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民心書 5 篇

第 5 篇 이전(吏典) 육조(六條)

덕치/이두진 2024. 3. 8. 20:43

 

 牧 民 心 書   券 5  

 

 

第 5 篇     이전(吏典)  육조(六條)

 
  
 

第 1 章 속리(束吏) : 아전을 단속하는 방법. 

 

 

 束吏之本 在於律己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行.
    (속리지본 재어율기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불행. )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데 있다.  

    자기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어질 것이고,
    자기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하더라도 잘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백성은 토지로써 논밭을 삼지만, 아전들은 백성으로써 논밭을 삼는다.

백성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으로써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수확하는 일을 삼는다.  

이러한 습성이 이루어져서 당연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아니하고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허물이 없고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나무랄 수가 있는 것이

천하의 일반 이치이니, 수령의 소행이 족히 다른 사람을 신복시키지 못하면서

오직 아전 단속하기를 위주로 한다면 명령해도 반드시 행하여지지 않으며

금지해도 반드시 그쳐지지 않고 위엄이 떨치지 않을 것이며 법이 서지도 않을

것이다.  스스로는 황음(荒淫)한 짓을 하면서도 항상 말하기를

『아전들의 습속이 극악하다』하는 것은 통할 수 없는 말이다.
세속 수령들은 흔히 엄한 형벌과 무서운 매질로써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청렴하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하면서 사나움으로써 위주하면

그 폐단이 난(亂)에 이를 것이다.
충간공(忠簡公) 조정(趙鼎) 1)이 월(越)땅을 다스리면서 아전을 단속하며 백성을

무휼하는 일을 힘썼는데, 매양 말하기를 『아전을 단속치 않으면 비록 선정을

베풀어도 행하여지지 않을 것이라』하였다. 

대개 해독을 제거한 뒤에라야 백성들에게 이로운 것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고양왕 옹(高陽王雍) 2)이 상주(湘州)의 자사(刺史)로 있을 때에 말하였다.

수령 노릇하는 길이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것이니, 그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아니하여도 행하여질 것이므로 이에 쉽다는 것이요, 

그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하더라도 좇지 않을터이므로

이에 어렵다는 것이다.』[唐書에 있다]
이문절(李文節) 3)의 『연거록(燕居錄)』4)에 이르기를 『공당(公堂)에 있으면서

한가지 사사로운 일을 행하고 한가지 법을 굽힌다면 이서(吏胥)를 속여낼 수가

없을 것이요, 제 집에 있으면서 한가지 법을 행하고 한가지 물건을 받는 것도

하인의 눈을 속여낼 수가 없을 것이다』하였다.
고려의 금유(琴柔)와 옥고(玉沽)두 사람 모두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를 지냈다. 

그 군의 아전 배설(裵泄)이 교활하고 영리하여 문서를 환롱(幻弄)하니

수령이 많이들 이에 따라 정사를 처리하였다. 배설이 만년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후의 수령은 내가 모두 거느렸으나, 오직 금유와 옥고만은 내가 모셨다』.
참판 유의(柳誼)가 홍주(洪州) 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주 아전들의 습속의 간활함이 충청 우도(右道)에서 제일 심하였는데,

그가 청렴과 검소로써 스스로를 지키면서 지성으로 백성들을 사랑하니 아전들이

모두 열복(悅服)하여 회초리 하나 쓰지 않았는데도 터럭만큼도 범하는 자가 없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스스로를 규율하는 것이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임을 알게 되었다.]

 

[각주]
1) 조정(趙鼎)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원진(元鎭), 호는 득전거사(得全居士),

    충간(忠簡)은 그의 시호. 송(宋)의 남도(南渡) 후 부흥에 힘썼다.

    벼슬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동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다. 

2) 고양왕 옹(高陽王雍) : 고양왕(高陽王) 옹(雍)인지 고양 왕옹(王雍)인지 미상. 

   『신(新)·구당서(舊唐書)』의 열전(列傳)에 나타나지 않는다. 

3) 이문절(李文節) : 미상 중국에는 이씨로서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은 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中國人名大辭典)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이로 여말(麗末)·선초(鮮初)의 이행(李行)(호 騎牛子)이

    있을 뿐인데, 현행하는 『기우집(騎牛集)』에는 「연거록(燕居錄)」이 들어있지 않다.
4)「연거록(燕居錄)」 : 공무(公務)를 떠나 사사로이 거처할 때의 기록을 말한다. 


 

★ 齊之以禮 接之有恩 然後束之以法. 若陵轢虐使顚倒詭遇者 不受束也.
     (제지이예 접지유은 연후속지이법 약릉력학사전도궤우자 불수속야. )
     예법(禮)을 갖추고 은혜로 대접한 뒤에 법으로써 단속하여야 한다.

     만약 업신여기고 학대하며 짓밟거나 함부로 다루며 사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 속임수를 쓴다면 단속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조빈(曹彬) 1)은 아전들을 이름부르지 않았으며, 아전들이 무슨 일을 아뢸 때마다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서야 접견하였다. 오암(娛菴) 박지경(朴知警) 2)이 이르기를

『선친(先親)이 수령이 되었을 때에 호장(戶長)이나 이방(吏房)이 죄가 있으면

먼저 그 직임을 바꾼 뒤에라야 벌을 주었다』고 하니

이것이 염치를 장려하는 길이었다. 〈冶谷三官記〉
초하루· 보름의 점고(點考) 이외에 뜻밖에 아무 때에나 점고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세속에 이르기를, 아전들이 향촌으로 나가서 백성들을 침학하기 때문에

아무 때에나 점고함으로써 그들이 임의로 드나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전들이 악폐를 자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자신이 직접 나가지 않고 

그 자제(子弟)들을 보내어서도 또한 족히 백성들을 침학할 수 있으니 어찌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밤중에 불을 밝혀놓고 장가(張哥)를 부르고 이가(李哥)를 부르게 되면

정령(政令)이 갈팡질팡하여 도리어 위엄을 손상하기 마련이다. 

무릇 현재에 직임을 띤 자는 으례 먼 곳에는 나아가지 않는 법이요,

오직 직임이 없이 한가한 자가 때로 이러한 악폐를 자행하는 것이다.

관아(官衙)에 혹 대단치 않은 잡무가 있어 불러 시키더라도 즉시 들어오지

않는 자는 그가 향촌으로 나갔음을 알 수 있으니 곧 벌을 줄 것이다.

야단스럽게 형적을 드러내지 말고 스스로 단속하도록 할 것이요, 

아무 때나 점고하는 짓은 할 것이 아니다. 관노 등속은 달리 점고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러나 이때에도 아무 이름이나 뽑아서 불러보아도 역시 족히

경계함이 되는 것이요, 반드시 명부에 따라 모조리 불러낼 것은 없다. 

아전들의 곡요(曲腰) 3)는 그 시초를 알 수가 없다. 지금 중앙관서의 모든 아전들은

머리만 숙일 뿐이요 곡요를 행하지는 아니하는데 어찌 홀로 향리의 경우에만

그러는가 하고 내가 일찌기 의심을 품어왔더니, 남녘땅에 와서 거처해 보고서야

곡요의 법이 원래 옛사람의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어서 변개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전이란 것의 됨됨이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눈에 관장(官長)이 없고

턱으로 사민(士民)을 부리게 되니, 만약 곡요의 법이 없다면 그 스스로 처신하는

바가 더더욱 존대해져서 제압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에 돌을 매달아서

땅에 닿도록 드리우게 하는 것은 모두 해괴한 짓이니 군자의 할 바가 아니다. 

혹 교만 방자한 자가 있거든 천천히 그 죄[曲腰하지 아니한 罪]를 따져서 뜰 위에

엎드리게 하였다가 시간이 지나거든 명하여 물러가게 함이 무방할 것이다.
아전으로서 그 부모의 질병이나 의외의 재액을 만난 자가 있거든 수령이 또한

어루만져서 구원해주되, 상사(喪事)에는 부의(賻儀)를 보내고 경사(慶事)에는

축의(祝儀)를 보낼 것이다. 그러한 뒤에 그 국고를 훔치고 백성에게서 빼앗아내는

죄를 막고 징계하면 아전으로서 법을 벗어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아전은 자벌레처럼 움츠리고 개미처럼 기어다니는 것이지만, 응대에는 물 흐르듯

기민하다. 수령이 마치 벌레처럼 내려다보고 때로는 작은 재주와 얕은 꾀로써

이리저리 마음대로 조종하고는 스스로 잡았다 놓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듯

생각하지만, 그러나 아전의 무리가 마치 여관의 주인처럼 나그네 겪어 보기에 

이력이 나서 성위(誠僞)와 허실(虛實)을 환히 눈에 익혀두고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관정(官庭)에 엎드려서는 서로 더불어 킥킥거리며 몰래 웃다가 관문을 나서기만

하면 만가지로 비웃는 줄을 수령이 알지 못한다. 

장차 무슨 도움이 있을 것인가. 다만 마땅히 지성으로 대하여 알거든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거든 모른다고 하며, 죄가 있으면 벌주고 죄가 없으면 용서하여

한결같이 떳떳한 이치를 좇을 일이요 술수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만 

이에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각주]
1) 조빈(曹彬) : 중국 송나라 초기의 장군. 송(宋)이 중국을 통일함에 크게 공을 세워 

    당시 양장제일(良將第一)이라 불리었다. 

2) 박지경(朴知警) : 광해군(光海君) 때의 성균관 생원으로서 5현(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극력주장하였다.
3) 곡요(曲腰) : 이속(吏屬)이 관장(官長) 앞에서 바로 서지 못하고 허리를 굽혀

    응대하던 제도. 


  

★ 居上不寬 聖人攸誡, 寬而不弛 仁而不懦 亦無所廢事矣.
     (거상불관 성인유계 관이불이  인이불나 역무소폐사의. )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못한 것을 성인(聖人)이 경계한 바이니,  
     너그러우면서도 게으르지 않으며 어질면서도 나약하지 않으면

     또한 일을 그르치는 않을 것이다.


[양귀산이 일렀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랫사람을 부리되 너그러움으로써 하라」

하였지만, 그러나 모든 일을 단속하지 않고서 오직 너그럽기만 힘쓴다면

아전들이 문서를 꾸미고 법을 농간하여 관부의 질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권한이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있도록 하여, 조종하며 통제하는 모든 일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도록 하면 크게 관대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
주자가 말하였다. 『대저 벼슬살이할 때에는 모름지기 스스로는 항상 한가하고

아전들은 항상 바쁘도록 하여야만 한다. 만약 스스로 문서 속에 파묻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으면 아전들이 곧 작폐를 할 것이다. 』〈五子近思錄〉
또 말하였다. 『수령 노릇을 하되, 만약 아전이 공무를 지체시키면서 백성으로부터

토색하는 것이 있으면 그 폐단이 말할 수 없이 될 것이니,

모름지기 기한을 엄히 세워서 반드시 기한 내에 처리하도록 하면 

그 기일이 이르르매 자연히 토색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
도남림(陶枏林)이 이르기를 『집에 있으면서 부녀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게 되면

친구들이 반드시 빈축하는 기색이 많을 것이요, 벼슬살이하면서 아전들의 기쁘고

즐거워하는 바 되면 백성이 반드시 원망하는 말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재척언(思齋摭言)』1)에 일렀다. 『이세정(李世靖) 2)이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한때의 재상(宰相)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고

우리 형제도 역시 그의 문인(門人)이다. 그러나 그는 행정의 능력이 없었다.

그가 나아가 청양현(靑陽縣)을 다스릴 때에, 최숙생(崔淑生) 3)이 새로 관찰사로

제수되니, 한때의 문인들이 모두 청양 현감을 부탁해서 말하기를, 

「우리 선생은 학문이 높고 지조가 맑으니, 삼가 망녕되이 폄하하지 말라」고 하였다. 

최숙생이 선선히 응낙하고 가서는 맨 처음의 고과(考課)에서 파출(罷黜)시켰는데,

그가 돌아오자 여러 재상들이 가서 보고는 「호서 일대에 어찌 교활한 수령이 없어서

최과정졸(催科政拙)1704)에 있어 우리 선생을 하고(下考)에 두었단 말인가」 하니,

최숙생이 말하기를, 「다른 고을의 수령은 비록 교활하다고 하나 다만 한 사람의

도적일 뿐이니, 백성들이 오히려 견딜 수 있지만, 청양 현감은 비록 청렴하되

여섯 도적이  아래에 있으니 백성들이 견딜 수 없는 바라」하였다. 』

[여섯 도적이란 六房의 아전을 이른다]

이로써 살피건대 비록 학문이 크고 넓다 하더라도 아전을 단속할 줄 모르는 자는

백성의 수령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각주]
1)『사재척언(思齋撫言)』: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저술. 무언(撫言)은 쓸 만한

    말을 주워모았다는 뜻이니, 일상생활의 귀감이 될 만한 일들을 써놓은 것이다.

    상(上)·하(下) 2편(篇)으로 되어 있다.

    김정국(金正國)은 형인 김안국(金安國)과 함께 성종∼중종조(中宗朝)의 문신이며

    소위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 

2) 이세정(李世靖) : 성종(成宗) 때의 문신(文臣). 

3) 최숙생(崔淑生) : 세조 3∼중종 15(1457∼1520). 자는 자진(子眞). 호는 충재(盅齋). 

    우찬성(右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4) 최과정졸(催科政拙) : 백성에 대한 과렴(科斂)을 독촉하는 정사(政事)가

    부진하다는뜻이니, 관원(官員)의 고과(考課)에 쓰는 말이다. 


  

★  誘之掖之 敎之誨之 彼亦人性 未有不格 威不可先施矣.
     (유지액지 교지회지 피역인성 미유불격 위불가선시의. )
     이끌어 주고 도와 주며 가르치고 깨우쳐주면 아전들 역시 사람의 성품을

     지녔으므로 고치지 않을 리가 없으니 위엄을 먼저 펼쳐서는 안 된다.


[한연수(韓延壽)가 영천태수로 있으면서 아전들을 대함에 은혜를 매우 두터이하고

약속을 분명히 하였다. 아전으로서 혹 속이고 배신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스스로

깊이 자책하면서, 어찌 그가 배신하기를 이같이 하는가 하니, 아전들이 이를 듣고

스스로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 동군에 있기 3년에 명령은 행하고 금령은

지켜졌으며 옥사 다스릴 일이 크게 줄어들어 정적(政績)이 천하에 으뜸이었다.
위패(魏覇) 1)가 고을을 다스리면서 아전이 허물이 있으면 먼저 훈계하고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이에 파면하며, 혹 다른 아전의 훌륭한 점을 들어 칭찬하여 분발하게

하니, 아전들이 모두 부끄러움을 알게되고 따라서 송사가 그쳐지게 되었다.
종리의(鍾離意) 2)가 하구(瑕丘)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어떤 아전이 도적질을

하거늘 차마 형벌을 주지 못하고 그 직임을 파하여 내쫓았더니,

그 아전의 아비가 말하기를 『이는 의(義)로써 사람을 벌주는 분이다』 하고 

이에 자식으로 하여금 약을 먹고 죽게 하였다.
당(唐)나라 낙양령(洛陽令) 양덕간(楊德幹) 3)이 아전을 곤장질해 죽여서

위명(威名)을 세웠는데, 가돈실(賈敦實) 4)이 그에게 이르기를

『정사(政事)가 사람을 기르는 데 뜻이 있으니, 의(義)가 모름지기 존무(存撫)해야

할 것이어늘, 생명을 해치는 것이 지나치게 많으니 정사가 비록 능하다 하더라도

별로 귀히 여길 바가 못된다』 하였다. 이때문에 양덕간이 또한 저으기 누그러졌다.
당나라 허어사(許圉師) 5)가 양주(襄州)를 다스릴 때에, 고을안에 뇌물 받은 자가

있거늘 허어사가 청백잠(淸白箴) 6)을 내렸더니, 그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다시 청렴한 선비가 되었다.
진희량(陳希亮)이 우도(雩都)를 맡아 다스리게 되었을 때에 늙은 아전 증전(曾腆)이

법을 무시하여 옥(獄)을 팔며 그가 나이 어리다고 하여 만만히 대하였다.

그가 일을 보는 날에 맨먼저 증전의 큰 죄를 적발해내니, 증전이 머리를 조아리고

피를 흘리면서 스스로 새로운 사람 되기를 애원하거늘, 그가 계칙하여 놓아주었다.
고려 정운경(鄭云敬)이 안동 판관(安東判官)이 되었더니, 고을의 아전 권원(權援)이

일찌기 정운경과 더불어 향학(鄕學)에서 함께 공부한지라,

이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뵙기를 청하였다. 정운경이 불러들여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말하였다. 『지금 너와 더불어 술을 마심은 옛정을 잊지 않아서이지만,

내일 법을 범한다면 아마도 판관이 너를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

 

[각주]
1) 위패(魏覇) : 중국 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교경(喬卿). 효렴과(孝廉科)로

    천거되어 거록태수를 지내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치사(致仕)했다. 

2) 종리의(鍾離意) : 중국 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자아(子阿).

    효렴과(孝廉科)로 뽑혀 상서(尙書)를 지냈다. 청렴으로 유명하였다. 

3) 양덕간(楊德幹) : 택(澤)·재(齋)·변(汴)·상(相)의 4주(州) 척사(刺史)를 지내면서 

    가혹한 위엄을 부리기로 유명하였다.

    후에 아들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4) 가돈실(賈敦實) : 중국 당(唐)나라 사람 성품이 관혜(寬惠)하여 칭송을 들었으며,

    회주자사를 지냈다. 

5) 허어사(許圉師) : 당나라 사람. 관용 청백하였으며 건(虔)·상(相) 2주자사(州刺史),

    호부상서를 지냈다. 

6) 청백잠(淸白箴) : 청백(淸白)을 권장하는 잠언(箴言). 

 

★ 誘之不牖 敎之不悛 怙終欺詐 爲元惡大奸者 刑以臨之.
     (유지불유 교지불전 호종기사 위원악대간자 형이임지. )
     타일러도 깨우치지 않고 가르쳐도 고치지 않으며 예전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속임수만 일삼는 간악한 자는 형벌로써 다스려야 할 것이다.

[『사기(史記)』 혹리전(酷吏傳) 1)에 이르기를 『영성(甯成) 2)이 웃사람이 되어

아랫사람 단속하기를 마치 젖은 섶을 묶듯 한다』하였다.

위소(韋昭) 3)가 이르기를 죈다는 뜻이라 하였다
유공작(柳公綽)이 산동(山東)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어 등현(鄧縣)을 순찰할 때에

장오(贓汚)를 범한 자와 문서를 거짓 꾸민 두 아전이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유공작이 반드시 장오 범한 자를 죽일 것이라 하였더니, 유공작이 판결하기를

『법을 범하면 그래도 법이 있는 바이지만 법을 어지럽히면 법이 없어지고 만다』고

하여 마침내 문서를 거짓 꾸민 자를 죽였다.
당나라 진원현(眞源縣)에 화남금(華南金)이란 세력 있는 아전이 있어 방자하였는데

온 고을이 말하기를 『화남금은 입이요, 사또는 손이라』4)하였다.

장순(張巡)이 현령으로 와서는 그 자를 즉시 죽여버렸다.
송(宋)나라 역전(酈戩)이 개봉부(開封府)를 맡아 다스릴 때에,

부(府)의 아전 풍사원(馮士元)이란 자가 권귀(權貴)들과 결탁하여 농간질과

장오(贓汚)를 자행하매 권세가 많이 풍사원에게서 나오게 되니, 

수도(首都) 사람들이<임시 서울> 5)이라고 불렀다. 역전이 풍사원을 잡아들여

죄안이 이루어지매 섬으로 귀양을 보내니, 도하(都下)가 숙연해지게 되었다.
황종(況鐘) 6)이 선덕(宣德) 7) 연간에 소주(蘇州)를 맡아 다스렸다.

이 고을이 일 많고 까다로와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이름이 난지라 마침내 황종을

발탁하여 새서(璽書) 8)를 주어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고 역마를 달려서

임지에 가도록 하였다. 황종이 처음 일을 볼 때에 나무처럼 뻣뻣하고 어리석은

듯하여 아전이 문서를 가져오면 전혀 그 당부를 묻지 아니하고 문득 옳다고

재결하되, 폐단이 되는 점은 그때마다 기억해두었다. 

통판(通判) 조침(趙忱)이 방자하고 오만하여 황종을 업수이 여기되 황종은 역시

그에 따랐을 뿐 상관하지 아니하였다. 이미 한 달이 지난 어느 아침 좌우에게

명하여 향과 촛불과 책상을 갖추게 하고 아울러 예생(禮生) 9)을 불러들이게 하니

요속(僚屬) 이하까지 다 모였다. 황종이 말하기를 『내가 조정의 칙명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선포하지 않은지라 이제 선포하겠다』고 하였다.

이윽고 선포하는 가운데에 요속의 불법이 있거든 편의대로 잡아 문죄하라는

말이 있자, 이에 여러 아전들이 모두 놀라게 되었다. 선포의 예가 끝나자

마루 아래에 내려가 앉아서  향리(鄕里)의 노인들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고을 사람들이 많이 교활하여 번번이 선한 사람을 모함한다고 하니,

내가 선한 이를 드러내고 악한자를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

비록 염라노자(閻羅老子) 10)와 같은 재능은 없지만 스스로 나누어 처리하리니,

이제 부탁하건대 여러분들이 속히 선호(善戶)와 악호(惡戶)로 나누어 보고하라. 

선한 자는 내가 우대하되 심지어는 손님으로 모셔와서 향음례를 행할 것이요,

악한 자는 내 또한 백성을 위해서 죽일 것이다. 내가 선·악의 두 가지 문부를

갖추어 두고 여러분들을 기다리겠다. 』 또 고을의 아전들을 모두 불러 나오게 하여

큰 소리로 『어느 날의 무슨 일은 너 아무개가 이와 같이 했으니 응당 뇌물 얼마를

도적질한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또 아무 날에는 아무개가 이러이러한 일을

했겠다』고 하였다. 뭇아전들이 놀라 굴복하여 감히 변명하지 못하거늘,

황종이 명하여 끌어내게 하고 말하기를, 『나는 번거로움을 오래 참지 못한다』 하고

명하여 그 자의 옷을 벗기게 하고 힘센 하인 네 사람으로 하여금 한 아전을 들어서

공중에 던져올려 떨어져 죽도록 하였다. 

하인들이 처음에는 조금만 던지자 황종이 크게 성내어 말하였다.

『내가 백성을 위해서 도적을 죽이거늘 너희 개나 쥐 같은 놈들이 나로 하여금

잔혹한 위엄을 보이도록 하느냐. 높이 던져올려서 그 자리에서 죽게 하라.

죽지 않으면  너희 놈들을 죽이겠다. 』 하인들이 두려워서 명령대로 하여 여섯 명을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다. 도인(屠人) 11)들에게 명하여 죽은 자의 머리털을 잡고

끌어가서 저자에다 늘어놓게 하고, 다시 관속가운데에서 탐욕하고

포학한 자와 어리석고 나약한 자 10여 명을 내쫓았다.

이로 말미암아 아전과 백성이 놀라 떨고 마음을 고쳐서 명령을 삼가 받들게 되니,

소주 사람들이 일컬기를 <황청천(況靑天)>12)이라 하였다. 〈皇明通紀 13)〉
살펴보건대 악한 자를 징계하고 교활한 자를 죽임에 스스로 떳떳한 형벌이 있으니,

하필 던져서 죽이는 것으로 쾌하다고 할 것인가.

혹독한 수령이 참혹하게 다스린다고 하여 민심을 신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고려 권단 14)이 경주(慶州)의 유수(留守)로 있을 적에 재정을 맡은 아전으로서

백성의 조세를 훔친 자가 있거늘, 그 머리를 관정에서 깨쳐버리니 보는 자들이

오금이 떨리었다. 충렬왕 초에 불리어 전리총랑(典理摠郎) 15)에 임명되었다.
고려 전원균 16)이 합천군을 맡아 다스리면서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다. 

그가 가난한 백성을 무휼함에는 가련하고 측은한 정상을 구부려 보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으되, 간활한 아전을 치죄함에 있어서는 캐어내고 다스림이

매우 엄하여 간교하고 숨은 것을 찾아내기를 귀신같이 하니 온 고을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옥사(獄事)를 판결함에는 더욱 자세히 살피니, 

비록 몽둥이나 회초리를 맞은 자라도 모두 『전(田) 사또가 판결한 것이라』 하였다.
이정영(李正英) 17)이 가산 현감(嘉山縣監)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고을에 간활한 아전이 있어 감영(監營)에 의지하여 수령을 능멸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되 볼기 치고 매질하기까지 하며 사사로이 궁민들을 협박하였다. 

이정영이 그 죄를 다스리고 그 빼앗은 것을 되돌려주게 하자 아전이 또 꾀를 내어서

원망과 해독을 부렸다. 그가 정상을 알아내고 감사에게 말하여 그 죄를 추궁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었으나 도중에서 그 허락이 고쳐졌다. 그가 마침내 그 아전을

곤장으로 쳐 죽이자 가난한 백성들이 기뻐서 노래부르고 춤추게 되었다.
이영휘(李永輝)가 임천 군수로 있을 때에 아전들이 사나와서 많이 간활하고

침탈 포학하였다. 그가 그 가운데 우심한 자를 적발하여 다스리고 법조문을

엄히 하여 서로 사찰(伺察)케 하여 촌리나 절이나 주막에 나가지 못하도록 금하니,

이 때문에 민간이 편안하게 되었다. 아랫사람 단속하는 것이 이미 엄해지고

아전들이 다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자 이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하여,

고을에 두 아전이 자못 염치와 긍지를 지니고 효도와 우애로 이웃간에 이름이

난 자가 있거늘, 그가 불러서 술과 밥을 내려주면서, 『너희가 이러한 조행이 있으니

응당 충(忠)을 효(孝)에서 구할 만하다.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맡은 바 일을 다하고

관장을 속이지 말며 죄벌을 지어서 너희 부모를 위태롭게 하지 말 것이다』 하니,

두 사람이 감격하여 스스로 다짐하였다. 무릇 맡은 바 일을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니

아전들 역시 스스로 분발하고 힘쓰게 되었다. 백성들이 상습으로 아전들을

대접하는 경우에도 아전이 받지 않으며 몰래 그 집에다 갖다 놓아도 아전이 알고는

마침내 되돌려보내니, 대개 뇌물먹이는 풍습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민진량(閔晋亮) 18)이 파주 목사(坡州牧使)가 되자 고을에 간활한 아전이 있어

그의 강명(剛明)함을 꺼려하여 그 무리들과 약속하고 일시적으로 달아나 흩어져서

하여금 그가 갈려가도록 하려 하였다. 그가 응연(凝然)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촌 백성을 불러서 부리면서, 『달아난 놈들의 땅을 장차 관(官)에서 수화하여

너희를 고용한 비용을 삼으리라』 하였다. 열흘이 못 되어 흩어졌던 자들이 차차

도로 모여들거늘 그도 역시 묻지 아니하고 안정되게 하였다.
판서 이노익(李魯益) 19)이 전라 감사가 되었는데 감영의 아전 최치봉이란 자가

간활 악독한 이속(吏屬)들의 괴수였다. 전라도 53읍에 읍마다 반드시 두셋 간활한

아전이 있어 모두가 최치봉과 결탁하여 믿고 맹주(盟主)로 삼고 지냈다.

최치봉이 해마다 돈 수십만냥으로 각 읍의 간활한 아전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창고의 곡식을 환롱(幻弄)하여 팔아 돈으로 바꾸어 고리대의 밑천을 삼으니,

만민이 그 해독을 입었다. 감사가 아전·군교 들을 보내어 각 읍 수령의 잘잘못을

탐문하게 하면 반드시 먼저 최치봉의 입김을 받아나가며, 그 돌아와서도 반드시

탐문해 적어온 보고서를 먼저 최치봉에게 보이니, 수령으로서 청렴 근실하여

법을 지키는 자는 모두 몰래 중상하고, 탐학 비루하며 불법한 자와 간악한 향임과

교활한 아전으로서 보고서 속에 들어 있는 자는 최치봉이 모두 빼내어 주되

그 기록된 글을 떼내어서 본인에게 보내어 자기의 위덕을 세우니,

온 도가 눈을 흘겨온 지가 오래었다. 이 판서가 부임한 지 10여 일에 문득 그를

잡아들여 말하되 『너의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하고 곤장을 쳤으나

오히려 죽지 않거늘, 3·4고을로 옮겨 가두다가 고창(高敞)에 이르러서는

물고(物故)를 내었다는 보고를 올리도록 재촉하니, 최치봉이 다음날 오시까지만

목숨을 붙여주기를 빌었으나 현감이 듣지 않아서 드디어 고창에서 죽었다.

[대개 崔致鳳이 宰相들과 결탁해 있은지라 이에 이르러 2·3 자식을 나누어 보내어

살아나기를 도모하였으니, 만약 다음날 午時가 되면 거의 살아날 길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때에 내가 강진(康津)에 있었는데, 간활한 아전 여럿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숨을 죽이고 마음을 태워서 그 때문에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더니 

여러 달 뒤에야 저으기 안심하는 것을 보았다.

악의 괴수를 죽이는 것의 영향이 이와 같은 것이다.]


[각주]
1) 혹리전(酷吏傳) : 가혹하고 위엄있는 지방 관원들의 전기(傳記)를 모은 것이니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권 122가 혹리열전(酷吏列傳)으로 되어 있다. 

2) 영성(甯成) : 중국 한나라 때 사람. 벼슬은 내사에 이르렀고, 환향(還鄕)하여

    영산(營産)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3) 위소(韋昭) : 중국 3국시대 오나라 학자. 자는 홍사(弘嗣). 벼슬이 시중에 이르고, 

    『효경(孝經)』 『논어(論語)』 『국어(國語)』 등을 주석(注釋)하였다. 

4) 원문에 『남금구(南金口) 명부수(明府手)』라 하였다. 명부(明府)란 태수(太守)·

    현령(縣令)을 의미한다. 이말은 현령이 거두어들인 것을 아전인 화남금이

    삼키고 있다는 것이요, 현령이 아전의 부림을 당한다는 뜻이다. 

5) 원문에「입지경조(立地京兆)」라 하였다. 입지란 즉각적(卽刻的)이란 뜻이요, 

    경조(京兆)는 수도(首都)를 말한다. 이 경우는 권력의 본산인 수도가

    일개 아전의 몸에 모여져 있다는 뜻이다. 

6) 황종(況鍾) : 중국 명나라 사람. 자는 백률. 예부낭중을 거쳐 소주의 지부로

    있으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7) 선덕(宣德) : 중국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1426∼1435. 

8) 새서(璽書) : 어보(御寶)를 찍은 특명서(特命書). 

9) 예생(禮生) : 제사(祭祀)·연향(宴享) 때의 예의(禮儀)를 찬(贊)하는 자. 

10) 염라노자(閻羅老子) : 강의엄정(剛毅嚴正)한 사람을 지칭함이니

      곧 송(宋)나라 포증(包拯)을 가리킨다. 혹은 염라포로(閻羅包老)라고도 한다. 

11) 도인(屠人) : 백정(白丁)을 말한다. 

12) 황청천(況靑天) : 청천과 같이 강명(剛明)하여 속일 수 없는 황종(況鍾)이란 뜻. 

13) 『황명통기(皇明通紀)』 : 중국 명(明)나라 진건(陳建)이 지은 사서(史書). 

     서명(書名)과는 달리 중국 역대의 흥망성패를 다루었다. 

14) 권단 : 고종 15∼충선왕 3(1228∼1311). 자는 회지(晦之) 또는 몽암(夢巖). 

      문신(文臣)으로서 전리총랑(典理摠郎)·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지냈다. 

15) 전리총랑(典理摠郎) : 전리사(典理司)는 원(元)의 간섭하에서

      고려의 이부(吏部)와 예부(禮部)가 합쳐진 기관. 총랑(摠郎)은 정4품직(品職). 

16) 전원균(田元均) : 인종 22∼고종 5(1144∼1218). 자는 진정(眞精). 

      문신으로서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를 지냄.

17) 이정영(李正英) : 광해군 8∼숙종 12(1616∼1686).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 문신(文臣)으로서 이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다

18) 민진량(閔晉亮) : 현종(顯宗) 때의 문신(文臣). 태안군수(泰安郡守),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지냈다. 

19) 이노익(李魯益) : 영조 43∼순조 21(1767∼1821). 자는 겸수(謙叟),

      호는 탄초(灘樵). 문신(文臣)으로서 대사헌(大司憲)·예조판서를 지냈다. 


  

★ 元惡大奸須於布政司外 立碑鐫名 永勿復屬.
     (원악대간수어포정사외 입비전명 영물복속. )
     원악 대간(元惡大奸) 1)은 모름지기 포정사(布政司)  2)밖에다 비(碑)를 세우고

     이름을 새겨서 다시는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노환(盧奐) 3)이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아서 특별한 치적을 세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기를 신과 같이 하였다. 무릇 간악한 자들을 다스림에는 먼저 그 죄를

다스리고 또 그 범한 바를 돌에 새겨 문에 세우며, 다시 범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사형수의 명부에 올려두고 그 비를 일컬어 기악비(紀惡碑)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기악비라는 것은 옛 제왕의 법이었다.

진운씨(縉雲氏) 4)가 못난 자식이 있어 음식을 탐하고 재물을 욕심내더니

천하의 백성이 그를 일컬어 도철(饕餮)이라 하였다.

은나라의 술두루미와 주(周)나라의 솥 5)에 모두 도철의 형상을 새겼는데 머리는

있으되 몸통이 없으니 형벌의 죽임을 상징하고 경계한다는 뜻을 붙인 것이다.

이것이 원래 악을 명심케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산해경(山海經) 6)에는 또 도철과 도올(檮杌) 7)로써 모두 악수(惡獸)의

이름을 삼게 된 고로 이 뜻이 드디어 어두워지게 되었다. 

근자에 보건대, 어사나 관찰사가 때로 원악향리(元惡鄕吏)를 잡아서 형벌을 주고

유배를 시킴이 엄하지 않음이 아니로되 향리들의 권력이 평소에 컸던지라

잠깐 동안에 편안히 제 집에 거할 수 있게 되고 어느 사이에 드디어 제 직임을 도로

맡게 되어 악행을 자행함이 전일과 같아도 달리 누가 따져보는 이가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어사나 관찰사가 이미 향리의 죄를 적발하거든 이어

포정문(布政門) 밖에다 돌에 새겨 그 악행을 기록해 놓는다면, 이 돌이 삭아지기

전에는 다시 직임을 맡을 수가 없을 터인즉반드시 그 악행을 징계할 수 있을 짓이다 

사대부가 장오(贓汚)의 죄에 빠지면 때로 종신토록 서용되지 못하게 되지만,

원악향리의 경우에는 잠깐 사이에 벗어나서 법을 얕보기가 이와 같으니,

역시 소루하지 아니한가.]


[각주]
1) 원악 대간(元惡大奸) : 악독하고 간활한 자의 우두머리. 

2) 포정사(布政司) : 정사를 펴는 기관이란 뜻이니, 감사(監司)의 선화당(宣化堂)을

    중국식으로 아화(雅化)시켜서 부른 것이나 이 경우는 수령(守令)의 정당(政堂)을

    가리키고 있다. 

3) 노환(盧奐) : 중국 당(唐)나라 관원으로서 청백(淸白)하였다.

    남해태수를 지내고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4) 진운씨(縉雲氏) : 중국 상고(上古) 황제(黃帝) 때의 관직명(官職名). 

5) 은나라의 술두루미와 주나라의 솥[殷彛周鼎] : 은(殷)나라 술두루미와 주(周)나라

    솥은 모두 청동(靑銅)으로 된 대표적 예기(禮器)이니, 국보(國寶)로 존숭되었다. 

6)『산해경(山海經)』 : 우왕(禹王) 곡은 백익(伯益)이 지었다는 책명(冊名). 18권. 

    산천(山川)·초목(草木)·조수(鳥獸)의 기담(奇談)을 적었다. 

7) 도올(檮杌) : 중국 고대(古代) 전설상의 악수(惡獸)의 이름.

    이 짐승의 악행을 귀감으로 삼아 현실의 처신에 참고가 되게 한다는 뜻에서

    초(楚)나라 사기(史記)의 이름을 도올(檮杌)로 지칭했다고 한다. 


