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國策(전국책) /戰國策 趙策 1

戰國策 趙策 1

덕치/이두진 2021. 6. 26. 18:34

 

                                   趙 策

 

 

【 序文 】

 

* 조나라는 원래 영성(嬴姓)의 나라이다. 선조 조보(造父)는 주목왕(周穆王) 때 말을 기르는 일을 담당해 공을 세우고

조성(趙城: 산서성 조성현)에 봉해졌다. 이후 성이 조성(趙姓)이 되었다.

조보의 6세손인 엄보(奄父)에 이르러 숙대(叔代)를 낳자 숙대의 5세손인 조숙(趙夙) 때에 그의 손자인 조최(趙衰)가

진헌공(晉獻公)의 공자 중이(重耳)를 좇아 망명길에 올랐다. 중이가 19년 간의 망명을 끝내고 보위에 올라

진문공(晉文公: 기원전 636 ~ 620)이 되자 조최가 국정을 맡게 되었다.
조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돈(趙盾)이 뒤를 이어 국정을 담당했고,

그가 죽자 아들 조삭(趙朔)이 진나라의 국정을 좌우했다.

조삭의 아들 조무(趙武)는 진평공(晉平公) 12년(기원전 546)에 정경(正卿)이 되었다.

조무의 작위는 조경숙(趙景叔)에게 이어지고, 다시 조간자(趙簡子: 기원전 518 ~ 458)인 조앙(趙鞅)에 이어

조양자(趙襄子: 기원전 457 ~ 425)에게 이어졌다.
조양자의 손자인 조적(趙籍)이 재위한지 6년이 되던 주위열왕 23년(기원전 403), 주위열왕이 그를 조열후(趙烈侯)로

봉후(封侯)했다. 조무령왕(趙武靈王: 기원전 325 ~ 299) 때 칭왕하며 한때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진시황 19년(기원전 228), 조왕 천(遷)이 진시황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조나라는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조나라의 영토는 지금의 섬서성 동북부와 산서성 중부, 하북성 동남부, 산동성 서부, 하남성 북단에 걸쳐 있었다.

도읍은 원래 진양(晉陽: 산서성 태원시)이었으나 주고왕(周考王) 16년(기원전 425)에 조헌후(趙獻侯)가

중모(中牟: 하남성 탕음현)으로 천도했다. 다시 주안왕(周安王) 16년(기원전 386),

조경후(趙敬侯)가 한단(邯鄲: 하북성 한단시)으로 옮긴 후 멸망할 때까지 줄곧 도읍으로 남았다.

  趙策 一 . 

 

知伯從韓魏兵以攻趙

 

知伯從韓、魏兵以攻趙,圍晉陽而水之,城下不沉者三板. 郄疵謂知伯曰:「韓、魏之君必反矣.」

知伯曰:「何以知之?」 郄疵曰:「以其人事知之. 夫從韓、魏之兵而攻趙,趙亡,

難必及韓、魏矣. 今約勝趙而三分其地.  今城不沒者三板,臼灶生蛙,人馬相食,城降有日,

而韓、魏之君無喜志而有憂色,是非反如何也?」

​[주정정왕 16년(기원전 453), 지백(知伯)이 한강자(漢康子)와 위환자(魏桓子)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양(晉陽)을 포위하고는 이내 수공(水攻)을 폈다. 성이 물에 잠겨 3판(板)을 남겨 놓고 있을 때

지백의 가신 극자가 지백에게 말하기를 : “한강자와 위환자가 장차 배반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지백이 묻기를 :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소.”라고 하자.
극자가 대답하기를 : “그들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한씨와 위씨의 군사를 이끌고 조씨(조양자)를 치기로

했으나 조씨가 망하면 그 화는 한씨와 위씨에게도 미치게 됩니다. 당초 조씨를 이기면 그 영토를 3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지금 성이 물에 잠기기까지 불과 3판을 남겼을 뿐입니다. 절구와 부뚜막 속에서 개구리가 나오고,

사람과 말을 서로 잡아먹고 있어 이제 며칠 안 돼 성이 함락되려는데 한강자와 위환자는 기뻐하기는커녕

근심스런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것이 배반할 조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明日,知伯以告韓、魏之君曰:「郄疵言君之且反也.」韓、魏之君曰:「夫勝趙而三分其地,

城今且將拔矣.  夫三家雖愚,不棄美利於前,背信盟之約,而為危難不可成之事,其勢可見也.

