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宋衛策

戰國策 宋衛策

덕치/이두진 2021. 6. 26. 21:24

 

                                      宋 衛 策 

  【 序文 】

송나라는 미자계(微子: ‘미’는 국호, ‘자’는 작위였으나 성씨가 됨, 계는 이름)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은왕조 제을(帝乙)의 장자로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었다. 주공이 주성왕의 명을 받아 무경(武庚)과  

관숙(管叔)을 죽이고 채숙(蔡叔)을 추방하면서 미자계로 하여금 은왕조의 후사를 잇게 하면서 송(宋) 땅에 봉했다.  

영역은 지금의 하남성 동남부와 산동성 일부, 강소성 일부, 안휘성 일부에 걸쳐 있었다.  

도읍은 수양( 陽: 하남성 상구시 서남쪽)이었다. 양관(楊寬)은 「전국사」에서 전국시대 초기인 송소공(宋昭公)이나 송도공(宋悼公) 때 팽성(彭城: 강소성 서주시)으로 천도했을 공산이 크다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주난왕 29년(기원전 286), 송왕 언(偃)이 제민왕에게 토벌됨에 따라 멸망하고 말았다.
위(衛)나라는 희성으로 후작이었다. 주무왕이 동복동생인 강숙(康叔) 봉(封)을 봉하면서 시작되었다. 
 

강역은 지금의 하남성과 산동성 북부에 걸쳐 있었다. 도읍은 원래 조가(朝歌: 하남성 기현 북쪽)였으나  

위문공(衛文公: 기원전 659 ~ 635) 때 초구(楚丘: 하남성 활현 동쪽)으로 옮겼다.

위성공(衛成公: 기원전 634 ~ 600) 때 제구(帝丘: 하남성 복양현 서남쪽)으로 옮긴데 이어

위원군(衛元君: 기원전 252 ~ 230) 때 다시 야왕(野王: 하남성 심양현)으로 천도했다.

진2세 원년(기원전 209), 위군(衛君) 각(角) 때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다.  

 

 

   宋衛策

齊攻宋, 宋使臧子索救於荊. 荊王大說, 許救甚勸. 臧子憂而反. 其御曰:「索救而得, 有憂色何也.」

臧子曰:「宋小而齊大. 夫救於小宋而惡於大齊,此王之所憂也;而荊王說甚,必以堅我.

我堅而齊弊. 荊之利也.」臧子乃歸. 齊王果攻, 拔宋五城, 而荊王不至. 公輸般為楚設機,將以攻宋.

[주신정왕 3년(기원전 318),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가 장자(臧子)를 초나라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  

초회왕이 크게 기뻐하는 표정으로 이를 허락하며 적극 싸움에 나설 것을 권했다.  

이에 장자가 귀국하면서 크게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어자(御者: 시종)가 의아해 하며 묻기를 :
“구원 요청이 성사되었는데 어찌하여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라고 하자.
장자가 대답하기를 : “송나라는 소국이지만 제나라는 대국이오. 무릇 소국인 송나라를 도와 대국인 제나라와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요. 형왕(초회왕)이 크게 기뻐한 것은 우리의 결전 의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오.  

우리가 굳게 수비하여 두 나라가 모두 지치게 되면 이는 초나라의 이익이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과연 제나라 군사가 송나라의 5개 성읍을 공략했으나 초왕 군대의 지원병은 오지 않았다. 

공수반(公輸般: 기계를 잘 만드는 善工에 대한 통칭으로 말 감정가의 백낙, 병을 잘 고치는 편작과 마찬가지로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님)이 초나라를 위해 군사무기를 만든 뒤 이를 이용해 송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墨子聞之,百舍重繭,往見公輸般,謂之曰:「吾自宋聞子. 吾欲藉子殺王.」

公輸般曰:「吾義固不殺王.」  墨子曰:「聞公為云梯,將以攻宋. 宋何罪之有?

義不殺王而攻國,是不殺少而殺眾. 敢問攻宋何義也?」 公輸般服焉,請見之王.

[묵자(墨子)가 이 얘기를 듣고 백사중견(百舍重繭: 삼천 리를 걷는 강행군으로 발에 겹겹이 굳은살이 박힘)하여

공수반을 찾아와서는 말하기를 : “나는 송나라에 있으면서 그대가 무기를 잘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소.

