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사등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래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느린 그림자 이다지 어두어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조선일보>(1938)-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김광균은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30년대 모더니즘 시를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직접적으로는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의 음악성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김기림의 말처럼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쓴 이미지즘(imagism) 계열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적 소재를 바탕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나 강한 색채감,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 등의 기법을
시에 차용(借用)했으며, 특히 사물의 한계를 넘어 관념이나 심리의 추상적 차원까지도 시각화하였다.
그의 시에는 기계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감과 삶의 우수와 같은 소시민적 정서가 짙게 깃들여 있다.
이 시는 참신한 비유를 통한 독창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보인 작품이다.
시각적 심상을 주축으로 한 이 시는, 그것을 촉각적 심상으로까지 전이시키면서 공감각적 심상을 보이고 있다.
<와사등>이란 제목은 '가스등'이라는 이국적(異國的)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도시적 가공물로
일몰(日沒)과 밤으로 귀결되어 절망을 상징하며 나아가서는 일제 치하라는 당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공허와 비애로 살아가는 당시대 사람들의 삶을 표상하고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라고 외치며 방향 감각을 잃은
현대인의 무정향성(無定向性)과 '사념'이 '벙어리'가 된 도회인의 정신적 위기를 통해
화자는 묘석과 잡초로 비유된 황량한 도시 문명을 신랄히 비판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피부에 스미는 어둠'과 '거리의 아우성 소리'로 '낯설고 눈물겨운' 시대적 상황 때문에
그는 갈 곳을 잃고 '군중의 행렬에 섞이'게 된다.
그리하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어두운 그림자 길게 늘이며' 절망할 때,
'비인 하늘에 걸린' '차단한 등불 하나'가 그를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조국을 잃고 떠돌이의 삶을 사는 당시 한국 지성의 정신적인 방황,
현대의 화려한 물질 문명이 가져다 주는 무질서와 황량함 속에서 살아야 하는 현대 지성의 방황을
'와사등'을 소재로 그리고 있지만, 정작 김광균 자신도 이 작품의 시적 자아처럼
제 삶의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 그저 무기력한 지성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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