是疵為趙計矣,使君疑二主之心,而解於攻趙也.  今君聽讒臣之言,而離二主之交,為君惜之.」

趨而出. 郄疵謂知伯曰:「君又何以疵言告韓、魏之君為?」 知伯曰:「子安知之?」

對曰:「韓、魏之君視疵端而趨疾.」郄疵知其言之不聽,請使於齊,知伯遣之.  韓、魏之君果反.

[다음날 지백이 한강자와 위환자를 만나 말하기를 : “극자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장차 배반할 조짐이 있다고 했소.”

라고 하자,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변명하기를 : “조양자를 이기면 그 영토를 3분 하기로 했습니다. 성의 함락은 지금

눈 앞에 있습니다. 우리 두 집안이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눈앞의 큰 이익을 버리고, 신의를 건 맹약까지 등지고,

위험이 많아 성사될 가능성도 희박한 일을 할 리 있겠습니까. 이는 지금의 정황으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같은 말은 극자가 조양자를 위해 만든 말입니다. 주군에게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의심케 만들어 조양자에 대한

공세를 늦추려 한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 군은 참소하는 신하의 말만 믿고 우리들과의 관계를 멀리 하려고 합니다.

군을 위해 애석히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극자가 지백에게 묻기를 : “주군은 무엇 때문에 신이 말씀드린 것을 두 사람에게 알린 것입니까?”라고 하자. 

지백이 되묻기를 : “그것을 어찌 알았소.”라고 하자.
극자가 대답하기를 : “한강자와 위환자가 소신을 보자 당황한 눈빛으로 급히 달려 나갔습니다.”라고 하였다.
극자는 자신의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이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갈 것을 자원했다.

지백이 그를 사신으로 보낸지 얼마 안 돼 과연 한강자와 위환자는 지백을 배반하고 말았다.]

 

 

知伯帥趙韓魏而伐范中行氏

 

知伯帥趙、韓、魏、而伐范、中行氏,滅之. 休數年,使人請地於韓.

韓康子欲勿與,段規諫曰:「不可. 夫知伯之為人也,好利而鷙復,來請地不與,必加兵於韓矣. 

君其與之. 與之,彼狃,又將請地於他國,他國不聽,必鄉之以兵;然則韓可以免於患難,

而待事之變.」 康子曰:「善.」使使者致萬家之邑一於知伯.  知伯說,又使人請地於魏,

魏宣子欲勿與. 趙葭諫曰: 「 彼請地於韓, 韓與之. 請地於魏, 魏弗與, 則是魏內自強,

而外怒知伯也. 然則其錯兵於魏必矣!不如與之. 」 宣子曰:「諾.」因使人致萬家之邑一於知伯.

知伯說,又使人之趙,請蔡、皋狼之地,趙襄子弗與.  知伯因陰結韓、魏,將以伐趙.

[주정정왕 16년(기원전 453), 지백이 조씨와 한씨, 위씨를 이끌고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쳐 멸망시켰다.

수년 동안 평온히 있다가 사자를 한강자에게 보내 땅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한강자가 이를 거절하려고 하자,

가신 단규(段規)가 간하기를 : “그래서는 안됩니다. 본래 지백이란 위인은 이해타산에 밝고 포악무도합니다.

와서 땅을 요구했는데도 이에 응하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 올 것입니다. 차라리 땅을 떼어주십시오.

이에 그는 재미를 붙여 다른 사람에게도 땅을 떼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말을 듣지 않으면 반드시 무력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환난을 면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강자가 말하기를 : “그 말이 옳소.”라고 하며,  이에 사람을 보내 1만 호의 성읍 하나를 지백에게 떼어 주었다.

지백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번에는 사람을 위환자에게 보내 땅을 떼어 달라고 요구했다. 위환자가 거절하려고 하자,

가신 조가(趙葭)가 간하기를 : “지백이 한강자에게 땅을 청하자, 한강자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안으로 강대함을 믿다가 밖으로 지백의 노여움을 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침공을 받게 될 것이니 땅을 떼어주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위환자도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이에 사람을 보내 1만 호의 성읍 하나를 지백에게 떼어 주었다.

