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佞行列傳

第 六十五. 佞行列傳(영행열전)

덕치/이두진 2024. 1. 13. 17:05

 

         第 六十五.  佞行列傳(영행열전)

諺曰「力田不如逢年,善仕不如遇合」,固無虛言.  非獨女以色媚,而士宦亦有之.

昔以色幸者多矣.  至漢興,高祖至暴抗也,然籍孺以佞幸;孝惠時有閎孺.

此兩人非有材能,徒以婉佞貴幸,與上臥起,公卿皆因關說.

故孝惠時郎侍中皆冠鵕鸃,貝帶,傅脂粉,化閎、籍之屬也.  兩人徙家安陵.

[속담에 이르기를 : “ 힘써 농사짓는 것이 해를 이어 풍년이 든 것 보다는 못하고,

관리가 영달하는 데는 직무에 충실한 것이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는 것보다 못하다.”

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단지 여인만이 미색이나

교태로 총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선비나 관리들로 또한 그렇다.  

옛날에도 미색으로 군주의 총애를 얻어 영달한 자가 많았다.

한나라를 일으킨 한고조는 사납고 오만했으나 적(籍)이라는 유자(孺子)를 총애했다.

그 뒤를 이은 혜제(惠帝)도 굉(閎)이라는 유자를 총애했다. 

이 두 사람은 재주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한낱 교묘한 말솜씨로 총애를 얻어 존귀한 신분으로 황제와 기거를 같이 했다.

그래서 공경대신들은 모두 그들를 통해서 황제에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다.

효혜제 때 랑(郞)이나 시중은 모두 준의(鵔鸃)1)의 깃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자개를 박은 허리띠에 지분을 발라 모두 굉(閎)이나 적(籍)의 무리를 본받았다. 

두 사람은 효혜제를 모신 안릉(安陵)으로 집을 옮겼다.]  

孝文時中寵臣,士人則鄧通,宦者則趙同、北宮伯子. 

北宮伯子以愛人長者;而趙同以星氣幸,常為文帝參乘; 鄧通無伎能. 

[효문제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는 사인 등통()이 있었고,

환관으로는 조동(趙同)과 북궁백자(北宮伯子)가 있었다.

북궁백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장자로써 총애를 받았고 ; 

조동은 성상(星象)과 운기(雲氣)를 보고 점을 치는 점성술로 총애를 얻어

효문제의 수레를 같이 타고 다녔으나 등통은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鄧通,蜀郡南安人也,以濯船為黃頭郎.  孝文帝夢欲上天,不能,

有一黃頭郎從後推之上天,顧見其衣裻帶后穿.  

覺而之漸臺,以夢中陰目求推者郎,即見鄧通,其衣后穿,夢中所見也.

召問其名姓,姓鄧氏,名通,文帝說焉,尊幸之日異. 

[등통은 촉군 남안(南安)2) 사람으로, 노를 가지고 배를 젓는 일을 잘했기 때문에

황두랑(黃頭郞)3)이 되었다. 어느 날 효문제가 꿈속에서 하늘에 오르려고 했으나

오를 수 없었는데, 한 황두랑이 효문제를 밑에서 받쳐주어 하늘에 오를 수 있었다.

문제가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의 옷솔기 띠 밑에 실밥이 터져있었다.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문제는 점대(漸臺)로 가서 꿈속에서 자기를 밀어 올려 준

황두랑을 찾았다. 등통을 발견했는데 그가 입고 있던 옷의 등 뒤가 터져 있어

자세히 보니 바로 꿈속에서 본 자의 모습이었다.그를 불러 이름과 성을 묻자, 

성은 등(), 이름은 통()이었다. 문제는 기뻐했고, 하루가 다르게 그를 총애했다.] 

 

通亦願謹,不好外交,雖賜洗沐,不欲出.  於是文帝賞賜通巨萬以十數, 官至上大夫.

