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疆域史
1. 중국 영토의 현황중국강역사(中国疆域史)는 중국 영토의 변화과정에 관한 역사이다. 중국의 강역은 예로부터 부단한 확장과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상서·우공(尚书·禹贡)의 구주(九州)를 시작으로 중화민국(中华民国) 시기에는 ‘베고니아 잎-秋海棠’과 같은 모양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또한 변모를 거듭하여 지금 소위 말하는 ‘수탉 -雄鸡’의 형상이 이루어졌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은 남으로는 베트남(越南, Vietnam), 라오스(老挝, Laos), 미얀마(缅甸, myanmar)와 접하고 서남쪽은 인도(印度), 부탄(不丹, Bhutan), 네팔(尼泊尔, Nepal)과 경계하며 서쪽으로는 파키스탄(巴基斯坦, Pakistan), 아프가니스탄(阿富汗, Afghanistan), 타지키스탄(塔吉克斯坦, Tadzhikistan), 키르키스스탄(吉尔吉斯斯坦, Kyrgyzstan), 카자흐스탄(哈萨克斯坦, Kazakhstan), 북쪽으로는 몽고(蒙古)와 접하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러시아(俄罗斯, Russia) 및 북한과 접하고 있으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일본, 한국, 필리핀(菲律宾, Philippines), 말레이시아(马来西亚, malaysia), 부르나이(文莱, Brunei) 등과 마주하고 있다. 중국과 인접국간의 국경선
2. 중국 영토의 변천과정1) 하상서주(夏商西周) 3대의 강역(疆域)전국(战国) 시기의 서적인 우공(禹贡)에 기재된 9주(九州)는 중국의 강역에 관한최초의 문헌상 기록으로 비록 우(禹) 시대의 기록은 아니라 할지라도 전국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지리관을 나타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중국을 기주(冀州), 윤주(兖州), 서주(徐州), 청주(青州), 예주(豫州), 옹주(雍州), 양주(梁州), 형주(荆州), 양주(扬州)의 9개 주(州)로 구분하였다. 9주(九州)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기주(冀州)는 현재의 산시(山西)와 허베이(河北), 허난성(河南省)의 일부 지역이며 윤주(兖州)는 지금의 허베이(河北)와 산둥(山东)의 일부, 청주(青州)는 지금의 산둥반도, 서주(徐州)는 지금의 산둥(山东) 남부와 장쑤(江苏) 북부, 양주(扬州)는 화이하(淮河, 회하) 이남의 장쑤(江苏) 및 안후이(安徽) 지역, 형주(荆州)는 후난(湖南)과 후베이(湖北) 지역, 예주(豫州)는 허난성(河南省), 양주(梁州)는 쓰촨(四川)과 산시(陕西, 섬서)의 한중지구(汉中地区)를 가리키며, 옹주(雍州)는 지금의 관중(关中)과 간쑤(甘肃) 동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록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이견이 분분하고 전설(传说)의 성격이 농후하지만 그 범위가 당시 중국의 영토관을 반영하고 있고 고대인의 세계관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상주(夏商周) 3대의 중국 강역은 혼돈상태로 당시에는 부락(部落)의 개념이 앞서고 국가 및 영토의 개념이 완전하게 성숙되기 전의 상태로 강역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대체적으로 이들 3대(三代) 모두황하 중하류 지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하(夏)는 중간, 상(商)은 동쪽, 서주는 서쪽 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까지 전설상의 국가로 여겨지는 하(夏)에 관해서는 역사적 문헌과 유적이 극히 희박하여 하대(夏代)의 강역에 대해서는 고증이 불가하나 구제강(顾颉刚, 고힐강, 1893 ~1980)은 중기 하(夏)의 