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廉頗 藺相如列傳

第二十一. 廉頗藺相如列傳(염파 인상여열전)

덕치/이두진 2021. 8. 3. 18:33

 

                  史記 列傳

 

  ​第二十一.   廉頗藺相如列傳(염파 인상여열전)

 

 

廉頗者,趙之良將也. 趙惠文王十六年,廉頗為趙將伐齊,大破之,取陽晉,拜為上卿, 

以勇氣聞於諸侯.  藺相如者,趙人也,為趙宦者令繆賢舍人. 

(염파자, 조지량장야.  조혜문왕십육년, 염파위조장벌제, 대파지, 취양진, 배위상경,  

이용기문어제후.  인상여자, 조인야, 위조환자령목현사인. )  

 
['염파'는 조나라의 훌륭한 장수다.  조'혜문왕' 16년,  '염파'는 조나라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양진"을 빼앗아 조나라 땅으로 삼자,
그 공으로 상경에 제수되고 '염파'의 용기가 제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상여'는 조나라 사람으로 환자령(환관) '목현'의 집사였다. ]
  


 

趙惠文王時, 得楚和氏璧.  秦昭王聞之, 使人遺趙王書, 願以十五城請易璧.  
(조혜문왕시, 득초화씨벽.  진소왕문지, 사인유조왕서, 원이십오성청역벽. ) 


[조'혜문왕'이 천하제일의 보물로 알려진 초나라의 화씨벽을 얻게 되었다.  
 

진'소왕'은 이 소문을 듣고 사자를 시켜 조'혜문왕'에게 글을  보내왔는데,
진나라의 15개 성읍과 화씨벽을 맞바꾸자고 요청하였다. ]
 

   

趙王與大將軍廉頗諸大臣謀:欲予秦, 秦城恐不可得, 徒見欺;

欲勿予, 即患秦兵之來. 計未定, 求人可使報秦者, 未得. 
(조왕여대장군렴파제대신모 : 욕여진, 진성공불가득, 도견기 ;

욕물여, 즉환진병지래. 계미정, 구인가사보진자, 미득.) 

 

[조'혜문왕'은 대장군 '염파'와 다른 대신들과 함께 그 대책을 의논한 결과 : 진나라에게 화씨벽을 주었다가  

진나라의 15개 성읍을 받지 못하고 속을 것 같아 염려하면서도 ; 그렇다고 화씨벽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트집잡아 진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전화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계책이 정해지지 않자, 진나라에 답신을 가지고 사신으로 보낼 만한 사람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
 

   

宦者令繆賢曰:「 臣舍人藺相如可使. 」  王問:「 何以知之? 」
(환자령목현왈 : 「 신사인인상여가사. 」  왕문 : 「 하이지지? 」 )


[환자령 '목현'이 조왕에게 말하기를 : " 신의 문객 중에 '인상여'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신으로 보낼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라고 하자.  '혜문왕'이 묻기를 : "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라고 하였다. ] 

   

對曰:「 臣嘗有罪, 竊計欲亡走燕, 臣舍人相如止臣, 曰:『 君何以知燕王?』  

臣語曰:『 臣嘗從大王與燕王會境上, 燕王私握臣手, 曰 「 願結友 」  以此知之, 故欲往. 』
(대왈 : 「 신상유죄, 절계욕망주연, 신사인상여지신, 왈 : 『 군하이지연왕?』  
 

신어왈 : 『 신상종대왕여연왕회경상, 연왕사악신수, 왈 「 원결우」  이차지지, 고욕왕. 』


['목현'이 대답하기를 : " 옛날 신이 대왕께 죄를 얻었을 때 저는 아무도 몰래 연나라로 도망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문객으로 있었던 '인상여'가 신을 제지하면서 ‘ 대감은 어떻게 연나라 왕을 아시게 되었습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일찌기 연나라 왕과 국경에서 열린 회담에 나가시는 대왕을 수행한 

적이 있었소. 연왕이 그때 아무도 몰래 내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 ' 우리 친구처럼 지내는게 어떻소 '라고 하였소.

그래서 연왕을 알게되었는데 이런까닭으로 연나라로 가려하오."라고 하였더니, 

   

相如謂臣曰:『 夫趙彊而燕弱, 而君幸於趙王, 故燕王欲結於君.   

今君乃亡趙走燕, 燕畏趙, 其勢必不敢留君, 而束君歸趙矣.  君不如肉袒伏斧質請罪, 則幸得脫矣. 』
(상여위신왈 : 『 부조강이연약, 이군행어조왕, 고연왕욕결어군.  
 

금군내망조주연, 연외조, 기세필불감류군, 이속군귀조의.  군불여육단복부질청죄, 즉행득탈의. 』 

  
['인상여'가 신에게 말하기를 : ‘ 대체로 조나라는 강하고 연나라는 약합니다. 
 

그리고 대감은 조왕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연왕이 대감과 친구 맺길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감께서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로 도망간다면, 연나라는 조나라를 두려워하여, 그 처해 있는 형편으로 보아 
 

반드시 대감을 머물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연왕은 대감을 결박하여 조나라로 돌려 보낼 것입니다.   

그러니 대감께서는 차라리 웃통을 벗고 부월을 지고 조왕께 엎드려 죄를 자청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며,
그러면 다행히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臣從其計, 大王亦幸赦臣.  臣竊以為其人勇士, 有智謀, 宜可使. 」
(신종기계, 대왕역행사신.  신절이위기인용사, 유지모, 의가사. 」)

  
[신이 그의 계책에 따라 대왕께 죄를 자청하자 대왕께서는 다행히도 저를 사면해 주셨습니다. 
신이 가만히 그를 살펴보니 그는 용기있는 선비로서 지혜와 꾀가 있으니

마땅히 진나라에 사신으로 갈 만한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 

   

於是王召見, 問藺相如曰:「 秦王以十五城請易寡人之璧, 可予不?」 

相如曰:「 秦彊而趙弱, 不可不許. 」
(어시왕소견, 문인상여왈 : 「 진왕이십오성청역과인지벽, 가여불 ? 」  

상여왈 : 「 진강이조약, 불가불허. 」)


[이에 조왕이 '인상여'를 불러 만나 보고 묻기를 : " 진왕이 15개의 성읍과 과인이 갖고 있는 화씨벽을 바꾸자고 
 

하는데, 주는게 좋겠는가 안주는게 좋겠는가 ? "라고 하자.  '상여'가 말하기를 : "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 

   

王曰:「 取吾璧, 不予我城, 柰何?」   

相如曰:「 秦以城求璧而趙不許, 曲在趙.  趙予璧而秦不予趙城, 曲在秦. 