지백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번에는 사람을 조양자에게 보내 인(산서성 이석현)과 고랑(산서성 이석현 서북쪽)의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 조양자가 이를 거절하자 지백이 은밀히 한강자 및 위환자와 결탁해 조양자를 토벌하고자 했다.]

 

趙襄子召張孟談而告之曰:「夫知伯之為人, 陽親而陰疏, 三使韓、魏, 而寡人弗與焉,

其移兵寡人必矣. 今吾安居而可?」
張孟談曰:「夫董安於,簡主之才臣也,世治晉陽,而尹鐸循之,其餘政教猶存,君其定居晉陽.」

君曰:「諾.」乃使延陵生將車騎先之晉陽,君因從之. 至,行城郭,案府庫,視倉廩,

召張孟談曰:「吾城郭已完,府庫足用,倉廩實矣,無矢奈何?」
張孟談曰:「臣聞董子之治晉陽也,公宮之垣,皆以狄蒿苦楚廧之,其高至丈餘,君發而用之.」

於是發而試之,其堅則箘簬之勁不能過也.

[이때 조양자는 가신 장맹담(張孟談)을 불러 대책을 상의하면서 묻기를 : “본래 지백이란 위인은 겉으로는

가까운 체하면서도 내심은 멀리하오. 한강자 및 위환자와는 3 차례에 걸쳐 사자를 서로 교환하면서 맹약을 했소.

그러나 나와는 아무런 맹약도 맺지 않았소. 곧 쳐들어올 것이 뻔한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 동안우(董安于)는 간주(簡主: 조양자의 부친 조간자)를 섬긴 재주 있는 신하입니다.

대대로 진양을 다스려 왔고 간주의 가신 윤택(尹澤: 尹鐸) 역시 그의 치도를 모방하고 있으므로 교화의 여풍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주군은 진양성으로 들어가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조양자는 : “그리 하도록 하겠소.”
이에 가신 연릉생(延陵生)을 시켜 거기(車騎)를 이끌고 진양성으로 들어가게 한 후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조양자는 진양성에 도착해 성곽을 순찰하고 부고(府庫)와 창름(倉廩)을 살펴본 뒤 장맹담을 불러 묻기를 :
“성곽은 완벽하오. 부고도 넉넉하고 창름도 충실하오. 그러나 화살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저는 동자(동안우)가 진양을 다스리면서 공궁의 울타리에 빠짐없이 쑥, 씀바귀, 싸리나무,

가시나무를 심었는데 그 키가 이미 한 길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주군은 그것을 베어서 화살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추호고초를 베어다가 화살을 만들어 시험하자, 강력한 전죽(箭竹)도 당하지 못할 만큼 단단했다.]

 

君曰:「足矣. 吾銅是若何?」

張孟談曰:「臣聞董子之治晉陽也,公宮之室,皆以煉銅為柱質,請發而用之,則有餘銅矣.」

君曰:「善.」號令以定,備守以具.  三國之兵乘晉陽城,遂戰.  三月不能拔,因舒軍而圍之,

決晉水而灌之。圍晉陽三年,城中巢居而處,懸釜而炊,財食將盡,士卒病羸.

襄子謂張个談曰:「糧食匱,城力盡,士大夫病,吾不能守矣,欲以城下,何如?」
張孟談曰:「臣聞之,『亡不能存,危不能安,則無為貴知士也』. 君釋此計,勿復言也.

臣請見韓、魏之君.」 襄子曰:「諾.」

[조양자가 다시 장맹담에게 묻기를 : “화살은 이제 충분하오. 그런데 화살촉에 쓰일 동(銅)이 모자라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 제가 듣기로 동자가 진양을 다스리면서 공궁의 매 건물마다

예외없이 정련된 동으로 만든 주춧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뽑아 사용토록 하십시오.

그러면 쓰고도 남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양자가 말하기를 : “그리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호령이 내려지고 만반의 수비책이 마련되었다. 얼마 후 과연 지백이 한강자 및 위환자의 군사를 이끌고

진양성으로 밀어닥쳤다. 양측은 교전한 지 3달이 지나도록 진양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지백은 수공으로 방향을 돌려

군사들을 뒤로 물린 후 진양성을 둘러싸고 있는 진수(晉水)를 막고는 진양성 안으로 물을 흘려보냈다.

