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經 (시경) 풍(風,國風)

國風. 정풍(鄭風) 2편 장중자3장(將仲子三章)

덕치/이두진 2021. 6. 20. 13:29

 

 國風. 정풍(鄭風) 2편 장중자3장(將仲子三章)

 

 

將仲子兮, 無踰我里, 無折我樹杞. 豈敢愛之, 畏我父母.

仲可懷也, 父母之言, 亦可畏也.

 

將仲子兮, 無踰我墻, 無折我樹桑. 豈敢愛之, 畏我諸兄.

仲可懷也, 諸兄之言, 亦可畏也.

 

將仲子兮, 無踰我園, 無折我樹檀. 豈敢愛之, 畏人之多言.

仲可懷也, 人之多言, 亦可畏也.

 

 

1장. 將仲子兮는 無踰我里하여 無折我樹杞어다. 豈敢愛之리오 畏我父母니라. 

        仲可懷也나 父母之言이 亦可畏也니라.

 

        장중자혜는 무유아리하여 무절아수기어다. 기감애지리오 외아부모니라. 

        중가회야나 부모지언이 역가외야니라. 賦也라

 

        청컨대 중자는 내 마을을 넘지 말고 내가 심은 버드나무를 꺾지 말지어다.

        어찌 감히 사랑하리오. 우리 부모가 두려워서니라. 

        중을 가히 그리워하나 부모의 말이 또한 가히 두려우니라.

 

賦也라. 將은 請也라. 仲子는 男子之字也라. 我는 女子自我也라.

里는 二十五家所居也라. 杞는 柳屬也니 生水傍하며 樹如柳하며 葉麁而白色하며

理微赤하니 蓋里之地域溝樹也라.  莆田鄭氏曰此淫奔者之辭라.

 

부이다. 장은 청함이다. 중자는 남자의 자이다. 아는 여자 자신이다.

리는 25가가 거처하는 곳이다. 

기는 버들 종류이니 물가에서 살며 나무는 버드나무와 같으며 잎사귀는 거칠고

흰빛이며 결은 조금 붉으니, 대개 마을의 경계인 도랑에 심는 나무이다. 

포전정씨[鄭樵]는 ‘이것은 음분한 자의 말이다.’하였다.

 

『史記』 鄭世家에 이와 관련된 고사가 실려 있는데,

이어 나오는 叔于田, 大叔于田도 이와 관련이 있다.

武公十年에 娶申侯女하니 爲夫人曰武姜이라.

生太子寤生에 生之難이라가 及生하니 夫人弗愛라. 

後에 生少子叔段한대 段生易러니 夫人愛之라. 

二十七年에 武公疾하니 夫人請公하여 欲立段爲太子한대 公弗聽이라. 

是歲에 武公卒하고 寤生立하니 是爲莊公이라.

莊公元年에 封弟段於京하고 號太叔이라. 

祭仲이 曰京大於國하니 非所以封庶也라. 莊公曰武姜欲之러니 我弗敢奪也라. 

段至京하여 繕治甲兵하고 與其母武姜으로 謀襲鄭이라. 

二十二年에 段果襲鄭하니 武姜爲內應이라. 

莊公發兵伐段하니 段走하고 伐京하니 京人畔段하여 段出走鄢이라.

鄢潰하니 段出奔共이라. 於是에 莊公이 遷其母武姜於城潁하여

誓言曰不至黃泉이면 毋相見也리라. 居歲餘에 已悔思母라. 

潁谷之考叔有獻於公하니 公賜食이라. 考叔曰臣有母하니 請君食賜臣母하소서 

莊公曰我甚思母하니 惡負盟고 柰何잇가 考叔이 曰穿地至黃泉이면 則相見矣리라.

於是에 遂從之하여 見母라.

武公 10년에 신후의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으니, 그녀가 곧 무강(武姜)이다.

무강은 태자인 오생(寤生)을 난산하자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뒤에 작은 아들인 숙단을 순산하자 그를 사랑했다. 

27년, 무공이 병이 나자 부인은 무공에게 숙단을 태자로 옹립하자고 요구했으나

무공은 듣지 않았다.
이해에 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오생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장공(莊公)이다.

장공 원년, 동생 단에게 경읍(京邑)을 봉지로 주고 태숙(太叔)이라고 칭했다.
제중(祭仲)이 아뢰기를: “경읍은 수도보다 큽니다. 그러니 서출의 형제에게 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장공이 대답하기를 :

“무강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내가 감히 거역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단은 경읍에 가서 무기를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어머니 무강과 정나라 수도를 습격하기로 비밀리에 계획했다.
22년, 과연 단이 수도를 습격하자, 무강이 성내에서 그를 맞이했다.

장공이 파병해 단을 토벌하자, 단은 도주했다. 장공이 또 경읍을 토벌하자, 

경읍의 백성들은 단을 배반했다. 단은 또 언읍(鄢邑)으로 도주했다.