均之二策, 寧許以負秦曲. 」
(왕왈 : 「 취오벽, 불여아성, 내하?」   
 

상여왈 : 「 진이성구벽이조불허, 곡재조.  조여벽이진불여조성, 곡재진.  균지이책, 녕허이부진곡. 」)


[조왕이 : " 진왕이 화씨벽만을 취하고 우리에게 성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 "하자. 
'상여'가 대답하기를 : " 진나라가 성읍을 준다고 하면서 화씨벽을 요구하였으니 조나라가 응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조나라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조나라는 화씨벽을 주었으나 진나라가 성읍을 주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진나라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두가지 계책을 저울질 해 볼 때 마땅히 우리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진나라에 잘못을 지도록 하는 계책이 나을 듯 합니다 "라고 하였다. ] 

   

王曰:「 誰可使者?」  相如曰:「 王必無人, 臣願奉璧往使.  城入趙而璧留秦;

城不入, 臣請完璧歸趙. 」  趙王於是遂遣相如奉璧西入秦.
(왕왈 : 「 수가사자?」  
상여왈 : 「 왕필무인, 신원봉벽왕사.  성입조이벽류진 ;

성불입, 신청완벽귀조. 」  조왕어시수견상여봉벽서입진. ) 

  
[조왕이 묻기를 : " 그렇다면 누구를 사자로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 "라고 하자.  
'상여'가 대답하기를 : " 대왕께서 마땅히 보낼 사람을 찾지 못하시겠다면, 신이 원컨대 화씨벽을 받들고 사자로 
 

가겠습니다. 성읍이 조나라로 들어온다면 화씨벽을 진나라에 두고 오겠지만, 성읍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신은 화씨벽을 온전하게 보전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왕은 마침내 '인상여'에게 화씨벽을 받들어 서쪽의 진나라로 들어가게 하였다. ]
 

   

秦王坐章臺見相如, 相如奉璧奏秦王.  秦王大喜, 傳以示美人及左右, 左右皆呼萬歲.   

相如視秦王無意償趙城, 乃前曰:「 璧有瑕,請指示王. 」
(진왕좌장대현상여, 상여봉벽주진왕.  진왕대희, 전이시미인급좌우, 좌우개호만세.   
 

상여시진왕무의상조성, 내전왈 : 「 벽유하, 청지시왕. 」)


[진왕이 장대에 앉아서 '상여'의 알현을 받았으며, '인상여'는 화씨벽을 받들어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이 크게 기뻐하며 대궐의 후궁들과 좌우의 신하들에게 돌려가며 차례로 보여주자,  
 

진왕의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면 환호했다.
'상여'가 진왕의 눈치를 보니 진왕이 조나라에 성읍을 넘겨 줄 의사가 없음을 알고 즉시 그 앞으로 다가가

말하기를 : " 그 구슬에는 티가 있는데, 저에게 잠시 넘겨주시면 그 티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  

   

王授璧, 相如因持璧卻立, 倚柱, 怒髪上沖冠,

謂秦王曰:「 大王欲得璧, 使人發書至趙王, 趙王悉召群臣議,  

皆曰『 秦貪, 負其彊, 以空言求璧, 償城恐不可得 』 

議不欲予秦璧. 臣以為布衣之交尚不相欺, 況大國乎!
(왕수벽, 상여인지벽각립, 의주, 노발상충관,

위진왕왈 : 「 대왕욕득벽, 사인발서지조왕, 조왕실소군신의,  

개왈 『 진탐, 부기강, 이공언구벽, 상성공불가득 』

의불욕여진벽. 신이위포의지교상불상기, 황대국호 ! )

  
[진왕이 화씨벽을 '상여'에게 주자, '상여'는 화씨벽을 가지고 뒤로 물러서서 기둥에 몸을 기대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이 들먹거릴 정도로 화를 내며, 진왕에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 이 화씨벽을 얻고자 하셔서 사람을 시켜서 서신을 조왕에게 보냈습니다. 

조왕은 모든 군신들을 불러 논의한 바, 군신들은 하나 같이 ‘진나라는 탐욕스러운 나라라  그들의 강함을 믿고

빈말에 단지 화씨벽만을 얻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니,
아마도 화씨벽을 주고 나면 약속한 성읍은 얻지 못할까 걱정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의논한 결과 진나라에 화씨벽을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주장하기를

아무 벼슬이 없는 필부도 서로 속이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대국이 그런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且以一璧之故逆彊秦之驩, 不可.  於是趙王乃齋戒五日, 使臣奉璧, 拜送書於庭.  何者?

嚴大國之威以修敬也. 今臣至, 大王見臣列觀, 禮節甚倨;得璧, 傳之美人, 以戲弄臣.

臣觀大王無意償趙王城邑, 故臣復取璧. 大王必欲急臣, 臣頭今與璧俱碎於柱矣!」 
(차이일벽지고역강진지환, 불가.  어시조왕내재계오일, 사신봉벽, 배송서어정.  하자?

엄대국지위이수경야. 금신지, 대왕견신열관, 예절심거 ; 득벽, 전지미인, 이희롱신.

신관대왕무의상조왕성읍, 고신부취벽. 대왕필욕급신, 신두금여벽구쇄어주의!」) 


[또한 한개의 구슬로 강한 진나라와의 우호관계를 해치는 일은 더욱 불가하다고 진언을 올렸습니다. 
이에 조왕께서는 즉시 5일 동안 목욕재계하신 후에 신으로 하여금 벽옥을 받들어 진나라 조정에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것은 대국의 위엄을 존중해서 공경을 표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이 이곳에 도착해서 보니, 

대왕께서는 신을 검열하듯 보시며, 매우 거만한 자세로 예절을 지키지 않으셨으며 ; 다시 구슬을 받으시자 

후궁들에게 주어 돌려가며 구경하도록 하여 신을 조롱하셨습니다. 신이 보기에 대왕께서 조왕에게 15개의 

성읍을 보상으로  주실 뜻이 없는 듯 하여, 그래서 신이 다시 구슬을 취한 것입니다. 대왕께서 저를 기필코 

내치려하신다면,  신의 머리는 지금 이 벽옥과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부셔지고 말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相如持其璧睨柱, 欲以擊柱.  秦王恐其破璧, 乃辭謝固請, 召有司案圖, 指從此以往十五都予趙.   

 

相如度秦王特以詐詳為予趙城, 實不可得, 乃謂秦王曰:「 和氏璧, 天下所共傳寶也, 趙王恐,

不敢不獻.  趙王送璧時, 齋戒五日, 今大王亦宜齋戒五日,  設九賓於廷, 臣乃敢上璧. 」 

(상여지기벽예주, 욕이격주.  진왕공기파벽, 내사사고청, 소유사안도, 지종차이왕십오도여조. 

상여도진왕특이사상위여조성, 실불가득, 내위진왕왈 : 「 화씨벽, 천하소공전보야, 조왕공,

불감불헌.  조왕송벽시, 재계오일, 금대왕역의재계오일,  설구빈어정, 신내감상벽. 」 )

  
['인상여'는 손에 든 벽옥을 노려보며 기둥에 던져 부셔버릴 듯하였다.  진왕은 벽옥이 깨질가 염려하여 
 

즉시 '인상여'에게 사과하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기를 간청하며,  유사를 불러 지도를 살피더니,  

15개 성읍을 손가락으로 일일이 가리키며 조나라에 할양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인상여'는 진왕이 조나라에 특별히 성읍을 할양하겠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짐작하며, 
 

실제로는 성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여'는 진왕에게 말하기를 : " 화씨벽은 천하가 인정하는 보물이거늘 

조왕께서는 진나라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왕께서 이 벽옥을 진나라에 보낼 때, 5일 동안 목욕재계하신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역시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신 후에 이 궁정의 뜰에서 구빈(임금이 우대하는 아홉의 손님. 