이같이 하여 진양성을 둘러싼 공방이 3년 넘게 계속되자 성 안에서는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들어 살고,

솥을 매달아 밥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군량이 바닥 나자 이내 병사들이 병에 걸려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조양자가 장맹담에게 묻기를 : “양식은 떨어지고, 성 안의 힘이 다하고, 사대부들은 크게 지쳐 있소.

나로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소. 성을 내놓고 항복하고자 하는데 어찌 생각하오?”라고 하자.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제가 듣건대 ‘나라가 망하려고 하면 이를 보존할 수 없고, 나라가 위험에 빠지려고 하면

이를 안정시킬 길이 없는데 굳이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을 존중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했습니다.

주군은 그같은 계책을 버리고 두 번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 번 한강자와 위환자를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조양자가 말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張孟談於是陰見韓、魏之君曰:「臣聞唇亡則齒寒,今知伯帥二國之君伐趙,趙將亡矣,

亡則二君為之次矣.」
二君曰:「我知其然. 夫知伯為人也,粗中而少親,我謀未遂而知,則其禍必至,為之奈何?」
張孟談曰:「謀出二君之口,入臣之耳,人莫之知也.」二君即與張孟談陰約三軍,與之期日,

夜,遣入晉陽. 張孟談以報襄子,襄子再拜之. 張孟談因朝知伯而出,遇知過轅門之外.

知過入見知伯曰:「二主殆將有變.」君曰:「何若?」

對曰:「臣遇張孟談於轅門之外,其志矜,其行高.」

知伯曰:「不然. 吾與二主約謹矣, 破趙三分其地, 寡人所親之, 必不欺也, 子釋之勿出於口. 」

[이에 장맹담이 은밀히 성 밖으로 나가 한강자와 위환자를 만나 말하기를 : “제가 듣건대 순망치한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지백은 두 분의 군사를 이끌고 조양자를 토벌하러 나섰습니다. 지금 조씨는 망하기 직전입니다.

그러나 조씨가 망하면 두 분이 곧 다음 차례가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강자와 위환자가 입을 모아 묻기를 : “우리도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소. 지백이란 위인은 거칠고 난폭하며

인자하지 못한 사람이오. 그러나 이쪽의 모사가 성취되기도 전에 누설되면 그 화가 필시 곧바로 떨어지고 말 것이오.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모사는 두 분의 입에서 나와 신의 귀에 들어왔을 뿐이니

다른 사람이 이를 알 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강자와 위환자는 그 자리에서 장맹담과 은밀히 전 군사를

투입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는 이날 밤 장맹담을 진양성 안으로 들여보내자 장맹담이 조양자에게 곧바로 복명했다.

그러자 조양자가 너무 기쁜 나머지 장맹담에게 두 번 절했다. 이에 앞서 장맹담은 지백에게 군사(軍使)의 신분으로

문안을 드리고 나오다가 진영의 군문 밖에서 지과(知過: 知果)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지과가 안으로 들어가서

지백에게 말하기를 : “한강자와 위환자가 변고를 획책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지백이 묻기를 :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지과가 대답하기를 : “장맹담과 원문에서 마주쳤는데 표정이 의기양양한 데다가 걸음걸이가 씩씩했습니다.”하였다
이에 지백이 말하기를 : “그렇지 않소. 나는 두 사람과 삼가 맹약하면서 조양자를 멸한 뒤 그 영토를 3분하기로 했소.

이는 내가 직접 한 일이오. 그들이 기만할 리 없소.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이를 입 밖에도 내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知過出, 見二主, 入說知伯曰:「二主色動而意變, 必背君, 不如今殺之. 」
知伯曰:「兵著晉陽三年矣,旦暮當拔之而饗其利,乃有他心?必不然,子慎勿復言.」

知過曰:「不殺則遂親之.」 知伯曰:「親之奈何?」
知過曰:「魏宣子之謀臣曰趙葭, 康子之謀臣曰段規, 是皆能移其君之計. 君其與二君約,

破趙則封二子者各萬家之縣一,如是則二主之心可不變,而君得其所欲矣.」

知伯曰:「破趙而三分其地,又封二子者各萬家之縣一,則吾所得者少,不可.」

知過見君之不用也,言之不聽,出,更其姓為輔氏,遂去不見.