文帝時時如鄧通家遊戲.  然鄧通無他能,不能有所薦士,獨自謹其身以媚上而已.

上使善相者相通,曰「當貧餓死」.

[등통 역시 근신했는데 밖에 나가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휴가를 주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는 거만금을 상으로 주었는데

횟수가 열 번이 넘었고 그의 벼슬을 높여 상대부에 이르게 했다.

문제는 때때로 등통의 집에 놀이를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등통에게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으며 선비를 천거할 능력도 없었다.

오로지 스스로 근신하여 자신의 몸으로 황제에게 아첨할 뿐이었다.

황제가 관상을 보는 사람에게 등통의 관상을 보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 " 가난을 맞이 하여 굶어 죽을 상입니다.”라고 하였다.]

文帝曰:「能富通者在我也.  何謂貧乎?」於是賜鄧通蜀嚴道銅山,

得自鑄錢,「鄧氏錢」 布天下.  其富如此.  文帝嘗病癰,鄧通常為帝唶吮之.

文帝不樂,從容問通曰:「天下誰最愛我者乎?」 通曰:「宜莫如太子.」

太子入問病,文帝使唶癰,唶癰而色難之.  

已而聞鄧通常為帝唶吮之,心慚,由此怨通矣.

[문제가 듣고 묻기를 : " 등통을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내가 있는데,

어찌 가난으로 굶어죽는다고 하는가? ”라고 하며. 촉군의 엄도(嚴道)에 있는 동광산을

하사하여 등통 스스로 자기 돈을 주조할 수 있게 하니 ‘등씨전’이 천하에 퍼졌다.

등통의 부는 그와 같이 대단했다. 문제가 일찍이 종기를 앓은 적이 있는데 등통은 늘

황제를 위해서 종기의 고름을 빨아냈다. 문제는 마음이 편치 않아 조용히

등통에게 묻기를 :  “ 천하에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겠는가? ”라고 하자.
등통이 대답하기를 : “ 마땅히 태자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태자가 문병을 오자, 문제가 태자에게 자기의 종기를 빨라고

시켰다.  태자가 종기를 빨기는 하면서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뒤 태자는 등통이 늘 황제를 위해서 고름을 빨아낸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가 이 일로 인해 등통을 원망하게 되었다.]

 

及文帝崩,景帝立,鄧通免,家居.  居無何,人有告鄧通盜出徼外鑄錢.

下吏驗問,頗有之,遂竟案,盡沒入鄧通家,尚負責數巨萬.  長公主賜鄧通,

吏輒隨沒入之,一簪不得著身.  於是長公主乃令假衣食.  竟不得名一錢,寄死人家. 

[마침내 문제가 세상을 떠나고 경제가 즉위하자, 등통은 면직되어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얼마 후에 누군가가 등통이 몰래 국경 밖으로 그가 주조한 돈을 빼돌리고

있다고 고발했다. 황제가 옥리를 시켜 심문한 결과 혐의가 있으므로 죄를 논하여 

등통의 가산을 모두 몰수하고 벌금으로 수만금을 더 부과했다.

장공주가 듣고 등통에게 얼마간의 돈을 하사하자, 관리들이 재빨리 따라와 몰수했다.

그래서 등통은 비녀 하나도 몸에 지닐 수 없었다.  

장공주는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의식을 내릴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은 등통은 일전도 몸에 지니지 못한 채 남의 집에 의지하며 살다가 죽었다.]  

孝景帝時,中無寵臣,然獨郎中令周文仁,仁寵最過庸,乃不甚篤.

今天子中寵臣,士人則韓王孫嫣,宦者則李延年.  嫣者,弓高侯孽孫也.

今上為膠東王時,嫣與上學書相愛.  及上為太子,愈益親嫣.  嫣善騎射,善佞.

[효경제 때는 궁중에 총애하는 신하를 두지 않았으나, 낭중령인 주문인이 있었는데

주문인이 황제로부터 받는 총애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두텁지는 않았다. 지금 황제가 궁중에서 총애하는 신하로는 사인(士人)으로

한왕(韓王) 신(信)의 후손인 한언(韓嫣)이 있고, 환관 이연년()이 있다.

