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疆域史 1. 중국 영토의 현황 중국강역사(中国疆域史)는 중국 영토의 변화과정에 관한 역사이다. 중국의 강역은 예로부터 부단한 확장과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상서·우공(尚书·禹贡)의 구주(九州)를 시작으로 중화민국(中华民国) 시기에는 ‘베고니아 잎-秋海棠’과 같은 모양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또한 변모를 거듭하여 지금 소위 말하는 ‘수탉 -雄鸡’의 형상이 이루어졌다. 미얀마(缅甸, myanmar)와 접하고 서남쪽은 인도(印度), 부탄(不丹, Bhutan), 네팔(尼泊尔, Nepal)과 경계하며 서쪽으로는 파키스탄(巴基斯坦, Pakistan), 아프가니스탄(阿富汗, Afghanistan), 타지키스탄(塔吉克斯坦, Tadzhikistan), 키르키스스탄(吉尔吉斯斯坦, Kyrgyzstan), 카자흐스탄(哈萨克斯坦, Kazakhstan), 북쪽으로는 몽고(蒙古)와 접하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러시아(俄罗斯, Russia) 및 북한과 접하고 있으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일본, 한국, 필리핀(菲律宾, Philippines), 말레이시아(马来西亚, malaysia), 부르나이(文莱, Brunei) 등과 마주하고 있다. 중국과 인접국간의 국경선
2. 중국 영토의 변천과정1) 하상서주(夏商西周) 3대의 강역(疆域)전국(战国) 시기의 서적인 우공(禹贡)에 기재된 9주(九州)는 중국의 강역에 관한 최초의 문헌상 기록으로 비록 우(禹) 시대의 기록은 아니라 할지라도 전국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지리관을 나타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중국을 기주(冀州), 윤주(兖州), 서주(徐州), 청주(青州), 예주(豫州), 옹주(雍州), 양주(梁州), 형주(荆州), 양주(扬州)의 9개 주(州)로 구분하였다. 기주(冀州)는 현재의 산시(山西)와 허베이(河北), 허난성(河南省)의 일부 지역이며 윤주(兖州)는 지금의 허베이(河北)와 산둥(山东)의 일부, 청주(青州)는 지금의 산둥반도, 서주(徐州)는 지금의 산둥(山东) 남부와 장쑤(江苏) 북부, 양주(扬州)는 화이하(淮河, 회하) 이남의 장쑤(江苏) 및 안후이(安徽) 지역, 형주(荆州)는 후난(湖南)과 후베이(湖北) 지역, 예주(豫州)는 허난성(河南省), 양주(梁州)는 쓰촨(四川)과 산시(陕西, 섬서)의 한중지구(汉中地区)를 가리키며, 옹주(雍州)는 지금의 관중(关中)과 간쑤(甘肃) 동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록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이견이 분분하고 전설(传说)의 성격이 농후하지만 그 범위가 당시 중국의 영토관을 반영하고 있고 고대인의 세계관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완전하게 성숙되기 전의 상태로 강역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대체적으로 이들 3대(三代) 모두 황하(黄河) 중하류 지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하(夏)는 중간, 상(商)은 동쪽, 서주(西周)는 서쪽 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대(夏代)의 강역에 대해서는 고증이 불가하나 구제강(顾颉刚, 고힐강, 1893 ~1980)은 중기 하(夏)의 이전 정치중심지는 산둥성(山东省) 인근으로 세력이 허베이(河北)와 허난성(河南省)에 미쳤고 말기에는 이(伊), 락(洛) 유역으로 이동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세력이 동쪽으로는 산둥반도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간쑤 동부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남부 화이하(淮河, 회하) 유역까지로 여겨지며 하대(夏代)와 비교해 볼 때 많은 확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주(周)는 지금의 산시(陕西) 서부, 간쑤(甘肃) 동부 일대에서 기원하였으며 주(周)가 상(商)을 멸망시킨 이후 영토는 외부로 대폭 확장되어 북쪽으로 지금의 랴오닝성(辽宁省) 자오양(朝阳县, 조양현) 일대의 숙신(肃慎)을 정복하였고 남으로 한수(汉水) 중류, 동쪽으로 대해(大海), 서쪽으로 웨이하(渭河, 위하) 상류에 이르며 널리 제후(诸侯)를 봉하여 이후 및 분열시기와 진(秦) 영토의 기초를 다졌다. 