이제 그대의 힘을 빌어 왕을 죽이고자 하오.”라고 하자. 공수반이 말하기를 : “나는 도의상 결코 왕을 죽이는데

도움을 줄 수 없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묵자가 말하기를 : “내가 듣건대 당신이 공성용 사다리를 만들어

장차 송나라를 공격한다고 하오. 도대체 송나라에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이오. 도의상 왕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송나라를 공격하면 단지 몇 명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오.

감히 묻건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도의요.”라고 하였다.

공수반이 감복하자, 묵자는 초왕에게 소개해 줄 것을 청했다.]

 

墨子見楚王曰:「今有人於此, 舍其文軒, 鄰有弊輿而欲竊之;舍其錦繡, 鄰有短褐而欲竊之;

舍其梁肉, 鄰有糟糠而欲竊之.  此為何若人也?」王曰:「必為有竊疾矣. 」

墨子曰:「荊之地方五千里, 宋方五百里, 此猶文軒之與弊輿也.  荊有云夢, 犀兕麋鹿盈之,

江· 漢魚鱉黿鼉為天下饒, 宋所謂無雉兔鮒魚者也, 此由七梁肉之與糟糠也.  荊有長松、文梓、

楩、楠、豫樟,宋無長木,此猶錦繡之與短褐也. 惡以王吏之攻宋,為與此同類也.」

王曰:「善哉!請無攻宋.」

[이어 묵자는 초왕을 배견하는 자리에서 묻기를 : “지금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화려한 무늬로 치장한

수레를 버려둔 채 이웃의 낡은 수레를 훔치려 하고, 자신의 비단 옷을 버려둔 채 이웃의 거친 베옷을 훔치려 하고,

자신의 좋은 곡식과 고기를 버려둔 채 이웃의 지게미와 쌀겨를 훔치려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초왕이 대답하기를 : “틀림없이 도벽이 있는 사람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묵자가 말하기를 : “초나라는 땅이 사방 5천 리나 되지만 송나라는 겨우 사방 5백 리에 불과합니다.

이는 화려한 마차와 낡은 마차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초나라는 운몽(雲夢)과 같은 큰 소택에 무소, 외뿔소,

사슴, 고라니 등이 가득 차 있고, 장강과 한수에는 물고기, 자라, 거북, 악어 등이 천하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송나라는 그 흔한 꿩과 토끼, 붕어조차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는 좋은 음식과 쌀겨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초나라에는 장송(長松), 문재(결이 고운 개오동나무), 편(녹나무와 유사한 남방의 교목), 남(楠: 녹나무),

예장(녹나무의 일종인 樟木)과 같은 재목이 많으나 송나라에는 재목이 될 만한 큰 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비단 옷과 거친 베옷을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대왕의 신하인 공수반이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는 것은

바로 ‘문헌’과 ‘양육’, ‘금수’를 버려둔 채 ‘폐여’와 ‘조강’, ‘수갈’을 훔치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초왕이 대답하기를 : “참으로 옳은 말이오! 송나라의 공격은 없는 것으로 하겠소.”라고 하였다.]

 

犀首伐黃,過衛,使人謂衛君曰:「弊邑之師過大國之鄰,曾無一介之使以存之乎?敢請其罪.

今黃城將下矣,已,將移兵而造大國之城下.」 衛君懼,束組三百緄,黃金三百鎰,以隨使者.

南文子止之曰:「是勝黃城,必不敢來;不勝,亦不敢來. 是勝黃城, 則功大名美, 內臨其倫.

夫在中者惡臨, 議其事. 蒙大名,挾成功,坐御以待中之議,犀首雖愚,必不為也.  是不勝黃城,

破心而走, 歸, 恐不免於罪矣!彼安敢攻維以重其不勝之罪哉?」果勝黃城, 帥語而歸. 遂不敢過衛.

[서수(犀首)가 송나라의 황성(黃城: 外黃)을 공격하기 위해 위(衛)나라를 지나면서 사람을 시켜 위도공(衛悼公)에게

말하기를 : “우리의 군대가 귀국의 인근을 지나가는데 어찌하여 사신 한 사람도 보내지 않는 것입니까?

