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滑稽列傳

第 六十六. 滑稽列傳(골계열전)

덕치/이두진 2024. 1. 14. 11:26

 

               第 六十六.  滑稽列傳(골계열전)

 

 

 孔子曰:「六藝於治一也.  禮以節人,樂以發和,書以道事,詩以達意,

易以神化,春秋以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 육예(六藝)는 그 다스림에서는 작용이 같은 것이다.

《예기(禮記)》는 사람을 절도 있게 하고, 《악(樂)》은 화합하게 하고,

《서경(書經)》은 옛일을 말해 본받게 하고, 《시경》은 옛 성현의 뜻을 전달하게 하며,
《역경(易經)》은 변화를 신비롭게 하고, 《춘추(春秋)》는 정의로 시비를 가리게 한다.”] 

 

太史公曰:天道恢恢,豈不大哉!談言微中,亦可以解紛.

[태사공은 말했다. “천도(天道)는 넓고도 넓으니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

말도 은미함 속에도 이치에 맞아서, 또한 이것으로써 일의 얽힌 것을 풀 수 있다.” ]

 

淳于髡者,齊之贅婿也.  長不滿七尺,滑稽多辯,數使諸侯,未嘗屈辱.

齊威王之時喜隱, 好為淫樂長夜之飲,沈湎不治,委政卿大夫.

百官荒亂,諸侯并侵,國且危亡,在於旦暮,左右莫敢諫.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으로 데릴사위였다. 키는 7척도 되지 못했으나 익살스럽고

변설에 능해 여러 번 제후에게 사신으로 나갔으나 일찍이 굽히거나 욕되게 행동하지

않았다. 제위왕 때의 일이다. 왕은 수수께끼를 좋아했으며, 음탕하게 놀면서 밤새워

술 마시기를 즐겼다. 술에 빠져 나라 일을 돌보지 않고 경(卿), 대부에게 맡겼다.

백관들이 문란해서 규율이 서지 않았고, 제후들이 모두 침범해 나라의 운명이

조석(朝夕)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측근의 신하들은 감히 간하지 못했다.]

 

淳于髡說之以隱曰:「國中有大鳥,止王之庭,三年不蜚又不鳴,不知此鳥何也?」

王曰:「此鳥不飛則已,一飛沖天;不鳴則已,一鳴驚人.」

於是乃朝諸縣令長七十二人,賞一人,誅一人,奮兵而出.

諸侯振驚,皆還齊侵地。威行三十六年.  語在田完世家中.

[순우곤이 수수께끼를 빗대어 왕에게 말하기를 : " 나라 안에 큰 새가 있는데

궁전 뜰에 살고 있습니다. 3년이 되어도 날지 않으며, 또 울지도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새가 무슨 새인 줄 아십니까?’라고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 "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뿐이나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르며,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 난 후, 모든 현령 72명을 조정으로 불러 그 중 한 사람은 상을 주고,

한 사람은 벌을 주었다. 그리고는 군사를 일으켜 출정했다. 제후들이 크게 놀라서

그 동안 침략해서 차지했던 제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었으며, 이로써 제나라의 위엄이

36년간에 걸쳐 떨쳐졌다. 이 일은 「전경중완세가」속에 기록되어 있다.] 

 

威王八年,楚大發兵加齊.  齊王使淳于髡之趙請救兵,齎金百斤,車馬十駟.

淳于髡仰天大笑,冠纓索絕.  王曰:「先生少之乎?」髡曰:「何敢!」

王曰:「笑豈有說乎?」 髡曰:「今者臣從東方來, 見道傍有禳田者, 操一豚蹄,

酒一盂,祝曰:『甌窶滿篝,汙邪滿車,五穀蕃熟,穰穰滿家.』

臣見其所持者狹而所欲者奢,故笑之.」

[제위왕 8년, 초(楚)나라가 대군을 동원해 제나라에 침입했다.

제나라 왕이 순우곤을 조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황금 1백 근과 거마(車馬) 10대를 예물로 보내려 했다.

순우곤이 하늘을 우러러 호탕하게 웃자, 관의 갓끈이 모두 떨어졌다.
위왕이 묻기를 : "선생은 예물이 적다고 생각하오 ?"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위왕이 다시 묻기를 : " 웃는 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소?’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이번에 신(臣)이 동쪽에서 돌아오면서 길가에서 풍작을 비는

자를 보았습니다. 돼지 발 하나와 술 한 잔을 손에 잡고 빌기를, 높고 좁은 땅에서는

수확이 바구니에 가득하고, 낮고 습기가 많은 밭에서도 수확이 수레에 가득해서

오곡이 풍성하게 우리 집에 넘쳐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 손에 쥔 것은

보잘 것 없으면서, 원하는 바는 그렇게 사치스러워 신이 웃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齊威王乃益齎黃金千溢,白璧十雙,車馬百駟.  髡辭而行,至趙.

趙王與之精兵十萬,革車千乘.  楚聞之,夜引兵而去.  

威王大說,置酒後宮,召髡賜之酒.

[이에 제위왕은 황금 천 일, 백벽(白璧) 열 쌍, 거마 1백대로 예물을 늘려주었다.
순우곤이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 조나라에 이르렀다.

조나라 왕이 정예 병사 10만 명과 혁거(革車) 천 승(千乘)을 주었다.
초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밤에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

위나라 왕이 크게 기뻐해 후궁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순우곤을 불러서 술을 내렸다.]

 

問曰:「先生能飲幾何而醉?」對曰:「臣飲一斗亦醉,一石亦醉.」

威王曰:「先生飲一斗而醉,惡能飲一石哉!其說可得聞乎?」

[위왕이 순우곤에게 묻기를 : "선생은 얼마나 술을 마셔야만 취할 수 있소?’라고 하자,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신은 한 말[斗]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石]을 마셔도 취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왕이 다시 묻기를 : "선생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오? 그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라고 하자.]

 

髡曰:「賜酒大王之前, 執法在傍, 御史在後, 髡恐懼俯伏而飲, 不過一斗徑醉矣.

若親有嚴客, 髡帣韝鞠跽, 待酒於前, 時賜餘瀝, 奉觴上壽, 數起, 飲不過二斗徑醉矣.

若朋友交遊,久不相見,卒然相睹,歡然道故,私情相語,飲可五六斗徑醉矣.

若乃州閭之會,男女雜坐,行酒稽留,六博投壺,相引為曹,握手無罰,目眙不禁,

前有墮珥,后有遺簪,髡竊樂此,飲可八斗而醉二參.  日暮酒闌,合尊促坐,

男女同席,履舄交錯,杯盤狼藉,堂上燭滅,主人留髡而送客,羅襦襟解,

微聞薌澤,當此之時,髡心最歡,能飲一石.

故曰酒極則亂,樂極則悲;萬事盡然,言不可極,極之而衰.」以諷諫焉.

