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經 (시경) 송(頌)

송(頌)-상송(商頌) 제1편 나1장(那一章)

덕치/이두진 2024. 4. 19. 18:00

 

  商頌

상(商)은 은(殷)나라를 말한다. 은나라 마지막 왕으로 폭군이었던 주왕(紂王)의

동생인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하고, 그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후 7대가 지난 대공(戴公)시대에 예악이 쇠퇴해지자,

공자(孔子)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정고보(正考甫)라는 사람이

주(周)나라의 태사(太師)로부터 상송(商頌) 12편을 얻었다고 하였다.

이때 정고보는 주나라 태사의 밑에서 함께 상송을 교정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韓詩(한시)』와 『사기(史記)』에서는 모두 상송을 정고보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고,

송(宋)나라 양공(養公)을 기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서진(馬瑞辰)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

" 정고보는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의 3대(代)를 섬겼던 것이

『좌전(左傳)』에 보인다.

또 그의 아들 공보가(孔父嘉)는 상공(殤公)때의 대사마 였음이 『좌전』에 보인다.

그 중간에 장공(壯公), 민군(湣君), 신군(新君) 환공(桓公)을 거쳐 비로소 양공에게

이르게 되었는데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 때 부터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정고보가 양공을 기리는 송을 지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은무(殷武)」 시를 보면 송나라 양공(養公)을 기린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다만 정고보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편들도 송나라 양공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지금은 12편 가운데 다섯 편만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그 문사(文辭)는 주송(周宋)의 대아(大雅)를 따르고 있으며 「은무」 시에서

읊은 사실과 같은 것은 송나라 양공이 아니면 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상송은 상대(商代)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 후손(後孫)인 송나라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契爲舜司徒하야 而封於商이러니 傳十四世而湯有天下하시니라.

其後에 三宗迭興이러니 及紂無道하야 爲武王所滅하고 封其庶兄微子啓於宋하야

修其禮樂하야 以奉商後하니 其地 在禹貢徐州泗濱하야 西及豫州盟猪之野하니라.

其後에 政衰하야 商之禮樂이 日以放失이라.

七世至戴公時하야 大夫正考甫가 得商頌十二篇於周大師하야 歸以祀其先王이러니

至孔子編詩하야 而又亡其七篇이라.

然이나 其存者 亦多闕文疑義하니 今不敢强通也로다.

商都亳하고 宋都商丘하니 皆在今應天府亳州界하니라.

설이 순임금의 사도가 되어 상나라에 봉해졌더니 14대를 전하고 탕임금이 천하를

두셨느니라. 그 후에 삼종(中宗 太戊, 武丁 高宗, 祖甲을 말함.

安成劉氏曰湯後九世至太戊하야 而商道興하야 廟號中宗이라 하고

太戊後十三世至武丁하야 商道復興하야 廟號高宗이라하고

武丁再傳而至祖甲하니 所謂三宗迭興也라. 蓋商人宗之는 皆爲百世不遷之廟라.

故로 周公이 作無逸歷擧言之라. 但祖甲親盡之際러니 適以國亡이라.

故로 未有宗號也歟인저 :

안성유씨가 말하기를 : " 탕임금의 9세 후손인 태무에 이르러 상나라 도가 일어나

묘호를 중종이라 하고,

태무의 10세 후손인 무정에 이르러 상도가 다시 부흥하여 묘호를 고종이라 하고,

무정의 2대 후손인 조갑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삼종이 차례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대개 상나라 사람들의 종이라는 것은 모두 백세동안 사당에서 옮기지 않는

不遷位廟로 삼았다. 그러므로 주공이 제사를 빠뜨리지 않도록 일렀음이다.

다만 조갑으로 제사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되었는데 곧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호, 곧 묘호가 있지 않도다. * 親盡 : 제사 지내는 代의 수가 다 됨.

(代盡이라고도 함)이 차례로 일어나더니 걸이 무도함에 이르러 무왕이 멸하는 바가

되었고 그 성형인 미자 계를 송나라에 봉하여 그 예악을 닦아서 상나라의 뒤를

받들게 하니 그 땅이 (『서경』) 우공편 서주 사빈에 있어 서쪽으로는 예주 맹저의

들판에 미쳐 있었다. 그 후에 정치가 쇠하여 상나라의 예악이 날로 없어진 것이다.

7세인 대공 때에 이르러 대부인 정고보가 상송 12편을 주나라 태사에게서 얻어

돌아와 그 선왕에게 제사하였는데 공자가 시를 엮음에 이르러 또 그 7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 보존된 것도 또한 빠진 문장과 의심스러운 뜻이 많으니

이제 감히 억지로 통하게 할 수 없다.

상나라는 박땅에 도읍하고 송나라는 상구에 도읍하였으니

모두가 지금의 응천부 박주의 경계에 있다.

송(頌)-상송(商頌) 제1편 나1장(那一章)

猗與那與, 置我鞉鼓. 奏鼓簡簡, 衎我烈祖.

湯孫奏假, 綏我思成. 鞉鼓淵淵, 嘒嘒管聲.