  

★ 牧之所好 吏無不迎合 知我好財 必誘之以利 一爲所誘 則興之同陷矣.
     (목지소호 이무불영합 지아호재 필유지이리 일위소유 즉흥지동함의. ) 
     수령의 기호에 비위를 맞추지 않는 아전은 없으니,

     내가 재물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 반드시 이(利)로써 유혹할 것이니,

     한번 유혹에 넘어간다면 이는 그들과 함께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수령이 처음에 와서는 그 호령을 발하고 정사를 베풂이 볼 만한 것이 있으되,

이미 부임한 지 몇 달만 지나면 아전의 꾐에 빠진 바 되어 혀를 구부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니, 썩은 쥐도 웃게 되는 것이다.
여씨의 『동몽훈(童蒙訓)』에 말하였다. 『젊은이들이 겨우 벼슬자리에 앉게 되면

많이들 교활한 아전의 먹이가 되어 스스로 살피지 못하게 되는데, 자기가 얻는 바는

지극히 적은데도 한 임기를 지나는 사이에 다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대저 벼슬살면서 이득을 탐낸다면 자기의 얻는 바는 적은데 아전의 도적질하는

바는 적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중한 벌을 받게 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수령이 재(災)를 도적질하는 것이 10결(結)이면故意가 아닌 災殃을 만났을 때

稅를 감면해주는 것을 일러서 災라 한다 아전의 1천결 도적질함을 금할 수 없으며,

수령이 1결을 방납(防納)하면餘結에서 徵米하는 것이다.

아전의 1백결을 막을 수 없고, 수령이 1백석(石)을 번곡(翻穀)하면 아전의 1만석을

금할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성질에 편벽됨이 있으면 아전이 이를 엿보아서 그 편벽된 곳을 따라 충동하여

저의 농간질을 피우게 되니, 이에 그 술수에 떨어지는 것이다.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고 응대하기를 물흐르듯 막힘없이 하는 것은 

수령이 아전의 술수에 떨어지는 까닭이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문신은 젊어서 시부(詩賦)를 익히고 무신은 젊어서 활쏘기를

익히니, 이 밖에 배운 바는 마조강패(馬弔江牌) 놀음이나 기생을 끼고 술마시는

일뿐이다. 그중에서도 나은 자는 구궁팔문(九宮八門) 1)의 이치와

하도낙서(河圖洛書) 2)의 명수(命數)를 공부하지만, 이 몇 가지로는 인간의

만 가지 일에 아무것에도 소용됨이 없다. 오직 활쏘기는 실제적인 일이라 하지만

이 또 한 행정 실무와는 상관이 없다. 하루 아침에 천리나 집을 떠나가서

올연(兀然)히 뭇 아전과 만백성 위에 홀로 앉아 평생 꿈에도 못본 일을 맡게 되니,

일마다 몽매함이 당연한 이치다. 이에 수령이 밝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기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여 일단 호령을 발하고 정사를 베풂에 있어서

모두 곡절을 묻지 아니하고 손 가는 대로 결재하여 처리하기를 물 흐르듯

쉬이 하면서 스스로 널리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듯 자처하니,

이것이 수령이 스스로 술수에 빠지는 장본이다. 

무릇 한 가지 명령, 한 가지 패지(牌旨) 3)를 내릴 때에도 마땅히 수리(首吏)와

해당 아전에 대해서 그 일의 근본을 캐어보고 지엽을 밝혀내어 밑바닥까지

궁구하여 스스로 마음이 환해진 뒤에야 이에 결재를 한다면 수십일이 지나지

아니하여 사무에 밝아져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읍내에 살면서 듣기로 새로 온 수령이 까다롭고 일의 근본을 캐어

묻는 경우에는 노희한 아전들이 의논하기를『그 징조가 고달플 것 같다』하지만,

응대하기를 물 흐르듯 쉽사리 하는 경우에는 서로 더불어 웃으면서

『그 징조를 알 만하다』고 하니, 아전을 단속하는 요체가 진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각주]
1) 구궁팔문(九宮八門) : 구궁(九宮)은 역산(曆算)의 9분야, 즉 태일(太一).

    섭제(攝提)·헌원(軒轅)·초요(招搖)· 천부(天符)·청룡(靑龍)·함지(咸池)·

    태음(太陰)·천일(天一). 팔문(八門)은 술수가(術數家)의 말이니 휴(休)·생(生)·

    상(傷)·두(杜)·사(死)·경(景)·경(驚)·개(開)로서 휴(休)·생(生)·개(開)의 3문(門)은

    길하고 여타는 흉하다는 것이다. 

2) 하도낙서(河圖洛書) : 하도(河圖)는 중국 상고 복희(伏羲) 때 황하(黃河)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나타났다는 도형(圖形). 역괘(易卦)의 원리가 되었다고 함.

    낙서(洛書)는 하(夏)의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씌어져 있었다는 글로서,

    홍범(洪範)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임.
3) 패지(牌旨) : 지시서(指示書). 


  

★ 性有偏辟 吏則窺之 因以激之 以濟其奸 於是乎墮陷矣.
     (성유편벽 이즉규지 인이격지 이제기간 어시호타함의. )
     수령의 성품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아전들은 그 틈을 엿보아 이로 인해

     바로 격동하여 그 간계를 이루게 되니 그의 술책에 빠지게 된다.

 

[포증(包拯)은 경조윤으로 일하는 동안 명찰(明察)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백성들 중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어 곤장을 맞게 되었는데, 아전이 뇌물을 받으며

약속하기를, '윤(尹)께서는 반드시 나를 시켜 네게 곤장치게 하실 것이니 내가 힘껏

때리는 척하면 너는 그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자기 변명만 해라.'라고 했다.

이윽고 포증이 죄인을 끌어내어 문책하매 죄인은 아전이 시킨 대로만 했다.

그러나 아전은 짐짓 죄인을 꾸짖으며,  '잔말 말고 곤장이나 받을 일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했다. 그러자 포증은 아전이 권세를 팔아먹는다 하여 아전을

곤장 치고 죄인은 너그러이 풀어 주었다. 포증은 그 아전이 죄수에게 매수되어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이렇듯 소인의 간계는 진실로 막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소위 병법(兵法)에 있어 반간(反間)이라는 것이다. 빼앗고자 할 때에는

주기를 청하고, 가두고자 할 때에는 풀어 기를 청하고, 서쪽으로 차지하고자 하면

동쪽을 치고, 좌측을 원하면 우측을 끌어 당김으로써 그 편벽된 성질을 치니,

염라대왕 못지 않은 포증의 현명한 판단으로도 그 술책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한가. 모름지기 수령은 군자의 마음을 지녀

공평하고, 먼저 예산을 정하여 물욕에 동요되지 아니하고, 분풀이를 다른 데로

옮겨 하지 않아야 아전들이 그 간계를 부릴 틈이 없게 되는 것이다.]
 


★ 不知以爲知 酬應如流者 牧之所以墮於吏也.
     (불지이위지 수응여류자 목지소이타어리야. )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며 아전들의 요구에 물흐르듯 쉽게 응하는 1) 것은

     수령이 아전들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신(文臣)은 젊어서 시부(詩賦)를 익히고,

무신(武臣)은 젊어서 활쏘기를 익힐 뿐, 그 밖에 배운 것이라곤 골패(骨牌)따위의

노름이나 기생 끼고 술마시기뿐이다. 좀 낫다고 하는 자라야 고작 구궁팔문 2)의

이치나 하도낙서(河圖洛書) 3)의 수(數) 정도를 공부하였다.

하나, 그런 것들이야 인간 만사와는 별 상관이 없고, 활쏘기 정도는 다소 실질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것도 고나리가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다.

그런 생활만 하다가 하루아침에 수령이 되어 천리 밖으로 혼자 떠나와 아전들과

많은 백성들 위에 우뚝 서서, 평생 꿈도 못 꾸던 일들을 손에 맡고 보면 일마다

아득하게 느껴짐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수령은 일 처리에 어두운 것을

수치로 여겨,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며 아전들이 일을 올리면 그 곡절도 묻지 않고

도장을 꾹꾹 누르며 물 흐르듯 순순히 응하면서도 스스로 모든 일에 널리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듯 자처하니, 이것이 바로 수령이 함정에 빠지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 명령이나 한 가지 지시를 내릴 때에도 마땅히 수리(首吏)와 담당 아전에게

자세히 물어 뿌리를 캐고 지엽까지 더듬어 문제의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 훤히

알고 나서야 결재를 한다면,불과 몇십 일 지나지 않아서 사무에 통달하게 될 것이다.
내가 현성(縣城)에 오래 살면서 늘 듣기로는 새로 부임해 온 수령이 일에 미숙하여

그 내막을 하나하나 캐고 들어가는 경우에는, 고을의 나이 든 아전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징조를 보니 고달플 것 같다.' 고 하고, 물흐르듯 쉽게 응해 주는

경우에는, 서로 수령을 비웃어 가며, '그 징조 알 만하다.' 하였으니,

아전들을 단속하는 요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각주]
1) 수응(酬應) : 남의 요구(要求)에 응(應)함.
2) 구궁팔문(九宮八門) : 역산(曆算)과 역술법(易術法)
3) 하도낙서(河圖洛書) : 고대에 예언(豫言)이나 수리(數理)의 기본이 된 책(冊).
 

 

★ 吏之求乞 民則病之 禁之束之 無碑縱惡.
     (이지구걸 민즉병지 금지속지 무비종악. )
     아전들이 구걸하면 백성들은 고통스로워하니 금지하고 단속하여

     함부로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탁무(卓茂)가 밀(密)땅의 수령이 되어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고 입으로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니, 아전과 백성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어떤 백성이 있어 관하의 정장(亭長) 1)이 자기의 쌀과 고기를 받았다고 고해왔다. 

탁무가 물었다. 『정장이 너에게 요구했느냐, 네가 일이 있어 부탁하니까 받았느냐,

아니면 평소의 은의로써  보내준 것이냐.』 백성이 말하였다. 『갖다 바쳤읍니다.』

탁무가 말하였다.『바치니까 받은 것인데 무엇 때문에 말하느냐.』

백성이 말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현명한 사또는 백성으로 하여금 아전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아전으로 하여금 백성으로부터 취하지 않게 한다 하니,

지금 제가 아전을 두려워하여 그 때문에 바친 것인데 아전이 마침내 받아들인

까닭에 와서 말하는 것입니다. 』

탁무가 말하였다. 『너는 몹쓸 백성이구나. 아전은 다만 위세를 타서 억지로

구청해서는 안될 뿐이다. 정장은 평소 선한 아전이니 명절에 선물 주는 것은

예(禮)인 것이다.』

백성이 말하였다. 『진실로 이같다면 율(律)이 무엇 때문에 금하고 있읍니까.』

탁무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율은 큰 법을 베풀어둔 것이요, 예는 인정에 따르는

것이다. 지금 내가 율로써 너를 다스린다면 네가 어느 곳에다 수족을 놀릴 수

있겠느냐. 돌아가서 생각해 보라.』 탁무란 자는 향원(鄕愿) 2)의 보잘것없는 자이다.

그의 행사가 본래 그러하였다 백성이 아전을 고발함에 으례 말을 다할 수가 없는

것이니, 백성이 한 귀퉁이를 들거든 수령이 그 남은 세 귀퉁이를 알아차려야

이에 실정을 파악할 수가 있을 터인데 이제 아전의 횡포는 의심치 아니하고

오직 민심의 험악함만 허물하니 또한 어둡지 아니한가. 백성이 만약 즐겨 바쳤다면

반드시 이러한 고발이 없을 터이요, 즐겨하지 않으면서도 바쳤다면 반드시 감춰진

사정이 있을 것이니, 어찌 곧바로 몹쓸 백성이라고 일렀단 말인가.

약한 백성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아프고 가려운 것을 스스로 말할 수가 없고 한마디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말을 명백히 하지는 못하니, 아,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후한(後漢) 오우(吳祐) 3)가 교동을 다스릴 때에 정사가 어질고 간소함을 숭상하니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하관으로 있던 손성(孫性)이란 자가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어 베옷을 사서 그 아비에게 바치자, 

아비가 노하여 『이 같은 사또를 모시고서 어찌 차마 속인단 말이냐』고 하면서

재촉하여 돌아가 죄를 받도록 하니, 손성이 부끄럽고 두려워 자수하여 아비의 말을

갖추어 말하였다. 오우가 말하기를, 『내가 어버이 때문에 더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이른바 허물을 살펴봄에 그 어진 것을 알 수 있는 경우이다』 하고,

돌아가 그 아비에게 감사하게 하고 도리어 옷을 보내주었다.
『북사(北史)』4)를 보면, 송흠도가 제(齋)나라에 벼슬살면서 지위가 중산태수가

되었는데 작은 일을 살피기를 좋아했다. 그 휘하 여러 고을의 보좌하는 관리로서

민간에 심부름 나간 자가 먼저 값을 준 뒤에라야 밥을 먹도록 하니,

부임하는 곳마다 엄정(嚴整)하다고 소문이 났다. 여몽정(呂蒙正) 5)이 말하였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살피면 따르는 사람이 없어진다. 

조참(曹參) 6)이 옥(獄)과 저자를 동요시키지 말도록 한 것 7)은 그가 선인과 악인을

두루 사랑했기 때문이다. 만약 끝까지 추궁하면 간특한 자가 용납될 수가 없기

때문에 삼가 요란스럽게 하지 말도록 타이른 것이다. 』이 또한 폐단이 있는 말이다.

근래에 재상들이 이 같은 말을 익히 들어서 일체의 시비·선악을 모두 뒤섞어

구분하지 않으니, 백성으로서 해로움을 입은 자가 많아졌다.

모든 것을 저울질해 보아야 할 것이요 한 곳에 고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산록(茶山錄)』에 일렀다. 『간활한 아전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방탕하다가

쫓겨나게 될 때에는 촌리(材里)로 돌아다니면서 돈과 곡식을 구걸하거나

혹은 그 동네의 환곡(還穀)을 제류(除留)1748)로 만들어놓고 실제로는

자기의 포흠(逋欠)을 때우게 되는데, 수령이 반드시 그러한 기미를 알아서 먼저

경계하되 『네가 이러한 죄를 범하면 반드시 벌주어 용서치 않으리라』 할 것이요,

그러고서도 살펴서 죄상을 알아내었거든 법에 비추어 중벌을 주어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각주]
1) 정장(亭長) : 향정(鄕亭) 즉 초소(哨所)의 장(長). 

2) 향원(鄕愿) : 향촌(鄕村)에 사는 사이비(似而非) 선비형(型) 인간. 

3) 오우(吳祐) : 자는 계영(季英).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재상(齋相)·

    하간상(河間相)을 지냈다. 

4)『북사(北史)』 : 사서(史書). 100권. 당(唐) 이정수(李廷壽)가 지은 바 북조(北朝)의

    위(魏)·제(齊)·주(周)·수(隋)의 4왕조(王朝) 242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5) 여몽정(呂蒙正) : 중국 송나라 사람. 자는 성공(聖功). 질후관간(質厚寬簡)하여

    중망(重望)이 있었으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내고

    채국공(蔡國公)에 봉해졌다.
 6) 조참(曹參) : 중국 한(漢)나라 사람. 소하(蕭何)와 더불어 한 고조(高祖)를 도와

     중국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평양후(平陽侯)에 봉해졌다. 

6) 원문에 『조참불요옥시(曹參不擾獄市)』라 하였으니, 다음과 같은 뜻이다.

    조참이 봉국인 제(齊)의 승상으로 있다가 소하의 뒤를 이어 고조의 승상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후임자에게 말하였다. 

    『제국(齊國)의 옥(獄)·시(市)를 맡기나니, 삼가 요동(擾動)시키지 말라. 』

    후임자가 물었다. 『다스리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는가. 』

    그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옥(獄)·시(市)로 부탁한 것은 아울러 포용하려는

    소이(所以)에서다. 이제 그대가 요동시킨다면 간인들이 어디에 용납될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이를 먼저 말한 것이다. 』 간인(奸人)들이 용납되지

    못하면 결국 난리를 일으킬 것을 고려함에서였던 것이다. 

8) 제류(除留) : 환곡(還穀)은 매년말 원곡(元穀)과 호모곡(蔰耗穀)을

    납관(納官)해야 함이 원칙인데, 아전이 호모곡을 문서상으로는 미납이라 해놓고

    실제로는 받아내어 자기의 용도에 쓰는 경우를 말한다. 

  

★  員額少 則閒居者寡 而虐斂未甚矣.
     (원액소 즉한거자과 이학렴미심의. )
     아전의 인원수가 적으면 한가로이 지내는 자가 적어서 백성들에게 무리하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심하지 않을 것이다. 

[『주례(周禮)』를 보면 부·사·서·도(府史胥徒) 1)가 다 정원이 있으니,

향· 당· 주 족(鄕黨州族) 2)의 경우는 곧 경성(京城)의 5부(部)와 유사하며

수·현·찬·비(遂縣酇鄙) 3)는 곧 경기의 여러 고을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그 부사서도가 다 정원이 있으니, 곧 중앙과 외방의 아전이 제도를 달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부사(府史)의 수가 정원이 극히 적어서 태재(太宰)·

대사도(大司徒)의 아문에는 부(府)가 불과 6인이요, 사(史)가 불과 12 인이요,

서(胥)가 불과 12인이요, 오직 도(徒)는 120인이다. 수인(遂人)에는 불과 4인이요, 

현사(縣師)에는 부가 불과 2인이다. 우· 하· 은· 주(虞夏殷周)의 제도에

아전의 정원이 극히 적음이 이와 같았으니, 옛 성인이 만백성을 위해 염려함이

이처럼 깊고도 먼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제도는 전혀 옛법을 본받지 아니하여

중앙과 외방의 아전의 수가 넘치고 어지럽지 않은 것이 없다.

중앙의 각 기관은 그래도 정원이 있으나, 외방의 여러 고을은 전혀 제한이 없어서

많은 것은 수백명에 이르고 安東·羅州 등이다 적어도 60명을 내려가지 않아서,

무리를 지어 지내면서 패거리로 서로 다투어 풍속을 해치니 그 소행이 흉악한

것이다. 그런데도 방임(房任) 중에 요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房任이란

現職任의 자리이다) 큰 고을은 불과 10자리요 작은 고을은 불과 5∼6자리이다.

아전들이 머리를 싸매고 나서기를 다투어서 겨우 한 자리를 얻게 되면 손뼉을 치고

팔을 걷어붙이면서 한 재산 얻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도적질과 농간질이

살을 베어가고 피를 빨아가니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향리의 인원을 제한하자는 의논이 오래 된 것이다.

작고한 장신(將臣) 이한풍(李漢豊) 4)이 여러 차례 경연(經筵)에서 아뢰었고

암행어사 이면승(李勉昇) 5)의 서계(書啓) 6)가 또한 있었으나 대신과  감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여겨서 그대로 파탄되도록 버려두었으니 진실로 한탄할

일인 것이다. 이제 마땅히 그 고을 전결(田結)의 다소(多少)로써 아전의 정원을

정할 것이니, 토지 1천결마다 아전 5인을 두어서 1만결 되는 고을에 아전 50인을

두더라도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전의 수를 줄이는 것은 아전들이 또한 원하는

바이나, 다만 감사가 순력(巡歷)할 때에 행차를 탐문하고 접대하는 데에 파견되는

일이 지극히 많아서 수십명으로써는 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요,

이 일 이외에는 도무지 안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저 지금의 감사라는 것은

만가지 병통의 근본이며 뭇 폐단의 근원이다. 무릇 외읍의 일들에 있어서

그 폐단의 근원을 캐어본다면 모두가 감사에게로 귀착되는 것이니, 

이것이 그 한 가지 증거이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아전의 숫자를 줄여 정하는 것은

수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늙은 자를 제거하며 나이 어린 자를

제거하여 토지 1천결마다 아전 5인씩을 두되 그 기록하고 셈하는 것을 

시험해보아서 직임을 맡겨야 또한 대개 체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난잡한 그대로에 일임해서는 안될 것이다.

동래(東萊)· 義州(의주)의 경우와 같이 인구는 많고 토지는 좁은 곳에서는 마땅히

민호(民戶)의 수(數)를 보아서 아전의 수를 정해야 할 것이다
한위공(韓魏公)이 익주 안무사가 되었을 때에 탐학하고 잔혹하여 직임을 다하지

못하는 아전과 불필요한 인원을 쫓아내고 파한 것이 760인이나 되었다.
조예(趙豫) 7)가 송강부(松江府)를 다스릴 때에 양가집 아들로서 근후한 자를 골라

아전으로 삼아 예와 법으로써 가르치며 요역(徭役)을 고르게 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아전의 수를 10에 5는 줄였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정승이 일찌기 병조에 있으면서 아전의 수를 줄인 것이

거의 1백명이나 되니, 우암(尤庵)이 상소하기를, 『부·사·서·도는 실로 나라를

좀먹는 큰 좀이니 줄이지 않을 수 없읍니다. 지금 병조에서 줄인 것이

근 1백명이 되어 비방이 떼를 지어 일어납니다만 그러나 그 유익함이 이미

적지 않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속히 제조에 명령을 내리어 같은 예로

줄이도록 하소서』하였다. 중앙과 외방을 막론하고 아전을 줄이는 것은

지금의 당면한 급무이지만 정원도 있고 유용한 바도 있으니 

반드시 감히 가벼이 법을 범하지는 말 것이다.
호태초(胡大初)가 말하였다. 『대군(臺郡)의 아전은 정원이 있고 봉록도 있으므로

사람마다 제 몸을 아끼는 뜻이 있으나 (臺郡이란 巡營과 같다) 현(縣)의 아전은

그렇지 않아서 정원도 없고 봉록도 없으되 현관의 일용품은 등· 초· 땔감까지를

사서 바치지 않는 것이 없고, 현관의 생신에는 향과(香果)· 신선도(神仙圖)·

채색옷 등 수언(壽筵) 잔치에 소요되는 물품을 다 갖추어 바친다.

사대부들이 현관에게 들러 노닐 적에 아전들이 번갈아 가면서 지공(支供)하고

대군(臺郡)에서 공문이 오매 돈을 거두어 사람을 보내는데, 재물이 어디서 저절로

난단 말인가. 백성의 재물을 속여서 받아내는 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중국의 현의 아전도 역시 정원도 없고 봉록도 없으며,

지공을 부담해야 하는 노고는 우리나라의 향리보다 더욱 심한 것이다.
아전에게 약간의 봉록을 주는 것도 갑자기 의논할 일이 못된다.

토지제도를 크게 개혁하여야만 비로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전제고(田制考)」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隱結의 절반만 찾아내어 아전의 봉록으로 하더라도 또한 남을 것이다
『통고(通考)』8)에 실린 바 아전들의 녹을 주는 법에 일렀다.

송나라 영종(英宗) 4년에 모역법(募役法) 9)을 천하에 반포하니,

내외의 서리들이 평소에 녹을 받지 않고 오직 뇌물받는 것으로써 살아오다가, 

이에 이르러 면역전(免役錢) 10)으로써 녹을 받게 되었다. 녹이 있는데도 뇌물을

받은 자는 창법(倉法) 11)을 적용하여 그 처벌을 무겁게 하였다.

처음에 경사(京司)의 아전들에게 녹으로 준 것이 겨우 4천 꿰미였더니, 

8년에 이르러서는 돈이 38만여 꾸러미요, 경사 아전들의 옛 녹과 외방 아전들의

녹은 아직도 이 숫자만 남아있었다.
신종(神宗) 희령(熙寧) 12) 4년에 삼사(三司) 13)에 조서를 내리되,

무릇 백성이 술과 국수를 파는 시장에서는 1천(千)전마다 50전씩 세를 거두어

쌓아두었다가 아전들의 녹을 주도록 하였다.
이것은 모두 구차한 미봉책이니 이제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향리로서 특별히 군공(軍功)을 세운 자는 그 한 자식의

역(役)을 면제해주고, 잡과(雜科) 14)에 합격한 자는 자손의 역을 아울러 면제한다.』
또 규정하였다. 『2대(代)를 계속하여 입역(立役)하였으면 비록 그 원래가 향리의

자손이 아니라고 제소(提訴)하더라도 들어주지 아니한다.』
또 규정하였다. 『본역(本役) 15)을 싫어하여 도망한 자를 그 동류(同類)가 잡아서

보고하는 경우에는 10인 이상을 잡은 자는 역을 면제해 주고,

20인 이상은 그 아들의 역까지 아울러 면제해 주고,

9인 이하인 경우는 매 1인마다 3년씩 역을 면제해 준다. 』
살펴보건대 국초(國初)에는 법의 기강이 엄숙하며 아전의 소행이 강직하고

염결하여 군현의 아전이 그 여덟 식구를 족히 먹여 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역(苦役)으로 여겨 도망하는 자가 잇따랐으니 그 도망간 자를 잡는 것을 공으로

삼게 되었다. 법을 세움이 이와 같았으니 당시의 민생의 안락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향리로 들어가려는 자가 다투어 나서서 머리를 부딪치기를

과거와 벼슬길로 나아가는 듯하여 작은 고을의 아전이 때로 1백명에 가까우니,

서로 수용할 수가 없이 되었다. 이에 사사로이 법을 세우되 혹은 아비와 자식이

함께 복무하지 못하도록 하며 혹은 형제 3사람이 함께 나오지 못하게 하니, 

그 이(利)가 두텁고 맛이 깊음을 이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요, 민생의 초췌해감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라 정사를 도모하는 자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각주]
1) 부· 사· 서· 도(府史胥徒) : 모두 전곡(錢穀)과 문서를 맡은 이속의 칭호이다. 

2) 향·당·주·족(鄕黨州族) ;중국 고대의 행정단위. 25가(家)가 1여(閭),

    4여(閭)가 1족(族), 5족(族)이 1당(黨), 5당이 1주(州), 5주(州)가 1향(鄕)이었다. 

3) 수· 현· 찬· 비(遂縣酇鄙) : 중국 고대의 향리(鄕里)제도. 5가(家)가 1인(隣),

    5인(隣)이 1리(里), 4리(里)가 1찬(酇), 5리(里) 1비(鄙), 5비(鄙)가 1현(縣),

    5현(縣)이 1수(遂)였다. 

4) 이한풍(李漢豊) : 영조 9∼순조 3(1733∼1803). 자는 계여(季輿). 무신(武臣).

    이순신(李舜臣)의 후손. 승지(承旨)를 거쳐 여러 곳의 병사(兵使)를 지내고

    포도대장(捕盜大將)·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하였다. 

5) 이면승(李勉昇) : 영조 42∼헌종 1(1766∼1835). 자는 계내(季來). 문신.

    전라도 암행어사·승지·판서를 지냈다. 

6) 서계(書啓) : 임금의 명(命)을 받들어 나간 관원(官員)의 복명서(復命書). 

7) 조예(趙豫) ;중국 명나라 사람. 자는 정소(定素). 관직 15년에 청정하기가

    하루같았고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8)『통고(通考)』 : 『교헌통고(交獻通考)』의 약칭. 남송(南宋) 때의 마단림(馬端臨)이

    찬(撰)한 348권의책. 당(唐)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을 바탕으로 하고

    송대(宋代)까지의 제도문물(制度文物)을 기록하였다. 

9) 모역법(募役法) : 송대(宋代)에 왕안석(王安石)이 주창 실시한 신법의 하나.

    종래에 민호(民戶)에서 요역을 징발해 오던 방법 대신 민호의 빈부를 기준으로

    면역전(免役錢)을 징수하고 이로써 역정(役丁)을 임고하게 된 제도. 

10) 면역전(免役錢) : 송대(宋代)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에 따라 요역(徭役) 대신

      민호가 바치게된 역가(役價). 

11) 창법(倉法) : 제국고(諸國庫)에 관한 법(法)이라는 뜻이니,

      곧 국가재산관리법(國家財産管理法)을 의미 한다. 

12) 희령(熙寧) : 중국 송(宋)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068∼1077.

      희령(熙寧) 4년은 1071년. 

13) 삼사(三司) : 중국 제도상의 염전사(鹽錢使)· 탁지사(度支使)·

      호부사(戶部使)의 3기구. 그 연혁은 당에서 비롯하였는데,

      송대(宋代)에 와서는 더욱 추요(樞要)의 지위를 갖게 되어 

      전곡(錢穀)·식화(食貨)의 정령(政令)이 모두 이 기구의 권능으로 귀속하였다. 

14) 잡과(雜科) : 문(文)·무관이 아닌 여타 기술관을 선발하던 과거.

      조선왕조때에는 역(譯)·의(醫)· 음양(陰陽)·율(律)의 제과(諸科)가 있었는데,

      중인(中人) 신분이 여기에 응했으며 그 격도 문· 무과에 비해 낮았다.
15) 본역(本役) : 원래의 신분에 따른 직역(職役)이란 뜻이니,

      여기서는 향리(鄕吏)의 이역(吏役)을 가리킨다. 


  

★ 今之鄕吏 締交宰相 關通察使 上藐官長 下剝生民 能不爲是所屈者 賢牧也.
     (금지향리 체교재상 관통찰사 상모관장 하박생민 능불위시소굴자 현목야. )
     지금의 향리는 재상과 결탁하고 감사와 연통해 있어서

     위로는 수령을 업수이 보고 아래로는 생민을 수탈하니, 
     능히 여기에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자는 존경받을 만한 수령이다.


[만력(萬曆)1) 이전에는 아전의 횡포가 아직 심하지 않더니 왜란 이래로 사대부의

녹봉이 박하여 집이 가난해지고 또 나라의 재화가 모두 5군문(軍門) 2)의 양병에

들어가게 되니, 이에 탐학하는 풍조가 점차 커지고 아전의 습속이 그에 따라

타락하여 수십년래로 날로 심해져서 오늘날에는 지극한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민간에 있으면서 그 폐단의 근원을 탐구해보니,

하나는 조정의 권귀(權貴)들이 뇌물을 받는 일이요, 

하나는 감사가 스스로 축재하는 일이요, 하나는 수령이 이익을 나누는 일이다.
아전이 재상과 결탁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으니 그 첫째는 적교(謫交)이며

둘째는 궁교(宮交)이며 세째는 유교(由交)이다. 적교란 어떠한 것인가.

귀신(貴臣)이 유배당하면 간활하여 시세를 짐작하는 아전이 손을 뻗쳐 떠받들어

주며 충성과 비분으로 개탄해주되 마치 의기를 숭상하고 의리를 좋아하는 듯하면, 

귀신이 처음으로 유배되어 궁한 근심 속에 움츠러들어 있다가 홀연히 이 사람을

만나 고마움을 골수에 새기게 된다. 금령이 엄한데도 이 아전이 그의 서신을 전하여

주고 음식에 바야흐로 고통을 당하는데 이 아전이 술과 고기를 계속 대어주니,

그가 저승에서라도 보답하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정국이 뒤바뀌어

그 귀신이 권세를 잡게 되면 이 아전의 기세가 치솟아서 그와 함께 높아지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귀신이 유배되어도 오히려  그 당파가 있어 아직도 조정의

권력을 잡고 있으니, 유배 중에 칭하는 바는 그 시행이 반드시 빠르고, 

금계(金鷄) 3)를 아직 부르지 않았는데도 먼저 그 혜택을 누리게 되니,

이것이 아전이 의로움을 좋아하는 듯한 짓을 취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미 결탁한 뒤에는 토산 명주와 가는 베며 진귀한 어포와 큰 전복을 그 집에다

갖다 바친다. 이에 새로 부임하는 수령이 하직을 고하면 먼저 이 아전을 부탁하고

새로 나오는 감사가 전별(餞別)의 술을 마실 때에도 그 이름을 듣게 되니,

수령이 부임한 날 아침에 이를 나오게 하여 호의를 보이고,

감사가 지방을 순행할 때에 불러서 음식을 내린다.

이에 아전이 물러나서는 행악하기를 끝이 없으니, 이것이 적교(謫交)이다. 

궁방(宮房)의 전장(田庄)이 많이 먼 지방에 있고 궁방의 자손이 또한 권문(權門)이

많은데, 그 전장을 관리하면서 드디어 결탁이 되어 세력을 얻어 악폐를 저지름이

또한 위의 방법과 같으니 이것이 궁교(宮交)이다. 

이른바 유리(吏房으로서 前任 수령의 解由를 작성해내는 자를 일러서 由吏)는

구관의 형세가 나쁘면 끊어버리고 그 형세가 좋을 것 같으면 결탁하는데,

결탁을 받는 자는 나의 형세가 좋아서 그러는 줄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아전이

충복스럽다고만 보게 되어 뇌물을 선물로 생각하고 청탁을 구걸로 알아

힘껏 천거하여 그 결탁을 굳히는데, 아전이 세력을 얻어 악폐를 저지름이

위의 방법과 같으니, 이것이 유교(由交)라는 것이다.
취임하는 날에 여러 아전을 불러 영을 내리되 『태가 떠나오는 날 모 재상이

모 아전을 부탁했는데, 이는 내가 영을 내리기 전이므로 처음부터 깊이 다스리지는

아니하겠다. 오늘 영을 내린 뒤로는 만약 부탁하는 편지 한 장이라도 관문에 다시

들어오는 일이 있으면, 당해 아전은 일차 엄형을 가하고 영구히 내쫓아 다시 쓰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식언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지켜 보아라』하고,

드디어 이 영을 크게 써서 판에 새겨서 이청(吏廳) 4)에 걸어두게 하고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약조와 같이 하여 용서하지 말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읍내바닥에 살면서 수령의 출척(黜陟)이 오로지 아전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아왔다. 순영(巡營)의 저리(邸吏)가 향리와 상응하여 수령을 헛되이

추키거나 억울하게 무고하여 제 하고자 하는 바를 자행하는데, 이는 감사가 아전을

풀어서 수령을 염탐해들이게 하되 심복처럼 믿기 때문인 것이다. 

잘못이 감사에 있으니 수령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천부(天賦)의 것이니, 수령의 소행이 맑고 밝아

잘못이 없다면 향리나 저리가 역시 이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요, 

만약 수령의 소행이 불법하면서도 간활한 아전에게 아첨해 빌붙어서

그들의 해악을 면하고자 하는 자는 한 구멍을 겨우 막음에 다른 구멍이

또 터질 것이니 마침내는 덕 됨이 없을 것이다.

오직 자수(自修)의 두 글자가 오히려 해악을 멀리할 수 있는 양책인 것이다.
『경국대전』에 원악향리에 관한 조문이 있으니, 그 법률이 지극히 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죽이고 난 후에야 백성의 해독을 제거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수령이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으니,

마땅히 감사에게 비밀히 의논하여 법을 시행하도록 할 것이다.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원악향리는 수령을 조종 농락하고 권세를 오로지 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 뇌물을 몰래 받고 역(役)의 부담을 고르지 않게 한 자,

조세를 받을 때에 부정하게 거두어 남용한 자, 양민을 강제로 거집하여 숨겨두고

사역시킨 자, 전장(田庄)을 널리 두고 양민을 부려서 경작하는 자, 

촌리에 횡행하여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제 이익을 도모한 자,

권세가에 붙어서 본역(本役)을 피하려 한 자, 본역을 피하여 도망가서 촌락에 숨어

사는 자, 수령의 위세를 가탁해서 백성을 침학한 자, 양가집 여자나 관비를 첩으로

삼은 자이니, 타인이 이를 고발하게 하며 본읍의 경재소(京在所 5本邑 사람으로서 

서울에 벼슬하여 宰相이 된 자를 이름하여 京在所라 한다)가 사헌부(司憲府) 6)에

고발케 하고 조사 심문하여 죄를 판정하되 도(徒)에 해당되는 자는 본도(本道)의

잔역리(殘驛吏) 7)로 영속(永屬)시키고 유(流) 8)에 해당되는 자는 다른 도의

잔역리로 영속시킨다. 수령으로서 범죄사실을 알고서도 조사 처리하지

아니한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9)로 논죄한다. 』
살피건대 법이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아니건마는 행하지 않음이 걱정인 것이다.

조종(祖宗)이 법을 제정함이 이와 같았는데 까닭 없이 이를 폐하여 쓰지 않음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경재소가 고발 처리할수 있도록 한 법은 위와 아래,

중앙과 지방으로 하여금 혈맥이 흘러 통하고 교화가 떨치게 하여 연약한 백성들의

숨겨진 원통함을 펴 알릴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이 법은 폐하여지고 군현의 하찮은

아전들은 방자하며 거리낌이 없어 하늘도 땅도 두려운 줄을 모르게 되었다.

아, 장차 어찌할 것인가,]

 

[각주]
1) 만력(萬曆) : 중국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19. 

    만력(萬曆) 이전이란 임진왜란 이전인 조선왕조 전기(前期)를 가리킨다. 