[순우곤이 대답하기를 :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려주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곁에 있고, 어사가 뒤에 있어서 곤이 두려워 엎드려서 마시게 되니

한 말을 넘지 않아서 곧 취하게 됩니다. 만약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계셔 

곤이 옷깃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 앞에 모시고 술을 대접하면서 나머지 술을 받고

술잔을 받들어 손님의 장수를 빌며 자주 몸을 일으키게 되면 두 말을 못 마시고

곧 취하게 됩니다. 만약 사귀던 벗과 오래 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만나게 되면 

즐거워서 지난날의 일들을 말하고 감회를 토로하다 보면 대여섯 말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만약 마을의 모임으로 남녀가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고,

장기와 투호를 벌여서 상대를 구하고, 남녀가 손을 잡아도 벌이 없고,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금함이 없으며, 앞에서는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서는 비녀가 어지러이 흩어지는 경우라면, 곤은 이런 것을 좋아해

여덟 말 정도를 마실 수 있지만 2-3할밖에 취기가 돌지 않습니다.
또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파하게 되어 술통을 모으고 자리를 좁혀서 남녀가 동석하고,

신발이 서로 뒤섞이며, 술잔과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이윽고 주인이 곤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배웅합니다.
그리고 엷은 비단 속 옷의 옷깃이 열리면 은은한 향기가 풍깁니다.

이런 때를 당하면 곤의 마음이 가장 기뻐지며, 한 섬은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고 하는

것인데, 모든 일이 모두 이와 같은 것입니다. 즉 사물이란 극도에 이르면 안 되며,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쇠한다는 것입니다." (순우곤이) 이런 말로 풍자하여 간하였다.

 

齊王曰:「善.」乃罷長夜之飲,以髡為諸侯主客.  宗室置酒,髡嘗在側.

​[위나라 왕이 말하기를 : "좋습니다."하고는, 이에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순우곤을 제후의 주객(主客)으로 삼았다.

그 후 왕실의 주연에는 곤이 언제나 왕을 곁에서 모셨다.] 

 

其後百餘年,楚有優孟.  優孟,故楚之樂人也.  長八尺,多辯,常以談笑諷諫.

楚莊王之時,有所愛馬,衣以文繡,置之華屋之下,席以露床,啗以棗脯.

馬病肥死,使群臣喪之,欲以棺槨大夫禮葬之.  左右爭之,以為不可.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초(楚)나라에 우맹(優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맹은 본래 초나라의 악인(樂人)이었다. 키가 8척이며, 변설에 능해 언제나

담소로써 풍자했다. 초장왕때 왕이 좋아하는 말이 있었는데,

왕은 그 말에게 무늬 있는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화려한 집에 두었으며, 

장막이 없는 침대 위에서 자게 하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였다.

말이 살찌는 병에 걸려서 죽으니, 신하들로 하여금 이를 장사 지내게 했는데,

속 널과 바깥 널을 갖추어 대부(大夫)의 예로써 장사 지내려고 했다.

좌우의 신하들이 이를 다투어 옳지 않다고 하였다.]

 

王下令曰:「有敢以馬諫者,罪至死.」 優孟聞之,入殿門.  仰天大哭.  王驚而問其故.

優孟曰:「馬者王之所愛也,以楚國堂堂之大,何求不得,而以大夫禮葬之,薄,

請以人君禮葬之.」

[초장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 감히 말[馬]을 가지고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죽음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맹이 이 말을 듣고 대궐문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을 우러러 크게 곡했다.

왕이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우맹이 말하기를 :  ‘말은 임금이 좋아하시던 것입니다. 당당한 초나라의 강대함으로

무엇을 구해 얻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부의 예로써 장사 지내는 것은 박합니다.

임금의 예로써 장사 지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王曰:「何如?」

對曰:「臣請以彫玉為棺, 文梓為槨, 楩楓豫章為題湊, 發甲卒為穿壙, 老弱負土,

齊趙陪位於前,韓魏翼衛其后,廟食太牢,奉以萬戶之邑. 

 諸侯聞之,皆知大王賤人而貴馬也.」 

[초장왕이 묻기를 :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우맹이 대답하기를 : ‘신이 청하옵건대 옥을 다듬어 속 널을 만들고, 

무늬 있는 가래나무[梓]로 바깥 널을 만들며, 단풍나무, 느릅나무, 녹나무 등으로

횡대를 만드십시오. 군사를 동원해 무덤을 파고, 노약자로 하여금 흙을 지게 해

무덤을 쌓으며, 제나라와 조나라의 대표를 앞에 모시게 하고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대표로 뒤에서 호위하게 하십시오.

사당을 세워 태뢰(太牢)로 제사 지내고 만 호의 읍으로써 받들게 하십시오.

제후가 이를 듣는다면 모두 대왕이 사람을 천하게 여기고,

말[馬]을 귀하게 여김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王曰:「寡人之過一至此乎!為之柰何?」

優孟曰:「請為大王六畜葬之.  以壟灶為槨,銅歷為棺,齎以薑棗,薦以木蘭,

祭以糧稻,衣以火光,葬之於人腹腸.」於是王乃使以馬屬太官,無令天下久聞也.

[초장왕이 말하기를 : " 과인의 잘못이 이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자,
우맹이 대답하기를 : "청컨대 대왕을 위해 육축(六畜)으로써 장사를 지내소서.

즉 부뚜막으로 바깥 널을 삼고, 구리로 만든 가마솥을 속 널을 삼으십시오.

생강과 대추를 섞은 뒤 향료를 넣어 쌀로 제사를 지내고,

화광(火光)으로 옷을 입혀서 이를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 지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곧 말을 태관에 넘겨주고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楚相孫叔敖知其賢人也,善待之.

病且死,屬其子曰:「我死,汝必貧困. 若往見優孟,言我孫叔敖之子也.」

居數年,其子窮困負薪,逢優孟,與言曰:

「我,孫叔敖子也. 父且死時,屬我貧困往見優孟.」

優孟曰:「若無遠有所之.」即為孫叔敖衣冠,抵掌談語.

[초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는 우맹이 어진 사람임을 알고 그를 잘 대우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자, 아들을 불러 당부하기를 : 

"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빈곤하게 될 것이다. 너는 가서 우맹을 만나보고,

나는 손숙오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해라."라고 하였다.
몇 해 지나자 과연 그 아들은 곤궁해 땔나무를 등에 지게 되었다.

우맹을 만나서 말하기를 : "저는 손숙오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에

당부하시기를 가난하게 되면 당신을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우맹은 말하기를 : "그대는 멀리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손숙오의 의관을 입고 행동거지와 말투를 흉내냈다.]  

 

歲餘,像孫叔敖,楚王及左右不能別也.

莊王置酒,優孟前為壽. 莊王大驚,以為孫叔敖復生也,欲以為相.

優孟曰:「請歸與婦計之,三日而為相.」莊王許之.

[이처럼 하기를 한 해 남짓 하니 손숙오와 비슷해 초나라 왕과 좌우 사람들이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장왕이 주연을 베풀었는데 우맹이 앞으로 나아가서 잔을 드렸다.

장왕이 크게 놀랐다. 손숙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여겨서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우맹이 아뢰기를 : "돌아가 아내와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사흘 뒤에 재상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三日後,優孟復來.  王曰:「婦言謂何?」

孟曰:「婦言慎無為, 楚相不足為也. 如孫叔敖之為楚相, 盡忠為廉以治楚, 楚王得以霸.

今死,其子無立錐之地,貧困負薪以自飲食.  必如孫叔敖,不如自殺.」

[사흘 뒤 우맹이 다시 왔다. 왕이 묻기를 : "아내의 말이 무어라고 하던가?’라고 하자,

우맹이 대답하기를 : "아내가 말하기를, 삼가 하지 마소서. 초나라의 재상은 할 것이

못 됩니다. 손숙오와 같은 초나라의 재상은 충성과 청렴을 다해서 초나라를 다스렸고,

초나라 왕은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죽자 그 아들은 송곳조차

꼽을 땅이 없고, 빈곤해 땔나무를 져서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합니다. 