국토가 비교적 큰 나라로 초(楚), 진(晋), 제(齐), 진(秦), 오(吴), 월(越), 연(燕), 정(郑), 송(宋), 위(卫), 노(鲁), 거(莒), 중산(中山) 등의 나라와 더불어 이미 소국(小国)이 되어 버린 주(周)가 있었다. 춘추 말기에는 진(秦)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위수(渭水) 상류에까지 이르렀으며 진(晋)은 북쪽으로 영토가 산시(山西) 펀하(汾河, 분하) 중류에 이르렀다. 연(燕)은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차지하였고 초국(楚)은 운몽택평원(云梦泽平原)을 보유하였으며 월(越)은 저장 북부를 점유하여 당시 중국영토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각국은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조(赵)는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군사와 복식의 개혁을 통해 북쪽의 경계를 쌍간하(桑干河, 상간하)로부터 하투(河套)까지 이동시켰다. 국경을 현재의 랴오둥(辽东) 지구로 이동시켰다. 진(秦)의 영토 확장에 대한 노력은 매우 두드러져 서쪽으로 지금의 간쑤 동부 타오하(洮河, 조하) 유역에 이르렀으며 또한 파(巴), 촉(蜀) 양국을 멸망시켜 그 세력이 쓰촨 지구에 이르렀다. 초(楚)도 남쪽으로 상(湘), 자(资), 원(沅), 풍(澧)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상서(湘西), 악서(鄂西) 지구를 점령하였다. 2) 진(秦)의 강역(疆域)진시황이 처음으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루면서 그 영토는 대폭 확대되었다. 원래의 6국시기(六国时期) 영토에다가 남월(南越) 및 민월(闽越) 지구까지 확대되어 북쪽으로 허난 지역을 점령하였고 흉노(匈奴) 세력을 인산(阴山, 음산) 이북으로 쫓아냈다. 진(秦)은 전국시기의 조(赵), 연(燕), 진(秦) 3국이 수축하였던 장성의 연결에 착수하여 임조(临洮, 린타오)에서 랴오둥에 이르는 일만여 리의 진장성(秦长城)을 수축하였다. 3) 한(汉)의 강역(疆域)한(汉)은 건국 초기에 공을 세웠던 제후들을 제거하였으며 이후 한고조 유방의 사후에 황후인 여후(吕后, B.C. 241~180)의 전횡과 B.C. 154년의 칠국지란(七国之乱) 등으로 정치상황이 매우 어지러웠기 때문에 변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로 인해 허난 지역은 흉노(匈奴)의 손에 다시 들어갔으며 남월(南越), 민월(闽越), 첸중(黔中, 검중) 지구 역시 차례로 방치하면서 영토가 대폭 감축되게 되었다. B.C. 127년 위청(卫青)이 북쪽으로 진출하여 흉노(匈奴)를 격퇴하고 허난(河南, 하남) 지역, 룽시(陇西, 롱서), 북지(北地), 상군(上郡)의 북부를 복속시켜 삭방군(朔方郡), 오원(五原)의 2개 군(郡)을 설치하였고 운중군(云中郡), 안문군(雁门郡) 2개 군(郡)의 북쪽 경계를 확장하였다. 이로 인해 서한(西汉)의 북부 영토는 허타오(河套, 하투), 인산(阴山, 음산) 이북에 이르게 되었다. B.C. 121년 한(汉)의 장수 곽거병(霍去病)이 룽시(陇西, 롱서)로 출병하여 허시주랑(河西走廊)의 흉노(匈奴)를 격퇴하고 이 지역에 주천군(酒泉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이를 장액군(张掖郡), 돈황군(敦煌郡), 무위군(武威郡)의 3개 군(郡)으로 분할하였으며 이어 황수(湟水) 유역에 금성군(金城郡)을 설치하여 모두 허시(河西, 하서) 5군(五郡)이 되었다. 또한 하이난(海南島, 해남도)를 점령하였으며 지역에 10 군(郡)을 설치하였다. 가오리궁산(高黎贡山, 고려공산)에 이르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위씨조선(卫氏朝鲜)을 정복하여 랴오둥 북사군(北四郡)을 두며 국가 영토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또한 동부도위(僮仆都尉)를 두어 서역제국(西域諸国)을 관장하게 하였다. 서남지구에서는 7군(七郡)이 5군(五郡)으로 바뀌었으며 하이난(海南島, 해남도)와 상군(象郡)은 방치되었다. 동한(东汉) 말기에는 중원(中原)에서 전란이 끊이지 않아 정양군(定襄郡), 운중군(云中郡), 오원군(五原郡), 삭방군(朔方郡), 상군(上郡)의 북쪽 6군(六郡)을 방치하였다. 