2) 오군문(五軍門) : 조선왕조 후기에 설치된 5개의 군영, 즉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으로서

    5영문(營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원래 5위(衛)의 제도가

    유명무실함이 드러났으므로 그 대신 선조 때로부터 숙종 때까지에 걸쳐 

    주로 중앙의 방어를 위한 5군영(軍營)을 차례로 설치하였다. 

3) 금계(金鷄) : 고제(古制)에 죄벌을 사면(赦免)하는 조서(詔書)를 반포할 때에

    장대 위에 매달던 바 황금으로 만든 닭. 한대(漢代)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4) 이청(吏廳) : 아전들의 집무소. 

5) 경재소(京在所) : 조선왕조 때 서울과 지방과의 연락·주선을 위해 서울에

    설치한 기구. 그 담당자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음. 각 지방 출신 혹은 그 지방과

    관계 있는 당상관(堂上官)으로 구성되며 각 지방의 유향소(留鄕所)(뒤의 鄕廳)와

    상응하는 것이니, 경저리(京邸吏)→영저리(營邸吏)→향리(鄕吏)로 

    연결되는 아전들의 연락기구와 대조적이었다.  후기에는 없어진다. 

6) 사헌부(司憲府) : 고려·조선왕조 때 백관의 규찰, 시정(時政)의 논란(論難),

    풍기의 단속을 맡은 감찰기관. 홍문관(弘文館)·사간원(司諫院)과 함께

    3사(司)를 이루어 . 사류(士類)층의 여론을 대변하였고,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와 함께 3법사(法司)를 이루어

    강력한 검찰(檢察)기구로 행세하였다. 

7) 잔역리(殘驛吏) : 쇠잔한 역(驛)의 역리(驛吏). 

8) 유(流) : 5형(刑)의 하나로서 유배형(流配刑).
9)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 : 임금의 명령을 어긴 형률(刑律). 


  

★ 首吏權重 不可偏任 不可數召 有罪必罰 使民無惑.
     (수이권중 불가편임 불가삭소 유죄필벌 사민무혹. ) 
     수리(首吏)는 권한이 막중하니 지나치게 일을 맡길 수도 없고

     너무 자주 불러서도 안되며,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의혹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호태초(胡大初)가 말하였다. 『일을 맡은 관인의 경우 아전을 수령이 혹 지나치게

중용하면, 그자가 문득 망녕되이 스스로를 과장하여 말하기를,

「일의 크고 적음이나 시비·곡직을 막론하고 모두가 나에게서 처리되니

네가 나에게 돈 얼마를 빌리면(빌린다는 것은 준다는 뜻이다) 내가 너의 일을

반드시 잘되도록 해주겠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되면 아전의 욕심 구덩이가

다 차기 전에 수령의 나쁜 소문이 이미 널리 퍼지게 된다. 』
어리석은 수령은 반드시 수리(首吏)를 심복으로 여겨 밤중에 몰래 불러서 여러가지

일을 의논한다. 아전이 그 수령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해주는 것은 전세(田稅)를

농간질하고 창곡을 번롱하여 그 나머지를 취하고 송사(訟事)와 옥사를 팔아서

그 뇌물을 빨아먹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수령이 그 하나를 먹으면 아전은 백을 도적질하는데도 죽일 죄가 이미 발각되매

오직 수령 혼자서만 당하게 되니, 역시 슬프지 아니한가.

이속(吏屬)의 참알(參謁)에 있어서는 마땅히 흰 베옷과 흰 띠를 금할 것이다.
무릇 참알을 받을 때에는 수령이 조관(朝冠), 오사모(烏沙帽)를 착용하니 이속이

어찌 흰 옷과 베 띠로써 관정(官庭)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지금 경사(京司)에

참알하는 서리는 모두 홍단령(紅團領)을 착용하는데, 법이 원래 그러한 것이다.

오직 상중에서 기복(起復) 1)한 자는 검은 갓과 검은 띠를 착용함을 허락할 것이다.

[起復한 자는 官庭에 들어와서 參謁하는 것을 허락치 말 것이요

다만 府中을 드나들면서 일을 아뢰도록 할 것이다]

 

[각주]
1) 오사모(烏沙帽) : 고려 말기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에 쓰던 모자.
2) 기복(起復) : 복상(服喪) 중인 자가 나와서 공무(公務)를 보는 것.


 

★ 吏屬參謁 宜禁白布衣帶.
    (이속참알 의금백포의대. ) 

    이속(吏屬)이 참알에 때는 흰 옷에 베로 만든 띠의 착용을 금하여야 한다.

 

[무릇 이속들의 참알을 받을 때에는, 수령이 조관(朝冠 : 烏沙帽)을 착용하는데,

이속이 어찌 백의 포대차림으로 관정(官庭)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지금 경사(京司)에서는 참알을 할 때에 서리(書吏)들이 모두 홍단령(紅團領)을

착용하는데, 그것이 법도인 것이다. 다만 상중(喪中)에 있는 몸으로 공무에 임하는

사람에게는 검은 갓과 검정 띠의 착용을 허락할 것이다.] 

 

 

★  吏屬遊宴 民所傷也. 嚴禁屢戒 毋敢戱豫.
     (이속유연 민소상야. 엄금누계 무감희예. )
   아전들이 놀이와 잔치를 즐기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엄중히 금하고 자주 경계하여 감히 희롱하고 즐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관리가 기생을 끼고 모여서 술 마시는 짓은 본래 형률(刑律)이 있다. 

근래에 보면 수령 된 자가 아전들의 잔치놀이를 방임하여 산을 오르고

물에 배를 띄우면서 노래와 춤추기를 번갈아 하도록 하는데,

백성이 이를 보고는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한다. 

즐기기는 아전이 하고 원망은 수령이 듣게 되니 역시 망녕되지 아니한가.

마땅히 엄금할 것이다. 혹 시절이 고르고 풍년이 들면 따뜻한 봄이나 맑은 가을날

부중에 일이 적을 때 한번 소풍을 하고자 하면 마땅히 흰 밥과 푸성귀반찬으로

산에 오르거나 물가에 가서 담박한모임을 갖도록 할 것이다.

이청(吏廳)에서 매질하는 짓은 역시 엄금할 것이다. 하찮은 아전들이나 하인들이

사사로이 서로 경계하고 신칙하는 짓은 반드시 다 금할 것은 없다. 

그러나 태(笞) 10도 이상을 벌주는 일은 마땅히 아뢴 후에 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릇 백성으로서 관(官)에 직접 예속되어 있지 않은 자는 읍민(邑民)이거나 촌민을

막론하고 매 한 대라도 사사로이 가하는 것은 허용치 말아야 할 것이니,

역시 모름지기 관속들과 미리 약속하여 그들이 범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취임한 지 몇 달이 지났거든 아전들의 이력표를 만들어 책상 위에 놓아 둘 것이다.
다음은 단지 10인의 10년 동안의 표를 만들어본 것이다.

만약 정식 이력표를 만들려고 한다면 마땅히 20년 동안의 표를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표를 보면 아무개는 여러 번씩이나 긴요한 자리에 있었고 

아무개는 매양 한산한 자리로 돌았으며, 아무개는 다능한 것으로 나타났으니

반드시 간활한 것이며 아무개는 지혜가 없으니 일을 맡겨서 부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 환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을살이가 오래 됨에 혹 그 사람의 재주가

일을 맡겨서 부릴 만한데도 특히 겸손하여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으로

일을 맡지 못한 자가 있거든, 연초(年初)에 아전들의 직임을 나누어 정할 때에

헤아려 요긴한 직임을 주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임신 계유
이수담(李壽聃) 도창색(都倉色) 이방(吏房) 이방 호장(戶長) 이방 이방

도서원(都書員) 호장 호장 호장
유종영(留宗永) 공방(工房) 호방(戶房) 지소색(紙所色) 공사색(公事色)   병방(兵房)
노경석(盧景植) 형방(刑房) 균역색(均役色) 형방 대동색(大同色) 북창색(北倉色)

호적색 형방 도서원 이방 이방
이응복(李膺福) 입사(入仕)   예방(禮房)     군기색(軍器色)   호방 병방  
최두일(崔斗一) 입사 형방 남창색(南倉色) 관청색(官廳色)

병방 도서원 세초색(歲抄色) 호적색 도창색(都倉色)
윤계만(尹啓萬) 입사   공방(工房)     객사색(客舍色)    
김종인(金宗仁) 입사 형방 어영색(御營色) 서창색(西倉色) 예방   도서원
정유년(鄭有年) 입사 공방 공사색   예방  
박재신(朴在臣) 입사 형방 금위색(禁衛色)   동창색(東倉色)
안득춘(安得春) 입사 공방   예방

아전의 농간에는 사(史)가 모주(謀主)가 되니, 아전의 농간을 막고자 한다면

사가 두려워하도록 할 것이요, 아전의 농간을 들추어내려면 사를 잡아내어야

할 것이다.  사라는 것은 서기(書記)이다. 창고의 곡식을 번롱하여

구름과 안개처럼 변화시킴에 있어서 그 일을 아는 자는 사이며,

전세(田稅)를 도적질하여 몰래 감추는 데도 그 숫자를 아는 자는 사이다.

아전이란 것은 원래가 거칠고 성글어서 그러한 일의 대체를 알 뿐이요,

사라는 것은 정밀하여 그 잗다란 조목들까지도 분별한다.

수령 된 자는 먼저 굳세고 엄정한 위엄으로써 그 심담(心膽)을 서늘하게 하고

다시 다른 길을 좇아서 그 농간의 실상을 낚아채어 물으며 그 죄를 용서하겠노라고

해준다면, 예측하지 아니한 부정의 구멍이 때로는 드러날 것이다.]

 

 

★ 吏屬用笞罰者 亦宜嚴禁.
     (이속용태벌자 역의엄금. )
     이청(吏廳)에서 볼기를 치는 형벌 역시 마땅히 엄금하여야 한다.

 

[하급의 아전들이나 하인들이 사사로이 징계하고 신칙하는 것은 일일이

금할 필요는 없겠으나, 10 대 이상의 태형을 가할 때에는 마땅히 품의를 올려

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관청에 속하지 않은 읍민이나 촌민에게는

단 한 대의 매도 사사로이 가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미리 아전들에게 일러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 上官旣數月 作下吏履歷 表置之案上.
     (상관기수월 작하이이력 표치지안상. )
     부임한 지 수개월 지나면 부하 아전들의 이력표(履歷表)를 만들어서

     책상 위에 놓아 두도록 해야 한다.

 

[아래 표는 단지 10 인에 대한 10 년 동안의 이력을 표로 만들어 본 것이다.

그러나 정식으로 잘 만들기 위해서는 20 년 동안의 상황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표를 보면, 아무개는 몇 번이나 요직에 있었으며,

또 아무개는 늘 한가한 직책으로만 돌았으며, 아무개는 다능하나 반드시

간활할 것이요, 아무개는 지혜가 없으니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수가 없다는 등의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을 살이를 오래 했으며 그 능력이 충분한데도

본인이 겸손하여 나서가를 좋아하지 않아 일을 맡지 못한자가 있거든,

연초(年初)에 아전들에게 직책을 배정할 때에 참작하여 요긴한 직책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甲 子    乙 丑    丙 寅    丁 卯    戊 辰    己 巳    庚 午    辛 未    壬 申    癸 酉
  李壽聃   都倉邑    吏 房    吏 房    戶 長    吏 房     吏 房   都書員    戶 長    戶 長    戶 長
  柳宗永    工 房      戶 房        紙所色     公事色      兵 房
  盧景植    形 房   均役色    形 房   對同色   北倉色   所籍色    形 房   都書員    吏 房    吏 房
  李庸福    入 仕      禮 房       軍器色      戶 房     兵 房  
  崔斗一       入 仕    形 房   南倉色   官廳色    兵 房   都書員   歲抄色   戶籍色   都倉色
  尹啓萬        入 仕      工 房       客舍色    
  金宗仁          入 仕    形 房    禁衛色   西倉色    禮 房     都書員
  鄭有年             入 仕    工 房   公事色      戶籍色  
  朴在臣              入 仕    形 房   禁衛色     東倉色
  安得春                入 仕    工 房      工 房

 

 

★ 吏之作奸 史爲謨主, 欲防吏奸 怵其史 欲發吏奸 鉤其史 史者書客也.
     (이지작간 사위모주 욕방이간 출기사 욕발이간 구기사 사자서객야. )
     아전이 농간을 부리는 데는 사(史)가 주모자가 되니, 아전의 농간을 막으려면

     그 사를 두렵게 해야 하고, 아전의 농간을 들추려고 하면 그 사를 꾀어야 하니

     사(史)는 곧 서객(書客)이다.

 

[사(史)라는 것은 서기(書記)를 이른다. 창고의 곡식을 농간부려 구름처엄 흩어지고

안개로 변하여도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오직 사(史)인 것이다.

또 전세(田稅)를 몰래 빼돌려 산 속에 감추고 덤불숲에 숨겨도 그 수량을 아는 자는

또한 사(史)인 것이다. 아전들은 원래 엄벙덤벙하여 대강만 관리할 뿐이며,

사(史)는 몹시 꼼꼼하여 그 세목(細目)을 낱낱이 다 알고 있으니,

백성을 위할 줄 아는 수령이라면 무엇보다도 사(史)를 엄히 다스려 그 위엄에

떨게함으로써 농간을 미연에 방지해야 하며, 이미 비행이 저질러진 경우에는

다른 루트를 통하여 그 농간의 실상을 캐고, 그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하면,

예상치 않았던 부정의 구멍이 드러날 것이다.]
 
 

제 2 장   어중(馭衆) 

                                 (부하를 통솔함.)  

 

 

★  馭衆之道 威信而已 威生於廉 信生於忠 忠而能廉 斯可以服衆矣.
     (어중지도 위신이이 위생어렴 신생어충 충이는염 사가이복중의.)  
     백성들을 거느리어 바른길로 나가게 방법에는 위엄과 믿음뿐이다.

     믿음은 충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충성되고 능히 청렴해야

     백성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상채(謝上蔡) 1)가 응성(應城) 2)에서 수령을 할 때에 호문정(胡文定) 3)이

지나다가 그를 찾아보려고 문을 들어섰는데 이졸(吏卒)들이 뜰 아래에서 마치

흙이나 나무로 만든 사람같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대개 사상채의 위엄과 신의가

본래 그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있었기때문에 그런 것이다.
설경헌(薛敬軒) 4)은 말하였다. 『마음에 털끝만큼도 편향(偏向)이 있어서는 안된다.

만일 편향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들이 엿보아서 알게 된다.

내가 일찌기 한 하인을 부렸는데 그가 자못 민첩함을 보고 그를 부리기를 좀 

자주 하였더니 다른 하인들이 그를 무겁게 여겼다. 나는 드디어 그를 쫓아내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이로써 수령 자리에 있는 자는 마땅히

공명정대하여야지 털끝만큼도 편향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운곡정요(雲谷政要)』에서는 말하였다. 『이졸(吏卒)이 수령과 백성사이에 처함이

질긴 담(痰)이 아래위의 초(焦)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으니 이러한 병폐를 철저히

제거하여 수령과 백성 사이가 환히 틔어 가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이졸 중에는 또한 가난하고 피폐하며 유달리 고생하는 자가 많아

배고프고 추움이 절박하니 심히 불쌍하고 측은하다. 수령은 반드시 그들을 보살펴

그들 역시 사람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항상 간직하는 것이 좋다. 』]

 

[각주]
1) 사상채(謝上蔡)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사량좌(謝良佐). 상채(上蔡)는

    그의 출신지로서 호(號)가 되었음. 상채학파(上蔡學派)의 개조(開祖). 

2) 응성(應城) : 중국 호북성(湖北省)에 있었던 지명. 

3) 호문정(胡文定) : 중국 송(宋)나라 때의 학자 호안국(胡安國).

    문정(文定)은 그의 시호. 자는 강후(康侯). 

    호는 무이선생(武夷先生)·초암거토(草菴居土). 

4) 설경헌(薛敬軒) : 설선(薛瑄). 경헌(敬軒)은 그의 호.


  

★  軍校者 武人麤豪之類也 其戢橫宜嚴.
     (군교자 무인추호지류야 기집횡의엄. )
     군교(軍校)란 무인으로 거칠고 사나운 자들이다. 그들의 횡포를 막는 데는

     마땅히 엄해야 할 것이다.


[무릇 읍내의 사람으로서 배우지 못하여 글도 모르고, 거칠고 패악하여 교화에

따르지 않는 자는 으례 군교에 투신해서 기생을 끼고 모여 술마시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사람을 구타하고 재물을 빼앗는 것을 그 생리(生理)로 삼는다. 

그 직종에는 통틀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장관(將官)이니 즉 천총(千總)·파총(把總) 등속이고, 

둘째는 군관(軍官)이니 즉 병방장무(兵房掌務) 등속이고,

세째는 포교(捕校)이니 즉 토포도장(討捕都將) 등속이다.
장관은 넉넉한 백성을 침학하되 조금이라도 뜻대로 안되면 문득 초관(哨官),

기패관(旗牌官)으로 뽑아, 그를 괴롭히고 짓누르되 그것을 피하는 자는 잡아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고 또는 독촉하여 입번(入番)케 함으로써

농사철을 빼앗으니 이러한 것들은 모두 수령이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군관은 혹 차사가 되면 좋은 벼슬을 얻은 양민가를 협박하여 뇌물을 요구하고

예전(例錢) 1)을 징수한다. 무릇 장차 차사가 이르는 곳에서는 술 따르고

국수 누르며 닭 잡고 돼지 잡으니 수령은 마땅히 이런 폐단을 알아서

역적을 체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벼이 차사를 내보내서는 안된다.

늘 보면 수령으로서 일에 밝지 못한 자는 무릇 징세하고 환곡을 거둠에

영을 발하는 처음부터 먼저 차사를 내보내는데 이름하여 검독(檢督)이라고 한다.

송아지를 끌어가고 가마솥을 빼어 가며 늙은이까지 묶고 따귀를 치니 

무릇 검독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문짝이 부서지고 마을이 쑥밭이 된다.

차라리 최과정졸(崔科政拙)로써 마침내 하고(下考)를 받을지언정 결단코

호랑이를 풀어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악을 쌓아서는 안된다. 

무릇 포도군관(捕盜軍官)은 경향을 막론하고 모두 큰 도적이다.

도적과 내통하여 그 장물을 나누어 먹고, 도둑을 풀어 도둑질할 수 있도록 방략을

제공하며, 수령이 도적을 잡으려고 하면 미리 기밀을 누설시켜 도적으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게 하고 수령이 도적을 처형하려고 하면 비밀히 옥졸을 사주하여

옥졸로 하여금 도적을 고의로 놓치게 하니 그 천만가지 죄악을 다 말할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시장감찰(市場監察)이니, 이것은 으례 포도군관에게

맡겨지는데 이는 곧 도둑놈을 풀어 장터에 들여보내 재물을 훔치도록 하는 것이다. 

상인들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기를 호랑이와 같이 하여 쌀과 솜을 빼앗아도 아무도

따지지를 못한다. 이 때문에 물화(物貨)가 장시에 나오지를 못하고 교역(交易)이

끊어지니 엄하게 단속하는 방도를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수령 된 자는 마땅히 이러한 폐단을 알아서 별도의 방법으로 염탐하고 살펴

범인을 잡아 단단히 곤장 치고 엄하게 징계하여 혼을 내주면

아마 그 폐해가 조금 없어지게 될 것이다.]

 

[각주]
1) 예전(例錢) : 상례적인 징수금.


  

★ 門卒者 古之所謂皁隷也 於官屬之中 最不率敎.
     (문졸자 고지소위조예야 어관속지중 최불솔교. )
     문졸(門卒)이란 옛날의 이른바 조예(皁隸)이다.

     관속(官屬)들 중에서 가장 교화에 따르지 않는 자이다.


[문졸은 혹은 일수(日守), 혹은 사령, 혹은 나장(羅將)이라고 불려진다.

이들은 본래 모두 근본이 없는 떠돌이들인데, 혹은 창우(倡優) 1)로써 투입하였고

혹은 굴뢰(窟儡) 2)로써 변신한 것으로 가장 천하고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이다.

그런데 손아귀에 틀어잡은 권리는 통틀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혼권(閽權)이고, 둘째는 장권(杖權)이고, 세째는 옥권(獄權)이고,

네째는 저권(邸權)이고 다섯째는 포권(捕權)이다. 이 다섯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아랫 백성들은 그를 승냥이처럼 두려워하는데, 수령 된 자는 그들이 제멋대로

포학하는 것을 내버려두니 이에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혼권이란 이러한 것이다. 백성이 소장을 가지고 관아문에 이르렀는데

그 호소하는 바가 이속에게 관계될 것 같으면 문지기는 백성을 막아버린다.

여러 날 배회하여도 한갓 품을 버리기만 하여 그 백성은 마침내 울면서 돌아간다. 

수령은 모름지기 먼저 다짐하고 거듭거듭 신칙하여 백성이 관정에 들어오기를

어머니 집에 들어오는 것 같도록 하여야 곧 백성의 수령이다.

그래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최고형을 시행할 것이다.
장권(杖權)이란 이러한 것이다. 수령의 노함이 엄한데도 곤장질이 오히려 가벼운

경우는 뇌물이 있었기 때문이고, 수령이 본래 말이 없었는데도 곤장질이 홀연히

사나운 경우는 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뇌물이 있어 곤장질이 가벼운 경우에는

속으로 웃고 용서해 주어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이 재물을 축내어가며 뇌물을 바친 것이 또한 죄값을 치른 것이니

몹시 때려 중상을 입히려고 할 필요는 없다.

앙심이 있어 곤장질이 사나운 것을 멍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크게 옳지 않다.

마땅히 빨리 영을 내려 곤장질을 가볍게 하도록 하고 은폐된 사정을 가만히

조사하여 그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옥권(獄權)이란 칼을 씌우고 벗기는 것이다. 자세한 논의는 형전조에 있다.
저권(邸權)은 가장 큰 민폐가 되고 있다. 나라의 법전에 관둔전 3)은 대읍이 20결,

중읍이 16결, 소읍이 12결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문졸의 먹이이다.

세상의 법도가 날로 떨어져 수령이 이를 차지하고서는 문졸을 외촌(外村)의

저인(邸人, 面主人이다)으로 삼는다. 밥 한 상 값이 혹은 50푼에 이르고 

수령의 영 하나를 전달하는데 혹은 수백푼을 토색하며 보리 추수, 쌀 추수,

솜 추수 때에는 노인· 노파를 함부로 내보내어 두루 다니며 구걸하게 한다.

이를 혹은 동령(動鈴) 혹은 조곤(釣鯤) 혹은 나가세(羅家稅)라고 칭하는데 훔치고

빼앗아 욕심을 채운다. 남방의 여러 읍에서는 또 이른바 근수조(勤受租,

즉 面主人의 役價이다)라는 것이 있어 환곡과 뒤섞어 경상적인 부세로 삼고 있다.

또 군리(軍吏) 그리고 풍헌, 약정즉 面任이다과 더불어 안팎으로 패거리를 지어 

군정(軍丁)을 농간한다. 갓난애를 낳기만 하면 이미 그 이름을 군적에 올리고

부황든 사람이 새로 이사만 와도 드디어 그 민호를 군적에 기재하는데

수령은 이미 깊이 들어앉아 있으니 어떻게 그것을 들어 알겠는가?
요전(徭錢)徭錢이란 것은 民庫錢 따위이다·세전(稅錢)·창전(倉錢)倉錢이란 것은

환곡의 모곡을 作錢한 것이다· 군전(軍錢)을 성화같이 재촉하여 당장에 다 거두어

마조강패(馬弔江牌)로 노름을 하거나 고리대를 놓으면서도 백성이 거납한다고

일컫고 주첩(朱牒, 이름을 刑杖에다가 쓴 것이다)을 속여 발부하고는 포흠(逋欠)을

짊어진 채 도망가면 백성들로부터 다시 징수한다. 이것들은 모두 저졸의 농간질인

것이다. 무릇 최과(催科)하는 방법에 있어서 힘을 헤아려 너그럽게 하고

의(義)를 설명하여 깨우칠 것 같으면 거납(拒納)하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

수령은 마땅히 이러한 것을 알아서 저졸(邸卒)을 내보내지 말고 단지

풍헌·약정으로 하여금 납부를 재촉토록 하여도 기한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포권(捕權)이란 이러한 것이다. 수령이 백성을 부름에 누가 감히 거부하겠는가.

혹은 송사하는 백성이 무고하거나  혹 군리가 허위 고발하면 수령은 그것을 믿고

문득 차사(差使)를 내보낸다. 홍첩(紅帖)[도장을 찍은 傅令]이 마을에 이르면

원래 예전(禮錢)이 있어 부자는 500푼이고 가난한 자는 200푼이며 붉은 포승줄로

겁을 주자, 술 빚고 돼지를 삶느라 온 마을이 떠들썩하여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으니 수령은 마땅히 이를 알아 무릇 도적이 나타난 경우 이외에는

포졸을 보내지 말 것이다.
평안도·황해도에는 보솔군(保率軍 :이름하여 奉足이라고 한다)이 있어 해마다

200푼을 징수하니 군첨(軍簽) 4)과 다름이 없고, 남쪽 지방에는 계방촌 5)이 있어

해마다 1만전을 징수하고 공적인 부세(賦稅)를 면제하니백성이 초췌하고

역(役)의 편중에 고통받고 있음이 모두 이 따위들 때문이다.

수령이 이를 혁파하려고 하면 아전은 문득 말하기를 『신영(新迎)때의 복장이

이에서 지출되고 감사의 순찰에 소요되는 지공(支供)이 이에서 지출됩니다.

만일 이 관례를 폐지하면 공작의 꼬리를 머리에 꽂을 수가 없고 건작(乾鵲) 6)의

옷을 등에 걸칠 수가 없으며 상영(上營) 7)의 군뢰 8)에게 닭을 대접할 수가 없고

마중나가는 취수(吹手) 9)를 말태울 수가 없읍니다』라고 하면 수령은 이를 믿고

느긋이 누워 이들 그릇된 관례가 모두 30년 이래의 새로 생긴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30년 이전에는 신임 수령이 부임할 수 없었으며  감사가 순찰할 수

없었겠는가? 보솔(保率)을 고르게 시행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겠으나

계방은 폐해가 많으니 혁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연해의 읍들과 섬의 저졸은 그 침학이 더욱 심하여 여러가지 농간질이 뭍에서보다

열 배나 된다. 먼 곳을 감싸주는 정사에 있어서 관계가 없다 하여 개의치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니 그 보살피는 바는 마땅히 몇배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문졸(門卒)에는 으례 도두(都頭, 都使令이다)가 있다. 무릇 사령청에 들어오는

수입은 도두가 먹는데, 많은 경우에는 10만푼(1천냥이다)이고

적은 경우에도 5만푼이다. 이른바 보솔전·계방전(契防錢)은 전부 도두 한입에

들어가고 문들의 차석(次席) 이하는 일수반전(一銖半錢)도 몫이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전에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본 것이나 지금 남쪽에서 본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곡산부(谷山府)에 군수고(軍需庫)가 있어 세입(歲入)의 돈이 2천냥이었는데

그 반은 도두가 혼자 차지하였다. 내가 그 법을 고쳐 문졸 30명에게 다달이

2냥씩을 주었다. 일년에 돈 720냥을 지출하여 문졸들로 하여금 고루 나누어

가지게 하고 나머지 돈 280냥은 도두의 차지로 삼도록 하고 동령(動鈴)·

조곤(釣鯤)의 관습은 일체 엄금하였더니 환성이 우뢰와 같았고 모두들 잘된

처사라고 하였다. 지금 강진군의 도두는 일년에 1천냥을 먹는데 문졸의 수는

20명이 안된다. 만일 한 문졸에게 다달이 3냥을 준다면 그 총액이 곡산의 경우와

같으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경우들에는 이러한 방법을 쓸 것이다.
『다산필담(茶山筆談)』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예(門隸) 10)가 구걸하는

명목은 대단히 많다. 정초에는 떡국값을 요구하고 추석에는 제수(祭需)를 바라며

망종(芒種)에는 보리를 요구하고 상강(霜降)에는 면화(棉花)를 바라며 먼 길에서

돌아오면 그 노비(路費)를 추징(追徵)하고 벌을 주게 되면 장(杖)질을 가볍게 칠 

댓가를 넌지시 토색한다. 가지가지 자질구레한 사례들을 다 말할 수가 없다.

혹은 간사한 노파로 하여금 대행시키기도 하고 혹은 고공(雇工)을 나누어

내보내어 문을 박차고 집을 부수며 마음대로 빼앗게 하니 울부짖고 억울해함이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다. 수령은 취임 당초에 마땅히 수리에게 물어서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은 그 유래가 비록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엄금토록 신칙할

것이며, 만약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경우에는 이 수리를 벌주면 

징치(懲治)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구걸한 것들은 대부분

두령의 독차지로 돌아가고 여러 조무래기 문졸은 혜택에 끼이지 못한다.

혹자는 저 도두에게는 일정한 보수도 없는데, 게다가 상례적인 구걸을 금하면 어

떻게 살겠는가라고 하지만 예하의 뭇 문졸들도 모두 일정한 보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어찌하여 유독한 사람만이 이렇게 살쪄야 하는가?

만일 순번의 차례에 따라 도두로 차임될 자는 내가 교체되어 돌아갈 때라도 마땅히

그대로 차임되게 하되차임이 안되면 그의 평생 소원이 나 때문에 불리하게 

될 것이다. 이미 여러번 도두를 지낸 자는 돌볼 필요가 없다. 』]

 

[각주]
1) 창우(倡優) : 광대(廣大). 

2) 굴뢰(窟儡) : 꼭둑각시놀이 연희자. 

3) 관둔전(官屯田) : 조선왕조 세종 6년(1424)에 생긴 제도로서 인리(人吏)나

    관노비로 하여금 경작하여 수확의 전부를 차지하도록 한(自耕無稅)의 토지. 

4) 군첨(軍簽) : 첨정(簽丁). 

5) 계방촌(契防村) : 계방촌(契房村)의 잘못인 듯. 계방촌은 제역촌(除役村)의 하나. 

    세법상(稅法上) 277혈(頁).

6) 건작(乾鵲) : 까치. 

7) 상영(上營) : 속오군(束伍軍)의 영(營)-사(司)-초(哨)-대(隊)-기(旗)

    편제에 있어서의 영(營)을 가리키는 듯함. 

8) 군뢰(軍牢) : 동오군 영장 휘하의 군직. 금위영의 표하군

    (각종 잡된 軍務에 종사하는 軍人)에도 군뢰가 있다. 

9) 취수(吹手) : 속오군(束伍軍) 영장(營將) 휘하의 군직(軍職). 

10) 문예(門隸) : 문졸(門卒).


  

★  官奴作奸 惟在倉廒 有吏存焉 其害未甚 撫之以恩 時防其濫.
     (관노작간 유재창오 유리존언 기해미심 무지이은 시방기람. )
     관노(官奴)의 농간은 오직 창고에 있는데 창고에는 아전이 있으니, 

     그 폐해가 대단치 않으면 그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져 때때로

     그 지나친 행동을 막으면 되는 것이다.


[여러 관속(官屬) 중에서 관노가 가장 고되다. 시노(侍奴 : 及唱이라고 함)는

종일 뜰 위에 서서 잠시도 떠날  수가 없고 수노(首奴)는 물자 구입을 맡고 있고

공노(工奴 :工房의 庫直이다)는 장작(匠作) 1)에 대한 일을 맡고 있고 

구노(廐奴, 즉 驅從이다)는 말 키우고 일산(日傘)을 들며 방노(房奴 : 房子이다)는

방을 덥히고 뒷간을 치우는데, 수령의 행차에는 여러 관노가 모두 따라가야 한다.

그 노고가 이와 같은 데에도 그 노고에 보수가 있는 것은 포노(庖奴 : 肉直이다)·

주노(廚奴 : 官廳庫直이다) 그리고 창고의 창노에 불과할 뿐이며 그 보수라는 것도 

낙정미(落庭米) 몇 섬일 뿐이니 어찌 딱하지 않은가? 그러나 창노는 반드시

원정(園丁 : 園頭漢)을 겸하는데 원정은 일년 동안 남새를 대느라고 빚을 지고

힘이 빠진 뒤에야 이 창노 자리를 얻게 된다. 때문에 관노를 거느리는 길은

오직 어루만지고 돌보아서 은혜를 베푸는 데에 있고 농간을 방지해야 할 바는 

오직 창고지기에 있을 뿐이다. 읍례는 여러가지로 다르니 혹 관노가 강성하여

농간의 폐단이 많은 경우에는 마땅히 엄하게 조사하여 방자함을 막아야 할 것이다.
시노로서 농간하는 자는 혹 관정에 송사하러 온 백성이 있으면 수령은 아무 말이

없는데 제가 나서서 성내어 꾸짖고, 수령은 부드러이 말하는데 제가 나서서

함을 지르고, 수령은 긴 말이 없는데 제가 나서서 잔소리를 하고, 

수령은 아직 모르는데 나서서 사실의 기밀을 들추어내고, 수령은 명령하지 않는데

큰 소리로 매우 치라고 하여 백성의 비난을 사고 수령의 체모를 손상시킨다.

이와 같은 시노는 마땅히 거듭 엄하게 다짐할 것이며 범하는 자는 벌할 것이다. 

수노가 저자에 나아가 물자를 구입함에 있어 관청의 구입을 빙자하여 헐값으로

빼앗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법은 앞에서 말하였다.[律己條에 있다]
공노는 노끈·짚신·죽기(竹器)·고리짝·토기(土器)· 철기(鐵器)를 관장하는데,

이것들을 씀에 있어 절제가 없어서 으례 추가징수를 요청하니

절간이 조락 피폐케 되고 점촌(店村) 2)이 결딴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항식(恒式) 이외에는 결코 추가징수를 말 것이며 혹 추가징수하는 경우에는

분명히 인첩(印帖)을 내리면 공노의 농간이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점촌에는 혹 연례적으로 공노에게 사사로이 주는 것도 있는데 이는 금지하면

안될 것이다. 포노(庖奴)·원노(園奴)의 폐단은 이미 앞에 나와 있다.

창노의 말질 농간은 엄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제사나 잔치가 있으면 마땅히

그 남은 음식으로써 관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것이다.

혹 춥고 굶주림이 심한 관노가 있을 때에는 수령은 옷과 음식을 주어서

가노(家奴)를 보살피듯 할 것이다. 이래야 좋은 수령인 것이다. 

관노는 일시적으로나마 나를 상전(우리 나라 풍속에 奴는 주인을 上典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부르니 은혜는 두터이 베풀지 않을 수 없다.
관가에는 때로 탐탁치 않은 재물이 있는데 수령이 그것을 쓰자니 청렴치 못하고

그것을 버리자니 의미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은 고된 일을 하고도 보수가 없는

관노·관비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또한 바람직한 것이다.
우속(牛贖) 3), [주세 양조가 금지되어 있을 때에는 반드시 稅가 있다]

관청에 압수된 소나무, 도박의 속전(贖錢) 4), 쇠가죽, 소의 힘줄, 쇠뿔 등의 값,

주인을 알 수 없는 장물,  이것들이 모두 이른바 탐탁치 않은 재물이다.
관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생인데 주탕(酒湯)이라고도 하며

또 하나는 비자인데 수급(水汲)이라고도 한다. 기생은 비록 가난하지만 모두

돌봐주는 자가 있으니 수령이 보살필 것은 못된다. 오직 더러운 돈으로

수령의 옷을 바느질하게 하지만 않으면 된다.(疋縷飛의 일은 이미 앞에 나와 있다)

가장 불쌍한 것은 추한 용모의 급비(汲婢)이다. 겨울에는 삼베옷을 여름에는

무명옷을 입으며, 머리는 쑥대같이 하여 밤에는 물긷고 새벽에는 밥짓느라

쉴새없이 분주하다. 수령이 이들에 대하여 능히 동정하고 보살피며 때때로

옷도 주고 곡식도 주며 그 지아비의 형편도 물어 그 소원도 이루어주면

(軍役을 면제해 주는 것 같은 따위) 또한 좋지 않겠는가?

무릇 수령으로서 잘 다스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아전의 원망이 있을 것인데,

만일 관속 삼반 5)이 모두 수령을 원망할 것 같으면 또한 괴롭지 않겠는가?

강한 자에게는 원망을 받고 약한 자에게는 은혜를 드리우면 어질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늘 듣기로 이웃 고을에서 노래와 춤으로 행락을 하면서 수천의

돈을 기생에 주고 기생은 그 돈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데 나는 그 돈의

반으로 이들 급비에게 베풀면 이들은 뼈에 사무치는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않는다. 

