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貨殖列傳

第 六十九. 貨殖列傳(화식열전)

덕치/이두진 2024. 1. 16. 19:12

 

      第 六十九.   貨殖列傳(화식열전) 


老子曰:「至治之極,鄰國相望,雞狗之聲相聞,民各甘其食,美其服,
安其俗, 樂其業,至老死,不相往來.」必用此為務,輓近世涂民耳目,則幾無行矣. 
[노자는 말하기를 : "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다 보일 만큼
가까워서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마주 들린다 하여도,
백성들이 각기 제 나라의 음식을 맛있다 하고, 제 나라의 의복을 아름답다 하며, 
자기 고장의 풍속을 편히 여기고, 자신들의 일에 만족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다른 나라에 서로 내왕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치가 훌륭하다 하여 일부러 그렇게 하려 한다면
지금의 세상에서는 백성의 귀와 눈을 틀어막는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太史公曰:夫神農以前,吾不知已.  至若詩書所述虞夏以來,耳目欲極聲色之好,
口欲窮芻豢之味,身安逸樂,而心誇矜輓能之榮使.  
俗之漸民久矣,雖戶說以眇論,終不能化.
故善者因之,其次利道之,其次教誨之,其次整齊之,最下者與之爭. 
[태사공은 말한다.
신농씨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나도 알지 못하지만, 《시경》《서경》에서 말하고 있는
순․ 우 이후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빛을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따위의 맛있는 고기 맛을  찾아 헤매며, 몸은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원하며, 마음은 권세와 능력으로 얻은 영화를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풍속에 백성들의 삶이 젖어들었는지 오래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자의 훌륭한
가르침을 들려준다 하여도 백성들을 쉽게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정치가는 백성을 마음으로 다스리고,  그 다음으로는 이익을
통하여 백성을 이끌며, 그 다음은 백성들을 가르쳐 깨우쳐 주는 것이며,
그 아래 방법은 강제로 백성들을 규제하는 것이다.
가장 못난 정치는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夫山西饒材、竹、穀、纑、旄、玉石;山東多魚、鹽、漆、絲、聲色;
江南出枏、梓、薑、桂、金、錫、連、丹沙、犀、瑁、珠璣、齒革; 
龍門、碣石北多馬、牛、羊、旃裘、筋角;銅、鐵則千里往往山出棋置:此其大較也.
皆中國人民所喜好謠俗被服飲食奉生送死之具也.
[대체로 산서지방에는 목재, 대나무, 닥나무, 산 모시, 소꼬리 털, 옥돌 등이 

풍부하고;  산동(山東)에는 생선, 소금, 옻, 명주실, 가희(歌姬), 미녀(美女)가 많으며;
강남에는 매화나무, 가래나무, 생강, 계피, 금(金), 주석, 아연, 단사(丹沙), 물소 뿔,
구갑(龜甲), 진주, 상아, 가죽 등이 풍부하고; 용문 북쪽에는 말, 소, 양, 짐승가죽,
동물 심줄, 뿔 등이 많다; 구리와 철이 나는 산은 천 리 사방의 땅 여기저기에 마치
바둑돌을 놓은 것처럼 흩어져 있다. 이상 살펴본 것이 대략적인 형세이다. 
이것들은 모두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로서, 각각의 풍속에 따라
의복과 음식에 쓰며 산 사람을 키우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쓰는 물건들이다.]

故待農而食之,虞而出之,工而成之,商而通之.  此寧有政教發徵期會哉?
人各任其能,竭其力,以得所欲.  故物賤之徵貴,貴之徵賤,各勸其業,樂其事,
若水之趨下,日夜無休時,不召而自來,不求而民出之.  
豈非道之所符,而自然之驗邪?
[따라서 농민은 먹을 것을 생산하고, 나무꾼은 산림에서 나는 연료를 공급하며,
장인은 물건을 만들며, 상인은 그것들을 유통시킨다.
이런 것들을 무슨 명령이나 교화에 따라 그렇게 때맞추어 내보내겠는가?
사람들이 각자 그 능력에 맞게 있는 힘을 다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건 값이 싸면 오를 징조이고, 비싸면 내릴 징조이니 각자 자기 일에
힘쓰고 즐거워하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낮밤으로 쉬지 않듯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오고 구하지 않아도 인민들이 내놓는다.
이 어찌 큰 이치에 부합되는 일이 아니며, 자연적 규율의 징험이 아니겠는가?]

《周書》曰:「農不出則乏其食, 工不出則乏其事, 商不出則三寶絕, 虞不出則財匱少.」
財匱少而山澤不辟矣.  此四者, 民所衣食之原也.  原大則饒,原小則鮮.
上則富國, 下則富家.  貧富之道,莫之奪予, 而巧者有餘, 拙者不足.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 “ 농부가 생산을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모자라고,
장인이 물건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용품이 모자라게 되며, 상인이 장사를 하지 않으면
3보[三寶:식량, 자재, 상품]의 공급이 끊기게 되고, 또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지 않으면
자재가 모자라게 된다." 자재가 모자라게 되면 산과 택지는 개발되지 못한다. 
이 네 가지야말로 백성들의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다. 근원이 크면 풍요로워지고,
근원이 작으면 모자라게 되는 바, 위로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아래로는 집집이
부유해진다. 빈부의 이치란 빼앗거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교가 있는 자는 남기고 서툰 자는 모자라게 된다.]

故太公望封於營丘,地澙鹵,人民寡,於是太公勸其女功,極技巧,通魚鹽,
則人物歸之,繦至而輻湊.  故齊冠帶衣履天下,海岱之閒斂袂而往朝焉. 
其後齊中衰,管子修之,設輕重九府,則桓公以霸,九合諸侯,一匡天下;
而管氏亦有三歸,位在陪臣,富於列國之君.  是以齊富彊至於威、宣也.
[옛날 태공망이 영구에 부임하여 보니 땅에는 소금기가 많고 습했으며 그 주민은
적었다. 이에 태공은 여자들에게 베짜기를 권하여 그 기술을 최고로 만들고,
물고기와 소금을 유통시키니 물산과 사람이 모여드는데 마치 꾸러미로 동전을 꿰듯,
수레바퀴살이 안으로 모여들 듯했다. 그리하여 제나라의 모자, 허리띠, 옷, 
신발이 천하에 퍼졌고, 동해와 태산 사이의 제후들이 조회했다.
제나라가 중간에 쇠약해지긴 했지만 관중이 나라의 정치를 맡으면서  
경중[輕重: 물가를 조절하는 방법]․ 구부[九府:물자를 관장하는 9개 관청]를 설치하여
경제를 부흥하여 환공은 패자가 되고, 제후들을 아홉 번 회맹시켜 천하를 바로잡았다.

관자도 좋은 집과 처첩들을 거느리는 삼귀(三歸)를 누리는 등 자리는 신하였지만
다른 나라들 군주보다 부유했다.  이로써 제나라의 부강은 계속해서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의 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故曰:「倉廩實而知禮節,衣食足而知榮辱.」禮生於有而廢於無.
故君子富,好行其德;小人富,以適其力.  淵深而魚生之,山深而獸往之,
人富而仁義附焉.  富者得埶益彰,失埶則客無所之,以而不樂.  夷狄益甚.
[옛말에 이르기를 : "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
라고 했듯이 예(禮)는 여유가 있으면 생기고 여유가 없으면 사라진다. 
따라서 군자가 부유해지면 즐겨 그 덕을 행하고, 소인이 부유해지면 그 힘을
휘두르려고 한다. 못은 깊어야 고기가 살고, 산은 깊어야 짐승이 살듯이,
사람도 부유해야만 인의가 따른다. 부유한 사람이 세력을 얻으면 더욱 유명하게
되지만, 세력을 잃으면 식객들도 모두 떠나고 아무도 따르지 않아 즐겁지 

못하게 된다. 오랑캐들은 더 심하다.]