공ㆍ후ㆍ백ㆍ자ㆍ남ㆍ고ㆍ경ㆍ대부ㆍ사)의 예를 행하셔야만, 신은 감히 벽옥을 바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秦王度之, 終不可彊奪, 遂許齋五日, 舍相如廣成傳.   

相如度秦王雖齋, 決負約不償城, 乃使其從者衣褐, 懷其璧, 從徑道亡, 歸璧于趙.
(진왕도지, 종불가강탈, 수허재오일, 사상여광성전.  
 

상여도진왕수재, 결부약불상성, 내사기종자의갈, 회기벽, 종경도망, 귀벽우조. )   


[진왕은 짐작하기를 화씨벽을 강압적으로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5일 동안 재계를 하겠다고 대답한 후, 
 

그동안 '인상여'를 "광성"이라는 상사에 머물도록 했다. '인상여'는 추측하기를 진왕이 비록 재계를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결국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15개의 성읍을 조나라에 주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자신을 수행한 일행 중 한 사람에게 옷을 허름하게 바꿔 입게 하여 화씨벽을 품속에 감추고 소로를 따라 
 

진나라를 몰래 도망쳐 조나라로 돌려 보냈다. ] 

 

秦王齋五日後, 乃設九賓禮於廷, 引趙使者藺相如. 

相如至, 謂秦王曰:「 秦自繆公以來二十餘君, 未嘗有堅明約束者也.  臣誠恐見欺於王而負趙,

故令人持璧歸, 閒至趙矣. 且秦彊而趙弱, 大王遣一介之使至趙, 趙立奉璧來.  

今以秦之彊而先割十五都予趙, 趙豈敢留璧而得罪於大王乎?   

臣知欺大王之罪當誅, 臣請就湯鑊, 唯大王與群臣孰計議之. 」 秦王與群臣相視而嘻.
(진왕재오일후, 내설구빈예어정, 인조사자인상여. 

상여지, 위진왕왈 :「진자무공이래이십여군, 미상유견명약속자야.  신성공견기어왕이부조,

고령인지벽귀, 한지조의. 차진강이조약, 대왕견일개지사지조, 조입봉벽래. 

금이진지강이선할십오도여조, 조개감류벽이득죄어대왕호?

신지기대왕지죄당주, 신청취탕확, 유대왕여군신숙계의지. 」 진왕여군신상시이희.)

 

 [진왕은 5일 동안의 재계를 끝내고, 구빈지례를 행하기 위해 백관들을 모두 조정에 도열하게 하고 조나라의 사자

인상여를 인도하였다. '인상여'는 자리를 잡고 진왕에게 말하기를 : " 진나라는 '목공'이래 지금까지 20여 군주 중  

자기가 맺은 맹약을 지켰던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대왕께 속임을 당해 우리 조왕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까 걱정되어 제가 데리고 왔던 수행원을 시켜 벽옥을 조나라에 돌려보냈습니다.
또한 진나라는 강하며 조나라는 약합니다. 그래서 대왕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조나라에서는 신을 시켜

화씨벽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지금 강대한 진나라의 대왕께서 먼저 15개의 성읍을 조나라에 할양하신다면,

조나라가 어찌 감히 화씨벽을 진나라에 보내지 않고 대왕께 죄를 짓겠습니까 ? 
신은 대왕을 속인 죄로 마땅히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신은 원컨대 기름 가마솥에 던져져 
 

삶아 죽이시기를 바라면서도, 오로지 대왕과 여러 대신들은 제가 드린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라고 하였다.  진왕과 군신들은 놀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억지 웃음만 지었다. ] 

   

左右或欲引相如去, 秦王因曰:「 今殺相如, 終不能得璧也, 而絕秦趙之驩, 不如因而厚遇之,

使歸趙, 趙王豈以一璧之故欺秦邪!」 卒廷見相如, 畢禮而歸之.
(좌우혹욕인상여거, 진왕인왈 : 「 금살상여, 종불능득벽야, 이절진조지환, 불여인이후우지,

사귀조,  조왕개이일벽지고기진야!」  졸정견상여, 필례이귀지. )   


[진왕의 측근 신하들이 '상여'를 끌어내어 죽이려고 하자,  진'소양왕'이 말리며 말하기를 : " 지금 '상여'를 죽인다 
 

해도 이미 조나라로 돌아간 화씨벽을 얻지 못할 바에야, 오히려 진나라와 조나라의 우호관계만 깨지게 될 것이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상여'를 후대한 후에 조나라에 돌려보내 준다면, 
조왕이 어찌 벽옥 한 개로 우리 진나라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 ! "라고 하였다.  
마침내 진왕은 '상여'를 조정에서 접견을 한 다음, 구빈의 예를 다하고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
 

   

相如既歸, 趙王以為賢大夫使不辱於諸侯, 拜相如為上大夫.  秦亦不以城予趙, 趙亦終不予秦璧.   

其後秦伐趙, 拔石城.  明年, 復攻趙, 殺二萬人.
(상여기귀, 조왕이위현대부사불욕어제후, 배상여위상대부.  진역불이성여조, 조역종불여진벽.  
 

기후진벌조, 발석성.  명년, 부공조, 살이만인. )   

['인상여'가 무사히 조나라에 돌아오자, 조왕은 그가 훌륭한 대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사자의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제후로부터 욕됨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상대부의 자리에 임명했다.   

진나라는 역시 조나라에 15개의 성읍을 할양하지 않았고, 조나라 역시 진나라에 화씨벽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나라는 조나라의 관문인 "석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다음 해에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여, 2만 여명에 달하는 조나라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
 

   

秦王使使者告趙王, 欲與王為好會於西河外澠池.  趙王畏秦, 欲毋行.   

廉頗· 藺相如計曰:「 王不行, 示趙弱且怯也. 」 趙王遂行, 相如從. 
(진왕사사자고조왕, 욕여왕위호회어서하외민지.  조왕외진, 욕무행.  
 

염파· 인상여계왈 : 「 왕불행, 시조약차겁야. 」  조왕수행, 상여종. )   


[진왕이 조왕에게 사신을 보내 서하 밖의 "민지"에서 진나라와 조나라의 우호를 위해 회맹을 하자고 통고해왔다.
  조왕은 진나라가 두려워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염파'와 '인상여'가 서로 의논한 후에 조왕에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 만일 가시지 않으신다면, 조나라는 허약하고 대왕은 겁쟁이라고 생각하여

조나라를 얕보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자.  조왕은 마침내 참석하기로 결심하고 '인상여'가 수행하기로 하였다. ] 

   

廉頗送至境, 與王訣曰:「 王行, 度道里會遇之禮畢, 還, 不過三十日. 

三十日不還, 則請立太子為王.  以絕秦望. 」 王許之, 遂與秦王會澠池.
(염파송지경, 여왕결왈 : 「 왕행, 도도리회우지례필, 환, 불과삼십일. 

삼십일불환, 즉청입태자위왕. 이절진망. 」  왕허지, 수여진왕회민지. )   


[조나라 국경에까지 따라나선 '염파'가 조'혜문왕'에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 "민지"로 행차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회맹의 의식을 끝내고 돌아오는데 30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30일이 지나도 대왕께서 돌아오시지  

못한다면 청컨대 태자를 대신 왕으로 옹립하겠습니다. 그러면 대왕을 볼모로 잡아 두려는 진나라의 의도를 

단념하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자.  조왕은 허락하고 마침내 "민지"에 도착하여 진왕을 만났다. ] 

   

秦王飲酒酣, 曰:「 寡人竊聞趙王好音, 請奏瑟. 」趙王鼓瑟. 

