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大苑列傳

第 六十三. 大苑列傳(대원열전)

덕치/이두진 2024. 1. 11. 16:58

 

          第 六十三.  大苑列傳(대원열전)        

 

 

大宛之跡,見自張騫.  張騫,漢中人.  建元中為郎.

是時天子問匈奴降者,皆言匈奴破月氏王,以其頭為飲器,月氏遁逃而常怨仇匈奴,

無與共擊之.  漢方欲事滅胡,聞此言,因欲通使.  道必更匈奴中,乃募能使者.

[대원의 사적은 장건으로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장건은 한중(漢中) 사람이다. 

건원(建元) 연간(서기전 140년-서기전 135년)에 낭관(郎官)이 되었다.  

당시에 천자가 흉노(匈奴)에서 투항해 온 사람에게 물어보면 모두가 말하기를

흉노는 월지(月氏)의 왕을 격파하고 그의 머리뼈로 술 마시는 그릇을 만들었고,

월지는 쫓겨 간 뒤로 항상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나 함께 흉노를 치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한나라는 흉노를 쳐 없애고자 했기에 이 말을 듣고

월지와 연락하고자 했다.  월지로 가려면 반드시 흉노의 땅을 거쳐 가야 했기에

능히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적합한 인물을 모집했다.]

騫以郎應募,使月氏,與堂邑氏(故)胡奴甘父俱出隴西.  

經匈奴,匈奴得之,傳詣單于.

單于留之,曰:「月氏在吾北,漢何以得往使? 吾欲使越,漢肯聽我乎?」

留騫十餘歲,與妻,有子,然騫持漢節不失. 

居匈奴中, 益寬, 騫因與其屬亡鄉月氏, 西走數十日至大宛. 

[장건은 낭관의 신분으로 응모해 월지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당읍씨의 흉노족 노예

감보(甘父)와 함께 농서(隴西)를 떠났다. 장건이 흉노를 지나는데 흉노는 그를 잡아

선우(單于)에게로 보냈다.  선우는 그를 붙들어 두고 말하기를 :

“ 월지는 우리의 북쪽에 있는데 한나라가 어찌 사신을 보낼 수 있겠느냐 ?  

내가 월(越)나라로 사신을 보내고자 한다면 한나라는 허락하겠느냐 ?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장건은 10여 년 동안 억류되었고 결혼해 자식까지 낳았으나,

장건은 한나라 사신으로서 부절(符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흉노에서 사는 동안 차차 그에 대한 감시도 소홀해졌으므로, 장건은 기회를 틈타

무리들과 월지로  달아났고, 서쪽으로 달린 지 수십 일 만에 대원에 이르렀다.] 

 

大宛聞漢之饒財, 欲通不得, 見騫, 喜, 問曰:「若欲何之?」 

騫曰:「為漢使月氏,而為匈奴所閉道.  今亡,唯王使人導送我. 誠得至,反漢,

漢之賂遺王財物不可勝言.」 大宛以為然, 遣騫, 為發導繹, 抵康居, 康居傳致大月氏.

大月氏王已為胡所殺,立其太子為王.  既臣大夏而居,地肥饒,少寇,志安樂,

又自以遠漢,殊無報胡之心.  騫從月氏至大夏,竟不能得月氏要領.

[대원에서는 한나라에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서로 왕래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있던 터라, 대원왕은 장건을 보자 기뻐하며 묻기를 :

“ 당신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 ”라고 하자,  

장건이 대답하기를 : “한나라를 위해서 월지에 사신으로 가던 중에 흉노 땅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지금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나왔는데, 청컨대 왕께서는 사람을 파견해

길을 인도하게 해 저를 보내주십시오. ​진실로 제가 월지국에 도착한 다음 임무를

끝내고 다시 한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한나라는 황제께 말씀드려

왕께 많은 재물을 선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원왕은 이 말을 믿고 장건에게 안내인과 통역원을 딸려 보내주었으므로,

그는 드디어 강거에 도착했다. 강거에서는 그들을 대월지로 보냈다. 대월지는

왕이 일찍이 흉노에게 죽음을 당했기에 그의 태자를 세워 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대하(大夏)를 정복해 그 땅에 살고 있었는데,

땅은 비옥하고 외적도 없어서 안락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흉노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장건은 월지에서 대하로 갔으나 역시 월지국으로부터 승낙을 얻지 못했다.]

留歲餘,還,并南山,欲從羌中歸,復為匈奴所得.  留歲餘,單于死,

左谷蠡王攻其太子自立,國內亂,騫與胡妻及堂邑父俱亡歸漢.  

漢拜騫為太中大夫,堂邑父為奉使君.  騫為人彊力, 寬大信人, 蠻夷愛之. 

堂邑父故胡人, 善射, 窮急射禽獸給食.  初, 騫行時百餘人, 去十三歲, 唯二人得還.

[1년 남짓 머물러 있다가 돌아오던 중 남산을 따라 강족(羌族)의 땅을 거쳐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또다시 흉노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곳에 1년 남짓 억류되어 있을 때

선우가 죽자, 좌녹려왕이 태자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므로 나라 안이

혼란스러워지자, 장건은 흉노의 아내와 당읍보를 데리고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왔다.

한나라에서는 장건에게 태중대부를 배수하고, 당읍보는 봉사군(奉使君)을 삼았다. 

장건은 사람됨이 의지가 굳세고 마음이 너그럽고 남에게 성실했기에 만이(蠻夷)들도

모두 그를 좋아했다. 당읍보는 본래 흉노인이었기에 활을 잘 쏘았는데,

곤궁에 처했을 때에는 짐승을 잡아 끼니를 제공했다. 처음에 장건이 길을 떠날

때에는 그 일행이 1백여 명이었는데, 13년 후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돌아왔다.] 

 

騫身所至者大宛、大月氏、大夏、康居,而傳聞其旁大國五六,具為天子言之.

曰:大宛在匈奴西南, 在漢正西, 去漢可萬里.  其俗土著, 耕田, 田稻麥.  有蒲陶酒.

多善馬, 馬汗血, 其先天馬子也.  有城郭屋室.  其屬邑大小七十餘城,眾可數十萬.

其兵弓矛騎射. 其北則康居, 西則大月氏, 西南則大夏, 東北則烏孫, 東則扜穼、于窴.

[장건이 직접 가본 곳은 대원, 대월지, 대하, 강거이지만, 그밖에도 인접한 5, 6개의

대국에 대해서도 전해 듣고 천자에게 자세하게 보고하기를 : “ 대원은 흉노의 서남쪽,

한나라의 바로 서쪽에 있는데, 한나라에서 약 만 리쯤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풍습은 한곳에 머물러 살면서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있고,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은 피와 같은 땀을 흘리고 그 말의 조상은

천마(天馬)의 새끼라고 합니다. 성곽(城郭)과 집이 있으며, 관할하는 읍은 크고 작은

70여 개의 성으로 인구는 몇 십만 정도 됩니다. 대원의 무기는 활과 창이며

사람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쏩니다.  그 북쪽은 강거, 서쪽은 대월지, 서남쪽은 대하, 

동북쪽은 오손(烏孫), 동쪽은 우미, 우전(于窴)입니다.

 

于窴之西,則水皆西流,注西海;其東水東流,注鹽澤.  鹽澤潛行地下,

其南則河源出焉.  多玉石,河注中國.  而樓蘭、姑師邑有城郭,臨鹽澤. 

鹽澤去長安可五千里.  匈奴右方居鹽澤以東,至隴西長城,南接羌,鬲漢道焉.

[우전의 서쪽은 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고, 동쪽은 물이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들어갑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흘러들고, 

그 남쪽은 바로 황하(黃河)가 발원하는 곳입니다.  옥석이 많고 황하는 중국으로

흘러갑니다. 누란(樓蘭)과 고사(姑師)에는 성곽이 있고 염택에 인접해 있습니다.

염택은 장안에서 약 5천리쯤 떨어져 있습니다. 흉노의 우측은 염택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농서의 장성(長城)에 이르러 남쪽으로 강과 접해

한나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烏孫在大宛東北可二千里, 行國, 隨畜, 與匈奴同俗.  控弦者數萬, 敢戰.

故服匈奴, 及盛, 取其羈屬, 不肯往朝會焉. 

康居在大宛西北可二千里,行國,與月氏大同俗.  控弦者八九萬人.  與大宛鄰國.

國小,南羈事月氏,東羈事匈奴.  奄蔡在康居西北可二千里,行國,與康居大同俗.  

控弦者十餘萬.  臨大澤,無崖,蓋乃北海云.