다른 수령은 더러운 소리를 퍼뜨리는데 나는 어진 소문이 나게 되니 그 이해가

어떠하겠는가? 교체되어 돌아오는 날에 성의 남문 밖에서 기생은 좋아라고 웃고

급비는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 이에 현명한 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예안(禮安) 6) 현감을 지낸 한광전(韓光傳) 7)이 일찌기 여러 고을을 다스렸는데

방노(房奴)와 급비(汲婢)에게 은혜와 사랑이 유달리 두터웠던바,

교체되어 돌아가는 날에 그들이 소리를 내어 슬피 울었다.

음탕한 여자를 속공(屬公)하는 법은 우리나라 법전에도 보이지 않고

『대명률(大明律)』에도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 음탕한 여자가 음탕한 짓을 하여

그 남편이 이를 잡아 진정으로 속공시키기를 원하면 속공하였다.

근래에는 수령이 법을 무시하여 무릇 촌백성이 아내를 빼앗겼다고 와서 호소하여

잡힌 뒤에 진정으로 다시 결합하기를 원하여도 또한 모두 속공하며 심지어는

마을에서 몰래 간통하는 여자를 관비와 기생으로 하여금 밀고하게 하여

강제로 속공시켜 관비로 삼으니 허실이 섞갈려 억울한 경우가 또한 많다.

대개 이는 관기로서 예쁜 자는 수령이 하나씩 데리고 가,

등록된 기생이 날로 줄어듦에 이들로써 채우기 때문이다.

또 『대명률』을 보면 무릇 양녀(良女)를 사서 기녀나 창우(倡優)로 삼는 것에 대하여

율례(律例)가 지극히 엄하지만 8) 수령이 이미 기생을 데리고 가면 그 대신에

관비가 될 자는 양녀를 사서 창기로 삼지 않으면 구할 수가 없으니, 

속비대구 9)의 법(大典通編)은 저 『대명률』의 율례와 서로 모순되니 행할 수가 없다.
무릇 속공되는 비(婢)는 한번 관적에 오르면 그 자녀도 모두 공천(公賤)이 되니

어진 사람의 정사에서는 경솔히 시행하면 안된다.

만일 본남편이 진정으로 원하거나 음탕한 여자가 스스로 투신하여 속공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아니면 속공해서는 안된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강도의 처와 딸은 속공하여 비(婢)로 삼는다』는

조문 10)이 있으나 이 법은 근래에는 씌어지지 않으니 이는 모두 사대부들이

법률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주례(周禮)』를 보면『사려(司勵)는 도적 다스리는 것을 맡는다.

도적에 연좌되어 노(奴)가 된 자로서 남자는 죄예(罪隸) 11)에 소속시키고

여자는 용고(舂槀) 12)에 소속시킨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 법은 본래 성인의 경전(經典)에서 나온 것인바, 마땅히 닦아서 행할 것이다.]


[각주]
1) 장작(匠作) : 물품 제작. 

2) 점촌(店村) : 광산촌 및 철기·토기 등의 제작소가 있는 마을. 

3) 우속(牛贖) : 소의 도살 금지령을 범한 자애게 과하는 벌금. 

4) 속전(贖錢) : 벌금. 

5) 관속 삼반(官屬三班) : 지방의 관아에 소속된 이속(吏屬)·군교·노비를 가리킴. 

6) 예안(禮安) : 경상도에 있었던 고을. 지금의 경북 안동군 예안면. 

7) 한광전(韓光傳) : 18·19세기의 관리(官吏)로서 정약용(丁若鏞)의 선배. 

8)『대명률(大明律)』권25 매량위창조(買良爲娼條)에 『범창우악인(凡娼優樂人)

    매양인자녀위창우(買良人子女爲娼優) 급취위처첩(及娶爲妻妾),

    혹걸양위자녀자(或乞養爲子女者) 장일백(杖一百)』이라고 규정. 

9) 속비대구(贖婢代口) : 노비가 자기 자리에 다른 노비를 대신 넣고 자기는

    면천하는 대구속신(代口贖身)을 뜻한다. 이 규정은 법전상으로는 1744년

    반포된『속대전(續大典)』에서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공천대구속신자(公賤代口贖身者)

    소대노비누식년호적상고(所代奴婢累式年戶籍相考) 명부적실(名付的實) 

    연후이년세상당자계구(然後以年歲相當者計口) 이노대노(以奴代奴)

    이비대비(以婢代婢) 여혹모위현노(如或冒爲現露) 즉기당신(則其當身)

    감관(監官)·색리(色吏)·두목(頭目) 병장일백류삼천리(並杖一百流三千里)

    수령삭직(守令削職) 관찰사파직(觀察使罷職)-속신후십년내(贖身後十年內) 

    대납노비물고자(代納奴婢物故者) 환천(還賤).공천사위속신자(公賤詐爲贖身者)

    환천(還賤) 색리장일백원지정배(色吏杖一百遠地定配)

    관원이제서유위율론(官員以制書有違律論)-』(卷5 贖良條). 

   『속대전(續大典)』에 명문으로 규정되기 이전인 17세기 중엽에 이미

    대구속신제(代口贖身制)가 관행되고 있었다.

    효종은 효종 6년(1655) 1월 26일 하교(下敎)에서 『노비대속(奴婢代續)

    사극허소(事極虛踈) 자금물허속신(自今勿許贖身)』이라고 하였던바,

    인조 말년의 수공공천(收貢公賤)은 약 19만명이었는데 

    효종 6년(1655)에는 2만 7천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격감(激減)에는 대구속신(代口贖身)이외에도 납속면천(納粟免賤),

    납전면천(納錢免賤), 군공면천(軍功免賤), 공로면천(功勞免賤),

    구포속량(購捕贖良)  (犯人捕告에 의한 免賤),

    진고면천(陳告免賤)(逃漏奴婢陳告에 의한 免賤) 등이 작용하였다. 

    대구속신(代口贖身)의 규정은 『대전통편(大典通編)』 권5 형전(刑典)

    속량조(贖良條)에 그대로 살아 있다. 

10)『대전통편(大典通編)』 권5 형전(刑典) 장도조(贓盜條)에

      『강도불사자(强盜不死者) 의율논죄후(依律論罪後) 자강도이자(刺强盜二字)

      재범처교(再犯處絞)』라고 규정되어 있고 그 주(註)에 『강도처자(强盜妻子)

      영속소재관노비(永屬所在官奴婢)』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다른 주문의 주(註)에서는  『적인처자(賊人妻子) 이사노비(以私奴婢)

      입어본주호내자물위정속(入於本主戶內者勿爲定屬) 』이 되어 있다. 

11) 좌예(罪隸) : 추관(秋官) 소속의 관(官)으로서 소역(小役)을 관장. 

12) 용고(春槀) : 제사나 빈객(賓客)의 미곡을 제공하는 것을 관장한 춘인(春人)과

      내외조의 당직(當直) 계리(計吏)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관장한

      고인(槀人) 등 지관(地官) 소속의 두 관(官). 


  

★  侍童幼弱 牧宜撫育 有罪宜從末減 其骨格已壯者 束之如吏.
     (시동유약 목의무육 유죄의종말감 기골격이장자 속지여리. )
     시동이 어리고 약하면 수령이 마땅히 어루만져 길러야 하며 죄가 있더라도

     가장 가벼운 죄로 다스려야 하겠지만 몸이 이미 건장하게 자라난 자는

     아전과 같이 단속하여야 한다. 


[시동이란 통인(通引)인데 혹은 지인(知印)이라고도 일컫는다.

이들의 농간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혹은 위조 첩문에 도장을 훔쳐서

찍고 혹은 과강(科講) 1)에 공첩(空帖)[照訖帖 2)]을 훔쳐내고 

혹은 시장(試場, 白日場 3이다)에서 방권(房卷) 4)을 꾸기도 한다.

대저 이들은 수령의 동정을 엿보아 살펴서 바깥에 퍼뜨리고 교묘하게 유언을

꾸며서 헐뜯어 고자질하니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린 시동의 죄에는 태형만 가할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곤장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크게 옳지 못하다. 통인 중에 큰 자는 지통통인(紙筒通引)이라고

하는데 절에서 달마다 바치는 지물(紙物)에 반드시 퇴짜를 놓아 그 위엄을

세우려고 하니 단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산청현(山淸縣)의 수통인(首通引) 5)은 지승(紙僧) 6)을 곤장쳐 죽이고도

검안(檢案) 7)에는 결곤(決棍) 8)을 절곤(折困) 9)으로 고쳤기 때문에 옥사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0)은 그 조사보고에서

『결(決)과 절(折)의 음을 통용하는 것은 상한(常漢 11 : 망예)의 관습이요

곤(棍)과 곤(困)을 잘못 읽은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라고 하였던바, 이에 옥사의

진상이 드디어 밝혀졌다. 이로써 보건대 이들 통인배를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된다.

 

[각주]
1) 과강(科講) : 소과초시(小科初試)에 앞서 각 고을에서 시행하는 예비시험인

    조흘강(照訖講)을 가리킨다. 

    수령(守令)이 주재하여 사서(四書)의 암송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2) 조흘첩(照訖帖) : 조흘강(照訖講)의 합격자에게 준 증서. 『대전통편(大典通編)』 

    권3 예전제료조(禮典諸料條)에 『과장응부인(科場應赴人)

    무조흘호패자(無照訖號牌者) 정거(停擧)』라고 규정되어 있다. 

3) 백일장(白日場) : 지방 고을에서 유생(儒生)들의 글공부를 장려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시문(詩文)짓기의 시험, 

4) 방권(房卷) : 답안지를 가리킨 듯함. 

5) 수통인(首通引) : 수석(首席)의 통인(通引). 

6) 지승(紙僧) : 지장승려(紙匠僧侶)의 준말인 듯함. 조선전기에 제지(製紙)를

    담당한 자는 주로 지장(紙匠)(經國大典에는 京紙匠 91명, 外紙匠 698명으로

    되어 있다)과 농민이었다. 절에서도 불경을 많이 인출(印出)하였기 때문에

    제지기술자(製紙技術者)가 상당히 있었다고 보여진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지장이 많이 유산(流散)되어 중을 지장으로 편입시켜

    절에 지역(紙役)을 부담시켰던 경우가 많았다. 관에서는 이들 지장승려를

    입역(立役)·부역(賦役)의 형태로써 제지노동(製紙勞動)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대동법(大同法) 실시로 공물주인(貢物主人)이 방물지(方物紙)를

    무납(貿納)하게 됨으로써 지장승려들은 공물주인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소생산자(小生産者)로 전화(轉化)하였다. 일반 지장들도 사원에 유입(流入)하는

    경우가 많아져 사원의 지소(紙所) 즉 지물제작소는 조선왕조후기 제지업의

    주류가 되었다. 

7) 검안(檢案) : 살인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시체의 상태와 특징, 피살자의 가족·

    친척·이웃 등의 참고 진술, 증인의 증언, 그리고 가해자의 진술 등을 기록하여

    올리는 보고서. 초검안(初檢案)은 사건 발생지의 수령이, 복검안(覆檢案)과

    삼검안은 이웃 고을의 수령이 그 보고자가 된다.

    사검안이 작성되는 경우도 혹 있었다. 

8) 결곤(決棍) : 곤장을 침 . 

9) 절곤(折困) : (애를 먹임)이란 뜻인 듯함. 

10) 박지원(朴趾源) : 영조 13∼순조 5(1737∼1805).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본관은 반남(潘南). 벼슬은 한성부판관· 양양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홍대용·박재가(朴齋家)와 함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대표자로서 과학기술의 개발, 상업의 발달을 역설하였고 지식인의 새로운

      존재형태를 추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이 있다.
 11) 상한(常漢) : 상민(常民)과 노비를 합쳐 비칭(卑稱)하는 말인 상놈이란 뚯이다.


     

 

제 3 장   용인(用人) 

                                   (사람을 쓰다.)

 

★ 爲邦在於用人 郡縣雖小 其用人 無以異也.
     (위방재어용인 군현수소 기용인 무이이야. )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사람 쓰기에 달렸으며 군· 현의 규모가 비록 작더라도

     사람 쓰는 일은 나라와 다르지 않다.

 

[자유(子游) 1가 무성(武城) 2)의 원이 되었을 때 공자가 『쓸 만한 사람을 얻었는가』

하고 물었다. 자유가 『담대멸명이란 사람이 있는데 사잇길을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나의 방에 들어오는 일이 없읍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지금 사람들이 담대씨를 다만 읍중의 한 민간인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유가 담대를 얻어서 보좌관으로 삼은 것은 후세의 주부(主簿)와 위(尉) 3) 그리고

우리나라의 향승(鄕丞 :요즈음은 鄕所 4)과 같은 것이므로 공자가 쓸 만한 사람을

얻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자유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읍내 민간인 가운데 어진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면 쓸 만한 사람을 얻었다고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칭찬해 주더라도 또 사사로움을 끊고 공무를 위하여

희생한다고만 말할 뿐이었을 것이다. 사잇길을 다니지 않는다고 한 것은 겹문이나

옆길을 지나 관아에 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공무가 아니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 것은 오직 나라일과 백성의 일로만 들어와서 의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향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됨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향정(鄕亭) 5)의 직책을 맡기려 하는 사람은

이 글을 숙독함이 옳을 것이다.
중궁(仲弓) 6)이 계씨(季氏) 7)의 가신이 되었을 때 정사하는 법을 물었는데

공자가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일에 힘쓰라 하였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어진 사람 등용하기를 급무로 삼아야 한다. 

원리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소 잡는 칼로써 닭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향승·군교(軍校)와 여러 아전에서부터 풍헌· 약정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쓸 만한 사람을 얻는 데 힘써서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복자천(宓子賤) 8)이 선보(單父) 9)를 다스릴 때 그곳에는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로 사귀는 사람도 있었고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거문고나 타고 정당 아래로 내려오지 않아도 선보는 다스려졌다. 

무마기(巫馬期) 10)도 역시 선보를 다스렸는데 아침 일찍 나와서 밤 늦게 들어가고,

밤낮으로 앉아 있지 않으면서 몸소 직접 일을 보아야 선보가 다스려졌다.

무마기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복자천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에게 맡겼고 그대는 자신의 노력에 맡겼다고 할 것이다.

노력에 맡기면 고되고 사람에게 맡기면 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각주]
1) 자유(子游) : 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 사람. 성은 언(言), 이름은 언(偃),

    자유(子游)는 자(字)이다. 공자의 제자.

2) 무성(武城)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읍으로 지금 산동성 비현(費縣)의 서남. 

3) 위(尉) : 현(縣)에 있는 관리로서 도적을 잡는 일과 부정의 사찰을 맡았다. 

4) 향소(鄕所) : 향청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 향청의 요직인 좌수(座首)·

    별감(別監)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이다. 

5) 향정(鄕亭) : 지방 도로의 각 요소에 설치된 것으로, 연락·숙박·감시등의 기능을

     갖고 있음. 10리(里) 1정(亭),  10정(停) 1향(鄕). 

6) 중궁(仲弓) :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 염옹(冉雍)의 자. 공자(孔子)의 제자,

    공문십철(十哲)중의 한명. 

7) 계씨(季氏)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계손씨(季孫氏). 문공(文公) 때부터

    소공(昭公) 때까지 국정을 장악하였다. 

8) 복자천(宓子賤) :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 복불재(宓不齋).

    자가 자천(子賤)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9) 선보(單父) :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읍명(邑名). 산동성 단현(單縣)의 남쪽. 

10) 무마기(巫馬期) : 중국 춘추시대 진(陳)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무마시(巫馬施)의 오기(誤記)이다. 자는 자기(子旗), 공자(孔子)의 제자이다. 


  

★  鄕丞者 縣令之輔左也. 必擇一鄕之善者 俾居是職.
     (향승자 현령지보좌야. 필택일향지선자 비거시직. )
     향승이란 수령의 보좌역이다. 반드시 한 고을에서 가장 착한 사람을 택하여

     이 직책을 맡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호선생이 말하기를 『요사이 수령을 보좌하는 직임으로 좌수·별감이 있는데

이를 향소(鄕所)라 한다. 처음 그 제도를 만들 때는 좋은 것이었다.

옛날에는 향소가 있고 또 경소(京所) 1)도 있었는데 그 고을 출신으로서

서울에 사는 사람을 골라 고을의 일을 잘 돌보고 주선하게 하였다. 

경소라는 이름은 『미암일기(眉巖日記)』2)에 보인다.荷潭錄 3)에 있다
세종대왕이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있을 때 함흥 경재소를 맡았다.

또 『송와잡록(松窩雜錄) 4)에서는 말하기를 『동래(東萊) 부사가 장차 향소를

처벌하고자 경소에게 알리고 그 직임을 바꿀 것을 청하였다.

그때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雅弼) 5)이 경소당상으로 있었다』라고 하였다. 

당시는 향소가 비록 과오가 있어도 수령이 감히 마음대로 바꾸거나 함부로 벌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만약 옛 제도를 다시 다듬어서 그 재기(才器)를

시험하고 발탁하는 길을 열면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살피건대 지금에는 오직 안동부에서만 사대부가 향소가 되고 있다.
선조(先朝) 6)의 말년에 어느 서원(書院)의 원장(院長) 이모(李某)가 안동 좌수의

첫째 물망에 오르고 승지 김한동(金翰東) 7)은 이미 전라감사를 지냈는데도

다음 물망에 올랐으니 이것이 옛법인 것이다. 옛날에는 8도가 모두 그리하였는데

뒷날에 모두 무너지고 오직 안동만이 아직 옛 제도를 지키고 있다. 

안동이 홀로 만든 특별한 제도가 아니다. 대저 수령의 직책에는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한 사람이 횡포를 부리면 백성이 쓰러진다.

그러므로 감사로써 그를 살피게 하고 도사(都事)로써 그를 감독하게 하고

명사(名士)를 택하여 향소에 있게 하고 대신을 명령하여 경소(京所)에 있게 하여,

서로 연결 통제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나쁜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충녕대군은 그 본향이 함흥이며 문익공 정광필은 그 본관이 동래이다. 

지금 경소법은 비록 다시 복구할 수 없더라도 향소는 반드시 명사를 등용하여

마땅히 안동의 제도와 같이 한 것이로되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우석(金禹錫) 8)이 안동 부사가 되었었다. 옛날부터 향임의 선택을 중히 해왔는데

중년에 와서 점점 가벼이 하게 되었다. 김우석이 안동부에 부임하여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손자 규(煃)가 평소 향중의 신망을 입고 있음을 듣고

그를 좌수에 임명하였다. 그때 규의 나이 70이 넘었으나 곧 나아가서

부사를 만나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성주(域主)의 정사가 깨끗하여

실로 내 뜻에 맞으니 내가 어찌 명령에 따르지 않겠는가』하였다. 

이것은 여남(汝南) 9)과 남양(南陽)10)에서 태수(太守)가 능히 범맹박(范孟博)과

잠공효(岑公孝)로 하여금 즐거이 군현의 정사에 참여하게 한 것과 같으니

김우석의 정사하는 이치를 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각주]
1) 경소(京所) : 경재소(京在所). 15세기초 지방의 유향소를 장악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앙의 기구. 세종 17년(1435)에 정비·보강된 제도에 의하면 각 고을의 경재소에

    그 고을과 연고가 있는 조관중(朝官中)에서 좌수(座首) 1명, 참상별감 2명,

    참외별감 2명을 두었다. 연고 범위는 2품 이상은 8향  즉 부(父)의 내(內)·

    외향(外鄕), 모(母)의 내(內)·외향(外鄕), 조(祖)의 외향(外鄕),

    증조(曾祖)의 외향(外鄕), 처(妻)의 내(內)·외향(外鄕)이고 6품이상은 위에서

    처(妻)의 내(內)·외향(外鄕)을 뺀 6향이고 참외(參外)는 위에서

    증조(曾祖)·조(祖)의 외향까지를 뺀 4향이고 무직의관자제(無職衣冠子弟)는

    부모의 내향(內鄕)인 2향이었다. 경재소는 그 고을 유향소 품관(品官)들의

    작폐(作弊)를 감독하고 동시에 그 고을의 공무(公務)를 장악하였으나

    수령의 행정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고려의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경재소와 유향소로

    분화된 셈인데 이는 양왕조(兩王朝)의 지방통치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양반주도(兩班主導)의 지방통치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경재소(京在所)는 혁파되었다. 

2)『미암일기(眉巖日記)』: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일기. 

    1568년부터 1577년까지의 경연일기(經筵日記)로서

    이조시대의 개인 일기로서는 가장 방대한 것의 하나이다. 

3)『하담록(荷潭錄)』 : 조선 중기 김시양(金時讓)(1581∼1643)의 수기류(隨記類)인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을 가리킨다. 

4)『송와잡록(松窩雜錄)』 : 조선 중기 이개(李槩)(1522∼1600)의 수기류(隨記類).

    대체로 고려 말기부터 이조 선조 때까지의 명사(名士)들에 대한

    사적(事蹟)·일화(逸話) 및 기담(奇談)·설화(說話) 등을 적었다. 

5) 정광필(鄭光弼) : 세조 8∼중종 33(1462∼1538). 자는 사훈(士勳),

    호는 수천(守天), 본관은 동래(東萊), 시호는 문익(文翼).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일시 파직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었고 중종(中宗)의 배향신(配享臣)이 되었다. 

6) 선조(先朝) : 여기서는 정조시대(正祖時代)를 가리킨다. 

7) 김한동(金韓東) : 영조16∼순조 11(1740∼1811). 자는 한지(翰之).

    호는 와은(臥隱),본관은 의성(義城). 벼슬이 승지에까지 이르렀고

    1801년에 천주교도로 몰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다. 

8) 김우석(金禹錫) : 인조 3∼숙종 17(1625∼1691) 자는 하경(夏卿),

    호는 귀래당(歸來堂),본관은 상주(尙州), 시호는 정목(貞穆). 황해도 관찰사·

    형조 판서를 거쳐 도승지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9) 여남(汝南) : 중국 하남성(河南省) 여남현(汝南縣)의 동남쪽에 있었던 군명.

    후한(後漢)때 여남태수 종자(宗資)가 범방(范滂)(字는 孟博)을 임용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그에게 정사를 위임한 후 모든 일을 말없이 승낙하였다. 

10) 남양(南陽) : 하남성 남양현에 있었던 군명. 후한(後漢) 때 남양태수 성진(成瑨)

      (字는 幼平)이 잠질(岑晊)(字는 公孝)을 초빙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그에게 정사를 일임하였는데  그는 호강자(豪强者)들을 크게 탄압함으로써

      고을의 행정을 맑게 하였다고 한다. 

    

 

★  座首者 寶席之首也. 苟不得人 庶事不理.
      (좌수자 보석지수야. 구불득인 서사불리. )
      좌수란 빈석(賓席 1)의 우두머리다. 진실로 마땅한 인재를 얻지 못한다면

      모든 일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다.

[부임한 지 이미 한 달이 넘고 난 후 좌수를 그대로 둘 만하면 두고

그대로 둘 만하지 않으면 향중의 여망에 따라 바꾸도록 할 것이다.

명령을 내려서 『향임을 지내고도 수임(首任)을 지내지 못한 사람은 내일 나와서

기다리라』하고 그들이 오면 정당에서 만나보고 『본관은 일찌기 좌수를 지낸

사람 중에서 새로 좌수를 임명하고자 하니 그대들은 떠들지 말고 문의하지도 말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각자가 권점(圈點) 2)하는 것이 옳다』하고 말한다.
이에 한 장의 종이에다 좌수 지낸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쓰고 차례로 권점하게 한다.

한 사람이 한 사람만 권점하게 한다. 권점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을 좌수로

임명하고 차점자를 부승(副丞)에 임명하여 자리가 비면 대충한다.
좌수는 향대승(鄕大丞)이라 하는 것이 좋고 별감은 좌우부승이라 하는 것이 좋다.

모두 종사랑(從仕郎) 3)의 품계를 주고 해마다 공적을 평가하여 감사나 어사로

하여금 식년(式年) 4)에 각각 9명씩을 추천하게 하고 그 가운데 3인을 뽑아

경관(京官)에 임명하면 갈고 닦아 명성과 품행 있는 사람이 반드시 그 속에서 나올

것이다. 이는 정부에서 강구해야 할 일이다. 황해도·평안도의 5영장(營將) 5)의

중군(中軍) 6)들도 모두 수령과 같이 고과(考課)하는데 향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으리요.[중국의 丞 7)·尉·主簿도 모두 考課한다]
『북사(北史)』8)에 보면 육발(陸발) 8)이 상주(相州) 10)를 다스렸는데 어질고

덕 있는 노인 10명을 예로써 대우하여 정사를 자문하고 십선(十善)이라 불렀다.

이에 농간질하는 자는 들추어지고 숨은 부정은 적발되어 겁탈하고 도적질하는

일이 없어졌다.
완평군(完平君) 이원익(李元翼)이 안주(安州) 목사로 있을 때 정사의 행적이

제일 높았다. 사람들이 정사하는 요체를 물으면 그는 말하기를

『쓸 만한 사람 하나를 얻어 좌수로 삼고 모든 일을 그에게 물어서 시행하니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결재만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각주]
1) 빈석(賓席) : 성주(城主)·지주(地主)라고도 일컬어지는 수령에게 좌수(座首)·

    별감(別監) 등은 원래 빈객(賓客)으로 대우된다는 뜻이니

    여기에서는 향청(鄕廳)을 가리킨다. 

2) 권점(圈點) : 사람을 뽑을 때 후보자의 이름 밑에 ○표를 침. 

3) 종사랑(從仕郎) : 조선왕조 시대 정9품 문관(文官)의 품계(品階). 

4) 식년(式年) : 과거 보이는 시기로 정한 해. 즉 간지(干支)의 지(支)가

    자(子)· 묘(卯)· 오유(午酉)가 되는 해로서 3년마다 돌아옴. 

5) 오영장(五營將) : 인조 5년(1627) 4월 각도마다, 대체로 5개 영(營)을 두고

    여기에 습진(習陣)· 조연(操鍊)을 전담하는 무관(武官)을 영장(營將)으로 두었다.

    그러나 1670년 무렵부터는 지방 수령이 영장을 겸하게 되는 경향이 나타나

    1744년의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수령의 영장(營將) 겸직이 제도화되었던바 

    오직 삼남(三南) 지방에서만 전체 18개영 가운데 14개영에 무관(武官) 영장이

    배치되고 있다. 『속대전』에서 황해도에는 6영(營), 평안도에는 9영을 둔다고

    규정에 따른다면 여기서의 5영장(營將)이란 착오인 듯하다. 

6) 중군(中軍) : 『속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중군에는 종2품 경관무관(京官武官)과 

    정3품 경관무관(京官武官), 그리고 정 3품 외관무관(外官武官)이 있다. 

    전자는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수어청(守禦廳)·

    총융청(摠戎廳) 등 5군영에 각 1원(員)씩 있었다.

    중간의 것은 관리영(開城府)· 진무영(鎭撫營)(江華府)에 각 1원(員)씩 있었다. 

    후자는 경기의 전영(前營)(廣州府尹이 營將을 겸함)과 평안도· 함경도에

    각 1원(員)씩 있었는데 경기전영의 중군은 영장(營將)의 하위(下位)에 있었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순영중군은 영장(營將)의 상위(上位)에 있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의 규정에 따르면 각도에는 외관(外官) 정 3품 당상무관인

    순영중군(巡營中軍)이 1원(員)씩 있어서 영장(營將)을 지휘·감독하였다. 

7) 승(丞) : 중국의 송(宋)나라 이후 군현(郡縣)에서 위(尉)·주부(主簿)와 같이

    수령(守令)을 보좌하던 직임의 하나. 

8)『북사(北史)』 : 중국 당나라 때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사서(史書). 

    북조(北朝) 즉 위(魏)·북제(北齊)·주(周)·수(隋) 4대 242년간의 역사를 서술. 

9) 육발(陸馞) : 중국 후위(後魏) 때 사람. 원문의 육복(陸馥)은 오기(誤記)이다. 

    건안왕(建安王)으로 개봉(改封)되었고 시호는 정(貞). 

10) 상주(相州) : 중국 하남성(河南省) 임장현(臨漳縣)의 서쪽에 있었던 주(州). 

      원문의 상주(湘州)는 상주(相州)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왜냐하면 육발(陸馞)은 상주자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  左右別監 首席之亞也. 亦宜得人 評議庶政.
      (좌우별감 수석지아야. 역의득인 평의서정. )
      좌우별감은 좌수의 다음 자리이다.

      마땅한 적임자를 골라 모든 정사를 평하고 의논해야 할 것이다.

 

[『정요 1)에 이르기를 『좌수는 이방과 병방의 사무를 관장하고, 좌별감은 호방과

예방의 사무를 관장하고, 우별감은 형방과 공방의 사무를 관장한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것은 각 도에 통행되는 읍례이다. 황해도 평안도의 큰 고을에는 또

혹시 예방·병방 등의 이름이 있고 창감(倉監)·고감(庫監) 등이 있어서 10명이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마땅히 6명으로써 6방에 나누어 맡게 할 것이다.

좌수가 이방을 맡고, 수창감(首倉監)이 호방을 겸하여 맡고, 좌별감이 예방을 맡고 

군창감(軍倉監)이 병방을 겸해 맡고 우별감이 형방 (監獄)을 맡고

고감이 공방을 겸해 맡게 하여 직책을 나누어 주고 각각 맡아 살피게 한다.

6방의 문서는 모두 이들의 서명을 받게 하여 무릇 농간질하는 일이 있으면 허물을

서로 나누어 가지게 하면 체모가 엄정해서 지금과 같이 난잡하지 않을 것이다. 

적은 고을의 재력으로 많은 인원을 먹이지 못할 경우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치현결(治縣訣)』에 이르기를 『향승(鄕丞)·향감(鄕監) 2)은 반드시 사람을 골라서

임명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향청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 3명씩 추천하게 하고 그 명단을 향교에 제출하여 권점하게 하여 

최고득점자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한 향(鄕)시속에서는 鄕을 面이라고 한다에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군소(群訴 : 等狀  3))가 들어오는데 그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쓸 만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다. 그 얼굴을 익혀두고 그 의견을 들어두고 사람 됨의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그리고 충성되고 간사함을 분별하여 그가 사는 마을과 성

명을 기록하였다가 향원(鄕員) 4)과 향교 유생들에게 묻고 그 의견을 종합하여

확증을 얻게 되면 실상을 알게 될 것이다. 자리가 생기는 대로 이런 사람으로

메우면 한 달에도 몇 사람을 쓸 수 있고 반년이 못되어 향청·무청(武廳) 5)·풍헌·

전감(田監)이 하나도 한 고을의 신망 있는 사람이 아님이 없을 것이다.
고지주(高智周) 6)가 진사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비현 7)에 보임되었는데

승(丞)·위(尉)의 녹봉이 박한 것을 염려하여 자기의 수입을 고루 나누어주었더니

정사와 교화가 널리 행해졌다.
한황(韓滉) 8)이 오랫동안 양절(兩浙) 지방에 있으면서 채용한 바의 여러 막료들이

각각 그들의 장점에 따랐으므로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일찌기 옛친구의 아들이 찾아왔는데, 한황이 그 능력을 살펴보았으나

장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자리가 끝날 때까지 좌우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으므로 창고의 문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 사람이 종일 꼿꼿이

앉아 있어서 이졸(吏卒)들이 감히 함부로 창고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그 장점을 취하면 세상에 버릴 물건이 없으니 이것이 사람을 쓰는 법이다.]


[각주]
1) 『정요(政要)』 : 안정복(安鼎福)의 『임관정요(臨官政要)』를 가리키는 듯함. 

2) 향감(鄕監) : 전감(田監)·창감(倉監)·고감(庫監) 등을 가리키는 듯함. 

3) 등장(等狀) : 많은 사람이 연기명(連記名)으로 제출하는 소상(訴狀). 

4) 향원(鄕員) : 향사(鄕仕). 

5) 무청(武廳) : 지방 군현에 있는 공해(公廨)의 하나로서 군교의 집합처인 듯함. 

6) 고지주(高智周) :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수주자사(壽州刺史)·어사대부등을 역임. 

7) 비현(費縣) : 중국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 서북에 있었던 현명(縣名). 

8) 한황(韓滉) :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자는 태충(太沖), 시호는 충숙(忠肅).

    성품이 강직하고 이사(吏事)에 밝았다.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 강회전운사(江淮轉運使)를 지냈다. 


  

★  苟不得人 備位而已 不可委之以庶政.
     (구불득인 비위이이 불가위지이서정)
     진실로 적격자를 얻지 못하면 그저 자리만 채울 뿐이니

     모든 정사를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황패(黃覇)가 영천(潁川)을 다스리면서 정사의 성취(成就)와 안정에 힘썼다. 

우두머리 아전 허승이 늙고 병들고 귀까지 멀어서 독우(督郵) 1)가 쫓아내기를

아뢰었다. 황패가 말하기를 『허승은 청렴한 아전이다. 비록 늙었지만 아직 능히

예절을 갖추어 사람을 보내고 맞이할 수 있은즉 잘 듣지 못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선 잘 돌보아주어라』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황패가 말하기를 『우두머리 아전을 자주 바꾸면

전임자를 보내고 신임자를 맞이하는 비용이 들고 간사한 아전들이 그것을 틈타서

장부를 없애거나 재물을 도둑질하여 공사간에 허비되는 비용이 많이 소모되며,

바뀐새 아전이 반드시 현명할 수도 없거니와 옛 아전만 같지 못할 수도 있다. 

무릇 다스리는 이치는 심한 것만 제거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상산록』에 일렀다. 『수령의 권한은 태형 50대까지를 스스로 결단하는 데 불과하다. 

지금에는 법과 기강이 해이해져서 향청과 이청(吏廳)의 태형이 셀 수 없고

군관(軍官)·장관(將官)의 곤장질이 한도가 없으니 백성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수령은 마땅히 사사로이 약속하기를 향청은 태형 10대를 넘지 못하되 읍민에게 

한하며[읍 밖의 백성에게는 태형하지 못하게 한다] 이청은 태형이 10대를 넘지

못하되 관속(官屬)에게만 한하며[일반 백성에게는 笞刑하지 못하게 한다]

군관·장관의 곤장질은 3대를 넘지 못하되 군졸에게만 한하며

[일반 백성에게는 매질하지 못하게 한다] 이를 어긴 자는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수령이 일에 밝지 못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는 정사를 향청에 맡겨서

군송(軍訟) 2)과 부소(賦訴) 3) 등을 모두 사품(査稟) 4)하게 하는데,

좌수가 아전과 더불어 농간을 부려서 뇌물을 받고 사정(私情)을 두거나 

간사한 자를 숨겨주고 정직한 자를 무고하는 일이 있다.

좌수의 권한이 한 고을을 덮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품(査稟) 두 자는 전혀 입 밖에

내지 말 것이다. 부득이 좌수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이 생기면 바로 면전에

불러놓고 묻되 이때 군송(軍訟)과 부소(賦訴)를 낸 백성을 관정에 엎드리게 하고

좌수의 대답을 들어보아 혹시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명할 수 있게 하면 그 일이 쉽게 조사될 것이며 백성들도 원통해하지 않을 것이다.
매양 보면 간특한 향임이 군송(軍訟)이 있어서 사품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송민(訟民)에게서 뇌물 수천푼 수십냥을 받고 첨명 5)에서 제외시켜 준다지만

군리(軍吏)에게는 뇌물이 양이 차게 가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는 딴 사람을 대신

첨명에 넣지 않는다. 뒷날 군포(軍布) 거두는 달이 되면 저 간특한 향임이 스스로

쌀과 포를 마련하여 군리에게 주는데 2년 후에는 그 송민에게서 다시 군포를

거둔다. 간특한 향임이 본래 먹은 돈은 수천푼인데 토해내는 것은 4백푼 뿐인

것이다. 군포 1필의 값은 2백여푼이다. 이에 송민이 놀라서 호소하면 간특한 향임과 

교활한 아전이 서로 미루고 핑계대어 송민이 수령에게 바로 제소하려 하면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있어서 맥없이 돌아갈 뿐이다. 이와 같은 일은 향리에 항상 있는

일이다. 수령이 이와 같은 일을 안다면 사품(査稟) 두 자를 입에서 낼 수 있겠는가.
수령이 일을 잘 보는 경우에는 좌수가 한적함을 견디지 못하여 장기나 바둑으로 소일하게 되고, 

하품하고 기지개 켜며 낮잠을 자게 된다. 이렇게 하다가 열흘이 지나면 휴가를 받고 한 달이 지나면 그만둘 것을 

청하게 되어야만 현명한 수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2년이되기 전에는 갈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수령의 예모가 지나치게 소홀해서는 안된다. 죄과가 있으면 마땅히 종용하여 물러나게 하고 

큰 죄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해직시키고 다음에 잡아들이도록 명령하되 형(刑)은 반드시 감영에 보고하고 

매질도 경솔히 하지 말며 그 체모를 존중하고 염치를 가다듬게 할 것이다. 