이에 저는 특별히 귀국에게 감히 죄를 묻고자 합니다. 지금 황성을 공략하러 가는 중이니 장차 공략이 끝나면 

군사를 이끌고 귀국의 성 아래로 달려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위도공이 크게 두려워하여

속조(갑옷용 허리띠 묶음) 3백 곤(緄: 다발로 실 네 가닥으로 만든 것은 ‘1扶’, 5부는 ‘1首’, 10수는 ‘1緄’)과

황금 3백 일(鎰)을 사자 편에 보내려 했다. 그러자 대부 남문자(南文子)가 말하기를 :
“황성을 공략하면 틀림없이 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공략하지 못할지라도 감히 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황성을 공략하면 대공(大功)으로 미명(美名)을 얻게 돼 조정 내에서의 위치가 동료들보다 높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동료들은 이를 꺼려한 나머지 그를 헐뜯을 것입니다. 대공을 세워 미명을 얻고도 속수무책으로 동료들의  

험담을 듣는 짓은 서수가 아무리 우매하다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황성을 공략하지 못하면

크게 놀라 황급히 귀국하며 죄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할 터인데 어찌 감히 우리 위나라를 공격해 황성을 공략하지

못한 죄를 가중시키려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과연 서수는 황성을 함락시키고 군대를 인솔하여 귀환하면서도

마침내 감히 위나라 땅을 지나가지 못하였다.]

 

梁王伐邯鄲,而征語於宋.宋君使使者請於趙王曰:「夫梁兵勁而權重,今征語於弊邑,弊邑不從,

則恐危社稷;若扶梁梁伐趙,以害趙國,則寡人不忍也. 愿王之有以命弊邑.」

趙王曰:「然. 夫宋之不足如梁也, 寡人知之矣. 弱趙以強梁, 宋必不利也. 則吾何以告子而可乎?」

使者曰:「臣請受邊城,徐其公而留其日,以待下吏之有城而已.」 趙王曰:「善.」

宋人因遂舉兵入趙境,而圍一城焉.  梁王甚說,曰:「宋人助我攻矣.」

[양왕(위혜왕)이 조나라의 한단을 정벌하면서 송나라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임금(宋君: ‘宋剔成’)이 사자를 조나라로 보내 조성후(趙成侯: 趙敬侯의 아들 種)에게 요청하기를 :
“무릇 위나라 군사는 강하고 위세 또한 막강한데 지금 우리에게서 병사를 징발하려 합니다. 우리가 이를 따르지

않으면 아마 사직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위나라를 도와 조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조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과인이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우리 송나라에 어떤 명이라도 내려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성후가 송나라 사자에게 묻기를 : “과연 그러할 것이오. 무릇 송나라가 위나라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은

과인 또한 잘 알고 있소. 조나라를 약하게 하고 위나라를 강하게 하면 이는 송나라에게 불리하오.

그렇다면 과인이 그대에게 어찌 얘기하면 되겠소?”라고 하자.
사자가 대답하기를 : “신이 출병은 하되 위나라와 함께 한단을 공격하지 않고 조나라의 변경에 있는 한 성읍을

공격하는 척 하며 그 날짜를 연기시키겠습니다. 그리하면 조왕께서도 위나라의 공격을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왕이 말하기를 : “좋은 생각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송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의 변경으로 쳐들어가 한 성읍을 포위했다.

그러자 위혜왕이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 “송나라 군대가 나의 한단 공격을 도와주고 있다.”라고 하였다.]

 

趙王亦說曰:「宋人止於此矣.」故兵退難解,德施於梁而無怨於趙. 故名有所加而實有所歸.

謂大尹曰:「君日場合矣,自知政,則公無事. 公不如令楚賀君之孝,則君不奪太后之事矣,

則公常用宋矣.」 宋與楚為兄弟. 齊攻宋,楚王言救宋.  宋因賣楚重以求講於齊,齊不聽.
蘇秦為宋謂齊相曰:「不如與之,以明宋之賣楚重於齊也. 楚怒,必絕於宋而事齊,齊、楚合,

則攻宋易矣.」

[이때 조성후도 역시 기뻐하며 말하기를 : “송나라 군사가 단지 변경의 한 성읍만 공격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위나라 군대가 철군해 한단의 싸움이 그치자, 송나라는 위나라에 덕을 베풀고, 조나라에 원한을 사지

않는  셈이 되었다. 이로써 송나라에게 위나라를 돕고 조나라를 구했다는 명분이 더해지고,

조, 위 두 나라 간의 친교를 좌우하는 실리가 뒤따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대윤(大尹: 송나라의 최고위 관직)에게 말하기를 : “임금이 날로 성장하여 스스로 국정을 주도하면

공은 할 일이 없어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니 초나라로 하여금 송군의 효성을 칭송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임금은 태후의 섭정을 막지 않을 것이고 공 또한 늘 송나라의 권력을 좌우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송나라는 초나라와 형제지국의 교분을 맺었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초회왕이 돕겠다고 나섰다.  