[오손국은 대원의 동북쪽 2천리쯤 되는 곳에 있으며 정착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는데 흉노와 풍속이 같습니다.  군사가 몇 만 명이나 되며, 용감하게 잘 싸웁니다.

원래 흉노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강성해진 뒤로는 흉노에 있는 인질들을 거두어가고,

조회에도 가려 하지 않습니다. 강거국은 대원의 서북쪽 2천리쯤 되는 곳에 있으며,

정착하지 않고 사는데, 월지와 풍속이 매우 비슷합니다.  

활을 쏘는 군사가 8~9만 명이며, 대원과 인접한 나라입니다. 나라가 작아서 남쪽은

월지에 복속되어 있고, 동쪽은 흉노에 복속되어 있습니다. 

엄채국(奄蔡國)는 강거 서북쪽 2천리쯤 되는 곳에 있으며, 정착하지 않고 사는데 

강거와 풍속이 매우 비슷합니다. 활을 쏘는 군사는 10여 만 명입니다.

큰 못에 잇대어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그곳이 북해인 것 같습니다.

大月氏在大宛西可二三千里,居媯水北.  其南則大夏,西則安息,北則康居.

行國也,隨畜移徙,與匈奴同俗.  控弦者可一二十萬. 

故時彊, 輕匈奴, 及冒頓立, 攻破月氏, 至匈奴老上單于, 殺月氏王, 以其頭為飲器.  

始月氏居敦煌、祁連閒,及為匈奴所敗,乃遠去,過宛,西擊大夏而臣之,

遂都媯水北,為王庭.  其餘小眾不能去者,保南山羌,號小月氏.

[대월지는 대원 서쪽 2천~3천리쯤 되는 곳에 있으며, 규수 북쪽에 있습니다.

그 남쪽은 대하, 서쪽은 안식, 북쪽은 강거입니다. 정착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며

옮겨 다니는데, 흉노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쏘는 군사가 10~20만 가량 됩니다.

이전에는 강성해 흉노를 업신여겼는데, 묵돌(冒頓)이 즉위한 후에 월지를 쳐부수고,

노상선우 때 와서는 월지왕을 죽이고 그 머리뼈로 술 마시는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월지는 돈황(敦煌)과 기련(祁連) 사이에 있었는데, 흉노에게 패하자

멀리 떠나 대원을 지나서 서쪽으로 대하를 공격해 그들을 신하로 삼고,

마침내는 규수 북쪽에다 도읍을 세우고 왕정으로 삼았습니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사람들은 남산과 강족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고 살면서 소월지라고 불렀습니다.

 

安息在大月氏西可數千里.  其俗土著,耕田,田稻麥, 蒲陶酒.  城邑如大宛. 

其屬小大數百城,地方數千里,最為大國.  臨媯水,有市,民商賈用車及船,

行旁國或數千里.   以銀為錢, 錢如其王面, 王死輒更錢, 效王面焉. 

畫革旁行以為書記.  其西則條枝, 北有奄蔡、黎軒.

[안식국은 대월지의 서쪽 몇 천 리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풍속은

한곳에 정착해 밭갈이하며 벼와 보리를 경작하고 포도주도 생산합니다.

성읍은 대원과 같습니다. 관할하는 크고 작은 읍이 몇 백 개이며, 

땅이 사방 몇 천 리나 되는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에 임해 있으며,

시장이 있는데 사람들은 장사를 하기 위해서 수레와 배를 이용해 이웃 나라나 때로는

몇 천 리 되는 곳까지 다닙니다.  은으로 동전을 만드는데, 동전에는 그 나라 왕의

얼굴이 있고, 왕이 죽으면 곧 돈을 다시 바꾸어 새 임금의 얼굴로 본을 뜹니다.

가죽에다 글을 적어 기록합니다. 그 서쪽에는 조지(條枝)가 있으며, 

북쪽에는 엄채, 여헌이 있습니다.

條枝在安息西數千里,臨西海. 暑溼. 耕田,田稻.  有大鳥,卵如甕. 

人眾甚多,往往有小君長,而安息役屬之,以為外國.  國善眩. 

安息長老傳聞條枝有弱水、西王母,而未嘗見. 

[조지국(條枝國)은 안식의 서쪽 몇 천 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해에 임해 있습니다.

날씨는 덥고 습기가 많으며, 밭갈이해 벼를 심습니다. 큰 새가 있는데, 알의 크기가

항아리만합니다. 인구는 대단히 많으며 대개는 소군장(小君長)이 있는데,

안식국은 이 나라를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고 있습니다.

나라 사람들은 마술에 뛰어납니다. 안식의 장로들의 말에 의하면 조지에는 약수와

서왕모(西王母)가 있다고 전해 듣기는 했으나 아직 한번도 본 일은 없다고 합니다. 

大夏在大宛西南二千餘里媯水南.  其俗土著,有城屋,與大宛同俗. 

無大王君長,往往城邑置小長.  其兵弱,畏戰.  善賈市. 

及大月氏西徙,攻敗之,皆臣畜大夏.  大夏民多,可百餘萬.

其都曰藍市城,有市販賈諸物.  其東南有身毒國.

[대하국 대원 서남쪽 2천여 리, 규수 남쪽에 있습니다. 그들의 풍습은 정착해 살고

있어서, 성곽과 집이 있고, 대원과 풍속은 같습니다. 대군장은 없고, 대부분의 성읍은

소군장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군사는 약하고 싸움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장사는 잘합니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옮겨간 뒤로 그들을 쳐서 깨뜨려

속국으로 만들어 다스리고 있습니다. 대하의 인구는 많아서 1백여 만 명입니다.

그들의 수도는 남시성(藍市城)이라고 부르는데, 시장이 있어 여러 가지 물건을

매매하고 있습니다. 그 동남쪽에 신독국(身毒國)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騫曰:「臣在大夏時,見邛竹杖、蜀布.  問曰:『安得此?』 

大夏國人曰:『吾賈人往市之身毒.  身毒在大夏東南可數千里.  

其俗土著,大與大夏同,而卑溼暑熱云.  其人民乘象以戰.  其國臨大水焉.』

以騫度之,大夏去漢萬二千里,居漢西南.

今身毒國又居大夏東南數千里,有蜀物,此其去蜀不遠矣. 

今使大夏,從羌中,險,羌人惡之;少北,則為匈奴所得;從蜀宜徑,又無寇.」

[장건은 또 말하기를 : " 신이 대하에 있을 때, 공(邛)의 대나무 지팡이와 촉(蜀)의

옷감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이것을 얻었느냐”고 물었더니, 대하 사람들은

“우리 장사꾼들이 신독에 가서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은 대하의 동남쪽에서 약 몇 천 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그들의 풍속은 정착해 살며 대하와 아주 비슷하고, 땅은 지세가 안 좋아 습기가 많고

덥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그 나라는 큰 강에 임해 있습니다.

신이 짐작해보건대, 대하는 한나라에서 만 2천리 떨어져 있고, 한나라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신독국은 또 대하의 동남쪽 몇 천 리에 위치해 있으며 

촉의 물건들이 있으니 이는 즉 촉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하로 사신을 보낸다면 강족의 영토를 지나가야 하는데 지세가 험하니 강족이

싫어할 것이고, 그렇다고 조금 북쪽으로 해서 가면 흉노에게 붙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촉에서 가게 되면 길도 가깝고 또한 도둑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天子既聞大宛及大夏、安息之屬皆大國,多奇物,土著,頗與中國同業,而兵弱,

貴漢財物;其北有大月氏、 康居之屬,兵彊,可以賂遺設利朝也.

且誠得而以義屬之,則廣地萬里,重九譯,致殊俗,威德遍於四海.

[천자는 이미 대원과 대하, 안식 등이 모두 대국으로서 진기한 물건들이 많고,

백성들은 정착해서 살고 있고 중국과는 산업도 매우 비슷하나, 군사는 약하고

한나라의 재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며, 그 북쪽에는 대월지와 강거 등이 있는데,

군사는 강하지만 물건을 보내주고 이로움을 베풀면, 조회에 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만약 도의로써 그들을 예속시킨다면,

만 리에 걸쳐 국토를 넓힐 수 있고, 여러 차례 통역을 바꿔야 할 정도가 될 것이며,

여러 특수한 풍속을 대할 수 있게 되니, 

천자의 위엄과 은덕이 세상에 두루 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天子欣然,以騫言為然,乃令騫因蜀犍為發閒使,四道并出:

出駹, 出冉, 出徙, 出邛、僰,皆各行一二千里.  其北方閉氐、筰,南方閉巂、昆明.

昆明之屬無君長,善寇盜,輒殺略漢使,終莫得通.  然聞其西可千餘里有乘象國, 

名曰滇越,而蜀賈姦出物者或至焉,於是漢以求大夏道始通滇國. 