만약에 손숙오와 같이 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느니만 못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因歌曰:「山居耕田苦,難以得食. 起而為吏,身貪鄙者餘財,不顧恥辱.

身死家室富,又恐受賕枉法,為姦觸大罪,身死而家滅. 貪吏安可為也!

念為廉吏,奉法守職,竟死不敢為非. 廉吏安可為也!楚相孫叔敖持廉至死,

方今妻子窮困負薪而食,不足為也!」 於是莊王謝優孟,乃召孫叔敖子,

封之寢丘四百戶,以奉其祀. 后十世不絕. 此知可以言時矣.

[이어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
"산속에 살면서 밭 갈며 고생해도 먹을 것을 얻기 어렵네. 몸을 일으켜서 벼슬아치가

된다고 해도 탐욕하고 비루한 자는 재물을 남기고, 치욕을 돌보지 않아

몸이 죽은 뒤에 집이 부유해지네. 그러나 뇌물을 받고 국법을 어겨 부정을 일삼다

대죄(大罪)에 저촉되면 몸이 죽고 집안이 망할까 두려워 탐욕하는 벼슬아치 노릇을

어찌 할 수 있으리! 청렴한 벼슬아치 되어 법을 받들고 직책을 지켜 죽어도 감히

비행(非行)을 저지르지 않을 것을 생각하나 청렴한 벼슬아치인들 어찌할 수 있으리.

초나라 재상 손숙오는 청렴을 지켜서 죽기에 이르렀어도 이제 처자가 궁해

땔나무를 져서 먹고 사네. 청렴한 벼슬아치도 할 것이 못 되네! " 

이에 초장왕이 우맹에게 사과하고,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침구의 땅 400호를 봉해

아버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뒤 10세손에게도 이것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졌다.

이는 말할 수 있는 시기를 알았다고 하겠다.]  

 

其後二百餘年, 秦有優旃.  優旃者, 秦倡侏儒也.

善為笑言, 然合於大道, 秦始皇時, 置酒而天雨, 陛楯者皆沾寒.

優旃見而哀之,謂之曰:「汝欲休乎?」陛楯者皆曰:「幸甚.」

優旃曰:「我即呼汝,汝疾應曰諾.」 居有頃,殿上上壽呼萬歲.

[그로부터 2백여 년 뒤에 진(秦)나라에 우전(優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전은 진나라의 난쟁이 광대였다. 그는 우스운 소리를 잘했으나,

그것이 도리에 맞았다. 진시황(秦始皇) 때 주연을 베풀었는데 비가 왔다.
창을 잡고 섬돌 가에 늘어서 있는 경호하는 군사가 모두 비에 젖어 추워하고 있었다.
우전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말하기를 : "그대들은 쉬고 싶은가?’라고 하자,
경호하는 사람들 모두가 말하기를 : "그렇게만 된다면 아주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전이 말하기를 : "내가 그대들을 부르면 그대들은 빨리 예라고 대답하라."

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전 위에서 황제의 장수를 빌며 만세를 불렀다.]

 

優旃臨檻大呼曰:「陛楯郎!」郎曰:「諾.」

優旃曰:「汝雖長,何益,幸雨立. 我雖短也,幸休居.」

於是始皇使陛楯者得半相代.  始皇嘗議欲大苑囿,東至函谷關,西至雍、陳倉.

優旃曰:「善. 多縱禽獸於其中,寇從東方來,令麋鹿觸之足矣.」 始皇以故輟止.

[우전이 난간에서 내려다 보며 큰 소리로 부르기를 : "경호하는 병사들아!"라고 하자, 

​병사들이 대답하기를 :"예"라고 하였다. 우전이 말하기를 : "그대들은 비록 키는 크나

비를 맞고 있으니 무슨 이익됨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비록 키는 작으나

다행히도 편히 쉬고 있다."라고 하자. 

이에 진시황은 경호하는 병사로 하여금 반씩 서로 교대하게  하였다.
진시황이 일찍이 원유(苑囿)를 크게 넓혀서 동쪽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고,

서쪽은 옹(雍)과 진창(陳倉)에 이르게 하려 했다. 우전이 말하기를 :

"좋습니다. 금수를 그 안에 많이 놓아서 도적이 동쪽에서 온다면 

고라니와 사슴으로 하여금 그들을 뿔로 막게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진시황은 이 말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二世立,又欲漆其城.  優旃曰:「善. 主上雖無言,臣固將請之. 漆城雖於百姓愁費,

然佳哉!漆城蕩蕩,寇來不能上. 即欲就之,易為漆耳,顧難為蔭室.」

於是二世笑之,以其故止.  居無何,二世殺死,優旃歸漢,數年而卒.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성벽에 옻칠을 하려고 했다.

우전이 말하기를 : "좋습니다. 주상께서 비록 말씀이 아니 계셔도 신이 진실로

청하려 했던 것입니다. 성벽에 옻칠하는 것은 비록 백성들이 비용을 근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훌륭한 것입니다.

옻칠한 성벽이 웅장하게 서 있으면 도적이 와도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한다면 칠을 하기는 쉬우나, 음실을 만들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2세 황제가 웃었고 그 까닭으로 일은 중지하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2세는 살해당했고, 우전은 한나라로 귀순해 왔다가 몇 해 뒤에 죽었다.]

 

太史公曰

淳于髡仰天大笑,齊威王橫行.

優孟搖頭而歌,負薪者以封.

優旃臨檻疾呼,陛楯得以半更.  豈不亦偉哉!

[태사공은 말한다.
순우곤(淳于髡)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자 제 위왕(齊威王)이 뜻을 얻게 되었고,

우맹(優孟)이 머리를 흔들며 노래하자, 땔나무를 졌던 자가 봉해지게 되었고,

우전이 난간에서 빠르게 부르자 경호하는 병사들이 반씩 교대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褚先生曰:臣幸得以經術為郎,而好讀外家傳語. 

竊不遜讓,復作故事滑稽之語六章,編之於左.

可以覽觀揚意,以示後世好事者讀之,以游心駭耳,以附益上方太史公之三章.

[저선생(褚先生)은 말했다.
"신은 다행히 경서에 관한 학술로 낭이 되었으나, 다른 분야의 기록을 읽기 좋아해

스스로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골계고사 6장(六章)을 지어 아래에 붙입니다.

이를 보면 견문을 넓힐 수 있고, 호사가가 읽는다면 마음이 유쾌해지고

귀가 놀랠 것입니다. 이로써 태사공의 3장(三章) 뒤에 붙입니다."] 

 

武帝時有所幸倡郭舍人者,發言陳辭雖不合大道,然令人主和說.

武帝少時,東武侯母常養帝,帝壯時,號之曰「大乳母」. 率一月再朝.

朝奏入,有詔使幸臣馬游卿以帛五十匹賜乳母,又奉飲糒飱養乳母.

[무제(武帝) 때 총애를 받은 광대(倡)로는 곽사인(郭舍人)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말하는 것이 비록 도리에는 맞지 않았으나,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무제가 어렸을 적에 동무후의 어미가 무제를 길렀다. 황제가 장년이 되자

이를 이름해 ‘대유모(大乳母)’라 했다. 유모는 대체로 한 달에 두 번 입조했는데, 

황제는 조서를 내려 총애를 하는 신하인 마유경(馬游卿)을 시켜 비단 50필을

유모에게 주었으며 또한 음식을 준비해 유모를 공양했다.]

 

乳母上書曰:「某所有公田,願得假倩之.」 帝曰:「乳母欲得之乎?」以賜乳母.