이어 허타오(河套, 하투), 산북(陕北, 섬북), 진시베이(晋西北, 진서북), 화베이의 북부지구도 포기하게 되었으며 고구려와 임읍(林邑) 양국이 동북과 남방의 영토를 잠식해왔고 단지 서남지구 다잉강(大盈江, 대영강) 일대에서만 확대되었다. 4)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의 강역(疆域)동한(东汉) 중기 이후 동북지구에서는 각 민족의 세력이 대두되었으며 그 중 가장 강성하였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서기 313년 고구려가 낙랑(乐浪)을 점령하면서 중원왕조는 한반도에서 퇴출되었고 404년 고구려는 더 나아가 요동 지구의 2개 군을 점령하며 랴오하(辽河, 요하) 동쪽지구를 전부 고구려의 영토로 소유하게 되었다. 변화가 거의 없이 안정된 상태였다. 555년 돌궐(突厥)은 북제(北齐)와 연합하여 유연(柔然)을 멸망시켰으며 돌궐(突厥)은 사막지역의 새로운 맹주가 되었다. 이외에 중원왕조도 서역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였으며 토욕혼(吐谷浑)이 서부지구에서 당시 북방 각 지역 정권의 변경을 장기간 위협하였다. 통제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였다. 후경의 난(侯景之乱) 이후 서남지구의 각 민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며 독립국을 수립하였고 이에 한족 세력은 닝저우(宁州, 영주)에서 물러났으며 임읍국(林邑国)이 계속하여 북쪽으로 확장을 계속하여 남군(南郡)을 차지하였고 진조(陈朝)의 남쪽 경계는 북위 18도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5) 수(隋)의 강역(疆域)수(隋)는 전국을 통일한 연후 변경에 대한 확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584년 쇠락한 동돌궐(东突厥)이 막남(漠南)에 안주한 틈을 이용하여 허타오(河套, 하투) 지역을 회복하고 우위안(五原, 오원), 위린(榆林, 유림) 등의 2군을 설치하였다. 609년 수(隋)는 토욕혼(吐谷浑)을 멸망시켰으며 또한 이오(伊吾)를 점령하고 서북5군(西北五郡)에 합병시켰다. 현지인의 격렬한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최종적으로 현재의 구이저우 서부 일대로 영토가 정해지게 되었다. 대업원년(大业元年) 수(隋)는 임읍(林邑)을 평정하였으나 수개월 후 철군하여야만 했고 임읍(林邑)은 재건되었다. 수(隋) 초기에 하이난두(海南岛)는 지금의 광둥성(广东省) 양강(陽江, 양강) 지역인 고량(高凉)의 남월 여걸이며 군사가인 세부인(冼夫人, 512~ 602)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인수(仁寿) 초기에 하이난도도(海南岛)를 영토에 편입시켰다. 수말(隋末)에는 동탕(动荡), 해남(海南), 토욕혼(吐谷浑) 등이 차례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6) 당(唐)의 강역(疆域)당(唐)의 초기에는 영토가 많이 확장되었다. 630년 당(唐)은 동돌궐(东突厥)을 멸망시켰으며 막북지구(漠南地区)를 소유하게 되었다. 646년에는 설연타(薛延陀)를 멸망시켰고 대막(大漠) 남북 모두 당(唐)의 소유가 되었다. 이에 당은 안서도호부(安西都护府), 안북도호부(安北都护府) 등 단위 행정기구를 두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682년 돌궐(突厥)이 재기하였고 당(唐)의 세력이 막북(漠北)에서 퇴출되었으며 이후 회흘(回纥)이 흥기하며 돌궐(突厥)의 영토를 차지하여 막북(漠北)의 강국이 되었다. 서쪽 변경에서 당(唐)은 659년 서돌궐(西突厥)을 멸망시켰으며 세력이 날로 커져서 파사(波斯)에 이르렀다. 당(唐)은 이들 지역에 도독부주(都督府州)를 설치하였으나 이후 대식(大食) 세력의 확대로 인해 당(唐)은 총령(葱岭) 동쪽으로 물러났다. 이 지역에서의 거센 반발과 신라의 저항으로 당은 랴오둥(辽东)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개원(开元) 이후 당은 랴오둥(辽东)을 포기하였으며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가 이후 발해가 건국되었다. 635년 당(唐)은 토욕혼(吐谷浑)을 공격하여 당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663년 토번(吐蕃)에 의해 멸망하였다. 