諺曰:「千金之子,不死於市.」此非空言也. 
故曰:「天下熙熙,皆為利來;天下壤壤,皆為利往.」
夫千乘之王,萬家之侯,百室之君,尚猶患貧,而況匹夫編戶之民乎! 
[속담에 이르기를 : " 천금의 부잣집 자식은 저자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빈 말이 아니다. 
예말에 이르기를 : " 천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찾아오는 것도 모두 이(利)를
얻고자 함이고, 우루루 달려가는 것도 이(利)를 찾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천승의 마차를 가진 왕, 만호를 가진 제후, 백가의 읍을 가진 대부들도 가난을
오히려 걱정하거늘 하물며 호적에 간신히 이름을 올린 보통 백성들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昔者越王句踐困於會稽之上,乃用范蠡、計然.
計然曰:「知斗則修備,時用則知物,二者形則萬貨之情可得而觀已. 
故歲在金,穰;水,毀;木,饑;火,旱.  旱則資舟,水則資車,物之理也.
六歲穰,六歲旱,十二歲一大饑. 夫糶,二十病農,九十病末. 
末病則財不出,農病則草不辟矣.
[옛날 월왕(越王) 구천은 회계산에서 치욕을 당하자, 범려와 계연을 중용했다.
계연이 월왕에게 말하기를 : "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면 미리 군비를 정돈해야 하며,
어느 때 무슨 물자가 필요할 것인가를 알면 앞서서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알면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상황을 미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목성이 서쪽에 있는 해에는 풍년이 들고, 북쪽에 있는 해에는 수해가 납니다.
또한 동쪽에 있으면 대 기근이 오고  남쪽에 있으면 가뭄이 듭니다. 
가뭄이 든 해에는 미리 배를 준비해 두고,
수해가 난 해에는 미리 수레를 준비해 두는 것이 세상을 준비하는 기본입니다.
일반적으로 6년마다 풍년이 오고 ,6년마다 가뭄이 들며,
12년에 한 번 큰 기근이 일어납니다. 쌀값이 한 말에 20전이면 농가가 힘들고,
90전이면 상인이 힘듭니다.  장사꾼이 어려우면 상품 생산 및 유통이 어려워지고,
농민이 어려우면 농지가 황폐해집니다.

上不過八十,下不減三十,則農末俱利,平糶齊物,關市不乏,治國之道也. 
積著之理,務完物,無息幣.  以物相貿易,腐敗而食之貨勿留,無敢居貴. 
論其有餘不足,則知貴賤.  貴上極則反賤,賤下極則反貴.  
貴出如糞土,賤取如珠玉.  財幣欲其行如流水.」
修之十年, 國富, 厚賂戰士, 士赴矢石, 如渴得飲, 遂報彊吳, 觀兵中國, 稱號「五霸」. 
[쌀값이 올라도 80전을 넘지 않고, 내려도 30전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농민과 상인들이 함께 잘 살게 됩니다. 쌀값을 안정시키고 시장에 물자가
부족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길입니다.
물자를 비축하는 방법은 쉽게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을 골라야 하지만
너무 오래 쌓아 두기만 한다고 해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건은 빠르게 유통이 되어야 하며 낡은 물건은 버리고 특히 비싼 물건일수록 빨리
유통시켜야 합니다. 물건의 남음과 모자람을 잘 파악하면 값을 추측하는 것은
쉽습니다. 가격이란 최고로 오르면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고 최하로 떨어지면
다시 오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값이 오르면 오물을 버리듯 내다 팔고,
값이 내리면 주옥을 얻은 듯 사들여야 합니다.  돈이나 물건은 흐르는 물과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구천이 계연의 말대로 10년 간 행하니
나라는 부유하게 되고 병사들 또한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에 병사들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적을 행해 용감하게 뛰쳐나가니, 
드디어는 오나라에 복수하고 그 위용을 떨쳐 춘추5패의 한 사람이 되었다. ] 

范蠡既雪會稽之恥,乃喟然而嘆曰:「計然之策七,越用其五而得意.
既已施於國,吾欲用之家.」 乃乘扁舟浮於江湖,變名易姓,適齊為鴟夷子皮,
之陶為朱公.  朱公以為陶天下之中,諸侯四通,貨物所交易也.  乃治產積居. 
與時逐而不責於人.  故善治生者,能擇人而任時.
十九年之中三致千金,再分散與貧交疏昆弟.  此所謂富好行其德者也.
此所謂富好行其德者也.  後年衰老而聽子孫,子孫修業而息之,遂至巨萬. 
故言富者皆稱陶朱公.
[범려는 회계에서의 치욕을 씻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 “계연의 계책 일곱 개 중
월은 다섯만 쓰고도 뜻을 얻었다. 나라에 베풀어 보았으니 내가 집에다 활용해 보고
싶구나!”라고 하고는,  조각배를 타고 강호를 떠다녔는데,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로 가서는 치이자피(鴟夷子皮)라는 이름으로 행세하고
도(陶)로 가서는 주공(朱公)이라 불렀다. 주공은 도 지역이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 제후의 나라들과 통하여 화물이 교역될 곳으로 판단하고 장사를 시작하여
물건을 사들이고 때맞추어 사고팔되 다른 사람 탓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은 사람을 잘 골라 때에 맡기는 것이다.
(범려는) 19년 사이에 세 번이나 천금을 모아 두 번은 가난한 친구들과 
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이른바 부유하면 즐겨 덕을 행한다는 말이다.
그 뒤 나이가 들어 늙자 자손들에게 일을 맡겼고,
자손들은 사업을 잘 꾸려 재산을 불렸는데 수만금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에 부를 말하는 사람은 모두 도주공(陶朱公)을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

子贛既學於仲尼,退而仕於衛,廢著鬻財於曹、魯之閒,七十子之徒,賜最為饒益.
原憲不厭糟糠,匿於窮巷.  子貢結駟連騎,束帛之幣以聘享諸侯,所至,
國君無不分庭與之抗禮.  夫使孔子名布揚於天下者,子貢先後之也.  
此所謂得埶而益彰者乎? 
[자공은 공자에게 배운 후 위나라로 가서 벼슬을 하고, 조나라와 노나라를 오가며
물건을 비축했다가 사고 팔아 공자의 70여 제자 들 중에 가장 부유해졌다.
공자의 제자 중 원헌 같은 이는 술지게미나 쌀겨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며 뒷골목에서
쓸쓸히 살고 있었던 것에 비해, 자공은 사두마차를 타고 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며 
제후들과 교제하였고 여러 왕들은 몸소 뜰로 내려와 그에게 예를 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여 널리 퍼진 것도 사실은 그의 노력 때문이었다.
이야말로 이른바 세력을 얻으면 그 이름이 더욱 세상에 높아진다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白圭, 周人也.  當魏文侯時, 李克務盡地力, 而白圭樂觀時變,故人棄我取,人取我與.
夫歲孰取穀,予之絲漆;繭出取帛絮,予之食.  太陰在卯,穰;明歲衰惡.  
至午,旱;明歲美.  至酉,穰;明歲衰惡.  至子,大旱;明歲美,有水. 
至卯,積著率歲倍.  欲長錢,取下穀;長石斗,取上種. 
能薄飲食,忍嗜欲,節衣服,與用事僮仆同苦樂,趨時若猛獸摯鳥之發.
[백규는 주나라 사람이다. 위문후 때, 이극은 농토를 최대한 활용하는데 힘을 썼고,
백규는 시세의 변화를 잘 살펴서 남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남이 취하면 나는
내다 팔았다. 풍년이 들면 곡식을 사들이는 대신 실과 옻을 내다 팔았고,
흉년에는 비단과 솜을 사들이는 대신 식량을 내다 팔았다. 
토끼해에 풍년이 들면 이듬해의 경기는 아주 나빠진다. 
말의 해에 가뭄이 들면 이듬해에는 상황이 좋아진다.
닭의 해에 풍년이 들면 이듬해는 나쁘고, 
쥐해에 큰 가뭄이 들면 이듬해는 좋아지고 홍수가 난다.
따라서 토끼해에는 물건을 사서 비축했다가 팔면 대체로 두 배 정도 이익을 얻는다.
돈을 크게 벌려면 하등 곡식을 사들이며, 생산량을 늘리려면 상등 품종을 사들인다.
자신은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욕심을 억제하며, 의복을 검소히 하고,
일을 할 때는 노비와 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시기에 따라 행동하여야 할 때에는 맹수나 매가 먹이를 잡듯이 하였다.]