이전 정치 중심지는 산둥성(山东省) 인근으로 세력이 허베이(河北)와 허난성(河南省)에 미쳤고 말기에는 이(伊), 락(洛) 유역으로 이동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상(商)의 활동무대 중심은 처음에는 허베이성(河北省) 중부와 남부였으며 상(商)이 번영하던 시기에는 그 세력이 동쪽으로는 산둥반도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간쑤 동부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남부 화이하(淮河, 회하) 유역까지로 여겨지며 하대(夏代)와 비교해 볼 때 많은 확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주(周)는 지금의 산시(陕西) 서부, 간쑤(甘肃) 동부 일대에서 기원하였으며 주(周)가 상(商)을 멸망시킨 이후 영토는 외부로 대폭 확장되어 북쪽으로 지금의 랴오닝성 자오양(朝阳县, 조양현) 일대의 숙신(肃慎)을 정복하였고 남으로 한수 중류, 동쪽으로 대해(大海), 서쪽으로 웨이하(渭河, 위하) 상류에 이르며 널리 제후(诸侯)를 봉하여 이후 및 분열시기와 진(秦) 영토의 기초를 다졌다. 춘추시기에는 기본적으로 주대(周代)에 분봉(分封)한 각 제후국이 모두 영토 확장을 제일의 과업으로 여겼으며 국토가 비교적 큰 나라로 초(楚), 진(晋), 제(齐), 진(秦), 오(吴), 월(越), 연(燕), 정(郑), 송(宋), 위(卫), 노(鲁), 거(莒), 중산(中山) 등의 나라와 더불어 이미 소국(小国)이 되어 버린 주(周)가 있었다. 춘추 말기에는 진(秦)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위수(渭水) 상류에까지 이르렀으며 진(晋)은 북쪽으로 영토가 산시(山西) 펀하(汾河, 분하) 중류에 이르렀다. 연(燕)은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차지하였고 초국(楚)은 운몽택평원(云梦泽平原)을 보유하였으며 월(越)은 저장 북부를 점유하여 당시 중국영토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전국시기 진(晋)이 한(韩), 조(赵), 위(魏)의 3개 국가로 분리된 사건인 삼가분진으로 어지러울 때 각국은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조(赵)는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군사와 복식의 개혁을 통해 북쪽의 경계를 쌍간하(桑干河, 상간하)로부터 하투(河套)까지 이동시켰다. 연(燕)은 북부에 거주하며 여러 차례 남하하여 중원을 침입했던 동호(东胡)를 격퇴하고 장성을 수축하여 국경을 현재의 랴오둥(辽东) 지구로 이동시켰다. 진(秦)의 영토 확장에 대한 노력은 매우 두드러져 서쪽으로 지금의 간쑤 동부 타오하(洮河, 조하) 유역에 이르렀으며 또한 파(巴), 촉(蜀) 양국을 멸망시켜 그 세력이 쓰촨 지구에 이르렀다. 초(楚)도 남쪽으로 상(湘), 자(资), 원(沅), 풍(澧)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상서(湘西), 악서(鄂西) 지구를 점령하였다. 2) 진(秦)의 강역(疆域)진시황이 처음으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루면서 그 영토는 대폭 확대되었다.원래의 6국시기(六国时期) 영토에다가 남월(南越) 및 민월(闽越) 지구까지 확대되어 북쪽으로 허난 지역을 점령하였고 흉노 세력을 인산(阴山, 음산) 이북으로 쫓아냈다. 진(秦)은 전국시기의 조(赵), 연(燕), 진(秦) 3국이 수축하였던 장성의 연결에 착수하여 임조(临洮, 린타오)에서 랴오둥에 이르는 일만여 리의 진장성(秦长城)을 수축하였다. 3) 한(汉)의 강역(疆域)한(汉)은 건국 초기에 공을 세웠던 제후들을 제거하였으며 이후 한고조 유방의 사후에황후인 여후(吕后, B.C. 241~180)의 전횡과 B.C. 154년의 칠국지란(七国之乱) 등으로 정치상황이 매우 어지러웠기 때문에 변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로 인해 허난 지역은 흉노(匈奴)의 손에 다시 들어갔으며 남월(南越), 민월(闽越), 첸중(黔中, 검중) 지구 역시 차례로 방치하면서 영토가 대폭 감축되게 되었다. 