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29. 五宗世家

第 二十九. 五宗世家(오종세가)

덕치/이두진 2021. 7. 13. 17:53

 

             史記 世家

 

    第 二十九.  五宗世家(오종세가)

孝景皇帝子凡十三人為王,而母五人,同母者為宗親.  栗姬子曰榮、德、閼于.

程姬子曰餘、非、端.  賈夫人子曰彭祖、勝.  唐姬子曰發.  王夫人兒姁子曰越、寄、乘、舜.

[경제(景帝)의 아들 열세 명이 모두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들은 각각 다섯 어머니에게서 나온 자식들이었다.
같은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을 일족(一族)으로 친다.

율희(栗姬)의 아들은 유영(劉榮), 유덕(劉德), 유알우(劉閼于)이고,

정희(程姬)의 아들은 유여(劉餘), 유비(劉非), 유단(劉端)이다.
가부인(賈夫人)의 아들은 유팽조(劉彭祖), 유승(劉勝)이며,

당희(唐姬)의 아들은 유발(劉發)이고,
왕부인(王夫人) 아후(兒姁)의 아들은 유월(劉越), 유기(劉寄), 유승(劉乘), 유순(劉舜)이다.]

 

河閒獻王德,以孝景帝前二年用皇子為河閒王.  好儒學,被服造次必於儒者.  山東諸儒多從之游.

二十六年卒,子共王不害立.  四年卒,子剛王基代立.  十二年卒,子頃王授代立.

[하간(河間)의 헌왕(獻王) 유덕은 경제 전원(前元) 2년(기원전 155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하간왕에 봉해졌다.
그는 유학을 좋아해서 복장과 행동에서 모두 유자(儒者)를 그 표준으로 삼았다.

산동 지역의 많은 유생들이 모두 그를 따르고 그와 교유했다.
그가 재위 2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공왕(共王) 유불해(劉不害)가 왕위를 계승했다.
공왕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강왕(剛王) 유기(劉基)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강왕이 재위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경왕(頃王) 유수(劉授)가 왕위를 계승했다.]

 

臨江哀王閼于,以孝景帝前二年用皇子為臨江王.  三年卒,無後,國除為郡.

臨江閔王榮,以孝景前四年為皇太子,四歲廢,用故太子為臨江王.

[임강(臨江)의 애왕(哀王) 유알우는 경제 전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임강왕에 봉해졌다.
그는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후손이 없어 제후국이 취소되고 군(郡)으로 바뀌었다.
임강의 민왕(閔王) 유영은 경제 전원 4년(기원전 153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4년 후 폐출되어 임강 태자의 원래 신분에 의해서 임강왕에 봉해졌다.]

 

四年,坐侵廟壖垣為宮,上徵榮.  榮行,祖於江陵北門.  既已上車,軸折車廢.

江陵父老流涕竊言曰:「吾王不反矣!」榮至,詣中尉府簿. 中尉郅都責訊王,王恐,自殺.

葬藍田.  燕數萬銜土置冢上,百姓憐之. 

榮最長,死無後,國除,地入于漢,為南郡.  右三國本王皆栗姬之子也.

[민왕 4년, 종묘의 담장 밖 공터를 침범해 궁실을 증축한 죄로 황제가 그를 소환했다.
유영은 강릉성(江陵城) 북문에서 노신(路神)에게 제를 올리고 길을 떠나려고 수레에 올랐는데

갑자기 굴대가 부러지고 수레가 망가졌다. 강릉의 노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은밀히 이야기하기를 : 

“우리 왕은 이제 다시는 못 돌아오실 거야.”라고 하였다. 유영은 경성에 도착해서 중위부로 가서 심문을 받았다.

중위(中尉) 질도(郅都)가 엄중히 심문하자 놀란 나머지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그를 남전(藍田)에 묻었는데 수만 마리의 제비들이 흙을 물어다가 그의 묘 위에 놓았고 백성들도 그를 애도했다.]