[천자는 흡족해 장건의 말이 옳다고 여겨, 장건으로 하여금 촉과 건위에서 밀사를

파견해 네 길로 나누어 동시에 출발하게 했는데, 하나는 방(駹)에서 출발하고,

하나는 염(冉)에서 출발했으며, 하나는 사(徙)에서 출발하고,

또 하나는 공(邛)과 북(僰)에서 출발했는데, 모두 제각기 1천~2천리를 갔다.  

그런데 북쪽은 저(氐)와 작(筰)에 의해서 막히고, 남쪽은 수(雟)와 곤명에 의해서

막혀버렸다. 곤명에 있는 무리들은 군장이 없고 도둑질을 잘했기에 한나라 사신들을

보기만 하면 죽이고 물건을 약탈해 끝내 대하와 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쪽으로 1천리쯤 되는 곳에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전월(闐越)이며, 이곳은 촉의 장사꾼들이 몰래 물건을 팔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곳을 왕래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대하국으로 통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전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 했다.]

初,漢欲通西南夷,費多,道不通,罷之.  及張騫言可以通大夏,乃復事西南夷.

騫以校尉從大將軍擊匈奴, 知水草處, 軍得以不乏, 乃封騫為博望侯.  是歲元朔六年也.

[처음에 한나라는 서남쪽 이민족들과 통하려고 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고 길도

통해 있지 않았으므로 그만두었다. 그런데 장건이 대하에 통할 수 있다라고 말하자,

이에 다시 서남쪽의 이민족들과 왕래하는 일을 진행했다.

장건은 교위로서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공격했는데, 장건이 사막 가운데

수초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곤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며,

이에 장건을 박망후(博望侯)에 봉했다. 이해가 원삭(元朔) 6년이다.]

其明年,騫為衛尉,與李將軍俱出右北平擊匈奴.  匈奴圍李將軍,軍失亡多;

而騫後期當斬,贖為庶人.  是歲漢遣驃騎破匈奴西(城)[域]數萬人,至祁連山.

其明年,渾邪王率其民降漢,而金城、河西西并南山至鹽澤空無匈奴. 

匈奴時有候者到,而希矣.

[그 이듬해 장건은 위위가 되어 이장군과 함께 우북평으로 나가 흉노를 공격하였다.  

흉노는 이장군을 포위했고, 한나라 군사는 사상자가 매우 많았으며, 장건은 약정한

기일에 늦게 도착하여 참형(斬刑)에 해당되었으나 돈으로 속죄하고 평민이 되었다.

이해에 한나라는 표기(驃騎)를 파견해 흉노의 서쪽 변경에 있는 수만 명을 격파하고

기련산(祁連山)에 이르렀다.

그 다음해에 혼야왕(渾邪王)이 그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한나라에 항복하니,

금성(金城), 하서의 서쪽에서 남산을 따라 염택에 이르기까지 흉노인이 없었다. 

흉노는 가끔 정탐병을 보냈으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其後二年,漢擊走單于於幕北.  是後天子數問騫大夏之屬. 

騫既失侯,因言曰:「臣居匈奴中,聞烏孫王號昆莫,昆莫之父,匈奴西邊小國也. 

匈奴攻殺其父,而昆莫生棄於野.  烏嗛肉蜚其上,狼往乳之. 

單于怪以為神,而收長之.  及壯,使將兵,數有功, 單于復以其父之民予昆莫,

令長守於西(城)[域] 昆莫收養其民, 攻旁小邑, 控弦數萬, 習攻戰.

[2년 후에 한나라는 선우를 공격하여 사막 북쪽으로 패주시켰다. 

이후로 천자는 여러 차례 장건에게 대하 등에 대해서 물었다.

이미 제후의 작위를 잃은 장건이 대답하기를 : " 신이 흉노에 억류되어 있을 때

들은 바로는 오손(烏孫)의 왕 이름은 곤모(昆莫)인데, 곤모의 아버지는 흉노의 서쪽

변경의 작은 나라의 왕이었답니다. 흉노는 그의 아버지를 공격해 죽였고, 

곤모는 태어나자마자 들에 버려졌습니다.

그러자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와서 위를 날고, 늑대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였습니다.

선우는 이상하다고 느끼고 그를 신(神)이라 여겨 거두어 길렀습니다. 

장년이 된 다음 군대를 거느리게 했더니 여러 차례 공을 세우자, 선우는 그의

아버지의 백성들을 다시 곤모에게 주고 장기간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습니다.

곤모는 그의 백성들을 잘 거두어 보살피고 가까운 소읍들을 공격했는데, 

활을 쏘는 군사가 수만 명이 되었으며, 모두 잘 싸웠습니다.

單于死, 昆莫乃率其眾遠徙, 中立, 不肯朝會匈奴.  匈奴遣奇兵擊,不勝,

以為神而遠之,因羈屬之,不大攻. 今單于新困於漢,而故渾邪地空無人.

蠻夷俗貪漢財物, 今誠以此時而厚幣賂烏孫, 招以益東, 居故渾邪之地, 與漢結昆弟,

其勢宜聽, 聽則是斷匈奴右臂也.  既連烏孫, 自其西大夏之屬皆可招來而為外臣.」

[선우가 죽자, 곤모는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먼 곳으로 옮겨가 독립해 흉노에게

조회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흉노는 기습병을 보내 습격했으나 이길 수 없자, 

곤모를 신의 아들이라 여기고 그를 멀리하며 그저 견제하기만 하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우는 새로 한나라로부터 고통을 겪었고,

또 원래 혼야왕의 땅이던 곳은 텅 비어 사람이 살지 않고 있습니다.  

오랑캐들은 한나라의 재물을 탐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으니, 만약 지금

이때에 후한 물건을 오손에게 보내주고, 점점 더 동쪽으로 가까이 불러들여

그 전 혼야왕의 땅에 살게 하고, 한나라와 형제의 의를 맺게 하면,  

오손은 형편상 한나라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흉노의 오른팔을 끊는 셈이 됩니다.  오손과의 연합이 성립되면,

서쪽의 대하 등을 모두 끌어들여 속국으로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天子以為然,拜騫為中郎將,將三百人,馬各二匹,牛羊以萬數,

齎金幣帛直數千巨萬,多持節副使,道可使,使遺之他旁國.  

騫既至烏孫,烏孫王昆莫見漢使如單于禮,騫大慚,

知蠻夷貪,乃曰:「天子致賜,王不拜則還賜.」昆莫起拜賜,其他如故.

騫諭使指曰:「烏孫能東居渾邪地, 則漢遣翁主為昆莫夫人.」

烏孫國分, 王老, 而遠漢, 未知其大小,  素服屬匈奴日久矣,且又近之,

其大臣皆畏胡,不欲移徙,王不能專制. 騫不得其要領.

[천자는 이 말이 맞다고 여기고, 장건을 중랑장에 봉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게 하고,

말은 군사마다 두 마리씩 주었으며, 소와 양은 수만 마리에 이르고 수백만에 해당되는

금과 비단을 가져가게 하고, 많은 지절부사를 수행시켜서 만약 길이 편리하다면,

그들을 다른 가까운 나라에도 보낼 수 있게 했다. 장건은 마침내 오손에 도착했는데,

오손왕 곤모가 한나라 사신을 만나는 데 선우의 예법대로 하자,  

장건은 매우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오랑캐들이 욕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말하기를 : “ 한나라 천자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니, 왕께서 절을 하지 않으시려면

하사하신 물건을 되돌려주십시오”라고 하자, 곤모는 일어나 보내온 물건에

대해서는 절을 했으나, 그 나머지 예식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장건은 사신으로

오게 된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 “오손이 동쪽으로 옮겨와 혼야왕의 옛 땅에

살게 되면, 한나라는 옹주를 보내 곤모의 부인으로 삼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무렵 오손은 나라가 나뉘어 있었고, 왕은 연로했으며, 한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한나라가 큰지 작은지도 몰랐으며, 흉노에게 오래도록 복속해 있었고,

또 그들과의 거리는 가까웠으므로 대신들은 모두 흉노를 무서워하며  

옮겨가 살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왕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건은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昆莫有十餘子,其中子曰大祿,彊,善將眾,將眾別居萬餘騎. 

大祿兄為太子,太子有子曰岑娶,而太子蚤死.  臨死謂其父昆莫曰:

「必以岑娶為太子,無令他人代之.」 昆莫哀而許之,卒以岑娶為太子. 

大祿怒其不得代太子也,乃收其諸昆弟,將其眾畔,謀攻岑娶及昆莫.