秦御史前書曰「 某年月日, 秦王與趙王會飲, 令趙王鼓瑟.」
(진왕음주감, 왈 :「과인절문조왕호음, 청주슬. 」조왕고슬. 

진어사전서왈「모년월일, 진왕여조왕회음, 령조왕고슬.」)

 

[진소양왕은 주연이 무르익어 가자 조'혜문왕'에게 말하기를 : "과인이 듣기로 조왕께서는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하니, 청컨대 저를 위해 비파를 한 번 연주해 주시기 바랍니다 " 라고 하자. 

조왕은 치욕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비파를  가져오게 하여 연주하였다. 

이에 진'소양왕'은 사관들에게 말하기를 : " 모년 모월 모일에 진왕이 조왕과 술을  마시다가

진왕의 명을 받은 조왕이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 ] 

   

藺相如前曰:「 趙王竊聞秦王善為秦聲, 請奏盆缻秦王, 以相娛樂. 」   

秦王怒, 不許.  於是相如前進缻, 因跪請秦王.  秦王不肯擊缻.
(인상여전왈 : 「 조왕절문진왕선위진성, 청주분부진왕, 이상오락. 」  
 

진왕노, 불허.  어시상여전진부, 인궤청진왕.  진왕불긍격부. )   


['인상여'가 이 모습을 보고 진'소양왕' 앞으로 다가와서 말하기를 : " 우리 조왕께서는 진왕께서 진나라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들으셨습니다. 청컨대 진왕께 분부(옹기로 만든 타악기)를 가져다 올리오니

진왕께서 분부를 두드려  이 자리의 흥취를 돋구워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인상여'의 의도를 알아차린 진왕은 화를 내며 '인상여'의 청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상여' 분부를 가지고  

진왕 앞에 꿇어앉아 분부를 연주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진왕은 분부를 연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 

   

相如曰:「 五步之內, 相如請得以頸血濺大王矣!」 左右欲刃相如, 相如張目叱之, 左右皆靡.
(상여왈 : 「 오보지내, 상여청득이경혈천대왕의!」  좌우욕인상여, 상여장목질지, 좌우개미. )  

 
[그러자 '인상여'가 말하기를 : " 대왕께서는 저로 부터 불과 다섯 발자국 내에 계십니다. 제 청을 거절하신다면 
 

제 목의 피로 대왕의 몸을 적실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진왕의 좌우에게 있던 무사들이 '인상여'를 

칼로 찌르려고 하자, '인상여'는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꾸짖자, 좌우에게 있던 무사들은 모두 물러갔다. ] 

   

於是秦王不懌, 為一擊缻.  相如顧召趙御史書曰 「 某年月日, 秦王為趙王擊缻. 」   

秦之群臣曰:「 請以趙十五城為秦王壽. 」
(어시진왕불역, 위일격부.  상여고소조어사서왈 : 「 모년월일, 진왕위조왕격부. 」  
 

진지군신왈 : 「 청이조십오성위진왕수. 」 )


[그러자 진왕은 어쩔 수 없이 분부를 한 번 두드렸다.  '인상여'는 조나라의 사관을 불러 말하기를 : 
 

" 모년 모월 모일에 진왕이 조왕을 위해 분부를 연주했다.’라고 적게 했다.  진나라의 군신들이 말하기를 :  

" 조왕께서는 우리 진왕의 축수를 위해 조나라의 성읍 15개를 바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자. ] 

 

藺相如亦曰:「 請以秦之咸陽爲趙王壽. 」 秦王竟酒, 終不能加勝於趙. 

趙亦盛設兵以待秦, 秦不敢動.  既罷歸國, 以相如功大, 拜為上卿, 位在廉頗之右.
(인상여역왈 : 「 청이진지함양위조왕수. 」  진왕경주, 종불능가승어조. 

조역성설병이대진, 진불감동.   기파귀국, 이상여공대, 배위상경, 위재염파지우. ) 

  
['인상여' 역시 말하기를 : " 진왕께서는 진나라의 "함양성"을 바쳐 조나라 왕의 장수를 빌기 바랍니다 "하였다. 
진왕은 주연이 끝날 때까지 결국 조왕을 이길 수가 없었다.  조나라 역시 많은 군사들을 주둔시켜 진나라에 

대비하고 있었음으로, 진나라는 감히 어찌하지 못했다.  이윽고 회맹의 의식이 끝나고 조나라에 돌아온 조왕은

'인상여'의 공이 크다고 생각하여 그를 상경에 제수하여 '염파'의 위에 두었다. ] 

   

廉頗曰:「 我為趙將, 有攻城野戰之大功, 而藺相如徒以口舌為勞, 而位居我上,

且相如素賤人, 吾羞, 不忍為之下. 」
(염파왈 : 「 아위조장, 유공성야전지대공, 이인상여도이구설위로, 이위거아상,

차상여소천인, 오수, 불인위지하. 」)

['염파'가 말하기를 : " 나는 조나라의 백전노장으로 수많은 전장에 나가 성과 요새, 전선의 선봉에서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지만,  '인상여'는 겨우 입과 혀만 놀렸을 뿐인데 나보다 윗자리에 앉았으며,   

또한 '상여'는 그 출신이 미천하니 내가 그의 밑에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라고 하였다. ] 

   

宣言曰:「 我見相如, 必辱之. 」  相如聞, 不肯與會.  相如每朝時, 常稱病, 不欲與廉頗爭列.   

已而相如出, 望見廉頗, 相如引車避匿.  於是舍人相與諫曰:「 臣所以去親戚而事君者,

徒慕君之高義也.  今君與廉頗同列, 廉君宣惡言而君畏匿之, 恐懼殊甚.

且庸人尚羞之, 況於將相乎!臣等不肖, 請辭去. 」
(선언왈 : 「 아견상여, 필욕지. 」  상여문, 불긍여회.  상여매조시, 상칭병, 불욕여렴파쟁열.  
 

이이상여출, 망견염파, 상여인거피닉. 어시사인상여간왈 : 「 신소이거친척이사군자,

도모군지고의야.  금군여염파동열, 염군선악언이군외익지, 공구수심.

 차용인상수지, 황어장상호 ! 신등불초, 청사거. 」 )  

 
[또한 공공연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 " 내가 '상여'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모욕을 줄 것이다 "하였다.

'상여'가 '염파'의 말을 전해 듣고 한자리에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다.  

'상여'는 늘 조회때마다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서열로 인해 '염파'와 다투려 하지 않았다.  