故曰:「吾治生產,猶伊尹、呂尚之謀,孫吳用兵,商鞅行法是也.
是故其智不足與權變, 勇不足以決斷, 仁不能以取予, 彊不能有所守, 雖欲學吾術,
終不告之矣.」 蓋天下言治生祖白圭.  白圭其有所試矣,能試有所長,非茍而已也. 
[그는 항상 말하기를 : " 내가 사업을 할 때에는 마치 이윤과 여상이 정책을 펴듯,
손자와 오자가 군사를 쓰듯, 상앙이 법을 다루듯이 했다. 그런 만큼 임기응변의
지혜도 없고, 결단을 내릴 만한 용기도 없으며, 주고받을 만한 어짐도 없고,
지켜낼 만한 힘도 없는 자에게는 나에게 배우고 싶어 해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이 사업가를 말할 때 백규를 그 원조로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의 이론을 실제로 행하여 성공하였기 때문이지 
그저 말로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猗頓用盬鹽起.  而邯鄲郭縱以鐵冶成業,與王者埒富.  烏氏倮牧,及眾,斥賣,
求奇繒物,閒獻遺戎王.  戎王什倍其償,與之畜,畜至用谷量馬牛.
秦始皇帝令倮比封君, 以時與列臣朝請.  而巴[蜀]寡婦清, 其先得丹穴,
而擅其利數世, 家亦不訾.   清,寡婦也,能守其業,用財自衛,不見侵犯.  
秦皇帝以為貞婦而客之,為筑女懷清臺.
夫倮鄙人牧長,清窮鄉寡婦,禮抗萬乘,名顯天下,豈非以富邪?
[의돈(猗頓)은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여 사업을 일으켰다.
한단의 곽종은 철광 제련으로 성공하였는데, 그들은 왕과 어깨를 겨룰 만큼 

부유했다.  오지현의 나(倮)라는 사람은 목축을 본업으로 했는데, 

가축의 수가 불어나자 팔아 신기한 비단을 사서 남몰래 융왕(戎王)에게 바쳤다.
융왕은 그 대가로 나라는 사람에게 열 배나 더 많은 가축을 주었다.  
그래서 그가 기르는 가축은 점점 늘어나 가축을 줄 때 소와 말을 됫박으로 곡식을
퍼주듯이 주었다.  진시황은 그를 군(君)으로 봉해진 자들고 똑같이 대우하여
정해진 때마다 대신들과 함께 조회에 들게 했다.
또 파촉에 사는 청(淸)이라는 과부는 그 조상이 단사(丹沙)가 나는 동굴을 발견하여
그 이익을 여러 대에 걸쳐 독점해 왔으므로 그 재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청은 과부이기는 했지만 그 가업을 지키고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을 지켜
사람들로부터 침범 당하지 않았다. 진나라 황제는 청을 정조 있는 부인으로 여겨 
빈객으로 대우하였고,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지었다.
이처럼 나라는 사람은 시골뜨기 목장주인이었고, 
청이란 사람은 외딴 산골의 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천자와 똑같은 예를 받았으며, 
그 이름을 천하에 드러냈으니, 어찌 부유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漢興, 海內為一, 開關梁, 弛山澤之禁, 是以富商大賈周流天下, 交易之物莫不通,
得其所欲, 而徙豪傑諸侯彊族於京師。 關中自汧、雍以東至河、華, 膏壤沃野千里,
自虞夏之貢以為上田, 而公劉適邠, 大王、王季在岐,
文王作豐, 武王治鎬,故其民猶有先王之遺風,好稼穡,殖五穀,地重,重為邪.
[한나라가 일어나 천하가 통일되자, 관문과 다리를 개방하고 산림과 소택에서의
금령을 느슨하게 하였다. 따라서 부유한 상인들이 천하를 두루 다니게 되었고,
교역하는 물건은 유통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호걸들과 제후국 권문세족들을 경사로 옮겨 살게 했다.  
관중(關中)은 견(汧)․ 옹(雍)에서부터 동쪽으로 황하․ 화산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땅이
천 리에 펼쳐 있어 우․ 하시대의 공부(貢賦)에서도 상등의 전지(田地)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공유는 빈(邠)으로 갔고,  대왕과 왕계(王季)는 기산(岐山)에서 살았으며,
문왕은 풍(豐)을 일으켰고, 무왕은 호경(鎬京)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은 아직도 선왕의 유풍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농사짓기를 즐겨하여 오곡을 심고 땅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나쁜 짓을 두려워했다.]

及秦文、(孝)[德]、繆居雍,隙隴蜀之貨物而多賈.  獻(孝)公徙櫟邑, 櫟邑北卻戎翟,
東通三晉, 亦多大賈.  (武)[孝]、昭治咸陽, 因以漢都, 長安諸陵, 四方輻湊并至而會,
地小人眾,故其民益玩巧而事末也.  南則巴蜀.  巴蜀亦沃野,地饒炧、薑、丹沙、
石、銅、鐵、竹、木之器.  南御滇僰,僰僮.  西近邛笮,笮馬、旄牛. 
[진(秦)나라 문공․ 효공(덕공)․ 목공이 옹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농(隴)․ 촉의 재화와
물건이 많이 모여들었고 장사꾼도 많았다. 헌공․ 효공은 역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역읍 북쪽으로는 융적이 있고, 동쪽으로는 삼진과 통해서 또 큰 상인들이 많았다.  
무왕과 소왕은 함양(咸陽)에 도읍했으므로, 한나라는 장안에 도읍을 정했다.
장안 주변에 여러 개의 능침이 있었으므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들었다.
땅이 좁고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곳 백성들은 약아져서 장사를 일삼았다.
남쪽으로는 파와 촉이 있다. 파와 촉은 땅이 기름져 치자․ 생강․ 단사․ 돌․ 구리․ 쇠․
대나무 그릇․ 나무그릇 등을 많이 생산했다. 그래서 그 남쪽의 전(滇)․북을 능가한다.
북(僰)에서는 노예를 보내고, 서쪽으로는 공(邛)․작(莋)에 가깝다.
작에서는 말과 모우(旄牛)가 생산된다.]

然四塞,棧道千里,無所不通,唯褒斜綰轂其口,以所多易所鮮. 
天水、隴西、北地、上郡與關中同俗,然西有羌中之利,北有戎翟之畜,
畜牧為天下饒.  然地亦窮險, 唯京師要其道. 
故關中之地, 於天下三分之一, 而人眾不過什三;然量其富, 什居其六.
[사방이 막혀 있지만 천 리에 걸친 잔도(棧道)가 있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다만 포․ 야의 땅은 파와 촉의 귀를 꿰매어 얽어 놓은 것만 같아서 남아도는 물자를
모자라는 것과 바꾸곤 한다.  천수(天水)․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은
관중 지방과 같은 풍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쪽에는 강중(羌中)의 이익이 있고,
북쪽에는 융적의 가축이 있었으며, 목축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구석지고 험난한 곳이라 오로지 경사로 길이 통한다.  
관중 땅은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나, 인구는 10분의 3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를 논해 보면 10분의 6을 차지하고 있다.]  