既和且平, 依我磬聲. 於赫湯孫, 穆穆厥聲.

庸鼓有斁, 萬舞有奕. 我有嘉客, 亦不夷懌.

自古在昔, 先民有作. 溫恭朝夕, 執事有恪. 顧予烝嘗, 湯孫之將.

猗與那與하며 置我鞉鼓하도다. 奏鼓簡簡하여 衎我烈祖하도다.

의여나여하며 치아도고하도다. 주고간간하여 간아열조하도다.

조상님의 공적이 매우 아름답고 많으며,

우리는 대청 위에 작은 북과 큰 북을 설치하였도다.

북소리를 크게 둥둥 울리게 하여, 공적이 큰 조상님들을 유쾌하고 즐겁게 하도다.

賦也라. 猗는 歎詞라. 那는 多요 置는 陳也라. 簡簡은 和大也라.

衎은 樂也라. 烈祖는 湯也라. 記曰商人이 尙聲하야 臭味未成이어든

滌蕩其聲하야 樂三闋然後에 出迎牲이라하니 卽此是也라.

舊說에 以此로 爲祀成湯之樂也라하니라.

부이다. 의는 감탄사이다. 나는 많음이요, 치는 진열함이다.

간간은 조화롭고 큼이다. 간은 즐거워함이다. 열조는 탕임금이다

(모씨는 ‘有功烈之祖, 공이 있는 선조’라 함).

『예기』에 이르기를 상나라 사람들이 음악을 숭상하여 취미(냄새와 맛,

곧 犧牲을 말함)가 이뤄지지 않았으면 그 소리를 진동시켜

(禮記郊特牲에 註曰滌蕩은 猶搖動也라 :

『예기』교특생 주에 이르기를 척탕은 요동함과 같음이라) 음악을 세 번 연주하여

마친 뒤에 나가서 희생을 맞이했다 하니 곧 이것이다.

(安成劉氏曰凡聲은 屬陽이라. 故로 曰樂은 由陽來라.

商人祭祀에 尙聲은 所以先求諸陽者也라. :

" 안성유씨 가로대 무릇 소리는 양에 속한다. 그러므로 음악은 양에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이 제사를 지냄에 음악을 숭상하는 것은 먼저 저 양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이로써 성탕을 제사하는 음악이라 하였다.

湯孫奏假하여 綏我思成하도다. 鞉鼓淵淵하고 嘒嘒管聲하도다.

탕손주가하여 유아사성하도다. 도고연연하고 혜혜관성하도다.

탕왕의 후손이 음악을 연주하여 조상께서 이르시길 빌며,

우리가 성공할 수 있게 조상님께 빌었도다.

세워둔 작은 북과 큰 북을 치니 둥둥 소리 울리고,

피리 소리는 부드럽고 가락에 맞추는도다.

湯孫은 主祀之時王也라. 假은 與格으로 同이니 言奏樂以格于祖考也라.

綏는 安也라. 思成은 未詳이라. 鄭氏曰安我以所思而成之人이니 謂神明來格也라.

禮記에 曰齊之日에 思其居處하고 思其笑語하고 思其志意하고 思其所樂하고

思其所嗜하야 齊三日에 乃見其所爲齊者하며 祭之日에 入室하야

僾然必有見乎其位하고 周旋出戶에 肅然必有聞乎其容聲하고

出戶而聽에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이라하니 此之謂思成이라.

蘇氏曰其所見聞은 本非有也오 生於思耳라하니 此二說이 近是라.

蓋齊而思之하야 祭而如有見聞이면 則成此人矣라.

鄭註에 頗有脫誤일새 今正之하노라. 淵淵은 深遠也오 嘒嘒는 淸亮也라.

탕손은 제사를 주관할 때의 임금이다. 격은 ‘이를 격’과 더불어 같으니

음악을 연주하여 조고에게까지 이름을 말함이다. 유는 편안함이다.

사성은 자세하지 못하다.

정씨 가로대 우리를 편안히 하되 생각하여 이룬 바의 사람으로써 하니 신명이 와서

이름을 말한다.

『예기』(祭義편)에 이르기를 재계하는 날에 그 거처하셨음을 생각하고,

그 웃으며 말씀하셨음을 생각하고 그 뜻을 생각하고, 그 좋아하신 바를 생각하고,

그 즐기시던 것을 생각하여 재계 삼일에는 이에 그 위하여 재계하는 바를 보며,

제삿날에 방에 들어가 어렴풋이 꼭 그 자리에서 보이는 것이 있고,

주선하고 방문을 나섬에 숙연하게 꼭 그 너그러운 소리를 들음이 있고,

방문을 나서서 들음에 탄식하듯 반드시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들음이 있다 하니

이것이 생각을 이룸이다.

소씨 가로대 그 보고 들은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나왔을 뿐이라 하니

이 두 가지 설이 옳음에 가까운 것이다.

대개 재계하고 생각하여 제사함에 보이고 들림이 있는 것 같다면

곧 이 사람을 이룸이다. 정주에 자못 빠지고 잘못된 것이 있기에 이제 바로 잡는다.

