]


十二年,趙使李牧攻燕,拔武遂、方城.  劇辛故居趙,與龐煖善,已而亡走燕.

燕見趙數困于秦,而廉頗去,令龐煖將也,欲因趙獘攻之.
問劇辛,辛曰:「龐煖易與耳.」燕使劇辛將擊趙,趙使龐煖擊之,取燕軍二萬,殺劇辛.

秦拔魏二十城,置東郡.

十九年,秦拔趙之鄴九城.  趙悼襄王卒.

二十三年,太子丹質於秦,亡歸燕.

二十五年,秦虜滅韓王安,置潁川郡.

[​12년, 조나라가 이목(李牧)을 보내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武遂), 방성(方城) 두 곳을 점령했다.

극신(劇辛)이 예전에는 조나라에 기거하면서 방훤(龐煖)과 친하게 지내다가 후에는 연나라로 도망쳤다.

연나라 왕은 조나라가 수차에 걸친 진(秦)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지칠 대로 지쳐 있고,

또 염파마저 조나라를 떠나버렸고 방훤을 대장으로 임명한 것을 보고는 피폐해진 조나라를 공격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극신에게 의향을 물어보자 : “방훤쯤은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연나라는 극신을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방훤을 보내어 연나라 군사에 대항해 싸우도록 해 연나라 군사 2만 명을 무찔렀고 극신을 죽였다.
진나라가 위(魏)나라의 20성을 점령해 그곳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19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땅인 업읍(鄴邑)에 있는 9성을 점령했다. 조나라에서는 도양왕이 죽었다.
23년,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인질로 붙잡혀갔다가 연나라로 도망쳐서 돌아왔다.
25년, 진나라가 한(韓)나라 왕 안(安)을 포로로 붙잡고는 한나라 땅을 점령해 그곳에다 영천군(穎川郡)을 설치했다.]

二十七年,秦虜趙王遷,滅趙。趙公子嘉自立為代王. 燕見秦且滅六國,秦兵臨易水,禍且至燕.

太子丹陰養壯士二十人,使荊軻獻督亢地圖於秦,因襲刺秦王.  秦王覺,殺軻,使將軍王翦擊燕.
二十九年,秦攻拔我薊,燕王亡,徙居遼東,斬丹以獻秦.

三十年,秦滅魏.

三十三年,秦拔遼東,虜燕王喜,卒滅燕.  是歲,秦將王賁亦虜代王嘉.

[27년, 조나라 왕 천(遷)을 포로로 붙잡아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조나라의 공자 가(嘉)는 대읍(代邑)으로 도망가서는 대왕(代王)이라고 자칭했다.

연나라는 진나라가 6국(六國)을 모두 멸망시킬 날이 머지 않았고,

진나라 병사들이 이미 역수(易水) 지역에까지 밀어닥쳐서 전화가 곧 밀어닥치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태자 단은 암암리에 신체가 건장한 병사 20명을 뽑아서 양성하고 형가(荊軻)를 보내어

독항(督亢) 지역의 지도를 진나라에 헌납하게 함으로써 진나라 왕을 암살하기에 편리하게 했다.

그러나 진나라 왕에게 그 계책이 발각되어 형가는 죽임을 당했다.

진나라는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어 연나라를 공격했다.
29년, 진나라가 연나라의 도읍지인 계(薊)를 점령했다.

진나라는 연나라 왕이 멀리 요동(遼東)으로 도망치자 태자인 단을 죽여 그의 머리를 왕에게 바쳤다.
30년, 진나라가 위나라마저 집어삼켰다.
33년, 진나라가 요동 지역을 점령해, 연왕 희(喜)를 사로잡음으로써 드디어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그해에 진나라 장수 왕분(王賁)은 조나라의 대왕(代王)인 가(嘉)마저 사로잡아 버렸다.]

 

太史公曰:

召公奭可謂仁矣! 笆棠且思之,況其人乎? 

燕(北) [外]迫蠻貉,內措齊、晉,崎嶇彊國之閒,最為弱小,幾滅者數矣.
然社稷血食者八九百歲,於姬姓獨後亡,豈非召公之烈邪!

[태사공은 말한다 :
“소공(召公) 석(奭)은 어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이 그가 그 아래서 정무를 처리하던 팥배나무도 그리워 하는데, 하물며 그에 대해서는 어떠하랴?
연나라는 밖으로는 만맥(蠻貊) 등 여러 종족들과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齊)나라와 진(晉)나라에 대항하면서

강국 사이에 끼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거의 멸망 직전에 이른 경우도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백~9백여 년간에 이를 만큼 오래도록 사직(社稷)을 보존했고,
희성(姬姓)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선 가장 오래도록 나라를 보존했다.

그것이야말로 소공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  연조(朝) 역대 제후, 왕 연표

 

소공 석(召公 奭)
혜후(惠侯) (기원전 864년 - 기원전 827년)
희후(釐侯) (기원전 826년 - 기원전 791년)
경후(頃侯)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7년)
애후(哀侯) (기원전 766년 - 기원전 765년)
정후(鄭侯) (기원전 764년 - 기원전 729년)
목후(穆侯) (기원전 728년 - 기원전 711년)
선후(宣侯) (기원전 710년 - 기원전 698년)
환후(桓侯)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91년)
장공(莊公) (기원전 690년 - 기원전 658년)
양공(襄公) (기원전 657년 - 기원전 618년)
환공(桓公) (기원전 617년 - 기원전 602년)
선공(宣公) (기원전 601년 - 기원전 587년)
소공(昭公)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74년)
무공(武公) (기원전 573년 - 기원전 555년)
문공(文公) (기원전 554년 - 기원전 549년)
의공(懿公) (기원전 548년 - 기원전 545년)
혜공(惠公)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36년)
도공(悼公) (기원전 535년 - 기원전 529년)
공공(共公)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24년)
평공(平公) (기원전 523년 - 기원전 505년)
간공(簡公) (기원전 504년 - 기원전 493년)
효공(孝公)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55년)
성공(成公)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39년)
민공(閔公) (기원전 438년 - 기원전 415년)
희공(釐公)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환공(桓公)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문공(文公)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
역왕(易王)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1년 )
쾌(哙) (기원전 320년 - 기원전 312년)
소왕(昭王)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79년)
혜왕(惠王) (기원전 278년 - 기원전 271년)
무성왕(武成王) (기원전 271년 - 기원전 258년)
효왕(孝王) (기원전 257년 - 기원전 255년)
희(喜)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22년)
태자 단(太子 丹)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