이에 송나라는 초나라와의 교분을 과시하며 제나라와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소진이 송나라를 위해 제나라 상국에게 말하기를 : “송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송나라가 초나라와의 교분을 과시하며

강화했다는 사실을 확연히 드러내십시오. 그리하면 초나라는 틀림없이 송나라가 자신들을 멋대로 팔아먹은 것에

화가 나서 송나라와 단교한 뒤 제나라와  화친하게 될 것입니다. 제, 초 두 나라가 연합하면 송나라 공벌은

극히 쉬운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魏太子自將, 過宋外黃. 外黃徐子曰:「臣有百戰百勝之術, 太子能聽臣乎?」太子曰:「愿聞之.」

客曰:「固愿效之. 今太子自將攻齊,大勝并莒,則富不過有魏,而貴不益為王.

若戰不勝,則萬世無魏. 此臣之百戰百勝之術也.」 太子曰:「諾. 請必從公之言而還.」

客曰:「太子雖欲還,不得矣. 彼利太子之戰攻,而欲滿其意者眾,太子雖欲還,恐不得矣.」

太子上車請還.  其御曰:「將出而還,與北同,不如遂行.」 遂行. 與齊人戰而死,卒不得魏.

[위혜왕의 태자 신(申)이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가던 중 송나라의 외황(外黃)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외황 사람 서자(徐子: 「한비자」의 徐馮)가 묻기를 : “저에게 백전백승의 비술이 있는데 

태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태자가 대답하기를 : “어떤 것인지 듣고 싶소.”라고 하였다.
서자가 말하기를 : “저 또한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태자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설령 승리하여 거 땅을 병탄할지라도 그 부귀는 기껏 위나라를 차지하고 보위에 오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더구나 패하게 되면 자손 대대로 만세에 걸쳐 결코 위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한 백전백승의 비술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는 이 말의 뜻을 알고 말하기를 : “알겠소. 청컨대 반드시 그대의 말에 따라 돌아가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서자가 다시 말하기를 : “그러나 태자는 돌아가고자 해도 그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 출병에 편승해 사욕을

채우려는 무리들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설령 돌아가고자 해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병거에 올라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어자(御者)가 말하기를 :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가 되돌아가면

싸움에 패해 퇴각한 자와 같은 벌을 받습니다. 그러니 전진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자 신은 할 수 없이 출병하여 제나라 군사와 싸우다 전사함으로써 끝내 위나라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宋康王之時,有雀生?於城之陬.  使史占之,曰:「小而生巨,必霸天下. 」  康王大喜.
於是滅滕伐薛,取淮北之地,乃愈自信,欲霸之亟成,故射天笞地,斬社稷而焚滅之,

曰:「威服天下鬼神. 」罵國老諫曰,為無顏之冠,以示勇.  剖傴之背, 契朝涉之脛, 而國人大駭.

齊聞而伐之, 民散, 城不守.  王乃逃倪侯之館, 遂得而死.  見祥而不為祥, 反為禍.

[송강왕(宋康王) 때 참새가 송나라 도읍의 성벽 돌담 한 구석에 새매를 낳은 일이 있었다.

이에 태사(太史)에게 점을 치게 하자, “작은 새가 큰 새를 낳으니 반드시 천하를 재패할 것이다.”하였다.
송강왕이 크게 기뻐하여 곧 등(滕)나라를 멸하고, 설(薛)나라를 정벌하고, 회북(淮北)의 땅을 탈취했다.  

이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자 하루 속히 패업을 이루려고 했다. 마침내 사천태지(射天笞地: 피를 가득 담은 

푸대를 매단 후 활을 쏘고 땅을 매질해 천지를 제압하려 함)하고, 사직지신(社稷之神: 토지신과 곡물신의 위패)을 
동강내 
이를 불사르면서 말하기를 : “위력으로 천지의 귀신을 모두 복종시키리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국로(國老 ;영상직을 지낸 사람으로 나랏일에 고문격이 될 만한 인물)가 간언하면 이를 꾸짖고, 

무안지관(無顔之冠: 이마를 덮지 못하는 관)을 만들어 용맹을 과시하였다. 게다가 꼽추의 등을 가르고,

이른 아침에 강을 건너는 자의 정강이를 절단했다. 이에 송나라가 크게 소란스럽게 되었다.  

