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 석문(石門) / 조지훈

덕치/이두진 2020. 1. 5. 14:42



석 문(石門) 

                                                                     -  조지훈 -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조지훈 전집>(1973)-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조지훈이 그의 고향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일월산 황씨 부인당 전설)을 소재로 하여 풀리지 않는 원한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서정주의 <신부>와 매우 흡사하다. 

그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신혼 첫 날 밤 잠들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 칼 그림자는 다름 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신랑은 그것을 연적(戀敵)이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숨어 든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첫날 밤 그대로 있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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