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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감상 Camille Pissarro(카미유 피사로) 모네의 영원한 연인

덕치/이두진 2020. 1. 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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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미유 피사로(1830.7.10 ~ 1903.11.13)


피사로는 1830년 7월 10일,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세인트토머스 샬럿아말리에서
성공한 유대인 상인인 아브라함 가브리엘 피사로와 라셸 만자노 포미에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842년 12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일찍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5년 뒤 서인도제도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이 이국적인 섬과 그곳의 주민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1853년 카라카스로 도망쳐서 2년간 그곳에서 덴마크의 화가인 프리츠 멜비와 함께 머물렀다.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1855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그린 가장 초기의 작품들은 열대지방과 프랑스 시골의 풍경화 및 인물화이다.
그가 입학한 국립미술학교에서는 평범한 전통미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흥미를 못 느낀 피사로는 화가인 카미유 코로를 추종했는데,
코로는 1864년의 살롱 전람회에서 피사로가 스스로를 코로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무렵 피사로는 바르비 종파의 미술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원적이고 감상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사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들에도 매력을 느꼈다.
1860년대에는 미술가들과 작가들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유명한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 토론회에 참가했으며,
젊은 화가들인 오귀스트 르누아르나 클로드 모네와 함께 활동했다.
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도피했으며, 그곳에서 역시 프랑스에서 망명한 모네와 함께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영국의 풍경화들을 감상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온 피사로는 루브시엔에 있는 그의 집이 약탈당하고 그의 그림들 중 상당수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는 곧 퐁투아즈에 또다른 집을 구했다.

​그의 주위 환경은 약 30년 동안 그의 미술의 주제가 되었으며, "나에게는 아름다운 장소가 필요하다!"라고
그가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언제나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1872년 폴 세잔이 퐁투아즈에 와서 합류했는데, 이들은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외광회화).
1870, 1880년대에 그는 주요한 모티프로서 단지 집과 공장, 나무, 건초더미, 들판, 일하는 농부들,
강의 풍경들을 사용했다. 형태들은 흐릿하지 않고 뚜렷하며 색채는 강렬했다.
1870년대 후반에는 쉼표 모양의 붓놀림을 이용해 반짝이는 섬광을 많이 묘사한 작품
'과수원의 꽃 피는 과일나무들'(Orchard with Flowering Fruit Trees),
'퐁투아즈의 봄' (Springtime, Pontoise)(1877)을 제작했다.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리인으로 그들의 작품 판매를 대행하고 있던 미술 상인인 폴 뒤랑 뤼엘이
그의 그림들을 팔아주었지만, 피사로는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맏아들인 뤼시앙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쓰고는 했는데,
이 주목할 만한 편지 왕래는 1883년에 시작해 그뒤 20년간 계속되었다.
피사로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표시한 적이 몇 번 있다.

1885년 화가인 폴 시냐크의 소개로 만난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 이론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피사로는 작은 색점들을 나란히 병치시켜 꼼꼼하게 그리는 쇠라의 기법을 채택했으며
5년 동안 이 '분할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들은 미술 상인들과 수집가들 및
심지어는 그의 오랜 동료 미술가들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또한 이무렵 그는 예전에 그와 같은 경향으로 활동하다가 새로운 상징주의 운동에 합류한 폴 고갱과도 멀어졌다.

1892년 뒤랑 뤼엘은 피사로의 작품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를 계기로 피사로는 재정적인 안정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이무렵 고질적인 눈병에 시달려 야외에서 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1893, 1897년에 그는 파리에 호텔 방을 잡고 해가 비치거나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낀 이 도시의 거리들을
밤낮으로 그려 24점을 완성했다.
1890년대에 그는 또한 루앙의 강 풍경을 연작으로 그려 마찬가지로 자연의 다양한 효과를 묘사했다.
1900년부터 그가 죽은 1903년 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에라니· 디에프· 르아브르에서 참신한 시각과
더욱 자유로워진 기법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유화와 구아슈, 템페라, 파스텔화, 심지어는 부채와 자기에도 그린 1,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약 200점의 정교한 판화들과 함께 피사로가 반세기에 걸쳐 남긴 작품들의 뛰어난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모네의 영원한 연인, 카미유

 

 

 

 

 

 Claude Monet,

 The Walk, Woman with a Parasol
1875, Oil on canvas 100 x 81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어느 바람 부는 날, 언덕에서 양산을 들고 서 있는 여인과 그리고 한 아이를 사랑스럽게 그린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은 화가의 아내인 카미유와 아들 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저 함께 산책을 나왔다가 불현듯 앞서 걸어가고 있는 카미유를 불러

뒤돌아본 순간을 그린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이 그림에서 화창한 날 오후 한적하게 산책 나온 모네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Poppies at Argenteuil,

1873, Oil on canvas 50 x 65 cm, Musee d Orsay, Paris France
 

모네의 그림에는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을 자연의 풍경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린 작품이 또 있습니다.
'아르장퇴유의 양귀비꽃'에서 아내와 아이가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그저 바람이 스치듯 유유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아내와 아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모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The Luncheon,

1868,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모네가 아내와 아이로 인해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동료 화가이자 아들의 대부였던 바지유에게 쓴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오두막 안의 따뜻한 난로와 편안한 가족의 미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네.

자네가 우리 아들을 보면 좋으련만. 그 아이가 있어서 정말 행복하네."
이 편지를 보낼 즈음인 1868년에 그린 '점심'에서 모네 가족의 행복한 일상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 맞은 편 자리를 보면 식사 중이던 모네가 막 일어난 듯합니다.

인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모네의 초창기 그림이라 색달라 보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Woman In A Green Dress,

1866,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모네는 카미유를 만난 1866년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그려 살롱에 출품했는데, 이 작품으로 격찬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카미유를 모델로 하여 인물을 거의 실제 사람 크기로 그린 대작입니다.

 The Reader also known as Springtime,

1872, Oil on canvas 50 x 65 cm,
The Walters Art Museum, Baltimore Maryland USA.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뿐 아니라, 카미유는 모네의 여러 그림 속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르장퇴유의 집 정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분홍빛 드레스의 이 매혹적인 여인도 카미유로 짐작됩니다.

 Camille At The Window,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이처럼 카미유가 모네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애초에 모델로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네의 카미유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한몫하였습니다.

이는 카미유가 사망한 후 모네는 재혼해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인물화가 현격히 줄어들고,

후반에 가서는 거의 그리지 않은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Camille Monet on Her Deathbed,

1879,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1878년 카미유는 둘째 아들 미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임신을 하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던 그녀는

둘째를 낳은 후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1879년 9월 4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카미유가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모습을 보는 모네는 참담하였습니다.

동료 화가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가엾은 아내는 오랫동안 병으로 괴로워하다가 오늘 아침 열 시 반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외톨이가 된 나를 남겨놓고, 불쌍한 아이들을 남겨놓고. 그저 비탄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모네는 사랑하는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는 침통한 남편이었지만 동시에 색을 탐구하는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비평가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에 모네는 "내게 너무나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임종을 맞는 카미유 모네'는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카미유는 비록 서른두 살이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위대한 화가 모네의 그림 속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