[곤모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 대록이라고 불리는 가운데 아들은 힘이

세고 병사들을 잘 다루었는데,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대록의 형이 태자였는데, 태자에게는 잠취(岑娶)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는 일찍 죽었다. 그는 죽기에 앞서 그의 아버지 곤모에게 말하기를 :

" 반드시 잠취를 태자로 삼아주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곤모는 불쌍히 여겨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잠취를 태자로 삼았다.

대록은 자신이 태자의 뒤를 잇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다른 형제들과 연합해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잠취와 곤모를 공격할 것을 도모했다.]  

昆莫老,常恐大祿殺岑娶,予岑娶萬餘騎別居,而昆莫有萬餘騎自備,國眾分為三,

而其大總取羈屬昆莫,昆莫亦以此不敢專約於騫. 

騫因分遣副使使大宛、康居、大月氏、大夏、安息、身毒、于窴、扜穼及諸旁國.

烏孫發導譯送騫還,騫與烏孫遣使數十人,馬數十匹報謝,因令窺漢,知其廣大.

騫還到,拜為大行,列於九卿.  歲餘,卒. 

[곤모는 이미 나이가 들었고 대록이 잠취를 죽일까봐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잠취에게 만여 명의 기병을 주어 다른 곳에서 살게 하고,

곤모 자신도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스스로 대비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대체로 곤모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곤모도 이로 인해서 감히 자기 마음대로 장건과 약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건은 곧 부사들을 대원, 강거, 대월지, 대하, 안식(安息), 연독(身毒), 우전(于闐),

우미 및 여러 인접한 나라에 사신으로 나누어 보냈다. 오손왕은 안내인과 통역원을

딸려 장건을 환송했다. 장건은 오손왕이 한나라로 보내는 사신 몇 십 명과

말 몇 십 필을 오손왕의 감사의 표시로서 함께 데리고 왔는데, 오손은 이것을 기회로

한나라를 살피고 한나라가 얼마나 광대한지 알아보도록 명령했다. 

장건이 돌아오자 천자는 그를 대행(大行)에 봉해 구경의 대열에 서게 했다.

그로부터 1여 년 뒤에 장건은 죽었다.]

烏孫使既見漢人眾富厚,歸報其國,其國乃益重漢.

其後歲餘,騫所遣使通大夏之屬者皆頗與其人俱來,於是西北國始通於漢矣.

然張騫鑿空,其後使往者皆稱博望侯,以為質於外國,外國由此信之.

自博望侯騫死後, 匈奴聞漢通烏孫, 怒,欲擊之.  及漢使烏孫, 若出其南,

抵大宛、大月氏相屬,烏孫乃恐,使使獻馬,願得尚漢女翁主為昆弟. 

天子問群臣議計,皆曰「必先納聘,然後乃遣女.」

[오손의 사신들은 이미 한나라의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한 것을 보고,

자기 나라에 돌아가 보고하니, 그들은 더욱 한나라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 후 1여 년이 지나자, 장건이 처음에 대하 등의 나라에 파견했던 사신들이 대부분

그 나라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니, 이때부터 서북쪽의 각국들이 비로소 한나라와

교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건이 처음 개척한 길이므로 그 후에

사신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박망후’라고 불렀고 외국에서 신의를 얻고자

했으며, 외국 역시 이러한 까닭에 그들을 신임했다. 

박망후 장건이 죽은 후에, 흉노는 한나라가 오손과 교통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공격하려고 했다. 오손에 도착한 한나라 사신은 그 남쪽을 지나서

대원과 대월지에 이르러 서로 접촉하니, 오손은 비로소 두려워져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고, 한나라의 옹주를 처로 맞이해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고자 했다.

천자는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여 대책을 세우라고 하자, 모두 말하기를 :

“반드시 먼저 폐백을 바치게 한 다음, 옹주를 시집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初,天子發書易,云「神馬當從西北來」. 得烏孫馬好,名曰「天馬」. 

及得大宛汗血馬, 益壯, 更名烏孫馬曰「西極」名大宛馬曰「天馬」云.

而漢始筑令居以西, 初置酒泉郡以通西北國.  

因益發使抵安息、奄蔡、黎軒、條枝、身毒國.  而天子好宛馬,使者相望於道. 

諸使外國一輩大者數百, 少者百餘人,人所齎操大放博望侯時.  其后益習而衰少焉. 

漢率一歲中使多者十餘,少者五六輩,遠者八九歲,近者數歲而反.

[처음에 천자가《역경》을 펴서 점을 쳐보았더니, 이르기를 “신마가 서북쪽으로부터

오리라”라고 했다. 그 뒤에 오손의 좋은 말을 얻고 ‘천마(天馬)’라고 이름했다.

그런데 이제 대원의 한혈마(汗血馬)를 얻고 보니, 더욱 건장했기에 오손의 말 이름을

바꾸어 ‘서극(西極)’이라 하고, 대원의 말을 ‘천마’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나라는 영거(令居) 서쪽에 성을 쌓고, 새로이 주천군(酒泉郡)을 설치해

서북쪽의 모든 나라들과 통하기 좋도록 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신들을

안식(安息), 엄채(奄蔡), 여헌(黎軒), 조지(條枝), 신독(身毒) 등에 보냈다. 

그리고 천자가 대원의 말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신들을 연달아 계속 보냈다.

외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많을 때는 몇 백 명, 적은 경우는 백여 명이 되었는데,

그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거의 박망후 때와 비슷했다. 그 후 점차 습관이 되자,

차츰 적어지게 되었다. 한나라가 대체로 1년 동안에 사신을 파견하는 횟수는 많으면

10여 차례, 적으면 5~6차례로서, 먼 곳을 간 사람은 8~9년,

가까운 곳으로 간 사람도 몇 해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是時漢既滅越,而蜀、西南夷皆震,請吏入朝. 

於是置益州、越巂、牂柯、沈黎、汶山郡,欲地接以前通大夏.  

乃遣使柏始昌、呂越人等歲十餘輩,出此初郡抵大夏,皆復閉昆明,為所殺,

奪幣財,終莫能通至大夏焉.  於是漢發三輔罪人,因巴蜀士數萬人,

遣兩將軍郭昌、衛廣等往擊昆明之遮漢使者,斬首虜數萬人而去.

[이때에 한나라는 이미 월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촉과 서남이들은 모두 두려워 떨며

한나라에게 관리를 파견해서 관할해 주고 입조하는 것을 청했다.

이리하여 한나라는 익주, 월수(越雟), 장가(牂柯), 침려(沈黎), 민산(汶山) 등의 군을

설치해 한나라의 경계와 연결시켜 대하와 왕래하기 편하게 하고자 했다.  

그래서 백시창(柏始昌)과 여월인(呂越人) 등 한 해에 10여 차례 사신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새로 설치한 군을 지나서 대하로 향했으나, 모두가 다시 곤명에서 저지되어

살해되거나 가지고 간 돈과 물건을 전부 빼앗겨 끝내 대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자 한나라는 삼보의 죄인들을 징발해 파(巴), 촉의 군사 몇 만 명과 합류시키고,

곽창(郭昌)과 위광(衛廣) 두 장군을 파견해 한나라 사자를 가로막은

곤명의 무리들을 치게 하니, 몇 만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아 철수했다.]

其後遣使,昆明復為寇,竟莫能得通. 

而北道酒泉抵大夏,使者既多,而外國益厭漢幣,不貴其物.

自博望侯開外國道以尊貴, 其後從吏卒皆爭上書言外國奇怪利害, 求使. 

天子為其絕遠, 非人所樂往, 聽其言, 予節,  募吏民毋問所從來, 為具備人眾遣之,

以廣其道.  來還不能毋侵盜幣物,及使失指,天子為其習之,輒覆案致重罪,

以激怒令贖,復求使.

[그 후 에도 사신을 파견하기는 했으나, 곤명은 다시 습격하곤 해 끝내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쪽의 주천을 거쳐 대하에 왕래한 사신은 너무 많아서, 

외국에서는 차츰 한나라의 폐물을 싫어하게 되었고, 그 물건들을 귀히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박망후가 외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 존귀하게 되었기에, 그를 따르던 관리와

병사들은 서로 다투어 글을 올려 외국의 진기하고 괴이한 것들과, 이로움과 병폐 등을

말하고 사신이 되기를 원했다. 천자는 그 나라들이 멀리 있는 곳이어서 사람들이

즐겨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 정절(旌節)을 주고, 

또 관리나 백성 중에서 모집해 그들의 출신 등도 묻지 않고 수행원을 준비해 주고

그들을 파견해 그 길을 넓혔다. 갔다가 돌아온 사자 중에는 재물을 빼돌리는

이도 있었고, 사신으로서 천자의 본뜻을 어기는 자들도 나타나게 되자, 

천자는 그들이 이러한 일에 습관이 되어 있다고 여기고 조사해 무거운 죄로

다스리고, 그들이 발분해서 공을 세우면 죄를 면할 수 있도록 해주자,

그들은 다시 사신이 되기를 요구했다.]