유영은 경제의 맏아들로, 그가 죽은 다음 후손이 없어서 제후국은 취소되었고 그 영지는 조정에 귀속되어

남군(南郡)으로 바뀌었다. 이상의 세 나라의 제1대 왕들은 모두 율희의 아들들이다.] 

魯共王餘,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淮陽王.  二年,吳楚反破後,以孝景前三年徙為魯王.

好治宮室苑囿狗馬.  季年好音,不喜辭辯.  為人吃.

[노(魯)나라의 공왕(共王) 유여는 경제 전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재위 이듬해인 경제 전원 3년, 오초 7국의 반란이 평정된 뒤 다시 노왕(魯王)으로 봉해졌다.
그는 궁실과 정원의 축조, 개와 말의 사육을 좋아했으며 만년에는 음악을 좋아하였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말을 더듬기도 하였다.]

 

二十六年卒,子光代為王.  初好音輿馬;晚節嗇,惟恐不足於財.

江都易王非,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汝南王.

吳楚反時,非年十五,有材力,上書願擊吳.  景帝賜非將軍印,擊吳.

吳已破,二歲,徙為江都王,治吳故國,以軍功賜天子旌旗.

[공왕이 재위 2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광(劉光)이 왕위를 계승했다.

당초 그는 음악과 수레와 말을 좋아했으나, 만년에는 인색해져서 그저 재물에만 탐닉했다.
강도(江都)의 역왕(易王) 유비(劉非)는 경제 전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여남왕(汝南王)에 봉해졌다.
오초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비는 나이가 열다섯으로 기력이 넘쳐서 오나라를 공격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경제가 유비에게 장군 인신(印信)을 주면서 오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오나라가 멸망된 지 2년 만에 다시 강도왕(江都王)으로 봉해져서 오왕 유비(劉濞)의 옛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고,

군사적 공훈에 힘입어 황제로부터 깃발을 하사받았다.]

 

元光五年,匈奴大入漢為賊,非上書願擊匈奴, 上不許. 非好氣力,治宮觀,招四方豪桀,驕奢甚.

立二十六年卒,子建立為王.  七年自殺.

[무제(武帝) 원광(元光) 5년(기원전 130년), 흉노가 한나라의 변경을 대거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유비(劉非)는 흉노를 공격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는 힘자랑을 즐겼고 궁실 축조를 좋아했으며 사방의 호걸을 모으고 교만과 사치를 일삼았다.
그가 재위 26년 만에 죽자, 아들 유건(劉建)이 왕위를 계승했다. 유건은 재위 7년 만에 자살했다.]

 

淮南、衡山謀反時,建頗聞其謀.

自以為國近淮南,恐一日發,為所并,即陰作兵器,而時佩其父所賜將軍印,載天子旗以出.

易王死未葬,建有所說易王寵美人淖姬,夜使人迎與姦服舍中.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이 모반을 일으켰을 때 유건은 그들의 음모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가 회남에 인접해 있어서 회남왕이 일을 일으키는 날에는 병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밀히 병기를 제조했고, 황제가 자기 부친에게 하사한 장군 인신을 늘 패용했으며,

황제의 정기를 수레에 꽂고 다녔다. 역왕이 죽어 미처 안장도 되기 전에 유건은 역왕이 총애했던

미인 요희(淖姬)에게 반해서 야밤에 사람을 보내 요희를 빈소로 불러 관계를 가졌다.]

 

及淮南事發,治黨與頗及江都王建.  建恐,因使人多持金錢,事絕其獄.

而又信巫祝,使人禱祠妄言.  建又盡與其姊弟姦.  事既聞,漢公卿請捕治建.

天子不忍,使大臣即訊王.  王服所犯,遂自殺.  國除,地入于漢,為廣陵郡.