그러나 한무제 시기에는 서한의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영토가 대폭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B.C. 127년 위청(卫青)이 북쪽으로 진출하여 흉노를 격퇴하고 허난(河南, 하남) 지역, 룽시(陇西, 롱서), 북지(北地), 상군(上郡)의 북부를 복속시켜 삭방군(朔方郡), 오원(五原)의 2개 군(郡)을 설치하였고 운중군(云中郡), 안문군(雁门郡) 2개 군(郡)의 북쪽 경계를 확장하였다. 이로 인해 서한의 북부 영토는 허타오(河套, 하투), 인산(阴山) 이북에 이르게 되었다. B.C. 121년 한(汉)의 장수 곽거병(霍去病)이 룽시(陇西, 롱서)로 출병하여 허시주랑(河西走廊)의 흉노(匈奴)를 격퇴하고 이 지역에 주천군(酒泉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이를 장액군(张掖郡), 돈황군(敦煌郡), 무위군(武威郡)의 3개 군으로 분할하였으며 이어 황수(湟水) 유역에 금성군(金城郡)을 설치하여 모두 허시(河西, 하서) 5군이 되었다. B.C. 138년 동구(东瓯)의 왕은 민월왕(闽越王)의 위협으로 인하여 지금의 장화이(江淮, 강회) 유역으로 천도하였다. B.C. 110년 한(汉)은 또한 민월(闽越)을 멸망시켰고 B.C. 111년 한조(汉朝)는 남월(南越)을 평정하고 또한 하이난(海南島, 해남도)를 점령하였으며 지역에 10 군(郡)을 설치하였다. 서남지구에서 한(汉)은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변경이 윈난 아이라오산(哀牢山, 애뢰산)과 가오리궁산(高黎贡山, 고려공산)에 이르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위씨조선(卫氏朝鲜)을 정복하여 랴오둥 북사군(北四郡)을 두며 국가 영토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또한 동부도위(僮仆都尉)를 두어 서역제국(西域諸国)을 관장하게 하였다. 서한(西汉) 말기에는 영토가 축소되었는데 동북에서는 진번(真番), 임둔(临屯)의 2군을 폐쇄하였고 서남지구에서는 7군(七郡)이 5군(五郡)으로 바뀌었으며 하이난(海南島, 해남도)와 상군(象郡)은 방치되었다. 동한(东汉) 말기에는 중원(中原)에서 전란이 끊이지 않아 정양군(定襄郡), 운중군(云中郡), 오원군(五原郡), 삭방군(朔方郡), 상군(上郡)의 북쪽 6군을 방치하였다. 이어 허타오(河套, 하투), 산북(陕北, 섬북), 진시베이(晋西北, 진서북), 화베이의 북부지구도 포기하게 되었으며 고구려와 임읍(林邑) 양국이동북과 남방의 영토를 잠식해왔고 단지 서남지구 다잉강(大盈江, 대영강) 일대에서만 확대되었다. 4)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의 강역(疆域)동한(东汉) 중기 이후 동북지구에서는 각 민족의 세력이 대두되었으며 그 중 가장 강성하였던 나라는 고구려였다.서기 313년 고구려가 낙랑(乐浪)을 점령하면서 중원왕조는 한반도에서 퇴출되었고 404년 고구려는 더 나아가요동 지구의 2개 군을 점령하며 랴오하(辽河, 요하) 동쪽지구를 전부 고구려의 영토로 소유하게 되었다. 서부 사막지구에는 몇몇의 유목민족이 흥기하였으며 선비(鲜卑)가 중원에 진출한 이후 가장 세력이 강성했던 나라는 유연(柔然)이었다. 북위(北魏)와 유연(柔然)간의 싸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나 영토의 경계는 대체적으로 변화가 거의 없이 안정된 상태였다. 555년 돌궐(突厥)은 북제(北齐)와 연합하여 유연(柔然)을 멸망시켰으며 돌궐(突厥)은 사막지역의 새로운 맹주가 되었다. 이외에 중원왕조도 서역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였으며 토욕혼(吐谷浑)이 서부지구에서 당시 북방 각 지역 정권의 변경을 장기간 위협하였다. 삼국시기 촉한(蜀汉)은 남중지구(南中地区)에 여러 군현을 설치하였으나 남조는 서남지구에 대해 통제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였다. 