乳母所言,未嘗不聽.  有詔得令乳母乘車行馳道中. 當此之時,公卿大臣皆敬重乳母.  

乳母家子孫奴從者橫暴長安中,當道掣頓人車馬,奪人衣服.

聞於中,不忍致之法.  有司請徙乳母家室,處之於邊.  奏可.  乳母當入至前,面見辭.

[유모가 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를 :

"어느 곳에 공전(公田)이 있는데 이를 빌려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 "유모가 이를 얻기를 원하는가?"하며, 그것을 유모에게 주었다.

황제는 일찍이 유모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명을 내려 유모가 수레를 타고서

황제가 다니는 길을 다닐 수 있게 했다. 이때 공경대신이 모두 유모를 공경하고 

존중했다. 유모의 집 자손과 종들이 장안의 거리에서 횡포를 부렸다.

길에서 남의 마차를 세우고 남의 의복을 빼앗았다.
이 말이 궁중에까지 들렸으나 차마 법으로 다스리지 못했다.

관리가 유모의 집을 옮겨 변방에 두기를 청하자, 황제가 이를 재가했다.

유모가 궁중으로 들어가 떠나기 전에 황제를 한번 만나기를 청하였다.]

 

乳母先見郭舍人, 為下泣. 舍人曰:「即入見辭去, 疾步數還顧.」

乳母如其言, 謝去, 疾步數還顧.  郭舍人疾言罵之曰:

「咄!老女子!何不疾行!陛下已壯矣,寧尚須汝乳而活邪?尚何還顧!」

於是人主憐焉悲之,乃下詔止無徙乳母,罰謫譖之者.

[유모는 먼저 곽사인을 만나보고 눈물을 흘렸다. 곽사인이 말하기를 : "들어가 뵙고

작별을 하고, 나오실 때에 걸음을 빨리 하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도록 하시오." 하였다.

유모는 그 말대로 작별을 고하고 나가면서 빨리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곽사인이 급한 말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

"쯧쯧, 늙은 여자는 왜 빨리 가지 않는가! 폐하께서는 이미 장년이신데,

아직도 그대의 젖을 얻어 사실 줄로 아는가? 무엇을 또 돌아본다는 말인가!"라고 하자. 

이에 황제는 불쌍히 여기고 슬퍼해 곧 조서를 내려 이를 중지시키고, 

유모를 옮기지 않게 했다. 그리고 참소한 자를 벌을 주어 멀리 귀양을 보냈다.]

 

武帝時, 齊人有東方生名朔, 以好古傳書,愛經術, 多所博觀外家之語.

朔初入長安, 至公車上書, 凡用三千奏牘.  公車令兩人共持舉其書,僅然能勝之. 

人主從上方讀之,止,輒乙其處,讀之二月乃盡.

詔拜以為郎,常在側侍中.  數召至前談語,人主未嘗不說也.

[무제 때 제나라 사람으로 동방생이라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삭(朔)이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서적과 경서(經術)에 관한 학술을 사랑했고, 

여러 분야의 기록을 많이 보았다. 삭이 처음 장안에 들어올 때

목간을 공거에 실어 황제에게 올렸는데 모두 3천 개나 되었다.
공거에 실은 목간은 두 사람을 시켜 함께 들게 해서야 겨우 이것을 옮길 수 있었다.

황제는 상방(上方)에서 이를 읽었는데, 그칠 때에는 곧 그곳을 붓으로 표시했으며,

이렇게 이것을 읽기 시작해 두 달 만에 겨우 끝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낭(郎)으로 삼았다. 그는 항상 황제의 측근에 있었다.

자주 불리어 어전에서 말했는데 일찍이 황제가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時詔賜之食於前.  飯已,盡懷其餘肉持去,衣盡汙.  數賜縑帛,檐揭而去.

徒用所賜錢帛,取少婦於長安中好女.  率取婦一歲所者即棄去,更取婦. 

所賜錢財盡索之於女子.  人主左右諸郎半呼之「狂人」. 

人主聞之,曰:「令朔在事無為是行者,若等安能及之哉!」

[때로 조서를 내려 어전에서 먹을 것을 내렸다. 먹기를 끝내면

그 남은 고기를 모두 품에 넣어 가지고 나갔으므로 옷이 모두 더러워졌다.

자주 비단을 내려주었는데 어깨에 메고 나갔다.

하사받은 돈과 비단을 부질없이 써서 장안의 미녀 가운데서 젊은 부인을 맞이했다.

이렇게 한 해 정도만 되면 곧 그 여자를 버리고 다시 맞이하곤 했다.
이처럼 황제가 내린 돈과 재물을 모두 여자에게 써버렸다.

황제 좌우의 낭관들의 반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황제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 "삭에게 그런 행동을 못하게 한다면 과연 그대들이

그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朔任其子為郎,又為侍謁者,常持節出使.

朔行殿中,郎謂之曰:「人皆以先生為狂.」

朔曰:「如朔等,所謂避世於朝廷閒者也.  古之人,乃避世於深山中.」

[삭이 아들을 천거해 낭에 임명되게 하고 다시 시알자(侍謁者)가 되게 하였으며,

그는 항상 병부절을 가지고 사신으로 나갔다. 동방삭이 궁전 안을 걸어가고 있을 때

어떤 낭이 말하기를 :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자,

삭이 말하기를 : "나와 같은 사람은 말하자면 조정 안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네.

옛사람들은 깊은 산속에서 세상을 피했지만 말이네."라고 하였다.]

 

時坐席中,酒酣,據地歌曰:「陸沈於俗,避世金馬門.

宮殿中可以避世全身,何必深山之中,蒿廬之下.」

金馬門者,宦[者]署門也,門傍有銅馬,故謂之曰「金馬門」.

[때로 술 좌석에서 거나하게 취하면 두 손을 땅에 붙이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속에 젖어 세상을 금마문(金馬門)에서 피하네. 궁전 안에서도 세상을 피하고,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데, 왜 오로지 깊은 산속, 볏짚으로 엮은 집 밑이랴."

금마문이란 환자서(宦者署)의 문을 말한다.

문 곁에 동(銅)으로  만든 말이 세워져 있으므로 이를 ‘금마문’이라고 한 것이다.]

 

時會聚宮下博士諸先生與論議,共難之曰:

「蘇秦、張儀一當萬乘之主, 而都卿相之位,澤及後世.

今子大夫修先王之術,慕聖人之義,諷誦詩書百家之言,不可勝數.

著於竹帛,自以為海內無雙,即可謂博聞辯智矣. 然悉力盡忠以事聖帝,曠日持久,

積數十年,官不過侍郎,位不過執戟,意者尚有遺行邪. 其故何也?」

[어느 때인가 학궁(學宮)에 모인 박사와 선생들이 서로 의론을 폈다. 

그들은 함께 동방삭을 비난하며 말하기를 : "소진과 장의는 한번 만 승의 임금을

만나보면 경상의 자리에 있게 되고, 은택이 후세에까지 미쳤습니다.

이제 선생께서는 선왕의 도를 닦고, 성인(聖人)의 의리를 사모해,

『시경』, 『서경』과 백가(百家)의 말을 왼 것이 이루 셀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문장을 쓴 것이 스스로 세상에 둘도 없다고 자부하고 계십니다.
곧 견문이 넓고 사물을 판단하는 데에 밝으며 지혜가 뛰어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힘을 다해 충성을 다하고 성스러운 임금을 섬겼으나 헛되이 많은 날을

수십 년 보냈어도, 벼슬은 시랑에 지나지 않고 지위는 집극(執戟)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하건데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었던가요?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자.] 