[회남왕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조정에서는 회남왕의 무리들을 징벌했는데 이때 강도왕(江都王) 유건도

다소 연루되어 있었다. 유건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사람을 시켜 많은 재물로써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는 또 무축(巫祝)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제사와 기도를 드렸고 황당무계한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유건은 또 자신의 모든 여자형제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이런 추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공경대신들은 유건을 잡아다가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황제는 참을 수가 없어 대신을 파견해서 그를 심문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살했다.

마침내 제후국이 취소되었고 영지는 한 조정에 귀속되어 광릉군(廣陵郡)으로 바뀌었다.]

 

膠西于王端,以孝景前三年吳楚七國反破後,端用皇子為膠西王.

端為人賊戾,又陰痿,一近婦人,病之數月.

而有愛幸少年為郎.  為郎者頃之與後宮亂,端禽滅之,及殺其子母.

數犯上法,漢公卿數請誅端,天子為兄弟之故不忍,而端所為滋甚.

[교서(膠西)의 우왕(于王) 유단은 경제 전원 3년에 오초 7국의 난이 평정된 후 황자의 신분으로 교서왕에 봉해졌다.

유단은 성격이 매우 포악했으며, 또 음위병(陰痿病)이 있어서 여자와 한 번 접촉하면 몇 개월을 앓아누웠다.
그는 자신이 총애하는 한 젊은이를 시종관에 임명했는데 이 시종관이 금방 후궁과 난잡한 행동을 하자

유단은 그를 잡아 처형했고, 후궁과 그 사이에서 난 아들까지 죽였다.

유단이 여러 차례 조정의 법령을 어겼으므로 조정의 공경대신들은 거듭 그를 주살하게 청원했다.
황제인 무제는 형제라는 관계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유단의 범법행위는 더욱 심해졌다.]

 

有司再請削其國,去太半.  端心慍,遂為無訾省.  府庫壞漏盡,腐財物以巨萬計,終不得收徙.

令吏毋得收租賦.  端皆去衛,封其宮門,從一門出游.  數變名姓,為布衣,之他郡國.

[담당 관원들이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영지를 박탈하라고 요청해 영지의 절반 이상이 몰수되었다.
내심 몹시 화가 난 유단은 마침내 제후국내의 어떤 일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창고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엄청난 재물이 훼손되었지만 전혀 이를 수습하지 않았다.

그는 또 관리들에게 조세를 거두지 말라고까지 명령했다.
유단은 또 경호 인원을 다 물리치고 궁문(宮門)을 폐쇄하고는 한 쪽 문으로만 나다녔다.
그는 여러 차례 성명을 바꾸고 평민으로 변복해 다른 군(郡)과 다른 나라(國)를 왕래하였다.]

 

相、二千石往者,奉漢法以治,端輒求其罪告之,無罪者詐藥殺之.

所以設詐究變,彊足以距諫,智足以飾非.

相、二千石從王治,則漢繩以法.  故膠西小國,而所殺傷二千石甚眾.

立四十七年,卒,竟無男代後,國除,地入于漢,為膠西郡.  右三國本王皆程姬之子也.

[교서에 파견된 상국이나 2천석 급(二千石級) 관리 가운데 만약 조정의 법령에 따라 정사를 처리하는 자가 있으면

유단은 그의 죄를 찾아내서 조정에다 처벌을 요구했다.

만약 죄를 발견하지 못하면 기만적인 술수로써 그들을 죽였다. 그의 기만술수는 무궁무진했다.

그는 워낙 고집이 세어서 남들의 권유는 완전히 무시했고, 지모가 뛰어나 자신의 과오를 잘 감추었다.
상국이나 2천석 급 관리 중에서 그의 명령에 의해서만 정사를 처리하는 자는 조정에서 곧 의법 처단되었다.
따라서 교서는 작은 나라였지만 피살되었거나 피해를 입은 2천석 급 관리가 매우 많았다.
우왕은 재위 47년 만에 죽었는데 끝내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어서 제후국의 지위가 취소되었고,

영지는 한 조정에 귀속되어 교서군(膠西郡)이 되었다.