[지과가 물러나 한강자와 위환자를 만나 본 뒤 다시 안으로 들어가 지백에게 말하기를 : “두 사람의 안색과 표정이

어색하고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필시 주군을 배반할 것입니다. 지금 제거하느니만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지백이 말하기를 : “군사들이 진양으로 쳐들어온지 벌써 3년이 되었소. 단모(旦暮)에 성을 함락시키고

이득을 나눠갖게 될 참이오. 그런데 오히려 두 사람을 제거하라고 하니 이는 불가하오.

그대는 물러가 두 번 다시 말을 꺼내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지과가 건의하기를 : “죽이지 않을 양이면 끝까지 친근하게 대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지백이 묻기를 : “친근하게 대하자면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하자.
지과가 대답하기를 : “위환자의 모신은 조가(趙葭)이며, 한강자의 모신은 단규(段規)라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모시는 주군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군은 곧 한강자 및 위환자에게 언약하기를,

조양자를 깨뜨리는 즉시 각각 1만 호의 현에 봉하겠다고 하십시오. 그리 하면 두 사람은 변심하지 않을 것이고

군주로서도 뜻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지백이 반대하며 말하기를 :
“조양자를 깨뜨린 후 그의 땅을 3분 하는 데다가 두 사람을 각각 1만 호의 현에 봉하면 내 몫이 적어질 수밖에 없소.

이는 불가하오.”라고 하였다.  지과는 지백이 밝지 못한 데다가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

이내 물러나 성을 보씨(輔氏)로 바꾼 뒤 마침내 지백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張孟談聞之,入見襄子曰:「臣遇知過於轅門之外,其視有疑臣之心,入見知伯,出更其姓.

今暮不擊,必後之矣.」 襄子曰:「諾.」 使張孟談見韓、魏之君,以夜期,

殺守堤之吏而決水灌知伯軍. 知伯軍救水而亂,韓魏翼而擊之, 襄子將卒犯其前,

大敗知伯軍而禽知伯. 知伯身死、國亡、地分,為天下笑,此貪欲無厭也.

夫不聽知過,亦所以亡也.  知氏盡滅,唯輔氏存焉.

[장맹담이 이 얘기를 듣고는 조양자를 만나 말하기를 : “저는 지과와 원문 밖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눈길에 저를 의심하는 마음이 엿보였습니다. 그런데 지백을 만나고 나오자 곧바로 성을 바꿨습니다.

오늘 저녁에 공격하지 않으면 지백도 곧 깨닫게 될 터이니 자칫 지백에게 선수를 빼앗길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조양자가 말하기를 : “과연 그렇겠소.”라고 하며, 이에 장맹담을 다시 성 밖으로 내보냈다.

장맹담이 한강자 및 위환자를 만나 말하기를 : “오늘 저녁에 거사하기로 약속합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진수(晉水)의 뚝을 지키는 병사를 죽인 뒤 뚝을 무너뜨려 지백의 군진쪽으로 물을 흘려보냈다.

지백의 군사들이 급작스레 몰아닥친 물길을 막느라고 혼란해진 틈을 타 한강자와 위환자의 군사들이 양쪽에서

협공을 펼쳤다. 조양자의 군사도 이 틈에 성문을 열고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에 삼면에서 협공을 받은 지백의 군사가 대패하게 되었다. 이때 지백은 포로로 잡혔다가 곧바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그는 몸을 망하고 오히려 자신의 영지가 3분 됨으로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는 지백이 끝없이 탐욕을 부린데 따른 것이었다. 지과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결국 지씨는 모두 망하고 오직 지과의 후손인 보씨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張孟談既固趙宗

 

張孟談既固趙宗,廣封疆,發五百, 乃稱簡之途以告襄子曰:「昔者,前國地君之御有之曰:

『五百之所以致天下者約,兩主勢能制臣,無令臣能制主. 故貴為列侯者, 不令在相位, 自將軍以上,

不為近大夫. 』今臣之名顯而身尊, 權重而眾服, 臣愿捐功名去權勢以離眾.」

襄子恨然曰:「何哉?吾聞輔主者名顯,功大者身尊,任國者權重,信忠在己而眾服焉.

此先聖之所以集國家,安社稷乎!子何為然?」 張孟談對曰:「君之所言,成功之美也.

臣之所謂,持國之道也. 臣觀成事,聞往古,天下之美同,臣主之權均之能美,

未之有也. 前事不忘,後事之師. 君若弗圖,則臣力不足. 」愴然有決色. 襄子去之.