토번은 6세기 중엽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송찬간포(松赞干布) 재위 시 라싸(逻些)로 천도하였으며 시짱(西藏) 지역을 통일하였다. 이후 차례로 소비(苏毗), 양동(羊同), 니파라(尼婆罗)를 정복하며 당의 강력한 적수로 등장하였다. 점점 영토가 축소되었다. 회골(回鹘)은 막북지구(漠北地区)를 차지하였으나 이후 840년 내란으로 망하였으며 거란이 북부지구에서 나날이 강성해졌고 916년에 건국하기에 이르렀으며 발해국을 멸망시키고 연운16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8세기 하반기에는 토번(吐蕃)은 매우 강성하여서 칭장고원(青藏高原)을 제외하고도 북쪽으로 신장, 황수(湟水, 황수), 동쪽으로 룽산(陇山, 롱산), 동남쪽으로 윈난 서북과 쓰촨 서부 산지, 남쪽으로 네팔,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에 이르렀다. 763년에는 장안(长安)을 공격하여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당(唐)과 연합하여 회골(回鹘) 및 남조(南诏)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토번(吐蕃)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과 회맹(会盟), 패맹(败盟)을 거듭하였으며 마지막으로 823년 장안회맹(长庆会盟)을 통하여 당과의 경계를 확정하였다. 과·사(瓜·沙) 2개 주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당의 원조 하에 이곳 허시주랑(河西走廊)을 수복하였다. 당시에는 토번에 내란이 발생하였고 이후 차례로 룽유(陇右, 롱우), 허시(河西, 하서)에서 퇴출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와해 분열되었다. 태화성(太和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영토는 윈난의 전 지역과 쓰촨 다두하(大渡河, 대도하) 이남, 구이저우 서부와 미얀마 북부에 까지 달하였다. 그러나 902년 권신(权臣) 정씨(郑氏)에 의해 찬탈 당하고 멸망하였으며 장화국(长和国)이 건국되었다가 이후 937년에는 다리국(大理国)이 건립되었다. 지금의 광둥, 광시(广西) 및 월남 북부를 지배했던 남한(南汉, 917~971)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이때부터 장기간 월남(越南) 북부지역은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7) 송(宋)의 강역(疆域)송조(宋)의 통일은 당 말기 안사지란(安史之乱) 이후의 약 200년간의 분열을 종식시켰으나 영토의 개척은 진전되지 않았으며 주변국가인 요(辽), 서하(西夏), 다리(大理) 및 이후의 금(金)과 병존하는 상태가 되었다. 수(绥), 희(熙), 하(河), 조(洮), 민(岷), 란(兰) 등의 주(州)를 확보하였고, 철종(哲宗) 때에는 더 나아가 황수(湟水) 유역, 타오하(洮河, 조하) 상류와 귀덕(贵德) 일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1121년 시안주(西安州), 회덕군(怀德军)을 서하(西夏)에 빼앗겨 전체적으로 볼 때 북송(北宋)의 서하에 대한 전과는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 몇 몇 주(州)를 설치하였는데 송(宋) 말기까지 큰 변동은 없었다. 북송(北宋)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요(辽)와 전쟁을 하였으나 크게 획득하거나 상실한 것은 없었고 국경은 옌먼산(雁门山, 안문산), 다마오산(大茂山, 대무산), 바이거우(白沟, 백구)로 이어지는 선에서 장기간 안정되었다. 남송(南宋)을 세웠으며 1129년 조구(趙構)는 건강부(建康府)에서 임안부(臨安府)로 피하였다가 1138년부터 임안부(临安府)에 상주하여 당시 남송(南宋)의 영토는 단지 친령(秦岭, 진령), 화이하(淮河, 회하) 이남, 민산(岷山) 동쪽지역에 국한되었다 남쪽으로 샤오관(萧关, 소관), 북쪽으로 대막(大漠)에 달하였다. 1114년 금(金)이 건립되었고 이어 요(辽)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또한 북송(北宋)의 수도인 카이펑(开封)을 점령하였다. 송(宋) 황실은 남쪽으로 항저우(杭州)까지 도주하였고 영토는 단지 화이하~친령(淮河~秦岭) 이남, 민산(岷山) 동쪽지역에 한정되었다. 