이상의 세 나라의 제1대 왕들은 모두 정희의 아들들이다.]

 

趙王彭祖,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廣川王.  趙王遂反破後,彭祖王廣川.

四年,徙為趙王.  十五年,孝景帝崩.  彭祖為人巧佞卑諂,足恭而心刻深.

好法律,持詭辯以中人.  彭祖多內寵姬及子孫.

조왕(趙王) 유팽조는 경제 전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광천왕(廣川王)에 봉해졌다.
조왕 유수(劉遂)의 반란이 평정된 이후에도 유팽조는 여전히 광천에서 왕 노릇을 했는데

4년 만에 조왕으로 봉해졌다.
재위 15년이 되는 해에 경제가 붕어했다. 유팽조는 사람됨이 간특해서 아첨을 잘했다.
겉으로는 아주 공손했지만 속마음은 모질고 잔인했다.

그는 법률을 좌지우지했고 궤변으로 남들을 중상모략했다.  유팽조에게는 총애하는 첩과 자손이 많았다. ]

 

相、二千石欲奉漢法以治,則害於王家.  是以每相、二千石至,彭祖衣皁布衣,自行迎,

除二千石舍, 多設疑事以作動之,得二千石失言,中忌諱,輒書之.

二千石欲治者,則以此迫劫;不聽,乃上書告,及汙以姦利事.

[상국이나 2천석 급 관리가 조정의 법령에 따라서 정사를 처리하면 그것은 조왕의 가문에게는 불리했다.
그래서 매번 조정에서 2천석 급 관리를 파견해 오면 유팽조는 노복이 입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직접 마중을 나갔으며 2천석 급 관리의 거처를 청소해 주었다.
그는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제기해 상대방의 답변을 들었는데 이때 만약 2천석 급 관리가 실언해서

조정의 금기를 어기는 날에는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 2천석 급 관리가 법대로 자기 영토를 다스리려고 하면

것을 가지고 그들을 협박했다. 만약 그들이 협박해도 듣지 않으면 조정에 상소해서 고발했고

또 상대방이 사욕을 위해서 사악한 방법을 취했다는 죄명을 씌워 무고했다.]

 

彭祖立五十餘年,相、二千石無能滿二歲,輒以罪去,大者死,小者刑,以故二千石莫敢治.

而趙王擅權,使使即縣為賈人榷會,入多於國經租稅.

以是趙王家多金錢,然所賜姬諸子,亦盡之矣.

[유팽조가 재위한 50여 년 동안 상국이나 2천석 급 관리 가운데 누구도 임기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늘 범죄 혐의로 직위를 잃었다. 중죄인은 처형되었고 경미한 자도 처벌받았으며,

이 때문에 2천석 급 관리 중 아무도 감히 조(趙)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조왕만이 혼자서 대권을 휘둘렀고,
그는 사람을 각 현(縣)으로 파견해서 상업에 종사하게 해 독점 경영으로 이익을 취했는데

그 수익이 조나라의 조세 수입을 능가할 정도였다.

따라서 조왕의 가문에는 재산이 많았으나 이 재산을 모두 첩과 자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깡그리 탕진해 버렸다.]

 

彭祖取笔江都易王寵姬王建所盜與姦淖姬者為姬,甚愛之.

彭祖不好治宮室、禨祥,好為吏事.  上書願督國中盜賊.

常夜從走卒行徼邯鄲中.  諸使過客以彭祖險陂,莫敢留邯鄲.

[유팽조는 과거 강도(江都)의 역왕(易王)의 애첩, 즉 유건이 빼앗아 관계를 가졌던 요희를 첩으로 삼아

그녀를 몹시 총애했다. 유팽조는 궁실 축조나 귀신에게 복을 비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하급 관원들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직접 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조정에 상소해 나라 안의 도적들을 다스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주 야밤에 군사들을 데리고 한단(邯鄲) 성내를 순시했다.
다른 군(郡)과 나라(國)의 사자(使者)나 과객들은 유팽조의 사악한 횡포 때문에 감히 한단에 머물지 못했다.]