 

使端無窮,而輕犯法.  其吏卒亦輒復盛推外國所有,言大者予節,言小者為副,

故妄言無行之徒皆爭效之.  其使皆貧人子,私縣官齎物,欲賤市以私其利外國. 

外國亦厭漢使人人有言輕重,度漢兵遠不能至,而禁其食物以苦漢使.

漢使乏絕積怨,至相攻擊.  而樓蘭、姑師小國耳, 當空道, 攻劫漢使王恢等尤甚.

[사신을 보내야 할 일은 끝이 없었고, 그들 역시 경솔하게 법을 어겼다.

그리고 이졸(吏卒)들은 또한 늘상 적극적으로 외국의 모든 것을 찬양했는데,

크게 과장한 사람에게는 부절을 주어 정사로, 과장이 적은 사람은 부사로 삼으니,

이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고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자들이 모두 다투어

그대로 따라 하게 되었다.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가난한 집 출신이어서

천자가 서역 각국으로 보내는 예물을 가로채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고,

싼값으로 그곳의 물건을 사들여 이익을 챙겼다. 

외국 사람들도 한나라 사신들의 말이 제각기 서로 다른 것에 싫증이 났고,

한나라의 군사는 멀리 있어 쳐들어올   없다는 계산으로 음식물 제공을 중단해

한나라의 사신들을 괴롭혔다. 한나라의 사신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게 되자, 

원한이 쌓이게 되어 서로 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누란과 고사는 작은 나라였지만, 교통의 요지에 있었으므로

한나라의 사신 왕회(王恢) 등을 더욱 심하게 위협했다.]  

而匈奴奇兵時時遮擊使西國者.  使者爭遍言外國災害, 皆有城邑,兵弱易擊. 

於是天子以故遣從驃侯破奴將屬國騎及郡兵數萬,至匈河水,欲以擊胡,胡皆去.

其明年, 擊姑師, 破奴與輕騎七百餘先至, 虜樓蘭王, 遂破姑師.  

因舉兵威以困烏孫、大宛之屬.  還, 封破奴為浞野侯.  

王恢數使,為樓蘭所苦,言天子,天子發兵令恢佐破奴擊破之,封恢為浩侯.

於是酒泉列亭鄣至玉門矣.

[또 흉노의 기병들이 자주 서쪽 나라로 가는 한나라의 사신들을 가로막고 공격했다. 

사신들은 대체로 외국에서 받은 재난에 대해서 “외국은 모두 성읍이 있기는 하나,

군대가 약해 격파하기 쉽다”라고 서로 다투어 말했다. 

이에 천자는 이러한 이유로 종표후 파노(破奴)를 파견해 속국의 기습병과 각 군( )의

군사 몇 만 명을 거느리고 흉하수(匈河水)까지 가서 흉노를 치려고 했지만,

흉노는 모두 달아나버렸다. 그 이듬해 고사를 공격했는데, 파노는 경기(輕騎) 7백여

명과 함께 먼저 이르러 누란왕을 포로로 하고 드디어 고사를 깨뜨렸다.

이 일로 군대의 위력을 떨쳐 보이고, 오손과 대원 등을 곤란하게 했다가 돌아오자

천자는 그를 착야후에 봉했다. 왕회는 여러 차례 사신으로 나가 누란에게

고통을 겪었으므로, 그러한 상황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군사를 징발해

왕회로 하여금 파노를 도와 누란을 격파하게 하고, 그를 호후(浩侯)에 봉했다.  

이리하여 주천군에서 옥문관까지 초소와 요새가 즐비하게 늘어서게 되었다.] 

烏孫以千匹馬聘漢女,漢遣宗室女江都翁主往妻烏孫,烏孫王昆莫以為右夫人.

匈奴亦遣女妻昆莫,昆莫以為左夫人.  昆莫曰「我老」,乃令其孫岑娶妻翁主.

烏孫多馬,其富人至有四五千匹馬.

[오손은 1천필의 말을 바치고 한나라 딸을 맞이하려 하니,

한나라는 황족의 딸인 강도옹주(江都翁主)를 보내 오손왕에게 시집 보냈고,

오손왕 곤모는 그녀를 우부인으로 삼았다. 흉노 또한 딸을 곤모에게 시집 보내니 

곤모는 그녀를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았다. 곤모는 “나는 늙었다”라고 말하고,

그의 손자인 잠취에게 옹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 오손에는 말이 많이 있었는데,

부유한 사람들 중에는 4천~5천 필의 말을 가진 자도 있었다.] 

 

初,漢使至安息,安息王令將二萬騎迎於東界.  東界去王都數千里. 

行比至,過數十城,人民相屬甚多.  漢使還,而後發使隨漢使來觀漢廣大,

以大鳥卵及黎軒善眩人獻于漢.  及宛西小國驩潛、大益,

宛東姑師、扜穼、蘇薤之屬,皆隨漢使獻見天子.  天子大悅.

[처음으로 한나라의 사신이 안식에 도착했을 때, 안식왕은 2만 명의 기병을 동원시켜

동쪽 변경까지 나와 맞게 했다. 동쪽 변경은 왕도에서 몇 천 리나 떨어져 있다. 

사신이 왕도까지 가는 데에는 몇 십 개의 성읍을 지나게 되어 있는데,

백성들은 계속 이어져 대단히 많았다. 한나라의 사신이 돌아오니, 그들도 사자를 보내

한나라의 사자를 따라와서 한나라의 광대함을 관찰하고, 큰 새의 알과 여헌(黎軒)의

마술사를 한나라에 바쳤다. 그리고 대원 서쪽의 작은 나라인 환잠(驩潛),

대익(大益)과 대원의 동쪽 나라인 고사(姑師), 우미, 소해(蘇薤) 등의 사신들이

한나라 사신을 따라와서 예물을 올리고 천자를 배알했다. 천자는 크게 기뻐했다.] 

而漢使窮河源,河源出于窴,其山多玉石,采來,天子案古圖書,

名河所出山曰崑崙云.  是時上方數巡狩海上,乃悉從外國客,大都多人則過之,

散財帛以賞賜,厚具以饒給之,以覽示漢富厚焉.  於是大觳抵,出奇戲諸怪物,

多聚觀者,行賞賜,酒池肉林,令外國客遍觀(名)[各]倉庫府藏之積,見漢之廣大,

傾駭之.  及加其眩者之工,而觳抵奇戲歲增變,甚盛益興,自此始.  

西北外國使,更來更去.

[그리고 한나라 사신들은 황하의 원류를 찾아냈는데, 황하의 발원지를 본래

우전(于窴)에서 시작되었고, 그 산에는 옥석이 많았으며, 그것을 캐어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는 옛날의 도서를 참고해 황하가 시작되는 이 산을 곤륜이라고 지었다. 

이때에 황제는 자주 바닷가를 순행했는데, 언제나 외국 손님들을 모두 데리고 

다녔으며, 인구가 많은 큰 도시에 들러서는 재물과 비단 등을 풀어 상으로 내리고,

풍성한 술과 안주를 갖추어 그들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한나라의 부유함을

과시했다. 또한 수시로 씨름대회를 열고, 신기한 놀이와 갖가지 괴이한 물건들을

전시해 많은 관중들을 끌어 모았으며, 많은 상품들을 하사하고 주지육림의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외국 손님들에게 각 창고와 부장(府藏)에 쌓여 있는 것들을 두루 보게 해

한나라의 광대함을 드러내어, 그들을 놀라게 했다. 마술사의 기교가 교묘해지고,

씨름이나 기예도 해마다 변화를 더해 갈수록 매우 성행했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서북쪽의 외국 사신들은 빈번히 왕래했다.]  

宛以西,皆自以遠,尚驕恣晏然,未可詘以禮羈縻而使也.  自烏孫以西至安息,

以近匈奴,匈奴困月氏也,匈奴使持單于一信,則國國傳送食,不敢留苦;

及至漢使,非出幣帛不得食,不市畜不得騎用.   所以然者,遠漢,而漢多財物,

故必市乃得所欲,然以畏匈奴於漢使焉.  宛左右以蒲陶為酒,富人藏酒至萬餘石,

久者數十歲不敗.  俗嗜酒,馬嗜苜蓿.