 

東方生曰:「是固非子所能備也. 彼一時也,此一時也,豈可同哉!

夫張儀、蘇秦之時,周室大壞,諸侯不朝,力政爭權,相禽以兵,并為十二國,

未有雌雄,得士者彊,失士者亡,故說聽行通,身處尊位,澤及後世,子孫長榮.  

今非然也.  聖帝在上,德流天下,諸侯賓服,威振四夷,連四海之外以為席,

安於覆盂, 天下平均,合為一家,動發舉事,猶如運之掌中.

賢與不肖, 何以異哉?方今以天下之大, 士民之眾, 竭精馳說, 并進輻湊者, 不可勝數.

悉力慕義,困於衣食,或失門戶. 使張儀、蘇秦與仆并生於今之世,曾不能得掌故,

安敢望常侍侍郎乎!傳曰:『天下無害菑,雖有聖人,無所施其才;

上下和同,雖有賢者,無所立功.』 故曰時異則事異.  雖然,安可以不務修身乎?

《詩》曰:『鼓鐘于宮,聲聞于外.  鶴鳴九皋,聲聞于天.』

茍能修身,何患不榮!太公躬行仁義七十二年,逢文王,得行其說,封於齊,

七百歲而不絕.  此士之所以日夜孜孜,修學行道,不敢止也.  

今世之處士,時雖不用,崛然獨立,塊然獨處,上觀許由,下察接輿,策同范蠡,

忠合子胥,天下和平,與義相扶,寡偶少徒,固其常也.

子何疑於余哉!」 於是諸先生默然無以應也.

[동방삭이 말하기를 : "이는 진실로 그대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때는 그때요,

지금은 지금인 것이오. 어찌 같을 수 있겠소? 무릇 장의나 소진이 살던 시대는

주나라 왕실이 크게 무너져서 제후가 조회하지 않았을 때요. 힘으로써 정치를 하고

권세를 다투어 서로 병력으로 침탈해 12개의 나라로 겸병되었으나, 아직도 자웅이

결정되지 않았던 시기였소. 인재를 얻는 자는 강성하고, 인재를 잃는 자는 멸망했소.

그래서 그들의 말과 계책이 받아들여져 높은 지위에 오르고, 은택이 후세에 미치며

자손이 길이 영귀했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소. 성스러운 황제께서 위에

계셔 덕이 천하에 흐르고 제후가 복종하며 위엄이 사방 오랑캐에 떨쳐지고 있소.
사해(四海) 밖까지 자리를 잡아 그릇을 엎어 놓은 것보다 편안하며,

천하가 고루 합해 한집이 되었소.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마치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으니,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이제 천하가 광대하고, 사민(士民)이 많기 때문에 정력을 다해서 유세하는 것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으려고 몰려드는 자가 이루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오.

힘을 다하고 의를 사모해도 먹고 입는 것에 곤란을 느끼고, 어떤 이는 집를 잃게 되오.
장의와 소진이 나처럼 지금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손바닥 만한 땅도 얻지 못했을

것이오. 어찌 감히 상시(常侍)나 시랑(侍郎) 등을 바랄 수 있다는 말인가!

전해 오는 말에 이르기를, '천하에 재해가 없다면 비록 성인(聖人)이 있다고 해도 

그 재주를 펼 곳이 없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면 비록 어진 이가 있어도

공을 세울 수가 없다 라고 했소. 그러므로 시대가 다르면 일도 다르다는 것이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 수신하는 일을 힘쓰지 않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종(鍾)을 궁궐(宮)에서 울리니 소리가 밖에서도 들리고,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린다.' 라고  하였소.
진실로 몸을 닦을 수 있다면 어찌 영화롭고 부귀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랴!
태공(太公)이 몸소 인의를 행해 72세에 문왕을 만나 그 포부를 행할 수 있게 되어

제나라에 봉해졌고, 7백년이 되도록 그것이 끊어지지 않았소.

이것이 바로 선비가 밤낮으로 부지런히 학문을 닦으며 도를 행하는 것을 감히 멈추지

못하는 까닭이오. 지금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가 비록 시대에 쓰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뚝 홀로 서고, ​외로히 홀로 거처하며, 위로는 허유를 보고 아래로는 접여를 살피며,

계책은 범려(范蠡)와 같고, 충성은 오자서(伍子胥)에 합치되나, 천하가 평화스러우니

정의를 지켜 수신을 하는 것뿐이오. 짝이 없고 무리가 적은 것은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오. 그대들은 어찌 나를 의심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여러 선생들은 묵묵히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建章宮後閤重櫟中有物出焉,其狀似麋.  以聞,武帝往臨視之.

問左右群臣習事通經術者,莫能知.  詔東方朔視之.

朔曰:「臣知之,願賜美酒粱飯大飱臣,臣乃言.」 詔曰:「可.」

已又曰:「某所有公田魚池蒲葦數頃,陛下以賜臣,臣朔乃言.」 詔曰:「可.」

[건장궁(建章宮) 후각의 이중으로 된 난간 안에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다.

그 모양이 고라니와 비슷했다. 무제가 가서 이를 보고는, 측근의 경험이 많고

경술에 통달한 신하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다들 알지 못했다.
이에 동방삭에게 조사하게 했다. 삭이 말하기를 : "신은 알고 있습니다. 신에게 술과

기름진 쌀밥을 내리시어 실컷 먹게 하옵소서. 그러면 신이 곧 말하겠습니다."하자.

조서를 내려 : "좋소"라고 하였다. 이미 음식을 내려 먹고 나서 또 말하기를 :

"어느 곳에 공전(公田)과 고기를 기르는 연못과 갈대밭 몇 이랑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이를 주신다면 신 삭은 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니,

조서를 내려 : "좋소"라고 하였다.] 

 

於是朔乃肯言,曰:「所謂騶牙者也. 遠方當來歸義,而騶牙先見.

其齒前后若一,齊等無牙,故謂之騶牙.」

其後一歲所,匈奴混邪王果將十萬眾來降漢.  乃復賜東方生錢財甚多.

[이에 삭이 기꺼이 말하기를 : "그것은 이른바 추아(騶牙)라는 짐승입니다.

먼 나라 사람이 귀순해 의(義)를 받들 때 추아가 먼저 나타납니다.

그것 짐승은 이빨이 하나 같이 가지런하고 어금니가 없습니다. 

그래서 추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과연 한 해 만에 흉노의 혼야왕이 정말로 10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다시 동방삭에게 많은 돈과 재물을 내려주었다.] 

 

至老,朔且死時,諫曰:「《詩》云『營營青蠅,止于蕃. 愷悌君子,無信讒言.

讒言罔極,交亂四國』.  願陛下遠巧佞,退讒言.」

帝曰:「今顧東方朔多善言?」怪之.  居無幾何,朔果病死.

傳曰:「鳥之將死,其鳴也哀;人之將死,其言也善.」此之謂也.

[동방삭이 늙어 죽게 되었을 무렵 간언하기를 : "『시경』에 말하기를,

윙윙 파리가 떼 지어 울타리에 앉네. 상냥하고 단아한 군자여, 참언을 믿지 말라.

참언은 끝이 없어 나라를 어지럽힌다.'라고 했습니다.