금(金)의 영토는 광활하여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서하(西夏)와 토번(吐蕃), 압록강(鸭绿江)을 사이에 두고 고려(高丽)와 접하였으며 북으로 헤이룽장 유역에 달하였다. 8) 원(元)의 강역(疆域)1206년 칭기즈칸(成吉思汗, Genghis Khan)이 몽고(蒙古)를 통일하고 대몽고국(大蒙古国)을 건립하였으며 이후 몽고(蒙古)는 여섯 차례에 걸쳐 서하(西夏)를 공격하여 1227년에 서하를 멸망시켰다. 1211년에 몽고는 금(金)을 공격하였으며 1215년 중도(中都)를 함락시켰다. 또한 1234년 송(宋)과 연합하여 금(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1218년 서요(西辽)도 몽고에 의해 멸망되었다. 1235년 몽고는 남하하여 송(宋)을 공격하였으나 1259년에 몽가(蒙哥, möngke) 대한(大汗)의 사망에 따라 잠시 중단되었다. 이 기간에 몽고는 계속하여 중앙아시아, 고려, 아랍지역 및 동구(东欧) 등지를 공격하였다. 1244년 시짱(西藏)을 빼앗고 1256년 대리(大理)를 멸망시켰다. 몽고제국(蒙古帝国)을 건설하였으며 면적은 3,300만 ㎢에 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몽고제국은 1259년 몽가대한(蒙哥大汗, möngke Khan)의 사망에 따라 쿠빌라이(忽必烈, Kublai)와 아리부가(阿里不哥, Ariq Böke)의 황위 쟁탈로 이후 제국의 영토는 원(元)과 4대 한국(四大汗国)으로 분리되었다. 1279년의 야산해전(崖山海战, 애산해전) 후 괴멸되었다.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에는 원(元)의 강역은 북으로는 인산(阴山, 음산), 서쪽으로 류사(流沙, 유사), 동쪽으로 랴오둥 왼편, 남쪽으로 해표(海表)에 이르러 랴오양(辽阳, 요양)과 간쑤(甘肃), 쓰촨(四川), 윈난(云南), 후광(湖广, 호광)의 변경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라 남송(南宋), 금(金), 서하(西夏), 대리(大理) 등 이전 국가의 영토를 모두 합한 것보다 넓었다. 9) 명(明)의 강역(疆域)원말(元末) 홍건군(紅巾軍)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주원장(朱元璋)이 1352년 군사를 일으켜 1356년 난징(南京, 남경)을 취하고 이어서 대한정권(大汉政权)을 건립한 진우량(陈友谅, 1320~1363), 장사성(张士诚, 1321~1367) 등의 할거세력을 격퇴하며 1368년 제위에 올라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하고 중원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원순제(元顺帝)는 상도(上都), 응창(应昌)으로 도주하였고 이후 막북(漠北, Gobi Desert)까지 도주하였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북원(北元)이라고 칭하고 있다. 명군(明军)은 계속 동쪽과 서쪽으로의 정벌을 단행하여 홍무(洪武) 15년인 1381년 원(元) 양왕(梁王)의 지배하에 있던 윈난(云南)을 평정했으며 1387년 랴오둥(辽东)의 수장(守将) 납합출(纳哈出)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며 통일을 이루었다. 원(元)을 계승하였고 동북(东北), 하밀(哈密, 합밀), 시짱(西藏)과는 속국관계를 유지시켰으며 신장 대부분의 지역에는 차카타이한국(察合台汗国, Chagatai Khanate)으로 하여금 지배하도록 하였으며 북 원(北元)의 잔여세력은 막북(漠北, Gobi Desert)지구까지 물러났다. 몽고세력이 북으로 물러난 이후 명(明)은 몽고고원(蒙古高原)에 40여 개의 위소(卫所)를 설치하였다. 명(明)은 몽고(蒙古)와의 경계는 대체적으로 인산(阴山, 음산), 다칭산(大青山, 대청산)을 따라서 동북쪽으로 서랍목륜하(西拉木伦河)에 이르는 선이었다. 15세기 후 날씨가 한랭하고 사막이 확대되며 환경이 악화되자 명(明)은 북쪽의 경계선을 지금의 장성(长城)으로 한정하여 남쪽으로 물러났다. 영락(永乐) 이후부터 명(明)은 몽고(蒙古)와의 경계 지역에 장성(长城)을 수축하고, 9변(九边)을 설치하였으며 몽고(蒙古)에 대한 방위를 강화하였다. 우수리강(乌苏里江) 양안에 기미위(羁縻卫)를 두었고 또한 노이간도사(奴尔干都司)를 설치하여 동북지구를 지배하며 그 세력은 사할린(库页岛)에 이르렀으나 이후 폐지하였다. 