'상여'는 혹시 외출하였을 때 앞에서 '염파'의 수레가 보이면 급히 자신의 수레와 함께 숨어 '염파'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래서 '상여'의 문객들은 모두 '상여'에게 와서 따져 묻기를 : 

"저희가 친척들의 곁을 떠나 나리를 모시는 이유는 나리의 높은 절개를 사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리께서는 '염파'장군과 서열이 서로 같은데도 불구하고, '염파' 장군은 나리에게 악설을 하고 

다니는데 오히려 나리께서는 두려워하며 피하고 계시는데, 그를 두려워함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이는 평범한 사람도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장차 재상에 오르실 분이 

그럴 수가 있는지요 ! 못난 우리들은 이제 나리를 떠나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 

   

藺相如固止之, 曰:「 公之視廉將軍孰與秦王?」 曰:「 不若也. 」  
(인상여고지지, 왈 : 「 공지시렴장군숙여진왕 ?」  왈 : 「 불약야. 」)


['인상여'가 문객들을 극구 제지하며 말하기를 : " 여러분들이 보기에 '염파'장군과 진왕 중 

어떤 사람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십니까 ? "라고 하자.  

문객들이 대답하기를 : " 그야 물론 '염파' 장군은 진왕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라고 하였다. ]  

   

相如曰:「 夫以秦王之威, 而相如廷叱之, 辱其群臣, 相如雖駑, 獨畏廉將軍哉? 

顧吾念之, 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 徒以吾兩人在也. 今兩虎共鬬, 其勢不俱生.

吾所以為此者, 以先國家之急而後私讎也. 」 
(상여왈 : 「 부이진왕지위, 이상여정질지, 욕기군신, 상여수노, 독외염장군재 ? 

고오념지, 강진지소이불감가병어조자, 도이오양인재야. 금양호공투, 기세불구생.

오소이위차자, 이선국가지급이후사수야. 」)


['인상여'가 말하기를 : " 무릇 진나라왕의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진나라 조정에서 진왕을 꾸짖었고, 
 

그의 신하들을 모욕하였소. 이 '인상여'가 비록 어리석지만 '염파' 장군을 무서워 하겠소 ? 

단지 내가 생각하기에 막강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감히 침공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지금 두 마리의 호랑이처럼 서로 싸우게 된다면 필시 우리 두 사람은 공존할 수 없소. 먼저 나라의 위난을 생각하고

후에 개인적인 원한을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인내하고 염파 장군에게 양보했을 뿐이오.」  

 

廉頗聞之,肉袒負荊,因賓客至藺相如門謝罪. 

曰:「鄙賤之人,不知將軍寬之至此也.」卒相與驩,為刎頸之交.  

是歲,廉頗東攻齊,破其一軍.  居二年,廉頗復伐齊幾,拔之.

後三年,廉頗攻魏之防陵、安陽,拔之.  後四年,藺相如將而攻齊,至平邑而罷.

其明年,趙奢破秦軍閼與下.

​[인상여의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즉시 어깨를 들어내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지고7) 그의 문객들과 함께

인상여의 집에 가서 사죄하며 말하기를 :"저는 장군께서 이렇듯 관대하게 대해 주시는 줄도 몰랐던 비루하고

천박한 인간입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결국은 서로 화해를 하고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그 해, 염파는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대 하나를 격파하였다.

2년 뒤, 염파는 다시 제나라를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몇 개의 고을을 점령했다.

3년 뒤, 염파는 위(魏)나라의 방릉(防陵)과 안양(安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년 뒤, 인상여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평읍(平邑)까지 진격했다가 철수하였다.  

다음 해에 조사(趙奢)가 진(秦)나라 군대를 연여(閼與)에서 격파하였다.]

 

趙奢者,趙之田部吏也.  收租稅而平原君家不肯出租,奢以法治之,殺平原君用事者九人.

平原君怒,將殺奢.

​[조사(趙奢)는 조()나라의 밭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여 관리하는 세리(稅吏)였다.

세금을 걷는데 평원군(平原君)의 집에서 세금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조사가 법으로 다스려 평원군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9명을 잡아서 죽였다.  

평원군이 노하여 조사를 죽이려고 하였다.]

 

奢因說曰:「君於趙為貴公子,今縱君家而不奉公則法削,法削則國弱,國弱則諸侯加兵,

諸侯加兵是無趙也,君安得有此富乎?以君之貴,奉公如法則上下平,上下平則國彊,

國彊則趙固,而君為貴戚,豈輕於天下邪?」 平原君以為賢,言之於王.

王用之治國賦,國賦大平,民富而府庫實.

​[조사가 평원군에게 말하기를 : " 군께서는 조나라의 귀한 신분이신 공자이십니다.

군의 집에서 공실을 받들지 않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조나라의 법은 문란해지고,

국법이 문란해지면 조나라는 약해집니다. 약해진 조나라를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오게 되면 군은 어디서

이와 같은 부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군과 같이 귀하신 분이 공실을 받들게 된다면  상하가 공평하게 되고,

상하가 공평하게 된다면 국력이 강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하게 되면 조나라의 사직은 공고하게 되어

군과 같은 귀한 공실의 인척을 천하의 그 누가 군을 가볍게 여기겠습니까?"라고 하자,  

평원군은 조사가 현인이라고 생각하여 조왕에게 조사의 일을 고하여 천거했다.

조왕이 조사를 등용하여 나라의 세금 걷는 일을 맡겼다.

세금을 걷는 일이 크게 공평하게 되어 백성들은 부유하게 되었고 국고가 재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秦伐韓,軍於閼與.  王召廉頗而問曰:「可救不?」 對曰:「道遠險狹,難救.」

又召樂乘而問焉,樂乘對如廉頗言.

又召問趙奢,奢對曰:「其道遠險狹,譬之猶兩鼠鬬於穴中,將勇者勝.」

王乃令趙奢將,救之.  兵去邯鄲三十里,而令軍中曰:「有以軍事諫者死.」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연여에 주둔하였다.

조왕이 염파를 불러 묻기를 : 한나라를 구할 수 있겠소? 없겠소?라고 하자. 

염파가 대답하기를 : " 연여는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길도 협소하니 구원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왕이 다시 악승(樂乘)을 불러 그 의견을 물었으나 염파와 같은 의견이었다.

또다시 조사를 불러 묻자, 조사가 대답하기를 : " 연여로 가는 길이 멀고 좁아 마치 두 마리의 쥐가 

좁은 굴속에서 서로 싸우는 형상이라 용기 있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자. 

조왕이 즉시 조사를 장수로 삼아 한나라를 구원하라고 했다.

조사가 군사를 이끌고 한단성을 나가 30리 되는 곳에 이르자, 행군을 멈추고 군중에 령을 내렸다.

​" 군사의 일로 나에게 간하는 자가 있다면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秦軍軍武安西,秦軍鼓譟勒兵,武安屋瓦盡振.  軍中候有一人言急救武安,趙奢立斬之.

堅壁,留二十八日不行,復益增壘.  秦閒來入,趙奢善食而遣之.

​[진나라의 군사들은 당시 무안(武安)12)의 서쪽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북은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며

군사들을  조련시키는데 무안 성내의 집들의 기왓장들이 진동했다.

이어 군중의 척후병 한 사람이 무안을 급히 구원해야 한다고 하자 조사는 그 군사를 잡아 목을 베었다.

조사는 단지 보루를 단단히 하고 28일 동안 머물며 단지 보루를 높이 쌓을 뿐이었다.

진나라의 사자가 조군의 정황을 염탐하기 조나라 진영으로 들어오자,

조사는 좋은 음식을 내어 그를 잘  대접한 다음 돌려보냈다.]