 

其太子丹與其女及同產姊姦,與其客江充有卻.  充告丹,丹以故廢.  趙更立太子.

中山靖王勝,以孝景前三年用皇子為中山王.

十四年,孝景帝崩.  勝為人樂酒好內,有子枝屬百二十餘人.

常與兄趙王相非,曰:「兄為王,專代吏治事.  王者當日聽音樂聲色.」

趙王亦非之,曰:「中山王徒日淫,不佐天子拊循百姓,何以稱為藩臣!」

[그의 태자 유단(劉丹)은 이복 누이들 및 동복(同腹) 누나와도 관계를 가졌다.
유단이 그의 문객 강충과 틈이 생겨 강충이 유단을 고발함으로써 유단은 폐출되었고 조나라는 다시 태자를 

옹립했다. 중산(中山)의 정왕(靖王) 유승은 경제 전원 3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졌다.

재위 14년 때 경제가 붕어했다. 유승은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자손이 120여 명이 되었다.
그는 늘 형 조왕(趙王)을 비난하며 말하기를 : “형님은 국왕으로서 매양 하급 관리나 하는 일만 하는데

국왕이라면 당연히 매일 음악을 듣고 여자나 즐겨야 한다.”라고 하자,
조왕도 그를 비난하며 말하기를 : “중산왕은 날마다 향락만 누릴 뿐 황제를 도와 백성을 돌보지 않으니

어찌 제후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立四十二年卒,子哀王昌立.  一年卒,子昆侈代為中山王.  右二國本王皆賈夫人之子也.

長沙定王發,發之母唐姬,故程姬侍者.

景帝召程姬,程姬有所辟,不願進,而飾侍者唐兒使夜進.

上醉不知,以為程姬而幸之,遂有身.  已乃覺非程姬也.  及生子,因命曰發.

[유승이 재위 42년 만에 죽자, 아들 애왕(哀王) 유창(劉昌)이 왕위를 계승했다.

유창이 재위 1년 만에 죽자, 그 아들 유곤치(劉昆侈)가 중산왕이 되었다.
이상의 두 나라의 제1대 왕들은 모두 가부인의 아들들이다.
장사(長沙)의 정왕(定王)은 유발이다. 유발의 모친은 당희(唐姬)로서 원래 정희(程姬)의 시녀였다.
경제가 정희를 불렀을 때 정희는 마침 월경중이어서 나아가지 않고 시녀인 당아(唐兒)를 분장시켜 자기 대신

들여보냈다. 황제가 술이 취해서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가 정희인 줄만 알고 일을 치렀는데 임신을 했다.
그 뒤에야 정희가 아님이 발각되었다. 그녀가 아들을 낳자 그 아이의 이름을 유발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長沙王.  以其母微,無寵,故王卑溼貧國.

立二十七年卒,子康王庸立. 二十八年,卒,子鮒鮈立為長沙王.  右一國本王唐姬之子也.

유발은 경제 전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장사왕(長沙王)이 되었다.

그는 모친의 신분이 낮아 총애를 받지 못했기에 저습하고 궁핍한 왕국에 봉해졌다.
유발이 재위 27년 만에 죽자 아들 강왕(康王) 유용(劉庸)이 왕위를 계승했다.

유용이 재위 28년 만에 죽자 아들 유부구(劉鮒鮈)가 장사왕이 되었다.
위의 나라의 제1대 왕은 당희의 아들이다.]

 

廣川惠王越,以孝景中二年用皇子為廣川王.  十二年卒,子齊立為王.

齊有幸臣桑距.  已而有罪,欲誅距,距亡,王因禽其宗族.

距怨王,乃上書告王齊與同產姦.  自是之後,王齊數上書告言漢公卿及幸臣所忠等.