동북지구는 점차 몽고(蒙古) 울량합(兀良哈)과 여진(女真)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16년 누르하치(努尔哈赤, Nurhaci)가 한(汗)을 칭하며 후금(后金)을 건국하였고 강성해졌을 뿐만 아니라 1619년 살이호지전(萨尔浒之战, Battle of Sarhu)후에 랴오둥(辽东)의 도사(都司) 대부분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가정(嘉靖) 시기에는 투루판(吐鲁番, Turfan), 와랄(瓦剌, Oirats), 토번(吐蕃) 등의 수차에 걸친 공격을 받자 이 지역을 포기하고 자위관(嘉峪关, 가욕관)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명(明)은 1381년에야 서남 전 지역을 그들의 지배하에 두며 변경에 차리(车里), 로과(老挝), 팔백대전(八百大甸), 목방(木邦), 맹양(孟养), 면전(缅甸, 미얀마)의 6개 선위사(宣尉司)를 두었다. 동부지역의 토사(土司)를 제외하고는 모든 토사(土司)가 차례로 미얀마 동오왕조(洞吾王朝)의 소유가 되었다. 저항이 격렬하여 1427년 포기하였으며 1624년과 1626년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차례로 타이완에 침입하였고 1642년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축출하였다. 이후 1661년 정성공(郑成功)이 타이완으로 진격하여 네덜란드의 타이완 통치를 종식시켰다. 1553년 포르투갈은 마카오(澳门, macau)에서의 선박 정박권을 확보하였으며 4년 후 정식 거류권(居留权)을 취득하였고 청대 전기까지 포르투갈이 관리하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10) 청(清)의 강역(疆域)1583년 건주여진(建州女真)의 수령인 누르하치(爱新觉罗·努尔哈赤, Nurhaci)가 기병하여 건주여진(建州女真)을 통일하고 해서여진(海西女真)을 멸망시켰으며 동부의 몽고(蒙古)를 수복하고 1616년 한위(汗位)에 오르며 후금을 건국하였다. 1618년 명의 요동지구로 침입하였고 1626년 황다이지(皇太极)가 등극하며 1635년에는 여진족(女真族)의 명칭을 만주족(满洲族)로 바꾸었고 1636년 황제위(皇帝位)에 오르며 청(清)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산하이관(山海关)에 입성하였고 이자성(李自成)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베이징(北京)을 장악하였다. 1645년 청군(清军)은 강남(江南) 지역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남명(南明) 홍광제(弘光帝) 정권을 멸망시켰다. 1659년 청군이 윈난성(云南省)으로 진격하자 남명의 영력제(永历帝)는 미얀마(缅甸, myanmar)로 도망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며, 쿤밍(昆明, 곤명)에서 살해당했다. 1664년 대륙의 남명(南明) 잔여세력은 모두 제거되었고 1683년 청군(清军)은 타이완으로 들어가 정성공의 동녕왕국(東寧王国)을 멸망시킴으로써 명은 마지막을 고했다. 몽고(蒙古)의 커얼진(科尔沁, 과이심), 객이객(喀尔喀, Khalkha) 등을 복속시켰다. 태종(太宗) 때에는 우수리강(乌苏里江), 헤이룽강(黑龙江) 유역 및 해상의 사할린(库页岛, Sakhalin)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몽고(蒙古) 차하얼부(察哈尔, 찰합이부), 토묵특(土默特), 어얼둬쓰부(鄂尔多斯部, Ordos) 등도 항복을 받아냈으며 막남(漠南) 몽고 16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청(清)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강대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 1688년 준가얼(准噶尔)이 청을 공격하였으나 오란포통(乌兰布通)에서 대패하였다.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친 전쟁이 지속되었고 이후에 카자흐(哈萨克), 시짱(西藏) 등을 탈취하였다. 1745년 갈이단책령(噶尔丹策零)의 사망이후 준가얼(准噶尔)은 내란에 휩싸여 청군(清军)에게 격퇴되었다. 청(清)은 준가얼부(准噶尔部)와의 전쟁 중에 계속하여 액로특몽고(厄鲁特蒙古, Oirats), 객이객몽고(喀尔喀蒙古, Khalkha), 투서(套西), 청하이몽고(青海蒙古), 시짱(西藏), 회부(回部) 등을 영토에 편입시켰고 영토 확장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계속 아극살(雅克萨), 네르친스크(尼布楚, Nerchinsk) 등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강희제는 삼번(三藩)을 평정한 후 1684년 러시아와 전쟁을 통하여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尼布楚条约, Treaty of Nerchinsk)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외흥안령(外兴安岭) 이남, 고혈도(库页岛, Sakhalin) 및 헤이룽강(黑龙江) 유역을 청의 영토로 확정하였으며 러시아는 바이칼호(贝加尔湖, Lake Baikal) 동쪽에서 어얼구나하(额尔古纳河, Argun River) 일대의 지역을 획득하였다. 