​[그러나 대원 서쪽의 여러 나라들은 한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 여전히

교만하고 안일하게 굴었으므로, 한나라도 여전히 그들을 예로써 복종하게 하며,

속박해 한나라를 섬기도록 할 수는 없었다. 오손의 서쪽에서 안식에 이르기까지는

흉노에 가까웠으므로 흉노가 월지를 괴롭히고 나서부터는 흉노의 사신이 선우의

편지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나라마다 먹을 것을 차례로 보내주며 감히 억류해 놓고

고통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한나라의 사신이 가면 재물을 주지 않고는

먹을 것을 얻을 수가 없고, 가축도 사지 않으면 탈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는,

한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고, 게다가 재물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나라의 사신은 반드시 사야지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한나라의 사신보다 흉노를 더 두려워한 탓이기도 하다. 

대원 주위의 나라에서는 포도로 술을 빚었는데, 부잣집에서는 만여 석(石)에 이르는

술을 저장해 두었고, 오래된 것은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상하지 않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고, 말은 목숙(苜蓿)을 좋아했다.]

 

漢使取其實來,於是天子始種苜蓿、蒲陶肥饒地.  及天馬多,外國使來眾,

則離宮別觀旁盡種蒲萄、苜蓿極望.  自大宛以西至安息,國雖頗異言,然大同俗,

相知言.  其人皆深眼,多須髯,善市賈,爭分銖.  俗貴女子, 女子所言而丈夫乃決正.

其地皆無絲漆,不知鑄錢器.  及漢使亡卒降,教鑄作他兵器.  

得漢黃白金,輒以為器,不用為幣.  而漢使者往既多,其少從率多進熟於天子,

言曰:「宛有善馬在貳師城,匿不肯與漢使.」

[한나라의 사자가 그 씨앗을 가져오니, 천자는 목숙과 포도를 비옥한 땅에 심기

시작했다. 천마가 많아지고, 외국의 사신들이 많이 오게 될 무렵에는 이궁과

별관 옆에는 보이는 곳마다 온통 포도와 목숙이 심어져 있었다.  

대원의 서쪽에서 안식에 이르는 나라들은 비록 언어가 많이 달랐지만,

풍습이 거의 비슷해서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눈이 움푹 들어가 있고,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난 사람이 많았으며, 

장사를 잘했고 아주 작은 돈 때문에도 서로 다투었다. 

풍속은 여자를 귀하게 여겼으므로 남편은 아내의 말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이곳에서는 명주실과 옻나무가 나지 않았고, 철기를 주조해 쓸 줄 몰랐다.

한나라 사신을 따라간 이졸들이 그들에게 투항해 병기를 주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한나라의 황백금(黃白金)을 얻게 되면 곧 그릇을 만들고 돈으로

쓰지는 않았다. 한나라에서 사자로 외국에 가는 자가 많아지고, 어려서부터 그들을

따라다닌 자들은 귀국한 후에 대부분 황제에게 과장된 말을 하기 좋아했다. 

한번은 말하기를 : “ 대원에는 이사성(貳師城) 안에 좋은 말[馬]이 있는데,

감추어 두고 한나라 사신에게는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天子既好宛馬,聞之甘心,使壯士車令等持千金及金馬以請宛王貳師城善馬.
宛國饒漢物,相與謀曰:「漢去我遠,而鹽水中數敗,出其北有胡寇,出其南乏水草.

又且往往而絕邑,乏食者多.  漢使數百人為輩來,而常乏食,死者過半,

是安能致大軍乎?無柰我何.  且貳師馬,宛寶馬也.」遂不肯予漢使.  

漢使怒,妄言,椎金馬而去.  宛貴人怒曰:「漢使至輕我!」

遣漢使去,令其東邊郁成遮攻殺漢使,取其財物.

[천자는 원래 대원의 말을 좋아하고 있었기에 이 이야기를 듣자 기뻐서 

장사(壯士)와 거령(車令) 등으로 하여금 천금과 금으로 만든 말을 가지고 가서,

대원왕에게서 이사성의 좋은 말을 얻어오게 했다.

대원에는 한나라의 물건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 상의해 말하기를 :

" 한나라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 사신 일행은 자주 염수에 빠져

죽은 일이 있고, 그 북쪽에는 흉노의 도둑들이 있어 습격하고, 그 남쪽으로 나가면

물과 풀이 없다. 게다가 성읍이 없어서 식량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한나라 사신들은 몇 백 명이 한패로 오지만 언제나 식량이 모자라 죽는 사람이 반을

넘는데, 어찌 많은 군사를 보낼 수 있겠는가 ?  한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이사성의 말은 대원의 보마(寶馬)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한나라 사신에게 말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나라 사신은 화가 나서

욕을 하며 금으로 만든 말을 망치로 쳐부수고 그곳을 떠났다.

대원의 귀인들은 노하여 말하기를 : “ 한나라의 사신은 극히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

라고 하며, 한나라 사신을 돌아가도록 해 놓고는 그 동쪽변경에 있는 욱성(郁成)으로

하여금 가는 길목을 막고 공격해 한나라 사신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게 했다.]

於是天子大怒.  諸嘗使宛姚定漢等言宛兵弱,誠以漢兵不過三千人,彊弩射之,

即盡虜破宛矣.  天子已嘗使浞野侯攻樓蘭,以七百騎先至,虜其王,

以定漢等言為然,而欲侯寵姬李氏,拜李廣利為貳師將軍,發屬國六千騎,

及郡國惡少年數萬人,以往伐宛.  期至貳師城取善馬,故號「貳師將軍」

趙始成為軍正,故浩侯王恢使導軍,而李哆為校尉,制軍事.

是歲太初元年也.  而關東蝗大起,蜚西至敦煌.

[이리하여 천자는 크게 노했다. 일찍이 대원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일이 있는

요정한(姚定漢) 등이 말하기를 대원은 병력이 약해 실로 3천명이 못 되는

한나라 군사를 끌고 가더라도 센 활을 쏘면 그들을 모두 포로로 하여 대원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천자는 일찍이 착야후(浞野侯)에게 누란을 치게

했을 때, 착야후가 7백기(騎)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그 왕을 포로로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요정한 등이 하는 말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총희(寵姬) 이씨의 형제들을

후(侯)로 끌어 올려주고자 하여 오라비인 이광리를 이사장군에 임명하고

속국의 6천기와 각 군국에 있는 불량소년 몇 만 명을 징발해 가서 대원을 치게 했다.

이사성에 이르러 좋은 말을 빼앗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장군’이라고

부른 것이다.  조시성(趙始成)을 군정(軍正)으로 하고, 옛 호후(浩侯) 왕회로 하여금

앞장 서서 군대를 이끌도록 했으며, 이차(李哆)를 교위로 삼아

군대의 큰 일을 담당하게 했는데, 이 해는 태초(太初) 원년이었다. 

이 해에 관동에 메뚜기 떼가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돈황(敦煌)까지 퍼지고 있었다.]

 

貳師將軍軍既西過鹽水,當道小國恐,各堅城守,不肯給食.  攻之不能下.  

下者得食,不下者數日則去.  比至郁成,士至者不過數千,皆饑罷. 

攻郁成,郁成大破之,所殺傷甚眾.  貳師將軍與哆、始成等計:

「至郁成尚不能舉,況至其王都乎?」引兵而還.  往來二歲.

還至敦煌,士不過什一二.  使使上書言:「道遠多乏食;且士卒不患戰,患饑. 

人少,不足以拔宛.  願且罷兵,益發而復往.」

天子聞之,大怒,而使使遮玉門,曰軍有敢入者輒斬之!貳師恐,因留敦煌.

[이사장군의 군사는 서쪽으로 진격해 염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목에 있는 작은

나라들은 겁이 나서 각기 성문을 굳게 닫고 한나라 군에게 식량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함락시키게 되면

식량을 얻을 수 있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면 며칠 만에 떠나가야만 했다. 

욱성에 도착할 무렵에 남은 군사는 몇 천 명에 불과했고, 그들도 모두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욱성을 공격했으나 욱성이 크게 이겨 살상(殺傷)당한 군사가 대단히 많았다.

이사장군은 이차 및 조시성 등과 상의해 “욱성조차 점령할 수 없는데,

하물며 왕도(王都)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갔다 오는 데에 2년이 걸렸다. 돈황에 돌아오니 군사 수는 출발할 때의 1~2할에

불과하여, 사자를 보내 글을 올려 고하기를 : “ 길은 멀고 식량은 거의 떨어졌으니,

병졸들은 싸움을 걱정하지 않고 굶주림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군사가 적어 대원을

함락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바라옵건대 잠시 병력을 거두고 새로 증강해 다시

나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천자는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옥문관을 막고는 군사로서 감히 들어오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

이사장군은 두려워서 그대로 돈황에 머물렀다.]