후경의 난(侯景之乱) 이후 서남지구의 각 민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며 독립국을 수립하였고 이에 한족 세력은 닝저우(宁州, 영주)에서 물러났으며 임읍국(林邑国)이 계속하여 북쪽으로 확장을 계속하여 남군(南郡)을 차지하였고 진조(陈朝)의 남쪽 경계는 북위 18도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5) 수(隋)의 강역(疆域)수(隋)는 전국을 통일한 연후 변경에 대한 확장 정책을 실시하였다.584년 쇠락한 동돌궐(东突厥)이 막남(漠南)에 안주한 틈을 이용하여허타오(河套, 하투) 지역을 회복하고 우위안(五原, 오원), 위린(榆林, 유림) 등의 2군을 설치하였다. 609년 수(隋)는 토욕혼(吐谷浑)을 멸망시켰으며 또한 이오(伊吾)를 점령하고 서북5군(西北五郡)에 합병시켰다. 서남지구에서는 수(隋)가 닝저우(宁州)의 통치권 회복을 위한 여러 차례 기도를 하였으나 현지인의 격렬한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최종적으로 현재의 구이저우 서부 일대로 영토가 정해지게 되었다. 대업원년(大业元年) 수(隋)는 임읍(林邑)을 평정하였으나 수개월 후 철군하여야만 했고 임읍(林邑)은 재건되었다. 수(隋) 초기에 하이난두(海南岛)는 지금의 광둥성(广东省) 양강(陽江, 양강) 지역인 고량(高凉)의 남월 여걸이며 군사가인 세부인(冼夫人, 512~ 602)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인수(仁寿) 초기에 하이난도도(海南岛)를 영토에 편입시켰다. 수말(隋末)에는 동탕(动荡), 해남(海南), 토욕혼(吐谷浑) 등이 차례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6) 당(唐)의 강역(疆域)당의 초기에는 영토가 많이 확장되었다. 630년 당(唐)은 동돌궐(东突厥)을 멸망시켰으며막북지구(漠南地区)를 소유하게 되었다. 646년에는 설연타(薛延陀)를 멸망시켰고 대막(大漠) 남북 모두 당(唐)의 소유가 되었다. 이에 당은 안서도호부(安西都护府), 안북도호부(安北都护府) 등 단위 행정기구를 두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682년 돌궐(突厥)이 재기하였고 당(唐)의 세력이 막북(漠北)에서 퇴출되었으며 이후 회흘(回纥)이 흥기하며 돌궐(突厥)의 영토를 차지하여 막북(漠北)의 강국이 되었다. 서쪽 변경에서 당(唐)은 659년 서돌궐(西突厥)을 멸망시켰으며 세력이 날로 커져서 파사(波斯)에 이르렀다. 당(唐)은 이들 지역에 도독부주(都督府州)를 설치하였으나 이후 대식(大食) 세력의 확대로 인해 당(唐)은 총령(葱岭) 동쪽으로 물러났다. 수(隋)는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 원정을 실시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645년 당(唐)이 한반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차례로 백제(百济),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에 안동도호부(安东都护府)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이 지역에서의 거센 반발과 신라의 저항으로 당은 랴오둥(辽东)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개원(开元) 이후 당은 랴오둥(辽东)을 포기하였으며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가 이후 발해가 건국되었다. 635년 당(唐)은 토욕혼(吐谷浑)을 공격하여 당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나 663년 토번(吐蕃)에 의해 멸망하였다. 토번은 6세기 중엽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송찬간포(松赞干布) 재위 시 라싸(逻些)로 천도하였으며 시짱(西藏) 지역을 통일하였다. 이후 차례로 소비(苏毗), 양동(羊同), 니파라를 정복하며 당의 강력한 적수로 등장하였다. 안사지란(安史之乱) 이후 당의 국력은 매우 약해져서 주변국가로부터의 영토에 대한 침입이 시작되었고 점점 영토가 축소되었다. 