[조간자의 가신 장맹담은 조양자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영지를 넓히면서 천맥(阡陌: 경계)를 확장했다.

그리고는 선군 조간자(趙簡子)의 치도를 칭송하면서 조양자에게 말하기를 : “전에 선군 간주(조간자)가 조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관련해 남긴 유훈에 이르기를, ‘5패(五伯)가 제후들을 영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 군주의

위세가 족히 군신들을 누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군신들의 권세가 군주를 제압하지 못하도록 한 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열후가 된 자는 재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고, 장군 이상의 무관은 대부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는 혁혁한 명성에 존귀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에 그 권세가 무거워 중인(衆人)들이 복종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원컨대 공명과 권세를 버리고 중인들과 더불어 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양자가 실망스러운 듯 말하기를 :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듣건대 ‘군주를 보필하는 자는 명성이 혁혁하고,

큰 공을 세운 자는 일신이 존귀해지며, 국정을 맡은 자는 권세가 무겁고, 마음이 충신하면 중인이 복종한다’고 했소.

이것이 바로 선성(先聖)이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편안하게 한 이유일 것이오. 그대는 왜 그같은 말을 하는 것이오?”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군주의 말은 공을 세운 자를 칭송하는 말이고, 저는 나라를 보존하는 길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이미 이뤄진 일과 옛 일을 토대로 돌아보건대 천하의 모든 선미(善美)는 한결같으나 군신의 권세가 균등하고도

능히 선미한 경지에 이른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앞으로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군주가 이를 깊이 고려치 않고 과거의 전철을 밟고자 하면 저의 역량으로는 도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창연(愴然)히 결의를 내비추자, 조양자는 장맹담을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臥三日,使人謂之曰:「晉陽之政,臣下不使者何如?」
對曰:「死僇.」張孟談曰:「左司馬見使於國家,安社稷,不避其死,以成其忠,君其行之.」
君曰:「子從事.」乃許之.  張孟談便厚以便名, 納地、釋事以去權尊, 而耕於負親之丘.

故曰, 賢人之行, 明主之政也.  耕三年,韓、魏、齊、燕負親以謀趙,襄子往見張孟談而告之曰:

「昔者知氏之地,趙氏分則多十城,復來,而今諸侯孰謀我,為之奈何?」
張孟談曰:「君其負劍而御臣以之國,舍臣於廟,授吏大夫,臣試計之.」君曰:「諾.」

張孟談乃行,其妻之楚,長子之韓,次子之魏,少子之齊.  四國疑而謀敗.

[조양자는 자리에 누운지 3일이 지나, 사람을 장맹담에게 보내 이같이 물어보게 했다.

" 지난번 진양성 공격 때에 신하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 하지 못한 자는 어찌 처리해야 하오?”라고 하자.
이에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자가 장맹담을 위해 조양자에게 건의하기를 :“좌사마(장맹담)는 국가를 이롭게 하고 사직을 평안하게 하는

일이라면 죽음도 사양치 않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그를 놓아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조양자는 대답하기를 : “그대가 그의 직무를 맡도록 하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장맹담의 은퇴를 허가했다.

장맹담은 이미 존귀한 자리와 혁혁한 명성이 있었으나 봉지를 반납하고, 재상의 자리를 버렸다.

그는 권력과 지위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구 에서 친히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이르기를, ‘명주(明主)가 있어야 비로소 현능한 대신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장맹담이 3년 동안 농사를 짓는 사이에 한, 위, 제, 연 등 4국이 조나라와의 결맹을 저버리고 조나라 침공을 모의했다.

그러자 조양자가 장맹담을 찾아가 이를 알리면서 호소하기를 : “전에 지백이 망하여 영지를 나눌 때

우리 조나라는10여 개 남짓한 성읍을 나누어 가졌을 뿐이오. 그런데 지금 제후들이 나를 상대로 계책을 꾸며

우리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이에 장맹담이 대답하기를 : “대왕께서는 검을 등에 메고 저를 수레에 태워 진양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어 저를 이대부(吏大夫: 조나라의 관직)에 임명하여 궁 안의 전전(前殿)에 머물게 함으로써 제후들로 하여금

제가 복임되어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음 계략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조양자는 말하기를 : “그리 하도록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장맹담이 곧 자신의 아내를 연나라, 장남은 한나라, 차남은 위나라, 막내는 제나라로 보내 각각 일러준대로

제후들을 설득하게 했다. 그러자 4국이 서로 의심하게 된 나머지 모사(謀事)가 무산되고 말았다.]