제나라가 이 소문을 듣고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백성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도읍을 지켜낼 길이 없었다.  

이에 송강왕은 이내 소주(산동성 등현)의 군주인 예후(倪侯)가 송나라에 만들어 놓은 관저로 피신했으나  

끝내 제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상서로움이 나타났는데도 덕을 닦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되는 것이다.]

智伯欲伐衛. 遺衛君野馬四百, 白璧一.  衛君大悅,群臣皆賀, 南文子有憂色.

衛君曰:「大國大歡,而子有憂色何?」 文子曰:「無功之賞,無力之禮,不可不察也.

野馬四,白璧一,此小國之禮也,而大國致之,君其圖之.」衛君以其言告邊境. 智伯果起兵而襲衛,

至境而反曰:「衛有賢人,先知吾謀也.」智伯欲襲衛,乃佯亡其太子,使奔衛.

南文子曰:「太子顏為君子也,甚愛而有寵,非有大罪而亡,必有故.」
使人迎之於境,曰:「車過五乘,慎勿納也.」智伯聞之,乃止.

[지백(智伯)이 위(衛)나라를 정벌할 생각으로 위출공(衛出公: 위영공의 태자)에게 북방의 명마 4 필과 백벽(白璧)

한 쌍을 선사했다. 위출공이 크게 기뻐하자 군신들이 모두 축하했다. 그러나 대부 남문자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축하하지 않자 위출공이 의아해하며 묻기를 : " 지백이 큰 호의를 보여주었는데도 그대는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연고요?”라고 하자.  남문자가 대답하기를 : "공이 없는데도 하사된 포상과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내리는 예물은 신중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명마 4 필과 백벽 한쌍은 소국이 대국에게 봉헌하는 예인데

대국이 이같이 했으니 주군은 거듭 이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이에 위출공이 곧 이 사실을 변경에 알려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지백은 과연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습격했으나 이내 국경까지 왔다가 철군하면서

말하기를 : “위나라에 현인이 있다. 위나라를 공격하려는 내 계획을 이미 모두 간파해 버렸다.”라고 하였다 

지백은 위(衛)나라를 습격하기 위해 자신의 태자인 안(顔)을 도주한 것처럼 꾸며 위나라로 가게 했다.  

그러자 대부 남문자가 말하기를 : “태자 안(顔)은 지백의 아들이다. 많은 총애를 받는 사람이 대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망명하려는 것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국경으로 가 태자를 영접하게

하면서 당부하기를 : “병거가 5 승을 넘거든 신중히 처신하여 받아들이지 말라.”라고 하였다.
지백이 이 말을 듣고 이내 태자의 위장 망명 계획을 중지시켰다.] 

 

秦攻衛之蒲.  胡衍謂樗里疾曰:「公之伐蒲,以為秦乎? 以為魏乎? 為魏則善,為秦則不賴矣.

衛所以為衛者,以有蒲也. 今蒲入於魏,衛必折於魏. 魏西河之外,而弗能復取者,弱也.

今并衛於魏,魏必強. 魏強之日,洗河之外必危. 且秦王亦將觀公之事. 害秦以善魏,秦王必怨公.」

樗里疾曰:「奈何?」胡衍曰:「公釋蒲勿攻, 臣請為公入戒蒲守, 以德衛君.」 樗里疾曰:「善.」

[기원전 306, 진나라가 위(衛)나라의 포(蒲) 땅을 공격했다. 그러자 세객 호연(胡衍)이 저리질에게 말하기를 :
“그대가 포 땅을 정벌하려는 것은 진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위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위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좋겠지만 진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위나라가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포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포 땅이 진나라의 손에 들어가면 위(衛)나라는 틀림없이 몸을 굽혀 위(魏)나라를 찾아가 구원을

청할 것입니다. 위(魏)나라가 서하(西河) 밖의 땅을 진나라에 잃고도 되찾지 못한 것은 나라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위(衛)나라가 위(魏)나라에 병합되면 위(魏)나라는 틀림없이 강해질 것입니다.  위나라가 강해지면