난잡하게 매질해 놓고 다시 공직에 돌아오게 하여 예속(禮俗)을 문란케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각주]
1) 독우(督郵) : 중국 제도로서 태수(太守)의 보좌관임. 소속 지방을 순찰하면서 관리의 성적을 조사함, 

2) 군송(軍訟) : 군역 관계의 소송. 

3) 부소(賦訴) : 부세(賦稅) 관계의 소송. 

4) 사품(査稟) : 조사하여 보고함. 

5) 첨명(簽名) : 첨정(簽丁)의 명단(名單). 즉 군적(軍籍)에 얹힌 이름.


  

★ 善諛者不忠 好諫者不偝察乎此 則鮮有失矣.
      (선유자불충 호간자불배찰호차 즉선유실의. )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충성스럽지 못하고, 간언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배반하지 않을 것이니,

     이 점을 잘 살핀다면 실수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다산필담』에 말하였다. 『현령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군도(君道)가있다. 힘써 아첨을 물리치고 간쟁을 흡족히 

받아들이기를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전과 노속(奴屬)들은 그 지위가 낮아서 감히 간쟁할 수도 없고 아첨하기도 불편하다. 오직 향승(鄕丞)이나 수교(首校) 등이 수령의 안색을 살펴 제대로 말을 다할 수 있다. 

이에 아첨으로 비위를 맞추어 수령을 악으로 유도하고 비방하는 말이 들끓어도 「칭송하는 말이 고을에 가득하다」 하고, 수령이 쫓겨날 기미가 있어도 오히려 「오랫동안 재직할 것이니 염려가 없을 것이다」하면 수령은 기뻐하여 

이 사람만이 충성스럽다고 여긴다. 감영의 공문이 이미 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조사를 당하게 되면 어제까지 면전에서 아첨하던 자가 스스로 나서서 비행의 증인이 되어 적은 잘못까지도 들추어내지만 혹 참고 덮어주는 자는 

전날 간쟁으로 귀찮게 여겨지던 사람이다. 수령 된 사람은 모름지기 크게 반성해야 한다. 』
동회(童恢) 1)는 낭야고막(瑯琊姑幕) 2) 사람이다. 젊어서 지방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사도(司徒) 양사(楊賜) 3)가 동회의 법 집행이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채용하였다. 

양사가 탄핵을 입어 면직되자 아전들이 모두 자리를 버리고 갔으나 회만 대궐에 가서 홀로 간쟁하여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이에 아전들이 모두 관청으로 돌아왔으나 회는 지팡이를 짚고 떠나갔으므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장악(長樂) 4)의 진희영(陳希穎)이 과주호조(果州戶曹) 5)가 되었는데 청렴하지 못한 세관(稅官)이 있었다. 

동료들이 이를 갈고 그 세관과 말을 하지 않았으나 호조만이 자주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개전할 것을 바라다가 

틈이 생겼다. 뒤에 세관이 임기가 차서 장차 떠나려 하자 청리(廳吏)가 탐묵장(貪墨狀)을 가지고 군에 가서 말하기를 『행장꾸러미에 각각 번호가 있는데 어느 번호의 꾸러미는 모두 금이다』라고 하였다. 군에서 그 일로 호조에게 

조사하도록 하였다. 호조가 명령을 받고 좋아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재직할 때 징계하여 다스리지 못하고 마침내 농간질하게 하였다가 지금 떠나려 하자 오히려 교묘한 말로써 해치려 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말하고 세관에게 

사람을 보내어 몰래 알려주었다. 이에 세관은 꾸러미의 번호를 바꾸어 순서를 어지럽혔으므로 드디어 무사할 수 

있었다.  막속(幕屬) 6)들도 또한 신도(臣道)가 있다. 무릇 신하로서 간쟁을 할 수 있는 자는 

그 군주를 배반하지 않는다. 남의 웃사람 된 자는 마땅히 이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각주]
1) 동회(童恢) : 중국 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한종(漢宗). 주군(州郡)의 이(吏)를 거쳐 단양태수가 되었다. 

2) 낭야고막(瑯琊姑幕) :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성현(諸城縣) 동남쪽의 지명. 

3) 양사(楊賜) : 중국 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백헌(伯獻), 시호는 문열(文烈), 

    벼슬은 시중(侍中)·태위(太尉) 사공(司空)을 역임하였다. 

4) 장악(長樂) : 중국 복건성(福建省) 민후현(閩侯縣)에 있었던 군명(郡名). 

5) 호조(戶曹) : 중국의 지방관아에서 민호(民戶)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관리(官吏)를 호조(戶曹)라고 한다. 

6) 막속(幕屬) : 막료(幕僚). 거느리고 있는 보좌원(補佐員). 예를 들면 비장(裨將) 같은 따위.


  

★  風憲約正 皆鄕丞薦之 薦非其人者 還收差帖.
      (풍헌약정 개향승천지 천비기인자 환수차첩. )
      풍헌(風憲) 1)이나 약정 2)은 모두 향승이 천거하는데 적임자가 천거되지 않았으면

      향승의 차첩(差帖 3)을 환수해야 한다.

 

[대저 향청의 천거를 오직 뇌물로써만 하니 뇌물을 바치고 천거되기를 꾀하는 자는 반드시 간사한 사람이다. 

농사를 철폐하고 술먹기를 업으로 삼으며 읍내에 출입하면서 오랫동안 농간질하여 백성의 좀이 된 자이다. 

매양 풍헌과 약정을 임명함이 있어서는 향승에게 신칙하여 『진심으로 사람을 택할 것이며 진실로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수령이 당연히 너의 차첩을 거두어들일 것이다』라고 하라. 

이같이 신칙하였는데도 마땅한 사람이 천거되지 않았을 때는 약속과 같이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시골의 미천한 사람들이 흔히 풍헌을 화려한 직임으로 여겨 풍헌·약정에 새로 임명된 자가 비록 쫓겨나더라도 

향승의 차첩을 거두지 않으면 먹은 뇌물을 토해내지 않으므로 수령의 명령이 엄할지라도 끝내 옳은 사람을 

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향승의 차첩을 거두는 것이 옳은 사람을 택하는 묘법이 된다.
풍헌을 혹은 존위(尊位)라고도 한다. 읍례(邑例)가 여러가지로 달라서 군보(軍保)의 첨정(簽丁)을 풍헌이 하기도 하고 혹은 약정이 하기도 한다. 첨정하는 권한을 잡은 자는 마을로 두루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토색질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그 이름이 이미 군적에 오르고 꼽추가 새로 와서 살면 먼저 그 파기(疤記) 2)를 

기록한다. 마땅히 따로이 염탐하여 그 실상을 파악하고 법에 따라 무겁게 다스릴 것이다.
또 이들은 군전(軍錢)과 부전(賦錢)을 모두 제 목구멍을 채우고 포흠이 이미 무거워지면 민간에서 다시 거두는데 

그것이 일년에 수만푼을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 간악한 향임과 교활한 아전이 함께 농간질하여 

그 도둑질한 것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풍헌과 약정을 차출하는 날에 좌수와 군리(軍吏)를 불러서 다짐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포흠을 지게 되면 좌수는 잘못 천거한 허물을 지고 군리는 부정을 숨겨준 죄를 져서 

당연히 두 사람이 이를 보충하게 할 것이다. 나는 식언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백성들에게서 다시 거두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거듭거듭 신칙할 것이며 포흠한 일이 발각되면 곧 다짐한 대로 할 것이다.
남쪽 지방에는 또 소위 연분별유사(年分別有司)가 있어서 전결(田結)을 관장하고 수단별유사(收單別有司)가 있어서 호적을 관장한다. 황해 도·평안도에는 향장(鄕長)과 방유사(坊有司)가 있고 남쪽 지방에는 집강(執綱)과 

계유사(契有司)가 있으니 자질구레한 명목을 모두 기록할 수 없다. 하나라도 명목만 있으면  그것이 모두 약한

백성들을 침학하고 촌락에 해를 끼치게 되니 없앨 만한 것은 없애고 그냥둘 만한 것은 마땅한  사람을 골라서

맡기되 그 공과 죄를 따져야 할 것이다. 대체로 백성 다스리는 이치가 마땅한 사람을 골라 쓰는 데 있다. 

비록 말단 소임일지라도 반드시 현명한 사람을 뽑아 쓰도록 힘써서 고을 안이 맑고 정돈되어 당우삼대(唐虞三代)의 

기상이 있게 하면 훌륭한 수령이 될 것이다. 이대로 확대해 나가면 천하와 국가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풍헌(風憲) : 조선 시대 향소직(鄕所職)의 하나. 면(面)이나 이(里)의 일을 맡아 봄.
2) 약정(約正) : 조선 시대 때, 향약(鄕約) 단체의 임원(任員). 도약정(都約正)과 부약정(副約正)이 있음 
3) 차첩(差帖) : 임명장.
4) 파기(疤記) : 16세에서 60세까지의 군역(軍役) 의무자(義務者) 명단(名單)인 군안(軍案)에서는 
    각자의 얼굴 특징도 같이 기록하였는데 이를 파기(疤記)라고 하였다. 

 


★ 軍官將官之立於武班者 皆桓桓赳赳 有禦侮之色 斯可矣.
     (군관장관지입어무반자 개환환규규 유어모지색 사가의. )
     군관과 장관으로서 무반(武班)의 반열에 서게 되는 자는 모두 굳세고 용맹하여

     모욕을 막아낼 만한 기색이 있어야 될 것이다.   

 

[수교(首校)가 뇌물 받고 군관·장관을 차임하는 것은 좌수의 경우와 같으니 신칙하고 차첩 거두어들이는 것도 

모두 그대로 하여야만 옳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사람 보는 법이 본래 위엄있는 용의에 있는 것이니 

무인은 더욱 용모와 풍채가 중요하다. 키가 난장이 같고 누추하기가 농사꾼 같으며 물고기 입에 개 이마를 가져 

그 모습이 괴상한 사람은 반행(班行)에 같이 서서 함께 백성들에게 임할 수 없다. 가령 위급한 일이 있어서 

숨돌릴 수도 없게 되었을 때 수령이 관하의 영준호걸(英俊豪傑)들과 평소 서로 친숙하게 지내지 않으면 

어떻게 장차 사변에 대응할 수 있겠는가. 때가 비록 태평하고 고을이 비록 영세하여도 인재를 수습함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한지(韓祉)가 군현을 다스릴 때 군교들을 사랑하고 어루만져 함부로 매질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평화로운 세월이 오래 계속되나 내 나이 젊으니 어느때 혹 변방 지키기를 명령받을지 모른다. 

평일에 성의와 은혜로 군교들과 마음을 맺어두지 않으면 변란에 임해서 그 힘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성심을 그들 속에 심어 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위급할 때 저버릴 수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 其有幕裨者 宜愼擇人材 忠信爲先 才諝次之.
     (기유막비자 의신택인재 충신위선 재서차지. ) 
     비장(裨將 1)을 두는 수령은 마땅히 신중하게 인재를 고르되 충성심과 믿음을 첫째로 삼고

     재주와 슬기를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의주· 동래· 강계· 제주의 수령 및 방어사(防禦使) 2)를 겸한 모든 수령은 모두 비장 거느리기를 감사· 절도사와 

같이 한다. 사대부의 염치와 체모가 날로 무너져서 면전(棉廛) 3)의 거간꾼이나 땔나무 저자의 장사꾼으로 

일찌기 거래가 있었던 자들이 모두 비장으로 임명되고 무변(武弁)이나 경대부(卿大夫)의 서얼 자식이 함께 섞여서 

기생이나 끼고 아전들과 어울려 수령을 속이고 백성을 침학하여 씻기 어려운 수치를 남기는 자가 많다. 

수령은 마땅히 이것을 알고 반드시 깨끗한 바탕에서 충실하고 사무에 밝은 자를 선발하여 중인도 

또한 모름지기 世祿의 집안에서 취해야 한다 비장으로 있게 할 것이다.
번암(樊巖) 채제공(業濟恭)이 함경 감사가 되었을 때 정도길(丁道吉)을 비장으로 삼았다. 

전례에 6진 지방의 세포를 거두되 1필이 밥주발에 들어갈 만큼 가는 베를 거두고 이름을 발내포(鉢內布)라 하였다. 

정도길이 변방 고을에 도착하여 발내포 가져오는 것을 모두 물리치고 말하기를 『사또께서 다음으로 가는 베를 

받아오라 하셨다』 하고 재삼 가려서 베를 받았다. 부중(府中)의 기생과 아전·군교 들이 모두 놀라 이를 믿지 않고 

말하기를 『생전에 이렇게 거친 베는 보지 못했다』 하였고 내외가 시끄러웠다. 번암이 마음으로는 이를 좋게 여기면서도 짐짓 말하기를 『그대가 나쁜 베를 받아와서 부중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가』 하였다. 정도길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세정에 어둡지만 발내포를 모르겠읍니까. 생각컨대 사또께서 비장을 

보낸 것은 마땅히 이전 베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 덕을 널리 펴려는 것입니다. 

진실로 부중이 서로 꾸짖는다면 청컨대 사직하고 가겠읍니다』 하니 채제공이 손을 잡고 달래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맹상군(孟嘗君) 4)에게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대는 풍환(馮驩) 5)이 되지 못하겠는가』하고 더욱 후하게 대접하니 부중이 감히 더 말하지 못하였다.
참판 이의준(李義駿) 6)이 황해도 감사가 되었을 때 윤광우(尹光于)를 불러 비장으로 삼았다. 

이때 해주 영고(海州營庫)의 돈 4만냥이 축났다. 창고 관리자가 예에 따라 돈 4백냥을 호방(戶房)과 비장에게 

뇌물로 주고 번고일(反庫日) 7)에 발설하지 말도록 부탁하였다. 방기(房妓)가 예에 따라 뇌물표를 보이니 

포의(布衣) 8)가 물리치면서 『8월에 순장(巡將)이 나오는 날에는 나는 당연히 고발할 것이니 

이때를 맞추어 원액을 배상 보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뇌물돈도 속히 영고에 넣어 그 백분의 일에라도 

충당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 하고 더 말하지 않았는데 기한이 되자 과연 이를 보충하였다.
판서 정대용(鄭大容) 9)이 전라 감사가 되었을 때 김동검(金東儉)을 비장으로 임명하였다. 

강진(康津)의 서객(書客)10)으로 곡물 장부의 농간질하는 법을 상세히 아는 자가 있었는데, 

내가 일찌기 조용히 묻기를 『전주의 호방비장으로서 전후 수십년에 누가 능히 아전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신명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가』하였더니, 대답하기를 『한 되, 한 약(龠) 11)도 속일 수 없은

사람은 오직 김동검 한사람이었고 그 밖에는 듣지 못했다』 하였다.]


[각주]
1) 비장(裨將) : 감사(監司)·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 등이 데리고 다니는 보좌원(補佐員). 

2) 방어사(防禦使) : 『적대전(績大典)』에 의하면 인조(仁祖) 때 이래로 경기· 강원· 함경· 평안도에는 

    종2품 외관직(外官職) 무관(武官)을 두어(전부 7員) 병사(兵使)의 지휘·감독을 받고 

    중군(中軍)·영장(營將)을 감독 지휘케 하였다고 한다. 

3) 면전(棉廛) : 육의전(六矣廛)의 하나로서 구분역(九分役)을 지고 있던 면포전(綿布廛)을 가리킨것 

    여기에서는 면포(綿布)와 은자(銀子)를 팔았기 때문에 혹은 은목전(銀木廛)이라고도 하였다. 

4) 맹상군(孟嘗君) : 중국 전국시대의 전문(田文). 제(齊)나라의 재상이 되어 천하의 현사(賢士)들을 모아 

     식객(食客) 수천명을 두었던바, 그는 이들에 의하여 어려운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5) 풍환(馮驩) : 맹상군의 식객. 그는 맹상군의 채권을 회수·소각하였는데 이로써 맹상군이 민심을 사게 되었다. 

6) 이의준(李義駿) : 영조 14∼정조 22(1738∼1798) 자는 중명(仲命). 본관은 전주(全州).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주자미가(鑄字米價)의 강제 징수를 폐지시켰다.『장릉지(莊陵志)』를 교정하였고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

7) 번고일(反庫日) : 창고 안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을 모두 들어내어 장부와 대조 검사하는 날. 

8) 포의(布衣) : 벼슬 없는 사람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비장(裨將)인 윤광우(尹光于)를 가리킨다. 

9) 정대용(鄭大容) : ?∼순조 5(1805). 한성부판윤을 거쳐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재직중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10) 서객(書客) : 지방 아전의 하나. 서원(書員)인 듯함. 

11) 약(龠) : 용량의 단위로서 기장(黍) 1200알을 뜻하기도 하고 1/10합(合) 즉1작(勺)을 뜻하기도 한다.


  

 

제 4 장   거현(擧賢)

               (여기서는 수령이 인재를 천거하는 일을 다루고 있다.)  

 

 

★  擧賢者 守令之職 雖吉今殊制 而擧賢不可忘也.
     (거현자 수령지직 수길금수제 이거현불가망야. )
     현인(賢人)을 천거하는 것은 수령의 직책이다. 비록 옛날과 지금의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현인을 천거하는 일만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요순(堯舜) 삼왕의 법에 태학에서 국자(國子)를 교육하여 세경(世卿)으로 삼고, 사도(司徒)는 일반 백성을 가르쳐서 빈흥(賓興) 1)의 바탕으로 하였는데, 사람을 얻고 쓰는 것이 이 두 길에 의하였다. 

한(漢)나라 이래로 이 두 법은 모두 무너지고 오직 군수와 현령으로 하여금 현능(賢能)한 사람을 찾아 천거하게 하여 조정의 벼슬에 오르게 하였으니 한(漢)나라 때에 좋은 인재를 많이 얻었음이 삼대(三代)에 버금갔다. 

수(隋)와 당(唐)나라 이후로는 사과(詞科) 2)로써 사람을 취하여 인재를 뽑았는데 세도가 날로 비루해졌으나 

오히려 군(郡)과 현(縣)에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을 해마다 천거하게 하여 이것을 향공(鄕貢)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거현(擧賢)은 수령의 본무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군현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법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하였다. 그러나 그 직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근세에 남구만(南九萬)이 변경지방을 안찰하고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곳 인재를 추천한 일이 그의 장주(章奏)에 자주 나타나 있다. 대신(大臣)이 인재의 천거로서 임금을 섬기는 뜻이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니, 뜻있는 선비가 백성의 수령이 되었다면 이 뜻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오늘날 천하의 현자(賢者)가 지혜롭고 유능하다면 

내가 능히 그를 존경하고 현달시킬 것이니 군수는 여기에 뜻을 두어 명덕(明德)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몸소 권하여 그를 말에 태워 서울로 와서 상국부(相國府)에 나아가도록 하라』3)고 하였다.
문제(文帝) 4)는 군수에게 조서를 내려 『현량하고 능히 직언에 극간하는 사람을 천거하라』5)고 하였다.
무제(武帝) 6)의 초년에 영을 내려 『군국(郡國)에서 효렴한 자를 각각 한 사람씩 천거하라』7)고 하였다. 

또 조서를 내리기를, 『박사(博士)와 제자(弟子) 8)를 보충하고 군국현관(郡國縣官)에서 그 부내에 문학을 

좋아하고 웃사람을 공경하며 정교(政敎)를 잘 정제하며 향리(鄕里)에 잘 순응하며 출입에 패악(悖惡)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거든 현령(縣令)과 후상(侯相)과 현장(縣長)과 현승(縣丞)은 이천석(二千石) 9)에게 보고하고, 

이천석은 삼가 가합한 자를 살펴 뽑아서 계해(計偕)1)하여 태상(太常)10)에 나오도록 하라』11) 하였다.
무제(武帝)가 다음에 또 조서를 내렸다. 즉 『십실지읍(十室之邑)12)에는 반드시 충신(忠信)이 있고 

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온 군(郡)이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으니, 

이것은 교화가 아래로 번지지 못하고 행적을 쌓은 군자가 위에 들리는 길이 막힌 것이다. 

이천석(二千石)의 관장(官長)은 인륜(人倫)을 다스리는 데 장차 유은(幽隱)14)을 밝히며 서민을 가다듬으며 

향당(鄕黨)13)을 숭상하는 짐(朕)의 교훈을 어떻게 보좌하겠는가?

또한 현인을 천거하면 큰 상을 받으며 현인을 가로막으면 현륙(顯戮)15)을 입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중이천석(中二千石)과 예관(禮官)·박사(博士)는 더불어 천거하지 않은 자의 죄를 의론하라』16) 하였다.
동중서(董仲舒)의 대책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열후· 군수·이천석(二千石)으로 하여금 각각 그의 이신(吏臣) 중에서 현자(賢者)를 뽑아서 매년 두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여 숙위직(宿衛職)을 주고 

또한 대신(大臣)의 능력으로 보아 현자를 천거한 자는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하면 제후와 이천석 관리들은 모두 마음을 다하여 현사를 찾을 것이니, 

이에 천하의 선비를 얻어서 관직을 주어 그 재주를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송(宋)나라 제도에 의하면, 단양(丹陽)18)· 오회(吳會)· 회계(會稽) 19)· 오흥(吳興)의 네 군은 매년 두 사람씩을

천거하고, 나머지 군은 한사람씩 천거한다. 대저 주(州)의 수재와 군(郡)의 효렴(孝廉)이 철거되어 오면 모두 

책시(策試)를 보도록 하되 천자(天子)가 간혹 친히 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공경(公卿)이 천거한 사람은 모두 

이부(吏部)에 맡겨서 재주의 등급대로 임용한다. 무릇 천거의 득실에 따라 상벌이 있으며,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는 금고형(禁錮刑)을 가하되 그 기간의 장단은 군(郡)에 따라 의논해서 정한다.
당(唐)나라 제도에 학관(學館)을 경유한 자를 생도(生徒)라 하고 주현(州縣)을 경유한 자를 향공(鄕貢)이라 하는데, 

모두 해당 관아에 올려 그들을 등용하거나 돌려보내게 한다.
보응(寶應) 20) 2년에 예부시랑 양관(楊綰)이 말하기를 자신이 소개의 글을 올려 자신을 천거케 하는 것은 

선왕(先王)이 현자를 기다린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현(縣)으로 하여금 주(州)에 천거하게 하고 주(州)는 그가 통달한 학문을 시험하여 성(省)에 보내도록 한다.

현(縣)에서 성(省)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천(自薦)의 글을 올리지 않도록 하자고 하였다. 

송(宋)나라 태종(太宗) 7년 21) 여러 주(州)에 조서를 내리기를, 『장리(長吏)는 천거한 사람을 서울로 보내되

판적(版籍) 22)이 분명하고 향리의 추천된 자를 취하게 하였다. 따라서 열 사람을 한 보(保) 23)로 삼고,

보(保) 안에서 행동이 지나쳤거나 어긋난 사람이 있으면 연좌하여 천거에 나갈 수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진종(眞宗) 원년 24)에 밀주(密州)의 발해관(發解官) 25)이 잘못 사람을 보낸 데에

죄를 받아 벌금을 내게 되었으나 특별히 조서를 내려 그를 직위해제시키고,

동시에 여러 지방에 조서를 내려서 관리들을 경고하였다.

 

[각주]
1) 빈흥(賓興) : 주대(周代)에 사인(士人)을 채용하는 방법. 학교의 생도 중에서 수재(秀才)를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賓客)으로 천거한다. 향시(鄕試)를 일컬음이다. 

2) 사과(詞科) : 사부(詞賦)의 과목. 

3) 중국 한(漢) 고조(高祖) 11년 2월의 일이다. 

4) 문제(文帝) : 중국 한(漢)의 효문제(孝文帝)인 유긍(劉恆). 

5) 문제(文帝) 15년 9월의 일이다. 

6) 무제(武帝) : 중국 한(漢)의 효무제(孝武帝)인 유철(劉徹). 재위 53년. 

7) 무제(武帝) 원광(元光) 1년의 일이다. 

8) 박사(博土)와 제자(弟子) : 박사(博士)는 중국 한(漢)나라에서 설치한 교학(敎學)을 맡아보던 벼슬이며, 

    제자(弟子) 또는 제자원(弟子員)은 그박사(博士) 밑에서 공부하도록 둔 학생(學生)·생원(生員)을 말하는데 

    박사제자(博士弟子)라고도 한다. 무제(武帝)가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세우고 제자원(弟子員)을 두었다. 

9) 이천석(二千石) : 중국 한대(漢代) 구경낭장(九卿郎將)으로부터 군수(郡守)에 이르기까지의 사람. 

    이들은 개질(皆秩) 이천석(二千石)을 받았음. 단 삼등분(三等分)되었는데, 중이천석(中二千石)(中은 滿의 뜻이며, 

    月 180斛), 진이천석(眞二千石)(月 150斛), 이천석(月 120斛)이다. 뒤에는 지방장관 즉 지부 등을 말하였다 

10) 계해(計偕) : 중국 한(漢) 무제(武帝) 때 이민(吏民) 중의 준수한 사람을 조정에서 뽑아올리게 한 것인데, 

      매년 군국(郡國)의 회계리(會計吏)가 그의 계부(計簿)를 조정에 바칠 때 동행(同行)케 하였다. 

      이것이 뒤에 잘못되어 상계(上計)라 하고 또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나가는 것을 말하였다. 

11) 태상(太常) : 중국의 관명(官名)으로, 태관(泰官)의 봉상(奉常)을 한(漢)이 태상(太常)으로 바꾸었다. 

      예의(禮儀)와 제사(祭祠)를 관장하는데, 한(漢)나라의 각급 학교(學校)는 태상(太常)의 관할을 받았다. 

      무제(武帝) 때에 홍(弘)이 학관(學官)이 되어 도(道)의 중흥을 청한 데 대하여 

       태상(太常) 장(臧)과 박사(博士)  평(平)이 의논하여 말한 것이다. 

12) 십실지읍(十室之邑) : 소읍(小邑)을 말한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서 따온 말. 

13) 유은(幽隱) : 세상을 피하여 깊이 숨어 사는 것 또는 그러한 사람. 

14) 향당(鄕黨) : 고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향리(鄕里) 1만 2천 5백집을 향(鄕), 5백집을 당(黨)이라 일컬음. 

15) 현륙(顯戮) : 죄인을 죽여서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 

16) 한나라 무제(武帝) 원삭(元朔) 1년의 일이다. 

17)『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나옴. 

18) 단양(丹陽) : 중국의 군명(郡名)으로 안징성(安徵省) 선성현(宣城縣). 

19) 오회(吳會)·회계(會稽) : 오회(吳會)는 오현과 회계군의 연칭(連稱)으로 현재 강소성(江蘇省) 무현성 지방. 

20) 보응(寶應) : 중국 당(唐)나라 대종(代宗)의 연호(서기 763), 

21) 태종(太宗) 7년 : 서기 982년, 태종의 재위기간은 976∼997년이었다. 

22) 판적(版籍) : 토지와 호적 또는 토지와 인구를 기록한 장부. 

23) 보(保) : 중국 송대(宋代)의 의용병 또는 갑(甲) 또는 향병이다. 송(宋) 왕안석의 보갑법(保甲法)에 의하면 

      중국 수(隋)나라에서는 오가(五家)가 한 보(保)가 되고 보(保)에는 장(長)이 있으며,

      보(保) 5가 여(閭)가 되고  여(閭) 4가 족(族)이 되어 서로 검찰(檢察)토록 하였다 한다. 

24) 진종(眞宗) 원년 : 서기 998년. 진종(眞宗)은 중금 송(宋)나라 임금(재위 998∼1022년). 

25) 발해관(發解官) : 발해(發解)는 중국 당(唐)·송(宋) 때 주, 현에서 뽑힌 자를 그 지방관청이 중앙정부에 보내어 

      경사(京師)에서 시험보게 하는 것. 발해관(發解官)은 그 업무를 담당한 자. 

      명(明)·청(淸) 때는 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곧 발해(發解)라 불렀다. 해(解)는 원래 주어보낸 공문을 가리킨다. 


  

★ 經行吏才之薦 國有恒典 一鄕之善 不可蔽也.
     (경행이재지천 국유항전 일향지선 불가폐야. )
     경행(經行) 1)과 이재(吏才) 2)의 천거에는 나라에서 정한 법전이 있으니

     만약 시골일지라도 훌륭한 선비가 있다면 덮어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원래 옛법을 본떠서 매양 식년(式年)이 되면 군현(郡縣)에서 현자(賢者)를 천거케 하고 있으나 

중세 이래로 당의(黨議)가 점점 굳어져서 자기 당이 아닌 사람이면 군현에서 천거된 사람을 다시 가려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법이 드디어 형식화되었다. 그러나 현자를 덮어두는 죄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므로 차라리 씌어지지는 않을망정 어찌 천거조차 않을 것인가! 오늘날 군현(郡縣)에서 올리는 추천장에는 으례 『없읍니다』고 보고하고 

있으니없다[無乎]는 그러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역시 잘못이 아닌가. 먼 시골 한미한 씨족들은 벼슬의 혜택에 

젖지 못하다가, 한번 천거를 거치면 그 자손들이 두고두고 칭술(稱述)할 것이다. 진실로 그러한 사람이 있을진대 

어찌 없다고 보고하는가.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갖추라고 책할 수 없는 것이니, 

한 고을의 착한 이와 십실지읍(十室之邑)의 충성스러운 사람이 이치상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천거를 그만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오직 영남의 천거만을 전가(銓家) 3)에서 때에 따라 收用하고 있다
『속대전(續大典)』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각 도(道)의 전함(前銜 :이미 벼슬살이를 한 자) 및 

생진(生進 : 經義의 출신은 生員이라 하고 詩賦의 출신은 進士라 한다 4)과 유학(幼學) 5) 중에서 

재주와 행실이 뚜렷이 드러난 자는 매 식년(式年)子·午·卯·酉의 해의 정초에 온 고을 사람들이 수령에게 

보거(保擧)하고邑人이 수령에게 천거하는 것을 保擧라 한다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초천(抄薦)한다.下三道 6)에서는 

3인을 초과하지 못하고 上五道 7)에서는 2인을 초과하지 못한다 혹시 추천된 사람이 명실(名實)이 부합되지 않고 

연령을 속여 기록한 자는生進은 30세 이상을 취하고 幼學은 40세 이상을 취한다 죄를 논하여 다스린다.』8)
무릇 추천장을 쓰는 방법은 성명을 기록하고 그 밑에 여덟 자로 제목을 달아 주를 붙인다. 

즉 『이(李)모는 경서를 연구하되 게을리하지 않고, 친척간에 화목하되 법도가 있다』라고 한다. 

또한 이재(吏才)를 천거하는 요식(要式)도 있다. 한 현(縣)에서 각각 세 사람을 천거하고 

감사는 여러 고을의 천거를 모아 다시 세 사람을 뽑아 이조(吏曹)에 보고한다.
한 고을의 여론을 채택하여 민심(民心)이 흡족토록 하여야 허물이 없을 것이다. 

내가 보건대 근일에 이러한 일도 역시 모두 뇌물로 사람을 취사(取舍)한다. 

부자로서 오래 전부터 인심을 잃어온 자가 많이 효행(孝行)의 천거에 들어가니 또한 무슨 말을 하리요.

 

[각주]
1) 경행(經行) :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뛰어난 것 또는 그러한 사람. 

2) 이재(吏才) : 행정능력 또는 그것을 갖춘 사람. 

3) 전가(銓家) : 전관(銓官)이라고도 함. 이조때 문무관의 전형을 맡아보던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각 관원. 

4) 생원(生員)과 진사(進土) : 생원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 과거제를 개편할 때 생긴 생원시를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생원시의 전신은 고려의 승보시(陞補試)[고려 때 州·縣學의 출신을 생원이라 하고 이들에게 時· 賦· 經義를

     시험하여 國學에 입학시켰는데 이 시험을 말한다]인데, 이조시대에 와서 진사시와 합쳐서 생원· 진사시로 되었다. 

    진사시(進士試)는 과부(誇賦)를 시험보이는데 반하여 생원시(生員試)는 경학(經學)을 시험보였다. 

    이조 초기에는 대체로 경학(經學)을 과거시험 과목 중에서 중시하여 생원(生員)이 진사(進士)보다 우위였으나 

    후기에는 진사(進士)가 생원(生員)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들은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관계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관리 선발의 목적이 아니고 문과(文科) 예비고사인 동시에, 양반으로서의 신분을 

    지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본래 생원· 진사시를 거쳐야 문과를 볼 수 있었는데 이조시대의 과거제도가 

    점차 문벌양반의 출세도구로 이용되게 되어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를 거치지 않고도 문과에 응시하게 되자, 

    생원·진사는 중앙 관계의 진출보다도 대부분은 지방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5) 유학(幼學) :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儒生). 

6) 하삼도(下三道)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일컬음. 

7) 상오도(上五道) :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를 일컬음. 

8) 『속대전(續大典)』의 이전(吏典) 천거조(薦擧條)에 나온다.


  

★ 科擧者科目之薦擧也. 今法雖闕 弊極必變 擧人之薦 牧之當務也.
     (과거자과목지천거야. 금법수궐 폐극필변 거인지천 목지당무야. )
     과거라는 것은 과목별로 천거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그 법이 비록 이지러졌지만

     그 폐단이 극에 다다르면 반드시 변하는 것이니, 사람을 천거하는 일은 수령으로서 당연히 힘써야 할 일이다.

 

[과(科)는 과목이다. 한(漢)나라 때에는 현량방정(賢良方正)의 과, 직언극간(直言極諫)의 과, 효제역전(孝弟力田)의 과, 무재이등(茂才異等)의 과(科)가 있었다. 무제(武帝)는 네 과(四科)의 목(目)을 정하였는데, 

첫째는 덕행(德行)이 고묘(高妙)하고 지절(志節)이 청백(淸白)함이요,

둘째는 학통(學通)하고 행수(行修)하며 경에 정통한 박사(博士)요, 

세째는 법령을 명수(明修)하여 족히 의옥(疑獄)을 결단함이요, 

네째는 강의(剛毅)하고 지략이 많아서 재주가 현령을 맡을 만함이다. 또한 재감장수(才堪將帥)의 과, 

문중어사(文中御史)의 과, 의복(醫卜)의 과와 천문산수(天文算數)의 과가 있었다.

수(隋)와 당(唐) 이래로는 시부과(詩賦科)·명경과(明經科)와 굉사박학과(宏辭博學科)가 있었는데,

군현(郡縣)의 장이 천거하면 천거받은 자는 그 천거에 응하여 나아가니 이를 일러 과거(科擧)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과거에는 본래 과목의 분류가 없었고 천거하는 법도 없었으니 이름은 함부로 과거라 했지만

실은 과거가 아니다. 우리 나라에 이름을 함부로 붙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행적을 상신한 후에 그 행적을

고찰하는 것이 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신하지 않고 고찰하며, 거현(擧賢)한 후에 과거에 응하는 것이 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천거하지 않고 응하니, 이 두 가지가 천하의 웃음거리인 것이다.

이제 과거에 폐단이 많아 질서가 없고 이미 그 극도의 경우에 달하였다. 

만물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변하는 것이다. 공의(公議)가 점차 일어나고 있으니, 생각컨대 중국의 군현 천거의 법이 

종국에는 반드시 우리나라로 옮겨올 것이다. 수령이 된 자는 마땅히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과거법은 매우 상세하고 치밀하다. 본받아 시행하게 되면 그 천거하는 일은 수령의 직책인 것이다.

명나라·청나라의 제도에는 무릇 학정(學政)을 감독하는 제학(提學) 1)을 17성(省)에 각각 1명씩 두었는데 

3년이면 임기가 만료된다. 이부(吏部)에서는 학식이 높은 사람의 성명을 열거해놓고 황제에게 청해서 간택해 쓰는데, 혹 부승(府丞)이 겸리하기도 하고,奉天府순도(巡道)가 겸리하기도 한다.福建· 臺灣 등 이들이 모두 친히 임석하여 

고시(考試)하도록 하되, 금년에 세과(歲科)를 설치하면 명년에는 향시(鄕試)를 설치하고 그 명년에는 회시(會試)를 

설치한다. 2) 시험은 양장(兩場)으로 하는데, 초장에는 사서의 문(文) 두 편, 경해(經解) 두 편으로 하고, 

이장(二場)에는 책(策) 일 편, 논(論) 일 편, 오언팔운배율시(五言八韻排律詩) 한 수(首)로 한다.