 

 

 晉畢陽之孫豫讓

 

晉畢陽之孫豫讓, 始事范、中行氏而不說, 去而就知伯, 知伯寵之.  及三晉分知氏, 趙襄子最怨知伯,

而將其頭以為飲器. 豫讓遁逃山中,曰 :「嗟乎!士為知己者死, 女為悅己者容. 吾其報知氏之讎矣.」

乃變姓名,為刑人,入宮涂廁,欲以刺襄子. 襄子如廁心動,執問涂者,則豫讓也.

刃其捍,曰:「欲為知伯報讎!」左右欲殺之.  趙襄子曰:「彼義士也,吾謹避之耳.

且知伯已死,無後,而其臣至為報讎,此天下之賢人也.」卒釋之.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의사(義士) 필양(畢陽)의 후손 중에 예양(豫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초 그는 범씨(范氏: 범소자 吉射)와 중항씨(中行氏: 중항문자 荀寅)을 섬겼으나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에 곧 지백에게 몸을 의탁하자 지백은 그를 총애했다. 그러던 중 3진(三晋)이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하게 되자,

조양자는 지백에게 극도로 원한을 품은 나머지 마침내 그의 두개골로 주기(酒器)를 만들었다.

이때 예양이 산 속으로 도망치며 다짐하기를 : “아,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는 법이다.나는 지씨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며, 

이에 변성명을 한 뒤 가짜 형인(刑人: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하는 사람)이 되어 조양자의 저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양은 변소를 수리하면서 기회를 보아 조양자를 척살하고자 했다. 하루는 조양자가 변소에 가려고 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변소를 수리하고 있는 자를 잡아다가 심문하니 바로 예양이었다. 당시 예양은 나무 흙손에

예리한 쇠날을 달고 있다가 신분이 발각되자, 말하기를 : “지백을 위해 복수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좌우가 그를 죽이려 하자 조양자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 “그는 의사다. 내가 삼가 조심하면 된다.

지백은 죽어 후계자도 없는데 그 신하가 죽은 주인을 위해 복수하고자 하니 그야말로 천하의 현인이다.”라고 하며, 

그리고는 마침내 풀어주었다.]


豫讓又漆身為厲,滅須去眉,自刑以變其容,為乞人而往乞,其妻不識,

曰:「狀貌不似吾夫,其音何類吾夫之甚也.」又吞炭為啞,變其音.
其右謂之曰:「子之道甚難而無功,謂子有志則然矣,謂子智則否. 以子之才,而善事襄子,

襄子必近幸子;子之得近而行所欲,此甚易而功必成.」
豫讓乃笑而應之曰:「是為先知報後知,為故君賊新君,大亂君臣之義者無過此矣.

凡吾所謂為此者,以明君臣之義,非從易也. 且夫委質而事人,而求弒之,是懷二心以事君也.

吾所為難,亦將以愧天下後世人臣懷二心者.」居頃之,襄子當出,豫讓伏所當過橇下.

襄子至橋而馬驚,襄子曰:「此必豫讓也.」使人問之,果豫讓.

[이에 예양은 다시 몸에 옷칠을 하고 문둥병자처럼 가장했다. 수염과 눈썹을 뽑아내고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

용모를 완전히 바꾼 뒤 걸인 행색으로 자기 집으로 갔다. 그러자 그의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고 중얼거리기를 :
“모습은 내 남편과 다르나 목소리만큼은 내 남편과 너무 흡사하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예양은 숯을 삼켜 말소리까지 완전히 바꿔 버렸다. 그러자 이를 본 그의 친구가 충고하기를 :
“자네가 하는 방법은 힘만 들 뿐 성공하기 어렵네. 자네를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네. 자네의 재능으로 조양자를 섬기면 조양자는 틀림없이 자네를 가까이 두고

총애할 것일세. 자네가 그에게 근접한 뒤 도모하는 것이 훨씬 쉽고도 차질없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길이라네.”하자.
예양이 웃으면서 응대하기를 : “그것은 선지(지백을 지칭)를 위해 후지(조양자를 지칭)에게 복수하고,

고군(故君: 옛 주군)을 위해 신군(新君: 새 주군)을 살해하는 셈이 되네. 이는 군신지의를 크게 어지럽히는 것인데

내 어찌 그같은 짓을 할 수 있겠나. 내가 이리 하는 것은 군신지의를 밝게 드러내자는 취지이지 용이한 길을 선택해

일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닐세. 그러니 몸을 굽혀 사람을 모시면서 이를 시해하고자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고 군주를 섬기는 것이 되네.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굳이 이같은 방법을 택한 것은

장차 훗날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일세.”라고 하였다. 얼마 후 조양자가 외출하게 되었다.