서하(西河) 밖의 땅은 위험해집니다. 게다가 진왕(秦王: 진소양왕)도 그대가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진나라를 해롭게 하여 위나라를 이롭게 한다면 진왕은 틀림없이 그대를 원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저리질이 묻기를 :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호연이 대답하기를 : “그대는 포 땅을 포기하고

공격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대를 위해 위(衛)나라에 사자로 가서 포 땅의 태수에게 이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공은 위군(衛君)에게 은혜를 베푸는 셈이 됩니다.”라고 하자. 저리질은 : “좋은 생각이오.”라고 말하였다.]

 

胡衍因入蒲,謂其守曰:「樗里子知蒲之病也,其言曰:『吾必取蒲.』今臣能使釋蒲勿攻.」
蒲守再拜,因效金三百鎰焉,曰:「秦兵誠去,請厚子於衛君.」 胡衍取金於蒲,以自重於衛.

樗里子亦得三百金而歸,又以德衛君也.  衛使客事魏,三年不得見.

衛客患之,乃見梧下先生,許之以百金.  梧下先生曰:「諾.」
乃見魏王曰:「臣聞秦出兵,未知其所之. 秦、魏交而不休之日久矣. 愿王博事秦,無有佗計.」

魏王曰:「諾.」 客趨出,至郎門而反曰:「臣恐王事秦之晚.」 王曰:「何也?」

先生曰:「夫人於事己者過急,於事人者過緩. 今王緩於事己者,安能急於事人.」
「奚以知之?」 「衛客曰,事王三年不得見. 臣以是知王緩也.」 魏趨見衛客.

[호연이 포 땅의 태수를 찾아가 말하기를 : “저리질은 포 땅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다짐하기를, ‘무슨 일이

있어도 포 땅을 취하고야 말겠다’고 했소. 지금 나는 그가 포 땅에 대한 공격을 포기토록 만들 수 있소.”라고 하였다.
포 땅의 태수가 재배한 뒤 금 3백 일(鎰)을 건네면서 당부하기를 : “만일 진나라 군사가 철군하면 위군에게 그대를

천거하여 후대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로써 호연은 포 땅에서는 금을 얻고, 위나라에서는 크게 우대를 받았다.

저리질도 3백 금을 얻고 철군함으로써 위군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 

위(衛)나라가 사자를 보내 위왕(魏王)을 섬기게 했으나 사자는 3년이 지나도록 위왕을 만나보지 못했다.  

위나라 사자가 이를 크게 우려해 오하(梧下) 선생을 찾아가 주선을 부탁하며 1백 금을 약속했다.

이에 오하선생이 말하기를 : “그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며.  오하 선생은 위왕을 만나 말하기를 :
“신은 진나라가 출병했다고는 들었으나 어느 곳으로 출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 위(魏) 두 나라는 국교를 맺고  

있으면서도 소원하게 지낸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진나라를 섬기는데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계책은 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위왕이 대답하기를 : “그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오하 선생이 급히 밖으로 나가 궁내의 낭문(廊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가서는 위왕에게 말하기를 : “신은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는 것이 혹 늦어질까 우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위왕이 묻기를 : “왜 그리 생각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이에 오하 선생이 대답하기를 : “무릇 사람이란 남이 자신을 섬김에는 지나치게 서두르고, 자신이 남을 섬김에는

지나치게 느긋한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자신을 섬기겠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토록 느긋하시니

어찌 남을 섬기는 일에 대해 급히 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위왕이 묻기를 : “그것을 어찌 알았소?”라고 하자.  오하 선생이 대답하기를 : “위나라 사자가 저에게 말하기를,

‘대왕을 섬긴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위왕이 서둘러 위(衛)나라 사자를 만났다.]

 

衛嗣君病. 富術謂殷順且曰:「子聽吾言也以說君, 勿議損也, 君必善子. 人生之所行, 與死之心異.

始君之所行於世者,食高麗也;所用者,紲錯、挐薄也. 群臣盡以為君輕國而好高麗,

必無與君言國者.  子謂君:『君之所行天下者甚謬。紲錯主斷於國,而挐薄輔之,自今以往者,

公孫氏必不血食矣.』」 君曰:「善.」與之相印,曰:「我死,子制之.」

嗣君死,殷順且以君令相公期.  胸錯、挐薄之族皆遂也.