昔唐人都河東, 殷人都河內, 周人都河南.  夫三河在天下之中, 若鼎足, 王者所更居也,
建國各數百千歲,土地小狹,民人眾,都國諸侯所聚會,故其俗纖儉習事.
楊、平陽陳西賈秦、翟, 北賈種、代.  種、代, 石北也, 地邊胡, 數被寇. 
[옛날 당(唐) 사람들은 하동에 도읍했고, 은(殷) 사람들은 하내에 도읍했고,
주(周) 사람들은 하남에 도읍했다.  대체로 삼하는 천하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솥의 세 발과 같은 것이었고, 왕들이 번갈아 가면서 있던 곳이다.
나라를 세운 지 제각기 수백 년에서 수천 년 되었고, 땅은 좁았으나 백성들은 많았다.  
수도는 제후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그 풍속이 섬세하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며
제각기 일을 익힌다. 양(楊)․ 평양은 서쪽으로는 진(秦)나라와 백적(白翟)과 장사하고,
북쪽으로는 종(種)․ 대(代)와 거래한다. 종과 대는 석읍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흉노와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침략 당한다.]  

人民矜懻忮, 好氣, 任俠為姦, 不事農商.  然迫近北夷, 師旅亟往, 中國委輸時有奇羨.
其民羯羠不均,自全晉之時固已患其僄悍,而武靈王益厲之,其謠俗猶有趙之風也.
故楊、平陽陳掾其閒,得所欲. 
[그곳 백성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을 이기려 들며 성을 잘 내고
유협의 기풍이 있고 간악한 일을 하며, 농사나 장사에 종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쪽 만이와 가까이 있어 군대가 자주 출동하는 탓으로 중국에서  
자주 수송을 위탁하므로 뜻하지 않게 석읍이익을 얻을 때도 있다.
그곳의 주민은 들에 사는 여러 종류의 ​양들처럼 종류가 복잡해 일치하지 않는데,
전전시기부터 그들의 포악함은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무령왕(武靈王)이 그들의
포악한 기질을 더욱 조장하였으므로 이곳 풍속에는 아직도 조나라의 유풍이 있다.
그래서 양과 평양에서는 그 사이에서 장사를 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다.]

故楊、平陽陳掾其閒,得所欲.  溫、軹西賈上黨, 北賈趙、中山.
中山地薄人眾,猶有沙丘紂淫地餘民,民俗懁急,仰機利而食.
丈夫相聚游戲,悲歌慨,起則相隨椎剽,休則掘冢作巧姦冶,多美物,為倡優.
女子則鼓鳴瑟,跕屣,游媚貴富,入後宮,遍諸侯.
[온(溫)․ 지(軹)는 서쪽으로는 상당과 거래하고, 북쪽으로는 조․중산과 거래한다.  
중산은 땅이 메마르고  사람이 많은데다 또 사구(沙丘)일대에는 음란한 짓을 하던
주왕의 자손들이 산다. 그들의 풍속은 경박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어
생활한다. 사내들은 함께 어울려 희롱하고 놀며, 슬픈 노래를 불러 울분을 터뜨리고,
움직였다 하면 패를 지어 사람을 때리거나 약탈하고, ​일이 없을 때는 무덤을 파헤쳐
보물을 훔쳐내며,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많은 종류의 악기를 

다루며, 광대놀이를 하기도 한다. 여자들은 비파를 타고 작은 신발을 신고,
부귀한 사람들에게 아부하여 후궁으로 들어가 제후국마다 두루 퍼져있다.]  

然邯鄲亦漳、河之閒一都會也.  北通燕、涿,南有鄭、衛.  鄭、衛俗與趙相類,
然近梁、魯,微重而矜節.  濮上之邑徙野王,野王好氣任俠,衛之風也. 
[한단은 장수와 하수 사이에 있는 큰 도회지이다. 북쪽으로는 연․탁에 통하고, 
남쪽으로는 정․위(衛)나라가 있다. 정․ 위나라의 풍습은 조나라와 비슷하지만
양나라와 노나라에 가까워 다소 중후하고 절개와 의리를 높게 친다.
복수(濮水) 가까운 읍에서 야왕(野王)지역으로 옮겨갔다.  
야왕 사람들은 의기(義氣)를 소중히 여기고 유협을 숭상했는데,
이것은 위(衛)나라의 기풍이다.]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南通齊、趙,東北邊胡.
上谷至遼東,地踔遠,人民希,數被寇,大與趙、代俗相類,而民雕捍少慮,
有魚鹽棗栗之饒.   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燕)나라는 발해(渤海)와 갈석산(碣石山) 사이에 있는 큰 도회지이다.
남쪽으로는 제․조나라에 통하고, 동북쪽으로는 흉노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곡으로부터 요동에 이르는 곳은 아주 먼 곳으로 백성들이 적고 자주 침략 당한다.
풍속은 조나라와 대나라와 아주 닮았으나, 백성들은 생각이 얇다.
물고기․ 소금․ 대추․ 밤 등이 많이 생산된다. 북쪽으로는 오환․ 부여와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穢貊)․ 조선․ 진번에서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洛陽東賈齊、魯,南賈梁、楚.  故泰山之陽則魯,其陰則齊.
齊帶山海,膏壤千里,宜桑麻,人民多文綵布帛魚鹽.  臨菑亦海岱之閒一都會也.
其俗寬緩闊達,而足智,好議論,地重,難動搖,怯於眾鬬,勇於持刺,
故多劫人者,大國之風也.  其中具五民.
[낙양은 동쪽으로는 제․ 노나라와 통하고, 남쪽으로는 양․ 초나라와 거래한다.  
태산 남쪽은 노나라이며, 북쪽은 제나라이다. 제나라는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기름진 들은 뽕나무와 삼을 기르기에 알맞고, 백성들이 많으며, 무늬 있는 베․ 비단․
생선․ 소금 등이 생산된다. 임치는 동해와 태산 사이에 있는 큰 고을이다.
이곳 풍속은 너그럽고 활달하며, 지혜가 있고 의논하길 좋아한다.  
성격이 진중해서 남에게 휩쓸려 따라가는 일이 없다. 단체로 싸우는 것을 겁내지만
개인적으로 찌르고 죽이는데 용감하여 남을 겁박하는 자가 많은 것이 큰 나라의
기풍이다. ​그 나라 안에 사․ 농․ 상․ 공․ 고(賈)의 오민(五民)이 다 갖추어져 있다.]

而鄒、魯濱洙、泗,猶有周公遺風,俗好儒,備於禮,故其民齪齪. 
頗有桑麻之業,無林澤之饒.  地小人眾,儉嗇,畏罪遠邪. 
及其衰,好賈趨利,甚於周人.  夫自鴻溝以東,芒、碭以北,屬巨野,此梁、宋也.  
陶、睢陽亦一都會也.  昔堯作(游)[於]成陽,舜漁於雷澤,湯止于亳. 
其俗猶有先王遺風,重厚多君子,好稼穡,雖無山川之饒,能惡衣食,致其蓄藏.
[추(鄒)․ 노(魯)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주공(周公)의 기풍이 남아 있다. 이곳 풍속은 유교를 숭상하고 예를
잘 지키기 때문에 백성들은 도량이 깊다. 뽕과 삼의 산업이 성행하기는 하지만,  
산림과 연못에서의 생산물은 풍요롭지는 않다. 게다가 땅은 좁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검소하고 인색하며, 죄를 두려워하여 사악한 것을 멀리한다.
나라가 쇠퇴해지면서 장사를 좋아하고 이익을 좇는 것이 주나라 사람보다 더해졌다. 
홍구(鴻溝)의 동쪽, 망산(芒山)․ 탕산(碭山) 북쪽 거야현까지는 양․ 송나라의 땅이다.
도(陶)․ 수양도 역시 한 도시다. 옛날 요임금은 휴식을 취하는 궁실을 성양에 세웠고,  
순임금은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았으며, 탕왕은 박에서 거주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풍속에는 아직도 선왕의 유풍이 남아 있고, 사람들은 중후하여
군자가 많고 농사짓기를 좋아한다. 산과 하천에서 생산되는 풍요로움은 없지만
남루한 옷에 거친 음식으로 생활하며 재물을 모은다. ]