원컨데 폐하께서는 아첨을 멀리하시고, 참소하는 말을 물리치십시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 "어째서 요즘 동방삭이 착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일까?’라고 하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얼마 안 되어 삭은 과연 병들어 죽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이르기를 : 새가 장차 죽으려면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면 그 말이 착하다."라고 했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武帝時,大將軍衛青者,衛后兄也,封為長平侯.

從軍擊匈奴,至余吾水上而還,斬首捕虜,有功來歸,詔賜金千斤.

將軍出宮門,齊人東郭先生以方士待詔公車,當道遮衛將軍車,拜謁曰:「願白事.」

[무제 때 대장군 위청(衛靑)은 위후(衛后)의 오빠로,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그는 종군해 흉노를 무찌르고, 여오수(余吾水) 부근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흉노를 베고, 포로도 잡아와 공을 세웠다. 그가 돌아오니 황제는 조서를 내려

황금 1천근을 하사했다. 장군이 대궐 문을 나서니, 제나라 사람 동곽(東郭)선생이

방사(方士)로서 공거(公車)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길 위로 나와 위장군의 수레를 

가로막고는, 절하며 말하기를 :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將軍止車前,東郭先生旁車言曰:「王夫人新得幸於上,家貧.

今將軍得金千斤,誠以其半賜王夫人之親,人主聞之必喜.  此所謂奇策便計也.」

衛將軍謝之曰:「先生幸告之以便計,請奉教.」

於是衛將軍乃以五百金為王夫人之親壽.

[장군이 수레를 멈추고 동곽선생을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동곽선생이 수레 곁으로 가서 말하기를 : "왕부인이 새로이 황제께 총애를 받고

있으나 집이 가난합니다. 이제 장군께서 황금 1천근을 얻으셨으니,

만약 그 반을 왕부인의 어버이에게 주시면 황제께서 이를 듣고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발하고 편리한 계책입니다."라고 하자. 

위장군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 "선생께서 다행히도 편리한 계책을 알려주셨습니다.

가르침을 받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위장군이 곧 황금 5백근을 왕부인의 어버이에게 선물을  하였다.]

 

王夫人以聞武帝. 帝曰:「大將軍不知為此.」

問之安所受計策,對曰:「受之待詔者東郭先生.」詔召東郭先生,拜以為郡都尉.

東郭先生久待詔公車,貧困饑寒,衣敝,履不完.  行雪中,履有上無下,足盡踐地.

道中人笑之, 東郭先生應之曰:「誰能履行雪中, 令人視之, 其上履也,

其履下處乃似人足者乎?」

[왕부인이 이 일을 무제에게 고했다.
무제가 말하기를 : "대장군은 이와 같은 일을 할 줄 모르오."라고 하고,

누구로부터 계책을 받은 것인지를 물었다.

위청이 대답하기를 : "조서를 기다리고 있는 동곽선생에게서 받았습니다."하였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동곽선생을 부르고, 군도위(郡都尉)에 임명했다.

동곽선생은 오랫동안 공거에서 조서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지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으며, 옷은 해지고 신도 온전치 못했다. 눈 속을 가면 신이 위는 있어도

밑창이 없어서 발이 그대로 땅에 닿았다. 길가의 사람들이 이를 보고 웃자, 

동곽선생이 이에 화답하며 말하기를 : "누가 신을 신고 눈 속을 가면서 사람들이

이것을 볼 때, 위는 신이고 아래는 사람의 발로 알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及其拜為二千石,佩青緺出宮門,行謝主人.  故所以同官待詔者, 等比祖道於都門外.

榮華道路,立名當世. 此所謂衣褐懷寶者也.  當其貧困時,人莫省視;

至其貴也,乃爭附之.  諺曰:「相馬失之瘦,相士失之貧.」其此之謂邪?

[그는 2천석(二千石)의 벼슬에 임명되어 푸른 인수(印綬)를 차고 대궐 문을 나가서

하숙집 주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전에 같이 조서를 기다리던 자들이 모여 

도성 문 밖에서 먼 길을 떠나는 동곽선생을 위해 무사하기를 빌었으니,

길 위에 영화가 넘치고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이른바 남루한 옷을 입고서

보배를 품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빈곤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다가, 

그가 영귀함에 이르러서는 곧 서로 다투어 붙었다.
속담에 이르기를 : " 말[馬]을 감정할 때에는 메마른 데서 실수하게 되고,

선비를 평가할 때에는 가난한 데서 실수하게 된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王夫人病甚,人主至自往問之曰:「子當為王,欲安所置之?」對曰:「願居洛陽.」

人主曰:「不可. 洛陽有武庫、敖倉,當關口,天下咽喉. 自先帝以來,傳不為置王.

然關東國莫大於齊,可以為齊王.」 王夫人以手擊頭,呼「幸甚」

王夫人死,號曰「齊王太后薨」

[왕부인이 병이 위중(危重)하자,  황제가 몸소 가서 이를 문병하며 말하기를 :

"그대의 아들은 마땅히 왕이 될 것이오. 어디에 있기를 원하는가?"라고 하자,

왕부인이 대답하기를 : "낙양에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 "안 되오. 낙양은 무고(武庫)와 오창(敖倉)이 있고 관(關)의 입구에

해당해 천하의 목구멍이오. 선제 때부터 왕을 두는 일을 하지 않았소. 그러나 관동의

나라들 중에 제나라보다 큰 것이 없소. 제나라 왕을 삼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부인이 머리를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 "심히 다행스럽습니다."하였다. 
마침내 왕부인이 죽자, 부르짖기를 : 제나라 왕의 태후가 돌아가셨다."라고 하였다.] 

 

昔者,齊王使淳于髡獻鵠於楚.  出邑門,道飛其鵠,徒揭空籠,造詐成辭,

往見楚王曰:「齊王使臣來獻鵠,過於水上,不忍鵠之渴,出而飲之,去我飛亡.

吾欲刺腹絞頸而死.  恐人之議吾王以鳥獸之故令士自傷殺也.

毛物,多相類者,吾欲買而代之,是不信而欺吾王也.  

欲赴佗國奔亡,痛吾兩主使不通. 故來服過,叩頭受罪大王.」

楚王曰:「善,齊王有信士若此哉!」厚賜之,財倍鵠在也.

[옛날에 제나라 임금이 순우곤을 시켜 고니를 초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그는 도성의 문을 나서자 길에서 그 고니를 날려 버리고는 빈 새장만을 든 채

초나라 왕을 뵙고 거짓으로 아뢰기를 : 제나라 임금께서 신으로 하여금 고니를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지나는데 고니의 목말라함을 차마 볼 수 없어 꺼내서

물을 마시게 했더니, 저를 버리고 날아서 도망쳤습니다. 저는 배를 찌르고 목을 매어

죽을까 생각했으나, 사람들이 우리 왕에 대해 하찮은 새 때문에 선비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고 논의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고니는 털을 가진 물건이며

서로 비슷한 것이 많기 때문에 제가 사서 이를 대신하려 했으나,

이는 신의가 없는 행동으로서 우리 왕을 속이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두 임금께서 사신을 통하지 않게 하실 것이

가슴 아프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와서 허물을 자복하고 머리를 두드려

대왕께 죄값을 달게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나라 왕이 말하기를 : "훌륭하도다. 제나라 임금에게 이와 같은 신의 있는

선비가 있었던가!’라고 하고, 후하게 예물을 내려주었다.

그 재물은 고니를 바칠 경우보다 갑절이나 많았다.]

武帝時,徵北海太守詣行在所.  有文學卒史王先生者,自請與太守俱,

「吾有益於君」,君許之. 諸府掾功曹白云:「王先生嗜酒,多言少實,恐不可與俱.」

太守曰:「先生意欲行,不可逆.」遂與俱.  行至宮下,待詔宮府門.