[기원전 283, 위사군(위평후의 아들)이 병이 나 자리에 눕게 되자, 위나라 사람 부술(富術)이 은순저(殷順且)에게

말하기를 : “그대는 내 말을 잘 듣고 군주에게 유세하도록 하시오. 가감 없이 내 말 대로 하면 군주는 틀림없이

그대를 칭송할 것이오. 사람이란 살아 있을 때의 행동과 죽기 진전의 마음이 서로 다른 법이오. 지금 군주가 세상에서

한 일이라고는 고아하고 화려한 물건을 사용하는데 힘쓴 것 뿐이오. 이에 총애를 받은 자도 기껏 설착(緤錯)과

나박(挐薄)에 불과할 뿐이오. 지금 군신들은 모두 군주가 나라를 가볍게 보고 고아하고 화려한 물건을 사용하는데

힘쓰고 있는 까닭에 결코 군주와 더불어 국사를 논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러니 그대는 군주에게

이르기를, ‘군주가 천하에 행한 일은 매우 잘못되어 있습니다. 설착이 국정을 오로지하고 있고, 나박이 이를 돕고

있습니다. 앞으로 위사군의 후손들이 조종의 제사를 올리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듣고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곧 위사군에게 그대로 말하자, 위사군이 은순저에게

상국의 인(印)을 건네 주면서 말하기를 : “과인이 죽으면 그대가 집정하도록 하오.”라고 하였다. 위사군이 죽자,

은순저가 임금의 명에 의해 공자 기(期)의 상국이 되었다.  이에 설착과 나박을 비롯한 그의 일족이 모두 추방시켰다.] 

 

衛嗣君時,胥靡逃之魏,衛贖之百金,不與. 乃請以左氏.

群臣諫曰:「以百金之地,贖一胥靡,無乃不可乎?」
君曰:「治無小, 亂無大. 教化喻於民, 三百之城, 足以為治;民無廉恥, 雖有十左氏, 將何以用之?」

為人迎新婦,婦上車,問:「驂馬,誰馬也?」御曰:「借之.」 新婦謂仆曰:「拊驂,無笞服.」

車至門,扶,教送母:「滅灶,將失火.」 入室見臼,曰徙之牖下,妨往來者.

主人笑之.  此三言者,皆要言也,然而不免為笑者,蚤晚之時失也.

​[위사군 때 어떤 서미(胥靡: 도망치지 못하도록 서로 묶어놓은 죄수로 대략 잡범에 해당)가 위(魏)나라로 도망쳤다. 

그러자 위(衛)나라가 1백 금을 주고 그를 데려오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이에 다시 좌씨(左氏: 산동성 조현) 땅을 내놓고 그를 데려오려 청하자였다. 모든 군신들이 반대하며 말하기를 :
“1백 금과 좌씨 땅을 제공해 서미 한 사람을 데려오고자 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위사군이 말하기를 : "작은 일이라 하여 다스림에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나라가 혼란스러운 것은 나라가 큰 것과

무관하다고 했소.  백성을 교화하여 깨우치게 만들고자 하면 3백 호의 성읍일지라도 족히 다스릴 만한 것이오.  

백성들이 염치가 없다면 비록 10개의 좌씨 땅이 있은들 장차 무엇에 쓰겠소.”라고 하였다. 

위(衛)나라 사람이 신부를 맞이하려 하자, 신부가 수레에 오르며 마부에게 묻기를 :
“저 참마(驂馬: 네 마리가 끄는 수레에서 바깥 쪽의 두 마리 곁말)는 누구의 것이오.”라고 하자.
마부가 대답하기를 : “빌려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신부가 말하기를 : “참마를 때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복마(服馬: 가운데 두 마리 말)는 참마를 때리는 것을 보고 열심히 달릴 것이니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수레가 신랑 집 앞에 이르자, 신부가 수레에서 내리며

송모(送母: 신부를 호송하는 老婦)에게 말하기를 : “부뚜막 속의 불을 꺼 실화를 막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또 집 안으로 들어가 절구를 보고 말하기를 : “창가로 옮겨 사람들이 오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이를 보고 웃었다. 원래 신부가 말한 3 가지 내용은 모두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비웃음을 산 것은 갓 시집온 사람이 일찍 해야 할 말과 늦게 해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