越、楚則有三俗.  夫自淮北沛、陳、汝南、南郡,此西楚也.
其俗剽輕,易發怒,地薄,寡於積聚.  江陵故郢都,西通巫、巴,東有雲夢之饒. 
陳在楚夏之交,通魚鹽之貨,其民多賈.  徐、僮、取慮,則清刻,矜己諾.  
彭城以東,東海、吳、廣陵,此東楚也.
其俗類徐、僮.  朐、繒以北,俗則齊.  浙江南則越.
[월나라와 초나라 땅에는 세 가지 풍습이 있다. 대체로 회수 북쪽에서 패(沛)․
진(陳)․ 여남․ 남군까지는 서초다. 그곳 풍습은 사납고 경솔하며 쉽게 화를 낸다.
땅은 거칠고 메말라서 물자를 축적하기 어렵다.  
강릉(江陵)은 본래 초나라 도읍인 영(郢)으로 서쪽으로는 무(巫)․  파(巴)로 통하고
동쪽으로는 운몽의 풍요한 생산물이 있다. 진(陳)은 초나라와 하(夏)나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생선과 소금 등의 물자를 교역하고  그곳 백성들 중에는 장사꾼이 

많다. 서(徐)․ 동(僮)․ 취려의 백성들은 청렴하지만, 각박하고 약속을 중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으로 안다. 팽성 동쪽으로 발해․오(吳)․광릉(廣陵)까지가 동초(東楚)이다.
이곳 풍속은 서(徐)․동(僮)과 비슷하며,  구(胊)․ 회(繪)로부터 그 북쪽의 풍속은
제나라와 비슷하고, 절강 남쪽은 월나라와 비슷하다.]  

夫吳自闔廬、春申、王濞三人招致天下之喜游子弟,東有海鹽之饒,
章山之銅,三江、五湖之利,亦江東一都會也.
衡山、九江、江南、豫章、長沙,是南楚也,其俗大類西楚. 
郢之後徙壽春,亦一都會也.  而合肥受南北潮,皮革、鮑、木輸會也.  
與閩中、干越雜俗,故南楚好辭,巧說少信.  江南卑溼,丈夫早夭.  多竹木.  
豫章出黃金,長沙出連、錫,然堇堇物之所有,取之不足以更費.
[대체로 오나라는 오왕 합려․ 춘신군․ 오왕비 세 사람이 놀기 좋아하는 천하의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쪽으로는 물고기와 소금의 풍요로움이 있고,
장산의 구리, 삼강․ 오호(五湖)에서 이익을 얻으며, 또한 강동의 도회지 중 하나이다.
형산․ 구강․ 강남․ 예장․ 장사는 남초(南楚)로서 이곳의 풍습은 서초와 대체로
비슷하다. 영이 멸망한 뒤 수춘(壽春)으로 옮겼는데, 수춘도 큰 도회지 중 하나이다.
그리고 합비는 남북으로 장강, 회수의 수로가 있고, 가죽, 건어물, 목재가 모여드는
곳이다. 이곳의 풍속에는 민중(閩中)과 간월(干越)의 것이 섞여 있기 때문에  
남초(南楚) 사람들은 말솜씨가 뛰어나지만 믿음이 적다.
강수 남쪽은 땅이 낮고 습하여 남자가 일찍 죽는다. 대나무가 많다.
예장에서는 황금을 생산하고 장사에서는 아연과 주석을 생산하는데 
그 양이 아주 적어 캐는 비용에도 모자란다.]

九疑、蒼梧以南至儋耳者,與江南大同俗,而楊越多焉. 
番禺亦其一都會也,珠璣、犀、瑁、果、布之湊.  潁川、南陽,夏人之居也. 
夏人政尚忠樸,猶有先王之遺風.  潁川敦願.  秦末世,遷不軌之民於南陽. 
南陽西通武關、鄖關,東南受漢、江、淮.  宛亦一都會也. 
俗雜好事,業多賈.  其任俠,交通潁川,故至今謂之「夏人」. 
[구의산과 창오군에서부터 남쪽 담이(儋耳)에 이르기까지는 강수 남쪽과 거의 풍습이
같으며 양월(楊越) 사람이 많다. 반우 또한 큰 도회지 가운데 하나이며,
주옥․ 서각․ 대모․ 과실․ 삼베 등이 모이는 곳이다. 영천․ 남양은 옛날 하나라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하나라 사람은 충실하고 질박한 정치를 숭상했으므로 
지금까지도 선왕의 유풍이 남아 있다. 영천 사람들은 후덕하고 삼가며 신중하다.  
진(秦)나라 말기에는 반역 행위를 한 사람들을 남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 남양은 

서쪽으로는 무관과 운관으로 통하고, 동남쪽으로는 한수․ 강수․ 회수와 만난다. 
완(宛) 또한 큰 도회지 중 하나이다. 이곳의 풍속은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으며
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업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많다. 협객의 기질이 있고
이곳은 영천과 서로 통하므로 지금까지도 이곳 사람들을 하나라 사람이라고 부른다.]

夫天下物所鮮所多,人民謠俗,山東食海鹽,山西食鹽鹵,領南、沙北固往往出鹽,
大體如此矣.  總之,楚越之地,地廣人希,飯稻羹魚,或火耕而水耨,果隋蠃蛤,
不待賈而足,地埶饒食,無饑饉之患,以故呰窳偷生,無積聚而多貧.  
是故江淮以南,無凍餓之人,亦無千金之家.
[대체로 천하에는 물자가 적은 곳도 있고 많은 곳도 있다. 백성들의 풍속도 달라서 
산동에서는 바닷소금을 먹고, 산서에서는 산(山) 소금을 먹으며, 영남․ 
사북  곳곳에서도 소금이 나오는데 지역에 따른 형세가 대체로 이와 같다.
이것을 대체적으로 보면 초나라와 월나라는 땅은 넓지만 사람이 드물며,
쌀밥에 생선국을 먹는다. 어떤 곳에서는 마른 풀을 태워 밭을 갈고 논에 물을 대어
김을 매고, 초목의 열매와 소라․ 조개 등이 장사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 지형형상 먹을 것이 풍부하여 굶주릴 염려가 없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게으르고 그럭저럭 살아가며, 재산을 모으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에 강수와 회수 남쪽으로는 굶주리는 사람들도 없지만
천금을 가진 부잣집도 없다.]

沂、泗水以北,宜五穀桑麻六畜,地小人眾,數被水旱之害,民好畜藏,
故秦、夏、梁、魯好農而重民.  三河、宛、陳亦然,加以商賈.
齊、趙設智巧,仰機利.  燕、代田畜而事蠶.
[기수와 사수 이북은 오곡, 뽕, 삼을 심고, 육축(六畜, 소, 말, 양, 닭, 개, 돼지)을
기르기에는 알맞다. 그러나 땅이 좁고 사람은 많은 데다 수해와 가뭄이 잦다.
그곳 사람들은 저축을 즐긴다. 그러므로 진(秦)․ 하(夏)․ 양(梁)․ 노(魯)에서는
농사를 권장하고 농민을 소중히 여긴다.  삼하․ 완(宛)․ 진(陳)의 땅도 이와 같으나,
상업에도 힘을 기울인다.  제나라와 조나라 지역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를 부리고
기회를 보아 이익을 잡으려 하며,  연나라와 대나라에서는 농사를 짓고
사냥과 목축을 하며 양잠에도 힘쓴다.]  

