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광야(廣野) / 이육사

덕치/이두진 2020. 1. 5. 14:56



      광야(廣野)
                 -  이육사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시집>(1946)-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배경의 웅대함으로 처음부터 독자를 압도한다. 
광막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을 배경으로 강인한 지사적 의지를 노래한 작품으로,
웅장한 상상력과 남성적 어조 그리고 의연한 기품이 잘 나타나 있다.

제1연에서 3연까지의 내용은 광야의 원시적 순수성에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흘러

강물이 길을 열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제3연까지가 이 시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기 존재의 역사적, 사회적 규정성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가 실천적 행위로써 연속될 윤리적 결단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제4연에서는 현재적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아무도 없는 광야, 더욱이 눈 덮인 겨울의 광야에 서서 무한한 과거의 시간과 먼 미래의 시간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고독한 것이면서 강인한 의지를 더욱 곧게 세우도록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독감과 긴장된 의지의 경지가 '매화향기'라는 사물을 통해 암시된다. 


여기에는 매화를 추위 속에 피어나는 매서운 기개의 상징으로 여긴 전통적 연상이 관계되어 있다.
그러면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일체의 생명이 용납되지 않는 냉혹한 시련의 상황에서
생명의 씨앗을 뿌린다는 다소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확고한 신념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보이며 비장감이 느껴지게 한다.
이렇게 뿌린 노래의 씨를 거둘 사람이 바로 5연에 나오는 '초인'이 아니겠는가?
'초인'은 단순히 '조국광복'의 의미로 해석되기보다는 조국의 밝고 무한한 미래를 짊어지고 갈
투사들, 지사들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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