[무제 때 북해(北海)의 태수를 불러 행차한 곳으로 오게 하였다.

그때 문학졸사(文學卒史)로서 왕선생이라는 자가 있어 태수와 함께 가기를 자청하며

‘제가 그대에게 이익이 될 수 있으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여러 관부(官府)의 아전들이 말하기를 : "왕선생은 술을 좋아하고, 말이 많으며

내실이 없습니다. 아마 함께 가셔도 도움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태수가 말하기를 : "선생의 뜻이 가려 하니, 거스를 수 없소."하며, 결국 함께 갔다.
궁에 이르러 궁부 문 밖에서 조서를 기다렸다.]

 

王先生徒懷錢沽酒,與衛卒仆射飲,日醉,不視其太守.  太守入跪拜.

王先生謂戶郎曰:「幸為我呼吾君至門內遙語.」戶郎為呼太守. 太守來,望見王先生.

王先生曰:「天子即問君何以治北海令無盜賊,君對曰何哉?」

對曰:「選擇賢材,各任之以其能,賞異等,罰不肖.」

[왕선생은 부질없이 지니고 있던 돈으로 술을 사서 위졸복야와 함께 마시며 날마다

취한 채 태수는 만나지도 않았다. 마침내 태수가 들어가서 황제께 인사하려 하자.

왕선생이 호랑(戶郎)에게 말하기를 : ​"바라건대 나 대신 우리 태수를 불러 문 안에서

말하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호랑이 태수를 부르자, 태수가 나와서 왕선생을 만났다. 왕선생이 말하기를 :

"천자께서 곧 태수께, 어떻게 북해를 다스려 도적이 없게 했는가?라고 물으시면,
태수께서는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태수가 대답하기를 : "나는 어진 인재를 가려 뽑고, 그 능력에 따라 일을 맡기며, 

상의 등급을 달리하고, 착하지 못한 자를 벌했습니다. 라고 말하겠소."라고 하였다.]

 

 

王先生曰:「對如是,是自譽自伐功,不可也.

願君對言,非臣之力,盡陛下神靈威武所變化也.」

太守曰:「諾.」召入,至于殿下,有詔問之曰:「何於治北海,令盜賊不起?」

叩頭對言:「非臣之力,盡陛下神靈威武之所變化也.」

[왕선생이 말하기를  : "그와 같이 대답하신다면, 이는 곧 자기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원컨대 태수께서는, 신의 힘이 아니라 모두 폐하의 신령과 위무가

변화시킨 바입니다.'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수가 알았다고 했다.

태수가 불려 들어가 어전 앞에 이르니,

황제가 묻기를 : "어떻게 북해를 다스려서 도적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는가?’라고 하자,

태수는 머리를 조아려 대답하기를 : "신의 힘이 아니라 모두 폐하의 신령과 위무가

변화시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武帝大笑,曰:「於呼!安得長者之語而稱之!安所受之?」

對曰:「受之文學卒史.」帝曰:「今安在?」

對曰:「在宮府門外.」有詔召拜王先生為水衡丞,以北海太守為水衡都尉.

傳曰:「美言可以市,尊行可以加人. 君子相送以言,小人相送以財.」

[무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 "훌륭하도다. 어디서 이런 장자()의 말을 얻어

들었길래 이렇게 말하는가? 누구에게서 그 말을 받았는가?’라고 하자.

태수가 대답하기를 : "문학졸사에게 이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자,

태수가 대답하기를 : "궁부 문 밖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왕선생을 수형승의 벼슬을 내리고, 북해태수는 수형도위로 삼았다.
전해 오는 말에 이르기를 : "아름다운 말(言)은 팔 수 있으며,

높은 행실은 베풀 수 있다’라고 했으며, ‘군자는 서로 보내기를 좋은 말(言)로써 하고,

소인은 서로 보내기를 재물로 한다."라고 하였다.]

 

 

魏文侯時,西門豹為鄴令. 豹往到鄴,會長老,問之民所疾苦.

長老曰:「苦為河伯娶婦,以故貧.」 豹問其故,對曰:

「鄴三老、廷掾常歲賦斂百姓,收取其錢得數百萬,用其二三十萬為河伯娶婦,

與祝巫共分其餘錢持歸.  當其時,巫行視小家女好者,云是當為河伯婦,即娉取.

洗沐之,為治新繒綺縠衣,閒居齋戒;為治齋宮河上,張緹絳帷,女居其中.

為具牛酒飯食,行十餘日.  共粉飾之,如嫁女床席,令女居其上,浮之河中.

始浮,行數十里乃沒.  其人家有好女者,恐大巫祝為河伯取之,以故多持女遠逃亡.

以故城中益空無人,又困貧,所從來久遠矣.

民人俗語曰『即不為河伯娶婦,水來漂沒,溺其人民』云.」

[위문후(魏文侯) 때 서문표(西門豹)가 업(鄴)땅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표가 업땅에 이르렀을 때. 장로(長老)를 모아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바를 물었다.

장로가  말하기를 : "하백에게 아내를 바치는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가난합니다."라고 하였다.  서문표가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 "업의 삼로와 아전이 해마다 백성에게 돈을 수백만 전 거두어 갑니다.

그 중에서 20~30만 전을 써서 하백에게 처자를 바치게 하고,

그 나머지 돈은 무당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 시기가 되면

무당이 다니면서 어려운 집안의 딸 중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말하기를,

​'이 여자는 마땅히 하백의 아내가 될 것이다.' 라고 하고는, 곧 폐백을 주고 데려갑니다.

먼저 씻기고 새로 비단옷들을 지어 주어서 홀로 있게 합니다.

재궁(齋宮)을 물가에 만들고 붉은 장막을 둘러서 여자를 그 안에 있게 합니다. 

쇠고기와 술과 밥을 갖추어 먹이고, 10여 일을 보냅니다. 그날이 되면 화장을 시키고

시집가는 여자의 상석(床席)처럼 만들어, 여자를 그 위에 앉힌 뒤

이것을 물 위에 띄웁니다. 처음에는 떠서 수십 리를 가지만 곧 물에 잠겨버립니다.
아름다운 딸을 가진 집에서는 무당이 하백을 위해 딸을 데려갈 것을 두려워해

딸을 데리고 멀리 도망가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성 안이 더욱 비어 사람이 없게 되고, 또 빈곤해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오래전 일입니다. 전해 오기를, 만일 하백에게 아내를 바치지 않는다면,

물이 범람해 많은 백성들을 익사시킬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립니다.”라고 하였다.]

 

西門豹曰:「至為河伯娶婦時,願三老、巫祝、父老送女河上,幸來告語之,

吾亦往送女.」  皆曰:「諾.」 至其時,西門豹往會之河上.

三老、官屬、豪長者、裏父老皆會,以人民往觀之者三二千人.

其巫,老女子也,已年七十.  從弟子女十人所,皆衣繒單衣,立大巫后.

西門豹曰:「呼河伯婦來,視其好醜.」 即將女出帷中,來至前.

[서문표가 말하기를 : "하백을 위해 아내를 바치려고 삼로와 무당과 부로(父老)가

여자를 물 위로 보내거든 와서 알려주기 바란다. 나도 여자를 보내러 가겠다."하자.