[광천(廣川)의 혜왕(惠王) 유월은 경제 중원(中元) 2년(기원전 148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광천왕에 봉해졌다.
그가 재위 12년 만에 죽자 아들 유제(劉齊)가 왕위를 계승했다.

유제에게는 총애하는 신하 상거(桑距)가 있었는데 후일 상거가 죄를 지었기로 유제가 그를 주살하려고 했다.
이에 상거는 도망을 쳤고 유제는 그의 가족을 체포했다.

상거는 유제를 원망하여 상소를 올려 유제가 친누이들과 관계를 가졌다고 고발했다.
이후 유제는 여러 차례 상소해 조정의 공경대신과 총신(寵臣) 소충(所忠) 등을 고발했다.]

 

膠東康王寄,以孝景中二年用皇子為膠東王.  二十八年卒.

淮南王謀反時,寄微聞其事,私作樓車鏃矢戰守備,候淮南之起.  及吏治淮南之事,辭出之.

寄於上最親,意傷之,發病而死,不敢置後,於是上聞.

[교동(膠東)의 강왕(康王) 유기(劉寄)는 경제 중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교동왕에 봉해졌다.
그는 재위 28년 만에 죽었다. 회남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기는 이 일에 대해서 다소나마 들은 것이 있어서
은밀히 전차와 화살촉을 만들어 방어태세를 다 갖추어 놓고 회남왕의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일에 조정 관리가 회남왕 사건을 심리하던 중 공술(供述) 내용이 유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유기는 황제와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기 때문에 이 일로 마음속에서 고통을 겪다가 끝내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후계자도 이 일 때문에 정해놓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이 황제에게 알려졌다.]

寄有長子者名賢,母無寵;少子名慶,母愛幸,寄常欲立之,為不次,因有過,遂無言.

上憐之,乃以賢為膠東王奉康王嗣,而封慶於故衡山地,為六安王.

膠東王賢立十四年卒,謚為哀王.  子慶為王.  六安王慶,以元狩二年用膠東康王子為六安王.

[유기에게는 맏아들 유현(劉賢)이 있었지만 그의 모친은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작은아들 유경(劉慶)의 모친은 총애를 받고 있었다. 유기는 항상 유경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우고

싶어했지만 순서가 맞지 않은 데에다 자신에게 과오도 있었던 터라 이를 감히 입 밖에 꺼내지를 못했는데,
황제는 이를 동정해 유현을 교동왕으로 봉해서 강왕의 후계자로 삼고,

또 유경을 과거 형산왕(衡山王)의 영지에 봉해서 육안왕(六安王)으로 삼았다.
교동왕 유현이 재위 14년 만에 죽자 시호를 애왕(哀王)이라고 했고 아들 유경(劉慶)이 왕위를 계승했다.
육안왕 유경은 무제 원수(元狩) 2년(기원전 121년)에 교동의 강왕의 왕자 신분으로 육안왕에 봉해졌다.]

 

清河哀王乘,以孝景中三年用皇子為清河王.  十二年卒,無後,國除,地入于漢,為清河郡.

常山憲王舜,以孝景中五年用皇子為常山王.

舜最親,景帝少子,驕怠多淫,數犯禁,上常寬釋之.  立三十二年卒,太子勃代立為王.

[청하(淸河)의 애왕(哀王) 유승은 경제 중원 3년(기원전 147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청하왕(淸河王)이 되었다.
그는 재위 12년 만에 죽었는데 후손이 없어서 제후국은 취소되었고 영지는 한 조정에 귀속되어

청하군(淸河郡)으로 바뀌었다.

상산(常山)의 헌왕(憲王) 유순은 경제 중원 5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상산왕(常山王)에 봉해졌다.
유순은 황제와의 관계가 아주 친밀했는데 막내아들로서 교만한데다가 음란했다.
누차 법을 어겼지만 황제가 늘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가 재위 32년 만에 죽자 태자 유발(劉勃)이 왕위를 계승했다.]