위의 삼과(三科)가  한바퀴 돌아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제학(提學)은 3년이 되면 교체가 된다.
모든 현(縣)의 교관(敎官) 3)은 이부(吏部)가 골라 각자 성(省)으로 부임하게 하면 무신(撫臣)이 그들을 고시하여 

1·2·3등에 든 자는 그 부임을 인준하고, 4·5등에 든 자는 돌아가서 학습하여 3년을 기다려 다시 시험보도록 하고, 

6등에 든 자는 직책을 갈아버린다. 그 부임한 자는 사자(士子)들을 훈칙하여 직접 시험을 보도록 하는데, 

사서문(四書文) 일 편, 배율시(排律詩) 한 수, 책(策)과 논(論) 중에서 한 수를 하는 것이 통례이다. 

등수를 공정하게 정한 후에 학정(學政)提學에 보고한다.
우리나라에는 교관도 없고 제학도 없어서 생원의 응시자를 뽑는 일은 오직 군수와 현령이 그 임무를 맡을 뿐이다.

[擧額· 分定의 법은 科制考에서 같이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를 생략한다]
예부칙례에 의하면, 『봉천부(奉天府)의 부학은 정원을 6명 내고,  승덕현(承德縣) 4)의 (縣學) 정원은 7명,

늠생(廩生)은 10명, 증생(增生)은 10명을 내는데,  2년에 한번 바친다』고 하였다. 

순천부 부학(府學)의 정원은 25명을 내고, 대흥현(大興縣) 5)에서는 정원 25명을 내며, 

완평현(宛平縣)에서는 정원 25명, 늠생은 80명, 증생도 80명이며, 1년에 두 번 낸다.
17성(省)의 여러 부(府)와 현(縣)에서 정원을 내고, 늠생·증생의 수는 각각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으며, 

3년에 한번 나아가게 하거나 혹은 5년에 한번 나아가게 한다. 먼 변방의 학문이 없는 곳 

또한 동생(童生) · 청사(靑社) 6)의 여러 명목이 있는데 공진(貢進)하는 데 들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오늘날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법은 오직 정거액(定擧額) 7)이란 세 글자에 있을 뿐이니, 

천거의 수를 정한다면 뽑아 천거하는 일을 지극히 공명하게 하는 것이 수령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각주]
1) 제학(提學) : 명나라는 학교와 과거(科擧)의 제도가 상보(相輔)한 체계를 이루었고 청나라는 더욱 완비되었다. 

    명(明)나라의 학핵제교(學核制校)에 중앙에는 태학(太學)(兩京의 國子監)과 특종학교(武學과 宗學)를 두었고, 

    지방에는 보통학교로서는 각부(府)·주(州)·현(縣) 및 위(衛)에 유학(儒學)(府學·州學·縣學·衛學)을 두고 

    특종학교로서는 각 도사위(都司衛)에 무학(武學)을 두었다. 명(明)나라 영종(英宗) 정통(正統) 1년(1436)에 

    지방학교를 관장하는 제학(提學)을 두었다. 이 제학(提學)은 지방 학교를 관장하는 외에 향시(鄕試)이하의 시험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청(淸)나라에서도 명(明)과 대체로 비슷하였는데, 각 성(省)에 제학(提學)을 두고 

    해당 성(省)의 학정사무(學政事務)를 관리하고 임기는 3년이었다. 

2) 세과(歲科)·향시(鄕試)·회시(會試) : 명나라의 고시제도에 있어서 고시과정은 동시(童試)·향시(鄕試)·회시(會試)를

    거쳐 전시(殿試)에 이르도록 일관적인 체계를 이루었다. 동시(童試)는 부주현학(府州縣學)의 재학생에게 모두 

    시험보이는 것으로 학교고시 또는 학년고시와 같았으며 이것을 세고(歲考) 또는 세과(歲科)라 하기도 하였다. 

    이동시(童試)에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거나 향시(鄕試)에 응시할 수있었다. 

    세과(歲科)가 있은 다음해에 향시(鄕試)를 성(省)에서 실시한다. 향시(鄕試) 이상은 임용고시(任用考試)와 같다.

    향시는 자(子)·오(午)·묘(卯)·유(酉)의 간지가 들어가는 해에 실시하였다. 향시에 합격한 자가 거인(擧人)인데, 

    이들이 그 다음해(즉 辰·戌·丑·未의 해)에 예부(禮部)에 가서 회시(會試)에 응시한다. 

    국자감(國子監)의 감생(監生)은 향시 또는 회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회시에 합격한 자는 진사(進士)라 하는데 

    이들이 그 해에 천자(天子)가 친책(親策)하는 전시(殿試)에 응시한다. 전시(殿試) 후에는 곧 조고(朝考)라는 

    것이 있는데 이 출신을 서길사(庶吉士)라 하였다. 세과(歲科)·향시(鄕試)·회시(會試)는 연도별로 순차별로 

    실시되며 매 3년마다 돌아가며 거행되는데 이것을 대비(大比)라 한다. 

    청(淸)나라도 크게 3단계로 실시하는 시험제도는 명(明)과 동일하였다. 

     명나라의 경우 향시와 회시(會試)는 삼장으로 실시한다. 초장(初場)은 1일간, 이장과 삼장(三場)은 3일간씩이다. 

    홍무(洪武) 3년 과거(科擧) 때에 초장(初場)에서는 경의(經義) 두 편, 사서의(四書義) 한 편, 

    이장에서는 논(論) 한 편, 삼장에서는 책(策) 한편을 시험보았다. 홍무 17년에 반포한 과거정식(科擧定式)에 

    의하면 초장(初場)에서는 사서의(四書義) 세 편, 경의(經義) 네편, 이장(二場)에서는 논 한 편, 판(判) 다섯 편, 

    조(詔)·고(誥)·표(表) 내에서 한 편, 삼장(三場)에서는 경사(經史)·시무책(時務策) 다섯 편을 시험보게 하였다. 

    청(淸)나라의 경우도 삼장(三場)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삼장(三場)에 따른 시험내용은 명(明)과는 약간 달랐다. 

    건륭(乾隆)시대에 개정된 제도에 의하면, 일장(一場)에서는 제예(制藝) 3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중용(中庸)』의 각각 포괄적 제목 1편과 오언팔운시(五言八韻詩) 한 수를 시험하고, 

    이장(二場)에서는 『시(詩)』『서(書)』『역(易)』『예기(禮記)』『춘추(春秋)』5편과 회시(會試)의 경우는 

    오언팔운시(五言八韻詩) 한수를 시험보고, 삼장(三場)에서는 대책(對策) 5편을 시험하였다. 

3) 교관(敎官) : 명(明)에서는 지방 학교인 부학(府學)· 주학(州學)· 현학(縣學)에 교관으로서 부학에는 

    교수(敎授) 1명과 훈도(訓導) 4명, 주학에는 학정(學正) 1명과 훈도 3명. 

    현학에는 교유(敎諭) 1명과 훈도 2명을 두었다. 청(淸)에서도 각각 교수· 학정· 교유를 두었다. 

4) 승덕현(承德縣) : 중국 청(淸)나라가 설치한 현(縣)으로 만주요녕성(滿州遼寧省) 심양현(瀋陽縣)이다. 

5) 대흥현(大興縣) : 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지방의 현명(縣名). 

6) 청사(靑社) : 사학(社學)인 듯하다. 명(明)나라에서는 부(府)·주(州)·현학(縣學) 외에 사학(社學)이 있었는데, 

    지방 향촌에서 민간자제를 가르치고 풍속을 선도하도록 하였다.
7) 정거액(定擧額) : 과거 응시 자격자익 수를 한정한다는 뜻이다. 


 

★ 中國科擧之法 至詳至密 效而行之 則薦擧者 牧之職也.
     (중국과거지법 지상지밀 효이행지 즉천거자 목지직야. )
     중국의 과거법은 지극히 자세하고 치밀해서 그것을 본받아 시행해야 하니 천거하는 것은 수령의 직무인 것이다.

 

[명(明) . 청(淸)의 제도는 무릇 학정(學政)을 감독하는 관리를 17 성(省)에 각각 1 명씩 두었으며,

3 년이면 임기가 만료된다. 이부(吏部)에서는 글과 학문이 깊은 사람의 성명을 펼쳐 늘어놓고는

황제께 조서(詔書)를 청하여 간택해 쓰는데, 혹 부승(府丞)이 겸리(兼理)하기도 하고 순도(巡道)가 겸리하기도 한다.

이들이 직접 고시장에 임석하여 시험을 행하는데, 금년에는 세과(歲科) 1)를 실시하면,

명년에는 향시(鄕試) 2)를 실시하고, 또 그 이듬해에는 회시(會試) 3)를 실시한다.
시험은 양장(兩場)으로 하는데, 초장(初場)에서는 사서(四書)의 문(文) 두 편과 경의(經義) 두 편으로 했으며,

이장(二場)에서는 책(策) 1 편, 논(論) 1 편 및 오언 팔운 배율시(五言八韻排律詩) 1 수(首)로 했다.

이렇듯 중국의 과거 제도는 대단히 치밀하고 엄격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교관(敎官)도 없고 제학(提學)도 없어, 생원(生員)의 응시자를 뽑는 일은 오직 군수와 현령이 그 임무를 맡을 뿐이다. 오늘날의 과거 제도의 폐단을 바로잡는 길은 오직 <정거액(定擧額)> 세 글자에 있을 뿐이니, 천거의 수를 정한다면, 천거를 지극히 공정하게 하는 것은 수령으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각주]

1) 세과(歲科) : 府. 州. 縣의 재학생 모두에게 치르게 하는 시험.

2) 향시(鄕試) : 歲科에 합격한 사람에 한해서 성에서 실시하는 시험.

3) 회시(會試) : 鄕試에 합격한 사람에 한해서 禮部에서 치르는 시험'

 

 

★  科擧鄕貢 雖非國法 宜以文學之士 錄之于擧狀 不可苟也.
     (과거향공 수비국법 의이문학지사 록지우거장 불가구야. )
     과거와 향공(鄕貢) 1)은 비록 국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마땅히 문학하는 선비로서

     거장(擧狀 : 추천서)에 기록하여야 할 것이니 아무렇게나 기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과거법은 고려 때에 시작하였다. 광종(光宗) 1)때에 시주(柴周) 2)의 쌍기(雙冀) 3)가 

조사(詔使)를 따라나왔다가 병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이에 과거법을 우리나라에 전해주었다. 당시에 어찌하여 

향거(鄕擧)의 법을 상세하게 전해주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의 법은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천거가 있은 

연후에 응거(應擧)가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법에는 본래 천거가 없는데도 외람되어 응거라 칭하니 명실(名實)이 

부합되지 않는 것이 대개 이런 따위들이다. 소위 과유(科儒) 4)가 항우패긍(項羽沛公) 5)이란 제목을 놓고 

20운(韻) 6)으로 풍진팔년(風塵八年)의 글귀를 짓는다고 하여 문득 재사라 하는 자들이고, 나머지 중에서 

송판필진도(松板筆陣圖) 7)를 연습해서 자칭 진체(陣體)라 하여 서로 바꾸어 글씨를 써주니 

이를 사수(寫手) 8)라 하는데 이들이 상으로 치는 자들이다. 그 나머지 떼들은 모두가 주먹을 휘두르며 

눈을 부릅뜨고 거적자리를 지고 일산을 바치며 나무를 베어 막대기를 만들거나 나무를 깎아서 창을 만드는데, 

이들을 이름하여 선접군(先接軍)이라 하고 혹은 수종(隨從) 혹은 노유(奴儒)라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과장(科場)은 난장판이 되어 서로 짓밟고 죽이기도 한다. 왕왕 시험 합격자가 이런 무리들 가운데서 

나오고 있다. 부자집 자식이 글자 한 자도 배우지 않고 글을 사고 글씨를 사서 뇌물을 바쳐서 합격자에 끼이게 되는 

자가 그 태반을 차지하게 되는데,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오직 이밖에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오늘날 식년(式年)의 가을에 군현에서 부거장(赴擧狀)을 써서 경시관(京試官)에게 보고하는데, 

아마 이 법은 곧 옛날 향거(辯擧)의 내려오는 뜻일 것이다. 수령이 부거장(赴擧狀)을 작성할 때 과문(科文)을 

잘 지을 수 있는 자만을 성책(成冊)에 기록할 것이며, 외잡하고 글을 모르는 자가 과장에 함부로 나아가는 것을 

엄금하여, 사풍(士風)을 조금이라도 맑게 하고 민산(民産)을 탕진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큰물의 흐름을 한손으로 능히 막을 수야 없겠지만 내 손으로 그 파도를 밀어 물결을 더 일도록 하지 않는다면, 

역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과거의 폐단이 이제 극도의 지경에 달하였으니 생각컨대 장차 변화가 

있을 것이며 거기에 대한 법령이 있을 것도 같다. 선비를 천거하는 데는 의당 한마음으로 공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엄종(嚴宗) 9)이 상고(上高) 10) 부조사(簿漕使) 11)가 되었는데 시관(試官)이 없었으므로 그가 과문(科文)을 

교열하느라고 소사(蕭寺) 12)에 머물게 되었다. 부자집 자식이 그 절의 중을 통하여 성의를 표한다면서

돈 50만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엄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럼, 그 사람을 만나 의론하겠다』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부자집 자식이 와서 뵈니, 그는 꾸짖기를 『삼년마다의 대비(大比)에 공경(公卿)이 이를 통하여 

배출되는데, 너 같은 놈이 마음을 잡고 공부에 힘쓰지 않고 뇌물을 써서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하는가』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 물러가 버렸다.  중국에도 역시 이런 폐단이 있었다.]

 

[각주]
1) 광종(光宗) : 고려 제 4대왕. 재위 949∼975년. 

2) 시주(柴周) : 중국 후주(後周)를 말함. 유숭(劉崇)이 951년에 세우고 960년에 망함. 

3) 쌍기(雙冀) : 중국 후주(後周) 사람으로 고려 광종 7년(956)에 사신을 따라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였다. 

    광종이 처음으로 과거제를 실시할 때(958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과거시험을 주재하는 지공거를 지냈다. 

4) 과유(科儒) : 과거시험의 응시자 또는 과거시험 공부를 하는 사람. 

5) 항우패공(項羽沛公) : 항우(B. C. 232∼202)는 중국 진말(秦末) 초(楚)의 패왕(覇王)인 항적(項籍).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죽이고 패공(沛公)과 천하를 다투었으나 해하의 싸움에서 패하여 오강에서 자살하였다. 

    패공(沛公)은 유방(劉邦)(B. C. 256∼195)이 한(漢)을 세워 고조로 되기 전 패현 출신이라 하여 부른 명칭이다. 

    항우를 격파하고 한(漢)을 세웠다. 항우와 패공이 천하를 다투어 싸운 햇수가 8년이라 하여 풍진팔년이라고 한다. 

6) 20운(韻) : 7언(言)을 1구(句)로 하여 40구(句)로 지은 시(詩). 

7) 송판필진도(松版筆陣圖) : 송판에 필진도를 연습했다는 뜻이다. 필휘도(筆輝圖)는 중국 진(晋)의 

    위부인(衛夫人)이 지은 것인데 글씨 쓰는 방법을 풀이한 것이다. 또는 진(晋)의 왕희지(王羲之)가

    위의 필진도 뒤에 붙인 제문(題文)으로서, 글씨 쓰는 것을 병사(兵事)에 비기어 설명했다. 

8) 사수(寫手) : 과거시험에 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람을 말한다. 

9) 엄종(嚴宗) : 중국 후한(後漢) 사람. 장제(章帝) 때 대일조(待日詔)를 지냄. 

10) 상고(上高) : 중국의 강서성(江西省)에 있던 현명(縣名). 

11) 부조사(簿漕使) : 중국 후한(後漢)에서 부조(簿漕)는 재곡(財穀) 부서(簿書)를 관장한 관리(官吏). 

12) 소사(蕭寺) : 절을 말한다.


  

★ 部內有經行篤修之士 宜躬駕以訪之 時節存問 以修禮意.
     (부내유경행독수지사 의궁가이방지 시절존문 이수례의. )
     관내에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을 독실하게 닦는 선비가 있으면 마땅히 몸소 나아가 그를 방문하고 
     명절마다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술과 고기를 보내 예의를 닦아야 할 것이다.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큰 원칙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친족을 친애하는 것이며, 

둘째는 어른을 어른 대접하는 것이며, 셋째는 취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네째는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대하는 것이다. 

서울과 근기(近畿)의 문명의 고장에서는 일일이 모두 그렇게 할 수 없지만, 먼 시골 지방에서는 그 귀한 이와 

어진 이에 대해서 더욱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한다. 비록 평소의 친분이 없더라도 마땅히 곧 찾아볼 것이며, 

명절마다 술과 고기를 보내는 것을 그쳐서는 안된다. 비록 오두막집 궁한 선비라 하더라도 능히 학행(學行)을 

스스로 닦아 명성이 온 고을에 자자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몸소 방문하여 사립문에 빛이 나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백성에게 권선하는 길이다.
진중거(陳仲擧) 1)가 예장(豫章) 태수가 되어 도착하자마자 서유자(徐孺子) 2)의 소재를 물어 그를 먼저 

찾아보고자 하니, 주부가 아뢰기를 『뭇사람의 심정은 사또께서 먼저 관아에 드시기를 바라고 있읍니다』라고 하니, 진중거가 말하기를 『미처 자리를 따사롭게 할 겨를도 없이 무왕(武王)이 상용(商容) 3)이 사는 마을을 지나면서 

경의를 표하였으니, 내가 어진 이에게 예를 다함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각주]
1) 진중거(陳仲擧) : 중국 후한(後漢) 사람. 이름은 번(蕃)이며 중거(仲擧)는 그의 자(字). 

    낙안태수(樂安太守)· 태위(太尉)· 태부(太傅)를 지내고 고양후(高陽侯)에 봉해졌다. 

2) 서유자(徐孺子) : 중국 후한(後漢)의 남창(南昌) 사람인 서치(徐穉)이다. 유자(孺子)는 그의 자(字).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일컬었다. 

3) 상용(商容) : 중국 은(殷)의 사람. 주왕(紂王) 때 대부(大夫).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이기고 

    그의 집 앞을 지나며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제 5 장   찰물(察物)

              (물정을 살핀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지방관이 아전 등의 부정과 작폐,  

              민간의 동태와 실정 등을 탐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 牧孑然孤立 一榻之外 皆欺我者也. 明四目達四聰 不唯帝王然也. 
     (목혈연고립 일탑지외 개기아자야. 명사목달사총 불유제왕연야. )
     수령은 외롭게 고립되어 있어서 내가 앉아 있는 그 자리 밖은 모두 나를 속이려는 자들뿐이다.
     사방을 보는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을 듣는 귀를 통하게 하는 일은 오직 제왕만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리있고 총명한 사람이 마음을 다해 잘 다스리기를 희구하여 9강(網) 54조(條) 1)를 취하여 일마다 살피고 

부지런히 힘써 실행한다면 그 고을 안이 잘 다스려 졌는지 못다스려졌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아전들의 간활함이 저절로 행사되지 못하게 되고, 힘있는 백성의 횡포가 저절로 자행되지 못하게 되면 귀를 막고 

총명을 가리고는 심연의 고기를 살피지 말아서 2) 만물이 푸근하게 안락하도록 함이 옳다. 

그러나 아전과 향임(鄕任)과 군교(軍校)들이 몰래 수령의 동정을 엿보고서 이를 빙자해서 멋대로 농간질하는 것을

헤아려 알아차리고 이를 받아 제 공으로 만드는 경우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조예(皁隸)와 저졸(邸卒)들이 몰래 민간에 나가 토색질하고 행패부리는 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으며,

또 불효불공하고 장터에서 횡탈을 일삼는 자를 금하지 않을 수 없으며,

향촌에서 무단행위(武斷行爲)를 하며 강한 힘을 믿고 약한 이를 업신여기는 자를 통제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별도로 염탐하고 조사하는 일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황패(黃覇)가 영천(穎川) 태수가 되어서 일찌기 염탐시킬 아전을 파견한 적이 있는데,

내보낼 적에 주밀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아전이 나가서 감히 우정(郵亭) 3)에서 묵지도 못하고 길가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까마귀가 그 고기를 나꿔채간 일이 있었다. 관아로 나아온 백성이 있어 패가 그와 이야기하는 중에

그 백성이 이 사실을 말했다.  나중에 그 아전이 돌아와 패를 보니,

패가 위로하기를 『고생이 심했더구나. 길가에서 음식을 먹다가 까마귀에게 고기도 도둑맞고』라고 하자,

그 아전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패가 묻는 말에 털끝만큼도 감히 숨기질 못했다.
생각해보건대 여기 까마귀가 고기를 나꿔채간 일을 이용한 물음은 그 수법이 얄팍해서 상례로 할 수는 없다. 

염찰(廉察)하는 중에도 그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 것이 옳다.
조광한(趙廣漢)이 영천(穎川) 태수가 되어 한번은 공문으로 호도정장(湖都亭長)을 불러들였다. 

호도 정장이 서쪽으로 군계(郡界)에 이르니 군계의 정장(亭長)이 우스갯소리로

『관아에 당도하거든 조군(趙君)에게 아주 고맙다고 인사나 전해주오』라고 했다.

호도 정장이 당도하자 광한은 사무에 관한 물음을 마치고 나서, 

『군계의 정장이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는데 어째서 전해주지를 않는가』라고 말했다. 

호도 정장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실토하였다.
북위(北魏)의 왕일(王逸)이 광주를 다스릴 적에 널리 이목을 두어 살폈더니 그를<천리안(千里眼)> 4)이라 불렀다.
송(宋)의 장등용(張登庸)이 양주 5)를 맡아 다스릴 적에 그를 일컬어 <수정등롱(水精燈籠)> 6)이라 했다.
전원균(田元均)이 성도를 다스릴 적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불러 

<조천납촉(照天蠟燭)> 7)이라고 했다.
교지명(喬智明) 8)이 육려(陸慮) 9)를 다스릴 적에 백성들이 그를 <신군(神君)>이라 했다.
북제(北齋)의 팽성왕(彭城王) 고유(高浟)10)가 창주 자사(滄州剌史) 11)가 되어 정사를 함에 엄격히 물정을 

살펴 관내가 숙연하였다. 그래서 수령과 참좌(參佐) 12)에서 아래로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나다니고 

왕래할 적엔 모두 제 먹을 양식을 싸가지고 다녔다. 고유는 민간에서 일어난 일을 티끌만한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습옥현 주부(濕沃縣主簿) 13) 장달(張達)이란 사람이 일찌기 주(州)의 관아에 나아오던 길에 밤에 민가에 투숙하여

닭고깃국을 얻어먹은 일이 있었는데, 고유는 이를 살펴 알았다. 수령들이 다 모이자 고유는 여러 사람을 대해 

『남의 닭고깃국을 먹고는 왜 값을 쳐주지 않느냐』라고 말하니 장달이 즉시 승복하였다. 

온 경내(境內)가 그를 신명(神明)이라고 불렀다.
고려의 박유저(朴惟氐)가 안동(安東)을 맡아 다스릴 적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정사를 행함이 유석(庾碩) 14)보다 

밑돌지는 않으리라 했다. 그래서 한번은 고을의 관아에 혼자 앉아 있다가 질직하고 신중한 한 아전을 보고, 

『지척에 있는 곳도 울타리로 막히면 이목이 보고 들을 수가 없는데 하물며 한 당(堂)에 앉아 사경 안을 살피자니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지금 간악한 아전이 법을 조롱하여 궁곤한 백성이 원한을 머금는 경우는 없는가』

라고 물어보았다. 아전은 말하기를『사또께서 부임해오신 이래로 백성들이 아전을 보지 못하니 아전들이 법을

조롱하는지 어떤지는  미처 알지 못하겠읍니다만 백성들이 원한을 머금는 일은 아직 듣지 못했읍니다』고 했다.

유저는 다시 『백성들이 나를 유석 사군(使君) 15)과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어보았다. 

아전이 대답하기를 『백성들이 유석 사군을 칭송하고 틈이 있은 연후에야 사또에 대해서도 말을 합니다』라고 하니 유저가 부끄러워하였다.  항통(缿筩) 16)의 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불안에 떨게 하니 절대로 행해서는 안된다. 

구거(鉤鉅) 17)식의 물음도 또한 속임수에 가까와 군자의 할 바가 아니다.
조광한(趙廣漢)이 영천(潁川)의 태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 이전에 영천의 호족대성(豪族大姓)들이 서로 혼인을 하고 아전들의 습속이 붕당을 잘 지었다.

광한이 아전을 시켜 항통(缿筩)을 설치하게 하여 투서(投書)를 얻으면 그 투서한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고

호족대성 자제(子弟)가 한 말이라고 가탁하자 그 뒤 강성한 종족들이 서로 원수 사이가 되어 간악한 붕당이

흩어지게 되어 풍속이 크게 고쳐졌으며, 아전과 백성들이 서로 잘못을 고해바쳐 광한이 이목으로 삼았다.

그는 특히 구거(鉤鉅)를 잘하여 실정을 파악했는데, 가령 말값을 알려고 하면 먼저 개값을 물어보고,

양값을 물어보고 또 소값을 물어보고, 그러고 난 뒤에야 말값을 물어보아

그 값들을 참작하여 유(類)에 따라 비교해보면 말값이 비싼지 싼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정요(政要)』 18)의 항통설(缿筩說)에 이르기를 『수령의 직에 있으면서 내리는 정령(政令)이 반드시

다 좋다고는 할 수 없는데 외인이 이미 바르게 간할 수 없고 간악한 아전들이 안에서 이목을 가려서

백성들의 원망이 분분하게 일어나도 아득히 듣지를 못하게 되니 염찰(廉察)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만약 사인(私人)을 파견하면 의혹과 비방이 또 비등하게 될 터이다.

옛사람들의 항통의 법이 능히 경미한 부정도 살필 수가 있으니 참으로 좋은 법이다』라고 하였다. 

항통이란 혹은 자기병을 쓰기도 하고 혹은 죽통(竹筒)을 쓰기도 하는데 그 입을 굳게 봉하고

단지 구멍 하나만을 내어 비벼 꼰 종이 토막이나 겨우 집어넣을 수 있게 하고 도로 꺼내지는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박만(撲滿) 19)의 모양과 같다 이것을 작은 면에는 1·2개, 큰 면에는 3·4개 정도를 내보내어 모든 마을들로 

하여금 서로 전해 돌리게 하되 한 마을마다 2·3일 정도를 경과하게 하고 나서 이에 거두어들이게 한다.
수령의 정사에 혹시 잘못한 바가 있으면 주저없이 고쳐 시행할 것이요, 민폐를 혹 고해오는 바가 있으면 

단연코 개혁할 것이요, 사사로운 원한으로 무고하는 것도 또한 모름지기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관리(官吏)가 고발을 당하면 정말 부정이 있는 자는 즉일로 조사 처리하고 실제 증거가 없는 일은 다시 조사를 

가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이속(吏屬)들이 백성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침노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토호(土豪)가 고발을 당하면 당해 면(面)에 영(令)을 전하기를 『이모(李某)는 무단(武斷) 행위를 했고 

장모(張某)는 불선한 행위를 하여 이런 밀고가 있다. 지금은 그냥 용서해 줄 터이니 마땅히 조심을 하라』고 한다.
만약 도적이 고발을 당하면 당해 면에 영을 전하기를 『아무개가 이런 지목을 받고 있으니 만약 마음을 고쳐 먹지 

않으려거든 마땅히 멀리 자취를 감출 것이다』라고 한다.
부임해온 초기에는 2·3차 통(筒)을 내보내고 일을 본지 오래 되면 단지 네 계절의 끝달에 각각 1차씩 내보낸다.

 

[각주]
1) 9강(綱) 54조(條) :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내용 중 부임(赴任)·진황(賑荒)·해관(解官)의 3강(綱)과이에

    속한 조목들을 제외한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의 9강(綱)과 이에 속한 각 6조(條) 전 54조(條)의 내용을 가리키는 듯.


2) 심연의 고기를∼ : 심안의 고기는 여기서는 드러나지 않는 하찮은 잘못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깊은 못 속에 잠겨 있는 고기처럼 묻혀져 있는 하찮은 잘못까지를 세세히 들추어내지 말라는 뜻.
3) 우정(郵亭) : 옛 중국에서 문서 전달을 위해 지방에 설치했던 곳으로 출장중인 관원의 숙박 기능도 겸하였다.

4) 천리안(千里眼) : 능히 천리(千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이란 뜻으로, 

    관아에 앉아서도 관내(管內)의 사정을 두루 잘 알고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5) 양주(洋州) : 중국의 옛 고을.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에 있었다. 

6) 수정등롱(水精燈籠) : 수정 둥우리를 씌운 등이란 뜻이니 관내의 사정을 훤히 잘 알고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7) 조천납촉(照天蠟燭) : 하늘을 비추는 촛불이란 뜻이니 관내의 사정을 훤히 살펴 알고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8) 교지명(喬智明) : 중국 전조(前趙) 사람. 자는 원달(元達). 진(晋)의 성도왕(成都王) 영(潁)의 밑에서 벼슬하다 

    나중에 전조왕(前趙王) 유요(劉曜)에게 벼슬하였다. 융려현령을 지낸 것은 진(晋)의 성도왕(成都王) 밑에서였다. 

9) 융려(隆慮) : 중국의 옛 고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다. 

10) 고유(高浟) : 자는 자심(子深). 조재(兆齋) 문선제(文宣帝)의 천보(天保)(550∼558)초에 

      팽성왕(彭城王)으로 봉해졌다. 세무(世務)에 밝고 과단성이 있으며 일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11) 창주 자사(滄州刺史) : 창주(滄州)는 중국의 옛 고을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에 있다. 

      자사는 한(漢)나라 무제 때에 각주(各州)에 1인(人)씩 두기 시작한 관직으로 관내 군현수령의 불법을 들춰내고 

      민정(民情)을 살피는 것이 그 직책이었는데 위(魏)나라에 와서는 그 직권이 더욱 무거워졌으나 

      수(隋)·당(唐) 이래 그 직책이 변개(變改)를 거듭하다가 원(元)·명(明)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었다. 

12) 참좌(參佐) : 요속(僚屬)들을 가리킨다. 

13) 습옥현 주부(濕沃縣主簿) : 습옥(濕沃)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있었던 중국의 옛 고을. 

      주부(主簿)는 한대(漢代) 이래로 중앙과 지방의 각 관서에 두어졌던 관직으로 문서와 장부를 맡았다. 

      현의 주부(主簿)는 조사(調査)·계고(稽考)하는 일, 현내의 비위(非違)를 규정(糾正)하는 일 등도 맡았다. 

14) 유석(庾碩) : ?∼고종 37(1250). 고려 고종(高宗) 때 사람. 평장사필(平章事弼)의 증손. 강직·청백한 성질에 

      백성을 사랑하여 성망(聲望)이 높아 고려 일대의 유명한 양리(良吏)로 꼽힌다. 지형부사(知刑部事)를 지냈다. 

15) 사군(使君) :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나라 밖으로나 지방에 온 사신(使臣)의 경칭. 

      지방관 중의 일부(觀察使·府使·牧使 등)는 일종의 봉명사(奉命使)에 해당하므로 이 경칭을 썼다. 

16) 항통(缿筩) : 일종의 투서함(投書函). 아래의 본문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17) 구거(鉤鉅) : 갈고리로 물건을 끌어내듯 어떤 사실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유도신문 방식.  

18) 『정요(政要)』 : 안정복(安鼎福)의 『임관정요(臨官政要)』와 이광우(李光佑)의 『운곡정요(雲谷政要)』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듯하나 전자의 현행본에는 여기에 인용된 내용이 없고, 후자는 책은 볼 길이 없다. 

19) 박만(撲滿) : 벙어리 저금통.


 

★ 缿筩之法 使民重足側目 決不可行 鉤鉅之問 亦近譎詐 君子所不爲也.
     (항통지법 사민중족측목 결불가행 구거지문 역근휼사 군자소불위야. )
     항통(缿筩) 의 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걸음을 무겁게 하고 서로 눈치를 살피게 하는 것이니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
     갈고리로 남의 마음속을 긁는 것 같은 질문은 또한 간휼한 속임수에 가까운 것이니 군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

 

[<정요(政要)>의 [항통설]에 이렇게 이르고 있다. "수령된 사람의 정령(政令)이 반드시 다 좋다고는 할 수 없거니와, 밖의 백성들이 이미 올바로 간(諫) 할 수 없고, 간교한 아전들이 수령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아

수령의 눈과 귀를 막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분분하게 일어도 수령의 귀에는 아득하여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수령이 어찌 염찰(廉察)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은밀히 사사로이 염탄꾼을 파견하면

의혹과 비방이 들끓을 것이다. 옛사람들의 항통의 법은 능히 사소한 부정도 살필 수가 있으니, 정말로 좋은 법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항통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있어, 남을 비방하고 무고(誣告)하는데 이용하니,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눈치 보게 되어, 인정이 피폐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 조광한이 영천태수가 되었다. 이전의 영천은 호족들이 서로 혼인을 하고 아전들이 붕당을 지었다.
조광한은 아전을 시켜 항통(缿筩)을 설치하게 하여 투서를 모아, 그 투서한 사람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호

족의 자제가 말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자,
그 이후로 호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간악한 붕당이 흩어지고 풍속이 크게 개혁되었으며,

아전과 백성이 서로 잘못을 고해 바치므로 조광한은 그것을 정보망으로 삼았다.
또 유도심문을 자주하여 실정을 파악하였는데, 가령 말 값을 알아 보려고 할때에는 먼저 개 값을 물어보고,

양 값을 물어보고, 다시 소 값을 물어본 다음에 말 값을 물어 보았다.

그 값들을 따져서 같은것 끼리 비교하면 말 값이 싼지 비싼지 알 수 있었다.]
 
[각주]
1) 항통(缿筩) : 대나무 통으로 된 일종의 투서함(投書函). 
2) 중족측목(重足側目) : 발걸음을 무겁게하고 곁눈질을 함. 불안에 떠는 모양.
3) 구거(鉤鉅) : 남의 마음속을 떠보는 것. 
4) 휼사(譎詐) : 간사한 속임수.   

  

★ 每孟月朔日 下帖于鄕校 以問疾苦  使各指陳利害.
     (매맹월삭일 하첩우향교 이문질고 사각지진이해. )
     매 계절의 첫달 초하룻날에 향교에 첩문 1)을 내려 백성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묻고

     각기 이해(利害)를 지적해 진술하도록 하였다. 

 

[향교는 정사를 의논하는 곳이다. (鄭나라 子産 2)이 鄕校를 허물지 않았던 일은 春秋傳에 나온다.) 

태학(太學) 3)에 정록청(正錄廳) 4) 있어서 이전에 밀통(密筒) 5)을 달아놓고 제생(諸生)들로 하여금 

그때 그때 정치의 득실을 논하게 했으니, 향교에 병폐를 물어보는 것은 근거가 있다.
먼저 각 면(面)에 대해 나이 많은 사람 중에 행실을 신칙하고 일을 잘 아는 이가 있는지를 물어 면마다 4인씩 취하여 향로(鄕老)로 삼는다. 差帖 6)을 주거나 付標 7)를 하지 말고 다만 그 이름만 적어서 책상 위에 비치해 둔다
첩문(帖文)은 이를테면 이런 내용으로 내린다. 『전 달 어느 날에는 양곡을 방출했고 곧 還穀의 分給이다 

그 다음 달 어느 날에는 창고를 열어 세곡(稅穀)을 거두었고, 그 다음 달 어느 날에는 새로 군보(軍保)를 작성했는데 여기에 만일 백성들에게 깊이 해가 되는 부정과 폐단이 있으면 각기 지적해 진술하라. 소송을 판결한 데에

잘못이 있거나 죄를 처단한 데에 억울함이 있거나 무릇 정령(政令)에 흠이 있으면 각기 지적해 진술하라. 