由此觀之,賢人深謀於廊廟,論議朝廷,守信死節隱居巖穴之士設為名高者安歸乎?
歸於富厚也.  是以廉吏久,久更富,廉賈歸富.  富者,人之情性,所不學而俱欲者也.
故壯士在軍,攻城先登,陷陣卻敵, 斬將搴旗,前蒙矢石,不避湯火之難者,
為重賞使也.  其在閭巷少年,攻剽椎埋,劫人作姦,掘冢鑄幣,任俠并兼,
借交報仇,篡逐幽隱,不避法禁,走死地如騖者,其實皆為財用耳. 
[이렇게 볼 때 현인이 조정에서 계책을 생각하여 의논하고, 절개를 지켜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나, 선비가 바위 동굴에 숨어 살면서 명성을 높이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함인가? 결국은 부귀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청렴한 관리는 오래 일할 수 있고 그 결과, 보다 많은 부를 얻을 수 있게 되며,
정직한 장사꾼이 결과적으로 더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부(富)는 사람의 본성인지라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열심히 추구하기 마련이다.
장수가 전투에서 누구보다 앞서서 용맹을 발휘하는 것도 그 목적은 큰 상을 받는 데 

있다. 또 젊은 깡패들이 강도질을 일삼고, 사람을 쳐죽이며 악행을 일삼는 것이나
도굴, 화폐 위조, 강도, 인질극, 그리고 불법적인 모든 행동들도 그 근본은
모두 재물을 얻기 위해 하는 짓이다.] 

今夫趙女鄭姬,設形容,揳鳴琴,揄長袂,躡利屣,目挑心招,出不遠千里,
不擇老少者,奔富厚也.  游閒公子,飾冠劍,連車騎,亦為富貴容也. 
 弋射漁獵,犯晨夜,冒霜雪,馳阬谷,不避猛獸之害,為得味也. 
博戲馳逐,鬬雞走狗,作色相矜,必爭勝者,重失負也.
[지금 대체로 정나라나 조나라의 미녀들이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고,
소리 고운 거문고를 켜면서 천 리를 멀다 않고 나아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손님을 찾는 것도 돈 때문인 것이다. 할 일 없는 귀공자들이 멋있게 꾸미고 으시대며
돌아다니는 것도 부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며, 어부와 사냥꾼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서리와 눈을 맞아가며 깊은 골짜기를 내달으면서 맹수의 피해도 마다하지
않는 것도 맛난 고기를 위해서이다.  도박, 경마, 투계 등으로 얼굴빛을 붉히면서도
싸워 이기려고 하는 것은 돈을 따기 위해서이다.]

醫方諸食技術之人,焦神極能,為重糈也.  
吏士舞文弄法,刻章偽書,不避刀鋸之誅者,沒於賂遺也.  
農工商賈畜長,固求富益貨也. 此有知盡能索耳,終不餘力而讓財矣.
[의술이나 방술 등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열심히 그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도
큰 재산을 벌기 위함이다. 관리들이 공문서를 조작하고 법을 농락하며 도장과 문서를
위조하다가 칼날 아래 목이 잘리는 것도 피하지 않는 것은 물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이다.  농부나 기술자, 그리고 상인들이 저축을 하고 이자놀이에 열심인 것도
부를 구하고 재산을 늘리려는 것이다.  돈을 버는 일이라면 있는 지혜와 능력을
다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적당히 하여 남에게 재물을 넘겨주는 일 따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다.]

諺曰:「百里不販樵,千里不販糴.」居之一歲,種之以穀;十歲,樹之以木;
百歲,來之以德.  德者, 人物之謂也.  今有無秩祿之奉,爵邑之入,而樂與之比者. 
命曰「素封」.  封者食租稅,歲率戶二百.  千戶之君則二十萬,朝覲聘享出其中.
[속담에 이르기를 : " 백리를 나가 땔나무를 팔지 말고, 천리를 나가 곡식을 팔지 말라"
라고 하였다.  또 1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고,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고,
100년을 살려거든 덕을 베풀라고도 했다.
덕이란 사람에게 재물이 있는 것을 말하며, 지금 녹봉도 관직도 봉읍도 없지만
이런 것들을 가진 자 못지않게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일러 ‘소봉(素封)’이라 한다.  ‘봉(封)’이란 조세로 먹고 사는 것으로 1년에
대개 1호당 동전 200전을 거둔다. 천 호를 가진 군주는 연 수입이 20만 전이나 되어
입조 비용, 제후들을 초대하고 연회를 여는 등의 비용은 그 수입에서 지출할 수 있다.]

庶民農工商賈,率亦歲萬息二千,百萬之家則二十萬,而更傜租賦出其中.
衣食之欲,恣所好美矣.  故曰陸地牧馬二百蹄,牛蹄角千,千足羊,澤中千足彘,
水居千石魚陂,山居千章之材.  安邑千樹棗;燕、秦千樹栗;蜀、漢、江陵千樹橘;
淮北、常山已南, 河濟之閒千樹萩;陳、夏千畝漆;齊、魯千畝桑麻;渭川千畝竹;
及名國萬家之城,帶郭千畝畝鐘之田, 若千畝卮茜,千畦薑韭:此其人皆與千戶侯等.
[서민인 농민․ 공인․ 상인은 해마다 1만 전에 대한 이익이 2,000전이므로 백만 전을
갖고 있는 집이라면 20만 전의 수입이 있는데, 부역을 대신해 줄 돈과 조(組)․ 부(賦)가
이 중에서 지출된다. 입고 먹는 것을 충족시키고 마음 놓고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 말 50마리, 소 100마리, 양 250마리를 각각 키울 수 있는 땅과 
돼지 2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습지대,  1,000석의 고기를 양식할 수 있는 연못,
1,000장을 벌채할 수 있는 산, 안읍(安邑)의 대추나무 천 그루,
연나라와 진나라의 밤나무 천 그루, 촉한과 강릉의 귤나무 천 그루,
회북과 상산에서부터 그 남쪽 하수와 제수 사이의 가래나무 천 그루,
진(陳)과 하나라의 옻나무 밭 천 묘, 제나라와 노나라의 뽕나무밭과 삼밭 천 묘,  
위천(渭川) 유역의 대나무 숲 천 묘, 거기에 각 국의 번창한 성이나 성곽 주위에서
1묘 1종의 수확이 있는 밭 천묘, 혹은 잇꽃․ 꼭두서니 밭 천 묘, 
생강과 부추 밭 천 묘, 이상의 것 중에서 어느 것이라도 가진 사람이면
모두 천 호를 가진 제후와 같다라고 하였다.]

然是富給之資也,不窺市井,不行異邑,坐而待收,身有處士之義而取給焉.
若至家貧親老,妻子軟弱,歲時無以祭祀進醵,飲食被服不足以自通,
如此不慚恥,則無所比矣.  是以無財作力,少有鬬智,既饒爭時,此其大經也.  
今治生不待危身取給,則賢人勉焉.
[이러한 것들은 부의 자원이다. 그것을 가진 사람들은 저잣거리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고, 다른 마을에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수입만 기다리면 된다.
몸은 처사(處士)처럼 있으면서 수입은 있다. 만일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처자식은 연약하며 세시(歲時)가 되어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못하며,
가족이 모여 음식을 먹지 못하고 옷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우면서도
이러한 것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면, 비할 곳이 없을 만큼 못난 사람이다.
그래서 재산이 없으면 힘을 쓰고, 조금 있으면 꾀를 쓰고, 많으면 때를 다투는 것이
재산을 모으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지금 생계를 꾸리면서 몸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고
재물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 힘을 쓰는 방법이다.]