1727년에 다시 한번 러시아와 포련사기조약(布连斯奇条约, Treaty of Kyakhta) 및 흡극도조약(恰克图条约)을 체결하여 청·러간 북부 변경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약 353만 ㎢ 이었으나 청대에는 1,300만 ㎢ 달하여 장기간 중국영토에 속하지 않았던 시짱(西藏), 신장(新疆), 몽고(蒙古), 칭하이(青海) 등 지역이 다시 중국영토에 편입되게 되었고 청대(清代)에서 확장된 영토가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기초가 되었다. 11) 근대(近代)의 영토상실19세기 중엽 후반 청의 국력은 점점 쇠약해졌으며 서방국가는 이때 해외에서의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1858년 청 정부는 헤이룽장 이북, 외흥안령(外興安嶺) 이남의 약 60만 ㎢에 달하는 영토 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중국근대사상 최초로 영토를 할양하게 되는 불평등조약인 아이훈조약(璦琿条约, 애혼조약, Treaty of Aigun)을 러시아와 체결하였다. 이후 베이징조약(北京條約, Convention of Peking)을 체결하여 아이훈조약(璦琿条约)의 합법성을 인정하였고 또한 아이훈조약(璦琿条约)에서 공동관리키로 한 우수리강(烏蘇里江) 동쪽과 싱카이호(兴凯湖, 흥개호, Khanka Lake)지구의 약 40만 ㎢의 영토도 탈취되었다. 사할린(库页岛, Sakhalin) 또한 러·일 양국이 각각 남과 북을 나누어 점령하였다가 이후 러시아로 귀속되었다. 서북방 지역에서는 러시아가 1864년 청 정부와 중아감분서북계약기(中俄勘分西北界约记)에 의해 파이카스호(巴尔喀什湖, Lake Balqash) 동쪽과 남쪽의 44만 ㎢의 토지를 차지하였다. 1871년 아고백(阿古柏, Yaqub Beg)이 점령한 기회를 이용하여 이리(伊犁)에 출병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881년 청 정부를 압박하여 이리화약(伊犁和約)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이후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여 7만 ㎢의 영토를 빼앗아감으로써 러시아가 이리(伊犁)에서의 철군에 대신하였고 카스(喀什, Kashgar) 서부를 분계선으로 하였다. 합병되었으며 카슈미르는 영국에 귀속되었다. 또한 서남의 윈난, 광시 2개 성(省)의 차산(茶山), 철벽(铁壁), 천마(天马), 한룡(汉龙) 등은 영국에 점령되었고 전남오득(滇南烏得), 맹오이토사(孟烏二土司)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원래 월남 소유의 십만대산(十万大山) 이남, 마오령(茅岭, 모령) 동쪽의 영토는 중국 광시의 소유로 되었다. 동남해 일대는 홍콩섬(香港島), 주룽(九龍, 구룡)이 영국에 할양되었으며 1895년 갑오전쟁(甲午战争, 청일전쟁)의 패전 후 마관조약(马关条约, 下関条約, Treaty of Shimonoseki)에 의거 타이완(台湾), 팽호(澎湖)를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여대(旅大)는 러시아, 위해위(威海衛)는 영국, 광저우만(广州灣)은 프랑스에게 차례로 조차(租借) 되었다. 또한 내륙의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한커우(汉口, 한구), 샤먼(厦门, 하문), 광저우, 충칭, 선양(沈阳, 심양), 난징(南京, 남경), 주강(九江, 구강), 전강(镇江, 진강), 사시(沙市), 푸저우(福州, 복주), 쑤저우(苏州, 소주), 및 베이핑(北平, 북평)의 동교민항(东交民巷) 등 조계(租界)가 계속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12)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의 영토신해혁명으로 청의 전제정부가 전복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민국(民国)의 건립 이후 나라는 어지러웠으며 영토에 대한 지배력도 매우 미약하였다. 