모두 말하기를 :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때가 되자,

서문표가 물가로 가서 이들을 만났다. 삼로와 아전, 유지들과 마을의 부로가

모두 모이고, 백성들로서 보러 온 자가 모두 2천~3천명이었다.
무당은 늙은 여자로서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다. 그녀는 여제자 10여 명을 따르게

했는데, 모두 비단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큰 무당의 뒤에 섰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

"하백의 아내를 불러오라. 내가 예쁜지 못났는지를 살피리라."라고 하였다. 

곧 여자가 장막을 나와서 서문표 앞에 이르렀다.]

 

豹視之,顧謂三老、巫祝、父老曰:「是女子不好,煩大巫嫗為入報河伯,

得更求好女,后日送之.」 即使吏卒共抱大巫嫗投之河中.

有頃,曰:「巫嫗何久也?弟子趣之!」復以弟子一人投河中.

有頃,曰:「弟子何久也?復使一人趣之!」復投一弟子河中.  凡投三弟子.

西門豹曰:「巫嫗弟子是女子也,不能白事,煩三老為入白之.」 復投三老河中.

[서문표가 이를 보더니 삼로와 무당과 부로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 
"이 여자는 아름답지가 않다. 수고스럽지만 큰 무당 할멈은 들어가서 하백에게 고하라.
다시 아름다운 여자를 구해 후일에 보낸다고."라고 하고는,  

곧 아전과 군사를 시켜 큰 무당 할멈을 안아 물속에 던지게 했다.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 "무당 할멈이 어찌 이토록 오래 있는가?

제자는 가서 그를 재촉하라!’"라고 하고 제자 한 사람을 물 속에 던졌다.

다시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 제자도 어찌 이토록 오래 있는가? 

다시 한 사람을 보내어 재촉하게 하라!"라고 하며, 또 한 제자를 물속에 던졌다. 

이렇게 모두 제자 세 명을 던졌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 "무당과 그 제자들은 모두 여자라 일을 고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삼로가 수고해야겠다. 들어가서 하백에게 고하라."라고 하며,

다시 삼로를 물속에 던졌다.]

 

西門豹簪筆磬折,向河立待良久.  長老、吏傍觀者皆驚恐.

西門豹顧曰:「巫嫗、三老不來還,柰之何?」欲復使廷掾與豪長者一人入趣之.

皆叩頭,叩頭且破,額血流地,色如死灰.  西門豹曰:「諾,且留待之須臾.」

須臾,豹曰:「廷掾起矣. 狀河伯留客之久,若皆罷去歸矣.」

鄴吏民大驚恐,從是以後,不敢復言為河伯娶婦.

[서문표가 털 비녀를 관에 꽂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물을 향해 서서 기다린 지

한참이 지났다. 장로와 아전들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서문표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 "무당과 삼로가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어찌 한다는 말인가?"라고 하며,
다시 아전과 고을 유지를 한 사람씩 들어가서 이를 재촉하게 하려고 했더니,

모두들 머리를 조아려서 이마가 깨지고 피가 땅 위에 흐르며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 "좋다. 잠깐 머물러라. 잠시 기다려보리라."라고 하고는,

​조금 지난 후 말하기를 : ‘아전은 일어나라. 하백이 아마 손님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 같다. 너희들은 모두 돌아가라."라고 하자, 

업의 아전과 백성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이로부터 감히 다시는 하백을 위해 아내를 바치게 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西門豹即發民鑿十二渠,引河水灌民田,田皆溉.  當其時,民治渠少煩苦,不欲也.

豹曰:「民可以樂成,不可與慮始. 今父老子弟雖患苦我,

然百歲後期令父老子孫思我言.」 至今皆得水利,民人以給足富.

十二渠經絕馳道,到漢之立,而長吏以為十二渠橋絕馳道,相比近,不可.

欲合渠水,且至馳道合三渠為一橋.

[서문표는 곧 백성을 동원해 12개의 도랑을 파서 강의 물을 끌어서

백성들의 논에 대었다. 이로써 논에 모두 물이 대어졌다. 그 당시 백성들은

도랑을 만드는 것이 좀 번거롭고 괴롭다고 여겨서 하려 들지 않았다. 

표가 말하기를 : "백성은 이루어진 것을 즐거워할 뿐, 함께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부로와 자제들이 비록 나를 원망하나, 백세 뒤에는 부로와 자손들이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모두 이 수리(水利) 덕분에 백성들이 풍족하다.

12개의 도랑이 천자의 치도(馳道)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게 되자 지방의 장리(長吏)는 12개의 도랑의 다리가 천자의

행차하는 길을 끊으며, 또한 그것이 서로 접근해 있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랑의 물을 합치고 또한 치도에 이르러서는 세 도랑을 합쳐서

하나의 다리로 만들려고 했다.]

 

鄴民人父老不肯聽長吏,以為西門君所為也,賢君之法式不可更也.  長吏終聽置之.

故西門豹為鄴令,名聞天下,澤流後世,無絕已時,幾可謂非賢大夫哉!

傳曰:「子產治鄭,民不能欺;子賤治單父,民不忍欺;西門豹治鄴,民不敢欺.」

三子之才能誰最賢哉?辨治者當能別之.

​[그러자 업의 부로들이 장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서문표가 한 것이니

어진 분의 법식(法式)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리도 마침내 이 말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두었다. 이리하여 서문표는 업의

현령이 되어 이름을 천하에 날리고, 은택이 후세에까지 흘러서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어진 대부(大夫)라고 일컫지 않겠는가?
전하는 말에 이르기를 : "자산이 정(鄭)나라를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를 속일 수가

없었고, 자천(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리자 백성들이 차마 그를 속이지 못했으며,

서문표가 업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감히 그를 속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의 재능 가운데 누가 가장 뛰어난 것인가?

다스리는 길을 아는 자는 마땅히 이를 분별할 수 있으리라.]

 

【 각주 】

1) 초장왕(楚莊王)/ 기원전613-592년에 재위한 초나라의 왕으로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이다. 부왕인 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오른 초목왕의 아들이다.

    즉위 초 음주와 가무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자기에게 정사에 과해

    간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자 오거(伍擧)가 삼년불비, 삼년불명(三年不鳴)의

    새로 비유하여 수수께끼 식으로 간하자 비즉충천(飛則沖天), 명즉경인(鳴則驚人)

    이라고 대답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초나라의 내정을 개혁하여 정사에 힘쓴

    결과 초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정나라를 사이에 두고

    당진국과 중원의 패권을 다투다가 기원전 600년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북쪽의

    황하 남안의 필에서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당진군을 대파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전 구절의 조(趙)와 본 구절의 한(韓)과 위(魏) 세 나라는 전국시대의 나라들이다.

    기원전 453년 진양성 싸움에서 한, 위 ,조 삼가는 지백(智伯)이 이끌던 그 당시

    가장 강력했던 지가(智家)를 멸망시키고 당진국(唐晉國)을 3분하여

    기존의 섬진(陝秦), 초(楚). 제(齊), 연(燕)과 함께 전국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활약했던 초장왕과는 그 시대가

    맞지 않는다. 사마천의 착오이거나 후세에 어떤 사람이 가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2) 태뢰(太牢)/ 고대 중국에서 소, 돼지, 양 각 한 마리씩을 잡아 음식을 준비하여

    손님을 접대하거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제후들만이 행할 수 있는

    주례 중의 하나다.

3) 육축(六畜)/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육축이라 한다.

4) 태관(太官)/ : 왕의 음식을 맡는 요리사.

    無令天下久聞也(무령천하구문야) 세상에 두고두고 긴 말이 없도록 하였다.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