회골(回鹘)은 막북지구(漠北地区)를 차지하였으나 이후 840년 내란으로 망하였으며 거란이 북부지구에서 나날이 강성해졌고 916년에 건국하기에 이르렀으며 발해국을 멸망시키고 연운16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남지역에서는 토번(吐蕃)이 촨(川, 천) 서북(西北), 칭둥(青东, 청동), 간(甘, 감) 동남 등지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차례로 량(凉), 간(甘, 감), 쑤(肃), 과(瓜), 사저우(沙州, 사주)를 점령하여 허시주랑(河西走廊)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8세기 하반기에는 토번(吐蕃)은 매우 강성하여서 칭장고원(青藏高原)을 제외하고도 북쪽으로 신장, 황수(湟水, 황수), 동쪽으로 룽산(陇山, 롱산), 동남쪽으로 윈난 서북과 쓰촨 서부 산지, 남쪽으로 네팔,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에 이르렀다. 763년에는 장안(长安)을 공격하여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당(唐)과 연합하여 회골(回鹘) 및 남조(南诏)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토번(吐蕃)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과 회맹(会盟), 패맹(败盟)을 거듭하였으며 마지막으로 823년 장안회맹(长庆会盟)을 통하여 당과의 경계를 확정하였다. 848년 사저우(沙州)의 토호(土豪) 장의조(张议潮, 799~872)가 토번의 병력을 축출하고 과·사(瓜·沙) 2개 주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당의 원조 하에 이곳 허시주랑을 수복하였다. 당시에는 토번에 내란이 발생하였고 이후 차례로 룽유(陇右, 롱우), 허시(河西, 하서)에서 퇴출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와해 분열되었다. 남조(南诏)는 윈난 지구를 통일하며 나날이 강성해져서 이후 당(唐)과 대립하게 되었고 태화성(太和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영토는 윈난의 전 지역과 쓰촨 다두하(大渡河, 대도하) 이남, 구이저우 서부와 미얀마 북부에 까지 달하였다. 그러나 902년 권신(权臣) 정씨(郑氏)에 의해 찬탈 당하고 멸망하였으며 장화국(长和国)이 건국되었다가 이후 937년에는 다리국(大理国)이 건립되었다. 당말(唐末)에는 자오저우(交州, 교주) 토착세력이 일어나 938년 오권(吳權)이 오조를 건립하며 지금의 광둥, 광시(广西) 및 월남 북부를 지배했던 남한(南汉, 917~971)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이때부터 장기간 월남(越南) 북부지역은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7) 송(宋)의 강역(疆域)송조의 통일은 당 말기 안사지란(安史之乱) 이후의 약 200년간의 분열을 종식시켰으나영토의 개척은 진전되지 않았으며 주변국가인 요(辽), 서하(西夏), 다리(大理) 및 이후의 금(金)과 병존하는 상태가 되었다. 송(宋)의 전기에는 서하(西夏)에 대하여 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송신종(宋神宗)은 영토 확장에 힘써 수(绥), 희(熙), 하(河), 조(洮), 민(岷), 란(兰) 등의 주(州)를 확보하였고, 철종(哲宗) 때에는 더 나아가 황수(湟水) 유역, 타오하(洮河, 조하) 상류와 귀덕(贵德) 일대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1121년 시안주(西安州), 회덕군을 서하(西夏)에 빼앗겨 전체적으로 볼 때 북송(北宋)의 서하에 대한 전과는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 송(宋)은 또한 서남의 대리국(大理国)과의 경계지역 일대에 려(黎), 서(叙), 로(泸), 검(黔), 옹(邕) 등의 몇 몇 주(州)를 설치하였는데 송(宋) 말기까지 큰 변동은 없었다. 