是故本富為上,末富次之,姦富最下.  
無巖處奇士之行,而長貧賤,好語仁義,亦足羞也. 
凡編戶之民,富相什則卑下之,伯則畏憚之,千則役,萬則仆,物之理也.
夫用貧求富,農不如工,工不如商,刺繡文不如倚市門,此言末業,貧者之資也. 
[그러므로 농업으로 부를 얻는 것을 으뜸이라 하고, 상업으로 부를 얻는 것은
그 다음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부를 얻는 것이 가장 저급한 것이다.
동굴 속에 숨어사는 선비의 괴상한 행동도 없이 오랫동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만을 즐기는 것 또한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대체로 일반 백성들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하고,
만 배 많으면 그의 하인이 된다. 이것은 사물의 이치다.
대체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며,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말단의 생업인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길임을 말한다.]

通邑大都,酤一歲千釀,醯醬千瓨,漿千甔,屠牛羊彘千皮,販穀糶千鐘,
薪槁千車,船長千丈,木千章,竹竿萬,其軺車百乘,牛車千兩,木器髤者千枚,
銅器千鈞,素木鐵器若炧茜千石,馬蹄蹾千,牛千足,羊彘千雙,僮手指千,
筋角丹沙千斤,其帛絮細布千鈞,文采千匹,榻布皮革千石,漆千斗,
糱麹鹽豉千荅,鮐鮆千斤,鯫千石,鮑千鈞,棗栗千石者三之, ​狐鼦裘千皮,
羔羊裘千石,旃席千具,佗果菜千鐘,子貸金錢千貫,節駔會,貪賈三之,
廉賈五之,此亦比千乘之家, 其大率也.  佗雜業不中什二, 則非吾財也.
​請略道當世千里之中, 賢人所以富者, 令後世得以觀擇焉.
[교통이 발달한 대도시라면 1년에 술 1천 항아리, 식초와 간장 1천 병,
옅은 술 1천 병을 양조하고, 소, 양, 돼지를 각각 1천 마리 도축하고,
곡식 1천 종(鍾)을 팔고, 1천 수레의 땔감을 소비하고,
전체 1천 장(丈) 길이의 배를 만들고, 목재 1천 장(章), 장대 1만 개,
간편한 수레 1백 령, 소가 끄는 우차 1천 량, 칠기 1천 건, 구리그릇 1천 균(鈞),
나무그릇 1천 석, 철기, 치자나무 꽃이나 꼭두서니 꽃, 말 2백 마리,
소 5백 마리, 양이나 돼지 각 2천 마리, 노비 1백 명, 짐승 힘줄 1천 근, 짐승 뿔, 단사,
1천 근의 비단, 솜, 모시, 색이 있는 비단 1천 필, 거친 삼베와 피혁 1천 석, 옻 1천 말,
누룩과 메주 각 1천 홉, 복어와 갈치 각 1천 근, 건어물 1천 섬, 자반 1천 균,
대추와 밤 각 3천석, 여우와 담비의 갖옷 각 1천 장, 염소와 양의 갖옷 각 1천 석,
담요 1천 장, 과일과 야채 각 1천 종 등이 거래된다.  또 1천 관을 자금으로 시장에서
이자를 놓으면 욕심많은 상인은 1/3을 이자로 취하고 양심있는 상인은 1/5을 이자로
취한다. 이런 것들 역시 천 승의 집에 에 비할 수 있는데 대체적인 정황이 이렇다.
기타 잡일에서도 2할의 이윤을 남기지 못하면 돈을 번다고 할 수 없다.
천 리 범위 안에서 현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치부했는가를 설명하여
후대 사람들이 보고 선택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

蜀卓氏之先,趙人也,用鐵冶富. 秦破趙,遷卓氏.
卓氏見虜略,獨夫妻推輦,行詣遷處.  諸遷虜少有餘財,爭與吏,求近處,處葭萌. 
唯卓氏曰:「此地狹薄.  吾聞汶山之下,沃野,下有蹲鴟,至死不饑. 
民工於市,易賈.」乃求遠遷.  致之臨邛,大喜,即鐵山鼓鑄,運籌策,
傾滇蜀之民,富至僮千人.  田池射獵之樂,擬於人君.
[촉땅의 탁(卓)씨는 조상이 조(趙)나라 사람으로, 제철업을 경영하여 부호가 되었다.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는데 탁 씨도
그 대상이었다. 포로의 몸으로 전 재산을 빼앗긴 탁씨는 부부가 손수레를 끌며
이주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때 같이 간 포로들 중 얼마간의 재산이라도 있었던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진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가까운 곳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해 가맹 땅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탁 씨만은, "가맹은 땅이 좁고 척박하다. 내가 듣기로 문산 아래쪽에는
기름진 들이 있고 먹을 것이 충분하여 평생 굶을 일이 없고, 주민들 또한 장사에
익숙해서 많은 돈을 번다. 라고 하고는 그곳으로 옮겨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임공으로 보내지게 된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철광산으로 들어가 제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사업을 행한 결과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의 부는 노비 천 명을 부릴 정도에 이르렀다.
전원과 연못에서 사냥하고 고기잡는 즐거움이 임금에 버금갈 정도로 호사를 누렸다.]

 

程鄭,山東遷虜也,亦冶鑄,賈椎髻之民,富埒卓氏,俱居臨邛.
宛孔氏之先,梁人也,用鐵冶為業.  秦伐魏,遷孔氏南陽.
大鼓鑄,規陂池,連車騎,游諸侯,因通商賈之利,有游閒公子之賜與名.
然其贏得過當,愈於纖嗇,家致富數千金,故南陽行賈盡法孔氏之雍容.
[정정(程鄭)은 산동에서 이주시킨 포로였다. 역시 제철업을 했고, 상투 모양의 머리를
한 인민들과 거래했다. 부가 탁씨와 견줄만 했고 다 같이 임공에서 살았다.
완 지방의 공(孔)씨는 양(梁)나라 사람이다. 공 씨 또한 제철업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진(秦)이 위(魏)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남양으로 이주된 공 씨는 철제 그릇과 못을
만들어 큰 재산을 모았다. 그 후 공씨는 많은 기마와 수레를 거느리고 제후들과
교체하며, 그것을 기회로 또다시 이권을 얻어내어  더욱 큰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는 많은 돈을 물 쓰듯 쓰면서 사업을 하였기 때문에 유한공자라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근검절약하는 일반적인 상인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재산을 모았다.  
그 결과 남양의 장사꾼들은 모두 공씨의 손 큰 경영방식을 본받으려 했다.]

魯人俗儉嗇,而曹邴氏尤甚,以鐵冶起,富至巨萬.  然家自父兄子孫約,俛有拾,
仰有取,貰貸行賈遍郡國.  鄒、魯以其故多去文學而趨利者,以曹邴氏也. 
[노(魯) 지역 사람들의 습속은 검소하고 아끼는 것이었는데, 조병씨는 특히 심했다.
제철업을 시작하여 수만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집안의 부형과 자손들에게
주입시키기를 허리를 굽히던 고개를 들던 무엇이든 물건을 얻으라고 하였다. 
또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장사와 금융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추(鄒)․노(魯) 지방에서는 학문을 버리고 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병 씨의 영향 때문이었다.]

齊俗賤奴虜,而刀閒獨愛貴之.  桀黠奴,人之所患也,唯刀閒收取,
使之逐漁鹽商賈之利,或連車騎,交守相,然愈益任之.  終得其力,起富數千萬.
故曰「寧爵毋刀」,言其能使豪奴自饒而盡其力.
 [제의 습속은 노비를 천시했으나 조한(刁閒) 만큼은 노예를 아끼고 정중히 대했다.
특히 머리가 비상하고 강한 노예는 사람들이 더욱 경계하기 마련이자만 
유독 조한은 이들을 뽑아 생선과 소금을 거래하여 이익을 보게 하니,
심지어 말과 수레를 잔뜩 몰고가서 지방 장관들과 교류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한은 그들을 더욱 신임했고, 결국은 그들의 힘을 빌려 
수천 만 금의 부를 쌓았다. 이 때문에 '벼슬하여 봉록을 받는 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조 씨의 종이 될 것이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는데,  
이는 그가 능력 있는 노예들을 잘 이끌어 그들에게는 큰 재산을 남겨주고,  
온힘을 다하여 주인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을 칭송한 것이다.]