 

閒以報秦將,秦將大喜曰:「夫去國三十里而軍不行,乃增壘,閼與非趙地也.」

趙奢既已遣秦閒,卷甲而趨之,二日一夜至,今善射者去閼與五十里而軍.

軍壘成,秦人聞之,悉甲而至.

[진나라의 사자가 돌아가 그 대장에게 보고했다. 진군의 대장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  

" 조군이 도성을 떠나 30리 되는 곳에서 행군을 멈추고 보루를 높이고 있으니,

아마도 연여는 이미 조나라의 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의 첩자가 돌아가자 조사는 즉시 군사들의 갑옷을 벗게 한 후 그 뒤를 추격하여

1박 2일 꼬박 행군을 한 끝에 활을 잘 쏘는 군사들을 선발하여 연여에서 50리 되는 곳에 주둔시켰다.  

이윽고 영채가 완성되자, 진나라 군사들이 소식을 듣고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진군해 왔다.]

 

軍士許歷請以軍事諫,趙奢曰:「內之.」

許歷曰:「秦人不意趙師至此,其來氣盛,將軍必厚集其陣以待之. 不然,必敗.」

趙奢曰:「請受令.」 許歷曰:「請就鈇質之誅.」 趙奢曰:「胥後令邯鄲.」

許歷復請諫,曰:「先據北山上者勝,後至者敗.」

[허력(許歷)이란 군사 한 명이 군사의 일로 간할 일이 있다고 조사에게 접견을 간청하자,

조사는 말하기를 : “들이라.”라고 하였다.  

허력(許歷)이 말하기를 : " 진나라는 설마 조나라의 군사가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기세가 사나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병력을 집중하여 진지를 두텁게 포진시켜 그들의 공격에 대비하십시오.

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조군은 싸움에 필시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하자.  

조사가 대답하기를 : " 너의 조언을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허력(許歷)이 말하기를 : "저에게 부질형(鈇鑕刑)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자. 

조사가 대답하기를 : "이 일은 나중에 한단에 돌아가서 처리하겠다."라고 하였다  

허력이 다시 의견을 말하기를 : " 먼저 연여의 북산(北山)을 점령하는 측이 싸움에 이기고,

나중에 당도한 측은 싸움에서 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趙奢許諾,即發萬人趨之.  秦兵後至,爭山不得上,趙奢縱兵擊之,大破秦軍.

秦軍解而走,遂解閼與之圍而歸.  趙惠文王賜奢號為馬服君,以許歷為國尉.

趙奢於是與廉頗、藺相如同位.

[조사가 허락하고 즉시 1만 명의 군사를 선발하여 허력에게 주고 달려가 북산을 점령하도록 했다.  

이어서 진군이 나중에 당도하여 북산을 다투었으나 먼저 당도한 조군으로 인해 산으로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조사가 군사를 풀어 진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진군이 연여의 포위를 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조혜문왕이 조사에게 마복군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허력에게는 국위라는 벼슬을 내렸다.  

조사는 그 공로로 염파 및 인상여와 같은 대열에 서게 되었다.]

 

後四年,趙惠文王卒,子孝成王立.

七年,秦與趙兵相距長平,時趙奢已死,而藺相如病甐,趙使廉頗將攻秦,秦數敗趙軍,

趙軍固壁不戰.  秦數挑戰,廉頗不肯.  趙王信秦之閒. 

秦之閒言曰:「秦之所惡,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趙王因以括為將,代廉頗. 

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

趙王不聽,遂將之.

​[그리고 4년 후, 조혜문왕이 죽자 효성왕(孝成王)이 조왕으로 새로 섰다.

효성왕 7년 (기원전 259년), 진과 조나라의 대군이 장평에서 대치했다. 그때는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이 들어 위독했기 때문에 조나라는 염파를 장수로 삼아 진군을 막도록 했다.

진군에 의해 여러 차례 패배한 조군은 보루를 높이하고 굳게 지켰다.  

진군이 여러 번 싸움을 돋웠으나 염파는 결코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왕은 진나라 첩자의 말을 믿게 되었다.  

진나라 첩자가 조나라 시중에 말을 퍼뜨리기를 : "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조군의 대장이 되는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조왕은 그로 인해서 조괄을 조나라 대장으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게 했다.

인상여가 듣고 아뢰기를 : " 왕께서는 조괄의 명성만을 듣고 조군의 대장으로 삼으신 처사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전혀 없음)과 같은 처사이십니다.

조괄은 단지 자기 부친이 남겨 준 서책만을 읽고 실전에서의 임기응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조왕은 인상여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괄을 대장으로 삼아 전선으로 보냈다.]

 

趙括自少時學兵法,言兵事,以天下莫能當.  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 

括母問奢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

使趙不將括即已,若必將之,破趙軍者必括也.」

​[조괄은 어렸을 때부터 병법을 공부하여 병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호언했다.  

한 번은 자기 부친 조사와 군사에 관한 논쟁을 벌였는데 조사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사는 그런 조괄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괄의 모친이 그 이유를 묻자,

조사가 대답하기를 : " 군사의 일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오.

그러나 조괄은 너무나 쉽게 병사의 일을 생각하고 있소.  우리 조나라가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를 대장으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사를 망하게 하는 자는 필시 조괄이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及括將行,其母上書言於王曰:「括不可使將.」 王曰:「何以?」 

對曰:「始妾事其父,時為將,身所奉飯飲而進食者以十數,所友者以百數,

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受命之日,不問家事.  今括一旦為將,東向而朝,

軍吏無敢仰視之者,王所賜金帛,歸藏於家,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

王以為何如其父?父子異心,願王勿遣.」

[마침내 조괄이 조나라 군사들의 대장으로 임명되어 출정하려 하자, 조괄의 모친이 편지를 써서  

조왕에게 바쳤다 : "조괄을 우리 조나라 군사들의 대장으로 삼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자,

조왕이 묻기를 : " 어째서 그렇소?”라고 하였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 " 옛날 첩의 부군이 조나라의 장군이 되었을 때, 몸소 음식을 받들어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십 수 명에 달했고  친구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백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대왕과 종실에게 내린 상은

모두 군리들과 막료들에게 나누어주고 이윽고 왕명을 받아 전장에 나갈 때는 집안의 일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루아침에 장군이 된 괄(括)의 행동을 보니 왕명을 받자마자 동쪽을 향해 앉아 부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자 군리들은 아무도 감히 머리를 들고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왕께서 하사하신 

상금과 재물들은 모두 집으로 가지고 와서 창고에 쌓아두고는 매일 값이 싸고 좋은 전답이나 저택을 살펴보러  

나갔다가 사둘만한 것은 사곤 했었습니다. 대왕께서는 괄이 그 부친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몸들은 비록 부자지간이지만 그 마음은 같지 않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제 자식놈을 보내 조나라 군사들을  

지휘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王曰:「母置之,吾已決矣.」 括母因曰:「王終遣之,即有如不稱,妾得無隨坐乎?」王許諾. 

趙括既代廉頗,悉更約束,易置軍吏.

秦將白起聞之,縱奇兵,詳敗走,而絕其糧道,分斷其軍為二,士卒離心.

​[조왕이 말하기를 : "이 일은 이미 결정된 일이니 부인은 더 이상 관계치 마시오."라고 하자. 