其夏,漢亡浞野之兵二萬餘於匈奴. 公卿及議者皆願罷擊宛軍,專力攻胡.  

天子已業誅宛,宛小國而不能下,則大夏之屬輕漢,而宛善馬絕不來,烏孫、

侖頭易苦漢使矣,為外國笑.  乃案言伐宛尤不便者鄧光等,赦囚徒材官,

益發惡少年及邊騎,歲餘而出敦煌者六萬人,負私從者不與.  

牛十萬,馬三萬餘匹,驢騾橐它以萬數.

多齎糧,兵弩甚設,天下騷動,傳相奉伐宛,凡五十餘校尉.

[그해 여름에 한나라는 착야후의 군사 2만여 명을 흉노에게 잃었다.

공경과 논자들은 대원을 치는 군사를 파하고, 전력을 다해 흉노를 칠 것을 원했다.  

그러나 천자는 이미 대원을 무찌르기로 했는데, 대원과 같은 작은 나라도 함락하지

못하면 대하 등도 한나라를 가볍게 여길 것이며, 대원의 좋은 말은 절대로 얻지

못하게 될 것이고, 오손과 윤두도 업신여기고 한나라의 사신들을 괴롭히게 되어

외국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원을 치는 것이 특히 부당하다고 말하는 등광(鄧光) 등을 조사해 처벌하고,

죄수들 가운데 재관(材官)의 죄를 용서해 주고, 더 많은 불량소년과 변경의 기병들을

징발해, 1년 남짓 지나자 6만여 명의 군사로 돈황을 출발하게 했는데,

개인적으로 먹을 음식을 지고 따라가는 사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 부대는 10만 마리의 소, 3만여 필의 말과 몇 만 마리의 나귀와 노새, 낙타를 데리고

있었다. 식량은 풍부했고, 무기와 큰 활도 많이 준비되었다.

온 천하가 소동을 일으키며 명령을 전하고 서로 받들며 대원을 치게 되었는데, 

대체로 이때 합류한 교위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宛王城中無井,皆汲城外流水,於是乃遣水工徙其城下水空以空其城.

益發戍甲卒十八萬,酒泉、張掖北,置居延、休屠以衛酒泉,而發天下七科適,

及載糒給貳師.  轉車人徒相連屬至敦煌. 

而拜習馬者二人為執驅校尉,備破宛擇取其善馬云.  於是貳師后復行,兵多,

而所至小國莫不迎,出食給軍.  至侖頭,侖頭不下,攻數日,屠之.

[대원왕이 있는 성 안에는 우물이 없어서, 물은 전부 성 밖의 흐르는 물을 길어다가

쓰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한나라 군대는 성 아래의 물이 흐르는 길을 옮겨 성 안의

물을 말리려고 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병사 18만 명을 더 징발하여 주천과 장액

북쪽을 수비하게 하고, 거연과 휴도 두 현을 새로 설치해 주천을 방위하게 했다.

그리고 천하의 일곱 가지 죄를 가진 자를 징발하여, 말린 식량을 싣고 가서

이사장군에게 공급해 주었다. 짐을 실은 수레와 사람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줄을 이어

돈황에 도착했다. 또 말[馬]에 정통한 사람 두 명을 집구교위(執驅校尉)로 임명해

대원을 함락시킨 후, 좋은 말을 고르도록 준비했다. 

이에 이사장군은 후에 다시 출정하게 되었는데, 병력은 많았기 때문에 가는 길목의

소국들은 감히 성 밖으로 나와서 맞이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모두 식량을 내오며 한나라 군사에게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윤두에 이르렀는데, 

윤두가 항복하지 않자, 며칠을 공격해 그들을 모조리 도륙하였다.]

自此而西,平行至宛城,漢兵到者三萬人.  

宛兵迎擊漢兵,漢兵射敗之,宛走入葆乘其城.  貳師兵欲行攻郁成,

恐留行而令宛益生詐,乃先至宛,決其水源,移之,則宛固已憂困. 

圍其城,攻之四十餘日,其外城壞,虜宛貴人勇將煎靡.  宛大恐,走入中城. 

[이후로 서쪽으로는 대항하는 나라가 없어 순조롭게 대원의 수도에 이르렀는데,

도착한 한나라 군사는 3만 명이었다. 대원의 군사는 한나라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한나라 군사는 활을 쏘아 이들을 물리치자, 대원의 군사는 달아나서

그들의 성 안으로 들어가 오로지 성벽에 의지해 방어만 하였다. 

이사장군의 군사는 진군해 욱성을 치고 싶었지만 행군을 지체하게 되면,

대원에게 더욱 속임수를 쓸 기회를 주게 될까 두려워 먼저 대원성을 공격해서

그 수원(水源)을 끊어 물의 흐르는 방향을 바꾸어 버리자,

대원국은 굳게 성을 지키고자 해도 곧 큰 어려움을 처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성을 포위해 공격한 지 40여 일 만에 그 외성(外城)을 무너뜨리고

대원의 귀족 중에 용장(勇將)인 전미(煎靡)를 사로잡았다. 

대원의 군사는 매우 두려워하며 성 안으로 달아났다.]

 

宛貴人相與謀曰:「漢所為攻宛,以王毋寡匿善馬而殺漢使.  

今殺王毋寡而出善馬,漢兵宜解;即不解,乃力戰而死,未晚也.」

宛貴人皆以為然,共殺其王毋寡,持其頭遣貴人使貳師,約曰:「漢毋攻我. 

我盡出善馬, 恣所取, 而給漢軍食.  即不聽, 我盡殺善馬, 而康居之救且至.

至, 我居內, 康居居外,與漢軍戰.  漢軍熟計之,何從?」 

是時康居候視漢兵,漢兵尚盛,不敢進.

[대원의 귀족들은 서로 상의해 말하기를 : " 한나라가 대원을 치는 이유는 우리 왕인

무과(毋寡)가 좋은 말을 감추어 두고 한나라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지금 왕

무과를 죽이고 좋은 말을 내놓으면, 한나라 군사는 분명히 포위를 풀게 될 것이다. 

설사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그때 가서 힘껏 싸우다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하자.

대원의 귀족들은 이것이 옳다고 여겨 그들 왕인 무과를 죽이고 귀족 한 사람이

그 머리를 가지고 이사장군에게로 가서 약속하며 말하기를 : “ 한나라는 우리에 대한

공격을 멈추어 주십시오. 우리는 좋은 말을 있는 대로 모두 내어 마음대로 골라 

가도록 맡기고, 또 한나라 군사에게 식량을 공급하겠습니다.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좋은 말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이며,  그리고 강거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입니다. 도착하게 되면 우리 군사는 성 안에 있고,

강거의 구원병은 성 밖에서 한나라 군사와 싸울 것입니다.

한나라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쪽을 따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강거의 후(候)의 구원병은 한나라 군사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한나라 군이 여전히 강성했기에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貳師與趙始成、李哆等計:「聞宛城中新得秦人,知穿井,而其內食尚多. 

所為來,誅首惡者毋寡.  毋寡頭已至,如此而不許解兵,則堅守,

而康居候漢罷而來救宛,破漢軍必矣.」  軍吏皆以為然,許宛之約. 

宛乃出其善馬,令漢自擇之,而多出食食給漢軍.  漢軍取其善馬數十匹.  

中馬以下牡牝三千餘匹, 而立宛貴人之故待遇漢使善者名昧蔡以為宛王, 與盟而罷兵. 

終不得入中城.  乃罷而引歸.

[이사장군은 조시성, 이차 등과 계획을 짜기를 : " 들리는 바에 의하면,

대원성 안에서는 최근에 진(秦)나라 사람을 찾아내서 우물을 파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성 안에는 식량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우리가 온 것은 괴수인 무과를 베어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 무과의 머리는 이미 와 있는데, 포위를 풀지 않는다면

대원은 성을 굳게 지킬 것이고, 강거가 우리 군사가 지친 것을 엿보고 있다가 대원을

구하러 오면 우리 군대가 불리해 질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자. 

한나라 군리(軍吏)들은 모두 그러리라 생각하고 대원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대원은 이에 좋은 말을 꺼내 와서는 한나라 군사에게 마음대로 고르게 했으며,

많은 식량도 가져와서 한나라 군사에게 제공하였다. 한나라 군사는 좋은 말

몇 십 필과 중등 이하의 암수 3천여 필을 고른 다음 대원의 귀족 가운데, 

매채(昧蔡)를 대원왕으로 세우고 함께 맹약을 한 후에 군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결국 한나라 군대는 중성()으로는 진입하지 못하고,

전쟁을 끝내고 군사를 거두어 철군하기 시작했다.]