북송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요(辽)와 전쟁을 하였으나 크게 획득하거나 상실한 것은 없었고 국경은 옌먼산(雁门山, 안문산), 다마오산(大茂山, 대무산), 바이거우(白沟, 백구)로 이어지는 선에서 장기간 안정되었다. 1127년 강왕(康王) 조구(趙構)가 지금의 허난(河南) 상추(商丘, 상구)인 배도(陪都) 난징응천부(南京應天府)에서 남송(南宋)을 세웠으며 1129년 조구(趙構)는 건강부(建康府)에서 임안부(臨安府)로 피하였다가 1138년부터 임안부(临安府)에 상주하여 당시 남송의 영토는 단지 친령(秦岭, 진령), 화이하(淮河, 회하) 이남, 민산(岷山) 동쪽지역에 국한되었다 서하(西夏)는 1038년 건국되었으며 영토의 범위는 동쪽으로 황하(黃河), 서쪽으로는 위먼관(玉门关, 옥문관), 남쪽으로 샤오관(萧关, 소관), 북쪽으로 대막(大漠)에 달하였다. 1114년 금(金)이 건립되었고 이어 요(辽)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또한 북송(北宋)의 수도인 카이펑(开封)을 점령하였다. 송(宋) 황실은 남쪽으로 항저우(杭州)까지 도주하였고 영토는 단지 화이하~친령(淮河~秦岭) 이남, 민산(岷山) 동쪽지역에 한정되었다. 금(金)의 영토는 광활하여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서하(西夏)와 토번(吐蕃),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려(高丽)와 접하였으며 북으로 헤이룽장 유역에 달하였다. 8) 원(元)의 강역(疆域)1206년 칭기즈칸(成吉思汗)이 몽고를 통일하고 대몽고국(大蒙古国)을 건립하였으며이후 몽고는 여섯 차례에 걸쳐 서하(西夏)를 공격하여 1227년에 서하를 멸망시켰다.1211년에 몽고는 금(金)을 공격하였으며 1215년 중도(中都)를 함락시켰다. 또한 1234년 송(宋)과 연합하여 금(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1218년 서요(西辽)도 몽고에 의해 멸망되었다. 1235년 몽고는 남하하여 송(宋)을 공격하였으나 1259년에 몽가(蒙哥, möngke) 대한(大汗)의 사망에 따라 잠시 중단되었다. 이 기간에 몽고는 계속하여 중앙아시아, 고려, 아랍지역 및 동 등지를 공격하였다. 1244년 시짱(西藏)을 빼앗고 1256년 대리(大理)를 멸망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당시 제국의 영토는 북쪽으로 바이칼호(贝加尔湖, Lake Baikal), 남쪽으로 중남반도(中南半岛, Indochina), 서쪽으로 다뉴브강(多瑙河, Danube), 동쪽으로 한반도에 이르는 세계사상 가장 큰 제국인 몽고제국을 건설하였으며 면적은 3,300만 ㎢에 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몽고제국은 1259년 몽가대한(蒙哥大汗, möngke Khan)의 사망에 따라 쿠빌라이(忽必烈, Kublai)와 아리부가(阿里不哥, Ariq Böke)의 황위 쟁탈로 이후 제국의 영토는 원(元)과 4대 한국(四大汗国)으로 분리되었다. 1271년 쿠빌라이(忽必烈, Kublai)는 중원에 원(元)을 건립하였으며 재차 남하하여 남송(南宋)을 공격하였고 1276년 남송(南宋)의 수도 임안(临安)을 함락시켰으며 얼마 되지 않아 송의 잔여세력도 1279년의 야산해전(崖山海战, 애산해전) 후 괴멸되었다.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에는 원(元)의 강역은 북으로는 인산(阴山, 음산), 서쪽으로 류사(流沙, 유사), 동쪽으로 랴오둥 왼편, 남 쪽으로 해표(海表)에 이르러 랴오양(辽阳, 요양)과 간쑤(甘肃), 쓰촨(四川), 윈난(云南), 후광(湖广, 호광)의 변경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라 남송, 금(金), 서하, 대리 등 이전 국가의 영토를 모두 합한 것보다 넓었다. 9) 명(明)의 강역(疆域)원말(元末) 홍건군(紅巾軍)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장사성(张士诚, 1321~1367) 등의 할거세력을 격퇴하며 1368년 제위에 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