이에 조괄의 모친이 아뢰기를 : " 대왕께서 정녕 괄을 대장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신다면,

만일 그가 그의 직무를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경우,  저를 연좌해서 죽음을 면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조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였다.

염파를 대신해서 조군 대장으로 부임한 조괄은 원래 염파가 정했던 군령들을 뜯어고치고 군리들은 모두 바꿨다.  

진군 대장 백기(白起)가 그간의 조군 진영의 정황을 듣고 별도의 기습부대를 보내 일부러 패주하는 척하면서  

조나라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여 조나라 군대를 둘로 나눔으로 군사들의 마음을 조괄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四十餘日,軍餓,趙括出銳卒自博戰,秦軍射殺趙括.  括軍敗,數十萬之眾遂降秦,秦悉阬之. 

趙前後所亡凡四十五萬.  明年,秦兵遂圍邯鄲,歲餘,幾不得脫.

賴楚、魏諸侯來救,乃得解邯鄲之圍.  趙王亦以括母先言,竟不誅也. 

[그 상태로 40여 일이 지나자 조군은 식량이 바닥나 굶주리게 되었다.

이에 조괄은 정병을 선발하여 진영에서 나와 진군과 육박전 전개하려고 했으나 진군은 활로 조괄을 죽였다.

싸움에 진 40만에 당하는 조군은 진군에게 투항했다.

진군은 항복한 40만의 조군을 모두 산채로 매장해서 죽였다. 조나라는 이 싸움으로 모두 45만의 군사를 잃었다.

다음 해, 진군은 장평에서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조나라 도성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위(魏)와 초(楚) 

두 나라가 보내 준 구원군의 덕분으로 간신히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고 한단성은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왕은 장평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괄의 모친을 옛날 약속을 지켜 연좌하여 죽이지 않았다.]

 

自邯鄲圍解五年,而燕用栗腹之謀,曰「趙壯者盡於長平,其孤未壯.」舉兵擊趙.

趙使廉頗將,擊,大破燕軍於鄗,殺栗腹,遂圍燕.  燕割五城請和,乃聽之.

趙以尉文封廉頗為信平君,為假相國.

​[한단의 포위가 풀리고 5년 후에, 연나라의 사자로 조나라에 다녀 온 율복(栗腹)이 연왕에게 계책을 말하기를 :

" 조나라의 장정은 모두 장평의 싸움에서 죽고 조나라에는 아직 성인이 안 된 고아들만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왕은 율복의 계책을 받아들여 조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조왕은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연군을 막도록 했다.

염파는 호성(鄗城)에서 연군을 대파하고 율복을 죽인 다음 계속 진격하여 연나라의 도성을 포위했다.  

연나라가 5개의 성을 조나라에 할양하고 강화를 청하자 비로소 싸움을 멈추었다.  

조왕이 염파를 위문(尉文)에 봉하고 신평후(信平侯)라 봉호를 내리고 상국 대리로 삼았다.]  

廉頗之免長平歸也,失勢之時,故客盡去.  及復用為將,客又復至.  廉頗曰:「客退矣!」 

客曰:「吁!君何見之晚也?夫天下以市道交,君有勢,我則從君,君無勢則去,此固其理也,

有何怨乎?」 居六年,趙使廉頗伐魏之繁陽,拔之.

[염파가 장평의 싸움에서 패하여 면직되어 권세를 잃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의 문객들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다시 그가 장군으로 임용되자 문객들이 다시 돌아왔다. 분개한 염파가 말하기를 : " 객들은 모두 돌아가라."하자.

이에 문객 중의 한 명이 말하기를 :" 아! 장군께서는 어찌 그리 세속의 흐름에 그리 둔하십니까?

무릇 천하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듯이 교제를 합니다. 장군께서 권세가 있으면 우리는 장군을 따르는 것이고, 

장군께서 세력을 잃으니 그 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온데 어찌 그것을 원망하시고

계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6년, 조나라는 염파에게 위나라의 번양()을 공격하게 하였고,

염파는 그곳을 점령하였다.]

 

趙孝成王卒,子悼襄王立,使樂乘代廉頗.  廉頗怒,攻樂乘,樂乘走.  廉頗遂奔魏之大梁.

其明年,趙乃以李牧為將而攻燕,拔武遂、方城.  廉頗居梁久之,魏不能信用.

趙以數困於秦兵,趙王思復得廉頗,廉頗亦思復用於趙.  趙王使使者視廉頗尚可用否.

​[조효성왕이 죽고 그의 아들 도양왕(悼襄王)이 새로 조왕의 자리에 올랐다.

도양왕은 염파를 면직시키고 악승을 대신 대장으로 임명했다. 염파가 노하여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다. 

염파는 위나라의 대량으로 달아났다.  다음 해에 조나라는 이목(李牧)을 장수로 삼아 연나라를 공격했다.

이목은 연나라의 무수(武遂)와 방성을 점령했다. 염파가 대량에 오래 머물렀으나 위나라는 염파를 기용하지 

않았다. 그때 진나라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조왕은 염파를 다시 기용하려고 생각했다.  

조왕이 사자를 보내 염파를 대장으로 기용할 수 있는지 살피게 하였다.]

 

廉頗之仇郭開多與使者金,令毀之.

趙使者既見廉頗,廉頗為之一飯斗米,肉十斤,被甲上馬,以示尚可用.

趙使還報王曰:「廉將軍雖老,尚善飯,然與臣坐,頃之三遺矢矣.」趙王以為老,遂不召. 

楚聞廉頗在魏,陰使人迎之.  廉頗一為楚將,無功,曰:「我思用趙人.」廉頗卒死于壽春.

[염파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곽개(郭開)가 사자에게 뇌물을 주어 염파를 헐뜯게 하였다.

조나라 사자를 접견한 염파는 그 앞에서 한 말의 쌀로 짓은 밥을 먹고 고기 10근을 먹어 치운 후에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른 후에 그이 근력을 자랑하며 아직 싸움에 나갈 수 있다고 과시했다.

그러나 조왕의 사자는 돌아와 보고하기를 : " 염파 장군은 비록 연로했으나 식사도 많이 하고 근력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앉아 있는 동안 한 식경 동안에 화장실을 세 번이나 다녀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왕은 염파가 이미 연로하여 싸움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르지 않았다.  

염파가 위나라에 체재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초나라가 아무도 몰래 사람을 보내 염파를 데려갔다.  

염파는 초나라의 장수가 되었으나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말하기를 :

" 나는 그저 조나라 군사들을 지휘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염파는 결국은 초나라의 수춘에서 죽었다.]

 

李牧者,趙之北邊良將也。常居代鴈門,備匈奴.  以便宜置吏,市租皆輸入莫府,為士卒費.

日擊數牛饗士,習射騎,謹烽火,多閒諜,厚遇戰士.

為約曰:「匈奴即入盜,急入收保,有敢捕虜者斬.」 匈奴每入,烽火謹,輒入收保,不敢戰.