初,貳師起敦煌西,以為人多,道上國不能食,乃分為數軍,從南北道.

校尉王申生、故鴻臚壺充國等千餘人,別到郁成.  郁成城守,不肯給食其軍.  

王申生去大軍二百里,  (偵)[偩]而輕之,責郁成.  

郁成食不肯出,窺知申生軍日少,晨用三千人攻,戮殺申生等,軍破,

數人脫亡, 走貳師.  貳師令搜粟都尉上官桀往攻破郁成.  郁成王亡走康居, 桀追至康居.

[처음에 이사장군은 돈황을 출발해 서쪽으로 나아갈 때 군사 수가 너무 많아 도중에

여러 나라들이 식량 공급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군사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남쪽 길과 북쪽 길로 나아가게 했다. 교위 왕신생(王申生)과 이전에 홍려(鴻臚)였던

호충국(壺充國) 등 1천여 명은 따로 떨어져 욱성에 이르렀다.  

욱성은 성을 굳게 지키며 그들에게 식량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왕신생은 대군(大軍)에서 2백리 떨어져 있었으며 대군의 위세에 힘입어

이들을 가볍게 여겨 식량을 제공하게 요구했지만, 욱성은 끝내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욱성에서는 신생의 군사가 날마다 줄어드는 것을 알아내고 어느 이른 아침

3천명의 군사로 공격해 와서 신생 등을 죽이니, 신생의 군사는 거의 전멸되었고,

그 중에 몇 사람만 겨우 탈출하여 이사장군의 본대로 돌아왔다.

이사장군은 수속도위(搜粟都尉)인 상관걸(上官桀)을 시켜 욱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욱성왕은 강거로 도망쳤고, 상관걸은 계속 추격하여 강거의 변경에 이르렀다.]

康居聞漢已破宛,乃出郁成王予桀,桀令四騎士縛守詣大將軍. 

四人相謂曰:「郁成王漢國所毒,今生將去,卒失大事.」欲殺,莫敢先擊. 

上邽騎士趙弟最少,拔劍擊之,斬郁成王,齎頭.  弟、桀等逐及大將軍.

[강거는 한나라가 이미 대원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욱성왕을 끌어내어 걸에게

넘겨주자, 상관걸은 네 명의 기사에게 욱성왕을 감시하며 대장군에게 보내도록 했다.  

네 사람은 서로 의논해 말하기를 : “ 욱성왕은 한나라에서 싫어하는 사람인데,

지금 산 채로 데리고 가다가 뜻밖에 그를 놓치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하며,

죽이려고 했으나, 감히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상규(上邽)의 기사인 조제(趙弟)는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었지만,

칼을 뽑아들고 나아가 욱성왕을 베어 죽이고, 그의 머리를 들고 갔다.

조제와 상관걸도 마침내 이사장군의 본대를 뒤쫓아 갔다.] 

 

初,貳師后行,天子使使告烏孫,大發兵并力擊宛. 

烏孫發二千騎往,持兩端,不肯前.

貳師將軍之東,諸所過小國聞宛破,皆使其子弟從軍入獻,見天子,因以為質焉. 

 貳師之伐宛也,而軍正趙始成力戰,功最多;

及上官桀敢深入,李哆為謀計,軍入玉門者萬餘人,軍馬千餘匹.

[처음, 이사장군의 원정 때, 천자는 사신을 오손에게 보내 대규모로 군사를 동원하고

힘을 합쳐 대원을 치자고 말했다. 그래서 오손국은 2천 명의 기병을 보내 출정하게

했으나, 두 나라 틈에서 망설이며 전진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사장군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 도중의 여러 작은 나라들은 대원이 항복한 것을

들었기에, 모두들 그 자제들을 한나라 군에게 딸려 보내 공물을 바치고,

천자를 뵙고 그들을 볼모로 해 한나라에 머무르게 했다. 

이사장군이 대원을 정벌할 때, 군정인 조시성은 힘껏 싸워 공로가 가장 많았고,

또 상관걸은 용감하게 적진 깊숙이 쳐들어갔으며, 이차는 많은 계책을 세웠으나

옥문관에 돌아온 군사들은 만여 명이고, 군마는 1천여 필 정도였다.]  

貳師后行,軍非乏食,戰死不能多,而將吏貪,多不愛士卒,侵牟之,以此物故眾.

天子為萬里而伐宛, 不錄過, 封廣利為海西侯.  又封身斬郁成王者騎士趙弟為新畤侯.

軍正趙始成為光祿大夫,上官桀為少府,李哆為上黨太守.

軍官吏為九卿者三人,諸侯相、郡守、二千石者百餘人,千石以下千餘人.

奮行者官過其望, 以適過行者皆絀其勞.  士卒賜直四萬金.  伐宛再反, 凡四歲而得罷焉. 

[이사장군의 두 번째 원정에서 군대는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전사한 사람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으나, 장수와 관리들이 탐욕스러워,

대다수가 사졸들을 아끼지 않았고 군량을 빼돌렸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만 리나 되는 곳에 가서 대원을 정벌했기에 천자는 굳이 과오를 따지지 않고,

이사장군 이광리를 해서후(西)로 봉했다. 또 스스로 욱성왕을 벤 기사 조제를

신치후(新畤侯)에 봉하고, 군정인 조시성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고,

상관걸을 소부(少府)로 하고 이차를 상당(上黨) 태수(太守)로 삼았다. 

군 관리들 중 구경(九卿)에 봉해진 사람들은 세 사람이고, 제후들의 재상이나 군수,

2천석의 신분으로 오른 사람들은 100여 명이며, 1천석 이하의 벼슬에 오른 사람들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자진해서 전쟁에 따라나선 사람들은 기대한 이상의 벼슬을

얻게 되고, 죄수로서 종군한 사람들은 그 노역을 면제해 주었다.

사졸들에게 하사된 물건은 4만 금에 상당했다.

대원을 정벌하기 위해 두 번 출정했고, 4년이 걸려 전쟁은 끝났다.]

漢已伐宛,立昧蔡為宛王而去.  歲餘,宛貴人以為昧蔡善諛,使我國遇屠,

乃相與殺昧蔡,立毋寡昆弟曰蟬封為宛王,而遣其子入質於漢. 

漢因使使賂賜以鎮撫之. 而漢發使十餘輩至宛西諸外國,求奇物,

因風覽以伐宛之威德.  而敦煌置酒泉都尉;西至鹽水,往往有亭.  

而侖頭有田卒數百人,因置使者護田積粟,以給使外國者. 

[한나라는 대원을 정복하고 매채(昧蔡)를 대원왕으로 세우고 떠났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나자, 대원의 귀족들은 매채가 한나라에 아첨을 잘해서

자기 나라를 망친 것이라고 여기고 매채를 죽인 다음, 무과의 동생인 선봉(蟬封)을

내세워 대원왕으로 삼고, 그의 아들을 한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한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후한 선물을 주어 위로하게 했다. 

그리고 10여 명의 사신들을 대원 서쪽의 여러 나라들에도 보내 진기한 물건들을

구해 오게 하고, 이를 계기로 대원을 정벌한 한나라의 위풍과 덕행을 보도록 했다.

또 돈황에다 주천도위를 두었고, 서쪽 염수까지 이르는 곳곳에는 정(亭)이 생겼다.

그리고 윤두에는 수백 명의 둔전병을 두고 그들을 감독하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

논과 밭을 보호하고 양식을 쌓아 두었으며 이를 외국으로 가는 사신들에게

공급하게 하였다.]

 

太史公曰:

《禹本紀》言「河出崑崙. 崑崙其高二千五百餘里,日月所相避隱為光明也.

其上有醴泉、瑤池」. 今自張騫使大夏之後也,窮河源,惡睹本紀所謂崑崙者乎?

故言九州山川,《尚書》近之矣.  至《禹本紀》、《山海經》所有怪物,余不敢言之也. 

태사공은 말한다. 

[우본기(禹本紀)》에 이르기를 ‘하수(河水)는 곤륜산(昆侖山)에서 나온다.

곤륜산은 그 높이가 2,500여 리이며, 해와 달이 서로 피해 숨으며 그 빛을 밝힌다.

그 위에는 예천(醴泉)과 요지(瑤池)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의 사신으로 간 후에야 하수의 원류를 밝혀내게

되었는데, 어떻게우본기》에서 말한 바의 곤륜산을 본 사람이 있겠는가 !  

그러므로 구주의 산천에 관한 기록은 《상서(尙書)》에 있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우본기》나 《산해경》에서 말한 괴상한 물건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