周人既纖,而師史尤甚,轉轂以百數,賈郡國,無所不至.   
洛陽街居在齊秦楚趙之中,貧人學事富家,相矜以久賈,數過邑不入門,
設任此等,故師史能致七千萬.
[주(周) 지역 사람들은 일찍부터 검소하고 인색했는데 사사(師史)는 특히 심했다.
수 대의 수레를 굴려며 군국을 돌면서 장사를 했는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낙양은 제(齊), 초(楚), 조(趙)와 통하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집에서 일을 배우고, 오랫동안 외지에서 장사하는 것을 서로 자랑했는데
낙양을 몇 차례 지나면서도 자기 집에 들르지 않았다.
이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겨서 사사는 천 만 금을 치부할 수 있었다.]

曲任氏之先,為督道倉吏.  秦之敗也,豪傑皆爭取金玉,而任氏獨窖倉粟.
楚漢相距滎陽也,民不得耕種,米石至萬,而豪傑金玉盡歸任氏,任氏以此起富.
富人爭奢侈,而任氏折節為儉,力田畜.  田畜人爭取賤賈,任氏獨取貴善. 富者數世.
然任公家約,非田畜所出弗衣食,公事不畢則身不得飲酒食肉. 
以此為閭里率,故富而主上重之. 
[선곡 지방의 임(任)씨는 그 조상이 독도의 창고지기였다. 진(秦)이 패망하였을 때
호걸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금, 은, 보석을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임 씨만은 창고의 곡식을 몰래 굴속에 감추어 두었다.  
그 뒤 초와 한이 형양에서 대치하게 되자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고
그리하여 쌀 한 섬에 1만 전까지 뛰어 올라 그 결과 앞서 호걸들이 차지했던 보석들은
모두 임 씨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부자들이 서로 사치를 일삼을 때에도
임 씨만은 허세를 버리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농사와 목축에 힘썼다.  
그러나 농사와 목축에 필요한 물건을 살 때 다른 사람들은 싼 것을 사지만,
임씨는 값이 비싸도 좋은 물건을 골랐다. 그 결과 그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그 부를 간직하였으며, 지금도 이 집안 사람들은 '내 집의 땅에서 지은 것이나  
기른 것이 아니면 입고 먹는 데 쓰지 않고, 갚아야 할 돈을 갚기 전에는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는 가훈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을의 모범이 되었고,
집안의 부 또한 더욱 커져 천자도 이들을 소중히 여겼다.]

塞之斥也,唯橋姚已致馬千匹,牛倍之,羊萬頭,粟以萬鐘計.  吳楚七國兵起時,
長安中列侯封君行從軍旅,齎貸子錢,子錢家以為侯邑國在關東,關東成敗未決,
莫肯與.   唯無鹽氏出捐千金貸,其息什之. 
三月,吳楚平,一歲之中,則無鹽氏之息什倍,用此富埒關中. 
關中富商大賈,大抵盡諸田,田嗇、田蘭.  韋家栗氏,安陵、杜杜氏,亦巨萬.
[변방을 개척할 무렵 교요는 말 1천 필, 소는 그 두 배, 양 1만 두, 수 만 종에 이르는
곡식을 갖고 있었다. 오, 초(吳, 楚)를 비롯한 7국이 군대를 일으키자,
장안의 제후들과 봉국의 국군들이 군을 따라 출정하면서 돈을 빌려 필요란 물품을
구입하려 했다. 돈 가진 자들은 제후들의 봉국이 관동(關東)에 있고 관동의 성패가
확실치 않아서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무염씨(無鹽氏)만 천금을 내어
빌려주었는데 그 이자가 (원금의) 열 배였다. 석 달 뒤 오초의 난이 평정되자,
1년도 못 되어 무염씨는 10배의 이자를 받아 이것으로 관중의 부와 견주게 되었다.
관중의 부유한 행상이 좌상들은 대부분 전씨(田氏) 집안으로 전색, 전란 등이다.
그 밖에 위가 지역의 율씨, 안릉과 두(杜) 지역의 두씨(杜氏) 역시 억만 금을 지녔다.]

此其章章尤異者也.  皆非有爵邑奉祿弄法犯姦而富,盡椎埋去就,與時俯仰,
獲其贏利,以末致財,用本守之, 以武一切,用文持之,變化有概,故足術也.
若至力農畜,工虞商賈,為權利以成富,大者傾郡,中者傾縣,
下者傾鄉里者,不可勝數. 
[이들은 그 중에서도 아주 특이하고 두드러진 자들로 모두 작읍이나 봉록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교묘하게 법을 이용하거나 어겨서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상황의 변화를 파악하고 행동하므로써 때에 맞추어 이익을 얻고,
부를 축적한 후에는 농사일로 돌아가 부를 지켰던 것이다.  즉, 처음에는 결단력과
시운에 승부를 걸어 재산을 모은 다음, 후에는 안정적인 방법으로 그 부를 지켰던
것이다.  또한 그 방법에는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고 순서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농업․ 목축․ 기술․ 상업 등에 종사하면서 기회를 적절히 포착하여
재산을 치부하니 부를 이룩한 사람들 가운데는 크게는 1군(郡)을 압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음으로는 1현(縣)을 압도하는 사람이 있고, 작게는 한 고을을
압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소개하지는 못한다.]

夫纖嗇筋力,治生之正道也,而富者必用奇勝.  田農,掘業,而秦揚以蓋一州.
掘冢,姦事也,而田叔以起.  博戲,惡業也,而桓發用富. 
行賈,丈夫賤行也,而雍樂成以饒.  販脂,辱處也,而雍伯千金. 
賣漿,小業也,而張氏千萬.  灑削,薄技也,而郅氏鼎食.
[무릇 아껴 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생활의 바른 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농사를 통해 부자가 되기는
어렵지만 진양(秦揚)은 바로 그 방법에 의해 주(州)의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또한 도굴(盜掘)은 매우 나쁜 행위지만 전숙(田叔)은 그 방법으로 큰 부를 이루었다.
도박 또한 좋지 않은 것이지만 환발(桓發)은 그것에 의해 부자가 되었다.
또 행상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옹락성은 그 일을 통하여 부자가 되었다.
기름장수도 부끄러운 장사이지만 옹백(雍伯)은 그것으로 천금을 벌었다.  
칼 가는 일 또한 보잘 것 없는 기술이지만 질 씨는 그 일로 성공하여
온갖 호사를 즐길 수 있었다.]

胃脯,簡微耳,濁氏連騎。馬醫,淺方,張裏擊鐘.  此皆誠壹之所致. 
由是觀之,富無經業,則貨無常主,能者輻湊,不肖者瓦解.
千金之家比一都之君,巨萬者乃與王者同樂.  豈所謂「素封」者邪?非也? 
[위포(순대의 일종)팔이는 단순하고 하찮은 장사였지만 탁 씨는 그 일을 통해
가마타고 다닐 수가 있었다. 마의[말을 치료하는 수의사] 또한 천박한 직업이었지만
장리(張里)는 그 일로 큰 재산을 모아 종을 쳐야만 하인을 부를 수 있을 만큼
큰 저택에 살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 사람들 모두가 온 힘을 다해 한 일,
즉 돈벌이에 몰두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부자가 되는 데는
고정된 일이 없으며, 재물 또한 주인을 정해 놓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못난 사람에게서는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천금을 소유한 가문은 한 도시를 지배하는 제후에 필적하고,
억만금을 가진 자는 왕과 같은 즐거움을 누렸으니,
이것이 이른바 진정한 재산을 가진  ‘소봉(素封)’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