 

初,憲王舜有所不愛姬生長男棁.  棁以母無寵故,亦不得幸於王.

王後修生太子勃.  王內多,所幸姬生子平、子商,王后希得幸.

及憲王病甚,諸幸姬常侍病,故王后亦以妒媢不常侍病,輒歸舍.

醫進藥,太子勃不自嘗藥,又不宿留侍病.

[당초 헌왕 유순에게는 그가 총애하지 않는 첩이 낳은 맏아들 유탈(劉梲)이 있었다.
그 모친이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탈도 헌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헌왕의 왕후 수(脩)는 태자 유발을 낳았다.

헌왕에게는 첩이 아주 많았는데 그가 총애하는 첩이 유평(劉平), 유상(劉商)을 낳았기에

왕후는 좀처럼 헌왕의 총애를 얻지 못했다. 헌왕의 병이 위독해지자 많은 첩들이 병시중을 들었지만

왕후는 질투심 때문에 문병이나 간호를 하지 않고 늘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의생이 약을 올려도 태자 유발은 자신이 직접 먼저 먹어본다거나 밤새워 간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及王薨,王后、太子乃至.  憲王雅不以長子棁為人數,及薨,又不分與財物.

郎或說太子、王后,令諸子與長子棁共分財物,太子、王后不聽.  太子代立,又不收恤棁.

棁怨王后、太子.  漢使者視憲王喪,棁自言憲王病時,王后、太子不侍,及薨,

六日出舍,太子勃私姦,飲酒,博戲,擊筑,與女子載馳,環城過市,入牢視囚.

[헌왕이 죽고 나서야 왕후와 태자가 달려왔다.

평소 헌왕은 장남인 유탈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죽음에 임해서도 재물을 남겨주지 않았다.

시종관 가운데 어떤 사람이 태자와 왕후에게 헌왕의 여러 아들들과 맏아들 유탈에게도 

재물을 나누어줄 것을 권유했지만 태자와 왕후는 이를 듣지 않았다.

태자가 즉위한 후에도 유탈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유탈은 왕후와 태자를 원망했다.
조정의 사신이 헌왕의 장례를 보러 왔을 때, 유탈은 직접 나서서 사신에게 헌왕이 병상에 있을 때

왕후와 태자는 헌왕을 간호하지 않았으며, 헌왕이 죽은 지 겨우 엿새 만에 빈소를 뛰쳐나왔고,

태자 유발은 음란행위와 음주와 도박과 축(筑)을 즐겼으며, 여자들과 수레를 타고 놀러 다니며 성곽을 넘어

소란을 피우고 감방에 들어가 죄인들을 시찰했다는 것 등을 고발하였다.]

 

天子遣大行騫驗王后及問王勃,請逮勃所與姦諸證左,王又匿之.

吏求捕勃大急,使人致擊笞掠,擅出漢所疑囚者.  有司請誅憲王後修及王勃.

上以修素無行,使棁陷之罪,勃無良師傅,不忍誅.

[이에 황제가 대행(大行) 장건(張騫)을 파견해 왕후와 신왕(新王) 유발을 심문하게 했다.
아울러 유발과 놀아난 모든 사람들을 잡아다 증인으로 삼고자 했는데 유발은 그들을 숨겨버렸다.
관리가 그들을 찾아서 체포하려고 할 즈음 유발은 사람을 시켜서 폭로한 자를 고문하라고 했고,
조정에서 혐의가 있다고 잡아놓은 범인들을 제멋대로 석방해 버렸다.

이에 조정 관원은 왕후 수와 신왕 유발을 주살할 것을 요청했다.
황제는 왕후 수가 여지껏 품행이 좋지 못해서 유탈이 그녀를 고발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했고,
유발에게는 현명한 태사(太師), 태부(太傅)가 없었음을 고려해서 차마 그들을 주살하지는 못했다.]