연연은 깊고 멂이요, 혜혜는 맑고 밝음이다.

既和且平이니 依我磬聲이로다. 於赫湯孫하고 穆穆厥聲하도다.

기화차평이니 의아경성이로다. 오혁탕손하고 목목궐성하도다.

이미 곡조가 서로 어울리고 소리는 맑고 평화로우니,

경소리에 맞춰 소리에 높고 낮음이 있도다.

아 탕왕의 후손이 아름답게 빛나고, 음악도 온화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엄숙하도다.

磬은 玉磬也니 堂上升歌之樂이오 非石磬也라. 穆穆은 美也라.

경은 옥경이니 당에 올라가 노래하는 음악이고 석경이 아니다. 목

목은 아름다움이다.

庸鼓有斁하니 萬舞有奕하도다. 我有嘉客이 亦不夷懌이로다.

용고유역하니 만무유혁하도다. 아유가객이 역불이역이로다.

종과 북소리가 크고 낭랑하게 일제히 울리니, 아름답고 성대한 만무 춤을 보는도다.

우리의 손님인 탕왕의 후손들이, 한 곳에 있으니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

庸은 鏞으로 通이라. 斁은 斁然盛也라. 奕은 奕然有次序也라.

蓋上文은 言鞉鼓管籥이 作於堂下하니 其聲依堂上之玉磬하야 無相奪倫者오

至於此則九獻之後에 鍾鼓交作하고 萬舞陳于庭하야 而祀事畢矣라.

嘉客은 先代之後로 來助祭者也라. 夷는 悅也니 亦不夷懌乎는 言 皆悅懌也라.

용은 ‘쇠북 용’으로 통한다. 역은 섞이듯 무성함이다.

혁은 아름다우면서도 순서가 있는 것이다.

대개 위 문장은 작은 북과 큰 북과 피리가 당 아래에서 일어나니

그 소리가 당 위의 옥경을 도와 서로 차례를 빼앗음이 없고,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홉 번 술잔을 올린 뒤에 쇠북과 북이 서로 일어나고

만무가 뜰에서 베풀어져 제사일이 끝난 것이다.

가객은 선대의 후손으로 와서 제사를 돕는 자들이다.

이는 기뻐함이니 ‘또한 기뻐하지 아니하랴’는 모두가 기뻐함을 말한 것이다.

自古在昔에 先民有作이로다. 溫恭朝夕하며 執事有恪하도다.

顧予烝嘗하니 湯孫之將하도다.

자고재석에 선민유작이로다. 온공조석하며 집사유각하도다.

고여증상하니 탕손지장하도다. 賦也라

멀고 먼 옛날에도, 옛 사람의 행동에 법도가 있었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화하고 공경하며,

신께 제사를 올려 복을 빌 때에도 공경함이 드러나도다.

삼가 증제와 상제를 올려 조상께서 받아 주실 것을 청하니,

탕왕의 후손들을 도우시도다.

恪은 敬也니 言恭敬之道는 古人所行이니 不可忘也라.

閔馬父曰先聖王之傳恭을 猶不敢專하야 稱曰自古라하고 古曰在昔이라하고

昔曰先民이라하니라. 將은 奉也라.

言湯其尙顧我烝嘗哉인저 此湯孫之所奉者 致其丁寧之意하니 庶幾其顧之也라.

각은 공경함이니 공경의 도는 옛 사람들이 행한 바이니 가히 잊지 말아야 함을

말함이다.

민마보(國語魯語註에 馬父는 魯大夫라 : 『국어』노어 주에 마보는 노나라 대부라)가

말하기를 : " 옛 성왕이 전하신 공경을 오히려 감히 오로지 하지 못하여

‘예로부터’라고 일컫고 古를 ‘옛날에’라고 하고 昔을 ‘선민이라’" 하였다.

장은 받들음이다. 탕임금이 바라건대 나의 증제와 상제를 돌아보실진저.

이 탕왕의 후손이 받드는 제사가 정녕한 뜻이 지극하니 행여 그를 돌아보리라고

말한 것이다.

那一章 二十二句라

閔馬父曰正考甫가 校商之名頌할새 以那爲首하고 其輯之亂曰云云이 卽此詩也라.

민마보가 말하기를 정고보가 상나라의 이름난 송을 교정할 때에 그 편집 끝에

(亂辭 : 시를 다 정리하고 난 뒤에 끝에 적는 한 편의 大意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운운했다는 것이 곧 이 詩이다.

『毛詩序』

那는 祀成湯也라. 微子至于戴公其間에 禮樂廢壞라.

有正考甫者 得商頌十二篇於周之大師하니 以那爲首하니라.

나는 성탕께 제사하는 詩이다.

미자로부터 대공에 이르는 사이에 예악이 없어지고 손상되었다.

정고보라는 사람이 상송 십이편을 주나라 태사에게 얻으니,

나(那)를 첫 번째로 삼았다.

 

 

原 文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 筆寫本 】

原 文 飜 譯 者 德庤 / 李 斗 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