언은 궁고후(弓高侯)4) 한칙(韓則)의 서손()이다.

금상폐하 무제가 교동왕의 신분이었을 때 한언과 황제는 학문을 배우면서 서로

친애하게 되었다.이어서 금상폐하가 태자로 책봉되자 한언과는 더욱 친하게 지냈다.

한언은 말을 잘 몰고 활을 잘 쏘았으며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재주가 좋았다.]

 

上即位,欲事伐匈奴,而嫣先習胡兵,以故益尊貴,官至上大夫,賞賜擬於鄧通.

時嫣常與上臥起.  江都王入朝,有詔得從入獵上林中.  

天子車駕蹕道未行, 而先使嫣乘副車, 從數十百騎, 騖馳視獸.  

江都王望見, 以為天子, 辟從者,伏謁道傍.  嫣驅不見.

​[무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흉노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일으킬 때 한언은 어렸을 때

흉노의 풍습에 익숙했음으로 그의 신분은 더욱 존귀하게 되어 관직이 상대부까지

이르고 상을 받음이 문제 때의 등통과 비교될 정도였다.

이 무렵 언은 늘 황제와 함께 자고 일어났다. 강도왕이 입조하니 황제를 따라서

상림()에서 사냥을 하라는 조서가 있었다. 천자가 행차하기에 앞서 먼저 언에게

뒤따르는 수레를 타고 수행원 수백 기를 거느리고 가서 사냥할 짐승들을 살피게 했다.

강도왕이 멀리서 보고는 천자인 줄 알고 시종들을 물리치고 길 옆에 엎드려

인사를 드렸다. 언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既過, 江都王怒, 為皇太后泣曰:「請得歸國入宿衛,比韓嫣.」太后由此嗛嫣.

嫣侍上, 出入永巷不禁, 以姦聞皇太后.  皇太后怒,使使賜嫣死.

上為謝,終不能得,嫣遂死.  而案道侯韓說,其弟也,亦佞幸.

[한언이 지나간 것을 알게 된 강도왕은 노하여 황태후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 “ 청컨대 도성에 머물며 숙위(宿衛)를 하도록 허락하시어

한언에 비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태후는 한언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언이 황제를 모시면서 궁녀의 처소를 거리낌 없이 드나들자, 궁녀와 간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태후가 듣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한언을 사사시키려고 했다.  

황제가 대신 사죄했으나 황태후는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한언은 죽고 말았다.  

안도후 한열(韓說)은 한언의 동생으로 역시 황제에게 아첨을 잘하여 총애를 얻었다.]  

李延年,中山人也.  父母及身兄弟及女,皆故倡也.  延年坐法腐,給事狗中. 

而平陽公主言延年女弟善舞,上見,心說之,及入永巷,而召貴延年.

延年善歌,為變新聲,而上方興天地祠,欲造樂詩歌弦之.

延年善承意,弦次初詩.  其女弟亦幸,有子男.

[이연년은 중산 사람이다. 자신을 포함해서 부모, 형제, 아내 등 모두는 원래 노래하는

가수였다. 연년은 법에 저촉되어 궁형을 받아 급사구중(給事狗中)6)이 되었다.

평양공주(平陽公主)7)가 연년의 누이동생이 춤을 잘 춘다고 말하자 황제가 접견하고

매우 기뻐하여 궁녀가 머무는 영항으로 불러들이고 연년도 불러 귀하게 만들었다.

연년은 노래를 잘 불렀고 또한 새로운 노래를 잘 지었다.

그래서 황제는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사당을 짓게 하고 음악과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부르며 연주하도록 했다. 연년이 황제의 뜻을 받드는데 능했기 때문에 

황제를 위해 수시로 새로운 음악을 지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연년의 누이동생이 무제의 총애를 받아 사내아이를 낳았다.]