 

有司請廢王後修,徙王勃以家屬處房陵,上許之.  勃王數月,遷于房陵,國絕.

月餘,天子為最親,乃詔有司曰:「常山憲王蚤夭,后妾不和,適孽誣爭,陷于不義以滅國,

朕甚閔焉. 其封憲王子平三萬戶,為真定王;封子商三萬戶,為泗水王.」

[조정 관원은 왕후 수는 폐출하고 유발과 그 가족들은 방릉(房陵)으로 쫓아 보낼 것을 건의하자,

황제도 이 요청은 받아들였다. 유발은 왕이 된 지 몇 달 만에 방릉으로 쫓겨났고 제후국도 취소되었다.

한 달 남짓 지난 뒤 황제는 헌왕과 친밀했던 관계를 고려해서 관리에게 명을 내리기를 : 

“상산의 헌왕이 일찍 죽어 왕후와 첩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키고 적자와 서자지간에 서로 무고를 일삼는 등

옳지 못한 행동들 때문에 마침내 제후국이 취소되었으니 참으로 헌왕이 가엾구나.

헌왕의 아들 유평에게 3만 호를 주어 진정왕에 봉하고, 

유상에게도 3만 호를 주어 사수왕에 봉하노라.”라고 하였다.]

 

真定王平,元鼎四年用常山憲王子為真定王.

泗水思王商,以元鼎四年用常山憲王子為泗水王.

十一年卒,子哀王安世立.  十一年卒,無子.  於是上憐泗水王絕,乃立安世弟賀為泗水王.

右四國本王皆王夫人兒姁子也.  其後漢益封其支子為六安王、泗水王二國.

凡兒姁子孫,於今為六王.

 

​[진정왕 유평은 무제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년)에 상산의 헌왕의 왕자 신분으로 진정왕이 되었다.
사수(泗水)의 사왕(思王) 유상은 무제 원정 4년에 상산의 헌왕의 왕자 신분으로 사수왕이 되었다.
그가 재위 11년 만에 죽자 아들 애왕(哀王) 유안세(劉安世)가 왕위를 계승했다.

애왕이 재위 11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이에 황제는 사수왕의 후손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 유안세의 동생 유하(劉賀)를 사수왕으로 봉했다.
이상의 네 나라의 제1대 왕들은 모두 왕부인 아후의 아들들이다.

후일 조정에서는 그들의 서자들도 각각 육안왕, 사수왕으로 봉했다.
이로써 왕아후의 자손은 지금까지 모두 여섯 나라의 왕이 되었다.]

 

太史公曰

高祖時諸侯皆賦,得自除內史以下,漢獨為置丞相,黃金印.

諸侯自除御史、廷尉正、博士,擬於天子.

自吳楚反後,五宗王世,漢為置二千石,去「丞相」曰「相」,銀印.

諸侯獨得食租稅,奪之權.  其後諸侯貧者或乘牛車也.

[태사공은 말한다.
고조(高祖) 재위 시에는 제후(諸侯)들이 모든 세금을 자기 소유로 했고 스스로 내사(內史) 이하의 관리를 임명했다.

조정에서는 다만 승상(丞相)만 파견했고 그 승상은 황금 인신(印信)을 패용했다.
왕이 직접 어사(御史), 정위정(廷尉正), 박사(博士) 등의 관리를 임명했으니 이는 황제와 유사했다.
오초 7국의 반란 이후 오종(五宗)이 왕으로 봉해졌던 시대에는 2천석 급의 관리들은 모두 조정에서 파견했고,
‘승상’은 ‘상(相)’으로 바뀌어 은(銀)으로 만든 인신을 패용하게 되었다.

제후는 세금만을 거두었고 정치권력은 박탈되었다.
후일 제후 가운데 가난한 자는 소가 끄는 수레나 탈 수 있었다.]

 

 

※  原 文 .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