아전과 관예(官隸)들이 마을에 나가 사사로이 거두는 것이 있거나 풍헌(風憲)·약정(約正)이 부정한 마음을 품고 

사사로이 농간을 부리는 일이 있으면 각기 지적해 진술하라. 불효불공하고 불목(不睦) 불화(不和)하여 풍교(風敎)를 손상시키거나 장터에서 소란을 피우며 어른을 능멸한 자는 각기 지적해 진술하라. 만일 아전을 겁내고 

토호를 두려워하여 오로지 은폐하기를 일삼거나 또 혹은 사감을 끼고 원한을 품어 기회를 타서 모함을 한다면 

그 또한 죄를 문책할 것이다. 드러내놓고 말할 만한 것은 성명을 바로 쓰고 드러내놓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성명을 쓰지 말되 모두 얇은 종이로 풀 발라 봉하고 겉봉에 도서(圖書)즉 私印를 찍어 교궁(校宮) 8)에 제출하고,

교궁은 이를 거두어 오는 초10일에 장의(掌議)가 몸소 와서 수령에게 바칠 것이다. 

위의 帖文은 鄕校 諸生과 각 坊의 鄕老에게 내린다
이것은 유사(儒士)를 책문(策間)하는 법이다. 고발장을 본 날에 이내 공개하여 말하지 말고 잠자코 홀로 헤아려서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별도로 염문(廉問)할 것이다.
북위(北魏)의 육발 9)은 상주자사(相州刺史)가 되어 정사를 행함이 맑고 공평하며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왔다. 

관내에 명망이 평소에 무거운 사람이 있으면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정사를 물으며 대책을 의뢰하기도 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이 10인이나 되어 <십선(十善)>이라 불렀다. 또 각 현(縣)의 호족(豪族) 1백여인을 뽑아 

가자(假子)10)로 삼아 달래고 받아들이기를 곡진하게 하여 의복을 하사하고 각기 집에 돌아가 

그의 이목(耳目)이 되게 했다. 그래서 부정을 적발하고 숨겨진 일을 캐어내는 데에 규명되지 않는 일이 없어서 

백성들이 신명(神明)이라 여겨 감히 겁도(劫盜)하는 자가 없었다.
장영(張詠)11)이 익주(益州)를 맡아 다스릴 적에 민간의 일을 물어 알아 먼 곳 가까운 곳 할것없이 

그 실정을 모두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대개 듣고 보는 것을 전적으로 남에게만 따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 호오(好惡)가 있어 나의 총명을 어지럽힌다. 다만 각기 그 부류에게 물어보고 다시 물어보면 

밝혀지지 않는 일이 없다. 군자에게 물어보면 군자다운 의견을 얻게 되고 소인에게 물어보면 

소인다운 의견을 얻게 되어 일에 숨겨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열에 여덟 아홉은 파악할 수 있다. 』]

 

[각주]
『비아(埤雅)』 : 책 이름. 송나라 육전(陸佃)이 저술한 것이며 석어(釋魚)· 석수(釋獸)· 석조(釋鳥)· 석충(釋蟲)·

    석마(釋馬)· 석목(釋木)· 석초(釋草)· 석천(釋天)의 8편 20권으로 되어 있다. 

1) 첩문(帖文) : 수령이 향교(鄕校)의 유생(儒生)들에게 유시(諭示)하는 글. 

2) 자산(子産) :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의 대부(大夫) 공손교(公孫僑)의 자(字). 

    40여년 동안 정(鄭)나라 국정(國政)을 맡아 내치(內治)·외교(外交)를 성공적으로 이루어갔다. 

3) 태학(太學) : 여기서는 이조(李朝)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4) 정록청(正錄廳) : 성균관(成均館) 관원 학정(學正)·학록(學錄)의 집무소로서 시정(時政) 중의 중요한 것들을 

    기록하여 현책(玄冊)이라 이름하여 궤에다 넣어 봉해두었던 곳인데,본문에 설명된 바와 같이 성균관 유생들이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여기서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壬)·병(丙) 우난(雨亂) 이후 정록청(正錄廳)의 

    이러한 기능은 사라지고 건물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5) 밀통(密筩) : 밀봉(密封) 된 용(筩)이란 뜻으로 추측되는데 일종의 투서함(投書函)인 듯. 

6) 차첩(差帖) : 보통(차접)이라 불려졌다. 하리(下吏) 등속의 임명 사령서(辭令書). 

7) 부표(付標) : 여기서는 인명(人名) 위에 쪽지를 붙여 표식(標識)하는 것인 듯. 

8) 교궁(校宮) : 각지의 문묘(文廟). 즉 향교(鄕校)를 가리킨다. 

9) 육발(陸馞) : 지혜가 많기로 이름났고 상주자사로서의 치적이 유명하다. 건안왕(建安王)으로 봉해졌다. 

10) 가자(假子) : 양자(養子)와 같은 말
11) 장영(張詠) :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복지(復之), 호는 괴애(乖崖). 벼슬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 子弟親賓 有立心瑞潔 兼能識務者 宜令微察民間.
     (자제친빈 유립심서결 겸능식무자 의령미찰민간. )
     자제나 가까운 빈객 가운데 마음가짐이 단정· 결백하며, 겸하여 실무에 능한 사람이 있거든,
     마땅히 이들로 하여금 몰래 민간의 일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 좋다.

 

[일가 친척과 그리고 문생이나 연고 있는 아전 가운데 단정·결백하며 마음이 곧은 사람이 한 사람 정도야 없겠는가. 

서울에 있을 때 이 사람과 미리 약속하기를 『부임해서 두어 달 되거든 내 마땅히 편지하리니

군(君)이 내려와서 몰래 민간을 다니며 조목조목 염찰(廉察)하도록 하라』고 하고, 

혼첩(閽帖) 세속에서 물금첩(勿禁帖) 1) 한 장을 주어 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낸다. 『북창(北倉) 2)에서 양곡을 거두고  내가 몸소 받지를 

못하니, 그 말질을 공평히 하고 낙미(落米) 3)를 돌려주라는 나의 지시는 과연 그대로 따르고 있는가? 

장삼이사(張三李四) 가운데 혹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거둬들인 곡식에서 혹 외집(外執) 4)하는 것이 

있는가? 창고에 들이고 난 뒤에 혹 분석(分石)하는 일겨를 쌀에다 섞어 한 섬을 나누어 두 섬으로 만드는 것을 

이름하여 分石이라 한다이 있는가? 이때의 형상을 모름지기 자세하게 그려내도록 하라.』
또, 『어느 면(面)에 이 달에 서원(書員) 5)이 간평(看坪 :순가巡稼 6)을 나가는데, 장삼이사(張三李四)가운데 

돈을 내어 재결(災結) 7)을 매수하는 경우가 있는가? 어떤 논배미들은 재해를 입었는데도 재감(災減)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는가? 어느 마을 어느 집에서는 송아지 잡고 돼지 잡아 서원에게 향응을 베푸는 일이 있는가? 

이때의 형상을 마땅히 자세하게 그려내도록 하라.』
또, 『어느 마을 아무개가 불효 불공하다는데 사실 그러한가? 아니면 향로(鄕老)가 무고를 했는가? 

아무 날에 그 아비에게 대들었고, 아무 날에 형제끼리 다투었으며, 아무가 죽었는데 염(殮)도 하지 않았고, 

아무가 굶주렸는데 구하지도 않았는지를 반드시 직접 목격한 듯 조사해내어야만 신빙성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느 마을 아무개가 사람을 죽여 암장했다는데 그 원인과 정황을 역시 자세하게 탐지하라.』
또, 『어느 시장바닥에서 아무개가 술주정을 하여 칼을 뽑아 든다거나 쌀을 뺏어가고 베를 뺏어가는 따위의

일이 있거든 그 평소의 죄악을 낱낱이 탐지하라.』 모든 조목들은 모두 위의 예에 준할 것이다.
무릇 마음가짐이 단정 결백하고 이 일을 잘 해내는 사람에겐 마땅히 월름(月廩) 8)의 일부로 후하게

그 노고에 대한 보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비록 백이(伯夷)나 오릉중자(於陵仲子) 9)라 하더라도 

아무 까닭없이 힘을 들일 리는 없는 것이다.]


[각주]
1) 물금첩(勿禁帖) : 관아에의 출입을 특별히 허가함을 표시한 증서. 

2) 북창(北倉) : 관아를 중심으로 북쪽에 위치한 창고. 

3) 낙미(落米) : 즉 낙정미(落庭米)를 일컬음. 마되질을 하다가 땅에 떨어져 남아 처진 곡식 . 

4) 외집(外執) : 남의 물건을 몰래 다른 데로 빼돌려 감추어 두는 일. 

5) 서원(書員) : 본서(本書) 세법(稅法) 

6) 순가(巡稼 : 看坪) : 본서(本書) 세법(稅法) 

7) 재결(災結) : 본서(本書) 세법(稅法) 

8) 월름(月廩) : 봉록(俸祿)과 같은 말.
9) 오릉중자(於陵仲子) :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 세가(世家)의 자제로 성은 진(陳), 

    청렴(淸廉)하게 살기로 유명했다. 형(兄)인 대(戴)의 만종(萬鍾)의 녹(祿)을 불의의 녹이라 하여 먹지 않고 

    그 집을 불의의 집이라 하여 살지 않고 처(妻)와 함께 오릉(於陵) 땅에서 신삼고 길쌈하며 살았으므로 

    흔히 오릉중자(於陵仲子)라 불렀다. 


  

★ 首吏權重 壅蔽弗達 別岐廉問 不可已也.
     (수리권중 옹폐부달 별기렴문 불가이야. )
     수리(首吏)의 권한이 중해서 수령의 총명을 가려 백성들의 실정이 상달되지 못하니

     별도로 염문(廉問)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시임 이방(時任吏房) 1)에게는 반드시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함께 아전의 반열(班列)에 끼어 있기 마련이니, 

부임해 가서 시일이 좀 오래 되면 이것은 저절로 알게 된다. 이방(吏房)의 간악함을 깊숙이 듣는 데는 이 사람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수령의 좌우에는 이방의 이목 아닌 사람이 없으므로 은밀히 수령에게 접근하여 일깨워 주려고 

해도 또한 그럴 도리가 없다. 마땅히 공무를 계기로 삼아 이 사람을 파견, 서울로 올려보내선 형제 자질 중에 말을 

조심하고 사리를 잘 아는 이를 시켜 이 사람을 면대해서 이렇게 일러주게 한다. 즉 『수리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무릇 몇 가지나 되는가? 네가 상세히 적어보라. 내 장차 원님에게 보고하리라』한다. 또 무릇 요직에 있는 아전으로서 수리와 한 패거리가 되어 부정을 하는 자들도 아울러 열거해 적게 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전날의 앙심을 갚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여 알고 있는 것이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이어서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릇 창고의 농간질이라든가 마을에서의 행악이라든가 하는 작은 일이고 큰 일이고 간에 듣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듣고 조사해 보아서 만약 모함이 아니라면 마땅히 그 부정을 들춰내어 법대로 징치(懲治)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방의 교체 문제는 반드시 말썽이 많을 터이니 곤장질·매질로 징치만 하고 쫓아내지는 말아서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해두었다가 전임(轉任)되어 갈 때에 이르러서야 차대(差代) 2)하도록 한다.
비록 그가 한 말이 혹 모함에 속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처벌하지는 말아서 언로(言路)를 틔워 놓아야 할 것이다.
매양 보건대 지혜롭지 못한 수령들은 이방을 사인(私人)으로 삼아 이방과 호오(好惡)를 같이하면서 편벽되게 

그의 말만 듣고 다시는 의심을 두지 않고서 무릇 이방과 적대되는 자들을 엎치고 뒤쳐 마음 놓고 지낼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수령 스스로 자신의 총명을 막고는 우뚝하게 고립하여 방 밖의 일은 한 점도 듣지 못해 아전들이 배반하고 

백성들이 저주하여 드디어 낭패를 불러들이는 사람이 많다.

 

[각주]
1)시임 이방(時任吏房) : 시임(時任)은 현임(現任)과 같은 말. 즉 현재 재임중인 이방(吏房).
2) 차대(差代) : 후임자를 선보(選補)하는 일. 


  

★  凡細過小疵 宜含雖藏疾 察察非明也. 往往發奸 其機如神 民斯畏之矣.
     (범세과소자 의함수장질 찰찰비명야. 왕왕발간 기기여신 민사외지의. )
     무릇 변변치 않은 과실이나 조그만 흠을 마땅히 덮어둘 것이니 병폐를 감추어 두더라도

     지나치게 샅샅이 밝혀내는 것은 진정한 밝음이 아니다.

     가끔씩 부정을 적발하되 그 기미를 살핌이 귀신 같아야 백성들이 두려워할 것이다.

 

[수령이 아전들이나 향임(鄕任)들의 한두 가지 숨겨진 부정을 듣고는 마치 기화(奇貨)라도 얻은 듯 그 부정을 들춰내어 세상에 드러내놓고 떠들며 스스로 그 세세히 밝혀내는 밝음을 과시하는 것은 천하에 박덕한 짓이다. 

그 큰 사건은 들춰내되, 그 작은 것은 그냥 지나쳐버리기도 하고, 혹은 속짐작만 하기도 하며, 

또 혹은 은밀히 그 사람을 불러 따뜻한 말로 훈계하여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하여 너그럽되 늘어지지 않고 

엄격하되 가혹하지 않아 온후하게 덕이 있어 진심으로 감동하여 좋아하게 하는 것이 아랫사람을 통어하는 길이다. 

세세하게 심연에 숨은 고기를 살피고 경솔하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것이 어찌 훌륭한 수령의 할 바이겠는가.
서구사(徐九思) 1)가 구용 지현(句容知縣) 2)이 되어 처음 일을 볼 적엔 어릿하게 마치 무능한 듯하였다. 

얼마 안 있어 한 아전이 공첩(空牒) 3)을 소매 속에 감추어 와 도장을 훔쳐 찍으려 하자 구사는 그 간특한 짓을 

적발하여 법대로 다스렸다. 군리(郡吏)가 그 아전을 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을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더니 

이에 사람마다 두려워했다.
승평군(昇平君) 김유(金瑬) 4)가 전주 판관 5)이 되어 부임한 날에 한 간특한 백성이 있어 몰래 숨어서 투서를 하여 그를 시험하려 하였다. 그 두어 달 뒤에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자 그는 『이자가 전날 투서한 자다』라고 했다.

그 사람이 과연 실토하자 아전들과 백성들이 놀라 탄복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각주]
1) 서구사(徐九思) : 명(明)나라 사람. 자는 자신(子愼). 가정(嘉靖) 연간에 구용지현(句容知縣)이 되어 

    혜정(惠政)이 있었고, 고주수(高州守)를 지냈다. 

2) 구용 지현(句容知縣) : 구용(句容)은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고을. 

    지현(知縣)은 관명(官名)으로서 한 현(縣)의 장(長)을 가리킨다. 

3) 공첩(空牒) : 관인(官印)이 찍혀지지 않은 공문서(公文書)인 듯. 

4) 김유(金瑬) : 선조 4∼인조 26(1571∼1648).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문충(文忠).
5) 판관(判官) : 이조(李朝) 때 돈녕부(敦寧府)·한성부(漢城府)·상서원(尙瑞院)·봉상시(奉常寺) 등 중앙관서와

    감영(監營)· 유수영(留守營) 및 큰 고을에 둔 종오품(從五品) 벼슬. 


  

★  左右近習之言 不可信聽. 雖若閑話 皆有私意.
     (좌우근습지언 불가신청. 수약한화 개유사의. )
     좌우에 가까이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들어서는 안된다. 
     비록 그냥 부질없이 하는 얘기 같지만 모두 사사로운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호태초(胡大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령(縣令)의 사람됨이 굳세어 좀체로 아전을 믿고 맡기려 하지 않으면 

온갖 그럴 듯한 사실을 늘어놓아 은근히 현령을 추켜세운다. 그래도 현령이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현령이 공사(公事)를 마치고 쉬는 동안에 저희들끼리 무리지어 사사로이 현령에 대한 논평을 주고받아

그 말이 모르는 사이에 현령의 귀에 들어가게 한다. 그러면 현령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그 말을 무심코 하는 말이라 여기고, 나아가 그 말을 믿어서 이미 그 계략에 떨어진 줄을 알지 못한다.』
생각하건대, 시기(侍妓)·시동(侍童)·시노(侍奴) 따위들이 저희들끼리 사사로이 문답하는 말을

아전들이 거짓 꾸짖어 못하게 하는 척하지만 기실은 아전들이 흘려들여보낸 것이 많다. 

간악하고 궤휼함이 천태만상이니 어찌 유의하지 않으리요.]

 

★  微行不足以察物 徒以損其體貌 不可爲也.
     (미행불족이찰물 도이손기체모 불가위야. )
     미행(微行)으로는 물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하고, 체모만 손상시킬 뿐이니 해서는 안 된다.

 

[수령의 일거일동은 마땅히 가벼이 하지 말 것이니, 설령 숨겨진 간악함이 있어 미행을 하면 알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하지 말 것이다. 하물며 밤중에 한번 나갔다 하면 아침엔 이미 성안 가득히 소문이 왁자지껄하니 

사사로이 주고받는 말, 몰래 하는 의논을 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한갓 여염집 부녀들로 하여금 길쌈하는 등불만 

끄게 할 따름이다. 근래 관장(官長)들이 즐겨 미행을 하는데, 그 의도인즉 몸소 기생집을 살펴서 몰래 사악한 짓을 

하는 연소배들을 붙잡아 자신을 밝다고 자처하려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현령(縣令)으로 미행하는 자를 

고을 사람들은 지목하여 도깨비라고들 한다.
미행을 하는 것은 첫째 창고의 부정을 적발하자는 것이요, 둘째 감옥의 부정을 적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창고의 양곡을 훔치고 농간질하는 것은 본래 붓끝에 달려 있는 것이요 곡식섬을 지고 밤중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죄수들은 목에 씌운 칼[枷]을 벗겨주지 않는다면 잠시도 숨돌릴 길이 없으니 이것은 어진 사람의 마땅히

살필 바가 아니다. 그러니 미행을 무엇 때문에 할 것인가.
우기장(牛奇章)이 양주(楊州)를 통수(統帥)하고 있을 적에 두목지(杜牧之) 1)가 그 막중(幕中)에 있으면서 

밤에 곧잘 미복(微服)을 하고 나가 놀곤 했다.  우기장이 이것을 듣고는 가자(街子) 2) 두엇을 시켜 

몰래 두목지를 따라가게 하여 뜻밖의 봉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막객(幕客) 3)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수령에게 있어서랴. 뜻밖의 봉욕도 또한 염려해야 할 것이다.
주신(周新) 4)이 절강 안찰사(浙江按察使) 5)로 있을 적에 일찌기 속현(屬縣)을 순행하면서 미복을 하고 

현관(縣官)을 건드려 옥에 갇혀 들어가 죄수들과 얘기를 나눔으로써 드디어 온 현의 질고(疾苦)를 알아냈다. 

다음날 아랫사람이 맞으러 가서야 옥에서 나오니 현관이 두려워하여 엎드려 사죄했다.
생각해보건대, 이런 일은 체모를 손상시킴이 적지 않다. 혹 비장(裨將) 6)을 시켜 해도 좋을 것이다.]


[각주]
1) 두목지(杜牧之) : 만당(晩唐)의 시인두목(詩人杜牧). 목지는 그의 자(字). 문집으로 『번천집(樊川集)』이 있다. 

2) 가자(街子) : 거리에 노는 한량배(閑良輩)를 가리키는 듯. 

3) 막객(幕客) : 우리 나라에서는 비장(裨將)을 주로 가리켰으나, 

    중국에서는 장사(將師) 막부중(幕府中)의 참모, 서기(書記) 등을 가리켰다. 

4) 주신(周新) : 명(明)나라 초기 사람으로 옥사(獄事) 판결을 잘하기로 이름났다. 

5) 절강 안찰사(浙江按察使) : 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 연해각성(沿海各省)의 하나. 

    안찰사(按察使)는 일성(一省)의 사법장관(司法長官)이었다.
6) 비장(裨將) : 감사(監司)·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유외사신(遺外使臣)들에게 따라다니는 관원의 하나. 


  

★  監司廉問 不可使營胥.
     (감사염문 불가사영서. )
     감사(監司)가 염문(廉問)할 경우 감영(監營)의 이서(吏胥) 1)를 시켜서는 안된다.

 

[『다산필담』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감사가 염문할 경우에는 마땅히 가까운 빈객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할 사람을 써서 몰래 촌락을 순행하게 해야 백성들의 고통을 파악할 수 있고 수령의 허물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감영의 이서들을 심복으로 보아 염문하는 데에 한결같이 모두 이 무리들을 보내는데, 

이 무리들이 본래 각 고을의 크게 교활한 아전들과 내통 결탁하여 표리로 얽혀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매년 겨울과 여름에 포폄(褒貶)을 시행할 때와 봄·가을에 순행을 할 때가 되면 이른바 염객(廉客) 2)이 기일에 

앞서 통보를 띄우고, 그 고을의 일 맡은 아전은 역시 기일에 앞서 화사한 방에 호화로운 자리를 마련하고 

대야며 안석과 책상을 산뜻하게 정돈해 놓고, 그리고 왜면(倭麵)에 연탕(燕餳), 울산(蔚山)의 전복에 제주도의 대합, 

맛좋은 쇠고기에 어린 돼지의 등살, 구운 자라고기에 잉어회 등 갖가지 진귀한 음식들을 차리고

휘황하게 촛불을 밝혀두고 염객을 기다린다. 저녁이 되면 호화로운 안장을 한 준마를 타고 한길을 내달려 와

말에서 내려 문에 들어서는데 그 기세가 마치 무지개와 같다.

이에 영저리(營邸吏) 3)와 고을의 아전이 왜쟁개비에 고기를 볶으면서 염객과 한 자리에 앉아

현령(縣令)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의논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현령이 저리의 비위에 거슬려서 최하의 고과(考課)를 맞아서 자리에서 떨려나 낭패해서 돌아가는 자들이

줄줄이 잇따라 있으니 현령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한암쇄화(寒巖瑣話)』 4)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5월에 내가 한암(寒巖) 밑에 앉아 있었더니 

당시 수리로 있는 현리가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밤에 감영의 염객(廉客)이 와서 염기(廉記) 5)를 

요구했읍니다. 생각컨대 지금 원님은 잘못된 정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우리 아전에게는 해가 없으므로

보고할  것까지는 없읍니다. 선정(善政)이라고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고 오직 향교(鄕校) 유생들의 싸움질이

요사이 자못 잠잠해졌고, 해창(海倉) 6)에서의 말질에 대한 원님의 신칙이 새로 있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일을 적어 염객에게 주고, 별도로 한 장을 써서 원님에게 바쳤는데 종당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읍니다. 」

6월 16일에 전주(全州) 감영에서 포폄 제목(褒貶題目) 7)이 내려왔는데,

그 글이 「고을엔 이미 싸움질이 멎었고, 말질이 또 공평해졌다[鄕旣息鬪, 斛又稱平]라고 되어 있었다.

아아, 이 고과를 한 자는 바로 수리가 아닌가, 

그를 신묘한 스승으로 세워 말만 하면 반드시 들어주고 계책만 내놓으면 반드시 써주는 것이 또한 옳지 아니한가. 

감사가 염문함에는 영리(營吏)를 믿고 써서는 안된다. 』
『운곡일초(雲谷日鈔)』8)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사가 염문하는 법은, 촌락을 숨어 다니면

부정을 살필 길이 없고, 읍내에 몸소 들어가면 정체를 감출 길이 없다. 마땅히 영리한 수하를 보내되

다만 일찌기 수리(首吏)를 지내다 자리를 잃고 좌절되어 현재의 수리와 앙숙인 자를 찾아내어

즉시 그 아전을 2백리 밖에다 옮겨 가둔다. 

가두어두고 며칠 있다가 그 영리한 수하를 보내어 거짓으로 친속이라 일컫고 옥으로 찾아가

마패(馬牌)를 내보이고는 그로 하여금 옥 안에서 수령의 허물과 아전들의 농간을 조목조목 적게 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네 죄는 죽어 마땅하나 지금은 잠시 미뤄 둔다. 네가 만약 참된 마음으로 조목조목 적되

털끝만큼이라도 숨김이 없고 털끝만큼이라도 속임이 없으면 네 죄를 모두 용서해주겠다.

만약 숨김이 있거나 아울러 속이는 일이 있게 되면 너를 죽이겠다」라고 한다.

이 아전은 죽음 속에서 삶을 얻고 아울러 원수를 갚을 수 있으니 그 기록한 바가 조금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제야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이에 그 아전을 꺼내다가 그전의 죄과를 열거하고 가벼이 형벌을 주어 방면한다.

그러면 씻은 듯 행적을 남김이 없이도 염문은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

[監司의 염문에도 또한 이 방법을 쓸 것이다 ]


[각주]
1) 이서(吏胥) : 각 관아에 딸린 구실아치의 통칭으로 아전(衙前)·서리(胥吏)와 같은 말이다. 

2) 염객(廉客) : 실정(實情) 염탐(廉探)의 임무를 띤 사람. 

3) 영저리(營邸吏) : 각 감영(監營)에 딸려 감영과 각 고을의 연락을 취하던 이속(吏屬). 영주인(營主人). 

4) 『한암쇄화(寒巖瑣話)』 : 다출(茶出)의 강진(康津) 시전의 한 저서(著書)로 추측되나 미상. 

5) 염기(廉記) : 염문기(廉問記). 즉 염탐(廉探)한 사실을 적은 기록. 

6) 해창(海倉) : 바다에 임(臨)해 있는 창고. 따라서 연해읍(沿海邑)에만 있을 수 있다. 

7) 포폄제목(褒貶題目) : 수령(守令)의 치민(治民)의 성적을 판정한 내용을 적은 글발.
8)『운곡일초(雲谷日鈔)』 : 『운곡정요(雲谷政要)』의 저자 이광우(李光佑)의 저서로 추측되나 미상임 . 


  

★  唯漢刺史六條之問 最爲牧民之良法也.
     (유한자사육조지문 최위목민지량법야. )
     무릇 행대(行臺) 1)가 물정을 살피는 데에는 오직 한나라 자사6조(刺史六條)의 조사 항목이

     백성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5년에 처음으로 자사(刺史)를 두어 각각 13주(州)를 맡게 하였다. 

추분(秋分)에 각 군국(郡國) 2)을 두루 다니며 치민(治民)의 상태를 살펴 능한 이를 올리고 능치 못한 이를 

내쫓으며 억울한 옥사(獄事)를 판결해서 처리하되 여섯 가지 조목을 기준으로 사실을 조사한다. 

1조는 강성한 씨족과 토호들이 전택(田宅)을 제도에 넘치게 가졌으며, 강한 힘으로 약한 자를 능멸하고 다수의 힘으로 소수에 대해 횡포를 부리는 일이 있는가? 2조는 이천석(二千石)이 조서(詔書)를 받들지 않고 공(公)을 등지고 

사(私)를 도모하며, 정도 아닌 행동을 하고 모리를 하며 백성을 침탈하여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간악함을 행하는 

일이 있는가? 3조는 이천석이 의옥(疑獄)을 돌보지 않고 사나운 기세로 사람을 죽이며, 성나면 멋대로 형벌을 가하고 기분좋으면 멋대로 상을 주며, 번거롭고 가혹하게 하여 백성을 긁어내어 백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산이 저절로 

무너지고 돌이 저절로 쪼개지는 등 요괴한 이변이 생겨나고 유언비어가 떠도는 일이 있는가? 4조는 이천석이 사람을 발탁하고 임용하기를 공평치 못하게 하고 자기 좋아하는 이에게 영합하며 어진 사람을 막고 나쁜 사람을 총애하는 

일이 있는가? 5조는 이천석 자제들이 세력을 믿고 각 직무담당자들에게 청탁을 하는 일이 있는가?

 6조는 이천석이 공도를 어기고 아랫사람과 한 무리가 되어 간악한 짓을 하며, 강성한 토호에게 아부하며, 

뇌물을 통하고 정령을 훼손하는 일이 있는가? 그리고 연말에 역마를 타고 중앙에 보고하게 한다.
유원성(劉元城) 3)은 이르기를 『육백석(六百石) 4)의 품질에 있으면서 이천석의 불법을 살필 수 있으니 그  권한이 가장 무겁다. 품질이 낮으니만큼 그 사람의 의기가 격앙하고 권한이 무거우니만큼 능히 뜻을 행할 수 있다』

고정림(顧亭林) 5)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품질은 낮으나 사명은 높고 관직은 작으나 권한은 무거우니 

이것은 작은 것과 큰 것이 서로 제어하게 하고 안과 밖이 서로 맺어지게 하려는 뜻이다. 본래 진(秦)나라 때부터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각 군을 감찰하게 했는데 제후(諸侯)를 폐지하고 군수를 둘 당초에 이미 이 제도를 만들었다. 성제(成帝) 6) 말년에 책방진(翟方進) 7)과 하무(何武) 8)가 「춘추(春秋)의 의리는 귀함을 써서 천함을 

다스리고, 낮은 직위로 높은 직위에 임하게 하지 않는다는데, 자사는 그위(位)가 대부(大夫) 9)에 밑가면서 

이천석에 임하게 하니 그 경중이 서로 맞지 않는다. 청컨대 자사제도를 폐지하도록 하자」고 하여 다시 주목(州牧)을 두어 이천석의 품질로 했다. 나중에 주박(朱博) 10)의 말에 따라 주목을 폐지하고 다시 자사를 두었다. 

유소(劉昭) 11)의 논의는, 자사가 비법을 감독·규찰하더라도 6조에 불과하고 역의 수레를 갈아타며 두루 다니고 

일정한 진(鎭) 12)이 있는 것이 아니며 품질이 겨우 육백석이어서 웃사람을 능범(凌犯)하는 말썽은 생기지 않았는데 성제가 주목으로 고치자 말썽의 싹이 비로소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13)의 말을 종합해 살펴보면 

주목제도에서는 중급의 인재는 겨우 연한에 의한 승진이나 전임의 순차나 따라가며 자기를 보전하는 정도이고, 

강자의 경우는 권한을 오로지하고 땅을 나누어 봉하기조차 해서, 그러고 난 뒤에야 자사 6조가 백대에 바꿔지지 

않을 좋은 법임을 알았다. 』
생각해보건대 우리 나라 감사제도는 본래 한나라의 자사와 같아 거주함에 일정한 진(鎭)이 없고 두루 다니며 

순찰하는 것이다. 지금의 營吏가 모두 郡縣에서 番上하게 된 것은 대개 이전에 監司가 列邑을 순행함에 이르는 

그  고을의 아전으로 營吏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 이래로 사신(使臣) 14)으로서 주목(州牧)을 겸해서

이를테면 平壤府尹·公州牧使의 類 어머니를 받들고 아내를 데리고 가서 수령과 같이 되었고, 

이따금 순력하다가 2년이면 갈려간다. 거처가 일정하니만큼 두루 살필 길이 없고,

부임한 지 오래 되면 점차 안면과 사정(私情)이 생겨나서 각 고을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져

다스림이 날로 탐학하고 혼탁해지니 반드시 옛 제도를 회복해야 이에 훌륭한 수령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 자사의 6조의 조사 항목은 그 큰 강령만 거머쥐므로 아랫사람을 침노하는 일이 없어

수령 된 자가 맘대로 그 뜻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감사는 형식적인 법규로 수령을 구속하여 걸핏하면 제약을 가해 손을 놀릴 수도 없게 하니 

제도 치고 좋지 않기로는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각주]
1) 행대(行臺) : 본래 중국의 관제(官制)에서 대성(臺省)으로서 지방에 두어진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일정한 대단위 행정구역 내의 제읍을 순행 통할하며 수령을 독찰하는 사명을 띤 관원을 통칭한 것이다. 

2) 군국(郡國) : 한대(漢代)에는 주대(周代)의 봉건제(封建制)와 진대(秦代)의 군현제(郡縣制)를 겸채(兼採)하여 

    전국을 군과 국으로 나누어 군은 중앙 정부에 직속하게 하고 국은 여러 왕과 제후에게 분봉(分封)해 주었다. 

3) 유원성(劉元城) : 중국 송나라 사람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킴. 자는 기지(器之). 사마광(司馬光)에게 배웠으며 

    직언(直言)으로 여러 차례 변방에서 귀양살이했다. 

4) 육백석(六百石) : 한대(漢代) 관리등급(官吏等級)의 하나. 받는 봉록의 다과(多寡)로 기준을 삼아 나누었는데, 

    중이천석(中二千石)에서 백석(百石)까지 있었다. 

5) 고정림(顧亭林) :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를 걸쳐 살았던 학자 고염무(顧炎武). 정림(亭林)은 그의 호이고 

    자는 영인(寧人)이다. 명나라가 망한 뒤 청조(淸朝)에 벼슬하지 않고 사방을 주유(周遊)하며 일생을 학구생활로 

    보냈는데 『일지록(日知錄)』을 위시한 수십종의 저서가 있다. 『일지록(日知錄)』은 그의 저서 중 

    가장 정박한 것으로 다산(茶山)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술에 참고자료(參考資料)로 이용되었다. 

6) 성제(成帝) : 전한(前漢) 제10대 제왕. 

7) 책방진(翟方進) : 중국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 자는 자위(子威).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승상(丞相)을 지냈고 고릉후(高陵侯)에 봉해졌다. 

8) 하무(何武) : 중국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 자는 군공(君公). 

    벼슬살이에서 사류(士類)를 추장(推奬)하기 좋아했으며 대사공(大司公)을 지냈다. 

9) 대부(大夫) : 중국 삼대(三代) 이래의 관위명(官位名)으로 경(卿)과 사(士)의 중간. 

    한대(漢代)에는  대개 진이천석(眞二千石)과 비이천석(比二千石)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10) 주박(朱博) : 중국 한나라 사람. 자는 자원(子元). 애제(哀帝) 때에 승상을 지내고 양향후(陽鄕侯)에 봉해졌다. 

11) 유소(劉昭) : 『중국인명사전(中國人名辭典)』에 나타난 바로는 두 사람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있다. 

      즉 양대(梁代)에 노장(老莊)에 밝고 ,섬령(剡令)을 지낸 사람과 명대(明代)초기에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를 

      지냈으며 변방 수비에 공을 세운 사람인데, 여기 인용된 논의를 한사람이 위 둘 중의 누구인지, 

      또는 제3의 다른 유소(劉昭)인지 알 수 없다. 

12) 진(鎭) : 관원이 관부(官府)를 차려 유둔(留屯)하는 곳. 

13) 두 사람 : 주박(朱博)과 유소(劉昭)를 가리킴. 

14) 사신(使臣) : 왕명을 받들고 파견되는 관원의 통칭인데, 반드시 외국(外國)으로 나가는 경우만이 아니라 

      국내의 지방으로 나가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를테면 관찰사(觀察使)는 본레 사신의 성격을 띤 관원이다. 


 

 

제 6 장   고공(考功) 

 

 

★ 吏事必考其功 不考其功 則民已勸矣.
     (이사필고기공 불고기공 즉민이권의. ) 
     아전들이 하는 일도 반드시 그 공적을 고가(考課)해야 하니, 그 공적을 따지지 않는다면,

     백성들을 권면할 수 없다. 일은 반드시 그 공적을 따져야 한다.

 

[고공(考功)이란 관리의 집무 실적을 심사하여 등급을 매겨 인사이훈(人事移勳)의 자료로 제공하는 일. 

고적(考績)·고과(考課)라고도 한다. 중앙관에 대한 고공은 고려 초기부터 법제화되어 있었고

지방 수령에 대한 고공은 고려 우왕(1374∼1388) 때(考績之法)이라는 것이 정해졌는데,

이조에 들어와서도 계속 실시되어 왔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지방 수령에 대한 고공은 각 도의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 행해서 계문(啓聞)하여 도목정사(都目政事)의 기준 자료로 삼게 하였다.

이때 고공의 기준으로 7개 항목을 두었는데 이것을 수령의 칠사(七事)라 부른다.

(七事 : 農桑盛·戶口增·學校嶼·軍政修·賦役均·詞訟簡·奸猾息)
아전들의 하는 일도 반드시 그 공적을 고과해야 할 것이다. 공적을 고과하지 않으면 백성을 권면할 수 없다.

『주례(周禮)』에 『이(吏)는 다스리는 것으로 백성을 얻는다』하였다.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소리(小吏)로 향읍(鄕邑)에 있는 자이다』라고 했으니,

3년마다 여러 이(吏)들의 치적을 크게 결산해서 상벌을 시행하는 데에 부사나 서리도 모두 그 속에 포함될 것이요

백관만 고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송(宋)나라 제도에 여러 주(州)의 연조(掾曹) 1) 및 각 현의 부위(簿尉) 2)들도 모두 주군의 장리(長吏)를 시켜서 

공적과 허물을 기록하도록 해서 임기가 차면 담당관이 자세히 살펴보아 전최(殿最) 3)를 정하였다.