이로 인해 민국시기 변경의 영토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국토에 대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러시아와의 영토분규는 1945년 동북의 흑할자도(黑瞎子島, Heixiazi Island), 1900년 강동64둔(江东六十四屯), 1944년 탕노오량해(烏梁海, Tannu Uriankhai) 등이 있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후 모두를 상실하였다. 또한 청대에 상실했던 영토의 회복에 대한 권리를 상실하였다. 2004년 체결된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과의 동쪽국경에 대한 보충협정(中华人民共和国和俄羅斯聯邦關於中俄国界東段的補充協定)에 의거 중국은 흑할자도(黑瞎子島, Heixiazi Island)의 절반에 대한 주권을 되찾아 174㎢의 영토를 취득하였으며 이 중에는 두 번째로 큰 도서(島嶼)인 은룡도(银龙岛)가 흑할도(黑瞎島)의 서북에 위치하고 있어 전부 중국에 귀속되었으며 러시아는 대오소리도(大烏蘇裏島) 즉 흑할자도(黑瞎子島)의 동쪽 부분을 차지하였다. 탕노 오량해(烏梁海, Tannu Uriankhai) 지역에서는 1924년 오량해공화국(乌梁海共和国)이 성립되었었고 1926년 도와인민공화국(图瓦人民共和国)으로 변경하였으며 1944년 정식 소련에 편입되었다. 1945년 얄타협정(雅尔塔协定, Yalta Conference)에 의거 당시 중화민국 정부가 외몽고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1949년 중화민국 정부의 타이완 이전 후에 중화민국 정부가 중소우호동맹조약 (中蘇友好同盟條約, China, Soviet Union: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의 실효(失效)를 선포하며 외몽고의 독립을 철회하였고 연합국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독립을 승인하였고 1962년 국경조약이 체결되어 낙문한(諾門罕, Nomonhan) 계곡, 차하얼(察哈尔, 찰합이) 북쪽 경계, 신장 베이타산(北塔山, 북탑산)이 몽고에 귀속되었다. 소련의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과 조약을 체결하고 분적하(噴赤河, Panj River) 동쪽의 파미르(帕米尔)를 포기하였으며 또한 1965년 조약을 체결하여 아프가니스탄(阿富汗)의 와한(瓦罕, Wakhan) 파미르 주권을 인정하였다. 1963년 파키스탄(巴基斯坦)과 두 지역을 할양하고 하나의 지역을 취하는 방식으로 변경문제를 해결하였으며 1961년 네팔(尼泊爾)과 국경조약을 체결하여 주무랑마봉(珠穆朗瑪峰, mount Everest)을 공용으로 하고 지금의 부탄 동남지역을 부탄(不丹)에게 할양하였다. 승인한 서북의 아극새흠(阿克塞欽, Aksai Chin)이 영국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인도는 이 두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이로 인해 중인변경전쟁(中印邊境戰爭)이 발생했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진 철수를 하였다. 현재 중국과 인도 간에는 국경문제를 협의 중이나 아직 조약에 체결되어 있지 않았다. 7만 ㎢의 영토를 포기하였으며 1945년 항전승리 후 카이로선언에 의거 타이완, 팽호(澎湖), 만주를 광복시켰다. 또한 다롄, 여순, 위해위(威海卫), 광저우만(广州湾) 등의 조계(租界)도 차례로 회수되었다. 1947년 중화민국은 군함을 보내어 남해제도를 접수하였으나 현재 남해제도는 여러 국가들의 소유로 되어 있다. 현재 양안정부는 모두 남해제도 전부와 조어대열서(釣魚台列嶼, Diaoyutai Islands 또는 Senkaku Islands)의 주권을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유구군도(琉球群島)의 회수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946년의 외몽고 독립과 1945년의 타이완 광복이다. 또한 장남(藏南), 강심파(江心坡), 파미르 등지는 청말 민국 초 시기에는 중국정부의 실제 지배권에 속하지 않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제 지배 영토 범위
資料 編輯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