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世家(사기세가) 30

第 十. 楚世家

史記 世家 第 十. 楚世家(초세가) ​ ​楚之先祖出自帝顓頊高陽. 高陽者,黃帝之孫,昌意之子也. ​高陽生稱, 稱生卷章, 卷章生重黎. 重黎為帝嚳高辛居火正, 甚有功, 能光融天下, 帝嚳命曰祝融. 共工氏作亂,帝嚳使重黎誅之而不盡. 帝乃以庚寅日誅重黎,而以其弟吳回為重黎後, 復居火正,為祝融. 吳回生陸終. 陸終生子六人,坼剖而產焉. 其長一曰昆吾;二曰參胡;三曰彭祖;四曰會人;五曰曹姓;六曰季連,羋姓,楚其後也. ​昆吾氏,夏之時嘗為侯伯,桀之時湯滅之. 彭祖氏,殷之時嘗為侯伯,殷之末世滅彭祖氏. 季連生附沮,附沮生穴熊. [초나라의 선조는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에게서 나왔다. 고양은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고양은 칭(稱)을 낳았으며,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고, 권장은 중려(重黎)를 낳았다. 중려는 제곡(帝嚳) ..

第 九. 晉世家

史記 世家 ​第 九. 晉世家(진세가) ​ ​晉唐叔虞者,周武王子而成王弟. 初,武王與叔虞母會時,夢天謂武王曰:「余命女生子,名虞,余與之唐.」 及生子,文在其手曰「虞」,故遂因命之曰虞. 武王崩, 成王立, 唐有亂, 周公誅滅唐. 成王與叔虞戲,削桐葉為珪以與叔虞, 曰:「以此封若.」史佚因請擇日立叔虞. ​成王曰:「吾與之戲耳.」 史佚曰:「天子無戲言. 言則史書之,禮成之,樂歌之.」於是遂封叔虞於唐. [진(晉)나라의 당숙우(唐叔虞)는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요 성왕(成王)의 아우이다. 일찍이 무왕이 숙우의 모친과 결혼할 때 꿈에 천신이 무왕에게 이르기를 : “ 내가 너에게 아들 하나 낳게 할 터이니 이름을 우(虞)라고 하라. 내가 당(唐)지역을 그에게 주겠노라.”라고 하였다. 무왕이 아들을 낳자 과연 그 손바닥에 무늬로 ‘우(虞)’라..

第 八. 宋微子世家

史記 世家 第 八. 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 ​ ​微子開者,殷帝乙之首子而帝紂之庶兄也. 紂既立,不明,淫亂於政,微子數諫,紂不聽. 及祖伊以周西伯昌之修德,滅黎國,懼禍至,以告紂. 紂曰:「我生不有命在天乎? 是何能為!」 於是微子度紂終不可諫,欲死之. [미자(微子) 개(開)는 은(殷)나라의 왕이었던 제을(帝乙)의 큰아들이며, 주왕(紂王)의 배다른 형(庶兄)다. 주왕이 즉위한 후, 모든 것이 밝지 못하고 정사(政事) 또한 음란해, 미자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간언했으나, 주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주(周)나라의 서백창(西伯昌)이 덕치(德治)를 수행(修行)해 기나라를 멸하자, 조이(祖伊)는 그 화가 장차 미칠 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주왕에게 고했다. 주왕은 말하기를 “내가 태어난 것은 곧 천명(天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

第 七. 衛康叔世家

史記 世家 第 七. 衛康叔世家(위강숙세가) ​衛康叔名封,周武王同母少弟也. 其次尚有冉季,冉季最少. 武王已克殷紂,復以殷餘民封紂子武庚祿父,比諸侯,以奉其先祀勿絕. 為武庚未集,恐其有賊心,武王乃令其弟管叔、蔡叔傅相武庚祿父,以和其民. 武王既崩,成王少. 周公旦代成王治,當國. 管叔、蔡叔疑周公,乃與武庚祿父作亂,欲攻成周. 周公旦以成王命興師伐殷,殺武庚祿父、管叔,放蔡叔. 以武庚殷餘民封康叔為衛君,居河、淇閒故商墟. [위강숙(衛康叔)은 이름이 봉(封)이고,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무왕(周武王)의 아우이다. 그보다 아래에 또 염계(冉季)가 있는데, 그가 막내이다.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은나라 유민들과 그들이 사는 땅을 주왕의 아들인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봉해 여타의 제후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第 六. 陳杞世家

史記 世家 第 六. 陳杞世家(진기세가) ​ 陳胡公滿者,虞帝舜之後也. 昔舜為庶人時,堯妻之二女,居于媯汭,其後因為氏姓,姓媯氏. 舜已崩,傳禹天下,而舜子商均為封國. 夏后之時, 或失或續. 至于周武王克殷紂, 乃復求舜後, 得媯滿, 封之於陳, 以奉帝舜祀, 是為胡公. 胡公卒,子申公犀侯立. 申公卒,弟相公皋羊立. 相公卒,立申公子突,是為孝公. 孝公卒,子慎公圉戎立. 慎公當周厲王時. 慎公卒,子幽公寧立. [진(陳)나라 호공(胡公) 만(滿)은 우(虞)나라 순(舜)의 후손이다. 예전에 순임금이 평민으로 있을 때 요(堯)임금이 두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 규예(嬀汭)에 살게 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그것을 씨성(氏姓)으로 삼았기 때문에 규씨(嬀氏)가 되었다. 순임금은 서거한 후에 천하를 하우(夏禹)에게 물려주었고, 자신의 아들인 상균(商..