고려시대의 제도에, 서인(庶人)으로 관에 있는 자 4)로 주사(主史) 5)· 영사(令史) 6)· 서예(書藝) 7)·

기관(記官) 8)· 서수(書手) 9)· 직성(直省) 10)· 전리(電吏) 11)· 문복(門僕) 12)· 조마(照磨) 13)·

역리(譯吏) 14)· 통사(通事) 15)· 지인(知印) 16)· 계사(計史) 17)· 산사(算史) 18)· 별가(別加) 19)·

통인(通引) 20)· 장수(杖首) 21)· 녹사(錄事) 22)· 지반(知班) 23)· 기사(記事) 24)· 소유(所由) 25)·

공목(孔目) 26)· 감사(監史) 27)· 감작(監作) 28)· 주의(注衣) 29)· 막사(幕士) 30) 등의 호칭이 있었다. 

매 6월·12월에 9품 이상과 부사(府史)·서도(胥徒)에 대해 연월을 차례로 적고 수고롭고 편안했던 것을 구분하고 

공과를 표시하고 능력의 우열을 논하여 모두 기록에 올렸으니 그것을 정안(政案) 31)이라 불렀다. 

중서성(中書省) 32)에서 승진과 파출을 의망(擬望) 33)하여 보고하고 문하성(門下省) 34)에서 제칙(制勑)을 받들어 시행하였으니 그것을 도목(都目) 35)이라 불렀다. 즉 고려시대에는 소리에 대해 고공이 있었던 것이다.
대저 사람을 부리는 법은 오로지 권·징(勸懲) 두 글자에 있는 것이다. 공이 있음에도 상이 없으면 백성을 권면할 

수 없고 죄가 있음에도 벌이 없으면 백성을 징계할 수 없다. 권면하지도 않고 징계하지도 않으면 만민이 해이해지고 백사가 무너지게 되니 백관과 여러 이속들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지금에 죄에는 벌이 있지만 공에는 상이 없다. 

이 때문에 이속들의 버릇이 날로 간악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당(唐)나라 노환(盧奐)이 섬주(陝州)를 다스릴 때 인자와 위엄이 아울러 드러났다.  섬주의 습속이 귀신을

숭상하였는데 그곳 백성들이 말하기를 『신명에게 빌 것도 없고 무당의 축원을 구할 필요도 없다. 

너희는 노공을 범하지 말아라. 곧바로 화복이 있으리라』하였다.]

 

[각주]
1) 연조(掾曹) : 지방 군현의 서리(胥吏). 

2) 부위(簿尉) : 주부(主簿)와 위(尉). 수령의 보좌관. 

3) 전최(殿最) : 옛날 관리들의 치적이나 군공을 고과하는 데 있어 최상등을(最) 최하등을(殿)이라 칭했다. 

4) 서인으로 관에 있는 자 : 관인층에 끼어들지 못하는,신분계충으로 행정 말단의 직책을 맡은 자들(庶人在官者). 

5) 주사(主史) : 중서문하성· 삼사(三司)· 상서(尙書)· 육부에 딸린 이속. 『고려사』에는 주사로 나와 있다. 

6) 영사(令史) : 중앙 각 관서에 딸린 이속의 일종. 

7) 서예(書藝)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사관(史館)·비서성(秘書省) 등에 딸린 이속. 

8) 기관(記官)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삼사(三司) 등의 관서에 딸린 이속. 

9) 서수(書手)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예문관(藝文館)·비서성(秘書省)에 딸린 이속. 

10) 직성(直省)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상서도성(尙書都省)에 딸린 이속. 

11) 전리(電吏)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딸린 이속으로 사령의 일을 맡은 자. 

12) 문복(門僕)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딸린 이속으로 출입문의 수위를 담당한 자. 

13) 조마(照磨)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딸린 이속. 

14) 역리(譯吏)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딸린 이속. 『고려사(高麗史)』에는 역사(譯史)로 나온다. 

15) 통사(通事)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딸린 이속. 

16) 지인(知印)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딸린 이속. 

170 계사(計史) : 삼사(三司)·호부(戶部)·형부(刑部) 등에 두어진 이속으로 회계를 담당했다. 

18) 산사(算史) : 상서성(尙書省)·호부(戶部)·형부(刑部) 등에 두어진 이속. 

19) 별가(別加) : 밀직사(密直司)에 딸린 이속. 『고려사』에는 별가(別駕)로 나온다. 

20) 통인(通引) : 밀직사(密直司)에 딸린 이속. 

21) 장순(杖首) : 형조(刑曹)에 딸린 이속. 

22) 녹사(錄事) : 하급의 벼슬로 녹사라는 관직이 있었던 한편 서리직으로 사헌부· 예문관에 속한 녹사도 있었다. 

23) 지반(知班) : 어사대(御史臺)(뒤의 司憲府)에 딸린 이속. 

24) 기사(記事) : 사헌부(司憲府)·전의시(典儀寺) 등에 딸린 이속. 

25) 소유(所由) : 어사대(御史臺)에 딸린 이속. 

26) 공목(孔目) : 예빈시(禮賓寺)에 딸린 이속. 

27) 감사(監史) : 군기시(軍器寺) 등에 딸린 이속. 

28) 감작(監作) : 선공시(繕工寺)·군자시(軍資寺) 등의 관서에 딸린 이속. 

29) 주의(注衣) : 상의국(尙衣局)에 딸린 이속으로 왕의 의복을 담당함. 

30) 막사(幕士) : 수궁서(守宮署)·공역서(供驛署)·상사국(尙舍局)에 딸린 이속. 공어(供御) 및 장설의 일올 맡았다. 

31) 정안(政案) : 이부(吏部)와 병부(兵部)(李朝시대에도 같음)에서 대소의 문무 관원들에 대하여

      그 출신(出身)한 연월의 차례와 벼슬자리의 일이 힘들고 편한 것을 구분한 것과,

      재직시 잘하고 잘못한 것을 표한 것과, 그 직임에 대하여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을 갖추어 적어서

      인사(人事)의 참고로 하던 책. 

32) 중서성(中書省) : 조칙(詔勅)을 기초하는 일을 맡은 기구. 

33) 의망(擬望) : 임금에게 3인의 후보자(三望)를 천거하는 일. 

34) 문하성(門下省) : 조칙(詔勅)을 심의하는 기구. 『고려사』 직관지(職官志)에는 중서(中書)· 문하(門下)가 

       한 성(省)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원래의 구분된 기능으로 설명한것 같다.
35) 도목(都目) : 매년 음력으로 6월과 12월에 벼슬아치의 성적이 좋고 나쁨에 따라서 이동시키고 파출하던 일. 

      도목정사(都目政事) 또는 도정(都政)이라고도 부른다. 


  

★  國法所無 不可獨行 然書其功過 歲終考功 以議施賞 猶賢乎已也.
     (국법소무 불가독행 연서기공과 세종고공 이의시상 유현호이야. )
     국법에 없는 것을 혼자 행할 수는 없지만, 그 공과를 기록해 두었다가

     연말에 고공을 하고 의논해서 상을 주면 오히려 그만두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한 책자를 비치해 두고 매 한 장에 한 인원의 이름을 쓰되 모든 향임(鄕任)과 모든 군교(軍校)[鄕丞 및 軍官], 

여러 아전과 여러 하예(下隸)들의 공과를 모두 기록한다. 과오는 범할 때마다 징치하고 공적은 연말에 검토 비교해서 9등급으로 구분한다. 상(上)의 3등급에 든 자는 새해 차임할 적에 반드시 요직을 주고, 중(中)의 3등급에 든 자는 

상(賞)을 논함에 차별이 있게 하고 하(下)의 3등급에 든 자는 1년 동안 정직을 시켜 직임을 얻지 못하게 하면 

어느 정도 권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향승(鄕丞)과 군교는 그 정원이 많지 않으므로 상등과 하등은 1인을 넘지 말도록 하고 그 공과에 따라 

혹 上上이 되게 하거나 혹 上中이 되게 하거나 上下가 되게 한다. 하등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아전들도 9등급을 적용할 것이다.  아전의 정원이 30인이면 상상(上上)과 하하(下下)에 각 1인, 

상중(上中)·하중(下中)에 각 2인, 상하(上下)·하상(下上)에 각 2인, 중상(中上) 중하(中下)에 각 3인을 넣고 

그 나머지 14인은 모두 중중(中中)에 둔다.
상상에 든 자는 제일가는 자리를 주고, 상중에 든 자는 다음 자리를 주고, 상하에 든 자는 또 그 다음 자리를 주고 

중상에 든 자는 또 그 다음 자리를 준다. 중중에 든 자는 이방(吏房)에게 맡겨서 박한 자리를 주도록 하며, 

중하에 든 자는 반년 정직을 시키되 차역(差役)은 면제시켜 주고, 하 3등급에 든 자는 1년 정직(停職)을 시키되 

하하에 든 자는 반드시 고된 역사(役事)에 징발을 시킨다.
향승과 군교는 자리가 많지 않아서 옮겨줄 자리가 없으면 활이나 화살, 필묵 따위로 차별을 두어 시상을 하고 

모두 첩문(帖文)을 주어 각기 후세에 전하도록 한다. 문졸(과 관노들도 역시 모두 위의 법에 비추어 따라야 할 것이다.
풍헌(風憲)· 약정(約正)· 저졸(邸卒) 등도 역시 모두 위의 법에 비추어 따르되 풍헌이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해서 

상상에 든 자는 올려서 향승을 삼을 것이다.  요즈음 관례를 보면 아전과 노속으로 신관을 모시고 오거나 

내행을 모시고 온 자는 그 명년에 반드시 좋은 자리를 얻게 되는데 이는 사적인 일로 공적인 상을 수여하는 셈이다. 

한번의 서울 걸음이 본래 큰 노고라 한 것도 없고 또다른 공무로 상경하는 경우와 그 수고로움이 마찬가지일 것이니 이 때문에 곧 제일 좋은 자리를 내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  六期爲斷 官先久任 而後可議考功. 如其不然 唯信賞必罰 使民信令而已.
     (육기위단 관선구임 이후가의고공. 여기불연 유신상필벌 사민신령이이. ) 
      6년으로 수령의 임기를 정해서 수령이 우선 오래 그 자리에 있은 후에 가히 고공을 의논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오직 신상필벌(信賞必罰)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명령을 믿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년 이래 수령들이 자주 교체되어 오래가봐야 2년이요 나머지는 혹 1년에 끝나기도 한다. 

이 법이 고쳐지지 않으면 이민(吏民) 1)들이 항구적인 계책이 없고 고공이 법도 웃음을 살 뿐이다.
공자께서 문인의 물음에 대답하여 『병(兵)은 버리고 식(食)은 버릴지언정 끝내 신(信)은 버려서 안된다』 2)했다. 

영(令)을 미덥게 한다는 것은 백성에 임하는 첫째의 임무이다. 

영을 내려 『무슨 죄를 범한 자는 무슨 벌을 받는다』하고서 그대로 시행하지 않고,

영을 내려 『무슨 공을 세운 자는 무슨 상을 받게 된다』하고, 그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무릇 명령을 시행하고자 해도 백성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는 큰 해가 없다 하더라도 만약 나라에 외환이 있을 경우

이때에 당해서 신이 아랫사람들에게 본래 서있지 않으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명령을 미덥게 한다는 것은 수령의 급선무인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장수는 명령을 철회하지 않는다』하였다.

수령의 장수 됨이 큰 것이니 명령이 서지 않으면 어떻게 백성을 지도할 것인가. 이것은 대의이다.]

 

[각주]
1) 이민(吏民) : 지방의 이속과 향임(鄕任) 부류들. 경우에 따라 (民)은 일반 백성과 구분되는 향임이나 

    풍헌 따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2) 공자(孔子)와 자공(子貢)과의 문답(論語 顔淵篇).


  

★  監司考功之法 因可議也. 疏略旣然 無以責實 奏改其式 抑所宜也.
     (감사고공지법 인가의야. 소략기연 무이책실 주개기식 억소의야. )
     감사가 고공하는 법은 말에 따라서 가히 의논할 수 있다.  그 소략한 것이 이미 그렇기 때문에

     실효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임금께 상주해서 그 방식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아마 좋을 것이다.

 

[「고적의(考績議)」1)에 이렇게 말하였다. 『국가의 안위는 인심의 향배에 달려 있고 인심의 향배는 

생민(生民)의 잘살고 못사는 데에 달렸으며, 생민의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의 좋고 나쁜 데에 달렸으며, 

수령의 좋고 나쁜 것은 감사의 포폄(褒貶)에 달려 있으니, 감사의 고과하는 법은 곧 천명(天命)과

인심의 향배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나라의 안위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그 관계되는 바가 이와같이 중요한데 

그 법이 소루하고 명백하지 못함이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으매 저으기 우려하는 바이다.  한(漢)나라의 법에 

자사(刺史)는 육조(六條)로써 이천석(二千石)을 살펴서 연말에 일을 보고할 적에 전최(殿最)를 들어서 상벌을 

실시하도록 했다. 그 법이 일찌기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원제(元帝) 때 이르러서 경방(京房) 2)이 

또 고공과리법(考功課吏法)을 아뢰어 천하의 이목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으니

그 옛법이 소루한 결점이 꼭 없지 않았던 고로 경방의 주장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 두예(杜預) 3)는 경방의 유법(遺法)이 세밀해서 통용하기 어렵다고 하여,

요(堯)임금의 구법을 펴서 세밀한 것을 버리고 간략한 것을 취하자고 하였다. 

이는 두예가 요임금의 법이 후세보다 엄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잘못 간이했다고 말한 것이다. 

전 시대의 제도를 두루 상고해본 바 무릇 고과법은 모두 9등으로 구분해서 연말에 한번 평가를 하였다. 

오직 후위(後魏) 문제(文帝) 4)가 말하기를, 『상과 하 두 등급은 세 질로 나누고 중간등급은 한 질로만 한다』 

하였는데, 이렇게 말한 것은 상과 하의 등급은 올리고 내쫓게 되는 종류이기 때문에 세세하게 선악을 나타내는 

것이요, 중간 등급은 본래 제 할 일을 지켜나갔기 때문에 보통일 뿐이다』하였으니 그 의도는 또한 좋다고 하겠다. 

우리 나라의 고과법은 오직 세 등급으로만 나누어 그 추솔 간략한 것이 이같으면서 1년에 두 번 고과하니 

또 어찌 자주자주 하는 것인가. 요순(堯舜) 시대의 사람들은 어질고 능하고 재주 있고 지혜로운 것이 요즈음 사람과 

같지 않았지만 3년 이후에 그 공적을 따졌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반년 이내에 고과를 하니 불가하지 않겠는가. 

수령의 고과는 마땅히 9등급으로 나누고 연말에 한번 고과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고적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고공하는 제목(題目)의 글을 쓰는데 여덟 글자에 그쳐서 너무 소략하다. 

옛날 노승경(盧承慶) 5)은 특히 자기를 고과해서 <감운손량(監運損糧), 비력소급(非力所及)> 6)이라 했고 

양성(陽城)이 몸소 자기를 고과하되 <무자심로(撫字心勞), 최과정졸(催科政拙)> 이라 썼으니 

모두 4글자 2구(句)를 사용하였다. 대개 당나라 시대에 그 법이 이미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周)나라 시대에 총재(冢宰)가 회계를 받는데 회계하는 글이 필시 여덟 글자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고, 

한나라 시대에는 군국(郡國)에서 모두 계부(計簿)를 올렸는데 계부의 글도 필시 여덟 글자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수령의 잘잘못을 논하는 데 글자가 많은 경우는 수백 자에 이르러 자수에 

구애가 없는데 감사의 고과만 유독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또 생각하건대 상고에는 상하가 서로 권면(勸勉)하며 

분용희제(奮庸熙載) 7)하였거늘 후세에는 이 뜻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흐리멍텅하고 무능한 사람이 대체를 

지켜나가기에 힘쓰고 옛 법도를 그대로 좇는다 하여 이름지어「명령을 않는데도 저절로 다스려진다」 

하지만 백가지 법도가 해이해지고 많은 구멍이 자꾸 뚫려 백성들이 그 해독을 입어 고혈이 점차 말라가는데도 

안찰(接察)하는 신하인 감사(監司)는 이런 수령을 고과하여 「간약(簡約)으로 다스리니 앉아서 진정시키되 

여유가 있도다」라고 쓰거나 「습속을 좇아 다스리고 빛나는 명예를 구하지 않는도다」라고 하거나 

심한 경우 「산수 좋은 고장에서 한묵(翰墨)으로 소요한다」라고도 한다. 이런 따위는 모두 일을 보지 않고 

녹봉을 축내고 자리를 병들게 하는 자의 제목인 것이다. 』

「고적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고적의 조례(條例)는 대저 아홉의 강(綱)이 있다. 첫째는 율기(律己), 

둘째는 봉공(奉公), 세째는 애민(愛民), 그 다음으로 육전(六典)이 들어가게 된다. 

9개의 강이 각각 6개의 조목을 포함하고 있으니 모두 54개 조항이 될 것이다. 

조정에서 54개 조목을 여러 고을에 반포해서 공손히 지켜 수령들이 받들게 하고 오직 조심스레 실행하여, 

그중 효과를 이룬 것을 27개 조목3에 9를 곱해서 27으로 갖추어 감사에게 보고하도록 한다. 

감사의 고적은 그중 9개 조목을 선택해서 9개 등급에 배정해서 조정에 아뢰도록 하되 

그 아홉 가지 일이 모두 <장(臧)>이 된 자는 상상의 등급에 들고 그 아홉 가지 일이 모두 [부(否)]가 된 자는 

하하의 등급에 들어가며, 8)  그중 하나만(부)인 자는 상중이 되며, 그중 하나만(장)인 자는 하중이 되는 것이니 

차례로 배열해서 매양(장과 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등급의 고하를 정하도록 할 것이다. 

이제 시험삼아 고적 장계(考績狀啓)를 모두 어사 서계(御史書啓)의 서식과 같이 만들어 다음에 제시해 본다.
옥과(玉果) 9) : 현감 이모.
율기(律己) : 아침 일찍 관아에 앉아 치정하는 것이 엄숙하여 이민(吏民)들이 공경할 줄 알게 하였다. <장(臧)>
봉공(奉公) : 문루에 올라가서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만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의 덕을 베푼 뜻을 알도록 하였다.[장]
애민(愛民) : 버려진 아이 7명에게 유모를 대주어 양육하도록 했으며 늙은 홀아비 4명을 창사에서 부양하였다.[장]
이전(吏典) : 간활한 아전 이모·김모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친 것을,

그 농간을 적발해서 법률에 비추어 처벌하자 모든 아전들이 손을 오므리게 되었다. [장]
호전(戶典) : 동쪽 두 면의 누전(漏田) 10) 12결(結)을 조사해내었고 또 신기전(新起田) 11) 10결 20부(負)를 

밝혀냈다. [장]
예전(禮典) : 백성들을 권유해서 관혼 상제(冠婚喪祭)의 예를 행하며 모두 한결같이 법제를 준수하도록 했다. [장]
병전(兵典) : 스스로 숙동(熟銅) 12) 3백근을 마련하여 무기고에 저장해서 불의의 병란에 대비하였다. [장]
형전(刑典) : 고을의 백성 박모가 살인을 하고 뇌물을 바쳐 사건이 밝혀지지 않고 해를 넘겼는데 

지난 7월에 그 간악함을 들추어 처벌하매 백성들이 그의 밝음을 칭송했다. [장]
공전(工典) : 관에서 전거 13) 20량을 만들어 20개 마을에 나누어 주매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기뻐했다. [장]
이상 아홉 가지 일이 모두 [장]에 해당되었으니 <상상>으로 매긴다.
순창(淳昌) 군수 김모
율기 : 가권(家眷)을 데리고 오지 않았고 자제와 친우들을 모두 내아(內衙)에 두고 정당에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장]
봉공 : 문보(文報)가 기한을 넘기지 않았으며, 관아 이민(吏民)이 지시사항을 기한에 앞서 실천한 자에 대하여 

관에서 시상을 하였다. [장]
애민 : 양로연을 하는데 인구를 부르기를 너무 심하게 해서 백성들이 혹 말이 있었다. [부(否)]
이전 : 공사(貢士) 7인을 하였는데 모두 공론에 맞았고 성시(省試) 14)에 발해(發解) 15)한 자가 

다른 고을에 비해 유독 많았다. [장]
호전 : 상평창(常平倉) 곡식의 곡가를 정하는데 억지로 5푼을 감해서 백성들이 혹 말이 있었다. [부]
예전 : 향교(鄕校)에 출입하는 자들이 명륜당(明倫堂)에서 싸움질을 하였는데 사정에 끌려 다스리지 않으매 

선비들의 습속이 무너졌다. [부]
병전 : 무사들이 교련을 받는데 한결같이 제식을 준수하여 그 무예가 정통하고 숙달되어졌다. [장]
형전 : 송사(訟事)를 처리할 때 백성들로 하여금 원고와 피고를 대질시키고 판결이 난 다음에 

송사에 패한 자를 다스리니 수십년 미결 상태의 송사가 많이 해결되었다. [장]
공전 : 황폐된 저수지 일곱 곳이 모두 메워져 있는데 파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
이상 [장]이 5개 조목이고 [부]가 4개 조목이니 [중중]으로 매긴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모
율기 : 애첩이 정사에 관여하고 술자리 벌이는 일이 너무 많았다. [부]
봉공 : 삭망(朔望)에 망하례를 궐해서 거행하지 않고 검시관(檢屍官) 16)의 일을 기피하였으니 성실치 못하다. [부]
애민 : 의지할 곳 없는 늙은 홀아비와 과부들을 강제로 마을 백성들에게 맡겨, 

뇌물을 바치고 모면하려는 자도 있게 하였다. [부]
이전 : 간활한 향임을 신임하여 정사를 모두 맡겨버리고 면임과 이임(里任)도 모두 간활한 사람들을 시켰다. [부]
호전 : 면화밭의 재해를 전혀 직접 둘러보지 않고 아전의 손에 일임해 버려서 31결(結)이나 그 재결(災結)을 

지나치게 매기도록 했다. [부]
예전 : 십삼경(十三經)을 구입해온 다음 그 좋은 본을 훔쳐 제가 갖고 몰래 좋지 못한 본을 바꾸어놓아 

많은 선비들의 비방이 있었다. [부]
병전 : 어영청(御營廳) 17) 군사 11명을 첨정(簽丁)하는데 간활한 아전의 부정하는 바 되어 

30여명을 침노하기에 이르러 백성들의 원성이 식지 않았다. [부]
형전 : 취한 채 그 죄가 아닌데 함부로 곤장질을 하고 조그만 과오에 혹 여러 달 갇혀 있게 하였다. [부]
공전 : 문루(門樓)가 부서져서 전임자가 그 수리비로 돈 3백냥을 남겨두었는데 모두 사용으로 들어가고 

다시 세울 작정을 하지 않았다. [부]
이상 아홉 가지 일에 모두 [부]가 되었으니 <하하>로 매긴다.
모든 도와 모든 고을의 고적에 등급을 나누는 것은 다 이와 같이 할 것이다.
「고적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9등으로 고적을 할 때 의당 각 도에 각각 정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경기도 같이 37고을이면 상상과 하하에 각 1명씩이고 상중과 하중에 각 1명씩이고 상하와 하상에 각 2명씩이고 중상과 중하에 각 4명씩이고 중중에 21명을 두면 될 것이다.위의 등급에 따라 나누는 법은

매 10명에 2명을 취하여 그 1명은 상등에, 다른 1명은 하등에 두며 그 나머지는 중등에 둘 것이다
또 전라도같이 53고을이면 상상과 하하에 각 1명, 상중과 하중에 각 2명, 상하와 하상에 각 2명, 

중상과 중하에 각 5명, 중중에 33명이 되게 할 것이다.또한 10명에서 1명을 상등으로 잡고 1명을 하등으로 잡는다
강원도같이 26고을이면 상의 세 등급에 각각 1명, 하의 3등급에 각각 1명씩, 중상과 중하에 각각 2명, 

중중에 16명이 되게 할 것이다.  다른 도에도 9등으로 나누는 인원수를 모두 이와 같이 할 것이다.
논하여 다음 같이 말한다. 선인과 악인이 본래 정원이 있을 수는 없다. 한 도에 30 고을이 있다 할 때 

반드시 상등급이 세 고을이 되고 하등중이 세 고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숫자를 고정하여서 가감이 없도록 

한다면 만약 어진 수령이 우연히 드문 경우는 필시 억지로 채워넣어 포상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만약 탐학한 수령이 우연히 많은 경우는 요행히 죄를 벗어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론을 제기하는 자가 반드시 분분히 일어나서 모두 그 불편함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문과(文科) 시험에 갑과(甲科) 18)는 매번 셋을 뽑는데 어찌 꼭 갑에 해당하는 

자가 셋이겠는가. 그리고 을과(乙科) 19)의 정원은 매번 다섯을 뽑는데 어찌 꼭 을에 해당하는 자가 

반드시 다섯이겠는가. 또한 무릇 과거 시험의 고권(考卷) 20)에 혹 이상(二上)인 자가 장원이 되기도 하고 

혹 삼하(三下)인 자가 장원이 되기도 한다. 21) 또 장원이 되면 관례적으로 반드시 육품(六品)에 올려 

곧 예조 좌랑(禮曹佐郎)·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임명하는데 일찌기 시권(試卷)이 하등에 있다고 해서 

장원의 상전을 주지 않는 일은 없었다. 지금 여기 정한 고공법이 이와 어찌 다르겠는가. 

시험삼아 전라도를 들어 말하자면 50명의 수령이 이 해의 말의 고과에서 하등에 5명이 있을 줄 분명히 알면 두렵고 두려워 혹 그 구렁에 빠질까 조심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이 해의 말의 고과에서 상등에 5명이 있을 줄 분명히 알면 열심히 부지런히 하여 혹 저 언덕에 오를까 바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두려울 바도 없고 희망할 바도 

없음이 오늘날의 그것과 어찌 같겠는가? 하물며 54개 조목은 조정에서 내린 명령이고 27개 조목은 수령이 치적을 

올리는 것이다. 이 해 말에 장차 27개 조목으로 자신이 나열해서 위에 보고하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54개 조목을 

조석으로 항상 눈에 두고 거기에 죄를 면하고 공을 세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할일없이 빈둥거림이 어찌 오늘날과 같겠는가.
『다산필담(茶山筆談)』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물(物)이 쪽 고르지 않은 것은 물의 이치인 것이다. 

한 대열의 사람들이 전부 꼭 선할 이치는 없을 것이니 비록 크게 악하지 않더라도 한 대열에서 최하에 설자가 있게 

될 것이고 비록 지선(至善)하지 않더라도 한 대열에서 최상에 설 자가 있게 될 것이다. 

마주(馬周) 22)의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이 있다. 「요즈음 고과에 등급을 매기는 데 <중상>밖에 없으니 

어찌 우리 황조(皇朝)의 선비에 상등과 하등의 고과에 들 자가 없음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그 뜻은 대개 현재 있는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선발해서 상의 등급에 올리자는 것이다. 

또 비록 <하하>의 등급에 들었더라도 그 나열한 바 결점을 지적한 조목들이 모두 나약하고 소루하고 

어두운 잘못이지, 탐학하고 일부러 범한 죄과가 아니라면 해직이 될 뿐이요 의당 후일의 재난은 없을 것이다. 

어찌 내가 고의로 고과를 나쁘게 하였다고 꺼림칙하게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고적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감사의 고적의 장계와 수령이 자기 치적을 보고하는 문서는 함께 조정에 올리고 아울러 이조(吏曹)에도 보내도록 할 것이다.  수령의 주적장(秦績狀)을 감영(監營)에서 없애는 것은 불가하다.

비록 9등급의 고적이 보고된 고적장에 따르지 않았더라도 그 문서는 의당 조정에 올리도록 한다.

법을 원래 이같이 하면 감사는 필시 그 실적을 감히 은폐하고  사사로이 그 사람을 깎아내리지 못할 것이다.』
「고적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3년마다의 대비(大比)에서 삼고수령(三考守令) 23)은 이미 교체되었든지 

교체되지 않았든지 물론하고 모두 상경해서 임금이 불러보는 것을 기다려 직접 자기 주적장을 보고하도록 한다.
3년 동안의 주적장 및 3년 동안의 고공계(考功啓)를 수령이 모두 직접 안고 임금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읽되 

혹 임금이 묻게 되면 즉시 그 자리에서 덧붙여 아뢰도록 한다. 이는 요순(堯舜)이 매일 군목을 만나보는 법인 것이다. 이 법은 엄숙하고 추상같아 후세 법의 소활하고 해이해서 백번이나 조용히 강구해보아야 

비로소 겨우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지 않았다. 』
「고적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이 지방 수령들을 불러보는 것을 마친 다음에 암행어사 12인을 팔도에 

나누어 보내서 영남·호남과 西道·北道는 각각 2인을 보냄 그 공죄 허실을 살피도록 한다.
자(子)·오(午)·묘(卯)·유(酉) 24)에 해당하는 해에는 입춘(立春)날부터 삼고 수령들을 불러보는데 

매일 5·6인을 만나 입하(立夏)열흘 전에 마친다. 주적장을 받기를 마치면북도의 수령은 모름지기 교체되어

돌아올 때 보도록 할 것이다 이에 입하날 어사를 풀어보내서 입동(立冬) 전에 복명(復命)하도록 한다.
어사는 수령들의 주적장과 감사의 고적계를 가지고 여러 고을로 몰래 다니며 그 허실을 살펴보아, 

속여서 공적을 보고했고 감사가 그에 부동(附同)한 것은 들어서 탄핵하고 실지 공적을 보고했는데 

감사가 억눌러버린 것도 들어서 탄핵할 것이다.
가만히 보건대 조정에서 어사를 파견하는 것이 대략 3·4년 만에 한번 보내기로 되어 있으나 혹 5·6년 동안 보내지 

않다가 7·8년 만에 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수령이나 향리(鄕吏)들이 모두 요행심이 생겨 부정을 저지르고도 

오래 되어 드러나지 않기를 기대하게 된다. 일정하게 법을 정해서 3년 만에 꼭 한번 파견하자는 것이다. 

자(子)·축(丑)·인(寅) 3년 동안의 일들을 묘(卯)년에 내려와서 조사하도록 하고, 묘·진(辰)·사(巳) 3년 동안의 일을 

오(午)년에 내려와서 조사하도록 하여 뚜렷하게 항식으로 삼아 당겨지고 물려지는 일이 없게 하면 탐관과 간활한 

아전들이라도 모두 후환이 두려워 감히 방심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고적이 아니더라도 응당 실효를 거둘 것이다. 

더구나 조정에서 반포한 바 54개 조항이 어사의 수중에 있고 수령이 보고한 바 27개 조항이 어사의 수중에 있으며, 감사가 고적한 바 9개 조항이 어사의 수중에 있으니 이것들을 가지고 고을로 가서 그 허실을 조사하면 

누가 떨고 두려워하지 않을 자 있겠는가. 비록 세가 대족이라도 3년 뒤에 어사로 내려올 사람과의 친소관계나 

그 사람의 성품이 유한지 강한지 여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장차 무엇을 믿고 의지하려 하겠는가. 

감사는 자기와 동시에 재직하고 있어 세력으로 흔들 수도 있고 안면과 인정으로 사정할 수도 있겠으나 

어사는 감사와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위의 것들이 다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감사의 고적도 또한 나중에 어사의 

의논이 있을줄 알면 그 고적하는 것이 공정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행해지는 고적법과 비교할 때 

성글고 주밀한 것이 어떠한가. 만약 수령이 허위로 치적을 보고하고 감사가 속여서 공적을 아룀이 있으면 

본죄와 아울러 임금을 속인 죄를 또 장차 용서받지 못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자 있겠는가. 

이 법이 만약 정해지면 태평의 치세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요· 순(堯舜)이 요· 순의 치세를 이룩한 소이는 

고적 이 한가지 일에 있었다. 나는 이 주장이 망언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고적의 구등(九等)· 삼고(三考)· 상벌· 출척(黜陟)의 법과 거복(車服) 25)· 유방(流放) 26)에 대한 규정은 

「고적의」에 상세하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각주]
1)「고적의(考績議)」 : 다산(茶山)이 고적(考績) 문제를 다룬 글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권(卷) 9에

   『고적의(考績議)』와 『옥당진고과조례차자(玉堂進考課條例箚子)』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것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원문에는(臣)자가 들어 있다.

    이것은 임금에 대한 자칭으로 관용적인 말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빼고 번역했다. 

2) 경방(京房) : 자는 군명(君明), 본성은 이(李). 누차 상소하여 채택된 바 있었으며 역학(易學)에 밝았다. 

    저서로는 『경씨역전(京氏易傳)』이 있다. 

3) 두예(杜預) : 자는 원개(元凱). 용병(用兵)을 잘하여 군공(軍功)을 세우기도 했으나 박통(博通)한 학자였다. 

   『좌전(左傳)』에 대한 주해가 유명하다. 

4) 문제(文帝) : 중국 북조(北朝)시대 북조(北朝)의 임금. 재위 471∼499년. 

5) 노승경(盧承慶) :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 자는 자여(子餘), 벼슬은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6) 감운손량(監運損糧) 비력소급(非力所及) : 운송의 임무를 맡고 있을 때 양곡이 축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뜻. 

7) 분용희재(奮庸熙載) : 훌륭한 신하들을 찾아서 공을 떨치도록 해서 성대(盛代)를 이룸

    (『尙書』 舜典 『有能奮庸熙帝之載』). 

8) 장(臧)은 잘한 것, 부(否)는 잘못한 것을 청하는 말. 선악(善惡)과 같은 뜻 

9) 옥과(玉果) : 전라도의 옛고을. 현재 전남 곡성군(谷城郡)에 속해진 고을. 

10) 누전(漏田) : 토지장부에서 누락된 전토. 

11) 신기전(新起田) : 새로 개간한 전토. 

12) 숙동(熟銅) : 달굼질한 구리쇠. 

13) 전거(田車) : 전간 도로에서 이용되는 달구지의 일종. 

14) 성시(省試) : 향시(鄕試)와 같은 말. 

15) 발해(發解) : 과거 시험 중 향시(鄕試)에 합격하는 것. 서울에서 보이는 회시(會試)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다. 

16) 검시관(檢屍官) : 검시하는 관원. 지방에서 살인 옥사가 발생하면 인근고을의 수령이 검시관으로 차출되었다. 

17) 어영청(御營廳) : 이조시대 삼군문의 하나. 효종 3년에 설치되어 이조말까지 두어졌다. 

      처음에는 북벌(北伐) 계획의 본영이 되었으나 뒤에는 중앙 방비 부대의 하나가 되었다. 

18) 갑과(甲科) : 문과(文科) 시험에서 성적 차례로 나눈 등급의 하나. 1·2·3등인 첫째의 상원(狀元)과, 

      둘째의 방안(榜眼)과, 세째의 탐화(探花)의 3인이 이에 속함. 따로 을과(乙科)와 병과(丙科)가 있었다. 

19) 을과(乙科) : 문과(文科) 급제자의 성적에 따라 나눈 두번째 등급. 법제상 정원이 7명으로 되어 있다. 

20) 고권(考卷) : 과거(科擧)에서 답안지에 채점하는 것. 

      이상(二上) 삼하(三下)는 과거(科擧)에서 글을 평가하는 등급. 전체를 4등(等)에 3급(級)으로 나누어, 

      상지상(上之上)·상지중(上之中) 상지하(上之下), 이상(二上)·이중(二中)·이하(二下),

      삼상(三上)·삼중(三中)·삼하(三下),차상(次上)·차중(次中)·차하(次下)의 12등급이 있었다. 

21) 마주(馬周) : 당나라 사람. 자는 빈왕(賓王). 태종(太宗) 때 중서시낭(中書侍郎)에 이르렀고 학문을 좋아해서 

     『시경(詩經)』과 『춘추(春秋)』에 밝았다. 

22) 삼고수령(三考守令) : 3차에 걸쳐서 고적을 받은 수령. 

23) 자(子)·오(午)·묘(卯)·유(酉) : 12간지 중에서 자(子)·오(午)·묘(卯)·유(酉)에 해당하는 해. 3년 간격이 된다. 

      과거(科擧) 식년시(式年試)의 해인 동시에 호적을 작성하는 해이기도 하다. 

24) 거복(車服) : 수레와 의복. 천자가 공 있는 신하에게 은전을 베푸는 것으로 이것을 신하에게 하사했다. 

25)『상서(尙書)』에(車服以庸)이란 말이 있다. 

26) 유방(流放) : 멀리 추방하는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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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資 料   編 輯 者       德 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