延年佩二千石印,號協聲律.  與上臥起,甚貴幸,埒如韓嫣也.

久之,寖與中人亂,出入驕恣.  及其女弟李夫人卒后,愛弛,則禽誅延年昆弟也. 

自是之后,內寵嬖臣大底外戚之家,然不足數也. 

衛青、霍去病亦以外戚貴幸,然頗用材能自進.

[그래서 연년은 2천석의 관리가 차는 인장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협성율8)이 되었다.  

황제와 함께 기거를 같이할 정도로 귀한 신분이 된 이연년은 한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연년은 궁녀와 음란한 행위를 저지르더니

교만하게 되어 황궁을 멋대로 출입했다. 마침내 그의 누이동생 이부인이 죽게 되자,

그에 대한 황제의 총애도 줄어들었다.  

얼마 후에 이연년과 그 동생들은 모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이후로 궁궐 안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외척 출신이었으나

족히 언급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위청과 곽거병은 외척 출신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그들은 뛰어난 재능으로 스스로 올라간 것이다.]

 

太史公曰:

甚哉愛憎之時!彌子瑕之行,足以觀后人佞幸矣.  雖百世可知也. 

[태사공이 말한다.

심하구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수시로 변하는 것이!

미자하()9)의 행적은 후세 사람에게 영행()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 것으로,

비록 백세 후의 먼 훗날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각주 】
1) 준의(鵔鸃)/ 별나라에 살고 있다는 전설상의 금계(金鷄)라는 닭으로 일반적으로

    닭의 미칭으로 쓰인다.

2) 남안(南安)/ 지금의 사천성 락산현(樂山縣)이다.

3) 황두랑(黃頭郞)/ 한나라 때 선박의 운행을 관장하던 하급관리로써 머리에

    노란 모자를 쓴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4) 궁고후(弓高侯)/ 윈래 한왕 신의 아들 한퇴당(韓頹當)의 봉호다.

    한왕 신이 한고조 유방의 의심을 받아 죽음을 피해 흉노로 달아나 살다가

    흉노의 퇴당성에서 낳았음으로 이름으로 삼았다. 퇴당은 후에 흉노의 상국이

    되었다가 한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조카 한영(韓嬰)과 함께 일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2년 후인 기원전 164년 퇴당은 궁고후에 봉해지고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서신으로 교서왕(膠西王)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냈으나

    그 공을 모두 휘하의 장수들에게 돌렸다. 퇴당의 봉호는 아들이 한칙에게

    전해졌다고 적자가 없었음으로 후국은 폐지되었다. 한언은 한칙의 서자다.  

5) 강도왕(江都王)/ 한경제의 아들 유비(劉非)의 왕호다. 원래 여남왕에 봉해졌다가

    오초칠국의 란 때 공을 세워 반란의 주모자 유비(劉濞)의 영지에 개봉되었다.

    한무제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유비가 죽고 아들 유건(劉建)이 사위했다.

    위인이 사치를 즐기고 부패했으며 음란한 생활을 즐기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락으로 삼았다. 원수(元狩) 2년 기원전  

6) 급사구중(給事狗中)/ 천자의 개를 맡아 기르는 직책
7) 평양공주(平陽公主)/ 무제의 누이로 원래 상국 조참의 손자 평양후 조시(曹時)에게

    출가해서 평양공주라고 칭했다. 조시가 악질에 걸려 일찍 죽자,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재가했다.  

8) 협성율(協聲律)/ 음악을 관장하는 관리의 장으로 한서에는 협성도위로 되어있다.

9) 미자하(彌子瑕)/ 춘추시대 위영공(衛靈公)의 총신이다. 임금의 명을 사칭하여

    어가를 훔쳐탔고, 자기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영공에 바쳤으나

    모두 효성과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일이라고 용서받았으나  

    후에 총애를 잃자 똑 같은 행위로 죄를 받고 살해되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