언읍의 백성들이 흩어지자, 단은 또 공(共)나라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장공은 그의 어머니 무강을 성영(城穎)으로 내쫓으면서 맹서해 이르기를 : 

“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나자 장공은 후회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영곡의 고숙(考叔)이 장공에게 예물을 바치자, 장공은 그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고숙이 간청하기를 : “신에게 어머니가 계신데, 군왕의 음식물을 저의 모친께

상으로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장공이 묻기를 : “나도 어머니가 매우 그리운데, 맹서를 저버릴까 두렵소.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하자,
고숙이 대답하기를 : “황천까지 땅을 파서, 그곳에서 만나면 되겠습니다.”하였다.

그리하여 장공은 그의 말에 따라 땅을 파서 어머니를 만났다.

   

杞나무에 대해 『說文』에서는 枸杞(구기)라 했고,

『爾雅』 釋木편에서는 枸檵(구계)라 했고, 

『廣韻』에서는 枸杞라 하고, 봄에는 天精子, 여름에는 枸杞葉, 가을에는 却老枝, 

겨울에는 地骨根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本草』에서는 一名 仙人杖이라 하고, 뿌리의 이름을 地骨皮라 했다. 

또 嚴粲이 쓴 『詩緝』을 보면 詩에서 세 가지 杞나무가 나오는데, 

위 鄭風 '將仲子'편의 '無折我樹杞'의 杞는 柳屬이고, 

小雅 '南山有臺'편의 '南山有杞'와 '湛露'편의 '在彼杞棘'의 杞는 山木이라 했고, 

'四牡'편의 '集于苞杞', '杕杜'편과 '北山'편의 '言采其杞'와 '四月'편의 '隰有杞桋'는

枸杞라고 했다. 

한편 嚴氏說에 따르면, 『주역』 姤卦의 “以杞包瓜”와 『孟子』의 杞柳는 柳屬이다. 

청나라 때 호승공(胡承珙)에 의하면 시경에 '杞'가 모두 7번 나오는데

'將仲子'편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는 '枸杞'를 가리키며, 

'將仲子'편에서는 '欅柳' 또는 '杞柳(키버들)'를 가리킨다고 했는데,

문일다도 枸杞는 관목이며 '將仲子'편에서의 '杞'는 桑, 檀과 같이 언급되므로

큰 나무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 견해가 옳다고 본다.

 

 

2장. 將仲子兮는 無踰我墻하여 無折我樹桑이어다. 豈敢愛之리오 畏我諸兄이니라. 

        仲可懷也나 諸兄之言이 亦可畏也니라. 

 

        장중자혜는 무유아장하여 무절아수상이어다. 기감애지리오 외아제형이니라. 

        중가회야나 제형지언이 역가외야니라. 賦也라

 

        청컨대 중자는 내 담을 넘지 말고 내가 심은 뽕나무를 꺾지 말지어다. 

        어찌 감히 사랑하리오. 우리 모든 형들이 두려워서니라. 

        중을 가히 그리워하나 형들의 말이 또한 가히 두려우니라.

 

賦也라. 墻은 垣也라. 古者에 樹墻下以桑하니라.

부이다. 장은 담장이다. 옛날에는 담장 아래에 뽕나무를 심었다.

 

   

3장. 將仲子兮는 無踰我園하여 無折我樹檀이어다豈敢愛之리오 畏人之多言이니라.

        仲可懷也나 人之多言이 亦可畏也니라.

 

        장중자혜는 무유아원하여 무절아수단이어다. 기감애지리오 외인지다언이니라.

        중가회야나 인지다언이 역가외야니라. 賦也라

 

        청컨대 중자는 내 뜰을 넘지 말고 내가 심은 박달나무를 꺾지 말지어다. 

        어찌 감히 사랑하리오. 사람들의 많은 말이 두려워서니라. 

        중을 가히 그리워하나 사람들의 많은 말이 또한 가히 두려우니라.

 

賦也라. 園者는 圃之藩이니 其內可種木也라.

檀은 皮靑滑澤이오 材彊韌하여 可爲車라.

 

부이다. 원이라는 것은 남새밭의 울타리이니 그 안에 나무를 심을 수 있다. 

단은 껍질이 푸르고 매끄러우며 윤택하고, 재목이 야물고 질겨 수레를 만들 수 있다.

 

  將仲子三章이니 章八句라

 

 

『毛詩序』

將仲子는 刺莊公也니 不勝其母以害其弟하고 弟叔失道而公弗制하며 

祭仲諫而公弗聽하니 小不忍하여 以致大亂焉이라.

將仲子는 莊公을 풍자한 시라고 하면서,

그 어머니의 뜻을 이기지 못하여 동생을 해쳤고, 

동생인 숙이 도를 잃었어도 공이 제어하지 못했으며,

제중이 간했어도 공이 듣지 않았으니, 

작은 것을 참지 못하여 대란을 초래했다고 하였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文 飜譯者    德庤 / 李 斗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