[이목(李牧)은 조나라의 북쪽 변경을 지키는 명장이었다. 항상 대(代) 땅의 안문(雁門)에 늘상 거주하면서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는 형편에 맞추어 관리를 배치하고 시정의 세금은 모두 막부(莫府)의 수입으로 잡아  

모두 사졸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했다. 그는 날마다 소를 몇 마리씩 잡아 군사들을 먹이고 말타기와

활쏘는 연습을 시켰으며 봉화대를 요소마다 설치하고 많은 첩자들을 풀어놓고 전사들의 대우를 아주 후하게 

했다. 병사들에게 령을 내리기를 : " 흉노가 들어와 노략질을 해 가면 군사들은 모두 보루로 들어가 지켜야 하며,  

만일 멋대로 흉노를 공격하여 포로로 잡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흉노가 쳐들어 올 때면 항상 봉화를 신속히 올린 후에 재빨리 요새 안으로 들어가 

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다.]

 

如是數歲,亦不亡失.  然匈奴以李牧為怯,雖趙邊兵亦以為吾將怯.  趙王讓李牧,李牧如故.

趙王怒,召之,使他人代將.  歲餘,匈奴每來,出戰.  出戰,數不利,失亡多,邊不得田畜.

復請李牧.  牧杜門不出,固稱疾.

[이와 같이 몇 년을 지내자 조나라의 변경지방은 아무 것도 잃지 않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흉노는 이목이 겁이 많은 장수로 생각하게 되었고, 조나라의 변방을 지키던 군사들도 

역시 자기들의 대장이 겁이 많은 대장이라고 여겼다.

이에 조왕이 이목을 질책했으나 이목은 개의치 않고 예전과 같이 행했다.

조왕이 노하여 이목을 소환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흉노가 쳐들어오면 출전해서 맞이해 싸웠다.

그러나 조나라의 군사들의 수효는 항상 적었기 때문에 많은 물적 인적 손실을 입게 되어

조나라의 북쪽 변경에서는 결국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군사들은 이목을 다시 자기들의 장수로 보내달라고 조왕에게 청했다.

이목은 한단성에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몸에 병이 났다고 하면서 대 땅으로 부임하려고 하지 않았다.]

 

趙王乃復彊起使將兵.  牧曰:「王必用臣,臣如前,乃敢奉令.」王許之.

李牧至,如故約.  匈奴數歲無所得.  終以為怯.  邊士日得賞賜而不用,皆願一戰.

於是乃具選車得千三百乘,選騎得萬三千匹,百金之士五萬人,彀者十萬人,悉勒習戰.

大縱畜牧,人民滿野. 

[그러나 조왕은 강제로 북쪽 변경의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이에 이목이 조왕에게 말하기를 : 

" 대왕께서 신을 다시 쓰신다면, 신은 예전처럼 다스릴 것이며, 이것을 허락하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하자. 

조왕이 이목의 청을 허락하였다. 이목이 다시 북쪽 변경 땅에 와서 옛날에 자기가 마련한 방식대로 다스렸다.

그러자 흉노는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얻어 갈 수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이목이 겁 많은 장수라고 생각했다.

변방의 군사들은 매일 상을 받고 후한 대접을  받음에서 싸움에 동원되지 않자, 모두가 한 번 싸워보기를 원했다.

그러자 이목은 즉시 병거 1천 3백 량, 기병 1만 3천 명, 큰 공을 세운 용사  5만 명, 활을 잘 쏘는 군사 10만 명을

선발해서 한 부대로 조직하여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가축을 방목하고 백성들을 들판에 가득 차게 했다.]

 

匈奴小入,詳北不勝,以數千人委之.  單于聞之,大率眾來入.

李牧多為奇陳,張左右翼擊之,大破殺匈奴十餘萬騎.

滅襜襤,破東胡,降林胡,單于奔走.  其後十餘歲,匈奴不敢近趙邊城. 

[소규모의 흉노가 쳐들어오자 거짓으로 싸움에 패한 척 하며  수천 명의 군사들을 버려두고 도망치도록 했다.

흉노의 선우(單于)가 그 소식을 듣고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목은 적들이 예상치 못한 기이한 진법으로 많은 기병들을 포진시킨 후에 그 좌우의 양익을 펼쳐 반격을 가하자,  

10여 만 기의 흉노족 기병을 죽였다. 이목의 조군은 계속 흉노의 땅으로 진격하여 담람(襜襤)이라는

흉노 부족을 멸하고 동호(東胡)를 무찌르고 임호(林胡)의 항복을 받아냈다.

선우는 북쪽 멀리 달아나 그후 10여 년 동안은 감히 조나라의 국경을 범하지 못했다.]

  

趙悼襄王元年,廉頗既亡入魏,趙使李牧攻燕,拔武遂、方城.

居二年,龐煖破燕軍,殺劇辛. 

後七年,秦破殺趙將扈輒於武遂,斬首十萬.

趙乃以李牧為大將軍,擊秦軍於宜安,大破秦軍,走秦將桓齮.  封李牧為武安君.

居三年,秦攻番吾,李牧擊破秦軍,南距韓、魏. 

[조도양왕 원년 (기원전 244년) 염파가 위나라로 망명하자 조나라는 이목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목은 연나라의 무수(武遂)와 방성을 점령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나라의 방훤(龐煖)이 다시 연군을 격파하고, 그 장수 극신을 죽였다.

그리고 7년 후에 진군이 조장 호첩(扈輒)을 무수에서 죽이고 그 군사 10만의 목을 베었다.  

조나라는 이목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군을 의안(宜安)25)에서 격파하자 진장 환의(桓齮)는 도망갔다.  

이에 조나라는 이목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했다. 그후 3년 후에 진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파오(番吾)를 공격하자  

이목은 다시 진군을 무찌르고 남쪽으로는 한(韓)과 위(魏)의 군사들을 막았다.]

 

趙王遷七年,秦使王翦攻趙,趙使李牧、司馬尚御之.

秦多與趙王寵臣郭開金,為反閒,言李牧、司馬尚欲反. 

趙王乃使趙蔥及齊將顏聚代李牧.  李牧不受命,趙使人微捕得李牧,斬之.  廢司馬尚. 

後三月,王翦因急擊趙,大破殺趙蔥,虜趙王遷及其將顏聚,遂滅趙. 

[조왕 천(遷) 7년 (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왕전(王翦)을 대장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을 보내 진군을 막도록 했다. 진나라가 조왕의 총신 곽개(郭開)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반간계를 행하여 이목과 사마상이 장차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왕이 조총(趙葱)과 제나라 출신의 장군 안취를 보내 두 사람을 대신하게 했으나 이목은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조왕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이목을 정탐하게 하고는 이목을 체포하여 죽이고 사마상의 병권을 빼앗았다.  

3달 후 왕전은 기회를 잡아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군을 대파하고 조총은 죽이고,

조왕 천과 그의 장군 안취를 사로잡아 결국은 조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太史公曰:知死必勇,非死者難也,處死者難。方藺相如引璧睨柱,及叱秦王左右,勢不過誅, 

然士或怯懦而不敢發.  相如一奮其氣,威信敵國,退而讓頗,名重太山,其處智勇,可謂兼之矣!

[태사공이 말한다.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난다.

이는 죽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손에 들고 기둥을 노려보며 진왕과 그 신하들을 질책할 때,

그는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비 중에는 혹 두려워하여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인상여가 한 번 그 용기를 떨치자 그 위엄은 적국에 미치고,

다시 조나라에 돌아가서는 염파에서 양보했으니 그 이름은 태산보다도 도 중하게 되었다.

인상여야 말로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