第 五. 管蔡世家

史記 世家 第 五. 管蔡世家(관채세가) ​管叔鮮、蔡叔度者,周文王子而武王弟也. 武王同母兄弟十人. 母曰太姒,文王正妃也. 其長子曰伯邑考,次曰武王發,次曰管叔鮮,次曰周公旦,次曰蔡叔度,次曰曹叔振鐸, 次曰成叔武,次曰霍叔處,次曰康叔封,次曰冉季載。冉季載最少. 同母昆弟十人,唯發、旦賢,左右輔文王,故文王舍伯邑考而以發為太子. 及文王崩而發立,是為武王. 伯邑考既已前卒矣. [관숙(管叔) 선(鮮)과 채숙(蔡叔) 탁(度)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의 아들이고, 무왕(武王)의 아우이다. 무왕과 같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형제는 모두 10명이다. 그의 어머니, 즉 태사(太姒)는 문왕의 정비(正妃)이다. 맏아들은 백읍고(伯邑考)이고, 그 다음이 무왕 발(發)이며, 그 다음이 관숙 선이며, 그 다음이 주공(周公) 단(旦)이고, 그 다음이 채숙..

第 四. 燕召公世家

史記 世家 第 四. 燕召公世家(연소공세가) 召公奭與周同姓,姓姬氏. 周武王之滅紂,封召公於北燕. 其在成王時,召王為三公:自陜以西,召公主之;自陜以東,周公主之. 成王既幼,周公攝政,當國踐祚,召公疑之,作君奭. 君奭不說周公. 周公乃稱「湯時有伊尹,假于皇天;在太戊時,則有若伊陟、臣扈,假于上帝,巫咸治王家; 在祖乙時, 則有若巫賢;在武丁時,則有若甘般:率維茲有陳,保乂有殷」. 於是召公乃說. [소공(召公) 석(奭)은 주(周)나라 왕실과 같은 성인 희씨(姬氏)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킨 후에, 소공을 북연(北燕) 지역의 제후에 봉했다. 성왕(成王) 때 소공은 삼공(三公) 중의 하나인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섬(陝)의 서쪽 지역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쪽 지역은 주공(周公)이 관할하게 되..

第 三. 魯周公世家

史記 世家 第 三. 魯周公世家(노주공세가) ​ ​周公旦者,周武王弟也. 自文王在時,旦為子孝,篤仁,異於群子. 及武王即位,旦常輔翼武王,用事居多. 武王九年,東伐至盟津,周公輔行. 十一年,伐紂,至牧野,周公佐武王,作牧誓. 破殷,入商宮. 已殺紂,周公把大鉞,召公把小鉞,以夾武王,釁社,告紂之罪于天,及殷民. 釋箕子之囚. 封紂子武庚祿父,使管叔、蔡叔傅之,以續殷祀. 遍封功臣同姓戚者. [주공 단(周公旦)은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이다. 문왕(文王)이 재위에 있을 때부터 단(旦)은 효성이 지극하고 애정이 돈독해 다른 공자(公子)들과 달랐고, 무왕이 즉위하자 항상 무왕을 보필하며 많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무왕 9년, 무왕이 동쪽으로 맹진(孟津)까지 정벌했을 때, 주공은 그를 보필해 출정했다. 11년, 목야(牧野)에서 주왕(紂王)을 ..

第 二. 齊太公世家

史記 世家 第 二. 齊太公世家(제태공세가) 太公望呂尚者,東海上人. 其先祖嘗為四嶽,佐禹平水土甚有功. 虞夏之際封於呂, 或封於申, 姓姜氏. 夏商之時,申、呂或封枝庶子孫, 或為庶人, 尚其後苗裔也. 本姓姜氏,從其封姓,故曰呂尚. 呂尚蓋嘗窮困,年老矣,以漁釣奸周西伯. 西伯將出獵,卜之,曰「所獲非龍非彨非虎非羆;所獲霸王之輔」. 於是周西伯獵,果遇太公於渭之陽,與語大說, 曰:「自吾先君太公曰『當有聖人適周,周以興』. 子真是邪?吾太公望子久矣.」 故號之曰「太公望」,載與俱歸,立為師.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동해(東海) 근처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4악(四嶽)이 되어 우(禹)임금이 물과 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들은 우(虞)와 하(夏) 시대에 여(呂) 또는 신(申) 땅에 봉해졌으며 성(姓)은 강씨(姜氏)..

第 一. 吳太伯世家

史記 世家 第 一. 吳太伯世家(오태백세가) ​ ​吳太伯,太伯弟仲雍,皆周太王之子,而王季歷之兄也. 季歷賢,而有聖子昌,太王欲立季歷以及昌,於是太佰、仲雍二人乃奔荊蠻,文身斷發, 示不可用,以避季歷. 季歷果立,是為王季,而昌為文王. 太伯之奔荊蠻,自號句吳. 荊蠻義之,從而歸之千餘家,立為吳太伯. 太伯卒,無子,弟仲雍立,是為吳仲雍. 仲雍卒,子季簡立. 季簡卒,子叔達立. 叔達卒,子周章立. [오태백(吳太伯)과 그의 동생 중옹(仲雍)은 모두 주 태왕(周太王)의 아들이며, 왕(王) 계력(季歷)의 형이다. 계력은 현명했으며, 더욱이 그에게는 덕성과 지혜로 지극히 훌륭한 희창(姬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태왕이 계력을 옹립하고 장차 희창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자, 태백과 중옹 두 사람은 형만(荊蠻) 지방으로 도망가서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