예양은 조양자가 반드시 지나가는 다리 밑에 몸을 숨겼다. 조양자가 다리에 이르렀을 때 조양자의 말이 갑자기

크게 놀랐다. 이에 조양자가 말하기를 : “예양이 이 근방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고는,
사람을 시켜 주변을 뒤지게 하자 과연 다리 밑에 숨어 있는 예양을 찾아내게 되었다.]


於是趙襄子面數豫讓曰:「子不嘗事范、中行氏乎?知伯滅范、中行氏,而子不為報讎,

反委質事知伯. 知伯已死,子獨何為報讎之深也?」

豫讓曰:「臣事范、中行氏,范、中行氏以眾人遇臣,臣故眾人報之;知伯以國士遇臣,

臣故國士報之.」 襄子乃喟然嘆泣曰:「嗟乎,豫子!豫子之為知伯,名既成矣,寡人舍子,

亦以足矣. 子自為計,寡人不舍子.」 使兵環之.
豫讓曰:「臣聞明主不掩人之義, 忠臣不愛死以成名. 君前已寬舍臣, 天下莫不稱君之賢. 

今日之事, 臣故伏誅, 然愿請君之衣而擊之, 雖死不恨. 非所望也, 敢布腹心. 」
於是襄子義之,乃使使者持衣與豫讓. 豫讓拔劍三躍,呼天擊之曰:「而可以報知伯矣.」

遂伏劍而死.  死之日,趙國之士聞之,皆為涕泣.

[이에 조양자가 예양을 불러 놓고 책망하기를 : “그대는 당초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범씨와 중항씨를 멸망시켰을 때 그대는 주군을 위해 지백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지백에게 머리를 숙여

지백을 섬겼다. 그런데 지백이 죽자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그토록 고집스럽게 지백을 위해 복수하려는 것인가?”하자.
예양이 대답하기를 : “범씨와 중항씨를 섬길 때 두 사람은 나를 중인(衆人)으로 대접했소.

그래서 나도 중인으로서 보답했을 뿐이오.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했소.

이에 나 또한 국사로서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조양자가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한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  “아, 예자(豫子)여, 그대의 지백을 향한 충성은 이미 충분히 그 명성을 이뤘다.

과인이 그대를 용서한 것은 지난번의 일로 족하다. 그대는 스스로 각오하기 바란다.

과인은 더 이상 그대를 용서해 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시켜 그를 둘러싸게 했다.

이에 예양이 말하기를 : “ 내가 듣건대 ‘명주는 사람의 의를 감추지 않고, 충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이름을

이룬다’라고 했소. 군은 이미 나를 관대히 용서해 준 바 있소. 지금 천하에서 군의 현덕을 칭송치 않는 자가 없소.

오늘 일로 나 또한 복주(伏誅)할 각오가 되어 있소. 다만 원컨대 군의 옷에라도 일격을 가하고 싶소.

그리 되면 죽어도 유한이 없겠소.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감히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조양자는 예양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좌우를 시켜 자신의 옷을 예양에게 갖다 주게 했다.

그러자 예양이 검을 빼들고 옷을 향해 3 번 도약해 달려들어 찌른 뒤 큰 소리로 외치기를 :
“이로써 나는 지백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었다.”라고 하며, 칼 위에 엎어져 자결했다.

예양이 죽은 날 조나라의 선비들이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魏文侯借道於趙攻中山

魏文侯借道於趙攻中山.  趙侯將不許.  趙利曰:「過矣. 魏攻中山而不能取,則魏必罷,

罷則趙重. 魏拔中山,必不能越趙而有中山矣.  是用兵者,魏也;而得地者,趙也.

君不如許之,許之大勸,彼將知趙利之也,必輟. 君不如借之道,而示之不得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